기도생활을 회복하라
(2010년 설교모음)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1 (2010. 08. 22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2 (2010. 08. 29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3 (2010. 09. 12 주일오전 예배)
설교기간|201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기도 생활을 회복하라 4 (2010. 09. 19 주일오전 예배)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5 (2010. 09. 26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6 (2010. 10. 03 주일오전 예배)
1. 마음의 골방으로 들어가라(마6:5-6) 2010.8.22 주일오전 1
2. 원수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5:44) 2010.8.29 주일오전 10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7 (2010. 10. 10 주일오전 예배)
3. 예수님의 기도생활(막1:35) 2010.9.12 주일오전 21
4. 기도 없이 능력 없다(막9:28-29) 2010.9.19 주일오전 27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8 (2010. 10. 17 주일오전 예배)
5. 기도, 강한 영혼으로 사는 길(시138:3) 2010.9.26 주일오전 37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9 (2010. 10. 24 주일오전 예배)
6. 대제사장의 기도(히5:7) 2010.10.3 주일오전 45
7. 실패를 숙명처럼 여기지 말라(눅18:35-39) 2010.10.10 주일오전 54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10 (2010. 11. 07 주일오전 예배)
8. 마음을 토하는 기도(시62:7-8) 2010.10.17 주일오전 63
9. 절망 속에서 만나는 예수(막5:25-29) 2010.10.24 주일오전 71
10. 네 마음을 쏟으라(애2:19-20) 2010.11.7 주일오전 79
11. 언약백성과 기도(렘33:1-9) 2010.11.14 주일오전 87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1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1 (2010. 08. 22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2 (2010. 08. 29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3 (2010. 09. 12 주일오전 예배)
기도 생활을 회복하라 4 (2010. 09. 19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5 (2010. 09. 26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6 (2010. 10. 03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7 (2010. 10. 10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8 (2010. 10. 17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9 (2010. 10. 24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10 (2010. 11. 07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화복하라 11 (2010. 11. 14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1 2010.08.22. 주일예배
마음의 골방으로 들어가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5-6)
I. 본문의 배경
II. 기도와 나뉜 마음
A. 기도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
B. 골방에 들어가는 이유
C. 최고의 예물, 온마음
III.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IV. 결론
기도생활을 회복하라2 2010.08.29. 주일예배
원수를 위하여 기도할 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I. 본문해설
II. 삶에 묶이는 기도
- 문학적 구조: 병행법
A. 기도는 마음의 활동
- 미움, 사랑 모두 마음에 깃듦
- 장애물의 예: 홍수에 폭격 맞은 다리
- 물처럼 흐르는 기도는 불가능한가?
B. 기도는 사랑의 흐름
- ‘사랑하라’(άπἆτε)가 ‘기도하라’보다 앞에 옴
- 그 대상은 ‘원수들’(έχθροὺς)임
- 적의를 품은 자
- 용서는 사랑을 흐르게 함
- 사랑하면서도 기도하지 못하는 것
1) 데레사 수녀의 고백
2) 도덕이 경건을 대치하지 못함
III. 기도에 묶이는 삶: 미움을 버리라
- 하나님 때문에 용서함
- 용서는 사랑의 통로임
IV. 결론: 기도하기 위하여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3 2010. 9. 12 주일오전
예수님의 기도생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I. 본문해설
II. 예수님의 기도생활
A. 새벽에 헌신하심
B. 한적한 곳에서
III. 결론 : 약함을 이기며
기도 생활을 회복하라 4 2010. 09. 19 주일오전
기도 없이 능력 없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8-29).
I. 본문해설
II. 신자의 영적 현실
A. 영적 전투
B. 신자의 특권
1. 죄에 대한 용서
2. 은혜의 무한 공급
III. 기도를 통해 역사하심
IV. 결론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5 2010.09.26. 주일예배
기도, 강한 영혼으로 사는 길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시 138:3)
I. 본문해설
II. 기도의 두 가지 유익
A. 응답을 받음
B. 영혼을 강하게 하심
- 영혼이 강하다는 의미
1) 헛된 욕망을 버리게 하심
2) 참된 소망을 품게 하심
3) 마음의 성향이 되게 하심
III. 결론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6 2010.10.03. 주일예배
대제사장의 기도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I. 본문해설
II.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III. 심한 통곡과 눈물로
A. 우리를 위해 탄원하시는 기도
B. 세상과 맞서는 기도
IV. 전능하신 하나님께
V.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
VI. 결론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7 2010. 10. 10 주일오전
실패를 숙명처럼 여기지 말라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눅 18:35-39).
I. 본문해설
II. 숙명같은 실패의 삶
Ⅲ. 소경의 부르짖은 기도
A.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 기도
B. 역경을 이긴 기도
C. 구원하실 주님을 믿는 기도
IV. 결론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8 2010.10.17. 주일예배
마음을 토하는 기도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시 62:7-8)
I. 본문해설
II. 성도가 고난 당할 때
III. 마음으로부터의 기도
A. 기도 능력의 근원
B. 마음을 토하는 기도
1. 하나님께 집중함
2. 마음의 소원을 품음
3. 자기 신뢰를 버림
4. 힘써 간절히 구함
IV. 하나님, 나의 피난처
V. 결론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9 2010.10.24. 주일예배
절망 속에서 만나는 예수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 5:25-29)
I. 본문의 배경
II. 혈루증 걸린 여인
열두 해 동안 계속됨
많은 의원들이 못 고침
물질을 다 허비함
병세가 더욱 중하여짐
III. 절망 속에서 만나는 예수
A. 예수의 소문을 들음
B. 예수께 나아와 손을 댐
C. 절대의존의 믿음을 고백함
IV. 기도로 나아가라
V. 결론
기도생활을 회복하라10 2010.11.7 주일오전
네 마음을 쏟으라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20]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살륙을 당하오리이까” (애 2:19-20)
I. 본문의 배경
II. 무너진 성안의 가족들
A. 성전이 무너질 때
B. 자녀가 흩어질 때
III. 무정부모와 유정부모
A. 자식을 먹는 여인들
B. 네 마음을 쏟으라
1. 초경에 부르짖어
2. 마음을 물 쏟듯이
3. 주의 얼굴 앞에서
IV. 결론: 네 자녀를 위해 기도하라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11끝 2010. 11. 14 주일낮예배
언약백성과 기도
렘 33:1-9
I. 본문의 배경
II. 언약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
A. 진노: 버려두심
B. 치료: 고쳐주심
1. 성을 고치심
2. 신적 성품을 보이심
- 평강의 풍성함
- 성실의 풍성함
C. 용서: 회복시킴
1. 용서
2. 정결
D. 기쁨: 강복하심
III. 기도하는 자에게 알리심
A. 부르짖는 자와 교통하심
B. 기도하는 자를 기뻐하심
1. 응답을 주심
2. 비밀을 보임
III. 결론: 기도하라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1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1 (2010. 08. 22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2 (2010. 08. 29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3 (2010. 09. 12 주일오전 예배)
기도 생활을 회복하라 4 (2010. 09. 19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5 (2010. 09. 26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6 (2010. 10. 03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7 (2010. 10. 10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8 (2010. 10. 17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9 (2010. 10. 24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10 (2010. 11. 07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화복하라 11 (2010. 11. 14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1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1 (2010. 08. 22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2 (2010. 08. 29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3 (2010. 09. 12 주일오전 예배)
기도 생활을 회복하라 4 (2010. 09. 19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5 (2010. 09. 26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6 (2010. 10. 03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7 (2010. 10. 10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8 (2010. 10. 17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9 (2010. 10. 24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10 (2010. 11. 07 주일오전 예배)
기도생활을 화복하라 11 (2010. 11. 14 주일오전 예배)
1.마음의 골방으로 들어가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5-6).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이 외식에 대해서 가르치시다가 나온 기도에 관한 교훈입니다. 그래서 이 6장은 “너희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는 당부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어서 나오는 구제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구제하는 것을 경고하시는 주님의 경고는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나 지금이나 조금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많이 칭찬 받고 자기를 세우기 위해 그렇게 구제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고, 또 지금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는 기도의 외식에 관한 말씀에 와서는 우리들이 좀 의아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과연 오늘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보여주려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길 어구에서 손을 들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기도보다는 자신이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인정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외식은 우리의 구제나 혹은 기도 생활 뿐 아니라 다른 수많은 우리들의 선한 실천에 파고듭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 만약 좋은 점이 있고, 훌륭한 점이 있어서 그 사람이 칭찬과 기림을 받는다면 그러면 궁극적으로 기림 받아야 할 분은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단지 주셔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것들을 그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하나님이십니까? 그래서 정말 우리들이 이 외식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인간이 가로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좋은 것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지니고 있는 그 사람이나 자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다양한 좋은 것들을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분의 탁월하심을 찬송하고 경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나에게 주신 이 좋은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를 높이고 기리고자 할 때에 우리는 즉시 그의 시선을 우리에게 그것을 주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향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에 와서 이 기도의 외식에 관한 적용은 아마도 이 외식하는 마음이 기도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데에 이 교훈의 요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II. 기도와 나뉜 마음
그것은 바로 나뉘어진 마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제일 먼저 기도는 기도하기에 적합한 마음이 될 때에 가장 좋은 기도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A. 기도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
‘기도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 이것을 예수님께서 외식을 통해서 지적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기도에 적합한 마음은 하나님께 고정된 영혼의 시선입니다. 기도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은 찢어지고, 갈라지고 나뉘어진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도가 믿음의 실천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믿음의 정체를 밝히기 보다는 믿음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 집중적으로 설명을 줍니다. 그러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 믿음의 정체는 어떤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이 믿음의 정체는 우리의 영혼이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유명한 성경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말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문맥에서 이 유명한 성경의 요절, 요한복음 3장 16절이 등장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먼저 광야에서 일어났던 이스라엘 백성의 한 사건을 제시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주님이 보내신 불 뱀에 물렸습니다. 이것은 독사입니다. 여기에 물리면 온 몸이 불 일 듯이 열이 나고, 몸이 붓고 짧은 시간 안에 절명하는 무서운 독이 있는 뱀이었습니다. 그때에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그 불쌍한 백성들을 구출할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을 제시받습니다. 그것은 지팡이에 구리 뱀을 매달아서 높이 쳐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 앰뷸런스에 보면 지금도 이상하게 거기 기분 나쁘게 뱀이 둥글둥글 올라가는 게 그려져 있습니다. 보셨죠? 그리고 그 속에 막대기 같은 게 있습니다. 사실은 성경에서 힌트를 얻어서 ‘치료한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근데 그렇게 해서 높이 쳐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살고, 바라보지 않는 자는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모세가 이 말씀에 순종해서 지팡이에 구리 뱀을 엮어 높이 쳐들었을 때에 그 구리 뱀을 보는 것과 독사에 물려서 퉁퉁 붓고 열이 불같이 일어나는 그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하는 그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신적인 치유의 역사죠. 그럼 그런 것들을 신적인 치유의 역사가 있으면 그냥 하나님이 낫게 하시면 되지 왜 보는 사람만 낫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믿음의 중요성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고, 또 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에 높이 달려 그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불 뱀에 물려 죽은 것 같은 절망적인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 뱀에 물리고 아무 약도 없이 옆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쓰러져 죽어갈 때에 지도자 모세가 높이 든 그 지팡이에 매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마 거기에만 유일한 치료의 길이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마음으로 의지하면서 그 구리 뱀을 주시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구리 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구리 뱀을 통해서 너희들을 치료하겠다는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영혼을 하나님께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믿고자 하는 마음이 충만할 때 이 기도는 열렬해 지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쏟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모으고 기도하는 그 일에는 환경과 시간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종종 어떤 분들이 인터넷으로 수요 예배를 드리던 경험을 듣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신다고요?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수요일 저녁 때 교회로 오신대요. 사경회 생각하니까 7시 40분까지 교회를 와야 하는데 그 교통지옥을 뚫고 오는 것은 너무 힘들어 보이더래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 컴퓨터 앞에 앉아야 합니다. 의자가 불편합니다. 그래서 이번엔 소파로 갔어요. 소파로 갔더니 옷차림이 불편해서 파자마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러고 가만히 앉으니까 이제 허리가 아파 살며시 누웠어요. 그러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환경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애들을 노는 친구 사귀어 보십시오. 그러면 애들은 놀이에 빠집니다. 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딸내미가 갑자기 가수가 되겠다고 그래서 왜 그러나 그랬더니 같이 노는 친구가 계속 가수가 꿈이야. 따라다니면서 노래를 하다가 전염이 됐어요. 나도 가수가 되고 싶다고. 공부하는 아이들하고 어울리며 놀아보십시오. 그럼 아이들은 자신의 공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예수 잘 믿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게 해 보십시오. 얘네들이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환경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시간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시간을 내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이렇게 환경과 시간이 모두 갖추어 진다고 해서 저절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환경적인 요건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응시하는 영혼의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을 때에는 우리들이 환경이 어려워도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바쁘고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을 때가 있었는가 하면, 여유가 있고 편안하고 염려가 없는 환경인데도 우리들이 거의 기도하지 않았던 때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이 기도에 적합하지 않는 마음, 곧 나뉘고 찢어진 마음이 될 때에 우리는 기도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 뜰 때부터 마지막 잠자리에 들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물들을 접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우리의 마음속에 이런 저런 인상들을 남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응시하는 믿음이 있을 때에는 이런 수많은 인상의 잔상들이 적절히 쓸려 나갑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께 고정된 응시하는 마음이 없을 때에는 즉,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에는 만나는 사람과 보는 이런 저런 사물들의 수많은 영상들이 우리의 마음에 찢겨서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동경을 불러일으키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이렇게 해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초점을 흐리고 찢어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응시하는 믿음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마음이 기울어지면 우리는 바쁜 속에서도 언제나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기가 오면 위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의 파도를 타게 되고, 고요할 때에는 평온하기 때문에 주님을 마음껏 찾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대체로 주일날 아침은 아침을 안 먹고 교회에 나오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아침에 일찍 깼어요. 잠시 기도를 하고 아침을 먹고 힘을 차려서 오늘은 영상으로 하지 말고 끝까지 다섯 번 설교를 해 봐야지 그러고 마음을 굳게 먹고 그러고 밥을 먹는데 갑자기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어요. 밥을 먹다가 한 참 혼자서 울었습니다. 근데 떠오르는 그 인상이 뭐였냐면 제가 원래 군대를 갔습니다. 군대를 갔는데 내일 8시에 군대에 가야 하는데 그 전날 밤 10시 반에 통보가 왔어요, 군대 가라고. 참 옛날에나 가능한 거지. 이별할 새도 없이 그렇게 이제 옷을 갈아입고 가는데 기차역에까지 따라와 가지고 손을 흔들면서 배웅을 하시는 분이 할머니셨어요. 할머니하고 둘이 살았는데, 그러고 14일 동안 있었는데 전화는커녕 편지한 장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14일 동안 고생을 했는데 정밀하게 신체검사를 하더니 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다 그래가지고 판정을 내렸어요. 그러고 14일 만에 돌아와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 안에 앉아 계신 할머니를 공교롭게 그 버스 안에서 만난거야. 근데 이 분이 꺼덕꺼덕 졸고 계시다가 나를 보더니 큰 소리로 ‘얘야 이게 웬일이냐, 이게 꿈이냐 생시냐’ 큰 소리로 그래서 ‘이만 저만해서 돌아왔습니다’ 했더니 ‘야, 내가 너를 보내고 14일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을 하셨는데 그냥 뭐를 해도 니 생각밖에 안 나더라. 너 누웠던 자리 봐도 니 생각, 너하고 같이 밥상 차려놔도 너 먹던 생각’ 많은 일들을 하지만 손주를 사랑하니까 모든 것들이 다 사랑하는 손주를 연상시키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일들을 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주님을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될 때에 우리는 기도에 적합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조용히 묵상하거나 산 속으로 피신하고 수도생활이나 하던 그런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고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들을 늘 만나셨고 병자들에게 에워 쌓이셨기 때문에 그는 식사하실 틈도 없이 고단하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자를 사랑으로 고치고, 무지한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고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늘 그 모든 환경 속에서 기도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환경이 도와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를 응시하는 믿음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는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고, 또 어느 곳에서는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고, 또 어느 곳에서는 감람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고 또 어느 곳에서는 빈들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장소의 다양성은 예수님의 생애가 얼마나 격한 일들에 봉사하신 생애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환경의 탓을 하지 말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에 적합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B. 골방에 들어가는 이유
그러면서 우리는 여기에서 골방에 들어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는 바와 같이 골방은 집에서 평소에 쓰지 않는 작은 방이고,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방입니다. 이 골방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바는 은밀함입니다. 그러한 은밀함은 물리적인 은밀함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과 마음의 은밀한 골방입니다. 기도할 시간, 기도할 장소, 이것이 물리적인 골방이라면 정신적인 골방은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 분께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정해진 시간과
그리고 기도하는 장소는 형식이지만 이 형식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의 내용을 보관하기에 아주 꼭 필요한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우리의 지체가 우리의 몸에 달려있지만 모두 다 치명적인 것은 아닙니다. 손이 부러지거나 심지어는 팔뚝이 덜컥 하고 절단되어도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심장은 손톱 깎기로 한번만 딸깍하고 찌르면 죽습니다. 우리의 다리가 하나 덜컥 끊어져도 생명에 지장이 없을 수 있지만, 우리의 뇌에서 골을 한 스푼만 퍼내면 죽거나 아니면 불구가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민한 장기들은 주님이 어떻게 보관하시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심장은 단단한 갈비뼈에 둘러 쌓여있어서 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셨습니다. 그리고 골은 이렇게 단단한 껍질, 돌보다도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길 가다가 벽에 부딪쳐서 쾅하고 부딪쳐서 살이 찢어져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순두부는 까딱없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같은 이런 더운 날에 음식을 상하게 하기 위해서 특별히 음식에다가 뭘 첨가해야 될 것은 없습니다. 상온에다가 내버려 두면 몇 시간 지나면 쉰 냄새가 나고 그 다음 날엔 곰팡이가 피기 시작해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치가 필요합니다. 꽝꽝 얼린다든지, 아니면 소금에 절여 놓는다든지, 햇빛에 바짝 말린다든지 아니면 기름 속에 담가둔다든지 여러 가지 조치가 필요합니다.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마음을 쏟아놓는 그 애절한 기도는 마치 상하기 쉬운 음식물과 같고, 그리고 손톱 깎기에도 절단될 수 있는 심장의 근육과 같고, 한 스푼 집어넣으면 떠지는 우리의 골과도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형식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그런 골방이 여러분에게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른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직장에 일찍 나가서 하나님께 조용히 간구하고 아뢰는 시간을 가지십니까? 퇴근하는 길에 교회에 들러서 기도하시나요? 아니면 점심시간에 인근에 있는 교회당을 찾거나 직장에서 한적한 곳을 찾아서 하나님 앞에 남들이 밥 먹는 시간에 매달리십니까? 아이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여러분은 가족과 교회와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의 높아지심을 위해 집안 어디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이 있으신가요? 아침에 하나님에 관해서 누군가에게 잘 가르쳐 주던 사람이 저녁때는 머리가 하얗게 되고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르쳐 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어떤 사람을 위해 열렬히 기도하던 사람이 저녁때는 누구를 위해도 기도할 수 없는 그런 메마른 마음이 되는 것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만큼 기도는 영적인 활동이고, 그리고 우리의 죄와 그리고 불결한 환경에 대해서 예민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도의 골방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주님과 독대하는 고요한 시간, 그리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서 주님은 내 마음에 당신의 마음을 부으시고, 나는 주님께 내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붓는 교통의 시간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고, 하나님은 탁월한 지혜 가운데서 이런 기도를 통해 당신의 영적인 생명을 우리의 인간 영혼 안에 부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같이 하나님 중심 신앙이 사라지고 자신이 자기의 인생의 주인인양 그렇게 교만하게 살아가는 시대의 특징은 주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점점 기도와는 거리가 멀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점점 줄어들어 갑니다. 이제는 교회 앞에 써 붙인 글귀 ‘내 집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고 하는 그 표어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은 이제는 기도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입니다. 여러분 중에 50% 이상이 하루에 단 20분도 기도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런 속에서 과연 이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을까요? 영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 분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는 교통이 없이 일주일을 살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삶 속에서 하나님을 삶으로 예배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건조해지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설교는 지겨운 시간이 되곤 하는 것입니다.
C. 최고의 예물, 온 마음
하나님께 바칠 최고의 예물은 바로 우리의 온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뜻보다는 마음, 그리고 성품과 목숨보다도 더 먼저 주님께 바쳐져야 될 것이 마음임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수영장이나 목욕탕에서 일과가 모두 끝나고 물을 뽑을 때 그 안에 계셔본 적이 있습니까? 매우 위험합니다. 작은 구멍에 배수구가 열리면 속에서 기계가 빨아들이는 것도 아닌데 어마어마한 수압과 함께 그 물들이 한 공간으로 몰리게 됩니다. 이때에 발을 잘못 디디면 그 배수구 속으로 발이 빨려 들어가고 아이들은 잘못하면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이게 바로 한 곳에 집중하는 물의 힘입니다.
우리의 정신의 힘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뉘어지고 갈라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하고 단일한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도 순수하고 단일하게 될 때에 그 분을 만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많은 시간을 기도해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물같이 쏟는 그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의 성도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을 온전히 쏟는 그 간절한 기도의 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마음을 온전히 쏟을 때 자기중심적으로 형성됐던 마음은 물같이 녹아내어 버리게 되고 그렇게 녹아내린 마음은 주님 한 분께로 모아져 쏟아져 들어가게 됩니다. 형체를 잃어버린 마음은 주님의 마음에 부어져서 주님이 원하시는 틀로 다시 주조되어 나옵니다. 마치 쇠붙이를 강한 불에 녹여 다시 형체를 잃어버린 그 쇳물을 틀 속에 부을 때에 장인이 원하는 그런 도구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는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 속에서 그렇게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형 수술을 하고 그리고 이런 저런 옷을 입고 외모를 가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새 사람 되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그렇게 주님 앞에 녹아 새롭게 주조될 때 우리는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는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예전에는 죄인이었던 사람이 그 시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원망했던 사람이 그렇게 마음이 물같이 녹을 때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두려워 떨고 한숨을 쉬던 사람이 마음을 쏟아 붓는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게 됩니다. 핍박과 고난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던 사람들이 마음이 녹아내리는 그 쏟아 부음 속에서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마음 안에서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평수도 없고 길이와 부피가 없는 그 마음 안에서 우리 인간의 영혼과 만나십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하나님 자신을 소유한 사람처럼 주님을 만나게 되고, 온 땅과 만물에 계신 하나님이 마치 자신 한 사람의 마음속에만 오신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친밀함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였습니다. 당신 자신은 식사할 틈도 없이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에게 에워 쌓여 사셨고, 하늘의 왕이신 그 분이 종처럼 내려오셔서 병든 자의 헌대를 만지며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며, 무지한 자를 수고하시며 가르치시는 그런 종 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 분은 죄가 없으신 참 하나님이셨지만 육체로는 우리와 꼭 같이 연약한 분이셨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르고 식사하지 않으시면 배고프시고 많이 걸으시면 행로에 지쳐 길가에라도 잠시 주저앉으셔야 했던 연약한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살아계신 그 기도의 통로를 언제나 유지하시기를 마지막 십자가에서 우리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못 박히실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생애의 마지막 한 마디도 아버지께 올리는 간절한 기도의 탄원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 세상의 환경 속에서 우리 자신의 마음에 요동치는 수많은 분요함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찢기고 마음은 나뉘어져서 그래도 주님 앞에 살고자 하는 우리의 중심이 심하게 상처받고 고단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우리와 꼭 같이 연약한 육체로 언제나 마음을 주님께 드려 기도하시던 우리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찬양)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합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그렇게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당신의 생애 전체를 무릎으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언제나 기도로 새 날을 깨웠고, 기도로 한 날의 문을 잠그셨습니다. 병든 자를 위하여, 망가진 세상을 위하여, 떨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 받아야 할 백성들을 위하여,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가하여 주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최고의 예물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III.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골방으로 들어가서 기도하여야 할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특성과 연관 시켜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기도의 전진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앎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장작불과 같이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이 기도의 불길이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은 그 불 아궁이에 계속 공급되는 나무토막과 같습니다. 잘 마르고, 견실한 나무토막이 계속 불 속에 들어갈 때 아궁이는 더운 불길로, 뜨거운 불길로 이글거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은혜가 순간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계속 알아가서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도의 제목들을 발견하지 않는다면 그 기도의 불길은 지푸라기에 붙은 불길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들을 목회할 때에 그 중에 형제 하나가 있었는데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연구대상입니다. 찬송을 부를 때는 열렬해,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찬송을 인도해 그리고 기도할 때는 눈물을 뚝뚝 흘려요. 설교들을 때는 자. 자다가 깨어나서 기도할 때는 또 눈물을 흘려요. 신앙 아니죠. 절대 신앙 아니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의 증가가 기도의 발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 마음이 하나님께 고정된 사람은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만나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담대하게 죄 짓고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전과는 비교될 수 없이 바쁘고 복잡한 시대를 살고 있고, 그래서 이것은 우리를 치열한 경쟁사회로 이끕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들, 신앙, 교회 지체들, 이웃, 내 가족 심지어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성찰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이 쓰이던 시대에 애썼던 성도들보다 더 많이 애쓰지 않으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받아서 죽어갔으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 부패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IV. 결론
그래서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처럼 무엇보다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무엇보다도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를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고 한 주님의 말씀에 더욱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강하게 먹고 그리고 우리의 환경과 싸우려고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주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인 우리에게 홈그라운드가 아닙니다. 고향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이 세상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방인이고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금주부터 마음에 뜻을 굳게 세우고 이 세상의 환경과 마음의 게으름과 영혼의 실증 속에서 무너져 가는 여러분의 기도의 골방을 한번 보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기도의 회복이 있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2.원수를 위하여 기도할 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0).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넓게는 마태복음 5장, 6장, 7장까지 이르는 산상수훈에 속해있는 장이고, 좁게는 팔복 이후에 전개되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의 삶에 대한 첫 번째 강론의 부분에 실려 있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주장하는 이 개신교도들에게 이 마태복음 5장은 적잖은 시험거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마태복음 5장뿐만 아니라 6장 7장 군데, 군데 마치 행위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같은 암시들이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그런 갈등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말씀들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은 천국 백성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정체성과 그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강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서 팔복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의 정체성은 내면의 세계에 있어서 변화된 사람들이고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은 곧 빛이요, 소금인 사람들이고 그들은 마땅히 이 세상 속에서 이러저러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와 화해하고 용서하는 문제가 나오고, 그 다음에 음욕을 품은 자마다 마음으로 이미 간음하였다는 새로운 율법의 제시들도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당신이 구원을 이루신 이후에 신약 시대에 전개될 율법의 시연은 구약 시대나 혹은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지키던 그 율법과는 다른 종류의 그러한 새로운 율법이 주어질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사로 잡혀 있었던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의 율법에 대한 관점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새로운 율법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마치 건물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과 유대백성들이 바라보았던 율법관이 건물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취하시고자 했던 새 율법의 관점은 그 건물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내다보는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외적으로 이런 저런 율법을 지킴으로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율법의 성취가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영적인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자가 될 때에 그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고, 그는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애통하는 자이고, 심지어 자기의 원수를 향해서라도 마음에 온유함을 유지하는 사람이며, 또 이 세상에서 먹고 입을 것과 그리고 세상의 지위가 주어져도 그것으로 배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면의 변화된 질이 그의 인격에 영향을 미치고, 그의 인격에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삶이 바로 예수님이 천국 시민의 생활이 이러해야 된다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제시한 내용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당신이 이 세상에 새로운 율법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인데 그 새 율법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루시려고 했던 일체된 그런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된 삶의 질로부터 흘러나오는 착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유익을 누리게 되어서 그래서 그의 선행에 참여하게 되고, 이방인들에게까지도 이 모든 것들이 확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의 영향이 미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5장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러한 천국 시민의 생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 중에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II. 삶에 묶이는 기도
그런데 이 기도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실제적인 삶의 윤리 문제와 관련 되어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삶에 묶이는 기도생활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하신 이 말씀은 문학적인 구조에 있어서 병행법입니다. 구약의 시편이나 잠언에 잘 나오는 문학적인 기법인데, 즉 원수가 A라면, 핍박하는 자는 A'이고 사랑하라가 B라면 기도하라는 B'가 되는 것입니다. 둘이 서로 짝을 이루면서 반복되거나, 전진되거나, 점층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병행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어적인 묘사로서 제시된 이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고 한 말씀은 사실상 동일한 말씀의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상정하고 있는 이 원수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를 받아서 영적으로 새로운 삶의 질을 유지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박해를 당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고, 이 원수는 바로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변화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원수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기도생활은 결국은 삶과 밀접한 연관을 가져요.
A. 기도는 마음의 활동
그래서 오늘 여기 성경에 보면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간곡한 권면이 기도와 함께 짝을 이루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도가 마음의 활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은 미움과 사랑, 분노, 감동, 이런 모든 정신 작용이 마음을 자리로 해서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올리는 활동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가 우리의 호흡이라고 말하는데 호흡이 그렇게 힘든 호흡이 어디 있어요? 호흡은 저절로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저절로 되는데 기도가 그렇게 저절로 된다면 그는 탁월한 영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칭찬받을 만한 교인인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아주 힘들게, 힘들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종종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하려고 해도 기도가 되지 않는데 그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기도하려고 애를 써도 기도가 되지 않는다는 사람에게 저는 오히려 이렇게 충고합니다. ‘당분간 기도를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따뜻하게 덥히도록 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은 뜨거운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리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면 방바닥에 엎드려 퍼질러 잠이나 자지, 무슨 마음이 더워지겠습니까? 마음을 덥히는 방법은 기도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덥히는 방법인데, 경건 서적을 읽는다든지 혹은 은혜로운 찬양을 깊이 묵상하며 부른다든지, 혹은 설교를 듣는다든지, 혹은 은혜로운 성도의 교제를 나눈다든지 하면 어느 순간에 우리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의 정서가 잠깐 우리에게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순간이 아주 짧은 때도 있고, 꽤 길게 계속되는 때도 있는데 그것은 마치 문이 조금 열렸느냐, 많이 열렸느냐의 차이겠죠. 그때에 마음을 집중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마음이 한 곳에 모아지고 따뜻해졌을 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더 깊고 간절한 기도로 나아가는 하나의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의 경험에 의하면 가난한 집에서는 부엌을 제대로 짓지 못하고 그냥 싸리 가지 같은 것을 얹어서 지었습니다. 그러니 겨울이면 큰 추위와 바람을 그까짓 나무들이 막아주지 못합니다. 저녁때가 되면 뜨겁게 불을 때서 소죽도 끓이고, 그 다음에 음식도 합니다. 그 동안에 구들이 뜨끈뜨끈해지고 거기에서 잠을 잡니다. 새벽이면 그 추위에 모두 식어서 방안이 싸늘해지죠. 이때 아침에 나아가서 그 차가운 아궁이에서 불을 피려고 하면 불이 잘 피질 않고 끊임없이 성냥을 그어대고 작은 나무 불쏘시개를 모아도 자꾸 굴뚝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기운에 불이 꺼집니다. 그러나 굴뚝이 뜨끈뜨끈할 때에는 조그만 불쏘시개에다 불을 붙여도 불이 활활 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불쏘시개라면 우리의 마음은 아궁이와 같아요. 그래서 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사랑의 정서로 언제나 따뜻하게 되어 있을 때 그때에 우리의 기도는 훨씬 순발력이 있고, 간절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라는 명령을 여러 곳에서 받습니다. 그렇지만 기도하라는 이 명령을 순종하려고 실천을 해도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기도하려고 애를 쓰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이 우리의 마음에서 기도의 은혜를 빼앗아 가버리는지를 찾아보고 그것들을 우리의 마음에서 물리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1995년에 열린 교회를 모두 데리고 여름 수련회를 강원도 철원으로 갔습니다. 그때에는 이제 엄청난 홍수가 있었고 그래서 그 지역이 국가 재난 지역으로 선포될 정도로 그렇게 커다란 홍수의 피해가 있은 직후에 수련회를 갔습니다. 저는 거기에 가서 물의 그 큰 힘을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홍수가 나서 수해를 본 지역이 아니라 적군이 와서 폭격을 퍼붓고 간 지역처럼 그렇게 폐허가 된 모습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커다란 충격은 평소에 버스도 큰 트럭도 안전하게 지나다니던 수십 년 된 다리가 완전히 세 동강이 난체로 부서져 버린 광경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믿어지지 않았는데 잠시 후에 다리 교각에 쌓여있는 퇴적물들을 보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이 머금고 있는 물의 양이 지표에 있는 모든 물의 양의 몇 십 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상 최대의 댐은 사람이 만든 댐이 아니라 숲입니다. 산이 그 어마어마한 물을 머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게 되면 이제 이 물이 계속 산으로 스며들어서 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물의 양이 되게 됩니다. 스며들어온 물은 흙과 흙 사이를 벌여놓아 응집력을 약화시키고, 힘이 약해진 바위 속에 스며들면서 수력으로 양쪽의 응집력들을 떨어뜨리며 바위들을 밀어내고 틈 사이에서 균열이 가게 만듭니다. 급기야 산이 너무 많은 물을 머금게 되면 이제 지탱하지 못하는 연약한 부분부터 산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사태는 맑았을 때는 절대로 산사태가 나지 않습니다. 비가 와서 산이 물을 머금을 때 산사태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태가 나게 될 때에 바위들까지 쪼개지면서 계곡 아래로 떨어지고 이때에 그 위에 서있던 커다란 나무들이 함께 쏟아져 내리게 됩니다. 떨어진 바위는 떨어지면서 쪼개어지고, 쪼개진 바위는 물속으로 들어가 부력을 받으면서 공처럼 굴러다니게 됩니다. 이때에 바위끼리 서로 부딪치는 큰 소리가 나면서 빠르게 공처럼 구르기 시작하고 점점 부딪치면서 동그래져서 더 빨리 구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나무가 떠내려 오면서 부딪치는 가운데 가지들이 꺾이고, 잎파리들이 다 뜯기고 껍질까지 하얗게 벗겨진 채로 나무들이 흘러내려가서 그래서 교각에 걸리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쓰레기들이 걸리고 또 작은 나무들의 가지가 걸려서 물의 흐름을 차단하게 되고 굴러 내려온 바위들이 거기를 때리게 됩니다. 그래서 물이 흘러가긴 흘러가지만 그 굉장히 많은 양의 물이 댐처럼 가로막은 그 나무들을 밀어내면서 하나의 댐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때에 굴러 내려온 바위들과 퇴적물과 함께 힘을 합쳐서 온 힘으로 교각을 밀게 되는데 이때에 그 튼튼하던 교각에 균열이 생기면서 결국은 쓰러지게 되고 쓰러질 때에 다리 상판을 분지러뜨리듯이 꺾어버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H빔과 같이 커다란 쇳덩어리도 엿가락처럼 휘어버리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힘이 물의 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이 정화되고 흘러갈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흘러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시죠. 그러나 장애물이 생겨서 우리가 기도할 수 없게 되면 그것들이 나뭇가지가 되어서 교각에 걸린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마음에 걸리게 됩니다. 전에는 기도를 안 해서 능력이 모자랐는데, 기도를 할 수 없게 되니까 이번에는 능력이 모자라는 게 아니라 마음에 각종 악과 욕망들이 솟아나서 그 자체가 커다란 힘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과 삶 자체를 밀어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몇 년 동안 열심히 교회에서 교사생활 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와서 ‘나 다음 주 부터 못 나오겠다고’, 그렇게 구역장 열심히 하던 사람이 ‘나 이번 달부터 이제 안할 거라고’, 열심히 이 일 저 일로 봉사하던 사람이 어느 날 ‘아, 나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주저앉고,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그런다고 그러지만 갑자기 그러는 게 아니라 이미 마음 안에서 기도가 사라지면서 그를 밀어낼 수 있는 강한 힘들이 형성이 되면서 이것이 교각처럼 간신히 버티고 있던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식까지 붕괴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급기야는 교회도 안 나오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그것들을 치워버리려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도 그 엄청난 크기의 달이이면서도 교각에 걸려있는 무수한 나무들로 말미암아서 교각이 무너지고 상판이 부러져서 폭격을 맞은 것처럼 변한 듯이 그렇게 우리의 삶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가 마음의 활동이라면 마음을 잘 지키는 것이 우리의 기도생활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겠죠. 그러면 이 마음은 우리가 지키는 겁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상하게도 이것을 둘 다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하나님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우리에게 제시하는 반면, 또 한 곳에서는 ‘니 마음은 니가 지켜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면 이 공교롭게도 상반되는 성경의 두 설명은 우리에게 어떤 통일된 답을 줄 수 있을까요?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누가 지키는 것일까요?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많은 담론들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짧은 시간이 제가 정리해 드리는 이 말씀의 내용만이라도 마음에 새겨둔다면 충분히 혼란에서 벗어나고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어떠한 경우에도 선택은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더 넓은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선택도 결국은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영향을 받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누구에게 메이지 않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선이든지 악이든지 의지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일의 경우에는 선택은 내가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산을 보겠느냐, 바다를 보겠느냐고 할 때에 ‘바다 쪽에 나를 세워 주십시오’ 라고까지는 할 수 있지만 바다를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정도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옳은 것을 선택하고 선한 일을 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은혜를 주신 하나님 때문에 그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의 힘이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반대로 우리가 악한 것을 선택했다면 그 선택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이고, 그리고 그 악한 일을 실행하는 것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도 충분히 그 악을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악한 것을 선택하고, 만약에 악을 행했다면 하나님은 비난 받으실 것이 없고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악의 힘으로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율법에 알맞은 의로운 행동을 하고도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마음인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이렇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기도를 해야 한다라는 선택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기도를 실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여러 가지 장애가 있게 되면 이런 하나님의 은혜는 곧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런 장애물들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는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는 일에 방해를 받으시면서 우리가 이 기도라고 하는 마음의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없도록 가로막는 것입니다.
B. 기도는 사랑의 흐름
기도가 마음의 활동이라면 기도는 또한 사랑의 흐름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들의 기도가 올려질 때에 가장 활발하게 아름답게 우리의 기도가 올려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고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참되고 진실하게 사랑하는 그 뜨거운 마음속에서 기도는 날개를 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영혼에 맞닿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육체와 이 물질 세계에 맞닿아 있습니다. 이 마음은 영혼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 안에서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결단하는 일들을 수행하게 됩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경향을 가지고 있을 때 마음은 모든 사물들을 하나님을 위하여, 위하는 방향으로 해석을 하게 됩니다. 또 우리의 많은 육체를 통해 들어오는 많은 사물의 정보들, 듣고, 냄새 맡고, 보고, 그리고 맛보고 또 접촉하는 이 다섯 개의 기관을 통해 수많은 정보들을 우리의 마음에 실어 나릅니다. 그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분노, 사랑, 기쁨, 미움, 비참함 이런 감정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반복적인 경험은 영혼에까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좋은 것인 줄 알고 자꾸 좋아하며 감동을 받게 되면 영혼은 악한 성향을 띄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그것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관계하는 사람과 사물들에게도 악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성경과 학문,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끊임없이 감동을 받게 된다면 그런 반복된 사랑의 정동, 감동의 경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갖게 하고 영혼에 하나님 사랑의 성향이 생겨지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마음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기 쉽게 되고. 모든 만나는 사람과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려고 하는 성향을 마음에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주의자들은 바로 여기까지 말했습니다만 오히려 성경은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놀라운 창조적인 작용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육체로 보는 것이 없어도 마음 안에서 기억을 더듬어 우리에게 놀라운 끊임없는 정동들을 일으켜 창조적인 연상을 하게 만듭니다.
언젠가 설교 하면서 신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사과를 이렇게 먹는 경험을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설명이 딱 끝났는데 갑자기 온 교회당에서 ‘쉬익 ~’ 하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때 삼킨 침이 한 1L는 됐을 것입니다. 어디에도 사과가 없는데 마음이 스스로 창조적인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이끌어 내어서 마치 지금 사과를 맛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육체에 침이 고이게 만들고, 그것을 먹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만들고 그 사과의 냄새까지도 이렇게 후각에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묵상의 중요성이 여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아직 성경을 읽고 있지 않아도 성경을 잘 외우고 있다면, 또 설교를 다 듣지 못해도 어떤 내용이 기억 속에 있다면 그것을 끌어내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은혜의 고결함을 상상하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는 마치 오늘 우리 주님을 만나는 것처럼 생생한 주님과의 만남이 경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묵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끊임없이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언제든지 기도하기에 적합한 마음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배당에 나와서 단지 예배를 드리는 이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이 날은 불을 받아 가지고 가는 날입니다. 그 불을 가지고 여러분의 마음의 아궁이에 계속 지펴서 일주일 내내 뜨겁게 불을 때어야지만 거기에서 여러분이 거룩한 성도다운 생활이 흘러나오는 것이고, 여러분의 인격도 날마다 성숙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을 이룰 이때에 가장 기도의 움직임은 활발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마음이나 삶으로 하나님의 유통하여 흐르는 이런 하나님의 자기 회기적인 사랑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는 동안에는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복을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육체의 건강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육체에게 건강을 주시고 병 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나는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그 병을 하나님이 고쳐주시면 그 몸뚱이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만약에 여기에 대한 대답이 없고 ‘그냥 좋지요’ 라고 말한다면 어쩌면 지금 아픈 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훌륭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은 다음에는 기도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궁핍해서 돈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자녀가 아버지께 구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구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그 돈을 여러분에게 주시면 어디다 쓰시렵니까? ‘부채를 갚겠습니다. 사업에 투자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부채를 갚고 투자 하면 그것은 또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야 내가 편하지요’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지금처럼 궁핍한 채로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궁핍한 한 여러분은 기도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이것들은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모든 것들이 소비되는 최종적인 목적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이것은 자신을 우상화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통해서 이웃을 향해 흘러가고 이웃을 휘돌아서 마지막에는 하나님 자신 속으로 회기 하여 어느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는 커다란 하나님의 축복의 흐름 속에 있을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축복을 만민들에게 혜택을 누리고 당신 자신이 복된 하나님이 되시기 위한 한 통로가 되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기쁨인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은 그런 하나님의 복을 많은 사람들에게 흐르게 하고 마지막에는 그도 나도 저도 함께 하나님 안에 있음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은 일체인 것입니다. 기도의 영은 신자가 하나님 사랑의 영으로 가득 차 있을 그때에 가장 풍부하게 역사합니다. 왜냐하면 두 영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곧 사랑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도 사랑의 영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성령은 또한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사랑하게 하시는 성령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보면 ‘사랑하라’ ‘아가파테’라는 명령이 ‘기도하라’는 명령보다 앞에 나옵니다. 여기서 ‘사랑하라 아가파테’는 여러분이 잘 아는 아가페 명사의 변형입니다. 인간들 사이에 흐르는 육욕적인 사랑이 아니라 순수한 아가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그 이웃이 바로 원수입니다. ‘에크드루스’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단수가 아니라 ‘원수들’이라는 복수입니다.
원수는 우리의 일부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원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머리가 그게 뭐예요? 그게 어느 미장원에서 하고 왔길래 돈 주고 그렇게 폭탄 맞은 것처럼 하고 왔어? 난 니 머리가 미워. 이런 사람은 원수가 아닙니다. 머리를 깔끔하게 하고 오면 ‘야 예쁘다’ 할 사람이죠. 원수는 어떻게 하고 와도 미운 것입니다. 그게 원수입니다. 얼굴이 예쁘면 얄밉고, 그 다음에 머리를 우아하게 했으면 폼 잡는 거 같아서 밉고, 아무렇게나 하고 왔으면 폭탄 맞은 거 같아서 보기 싫고, 뚱뚱하면 돼지 같아서 싫고 바짝 말랐으면 멸치 같아서 싫고, 적당하면 혼자 잘난 거 같아서 보기 싫고 그게 원수입니다. 속속들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게 원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고 오셔도 속속들이 싫어하던 사람들이 우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때 하나님 앞에 죄인 되었을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게 우리였습니다.
그러니 사실 원수와는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왜? 속속들이 미워하는데 우리 부분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 남성이 여성을 향해 사랑이 남아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니 마음에 들겠니?” 그러면 “너 요런 거를 좀 고쳐라” 그러고 얘기할지 몰라요. 그렇지만 원수에게는 그게 통하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변하면 니가 좋아하겠니?” 그럴 때 원수는 대답할 것입니다. “그건 불가능해. 왜냐하면 내가 싫어하는 것은 너의 일부분이 아니라 속속들이 너 전체이기 때문이야”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 원수에 대한 감정이 성경에서 미움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미움이 뭐라고 했습니다.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속속들이 미워하니까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 주랴” 그러면 대답은 딱 하나입니다. “니가 없으면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그를 없애주지를 않아, 그러면 내가 가진 힘으로 그를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유일한 방법이 뭐예요? 살인입니다.
그렇게 될 때 결국은 기도 자체를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의 삶이 다리이고 그리고 교각들이 그 물속으로 내려져 있습니다. 영적인 뿌리들이죠. 물이 흘러가면서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복과 은혜들이 흘러가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를 통해서. 그래서 상류에 모아진 물들이 하류로 내려가면서 고기들을 살게 하고, 생태계를 살게 하고 마을 아낙네들이 와서 거기에서 소라도 줍고, 빨래도 하고 하면서 이 마을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이 막히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복이 우리를 밀어버리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악의 힘이 우리 자신을 확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골격을 무너뜨려버리고 마지막에 상판처럼 얹혀져 있는 그 다리를 분질러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 자체를 무너뜨려 붕괴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어요. “한 사람이 이웃에 대해서 악을 행할 때 악을 행하는 그 사람은 악을 당한 이웃보다 더 나쁜 것을 이미 그 마음속에 당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폭행을 하거나, 폭언을 퍼붓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속이거나 이웃에게 이웃의 행복을 짓밟는 어떤 일을 했을 때 최대의 피해자는 그것을 행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 자식이 그러고 팍 쳐서 옥수수가 다섯 개가 우르르 쏟아졌어요. 그러면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이게 나가는 그 순간에 미움이 생겼겠어요? 아니면 오래전부터 그런 일이 있었겠어요? 있었겠죠. 그러니까 이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지금 가격을 당해서 이빨이 부러졌지만, 이 사람은 저 놈을 언젠가 한번 반 죽이리라고 마음을 먹은 최초의 순간서부터 마음속에서 수많은 주먹에 휘둘리면서 영혼과 마음이 부서지고 짓이겨지는 피해를 이미 본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를 진짜 때릴 때쯤에는 이 사람이 망가진 사람이 되어서 바깥으로 그것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울합니다.
그럼 더 좋은 이야기를 해 볼게요. 자 그러면서 똑같은 이야기를 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그 선의 최고의 수혜자는 선한 행실을 제공받은 이웃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아우 저 지체가 너무 불쌍하구나, 아 저럼 안 되지. 어떻게 저렇게 살까’ 그러고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 그럼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다가 숨 쉬듯이 돈을 툭 줬겠어요? 무슨 짐승입니다. 속으로 ‘얼마나 불쌍할까 아, 너무 안됐다’ 그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죠. ‘내가 뭘 나눠줄 수 없을까?’ 이렇게 계속해서 마음에서 상당한 활동이 있은 후에 탁 도와주게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갑자기 돈을 받았는데 준 사람은 이 안에서 굉장히 돈 이상의 좋은 것들을 선물로 이미 받은 것입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악을 행하고 큰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찾아와서 내가 너를 미워했던 것을 고백한다, 근데 잘못됐다는 것을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에게 용서를 빌고 나도 너를 용서한다. 근데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당하는 일입니다. 이 사람은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 이 안에서 끊임없이 마음의 활동을 하는 동안에 망가진 많은 것들을 치유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다고는 했는데 복음서에는 안 나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 한 그 말의 뜻이 바로 정확하게 그 의미입니다. 받은 사람은 그냥 갑자기 혜택을 받았을 뿐입니다. 준 사람은 그것을 주기까지 더 좋은 것들의 활동을 이미 누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도와준 돈에 대해서 보상을 안 해 주셔도 이미 그는 충분한 보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놀라워요? 별로 충격 안 돼요? 나는 발견했을 때 뛸 것같이 기뻤어요. 정말 하나님의 이 은혜의 세계는 너무너무, 너무너무 놀라워요. 그런데 이 적의를 품은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라. 용서는 사랑이 흐르게 하고 사랑은 기도가 흘러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III. 기도에 묶이는 삶 : 미움을 버리라
그래서 결국은 기도에 묶이는 삶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있는 미움, 그리고 마음속에 있는 원수된 감정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말이 어찌 원수보다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럼 주님이 원수편이겠어요? 그럴 리가 없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핍박하는 자를 우리보다 더 생각하셔서가 아니라 정말 원수를 정당하게조차 원수를 미워할 때 우리의 마음 안에 일어날 그 재앙을 아시는 주님이 우리가 그렇게 미움 속에서 우리의 기도의 영이 마르고, 은혜의 영이 소멸되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충고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았던 많은 인물들이 나와요. 근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방법은 주님이 돈 많이 주시고, 출세시켜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큰 죄에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경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한 깊이와 끝없는 넓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 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 마음으로 깊이 미워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용서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아주 표독스럽게 항의하던 것들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조금 주시고 왜 나보고만 죽으라고 하십니까? 내 원수를 주님이 나보다 더 사랑하신 것이 분명한 것 같았어요.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나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아 그런 거구나!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근데 다 깨닫고 나서 정말 하나님이 나의 원수를 나보다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를 훨씬 더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속을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더러 ‘지라’고 명령하시고, ‘꺾으라’ 고 명령하시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설교를 했더니 어떤 사람이 저한테 이런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목사님, 와서 잘못했다고 빌어만 보세요. 내가 진짜 용서 하지. 근데 안 와요”. 안 옵니다. 오게 되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입니다. 그때마다 내가 그 지체에게 설명을 해 줘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는 방식이 어떤 방식이냐?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 합니다. 복음을 듣고 내가 죄인입니다 하고 펑펑 울면서 회개했더니 하나님이 ‘용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고 생각 합니다. 사실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용서했다 미워했다, 미워했다 용서했다 하나님이 그러신 분이시겠어요?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택되었을 때 이미 하나님은 영원 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등질 것도 아셨지만, 용서할 것도 주님이 예정하신 것이고 그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구체적으로 펼쳐진 것입니다. 이렇게 말려 있는 동안에는 여기에 뭐가 들어있는지 몰라요. 그렇지 않아요? 이미 이렇게 펼쳐짐으로써 글자가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기 써있는 글자들이 이렇게 펼치니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타나듯이, 펼쳐지듯이 그렇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이루신 그 칭의와 용서의 작정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개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셨음에도 사랑을 모르다가 우리가 회개를 하게 되니까 비로소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 예전부터 사랑했다는 것이 커다란 감격으로 우리에게 경험이 되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감격적인 복음의 사실을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깊이 용서하고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흐르게 됩니다. 여러분이 부부싸움 한 번 해 보세요. 확실하게 기도가 막힙니다. 아주 확실하게 막힙니다. 사랑의 통로가 탁 막히게 될 때에 기도도 함께 막히는 것입니다. 이런 거를 해결하지 않고 아무리 기도하려고 몸부림 쳐도 기도는 허공을 치는 것 같고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것 같은 차가운 거절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가 하나님 사랑의 통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기도와 나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 혹은 우리가 옳은데도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불가능해 보이는 우리의 원수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 큰 사랑을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IV. 결론 : 기도하기 위하여
결론을 내리자면 우리는 기도하기 위하여 우리와 우리의 원수들조차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미워하는 대신 하나님이 우리를 핍박할 수밖에 없는 저들을 변화시켜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닫혀진 기도의 문을 열 때 제일 먼저 마음에 이런 원수와 미움들을 품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고 여러분에게 악을 행하거나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고, 그때에 여러분의 닫혔던 기도의 문도 열려 하나님의 사랑이 기도와 함께 흐르게 될 것이니 여러분이 이렇게 해서 기도생활을 회복하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3.예수님의 기도생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한 토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새벽 미명에 기도하기 위해 일어나셨고, 한적한 곳에서 홀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기록은 후에 예수님을 찾아 나선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아마 사람들에게 전해져온 기록이었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신 그 앞부분에 보면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쭉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을 내어 쫓으시고 그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논쟁과 시름 속에서 그들과 함께 싸우시고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는가 하면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가셔서 그를 심방하고, 그리고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을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병 고쳐주심을 바라며 온갖 병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많은 무리를 이루었고,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을 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고쳐주셨고, 틀림없이 육체의 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어 그들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사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깨우쳐 주셨을 것입니다.
II. 예수님의 기도생활
오늘 예수님은 이러한 지난 하루 동안에 일어난 많은 일들을 뒤로 하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기도생활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에게는 기도가 필요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 신성을 하나님의 본체를 사람의 인성 아래 감추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죽기까지 하나님 앞에 복종하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우리 중 연약한 한 형제처럼 우리들이 사는 것과 꼭 같은 신앙생활을 하심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본을 남겨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하나님께 무슨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까? 당신 자신이 기도를 들으셔야 할 하나님이신데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이 이른 새벽에 한적한 곳에 나아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셔야 했습니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비록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을 때에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짧은 생애를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우리에게 우리와 꼭 같은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알고, 섬겨야 할지를 당신 자신의 모본으로 끼쳐주시기 위해서 신의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셔서 우리와 꼭 같이 죄는 없으시지만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영광스런 신성을 인성 아래 감추신 채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있었고, 당연히 예수님에게도 기도생활이라는 것이 존재하였습니다.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박해를 이기며 하나님의 참 사랑을 전하셨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기 위하여 매일 매일 하늘로부터 임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의 은혜를 힘입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기도생활을 우리에게 한 토막 보여주셨습니다.
A. 새벽에 헌신하심
제일 먼저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새벽에 헌신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셨다고 말입니다. 아직 어두움이 도망가지 못하고, 아침은 아직 오지 않은 그 시간에 예수님은 이 새벽 미명의 시간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당신의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하심으로 하루의 생활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그 전날 밤에는 밤늦게까지 어쩌면 이른 새벽까지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그들을 돌보셔야 했던 피곤한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른 새벽 아직도 만물이 깨어나지 않고 어둠 속에 있을 때에 예수님 홀로 제자들이 깰 세라 문을 열고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일어나기 힘든 새벽 미명의 시간을 기도에 헌신하는 때로 선택하셨을까요?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예수님이 늘 기도하셨지만, 낮에는 간단 간단한 기도였고, 장시간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의 시간은 이른 새벽 미명과 깊은 밤중이었습니다.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 열심히 기도하셨고, 제자들을 세우실 때에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후 그들을 사도로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의 육체의 성질로 볼 때에 가장 헌신하기 어려운 새벽과 그리고 어두운 밤중을 선택하신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새벽과 밤 시간에 어떤 신묘한 효험이 있었기 때문에 기도시간을 선택하셨다기보다는 낮에 기도하시면 영혼을 섬기는 일에 방해를 받고, 그 손해는 사랑하는 양떼들이 고스란히 받으실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새벽 미명 그리고 깊은 밤, 자기의 양떼들이 당신의 섬김을 아직 받지 않을 그 시간에 예수님은 기도에 헌신하심으로 낮 시간을 영혼들을 돌보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을 놓고 볼 때 예수님의 생애는 풍광이 수려한 자연 속에서 조용히 수도나 하던 수도자들과 같은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도시와 초원을 두루 다니시면서 자신의 마음을 쏟아 영혼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상처받은 자를 싸매시면서 착한 예수로 일생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도 잠들고 싶어 하신 새벽 미명을 기도의 시간으로 선택했고, 하루의 피곤을 이기기 위해 휴식을 취하셔야할 깊은 밤을 하나님 앞에 통곡으로 수놓으시며 기도의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사신 기도의 생애의 한 토막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론 30이 갓 넘으신 나이였기 때문에 나이가 많이 든 오늘의 우리보다는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계셨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낮에는 예수님이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당신 자신을 모두 쏟아 부어주신 헌신의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영국으로 출국하기 위해 집을 막 나오면서 사랑의 교회 옥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사랑의 교회 비서실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영국과 화란에 있으면서 목사님 돌아가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40을 갓 넘은 연세에 저에게 많은 은혜를 끼치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사석에서 몇 번 만났을 때 특별히 이 교회에서 제가 위임 목사로 위임을 받을 때 옥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하셨습니다. 그때 저에게 이런 충고를 하셨습니다. “김 목사, 절대 무리하지 말거라 나도 그대 나이일 때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 조심하라고 조심하라고 주위 사람들이 말렸지만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그렇게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한번 쓰고 버릴 일회용품이 아니기 때문에 춥다고 하면 따뜻하게 덥혀주고, 피곤하면 쉬게 하여야 하고. 무엇이 먹고 싶다면 양분을 공급해 주어서 좀 오래도록 주님을 섬기면서 살 수 있게 보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한편으로 살아있는 날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모두 쏟아 부어 섬기신 것처럼 우리 자신도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옥합을 깨뜨리듯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먹고 싶을 때 모두 먹고, 자고 싶을 때 모두 자고, 쉬고 싶을 때 모두 쉬면서 주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두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얼마만큼이 주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우리의 육체를 잘 보존하여 주님을 오래도록 잘 섬길 수 있게끔 스스로 보살피는 것인지, 얼마만큼이 자기의 육체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욕심에 빠져 안일한 것인지 우리는 뚜렷이 선을 그을 수가 없고, 어느 만큼이 주님의 뜻을 벗어나 절제 없이 자신을 낭비하는 것인지, 어느 만큼이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뒤따르며 자기를 올바르게 헌신하는 것인지의 사이를 정확하게 줄을 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사이에 늘 끼어서 이리로 치우치는가 하면 혹은 저리로 치우치고, 저리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균형을 잡는가 하면 이리로 빠져버리고, 또 저리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이리로 절제하는가 하면 또 이쪽으로 굴러 떨어져 버리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갈등은 주께서 우리의 인생을 마감하게 하시는 날 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B. 한적한 곳에서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실 동안에는 당신 자신을 돌보실 겨를이 없이 하나님과 그리고 이 땅에 이루어져야할 아버지의 나라와 그리고 사랑하는 영혼들과 우리를 위해 자기를 온전히 쏟아부어주신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조지 휫필드 18세기 위대한 설교가가 고백하였듯이 ‘나는 썩어서 죽느니 보다는 달아서 없어지겠노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전날 자신의 체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그 모든 일을 감당하시고, 새벽 미명의 한 적한 곳에 나아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기도 생활을 뵈오면서 우리들은 이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니라 저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닌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주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보다 더 어렵고 고단하실 때에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찬양)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합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힘들고 고단하고 어려울 때마다 주님은 더 많이 힘드셨는데도 기도하셨다고 우리 자신을 타이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장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적한 곳을 찾으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지 정처 없이 다니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거처는 일정하지 않았고 식사 장소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속에서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다양하게 제시됩니다. 어느 곳에서는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어느 곳에서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고, 어느 곳에서는 광야에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했고, 어느 곳에서는 감람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고, 심지어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기도 장소가 다양하게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얼마나 분주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셨던 생애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당신이 얼마만큼 이 세상에서 섬기다가 언제 주님이 자기를 부르실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3년이었고, 그 시간동안 예수님께서는 후회 없이 당신 자신을 다 쏟아 부으시며 연약한 자를 위해 그들을 고치시고, 병들고 주린 자들을 치료하고 먹이시고,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진리의 빛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혼신의 힘을 모두 쏟아 부어주신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하나님 한 분을 우러러 보는 독대의 시간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숲속에나 경치 좋은 산 속에서 혼자 수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대신 영혼들과 함께 계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유가 바로 예수님이 그들로 당신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셨다고 기록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을 다하여 섬기셨고, 그래서 불꽃같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도 매일 매일 정해진 시간에 그리고 적합한 장소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당신의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의 시간은 방해받지 않도록 유지하셨습니다. 그 달콤한 시간에 당신 자신을 쏟아 붓는 아름다운 헌신의 삶을 사시면서 하루 동안의 고난과 시련을 이기셨고, 그리고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할 강한 힘을 회복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한적한 곳을 선택하신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 기도생활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는 많은 짐들, 이것을 짊어지고, 고생하고, 고민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는 대신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부었더라면 지금보다 얼마나 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지금도 구원을 받지 못한 가족들을 위한 무거운 부담은 변하여서 그 가족들이 기쁘게 주님을 만나는 신앙생활을 보는 환희에 젖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돌보는 목장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영혼을 회복시키는 역사가 일어났을 것이고 우리가 돌보는 어린 영혼들에게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늘 근심과 걱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대신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아 하나님께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한다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 되겠습니까? 염려와 근심은 우리의 마음과 육체를 썩이고 하나님 앞에 상 받을 것이 없이 우리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파괴하지만,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의 고뇌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상 받을 만한 헌신이요, 그 기도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하늘의 능력을 이 땅 아래로 불러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온 마음을 모아서 교회가 간절히 기도한다면 꿈꾸지 못했던 크고 놀라운 일들이 어찌 아니 일어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시고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받으신 하나님 자신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매일, 매일 새벽 미명의 깊은 밤에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거기서 자신의 마음을 빨래 짜듯이 짜서 주님 앞에 바치시며 때로는 땀이 떨어지는 핏방울과 같이 되기까지 당신 자신의 진액을 쏟으며 아버지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그런 기도는 마치 그가 하나님 앞에 한없는 죄인으로서 참회하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을 짜내는 기도였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으니 당신 자신의 마음을 짜서 주님 앞에 드린 것은 오직 당신 자신 안에 있는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영혼들과 당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없는 불쌍한 우리 인간의 영혼을 위해 대신 당신 자신이 기도의 즙을 짜 당신 앞에 바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액체였던 예수님의 생애를 다시 한 번 기억하여야 합니다. 부당하게 우리를 사랑하는 정신에서 벗어나서 우리의 게으른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고 안일한 우리의 정신을 꾸짖어서 하나님 앞에 맨 처음 주님을 만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부어 기도하면서 가장 달콤한 영혼의 위로를 주던 시간이었던 것을 회상하며 아버지 앞에 매달리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III. 결론: 약함을 이기며
우리는 지극히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많은 죄와 헛된 욕심들도 우리가 주님 앞에 짊어지고 나아가야할 무거운 짐 덩어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모두 아시는 분이고, 예수님 자신도 죄는 없으셨지만 우리와 꼭 같이 시험을 당하신 분이시기에 또한 시험을 당하고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가 어떠한지를 당신 자신의 인성으로 잘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온갖 연약함에 둘러싸여서 고통을 받으시면 서도 주님 앞에 한적한 곳을 찾아 당신의 마음을 짜서 바치던 헌신의 삶을 사셨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주님이 당신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여 기도에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게으름이 우리에게 엄습할 때마다 주님의 생애를 기억하며 우리의 육체를 꾸짖어야 합니다. 안일한 마음이 될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한 번의 마음을 쏟아 붓는 간절한 기도는 열 번의 마음을 썩이는 근심보다 낫고, 한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응답은 이 세상에서 천만인이 우리를 돕겠다는 약속보다 더 뛰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삽니다. 주님을 꼭 붙들고 기도의 삶을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기도 없이 능력 없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8-29).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신들려 벙어리가 된 한 아이를 고치는 장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에 산 아래서는 이 아이를 두고 큰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다루지 못한 이 아이를 예수님이 능력으로 고쳐주셨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물러간 후에 집에 들어가실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왜 자신들은 그 귀신을 내어 쫓지 못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주님께로부터 이런 권능을 받았고, 또 여러 번 행사에서 이 일들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류”라고 하는 것은 kind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즉, ‘너희들이 예전에는 이런 저런 모양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능력을 행하였지만, 이러한 종류는 너희에게는 감당이 안 되는 거란다. 이런 것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더 많이 기도를 해야 된단다’ 이 말씀인 것입니다.
II. 신자의 영적 현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병자 하나를 고치는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신약 성경 전체가 전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적인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의 영적 현실입니다. 신자의 영적 현실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신자의 영적인 현실은 바로 영적 전투의 현실로 나타납니다.
A. 영적 전투
물론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악령과 성령의 대결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창조되었고, 그렇게 창조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이나 예수를 믿은 후나 우리는 지극히 자유로운 존재들이고, 그래서 주님 앞에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택에 있어서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실제 그 선택된 것을 행하는 데 있어서는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들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할 때에는 우리의 힘으로 하지만, 선을 행할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악을 행한 자는 책임을 피할 길이 없고, 선을 행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칼빈 선생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인간이 죄를 짓거나 악에 이끌릴 때에 마귀에게 속박을 받아서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존재로 그 일을 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전쟁이고,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영적인 전쟁의 불리움을 받은 영적 전사입니다.
성경은 이런 죄의 큰 원천을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하나는 하늘과 공중에 있는 악의 영들이고, 또 하나는 죄악된 세상이고, 마지막 하나는 부패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 셋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신자의 마음과 내면의 세계의 의지를 압박해서 그들의 삶과 생각들을 악으로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를 장엄하게 진술하면서 하나님이 세계를 지으신 뜻과 교회를 세우신 목적,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에서 소명을 따라 살아야 할지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종말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실한 측면이 바로 영적 전쟁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얼마나 안일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 그리스도인들 중에 누가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의 본분은 영적인 전사요, 군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모두 교회에 와서 스스로 상처받은 자, 치유 받아야 될 자, 사랑을 받아야 할 자,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나 부르고 있는데, 물론 우리가 살다가 이 세상에서 찢기도 할퀴었을 때 교회에 와서 사랑도 받고, 치료도 받고, 그리고 고침도 받지요.
그러나 여기는 그런 일을 교회가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에게 교회는 야전병원이야. 병 낫으면 전쟁하러 가야지, 훈련 안 받는다고 병원에서 환자복 입고 식판 들고 왔다 갔다 하면 군대가 되겠어요? 나라가 꼴이 되겠느냐고요. 군대는 어림없어요. 군대는 다치면 군의관이 정확하게 진찰해서 이놈은 10일 입원, 딱 그러면 10일 딱 끝나면 에누리 없어. 바로 자대 복귀해서 그 날부터 건강한 사람처럼 땀 뻘뻘 내고, 완전무장하고 뛰어야 합니다. 기압도 받아야 되고, 산에도 올라가야 되고, 모든 일을 다 정상적인 사람처럼 해야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러느냐 한번 생각을 해 보란 말입니다.
언젠가 외국 출장을 가는 길에 다큐멘터리 하나를 봤어요. 그게 뭐냐 하면 ‘21세기 강군으로 가는 길’ 그거였습니다. 해병대 편이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깜짝 놀랐어요. 아이들이 훈련받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그렇게 개념 없던 젊은이들이 와서 어떻게 대한민국 최고의 군대가 되는지를 다큐멘터리로 찍은 것입니다. 마지막 감동을 받은 장면이 뭐냐 하면 135시간 잠 안 재우기 훈련이 마지막 그 훈련의 마침표야. 그런데 135시간동안 안 재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복부터 군화까지 아무것도 갈아입을 수가 없어. 막 뜨겁고, 뭐 진창에서 구르고 막 그렇게 훈련을 받는데 못 벗어. 그러니까 행군을 하면서 막 조는 거야. 뒤에서 소방차가 물을 막 뿌리는 것입니다. 졸지 못하게. 왜 그렇겠어요? 실제 전쟁터에서는 취침시간이 없거든. 적군이 계속해서 교대로 공격해 오면 일주일이 아니라 열흘도 잠을 못자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거든요. 그러면 그런 상황에서 훈련 안 되는 사람들은 전쟁이 계속되면 그 다음에는 도저히 그 전투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 135시간을 안 재우는데 거기에서 상당수가 낙오를 하더라고. 마지막에 정말로 가슴이 아팠던 것은 이게 이렇게 마지막에 군화를 벗는데 살 껍질하고 양말하고 붙었습니다. 양말을 벗으니까 살 껍질이 같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를 오랫동안 견지했던 나라가 로마입니다. 그 로마의 위대한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이태리를 여행해 보고 나면 실감을 하게 됩니다. 그 로마의 강함은 어디에서 왔냐하면 군대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 로마 군대 지휘관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 아예 그 지휘관이 될 사람들은 엘리트들로서 어려서부터 뽑아서 철저하게 훈련을 시켜서 그래서 별도의 교육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려서부터 로마를 위해서 장렬하게 죽는 것이 자기 생애의 최고의 영광이라고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로마에 대해서 종교심을 가진 사람들로서 군대에 배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운 정신대로 자기의 군대를 철저하게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의 많은 나라들이 군대의 강함의 개념을 수와 연관시키던 그런 시대에 로마는 그 틀을 깨고 전쟁에 있어서 승패는 수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고 믿었고, 오히려 기민하고 날렵한 전투를 하기에 많은 수의 군대는 불리하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수 정예 부대로 철저한 훈련을 시켜서 그래서 아주 기동성이 뛰어난 군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용맹스러운 군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전쟁에서 용맹스러울 수 있었던 군인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아마 영화 같은 거 보면 희랍이나 페르시아 군대와 로마 군대가 대조적인 게 탁 보일 것입니다. 로마 군대는 어때요? 무장 자체가 간편합니다. 방패도 그리스 방패는 무지하게 커가지고 대문짝만해. 그 대신 절대 화살에 안 맞아. 그 대신 이걸 들고 싸울 수가 없어요. 페르시아 군대도 마찬가지야. 로마는 방패가 팔에 딱 감기는 짧은 치마, 검을 잘 보세요. 긴 칼이 아니고 아주 짧은 칼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확 덤벼들고, 파고 들어가지고 아주 빠른 손놀림으로 여러 사람을 찔러 죽이는 그런 말하자면 군장 체제를 갖추는 그게 로마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전쟁에 그렇게 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 하면 평소에 피나게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가 자기의 글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훈련은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었고, 전투는 피 흘리는 훈련이었다 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유지되고 있는 동안에는 감히 로마를 넘볼 나라가 없었습니다. 강력한 군대에 의해서 그 긴 세월동안 나라가 평화를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분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대답을 해 보세요. 여러분 가운데 나는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는 즉시, 나는 하늘나라에 입영한 군인이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이 전투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소수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은근한 성공주의와 그리고 은근한 안일에 빠져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오늘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것은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그려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현실로서의 영적 전투와 얼마나 거리가 먼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나라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강력하게 교회를 지키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을 때 복음에 혁혁한 승리를 이루었고, 강한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더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수가 많아도 안일하고 나태한 사람들로 교회가 가득차고 군인이 없었을 때 교회는 망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떻게 망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보편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어떤 핍박과 환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지체들이 아무리 부패해도 보편적인 교회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2000년의 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핍박해서 말살시켜 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러나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역교회는 망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한국 교회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추문의 폭풍이 교회를 강타했습니다. 어디까지 이 폭풍이 갈지 우리 모두 두려울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어떻게 보면 그 일속에는 몇 명의 개개인이 있을지 모르지만 보다 더 넓은 차원에서 보면 이것은 하나의 영적 전쟁 속에 서 있는 한국교회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탓할 수가 있겠습니까? 설교 좋은 데를 따라서 메뚜기 떼처럼 몰려다니고, 누구네 교회에 무슨 프로그램이 있다더라 하면 벌떼처럼 우르르 몰려다니고 시들먹해지면 다시 우르르 몰려다니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신약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영적 군사로서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까?
보편 교회는 망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지역 교회는 망할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화려했던 영국의 교회들이 다 무너지고, 모슬렘들에게 팔려나가고, 그리고 교회는 건물을 유지할 수 없어서 건축업자한테 팔고 건축업자는 교회의 외관은 시에서 규제를 하니까 헐지 못하고 십자가만 잘라버리고 밑에다가는 연립주택을 지어서 분양을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국 교회도 이런 교회의 쇄락으로부터 멀지 않았는지 자신을 살피고 경계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영적인 능력의 총화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인 능력의 집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지켜 주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지키시지만 주님은 당신이 세우신 사람들을 통해서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이 세워주신 사람들이 충성스럽게 주님 앞에 전투적인 삶을 살 때에 그 시대의 교회에는 하늘의 복이 내렸고, 수많은 불신자들을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태만하고 나태하게 살 때 그래서 의의 흉배를 집어버리고, 구원의 투구를 내동댕이치고, 진리의 허리띠를 풀어놓고, 믿음의 방패를 팽개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내동댕이친 채 술이나 퍼먹고 있던 그런 영적인 싸움으로부터 교회가 무관심해졌을 때에는 주님이 말할 수 없는 섭리의 격련 속에서 사단에게 교회가 짓밟히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후일에 많은 교회에 경고를 삼으셨던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이 영적 군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셔야 됩니다. 응석이나 부리고 있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런 영적인 전쟁이라면, 전투라면 그러면 그런 영적인 전투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씨름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 팔레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샅바를 메고 점잖게 모래판에서 서로를 밀치고 땡기면서 모래판에다가 쓰러뜨리는 한국의 씨름 경기가 아닙니다. 고대 로마에서 이 팔레의 경기는 격투기였습니다. 가죽에 금속을 박은 장갑을 천으로 된 장갑을 두르고 두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글라디에이터들이 검으로 그 일을 했다면 이 사람은 금속이 박힌 주먹을 가지고 상대방을 죽을 때까지 쳐서 쓰러뜨리는 것입니다. 보는 사람들에겐 그것이 구경이고 장난이겠지만 그것을, 싸움을, 씨름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싸움 씨름이 끝났을 때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피투성이가 된 주먹으로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많은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내지만 진 사람은 그 주먹에 머리가 짓이겨서 깨져 피를 흘리고 눈을 부릅뜨고 죽어있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전투적인 삶을 포기하고도 행복해진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소수이지만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해가 창문을 두드릴 때까지 퍼질러 자고, 밤이면 늦게까지 앉아서 게임이나 하고 앉았고, 비디오나 보고 앉아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 허접한 인터넷에 들어가서 친구하고 수다나 떨고 그런 사람들에게서 무슨 그러한 영적인 전투력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인 전쟁에서 측면에서만 본다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전쟁하러 나가는 군인 뒤에 따라 붙은 피난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지식이나, 이 세상에서의 가문이나 학벌이나 이런 것들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한 삶,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된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 이것이 없이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엄중한 현실 속에 주님이 우리를 두셨을 때 우리를 전투는 이렇게 엄중하고 무서운 전투지만,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그러셨을까요? 아닙니다. 구속사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주님께서는 반란군이 일어난 창조세계에 토벌군 대장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친히 싸움을 진두진위하시며 우리를 또한 무장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시키시면서 하신 그 첫 번째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사와 권세와 의문의 증거를 폐하신 것입니다.
B. 신자의 특권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영적인 싸움에 적합하도록 신자에게 특권을 주셨습니다. 두 가지를 주셨는데 죄에 대한 용서와 은혜의 무한한 공급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우리를 이 영적인 전투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소명을 느끼면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지성은 맑고 투명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그 가슴에 예배시간마다 아로 새겨집니다. 그리고 그의 정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으로 가득 차 있고, 그의 의지는 올곧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왜 변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맑고 청명하던 지성이 흐려져서 예배시간 내내 꺼덕거리고 졸지 않으면 잡생각으로 가득 채우고, 혼탁해진 마음으로 예배당을 물러나게 되는 이유 무엇이죠? 여러분 가운에 예배 시간에 드물긴 하지만 종종 조는 분들이 있던데 조심하세요. 큰 일 납니다. 예배 시간에 조는 게 뭐가 죄냐고 묻고 싶지요? 그 자체는 큰 죄가 아닐지 몰라요. 그러나 이미 여러분의 그런 태도는 여러분의 영혼에 빨간 불이 들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여러분의 영혼이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여러분 자신도 그렇게 죄에 빠지고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죄에 대한 용서
그래서 필요한 것이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죄가 신자의 마음에 가득하게 될 때에 선명하고 명료하던 진리의 빛은 혼탁해지기 시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의 빛이 비치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아요. 마음은 헛된 것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들뜨게 되고, 의지는 하나님 앞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 완고하기 짝이 없는 노새와 같은 의지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 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용서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께 나아와 용서를 비는 모든 자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전에는 그릇 살았으나 다시 바르게 살게 해 주시고, 예전에는 부랑아였으나 단정한 군인으로 만들어 주시고, 예전에는 방황했으나 갈 길을 찾게끔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죠. 신령한 진리의 빛은 정결한 마음의, 주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은 깨끗한 영혼의, 하나님을 향해 올곧은 의지는 하나님을 향해 정결해진 심령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능력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주님 한 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정직하고, 간절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고 이 죄가 주님께로부터 비취는 그 찬란한 진리의 빛, 그리고 은혜의 사랑, 이것들로부터 저를 막았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시고,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다시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았던 모든 사람들은 한 때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왜냐하면 그 용서 때문에 자기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좋은 것들도 나쁜 것이 되고, 그래도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일어난 나쁜 것들도 좋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커다란 추문의 폭풍이 한국 교회를 강타할 때 그때 그대들은 이 교회에서 배운 교리를 따라서 그 교회를 모두 끌어 앉고,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깨어있는 군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구나 생각하고 마음으로 깊이 아파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은혜의 무한 공급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은혜의 무한한 공급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하나는 내재적인 방식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초월적인 방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초월적인 방식으로 주시는 것은 이것은 개인적인 부흥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물 붓듯이 강한 은혜를 부어주어서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놀랍게 눈 뜨도록 만들어 주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를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Second Blessing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이것이 없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없다고 하는 그런 논리에는 더더욱 동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축복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기이한 성령의 충만함이라고나 말할까요? 사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도 회상을 해 보니까 이런 초월적 사랑의 부으심을 경험한 것은 저도 생애 중에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몇 번 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은혜는 그 보다 더 보편적인 방식인 내재적인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이 내재적인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그 주신 은혜를 가지고 잘 활용하는 사람들의 참여하는 성화의 노력에 따라서 주님이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원하지 않았는데 다쳐서 상처가 덧나서 곪기 시작했습니다. 손바닥 보다 넓은 부위까지 염증이 번져가면서 시뻘겋게 붓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미 속에서 세균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죠.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욱신거리고 쑤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 적절히 치료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놀랍게 부었던 부분들이 점점 부기가 빠지기 시작하면서 상처가 아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새살이 돋기 시작하고 상처는 완전히 사라지고 새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 사라졌지만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수도 있는 집은 거의 없었고요. 펌프가 있었습니다. 펌프. 더 가난한 집은 우물이었고, 조금 부잣집은 펌프가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보편화 됐지만, 그 펌프는 밀펌프와 빨펌프가 있습니다. 밀펌프는 아주 비싸요. 그거는 이렇게 밀 때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밀 때도 나오고 내릴 때도 나와서 막 푸면 물이 계속 쭉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굉장히 비싸요. 가지고 있는 집은 많지 않았고. 대 부분은 빨펌프입니다. 막 펌프질을 하고 나면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을 푸고 나면 신기하게 그 물은 찍 하고 도로 물이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수십 명의 군인이 막 훈련을 뛰다가 펌프 앞으로 몰렸어요. 물을 먹으려고 하는데 아무 물이 없어요. 한 바가지 시원한 물이 생겼어요. 자 그것을 돌려서 먹겠어요. 아니면 목마름을 참고 펌프에 붓겠어요? 그게 유수입니다. 그래서 물을 그 펌프에다가 물을 한 바가지를 붓고 펌프질을 하면 밑에 있던 물들이 집어넣은 유수의 압력에 의해서 따라 올라와서 물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목말라도 그 한 바가지 물을 나눠 먹으면 백 몇 명이서 먹겠다고 싸우다가 다 쏟고 말아, 그거 먹지 말고 그걸 부어야지 그리고 그걸 펌프질 하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시냐고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 사람들에게 이 시간에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건 뭐냐 하면 용도가 불분명해서 그래. 은혜를 구하는데 용도가 불분명해. 용도가 불분명하면 절실해 져요? 절실해지지 않아요? 아니 누구든지 돈이 안 필요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러나 빚에 몰리는 사람은 너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죠? 은혜를 구하는데 용도가 없어, 용도가 불분명해. 그래서 입에 달렸어 ‘하나님 은혜를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은혜는 자기만족이고 평안이고 감동받은 느낌입니다. 그것은 은혜의 목적이 아니야. 우리의 마음과 우리 자신은 은혜의 최종 소비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목적 없이 기도하니까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도 은혜가 안 오는 것입니다. 그거 백날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입만 아프지. 응답 안 됩니다.
또 그 사람에게 은혜를 줘서 뭐 하겠어요? 쓸모도 없는 사람에게 왜 은혜를 주시겠어요?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그러면 확실하게 금주에 은혜를 받는 비결을 알려 드릴게요. 그럼 어떻게? 용도를 정하세요. 용도를. 그 대신 은혜를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은 그 은혜의 용도가 아닙니다. ‘주님, 오늘 아침에 은혜를 부어주셔서 화장 예쁘게 되게 해 주세요.’ 그런 건 은혜가 없어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번 추석에 시골에 내려갑니다. 우리 가족들에게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며 친절하게 섬겨서 마지막에 예수의 복음을 전할 때 우리 가족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옵소서.’ 그거는 정말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고 가봐, 그러면 그렇게 가족들을 섬길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할 용기가 생겨나요.
그러니까 뭐입니다. 전투하는 군인에게 탄약 배급하지 탈영 나온 군인에게 총도 뺐어야 해. 반드시 사고 친다고, 당연하지 않겠어요? 여러분이 만약에 군대에 지휘관이라면 탈영 나가는 애, 오락회 가려고 하는 애한테 실탄 지급해 주겠어요? 놓고 가라고 하지. 수건돌리기 하는데 총이 뭐가 필요하냐? 그럼 어떻게 합니다. 의무를 정해요, 의무. 여러분에게 명백히 주어진 의무인데 안 하는고 있는 것 있죠? 주님이 분명히 여러분에게 주신 의무인데 게을리 하고 있는 거 있죠. 마지못해서 하고 있거나 아니면 포기해 버린 그런 일들 있죠. 그걸 정합니다. 목사님 그거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데요? 그러니까 그게 나쁜 것입니다. 그게 부패한 것입니다. 의무는 하기 싫고, 놀고 싶고, 게기고 싶고, 자기 맘대로 살고 싶은 그것이 바로 그게 바로 하나님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의무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의무가 마음에 명료하게 새겨질 때 정말 하나님 앞에 내 힘으로는 도저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요?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셔야 된다는 사모함으로 목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렇게 간절하게 부르짖게 되면 그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렇게 주일에 와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가면 그거는 펌프에 집어넣는 한 바가지의 물입니다. 그거를 여러분의 삶 속에서 도전을 받은 것을 부지런히 펌프질을 해서 예배에 와서 다음 예배시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서 열심히 말씀 가까이 하고, 열렬히 기도하고, 틈틈이 시간 내서 영혼들에게 전도하고 가족들 돌아보고 지체들 섬기고, 그렇게 전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와서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이 다시 그를 은혜로 채워주시는 그게 그리스도인의 유통하는 삶이야.
III. 기도를 통해 역사하심
그런데 그런 은혜의 놀라운 공급들이 기도를 통해서 역사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우리를 좀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쫓지 못해서 우왕좌왕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어요. 그랬더니 그 아비가 얘기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데리고 갔는데 못 고쳐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무엇을 하실 수 있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십시오.” 그랬더니 예수님이 유명한 말씀을 하셨어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것은 간접적으로 이 아이를 귀신들린 상태에서 고쳐주지 못한 이유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이잖아요. 이 대상이 누구인지는 궁금합니다. 그런데 아마 제 생각에는 제자들도 포함되고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는 이 병든 아이의 아버지도 해당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더니 상황이 다 종료된 다음에 사람들이 다 간 다음에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이 바뀌는 것입니다. ‘기도 안 해서 그렇다’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둘 사이에 보이는 모순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거기에 있는 답이 누가복음에서 기도의 장에서 등장합니다. 여러분은 누가복음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불의한 재판장과 억울한 과부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재판장은 불의했지만 억울한 과부가 쉼 없이 가서 매달렸더니 재판장이 나는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이 여자가 나를 하도 괴롭게 하니 결국 올바로 판결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이랬으니까 너희도 하나님 앞에 밤이나 낮이나 매달려라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이에요? 기도하는 믿음이죠.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로서 화란에서 이름을 떨쳤던 하나님의 사람 기스베르투스 뵈티우스(Gisbertus Voetius)는 ‘하나님을 향한 내적인 경건의 최고의 외적인 실천은 간절한 기도다’ 라고 말입니다. 간절한 기도, 나는 그 사람 아무리 무지하고 배우지 못했고 또 그 사람이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 사람을 높이고 싶습니다. 죄 짓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매달리는 신앙이 죄 안 짓고 하나님 앞에 반역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기 때문이죠.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의 내적인 믿음의 최고의 표현, 혹은 최고의 증거가 간절하고 쉽게 굴복하지 않는 기도생활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너희들이 이 정도의 일을 감당하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은 은혜를 받아서 강한 능력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지 너희가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이 모인다고 교회가 되는 게 아니야, 그게 기도의 끈이 거미줄처럼 막 엉겨서 영적인 연대를 이루어야 됩니다. 이런 교회는 마귀가 넘볼 수가 없어요. 몇 사람은 깨어서 기도하면서 성벽을 지키고 화살을 맞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 안에 둘러앉아서 화투놀이를 하고 있다면 그 성이 무너질 날은 얼마 남지 않은 게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좀 진실하고, 진지하고, 그리고 간절해야죠.
(찬양)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IV. 결론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은 자기의 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은 능력의 사람으로 서서히 세워주십니다. 광야와 같은 빈들에서 주님 한 분을 우러러 보며 어두워져 가는 세상을 가슴에 품고 빛들로 나타나기를 갈망하면서 주님의 이름 하나에 목숨을 걸고, 주님의 명예를 위해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한 시대에 태어나서 이 시대의 보편 교회를 끌어안고, 그리고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돌보았을 영혼들을 싸매고 돌보며 사셨어요.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늘의 능력이 필요하고, 기도 없이는 이런 능력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에 지고 물러가는 황폐한 신앙생활의 한 복판에는 기도가 사라진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합니다. 기도하셔야 됩니다. 두 세 사람이 만나면 기도하자고 권하십시오. 그리고 서너 명이 만나도 기도하자고 권면하십시오. 지금 우리가 춤추고 노래할 때가 아니라 가슴을 찢고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해야 될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없는 그 하늘의 신령한 능력을 교회에 가득 채우고 탈영했던 군인 같은 교인들이 모두 단정하게 다시 복귀하여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 다시 태어나 영적인 전쟁에 헌신할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이 먼저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5.기도, 강한 영혼으로 사는 길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시 138:3).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전형적인 찬송시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무엇인가 신앙의 깊은 감격을 느끼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아마도 이 찬송의 이유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기도의 한 경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이 본문입니다.
II. 기도의 두 가지 유익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시인은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기도생활의 두 가지 유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A. 응답을 받음
야고보 선생은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이 있고 주님은 모든 일들을 이루실 수 있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시면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가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을 향한 경외와 의존의 가장 훌륭한 표를 기도로 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징벌하시기로 결정하신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만들었습니다. 일은 바꾸시지만 뜻은 돌이킴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뜻은 일정하시만 사람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뜻이 펼쳐지도록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로 나라의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고,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하였고, 핍박과 고난에서 이기기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사실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생애는 기도 응답으로 사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심에도 당신에게 필요하고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방편으로 기도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수많은 기도 응답을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것을 자신이 아시고 또 모든 사람에게 알 수 있도록 그렇게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속사는 특별히 신약 성경에서 기도를 통해서 줄로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이후에 인간을 구속할 성령이 오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모여 기도하는 작은 무리의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서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축복이라고 굳게 믿던 때에 사실은 모든 이방인도 그렇게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을 기도하는 베드로와 그리고 기도하는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고넬료의 이 기도시간과 베드로의 기도시간이 일치했고, 두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성령은 이방의 세계에 물 붓듯 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전개입니다.
우리 주위에 산적해 있는 많은 문제들은 사실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라면 우리 가정과 나 개인은 물론이고 교회와 조국 교회, 그리고 나라 안에 있는 많은 문제들은 이미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 기도를 믿음과 관련해서 자주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세에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 믿음의 정체도 바로 낙망치 않고 깨어서 기도하는 믿음이었고, 사도 베드로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이 따로 있다고 말했을 때 그것도 깨어서 기도하는 것이었고, 또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간절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은 응답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만약에 기도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의 절대자이고 주관자일 뿐 실제 우리 삶 속에서 직접 관련을 맺고 있는 하나님으로서는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주님이 매 순간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기도하지 않던 사람은 운이 좋았다고 부지불식간에 입술로 말하지만, 기도했던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을 찬송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우리들이 고민하는 것, 그것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실제의 기도에 바칠 때 근심과 염려로 상했던 우리의 마음은 기쁨과 감격에 가득 차게 될 것이고 그리고 번뇌하며 방황하던 우리의 삶은 분명한 푯대를 향해 걸어가는 당당한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문제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문제 옆에 바로 문제에 대한 해결이 있고, 짧은 거리이지만 사람들이 문제 옆에 있는 해결의 열쇠를 찾지 못하는 것은 그 문제와 해결 사이에 기도라고 하는 한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막막한 문제도 바로 그 옆에서 열쇠를 찾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문제가 문제를 낳고, 문제가 또 문제를 낳을 뿐 어디에서도 해결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불신자들의 무신론이 아니라 신자들의 무신론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을 신뢰하고 의존하며 산다는 가장 확실한 신앙의 표현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동의할 뿐 아니라 자신의 온 존재를 다 실어서 주님이 말씀하셨고 약속하신 것이 옳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렇게 간구하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신다는 것에 대한 실천적인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실천적인 무신론자가 됩니다. 이런 저런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고개를 끄덕거릴지는 모르지만 그 분의 살아계심을 온 몸으로 전율하듯 느끼며 그 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적게 깨달아도 많이 기도하는 사람들은 깨달은 그 말씀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지만, 많이 깨달아도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그 말씀의 지식은 지식의 창고에 드러누워서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체험적으로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거기에 자신을 적용하여 치열하게 살고자 하지만 지성의 창고에 궤짝처럼 쌓아둔 그 말씀은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데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실천하는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고, 다가오는 여러분의 자녀들의 세대에 밀려올 그 수많은 다원주의와 그리고 무종교주의, 무신론,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쾌락주의와 정욕주의를 이겨낼 수 있는 놀라운 힘도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을 통해서 기도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영을 받아 기도의 즐거움과 달콤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자녀들은 여러분이 죽은 후에도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살 것입니다.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하나님 없는 증거보다는 말씀과 기도 속에서 생생하게 자신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신뢰하며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설교만 듣지 말고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아멘
B. 영혼을 강하게 하심
두 번째는 기도의 또 한 가지 유익이 있는데 시인은 그것을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도대체 영혼이 강해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기에 나와 있는 영혼이라고 하는 이 구약의 단어는 오늘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영혼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 정신, 마음 이 모든 것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영혼이 강하다는 마음과 정신의 강함 지도 포함하는 그런 종류의 영적인 강인함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강함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강함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하나만 있어서는 그것이 강한지 약한지 알지 못합니다. 유리는 쇠보다 더 단단합니다. 그러나 맞부딪쳐 보면 유리는 쇠보다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강함이라고 하는 것은 힘과 힘이 맞부딪쳐 겨룰 때에 상대를 꺾고 누를 수 있는 그러한 힘을 가리켜서 강함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100m 달리기와 같지를 않고 49km가 넘는 마라톤, 혹은 평생을 달려야 하는 장거리 경주입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수시로 변합니다.
오늘 이 시를 쓰고 있는 이 다윗은 구약에서 정말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정신이 항상 강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강했던 적도 있고, 약했던 적도 있고, 추했던 적도 있고, 아름다웠던 적도 있습니다. 시인은 다른 사람 비교할 수 없는 영혼의 아름다움과 정신의 강인함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소망자체를 하나님께만 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한나라의 임금을 삼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주 비천한 종으로서 자기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 한 분을 우러렀습니다. 올곧은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 앞에 늘 깨뜨려지기를 잘하며 자기의 심령의 산제사를 하나님께 올렸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지 남에게서 배우고 들은 학습된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우주와 세계와 인간과 영혼과 역사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 포괄적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던 구약 최고의 철학자였습니다. 그러면서 신학자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술가였습니다. 그러면서 정치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부패한 아담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그가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여 주님이 보시기에 심히 악한 사람이 된 적도 있었습니다. 추루하고 더러워진 영혼으로 몸부림치며 울던 지극히 연약한 성도들 중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이때에는 그의 영혼이 약하였습니다. 정신과 모든 마음이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연약해졌을 때에 그는 이렇게 범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혼의 강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정신과 마음의 위대한 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한 의지의 크기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에게는 비록 그가 지금 악을 행하고 있다 할지라도 저 마음 한 구석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진실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은 단일한 의지로 죄를 짓고, 믿는 사람은 죄를 지을 때조차도 복합적인 의지로 죄를 지은 것이니 하나는 육체의 욕심대로 살고자 하는 죄 된 의지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신령한 의지입니다.
영혼이 강하다고 하는 것은 이런 육적인 의지를 영적인 의지로 누르고 이긴 영혼의 크기, 선한 의지의 크기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지만 모든 사람의 아름다움이 동일한 것이 아니요, 모든 사람의 가치가 모두 다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아름다움은 그의 사회적 지위나 외모, 젊음이나 늙음, 육체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영혼에 지니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천한 직업에 종사하고, 사람들이 멸시한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커다란 의지와 크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매우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한국의 유명한 재벌이 생일 파티를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부하 직원들이 조촐한 생일파티를 열면서 그 생일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함께 즐기기 위해서 우리로 말하자면 축하연 순서를 마련한 것입니다. 사회는 방송계에서 가장 유명한 누구를 부르고, 또 코미디는 누구를 부르고 이렇게 해서 전화 한 통씩 하면서 ‘우리 회장님이 당신이 회장님 생신에 오셔서 이렇게 이렇게 해 주시기를 바란답니다’ 그러니까 모두 다 영광으로 여기고 쏜살같이 달려왔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중가요 가수한테 전화를 해서 ‘우리 회장님이 당신 노래를 좋아하시니 생신에 오셔서 노래한 곡 불러주십시오’ 그랬더니 이 대중가수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대중가수는 대중 앞에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요, 개인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딴따라가 되는 것입니다.’ 딸깍.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 사람에 대해서 정말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대면 회장,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 사람과 인연을 가져서 미래에 나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난다하는 사람들이 다 달려갈 때 이 사람에게는 비록 대중가수지만 대중가수로서의 가치와 그리고 자기가 살아야 될 본분으로서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것이 한 대중가요 가수나 한 사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해 그런 올곧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으며 하나님 자신에게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것이 바로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그리고 인간 존재의 가치인 것입니다. 태어나서 이런 저런 직업에 종사하고 때로는 부유하게 가난하게 혹은 예쁘게 태어나서, 예쁘게 살다가 죽든지 아니면 못생기게 태어났는데 돈 많은 부모를 만나서 예쁘게 살다가 죽든지 그거는 하나의 삶의 양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본질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호박에다가 매직을 긋는다고 해서 수박이 되는 것도 아니고, 수박의 까만 줄을 지운다고 해서 호박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영혼의 강함입니다.
한번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보디발은 애굽의 저명인사였고, 왕 아래에서 왕을 호위하며 권력을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많은 가문의 영광, 애굽의 영광을 바라보지 아니하시고 그 집에서 마당이나 쓸고 있었을 작은 히브리 종 요셉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종 때문에 하나님이 보디발의 집에 큰 복을 베푸시고, 애굽에 복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보는 시각과 사람이 사람을 보는 시각의 차이인 것입니다.
시인은 약해질 때도 있고, 강해질 때도 있었는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영혼을 강하게 하셨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강하게 하셨습니까? 영혼을 장려하심으로서 강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단어인데 ‘타르히벤히’ 라고 하는 히브리 동사입니다. 라합에서 왔다고 보는데 그 뜻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근데 성경에서는 이것을 ‘거칠다, 무섭다, 거칠게 다루다’ 이런 형태로 번역을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더니 연약했던 영혼이 강해졌는데 그 이유는 기도하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시인의 마음에 개입하셔서 영혼에 개입하셔서 그것들을 막 움직여 놓고 역사하셔서 튼튼하게 만드셨다 그런 뜻입니다. 어떻게 튼튼하게 하시냐면 간절히 기도할 때에는 우리가 원하는 바는 기도하는 것을 얻으려고 우리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거지. 기도하는 것을 얻으려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부수적인 효과가 나타나는데 그 부수적인 효과가 그 얻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땀을 흘리는 것은 인체에 좋습니까? 나쁩니까? 참 좋은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죠. 그렇죠? 그런데 자 어떤 사람이 이제 밧줄을 타고 막 힘겹게 암벽을 오르면서 등산을 합니다. 그러면 겨울인데도 땀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그죠? 막 몸부림치면서 올라갑니다. 그 사람의 땀을 채집을 하고, 사우나에서 그 들어가서 땀을 흘리는 그 사람의 이것을 채집을 합니다. 두 개를 비교를 했습니다. 학자들이. 그랬더니 사우나에서 흘린 땀은 거의 맹물에 가까워요. 여러분 목욕한번만 하면 500g 정도 빠지거든요. 근데 살이 빠졌다고 생각하는데 물이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목욕하고 나면 갈증이 와요. 물 두 컵 먹으면 원위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등산을 하고 밧줄을 타고 오르면서 땀을 막 쏟았던 사람은 땀 흘리려고 산을 오르는 게 아닙니다. 목표는 뭐예요? 정상에 가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흐르는 그 땀을 분석을 해 보니까 온갖 중금속, 노폐물, 그런 것들이 나오는데 그렇게 운동하면서 흘리는 이 땀은 사실 소변보다 더 성분이 나빠요. 그러니까 땀을 그렇게 쏟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속에서 전혀 분리가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을 가만 놔두고, 어떻게 그 피 속에, 살 속에, 그 체액 속에 중금속이나 성분들이 막 녹아들어가 있는데 그걸 어떻게 구별해 낼 수 있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사우나에서 가만히 있으면 물만 나오고 오래있으면 북어처럼 되겠죠. 근데 막 운동을 하면 그 속에서 신기하게 분리가 되지 않던 중금속과 노폐물들이 신기하게 물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막 열심히 운동하면 땀구멍으로 피가 쏟아지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피는 그대로 남고 그 물을 타고 그 중금속과 노폐물들을 막 계속 토해내가지고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매번 산에 올라간다고 칩시다. 그래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운동을 합니다. 산꼭대기에 돈이 있어요? 밥이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사실 산을 천 번을 올랐다 그리고 그가 산꼭대기에서 얻은 게 뭐가 있을까요? 등산 많이 한 사람이 산꼭대기에만 있는 뭘 좀 가지고 왔습디까? 아니잖아요. 그거는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별로 없을지 모르지만 뭐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광경을 봤겠죠. 그렇지만 그 등산하기 위해서 올라가서 흘린 그 땀 속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노폐물 때문에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복이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그 간절한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순수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실지 모르겠는데 인도의 썬다씽이라는 성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 히말라야 산을 이제 어느 산을 이렇게 지나가게 되었답니다. 지나가게 되었는데 뭐, 그 산 전체를 넘는 것은 아니겠죠 어쨋든. 오후에 출발해서 산을 넘어야 했는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데 산길 가던 어떤 노인네가 다리를 다쳤는지 걷지를 못하고 주저앉아서 자기 좀 살려달라고 그렇게 애원을 하는데 사람들이 그냥 지나가더래요. 왜냐하면 그 사람을 엎고 자기 몸 하나도 가누지도 못하는데 그렇게 하면 같이 얼어 죽지 않겠어요? 이 썬다씽이 은혜를 받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니까 그 노인네를 엎고, 그리고 산을 넘게 되었답니다. 막 엄청난 추위가 몰아닥치고 눈보라가 치게 되었는데 그래서 한참 갔는데 그 도움을 뿌리치고 걸어가던 사람들은 얼어 죽었고, 썬다씽의 몸에서는 땀이 계속 흐르더라는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효과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기도가 이렇게 영혼을 강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오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비가 많이 쏟아져도 뚜껑을 닫아놓고 물을 아무리 비가 많이 쏟아져도 그 항아리 안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뚜껑을 열어야죠.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러분 교회에서 종종 보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굉장히 예수 오래 믿으신 분이고, 또 자기가 굉장히 존경했었는데 보면 어떤 결정적인 지점에 있어서 신앙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 있죠. 또 물질도 바치고 굉장히 헌신적으로 일하는데 어느 순간 일하다가 보면 하나님 보다는 사람의 뜻에 치우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혹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봉사하고 굉장히 헌신적인 줄 알았는데 자기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을 때에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 뜻보다는 자신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굉장히 헌신적이고 열심히 일했는데 자기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 때는 혈기를 부리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뭘 보여 주냐 하면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 혹은 그 사람이 하고 있는 말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관련을 맺고 계신 하나님만이 그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석이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들은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일하면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반석이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들은 배짱에 맞을 때에는 집을 팔정도로 헌신적이지만 베짱이 틀어지면 하나님과도 맞짱을 뜰 수 있는 담대한 용기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제 좋은 신앙생활이지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오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 속에 스며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섬기든지 기도하든지 예배하든지 마음을 짜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러한 내적 투쟁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III. 결론
여러분 굴러다니는 걸레 보면 물기가 없는 것 같아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양손을 꽉 쥐고 뒤틀어 짜면 그러면 물이 나옵니다. 더욱이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건조한 것처럼 보이는 걸레에서 더러운 물들이 쏟아지지 않습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이 바른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의 비췸을 받고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이 오그라들고 펼쳐지는 운동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은 피의 펌프질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그 속에서 보통 때에는 결코 다뤄지지 않았던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올바른 것들과 바르지 않은 것들, 나의 정욕과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거룩한 욕망, 이런 것들 사이에 분리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런 간절하게 마음을 드리는 기도 속에서만 자신의 마음이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나와서 근엄한 척 앉아서 지그시 눈을 감고 예배를 드리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객관적으로 스쳐가고 기껏해야 거기에 대해서 고개를 끄떡거리며 지식적인 동의나 표하고, 그리고 말씀을 들어도 그렇게 말씀이 가슴을 때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신을 짜서 바치는 간절한 기도 같은 것 없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다부진 각오 같은 것, 결단 같은 것 존재하지 않는데 그 마음속에서 어떻게 이런 내적인 투쟁이 있는 기도가 나올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사우나에 가서 땀 빼는 사람들입니다. 계속 땀이 나와요. 왜 안 나오겠어요? 줄줄 줄줄 흐르죠. 맹물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짜서 바치는 간절함이 없이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아니면 새벽마다 나와서 그렇게 기도하는 시늉을 하는 것보다는 단 10분이라도 마음을 진실하게 짜서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찢어질 듯이 통곡하고 탄식하는 그 기도가 오히려 그 사람을 더 많이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신앙의 견고함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콘크리트 위에 전봇대 꽂아놓은 걸 가리켜서 견고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소 잡아먹는 귀신처럼 눌어붙어 앉아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견고함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견고함은 생명령의 견고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면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서 자신이 깨뜨려지고, 다시 실수할지라도 뉘우치고, 그리고 다시 또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지라도 불순종한 것을 회개하고 그렇게 불순종하는 자신을 미워하는 자기 정죄와 자기 심판과 자기 처벌의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간절함이 없이 어떻게 우리들이 변화될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세월이 흘러서 그 사람이 나이가 들어 점잖은 사람으로 변해가고 자식들을 낳고 교회에서는 이런 저런 직분을 맡고 교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지라도 변한 것은 변한 것이고, 안 변한 것은 안 변한 것입니다.
시인이 얼마나 간절하게 부르짖었으면, 하나님은 자기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거칠게 다루어 그래서 강한 영혼이 되게 하셨나이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겠습니까? 보십시오. 한 때에는 주님만을 위해서 살던 사람도, 또 어떤 때에는 하나님 앞에 넘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주님을 위해 정말 충성스러웠던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는 주님 앞에 아주 불충성한 사람으로 돌아서기도 합니다. 영혼의 약함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강한 영혼으로 살아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족을 여러분의 강한 영혼으로 붙들어 주고, 주님이 맡기신 그 일들을 시련과 고난, 환란,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무관심 속에서도 선한 뜻을 하나님 앞에 품고 충성되게 주님 한 분 앞에서 살아가는 모든 비결은 이 영혼의 강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를 실천해서 지금은 약한 영혼이지만 강한 영혼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6.대제사장의 기도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신약의 레위기라고 불리워집니다. 그만큼 제사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나오고,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서신서가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여진 편지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것입니다. 박해 받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영원한 구속 사건을 설명해 주는 것은 핍박 받는 상황 속에서 커다란 위로였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그만이 일 년에 한 차례씩 오직 지극히 거룩한 성소인 지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임무는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는 언제나 임시적이었습니다. 잠시는 하나님과 교통하지만 다시 죄를 범하고 나면 교제가 막히는 그러한 임시방편적인 교제의 통로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이런 한시적인 제사와 교통이 아니라 영원히 단번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여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II.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오늘 이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어떤 한 단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육체에 계실 때에 바로 이런 방식의 기도생활로 당신의 삶을 영위하셨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신 그 분이, 창조주이신 그 분이 구차하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늘에 계셔서 천군과 천사들의 경배를 한 몸에 받으시고, 성도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셔야할 그 분이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은 오직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로 그 분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한 모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계시되기는 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생생한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 오셨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그리고 그 능력과 그 거룩하심, 모든 당신의 속성들을 이 세계에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예전에는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이제는 그의 성육신 안에서 그 하나님을 뵈올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그 때에 한 참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참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할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관련을 맺기 위해서는 참 하나님이셔야 했고,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참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었기에 죽으실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의 죽음은 죄의 형벌이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는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구원하여야 할 이 세상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신 대신적인 형벌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기에 죽을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육신 하신 그 분은 온 세계와 그리고 열방 중에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이셨지만, 사람들은 그 분이 그렇게 아름다운 분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건만 사람들은 그를 미워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핍박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대적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어떤 나쁜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탐하는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를 다투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그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미워하고 박해하였을까요? 이유는 오직 하나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진리를 가르치러 오셨지만 그들은 진리보다는 거짓을 사랑했습니다. 주님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들이 정말 사랑한 것은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시기에 미움을 받았고, 빛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계셨을 때의 삶이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묵상은 모든 건전한 기독교적 경건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창조된 사물 안에 당신의 존재와 성품을 아는 희미한 빛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그 빛은 모두 희미한 그림자일 뿐입니다. 찬란하게 비치는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의 광채는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안에서 발견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배우는 하나님이 우리가 직접 배우는 하나님보다 가장 탁월하고 훌륭한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직접 배우는 세계 보다는 그리스도를 통해 배우는 세계가 가장 아름다운 세계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무리 탐구하여도 우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볼 때에 우리가 누구인가는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였습니다.
III. 심한 통곡과 눈물로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렇게 수욕된 삶을 사시는 것도 우리에게는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인데 오늘 성경은 그 분이 이 세상을 사시면서 살았던 독특한 삶의 방식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분이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사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하나님 되심을 사람 되심 아래 감추셨습니다. 본질은 하나님이셨지만 마치 하나님이 아니고 지극히 연약한 한 인간인 것처럼 이 세상에서 그렇게 겸손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였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무엇을 하든지 바로 이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강력하게 눈물로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를 닮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모든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 예수의 마음을 닮도록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그 예수의 마음이 오늘 이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실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셨지만 하나님이셨습니다.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회개할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에 자신이 무능하다고 비관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분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이 세상에 땅 끝에서부터 땅 끝에 이르기까지 만민들이 경배와 영광을 돌려야 마땅했건만 주님은 오히려 멸시와 욕을 받으셨습니다. 가장 연약한 자처럼 어린 아이처럼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면서 당신의 짧은 지상 생애를 점철하여 가셨던 것입니다.
A. 우리를 위해 탄원하시는 기도
그러면 그렇게 죄도 없으시고, 무능하지도 않으신 그 분이 이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것은 우리를 위해 탄원하신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그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는 바로 당신이 당하게 될 이 십자가의 잔을 옮겨달라는 그 기도 때문이었다고 해석을 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당신에게 지워져야 할 이 십자가의 잔을 치워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세 번의 간절한 기도 후에 하나님 앞에 ‘하오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로 마무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이 대제사장의 기도를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리셨을 것이라고 우리는 근거 있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한 이 기도의 내용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고 나면 남겨질 사랑하는 제자들과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면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면 그때는 대부분 우리를 위한 기도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정말 기도의 은혜에 강력하게 사로잡혔을 그 때에는 우리는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가장 순수해지는 때가 두 순간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닫고 통렬하게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우는 그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통절히 기도할 그때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진정 행복해 질 수 있다면 그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가 그 많은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면, 자신은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아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남을 위한 기도의 순간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날마다 눌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의 골육지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에게로부터 저주를 받아 끊어질 지라도 골육지친 중 몇이라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바라는 바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선교적인 기도는 위대한 선지자의 비조 모세의 기도를 생각나게 만듭니다. 즉,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버리시려거든 차라리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주시옵소서 라고 백성들을 위해 통렬히 탄원하였던 위대한 사람 모세의 기도를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삼위일체의 가장 아름다운 모상이 이 지상에 세계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영혼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지성과 사랑과 의지의 이 아름다운 작용은 삼위일체의 아름다운 교통의 훌륭한 모상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아내와 남편의 결합,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과 부모들의 아름다운 결합이 이 세상에 하나님이 남겨두신 두 번째 아름다운 삼위일체 교통의 모상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남겨두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여 지체로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 속에 아름다운 영적인 교통의 연합이 이루어져 있고, 그래서 우리의 중생은 우리 개별적인 중생이 아니라 공동체 속으로의 중생인 것입니다.
B. 세상과 맞서는 기도
예수 믿고 거듭나는 그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서 주님께 열납 되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심한 통곡과 눈물로 우리의 사랑하는 지체들을 위해 그렇게 기도하고, 남을 위해서 그렇게 눈물로 부르짖을 수 있다면,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위해 우리가 그렇게 간구할 수 있다면,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비회심자들을 위해 그렇게 통절하게 그들을 위해 간구할 수 있다면 이 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가 되겠습니까?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관계는 거미줄 같은 영적인 연관으로 아름답게 물들 것이고, 그 통로를 통해 예수의 생명과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그리고 기도의 은혜는 강물처럼 흐르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과 뚜렷이 구별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 성도들의 교통 아래 충만하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주일이면 한 번씩 한 장소에 모이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셨던 참된 교회의 모습을 구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깊은 영적인 연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허락하신 이 영적인 연결이 실질적으로 작용하고 역사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 안에서의 교제이고, 기도 안에서의 교통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면밀히 살펴볼 때 그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하나님의 세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와 그리고 성령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기도는 성령의 역사를, 말씀의 은혜를 한데 모으는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역사가 나타났습니까? 교회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위대하게 선포되어 교회를 깨울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변화시켰던 놀라운 일들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는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두운 시대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불같이 타오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기도가 있는 그곳에 성령은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죽은 자와 같은 교회를 일깨우시고 그리고 시체와 마른 뼈와 같은 인간들을 일깨우셔서 하나님의 용사로 다시 태어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침묵만이 감돌던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깃들도록 만들어 준 곳도 바로 기도가 있는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가장 연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어린 아이처럼 아버지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과 깊은 밤은 그 분을 위한 기도 시간으로 따로 떼어져 있었고, 기도할 때마다 주님은 죄 없으셨지만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오셨고, 주님은 강건하셨지만 병든 자들을 위해 통곡하셨고, 주님은 부유하셨고 가난한 삶을 기꺼이 선택하셨으나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을 위해 눈물로 아버지 앞에 양식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이유이고, 나머지 삶 속에서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의 소원을 올리셨던 그 이유였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이제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여야 하겠습니까? 물론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되겠습니다마는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계셨더라면 여전히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하셨을 그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끌어안고 기도해야 하고, 아직까지도 주님의 사랑 안에 들어오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희생의 즐거움을 안 사람들은 기도의 비밀을 어느 정도 터득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할 수가 없고,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아도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혼란스러운 때를 경험합니다. 그때 마음을 풀어버리십시오. 그리고 남을 위해 먼저 기도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다 보면 비로소 자신의 영혼의 불쌍한 처지에 눈을 뜨게 됩니다. 남의 필요한 것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다보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의 이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는 세상과 맞서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셨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 굴복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이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위대한 영적인 힘을 기도생활 속에서 공급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금식기도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권세 있게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연약한 자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모두 세상과 맞서시기 위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악하게 핍박 할수록 주님은 사랑으로 그 세상과 맞서시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하고 간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수가 너희를 핍박할 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당신의 체험 속에서 우러나온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기도했더라면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을 너무나 쉽게 그 환경 앞에 무릎을 꿇고 좌절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한다고 다짐하고 영광이 있고 기쁨이 있을 때에는 즐겨 봉사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어려움이 올 때에는 우리는 너무나 쉽게 무릎을 꿇고 그 환경에 굴복하고 맙니다. 그래서 처음 의지는 선하였으나 그 선한 의지의 열매는 매우 드물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력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결단 같은 것들이 우리를 이기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은 이것이니 너희의 믿음이니라 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이 세상 속에서 찾는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그 힘은 이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바로 그렇게 세상과 맞서서 이기게 하는 하늘 능력을 공급받는 위대한 통로란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이고,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을 굳게 신뢰하고 내가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가졌을 때에는 별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깨닫게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납니다. 온유한 자에게는 위로를 주시고, 청결한 자에게는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핍박 받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위로를 주셨으나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는 천국 그 자체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의인보다는 오히려 겸손한 죄인 가까이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날 만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계시고, 중심이 통회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 기도는 바로 이렇게 통회하는 마음, 상한 심령에서 울려 나오는 하늘의 아름다운 가락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기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거의 기도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현대의 삶이 복잡하고 바쁘다는 환경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현실은 마지막 때가 될 수록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만 바쳐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제껏 믿음 생활을 해 온 지난날들을 돌아보십시오. 언젠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지금과는 비교될 수 없는 열심으로 어린 아이처럼 기도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탁월한 친밀함으로 보좌 앞에 나아가 아버지께 그대들의 마음을 모두 쏟아놓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언제였습니까? 그리고 그때 그 기도는 얼마나 달콤했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생애 전체를 이런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시련을 당하여 막막하지만, 무릎을 꿇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으며 기도하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그 큰 고통이 우리를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이끄는 도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그렇게 멀리 계시던 주님이 사실은 가장 가까운데 계시고 주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많은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상한 심령 가까이에 계신 주님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우리 주님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그 분의 생애는 가난하고 병든 자, 무지한 자를 위해 흘리신 노역의 연대기였고, 그래서 그 분의 생애는 땀의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홀로 계실 때에는 그들을 위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눈물의 생애였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피의 생애였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 그 피 묻은 십자가의 흔적을 기억해 보십시오. 죽으신 후에도 악한 병정들이 옆구리에 나온 그 창으로 허파를 통과하고 심장을 터트려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신 그런 생애였습니다. 아들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그 보혈로 당신의 성소로 들어오게 하사 모든 구원받을 자를 용서해 주시기 전에 먼저 아들의 땀과 그리고 아들의 눈물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오늘은 참된 복음이 점차로 잊혀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그 복을 이 세상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참된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차례이다 라는 명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불굴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본받지 말라”. 사도 요한도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예배를 드리라”고 말입니다. 어디서 그럴 수 있는 힘이 나옵니까?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힘주시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안팎으로 우겨 쌓여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죄의 부패성들이 잔존하고 있고,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죄 된 세상입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공중 권세 잡은 자들과 악의 영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거룩한 힘을 공급받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굴복하지 말고 기도로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대들을 위해 기도하시던 주님을 기억하시면서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IV. 전능하신 하나님께
성경은 말합니다. 바로 그분이 기도하셨던 그 기도의 대상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고 말입니다.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해 내실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원수들에게 박해를 당할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를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 원수들에게 끌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반을 당하며 끌려가실 때, 프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에서 벗기신 채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에 맞을 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실 때, 나무에 그 분이 못 박혀 높이 매달리실 때 도대체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도대체 예수님은 어디서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읽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절망의 기도였고,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희망을 앗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믿으셨습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계획,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이 모든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신 어린 양으로 형벌을 당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그 수치스런 죽음에서 건져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게 하실 것을 예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잠시 당하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고 영광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우리가 건성으로 믿는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부패성 때문에 고민해야 합니까? 아직 드러나지도 않은 죄의 가능성이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본성의 부패성 때문에 우리들이 슬퍼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셨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예수님의 사도들은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거절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제나 복음이 전파되는 그곳에 교회를 섬기는 그곳에 자랑스런 영광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의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그럴 정도까지 고생을 하였노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만약에 그냥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데로 나 좋은 데로 인생을 살았더라면 당할 이유가 없었던 고난이 주님을 섬기려고 결심할 때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기쁨도 있지만, 부끄러움과 그리고 그 고난이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는 내동댕이쳐지고 광야에 버려진 것같이 느껴져서 어디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고난의 지경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의 육신의 눈은 의심하여도 우리의 믿음의 눈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는 우리의 인생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애의 매 순간을 씨줄과 날줄 삼아서 당신의 베틀에 놓고 천을 짜듯이 나의 인생의 역사를 짜가고, 교회의 역사를 직조해 가시고, 세계의 역사를 그렇게 옷감처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시련을 당할 때 이것이 내 인생의 종착역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나의 인생을 붙들고 계시고, 교회를 붙들고 계시고, 이 세계의 역사를 붙들고 계시다는 삼위일체의 위대한 경륜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주님을 위해 부끄러운 고난을 당하고 난 후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동참할 것이라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미래에 이런 영광을 우리에게 주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내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는 그때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현재적인 부활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세상의 근심과 염려로 가득 찬 마음으로 예배당에 나와 무릎을 꿇었으나 기도가 끝난 후에는 우리의 영혼을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힘을 경험합니다. 기도가 우리를 이렇게 바꾸어 놓습니다. 기도가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킵니다. 기도가 우리의 환경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바꾸어 놓고 변화시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V.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에 관한 예기치 못한 진리를 전달해 줍니다. 그것은 이런 간절한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된 이유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고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를 종종 믿음이 결핍된 기도 혹은 간절하지 않은 기도 혹은 힘을 합하지 않은 기도 등등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응답되었다고만 말하지를 않고 그 기도 응답의 이유를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삶과 연결을 짓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경외하심의 삶입니다. 경외는 마음과 인격, 삶 전체를 어우르는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감정입니다. 지극히 높고 위대하시기 때문에 가까이 하기에 두려운 떨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께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 분께로 끌려가는 사랑,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이 바로 경외의 진수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를 우러르고, 그 분의 마음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 분의 간절한 기도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그렇게 주님이 기도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요한 서신의 기자와는 다르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동일한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 서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기뻐하시는 바를 행함으로 그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청교도는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는 삶을 능가할 수 없고, 삶은 기도를 넘어설 수 없다”고 말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삶을 위한 준비이고, 삶은 다음의 기도하기 위한 준비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삶과 기도는 순환관계에 있습니다. 열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만이 열렬히 기도할 수 있고,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만이 열렬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그가 엎드려 기도할 때 그 사람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삶은 기도에 묶이고 기도는 삶 안에 갇힙니다.
VI. 결론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의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여 정향되어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우러르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살리심을 얻었으니 이제 여러분의 몸과 마음,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구원해 주신 그 구원의 소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아직도 살아가셨을 그 일 뒤를 잇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남아계셨더라면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을 그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여러분이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위해 기도하고 간구함으로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7.실패를 숙명처럼 여기지 말라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눅 18:35-39).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시자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고,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고난에 대해 말씀을 하시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이때에 여리고에서 한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소경으로서 거지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을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II. 숙명같은 실패의 삶
우리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에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호소하며 동냥을 하던 소경인 이 거지를 통해서 우리는 숙명 같은 실패의 삶을 보게 됩니다. 모든 사지가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다 가엾지만, 그러나 특별히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더 많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판단을 하는 모든 기능 중에서 눈으로 보는 시각의 기능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죠. 어떻게 보면 이 소경은 아무 희망이 없는 삶을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아침마다 구걸을 해야 하는 장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그 길에까지 이끌려 나왔고, 또 혹은 지팡이로 두드리며 길을 걸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묻고, 묻고, 물어서 아침마다 여기에 당도하여 하루 동안에 구걸행위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언제부터 이 사람이 소경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 사람의 삶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길거리에 나와서 구걸을 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바랄 때에 그가 생각하는 큰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오늘은 동정심이 많은 부자를 만나서 다른 때보다도 좀 더 많은 돈을 동냥을 해서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좀 더 맛난 음식을 먹고, 따뜻하게 하루를 지내면 그에게 정말 다행스럽고 좋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사람의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하루는 행복할지 몰라도 다음날까지 계속되기 어려운 그런 종류의 행복이었기 때문이죠.
우리도 이렇게 실패를 운명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소경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아닌지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불행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불행과 좌절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인신매매 범들이 사람을 붙잡아다가 인신매매를 시키는 자신들의 이 일에 복종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좁은 공간에 가두고, 비참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짓밟아서 자기 스스로의 자존감을 모두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고, 그리고 자기가 이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모두 상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 실패한 삶의 처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시대 때에 노예를 만들던 방법을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원래의 노예 집안에 태어난 노예도 있었지만, 지체 높은 집안에 태어났지만 전쟁에 져서 포로로 끌려와서 노예가 되기도 하고, 혹은 자유인이면서 형벌을 받아서 노예로 감금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옷을 입혔지만 이 사람은 노예가 아닙니다. 그래서 노예를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역시 똑같이 자존감을 짓밟아 버리고 비참하게 폭력을 행사해서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떠한 희망도 갖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노예를 만드는 비결이었습니다. 이 소경이 바로 그런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 아무 희망도 없는 이 소경으로서 동냥을 하면서 사는 비참한 처지를 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오늘도 예배당에 나오고 이런 저런 행위로 하나님께 예배를 들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몸으로 이렇게 예배를 드려도 신앙인이 아니고, 만약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신의 실패한 삶에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복종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여러분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신앙인이 아닙니다. 자유로운 사람의 특징은 끊임없이 억압에 항거하고, 무엇이든지 그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사는 그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패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실패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절망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절망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절망 속에 있을 때에 한 두 번은 기회가 주어지듯이 오늘 이 불행한 소경에게도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많은 사람들의 지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소리치며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 귀찮다는 듯이 어떤 사람이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저 멀리서 오고 계시다’ 라고 말입니다. 그때 이 소경은 자신이 눈먼자로서 남의 푼돈이나 구걸하며 살아가는 이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로 자신의 소망을 피력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겉모습을 바꾸어 일시적인 고통의 증상을 치유해 주는 곳이 아니라 기독교는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Ⅲ. 소경의 부르짖은 기도
이 사람 소경은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이 간절한 부르짖음은 단지 자기를 이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환경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기도 속에서 절망을 극복하고 운명과 같은 실패의 삶에서 벗어난 세 가지 특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A.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 기도
우선 첫째는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짧은 성경 구절에서 두 번이나 온 힘을 다해서 부르짖는 소경의 간절한 탄원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소경이 오늘 처음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주위에 향수 냄새를 풍기며 돈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 같을 때 그는 틀림없이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처롭게 그들에게 동냥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을 때에 그것은 주님께 바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할 때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을 때에는 몇 푼의 돈을 바라는 것이었지만, 예수님께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을 때에는 동전 몇 푼을 바라고 예수님을 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소식을 듣고 동전을 한줌 옜다 하고 던져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그릇에 덜그럭 소리가 나도록 담아주었다면 그는 만족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구하는 것은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자신이 이 불행한 처지에서 벗어날지는 몰랐지만 그는 오늘 예수님께 돈을 좀 넉넉히 얻어서 오늘도 따뜻한 음식을 먹고, 편안한 데서 자고, 내일 다시 돈 벌러 나와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건고 나의 삶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고, 그리고 나는 실패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나를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 건져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숙명처럼 계속되던 실패 속에서 이 사람을 건져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서 공감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할 간절한 그런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수많은 문제들을 보면서도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떨쳐버릴 수가 없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보면서도 우리는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이 소경의 간절한 부르짖음 속에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아는 마음의 가난함이 있습니다.
흔히들 죄는 기도를 가로막는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회개하던 때에 분명히 죄가 있으니까 회개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통렬하게 주님 앞에 회개할 때 여러분의 죄가 기도를 가로막던가요? 오히려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죄가 기도의 불길을 지피는 나무토막 같은 역할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럼 무엇입니까? 문제는 죄가 기도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지 못하는 그 무지가 기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어도 그 죄가 얼마나 나쁜지를 알고 자신이 그런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비참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이 비참하고 불행한 처지는 무엇으로도 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오히려 그 죄는 기도에 불을 지피는 나무토막이 됩니다. 문제는 그것을 계속 붙들고 있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위대한 기도의 장 18장에 나오는 세리가 올라가서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요? 그는 실제로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가 기도를 많이 하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죄가 기도를 방해했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아는 가난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 한 분께 자신의 모든 마음을 모으고 아버지 앞에 간절히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가 가장 아름다운 때가 두 번 있습니다. 주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전 존재가 가득 찼을 때와 자신이 가난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통절하게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주님 앞에 매달리는 때입니다. 이 소경은 그렇게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의 가장 큰 방해꾼은 부요한 마음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씩씩하게 사는 사람들은 절대 기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당신 없이 용감하고 씩씩하게 사는 사람들을 다 싫어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며, 종이 상전의 손을,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라는 것처럼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들 가까이 계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이 상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께서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고, 심령에 통회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사람들입니다.
여유 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복으로 넘칠 때에는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부요해져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의 비참한 처지를 알지 못하고 결핍되어 있을 때에는 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과 그것을 바라는 불만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깨뜨려진 마음 가까이에 계시고, 부서진 마음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한 순간이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고요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얼마나 초라한지,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오셔서 이룬 이 구원의 계획을 통해 주시고 싶으셨던 그 풍성한 삶과 생명으로부터 자신이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생각하면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간절히 부르짖을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형식적인 기도일 수가 없고, 이 기도는 마음 중심에서 자기를 깨뜨리며 나오는 간구가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어린 아이일지라도 이렇게 깨어진 마음으로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부르짖는 이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B. 역경을 이긴 기도
두 번째는 이 기도는 역경을 이긴 기도였습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소문을 듣고 있었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큰 능력의 주님이시라는 소식도 들었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인자와 사랑에 넘쳐서 진리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이라는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 소경은 이제 이 기회가 자신에게 있어서 늘 오는 기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문맥으로 보아서 이 사람은 아마도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소망을 품은 사람이었던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빨리 반응할 리가 없죠. 어쩌면 이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도 예수님의 설교를 한 번 듣고 싶고, 그 분께 기도를 한 번 받아보고 싶다고 소망을 피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가 충분한 사랑을 가지고 이 사람을 이끌어 예수께 데려 갔겠으며, 데려간들 주님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이 사람과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바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다 잊어버렸고, 자신의 처지도 모두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온 영혼과 마음을 집중해서 평생 본적이 없는 예수, 그 한 분의 귀에다가 대고 소리치는 마음으로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이 사람의 소리는 매우 특별한 큰 소리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고 지나가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아주 강력한 소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며 가던 사람이 꾸짖으며 그를 나무랐습니다. ‘잠잠하라’고 그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심하게 소리를 지르며 꾸짖는 그 사람 소리를 뛰어넘어 예수의 귀에 들리기까지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통절하게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로 뜻을 세우기만 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그리고 사단은 방해물들을 놓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있는지 보십시오. 그러나 또 믿음의 눈으로 보지를 않으면 기도의 제목보다 더 많은 방해물들이 우리 안팎에 가득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지 않습니까? 기도할 마음이 꺼져가는 심지의 불꽃처럼 남아있을 때에는 기도할 수 있는 때인데 환경이 자기를 기도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수많은 일과와 수많은 해야 할 일들이 자신의 시간을 남겨두지 않습니다. 환경이 여유로워져서 충분히 기도할 시간을 확보할 때쯤 되면, 속에 근심, 밖의 걱정이 영혼을 파고 들어와 무릎은 꿇었지만 마음속에서 기도가 쏟아져 나오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마음도 갖추어지고 기도할 시간도 마련되었을 때에는 끊임없이 죽음의 기운과 함께 동거하는 육신인지라 때로는 질병이, 육신의 연약함이 주저앉아서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없도록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이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시때때로 주님을 사랑하고,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며 기도 속에서 살고자 하지만 이 세상 온갖 시험은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고, 안팎의 염려와 근심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하루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영혼과 정신이 협조를 하면 육체가 반역을 하고, 육체가 도움을 주는가 하면 우리 마음이 스스로 하나님을 등져 기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이런 갈등 속에 일주일을 살다가 온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의 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죄악 속에서 충분히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상한 것처럼 생각하고 세월이 지나면 기도하기에 좋은 여건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속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떨치고 이 모든 역경들을 극복하는 영혼의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오늘 이 사람 소경이 사람들에게 꾸짖음을 당하며 잠잠하라고 야단을 맞았을 때 오히려 그것은 이 사람을 주저앉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 사람들이 나를 꾸짖고 무시하는 것 자체가 내가 하나님 앞에, 우리 주님 앞에 내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구나 하면서 그는 예수밖에는 나에게 희망이 없다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매달렸던 것입니다.
이 배를 잘 몰 줄 아는 선장들은 바람과 파도를 탄답니다. 그래서 물결이 치면 배의 각도를 정교하게 조정하면서 오히려 그 물결을 타고 배가 빨리 항해하여 풍랑을 벗어나는 기술을 발휘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우리의 기도생활과 꼭 같습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충만한 기도생활을 하신적인 언젠가 있으셨겠지요. 그때 생각해 보십시오. 놀라운 게 감사한 일이 있기 때문에만 하나님 앞에 기도생활을 잘하던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일이 생기면 감사해서 감격하는 마음이 기도로 변하고, 고난이 닥치면 그 고난 때문에 세상에 대한 희망을 끊고 우리 주님의 손을 꽉 붙드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주께서 그때도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어제도 제가 다니던 신학교에 신학자들이 많이 모인 곳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올라가면서도 또 학교 다니던 생각이 났어요. 속에 근심, 밖에 걱정, 아침에 눈을 뜨면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그때도 근심과 걱정이 쉬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을 모두 가슴에 쌓아 안고 채플실에 올라가요. 그리고 조용히 예배당에 홀로 앉아 머리를 숙이면 마음 깊이 쌓였던 설움이 복받혀 쏟아지는 것입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그러면 오히려 가슴 아픈 일을 당하고 걱정이 있는 것이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왜? 그 근심과 괴로움의 파도를 타고 기도의 배는 항해를 계속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런 겁니다. 이 세상의 죄가 들어온 날부터는 원래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당신을 더 많이 의지하게 하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셔도 그거 붙들지 않고 우리를 붙드신 주님의 손 꼭 잡고 주님과 함께 우리의 인생을 가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역경을 이기고 부르짖었던 이 소경처럼 여러분도 역경을 파도처럼 여기며 그것을 이기며 부르짖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구원하실 주님을 믿는 기도
마지막 세 번째는 구원하실 주님을 믿는 기도였습니다. 이 소경이 우리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을 두 번이나 꼭 같이 반복합니다. 자,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속에 있었던 다윗 사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가슴속에 남아있는 그리운 왕국의 모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 왕국이었습니다. 다윗 왕국은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 영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첫째는 다윗 왕국 시대에는 가장 나라가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세계 지도를 놓고 보면 하찮지만, 각자 자기 수준에서 생각하는 것이니 이 사람들에게는 그때가 강대국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때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던 신앙의 부흥이 있는 때였습니다. 세 번째는 이 다윗 왕국의 핵심은 다윗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별한 언약에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윗 왕국은 매우 중요한 왕국의 모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국에 대해서 예언 하시기를 ‘다윗의 위에서 다스릴 자가 나올 텐데 그것은 다윗의 자손이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이루시고, 그 왕국은 영원할 것이라’고 하는 약속이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소위 하나님의 아들, 신자 사상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신자 사상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왕국을 향한 기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의 초자연적인 신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초자연 적인 존재, 그런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서 그래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이방의 나라들을 전부다 다 정복하고, 다윗왕국 시대의 그 찬란한 왕권을 이 지상에 재수립할 것이라고 하는 기대였고, 그런 기대를 한 몸에 모으셨던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랍게 한 번도 당신을 ‘나 다윗의 자손이야’ 이렇게 소개하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난 신자라기보다는 인자로 소개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난 사람의 아들이라’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신자 사상의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게 하셔서 다윗의 왕국은 하나의 껍질에 불과하고, 그 껍질을 깨고 나오는 이 세상의 창칼에 의해서 쓰러지지 않는 영적인 왕국, 이스라엘 교회의 수립을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이 소경, 예수님께 부르짖는 이 소경은 똑같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이 심오한 왕국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는 이 고백 속에서 그런 사상은 몰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의해 보냄을 받은, 그 분의 능력을 함께 가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 하나는 이 속에서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IV. 결론
어떤 사람이 실험을 했답니다. 중국에 가도 그런 게 있는데 미국에 절벽 사이 양쪽에다가 줄을 놓고, 그 위로 오토바이를 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쪽으로. 중국에도 그런 게 있습니다. 이렇게 달리는데 안 떨어지고 잘 저쪽으로 건너가고 이쪽으로 건너가요. 그러면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모자에다가 돈을 던져줘요. 그 사람이 물었대요. 너무 열광적으로 박수치는 사람한테 ‘나 여기 또 건널 텐데 당신은 내가 여기서 저기까지 건너갈 거라고 믿냐’고 했더니 ‘확실히 믿는다’고 했대요. ‘그럼 한번 뒤에 타 보겠느냐?’ 탔을까요? 안탔을까요? 안탔죠. 절대 안 탔죠. 그거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입니다.
이 사람 소경은 예수님이 자기를 그 비참한 처지에서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믿음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주님이 자기를 이 비참한 운명과 같은 이 실패에서 건져내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과 두 번째는 그렇게 해 주실 만큼 충분히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라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기도의 영은 사랑의 영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많이 사랑할 때 우리의 기도는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받을 거는 많고, 사랑하는 마음이 거의 없을 때 우리의 기도는 목구멍에 붓고, 마음은 차갑게 얼어버립니다.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거기에 우리의 인생의 모든 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어떻게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그리고 자신을 능히 건져 내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현재 그것을 느낄 수 없다면 과거를 회상해 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이 주님을 찾지 않을 때부터 사랑하셨고, 그리고 예수님이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셨을 때 여러분은 죄악덩어리였습니다. 그런 때에도 주님은 찾아오셔서 여러분에게 은혜의 손을 내미시고, 인생의 수렁에서 여러분을 건져주셨다면 지금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된 지금 마음 한 구석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그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가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 얼마나 많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일지 한 번 눈 여겨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 쓸모없어도 워낙 비싸게 주고 산 물건은 잘 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건져 구원해 주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대단해 보이지 않아도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핏덩어리처럼 소중하게 당신의 몸을 핏값으로 주고 사신 당신의 구속의 사람들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믿음을 가지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어제 중국의 반체제 인사가 11년 선고를 받고 옥중에 있는 중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신문의 보도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 사람의 주장은 중국을 다 뚜드려 엎고 새 나라를 세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를 하더라도 상식적인 공산주의를 하자는 것입니다. 핵심이 뭐냐 하면 공산당을 하되 다당제로 하자 그게 핵심입니다. 그래서 서로 견제하고 감시하고 올바르게 하자는 것입니다.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눈 하나 깜짝 안합니다. 그런데 그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자신은 그렇게 가시밭길과 같은 투쟁의 길을 걸었지만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외칠 거라고 말입니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데 그는 자신의 온 몸을 감옥에 던지며 그렇게 외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든지 입을 열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너무나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기울여 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부르짖지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들어줄 희망이 없는 나라를 향해서도 감옥 속에서도 저렇게 부르짖는데, 우리는 친근히 하시고 가까이 계신 주님이 우리 옆에 계신데 그래서 모세가 말하기를 ‘이제까지 너희는 이렇게 가까이 계시고 우리가 부를 때에 이렇게 친근하게 해 주신 신이 어디에, 어느 민족이 그런 신을 누렸느냐’고 반문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매우 가까이 계셔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가까운 분이 되셔서 언제나 그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당신의 마음과 그리고 당신의 그 큰 능력을 보여주셔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날 이 소경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간절히 부르짖었고,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 분은 자신을 이 비참한 운명과 같은 실패에서 건져낼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그의 영혼을 고쳐주셔 새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맞이한 첫 날은 예전에 살아왔던 수많은 날과는 비교되지 않는 새로운 한 날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에 사경회 때 그렇게 주님이 지나가시는 길입니다. 간절히 부르짖어 우리 주님을 만나고 새 삶을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8.마음을 토하는 기도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시 62:7-8).
I. 본문해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다윗의 시입니다. 언제 이 시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이 시인은 사람들로부터 큰 고통을 받는 가운데 하나님을 앙망한 기도의 경험으로 이 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깊이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그 고통을 사용하셔서 성도들을 당신의 언약 안에서 친밀한 백성으로 부르시고, 형통할 때에는 소원하였던 주님과의 교제가 온전해 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II. 성도가 고난 당할 때
먼저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 그 때에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하는지를 오늘 시편 62편이 생생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시인은 자신을 강한 사람이라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신이 넘어지는 담과 같고, 그리고 흔들리는 울타리 같아서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지극히 연약한 인간일 뿐인데 이 비천한 인간을 수많은 사람들이 공격하고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인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자신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집요하도록 미워하는 사울의 추격을 받으며 상당한 기간을 동안 도망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언제 그 사람이 하나님께 기름을 부어달라고 애원한 적이 있으며, 그래서 사울을 없이하고 자신이 왕권을 차지해야 되겠다는 정치적인 야망을 품은 적이 있습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성령이 충만하게 넘치는 영적인 기름부음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후로 그의 삶은 치열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이 시도 추측컨대 이때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또 굳이 그때가 아니라고 하고 왕이 된 후에 일어난 경험을 토대로 하였다 하더라도 핍박받는 이 시인의 본질도 변한 것이 없고, 이 시인을 파멸하기 위해서 덤벼드는 악인의 세력들은 그 생애의 시기가 어느 때든지 간에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악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무지가 저희를 악하게 만들었고, 저희의 마음을 분탕질하여 이 시인을 시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인 다윗의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비록 이 시인과 꼭 같은 형태의 고난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이 세상에 살아갈 때 우리도 끊임없이 고통을 당합니다. 우리의 본성적인 죄 때문에 우리 안에서 이 고통의 고통이 비롯되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는 그 죄의 본성을 이기며 올바르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어두움인 이 세상이 빛으로 살려는 우리들을 파멸하고자 공격을 하고 그래서 핍박과 시련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잘못한 것은 없지만 그러나 끊임없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이 상황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끊임없는 고통을 받고 인생살이가 쓴 맛이 되는 적도 우리에게는 자주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날들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고통을 받을 때에 그 고통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하고 하나님 앞에 그 고통을 어떻게 활용을 해서 그 고통이 지나고 난 후에는 그 고통이 미치기 전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가 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시인은 그런 놀라운 변화를 고통 속에서 자신의 마음 가운데서 경험함으로 고통도 이 사람이 주님 앞에 새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이 시인의 경험 속에서 녹여내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원리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는 기도 속에서 발견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통 속에서 이 시인이 변화될 수 있고, 자신만 변화될 뿐만 아니라 상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까지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III. 마음으로부터의 기도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어떤 기도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가 아닙니까? 물론이죠. 모든 기도는 전부다 다 마음의 작용이죠. 우리의 언어와 모든 사유의 기능 자체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니 어떤 기도인들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 기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여기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라고 할 때 그것은 일반적인 정신 작용으로서의 마음으로부터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그러한 심층적인 마음의 언어로부터 나오는 기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들을 마음으로 합니다만 마음 얕은 곳에서 하는 일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는 일들에 의해서 무시당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건망증 같은 것 아닙니까? 어떤 교인이 그래요. 아무리 찾아도 텔레비전 리모컨이 없대요. 소파를 뒤지고, 서랍을 뒤지고, 별 난리를 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까 냉동실에다가 넣어놨더래요. 리모컨을 들고 딴 생각을 하면서 막 떠들고 이야기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냉동실에 집어넣고 쿵하고 닫은 것입니다.
모든 게 마음에 있지만 얕은 마음에 있는 것은 깊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에 의해서 무시당합니다. 그 기도가 만약에 얕은 마음에 있는 것이라면 마음 심층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에 의해서 무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솟구치는 온천과 같아야 하고, 샘물과 같아야 하는데 물위에 떠있는 거품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걱정은 솟아나는데 기도는 마음 얕은 곳에 있다면 그 기도는 걱정에 의해 근심에 의해 삼킨바 되고, 기도는 거품처럼 물 위에 떠 있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 욕망이 우러나면 그 욕망에 의해서 기도는 잊혀진 바 되는 것입니다.
A. 기도 능력의 근원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의 능력이 바로 이렇게 마음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 능력의 근원은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에도 은사가 있어서 그래서 어떤 사람은 슬슬 기도해도 매우 특별한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매우 강력한 기도의 효과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열심히 기도해 봤자 별거 아닌 기도밖에는 할 수 없고 이것이 일생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는 어떤 숙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은 어떤 의미에서 뒤로 후퇴할 수 없어도 기도는 전진할 수도 있고, 후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잘 기도할 수 있었던 사람이 오늘은 기도할 수 없게 되는가 하면, 언젠가는 기도 속에서 그렇게 처절하게 하나님을 갈망했던 사람이 오늘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절대로 기도할 수 없는 사람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허황된 모든 사실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참된 기도의 능력은 기도하는 우리를 주님이 돌아보실 그때에 나타난다고 우리는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분이 아니시니 어떤 현란한 언어와 아름다운 학식으로 기도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털어놓는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고, 그리고 그렇게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의 사람과 하나님은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기에 임재하십니다. 궁궐이나 아름다운 저택이 아니라 거기가 초막과 같아도, 광야와 같아도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진 그 곳이 우리 주님에게는 거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처소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런 마음으로 당신께 나아오는 그 사람들 가장 가까이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언제든지 무릎을 꿇을 때 마음이 가난해 질 수 있는 사람, 언제든지 우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 마음의 울림으로 하나님을 앙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도대체 누가 이 세상에서 복 받은 사람들이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며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청결한 마음이 되어서 우리 하나님을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B. 마음을 토하는 기도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은 원수들에게 그렇게 고통을 받고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깊은 고통 속에서 만물의 찢기와 같이 되었을 때 그는 우리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토했던 기도의 경험을 반추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토하는 기도, 이것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의 정수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마음을 토하는 기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넓게는 모든 언어와 우리의 정신의 활동이 마음에서 부터 비롯되지만 좀 더 좁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앙망의 언어가 바로 마음으로부터의 기도입니다. 마음을 쏟는 기도라고 혹은 마음을 토하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이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우리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를 이루어 주님과의 커다란 교통이 이루어지는 기도의 최고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적어도 네 가지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마음으로 쏟는 기도는 하나님께 집중된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지만 탁월한 집중으로 우리 하나님 한 분만 집중하면서 간구하는 적은 우리의 기도 가운데 얼마나 적은 순간들인지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설교를 여러분에게 말하면서 머릿속에 공중 급유기가 전투기에 기름을 공급하는 과정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전 세계의 공군들은 작전 반경을 넓히기 위해서 온 기술력을 기울였습니다. 저의 제자 가운데 공군 조종사 출신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하는 이야기가 전투기 한 대에 기름이 큰 드럼 있잖아요? 둥그런 거 그게 다섯 개 반이 들어간답니다. 그 다섯 개 반이면 양이 거의 조그만 트럭 하나 정도 될 정도의 분량이잖아요. 그 날개와 동체, 이 전체적으로 전부다 다 기름통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전투기들이 미사일에 맞는다든지, 대공포에 맞으면 이렇게 불덩어리가 되는 이유가 그 전체가 기름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인화성이 아주 탁월한 기름입니다. 그 기름을 다섯 드럼 반을 싣고 정속 주행을 해야 한 시간 남짓하게 운행할 수 있고, 정속 주행이 아니라 우리로 말하자면 엑셀을 막 밟으면서 언덕을 올라가는 것처럼 공중전 상황이 되면 20분 남짓 사용하면 그 다섯 드럼 반의 기름이 모두 없어진대요. 그래서 그게 어느 정도냐고 그랬더니 수도 큰 것을 확 틀어놨을 때 콸 쏟아지는 정도로 기름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비행기를 만들어도 전투기는 크기의 한계가 있으니까 아무리 기름통을 만들어도 그 기름을 많이 지닐 수 없어서 세상의 좋은 비행기를 만들어도 항속 거리가 그저 2,000km 남짓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공중 급유기입니다. 그래서 공중 급유기가 기름을 잔뜩 실은 비행기가 뜨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비행기가, 전투기가 날아가요. 이 전투기는 계속 작전하면서 가는 거지. 그리고 위에 비행기가 쭉 하고 날아가요. 그래서 컴퓨터로 이것을 딱 맞추어서 이 비행기 속도와 이 비행기 속도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줄을 달아 내리는 것입니다. 그 달아 내린 그 줄을 이 기름구멍에다가 집어넣어가지고 기름을 하면서 똑같이 날아가니 그게 생각을 한 번 해 보십시오. 그게 최대 시속이 좋은 전투기는 한 시간에 1,800km~ 2,300km 까지 날아가는데 그 속도를 아무리 줄여도 한계가 있지 그 속에서 그 줄 하나에 연결이 되는데 솔직히 얘기해서 한 시간에 몇 십 km 오차만 나도 이 줄은 후드득하고 끊어지면서 비행기가 부서지든지 급유기가 부서지든지 할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걸 기름을 밸브를 넣어서 기름을 쏟아 붓는 시간은 불과 몇 분 안 되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과 조화하기 위해서 그 비행기가 어둠 속에 날아서 그래서 그 비행기를 레이더에 찾아내서 이거를 조정하고 마지막에 맞추는 그 시간까지 비교를 해 보면 그 기름 넣는 시간은 잠깐이지만, 그것을 맞추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가 기도를 하기 위해서 애쓰는 모든 노력은 마음을 쏟는 그 기도를 잠깐 하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를 위해서 애쓴다고 말해도 전혀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요소가 바로 하나님을 향한 탁월한 집중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수많은 사물들이 우리의 마음에 비추고 그리고 생각들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게 해서는 우리들이 깊은 기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을 감고 기도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눈을 뜨고 기도한들 하나님이 기분 나빠하실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눈을 감고 외부 세계와 단절을 취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영이시고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사물의 시각 때문에 잊혀지고 그 분을 생각하는 것이 방해될까봐 우리는 잠시 눈을 감고 외부의 세계와 단절하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대부분 두 손을 모읍니다. 두 손을 모을 때 심리적으로 가장 마음에 집중이 잘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마음을 쏟는 기도는 제일 먼저 하나님께 집중된 기도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쏟을 때가 되면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하러 나간 첫 자리에서는 근심과 염려, 시험과 고통, 괴로움과 번민, 욕망들이 우리를 심하게 휘둘렀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고 간절하게 마음을 쏟아놓을 때에는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마음을 쏟는 기도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마음의 소원을 품는 것입니다. 조용히 하나님을 명상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진정한 기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기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로부터 생각을 떼어내어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때 우리의 참된 소원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주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우리의 소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올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도되는 기도의 제목만이 정말 살아있는 기도제목이라는 말할(?)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우리 자신을 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남들은 우리를 보지만 나는 일평생 나를 직접 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아무리 내가 나 자신을 생각을 많이 한들 거울로 나를 비춰보지 않는 한 나를 정확히 알자가 누구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응시함으로 참된 마음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울 대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비춰봄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와 현재에 있는 나 사이의 차이를 발견해 참다운 마음의 소원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에 소원을 품어 이 소원이 내 마음 속에 불같이 타오르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같이 타올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방해되지 않는 것은 그 불같이 타오르는 소원이 정욕으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서 주님의 마음을 전수받아서 내 마음에 품은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식지 않고 기도 속에서 타오르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바라시는 그것이 우리도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에 간절한 소원의 일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사실 때에 그런 생애를 사셨습니다. 당신은 헐벗고 굶주리셨고, 그리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었지만 당신은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마음의 소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소원이었고, 그 분이 하시는 그 일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바로 그 일이었기에 예수님은 스스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의 기뻐하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와 나와 항상 함께 해 주신다고 고백을 하셨던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그래서 그 마음의 소원을 꼭 품는 것이 그래서 그것이 마음속에 불같이 뜨겁게 타올라 이 기도제목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나의 인생을 마름해도 괜찮습니다 그 마음이 되기까지 생명보다 더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품을 때 그것이 바로 마음을 쏟는 기도인 것입니다.
세 번째 요소는 자기의 신뢰를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마음이 본래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죄로 말미암아 아집으로 말미암아 안일 속에서 혹은 고통 속에서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다고 신뢰하면서 굳어진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깊은 고통 속에서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지를 깨닫고 주님이외에는 자신을 구원할 자가 없다고 이 시인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오늘 말했습니다. “나의 힘의 반석이시며 그리고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라고 말입니다. 성경에서 히브리말로 ‘쭈르’라고 하는 이 반석은 대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하나는 어떤 행동과 어떤 사상의 기초로서의 단단함, 흔들리지 않는 기초로서의 튼튼함을 가리킬 때 반석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또 하나는 이 반석은 피난처와 거의 동일한 말로 사용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지방에는 바위산이 아주 많이 있고, 그런 산들은 어떤 때에는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로 된 산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적으로 동굴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동굴 자체가 흙을 판 동굴이 아니라 아예 반석으로 된 동굴입니다. 거기에 피하게 되면 두 가지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적어도 세 가지의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누구에 의해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설령 누가 발견했더라도 어떤 화살과 불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뜨거운 사막에서 그 뜨거운 기운을 그 바위가 막아줍니다. 밤에는 굉장히 서늘합니다. 그 서늘하게 식은 바위가 한낮의 뜨거운 태양 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반석은 두 번째 의미로 사용이 되었기 때문에 나의 반석이시요, 피난처시라는 이 말은 거의 동의어의 반복입니다. 그래서 나의 반석 곧, 피난처이십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예전에는 자기를 스스로 피난처로 알고 자신을 보호하고 지킬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고 믿었지만, 마음을 쏟아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나를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지를 발견하고 내가 죄 가운데서 고통하고 시련 가운데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생의 벼랑 끝에 선 이 모든 것이 나에 대한 신뢰, 하나님께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쏟는 기도 속에서는 자기를 철저히 미워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망아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철저히 잊어버리면서 오직 주님 한 분이 자기에게 의지할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마음에 그 심령이 물같이 녹아내릴 때 그 기도가 마음을 쏟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종종 이렇게 나에 대한 신뢰를 모두 버리고 우리 주님만을 붙들던 기도의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문제가 있어서 주님 앞에 그랬습니다. 지금은 그럴만한 문제가 없다기보다는 우리의 마음이 살찌고 기름져 부요해졌기 때문에 그렇게 매달려야 할 수많은 기도의 제목들, 우리의 영혼의 가엾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하지 못하여 아버지 앞에 이런 식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한 신뢰가 우리의 기도의 가장 어려운 장애물인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해 미친 듯이 날개가 피가 맺히도록, 겨드랑이에 피가 맺히도록 날개를 휘 저으면서도 그 발이 땅 아래 말뚝에 묶여있어서 하늘을 향해 오르지 못하는 새처럼, 자기를 신뢰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하는 자기중심성이 우리의 기도의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주님을 우러르는 마음은 기도의 날개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앙망하는 삶은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는 훌륭한 기도의 엔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자기 신뢰를 버리고 주님을 붙드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쏟는 기도는 하나님께 힘써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 앞에 수없이 기도하며 결심하고, 결심하며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이 시인은 자신의 결심을 표하고 있습니다. “내가 요동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나의 구원이시고,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라” 얼마나 많이 요동했으면 자신에게 요동치 아니하리라고 다짐하고, 다짐하고, 다짐합니까? 주님은 마음의 심지가 굳은 사람들을 평강과 평강으로 인도하시고, 마음이 확정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은혜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뜻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숙명처럼 매인 이 세상에 대한 사랑, 나의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수시로 하나님 앞에 뜻을 세워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할 때 저절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쏟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래의 모습이고 마음을 쏟아 하나님 앞에 펑펑 울면서 기도하고, 우리의 마음 전부다가 그 분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래서 기도할 때 우리의 몸속에 예수가 들어오시는 것 같은 그런 일체의 경험들은 비상한 것이고, 예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수많은 투쟁의 터널, 투쟁의 과정을 거친 사람들만이 그런 마음을 쏟는 기도의 환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자라면서 할아버지로부터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뒷산을 가리키면서 ‘얘야, 전설에 의하면 저 산에는 엄청나게 많은 금이 뭍혀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금을 캤는데 결국은 별로 금을 얻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나도 우리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전설 같은 이야기란다’ 이 어린 아이가 점점점점 자라서 이제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게 되었을 때 전설 같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그 산을 구입하고, 그리고 옛날에 광산으로 사용하던 그곳을 재개발하기로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퍼부으며 파고 들어갔지만,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사업이 거의 파멸하게 되었을 즈음에 일하던 광부들도 거의 다 떠나고 몇 사람 남아서 힘겨운 곡괭이질을 하고 있을 때에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 무엇이 있다’고 말입니다. 놀랍게 그것은 메워진 광도에서 발견된 하나의 곡괭이 자루였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힘껏 그 곡괭이자루를 뺐을 때 곡괭이는 너무나 오래되어서 나무가 삭아서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매달리다 시피해서 아직은 완전히 부스러지지 않은 곡괭이 그 쇳덩어리를 들고 씨름을 해서 그 쇠를 뽑아냈을 때 놀랍게도 그 곡괭이 끝에는 금이 묻어나왔습니다. ‘좀 더 파 들어가 보자’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금맥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전에 깊이, 깊이 파 내려갔던 사람들은 한 번 마지막으로 곡괭이를 쾅 치고 이게 빠지지 않으니까 그것을 끝으로 이 모든 광산 개발을 끝내고 세월이 많이 흘러 지진이 일어나고 산이 흔들리면서 그 갱도가 모두 메워졌던 것입니다. 조금만 더, 한번만 더 곡괭이질을 했더라면 발견했을 수 있는 그 금광을 뒤로 둔 채 그들은 철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인내와 끈질긴 열심, 힘써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런 자세 없이는 누구도 마음을 토하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바로 그 옛날, 지금으로부터 거의 3000년 전에 그런 기도의 경험을 하나님 앞에서 하였습니다.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하여 마음을 토하기를 시시때때로 라고 그랬습니다. ‘시시로’ 이것은 언제나라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매순간 이 시인의 영적인 삶 속에서는 기도의 공간과 삶의 공간이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기도가 곧 삶이었고, 삶이 기도였기 때문에 언제든지 마음을 쏟으며 우리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들에게 고통 받는 이 불쌍한 인간을 돌아보시고, 제발 나를 통해서 당신이 이루시려고 했던 그 기름 부을 때의 그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온 맘을 다하여 매달렸고,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었습니다. 혼란과 어두움 속에 그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을 수 있었고, 그렇게 기도할 때 그는 하나님 그 분이 자신의 피난처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의심은 물러가고 확신이 밀려왔고, 불안은 사라지고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악인은 모두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들이고 자신은 하나님의 영영한 기업이며 그 분의 사랑을 받는 감람나무인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강하나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었고, 자신은 약하나 하나님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 하리리다
IV. 하나님, 나의 피난처
그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빌면서 하나님께서는 매달리는 이 다윗을 돌아보셔서 정말로 그의 피난처가 되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난을 받으며 가장 외로울 때에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위로를 즐겼고, 가장 원수들에게 고통을 당하며 괴롭힘을 당하는 그때에 이 시인은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주의 자비와 인자를 경험하고 그 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V. 결론
여러분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설령 그것이 여러분의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이 여러분에게 복수하고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오라고 그 고통에서 평강의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라고, 어두운 밤길에서 진리의 밝은 빛이 있는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오라고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시는 소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주 앞에 모두 토하며 우리의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주님의 그 자비와 긍휼하신 속성을 알게 되도록 마음을 주 앞에 토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절망 속에서 만나는 예수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 5:25-29).
I. 본문해설
비교적 예수님의 사역의 초기라고 믿어지는 때에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서쪽에 계시다가 배를 타고 동쪽으로 건너가셨고, 거기에서 거라사의 광인을 만나 고쳐 주신 다음 데가볼리까지 가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다시 배를 타고 서쪽으로 건너오셔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II. 혈루증 걸린 여인
여기에는 절망적으로 혈루 증에 걸려 고생하던 한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는 광경들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오늘 혈루 증에 걸린 여인이 나옵니다. 이 혈루증이라는 것은 아마도 부인병의 일종이라고 여겨지고, 우리말로 하면 하혈을 하는 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학적인 소견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여인은 이렇게 하혈을 계속하면서 여자로서의 일생을 살아가는데 고통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여자의 절망적인 상태를 사중 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질병이 1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이 질병이 발견되었을 때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많이 염려하고 걱정해 주었을 것입니다. 12년의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 여자의 병은 점점 깊어져 갔고, 긴 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처럼 가족들도 이제 이 여자의 질병에 대해서 지쳤을 것입니다. 12년이나 흘렀다고 하는 것은 이 질병의 상태가 이제 절망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의 상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욱이 성경은 많은 의원들에게 호소하였지만 고통만 받았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의 다른 사본에 보면 이 부분이 많은 의원들을 만나서 가산을 탕진하게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많은 의원들에게 이 병을 호소해서 고쳐보려는 굉장한 집념을 가진 여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용하다는 모든 의사는 다 찾았을 것이고, 그리고 재산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질병을 고치는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돌아온 것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었습니다. 치료의 과정에서 인내해야 하는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들, 그것만이 마지막 12년 후에 이 여자의 몸에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치료의 과정에서 그는 꽤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이제는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있어서 그래도 마지막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돈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돈 마저 완전히 잃어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었고, 병은 점점 더 병세가 깊어가서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병세가 더 중하여져가 점점 더 혈루가 흘러나오고 이 여자는 결코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자도 사람이었으니 꿈이 있었을 것이고, 상세한 기록은 나오지 않지만 결혼을 했던 하지 않았든 이 여자의 삶은 너무나 비참했을 것입니다. 결혼을 했다고 하면 아마 이 흐르는 혈루 때문에 그는 아이도 낳을 수 없었을 것이고, 또 정상적인 부부관계도 가질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가정에 생겨나는 많은 고통은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고 꿈을 이루고자 하는 계획은 이 여자의 일생에 있었으나 이런 질병 속에서 12년 동안 투병생활을 할 것이라 하는 계획은 인생의 계획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행복하고 좋은 계획을 세우지만 불행과 시련은 불청객처럼 찾아와 우리의 인생의 계획을 망가뜨려놓습니다. 이제 이 여자는 집념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모두 행했고, 마지막 돌아온 것은 물질을 모두 잃어버린 가난과 병세가 더 깊어지는 것과 절망 속에서 스스로 고독을 느끼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이 여자야 말로 인생의 벼랑 끝에 선 여자라고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여자는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여자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도 허락되지 않고 이 여자는 힘겹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III. 절망 속에서 만나는 예수
이 여자가 이렇게 절망 끝에 선 것 같은 벼랑 속에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여자가 이 절망 속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전에도 필요했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12년 전에도 필요했지만 자신을 의지하느라고 12년 동안을 허송세월을 보내었고, 그리고 그는 이제 이 절망 속에서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A. 예수의 소문을 들음
오늘 성경은 이렇게 절망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 여자의 치료의 과정에 대해서 세 가지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이 여자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문둥병자처럼 막연히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고차원적인 신앙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에게는 예수의 소문이 들렸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자기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하는 소원이 마음속에서 자라갔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특별히 언약백성들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그리고 그 아버지가 어떻게 그들을 다시 구원을 통해 하나님 당신께로 이끌고 싶어 하시는지를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사랑의 생애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어머니 같은 그 놀라운 사랑과 은총과 자비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마음은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연민 때문에 짓눌리던 가슴을 가지신 생애였고, 그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 이 모든 인간들과의 접촉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죄인들에게는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나타났고, 고통 받는 자들에게는 그 고통에서 위로하시고 건져주시는 은혜로 나타났으며, 질병 상태에서 인생의 괴로움을 직면하고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은 병을 고쳐주시는 자비로 나타났습니다. 무지와 어둠 속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에게는 진리의 빛을 비춰주심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을 버리지 않고 긍휼히 여기신다는 사랑을 아주 찬란한 다면체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와 예수의 소문을 연결할 줄 알았습니다. 수많은 병든 자들을 고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어떤 비참한 병자라도 더럽다고 물리치지 않고 친히 그 헌데를 어루만지시며 고쳐주셨다고 하는 그 소식도 접하였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이 여자의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의원들에게 호소해도 고칠 수 없었던 자신의 질병, 인생을 불행하게 한 이 근원적인 문제를 그 분은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막연한 소망과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총체적이고 구체적인 지식을 가진 것 같지 않습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아주 작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올바른 지식을 붙들고 믿는 사람들이 더욱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 여자가 소문만 듣고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 예수님께로 나아갔다면 이 여자보다 더 많은 예수님에 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더 예수님께 나아가야할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이런 저런 작은 질병들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 여인처럼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혈루병과 같은 절망적인 질병을 가지고 이 예배 시간에 나아온 성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 여인보다 건강하고 복된 육체를 가지고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는 교만하고 하나님을 덜 의지하는 사람이 돼서야 되겠습니까? 만약에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영적인 광명으로 우리의 영혼의 상태와 마음을 비춰주신다면 우리 가운데 이 여인 못지않은 절망적인 질병에 걸린 영혼을 가지고 오늘 예배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보는 것들에 메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것이 신앙이고, 그것 때문에 용기와 희망을 얻을 뿐만 아니라 절망하기도 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부요한 마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이 세상 썩어질 것들을 의지하기 때문에 영혼의 상처와 질병의 상태를 직시할 수 없는 마음이 부요한 마음이고, 가난한 마음은 이렇게 영적인 안목으로 자신의 심령의 상태를 보고, 배부르나 가난하고 배고픈 영혼을 이해하고, 잘 입었으나 헐벗은 자신의 영혼의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모든 것이 평안하다고 자신의 육체가 말하나 그것을 뛰어넘어서 위기 속에 있는 자신의 심령을 보는 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이고 복된 마음이며 주님은 그런 사람에게 천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영적인 안목으로 우리의 영혼과 그리고 심령의 상태를 헤아려 보십시다. 혹시 우리의 영혼의 질병이 절망적이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영혼의 질병, 깨뜨려진 하나님과의 관계, 생명이 사라져 버린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속절도 없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고 있다면 우리가 바로 그 주님을 만나야 할 혈우병 걸린 사람들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이 여자는 예수의 소문만 듣고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전심으로 붙잡았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끊임없이 전해주었고,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그 분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성품과 자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지만 여러분은 제가 가르쳐 준 그 진리의 말씀 중 얼마만큼이나 굳게 붙들고 거기에 여러분의 인생을 던지셨습니까? 만약에 그랬더라면 여러분이 혈우병에 걸린 여인과 같이 비천한 처지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건강한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구김 없이 사는 것은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복된 것이며, 주님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는 생명을 잃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 복된 것인 것쯤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복음의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보십시오. 예수의 희미한 소문을 붙들고 이 여자는 그 소문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고 그리고 그 분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마음이 있느냐고 나는 묻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기도회가 무관심과 싫증 속에 흘러가 버렸고, 얼마나 자주 핀 성경읽기가 게으름과 나태함 속에서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 채 글자가 여러분의 눈에만 비치며 스쳐 지나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수없이 여러 번 예배를 드렸지만 주님을 만난 적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수없이 여러분에게 외쳐졌지만 그 말씀 앞에 여러분이 부서져 본 적은 없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해 부순 적은 있지만, 여러분 자신이 주님의 위엄 앞에 그리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 앞에 쪼개져 본적이 있습니까? 거기에서 여러분의 혈루가 고쳐진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껍데기 밖에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복음의 진수가 여러분의 심령을 찔러 무엇으로도 고쳐지지 않는 여러분의 병의 근원이 마르는 그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여러분에게 하고 싶어 하셨던 일인 것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목회사역과 영혼을 향한 모든 사랑과 교회의 아름다운 질서들은 바로 이 신적인 일들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이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이 유익에 얼마나 많이 참여하길 갈망하고 그리고 사모해야 되겠는지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이렇게 희미한 예수의 소문만 듣고도 그 분을 만나기 위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달려오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면 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이며, 우리의 예배는 얼마나 하늘 가락으로 울려 퍼지는 찬양의 예배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이 변화되겠습니까?
(찬양) 비추소서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채우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눈을 들어서 잠시 여러분의 이웃, 심지어는 교회 안에 있는 파리해진 지체들, 구원 없이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여러분의 가족들을 보십시오. 그들을 품고 주님의 생명으로 흘러가 달라고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깊이 병들어 생수 대신 피고름이 나온다면 그가 어떻게 이방의 빛이 되겠으며 열방을 위해 그리스도의 복의 근원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질병 상태를 치료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신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B. 예수께 나아와 손을 댐
이 여자가 보여준 두 번째 믿음은 예수께 나아와 그 옷에 손을 댄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하시고 그리고 위엄 있으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인파에 에워 쌓여있을 때에 이 여자는 감히 예수께 나아가 정면으로 독대하여 나에게 이러 이러한 질병이 있으니 고쳐주시옵소서 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그런 용기조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예수께 가까이 다가가고 무리 속에 섞여서 눈에 띄지 않게 그것도 예수의 뒤를 따라가다가 그 분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마음속으로 믿기만 하고 믿음을 실천하지 않으면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믿음이 끊임없이 유산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적절한 믿음을 가지고 그에 합당한 실행을, 그 믿음을 실행에 옮길 때 그때에 그것은 주님께 훌륭한 고백이 되고, 우리의 믿음도 아주 놀랍게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충만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성경만 읽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믿음을 행사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작은 일에 믿음을 행사하고, 좀 더 큰일에 믿음을 행사하면서 그 속에서 주님을 향한 확신과 신뢰는 더욱더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떤 사람 말하는 것이 선명하게 믿어지지 않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 마음을 잘 가다듬고 그 사람을 한 번 믿어주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점점 쌓여가지만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하면 아주 분명히 믿을만한 것도 신뢰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의심의 결국은 관계의 파괴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찬송하며 여러분이 마음속에 어떤 믿음이 생길 때 그것이 비록 큰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그 믿음을 사용하지 않고 사는 것보다는, 작은 믿음이라도 당장 실천하고 실행하면서 살게 될 때에 그 작은 믿음은 큰 믿음이 되지만, 크게 있는 것 같이 있는 믿음도 사용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사실은 믿음이 아닌 것처럼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갔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 나아가는 그 순간에도 그 혈루가 계속 흐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성경에 보면 누가 이 여자를 도와줬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가족들도 지겨워서 이 여자를 버렸을지 모릅니다. 이 여자 홀로 예수 계신 곳까지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뒤에 다가가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때에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신도 혈루의 근원이 마르는 것을 느낄 수 있게끔 기적적인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행사는 너무나,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받기만 하고 그 믿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있는 것 같은 그 믿음이 곧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 여인처럼 혈우병에 걸린 절망적인 영혼의 상태를 가지고 있다면, 또 혈우병은 아닐지라도 이 여인 못지않게 여러분을 절망의 벼랑 끝에 세우는 환경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이 주님을 원망하기 전에 과연 여러분이 주님께 간절히 믿음을 행사하며 주님께 매달렸는지 한 번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고, 이 여자의 혈루의 근원이 마르는 것이 본인에게도 느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이 자신의 뒤로 다가와 아무도 모르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이 여자의 비천한 환경을 모두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이 이 여자에게 미치는 것을 충분히 느끼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이 여자를 고쳐주실 의사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질병은 주님이 모두 고쳐주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모든 질병을 항상 고치는 것이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들은 우리가 많이 기도해 주고 본인이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이 불러 가시는 사랑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서 그의 영혼을 너무너무 아름답게 만들어서 데려가시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이죠.
C. 절대의존의 믿음을 고백함
그러나 우리의 영혼의 질병은 다릅니다. 영혼의 질병은 주님이 모두 우리의 영혼의 질병이 고침을 받고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영혼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일을 주님께서는 홀로 하지 아니하시고 때때로 우리의 순종, 우리의 회개, 우리의 믿음, 주님을 향한 우리의 절대적인 믿음의 실행을 통해서 주님은 이 일들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질병의 상태는 주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고, 불순종 때문에 생긴 것이며 고쳐 주셔서 건강을 회복한 영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리된 것이지만, 혈루가 흐르는 것 같은 영혼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그 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 분께로 나아와 고침을 받고자 하는 우리의 믿음과 기도의 부족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의 실천이 필요할 때가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운명처럼 여겨졌던 신앙의 실패, 영적인 침체를 딛고 일어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앉은뱅이가 되어서 일평생 일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달리다굼’이라고 명령하시는 주님의 그 음성을 듣고 여러분이 이런 질병적인 신앙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으로 이 여자는 이러한 신앙의 고백적인 행위 속에서 주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믿음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이제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12년 이라는 긴 세월동안 자신의 이성적인 생각으로 자기의 질병으로 벗어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찾아온 것은 죽음에 가까운 질병이었습니다. 수없이 의원들을 의지했지만, 이 여자는 모든 재산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고통의 괴로움을 더하였고, 그리고 질병도 중하여졌습니다. 아무 노력이 도저히 쓸모없는 노력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질병에 대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원에게 호소해서 고침을 받기도 하고, 병세가 완화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원도 급하면 찾아갑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질병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당신 만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질병이었습니다. 그것은 백약이 무효인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까지는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생각한다면 이 질병의 상태는 끝없는 고통의 원인이지만, 주님을 만나게 해주시려는 계획이라는 견지에서 내려다본다면 이런 질병은 필연적으로 주님을 만나게끔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니 감사와 영광의 찬송을 올려야 될 질병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과거를 회고할 때 잘 먹고, 배부르고, 예쁜 옷 입던 날들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고통을 받고 우리의 심령이 찢어지는 것같이 의지할 데가 없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아버지를 향하여 매달렸던 우리의 그 고통스러운 날들은 또렷이 기억에 남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거기에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찾게 만들어 주셨고,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주님을 뵈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와 강퍅함 때문에 주님을 뵈옵지 못했을 뿐이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거나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에 그랬던 적은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치료받은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의 어떤 골짜기에 들어서고 불 가운데 지날지라도 두 가지 사실을 잊지 않고 굳게 붙들면 헤어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선하시다는 사실과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인생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지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건지신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IV. 기도로 나아가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열두 해나 계속되는 절망적인 질병에 시달리던 여인이 자기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찾아야 했고, 무리 속에 치이면서 예수님께로 나아와 예수님의 옷을 만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는 주님이 거기만 계셨지만 이제는 주님이 어디든지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경외함, 주님을 향한 의존의 모든 표현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인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없습니다.
여러분이 삼위일체를 모두 아는 놀라운 교리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통절히 기도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지식이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주 작은 빛이라고 굳게 붙들고, 주님께 온 마음을 다해서 이 여인처럼 주님 앞에 메어 달린다면 여러분은 정말 훌륭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더러운 병자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의 마지막 피난처이심을 알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박대하시면 우리가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께 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시고 산성이며 또 요새가 되십니다.
V. 결론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를 정직하게 보십시오. 그리고 비록 여러분의 두 다리 사이로 피가 흐르지 않아도 그것과 비견될 수 있는 비참함에 놓인 여러분의 상태, 주님의 도움 없이 살아가는 여러분의 형편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주님께 모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 간절히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전심으로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은 여러분을 버리시지 아니하신다는 것과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보다 여러분을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 오직 주님 그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에 관한 막연한 소문만 들었던 이 여인도 이 큰 믿음을 행사했거든 하물며 이제껏 진리의 말씀을 배운 여러분이야 얼마나 더 주님을 더 의지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 기도의 실행을 통해서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이 질병적인 영혼의 상태에서 환경의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러분의 믿음이 사실은 유산될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뜻을 세우십시오. 뜻을 세우십시오. 상황이 특별하면 특별히 매달려야 합니다. 추우면 따뜻하게 하는 것이 창조의 섭리이고, 배고프면 먹는 것이 창조의 섭리입니다. 밤이 되면 푹 자고 새벽까지 숙면을 취하는 것이 창조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위급하면 그 원리를 거슬러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배고픈데도 굶고, 육체가 휴식을 필요 하는데도 채찍질하여 주님 앞에 우리의 굳은 무릎을 꿇고 주님께 매달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큰 믿음으로 주님을 붙들고 호소함으로 절망적인 질병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네 마음을 쏟으라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 찌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살륙을 당하오리이까”(애 2:19-20).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유대 나라가 최종적으로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직후에 기록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애가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심으로 바벨론에게 이 유다 나라를 멸망하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렇게 나라가 망할 것을 이미 수차례 예고하였고, 불을 토하듯이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주었지만 사람들은 그릇된 낙관주의에 빠져서 일어날 일들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고, 그 중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위대한 성전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어떠한 외적의 침입에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아니라 자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믿음의 그루터기라도 건지기 위해서 부패한 이 유다 백성들을 멸망시키시고,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의 씨들을 정화하였던 것입니다.
II. 무너진 성안의 가족들
이렇게 하나님의 커다란 심판이 임했을 때 이 예루살렘성은 파괴되었고 무너진 성안에 있는 많은 가족들이 방황하는 모습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이 파괴되고 그리고 성전이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A. 성전이 무너질 때
알다시피 이것은 바벨론의 역사적인 침공을 통해서 아주 커다란 재앙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포위되고, 그리고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서 끝까지 항전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륙을 당했습니다. 성이 무너지고 그리고 성전이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낙관은 거짓임이 입증되었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피 끓는 예언이 바로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하고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왕국이 망했는데도 이기심에 빠져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무너지고, 성전이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는데도 그들은 이 난리 통에 자신들의 양식을 장만하기 위해서 이 거리, 저 거리 감추었던 재물로 양식을 사기 위해서 뛰어다니는 상황을 연출하였습니다. 이때 예레미야는 무너진 성전 앞에서 그 성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며 하나님이 나에게 골수에 사무치기까지 불을 주셨는데, 너희에게는 이런 슬픔이 왜 없는지, 그렇게 왜 없느냐고 물으면서 그는 더욱더 망한 이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통곡하며 이렇게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속에서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그래서 이 무너진 왕국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또 일하고자 하는 바가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현실은 비관적이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자신을 추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이 철저히 파괴되고 부서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방인의 칼날에도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산산이 훼파되었고, 모두 부서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산산이 성전이 부서질 때 사실 그것은 그 성전 안에서 생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교회를 판단하시고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내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들이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B. 자녀가 흩어질 때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렇게 성전이 훼파되고 산산이 부서지게 되었을 때 놀랍게도 그 여파는 가정에까지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흩어져 유리방황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하라 각 길 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손을 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고 훼파되었을 때 결국은 가정도 산산이 깨어지고, 어린 아이들은 혼미한 가운데 이 거리, 저 거리 방황하면서 죽음 가까이 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영적인 굶주림과 육적인 굶주림 속에서 그들은 가정으로부터 뿔뿔이 유리되어 방황하는 처지들이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교회와 가정이 이렇게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교회의 일부분이라고 부릅니다. 교회가 따로 있고 그 속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주님의 교회의 한 몸으로 지어져 가는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벽돌처럼 그렇게 하나, 하나 연결이 되면서 영적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 한 몸인 교회를 이뤄 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잘 다듬어 지고 깊이 변화되고 새롭게 되어서 주님의 교회의 벽돌 한 장의 용도로라도 정확하고 아주 쓸모 있는 존재가 된다면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분량 안에서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워 가는데 아주 크게 이바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의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교회의 아름다운 일부분이 될 때 그가 아내라면, 그가 결혼한 여성이라면 집안에서 가장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이요. 아이들의 어머니라면 바로 그 사람이 아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엄마요 그 사람이 결혼한 남성이라면 그렇게 교회에 아름다운 지체가 될 때에 그 지체를 가정에 갖다 놓으면 훌륭한 아비가 되고, 남편이 되고, 그리고 자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우연적인 경우에 있어서 아름다운 사람의 존재가 하나님의 교회의 아름다운 일부분이 될 때에 바로 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하고 아주 신실하고 아름다운 성도가 되었을 때 그는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한 부분이 되며 그런 성도들이 모였을 때 그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커다란 건물이나 아름다운 장식을 통해서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신자들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의 형상을 본받을 때에 그때에 그가 진정으로 교회의 아름다운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들은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신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구별된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그런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기 때문에 자신들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안전할 것이라고 하는 세속적인 희망이 믿음을 가장한 것입니다.
III. 무정부모와 유정부모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에 그들의 자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부모들은 죽임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자식들은 이 거리, 저 거리 혼미한 가운데 방황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정말 무정한 부모와 그리고 신앙 안에 정이 있는 부모의 대조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믿기지 않는 발언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A. 자식을 먹는 여인들
자식을 먹는 부모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인들이 어떻게 해서 자기의 열매, 곧 손에 받아가지고 있는 갓난아기 같은 그 아이들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가상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성이 포위되거나 기갈이 들었을 때에 사람들이 서로 서로 작정을 하고 오늘은 이 아이를, 내일은 저 아이를 잡아먹는 일들이 역사 속에 실제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들을 우리는 아주 먼 역사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동남아를 지배했을 때에도 얼마든지 그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대동아 전쟁 때 동남아에서 고생하던 많은 사람들이 느닷없이 어느 날 고래 고기 국이라고 그러면서 고깃국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전쟁 통에서 죽은 무수한 시체들을 그거를 뜯어가지고 끓여서 국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나이 먹은 우리들은 오늘날 자라나는 세대를 보면서 버르장머리가 없느니, 개념이 없느니 아니면 싸가지가 없느니 그렇게 우리들이 비난을 합니다. 옛날 우리 자랄 때는 안 그랬느니 하고 욕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옛날에 자라던 사람들은 지금 아이들처럼 잘 먹고, 잘 입고 그렇게 기름진 음식으로 자기 몸을 보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인격적인 사랑을 부모로부터 받았습니다. 물론 안 그런 가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률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때가 나았습니다.
부모들은 이른 아침으로부터 밤까지 그렇게 늦게까지 일을 하고, 노동을 해야 겨우 먹고 살았지만 가족들의 연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할 줄 알고, 특히 어미는 자식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것이 그것이 훌륭한 부모의 길이라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들은 뼈 빠지게 일해도 그 자기의 희생을 통해서 자식들이 올바르게 사람답게 자라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 좋은 교육을 받는 그것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4명이 결혼을 하면 한 사람이 이혼을 하고, 그 이혼한 사람들 중에 자식을 가지고 있는데도 자식의 행복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오늘 날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물질적으로 넉넉하지만 아이들이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말 필요한 것들을 부모를 통해 공급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사랑이 없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식을 먹는 무정한 여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 날에도 실제로 자기 새끼를 잡아서 그 몸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자기 자신의 행복을 자녀들의 행복보다 더 우월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자녀들을 희생해서라도 자기 자신이 행복해져 보려고 하는 그런 이기심들이 부모들의 마음에 가득 있기 때문에 오늘 날 우리의 자식들이 마음 둘 곳 없이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들어도 지나치지 않는 것입니다.
B. 네 마음을 쏟으라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방황하는 많은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 부모들이 과연 얼마나 기도했을까요? 그리고 그 마음속에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고, 가엽게 여기는 그 부모로서의 그 마음이 얼마나 우리들 가운데 충만한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정말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그리고 그 무엇인가 그 아이들이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이 여러분의 아픔처럼 느껴지는 적이 언제입니까? 여러분은 지금도 자녀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들입니까?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언약 백성으로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그 부모, 그 어미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오늘 성경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마음을 물같이 쏟아 놓으라. 네 눈에 강물처럼 눈물을 흘릴지어다’ 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자기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기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깨어 기도했더라면 그렇게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데 까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기도의 은혜를 회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간절히 기도 받지 못하는 그 아이들은 얼마나 가엾은 아이들입니까? 부모는 자신은 자신의 생을 열심히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고, 귀여움을 받으며, 그 부모로부터 자신의 행복과 생명이 부모 자신의 것인 것처럼 돌봄을 받고 부모로부터 섬김의 기도를 받지 못하는 자식들은 부모와 함께 살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고아인 것입니다. 이렇게 고아와 같이 버려진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도 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그리워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부모의 사랑, 그리고 형제들 속에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바로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 상황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도덕의 가치들이 산산이 무너져 버리고 그리고 우리를 이제까지 붙들었던 사회적인 가치들도 산산이 무너져 버리고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의 자녀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1. 초경에 부르짖어
선지자는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초경에 부르짖으라고 말입니다. 이 초경이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로쉬아쉬물로트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거는 밤중에 군인들이 보초를 교대로 서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보초 교대하는 시간을 가리켜서 초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밤을 3경으로 나누기도 하고, 4경으로 나누기도 했는데 3경으로 나누는 경우 이 초경은 밤 10시 정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깊은 밤이 아니라 이 얕은 밤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다는 이야기는 무슨 의미일까요? 자식들에 대한 염려와 그리고 짓밟힌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가슴아파하는 마음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성도의 그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컷 자다가 일어난 게 아니라 일찍 자리에 누웠으나 도저히 어른거리는 자녀들의 그 고통 받는 모습, 그 다음에 성전이 짓밟힌 이 현실을 보면서 잠을 이룰 수 없어서 그래서 잠 대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상한 심령을 물처럼 토해놓는 그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잠 못 이루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간절한 기도의 제목들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리고 그 기도의 제목이 자녀들을 위한 기도이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들을 위한 기도인지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선지자는 또 말합니다. ‘마음을 물같이 쏟아놓으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이 표현은 마음이 하나님 앞에 물같이 쏟아진다는 이 표현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의미가 심장합니다.
2. 마음을 물 쏟듯이
얼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같은 물의 성분이지만 고체입니다. 형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건 아무데나 옮길 수도 없고, 아무 그릇에나 담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모양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녹아내려서 물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둥그런 통에 담으면 둥그런 물이 되고, 네모난 통에 담으면 네모난 물이 되고, 길쭉한 통에 담으면 길쭉한 물이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쏟아져 내리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부정한 것이고, 포기한 것이고,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고집을 꺾고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명령하든지 그 뜻을 받아들일 준비에 대한 마음이고,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기로 다짐하는 자신의 마음의 녹아짐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녹아짐과 함께 이루어지는 한 마디의 기도는 얼음같이 차가운 마음으로 일 만 마디의 말을 쏟아놓는 것보다 더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물같이 쏟아지는 그 기도는 자신 속에 있었던 수많은 죄를 불태우고 아집과 고집을 무너뜨립니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하고 사랑이 없던 마음을 사랑이 가득 찬 마음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만들고 복수를 꿈꾸던 마음을 바꾸어 사랑과 용서의 마음으로 고쳐놓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꾸려고 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먼저 바뀌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물같이 녹아내리는 마음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죄인은 용서를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 악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악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비교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드넓은 사랑과 놀라운 은혜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 우리의 악, 우리의 모든 불순종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내가 중요하고 매우 가치 있는 존재라고 하는 그릇된 신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나는 티끌 같은 존재이요, 나는 주님께로부터 그 큰 사랑과 용서를 받았으니 내 인생은 이제는 내 것이 아닙니다 라는 고백이 있을 때 그는 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물같이 녹아서 무엇이든지 주님이 원하신 그 뜻을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마음이 물같이 녹아져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일까요?
이번에도 미국에 집회를 갔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참 많이 주셨어요. 하여튼 비행기를 6번을 갈아탔으니까 제가 얼마나 빨빨 거리고 다녔는지 아시겠죠. 참 많은 일들을 보았습니다. 정말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뜨려지고, 예배에 맨 처음 나올 때에는 근심과 염려에 찌든 얼굴로 나왔다가 말씀을 들으면서 얼굴이 펴지고, 마지막에 자기를 물같이 쏟아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태평양을 날아간 피곤도 잊고 잠자리나 모든 것에 있어서 불편함도 정말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죄인도 그렇게 죄인들이 깨뜨려지고 마음이 녹는 것이 기쁘니, 우리보다 비교할 수 없이 무한히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 마음이 녹아내리는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겠어요?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 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물같이 녹으며 쏟아질 때에 똑같이 우리의 심령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도 물같이 녹아내리는 것이 경험됩니다. 그래서 이제껏 나의 불순종하던 삶, 악한 생활, 마음의 완고함을 보며 굳어졌던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물같이 쏟아질 때 그 분도 사랑과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당신의 마음이 물같이 쏟아지는 것을 우리는 동일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이 울어야 합니다. 나는 이 말씀을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제법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산다고 살았습니다. 이 중의 어떤 사람들은 놀지 않고 꾀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주님을 섬기며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좀 더 하나님 앞에 진실 되어서 우리의 마음을 주님 앞에 물처럼 더 많이 쏟아 놓았더라면 우리의 회심치 못한 자녀들은 이미 회심하였을 것이고, 아직까지도 주님 앞에 변화 받지 못했던 우리의 육신의 자식들은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주일에도 이 거리, 저 거리를 핍절한 영혼으로 방황하기 보다는 주님의 은혜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주일을 지키며 하나님 말씀 앞에 위로와 용기를 얻는 자녀들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육신의 열매인 자식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붙여준 많은 영적인 자녀들인 우리의 영혼들, 교회에서 우리에게 맡겨준 영혼들, 그들을 우리의 자식처럼 마음에 품고 우리가 물같이 우리의 마음을 그들을 위해 쏟았더라면 주님의 은혜에서 소외된 채 멀리 떠났던 영혼들은 아마 여전히 주님의 교회의 아름다운 감람나무들로 자라고 있었을 것이고, 아직도 변화 받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많은 영혼들은 그들을 위해 마음을 쏟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지가 이미 느껴지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들이 그들을 위해 마음을 물같이 쏟고,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충분히 울어주지 못했을 때에 그들 자신도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눈물 흘릴 수 없었기에 그들은 주님은 사랑했지만 사람들로부터는 버림을 받은 체 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존재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자기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입증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들이 당신의 사랑의 빚진 자 되어 이런 영적인 자녀들, 자신의 육적인 자녀들을 위해서 대신 눈물을 흘리며 울어주고 마음을 물같이 쏟으며 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 은혜와 이 사랑을 알게 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를 모두 버리셨습니다. 자신을 모두 물같이 녹여 우리 속에 스며들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일부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덕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인바 되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실 때에 그의 마음은 항상 이렇게 물같이 녹아내리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처럼 우리의 죄 된 모습 때문에 안타까워 녹아내리는 그런 종류의 녹는 마음이 아니라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 자신을 보내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을 자신의 인격을 통해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있는 수많은 무지하고 몽매한 영혼들을 위해서 그 분의 마음은 물같이 녹아 내렸던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이기심과 일체의 사랑이 없이 그렇게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늘 고민하고 염려하셨기 때문에 그 분의 마음에는 우리를 위하여 물같이 녹아내리는 심령이 있었고, 그 분의 눈에는 우리를 위해 그렁그렁한 눈물이 가득 찼던 것입니다.
3. 주의 얼굴 앞에서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마음을 물 쏟듯 쏟으며 우리의 새끼들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 안에서 누군가 돌봐주어야 할 그 영혼들을 위하여 우리들이 그렇게 마음을 쏟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잃어버린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자신을 도구로 써달라고 주님의 마음을 재현하는 사람이 되어서 마음을 물같이 녹여 그들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한 부분처럼 스며들 수 있다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루어질까요?
미국에 갈 때마다 우리가 미국에 있는 교회를 위해 많이 기도해 된다는 것을 날마다, 날마다 경험합니다. 끊임없이 교회에서 이어지는 추문들과 더러운 돈 싸움, 네 명의 목사가 모여 차를 마시고 있는데 한 명은 나고 세 명의 목사 중 두 사람이 교회의 장로들과 법원에서 소송 중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가슴 아픈 일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찢으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 마음이 물같이 쏟아져 내려 본 적이 없는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그리고 그 더러운 싸움으로 자신의 유익을 채우려고 하는 쓰레기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단의 역사가 나라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름만 대면 유명한 도시에 제일 큰 교회는 모두 소송 중이거나 주일 예배 시간에 하도 쌈질이라서 경찰이 정돈을 하지 않으면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지경입니다. 시카고, 뉴욕, 워싱턴 뭐 이름을 대면 수많은 도시들이 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음을 물같이 한 번만이라도 쏟는다면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리고 미운 사람들을 세워주기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고, 그리고 자신이 찢어질 지언정 그리스도의 몸은 치료되기를 바라는 갸륵한 마음이 있다면 어찌 하늘 아래 이렇게 끔찍한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날 수 있겠어요.
IV. 결론 : 네 자녀를 위해 기도하라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그 마음은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세상과 망가진 언약 백성들을 위하여 녹는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주님 앞에서 그렇게 마음을 물같이 쏟아놓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수많은 여러분의 인생의 기도의 제목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영혼 깊이 여러분의 손을 넣어서 그 마음을 만져 보십시오. 녹지 않고 단단하게 돌처럼 만져지는 암덩어리와 같은 부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여러분의 기도가 폭포수처럼 쏟아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녹아진 기도, 하나님 한 분께 시선을 고정한 기도, 그 분의 영광 이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는 것이 없는 주님께 목 메인 기도는 충천하는 화염과 같습니다. 어둠의 세력들을 꺾고 불의의 세력들을 멸하며, 환란과 난관을 이기는 용기와 지혜를 줍니다. 그렇게 기도다운 기도를 드리면서 힘 닿는 데로 주님을 섬기고, 영혼들을 돌보며 자기가 섬길 수 있는 일들은 섬기고, 갈 수 없는 곳은 사람을 보내고 그렇게 해서 주님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본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교회의 영적이니 자녀들을 위해 교사들이, 영혼을 돌보고 있는 구역장들이, 그들을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가 더 많이 마음을 물같이 쏟고 그들의 영혼의 진정한 행복 이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자신의 마음을 끄는 것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마음을 물같이 쏟으며 기도했더라면 주님의 교회는 얼마나 더 아름다운 모습이 되었을까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렇게 마음을 물같이 쏟는 기도 세계를 가지고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가정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영적인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기도 생활을 회복하고, 그 기도의 은혜 안에서 열렬히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1.언약백성과 기도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일을 행하는 여호와,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여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애 33:1-9).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기 직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에워싼 가운데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보내신 뜻을 상기시키셨고, 그들로 불순종과 악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촉구하셨습니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경고가 주어졌으나 그들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불순종하는 우상 숭배의 길로 나아갔으니 이는 그들의 마음에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임박한 심판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고, 잠시 후면 이 성이 부서지고 성전도 모두 훼파될 것이었습니다.
II. 언약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
이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시위대 뜰에 갖혀 있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와 포로귀환에 이르는 앞으로 전개될 역사의 전 과정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A. 진노: 버려두심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 하나님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방식을 네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덕스러운 삶을 살면 그것이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공식을 우리가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반항하면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이 이것도 막아주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덕스러운 능력은 없지만, 그러나 악을 행할 능력은 충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형언할 수 없는 수많은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에 품은 죄와 악들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억제하시고 그것을 막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의 힘이 워낙 크고,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에 현저히 위반되었다고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악한 의지대로 하나님을 떠나 살게 하심으로서 그 고통을 맛보게 하셔 하나님 안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함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조차도 당신의 마음속에서 그들을 내버려 두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입니다. 로마서 1장은 이방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커다란 진노가 그들을 마음의 원하는 데로 살도록 정욕에 내버려 두시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불신자들, 비 언약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은 절대적 방임인가 하면 언약 백성들을 내버려 두시는 것은 상대적인 방임입니다. 그래서 잠시 내버려 두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을 버린 악의 결과가 얼마나 쓰라린지를 몸소 체험하게 하심으로 인격적으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지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악으로 밀어 던진 것이 아니라 악으로 달려가려고 하는 그들을 붙들고 있었던 그 붙드신 손을 잠시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심각한 악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것은 곧 이어 바벨론 멸망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앗수르에 의해 북왕국이 망하고, 남왕국 유다가 이제 바벨론에 의해서 파멸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인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지 모릅니다. 무슨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에 있어서 일체의 속박을 느끼지 않고 양심의 가책마저 멈췄을 때 그것은 분명히 여러분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잠시 여러분을 버려두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속에서 항구적인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얻으려고 했던 그 자유는 잠시 우리에게 해방의 기쁨을 가져다주지만 그 해방의 기쁨이 끝나고 난 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속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고 그 속에서 이어지는 비참한 포로생활 속에서 마음이 겸비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통 받는 순간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부르짖으며 자신들을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빌게 되는 일들이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B. 치료 : 고쳐주심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로 그들을 치료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고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의 풍부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이 고쳐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고쳐주시는 치료의 과정을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신적인 성품, 두 가지를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평강의 풍성함입니다. 여기에서 평강이라고 하는 샬롬은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개인의 내면 속에서 이루어지는 안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샬롬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것까지를 포함하는 안녕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욕망에 이끌려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기도와 말씀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마음의 평강입니다. 이 세상이 요동치고 그리고 험한 물결이 출렁거리는 위기와 시련 한복판을 지날 때에도 주님과 평화가 있을 때에는 내 마음속에 평강이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거기에서 나오고 천만인이 나를 에워쌀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용기가 바로 그 하나님과의 평화, 그로 말미암는 모든 지각에 뛰어나는 하나님의 평강을 현재적으로 누리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기도생활, 말씀생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바로 이렇게 마음의 평강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입니다. 불안과 동요에 자신의 마음은 굴복하게 되고 이 속에서 거짓된 평화를 잠시 맛보고자 하는데 그것이 이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에 탐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쾌락에 탐닉하는 많은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영원하고 무궁한 평강을 흉내 내고, 그것을 하나님 바깥에서 누려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강은 결코 오래가지 않고 이 평강 뒤에는 거짓된 평강이 몰고 올 더 큰 악의 심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자들을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치료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이신 것과 그리고 자신과 평화를 맺는 모든 사람들이 험한 풍랑과 폭풍우 속에서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이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그들에게 풍부히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을 예고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성실하심을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성실하심은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에 기초하여 인간과 맺으신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신적인 행동의 일관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비와 사랑에 기초한 하나님의 행위의 신적인 일관성, 언약 없이는 이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성실하심은 자연의 모든 세계에도 나타나지만, 고유한 의미에서는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나고 이러한 언약 관계 안에서의 성실하심을 가르쳐서 우리는 신실하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처럼 여러분도 주님의 은혜를 배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악으로 갚고, 하나님이 주신 그 놀라운 기회와 달란트들을 주님 앞에 배신으로 갚을 때가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런 생활을 계속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형통하게 내버려 두신다면 그 내버려두심은 아마 영원하고 절대적인 포기일 것입니다. 그러면 한때는 사랑하고 돌보셨던 하나님이 여러분이 악하기 때문에 버리셨다면 어떻게 그 분을 신실하신 하나님, 성실하신 주님이라고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은 여러분이 불순종하고 악을 행할 때에 여러분을 종아리를 걷어 피가 나도록 회초리로 여러분을 때리십니다. 피가 맺히도록 얻어맞을 때 여러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만 때리시는 주님의 마음에는 피가 흐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바로 회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안하게 있을 때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의식하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계속해서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그들에게 들려주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던 이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옥 속에 가두었을 때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의해 철저히 멸망당하고 파괴당하여 예루살렘 성이 겁탈당한 아녀자와 같고, 성전이 파괴당하여 부서진 버림받은 집과 같았을 그때에 오히려 그는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지신 자비로우신 성실하심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을 멀리 떠난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마음에 피가 흐르면서도 회초리로 모질게 때리시는 그 끔찍한 징계를 통하여 범죄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고 역사 속에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기까지 부를 수 없었던 노래를 애가 속에서 이 선지자가 부른 것입니다. 아무 희망이 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내동댕이쳐진 것같이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심판받은 한 마당 위에서 그는 범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노래들을 불렀던 것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오늘도 주님의 은혜에서부터 멀어져 방황하는 여러분은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서 그 안에서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어 보려고 하는 모든 노력들은 헛수고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C. 용서: 회복시킴
주님은 이렇게 당신의 평강과 성실의 풍성함을 보이시면서 아울러 그들에게 세 번째로 용서를 약속하셨으니 이는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1. 용서
한때는 주님의 마음에 못 박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끔찍한 70년의 포로 기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섭리 속에서 그들을 다루신 후, 때가 되매 당신의 종들을 보내 포로의 기간이 끝난 것을 미리 알리시고,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언약 백성들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심으로서 그들을 당신과의 관계 속으로 불러들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을 후회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는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불순종과 죄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그때마다 하나님은 용서의 길을 예비하셔서 우리를 다시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살아온 인생의 역사는 하나님의 용서를 양식 받아 살아온 우리의 삶이고, 그렇게 악을 행하고 짐승처럼 모질고 표독하게 주님께 대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의 은총 아래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로 말미암아 우리의 관계가 지탱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언약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언약 관계 속으로 부르셨을 때, 특별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성취하시고, 우리를 예수의 머리에 붙여 한 지체로 삼으셨을 때 은혜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특권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 앞에 잘못했든지 중심으로 용서를 빌면 하나님은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아들이 우리를 위해 쏟으신 그 공로를 의지하여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로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는 용서받기에 너무 무거운 죄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오지 않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범죄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명예를 현저히 해치고 스스로 불행한 길로 가는 것이지만, 만약에 그들이 하나님께 언약 백성으로서 돌이킨다는 보증이 있기만 하면 오늘 그들이 지은 그 끔찍한 죄들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경험함으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이렇게 불러 우리 가슴 속에 지워질 수 없도록 깊이 새겨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그 끔찍한 죄에서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무엇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모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에 빚진 자가 되게 만들었습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같은 신적인 강제력에 사로잡히게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로부터 또 다른 구약의 율법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저주와 심판이 무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같이 죄인 중의 괴수요, 흉악한 인간 중에 가장 포악한 핍박자였던 자신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영혼 깊은 살 속에 ‘둘로스 크리스투’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하는 그 놀라운 사실을 지울 수 없도록 아로 새겨 놓으셨기에 그는 신적인 강제력 속에서 복음의 부채 의식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방법입니다.
주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들은 주님께로부터 지극히 큰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었고,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했던 사람들은 끊임없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것만큼 나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의 필요성을 주기도문으로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주위에서 아주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현저한 용서하시는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곧 같은 죄악에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의심합니다. 아마도 얼마 전에 그들의 회개는 가식이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진실하게 회개한 것도 가식이 아니라 사실이고, 또 은혜에서 금세 미끄러져 믿을 수 없을 만치 과거로 돌아간 것도 사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2. 정결
이 둘 사이의 모순이 바로 정결의 개념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여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용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깨끗케 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를 좀 더 설명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기에 우리에게 침묵으로 비췹니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상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상당한 기간 동안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아마 음주와 폭음으로 말미암아서 위장이 상하였을 것이고, 허랑방탕하였다고 했으니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창기들에게 들락거리면서 어쩌면 몹쓸 성병까지 옮았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이 그에게 경험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회개했습니다. 양식이 주려서 굶주려 죽게 된 그때에, 그래서 쥐엄 열매조차도 주는 이가 없는 그때에 아버지의 풍족한 집을 생각했고, 자기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이은 나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충심으로 회개했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고, 아버지의 집에 품군 중 하나로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매달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갔습니다. 동구 밖에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그를 뜨겁게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들은 아버지께 용서를 빌었고 아버지는 그의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아버지가 뜨겁게 끌어 앉는 그 순간 그 몹쓸 위장병과 성병 같은 것들이 단번에 치료되었다고 믿을 근거는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정상적이라면 그는 아버지의 집에 돌아간 후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자숙하며 아버지가 비록 좋은 옷과 가락지를 끼어주어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을지라도 겸손하게 아버지께 복종하고 품군 중 하나처럼 살려고 했을 것이며, 정기적으로 의원에게 치료를 받으며 자신의 몸을 회복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결인 것입니다.
한 순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 때에는 그 죄가 끔찍하게도 밉지만 그 속에서 동일한 죄를 향해 기울어진 습성은 그렇게 뜨겁게 흐르는 한 번의 눈물로 씻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여야 합니다. 자신이 볼 수 없는 자신의 뼛속 깊은 곳에까지 배어 있는 그 타락한 본성과 죄 짓기를 원하는 악한 성향들을 말씀의 빛으로 탐사하여 발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매일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로 맨 처음 회개하고 돌아왔던 그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뜨겁게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 용서받게 만들어 주셨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그렇게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 속에 남아있는 죄의 뿌리를 미워하며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동안에만 자신이 돌이킨 그 회개의 정신대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매일 매일 주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보좌에 흐르는 새롭고 산길을 걸어 뿌리신 핏 길을 지났습니다. 그의 찢으신 육체로 갈라진 휘장을 지나 맨발로 그 핏 길을 걸어 보좌 앞에 새롭고 산길에서 무릎을 꿇어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모두 씻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주님의 놀라운 사랑은 오직 시작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한번 주님의 사랑을 받고 다시 죄로 돌아가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겸손해야 되는지,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지, 얼마나 하나님의 은총에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하는지, 얼마나 자기를 미워하고 십자가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날마다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D. 기쁨: 강복하심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신 이 사람을 정결하게 하시면서 그에게 기쁨이 되게 하시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강복하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게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삶의 목표를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에 두지를 않습니다. 종종 바보 같은 교인들이 내게 와서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담배를 피우면 죄일까요? 주일날 예배만 드리고 오후에 집에 가서 쉬면 죄를 짓는 것입니까? 주일날 예배만 간단하게 드리고 평일 날은 교회 한 번도 나와서 봉사를 안 하면 하나님이 벌주실까요?’ 그거 왜 그렇게 질문을 합니까? 부부가 같이 살다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에는 내 아내에게 어떻게 해 줄때 아내가 기뻐할까? 이렇게, 이렇게 일을 하면 내 남편이 기뻐할까? 이렇게 고민을 합니다. 그러다 살기가 싫어지면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저 인간이 성질을 부리겠지. 내가 이렇게 이렇게까지 하면 저 여편네가 곤조를 부릴 꺼야. 이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성질과 곤조가 안 나올 때까지는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 사라진 마음에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나는 그 질문을 거꾸로 해 보라고 물어요. 그럼 자신들이 한 번씩 스스로 질문한 다음에 내 대답도 안 듣고 그냥 가요. 거꾸로 질문합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까요? 주일날 예배만 달랑 드리고 축도하기 전에 집으로 내빼서 소파에서 잠옷 바람으로 뒹굴며 티비를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죠?’ 이렇게 질문하면 이미 답이 다 나왔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구원을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합니까? 낭떠러지가 아니고 벼랑 끝인 한 끝까지 가보겠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확장 되어서 결국 자신의 인생을 벼랑 끝에 세우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벼랑으로 가려고 결심하고 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아는 성도의 질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찬양)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비록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의 불꽃과 같지만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그래도 나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이렇게 살아있는 이것이 없는 것보다도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기를 원하는 소원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벌 받지 않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려고 주님이 창조하셨지만, 당신을 멀리 떠나서 죄로 어두워진 이 땅에 작은 반딧불이라도 하나 밝혀 사람들에게 희미하게나마 빛이라도 던져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 같이 쓸모없는 사람을 위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자기를 다 주심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위해 구원해 주신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최대의 소원이 주님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받기에는 너무 큰 죄악이라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충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 값없이 거저 용서해 주심으로 예전에는 당신의 마음에 슬픔이었던 사람들을 기쁨이 되게 하시며, 당신의 가슴에 못 박던 사람들을 오히려 스스로 자기를 못 박아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는 사람들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원리인 것입니다.
III. 기도하는 자에게 알리심
이런 놀라운 언약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의 비밀을 알게 하시도록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의 손길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A. 부르짖는 자와 교통하심
주님은 부르짖는 자와 교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음은 마음을 하나님께 오로지 하고 그 분께 쏟아놓는 마음을 물같이 쏟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이것은 꼭 우리의 물리적인 외침일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을 쏟아 놓는 그 한 맺힌 기도의 울부짖음은 신음으로도 들릴 수 있고, 언어 없는 탄식으로도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리로 조용한 것이 정으로 소리치지 않는 것이 아니요, 목소리로 높여 소리치는 그것이 반드시 정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 중심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는 사람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녹아 하나님 앞에 자신을 쏟아 붓는 간절한 부르짖음의 이 기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부르짖는 사람들 가장 가까이 계셔서 당신의 위대한 일들을 그들에게 미리 보이시고 또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제게 성경을 가르쳐 주신 목사님 가운데 배 명준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남대문 교회에서 42년 동안을 목사님으로서 시무하신 분입니다. 당신이 유아세례 준 그 사람을 장로로 안수한 적이 있다고 하니 얼마나 긴 세월동안 목회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분이 성경을 가르쳐 주실 때에 6살 때 자신의 신앙의 간증을 들려주실 때, 저는 기도에 관한 어떤 사실을 깨달으며 큰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을 가졌던 목사님은 주일학교에서 교육을 철저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6살 때 동네 사람들은 항상 그 마을 어귀에 있는 수 백년된 큰 나무 앞에 와서 철따라 떡을 해 놓고, 돼지머리를 갖다 올려놓은 채 구부렁, 구부렁 절을 했답니다. 그것을 보면서 마음속에 얼마나 분노가 치밀었는지 분명히 하나님은 하나님 한 분 이외에 경배 받을 분이 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고, 주일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웠는데 왜 지각이 있는 어른들이 아무것도 아닌 나무토막에다 대고 저렇게 경배하고 오히려 경배해야할 하나님은 멸시하는 것일까? 6살 먹은 아이가 매일 그 서낭당 밖에 있는 그 나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나무 아래에서 많은 어른들이 절을 합니다. 저는 너무 속상합니다. 어른들이 이 나무를 섬기지 못하도록 주님이 이 나무를 없애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6살 먹은 아이가 6개월을 기도를 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 번개가 치고 무서운 바람이 불던 날 어마어마한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동네에 높은 다른 곳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 나무에 벼락이 떨어져서 흔적도 없이 그 나무가 홀라당 불타버렸답니다. 동네 사람들은 천지신명이 노한 것이라고 두려워 벌벌 떨었지만, 이 아이는 그렇게 불타버린 나무 아래 가서 기도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고, 70년이 지난 세월까지도 그때 그 끔찍하고 엄청난 사건은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신 것이라고 굳게 믿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나는 17년 동안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어떤 때는 쉽고 기초적인 교리도 있었지만,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어려운 교리들도 있었죠. 많은 사람들이 이성의 능력이 모자라서 깨닫지 못하고 어리둥절할 때에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다시 두 번 설명하지 않아도 놀랍게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견고한 신앙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기도 속에 마음을 쏟지 않는 사람보다는 적은 지식을 가지고 기도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쏟는 사람이 훨씬 거룩해지고 견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지식을 가지고 많이 마음을 쏟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큰 나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겠죠. 거목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작은 새들을 그 나무 아래 깃들게 하고 물을 머금어 메마른 땅에 대지를 두루 적시는 산이 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교회는 마치 산과 같습니다. 개척할 때에는 민둥산입니다. 거기에다 한 그루, 두 그루 회심의 나무를 심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머금으며 큰 나무로 자랄 때, 어마어마한 큰 산을 땅 속에서 서로 뻗은 뿌리들이 움켜쥐고 산 전체를 휘감을 때 그들은 거대한 삼림을 이룹니다. 나무가 어렸을 때는 나무가 산의 신세를 지지만 그렇게 거목이 되고 나면 산 때문에 나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무 때문에 산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 주님이 여러분을 예수 믿게 만드신 궁극적인 이유인 것입니다.
B. 기도하는 자를 기뻐하심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와 교통하실 뿐만 아니라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는 감추어진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도 안 보여주고 감추어 놓으신 것을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인데 이는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주님을 가장 잘 아는 길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사랑하지 않을 때 볼 수 없었던 주님의 진리들을 발견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성장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불신자들이 포기하는 그 지점에서 우리도 포기하고, 불신자들이 잔재주를 부리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그 지점에서 정면대결을 피하고 돌아갈 길을 찾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알다시피 저는 강원도에서 자랐습니다. 우리 초등학교 때는 숭인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5시 반쯤 타고 새벽 다섯 시 반쯤 차를 타고 떠나면 오대산 밑에까지 가는데 오후 1시 반이나 2시 돼야지만 도착했습니다. 그러니 거의 한 9시간 내지 10시간 가까이 걸렸던 것입니다. 어쨌든 강릉까지 가는 것은 해뜨기 전에 출발해서 오후가 뉘엿뉘엿해야지만 도착하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오대산 아래까지 1시간 40분이면 갑니다.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물론 도로 포장이 되고 길이 넓어진 것도 있습니다만 옛날에는 모두 다 언덕이 나오면 돌아가고, 산이 나오면 둘러가고, 둘러갈 수도 없으면 뱅글뱅글 돌면서 그렇게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다시 내려가는 그런 끔찍한 여행길이었습니다. 지금은 과학이 발달하고 자본이 있으니까 강이 나오면 다리를 놔 버리고, 산이 나오면 돌아가는 길도 만들 수 있는데 그냥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오대산 가는데 제일 긴 터널은 3.3km 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길로 거의 십리를 굴을 뚫어서 한 번에 통과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루 종일 넘어야 될 산을 불과 15분 사이에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강릉길에 굽이굽이 치는 길이 아흔 아홉 구비라고 해서 차를 몰고 한 번 몇 번인지 세어 봤더니 아흔 아홉 구비는 과장이고 일흔 일곱 구비였습니다. 일흔 일곱 번을 회전을 하더라구요. 그 길을 옛날 길은 더 돌았으니 아흔 아홉이었을지 모르죠. 한 번에 뚫으니까 강릉까지 두 시간 반이면 놀면서도 갈 수 있을 정도의 길이 생겼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굴복하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굴복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모든 두려움과 불안과 좌절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고 그 분과의 평강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삶과 죽음 사이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리고 주님의 능력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에게 능치 못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도전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돌아와 용서를 비는 자들에게 사죄의 은총을,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은혜의 능력을, 그리고 갈 길을 몰라 자신의 무지함을 고백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 앞에 인생의 심각한 위기를 맞아서 방황하고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절망하면서도 그 에너지를 기도에는 쏟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서 자신의 방황하는 모든 마음을 그대로 구하고, 그리고 주님 밖에는 자신을 위로할 이가 없음을 분명하게 깨닫고, 사람과 세상에 걸던 모든 소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종종 양심이 여러분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양심의 송사를 받아 주님 앞에 기도하러 나아가는 그 길에 방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의 좋은 행실과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그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길을 당신의 몸을 갈라 피를 뿌려 우리를 위해 열어놓으신 그 핏길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보좌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실하고 충성되게 살 때 그때만 주님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도전해 넘을 수 없는 생의 벼랑 끝에서, 절벽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전히 돌아오도록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에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 만 바라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을 쏟아 아버지 앞에 기도의 보좌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이길 수 없는 현실을 이기게 만드시고, 도저히 극복할 길이 없는 그 난관을 생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극복하게 하시고, 이제는 인생의 끝이 이르렀다고 하는 벼랑 끝에서 마음을 쏟고 이 낭떠러지의 그 천해만해 한 것을 보며 두려워하는 대신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셨지만 그 분을 배반하고 벼랑 끝까지 걸어오게 된 자신의 악함을 인해 거룩함 앞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어깨위에 날개를 달아 그 절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향해 날아오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III. 결론: 기도하라
나는 이렇게 해서 여러분에게 11번에 걸친 기도 시리즈의 막을 내립니다. 설교의 시리즈는 막을 내렸으나 여러분의 기도생활의 시리즈는 막을 올려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십시오. 여러분이 방황하고 때로는 넘어지나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인 것을 마음을 쏟는 기도 속에서 보여주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의 피로 여러분을 사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신실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주님 앞에 그렇게 신실한 사람들이 되어서 여러분이 한 사람 한 사람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생활을 회복하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