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필요할 때
(2015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2015년 10월 25일-12월 27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6년 2월 22일
목 차
기도가 필요할 때 1 (2015.10.25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2 (2015.11.01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3 (2015.11.8 주일오전설교)
1. 한적한 곳을 찾으라(눅 5:16) 2015.10.25 주일오전설교 1
기도가 필요할 때 4 (2015.11.22 주일오전설교)
2. 예수님의 기도생활(눅 11:1) 2015.11.1 주일오전설교 10
기도가 필요할 때 5 (2015.11.29 주일오전설교)
3. 기도를 위한 작별(막 6:46) 2015.11.8 주일오전설교 18
4. 회막으로 나아간 사람들(출 33:7) 2015.11.22 주일오전설교 25
기도가 필요할 때 6 (2015.12.6 주일오전설교)
5. 기도생활의 감화(눅 11:1) 2015.11.29 주일오전설교 32
6. 기도로 나타난 믿음(눅 18:1-8) 2015.12.6 주일오전설교 40
기도가 필요할 때 7 (2015.12.13 주일오전설교)
7. 죄인을 높이실 때(눅 18:9-14) 2015.12.13 주일오전설교 49
8. 교회가 기도할 때(행 12:5) 2015.12.20 주일오전설교 57
기도가 필요할 때 8 (2015.12.20 주일오전설교)
9. 모여서 기도할 때(행 12:11-12) 2015.12.27 주일오전설교 64
기도가 필요할 때 1
기도가 필요할 때 1 (2015.10.25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2 (2015.11.01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3 (2015.11.8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4 (2015.11.22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5 (2015.11.29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6 (2015.12.6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7 (2015.12.13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8 (2015.12.20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9 (2015.12.27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1) 2015. 10. 25. 주일오전예배
< 한적한 곳을 찾으라 >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 5:16)
I. 본문해설
- 예수께서 나병 들린 자를 고치실 때
- 그 소문이 퍼져 많은 무리가 모일 때
- 말씀 듣고 병 고침 받고자 함
- 예수님의 이상한 반응: “물러가심”
- 성공에 취하기 쉬운 인간과 기도 생활의 태만함
- 분주한 몰입과 산만한 마음이 기도의 적임
- 살아가는 삶 vs 끌려가는 삶
II. 바쁠 때 하신 일
A. 물러가심
- “자신을 철수함‥”(ὑποχωρῶν) 일로부터 격리
- 일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심
- 섬김의 번성과 많은 무리들이 진리를 찾음
- 성공에 감격하기보다 하나님 대면하심
- “물러감” 거룩주 위한 마음의 여유
- 충성스러운 삶은 부지런한 생활임
- 매 순간 주 위해 헌신하며 살아야 함
- 여유로운 삶이 모두 주님 찾는 것 아님
- “썩어져 죽느니 닳아서 죽겠다”(조지 윗필드)
- “죽도록 섬기고 죽게 될 때 기도하라”(찰스 스펄전)
- 물리적 바쁨과 한가함보다 마음의 공간 필요
- 시시때때로 주님을 바라보는 영혼의 응시
- 마음의 공간은 상황 아닌 사랑에서 옴
- 주님 사랑하는 자 세상에 여유 있음
- 가치가 작은 일들에서 마음을 철수하라
- 주께 붙어 있기 위해 세상에서 분리가 요구됨
B. 한적한 곳에서
- 그 광야 속으로(ἐν ταῖς ἐρήμοις)
- “고독한 곳”(NIV: to lonely places-세상과 구별)
- 벌판 많은 이스라엘과 관광객 조난
- “광야”(ἐρήμοις)는 Heb.
- 하나님은 고독한 자들의 마음에 찾아오심
- 거룩한 고독은 하나님을 찾게 한다
- 세속적 고독은 하나님 떠나게 만든다
- 거룩한 고독은 하나님의 은혜 산물임
-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
- “상함”은 a. 율법의 작용 b. 허무의 직시로써
- “통회함”은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 모세, 엘리야, 요한, 예수, 바울과 광야
- 하나님 대면할 마음과 공간 찾으라
C. 기도하심
- 성공과 명성에 취하는 대신 기도하심
- 말씀을 듣고 병고침 받으려는 자들을 떠남
- 주님은 일로부터 해방 아닌 기도를 위해서
- 우리는 일로부터 해방되어 쉬기 위해서
- 많은 휴식이 거룩한 사역을 방해함
- 섬김과 휴식의 기계적 배분보다 마음의 초점
- 번영과 성공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봄
- 인생을 평가하는 다른 가치관을 요구함
- 무죄하신 예수님도 기도하셨음을 기억하라
-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할 상황이 찾아온다
- 기도는 단지 상황 개선의 수단이 아님
- 거룩한 친교 속에 주님을 즐거워 함
III. 적용과 결론
- 지금은 마음의 온갖 얽매인 것을 풀 때임
-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늘 향해 날자
- 기도로 삶을 이끌어가고 환경을 개척하자
- 힘들 때마다 예수를 생각하며 기도하자
기도가 필요할 때(2) 2015. 11. 2. 주일오전예배
< 예수님의 기도생활 >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I. 본문해설
- 주기도문이 주어진 배경을 보여줌(마6장)
- 스승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던 풍습
- 마태복음에는 산상수훈 속에서 내용만 등장함
- 제자들에게 기도의 방식을 가르쳐 주신 문맥에서 등장함
a. 외식 b. 은밀함 c. 중언부언하지 말 것
- 누가복음에는 역사가의 시각으로 배경을 기술함
- 예수님의 기도생활에 감화 받은 제자들의 요청
II. 예수님의 기도생활
A. 몸소 기도하심
- “예수께서” 기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음
- 공관복음에 예수님 기도 기록 17회(마4+막3+눅10)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기도하신 이유
a. 인성과 신성 b. 연약함을 짊어지심 c. 모본을 보여주심
- 하나님 아버지를 의존하시는 삶의 진수를 보여줌
- 남의 섬김 기도는 스스로 기도할 의무를 대신하지 못함
- 생각 속의 말이 아니라 기도를 실천하라
B. 환경을 이기심
- “한 곳에서”(ἐν τόπῳ τινὶ) 기도하셨다고 기록함
-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의 다양성
a. 산(마14:35) b. 광야(막1:35) c.강(눅3:21)
-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심(마8:20)
- 일이 기도를, 기도가 일을 방해하지 않으심
- 환경은 기도를 도와주지 않음을 기억하라
- 세상은 신자에게 편히 쉴 고향 아니라 분투해야 할 타국 땅임
-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환경에 굴복하지 말라
C. 기도에 헌신하심
- “기도하시고 마치시매”(ἐπαύσατο)
- 기도하고 휴식을 취하셔야 할 정도로 힘을 쓰심
a. 몰입에 의한 소진 b. 장시간의 기도
- 마음으로부터 기도를 길어 올리는 집중
- 기도의 경륜과 마음과 본성을 바꾸시는 방법
- 이방종교의 기도와 기독교 기도의 차이점(치성 드림 아님)
- 죄 없으신 예수님의 마음 쏟으신 기도를 생각함
a. 순결한 마음일수록 기도에서 쏟아짐
b. 예수님의 성결과 우리의 죄 보여줌
- 마음을 모아서 몰입하는 기도를 드리라
III. 적용과 결론
기도가 필요할 때(3) 2015. 11. 8. 주일오전예배
< 기도를 위한 작별 >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막 6:46)
I. 본문해설
- 오병이어 기적과 풍랑 사건 사이에 위치
-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높임을 받으심
- 정치적 메시야에 의한 해방을 기대
- 임금 삼고자 하실 때 예수님의 반응
- 예수께서 세우고자 한 나라는 영적임
II. 기적과 열광의 때 하신 일
A. 작별하심
- 예수께서 열광하는 무리를 떠나심
- 무리들과 헤어지는 동안 제자들 떠나보내심
- 제자들로 배 타고 뱃새다로 가게 하심
- 남은 무리와 작별하시고 산으로 가심
- 백성들이 열광하는 때에 예수님 홀로 계심
- 무리로부터 자신을 철수하듯 사람과 작별하심
- 하나님만을 응시하기엔 너무나 분주한 우리들
- 영혼의 응시는 온전한 사랑 안에서 이뤄짐
- “떠나라” 때로는 사람의 도움 요긴함
- 사랑하는 이들과 작별할 용기가 필요함
B. 기도하심
- “기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을 향한 마음
- 번영, 성공, 평판에 마음 뺏기지 않음
- 자신 뜻 아닌 하나님 뜻 이루기 위해
- 기도는 역경과 난관 때만 필요한가?
- 기도는 단지 목적 성취의 수단 아님
- 삶의 동기를 순화하고 목적을 오롯이 함
- 인생의 의미는 곧 하는 일의 크기가 아님
- 삶에는 순전치 않은 동기들이 많이 섞임
a. 진리의 빛 b. 삶의 적용 c. 간절한 기도
-하나님이 낯설어질 때와 마음의 조율
-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누군지를 성찰함
- 간절한 기도로써 모호한 경외심이 구체화 됨
- 같은 쇠라도 벼리어진 촉끝이 필요함
- 기도로써 추상적인 사랑이 구체화됨
- 순종할 힘으로써 변모되는 내적 과정
C. 산에 가심
- “그 산속으로” 마음을 쏟을 환경을 찾으심
- 경건한 슬픔의 좋은 환경은 외로움
- 인생의 의미를 묻는 이들에 꼭 필요함
- 홀로 있음을 견디지 못함과 병든 마음
- 자신에게 돌아올 때 기도가 시작됨
- 거짓된 나에게 에워싸인 참스러운 나
- 먹고 마시고 즐기며 염려 속에서 살아감
- 그런 삶 속에 외면받는 영혼의 갈망을 생각함
- 외로운 장소가 하나님 대면함에 도움을 줌
- 더 중요한 마음의 산속으로 들어가라!
- 세속은 장소나 거리가 아닌 마음에 있음
- 외롭고 의지할 것 없는 마음이 있는가?
III. 적용과 결론
- 시련보다 번영 속에서 위험한 신자의 영혼
- 모든 평안과 성공이 신적인 화목의 증거 아님
- 마음의 소란함에서 떨어져 나오라
- 홀로 있는 시간을 갖고 깊이 생각하라
- 말씀의 빛 아래서 간절히 기도하라
기도가 필요할 때(4) 2015. 11. 22. 주일오전예배
< 회막으로 나아간 사람들 >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출 33:7)
I. 본문해설
-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
- 애굽으로 인도할 금송아지를 만듦
-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컴플렉스
-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가시적 형상화
- 질서가 무너지고 아론도 중심 잃음
- 하나님 진노와 모세의 생애적 중보
- 진노를 돌이키심과 동행을 거부하심
II. 우상을 금하심
A. 형상화를 금하신 뜻
a.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대등화 함
b. 여호와 종교의 영적 특성을 소멸함
c. 참된 경외와 우상 숭배를 혼돈함
B. “동행치 않으리라”
- 가나안 땅을 주시지만 동행하지는 않으심
- 이스라엘의 영적각성과 회개의 역사
-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게 됨
- 회막을 만든 지도자의 영적 통찰력
III. 위기 속에 사용하신 사람들
A.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
- “앙망하다”: a. 믿음 b. 희망 c. 의존함
- 진 밖에 있는 회막에 나아간 백성들
- 주님께 버림받은 상황에서 반응함
- 하나님 없는 가나안이 무엇인가?
- 언약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뜸
B. 기도하는 사람들
- 신앙의 세 요소: 지식+의존+신뢰
- 각성된 심령의 특징: 새로운 인식+기도
- 혼란스런 상황에서 마음을 구별함
- 영혼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해 기도함
- 일상의 즐거움과 결별하고 매달림
- 공동체의 허물과 죄악을 자기화함
- 기도 과정이 기도자의 마음을 치료해 줌
- 사람이 상황을 다루나 하나님은 기도자를 쓰심
- 가시적 역사를 중요시 하지만 영적 역사를 봄
- 기도의 사람들이 움직인 역사임
- 작은 불꽃 하나로 시작되는 대부흥
C. 구별된 마음과 환경
- 어디나 계신 하나님이신데 장소를 마련함
- 기도는 마음의 일임. 환경과 밀접한 관계
- 감각적 사물에 포위된 인간의 마음
- 끊임없는 표상과 초점 잃은 마음들
- 예배 시간마다 만나는 곤고한 영혼
- 내리는 비가 한 군데 쏠려 큰 힘 이룸
- 철원에 내린 폭우로 폐허가 된 현장 이야기
- 구별된 장소는 구별된 마음을 보여줌
- 하나님만 바람이 기도의 능력이다I
IV. 적용과 결론
- 지금이야말로 은혜가 필요한 때다
- 사단의 전략은 마음을 산만하게 하는 것이다
- 곤고한 영혼으로 방황하지 말라
- 당신은 회막에 있는가? 진에 있는가?
-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를 앙망하라!
기도가 필요할 때(5) 2015. 11. 29. 주일오전예배
< 기도생활의 감화 >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q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하)
I. 본문해설
-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통해서 배움
a. 기도 실천 b. 환경 이김 c. 심신 헌신
- 주님의 기도가 끝났을 때 제자들의 반응
- 기도를 배우고 싶은 마음을 들었음
II. 감화를 끼친 기도생활
A. 기도를 배운 제자들
- 기도를 배움: a. 은혜 b. 실천 c. 모범
- 예수님의 기도 실천을 통해 인격을 보게 됨
-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은 곁에 있다 왔음
- 기도: 마음의 순결+삶의 동기를 정화함
- 그리스도께 기도를 배웠던 제자들
- 예수님의 일생은 기도의 생애였음
- 세례+광야시험+사도들+십자가 고난
B. 기도의 두 가르침
1. 기도의 내용
- 예수님의 생애 사역과 관심의 초점
-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따르는 신자의 삶
- 기도와 삶이 유리되지 않기에 어려움
- 주기도문이 기도 속에 가르쳐졌음
-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의 진수를 배우지 못함
2. 기도의 방식
- 예수님께로부터 배운 기도의 방식
- 깊은 기도+장시간의 기도+헌신함
- 예수 그리스도의 핏빛 생활 본받음
- "너희 안에 이 마음 품으라"(빌 2:5)
- 힘없는 기도생활로 삶 자체가 흔들림
- 마음을 쏟은 기도생활과 액체의 생애
- 아름다운 영혼으로 아픔 속에서 기도함
- 상황과 환경에 마음이 휘둘리지 말자
- 시련과 유혹에 주체성 없이 굴복하지 말자
- 예수는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며 사셨음
- 기도의 방식이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III. 기도의 제자가 있는가
- 참된 믿음의 삶에는 감화력이 있다
- 감화를 끼침은 마음 쏟는 기도의 열매임
- 완전한 사람 없으며 완전 향해 나아감
- 나는 후일 자녀와 지체에게 누구로 기억될까?
- 우리에게 기도의 제자가 얼마나 있나?
- 바른 지식에 기도 눈물과 피 흘린 삶 바름
IV. 적용과 결론
- 시련과 고난 속에서 기도로 사셨음
- 마음을 고난 받으신 예수께 고정함
- 그분 가신 곳, 엎드린 곳, 죽은 곳에서 우리도…
- 교회와 세상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자
기도가 필요할 때(6) 2015. 12. 6. 주일오전예배
< 기도로 나타난 믿음>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 18:1-8)
I. 본문해설
- 기도에 관한 두 가지 교훈을 담은 본문
-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기도 비유
- 낙망치 말아야 할 기도 생활을 가르침
II. 믿음의 기도
A. 기도의 조건
a. 항상 기도할 것
- 항상 기도한다는 것은 삶의 기도화
- 삶의 초점이 기도와 일치되었을 때
- 수시로 하나님을 찾는 기도의 능력
-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주님을 찾음
b. 낙심하지 말 것
- eἐκκακεῖν 낙담∼, 실망∼, 지치다
- 나쁘게 생각하여 절망함으로 좌절
- 주님의 지혜, 현실과 맞설 마음 포기
- 이런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B. 하나님 앞에 매달림
- 당시 과부들의 불리한 사회적 위치
- 무조력 상태와 맺힌 한: 원수+원한
- 서러움과 고통이 인간성에 영향을 줌
- 나쁜 삶의 사태들을 승화시키는 힘
- 생명의 땅과 잔디 속에 있는 나방 알
C. 절실한 기도제목
- 원수에 대한 원한 풀어달라는 간청
- 좋은 재판관 아니었으나 그 길 뿐임
- 꺾을 수 없는 마음의 간절함을 보임
- 아주 구체적이고 확인 가능한 기도 제목
- 뾰족한 기도 제목과 실린 힘의 능력
- 문제없는 이 없지만 원한 되지 못함
- 기도는 없이 이성과 충동으로만 삶
- 인생의 문제로써 간절히 매달리라
III. 적용과 결론
- 그 재판관 a. 경외 없음 b. 사람 무시함
- 꺾을 수 없는 과부의 의지를 확인함
- 간절히 기도할지라도 기다리게 함
- 믿음 더욱 견고히 주를 바라게 하심
- 그 과정에서 의심, 염려, 불안과 싸움
- 선하신 하나님 바라며 살아가야 함
- 근심을 기도의 자리로 가져 오라
기도가 필요할 때(7) 2015. 12. 13. 주일오전예배
< 죄인을 높이실 때 >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9-14)
I. 본문해설
- "또 자기를∼" 기도의 연속적 교훈임
- 끈질김과 함께 자기의(義) 버림을 강조
- 당시 유대인들의 기도의 습관을 묘사함
- 당시 바리새인은 정통적 유대교파였음
- 율법과 엄격함을 강조하지만 형식적이었음
- 대조를 이루는 인물로 세리가 등장함
- 회개로 마음에 하나님 나라 임한 사람
II. 기도의 두 기초
A. 객관적 기초: 창조 목적+전능하심
B. 주관적 기초: 거룩함에 대한 의존
1. 존재적 초월성 의존 미천함 자각
2. 도덕적 완전성 의존 죄인임 자각
III. 기도를 막는 마음
- 깊은 기도를 가로막는 기도자의 마음
A. 자기를 의롭다 믿는 마음
-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킨 자신의 행위를 상기함
- 토색, 불의, 간음한 자들과 같지 않음
- 은혜에 대한 고백 없는 자기의 자랑
- 이레의 두 번 금식과 소득의 십일조를 드림
-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마음이 없음
B. 세리와 자신을 비교함
-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
- 주만 응시하는 기도 아니었음을 입증
- 기도는 믿음, 믿음은 영혼의 응시임
IV. 하나님이 높이실 때
- "의롭다 하심을 받고 ‥ 내려 갔다“
- 기도를 들으심과 사람을 받으심
- 의인의 기도를 잘 들으시는 하나님
- 그 의는 주 없이 지킨 율법 공로 아님
A. 자기의 죄를 자각함
- 5가지로 주 앞에 선 세리 마음 표출
a. 멀리 서서 b. 하늘 쳐다보지 못함 c. 가슴을 침
d. "불쌍히 여기소서" e.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함
B. 긍휼을 간절히 구함
- 의롭게 살며 십자가의 은총을 잊어버림
- 섬기면서 예배자의 마음을 상실함
- 모든 섬김과 삶의 출발 죄인임 자각
- 거기에 하나님의 절대 은혜에 대한 고백이 옴
- 기도의 마음에 찾아오는 최초의 자각: 가난함
- 의존하던 것들 버리고 주께 돌아감
-세리처럼 눈물로 마음 쏟아 기도함
V. 적용과 결론
- 기도는 주 앞에 선 기도자의 사람됨
- 첫 회심 때의 사랑과 눈물을 기억함
- 바리새인 각질로 덧 씌운 마음 버림
- 마음에 할례를 받고 주님께 돌아감
기도가 필요할 때(8) 2015. 12. 20. 주일오전예배
< 교회가 기도할 때 >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행 12:5)
I. 본문해설
-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과 야고보의 순교
- 유대인들의 기쁨과 헤롯의 사형 계획
- 이 소식이 교회에 들렸을 때의 태도
- 기적적인 방법으로 베드로 구출됨
II. 교회가 기도할 때
-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A. 교회가 기도함
- 개인기도에서 공동체 기도로 연결됨
- 이기심은 교회를 위해 기도하지 않음
- 공동체의 주기도문은 성령강림 이후 강조됨
- 실개천이 모여 개천이 되어 계곡을 달림
-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구체적임
- 성도들이 모여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함
B. 간절히 기도함
- “간절히”(a+katapausis) 쉼 없이
- 짧은 기도로 큰 능력을 불러온 간증
- 평소에 간절히 기도드린 사람들임
- 회심한 아프리카 여인의 갈대숲 기도
- 간절한 기도는 신적 친밀감의 표시
- 물같이 녹은 마음의 기도를 들으심
C. 하나님께 기도함
-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영적 은혜
- 단순한 기도의 대상 아닌 기도의 임재 효과
- 신적 임재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됨
- 사랑의 마음으로 그 의지에 일치함
- 분산되지 않은 마음의 집중과 금식
- 기뻐하신 기도와 기뻐하지 않으신 기도
III. 적용과 결론
- 성도의 마음과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제목
- 예배당이 전소된 교회와 기도의 은혜
- 상황이 아니라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함
- 시련은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모아 줌
- 공동체적 시련도 마음 모을 기회임
기도가 필요할 때(9) 2015. 12. 27. 주일오전예배
< 모여서 기도할 때 >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행 12:11-12)
I. 본문해설
- 옥에 갇힌 베드로의 쇠사슬이 끌러지는 기적
- 천사와 함께 기적으로 탈출한 사건의 보도
- 마가 요한의 모친 마리아의 집 "마가 다락방"
- 예수께서 최후 만찬을 나누셨고 성령 강림한 장소
- 대문을 지키는 하녀가 있을 정도의 큰 집임
II. 중대한 시점에 기도함
A. 지도자의 순교와 투옥
-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존폐가 달린 고난임
- 성령 받은 교회에 찾아 온 것은 핍박이었음
- 물질의 복이 아닌 신자의 뚜렷한 존재감
- 베드로: 사실상 마지막 남은 지도자였음
- 중차대한 사건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였음
- 대책반을 가동하는 대신 모여서 기도하였음
- 진리와 성령의 인도를 받은 교회였음
B. 한 곳에 모인 성도들
- 교회가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을 발견함
- "여러 사람이 거기 모여서∼"(12절)
- συνηθροισμένοι 분사 완료, 수동, 주격, 남성 복수
- 이미 모여 있었음, 모이는 희생을 감수함
- 기도는 영적 섬김이지만 물리적 장소가 필요함
- 교회의 위기 때마다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함
a. 예수 승천 후 성령 기다림(2:1)
b. 사도들의 핍박을 받을 때(4:24)
c.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12:5)
- 한 장소에 모이는 일의 영적 중요성
- 인터넷이 신자의 현존을 대신 못함
- 거기에 있는 것 만큼 큰 섬김이 없음
C. 간절히 기도함
- "간청하다, 빌다, 간구하다"
- 커다란 핍박 속에서 해결책 없지만 기도함
-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표현
- 모든 사태를 끌어안고 간절히 기도함
-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맘대로 전개되지 않는다
- 우울증 환자 "잘 될거야" 도움 안됨
- "사람 일할 때 일하지만 ... 기도할 때"
- 머리만 굴리지 마음을 쏟아 보았는가?
III. 적용과 결론
- 영적 위기의 순간에 교회가 모였음
- 불편이 아니라 핍박의 위협 속에서도
- 교회는 목회자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 붙드시는 하나님의 두 손 안에 있다
- 모여라! 마음을 모으라! 기도하라
기도가 필요할 때 1
기도가 필요할 때 1 (2015.10.25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2 (2015.11.01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3 (2015.11.8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4 (2015.11.22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5 (2015.11.29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6 (2015.12.6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7 (2015.12.13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8 (2015.12.20 주일오전설교)
기도가 필요할 때 9 (2015.12.27 주일오전설교)
한적한 곳을 찾으라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이 나병 들린 자를 고치실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에 나병은 하늘의 저주를 받은 병이라고 불렸고, 그만치 나병은 불치의 질병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나병에 전염된 사람들은 이스라엘 회중 속에서 살 수가 없어서 바깥으로 이제 격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질병을 고치셨습니다. 그 소문이 퍼지자 많은 무리가 모였는데 이는 예수께로부터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왔다고 했습니다. 이때는 아직 예수님이 널리 알려지시기 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초창기였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어차피 예수님이 오신 것은 당신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고, 그 전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믿어 회개와 신앙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이 놀랄만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예수님은 이상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오히려 그 무리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물러가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당신의 사역에 성공에 도취하시거나 혹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 것 같은 성공과 번영의 때에 예수님은 오히려 스스로 물러가셔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자신의 뜻대로 삶의 상황이 전개되면 스스로 성공에 도취해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무엇인가 자기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낙심과 근심으로 마음이 갈라져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이 분주하여 세상일에 몰입하는 것도 기도를 방해하고 염려로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도 기도를 방해하는 적입니다. 우리 모두 살아서 꿈틀거리며 이 땅에 있지만 모든 삶이 모두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살아가는 삶이 있고 끌려가는 삶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삶은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인생에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전망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판단하고 또, 진리를 인식하면서 어떤 삶이 되고 내가 사는 세계는 어떠한 세상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판단력을 가지고 자신이 옳다고 믿고 생각하는 것을 지향하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에 반해서 끌려가는 삶은 이미 삶이 자신의 주체가 아닙니다. 일에 끌려서 하기 싫은데도 혹은 해야 할 일인데도 할 마음이 별로 없어서 그렇게 목에 개 줄이 매인 체 억지로 주인에 의해서 끌려가는 강아지처럼 어거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가 100세가 넘는 긴 인생을 그런 식으로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한 번도 이 세상에서 자기의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지금 여러분은 끌려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정말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II. 바쁠 때 하신 일
A. 물러가심
우리는 종종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에 골몰하다보면 바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쁘게 되면 자신의 인생이 어느 길로 가는지 그리고 자기가 믿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인생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기가 매일매일 부딪히며 살아가는 이 삶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원대한 계획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가장 일이 잘 될 때, 아주 바쁘실 그때에 세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물러가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여기에 물러갔다라고 하는 말은 희랍어로 ‘에포 코론’(ὑποχωρῶν)이라는 단어인데 ‘자신을 철수하다’라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철수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있는 것들을 그 자리에서 떼어 놓아서 뒤로 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사역이 아주 번성했을 때 당신 자신을 철수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당신의 이름을 높이고 당신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고 치료를 받으려는 일이 잘못된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일이 당신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잠시 물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성공에 감격하기보다는 조용히 하나님을 대면하실 시간을 갖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물러간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감만이 아니라 마음을 이 세상의 일로부터 떼어놓아 거룩한 주님을 바라볼 정신의 공간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충성스러운 삶이 부지런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고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결심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진심으로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삶의 휴식을 말하지만 그러나 휴식을 통해 여유로운 삶을 가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여유 있는 시간들을 주님께 그 마음을 모으는 일에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을 하나님께 모을 수 없는 휴식이 우리를 방탕과 그리고 잘못된 삶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것은 다윗의 타락을 통해서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윗필드 같은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썩어져 죽느니 차라리 닳아서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죽도록 주님을 섬기십시오. 그리고 진짜 죽게 되면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살려주시면 다시 죽도록 섬기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물리적인 바쁨과 한가함, 이것이 곧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끔 만들어주는 것을 좌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속에서 위대한 인물들은 분투하면서 몸부림치듯 인생을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 같이 그 바쁜 섬김 속에서도 마음을 주님께 고정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핍박과 고난 속에서 투옥을 당하며 사형수의 몸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대한 신약의 진리를 풀어내어 성경의 절반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일을 그만두고 안두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휴식은 그 사람의 사람됨을 반영합니다. 사람이 거룩하면 휴식시간에 주님을 간절히 찾을 것이고 그 사람의 성향이 신령하면 육체의 쉼을 얻는 시간은 영혼이 하늘을 향해 나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지 못하다면 그의 쉼은 의무를 태만하게 할 것이고, 그의 휴식은 그를 더욱 방종하게 할 것입니다. 마음의 공간은 물리적인 상황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서 비롯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바빠도 사랑하는 그것을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세상을 향해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이 주님이기 때문에 주님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양보하고 포기하고 접고 변화된 속에서도 그 환경을 얼마든지 수납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합니다. 오래전에 지금은 떠나고 없는 어느 부교역자가 교역자 회의 시간에 자기가 얼마나 사역에 바쁜지를 열심히 토로하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제가 얼마나 바쁜지 화장실 갈 시간이 없습니다.’ 그날 저녁에 두 부부가 우연히 심야 극장에서 만났습니다. 결국 아무리 바빠도 자기 하고 싶은 것은 하게 마련입니다. 안하는 것은 하고자 하는 소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가치가 작은 일에 집념을 가지고 붙어있는 여러분의 마음을 철수시켜야 합니다. 주님께 붙어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분리가 요구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한번 물러가 보십시오. 여러분이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일들이 진정으로 정말 그렇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바쳐서 자신을 허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를 잠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하여야 할 일은 혹시 내팽개쳐져 있지 않은지 한번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사역에 있어서 성공을 거두는 것 같은 그 시간에 뜻밖에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무리들로부터 물러나셨습니다. 하나님을 홀로 대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여러분이 잠시 여러분을 분주하게 하고 하나님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일들로부터 스스로를 철수 시킬 때가 아니겠습니까?
B. 한적한 곳에서
두 번째 예수님이 하신 일은 한적한 곳으로 가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더라”고 말입니다. 한적한 곳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는 희랍어로 ‘엔 타이스 에레모이스’(ἐν ταῖς ἐρήμοις)인데 직역을 하면 ‘그 광야에서’입니다. 팔레스타인에는 광야가 많습니다. 거기에는 물이 없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광야가 많고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그 광야 속으로 들어가서 여행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이 없기 때문에 2박 3일을 여행하려고 하면 최소한 1.8리터짜리 물을 8통 정도를 배낭에다가 넣어가지고 그 광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물론 거기에서는 핸드폰도 터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 1박 2일하고 나올 요량으로 서너 통 물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길을 잃게 된답니다. 그래서 종종 물이 없어서 그 광야에서 조난을 당하고 죽는 일들이 가끔 일어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광야라고 하는 것은 황폐하고 아무것도 찾지 않는 곳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고독입니다. 희랍어에 ‘에레모스’(ἐρήμοις)라고 하는 광야라고 하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미드바’라고 하는 단어인데 공교롭게도 ‘미드바르’는 ‘다바르’라는 말의 명사형이고 다바르는 ‘하나님이 혹은 사람이 말하다, 말씀하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이 모두 광야와 연관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소명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여년의 세월동안 연단을 받은 곳이 바로 광야였습니다. 엘리야는 광야에서 주님의 도움을 받았고, 그리고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예수 오시는 앞길을 그 시대의 사람들 마음 안에 예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유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40일 동안을 금식하고 이기셨습니다. 바울은 회심한 직후 아라비아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결국 하나님을 만날만한 고독한 장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고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세속적인 고독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하나님을 부인하도록 만들지만 그러나 거룩한 고독은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게 만들고 이 세상에서 의지하던 것들을 버리게끔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이렇게 광야와 같이 고독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얼굴을 구했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난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무엘상서에 나오는 유명한 한나의 간절한 기도는 그녀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광야에서 기도하지 않고 성소에서 주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도시가 아니라 광야였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의지할 것이 없는 마음으로 자기의 중심을 주님께 쏟아 놓았을 때 하나님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 사무엘 선지자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의 범죄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해결해 볼 길을 찾았습니다. 그가 익숙히 알고 있는 죄 사함의 방법인 제사를 택했습니다. 그가 한 나라의 제왕이었으니 명령을 받들 제사장이 없었겠습니까? 주님께 바칠 제물이 모자랐겠습니까? 수없이 제사를 드려도 그가 깨달은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한 성품을 지성의 벼락을 맞은 것처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이 기뻐하셨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주께서 통회하는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라는 발견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상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비결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묘사하다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상한 마음은 히브리말로 ‘네브니쉬바르’라는 단어인데 정확하게 말하면 독이나 그릇 같은 것들이 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자, 마음을 하나의 독이라고 비유해 보십시오. 무언가에 부딪혀서 깨졌습니다. 완전히 부서져 버리지는 않았지만 금이 갔습니다. 그 속에 간장이 담겨있으면 서서히 간장이 새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물을 퍼서 담아도 그 밑둥이에 금이 가서 벌어진 금 사이로 계속해서 그 물이 흘러나와 아무리 길어서 그 독에 부어도 계속해서 물이 흘러 빠져 나갑니다. 그게 상한 마음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인 기쁨, 쾌락, 즐거움, 성공, 번영 같은 것들을 부어도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낌없이 빠져나가고 다시 빈 항아리가 됩니다. 성경에서 이 상한 마음은 율법의 작용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에 대해서 선악을 판단하는 율법의 작용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느끼고 상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몰두하던 삶에서 삶의 허무를 직시함으로써 자신이 찾고 추구하고 몸부림치는 이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한 마음의 정체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가할 때 예수님을 깊이 만났나요? 아니면 바쁠 때 주님을 깊이 만났나요? 여러분이 사업이 잘 되고 성공할 때 하나님 사랑을 체험했나요? 아니면 실패하고 완전히 짓밟혔을 때에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나요? 우리 모두 이것에 대해서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저는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밤에는 야간 신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니 6시 10분쯤 수업을 해서 10시 10분에 수업이 끝납니다. 직장에서 조금 일찍 퇴근을 해서 그냥 부리나케 달려가야지만 겨우 수업시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10시 10분까지 공부를 하고 그리고 채플실에 들어가서 기도를 좀 하고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대게 11시 반, 아니면 때에 따라서 도서관에서 11시까지 책을 보고 집에 들어오면 12시가 되어야지만 집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한 30분이나 한 시간 동안 더 책을 보다가 새벽 4시 반이면 새벽기도를 준비하기 위해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평생의 소원은 공부를 한번 실컷 해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똑같은 처지에 있던 친한 동료들이 한결 같이 모이면 눈물을 흘리면서 바라던 바가 그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친구가 하나님이 풀어주셔서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더니 한 석 달인가 6개월쯤 지나고 나더니 다시 직장에 간답니다.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그냥 취직은 아니고 간간히 도와주기고 했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직장을 다닐 때에는 1분 1초가 아까워서 단어라도 하나 더 외우고 전철에서도 책을 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 시간이 많으니까 늘어나는 것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지식이더라 그것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우리는 그런 연약함을 겪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는 그렇게 정신없이 바쁘고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살던 때 신학교 교수가 되어서 첫해에 미친 듯이 학생을 가르치고 정말 지금 와서 후회되는 일이지만 가정을 돌아볼 틈을 갖지도 못했을 그때에 오히려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 속에서 살 수 있었고, 하나님은 나와 동행하신다고 그렇게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얼마나 휴식을 많이 누리느냐 그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마음에 한적한 곳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한적한 곳은 상한 마음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이상의 더 좋은 마음을 우리에게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레브다끄에’라고 하는 이 표현은 짓이겨진 마음입니다. 북한에서 어떤 사람들을 세워놓고 비행기를 맞추는 고사포로 갈려서 죽였다고 합니다. 목격한 사람이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사총이라고 하는 것은 비행기를 맞추는 그것은 총이라고 그러지 않고 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탄약이 워낙 굵으니까 세워 놓고 두르르하고 갈기니까 목격자의 증인에 의하면 사람이 서 있다가 죽이 되어서 후루룩 쏟아지더랍니다. 피와 살이 범벅이 된 덩어리가 우르르 쏟아지면서 허물어지는 것이 보이더랍니다. 그게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짓이겨져서 뼈와 살이 커다란 망치 같은 것에 맞아서 짓이겨져서 그냥 반죽처럼 되어버린 상태,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심장에는 뼈가 없지만 심장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마음에는 정말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뻣뻣한 뼈들이 수없이 들어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도 그것을 꺾지를 못하십니다. 못하신다기보다는 완고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주님만을 의지하게 될 때에 다 물렁거리는 반죽 같은 마음이 됩니다. 주님이 그 마음으로 무엇을 빚으시듯이 원하는 대로 빚어질 마음의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에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에게는 최고의 헌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상함은 율법의 작용과 인생의 허무를 직시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만 통회하는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앎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한적한 곳이 있습니까? 이 세상의 소음과 소란한 것, 번잡한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오직 우리 주님 한분의 얼굴만을 뵈올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의 광야가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고독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 모르는 사람이고 주님 앞에 홀로 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런 거룩한 고독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어제 저녁에도 깊어가는 가을밤을 잠시 산책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고였습니다. 아무리 영민하고 학문적인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일정한 나이가 되기까지는 결코 깨닫지 못하는 진리들이 있구나 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영민하다거나 아니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의 경험을 관통할 수 있는 사실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이든 모든 사람이 그 나이에 저절로 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혹은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조차도 그 나이가 들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게 되는 진리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지난날들을 회고해 봅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었는지 그렇게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그 일에 인생 전체가 달린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몸부림치고 때로는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랬는지 참 지난날들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미래에 각광 받을 사업 중의 하나가 교통이나 기상의 정보를, 자연의 정보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파는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를 몰고 지방의 도로를 달릴 때 결코 막힐 수가 없는데 차가 막히기 시작합니다. 무슨 일인지 너무 궁금해서 창문을 열고 고개를 쭉 빼보지만 앞에 한없이 늘어져 있는 자동차 바퀴밖에는 보이지 않고 그 맨 앞에 머리는 산모퉁이를 돌아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궁금해 합니다. 저 앞에 어떤 상황일까? 라고 말입니다. 헬리콥터나 드론을 띄워서 한 10km 앞까지 위에서 한꺼번에 쭉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시원할까요? 그런 정보들이 필요한 때에 즉시, 즉시 제공된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이용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우리 눈앞에 부딪치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감당하고 그리고 최고의 결과를 생산해 내기 위해서 시간과 그리고 젊음을 아끼지 말고 헌신해야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그런 미시적인 인생의 관측에서 벗어나 가끔은 드론을 띄우거나 헬기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자기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혜로운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그렇게 피 흘리고 분투하고 눈물을 흘리며 살던 인생인데도 가끔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남의 인생인 것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마음의 한적한 공간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정말 한적한 곳이 있습니까?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게 하는 신앙적인 고독의 시간이 여러분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그렇게 주님만 홀로 바라보고 만날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는지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가장 당신의 봉사가, 사역이 성공하는 것 같은 때에 예수님은 자신을 철수시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대면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마음이 한적한 곳을 찾아 주님을 대면하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C. 기도하심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하신 일은 기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고 말입니다. 말씀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에워싸지만 당신은 웬일인지 이들을 사랑하시면서도 당신을 철수시켰고 그리고 그렇게 물러가 홀로 외롭게 있는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일로부터의 해방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간절히 마음을 쏟기 위해서 잠시 일로부터 자신을 철수시켰습니다. 우리는 그런 목적이 아니라 그냥 쉬고 싶어서 일로부터 자기 자신을 철수시키는 적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신령한 목적을 가지지 않은 그런 마음으로 택하는 많은 휴식은 거룩한 사역을 방해합니다. 휴식의 방탕은 반드시 정신의 해이를 가져옵니다. 섬김과 휴식을 어떻게 배분할 것이냐고 하는 기계적인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휴식할 때 나타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조용한 휴식의 시간을 주님과의 교제로 사용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외로움을 이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번영과 성공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예수님을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가장 성공해 보이는 때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시는 것 같은 때에 스스로 자신을 철수하시고 그리고 광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만약에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때가 예수님이 이름을 날리고 예수님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최대한 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지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죄가 없으셨을 뿐만 아니라 죄를 지으실 수 있는 가능성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그가 입으신 육신은 죄 없기는 하지만 여전히 유한한 사람의 몸이었고, 많이 걸으시면 피곤하셨고, 주리면 배고프시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이 마른 육체였습니다. 그 제한된 육체 안에서 예수님은 인성을 배우셨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그런 인간성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을 배우셨고, 그것을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간절히 자기를 쏟아 붓는 기도 속에서 표현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또 다른 목적이 있었으니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찾고 간절히 구하며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왔지만 완성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기도하지 않는다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점점 어렵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기도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흔히 우리 인생의 상황을 우리 마음에 좋게끔 개선하는 수단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는 간절한 기도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친교를 나누며 세상에 붙은 욕심을 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정말 이 세상의 사물들과 만나며 부딪치는 수많은 표상으로 욕망에 사로잡히고 어두워진 우리의 마음을 쓸어내리고 다시 주님이 세우신 가치와 존재의 질서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상황을 개선하고 우리의 섬김의 열매를 맺는 수단이기도 한 동시에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은혜의 힘을 우리의 정신과 영혼 안에 부어주십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많은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될 것이고,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시련과 어려움이나 역경을 만나도 자신의 힘은 약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자원들을 활용해서 주님의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물러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간절히 주님을 찾으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내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행복하십니까? 그렇게 주님을 간절히 찾지 않고 하나님 중심이 아닌 신앙의 삶을 살면서 행복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여러분 자신이 인생의 임자가 되어서 살아가는 그 삶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하면 그 길을 가십시오. 나와 사랑하는 지체들은 다른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거기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그 길은 이미 우리의 갈 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의 짐을 벗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 묻은 십자가를 붙들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는 곤고합니다. 우리는 건조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메마른 광야를 맨발로 타박타박 걷는 것처럼 우리는 목이 마르고 쓰러질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항상 꿈꿀 수 없는 위대한 것부터 시작하지 마십시오. 가능한 일부터 생각하십시오. 지금은 여러분 마음을 그렇게 얽매인 체 그렇게 건조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발 그 스마트폰 같은 그런 쓰잘떼기 없는 그런 기구들을 좀 멀리하십시오. 텔레비전이나 우리의 감각을 현란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잠시 자기를 떼어 놓으십시오. 힘들고 어려워도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어려우면 조용히 경건서적을 읽으며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 보십시오. 마음에 얽매인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보십시오.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마치 가기 싫은 강아지 목에다가 줄을 매고 그리고 주인이 잡아끄니까 목뼈가 빠지는 거 같아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따라가는 그런 개 같은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 자신의 삶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리고 손가락질을 해도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된 것은 포기할 수 없고, 이것을 위해서 내가 예수를 믿었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어떻게 내가 이 삶을 영위해 가고, 내가 내 인생의 참된 주체가 되어서 내 인생을 의미 있게끔 살아갈 수 있을지 먼 훗날 내 인생을 회고할 때에도 어쩔 수 없이 끌려왔던 남 때문에 살았던 삶이 아니라 내가 거기에 20년, 30년 후에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와도 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을 그런 삶을 자랑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야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과연 저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인간답게 살 수 있겠구나.’ 라는 아우라를 전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얼마나 기도하고 계십니까? 무릎을 꿇는 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 얼마나 됩니까?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현란해지는 시간 말고 주님의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간 그래서 주님을 믿고 그 분의 자녀가 된 것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됩니까?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음성 주님을 만져보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주님은 그렇게 이 세상에 얽매여 피곤하게 살아가는 죄의 노예 된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끌러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기도는 낯선 것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철수하기에는 너무 달콤한 세상이고, 한적한 곳을 찾기에는 거기서 주님을 독대해야 될까봐 두려운 마음이 있어서 감히 그렇게 못합니다. 기도를 하자니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여러 가지 사랑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에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것만큼 신자는 허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간절히 그것이 꼭 새벽기도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그곳이 어디이든지 마음의 무릎을 꿇고 아무도 그 교제를 방해할 수 없는 그 마음의 공간에서 주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나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은혜를 달라고, 참 나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총을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찾는 일이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의 그 핏빛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때로는 마음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가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나님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희를 해방시켰다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하나님의 자녀도 하나님의 마음에는 싫어버림 바 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어머니 같은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 다시 영혼의 부흥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기도문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도 주기도문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산상수훈에서 내용만 실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주기도문의 가르침을 마태복음에서 주실 때 기도에 관해서 가르치시다가 주셨습니다. 그 6장의 문맥에서는 하나님 앞에 외식하며 살지 말 것을 가르치시고, 또 하나님 앞에 은밀하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시며 골방으로 들어가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에는 중언부언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아뢰라고 가르치시면서 주기도문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종교적인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무슨 내용으로 기도해야할지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시는 가운데 주기도문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역사서술가였습니다. 과연 역사서술가 다운 필치로 주기도문이 어떻게 태어나게 됐는지를 아주 그림 같은 묘사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모습에 깊이 감화를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 주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II. 예수님의 기도생활
A. 몸소 기도하심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28년 전인 1988년도쯤 교수가 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에 이 본문을 통해 큰 은혜를 받고 일생동안 저의 신앙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수업을 마친 오후 어느 날 조용히 교수실에 앉아서 누가복음 11장을 읽기 시작했고, 1절에 꽂혀서 3시간 동안을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제 일생에 잊혀지지 않는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생활이었습니다.
성경은 상세한 기록을 생략하고 있지만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을 종합해서 예수님의 기도의 관습을 고려하면서 생각할 때 아마 11장 1절과 10장 마지막 절 사이에는 이런 상황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단하게 복음을 전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어느 숙소에 묵으셨고,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이 잠자는 제자들을 놔둔 채 한적한 곳으로 멀리 가셨고, 거기서 오랫동안 기도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깨어나 보니 예수님이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아침 시간이었고,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범접할 수 없는 신령한 분위기 속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말을 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끝난 것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다가가 한결같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하시던 그 모습에 깊은 감화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는 예수님의 평소의 기도 생활이 등장합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몸소 기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11장 1절에 보면 기도하신 동사의 주어가 ‘예수께서’라고 나옵니다. 예수께서 몸소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의 인격도 하나님의 인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지상 생애 동안 이 세상에 가장 연약하여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처럼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성과 인성의 비밀에 속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은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성품 아래 감추시고 스스로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의 연약한 것을 짊어지시기로 다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가장 연약한 인간으로 자처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우리에게 몸소 기도의 본을 보이기 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중적인 목적이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가장 연약한 우리의 형제 중 한 사람이 되어 기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끼쳐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고난의 생애였습니다. 그 분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피 흘리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 율법 아래 태어나 율법에 복종하신 것, 그리고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 장사되고 음부에까지 내려가신 모든 과정이 예수님에게는 고난이었습니다. 그 모든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은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불순종할 가능성이 있는 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구속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도우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똑같은 사람의 몸으로 체험하여 배우시기 위해서 그렇게 고난을 통해 순종을 터득하셨던 것입니다. 결과 예수님은 우리 연약한 모든 인간의 연약함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공감하며 긍휼히 여기며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중보기도, 신학적으로는 이 표현이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보라고 하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쓸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중보기도라고 하는 대신 남을 위해 하는 기도를 섬김 기도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중보기도, 다시 말해서 섬김 기도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남을 위한 간절한 기도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하고, 이러한 섬김의 기도를 통해 역사를 열어갔고, 죽어가는 교회를 살렸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고, 얼어붙은 동토의 땅에 선교의 불꽃이 불길처럼 타오르도록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섬김 기도의 위대한 능력에 대한 수많은 증언들과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라는 명령을 성경 속에서 수없이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남을 위한 섬김의 기도가 아무리 위대하다고 할지라도 그런 기도를 받는 사람이 몸소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약화시키거나 의무를 면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종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어떤 자식들은 자신의 부모님이 워낙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기는 든든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모님이 나를 위해 이렇게 섬기는 기도를 많이 하시니 나도 부모님 못지않게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야 되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해야지 부모님이 든든히 기도해 주시니까 나는 돈만 벌면 된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찌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신앙일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시키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받으시는 것으로 만족하시는 대신 오히려 당신의 스스로 당신의 육체를 이끌고 나아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이 모습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몸소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 자신이 죄가 없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오히려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그로 말미암아 당하는 우리의 비참과 슬픔을 마치 당신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슬픔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당신의 의무를 대신 맡기지 아니하시고 이른 새벽 미명에 혹은 깊은 밤에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당신의 마음을 쏟으며 몸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생애를 통해서 우리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사랑의 우리 주님을 어떻게 온전히 의지하며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수많은 웅변보다도 몸소 실천하신 예수님의 기도의 이 생애는 더 커다란 함성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은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으니 이는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온전한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어 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이 예수님, 죄가 없으시고 죄를 지으실 수도 없는 흠이 없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몸소 기도하시던 그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생활이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기도하고 계십니까? 매주일 변함없이 교회에 나와 같은 시간에 거의 비슷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예배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가 보장된 자리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는 살아있는 식물에게는 새싹이 돋아나게 하는 힘을 주지만 썩은 나무는, 죽은 나무는 더 썩어가게 만드는 것이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입니다. 견딜 수 없는 지루함과 그리고 힘듦 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주간동안 몸소 기도를 실천한 시간이 없거나 매우 부족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고단한 육신을 이끌고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직접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환경을 이기심
두 번째는 환경을 이기신 기도였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이 구절이 ‘엔토포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어떤 장소에서’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사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명이 사방에서 당신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병든 자가 있는 곳에는 주님이 찾아가셔서 그들의 헌데를 몸소 어루만지시며 그들의 병을 낫게 해 주셔야 했습니다. 진리를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설교로, 상담으로 진리에 대해 가르쳐 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늘 다니는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4장 35절에서는 예수님이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고, 마가복음 1장 35절에는 광야에서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복음 3장 21절은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강이었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이든 갈릴리 지역이든 유대인들이 통행하기 불결히 여기던 사마리아 땅이든지 어디든지 방황하는 영혼들이 있는 곳은 주님이 가야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여행하셔야 했습니다. 그래도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에 있든지 이른 아침 그리고 깊은 밤에 시간을 내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마음을 쏟으며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시고 깊은 밤에 기도하신 그 속에 어떤 깊은 영적인 의미를 시간이 가지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예수님이 새벽이나 혹은 깊은 밤에 기도하신 이유는 낮에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많은 영혼들을 위해 섬겨야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은 섬김이 기도를 방해하지 않았고, 섬김에 의해서도 기도가 방해받지 않는 그러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자기를 필요하는 모든 사람들이 아직 잠들어 있는 새벽 이른 아침 시간과 그리고 이미 잠들어 버린 깊은 밤 시간을 희생하셔야 했습니다. 사람의 육체를 가지신 분이었기 때문에 그 분도 과로하면 피곤하셨고 그리고 굶주리면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모든 마음을 드려서 환경을 극복하며 하나님 앞에 사셔야 했습니다.
제가 새벽기도라는 책을 쓴 것이 아마 2004년도쯤의 일로 기억이 됩니다. 그 후로 11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그때보다 두 배나 더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책이 나올 때만 해도 지금은 아름다운 예배당으로 바뀐 저 뒤편에 우리 사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저희는 아마 7년 정도의 세월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일날 고단하고 월요일 혹은 저녁 집회를 마치고 와서 혹은 2층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새벽에 일어나기 어려운 시간이면 두 발로 이불을 걷어차면서 충성하며 새벽기도에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시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때에 비해서 죽음의 기운이 더 많이 스며 들어와서 육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심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그 모든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싸우시며 당신 자신이 환경을 이기는 기도생활을 하셨습니다. 저는 우러러 바라보며 그것을 본받으려고 애를 쓸 뿐입니다. 환경은 우리를 돕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와 대적들로 둘러싸인 남의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은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지 않고 사람도 우리의 기도를 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있는 사람은 이러한 외로운 타향 땅에 살면서 늘 밤마다 새벽마다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주님의 도움을 바랍니다. 그 은혜로 살고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치면서 그렇게 몸부림쳐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며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도움을 구할 뿐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 굴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동정할 수 있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영혼의 고갈 상태에 들어가기 매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이 세상을 향해 단호한 강인함, 거룩한 강인함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 없이 이 세상을 사는 것만큼 힘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그 고단한 일과를 이기고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기도의 삶을 유지하셨다면 여러분은 어때야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삶의 무게가 기도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힘겹다고 생각할 적마다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묵상해야 합니다.
(찬양)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에게도 고단한 육체를 이끌고 아버지 앞에 엎드리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분도 쉬는 것이 좋았고 여유를 갖는 것이 그 분에게도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마음을 모두 쏟아 스스로 당신의 몸을 이끌고 모든 기도하기 어려운 환경을 이기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이 아무리 힘겹고 어렵더라도 예수님이 이 당시에 짊어지신 그 인생의 무게만 하겠습니까? 죄는 없으셨지만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며 그 부담을 짊어지고 아파하셨고, 어떡하든지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을 그 죄에서 풀어 자유하게 해 주고 싶으셨습니다. 고단한 일과 속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파하시고 아픈 사람마다 그들의 병을 고쳐주셔야 했습니다. 그 속에서도 주님은 그 모든 환경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극복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실천하는 어려움만 주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려움 속에서 당신을 찾는 모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그 큰 은혜를 우리가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환경을 이기며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어여삐 보시겠습니까? 기도할 수 없는 무거운 삶의 환경 속에서 시시때때로 주님께 부르짖는 그 기도는 주님의 마음에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기도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섬김의 삶을 살면서 그 고단한 몸을 이끌고 아버지 앞에 기도하시던 그 모습을,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삶을 살 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환경을 이기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 기도에 헌신하심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기도에 헌신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한적한 교수실에서 성경을 읽다가 마음이 물처럼 녹는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희랍어 성경을 펼쳐서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상세히 읽다가 눈에 들어온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치시매’라는 단어였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라는 단어였습니다. 사실 이 단어는 희랍어로 ‘에파우사토’(ἐπαύσατο)라고 하는 단어인데 히브리어에 ‘샤바트’라는 단어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 희랍어 단어입니다. 그 ‘샤바트’라는 단어는 바로 창세기 1장에서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셨다고 할 때에 쓰여진 동사입니다. 그러니 이 단어를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쉬시매’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가 어떠한지를 두 가지로 보여줍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이 기도가 워낙 집중하여 자기를 쏟아 부은 기도였기 때문에 육체의 힘을 소진한 기도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가롭게 입술만 움직이며 자기 기도의 말을 하기 위해서 입술에 침이나 바르면서 하는 기도는 서너 시간을 해도 대여섯 시간을 기도해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 한 시간을 기도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 그 기도를 애끓는 심정으로 토해내고 그 기도에 눈물을 바르고 피에 절인 그 기도는 한 시간만을 해도 온 몸의 기운이 빠져 나가는 탈진을 가져옵니다. 또 한 가지의 가능성은 예수님의 이 기도가 장시간의 기도였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쏟아 붓는 기도 속에서 정신의 힘과 함께 육체의 기운이 소진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잠시 육체의 휴식을 얻기 위해서라도 쉬셔야 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힘에 진할 정도로 기도한 적이 언제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간절히 쏟으며 휴식이 필요할 정도로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려 본 적이 언제입니까? 워낙 집중해서 애끓도록 뼈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액을 우리의 기도에 발랐기 때문에 기도가 끝난 후에는 탈진하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그렇게 자기를 쏟아 부으며 육체의 힘을 소진하도록 기도한 적이 언제입니까? 그러나 우리도 한때에는 그렇게 기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때에는 병들고 죽어가고 있지만 스스로 기도할 수 없는 남의 영혼을 위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렇게 우리의 중심을 쏟으며 그렇게 울어준 적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기도 속에서 육체의 힘을 모두 써버리는 소진의 의미를 알았고, 그렇게 주님 앞에 중심을 쏟으며 탈진하리만치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정말 이렇게 예수님처럼 기도를 마치신 후에는 휴식을 취해야 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모든 것을 쏟아서 주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까?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주님을 만난 한 성도의 인생은 메마른 들판을 가르고 지나는 한 줄기 물길과 같아야 합니다. 그냥 그 물이 벌판 한복판을 흘러갔을 뿐인데 그런데 그 물이 흐르고 가니까 풀들이 돋아나고, 벌레들이 와서 깃들고, 새들이 와서 거처를 마련하고, 나무들이 자라나고, 숲을 이루고, 급기야 사람들이 그곳에 터를 잡고 사는 그런 열매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렇게 어두운 이 세상 속에서 온갖 삶의 사태를 겪으며 우리의 인생의 대부분의 일들은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과 꼭 같이 분투하며 살면서도 벌판을 가르고 지나가는 한줄기 강물이 되어서 살 수 있는 자원은 우리 자신에게서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하고 신령한 은혜가 주님께로부터 끊임없이 부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깊은 기도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사람들에게 정답이 순결한 삶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순전한 삶은 집중된 기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없음은 열렬한 기도의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기도할 때 그는 일생동안 살아온 자기 자신을 짊어지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이 기도만 잘하기를 원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어떠하든 열렬히 기도하면 그 기도에 의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은 더더욱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신앙입니다. 삶은 기도 전체를 요청하고 기도는 삶 전체를 요구합니다. 그 기도와 삶은 한 사람의 사람됨에서 흘러나오고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 자신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순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고 심지어 죄를 지어서 불결한 마음이 된 사람도 간절히 기도해야 할 필요는 오히려 더 큽니다.
그러면 그렇게 순전한 삶을 살지 못했던 사람들조차도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아주 어린 시절 저는 버스를 어떻게 시동을 거는지를 보았습니다. 지금처럼 자동차 키를 집어넣고 이렇게 시동을 거는 때도 있었지만 자동차가 망가지면 운전수와 조수는 내려서 엔진에다가 크랭크축을 집어넣고 열심히 돌립니다. 그러면 멎었던 모터가 돌아가면서 차가 다시 시동이 걸리곤 했습니다. 혹은 승객들이 내려서 차를 막 밀면 그 추력에 의해서 시동을 걸기도 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도의 시동을 거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음 깊은 곳에서 언어를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를 통해서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뀐다는 것은 마음의 변화, 영혼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날이 가물어도 끝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깊이 판 우물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고여 있습니다. 목마른 과객은 그 두레박을 우물 깊이 던집니다. 그리고는 바로 길어 올리지 않고 줄을 흔들어 두레박이 충분히 쓰러져서 깊은 물속에 풍덩 잠길 때까지 줄을 흔듭니다. 완전히 그 두레박에 물이 가득 담긴 것을 무게를 통해 확인한 후 그는 그 긴 줄을 천천히, 천천히 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길어 올립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없는 일상적인 언어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의 깊이를 더해주지 못합니다. 한 마디 말이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깊은 우물의 두레박을 던진 마음으로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언어를 길어 올려야 합니다. 그것이 비록 무슨 사소한 이야기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되도록 그렇게 기도를 길어 올려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걸으려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헐렁한 추리닝 바람으로 운동화를 신고 걷고는 있습니다마는 걸으면서 끊임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어플을 만지작거리며 어슬렁어슬렁 걸어갑니다. 괜히 시간만 낭비하는 거지 운동 아닙니다. 걸을 때에는 자기 몸이 앞뒤로 밀릴 정도로 파워 있게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불과 한 15분 정도 걸으면 장기 전체가 출렁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것이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간절한 기도야말로 그의 마음과 온 정신을 출렁거리게 만듭니다. 주님 앞에 옳지 않은 마음을 떨쳐버리게 만드는가 하면 하나님이 주신 마음들이 단단히 달라붙어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마음 깊은 곳에서 건져 올리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뜻 없는 수만 마디의 치장하는 말보다는 오히려 언어가 없는 한 마디의 신음소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훌륭한 기도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을 담아 언어를 길어 올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언어에 단지 침을 바르는 것이 아니라 수고의 땀과 눈물을 담아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이 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여러분 자신에게 더 먼저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없이 말씀을 들어도 왠지 깊이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도가 부족하다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기쁨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기도생활에 척박함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이 기도를 건져 올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하고 그렇게 몰입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하나님께 쏟는 기도를 드릴 때에 그때에 기도하는 사람의 영혼 안에는 그 기도의 응답보다도 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어둡던 마음에 빛이, 얼음처럼 냉랭했던 마음의 불꽃이 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 자신의 마음을 모두 쏟아 붓는 육체의 혼신의 힘을 다하는 기도로 당신 자신을 헌신하셨기에 기도를 마치신 후에는 쉬시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육신이 연약해지셨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의 기도의 헌신은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교회를 위해서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나 혹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들이나 어려움에 처한 지체들을 위해서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마치 그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위대한 일의 계획이 자신의 일인 것처럼 생각되어서 마음을 쏟은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그렇게 마음을 모아서 당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친밀함을 보이시고, 그가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는 도우실 것이며 그가 무지 속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진리의 빛을 비춰주실 것이고, 능력이 모자란 사람들에게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렇게 당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을 기도 속에서 만나주시는 주님입니다. 건조하고 메마른 삶을 버리고 다시 한 번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며 그 은혜 속에서 새 힘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를 위한 작별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막 6:4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풍랑 이는 파도를 잔잔케 하신 사건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수만 명의 사람을 먹이셨고, 그러자 무리들은 예수님을 높이기 시작 했습니다. 병행기사인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달랐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꿈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다윗왕 때처럼 강성한 나라를 이루고 주변의 작은 많은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그러한 나라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과 같은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무리들로부터 열광과 인기를 한 몸에 얻으실 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혀 색다른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던 사람 흔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도 이 놀라운 광경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II. 기적과 열광의 때 하신 일
A. 작별하심
그러면 그 기적과 열광의 때에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제일 먼저 작별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해 열광하는 무리들을 떠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리들과 헤어지는 동안 제자들로 하여금 배타고 뱃세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남은 무리들과도 작별하고 예수님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백성들이 가장 열광하고 있는 이 인기 절정의 순간에 예수님은 홀로 계시기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무지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고, 병들었기 때문에 기적적인 치유의 능력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주님이 열심을 다하여 가르치면 어두운 지성을 깨치고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훌륭하게 받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들로부터 당신 자신을 철수하듯이 사람들과 작별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분주하고 바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응시하기에는 너무나 번잡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영혼의 온전한 응시는 믿음의 표현이고, 그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는 온전한 사랑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질력이 나지 않습니다. 응시하면 응시할수록 마음속에는 그리움과 사랑의 정이 물결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많은 시간들 속에 작별하지 못하고 헤어지지 못하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그리고 세속적인 관심사들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평균 들여다보는 시간이 2시간 40분이라고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많은 시간을 사람들을 만나서 떠들고 웃고 싸우고 이야기하고 그것도 모라자서 집에 와서는 텔레비전 틀어놓고 또 들여다보고, 그것도 모자라서 혼자 있을 때 같이 있을 때 수시로 대중적인 매체를 보면서 우리는 수많은 영상 혹은 그 내용에 현혹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도움이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오는 격려나 위로, 섬김이 우리의 인생에 힘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 그런 것들과 작별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지 않고는 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라고 생각하던 일과도 때로는 작별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이 사람들하고는 헤어지는 것이 불가능하겠구나, 내가 이 사람은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죽으면 죽었지 이 사람들과는 헤어질 수 없다 하는 사람과도 작별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 자신께 나아올 때에 수많은 무거운 것들을 끌어안고 나아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당신을 만나기 위해 모든 사람과 작별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면서 당신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들과 헤어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어디에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 한 분 앞에 사는 것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그 주님 앞에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것과 헤어질 수 있다는 용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과 열광의 때에 이런 모든 사람들과 작별하셨습니다.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대면할 갈망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B. 기도하심
두 번째는 기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무리를 작별하신 후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원래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번영, 성공, 이 세상의 평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셨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여러 차례 당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기도라고 하는 것은 문제 있는 사람들만 기도하는 것일까요? 정말 기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역경과 난관에 처해 있을 때 거기로부터 스스로를 건져내기 위해서만 필요한 그러한 수단일까요? 기도는 단지 목적 성취의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오히려 마음을 쏟아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에 삶의 동기는 순화되고 구원 받을 때의 신자의 마음속에 품었던 삶의 목표는 오롯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인생의 의미는 곧 그가 하고 있는 일의 크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고 열렬히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는 순전하지 않는 동기들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하물며 스스로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이런 것들이 섞여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찬란한 진리의 빛입니다. 진리의 좌표 위에 자신의 삶을 얹어놓고 그 진리로부터 얼 만큼 이탈했는지 살펴보고 그것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진리가 지시하는 대로 살려고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때로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났다가 사라지지만 진리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피아노가 다 낡아서 그래서 소리가 이상해도 좋은 조율사가 와서 하루 종일 잘 조율을 하고 나면 완전히 다른 피아노가 됩니다. 그 조율사가 탁월한 피아니스트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조율사의 정신 속에는 절대 음감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음정의 음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머릿속에 박혀있고, 피아노의 소리를 들을 때에 그것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술을 이용해서 현을 늘이고 줄이면서 소리를 그 절대 음감에다가 맞추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지고 멀리 계신 분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의 조율이 흩어져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깊이 성찰하고 그래서 간절한 기도로서 그 자신의 위치와 그리고 현 상태를 정확하게 인식하여야 합니다.
최근에 조선시대의 선비들의 역사를 좀 읽으면서 참 이 세상에 멋있게 살다가 간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최근에 나왔던 영화중 ‘사도’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세자는 불행하게도 왕의 눈에 차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세자를 미워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자식에게 나라를 맡겼다가는 나라를 거덜 나겠구나 라고 하는 나라에 대한 염려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아예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서 죽일 수는 없고, 세자에서 폐하여 서민이 되게 하고 싶었습니다. 왕이 너는 잘렸다, 너는 평민으로 돌아가거라 이런 것은 너무 체통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중량급 있는 신하에게 주청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폐하, 세자는 깜량이 안되니 자르시고 평민으로 만드소서.” 그러면 자기가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다’ 그리고 받아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승지, 대제학 이런 신료들 중에서 명망이 있고 쟁쟁한 사람들에게 지시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반응이었죠? ‘폐하, 그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목메어서 죽었습니다. ‘니가 해라’ 그 사람도 똑같이 써 놓고 또 죽었습니다. 써 놓고 또 죽었습니다. 그게 조선 시대의 선비의 기개입니다.
여러분들은 제사를 지내보셨죠? 그러면 할아버지나 조상 제사를 지낼 때 보면 ‘고 아무아무개 학생 부군’ 이렇게 나옵니다. 그 학생이 뭐냐 하면 학생입니다. 저는 그 지방을 이렇게 보면서 도대체 우리 할아버지가 무슨 학교를 다녔길래 학생이라고 썼나하고 어린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태어나면 모두 공부하는 것이 인간이다 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서당에서 무릎을 꿇고 배우는 천자문이나 사서삼경만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경전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 자연의 세계에서 자신의 반성을 통해 인간과의 경험을 통해서 참된 도가 무엇인지를 배워가는 사람들이 바로 인간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기회가 주어지면 이 사람들에게는 이상이 있었는데 그 이상이 뭐냐 하면 수기안인, 수기치인이라고도 하는데 수기는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수양하여 참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분량만큼만 안인할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치인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다스린다라는 이 말은 큰 권력을 가지고 위에서 지배한다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질서에서 어긋난 사람들을 잘 섬겨서 인간에게 마땅한 자리로 갖다놓고 사회가 그런 사회가 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유교의 이상입니다. 이것은 사실은 성경에서 인간에게 준 정신, 르네상스 시대에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발견할 때 가졌던 두 가지 사상과 일치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신 앞에서 온전한 인간이 되고,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이 모든 인류 세계에 유익이 되도록 사는 것이 르네상스 사람들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르네상스 사람들만의 이상이 아니라 성경에서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이 인간에게 그려주신 하나의 아름다운 삶의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의 삶은 그냥 골방 속에서 혼자 예수 믿으면서 살아가는 삶이어서는 안 됩니다.
종종 그 선비들이 그 나라의 부름을 받으면 커다란 관직에 나아갑니다. 그 관직에 나아가서 그 많은 녹봉과 권력을 가지고 밑에 있는 사람들을 휘어잡고 말하자면 가렴주구하고 그렇게 이익을 취해서 자기 배를 부풀리는 오늘날 같은 이 정치인이나 관료 같은 그런 소인배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런 권한을 가지고 공직에 나아와 많은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자기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질서에서 이탈한 인류의 생활을 올바로 바로 잡게 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자기가 거기에 있는 이유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그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시국이 안 좋습니다. 왕이 거의 또라이 같은 사람을 만나서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조폭 같은 인간을 만난다든지 아니면 형세나 모든 것을 볼 때 자기 이상을 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누군가의 하수인 노릇이나 해야 될 것 같은 상황이 들면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그 다음에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고 간절히 주청을 하고 끊임없이 저항했기 때문에 사약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고요히 돗자리 위에 무릎을 꿇고 그리고 사약을 먹은 다음 자신의 진정성을 토하는 붉은 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배를 가면 절해고도의 외로운 섬에서 찾아오는 친구도 없이 홀로 외로이 있을 때에도 그는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한 인간으로서 자기를 끊임없이 성찰하며 그리고 어떻게 남아있는 이 인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을 하면서 자기를 연마하고 수련할 뿐만 아니라 기록들을 남기면서 농업이나 어업 혹은 의학에 관한 저술들을 남깁니다. 그게 조선 시대 선비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만약에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눈을 가지고 본다면 그 분들은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관념이 없습니다. 추상적으로 그려낸 어떤 도라는 개념 하나를 가지고도 이렇게 용기가 있는 진정성 있는 삶을 산 것입니다.
우리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너무 품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작은 이익에 너무나 밝고 그리고 자신에게 어떤 권한이나 지위가 주어졌을 때에 그것을 사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고 그리고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보십시오. 이렇게 기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습니다. 남자만 5000명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주석가들에 의하면 이 남자 속에는 애들하고 노인은 포함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인구조사를 할 때 기본적인 기준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건강과 체력이 있는 사람들의 수만 인구에 들어갑니다. 몇 만 명이 지금 이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었는지를 모릅니다. 최소한 2~3만 명 되지 않겠습니까?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과연 이 시대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 쉬웠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했으면 수많은 사람이 따라왔을 것입니다. 그 따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단순히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꺼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로마에 반기를 들겠다고 하는 그런 자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러한 인기를 얻지 못해서 안달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을 죽여서라도 그런 인기를 누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 번째로 하신 일이 그 무리들과 작별하고 산에 가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찬송을 부르거나 책을 읽거나 하면 경건한 정동이 일어납니다.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예화를 듣다가 감동이 와서 흐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것이 삶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마음에서 그렇게 일어난 커다란 정동은 두루뭉술합니다.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파워가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감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상황을 위해서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마음에 일어난 거룩한 정동이 커다란 밀가루 반죽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보여준다고 해서 배부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빚어서 찌든지 튀기든지 굽든지 삶든지 그렇게 할 때에 그것이 음식이 되어서 우리 앞에 놓이는 것처럼 두루뭉술이 같은 우리의 마음속에 거룩한 경외심은 간절한 기도를 가지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복종하기 위하여 기도할 때 그때에 그것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쇠로 만든 화살이라도 그 끝을 예리하게 벼리지 아니하면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끝을 예리하게 벼려서 살갗을 스치기만 해도 그 끝에 묻은 독이 치명적으로 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위력이 있는 화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을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 산에 가심
마지막 세 번째는 산에 가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희랍어 성경에는 ‘그 산 속으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쏟을 환경을 찾으신 것입니다. 경건한 슬픔이 가장 좋아하는 환경은 외로움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묻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에 홀로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다른 생각을 하고 우리의 정신을 분산시키지 않으면 너무 힘들어 합니다. 그것은 결국 신자의 영혼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먹고 마시고 끊임없이 관심을 분산시키는 속에서 영혼의 흐느끼는 갈망은 외면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정말 내 안에 거짓된 나에 에워싸여서 참된 나를 잊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맛집에 다녀보고 온갖 즐거운 시간을 가져도 홀로 자리에 눕는 밤에는 견딜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옵니다. 할 수 없이 그 다음날 바쁘게 보내며 즐거움을 찾을 계획을 짜야지만 잠이 드는 것입니다. 이게 어찌 인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위대함은 정신에 있고 그 정신의 위대함은 삶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외로운 장소는 참 자기를 찾아가기에 적합한 환경이고 참 자기를 찾아가는 여행의 과정은 참 하나님을 마음으로 찾아가는 과정과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가끔 가슴이 답답할 때 기도원을 찾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저도 자주 갑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속세에 근원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세속적인 사람은 산 속에서도 세속적일 수밖에 없고, 마음에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사람은 시장 바닥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교통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세속은 장소나 거리가 아닌 자기 마음 안에 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예수님은 그 인기 절정의 시간에 무리들이 열광하는 그 시간에 자기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과 작별하시고, 기도하셨고, 하나님과의 더 깊은 대면을 위해서 산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자기를 철수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외로워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외로운 시간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이 세상도 없고, 거짓된 나도 끊임없이 작별하며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어 들뜨고 분주한 마음으로부터 풀려나와 참 자기를 찾아가는 시간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만 한 시간이라도 그런 시간이 있습니까? 시련보다는 번영 속에서 위험한 것이 신자의 영혼입니다. 여러분들이 평안하고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소란한 마음, 분요한 정신에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갖고 하나님을 깊이 대면해야 합니다. 건조하게 살다가 주일에 한번 나와 어쩌다가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몇 주 지나지 않아서 그 뭉클함도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하나님의 경외의 정신이 정동으로 다가올 때에는 그것을 발판 삼아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번잡하던 일상으로부터 떠나 하나님 한분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중심을 쏟아 놓으며 주님의 얼굴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빛 아래서 마음을 물같이 녹이며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형상을 우리의 마음속에 빚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에 그 은혜의 감동이 구체적인 삶의 순종을 위한 파워가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시렵니까? 설교는 끝났고, 이제 여러분들이 삶으로 응답하실 차례입니다. 내 인생도 아닌 남의 인생 같고 남의 인생 같으면서도 남이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 힘겨운 인생살이, 무거운 착고를 발에 차고 가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꼭 가고 싶지도 않은 길을 두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온 인생의 길이 지금까지도 억울한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정말 기도하고 이 모든 사슬을 끊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참으로 자기 인생에 진정한 주체가 되어 자유로운 삶을 사시겠습니까? 이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회막으로 나아간 사람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출 33: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모세는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내려오기를 지체하자 백성들 속에서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모세가 더디 내려옴을 보고 그들이 우상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우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 고유한 우상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를 보이는 형상으로 빚어 모세를 대신해서 그 우상이 자신들을 인도하여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매우 슬프게 생각하셨고, 하나님의 진노를 발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II. 우상을 금하심
A. 형상화를 금하신 뜻
하나님은 왜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것, 혹은 우상을 만드는 것을 싫어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우상을 금하신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는 하나님을 다른 신과 대등하게 생각하게 될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여호와의 종교의 영적 특성이 무시될 것을 우려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종의 종교적인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빚어서 만든 형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모두 자신들의 신을 형상화한 우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보이는 그것에 열심을 품고 그것을 섬기고 그것에 예배하는 것이 곧 자기의 신들을 위한 경배 행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을 빗대어서 만든 어떠한 형상도 제작하는 것조차 금지되었습니다. 그들이 영적인 생활 속에서 생생하게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느끼는 동안에는 어떤 우상보다도 확실한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셨지만 그러한 영적인 감각이 사라지고 나면 하나님은 아무데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절을 하고 제사를 드릴 때만이 아니라 항상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종교를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참된 경외와 우상 숭배를 혼동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을 기억할 것입니다. 모세가 만들었던 구리 뱀, 그래서 불뱀에 물린 수많은 사람을 낫게 만들었던 역사적인 유물인 그 구리뱀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것을 모두 두드리고 없애면서 그것을 단지 놋 조각일 뿐이라고 혹평하였습니다. 그는 얼마나 여호와의 종교에 특성에 정통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했던 것이 바로 그렇게 눈에 보이는 형상을 통해서 그것에 대해서 바치는 미신적인 행위가 곧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건과 경배의 마음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를 뇌물처럼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우리의 중심을 통회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예배였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형상화를 금지하셨습니다.
B. “동행치 않으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거역하여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범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번에 이스라엘을 진노하여 쓸어버리셔야 마땅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올라가라 내가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내 앞서 사자를 보내어 여호와의 사자, 곧 천사일 것입니다. 그 천사를 보내어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모두 소탕하고 그리고 너희가 그 땅을 약속대로 유업으로 얻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3절에서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으리니” 다시 말해서 “동행하지 않으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굳은 마음이 녹아 내렸고 커다란 영적인 각성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영적인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던 마음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영적인 각성을 경험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와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에녹은 65세에 무드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셨다는 기록은 수없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열왕 등의 역사에서 다음 한 마디의 말씀은 그 왕에 대한 모든 하나님의 호의적인 평가를 대신하는 표현입니다. 그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그와 함께 동행하셨더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지상 최대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축복의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실현이 됩니다. 그래서 그 분이 사람의 몸 입고 도성인신하실 때에 그 이름을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다 라고 불렀습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병들고, 헐벗고, 굶주리고, 무지한 사람들과 함께 계셨고,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씻기시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치료하시며 어두운 마음을 진리의 빛으로 밝혀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구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와 계실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고 함께 계심으로써 이 약속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기에서 끝나지가 않습니다.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는 모두 몸의 부활을 경험하며 완전한 구원의 성취를 보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지는 않겠다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말씀의 각성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지 않는데 우리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유업으로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무너진 마음을 가지고 경건한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모세는 영적인 통찰력이 있는 지도자로서 그들이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해낼 수 있는 장소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막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후 이제 광야 생활을 하던 시절을 새겨보십시오. 어디를 가든지 구름기둥, 혹은 불기둥이 머무는 그곳에서 이동식 성전인 성막이 자리를 잡았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각각 정해진 위치에 따라서 성막을 중심에 놓고 진을 쳤습니다. 이백만 명 내지는 삼백만 명가량 되었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요를 생각한다면 하늘에서 내려다 본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천막으로 이루어진 임시 촌락은 어마어마한 규모였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 회막을 그 진 가운데 세운 것이 아니라 그 진에서 떨어진 곳에 세웠습니다. 성막 가까이에 자리를 잡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그 모든 진을 통과해서 회막까지 나아가는데 상당히 많은 거리를 걸어야 했을 것입니다.
III. 위기 속에 사용하신 사람들
A.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커다란 위기를 만났습니다. 출애굽 이후로 때로는 홍해 바다 앞에 직면하거나 마라에서 물이 없어 목마른 위기를 만났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육적인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일종의 영적인 커다란 위기였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이 위기는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위기 속에서 사용하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여호와를 앙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갔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앙모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인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 하나님을 의존한다는 의미입니다. 진 안에 있던 백성들 중 그런 깊은 신앙의 각성을 경험한 사람들은 바로 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진을 지나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벌판에 쳐져있었을 그 회막으로 나아가 거기서 하나님을 앙모하는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았을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앙모하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보여드렸습니다. 그들은 단장품을 모두 제거했으니 이것은 그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일매일 자신들의 몸에 달린 장신구, 혹은 일상적인 소소한 즐거움들에 매달려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받은 소명이 무엇이고 애굽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는 자신들의 이 여정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잊고 살았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사실상 그들을 버리는 것처럼 동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을 때 그들에게는 큰 두려움이 임했고, 이것은 복스러운 영적인 각성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실상 버리셨는데 그까짓 가나안이 무엇입니까? 거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든들,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따고, 짓지 않은 집에서 평화를 누리며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묻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언약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앙모하는 사람들입니까? 매일 예배가 끝나고 교회당을 나가는 순간에 마음속에서 눈물이 비처럼 쏟아집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곤고한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앙모하기 때문에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예배 시간에 얼굴을 가리고 계십니다. 그렇게 생기발랄하던 얼굴이 예배시간에는 우울하기 짝이 없고 진리가 선포될수록 여러분의 영혼은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지난 22년간 게으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했고, 주님이 여러분에게 전하라고 하는 말씀을 최선을 다해서 전했습니다. 자, 저는 이제 목회의 끝자락을 밟고 있고 여러분은 저와 함께 얼마나 더 이 설교를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무슨 지위와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느 가문에서 태어나서 어떤 훌륭한 존경을 사회로부터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나의 눈에 그저 영혼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지금 있는 이 처지, 이 신앙, 이 마음, 이 삶이 하나님 앞에 받으심직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이 약속한대로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지만 그러나 당신 자신은 주시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 없는 그 유업, 그 영광,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렇게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언젠가는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감화를 받고 하나님을 앙모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그 분의 살아계심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었고, 그리고 삶의 사태가 어떠한 비극적인 상황으로 전개되든지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갖는 사람들이었고 이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우리 주님을 의지하며 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물이 말랐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예전에는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방황하고 어둠 속에 헤매었습니다. 이제는 진리가 가까이 있습니다. 손을 뻗으면 진리를 담고 있는 책들이 있고,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면 들을 수 있는 설교가 있습니다. 손을 뻗치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기도하면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런데 곤고하게 삽니다. 여러분은 종종 이것이 이러저러한 상황 때문이고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유체 이탈적 화법으로 변명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길이 무엇일까요? 세월이 많이 흘러도 길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길도 언제나 스스로 하나님을 버림으로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회개의 다리를 지나야 합니다. 회개의 눈물이 여러분과 관계가 있습니까? 여러분 중의 대부분은 지난 일주일동안 하루에 20분도 기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전 세계의 모든 종교, 심지어는 미신을 포함해도 그 정도 치성으로 새 사람이 된다고 가르치는 종교는 없습니다. 많은 지식이 있으면 무엇을 합니까?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한 시간 남짓 하는 예배를 드리고 오늘도 하나님 앞에 의무를 다했다는 만족감을 가지고 예배당을 떠나지만 예배당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잠시 잊었던 삶의 무거운 무게들은 다시 여러분을 엄습합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일상적인 진의 생활로 돌아갑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큰 저택이나 고액의 사례비나 고급스러운 자동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여러분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보람이 없이 교인들의 종교의 만족을 위해서 설교하는 목회자는 거룩한 소명을 생계와 바꾼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큰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은 그들 모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앙모하는 사람들, 이 청천벽력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눌 수 없는 마음으로 그 먼 길을 걸어 광야에 있는 회막을 향해 나아가던 사람들, 그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언제나 이 장막을 찾았고 모세가 그 장막에 들어갈 때마다 그를 볼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립하여 모세와 마주하시는 하나님께 경배를 표했습니다. 모세가 그 안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오늘 성경은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앙모하는 마음으로 이 회막을 찾았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와 같은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정말 주님만을 앙모하는 시간이 있습니까? 이른 아침 눈 뜰 때부터 깊은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의 입은 쉼 없이 움직이고 이 입으로 먹고 마시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사물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의 몸을 더럽혀 우리 속에 죄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수많은 쏟아낸 말들 중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묻어나온 말이 얼마나 될까요? 정말 여러분 마음속에 조용히 눈을 감고 우리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 때문에 참고, 주님 때문에 이기고 견디고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던 것들을 내려놓는 교제의 시간들이 있기는 한 것입니까?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앙모하는 사람, 이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주님께만 희망을 둔 사람들을 오늘도 찾으십니다. 여러분이 이 마음으로 돌아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기도하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주님은 기도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각성된 심령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두 가지인데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마음을 구별하고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일 없이는 누구도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일 먼저 단장품을 제거하고 일상의 즐거움과 결별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공동체와 타인의 허물을 자신의 죄악으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교제하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삶의 상황을 사람이 다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여러분은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저의 마음에 사무치도록 느껴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 잠자리에 드는 그 시간까지 여러분의 생각을 신령한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들이 가득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여러 주 동안 기도에 대해서 외쳐도 대부분의 사람은 요지부동입니다. 왜 그렇게 여러분이 기도를 안 하는지 아십니까?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즐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C. 구별된 마음과 환경
사람이 가장 행복한 때는 자신의 마음의 성향과 꼭 같은 곳에 있을 때 행복합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파자마 바람으로 뒹굴 수 있는 소파가 가장 편한 장소입니다. 정욕에 일렁거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질펀한 육체의 광란의 자리가 가장 행복한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주님께 예배하는 이 시간이 천상의 시간처럼 달콤합니다. 왜 기도하지 못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냥 사시렵니까? 사십시오. 나는 생각합니다. 위선과 거짓 속에서 그릇된 안전에 취하여 영혼을 망가트리느니 차라리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정직하게 고백하고 세상으로 나갔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에 대한 고민도 없고,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없으면서 이렇게 예배당에 나오는 것만으로 영혼의 만족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계십니까?
저는 예배 시간마다 곤고한 영혼을 안고 돌아가는 수많은 여러분의 얼굴을 봅니다.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배의 표현입니다. 비록 그가 아는 지식이 짧고 가진바 학식이 얕을 지라도 어린 아이처럼 마음을 쏟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면 여호와의 종교의 본질에 접근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기에 매우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 같은 자들에게는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고정된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집중된 마음,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중심의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매시간 12시에 여기에 서서 극장의 주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왜 그렇게 늦게 오십니까? 얼마나 중요한 일이 있으십니까? 한 15분 전에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 간절히 이 예배에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 무슨 이변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은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당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게 하시고, 이길 수 없는 시련을 인내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어떠한 삶의 상황을 만나든지 기도하던 사람들은 언제나 간증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그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다는 간증이 있습니다.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좋은 것으로 바꿔 주시고 유혹받는 위기의 순간에서 미끄러질만한 때에 붙들어 주셨던 고백이 있습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모든 희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할 때에 주님을 부르던 사람들은 그 벼랑을 뛰어 내릴 때에 날개를 달아주시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금도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때 우리가 아닌 것이 문제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사단의 전략은 교회의 마음을 찢어놓는 것이고, 마귀의 전략은 여러분의 심령을 소란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끔, 하나님을 향해 영혼의 시선을 고정할 수 없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인생의 고귀한 시간들을 곤고한 영혼으로 방황하다가 마치실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를 보았고 그리고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할 때임이 밝히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각성을 한때 경험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진에 머물며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먹고 마시고 그저 즐기며 그렇게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견딜 수 없는 엄습하는 슬픔과 경건한 눈물을 간직한 채 먼 길을 걸어 진 밖에 떨어져 광야에 있는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중심을 쏟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은총을 베푸실 하나님을 앙망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회막에 있습니까? 아니면 진 한 가운데 그냥 있습니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간절히 앙망하고 진실해 지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 번잡한 세속사에서 떨어져 나와 여러분만의 회막으로 들어가십시오. 거기서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며 용서와 은혜를 구하십시오. 거기서 생명과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생활의 감화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下)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저는 몇 주 전 이미 누가복음 11장 1절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서 이 위대한 성경 구절의 모든 메시지들이 전달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늘 11장 1절의 하반절에 여러분의 시선을 주목하게 하고 싶습니다.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발견했고, 그 예수님의 기도 생활 속에서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몸소 기도를 실천하셨을 뿐만 아니라 환경과 싸워서 그것을 극복하며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에는 육체의 휴식을 취하셔야 할 정도로 심신을 쏟아 부으신 장시간의 기도였음을 제자들이 알았습니다.
II. 감화를 끼친 기도생활
A. 기도를 배운 제자들
주님의 기도가 끝났을 때에 제자들의 반응이 오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는데 예수님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간청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뵈오며 그 기도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의 기도생활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감화를 끼친 기도생활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기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배운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자신들도 기도를 실천하며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가르쳐 준 것같이 자신의 양떼들에게도 이 기도를 가르쳐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과 교통하시는 그 깊은 은혜와 모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열심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셨던 주님의 그 경건한 모본이 제자들의 마음에 커다란 감화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열렬하고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 간절한 기도 생활은 예수님의 인격에 뿌리가 닿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곁에 있다온 흔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 속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의 거룩하심을 경험한 흔적이 묻어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흔적이 인격 속에 깃들여 있을 때에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수많은 삶의 사태들 속에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기도는 불결한 마음을 순결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바쁘게 살면서도 우리의 삶의 진정한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을 향해 정화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예수님의 그 기도 생활을 진심으로 본받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어느 한 곳에서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을 통해 제자들에게 감화를 끼치신 것은 사실이지만 제자들이 오늘 예수님께 기도를 배우고 싶다고 한 것은 그 한 번의 예수님의 기도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세례를 받으시던 그때에도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기도하셨고, 공생애가 시작되자마자 예수님이 마귀에게 이끌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을 때 40일 동안을 금식하셨는데 광야에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제자들을 불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도를 세우실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당신이 매달려야 할 십자가의 형벌이 가까이 왔을 때 그분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매달리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일을 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생활은 결국 기도를 배우는 생활입니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표할 수 있는 거룩한 경외의 최고의 표현이고, 간절하고 마음을 쏟는 기도는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표징입니다. 여러분은 제자들처럼 예수님께로부터 기도를 배우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자신의 고달프고 힘겨운 삶의 마음을 모두 쏟은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눈길 한번 줄 수 없는 그리스도께 매우 낯선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 그는 기도의 학교에 입학합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성실하게 선생님에게 배우며 열심히 학습을 하는 학생들도 있고, 허송세월을 하며 방황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의 학교에서 어떤 학생들입니까? 지금은 비록 약하지만 매일매일 나를 위해 비셨던 우리 주님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여러분도 기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기도의 두 가르침
두 번째는 기도의 두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두 가지를 가르쳐 주셨는데 하나는 기도할 내용이고 이것은 말로 가르치셨고, 그리고 기도의 방식이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뜻이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로 이어지는 주기도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상수훈이야말로 신약 성경 가르침의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 ‘대헌장’이라고 부르는데 저는 주기도문이야 말로 산상수훈 중에서 예수님의 교훈의 대헌장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고는 신약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으며 신약의 메시지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기독교를 오해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만큼 주기도문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주기도문이라는 책을 썼는데 사람들이 어렵다고 잘 안 읽습니다. 그래도 인생을 지식 없이 사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이라도 가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시 펼쳐서 “이 책이 아무리 어려워도 진리의 말씀 없이 인생을 사는 것보다는 쉽다.” 그러고 읽으십시오. 이것은 우리에게 폭풍과 같은 가르침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묻는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친 것은 우리에게 기도를 묻는 제자들에게 소명과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왜 사냐? 그리고 너희들이 기도한다고 치자. 그 모든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서 이 땅에 이루려고 하는 너희의 삶이 무엇이냐?’ 그리고 예수님이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것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옷을 주십시오. 먹을 것을 주십시오. 심지어 신학교 다닐 때에 어느 여학생은 빨간 부츠가 너무 신고 싶으니까 하나님께 간절히 빨간 부츠를 달라고 기도했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귀여우시겠어요?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맨날 그런 거나 달라고 그러면 얼마나 짜증나시겠습니까? 나라를 지키라고 군대를 보낸 녀석이 매일 간식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폭풍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너 왜 사니?’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너 왜 사니? 너 누구니?’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찬양)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 하사
주님 나라 임하시고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것 때문에 인간이 여기에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너희들이 구할 수 있지만 그 구하는 모든 것은 이렇게 너희를 이 땅에 살게 하신 인간의 존재의 목적을 실현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된다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방 종교의 기도와 기독교 기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방 종교의 기도는 그 기도를 들어주어야 할 신들이 세계를 향해 가지고 있는 웅장한 계획이 없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기도가 신학적이지 않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명확한 신학을 이 기도 속에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의 목표와 의도를 가지고 기도하느냐 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즉석해서 예수님이 생각해낸 급조된 기도의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평소 예수님이 일생동안 살아오면서 매일매일 기도하는 그 길었던 기도의 핵심적인 내용, 곧 패턴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주기도문 속에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이루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예수님 마음속에 있는 이상적인 모습이 이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참된 기독교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핵심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왜 기도가 안 될까요?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삶의 초점과 기도의 초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의심이 되면 실험을 해 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이 내일 아침이라도 이래선 안 되겠다 내가 교회의 집사인데 평신도인데 장로인데 내가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그래서 한번 전도지를 들고 아파트를 누비면서 전도해 보십시오. 경비원의 욕설과 냉대를 아파트 주민에게 당하면서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그리고 저녁 때 와서 교회당 앞에 무릎을 꿇고 이 동네의 불쌍한 영혼들을 하나님이 구원해 달라고 빌어보십시오.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하는 것이 가슴에 다가오게 됩니다. 삶이 기도의 문을 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코에 호흡이 남아 있고, 우리의 핏줄의 피가 흐르는 한 계속해야 될 입니다. 그런데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맛을 알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려고 하루 종일 몸부림 쳐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저는 그 찬란한 진리의 빛을 받았던 신앙의 선배들에 비하면 나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진리를 더 많이 깨달을 수 있을까요?’ 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진심으로부터 그 기도가 우러나옵니다. 이처럼 삶과 기도는 나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주기도문의 내용은 우리에게 폭풍과 같이 질문합니다. 너는 기도를 배우기 전 너의 삶이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의 정수를 배울 수 없습니다. 부디 여러분이 이 세상에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생각하며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이 배운 두 번째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몸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환경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열심히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생활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기도는 끝난 후에는 육체의 휴식을 취하여야 할 정도로 몸과 마음에 모든 기운을 쏟아 부은 기도였습니다. 깊은 기도와 장시간의 기도, 그리고 마음과 몸에 모든 기운을 쏟아 붓는 기도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 생활은 핏빛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기도를 가능하게 했던 그 중심에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바로 우리가 마음에 품도록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그 마음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합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그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온전히 복종시키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으로 이 세상에 왔으니 나의 일생이 아버지의 손에 있나이다 운명하실 때에 그 분의 기도는 나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그 순간에 올리는 기도가 아니라 일생 동안 수많은 삶의 상황들을 만나며 그 예수님이 마음으로 누구를 의지하며 사셨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분노하고 사람을 미워하고, 복수를 꿈꾸고, 울분을 터트리고 하는 것은 소인배들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든 삶의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는 구체적인 소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렇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어느 한 순간에 우리의 삶의 밧줄을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르치고 훈계하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고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결국 모든 일들은 주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선한 동기와 악한 동기, 선한 일과 악한 일, 모든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그 일이 왜 그때 내게 일어났어야 됐는지 결국은 모르고 죽게 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높이 계셔서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고 어떤 경우에라도 당신을 어린 아이처럼 의지하는 사람을 배반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신뢰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그 신뢰의 최고의 표현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모두 쏟아 붓는 하나님께만 고정된 마음의 기도입니다. 한 사람이 아무리 유창하게 하나님에 관해 말해도 듣는 사람은 그 지식의 말들이 깊은 기도 속에서 나온 언어인지 요동치는 혈기에서 쏟아져 나온 언어인지를 모두 압니다.
힘없는 기도 생활은 삶 자체를 요동치게 만듭니다. 사람을 향해 비굴해지도록 만들고 때로는 턱없이 교만해지게 만듭니다. 결국 삶 전체가 요동치는 물결과 같아서 안정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은 괴로운 일이고, 기쁜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즐거움이 인생을 뿌리 채 흔들어 놓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쏟는 기도 속에서 매일매일 선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능가하는 사랑으로, 그 선하심으로 자신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가엾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훌륭한 지위를 잃어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 받지 못하는 소외된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기도의 세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에 늘 외면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눈물과 땀과 피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그렇게 농도 짙은 액체의 삶으로 인도하였던 것은 그 분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는 기도생활이었습니다. 시련과 고난,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도전 속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이외에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으로 자기의 길을 뚜벅뚜벅 걸을 수 있는 자신이 거룩한 은혜 안에서 주체성을 가진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황과 환경에 마음이 휘둘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시련과 유혹에 주체성 없이 굴복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신 자신을 모두 쏟으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가능했던 것은 일평생 예수님이 사신 삶의 방식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들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는 법입니다.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미워할 때가 있으면 화해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세월이 지나면서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있는가 하면 지혜로운 사람이 그 지혜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그렇게 다양한 사연을 안고 모든 인간들을 웃기고 울리고 가슴 아프게 하고 가슴 뛰게 하면서 흘러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흘러가는 개울에 소리치는 흐름 그 위에 떠 있는 물방울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마음을 쏟으며 기도할 수 없는 사람, 어디서든지 주님을 찾고 그 분을 뵈옵는 영혼의 만족이 없는 사람들은 군중 속에 있어도 외롭지만 언제든지 그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사람, 어디서든지 그 분과의 교제가 있고, 자신이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이 자신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광야에서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삶의 방식을 능가하는 기도도 없고, 기도의 방식을 초월하는 삶도 없습니다. 삶은 기도의 가치이고 기도한 것만큼만 살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또 어떻게 보면 기도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의 생애를 보면서 그 분이 사셨던 기도의 삶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는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를 쓰시며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 분에게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버림받으신 적이 없었기에 그 분은 십자가에서도 우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친밀하게 부르실 수가 있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모든 이김이 이 정신의 위대한 힘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여러분은 너무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목회자로서 제가 느끼는 감각이고, 여러분의 기도하지 않는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목회에 대한 성적표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기도 이외에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 관해서 능숙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입술에 침을 바르면 되지만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유창하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십자가의 피를 발라야 됩니다. 너무 가슴 아픈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를 그렇게 다 버리시고 기도하셨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시간을 기도 없이 살고 충동적이고 그래서 우리의 삶에 질서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주님은 오늘도 그가 누구이든지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 아들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니 아버지도 아들을 기억하셔서 우리를 용납해 달라고 비는 사람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의 기도를 우리 하나님이 왜 거절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조용히 묵상하시며 어떠한 방식으로 예수님이 기도하셨는지 한번 보십시오.
어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11세기에 어느 주교가 교회에 와보니까 한 성도가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더랍니다. 이 사람은 아주 형식적인 기도의 일인자였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있으면 손을 들고 간절히 기도하는 척하다가 없으면 돌아가는 사람이었는데 그 간절하게 기도하는 성도를 보면서 자기도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손을 들고 ‘하나님’하고 불렀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며 ‘네가 나를 불렀느냐?’ 그러시더랍니다. 심장마비로 죽었답니다. 기도에 예수님의 기도의 방식이 어떤지를 배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렬히 기도하라 그런 뜻입니다.
III. 기도의 제자가 있는가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을 뵈오며 제자들은 진심으로 기도를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참된 믿음의 삶에는 언제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감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감화를 예수님의 이 기도가 제자들에게 감화를 끼친 것은 마음을 쏟아 당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의 열매였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완전히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막 살자,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온전해질 수 있는 것처럼 몸부림칩니다. 매일 매일 영혼이 주님을 만나 온전해지기를 사모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추구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기도생활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면 결국 우리는 하나씩 하나씩 죽을 것입니다. 그때에 나의 자녀들이 교회 안에 있는 나의 지체들이 나를 누구로 기억할까요?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모습을, 여러분이 죽었을 때에 생전의 모습을 기억하며 이런 찬송을 부를 수 있을까요?
(찬양)
예수 세상 계실 때에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IV. 적용과 결론
늘 주님의 생애를 성경에서 읽으며 고난당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에 눈물 흘리던 엄마, 시련과 고난이 가득한 날에도 애써 인자한 모습을 보이시다가 홀로 자신의 방에서 흐느껴 우는 기도로 하루의 문을 닫던 아빠로 기억될까요? 여러분이 떠나가고 난 후에 내가 곤고할 때 대신 눈물 흘리며 나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던 구역장으로 기억이 될까요? 우리의 일생에 기도의 제자가 있습니까? 바른 지식에 피를 바르는 삶이 우리로 하여금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에 그는 일생동안 자신이 살았던 모든 삶을 질어지고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잘 산 사람이라도 회개가 기도의 문을 여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를 배우며 그리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끊임없는 시련과 그치지 않는 고난 속에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모든 생명력 넘치는 은혜의 삶, 원수들까지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던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의 삶은 인간이 예수에게서 솟아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이 그러했던 것처럼 쉼 없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바치며 기도하는 그 은밀하고 깊은 기도 속에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거룩한 은혜의 힘이 솟아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십시오. 그 분이 가신 곳이 어디입니까? 그 분이 엎드렸던 곳이 어디입니까? 그 분이 죽으신 곳이 어디입니까? 거기가 바로 우리가 가야할 곳이고 우리가 엎드려야 할 곳이고, 우리가 죽어야 할 곳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이런 마음으로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며 부복하고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로 나타난 믿음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1-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누가복음 18장은 기도에 관한 위대한 교훈을 두 편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고, 또 하나는 바리새인과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죄인인 세리의 이야기입니다. 죄인인 세리의 이야기가 하나님 앞에 한없이 낮아진 죄에 대한 자각이 기도의 문을 여는 것을 보여 준다면,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는 끈질긴 기도와 낙심하지 않는 믿음이 기도 생활의 중요한 토대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과부였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원한에 깊이 사무칠만한 억울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재판장에 나아가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로 이 유명한 비유는 시작이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 보여야 할 믿음 생활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생활입니다.
II. 믿음의 기도
A. 기도의 조건
그러면 믿음의 기도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 유명한 비유를 말씀하시기에 앞서 당신이 말씀하시려고 하는 이 비유의 요점을 먼저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조건이었습니다. 그 기도의 조건은 두 가지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24시간 기도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체의 휴식을 위한 수면이 필요하고, 또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어떤 일에 쏟으며 살아야 하는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항상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으로 24시간을 채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기도의 영으로 꽉차있는 신자의 은혜로운 마음의 상태가 삶을 움직이는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금식기도를 해 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기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를 하면 실제로 모든 시간을 기도에 사용하지 못합니다. 저는 젊었을 때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그저 금식 기도를 해도 하루에 한 7시간 정도 기도하면 족하고 좀 많으면 8시간 9시간 정도입니다. 체력이 그 기도를 다 감당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음식을 끊으니까 육체에 엄청난 피곤과 그리고 무력감이 엄습합니다. 아침에 한 두어 시간, 두세 시간 기도하고 점심에 한 두 시간 기도하고 오후에, 밤에 한 세 시간 기도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에 쏟는 것입니다. 나머지 시간은 성경도 읽고, 찬송도 듣고, 묵상도 하면서 지냅니다. 그 대신 그런 기도의 장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번뇌와 모든 산란한 것들로부터 자신의 마음과 감각을 떼어놓고 눈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우러러 봅니다. 그래서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면 그것이 즉시 기도로 쏟아져 나올 수 있도록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응시하며 집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도의 큰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제든지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항상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조건에 대해 또 한 가지를 말씀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엥카케인’(eἐκκακεῖν)이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무엇 안에’라는 뜻을 가진 ‘엔’이라는 전치사와 ‘나쁘다’라는 의미를 가진 ‘카코스’의 합성어입니다. 나쁜 것, 안에 있는 것, 나쁜 것들에 에워싸여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낙담하다, 실망하다’ 혹은 ‘괴롭다, 싫증나다’라는 의미들이 나오게 됩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좋은 것에 에워싸여 있을 때 삶의 의욕이 솟고, 희망이 솟고, 무엇인가 해보고자 하는 욕구가 일어나지 사면을 돌아보았는데 모든 사물들의 질서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닐 경우에는 지치고 고통스럽고 살아서 그 상황을 맞이하는 것 자체가 괴롭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이들을 교육시킬 때 무엇이든지 “네가 결심하면 될 수 있다.”라고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교육은 매우 잘못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제가 성인이 된 이후에 아니 더 양보해서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한 달에 한 번씩 내 원하는 길을 선택하고 그대로 될 수 있었다면 전 여기서 여러분을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여기에 모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꽤 먼 수백 킬로미터의 길을 운전해서 매주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동네에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있고 편리하게 나갈 수 있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에 와서 매 예배시간마다 자기들을 죄인이라고 여기면서 쥐 잡듯 하는 그 긴 설교를 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뭐 하러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만약에 매순간 스위치를 누르듯이 우리가 원하는 삶을 선택했다면 우리가 여기 모였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목사가 됐겠습니까? 저는 목회는 꿈꾸지 않았습니다. 저는 신학 교육 2학년 때 헌신했습니다. 생명처럼 생각했습니다. 만 서른 두 살의 나이에 모든 친구들이 부러워하도록 박사학위도 없이 신학교에 정식 교수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살았습니다. 첫 대학에서 4년을 봉직했지만 22년 동안 열린 교회를 개척해서 흘린 눈물보다 훨씬 많이 흘렸습니다. 현실은 내 맘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팔년 만에 결국은 학교를 떠났습니다. 모든 동료들이 말렸습니다. 당신 가면 후회한다. 교수하던 사람들은 목회 못한다. 이 좋은 대우를 무엇 때문에 뿌리치고 가느냐 라고 말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 이상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에 불타고 있는 신학 교육의 꿈은 있는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힘 앞에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 뜻대로 안됐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만났습니다. 할렐루야. 이상하지만 할렐루야. 나는 그때 그 결정을 추호도 후회 안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감사합니다. 그때 내 맘대로 안 됐던 게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는 여러분을 이렇게 만나게 한 것입니다.
여기 장남과 장녀가 아닌 분들이 많이 있는데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금 적합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용서하고 들으세요. 절대적으로 그렇지 않지만 확률적으로 많은 형제의 장남이나 많은 오누이들의 장녀는 용서하십시오. 확률적으로 사가지가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적습니다. 확률적으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얘는 자라면서부터 제 맘대로 안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터득하며 자라온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천재와 도전적인 모험가는 장녀, 장남에게서는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뭐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도 자라면서 어렸을 때 고민이 엄마가 먹을 것을 나눠줍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고민입니다. 똑같이 나누어줬습니다. 동생들이 먹습니다. 먼저 먹으면 동생 먹는 게 먹고 싶고, 남기면 동생이 달라고 그래서 뺐기고, 안 뺐기겠다고 그러면 항상 혼나는 것은 나입니다. “너는 형이 되 가지고 어떻게 동생을 그렇게 울리냐” 그래서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터득을 합니다. 그게 쌓이면서 사회에 나갑니다. 그런데 모든지 벌떡 드러누워서 두 발만 구르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둘째, 셋째들의 이상보다는 ‘이게 안 되는 게 많구나, 내가 잘못한 게 없어도 혼나는 때가 많구나.’ 그게 세상의 현실과 아주 유사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좀 이상한 일을 만나도 충격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늘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게 혼자 태어났거나 아니면 그냥 으악 하고 발 구르면서 소리를 지르면 엄마, 아빠가 종처럼 쩔쩔매는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을 가져도 그런 습관을 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힘은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을 집요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때로는 비윤리적인 방법, 배신과 음모, 그리고 반역, 심지어는 부도덕한 일을 자행하면서도 자기 뜻대로 일이 되게끔 만드는 데에 인생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신앙의 힘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이 무엇인가 자기의 뜻대로 안될 때 그 안 되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굴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왜 내가 가지고 있는 뜻이 선하고 올바른데 이게 좌절될까 생각을 하면서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연결시켜서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 현실에서 당하는 모든 좌절과 시련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승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이 항상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선이 패배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완벽하게 패배하는 때가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한숨을 쉬며 좌절합니다. 이 세상이 끝난 것처럼. 인류 역사 이래 항상 그런 한숨소리 속에서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마틴 루터 킹이라는 설교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전히 패배한 선이 승리한 악보다 위대하다.” 왜냐하면 거기가 인생의 끝도 아니고 세상의 종점도 아닙니다.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눈에 보이는 이 사물의 모든 질서 너머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모든 사태들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와도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붙들며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고, 그런 사람을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에 보고 싶어 했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 현실 속에서 그것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오느냐 입니다. 우리가 좋고 옳다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모두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주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의식입니다. 인정해야 됩니다. 세상에 만사가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그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쉽게 굴복해서 악과 타협하거나 불의에 양보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일에 몸을 파는 일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항상 우리의 신앙과 양심을 총동원해서 참으로 옳다고 믿는 바를 그러나 언제든지 성경과 이성에 의해서 설득 당하면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 가치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아우라입니다.
저는 이번 화요일 날 뉴스에서 보시겠지만 총신대학원 졸업반 학생들에게 마지막 고별 강연을 해달라고 그래서 갔습니다. 강의 제목이 “목사, 기독교 선비로서 살다가 죽다”였습니다. 이러고 가서 선비를 이야기하려니까 좀 아닌 것 같아서 두루마기를 하나 그리고 또 누구 흉내 낸다고 그럴지 모르지만 까만 두루마기를 하나 해 입고 올라갔습니다. 오늘날은 목회자이건, 그리스도인이건 아우라를 잃은 시대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때에 비록 성경의 특별 계시는 몰랐지만 일반 계시의 빛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될 지를 터득하고 그리고 인간으로서 올바른 길을 걸으려고 했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 속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하게 하는 대목들이 많이 있더라 하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한 구절이 맹자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한문은 생략하고 번역을 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집에 거하며” 이것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곳에 서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길을 걸으며 뜻을 얻는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걷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라도 그 길을 걷나니 부귀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못하고 존귀하게 되고 비천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그의 뜻을 바꾸지 못하게 하며 무력과 죽음의 위협의 칼이 그를 무릎 꿇게 하지 못하나니 우리는 이런 사람을 일컬어 대장부라고 부른다.” 읽는 순간 가슴이 쿵하고 울렸습니다. 아, 이게 그리스도인인데 모든 사랑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질서를 따라 자기의 자리에 서며 대의가 아닌 길은 결코 걷지 못하며 만약에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면 지도자가 되어서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걷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거나 배척을 받아 낙향을 하면 시골에서 혼자 살면서도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니 부귀에 대한 기대가 마음을 어지럽게 못하고 존귀하게 되거나 비천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공명에 대한 기대가 그의 뜻을 기회주의적으로 바꾸지 못하게 하며 때로는 자기의 사상을 핍박하는 원수들의 칼날을 목에 겨눈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를 굴복시킬 수 없는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고 말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 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우리에게는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러질지언정 꺾어지지 않는 신앙으로 자신의 현실과 마주하며 그 고난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환경과 상황이 자기에게 주는 모든 유익과 안일함, 때로는 지위까지 대담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자신을 인간으로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해 씨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낙심할 이유가 없고, 낙심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차피 살아가는 동기가 넉넉한 물질생활이나 사람들로부터 받는 박수갈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B. 하나님 앞에 매달림
예수님은 이런 기도의 조건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다시 오실 때 이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가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비유의 이야기를 진전 시키십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이 교훈이 한 가지로 집약되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과부의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부가 간청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방식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과부들은 사회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회적인 약자였기 때문에 어려움에 처해도 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날 많이 민주화가 되었고, 법이 만민에게 평등하다고 들 생각하지만 저는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이 이렇게 정당한 판결을 받았더라는 것이 뉴스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던 어느 목사님의 간증 속에서 제가 읽은 이야기입니다. 감옥에 갔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사람이 섞여 있더랍니다. 감옥 속에서 같이 생활해 보니까 이 사람이 그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정도의 위인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의 죄명이 뭐냐 하면 집단 살인 미수죄입니다. 한 사람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쳐도 큰 벌인데 집단적으로 사람을 살해하려다가 미수에 그쳤으니 중형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물어보았답니다.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일을 했냐 그랬더니 시골에서 올라와서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래서 빌어먹다가 안 되니까 어느 가정집 허름한 집을 들어간 것입니다. 다섯 식구인가 여섯 식구가 한 방에 자더랍니다. 그런 가난한 집에 뭘 훔칠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초범이라 그것을 잠을 자고 있는데도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갈 담력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아궁이에서 연탄불이 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연탄불을 옮겨다가 문 앞에다가 화덕을 놓고 부채질을 했습니다. 가스가 들어가서 저 사람들 기절하면 뭘 좀 가져가려고 그런데 너무 추운데 따뜻하니까 거기서 잠이 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떨어진 판결이 집단 살해 미수죄입니다. 중형을 선고 받은 것입니다. 과연 사회적 대항 능력이 있는 사람이 이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런 끔찍한 죄목으로 기소가 되었을까요? 변변한 변호사라도 샀다면 그렇게 됐을까요? 물론 헌법에 국선 변호인의 도움을 받게 되어 있지만 그 월급 받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 얼마나 그 도둑질 하다가 걸려 들려온 사람의 인권을 보호했겠습니까? 우리처럼 힘이 없는 약자들에게는 여전히 세상은 불평등합니다.
더군다나 예수님 이 시대에 이렇게 힘이 없는 과부는 정말 약탈의 대상이었고, 사람들의 무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경우에 맞지 않는 불법한 어떤 일을 당했습니다. 그게 무언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에게 그런 가해를 한 사람도 있고, 범죄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자기에게 남은 방법이라고는 재판장에 나아가서 간절히 호소해서 자기를 좀 올바르게 재판을 해서 자기를 이렇게 곤궁에 빠뜨린 원수를 벌해달라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길이 있으면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딱 한 한 길밖에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꼭 안 할 수 없을 때에는 목숨을 겁니다.
제가 직장 생활할 때의 일입니다. 지금도 있나 모르겠는데 새마을 교육이라고 있었습니다. 일주일동안 집을 떠나서 교육원에 들어가서 똑같은 옷을 입고 생활하면서 박대통령 각하 어록을 아침마다 청취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그것으로 경건의 시간을 시작을 하고 밤에 잘 때에 다시 각하의 나직한 음성을 들으며 결심문을 쓰고 잠을 드는 그런 과정입니다. 낮에는 이런 저런 강의를 듣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가라고 명령을 내리면 가야 됩니다. 그런데 직장에 상사가 하나 있는데 그 교육이 떨어진 것입니다. 내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못가겠습니다 그러고 위에다 연락을 했더니 ‘당신 꼭 가야 된다. 이것은 상부의 명령이다.’ 그러니까 간단하더라고요. 그럼 제가 교육가기 전날 사표를 내죠. 툭 끊는 것입니다. 금방 바꿔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왜 그럽니까? 부자입니다. 그 직장 생활은 자기표현에 의하면 사업하기에, 명함을 내놓기에 아주 좋은 게 공무원 명함이라서 그냥 나와서 사는 것입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라이온스 클럽에 갔던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모두 헐 했습니다. “아이 친구들 말이지. 어떻게 도와 달라고 그러는지 내가 이만큼 도와주고 왔네.” 우리는 6개월 치 월급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직장 생활에 목 메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갈 길이 많으니까 이 여자에게는 선택지가 이것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 사회적인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찬송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찬양)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주님은 이 여자의 절절한 마음을 통해서 그 당시 과부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던 최초의 독자들에게, 최초의 청취자들에게, 청중들에게 실감나게 기도에 관한 한 메시지를 전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하며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원한에 사무친 사람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있는지 우리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뺨을 만져 보십시오. 이 뺨에 기도의 눈물이 흐른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눈물은 흘렀나요?
C. 절실한 기도제목
이 여자가 이렇게 간절히 재판장에서 매달릴 수 있는 이유는 절실한 간청의 제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판단에 의하면 이 재판장은 억울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기대를 가지고 의지할 만한 좋은 판관은 아니었습니다. 남이 말한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고백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무서운 사람 아닙니까? 똑같은 맥락에서 그리고 또 뭐라고 그럽니까? “사람을 무시한다. 나는” 그게 이 재판장의 자기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최악의 재판장을 만난 것입니다. 맹자가 다른 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도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세상의 공명을 구하지 않는다. 공명을 즉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은 부귀에는 관심 없다. 그러나 부귀를 탐하는 사람은 무슨 짓이라도 할 사람이다.”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무섭지 않고 사람도 우습게 보는 재판장이었습니다. 그에게 무슨 공의로운 판결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자에게는 그 길 밖에 없었습니다. 또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자주 가서 간절히 나의 원수를 갚아 주시고, 내 원한을 풀어 달라고 마음을 다해 끈질기게 호소했습니다. 결국 이 사람이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귀찮을 정도로 매달리면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할 때에 이것을 올바르게 처결해서 이 여자의 억울함을 해소시켜 주지 않는다면 저 여자는 저 일 하는 것을 결코 꺾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 여자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해결해 주어야 되겠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지난 일주일 동안도 수많은 문제로 마음이 근심하고 고통을 느끼고 괴로웠습니다. 마음에 근심은 심령을 썩게 만들고 육체를 병들게까지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괴롭게 하는 고통스러운 일이 가장 간절한 기도의 첫 번째 제목이 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 마음속에는 근심과 걱정의 레코드판과 기도의 레코드판이 따로 돌아갑니다. 여기에 있어 일 순위가 기도에 있어 일 순위가 되지 못합니다. 마음을 끓이며 염려하는 그만큼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이 과부처럼 매달리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근심과 걱정으로 뼈를 말리고 고통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고통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안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대답은 둘도 아니고 하나입니다.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선한 삶을 위해서는 불신자로서는 회심이 필요하고, 회심할 때에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부르심을 따라서 신실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회심과 회심의 보전이야말로 목회 사역의 가장 중요한 두 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회심의 은혜가 충만해서 진리의 말씀으로 마음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거룩한 정동을 지니고 있었을 때에 그때 우리의 마음은 두 개의 레코드판을 돌리지 않습니다. 걱정이 되는 첫 번째 제목은 간절히 매달리는 첫 번째 기도의 제목으로 즉시 일치를 이룹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물론 사람이니까 원하지 않는 삶의 사태들이 전개될 때 괴롭습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그 괴로운 일이 기도의 제목이 됩니다. 그 속에서 세상에 붙었던 욕심을 내려놓게 됩니다. 자신의 높은 지위, 많은 수입, 사람들로부터 받는 박수와 갈채, 영광, 대적, 이런 것들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는 얼마나 편안한 삶을 사느냐, 고통을 받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을 걷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와 마주하고 있는 삶의 환경이 얼마나 어려우냐가 큰 관심사가 되겠고 자기가 맞서서 싸워야 하는 대적들의 수요가 얼마인가가 관심거리이겠지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천하의 만민이 자기를 에워싸고 높일지라도 거기가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자리가 아니면 그 영광은 수치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마지막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겨질지라도 그 자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삶에서 일어나는 정말 어려운 문제들이 기도 제목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는 없이 이성이나 충동으로 살도록 만들고, 그래서 결국은 욕심 부리지 말아야 할 것들을 욕심을 부리고 그리고 진정으로 붙들어야 될 것들을 하찮게 생각하고 내어버리는 우를 범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용기와 기개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올바른 길을 생각할지라도 이 대의를 위해서 기꺼이 죽어도 좋고 짓밟혀도 좋다는 용기가 없으면 끊임없이 변절하고 양심에 빗나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대장부가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이 재판관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꺾을 수 없는 이 과부의 간청하는 의지를 확인하고는 정의에 굴복하지는 않았지만 이 여자의 일을 올바로 처결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정말 선하신 하나님, 그리고 자비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올바른 판결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겠습니까? 만약에 이 과부가 이 불의한 재판장에게 이렇게 희망을 걸고 지치지 않은 열심,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간절함으로 매달렸다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한히 좋으시고 사랑이 많으신 그 하나님께 얼마나 더 많이 매달려야 하겠습니까? 설명할 수 없는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는 우리의 인생을 항상 순풍에 돛을 달고 가게 하거나 푸른 잔디밭 길을 한가롭게 걷게끔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왜 그런 좋은 길들을 다른 사람들은 걸어가는데 나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드리워지고 사명이라고 내게 주신 길에는 왜 그렇게 험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지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녁에는 눈을 감으면 아침에는 결코 세상에서 눈을 뜨고 싶지 않은 수많은 날들을 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들이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아픔 속에서 자기도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게 하고 싶으십니다. 그래서 지위와 권세, 사람들로부터 받던 존경과 덕망, 경제적인 모든 부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시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더 이상 깨끗케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순결해졌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 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믿음은 이해할 수 있는 인생길만을 걷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이 없는 날에도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시련 속에서도 분명히 자신에게 어떤 숨겨진 불결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모든 집착하던 것, 내 생애 이것은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것조차도 내려놓게 만드시는 것이 시련의 계곡을 통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인연,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모든 섬김, 그리고 자신이 이루어 놓은 모든 일, 지금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하나님을 향한 봉사, 이 속에서 겨우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것들이다. 내가 너를 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지었노라. 너는 어디에 있든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너를 창조하고 구속한 나에게 기쁨이 되는 길을 가라.” 그러실 수 있는 하나님을 붙들며 살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과부는 인간적으로는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상천하지에 자신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장에게 절실하도록 매달렸습니다. 그 하나에 자신을 모두 던지며 쏟아 부었고, 그의 마음의 소원은 뼈에 사무친 원한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이러한 과부의 모습을 너희의 기도에 적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믿음을 내가 올 때에 정말 찾고 싶은데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런 사람들 얼마나 보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손을 드십시오. “주여 여기 제가 있습니다. 주님이 기대하신 것처럼 그렇게 완전하지는 않지만 매순간 그렇게 완전히 살았다고는 장담드릴 수 없지만 그러나 매순간 그럴 수 없는 자신과 싸우며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쳐 온 그런 삶을 가능하게 했던 주님의 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찬양)
시시때때로 주 만 봅니다
죄인을 높이실 때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은 유명한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에 비유에 이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를 이야기하시기에 앞서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라고 성경이 기록하였으니 예수님의 이 두 번째 비유는 첫 번째 비유와 따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연결되는 기도에 관한 교훈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가 기도에 있어서 끈질김을 강조하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비유인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는 자기 의를 버리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기록된 이 성경의 장면은 유대인들의 기도관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시간을 정하여 기도했고 어떤 사람들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은 정통적인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교파의 사람들이었고, 유대교인 중에서도 가장 엄격하게 율법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고 스스로 자부하였지만 형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 바리새인과 대조를 이루는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세리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전 영토에서 세금을 거둬들이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만든 그 놀라운 도로들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 졌는데 하나는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신속히 군을 출동하게 하기 위한 용도였고 또 하나는 제국 각지에서 거둬들인 세금 혹은 곡물을 원활하게 로마로 운반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로마는 로마의 관리를 세리로 파송하지를 않고 토착민 중에 세금을 그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 중에 세금을 징수할 사람들을 선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할당된 금액을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알아서 챙기는 직업이 바로 세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로마에 빌붙어서 동족들의 피를 빨아먹는 아주 더러운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남자인 세리에 대한 생각을 유대인으로서 창녀가 된 여자와 동급으로 여겼습니다.
Ⅱ. 기도를 막는 마음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싶어 합니다. 만약에 기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진심으로 기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자녀는 혼자 잘 살다가도 때가 되면 부모의 품을 그리워합니다. 하물며 영적으로 주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그건 영적으로 진정으로 거듭난 자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기도에 갈망을 가지고 있고 다만 그것을 얼마나 강하게 필요성을 느끼느냐는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기를 원하지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를 안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못하기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섬기는 것은 정신이 명령하고 마음이 손발에게 지시를 하면 움직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지만 기도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아서 기도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해서 안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마음의 질병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고 싶은데 기도가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요인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여러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기도를 막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바리새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A. 자기를 의롭다 믿는 마음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올라가서 율법을 지키며 쌓아온 자신의 행위를 상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은 토색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지 않았으며 간음한 자들과 같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는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하게 팩트, 사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봐라. 토색하지 않는 것, 불의하지 않는 것, 간음하지 않는 것,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것,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 그렇게 올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주님을 못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한 걸음 더 지나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로마서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 이제 우리가 토색도 하고 불의도 하고 간음도 하자, 이레에 두 번 금식하지 말고 소득의 십일조는 떼어먹자. 그러면 주님을 만날 것이다.’ 사실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비겁합니다. 그 이유는 정의에 대한 관점이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교리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신약 성경에서 이러한 덕목을 행하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이런 덕 자체를 하찮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하나님 없이 율법에 한두 가지를 행한 자신을 신뢰하고 그것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있어야 될 자리를 자신의 의가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바리새인이 올린 이 기도가 정말 기도였을까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를 갖습니다. 그는 기도 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데 남이 들으라고 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바보가 보더라도 지금 기도할 때에 이 사람이 잔뜩 의식하고 있는 이 사람이 자기 가까이에 있는 세리를 의식하고 하는 말 아닙니까? 토색, 이것은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에게나 쓰는 용어입니다. 불의, 간음, 모두 대부분이 세리를 염두엔 둔 언어입니다. 기도시간에 대표기도 할 때에 가끔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가 이런 것입니다. 혼자 기도할 때 하나님을 의식하지만 대표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 보다 자기의 기도를 듣는 많은 사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고민하지도 않던 내용을 기도시간에 고민하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유료한 말이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기를 기대하는데 그것은 영적인 매춘행위입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는 화려하고 길면 길수록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B. 세리와 자신을 비교함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 없는 자기 자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 칭찬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결정적인 문제는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세리와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세리를 멸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방점은 감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세리보다 잘난 삶을 살아온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기도를 불가능하게 만든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지난봄에 근 한 달 동안을 매일 아침마다 많이 울면서 보냈습니다. 그것은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가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100번 양보해도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고통을 나에게 주었고, 미워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은 후 용서하고 한없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그리웠습니다. 그리움이 뼛속 깊이 타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아버지가 나에게 행한 모든 나쁜 일들, 심지어는 아버지가 지은 죄까지도 아버지를 향한 나의 그리움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그 죄는 미워하지만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끊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더 많이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 이어서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지난 2년 동안 고통의 시간들을 보냈고 매일 밤 잠자리에 들었지만 단 하루도 아침을 맞이하고 싶은 밤이 없었습니다. 어젯밤에도. 그러나 오늘 여기 살아있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모두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일 밤 잠자리에 들면서 단 하루도 눈 뜨고 싶은 아침이 없는데도 여전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즐거움이나 미래의 어떤 행복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의 일생이 주님의 손 안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나에게 전개되고 있는 이 모든 삶의 상황들은 하나님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만나게 된 상황들이지 어떤 사람이 만든 것이나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나를 방치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보고 사는 것,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과 같이 나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좋지만 너희를 위해서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유익할거다 라는 마음으로 살아있는 것, 그것은 비관주의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이 주님의 수중 안에 있고 결국은 인생 모든 만사가 주님의 뜻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나는 삶의 한 순간이라도 대의에 어긋나도록 살거나 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하신 지엄하신 말씀의 법칙에 어긋나서 불의하게 살지는 않겠노라는 끊임없는 자기 확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변절과 배신으로 얼룩진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현대사의 굴곡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스스로 걸어서 대의를 버리고 불법한 길로 가는 것도 죄지만 상황에 떠밀려서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은 그것도 죄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에 서 있기 위해서는 결기가 필요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기꺼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대의를 꺾고 이익에 굴복할 바에야 대의와 함께 장렬하게 죽겠노라고 하는 다짐이 없이는 의도하지 않은 변절과 배신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바리새인은 바로 그렇게 살아온 자신의 날들 중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깊이깊이 마음속에 새겨져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행한 불의하고 잘못된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오직 이 세리보다 내가 우월한 사람이라는 것만이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주님을 못 만나고 돌아갔습니다. 한 사람이 식자로 산다는 것, 다시 말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안 식자로서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한한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도리와 신앙의 대의와 양심을 저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이 높이실 때
오늘 이 바리새인은 세리보다 더 월등하게 의로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신앙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를 결핍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만을 응시하는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믿음이고 믿음은 영혼의 응시입니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매순간 자기가 여기에 서 있는 이유, 그리고 이렇게 결연하게 이 자리에 있는 목적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영원히 우러르고 주님 때문에 여기 있다는 것, 주님 때문에 이 도리를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명료한 인식이 있어야 하고, 인식만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정동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순간 기도에 있어서 거절을 당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갈 때 그는 기도하기 직전까지 살았던 모든 삶을 짊어지고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삶을 인정받은 사람들은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와 삶을 불쾌해 하는 최대의 표현을 기도에서 얼굴을 돌리심으로써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A. 자기의 죄를 자각함
이어서 세리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오늘 성경은 결론을 내기를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도를 들으시는 것과 사람을 받으시는 것이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객관적으로 바리새인은 세리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렇게 도덕적으로 우월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여기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성경에 두 가지 특징이 나오는데 첫째는 자기의 죄를 자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죄에 대한 자각은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어리석게도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아온 세리 앞에 서 있었고 이 더러운 죄인인 세리는 지존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게 차이입니다. 쓰레기 같은 죄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긍지와 자부심이 넘쳤고 세리는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몸 둘 바를 모르며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 불결한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죄에 대한 자각은 오늘 성경에서 다섯 가지로 표출되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멀리 서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지만 세리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갈 수 없었습니다. 법이 금하지 아니하였더라도 자신의 양심이 그것을 막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하늘을 쳐다보고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는 것이 경건한 기도의 표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파격적이었으니 고개를 떨구고 하늘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부끄러워서 하늘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가슴을 쳤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이것은 의학적인 행동입니다. 마음이 사무쳐서 간절히 기도할 때 폐가 응축되고 피가 잘 흐르지 않습니다. 그때 가슴에 계속 통증이 오고 이것을 계속 두드려주면 숨쉬기가 편해지고 피가 좀 자유롭게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 본 사람은 알지만 밤새도록 가슴 아파서 기도하고 나서 아침에 가서 샤워를 해보면 여기에 멍이 들어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두 가지도, 세 가지 기도도 아니고 오직 한 가지 기도를 드렸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입니다. 영어로 “Have a pity on me.”라고 하는 이 표현은 거지가 길손들에게 동냥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똑같은 표현을 기도 속에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표현 속에 담겨져 있는 마음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여러분 중에는 주려서 헐벗은 체 길거리에 엎드려 벌벌 떨며 한 푼만 달라고 동냥을 해 본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끼니의 식사, 정확하게 말하면 식은 밥, 먹다 남은 밥 한 덩어리라도 타인의 자비에 의존해서 생명을 부지해야 하는 사람의 마음을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 사람의 기도는 하나였습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리고는 마지막 다섯 번째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죄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를 안 하기 때문에 안한 것이 아니라 못하기 때문에 안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못하는 것은 마음이 기도하기에 적합하지 않게 망가졌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몸이 망가졌을 때 수술을 받거나 치료를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치료를 받습니다. 회개할 때 사람들은 고통 속에 울부짖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칼이 그의 마음을 고치고 있는 통증에서 오는 것입니다. 회개가 있습니까? 정말 사업이 안 되고 사는 게 고달프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러워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물을 것입니다. “목사님 매 시간마다 회개를 강조하는데 회개 안하면 나쁜 사람입니까?” 정확합니다. 회개 없이 살아가는 것은 나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기도는 대가가 없습니다. 설교에는 대가라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자칭, 그러나 기도에는 대가가 없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언제나 어렵습니다.” 신앙의 관록, 그게 기도를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자각,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불결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눈물로 진심으로 회개하는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망가진 마음을 가지고 1년, 2년, 3년, 4년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도 그 직분이 그 마음을 고쳐주지는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더 높은 사회의 지도자가 되면 될수록 이 사회는 본받을 것이 없는 변절과 배신이 난무하는 대의를 잃어버린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을 입은 자녀인데 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계획 앞에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울며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놓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여러분의 입에서 눈뜨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쏟아져 나오는 그 수만 단어의 언어중 수신자가 하나님 한분에게만 규정된 언어가 몇 마디나 되느냐고 제가 지금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회개가 없는 기독교, 죄에 대한 뉘우침이 없는 신앙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따라가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인간은 회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B. 긍휼을 간절히 구함
이 세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이유는 긍휼을 간절히 구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에 찾아오는 최초의 자각은 가난함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의지하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전적으로 나의 인생은 주님의 수중에 있다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온 세상이 나를 버려도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배신해도 나의 존재가 흔들리기까지는 충격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설령 내 아내가 나를 배신했다 할지라도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까지 뿌리째 흔들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삶의 기초 자체가 잘못 놓인 것입니다.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나서 나를 버리고 나를 외톨박이로 만들어도 여전히 내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찾으며 흔들림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뭐가 무섭습니까? 무엇이 두렵습니까? 우리가 기회주의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의를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에게 그 대의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복수하지 말고 무력으로 봉기를 할 생각을 하지 말고 그것은 사랑의 원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무릎 꿇는 사람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는 짓밟고 지나가는 군화소리와 탱크 소리, 창칼에 부딪히는 소리에 비하면 가냘프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깁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고백한 것처럼 혹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의의 길을 걸어가다가 군홧발에 짓밟히고 탱크에 깔려서 죽는 것이 그게 숭고한 인생입니다. 변절과 타협, 유체 이탈적인 언어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토해 놓으며 변절과 배신 사이를 오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렇게 인생의 순간, 순간을 자기의 방식대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은 “have a pity on me.”,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울부짖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많은 인간적인 방법들이 머리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기도가 있습니까? 눈물이 있습니까?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존 오웬이 지적한 것처럼 첫 회심에서 은혜의 샘이 터졌고, 하나님의 사랑, 영광, 자비, 그리고 죄에 대한 감각이 솟아났습니다. 그때에는 언제나 풍부한 기도가 있었고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담대한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문제는 그런 마음이 지금도 여러분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모든 삶을 짊어지고 나아가 자신을 돌아볼 때 자신이 죄의 덩어리라는 사실 밖에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결해서 토해 내쳐버리고 싶은 자신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했던 것처럼 자신이 어떻게 자기를 버릴 수 있겠으며 인간이 자기를 떠나 어디에서 산다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해결의 길은 하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도 너무 싫은 자기를 바꾸어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자기가 되고 싶었던 절규였습니다.
기도는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됨입니다. 첫 회심 때 여러분은 눈물이 있는 기도가 있었고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 다수는 바리새인의 각질로 마음에 이미 두터운 살이 덧씌워졌고 그래서 웬만한 하나님의 음성에도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 마음에 병든 상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할례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기도할 수 있는 이 마음을 주님께 쏟아놓고 주님께 긍휼히 여겨 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 교회와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세리처럼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구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루살렘 교회에 커다란 시험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찍이 없었던 끔찍한 핍박이 발생한 것입니다. 당시 초대 교회의 세 기둥과 같은 특별한 사도가 있었는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생전에도 그분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인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사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너무나 순식간에 그리고 아주 빨리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아마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그렇게 위대한 사도가 그렇게 쉽게 순교하리라고 하는 것을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연히 예루살렘 교회는 커다란 소동이 있게 되었고,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은 불안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큰 시험에 들 때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힘차게 전파되고 있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10장에서 유명한 그 고넬료와의 만남의 사건이 있고, 사도 베드로에 의해서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이 확인되었고, 이제 이방의 세계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되는 바로 그 시점이었습니다. 복음은 요원의 불길처럼 예루살렘의 지경을 넘쳐 온 땅에 힘 있게 전파되기 시작할 때에 이런 사탄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야고보의 죽음을 매우 기뻐하였고, 헤롯은 백성들에게 이 환심을 사기 위해서 베드로도 처형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최고의 사도는 힘없이 체포되었고, 4명씩 4패인 16명의 군인이 비무장한 상태의 이 한 사람을 교대로 돌아가며 지켰습니다. 탈출하거나 혹은 거기에서 빠져나올 제 3의 방법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성숙한 교회였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끔찍한 순교의 소식이 들렸을 때에 교회는 의외로 차분하였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죽음을 염려하며 헤롯과 협상하기 위해서 정치계에 돈 보따리를 들고 가서 길을 트는 그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열렬한 교회의 사람들을 함께 소집해서 그래서 군사작전을 통해 베드로를 구출할 전략을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야고보가 죽임을 당한 것처럼 베드로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이 모든 일을 맡기며 기도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교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환란을 당하거나 시련을 만나는 것 같고 혹은 어려움을 겪는 것 같지만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가 완전히 무너지거나 혹은 악한 자들에 의해서 짓밟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교회에 관한 이 세상 나라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질수록 교회를 붙들고 계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II. 교회가 기도할 때
A. 교회가 기도함
그러면 이 예루살렘 교회는 이 절대 절명의 지도자를 잃어버릴 위기 앞에서 무엇을 하였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은 어떻게 그 커다란 난관을 극복하게 도우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기도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 앞에는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나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입니다. 3일간의 구류나 혹은 6개월의 징역에 처해진 것이 아니라 사형당하기 위해서 포박되어 투옥된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상황을 두고 교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교회는 기도하더라”고 말입니다. 교회가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교회 전체가 마음을 모아서 하나의 기도제목을 자신의 기도제목인 것처럼 여기며 기도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꺼지지 않는 기도의 불씨는 모든 가족과 교회, 그리고 인류 공동체를 위한 기도의 큰 불을 타오르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이 개인 기도가 살아있을 때에 그 기도의 불꽃으로 그보다도 더 큰 영역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안녕, 평화, 자신의 사업, 행복, 이런 것들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공동체를 향해서 그 기도가 확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이기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신앙생활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신앙생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 안에서 교회를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 신앙은 온전한 신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기심은 끝없이 자신의 행복을 생각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는 또 다른 이웃의 행복과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세우셨을 때에 마음이 그러하였으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심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셨으니 이는 그들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한 설교자의 마음에 불처럼 타올라 지하실에서 7명의 성도들과 함께 이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여러분 곁에 있지도 않은 이름 없는 많은 성도들이 생명보다 이 교회를 사랑했고,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전 재산을 드렸으며 노후를 지탱할 퇴직금을 모두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 이름 없는 얼굴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성도들의 목숨을 건 희생 속에서 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고, 그래서 교회를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했고 그래서 언제나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제목이 자기 개인의 행복을 위한 기도 제목보다 더 컸습니다. 이기심은 결코 교회를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 때 이미 공동체로서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었으며, ‘일용할 양식’도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였고, 죄 지은 자를 서로 사하여 주는 것도 ‘나’와 ‘너’가 아닌 ‘우리’를 기도의 제목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말고 악에서 건져달라는 것도 ‘내’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그렇게 보호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기도에 있어서 공동체적인 성격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오신 성령님 그 자신이 바로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메말랐던 산하에 비가 내립니다. 그러면 비가 이제 산이나 들이나 후드득거리면서 내리기 시작합니다. 한나절 비가 내리고 나면 바짝 말라 물기가 없던 작은 실개천에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산 전체를 뒤덮는 비는 그 실개천에 물이 흐르게 하고 실개천들의 물은 산 아래를 따라 내려오며 계곡에서 만납니다. 그 계곡을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달음질 치고 산 아래 내려왔을 때쯤에는 하나의 큰 개울이 되어서 급한 물살을 이루고 바위까지 굴리며 산 아래로 힘차게 달음박질쳐 엄마 젖을 기다리는 것처럼 목마른 대지를 적시며 봄이 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기도의 효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곳에는 기도가 흐를 수 없습니다. 기도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이시며 성령은 곧 은혜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받은 은혜가 진실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두 가지 열망을 가져다줍니다. 좀 더 찬란한 진리의 빛을 깨닫고 싶고, 그 빛 아래서 살고 싶다는 열망과 두 번째는 자신은 비록 죄인이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 예루살렘 교회가 바로 문제에 부딪쳤을 때 이런 마음이었고 그래서 성도들은 모였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몸이 아프면 즉시, 즉시 조치를 취합니다. 저도 어제는 갑자기 위경련이 일어나서 즉시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육신의 몸이 아프면 이렇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응급실에라도 급히 달려가는데 교회가 아팠을 때에도 우리가 이렇게 반응하는가 라고 말입니다. 육신은 우리의 몸이지만 교회는 우리의 영적인 몸입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아무리 예배 시간에 마음을 모으고 집중해도 하나님께 그 예배에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기도하지 않는 것은 설교자의 재주를 의지하는 것이고, 언젠가 하나님은 크게 실망하도록 만드십니다. 교회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주님의 손에 붙들려야 될 필요를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고도 교회가 잘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교회의 장로들을 비롯한 교회의 일군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진정한 우상은 하나님이 아닌 그 모든 것, 물질이나 사람, 인간의 경험이나 모든 것들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 모든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절대적인 위기의 순간에 교회는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베드로가 옥에 갇힌 이 한 가지 구체적인 상황을 놓고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B. 간절히 기도함
두 번째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간절히’라고 하는 말은 희랍어 성경에 ‘아카타파우시스’라고 되어 있는데 ‘아’는 ‘없다’라는 부정어이고 ‘카타파우시스’는 ‘안식, 쉼, 휴식’,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 간절히 기도했다는 의미는 쉬지 않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왜 쉬지 않았을까요? 이 기도의 제목이 워낙 절박했기 때문에 베드로를 위한 기도의 제목이 워낙 절박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과 정신이 한 차례도 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함께 모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서 쉬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간절한 기도는 일찍이 예수님을 통해서 배운 기도의 모본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짧은 기도로 큰 능력을 불러온 기도의 예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표적이셨습니다. 그래서 귀신아 물러가라하고 명령하셨는데 이것은 변형된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사도들도 드렸습니다. 그래서 꾸짖어 귀신과 병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의 형태는 신약에서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닙니다. 이미 가나안 정복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했던 기도입니다. 가나안 원주민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공격했고 그들은 가나안 족속을 추격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자신의 땅에 대해 지리가 밝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두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서쪽에 해가 지며 어두움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면 그들을 추격해서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하늘에 있는 태양과 달을 향하여 멈추라고 명령하였고 이 역시 변형된 기도의 제목이었으며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가끔 흉내를 내봅니다. 어떤 위기의 순간에 될지어다하고 명령해 보는데 상황은 그러지 말지어다 하고 계속 진행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성경에 믿음으로 기도하면 된다는 약속도 거짓말이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짧은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불러왔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놀다가 그 시간에 필요해서 간절히 기도한 사람들이 아니라 평소 깊은 기도 속에서 살던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으로 인정받은 인물들이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한 책이 생각이 납니다. 어느 아프리카 여인의 회심의 이야기를 쓴 책이었습니다. 선교사가 복음을 전했고 이 젊은 여인은 회심했습니다. 성경도 없는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 했고 그리스도를 뵙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려면 기도해야 된다고 선교사가 가르쳐 주자 그는 하루에 두 번씩 자신의 집에서 풀숲을 헤치고 숲속에 들어가 주님께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녀는 고백했습니다. “우리 집 뒤뜰로부터 숲까지 나 있는 곳에는 길이 없고 풀이 무성하였습니다. 이틀만 기도하러 가지 않아도 풀이 무섭게 자라서 내가 걸어가던 길이 사라질 정도였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매일매일 하루에 두 번씩 숲속에 들어가서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자기 어린 아들이 온 몸에 신열이 나서 불덩어리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연히 동네에는 의사가 없었고 이 아이의 체온을 낮추어 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얼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에 거의 포도송이만한 우박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그 얼음으로 이 사랑하는 아들의 온 몸을 찜질해서 열을 낮추어 아이를 구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심에 있어서 세상의 지위나 그리고 남녀의 구분이나 그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시면서 차별대우 하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의 기도를 불붙이시고 그들의 기도를 당신의 마음에 맞는 기도로 움직이시며 간절한 기도 속에서 당신과 같은 소원을 품게 하심으로 당신의 일을 이루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의 본보기입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수식어를 동원한 많은 말이나 같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마음은 거기에 실리지 않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설득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의 구체적인 상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비는 마음을 쏟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그 사람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어떤 일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 지를 구별하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1차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여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지지하는 기도는 기도해서 받는 응답보다 더 확실합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조차도 뇌물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이 교회의 터가 여기에 세워질 때 그 비사를 여러분 중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돈 한 푼 없을 때 이 땅을 계약했습니다. 정말 맘씨 좋은 사업에서 은퇴하시는 장로님을 만나서 말도 되지 않는 혜택을 받으며 하나님이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땅값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36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당 약 400만원 정도였습니다. 그 분은 이 땅을 팔 생각이 없었고 땅 값은 계속 오르고 있었는데 교회를 짓는다고 하니까 일주일동안 기도하게 해 달라고 하고 일주일 후에 우리를 불러 고백했습니다. 자기 평생소원이 자기가 은퇴하고 난 다음에 여기에 교회가 서는 게 꿈이었다고 그러니 교회가 이 땅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3억을 계약금으로 주어야 하는데 있을 리가 없습니다. 교회의 재직 한 사람이 선뜻 돈을 빌려주어서 그 돈을 꾸어서 계약금을 지불했지만 교회 통장에는 1500만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중도금을 주지 못해서 마음에 안달을 하고 있을 때 얼마나 놀라운지 보십시오. 그 장로님이 우리를 부르더니 모든 등기부등본과 인감 증명을 넘겨주면서 돈 주기 전에 먼저 교회가 명의를 이전하고 그렇게 해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자신에게 잔금을 치루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내 땅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않을 텐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36억을 주기로 계약한 땅인데 그 후에 재직들에 의해서 들려오는 소식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36억에 계약하는 대신 6억을 비자금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즉, 30억이라고 계약서를 쓰고 6억을 서류 없이 비자금으로 넘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세금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틀 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혹시 땅을 사지 못해 교회를 못 짓더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까지 이렇게 살면 희망이 없다. 그리고 다시 사람을 보내서 세금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3억이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정했습니다. 36억을 달라는 땅을 39억을 주기로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기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대의를 따라서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하나님이 올바른 길이라고 인정해주실 수 있는 길을 걸어가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의 후원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이 하고 있는 어떤 일이 올바르다면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더 마음이 녹는 간절함이 깃들 것입니다. 사람보기에 올바르게 보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 일을 행하면서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정말로 눈물로 가슴이 저미도록 그 뜻이 이루어지이다 기도한다면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왜 안 이루어주시겠습니까? 공동체가 이런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까? 교회가 커지면서 그냥 잘 갖추어진 체제 속에서 굴러가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매우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작은 교회였을 때 바람에 선 등불처럼 교회를 위해 염려하고 가슴이 저리도록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던 그 간절함을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하나님께 기도함
세 번째는 하나님께 기도하더라고 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기도를 우상께 빌겠으며 그리고 이 세상 권세 가진 사람에게 기도를 토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기도의 대상이 아닌 기도 시에 경험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임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고, 사랑의 마음으로 그 하나님의 의지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킨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마음, 이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육적인 생각에 좌우되는 마음은 그 마음을 찢어지게 만들고 찢어진 그 마음으로는 말을 잘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분산되지 않는 마음, 하나님 한분의 영광과 그 분의 은혜에 자신의 마음을 고정시키고 범사에 일체의 경건함과 정숙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가슴 저미는 기도는 그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기도가 있고 기뻐하지 않으시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뻐하지 않으시는 기도는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그 기도제목이 자신의 마음을 끌지 못하고 그 기도의 제목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의 제목은 비록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했다고 할지라도 간절히 기도할 때에 그 기도는 점점 뜨거운 불꽃이 되어 타오르므로 그 기도가 올바른 기도라고 하는 사실을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심으로서 우리에게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도하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주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을 모두 드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에 힘쓴 나머지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우리 주님 한분 앞에서만 서 있다고 하는 그런 마음, 그래서 때로는 인생을 살면서 시련을 만나고 고난을 만나지만 그 시련 속에서도 시련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고난보다 더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원수들조차 사랑하고 그리고 나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이웃들조차 하나님의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며 그들이 참 지혜와 행복에 이르기를 기도하는 때가 우리에게 얼마나 드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른 아침에서부터 깊은 밤까지 수십만 마디의 말들을 쏟아내지만 하나님 한분에게만 바쳐지는 그 말은 과연 몇 토막이나 될까요? 오늘 아침 이 예배에 나오기 전까지 우리의 마음을 분리해서 하나님께만 온전히 드리고 그 분께 우리의 마음의 진심을 아뢰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음성을 우리의 마음에 담은 시간들이 우리에게는 있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그 분의 생애는 평안이 없는 생애였고, 수많은 원수들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였고 긍휼에 넘치는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은 복음을 싫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운 물건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먹기를 탐하는 탐욕스런 돼지였고, 그리고 율법을 행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지엄성을 파괴하는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깔보는 신성 모독자로 비췄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애는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였고, 사랑하는 사람 별로 없이 끊임없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척받은 일생이었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교회는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방법은 기도하던 사람들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그 옥에 천사가 나타났고 잠들어 있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발로 차서 깨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차고 있던 모든 수갑과 차꼬들을 풀어지게 만들고 유유히 닫힌 옥문을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 다가가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받는 위대한 응답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성도의 마음이 주님의 은혜로 가득 찰 때 교회의 기도 제목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상황이 아니라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련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시련은 늘 옳은 줄 알았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심지어 조나단 에드워즈의 표현에 의하면 원수들의 비난에는 진실이 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교회에 때로는 시련을 주셔서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앙망하고 완전함을 추구하지만 미완성의 교회를 생각하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련은 우리 안에 있는 흩어진 모든 마음을 한 곳에 모으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기도를 쏟게 만들어 줍니다. 상황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공동체의 시련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살아있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노립니다. 배교한 사람들 속에 사단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들 수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와 배신이 부딪치는 곳,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만나는 곳, 진리와 거짓이 섞이는 곳,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사람과 불순종하는 사람이 섞여있는 그곳에서 갈등을 극대화하고 결국 암세포가 서로 죽지 않기 위해서 결국은 우리의 몸을 죽음으로 전체를 데려가는 것처럼 그렇게 만듭니다. 이 모든 위협으로부터 피하는 길은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 쉼 없이 간절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듣고 이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모여서 기도할 때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 12:11-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옥에 갇힌 베드로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스스로 그를 묶어 두었던 사슬이 풀러졌습니다. 천사는 자고 있는 그를 쳐서 깨웠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끌어 옥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문 있는 곳에 와서는 쇠문도 저절로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하고 베드로가 찾아간 곳은 마가 요한의 모친 마리아의 집, 곧 그 유명한 마가의 다락방이 있는 집이었습니다. 이 집은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장소이며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성령 강림을 경험한 뜻 깊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대문을 지키는 하인이 있을 정도로 매우 큰 집이었고 거기서 성도들은 모여서 옥에 갇혀있는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II. 중대한 시점에 기도함
A. 지도자의 순교와 투옥
여기에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교회가 매우 중대한 시점에 있을 때 그들은 기도하기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였습니다. 지도자의 순교와 투옥의 시기였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존폐가 달려있는 중차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솥발과 같은 초대 교회의 세 지도자가 있었는데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였습니다. 알다시피 요한은 어린 제자였고 사실상 야고보가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남아있는 유일한 지도자였습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그들에게 내려오며 충만한 성령의 임재가 있었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복음을 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런 영적인 놀라운 축복이 있는 교회에 주어진 것은 하늘을 열고 쏟아지는 돈 벼락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큰 성령의 역사는 핍박과 함께 주어졌습니다. 도망 다니던 시기에는 죽음을 무릅쓰는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자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되었고, 담대히 복음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단의 세력들은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정부에 있는 사람들을 부추겨서 교회를 잔인하게 박해하도록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 예루살렘 교회는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가 순교하는 광경을 지켜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왜 그렇게 이 교회를 집요하도록 핍박했을까요? 그리고 사단은 온 세상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는 이들밖에 없는 것처럼 하늘의 군대와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향해 퍼붓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들이 위대한 복음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거기에서 터져 나오는 복음의 물줄기를 그들은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강물이 온 세상에 흐르고 나면 자신들의 왕국이 무너질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미친 듯이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의 샘을 막기 위해 모든 일을 동원하였습니다. 결국은 헤롯의 마음을 충돌질 해서 야고보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죽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진리가 거기 있었기에 오류에 붙들리지 않는 교회이기에 사단은 모든 화력을 동원해서 이 예루살렘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미래의 존폐가 달린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곧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대책반을 가동하는 대신 기도하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모여서 바로 그곳,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자신들을 모아 이것은 내 몸이니 하고 떡을 떼어주시던 그곳,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 라고 하시며 잔을 따라 주시던 바로 그곳에서 모였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모여 기도할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잡히시던 날 밤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던 그때의 예수님의 고별 설교를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주님은 승천하시고 고아처럼 자신들이 남겨져 있다고 생각하고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분부를 따라 거기 모여 기도하기를 힘쓰되 오순절의 충만한 성령이 임하는 복을 경험한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그 유서 깊은 장소에서 기도하면서 그들은 두 가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울 수 없는 그 위대한 추억,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 여기서 우리와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던 곳, 그리고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시고 거기서 붙잡히셔서 온갖 모욕을 받으셨던 고난의 기억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아처럼 남겨진 교회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친히 당신이 약속 하신대로 성령님으로 찾아오셨던 오순절의 그 위대한 사건을 기억하면서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그 고난을 따라서 자신이 손해를 보고, 십자가를 지고, 마지막에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겠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암세포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떠한 문제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은 그 문제보다 훨씬 크다는 것, 오늘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 충만한 성령의 능력이 부어져서 두려움 속에 갈 바를 모르던 공동체가 로마 제국을 뒤흔드는 복음의 공동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시간에 이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B. 한 곳에 모인 성도들
두 번째는 한 곳에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위기를 만날 때에 교회가 이것을 극복하는 방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였습니다. 그렇게 모여 있는 것이 그들에게 좋은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흩어져 있으면 의심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여 있으면 그리스도인으로 낙인이 찍히고 체포되고 심문되고 처형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이 무서워서 모인 것이 아닙니다. 모여야 했기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모여 있다는 이 이야기가 되어 있는데 ‘스네드로이스메노이’(συνηθροισμένοι)라고 되어 있는데 분사 완료, 수동, 주격 남성 복수입니다. 물론 여성도 거기 섞여 있었습니다. 남녀가 섞여 있을 때에는 그냥 남성 복수로 사용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화자가 이 사건을 목격하기 전에 이미 그 전부터 그들은 거기에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모여 있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거기 모여서 지금 기도하는 그 행동을 계속해 왔던 것입니다. 모이는데 따르는 희생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일입니다. 기도는 육신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디에서든지 기도할 수 있고 무엇을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간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싱크대에서 설거지하다가 열린 교회 설교 방송을 듣고 회심한 아주머니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명백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들이 모여서 기도했다고 하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유명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 하신 후 예수님이 남기신 말의 의미가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른 체 성령이 오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체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인 곳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었고 그들이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말합니다. 오랜 시일동안 그들은 오직 기도에 힘썼고 이때 성령의 충만한 강림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위대한 물줄기가 이 세상에 쏟아지는 첫 번째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던 사도행전 4장에서 예루살렘을 뒤흔드는 커다란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지도자들을 데리고 가서 심하게 때려 처형했고, 그렇게 형벌을 받으며 교회에 돌아왔을 때 온 성도들은 모여서 하나님 당신의 큰 이적과 능력으로 이 교회를 보호해 주시고 복음이 전파되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불세출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가 죽고 베드로가 순교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온 교회는 다시 모여 그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렇게 한 장소에 모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터넷 설교, 인터넷 방송, 이것이 신자가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그 현존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최고의 섬김은 바로 그 자리, 교회가 그런 위기를 만났을 때, 국가가 커다란 위기를 만났을 때 바로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C. 간절히 기도함
마지막 세 번째는 그들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기에서 ‘기도하다’라는 이 말은 ‘간청하다, 빌다, 구하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커다란 핍박을 받았고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을 지도자를 한 사람은 잃어버렸고, 한 사람은 잃어버릴 위기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해결책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결책이 있었어도 그들은 그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정부에 헤롯 왕궁에 이리저리 두 다리, 세 다리 걸러 관계를 엮어서 뇌물을 올려 보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탄원서를 쓸 생각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과 교회의 운명,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표현이었습니다. 모든 벌어진 그 사태를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비는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야고보는 순교함으로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을 피로 증언하게 하셨고, 베드로는 살려주셔서 좀 더 주님의 교회를 목양하도록 예루살렘 교회에 돌려보내셨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만사는 우리의 뜻대로 안됩니다. 어느 자살한 우울증 환자가 유서에서 이런 말을 남겼답니다. 나를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해주는 그 말을 믿었습니다.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그러나 그 말은 아무 도움이 안 되었고, 사실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거짓말입니다. 난 지난 2년 동안 매일 밤, 잠자리에 들었지만 단 하루아침도 눈 뜨고 싶은 날이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단 하나의 일도 내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떠나서 타락했을까요? 중대한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을까요? 아닙니다.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 모두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바다 위에서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미친 듯이 뒤웅치며 아무 육지나 섬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도대체 내가 갈 곳이 어디냐고 묻는 대신에 하늘을 쳐다봐야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별자리를 보며 스스로 분도기와 각도기로 컴퍼스로 해도를 그으며 항해를 하였습니다. 바다 위에서 찰박거리는 대신 저 높은 별 위에서 인생의 바다 전체를 내려다보고 없으면 안 되겠다,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리고 헤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과 헤어질 수 있고, 버릴 수 있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지만 하나님의 지혜가 보이는 법입니다. 우리의 삶의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든지 간에 위대한 사실 하나가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마음을 드려 주님께 눈물을 쏟을 수만 있다면 내가 어떠한 상황을 맞이하든지 거기서 고난을 당하든지 바로 거기서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고통을 받고 계시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문제는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슴이 녹으며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부으며 오랜 시일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옳은 사람입니다. 옳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영적인 위기의 순간에 교회는 모였습니다. 불편이 아니라 핍박의 위협 속에서도 그들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인지를 미리 그림을 그릴 수 없었지만 그들은 믿었습니다. 핍박당하는 이 교회에 지도자를 잃어버리고 어디를 갈지 몰라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들을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들이 이렇게 마음을 쏟아 우리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면 주님은 자신들과 함께 하실 거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가 필요할 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