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기도할 때 II
(2017년 가을말씀사경회, 주일오전 시리즈 모음)
설교기간|2017년 10월 30일-12월 31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3월 9일
목 차
1. 교회가 기도할 때입니다(행 12:5) 2017.10.3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1
2. 마음을 같이할 때(행 1:12-14) 2017.10.3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2 9
3. 성령이 임하실 때(행 2:1-4) 2017.11.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3 18
4. 그들이 주께 돌아올 때(행 2:37-42) 2017.11.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4 31
5. 새로운 삶의 길(행 2:37-38) 2017.11.12 주일오전 41
6.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행 3:1-10) 2017.11.26 주일오전 49
7. 교회가 간절히 기도할 때(행 4:31) 2017.12.3 주일오전 56
8. 하나님이 쓰신 사람(행 10:34-35) 2017.12.17 주일오전 62
9. 밤중에 드린 기도(행 16:25-34) 2017.12.31 주일오전 68
교회가 기도할 때1 2017. 10. 30 (가을말씀사경회 첫째날)
< 교회가 기도할 때입니다 >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행 12:5)
I. 본문해설
- 복음증거는 예루살렘을 넘어 이방인들에까지 전파됨
- 힘차게 복음이 전파됨: 스데반의 순교와 사울의 회심
- but 본격적으로 심각한 박해가 시작된 때였음
- 야고보 처형과 베드로에 대한 체포 및 처형 계획 세워짐
- 이 일로 헤롯은 유대인들의 커다란 환심을 사게 됨
II. 기도가 필요할 때
- 베드로의 투옥과 위기에 처한 교회
- 16명의 군사가 베드로를 교대로 감시했음
- 어떠한 구출의 여망도 없는 상황이었음
- 이 때 교회는 무엇을 하였는가?
A. 교회가 기도함
기도의 주체가 “교회”였음
-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교회는…”
- 구체적 상황 있음: 베드로의 구금과 처형의 위기
- 개인이 아니라 “교회”가 기도했음
- 신자는 모두 그리스도의 한 몸임
- 어떤 개인의 문제도 공동체적인 것들임
- but, 지도자와 교회 자체의 문제는 더욱 그러함
- 한 몸임을 공동체적 기도로써 입증하라
- 끊어지지 않는 삼겹줄 같은 기도이다
- 개인적 영적 생명과 교회가 생명을 누리는 상태
- 그리스도 몸의 한 지체로서 공동체의 기도에 참여함
B. 간절히 기도함
기도의 방식은 “간절함”이었음
- “간절히…기도하더라”
- “간절히” ektenos “밖으로 쭉 뻗다”
-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힘 있는 기도를 뜻함
- 능력 있는 기도의 비결은 함께 하시는 성령이심
간절한 기도: 자신의 무능 확신+전적의존
- 간절한 기도는 열렬한 마음의 간구
- 근원과 자리: 성령의 은혜+마음의 갈망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내는 두레박
저 밑바닥에서부터 마음을 짜는 것
그리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 나뉜 것임
하나님: 버림받고 싶지 않고 대면하고 싶지도 않음
“그를 위하여…” 한 곳에 초점 모음
개인들의 관심사가 하나의 초점으로 모아짐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간절한 기도가 터짐
C. 하나님께 기도함
기도의 상태는 “하나님 앞에서…”였음
- 이것은 온 지체들이 임재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함
- 머리에서 나와 입으로 나간 기도가 아님
- 기도의 경륜: 마음고침+절대의존
- 마음에 다다르지 않은 생각은 우러나올 수 없음
- 간절한 기도는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임
- 그 속에서 성령이 우리 마음의 기도를 주장하심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그런 임재 속에 들어갈 때 있음
영적각성과 놀라운 은혜가 집단적으로 나타남
기도할 때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라
III. 적용과 결론
- 우리의 영적 생명은 교회와 하나임
- 지체로서 함께 기도할 의무가 있음
- 구체적 상황을 위해서 간구해야 함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길어내라
-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도하라!
교회가 기도할 때 2 2017. 10. 31 (가을말씀사경회 둘째날)
< 마음을 같이 할 때 >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행 1:12-14)
I. 본문해설
- 예수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의 일의 보도임
- 예수님 지시대로 예루살렘에 돌아옴
- 안식일 여행 규정. 약 1km 이내였음
- “마가의 다락방”, Zahn(행12:12)
- 120명이 모임: 다락방뿐만 아니라 성전까지 포함한 듯함
- 그들은 모여서 “예루살렘에서 약속한바 기다림”
II. 구원사의 아침을 열 때
- 예수는 구속을 성취하셨으나 그들은 의미를 모름
- 여전히 유대주의적인 하나님 나라를 대망함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했음
A. 다 함께 모임
-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였음
- “그 후 오백여 형제에게…보이심”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고전15:6)
- 오순절: 유월절 후 첫 안식일로부터 50일 째 되는 날
-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행1:3)
- 그렇다면 그들이 모인 기간은 승천 후 약 10일간으로 추정
- 5백여 형제 중 120명만 잔류했거나 합류하였음
- 그들이 주님의 분부를 따라 한 곳에 모였음
- 말세의 경고, 모이지 않음을 경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10:25)
- 통신 기술 발달로 교회의 모임 해체 현상이 심화됨
- 더 바빠진 현대인의 삶과 의미를 물을 시간 없음
- “지금도 모여야 하나?” 반문함
- 더욱이 경륜과 구원의 소명에 대한 고민이 없음
- 모이지 않으므로 교회 정신도 해체됨
- 지체들의 사랑은 공간과 관계있음
- 예수 그리스도의 뜻 받들어 모이기 힘쓰라
B. 마음을 같이함
- omothumadon “마음을 같이 하여”
- omos “동일한 것”+ thumos “정신, 심”
-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단일화 하는 것이 아님
- 오히려, 정신의 본질 아닌 신자들의 마음의 초점을 가리킴
- 다양한 사람이 마음을 모아 하나의 초점을 향함
- 예수의 승천 이후 두려운 상황에 갈 바 모르던 때임
예수 부활의 의미는 모르고 미래는 불확실한 때였음
절대의존으로 구속사 아침을 맞게 하심
- 개인의 관심사를 능가하는 구속의 경륜에 마음을 모음
- 그것을 깨달음으로 자신들의 인생 의미도 규정됨
구속 경륜 깨달음→교회 갈 길을 앎→인생의 의미 발견
그리스도의 구속의 위대한 결과를 교회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심
그 위대한 일을 이루시기 전에 먼저 한 마음이 되게 하심
C. 기도에 힘씀
-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1:14)
- proskaltereo “계속 부르짖다”
“오로지…기도에 힘씀”(행2:42;6:4)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6:4)
- 하나님 홀로 역사하시나 기도 사용
- a.함께 모임 b.주님 향함 c.계속 기도
두려운 날에 그들은 전심으로 순종하며 기도했음
그대에게 예수님이 주신 공동체의 마음이 있는가?
III. 적용과 결론
- 교회의 기도와 개인의 기도는 나뉘지 않는다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경륜과 기도제목을 찾으라
먼저 모이기를 힘쓰며 교회를 돌아보라
교회를 돌아보며 자신의 영적 상태에 눈을 뜨라
어떤 상황에서도 오로지 기도에 힘쓰라!
교회가 기도할 때 3 2017. 11. 1 (가을말씀사경회 셋째날)
< 성령이 임하실 때 >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행2:1-4)
I. 본문해설
- 사도행전: 교회의 탄생(1-12)+확장(13-38)
- 성령강림은 제2의 보혜사가 오신 것임
-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적용하시는 분
- 사람을 감화하여 믿게 하시는 성령님
- 교회가 모여 기도했고 오순절 날이 이름
-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함
II. 성령이 임하실 때
- 교회는 성령강림으로 놀라운 체험
단순한 기적 아닌, 그리스도 중심적 사건
그리스도가 중심인 세계 구원의 경륜을 깨닫는 체험
- 예수께서 공생애 직전에 세례를 받으심
- 교회가 선교하기 직전 성령을 받음
- 신자가 구원과 함께 성령을 경험함
A. 홀연히 임하심
- 성령의 강림으로 복음과 은혜의 시대가 열림
- but, 오신 성령이 신자 안에 영원히 내주함
- “하늘로부터…” 성령강림의 근원과 주권
-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근원을 알 수 없는 힘
- “급하고 강한…” 힘과 구원 시급성
- “온 집에 가득하여…” 충만한 성령의 역사(사랑)
B. 불로서 임하심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보여…”
a. “불”: 죄와 불결을 태움. 인간을 쇄신하는 능력
b. “…혀처럼 갈라지는…”
glassai(히 lashon: 언어): 말을 통한 복음전파
전도의 능력과 사명이 성령 받은 신자에게 있음
- “그들에게 보여∼” 확실히 의식 할 수 있음
-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하나의 불 아래 있는 모든 지체들: 연합+성령
- 거룩함+소멸의 능력+하나님의 큰 일 (그리스도) 증거함
C. 방언을 말함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임하신 성령이 내주하심
성령이 복음을 말하게 함: 구속 사역의 증언 통한 전도
방언 내용 “하나님의 큰 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2:11)
각기 다른 언어들로 말함을 듣게 됨: 두 가지 해석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구령의 열정을 요구함
방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증언했던 바를 말함
III. 적용과 결론
- 제자들은 신학적 혼란과 핍박의 두려움에 떨었음
- but,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분부에 순종하였음
- “한 곳에…” 지상교회가 중요하다
- “모여 있음” 공동체임을 드러내 줌
함께 모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였음
구원사의 새 역사인 성령강림 사건의 첫 열매들이 됨
“홀연히, 불로서 임하여, 하나님의 큰 일” 증거하였음
세상을 정복하는 강렬한 군대 같은 교회로 태어남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교회가 기도할 때4 2017. 11. 2 (가을말씀사경회 넷째날)
< 그들이 주께 돌아올 때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 2:37-42)
I. 본문해설
- 성령 강림 사건 직후 베드로의 설교가 시작됨
- 성령 강림 사건은 설교자를 태어나게 했음
- 구약과 예수 생애 관통하는 신학을 보여줌
a. 구원 역사 중심축은 예수 그리스도
b. 성령의 큰 능력으로 감화를 일으킴
- 베드로만 아니라 교회 전체가 증인으로 변화하였음
II. 말씀의 능력이 나타남
A. 말씀을 듣게 함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 기울여 들음
-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설교함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행2:14)
- 먼저 설교자의 마음 안에 말씀이 불타올랐음
- 그것은 새로운 사상: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었음
- 사람들로 하여금 듣게 한 힘: 명료성+불타는 확신+비상한 힘
- 성령이 십자가와 부활, 승천의 의미로 각성시켰음
- 늘 듣던 말씀 아니고 세뇌된 지식 아닌 체험된 사상
- 성령의 임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 세상으로 하여금 듣게 하는 힘
a. 내용: 경륜의 핵심적 열쇠이신 그리스도
b. 능력: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경험케 하심
- 교회는 하나님의 경륜을 증거하는 공동체임
- 성령은 이 경륜의 중심인 복음과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함
- 아름다운 모범과 윤리와 함께 능력 있는 말의 전도 필요함
- 듣게 하는 능력을 가진 교회가 되자
B. 마음에 찔리게 함
- 완고한 유대인들의 마음을 찌른 하나님 말씀의 역사
- “그들이…마음에 찔려…”
- katanusso “관통해 찌르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19:34)
- 영혼 깊은 곳은 원래 성령이 계셔야 할 자리임
찔림의 아픔은 양심, 성령이 떠났었음 보여줌
인간 마음은 수많은 각질에 싸여 있음
많은 설교와 교훈들이 마음에 이르지 못함
말씀에 성령이 역사하시길 사모해야 함
베드로 뿐만 아니라 각 신자들이 성령 충만하여 전도의 능력이 나타났음
이런 말씀의 능력이 온 교회에 나타나도록 간구하자!
C. 깨어지게 함
- “우리가 어찌할꼬…” 이전 자아의 깨어짐을 보여줌
- 사울의 경험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행22:10)
- 복된 회심의 역사: 깨어짐(회개)+세워짐(믿음)
- 이것은 이중의 깨어짐을 가리킴
a. 자기 의에 대해 깨어짐: 예수 의존
b. 자기사랑의 깨어짐: 예수 사랑
- 유대교의 가르침, 이방 철학의 사상에는 없음
- 인격적 하나님께 대한 회심의 반응임
a.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
b. 새로운 세계관·인생관의 도입
c. 잘못된 질서와 올바른 질서를 인식함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복음의 능력
- 죄를 꾸짖고 죄인을 중생케 하는 능력을 사모하자!
III. 적용과 결론
- 구원받은 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함
- 능력 있는 공동체와 능력 있는 생활
- 성령 강림 사건이 진정으로 교회가 되게 함
교회는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쇄신됨
성령의 충만으로써 이 일을 이루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사모하자!
교회가 기도할 때5 2017. 11. 12 (주일 낮 예배)
< 새로운 삶의 길 >
“…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 2:37-42)
I. 본문해설
-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복음을 듣던 무리들이 회심함
- “하나님의 큰 일” 곧 구원의 경륜을 선포하였음
- 모든 방언의 기적의 한 초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
- “마음에 찔려…” 어쩔 줄 모르는 청중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함
II. 구원과 새로운 삶의 길
A. 죄를 회개하라
- metanoeo의 본질적 의미: “생각의 바뀜”
- 그리스철학에서 “체관”을 의미하였음
- 그러나 그 대상은 인격적 사랑의 하나님이 아님
- 기독교는 인격적 하나님 앞에서의 인격적 회개
- 참 생명인 그분과의 관계를 떠난 죄를 회개함
-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김과 무능: 회개로써 돌이킴
-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하는 회개→사랑을 불러일으킴
- 교회의 말씀 선포, 전도에 능력을 주신 성령님
- 그 때의 불신자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필요함
B. 죄 사함을 받으라
- 인격적으로 회개하는 자를 사해주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최고의 은총은 죄의 용서임
단지 죄사함 뿐이면 그것은 겨우 복수하지 않음을 의미함
- 세례는 회개를 통한 죄사함의 은총에 자신을 언약으로 묶음
- 일생을 그 언약 안에서 살기로 맹세하는 것임
- 이 때 하나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심
-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영원히 내주하게 하심
- “너희가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 받으라”
- 교회가 고치도록 부름 받은 세상의 정체임
- “패역”이란 “도덕적으로 잘못 굽어져 완고한 상태”를 가리킴
- 구원은 그 세상에서 우리를 구별하는 것으로 시작됨
- 지속적으로 말씀의 은혜를 받으며 살 때 행복하고 세상을 고칠 수 있음
-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
C. 교회의 지체로 살라
-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고 떡을 떼며…기도하기를 힘쓰니라”
- 말씀을 사모함+사랑으로 교제함+떡을 뗌(가족 됨)
- 그리스도께서 주기도문 속에서 기대하신 공동체를 이룸
- 신자의 행복한 삶은 관계: 하나님+사람
- 교회 안에서 천국에서 누릴 완전한 행복을 미리 맛봄
- 세계를 향한 신적 경륜을 이루는 교회가 되자
III. 적용과 결론
- 성령의 역사로 구원받은 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했음
- 성령으로 능력 있는 증거 공동체가 되었음
- 성령 강림 사건이 어린 교회를 전투적 교회로 만들었음
교회는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쇄신됨
성령의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함께 기도하자!
교회가 기도할 때6 2017. 11. 26 (주일 낮 예배)
<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 >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행 3:1-10)
I. 본문해설
-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전파될 때였음
- 사도들 유대인의 기도 시간에 성전 올라감
- 이 때 일어난 사건은 기독교의 본질을 보여줌
II.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이었음
- 사람들이 메어다가 미문(美門)에 두었음
- 성전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구걸하여 연명함
- 하루 동냥을 얻어 하루 먹고 사는 생활
- 그는 불행했으나 궁극적 해결에는 무관심했음
- 오늘날 우리 인간들도 이 사람과 유사함
III.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함
A. 예수의 이름으로 명함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내게 주노니”
- 특별한 성령의 시대에, 사도의 권위로 말함
- 사도들에게는 무엇인가가 있었음
- 그것은 인생 문제의 궁극적 해결 방안임
- 그것을 교회가 지금도 갖고 있나?
- 교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 교회의 영광은 회심케 하는 능력임
- 그런 능력이 제도와 방법 자체가 아님
- 그것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임
- 교회가 성령에 사로잡힐 때 가능함
- 교회가 이런 선언을 할 수 있게 하자!
B. 그를 일으켜 세움
-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곧 힘을 얻고”
-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을 경험함
-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에서 찬양함
- 사도들은 몇 푼의 돈을 주지 않았음
- 그 일이 필요 없거나 나빠서가 아님
- 구제하는 것이 초대 교회 일이었음
-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게 해 주었음
- 복음을 주신 궁극적 목적을 보여줌
- 기독교의 해결 방안을 보여준 것임
- 쾌락, 몰입, 안일은 잠시 잊게 해줌
- but, 문제들의 기독교적 해결 아님
- 기적과 함께 모든 문제들을 박차버림
- 같은 기적 아니나 같은 방식의 해결
- 예수 만나고 은혜 받고 이기게 하심
Ⅳ. 적용과 결론
- “…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 앉은뱅이 걸인 변화에 모두 놀랐음
- 최고의 선교는 변화된 존재 보여줌
- 성령의 역사로 생명을 주는 교회가 되자!
교회가 기도할 때7 2017. 12. 03 주일 낮 예배
< 교회가 간절히 기도할 때 >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4:31)
I. 본문해설
- 성령강림 후 예루살렘 교회의 대부흥 시기였음
- 다락방 기도회의 120이 5000명이 되었음
-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았음
- esp. 부활을 부인한 사두개인들에게 핍박을 당함
- 초대교회 선포의 제목은 부활과 십자가
- 그들은 부활을 통해 십자가 의미를 해석했음
-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다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됨
-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경륜을 말함
- 사도들은 형제들에게 돌아와 사실을 고함
II. 교회가 간절히 기도할 때
- 교회는 한마음 되어 간절히 기도함
a. 하나님의 위엄을 찬송함
b. 대적하는 세상을 고발함
c. 담대히 전도하길 간구함
- 교회가 간절히 기도할 때 응답하심
A. 하나님의 임재
-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하나님의 임재
- 땅의 진동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함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출19:18)
- 구약에 익숙한 유대인에게 징조를 보이심
- 박해받으나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여주심
- 그들은 진동의 기적을 통해서 확신을 가짐
- but, 우리라는 더 큰 믿음 통해서 확신함
- 승승장구하던 교회를 겸손케 하심
- 다시 온 교회가 마음을 모아 간구하게 하심
- 기도가 있는 교회에 그 분의 임재 있음
- 기도하는 자에게는 항상 놀라운 간증이 있음
- 오늘날 같은 불신 상황에서 유일 대안임
-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간구하자
B. 성령의 충만함
-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 사실상 성령 강림 후 첫 핍박이었음
- 이 경험을 통해 온 교회가 주님만 바라보게 됨
- 절대적 의존의 마음을 기도로 표현하였음
- 모든 것 버리고 예수 품에 의지했음
-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 충만을 주심
- 오순절의 경험과 꼭 같은 것을 경험함
- 성령 강림의 의미는 반복되지 않으나 같은 경험을 함
- 교회를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에 매이게 하심
- 간절한 기도자가 성령의 충만을 경험함
- 충만한 성령으로써 사랑과 의로 살자
C. 말씀을 전파함
-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 전도하다 핍박 받았는데 또 복음을 전파함
-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을까?
-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경륜
- 자신과 이웃 인생으로 하여금 창조 목적을 따르게 함
- 신자는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만큼 사모하게 됨
- 어떤 상황에서든 복음을 전파하였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4:2)
- 이 체험으로 핍박을 두려워하던 공동체가 담대해졌음
-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힘차게 뻗어나감
III. 적용과 결론
- 언제 이런 놀라운 일 일어났는가?
- “빌기를 다하매…”
- 새싹같은 교회를 보호하기로 작정하심
- 교회 지체들의 마음을 모아 기도하게 하심
- 기도의 분량이 찼을 때 놀랍게 역사하심
-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자
교회가 기도할 때8 2017. 12. 17 주일 낮 예배
< 하나님이 쓰신 사람 >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10:30-33)
I. 본문해설
- 고넬료 집안의 성령사건 성령강림 다음으로 중요한 사건임
- 유대인의 편견을 깨고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심
- 구속사의 새 장을 여시는 일에 베드로 쓰심
- 한 이방인과 친지들 회심의 긴 얘기가 등장함
- 환상에 대한 증언은 여러 번 반복되었음
- 특히 11장에서 형제들 앞에서 베드로의 증언으로 반복됨
-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중요하고 충격적 사건이었음 확인하게 됨
II. 선교의 새 장을 여심
- 이 사건에 당시 교회의 최고 지도자 베드로를 사용하심
- 이방인에게 성령 부으심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 보여주기 위함이었음
- 평범하지만 신실한 이방인 고넬료를 첫 열매로 삼으심
A. 기도하는 자
- 기도하는 두 사람을 사용하셔서 뜻을 이루심
- 교회의 최고 지도자와 이방인 백부장을 만나게 하심
- 각자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주님의 뜻을 이룸
- 성경에서 하나님은 항상 기도하는 자를 사용하심
- 두 사람은 각자 시간 정해놓고 기도했음
- 깊은 기도는 일정한 규칙을 가진 기도의 실천에서 나옴
- 당신의 골방은 어디인가?
- 우리는 어디든지 반드시 기도할 시간과 장소 갖자
B. 순종하는 자
- 두 사람 단지 그저 기도하는 사람 아니었음
-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되었음
- 이방인으로서 교회의 최고 지도자를 부르는 것이 가능할까?
- 유대인으로서 이방인 가정에 가서 그들과 교제할 수 있나?
- 더욱이 그들과 함께 예배하고 기도해 줄 수 있을까?
- but, 베드로는 이 일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음
-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관습과 선입견의 틀을 깼음
-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한 두 사람 통해 큰일을 이루심
- 하나님은 단지 기도할 뿐 아니라 순종하는 자를 찾으심
C. 경외하는 자
-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5)
- 하나님은 “외모”나 “혈통”으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심
- 이방인 고넬료 뿐 아니라 유대인 베드로도 그러했음
-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택하셔서 사용하셨음
- 예수의 죽음은 유대인 아닌 구원받을 인류를 위한 죽음임
- 육적 왕국인 이스라엘 깨지고 영적 왕국인 교회가 탄생함
- 그 교회가 한 알의 씨앗이 되어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심
- 죄인들을 구원하심은 주 하나님을 경외케 하기 위함임
- 우리의 믿음의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
III. 적용과 결론
- 주님의 위대한 역사에 평범한 사람들을 쓰심
- but, 온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심
-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는 사람이었음
- 한 번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을 뜻있게 살자
교회가 기도할 때9(끝) 2017. 12. 31 주일 낮 예배
< 밤중에 드린 기도 >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행16:25-34)
I. 본문해설
- 충만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던 때였음
-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 들린 자를 만남
- 그가 따라오며 하나님과 종들 찬양했음
- 바울이 명하여 귀신을 쫓아내 버림
- 수익의 소망 끊어진 주인들의 고소를 받음
- 체포되어 옷을 찢어 벗기고 많은 매를 맞음
- 깊은 곳에 투옥된 후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함
II. 한밤 중에 기도할 때
A. 기적을 주심
- “큰 지진이 나서…열리며”(26)
- 옥 터 움직임, 문 다 열림, 차꼬가 벗겨짐
- 아무도 예상치 못한 기적이 일어남
- 핍박과 시련의 때에 낙심 대신 찬송하고 기도함
- 감사와 간구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김
- 지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함(사29:6, 겔38:19)
- 감옥에 갇힌 사도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
- 감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리는 기적이 일어남
- 아무 희망도 없어보이는 상황에서도 일하심
- 인간의 희망 없음이 주님의 한계는 아님
- 막막한 날에 감사와 기도로 매달리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B. 구원을 주심
죄수가 도망간 줄 안 간수는 칼을 빼 자결하려고함(27)
- 사도들은 도망 칠 수 있는 상황이었음
-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28)
- 사도의 지도력으로 죄수들을 지키고 간수도 살림
- 도망쳐서 자유를 얻은 것보다 더 놀라운 결과를 주심
-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 받으리까”(30)
-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31)
- 간수와 온 집안 사람들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
- 온 가족이 믿고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남
- 사도들에게 나쁜 일 일어난 듯 했으나 선을 이룸
- 당신을 의지하는 자녀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방범
- 사도들이 이런 기적을 미리 예상했을까?
- 감사와 기도로 의지하며 살자!
C. 기쁨을 주심
-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34)
- 간수가 사도들ㅇㄹ 집에 데려가 음식을 차려줌
- 이는 예수 안에서 형제됨을 보여줌
- “하나님을 믿음”으로 한 마음이 되었음
- 핍박의 위기 기쁨의 축제로 바꾸심
- 시련 속에서 찬송과 기도로 간구하였기에
- 기쁨이 번영과 풍족이나 자아성취에서 온다고 생각함
- but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의지에서 옴
-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두려워할 자아 없었음
- 이렇게 믿고 신뢰할 때 기적과 기쁨을 주셨음
III. 적용과 결론
- 고난의 때가 기도와 찬송 드릴 때였음
- 원망과 불평 대신 감사의 기도로 살자
-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기억하자!
교회가 기도할 때∐(2017.10.30.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교회가 기도할 때 II (2017.10.31.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2)
교회가 기도할 때∐ (2017.11.01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3)
교회가 기도할 때 II (2017.11.02.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4)
교회가 기도할 때Ⅱ(2017.11.12._주일오전 5)
교회가 기도할 때 Ⅱ (20171126_주일오전 6)
교회가 기도할 때II (2017. 12 03 주일오전설교 7)
교회가 기도할 때 ∐(2017.12.17 주일오전예배 8)
교회가 기도할 때 II (2017.12.31 주일오전 9)
교회가 기도할 때∐(2017.10.30.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교회가 기도할 때∐(2017.10.30.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교회가 기도할 때 II (2017.10.31.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2)
교회가 기도할 때∐ (2017.11.01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3)
교회가 기도할 때 II (2017.11.02.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4)
교회가 기도할 때Ⅱ(2017.11.12._주일오전 5)
교회가 기도할 때 Ⅱ (20171126_주일오전 6)
교회가 기도할 때II (2017. 12 03 주일오전설교 7)
교회가 기도할 때 ∐(2017.12.17 주일오전예배 8)
교회가 기도할 때 II (2017.12.31 주일오전 9)
1. 교회가 기도할 때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행12:5)
녹취자: 백지영
Ⅰ. 본문해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은 후 그야말로 복음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습니다. 예루살렘을 넘어 이제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고, 힘차게 전파되는 과정에서 스데반의 순교가 있었고 사울의 회심까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때 바로 교회를 향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는 때이기도 하였습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교회를 박해하기로 하고 야고보를 처형했습니다. 당시 기둥과 같은 교회의 세 지도자가 있었는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순식간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야고보가 이렇게 쉽게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셨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인가 교회에 큰일을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한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은 헤롯은 베드로도 체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옥에 갇혔고 옥에서는 네 명씩 한 조가 된 열여섯 명의 간수들이 베드로 한 사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백성들 앞에 끌어내고자 했다고 하니까 아마 이것은 종교재판의 이름을 빌어 베드로도 죽이려 했던 것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자, 이제 막 태어나 이제 성장하기 시작한 교회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기둥과 같은 세 명의 사도 중 한 사람이 처형을 당했고 그야말로 그 세 지도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지도자이자 교회가 심정적으로 가장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베드로조차 이제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Ⅱ. 기도가 필요할 때
이때는 기도가 필요한 때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베드로를 구출할 특수작전을 수립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뇌물을 준비해서 헤롯의 조정을 움직여 정치적으로 해결해서 이 지도자를 빼올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명 정치인에게 청탁을 넣어서 두 다리 세 다리 건너 청탁을 넣어서 조정에 끈을 대고 어떤 힘으로 협상을 할 계획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는 할 일이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A. 교회가 기도함
오늘 우리 앞에 있는 이 짧은 구절은 우리한테 세 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교회는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교인들이 기도했다거나 혹은 누가, 누가 기도했다거나 이렇게 나오지 않고 교회는 기도했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교회가 무엇일까요? 교회는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지체들입니다. 그들이 어디에 흩어져있든지 한 마음으로 베드로가 옥에 갇힌 상황을 직면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다고 하는 구체적인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이루는 모든 교인들은 한 마음이 되어 기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사람의 이름이나 집단을 거명하는 대신 교회가 기도하였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장소에 모여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물론 그 당시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심각한 박해에 직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믿음의 형제들이 한 곳에 모일 수도 없었고 또 아마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찾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만 모였고 아마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개인이 아니라 ‘교회가 기도했다’는 이 표현을 주목해 보기 바랍니다. 신자는 모두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교회는 ‘몸의 기도’에 모두 참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신자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어떤 개인적인 문제도 개인적으로 끝나는 문제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피와 한 살을 받아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문제도 그것은 교회의 문제이고 기쁨이 있어도 그 기쁨을 모든 지체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로써 나누고 슬픔과 아픔이 있어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지도자에 관한 문제였고 교회의 리더십이 위기에 처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더욱더 교회의 기도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도함으로써 입증해 보였습니다.
개인의 영적인 생명은 교회 전체의 영적인 상태와 매우 밀접한 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있고 그 속에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생명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하고 생명에 넘치는 것은 개개인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너무 너무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갈 뿐만 아니라, 주 안에서 행복한 인생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신앙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건강한 상태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 교회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 앞에 빌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모두 개인주의에 깊이 영향을 받은 현대인들이 교회에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공동체 의식이 심각하게 약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이런 교회의 공동체 속에서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 기도의 제목을 깊이 고민하고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교회가 처한 선교적인 환경에 대해서 깊이 관심을 가지며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합니다. 단지 이 도시에 있는 이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나아가서 조국의 교회 그리고 나아가서 열방에 있는 모든 교회들과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의 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기도하고 있는 바, 그들이 고뇌하고 있는 바에 함께 참여하며, 그들의 영광을 우리도 함께 즐거워하고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우리도 함께 느끼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교회의 자녀들의 공동체적인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지금은 어마어마한 첨단시대가 되었고 이제는 전투기도 한 20년이나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획기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한 2, 30년 전까지만 해도 군대에서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병들이 격추하는 것을 훈련소에서 가르쳐주었습니다. 실제로 전투기를 조종했던 어떤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미사일이나 대공포가 두렵지만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쏘는, 낮게 비행기가 나를 때 어디선지 모르게 소낙비처럼 쏟아져 올라오는 그러한 총알들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행기가 뜨면 비행기를 속도를 계산에서 그 앞에 수백 명 혹은 수십 명 수백 명의 군인들이 그쪽을 향해서 총을 쏩니다. 낮게 나는 비행기를 향해서 소위 화망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정한 지역에 수백 발 혹은 수천 발의 탄환이 빗발처럼 하늘로 치솟게 됩니다. 그런데 비행기는 그 사람들이 그 풀숲에 숨어있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지나가다가 그 화망에 걸리게 되면 잘못하면 대공포는 피했는데 총알에 맞아서 비행기가 격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마치 이렇게 교회의 하늘을 날고 있는 마귀의 세력들을 겨냥하는 화망을 구성하는 총과 같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는 힘이 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온 교회가 하나로 마음을 합하여 간절히 빌 때 우리가 일찍이 생각하지 못했던 위대한 일들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곡괭이로 땅을 파고 그리고 언덕을 헤집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수십 명이 매달려서 파는데 이번에는 저 멀리서 커다란 트랙터가 옵니다. 그리고는 한 방에 밀어버립니다. 공동체가 마음을 합하여 교회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트랙터로 한 번에 언덕을 밀어버리는 힘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므로 성도의 가장 큰 의무는 교회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가, 어떤 연약한 부분을 위해 우리가 기도해야 하고 도움이 필요한 어떤 사람들을 우리가 빌어야 하는가를 관심을 가지고 헤아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래서 교회의 기도의 제목을 알리고 그리고 교회는 그 기도의 제목을 많은 교인들에게 다시 전달하고 그래서 교회가 필요한 기도를 교회 전체가 영적인 하나의 망이 되어서 필요한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올린다면 우리들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기도의 능력과 은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받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마지막 열매는 치열한 기도와 그리고 진실한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렇게 교회의 한 지체로서 교회 공동체의 기도제목을 위해 기도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간절히 기도함.
두 번째는 간절히 기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방식이 어떠했느냐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간절히'라고 되어있는 단어는 희랍어로 '에크테노스'(ἐκτενῶς)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힘 있게 무엇엔 가도 방해받지 않고 쭉 뻗어나가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누가 어떻게 막을 수 없이 그냥 쭉 뻗어나가는 힘 있는 확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진공상태에서 하나님께 올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영적인 행위이고 영적인 행위 속에는 그것을 방해하려는 미귀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온갖 유혹과 교회의 기도를 약화시키는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모든 것과 싸우며 이 세상을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항상 잔잔한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커다란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교회를 뒤집을 것 같은 수십 미터짜리 풍파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모든 시련의 파도를 넘나들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소명을 바라보며 항해를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자연적인 풍랑이나 바다만이 교회의 항해를 방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세력들이 수없는 화살로 공격하고 대포로 공격을 하고 해적선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은밀히 침투시킨 적의 무리들이 교회 안에서 내분을 일으키기도 하고 반란을 획책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과 안팎으로 싸우면서도 교회는 표류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목표를 향하여 항해를 계속 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상황들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힘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흔히 활이라고 하면 한쪽 팔로 활을 붙들고 또 한쪽 손으로 시위를 당겨 화살을 먹여 쏘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활 중에는 매우 크고 화살이 무거운 활도 있습니다. 궁수가 땅에 등을 대고 눕고 하늘을 향해 활을 밀고 그리고 온 몸으로 시위를 당겨 하늘로 올리는 그러한 활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손이 아니라 발로 겨누고 손가락으로 쏘는 그러한 화살도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화살은 더 굵고 그리고 더 힘 있게 나갑니다. 더 멀리 나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더 힘이 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화살은 중심을 관통합니다. 전쟁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무기 가운데 하나가 석궁이었습니다. 이제 청동기 갑옷만 입으면 화살을 모두 막을 수 있었는데 어느 날 석궁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휙'하고 쏘니까 갑옷을 펑 뚫으며 군인들이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큰 전쟁의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활이 쭉 뻗어나가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갑옷 따위가 화살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힘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는 처형됐고 하늘같은 지도자인 베드로는 이제 처형의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정치적인 힘도, 갖다 바칠 뇌물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있어도 그들은 그런 것을 의지하기에는 너무 순수한 믿음을 가진 교인들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과 지혜와 모든 것을 다해서 간절히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능력 있는 기도는 함께 하시는 성령님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은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힘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기도하러 올라가자마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올라가 땀이 피가 되도록 자신을 모두 쏟으며 기도하시고 그 기운이 거의 진하셨을 때 천사가 와서 예수의 기도를 도왔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사라져가고 있는 미덕중의 하나는 치열함, 간절함, 목숨을 걸었음, 살든지 죽든지 이런 표현들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우리들이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과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껏 신앙생활 해 오신 여러분들은 몇 번쯤 인생에서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일이었든지 하나님이 마음을 모으게 하셔서 그래서 살든지 죽든지 간절히 매달렸던 경험, 그리고 그 간절한 기도 속에서 평소에 받아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 그리고 여호와의 친밀함을 경험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상황이야 각각 달랐지만 놀면서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은 없습니다.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하거나 다방에서 친구들과 노닥거리다가 그렇게 깊이 주님을 만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하던 때에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난 경험을 여러분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간절함의 근원은 성령님의 은혜이고, 그 자리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간절한 갈망함에서 옵니다. 그 갈망은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생각할 수 없으며 이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고 하는 대치할 수 없는 치열한 갈망입니다. 그런 갈망이 마음 깊은 밑바닥에서 기도를 길어 올리게 되고 저 마음에 남아있는 마지막 진액까지 모두 짜서 주님 앞에 바치도록 합니다. 기도는 하지만 마음을 쏟으며 중심을 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쏘다가 만 화살처럼 그렇게 툭툭툭툭 떨어지는 것입니다. 갑옷은커녕 좀 두꺼운 박스 한 장에 걸려서도 툭툭 떨어지는 화살처럼 되어버립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나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이 넓게 그냥 흐르고 있을 때는 힘이 없지만 그 물이 작은 도랑으로 모여 한꺼번에 흐를 때에는 가던 길의 흙도 밀쳐버리고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낼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눠진 마음을 하나로 묶고 그것을 모두 한곳으로 흘러가도록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돌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간절한 기도이고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간절한 기도에 대해서 수없이 듣는 것보다는, 간절히 기도를 한 많은 사람들의 전기를 읽는 것보다 본인이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간곡히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마음의 진액이 모두 다 짜내어질 것처럼 매달려 기도해 보면 간절한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것보다도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 삶의 이유가 되고 그 기도가 이루어져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다면 자신의 목숨쯤은 어떠해도 좋다고 하는 치열한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에크테노스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교회를 통하여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가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문제를 끌어안고 오랜 세월을 고민했지만 마음을 상하고 몸을 망가뜨리는 것 이상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하나님께 기도함
마지막 세 번째는 이들의 기도의 특징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라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이지 이웃집 아저씨에게 드리는 기도도 아니고 자신에게 올리는 탄원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인지는 물어보아야 합니다. 명목상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에 호소하여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입니까?
여러 해 전에 중고등학생들이 수련회를 가는데 본 교회 교역자들도 학생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설교를 잘 하지만 좀 더 아이들에게 커다란 영적인 영향을 주고 싶다고 하며 교역자들이 외부의 좋은 강사를 좀 모시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삼일동안 다 와서 할 사람은 쉽지 않지만 그러나 특강이라도 누가 와서 좀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이름을 죽 올렸는데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 중에도 물론 훌륭하게 설교를 하거나 강의를 하실 분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아니, 기왕에 학생들에게 도전을 주려면 좀 이미 눈에 확 띠어서 누구든지 '아, 그분 참 존경할만하고 굉장한 분이시다' 이런 분이 와서 평생 살아온 삶과 인격으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도전을 줄 수 있으면 좋지 않냐?" "그런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 옛날에 한동대학교에 김영길 총장 같은 분 오시라고 해서 중고등부 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면 어떠냐?" 교역자들이 막 웃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런 유명한 분이 큰 교회에서 섭외를 해도 될까 말까 한 분이 그것도 저기 기도원에서 중고등부 한 2, 3백 명도 안 모이는 곳에 거기 오시라고 하면 그 바쁜 양반이 그 포항근처에서 거기까지 오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나, 김남준 목사다. 그 사람도 유명하지만 나도 좀 유명하다." 그런데 저 자신도 천명, 이천 명씩 모이는 집회에서 와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해도 도저히 갈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도 아홉 명이 모이는 교회에 가서 삼일동안 부흥회를 해 준적이 있습니다. 부흥회 부탁이 들어와서 내가 너무 힘들어서 '못 갑니다'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그 젊은 목사님이 선수를 치는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 교인들이 아홉 명입니다." 그 말을 하니까 못 간다고 말을 못하겠는 것입니다. 아니 9천명쯤 된다고 하면 저 못갑니다 - 실제로 한 5천명 모이는 교회에서도 연락이 왔을 때 내가 못갑니다 그랬습니다. - 그래도 마음에 하나도 부담이 안 됩니다. 그런데 "목사님, 아홉 명입니다." 그러는데 못 간다고 말을 못 하겠는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마음을 주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갈게요. 최선을 다해서 부흥회를 해 드릴게요." 그리고 갔더니 놀랍게 열 네 명이 모였습니다. 그 사람들을 놓고 새벽, 밤 이렇게 삼일 집회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목사님, 저 목사님 책도 많이 읽었고 우리 교인들 정말 변화되어야 합니다. 목사님 제가 육 개월을 기도하다가 전화 드리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마음을 쿵 울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II (2017.10.31.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2)
그분을 부르는 방법을 가르쳐줄테니 적으라고 했습니다. 전화를 덜컹 해보아야 비서가 받으니 그러지 말고 편지를 쓰라고 했습니다. 길이는 한 장은 넘고 두 장은 넘지 않도록 하고 간곡히 기도하면서 써서 보내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총장님이 편지를 받았는데 보니 손으로 쓴 편지라 -수없이 우편물이 오지만 인쇄된 것은 쓰레기통으로 거의 들어가고 손으로 쓴 것은 봅니다- 받아서 읽어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미국의 출장이 있으셔서 못 오신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열심히 기도해라 그랬더니 웬일인지 그 스케줄이 취소가 됐습니다. 그래서 이틀 후에 다시 연락이 오기를 다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시게 됐습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저는 또 가만히 있을 사람입니까? 관광버스 두 대를 불러서 그 청소년들의 부모를 다 불렀습니다. 그리고 도시락까지 줄 테니까 모두 가서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 산골에 학생들을 위해 강의를 하려고 했는데 관광버스로 두 대로 온 아줌마들이 함께 포진을 하고 있으니 이분이 너무 감동을 받으셔서 여기에 다시 한번 오고 싶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시지요? 여기서 "하나님께"라고 하는 것은 그냥 명목상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쏟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과 영적인 친밀한 교통을 나누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마음 깊은 밑바닥에서 우러나왔고 그것은 그들의 가슴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되었고 그리고 그 뜨거운 불을 안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 기도는 에크테노스의 기도였고 상황이나 마귀의 세력이 부러뜨리거나 꺾을 수 없는 힘을 가진 하늘을 향해 발로 쏴 올리는 그러한 힘 있는 화살과 같았던 것입니다. 하나의 화살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주님이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무슨 많은 기도가 있었겠습니까? 베드로를 살려주셔서 다시 교회로 돌아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목양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 외에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부었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깊은 임재 속에서 그분과의 친밀한 영적인 교제를 누리며 하나님 앞에 빌었습니다. 그게 한 사람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 간절히 기도했고, 그때 놀라운 영적인 각성과 은혜가 집단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제 12장 이후에 전개될 이제까지 교회가 이루어놓은 것들도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복음이 기껏해야 예루살렘을 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될 위대한 복음의 계획을 가지고 이 어리디 어린 교회를 한번 불같은 시련 속에서 치열한 기도로 이 모든 시련들을 다 능가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사명을 이루어내는 훈련을 치열하게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부쩍 청년같이 크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인이 많이 모여도 얼라 같은 교회가 있고 교인이 조금 모여서 청년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물론 할아버지 같은 교회도 있습니다. 얼라 같은 교회는 만날 교인들이 징징거리고 불평하며 뭘 좀 달라고 합니다. 청년 같은 교회는 이제 내가 장성한 사람으로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내 소명이 무엇이고 어떻게 헌신하며 살아야 할까를 고민할 정도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까? 수천 명의 교회가 모이고 많은 세월이 지나갔을 때 여전히 똥 기저귀차고 징징거리는 영적인 얼라들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방금 예수를 믿어서 미성숙한 게 아니라 오래 예수를 믿어서 이제 수염도 나고 돋보기까지 썼는데 아랫도리 벗고 드러누워서 기저귀를 차고 젖병을 입에 물고 징징거리고 있다고 한번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런 교인이 태반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재앙입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상태였습니다. 그 속에서 성령이 이들의 마음을 주장해 주었고 교회 전체가 이런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은 교회는 이 불같은 시련을 통해서 청년과 같은 교회로 다시 태어나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런 중대한 시련 속에서도 여전히 교회를 붙들고 계시고 이 세상의 어떤 권력과 어떤 마귀의 세력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하는 위대한 신념이, 확신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간절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 임재 앞에 매달리는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Ⅲ.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명은 교회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제목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진짜 하나님 앞에 기도로 헌신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교회의 상황이 무엇인지 그래서 그 상황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모아 빌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 힘이 모두 합쳐져서 호미로 산을 허무는 것 같은 각개전투(各個戰鬪)가 아니라, 우리 모두 힘을 합해 하나의 트랙터가 되어 수백 개의 삽이 허물 수 없는 산들을 단번에 밀어버리고 힘차게 상황을 격파하며 앞으로 가야 합니다. 교회가 뜻있는 일을 위하여 목표를 세우고 앞으로 전진할 때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으며 순풍에 돛단 듯이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 길이 어떻게 십자가의 길입니까? 그것은 꽃길입니다. 그런 영광 받는 길은 우리에게 차례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주님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다가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교회 공동체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다가 힘든 일이 생겨나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것들을 통하여 우리보고 한 마음이 되라고 하시는구나. 우리보고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시는구나. 아, 이런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가 부족하니 더욱더 간절하고 열렬히 빌라고 말씀하시는구나. 아, 그저 우리가 형식적으로 모일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 한 마음이 되어 매달리라고 가르치시는구나. 구체적인 상황을 위해 빌라고 가르치시는구나."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상황을 극복하면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모든 사람을 일깨워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십니다. 교회를 담대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사경회를 통해 이렇게 기도의 혁명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영혼도 다시 살아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마음을 같이 할 때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행 1:12-14)
녹취자 : 조원정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의 어떤 일이 났는지를 보도하고 있는 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많은 제자들이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의 승천하시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분부대로 그중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거기 머물렀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감람원이라고 하는 그 산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 왔는데 그 거리가 안식일에 가기에 알맞은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한계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1km이내였고 1km가 넘으면 안식일을 범하는 여행이라고 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한 이곳이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주석가 짠(Zahn)이라고 하는 사람이 사도행전 12:12을 해설하면서 이것을 근거로 아마 여기 모인 이 장소도 마가의 다락방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120명이 모일 정도의 다락방이 그 당시에 가능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120명이 그 한 사람 집의 다락에 모두 모였다기보다는 다락뿐만 아니라 성전까지 포함해서 모두 120명 정도가 모였고, 그들은 동일하게 예루살렘에서 약속한 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다락방에서 120명이 모두 들어갔는지 아니면 일부의 사람이 거기에 들어갔는지 우리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대로 사도들과 또 다른 사람들이 바로 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간절히 기도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이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II. 구원사의 아침을 열 때
이 시간은 폭풍속의 고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구원사의 아침이 열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침이 열리고 찬란한 해가 떠오를 텐데 그 해가 동 터 오기 전 어두움이 아직 짙게 깔려 있는 새벽에 해당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인류의 조상이 타락한 이후로 제시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을 바라보며 달려왔던 그 구약역사의 모든 전개 그리고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언약, 그 언약의 성취를 전달하는 모든 사건과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점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에게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당신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희생적인 속죄의 죽음을 죽으시는 것이 구속의 대업이었습니다. 집요한 사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을 모두 성취하셨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그의 가르침을 모두 받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생활했던 사도들조차도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이 이제 승천하시기 직전인데 바보 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고 6절에서 제자들이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굉장히 신학적인 질문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 그 하나님의 왕국의 지상적인 성취, 이런 것들에 대한 구약적 전망과 이것을 완전히 지상 나라적으로 이해하고 육적으로 이해하여 메시아사상을 정치적 해방자로 이해했던 당시 유대주의자들의 신학을 모르면 이 질문의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늘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갑니다. 골자만 말씀드리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고 이제 승천하시려고 하는데 여전히 제자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로마 나라를 때려눕히고 이스라엘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 것이라는 세속적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칭찬할 만한 것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들은 그 질문에 대해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질문을 하시니까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알바가 아니요, 대답을 비껴갔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하고 싶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도 사도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루살렘에서도 온 유다에서도 사마리아에서도 땅 끝 까지도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도 이해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앞서서 사도들과 함께 모여서 그들에게 특별한 분부를 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도 이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칭찬할만한 일은 예수님의 유언 아닌 유언, 죽지 않으시는 분으로 승천하시는 순간에 그들에게 주셨던 분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이것을 정확히 순종한 일입니다.
A. 다 함께 모임
위대한 구원사의 아침이 열릴 때 이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우선 첫째는 다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분부대로 승천을 목격한 후 예루살렘에서 모였습니다. 이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보았을까? 고리도전서 15장 6절에는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많은 주석가들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였다는 이 말씀이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숫자일거라고 이해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타나신 순간들이 복음서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무대 자체가 오백여 명씩 모일 수 있는 무대가 아니었습니다.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형제라고 해서 자매가 제외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하는 것은 승천당시 목격자들의 숫자라고 이렇게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서 이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다가 오순절 성령 사건을 경험합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후 첫 안식일로부터 50일 째 되는 날입니다. 유월절 후 첫 안식일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죽으셨으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여인들을 만나신 그 다음 날입니다.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에 여인들을 만납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이 유월절 후 첫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니까 사도행전 1장 3절에 예수님의 생애를 이야기 할 때 40일 동안 부활한 몸으로 그들에게 보이셨다고 했으니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이들이 성령 세례를 받는 그 기간까지가 약 9일에서 10일로 추정됩니다. 그때에 있었던 사람들의 수가 120명 된다고 했으니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목격한 사람의 숫자가 고린도 전서 15장에 나오는 500명이라면 그 한 10일내지 9일내지 되는 기간 사이에 500명이 예수님을 보았고 실제로 기도하기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120명뿐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380명이 아예 오지 않았는지, 왔다가 한사람씩 빠져 갔는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을 때 바로 여기에 보면 모인 무리의 수가 ‘약 120명이나 되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날이 정확하게 오순절날 하고 일치하는 날인지 아니면 하루나 이틀 앞당긴 날짜인지를 정확하게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봅니다. 일단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의미도 잘 모르겠고 부활한 것을 보긴 했지만 그 의미도 잘 모르겠고 도대체 승천하셨는데 이건 또 무슨 사건인지도 몰랐지만 주님의 분부를 따라 순종하여 그들은 한곳에 모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게 하신 후 성령을 보내심으로 새 시대를 이루실 작정이었습니다. 위대한 구원사의 아침을 여시기전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들을 모두 모이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놀랍게 예수님의 분부에 순종하여 그들은 핍박의 칼날이 시퍼런 그 시간에 모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통신 기술의 발달로 교회의 모임은 거의 해체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도 여러 사람이 매주 인터넷에서 예배를 드리고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저 교회 옮길 때까지는 상당히 많은 기간을 그렇게 보내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교회 옮기기를 포기하고 온라인 교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더 바빠진 현대인의 삶은 점점 이렇게 한 공간에 모이는 것을 어려워하고 삶의 여건들이 우리의 삶 전체를 아침부터 밤까지 쥐어짜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적인 목적을 위해서 먼 거리를 이동해서 모이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어디에서든지 유비쿼터스 시대가 되었는데 지금도 우리가 모여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그것은 매우 비생산적이라고 까지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때 그 모임은 단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고 나누는 경제적인 모임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보면 사도는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은 신앙을 위해서 모이지 않을 것을 이미 예고하고 있습니다. 모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모임을 자꾸 폐지하는 시대가 올 거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서로 권하여, 무슨 뜻입니까? 한 사람 한사람은 그렇게 모이기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일이 지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도 이미 그랬다는 것입니다. 서로 격려하여 마지막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치열하게 모이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든 모임을 그렇게 다 싫어하고 모이지를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즐거움을 찾고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는 박 터지는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분양현장, 더군다나 아파트가 오를 것 같은 분양현장에는 그 전날부터 입장권을 타기 위해 기다립니다. 명절에 귀성열차를 타는 사람들, 백화점에서 뭔가를 공짜로 준다고 그럴 때 박 터집니다. 무엇인가 돈을 지불해도 그럴 듯 하는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곳이면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홍콩에 가면 빅토리아만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좋은 호텔들이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페닌슐라호텔이 있습니다. 랜드마크 격에 속하는 아주 숙박료가 비싼 호텔입니다. 그 호텔에서 오후 시간 좀 되면 수십 미터씩 줄을 섭니다. 그 이유는 호텔 로비에서 커피숍에서 하는 프로그램 때문입니다. ‘애프터눈 티 서비스’(afternoon tea service)입니다. 그 서비스라고 해서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줍니다. 홍콩을 영국 사람들이 지배할 때부터 있었던 문화인데 영국 사람들은 차를 잘 마십니다. 영어에 tea라는 말이 자기네가 만든 것이 아니라 중국어 ‘떼’(茶)에서 나온 것입니다. 발음 나오는 대로 쓴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홍차를 타서 거기에 밀크를 좀 붓고 달콤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스콘이나 비스켓 같은 것을 해서 오후에 먹는 것이 영국 사람들의 낙입니다. 그 호텔에서 오랫동안 수십 년 동안 내려오는 전통이 오후가 되면 바다를 보면서 앉아서 티를 한잔씩 마시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비싼 돈을 내고 투숙한 손님은 예약이 되지만 들어오는 사람은 예약을 안 받고 줄 섰다가 순서대로 들어와야 합니다. 투숙객들이 모두 예약을 하고 빈자리만 줄 서 있으면 순서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자의 티와 몇 개의 과자가 나오고 앉을 자리가 주어지는데 네 사람 한 테이블에 36만원입니다. 수십 미터씩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이게 모이지 않는 시대입니까?
여러분 서울 시내나 어디에서도 맛집으로 대박이 난 집이라 가보면 20분-30분 줄서서 기다리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절대로 모든 모임을 폐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른 새벽부터 사람들이 산에 오르기 위해서 동호회 회원들이 모입니다. 똑같은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는 사람들, 똑같은 오토바이를 타고 모이는 수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열심히 뻗쳐서 모이는 것입니까? 그것은 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교회도 즐거움을 줘야 하는 시대가 아니냐고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즐거움을 교회가 그렇게 줄 수 있습니까? 교회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은 진리의 말씀을 만나고 하나님을 사귀는 기쁨입니다. 그것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한번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더니 굉장히 좋은 집이 있다고 나를 태워 가지고 그 교회 목사님이 산길을 돌고 산길을 돌아서 절대로 사람이 안 올 것 같은 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보리밥 집이었습니다. 그 산골에 차들이 바글바글하고 차량 들어가고 나오는 차들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거기서서 깃발을 흔들면서 통제를 합니다. 가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보리밥을 먹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보리밥만 맛있게 해도 이렇게 사람이 모이는데 나는 어떻게 목회를 하기에 만날 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사정을 해도 그 모양인가? 좀 잘하자. 하고 왔습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편의주의를 따라서 교회의 모임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 구원사의 위대한 아침을 열 때 하나님은 놀랍게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이게 하셨습니다. 일시에 텔레비전 방송을 하듯이 온 세계에 성령의 역사를 보내지 아니하시고 거기 모여 있어 기도하던 사람들 위에 첫 번째 성령 강림 사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이지 않으므로 교회의 정신이 형성되지 못하고 해체됩니다. 보이는 지체들에 대한 사랑은 공간을 함께 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참여하기 위해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내년 목회의 중요한 방침 중 하나가 어떻게 하든지 교인들이 많이 교회에 나와서 교육을 받고 예배하고 교제하고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가 되게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받들어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마음을 같이함
이것보다 더 중요하게 이 사람들이 한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도들을 비롯해서 여자들, 예수의 어머니와 예수의 가족, 사도들 중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더불어 마음을 함께 한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라는 구절은 ‘호모튀마돈’(ὁμοθυμαδόν)이라는 희랍어인데 ‘호모’(homo)라는 말은 “동일한 것”이란 뜻이 ‘호모’(homo)와 “정신, 마음”이라는 뜻인 ‘튀모스’(thumos)가 합쳐져 생겨난 단어입니다. 이들이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었지만 남자, 여자, 어린사람, 나이 많이 든, 어른 예수의 어머니, 예수의 가족들까지 있었지만 그들은 놀랍게 시간이 흐르면서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 받을 온 인류가 죄 용서를 받는 것도 몰랐고 예수의 피가 위대한 구원의 능력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무슨 의미인지 이렇게 모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놀랍게 앞일을 알 수 없는 이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게 하였고 각자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니까 그 마음은 각각 다른 사람의 마음인데도 하나의 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마음의 하나 됨은 하나 되자고 노력을 하고 맞추는 것도 필요하지만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한 사람 한 사람 서로 개성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신앙의 경험도 다른 사람들이 한분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분 하나님께 모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획일화 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사람인데도 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마음이 하나로 묶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획일화하고 단일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의 본질이 아닌 서로 다른 신자들이지만 마음의 초점이 하나로 모아져 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자신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두려운 상황에서 이제 어떻게 가야할 바를 모르던 때였습니다. 그때 이 모든 성도들은 모였습니다. 우리 주님이 남기신 마지막 분부에 순종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주님이 약속하신 그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박해는 핍박의 서슬이 시퍼런 때에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 된 마음으로 거기에서 구속사의 새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다양한 사람들이었지만 한 사람 한사람이 예수님의 마지막 남기신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시하신 대로 순종하며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모두 한줄기 가느다란 빛이 되어 하늘로 향했고 그 빛이 다다르는 마지막 지점은 하나님의 보좌였습니다. 그렇게 쏘아올린 간절한 빗줄기들이 보좌에 모두 모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단일한 마음들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의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간절히 앙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우리를 위해 하실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로 오르셨는데 우리 홀로 남은 것 같지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세례가 무엇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우리를 지켜주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믿음으로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같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마음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교회의 마음을 갈라놓는 말이나 행동들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마음이 확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먼저 믿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작은 언어와 행실이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흔들어 놓습니다. 마음을 격려하고 불러 일으켜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지만 말 한마디 잘못된 태도 하나로 쓰러진 지체들을 밟아 버리기도 합니다. 소극적으로는 우리들이 그렇게 조심해야하지만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한 사람 한사람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하여 여전히 교회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앙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그때에 개인도 마음의 관심사가 하나님께 맞춰져야지만 말씀도 들리고 기도도 되고 교회가 그렇게 딱 맞춰질 때 하나님은 그 교회를 매우 기뻐하며 특별한 진리의 말씀을 내리시고 기도의 은혜를 부어주시고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앙망하므로 한 마음을 갖는 성도들이 되기를 그래서 하나님이 이 교회를 위대하게 쓰시는 한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기도에 힘씀
마지막 세 번째는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라고 합니다. 저는 1장을 예전부터 여러 번 읽으면서 참 이상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잘 읽어보면 기도하라는 말씀이 안 나옵니다. 그냥 기다려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을 기다려라. 그것은 바로 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보혜사 성령을 이 땅에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이 있다. 그것을 기다려라.
그런데 생각을 한번 해보십시오. 주님은 기다리라고 그러셨는데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기도에 힘쓰게 하였을까? 더욱이 오늘 기도에 ‘힘쓰더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가 희랍어로는 ‘프로스카르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έω)라는 단어인데 ‘계속 부르짖다.’ 라는 뜻입니다. 어제 나왔던 에크테노스처럼 쭉 뻗어간다는 표현처럼 이것도 역시 부르짖는데 그냥 간헐적으로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부르짖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보면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우리가 우선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중요한 것 하나가 평상시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었다. 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어제도 우리가 잠시 말씀을 보았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하는 그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구하는 것의 대상이 성령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순간에는 너희들이 다른데 가지 말고 예루살렘에 모여서 빡세게 기도해라. 그렇게 말씀 안하셨어도 성령의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으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다리라는 분부를 받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 그냥 놀면서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기다리라는 것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어떤 이야기들을 우리들이 보탤 수 있는가 하면 기도 안하고 베길 수가 없는 상황이고 예수님이 데려가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해서 같이 계실 때는 그래도 낫는데 가셨습니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겨 놓고 가시고 성령이 오신다고 하였는데 당신이 직접 오신다고 말은 안하고 성령님이 오신다고 말씀하시고 가십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밖에서는 지금 사라진 예수의 시체와 그것을 둘러싼 흉흉한 소문들, 박해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들이 그냥 맥 놓고 기다릴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커다란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구원사의 관점에서 보면 이제 교회가 막 은혜의 요람에 태어난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아주 산고를 겪으며 응애 하고 애가 태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툭 떨어트려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한 공간에 모으시고 그들의 마음을 찰떡처럼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열흘 기도하면 내가 보내주마. 팔일 기도하면 내가 보내주마.’ 이런 것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될지 모릅니다. 얼마가 되든지 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서 그 다양한 사람들이 마음의 빛줄기가 보좌로 향하면서 이들이 오랫동안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경험을 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은 진짜 좋겠다고 생각해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고 그들이 유대주의적인 하나님 나라의 대망에 관점은 가지고 있어서 그 나라가 올 때 자기에게 벼슬을 하나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비교적 이 사람들은 그런 세상의 자랑과 욕심들은 상당히 버린 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진심이었겠지만 결국은 그대로 못했지만 죽는 데까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말하던 사람들입니다. 일찍이 이렇게 마음이 하나 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구속사의 새벽을 여는 이 위대한 순간에 하나님이 그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향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한 마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을 하고 난 후에 그 모아진 응축된 힘을 기도로 쏟아 놓게 하십니다. 그때 그 기도는 진짜 하늘의 보좌를 흔드는 강력하고 간절한 기도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이 있고 난 후에 현상을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행전 6장에서 일곱 집사들을 세우기에 앞서서 우리 사도들이 이렇게 가난한 자들을 물질로 섬기는 일에 깊이 관여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반성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 6:4) 이것이 구원사의 새벽이 열리며 오순절 강림 성령 사건 이후에 나타날 모든 경험들이 그 성령 강림 사건 직전에 이 사람들 마음이 하나로 모아집니다. 모아진 마음을 통해서 성령이 부어지고 부어질 때 그 다음에는 항상 이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교회가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면서 구원 역사의 위대한 추동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역사하시고 하나님에게는 더 쉬운 일도 없고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 한정된 에너지 중에서 에너지를 들여서 그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한 힘을 가지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존재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어려운 일, 매우 힘겹게 하시는 일이나 혹은 쉽게 하는 일이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홀로 역사하시지만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역사를 펼치십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이 펼치시는 구원의 역사를 보면서 감격하고 감탄하게 하십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 영혼의 부흥을 위해 성도들의 변화를 위해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던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이루어 질 때마다 가슴이 뛰고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매일 매일 매순간 만나기 때문입니다. ‘예수 예수 믿은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라고 하는 것이 산이 무너지고 땅이 변하여 바다가 되는 그런 획기적인 이적을 통해서만 그 찬송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도하던 그 사람이 그렇게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눈물이 흐릅니다. 산이 변하여 바다가 된 것보다 더 감격스러운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기도가 있고난 후에 당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마치 기차가 어디든 다 갈 수 있지만 철로를 놓은 후에야 다 갈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의 지체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매달리는 그 기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오래전에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무디 신학교에서 부흥이 일어났답니다. 교수와 학생들이 매일 모여서 진짜 불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달렸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많이 모일 때는 삼백 여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가운데 큰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하나님 이곳에 부흥을 달라고 우리가 기도합니다. ‘이곳에 부흥을 주소서.’ 그리고 기도할 때 들어오는 선교 보고는 놀랍게 자신들이 기도할 때 가리키는 것에 따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더랍니다. 하나님은 숫자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여도 수를 과시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두려운 날에 전심으로 순종하여 하나님 앞에 한 마음이 되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이루셨고 그 이루시는 위대한 일은 기도하는 각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야 말로 위대한 구원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찬송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공동체가 되어서 예루살렘을 성령의 역사로 복음의 역사로 뒤집어 놓았던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2017.11.01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3)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그들이 모이지 않았더라면 두려움 속에 서로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서로 찢어졌더라면 그들이 마음을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모여서 두려움과 염려 속에서 서로 사람들의 탓이나 하고 기도에 힘쓰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요? 과연 이런 위대한 구원 역사의 새벽의 첫 증인들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기도에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적용과 결론
교회의 기도와 개인의 기도는 나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위대한 구원의 경륜과 기도 제목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의 기도 제목도 그 안에서 발견됩니다. 모든 것을 뿌리치고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마음이 하나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에 힘쓰기를 다짐하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여러분의 인생을 통해 교회를 통해 이루시는 것을 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성령이 임하실 때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녹취자: 이경순
Ⅰ. 본문해설
사도행전은 크게 두 토막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교회의 탄생을 다루고 있고, 13장부터 마지막 28장까지는 교회의 강력한 복음의 확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단순히 사람들이 불 받은 사건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을 이어 제2의 보혜사가 오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당신이 가면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보혜사’(保惠師, counselor)라고 하는 이 단어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우리가 만든 단어입니다. ‘보’(保)라고 하는 말은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거나 변호하는 분이라는 뜻이고 ‘혜’(惠)는 우리를 돕는 사람, 헬퍼(helper)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師)는 진리를 모르는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희랍어 성경에서 ‘파라클레이토스’(παράκλητος)라고 나오는 ‘보혜사’에 대한 그 원어는 이 세 가지의 뜻을 모두 담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말로 옮길 수가 없어서 보혜사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쓰고 있으면 지금쯤은 이 단어가 국어사전에 올라갈만한 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를 위해서 하셨던 일이 바로 그 보혜사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를 변호하고 우리를 도우시고 힘이 없는 우리를 도우시고 무지한 우리를 가르치셨던 일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보혜사로서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의 대업을 통해 하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성취하게끔 토대를 놓으셨습니다. 이제 교회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시던 그 일을 뒤이어서 해야 합니다. 이제는 예수님 한 분이 아니라 당신을 믿어 구원 받은 온 성도들-전 세계에 흩어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그 정신과 마음을 하나님 사랑 안에서 가지고 그분이 하셨던 일을 그대로 뒤이으면서 하도록 교회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가 그 일을 하도록 이번에는 보혜사의 역할을 당신이 직접 오셔서 하지 않고 보혜사를 통하여 하시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위대한 일을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당신의 약속대로 당신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이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내서 교회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행하게 하신 사건이 성령강림의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은 구원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 ,십자가에서 죽으심 ,부활하심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완성하심 이것들과 함께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아니 이 성령 강림사건이 없었다면 그 모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그리고 완성의 퍼즐이 맞혀질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 성령강림사건이 가지고 있는 구속사의 장엄한 의미에 아직 눈을 뜨지 못한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교회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않으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가 모여서 마음이 하나가 되어 기도했고 그리고 오순절 날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위대한 구속사역을 본격적으로 이 땅에 펼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의 가장 중요한 것은 구속 사역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구속사역을 이루시고 이제 이 이루신 구속사역을 토대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인데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사역을 각 사람 속에 적용시켜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실제적인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심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Ⅱ. 성령이 임하실 때
자, 그러면 성령이 임하실 때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오늘 성경을 통해서 오늘과 그리고 내일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자, 교회는 성경강림으로 예전에 없었던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계셨을 때에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직접 설교하실 때 그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의 마음에 일어났던 일 보다도 어떻게 성령님이 강림하실 때 일어난 일이 더 큰 일 일수 있을까?”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하실 가장 중요한 일은 구속의 토대를 놓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님은 그 이루신 구속사역을 각 사람에게 적용하십니다. 성령님의 원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고 사시고 가르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특히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각 사람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신학적인 사상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 일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사역 없이는 성령님이 적용할 것이 없으셨지만 실제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토대로 성령이 역사하실 때 일어날 그 역사는 예수님이 실제로 하신 일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 그러셨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요 14:12) 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속 사역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공동체가 이 땅에서 경험하게 될 구속사역 적용의 위대한 역사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 성령강림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실 재림의 사건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타락한 세상을 구속하시고 완성하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것을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깨닫게 만드시는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죽기까지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예수님이 로마군인들 모두 때려 부수고 그리고 다윗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강림 사건으로써 그 모든 유대교에서 배운 편견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유리처럼 다 부서지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경륜의 의미가 확 솟구쳐서 찬란한 불꽃처럼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보고 비로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분이 반드시 다시 오신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고 그동안 어려서부터 배운 구약의 역사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 로마의 치하에 있는 유대인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온 시대를 관통하는 한줄기 빛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모두 복음에 불붙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재미있는 그림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애를 30세까지 사시다가 드디어 공생애로 진입을 하십니다. 그 때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예수님이 요단강에 오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세례를 받은 당신의 아들 예수가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렇게 보여주셨습니다.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임하시며 하늘에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자, 그분이 물로 세례를 받으신 후에 공생애를 시작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가 태어났습니다. 이 교회가 시작된 시점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가장 보편적인 견해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생겼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무리를 형성하였을 때 그것은 사적인 집단이요 교회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설명을 하면 굉장히 좋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이제 공적으로 비로소 메시아로 취임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가지신 그 모임도 교회였지만 이 교회가 성령의 세례를 받음으로 드디어 공적으로 진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그림이 얼마나 놀라운 일치를 보여줍니까? 예수님이 사적인 생애를 사시다가 세례를 받으시면서 공적인 생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실 때, 교회는 이미 있었습니다. 이처럼 있었던 교회가 성령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드디어 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진정한 교회로써 공적인 출발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물로 주신 세례를 인정하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오셨고 두 번째 교회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그 다음에 내일 나오겠지만-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서 교회가 세례를 받습니다. 이 두 개가 놀라운 대조를 이루면서 교회가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을 뒤잇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주 간단하게 정리를 하자면 교회는 예수의 분신입니다. 얘기하면 너무 길어져서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은 신자는 구원을 받는 것과 함께 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가끔 보면 여기서 예수님이 성령 세례를 받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그냥 예수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성령세례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한 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눈에 보였고 마음이 살짝 끌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연구를 더 하면서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례’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세례를 줄 때 우리는 지금 물을 뿌리는 세례를 주는데 맨 처음에는 이게 아니라 사람이 물속으로 완전히 쑥 들어가서 나오는 세례를 줬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들어갈 때는 죽음이고 다시 나올 때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 세례는 물이 적은 곳이면 안 되고 강 같은데 가서 풍덩 몸을 담가야 됩니다. 그것은 성령의 체험을 하나의 회화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풍부하게 성령을 경험한다는 것을 세례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령세례는 딱 한 번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모든 교회’는 이미 있었던 교회와 지금 있는 교회와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교회를 포함합니다. 그 ‘모든 교회’를 비유하자면 성령의 강물 속에 풍덩 담가서 다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한 교회는 이제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서 그 교회에 그리스도가 그 교회의 머리이시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접붙여져서 이루어집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고 접붙여짐으로써 이미 받은 교회의 성령세례 속으로 우리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즉,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고 회심하는 그 순간 이미 교회에 부어주신 그 성령의 세례 속으로 적용이 되어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충만한 성령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누구든지 진정으로 회심하게 되면 회심한 즉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시점에서 그것을 많이 느끼고 덜 느끼고 하는 그런 차이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진정으로 그가 중생하고 회심하면 그 처음 순간에 성령의 충만한 상태로 들어가게 되고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의 성화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가 회심하면 성령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조심해야 될 것은 제2의 성령의 세례가 필요한 것처럼 그렇지 않으면 이미 받은 구원이 매우 무가치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마치 구원 받은 것은 경복궁 입장권이고 그리고 그담에는 중요한 곳에 갈 때마다 표를 다시 끊어야 되는 것처럼 거기서는 그렇게 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구원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끔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강력한 성령의 쏟아부어주심을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며, 성령의 충만함이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성령이 임하신 것은 이렇게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이 사건은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는 성령 충만함과 은혜를 받은 사건과는 구속사의 의미를 완전히 달리합니다. 아주 더 간단하게 말하면, 성령강림사건이 없었으면 우리의 성령 충만도 없고 구원도 없었다라고 얘기하면 간단하게 정리가 됩니다. 교리에 명쾌하신 열린 교회 교인들 이해하시겠지요? 충분히 설득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강림 사건이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교회에 세례처럼 임하신 성령님의 경륜이 구약과 매우 다르기 때문에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냥 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성령님이 필요한 때에 필요한 사람에게 오셔서 당신이 하실 일을 하고 다시 떠나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의 일반적인 예였습니다. 떠날 때에는 어떤 사람이 매우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서 악함으로 떠나기도 하고 그것은 사울에게서 봤던 것 같은 것, 다윗이 범죄했을 때에 그런 위협을 느꼈을 것 같은 케이스입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할 때 그 사람에게 특별히 성령을 보내셔서 놀라운 지혜와 재능 판단력을 주셔서 그 일을 하게 하신 후 그가 특별히 죄를 범하지 않아도 일을 끝내신 다음에 하나님이 다시 성령을 거두어 가십니다. 이것이 구약시대에 성령님의 경륜이었다면 신약에서는 성령님이 각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십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신다고 할 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인간의 육체 혹은 마음의 존재와도 동질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장소적으로 계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충격들을 받는데 충격 받지 마시고 아주 요약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성령님을 떠나는 것은 불가하며 그분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계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본질이 내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령이 이 물 컵 속에도, 이 꽃 속에도 계신다’라는 식으로 설명하면 안 됩니다. 잘못하면 물활론이 됩니다. 따라서 ‘성령의 내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중생과 함께 당신의 자녀들을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 통로를 주신 것을 말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사귀는 영적인 교제의 통로, 그 자체를 성경은 ‘Spiritus’ 곧 ‘성령’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신자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사역을 토대로 하나님의 교회와 영적인 교통을 어떤 경우에도 끊지 않고 계속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런 특별한 영적인 교통의 통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것과 비교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교회를 하나님의 성령 속으로 풍덩 잠그시듯이 하나님과의 교통 속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각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짐으로써 그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있어서 하나님이 생각하는 바를 우리가 전달받고 하나님이 느끼는 바를 우리도 느끼고 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뜻들을 우리들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영적으로 영향을 받는 관계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의 내주’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교제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짜 오셔서 우리의 마음에 살아계신 것을 우리 온 마음으로 경험하며 인격 속에서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고백했습니다. 즉, 내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이 말은 즉, 성령님이 살아 계시다는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게 성경이 오락가락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실 영광을 그리스도도 받으시고 성령님도 좀 나누어서 받으시는 냥 그런 일을 위해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경배의 대상입니다. 여러분들이 가끔 예배드리다가 ‘예수님 우리 예배를 받아주세요’라고 기도하는데 그것은 확실하게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성부나 성자나 성령 중 한 위격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경배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그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예배를 드립니다. 이 기도도 잘못된 기도 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하나님 아버지를 이야기 할 때 그것은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하나는 신적인 본질로서의 아버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모두를 가리킵니다. 나머지 하나는 위격으로서의 아버지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요17:18) 말씀하실 때 여기서의 아버지는 성부를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기도 했을 때는 놀랍게도 성부 하나님만을 가리킵니다. 원래 성부 하나님 홀로 우리의 기도의 대상일 수가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당신 자신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그러나 성자로서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하실 때는 그리스도 자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그렇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를 ‘본질로서의 아버지’, ‘위격으로서의 아버지’로 나누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성령님이 오신 이유는 바로 성령님이 오심으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이었고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음으로써 당신 자신을 포함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구속하고 완성하시는 경륜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체험이 올바른 것인지를 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금석들이 몇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성령’입니다. 성령님은 내년에 장가를 가겠느냐 취직이 되겠냐와 같은 것들을 맞추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성령님에 대한 체험이 참된 것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오시는 일에 대해서 아주 심오한 이해가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미에 우리가 매이게 되는 것이 진실한 성령의 체험을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입니다. 또 하나의 시금석은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다시 오시는 일을 모든 의미를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놀라운 특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시금석이 성령체험의 진실성을 입증합니다.
더 강조해야 될 사실 하나는 그런 성령을 체험함으로써 성경이 지루하게 보이다가 놀랍게 함께 연결된 놀라운 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주인공을 모르고 영화를 몇 시간씩 들여다봐도 이게 어떻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영화도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게 처음부터 시작해서 끝나는 영화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영화 자체가 영화가 아닙니다. 그냥 기록일 뿐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그 다음에 주인공이 누구인지 딱 보고 그 사람을 따라가면서 영화를 보면 그 영화의 전개가 모두 이해되고 그 주인공과 직접 연관 되지 않은 것은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됩니다. 지나갈 때 길거리에 빨간 옷 입은 사람이 몇 사람이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지 그런 것은 크게 상관없습니다. 알면 더 좋지만 몰라도 원판을 이해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오신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것이고 우리에게는 이렇게 하나님을 친밀하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그 토대가 되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우리를 이런 식으로 까지 격려합니다. “죄가 들어온 것은 매우 나쁜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보게 되었다.” 고 말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게 회개를 하고 이후에 밀려오는 놀라운 기쁨, 천국의 향취,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 죄 사함의 놀라운 감각, 그리고 거룩함에 대한 달콤한 감각, 이런 모든 것들은 타락하기 전에 아담도 누려보지 못한 것이었다 라고까지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하나님의 이런 구원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탁월하게 지혜로우신 분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너무 서론이 길었습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 성령이 임하신 장면을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A. 홀연히 임하심
첫째는 ‘홀연히’ 임하셨습니다. ‘홀연히’ 라는 말은 근원도 알 수 없이 예상치도 않았던 때에 기대할 수 있었던 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뭔가가 일어나거나 사라지는 것을 가리켜서 홀연히 라고 이야기 합니다. 성령님이 그렇게 오셨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늘로부터’ 라는 말은 성령이 오신 그 근원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이 직접 이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 자신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보통 우리는 기도를 하니까 성령님이 오셨고,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하늘 문을 열고 성령님을 불러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때가 차매’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시게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이르자 성령님은 강림하셔서 모든 교회를 당신 속으로 세례를 주셨습니다. 자 그러면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 그리고 그 성령강림의 근원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성령강림 사건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 일을 행하실 시간에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모여서 합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이 ‘때가 차매’ 이루시고자 했던 위대한 일이 거기에서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후로도 모든 교회가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다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것을 교육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 성령이 오심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십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실제로 바람이 분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불 때 ‘후’하는 어마어마한 소리가 납니다. 우리가 그냥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면 무슨 소리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어마어마한 속도로 부는 바람입니다. 얘기 들어보니까 알프스 어디에서 관측된 이래로 가장 강한 바람이 1초에 240미터를 갔다고 합니다. 난 이해가 안 됩니다. 에어백이 터지는 속도가 1초에 350킬로미터 정도입니다. 에어백 못 터져보셨죠? 순식간에 터집니다. 눈 깜짝할 시간에 에어백이 팍 터집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속도로 그 바람이 지나갈 때 나는 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바람 같은 소리로 형상화 한 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이 세상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이런 형상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소리가 급하고 강했다고 하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 이루실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과 함께 그 구원 역사의 시급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온 집안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그런 소리가 가득하게 들려서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처음에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런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엄함에 대해서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기치 않았던 때에 우리들이 예기치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십니다. 동토와 같은 마음에 성령의 바람이 불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생각하지도 않았던 놀라운 역사가 성령을 체험함으로 신자들은 그 성령을 다시 충만하게 경험함으로써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언제 우리가 경험하게 될지 모릅니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교회에 임하실 때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실 때도 조짐이 보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한곳으로 모여지고 마음을 모두 쏟아 부으며 세상의 자랑과 욕망들을 끊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그분의 사랑을 입고자 하는 치열한 갈망이 생겨나고 그것은 때로는 피 끓는 기도를 동반하게 됩니다. 그렇다고해서 그 기도가 성령의 충만함을 가져왔다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 기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기도 조금 한다는 사람들이 ‘헤이’하고 손짓을 하면 성령이 그 기도 발에 이끌려서 딸려오는 것처럼, 혹은 내가 성령을 주노니 받아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사도들이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도시대의 이야기이고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마다 제일 먼저 가져야 될 태도는 ‘세게 기도하면 하나님도 꼼짝 못할 거야. 그리고 우리도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은 예수님의 팔을 꺾는거야. 결국은 예수님도 항복하고 말거야.’란 식으로 신앙을 자기화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성령’, 이런 소리만 들어도 ‘아 그 하나님’ 그리고 옷깃을 여미는 자기가 얼마나 그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그러면서도 그분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겸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떠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날을 교회를 다니면 새사람이 될까요? 산삼은 오래 묵을수록 명약이 되지만 무는 오래 묵으면 심지가 생겨서 못 먹습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은혜 안에 있으면서 믿음생활 오래하면 믿음의 연륜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냥 교회에 와서 오랜 세월이 흘러버리면 폐계(廢鷄) 같은 신자가 됩니다. 폐계가 너무 어려운 말인가요? 더 이상 알 못나서 쓸모없어진 닭입니다. 무지하게 쌉니다. 한 마리에 천원도 안갑니다. 먹을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시절에 시장에서 한 마리에 1500원 주고 사다 먹었는데 이것은 인간의 이빨로는 씹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로 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카터기로 잘라야만 될 수 있을 정도지 자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압력솥에 삶으면 된다고 하는데 그때는 압력솥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에 충만함을 입으십시오. 홀연히 임하시는 성령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도 우리 교회일수도 있고 다른 교인 일수도 있는데 어째든 특별히 우리교회에서 교회 오는 첫날 바로 그날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분이 여럿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을 까요? 성령님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믿어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확 가슴에 새겨 주신 것입니다. 들어요. 덜렁덜렁 건성으로 흘려버립니다. 그것은 그냥 사람의 피부위에 붓으로 물을 묻혀서 글씨를 쓴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깊이 체험하면 10년, 20년이 지나도 그 말씀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에 시뻘겋게 달군 인두로 확 지집니다. 어렸을 때 한번 지지면 노인이 되어도 그 흔적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 배를 열면 항상 배 가운데 밤톨 만하게 불로지진 흔적이 있습니다. 전 모르는데 어렸을 때 제가 경기를 하니까 할머니가 뜸쟁이를 불러다가 뜸을 떴답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엄청 화를 내면서 미친것들이라고 화를 내셨답니다. 요새도 목욕할 때 볼 때 마다 우리 할아버지 생각납니다. 그 할아버지만 내편이었구나, 불로 지지니까 안 사라집니다. 그래서 오늘 기도제목 드립니다. 홀연히 임하시는 성령을 만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B. 불로서 임하심
두 번째는 ‘불’로서 임하셨습니다. 놀랍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보여서’ 그랬습니다. ‘불’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불’은 심판을 상징하기도 하고 그리고 보호를 상징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 불은 죄와 불결을 태우고 인간을 쇄신하는 성령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불은 하나의 불이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경솔하게 손으로 그리기는 어려운데 어째든 대충 생각해보면 ‘하나의 불’이었습니다. 하나의 불이 혀처럼 갈라졌다고 했습니다. 그게 궁금합니다. 아래에서 불이 올라와서 만약에 혀처럼 갈라졌다면 각 사람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불길이 위로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내려와서 불꽃이 출렁거리며 올라가는 모습을 뒤집어서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불의 기운이 하늘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내려와서 불이 혀처럼 갈라졌습니다. 그리고는 올라갑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 불길을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불길이 막 갈라지는데 그것이 각 사람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혀’라고 하는 단어가 희랍어로 ‘글루사이’(γλῶσσαι)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랴손’()이라는 단어를 희랍어로 옮긴 것입니다. ‘라숀’이라는 단어는 혓바닥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텅(tongue)’입니다. 그래서 ‘모국어’라고 이야기 할 때는 ‘마더 텅(mother tongue)’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도 ‘랴손’이라는 말은 혓바닥인데 그게 언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랴손 이브리띠’입니다. 이게 그냥 우연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내린 불이 혀처럼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그들에게 성령 강림하셔서 성령이 그들안에 내주하심으로써 그 사람들을 이제 말하자면 이 혀를 통해서 그 복음을 전함으로서 이러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성령 강림사건은 딱 한번입니다. 이미 오신 성령님이 이후에 지역을 확장하시면서 어떤 사람들에게 다시 성령을 주시는데 두 번째 그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도 첫 번째같이 거의 유사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때그때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한 번에 내려오신 성령님이, 이미 내려오신 성령님이 당신 자신의 역사를 확장해가면서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예수 믿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의 뒤를 계승하며 예수님을 분신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불로서 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불이 있고 그 불이 갈라져 모든 지체 속에 위에 있었던 것은 결국은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교회가 한 번에 세례를 받은 것과 그리고 그 한 성령 안에서 모든 지체들이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지체들은 성령을 체험하고 그 성령이 내주하심 속에서 서로 다른 지체들이지만 그러나 그 모든 지체들이 하나의 성령 안에서 연합되어 있는 연합의 통일성과 개별의 단일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이렇게 성령이 임하신 사람들의 관심사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구속사역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수련회 때 들었던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 가지고 계신 경륜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무슨 목적으로 창조하셨고, 타락한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고, 구원 받은 인류가 완성할 하나님나라의 계획을 보며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야 되는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한 전망을 성령님이 우리에게 치열하게 증거 하셨습니다. 정말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뼛속까지 사무쳐서 자신이 죽든지 살든지 자기를 통해서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그 위대한 경륜이 이루어지기를 피를 토할 듯이 갈망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의 삶이고 예수가 미리 보여주신 삶의 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것을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삼으며 살아가야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결국 불로서 임한 성령님이 바로 우리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교회가 이렇게 입술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들이 이 성령을 경험하면 영혼들이 불쌍하게 느껴지고 이 세상에 가장 시급한 문제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모르는 것이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어찌하던지 자신의 모든 것을 허비해서라도 이 복음을 전해 저들을 구원하는 것이 저들의 인생의 운명을 바꿔놓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안에서 딱 정리시키며 자기의 길을 찾게 되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 인류를 지으신 목적 자기가 태어난 목적 인생을 살아야하는 이유 이런 것들이 한방으로 질서 있게 정돈되면서 잠시 살아 질 인생이지만 영원에 잇대어 살 수 있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C. 방언을 말함
마지막 세 번째, 방언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에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셔서 이제 마지막으로 바람 같은 소리로 가득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보이고 성령의 충만함을 드디어 이들이 받게 되었을 때 첫 번째 터져 나온 것이 방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방언을 어마어마하게 중요하게 여겨서 방언이 구원의 증거라고까지 강변을 합니다. 한 이삼십 년 전에는 어떤 일까지 있었느냐면 자기네 기도원에서는 강아지도 방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못 받으니까 방언을 교습하는 일까지 생겨났습니다. ‘랄라랄라 룰루랄라’를 정신이 몰입된 가운데 매우 빠르게 하면 방언이 터진다는 우스갯 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제가 보기에는 성령의 역사라기보다는 어떤 인간의 심리적인 것들이 그 안에 함께 섞여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미 고린도 전서 13장을 해석하면서 방언에 대해서 총정리를 상당히 긴 시간동안 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 후에 오신 분들이 꽤 많고 또 그 때에 들으셨다고 하더라도 고맙게도 늘 잊어버리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저의 존재의 가치를 이렇게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정리할 시간은 없지만 간략하게 결론만 내려드리면 오순절에 임했던 방언, 그리고 고린도전서에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방언, 심지어 오늘날 방언이라고 행해지는 것들까지,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다릅니다. 오늘날에 있는 방언은 말하자면 오순절에 임했거나 혹은 사도시대에 고린도 교회에 충만하게 임했던 그런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방언이라기보다는 다른 심리적인 것들이 많이 섞여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님은 방언을 못하니까 이렇게 학문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하시는데 저도 오래 전 방언을 했습니다. 지금도 기도하면서 시작하면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별로 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커다란 열매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걸음 더 나가서 어떤 사람들은 통역의 은사를 받았다고 이야기 하는데 대부분은 가짜입니다. 어떤 분이 통역의 은사를 받았다고 교수님에게 하도 그래서 학생하나 데려다가 주기도문을 희랍어로 빨리 외었답니다. 그랬더니 내년에 장가가서 아들을 낳게 될 거라고 하더랍니다. 내년에 가서 어떻게 아들을 낳습니까? 속도위반이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방언은 사도행전하고 다릅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학설은 어찌 하든지 방언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그것은 청취력의 기적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소리로 뭔가 말했는데 듣는 사람들 귀에 여러 가지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 당시에는 이미 코이네 희랍어가 로마제국 전체의 공용어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자기네 말을 하지 못해도 충분히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기에 이런 것들이 선교의 수단으로 쓰여졌다고 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또 다른 학설은 방언을 인정하는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아니다. 성경을 봐라 이것은 다른 언어로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청취력의 방언이 아니라 각기 다른 언어로 말을 했는데 많은 지역의 토착어를 하는 사람들이 와서 놀랍게도 자기네와 같은 그런 소수 언어를 하는 것을 여기서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은 두 번째가 훨씬 성경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성경에 보면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노라” 9절에는 아주 명백하게 우리는 바대인, 메대인과 엘람인과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부르기아와 등등등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인데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듣는구나.’ 이렇게 까지 이야기 했으니까 이것은 말하는 것의 방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의심할 수는 없다고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인지 좀 더 과격한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선교를 나갔는데 선교지의 언어들을 익힐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빠서 방언의 은사를 간절히 구했더니 단번에 터져서 지금까지 회화를 하며 산다고 하는데 그 진실성을 아주 심각하게 의심해 봐야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요점은 이렇게 놀랍게 기적적으로 습득하지도 않은 언어를 말하게 되었다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가를 주목해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관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그런데 여러분 1장부터 2장까지 쭉 성경을 읽어보면 그리고 그 이후에 교회의 역사가 전개되면서 터져 나오는 설교를 들어보면 그 ‘하나님의 큰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큰일 났다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일’입니다. 그럼 그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인간이 창조되었고 타락해서 희망 없이 망가져 있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시고 마침내 그 구속사역을 각 인류에게 적용하실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그 구원 사역을 지금 베풀고 계셔서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변화되어 새로운 사람이 되어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 일’입니다. 그러니까 요약해서 이야기하면 그것은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과 구원의 계획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창조된 세계의 완성의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리스도교(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 자기의 인생길을 자기 마음대로 걸어가는데 순간순간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을 손가락으로 불러서 내가 이런 것들이 필요하니 보급품을 주십시오. 그리고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서 눈을 뜨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세계가 무엇인지 그러니까 14살 2개월에 논바닥에 엎드려서 울었다는 그 이유, ‘난 누구인가, 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세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신은 존재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대답이 바로 ‘하나님의 큰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큰 일’의 중심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있습니다. 그리고 승천이 그 결과물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에 확 열립니다. 비유를 하자면 천정이 까만 천으로 완벽하게 쌓여있습니다. 바깥에는 찬란한 태양이 비치는데 안에는 암흑입니다. 도저히 어떻게 무엇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놀랍게 들것을 타고 올라가서 바깥에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큰 칼로 그 까만 텐트를 북 찢었습니다. 그러자 찬란한 빛이 그 어둠속에 확 쏟아진 것 같은 그러한 진리의 빛이 비칩니다. 그 한 번의 빛에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이 세상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은 살아계시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답을 단번에 얻고 그리고 인생의 갈 길이 쫙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세계관입니다. 인생관입니다. 그것을 확정하고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교회가 기도할 때 II (2017.11.02.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4)
결국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난 다음에 이런 놀라운 방언의 일이 일어났는데 방언의 방식에 대해 주목하지 말고 그 기적적인 방식의 방언을 통해 쏟아져 나왔던 내용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용은 모두 똑같은 내용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과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그것이 방언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다양한 언어로 한꺼번에 그것을 쏟아내게 하신 이유는 이 복음이 그야말로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하신 말씀처럼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아직 미치지도 아니한 이웃, 나아가서는 몇 명 살지 않는 저 에스키모인들, 그리고 문화와 모든 것 등이 다른 산간 오지에 사는 아프리카와 동남아 섬에 사는 원주민들, 인디안들, 그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이 행하신 이 위대한 구속사역이 전파되어 그들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참된 인생의 목적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눈을 떠야 됩니다.
교회와 우리의 관심사가 거기에 쏠리지 않고 쓸데없이 딴 곳에 힘을 쓰게 되니 힘과 힘들이 충돌하면서 교회가 싸우고 분열을 하며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들을 가지고 다투면서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교회를 파괴하는 미친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것을 깊이 기억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놀라운 사건을 방언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선교의 시급성과 이 땅 끝 구석구석까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어야할 그 부담을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우리들이 분신처럼 가져야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이런 선교에 대한 불붙는 열정이 사람들이 마음속에 생겨나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이 큰일에 관심을 갖고 여기에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신학적인 혼란과 핍박의 두려움 속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마지막 남긴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교회는 중요합니다. 공동체임이 드러났고 그들이 함께 모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구원의 새 역사인 성령강림사건의 첫 열매들이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홀연히 불로 임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증거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오늘 증거한 말씀처럼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고 그 성령님과 함께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기대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그들이 주께 돌아올 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 2:37-38)
녹취자 : 오희열
I. 본문해설
성령강림이 있고 난 후 제일 먼저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방언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방언은 하나님이 당시의 위대한 구속의 경륜을 온 인류에게 전파할 당신의 선교계획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드디어 설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전까지 사도들이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백성들을 가르치고 인도하기는 했지만 이런 설교가 터져 나온 적은 없었습니다. 비록 마태복음 10장에서 권능을 받아 병든 것과 약한 모든 것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지만, 그래서 실제로 그러한 영적인 역사를 일으켰지만 아직 그들은 설교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하기는 커녕 예수님의 말씀도 잘 이해를 못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강림사건은 설교자를 태어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구약에 대해 어려서부터 배웠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고 또 예수님이 그 오랜 동안 데리고 다니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말씀에 관한 지식이 있었고 많은 기적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쪼가리 쪼가리 돌아다닐 뿐 이것이 어떻게 엮여지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순간에도 그들은 “다윗의 왕국을 부흥시켜주시겠습니까?” 하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령 강림사건을 통해서 구약과 예수의 생애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큰 경륜의 물줄기를 보았고 그것은 신학이었습니다. 그리고 철학이었습니다.
구원 역사의 중심축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 그리고 성령이 큰 능력으로 그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가슴 속에 불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유대주의에 빠져서 갈 길을 모르고 있는지, 이방의 헛된 철학이 왜 우리의 인생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지 ,그리고 이성에 뛰어난 헬라의 사상과 종교들이 왜 그렇게 허망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령강림사건을 통해서 그들은 구약과 예수의 생애, 자기들의 시대, 앞으로 이루어질 미래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한 줄기 빛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마음은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순절 강림 때에 임하심으로 사람들에게 일어난 가장 현저한 변화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성령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말씀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II. 말씀의 능력이 나타남
A. 말씀을 듣게 함
제일 놀라운 변화는 몇 가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첫 번째로 그들이 설교를 하자 말씀을 듣게 하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이 설교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최초의 설교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설교를 듣던 사람들에게 벼락이 치는 것 같은 큰 충격을 줬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예수는 어떤 예수였습니까? 감히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천한 것이 신성모독을 감행하고 참람하게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혹세무민하여 헛된 도를 따르게 하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 이것이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예수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인인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하수인격인 모든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던 예수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라는 명칭,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우리가 지금 흔하게 사용하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주”는 “여호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었기 때문에 글씨로는 “여호와”라고 쓰고 읽기는 “주님”, “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의미에서 “주”라고 할 때는 “여호와”였습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그 예수를 하나님이 지극히 높여 여호와가 되게 하셨다.” 다시 말해 “너희들이 알고 있는 유일신 여호와가 계신데, 그 여호와 하나님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과 예수 사이에 어떤 간격도 없고 너희가 그렇게 하찮게 여기던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셨는데 승천하심으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시는 주가 되셨으니 그가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했는데 여러분은 물으실 것입니다. 원래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셨습니까?” 원래 그리스도이셨는데 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오셔서 어린 아이였을 때도 메시아였습니다. 세례를 받으심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주장이 있지만 잘못된 것입니다. 처음 오실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할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속 사역이 성취됐습니다. 메시아로써 하실 일을 모두 하셨습니다. 그분이 승천하심으로 이제 진정으로 구속 사역을 모두 완성하시고 하늘보좌 우편에서 성령님에 의해서 그 구속사역을 개인에게 적용시켜서 구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시고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승천을 통해서 이 일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메시지를 마지막 결론으로 제시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완고하기 짝이 없는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듣다”고 하는 것은 “들린 것”이 아니라 마음을 기울여서 그 의미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며 들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음 같은 소리의 들음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도 뭔가 바람이 돌아가는 소리, 부스럭거리는 소리, 옆 사람이 코를 훌쩍 거리는 소리, 이런 것이 들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듣는 것’은 마음을 기울여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 그 말의 도덕적 의미에 기꺼이 복종할 마음으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듣는” 역사는 유대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러분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도 유대인들의 마음이 강퍅해져서 듣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던 상황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예수님에게도 일어났으니 제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많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무엇인가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권세가 이 말씀을 증거하는 현장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이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던, 일평생 배나 타며 살던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 열한 사도들 중 탁월한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그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 때 저항할 수 없도록 진리에 압도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일단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속을 파고들어오면서 그 말씀이 들리게 되면 이 시간에 대한 생각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마음을 기울여 들었습니다.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설교했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이들에게는 원고도 없고 성경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성경은 요즘 이런 성경이 아니라 두루마리였고 성경 전권이 한 구루마였습니다. 당연히 성경이 없습니다. 그냥 섰습니다. 그리고 설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청산유수와 같은 그들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성령강림사건은 베드로와 사도들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들을만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으로 가슴이 불타게 만들어 줬습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사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고자하는 하나님의 경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설교의 명료성, 그리고 불타는 확신, 근원을 알 수 없이 압도하는 비상한 힘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맨 처음 성령강림사건이 있을 때 바로 그 다락방에서 불을 체험하고 혼란스러웠던 구약과 예수님의 생애를, 그리고 미래 세계의 완성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이 마음에 불붙었던 것처럼 똑같이 이들에게도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결국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없으신 분이지만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 그리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그리고 하늘에 오르신 것이 이 구속의 사역을 적용하고 이 세계를 다스리기 위해서이고 바로 그 예수가 다시 오신다는 것을 피 끓는 열정으로 증거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거기에 모인 모든 예루살렘과 유대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늘 듣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듣지 못한 새로운 말씀이었습니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예전에도 주워들었지만 그때에는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충만해진 제자들이 이 복음의 진수를 외쳤을 때 그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똑같이 한 순간에 눈이 떠지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씨가 뿌려졌고 자랐고 그것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온 인류를 구하게 되는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의 임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혜사, 곧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보내실 성령”, “내 이름으로 보내신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었더라면 성령이 이 세상에 오실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충분한 신앙의 지식과 생활의 교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성령님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셔서 역사하실 때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생각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포도를 먹는다고 생각해봅시다. 제가 좋아하는 포도 중에 하는 맨 끝물에 나오는 머루포도입니다. 진짜 머루를 보기는 이제 힘들어졌지만 머루포도에는 그 머루의 맛이 남아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달기만해서 맛이 없다고도 하지만 그 포도의 단맛은 그냥 설탕의 단맛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 포도를 깨끗이 씻으려면 포도알을 다 따서 닦아야 합니다. 물로 여러 번 씻고 혹은 베이킹파우더를 넣고 깨끗이 닦고 물기를 빠지게 한 다음에 냉장고에 넣어서 차갑게 해서 먹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를 입에 넣고 사탕을 빨듯이 굴려보십시오. 그러면 무슨 맛이 있겠습니까? 크고 좋은 포도를 입에 넣고 이빨로 탁 깨뜨려서 포도 껍질이 찢어지면서 맑은 과육이 쪼개져야 합니다. 씨가 세알이 나오면 혀로 기술적으로 뱉어냅니다. 그리고 앞 이빨로 포도 껍질을 빨아내고 그 껍질을 꺼냅니다. 그 포도의 과즙을 음미하는 것입니다. 그냥 포도알을 넣고 입 안에서 핥는 사람이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맛을 터뜨려 먹은 사람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학생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갔다가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저녁 8시에 예배를 시작해서 9시까지 설교를 하고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인도하는 사람도 없이 “다 같이 기도합시다.” 했는데 새벽 1시에 기도가 끝났습니다. 사회자도 밀치고 성령님께서 홀로 기도회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끊어지지 않는 기도가 네 시간 이상 이어져서 새벽 1시 20분쯤 되었을 때 같이 가신 장로님이, “전도사님, 저러다가 애들이 탈진해서 쓰러질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만합시다.” 해서 1시 반, 두 시 가까이 되어서 집회를 마쳤습니다. 그때 제가 주님을 깊이 체험했는데 그 비밀스러운 일을 여기서 말하고 싶지는 않고 평생 간직하며 살려고 합니다. 그때 제가 했던 생각이 “내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신학을 배웠는데 그 사람들이 책에서 그리고 싶었던 하나님이 이런 분이었구나!”였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칼빈을 비롯한 위대한 신학자들이 기록했던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흑백 스틸사진이고 내가 만난 하나님은 총천연색 동영상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묘사가 최고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분들이 그려낸 묘사는 흑백스틸사진이었고 그때 내가 만난 하나님은 3D의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VR 한 번 해보셨습니까? 저는 길거리를 지나다가 하도 궁금해서 차를 잠깐 세워두고 들어가서, “나도 한 번 봅시다.”하고 써 봤습니다. 애들이 푹 빠질 것 같았습니다. 완전히 리얼합니다. 그런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런 찬송이 있는 것입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여러분은 이런 찬송을 들으실 때 둘 중 하나를 해야 합니다. 소외감을 느끼거나 공감을 하거나 해야 합니다. 소외감을 느낀다면 하나님 앞에 다시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공감하신다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말해야 합니다. 아멘이십니까? 불리할 때만 아멘을 하지 않으십니다. 아멘?
이처럼 그 말씀이 놀랍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큰 능력으로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순간에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미래의 조국 교회의 모습입니다. 20년 후, 30년 후에 이 교회가 어떻게 될까? 다 필요 없고 세상에 있는 것들 중 딱 한 가지만을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구하라고 한다면 저는 이것 하나만을 하나님 앞에 간청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 복음의 진리가 뼛속까지 사무친 사람을 성도로 주십시오.” 보십시오. 오늘 이 베드로가, 그렇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도망쳤던 비겁쟁이가 여기서는 죽을 각오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3천 명이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 번 그게 현실로 이루어졌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물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온전히 전파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삶의 모본, 그리고 깨끗한 윤리적 생활, 이런 것이 꼭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이 신앙의 도리가 참되고 거룩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으로 충만해진 교회가 말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해야할 필요성을 무효로 만들지는 못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이렇게 누군가가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경륜을 성령에 사무쳐서 피를 토하듯이 토해 놓을 때 그때 그 복음을 듣고 변화를 받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놀라운 능력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완고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과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말씀을 듣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할 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편의 설교를 듣고 인생이 바뀌었는데 무엇이 이보다 더 큰 변화를 그 사람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무지와 어두움 속에 살던 사람들이 빛과 광명으로 돌아오고 끊임없이 육신의 열매를 맺으면 죄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 거룩한 기업으로 돌아왔습니다. 무엇이 사람들의 인생을 이렇게 바꿔놓을 수 있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교회가 뭐라고 떠들어도 듣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길이 없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왜 우리의 말 속에는 능력이 사라졌고, 이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지금 현대인들 못지않게 강퍅했고 최소한 현대에는 종교 때문에 사람을 때려죽이는 일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그렇게 선하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로 완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가, 그리고 교역자들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 사역이, 성도들이 전하는 복음의 증거가, 그리고 교사들이, 구역장들이, 순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그 행위 속에 비범한 능력이 나타나서 완악한 죄인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존재의 이유라는 것을 믿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마음에 찔리게 함
두 번째 나타난 것은 마음에 찔리게 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완고하기 그지없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강퍅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희랍어로 “스클레로스”(σκληρός)라는 단어인데 여기에서 영어의 “skeleton”이 나옵니다. 피골이 상접하다는 뜻인데 지금은 시장에 나가보면 북어도 다양한 종류가 나오고 심지어 요즘에는 북어를 사다가 믹서에 넣고 갈아 버리면 보푸라기처럼 되고 그것을 무쳐먹으면 그렇게 식감이 좋고 맛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전에 저희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해도 그렇게 북어를 가공해서 파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북어를 사다가 저녁때에 먹으려면 아침쯤에 베 보자기를 물에 적셨다고 꼭 짜서 그 북어에 감아두고 부뚜막에 놓습니다. 점심때까지 두면 습기가 슬슬 스며듭니다. 그러면 그것을 그대로 싼 채로 두드립니다. 너무 빨리 가져다가 두드려도 북어가 부서지고 너무 오래 두면 질퍽해집니다. 그렇게 두드리면 보들보들해집니다. 그것을 펼쳐서 가운데 뼈를 잘 분해되니까 빼 내고 껍질을 벗겨낸 후 하나씩 하나씩 손으로 찢었습니다. 그 북어를 맨 처음에 사가지고 와서 방방이로 내리치면 우지끈 하고 부러져버립니다. 이빨을 넣어도 안 들어가고 심지어 칼로 긁어도 찢어지지 않습니다. 딱딱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라면서 그 북어로 애들이 맞는 광경도 많이 봤습니다. 되게 아픕니다. 그렇게 딱딱한 상태를 “강퍅하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라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에게 불리하면 귀를 막은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깊은 마음의 찔림이 나타났습니다. “찔렀다”는 말은 희랍어로 “카타니소”(κατανύσσω)라는 단어인데 “관통한다”는 의미입니다. 뻥 뚫어서 관통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보면 “그 중에 한 군인이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찌르니 곧 물과 피가 나오더라” 창으로 예수님을 꽉 찔렀는데 창이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가서 장기와 허파를 가로질러서 왼쪽에 있는 심장을 관통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물과 피가 나오더라” 했을 때 쏟아진 다량의 물과 피가 그렇게 심장을 터뜨려서 창을 찌를 때는 날카로운 끝부터 들어가게 되어서 푹 찔러 들어가지만 그 창을 뺄 때는 장기고 뭐고 다 너덜너덜하게 찢으면서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창으로 넓혀진 곳을 타고 터진 심장으로부터 피가 물과 함께 쏟아져 내린 것입니다. 그런 곳에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찔려”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 자체가 이 사람들이 받았던 찔림이 그냥 켕기고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말씀의 창으로 관통당하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찔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깊은 마음의 찔림의 정체는 극단적인 양심의 가책을 보여주는 것인데 자신이 매우 잘못되게 살아왔고 자신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것에 대한 극단적인 가책인 것입니다. 그런 강한 가책이 오늘 관통하는 것 같은 그런 찔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양심의 극단적인 가책을 가져온 것입니다. 오늘 이들이 복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기가 막힌, 절체절명의 자신의 심령이 관통하는 것 같은 아픔을 못 느끼면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원래 회개하지 않고 살던 이 사람들이 얼마나 성령을 떠나 있었던 사람들인지,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 악하게 살았던 사람들인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자식들이 저 만큼만 살아주면 부모가 절을 할 정도로 올바르고 곧게 자라서 대학생까지 됩니다. 심지어 가정방문을 해 보면 그 엄마가 하는 얘기가, “나는 이 아이 때문에 속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친구들도 그 아이 때문에 상처받은 적이 없습니다. 교회 선생님도 극구 칭찬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런데 전도사님, 단점이 있다면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무슨 죄가 그렇게 많겠습니까? 그런데 가슴을 찢으면서 회개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회심집회 때 보면 3학년, 4학년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면서 회개를 합니다. 그 아이들이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겠습니까? 여러분이 웃으면서 짓는 죄를 그 아이들은 가슴을 찢으면서 회개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어린이들이 그런가 하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찔림을 받은 사람들만 그렇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을 얼마나 선하고 순수하게 살도록 창조하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수많은 가책이 쌓여 있습니다. 까고 까고 또 까고 아무리 까도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거짓과 위선, 그리고 자기보호 방어의 기재로 에워싸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평생을 살면서도 자신의 마음과 만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마음과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역사하시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양파껍질 같은 무한한 껍질을 깨고 심령 깊은 곳에 파고 들어가 결국은 그를 관통하며 찔러 가슴을 찢으며 회개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 필요한 것은 많은 재산, 좋은 조직, 시스템, 지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그것일 뿐이지 그 자체가 생명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은 생명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마음을 찌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예배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며 자신이 살며 지었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다면 천막에서도 예배드릴 수 있고 헛간에서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주님이 가장 오실만한 아름다운 천국의 장막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한 번 깊이 찔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가 이런 말씀의 능력에 가득 차도록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 깨어지게 함
마지막으로, 깨어지게 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자, 놀라운 호칭이 생겨났습니다. “형제들아” 이 사람들이 원래는 예수 따르던 무리들을 이단자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찔려 하나님이 이 세계를 향해 가지고 계신 위대한 경륜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죽으심, 부활, 승천하심의 의미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 일을 먼저 안 사람들이 자신들의 형제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지극한 존중심으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찌할꼬”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깨어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적적으로 만난 사도 바울이 최초로 한 질문이, “주여, 뉘시니이까?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였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2장 10절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만난 체험을 반복합니다.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군가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재개발이 필요한 동네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은 그래도 낫지만 옛날에 철거민들이 많이 나온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집을 철거당한 경험이 있었는데 진짜 게딱지만한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나라에서 어느 어느 지역이 개발이 되면서 이사를 가라고 해서 가보면 넓은 밭에다가 하얀 횟가루로 땅에 그려놓고 그 사람들에게 알아서 지으라고 합니다. 건축허가고 뭐고 없이 그냥 벽돌 쌓거나 아니면 벙거지처럼 씌어놓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10년 지나고 나면 재개발을 합니다. 재개발을 하려면 첫 번째 조건이 무엇입니까? 모든 주민을 내보내놓고 그 다음에 깨끗이 집을 허물어버립니다. 허물어버리지 않고는 다시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소명하실 때 그에게 주신 소명이 “너는 파괴하고 허물고 그리고 다시 세우며”라고 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미 있는 것을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훌륭한 신앙의 집을 짓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자기 인생관과 자기 사상을 가지고 성경을 펼쳐서 자기를 지지해 주는 구절을 찾으려는 사람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내가 가졌던 많은 사상은 모두 쓰레기요 거지같은 것들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잘못 쌓아올려진 이 모든 것들을 당신의 복음의 말씀으로 허물어 주십시오!” 그리고 진짜 성령의 역사로 허물어질 때 이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까지 그 집에서 살았고 그 틀에서 생각했고 그 구조 속에서 살면서 그 구조 속에서 인생관을 형성했었는데 다 부서져버린 것입니다. 이제 내가 어떻게 할꼬?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때 하나님이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믿어야 할지 차곡차곡 쌓아올려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특히 하나님의 말씀의 뼈대인 교리를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두 번의 시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어린 아이일 때입니다. 두 살, 세 살, 네 살, 이런 때입니다.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이 되면 이미 세속화되어버립니다. 우리 손녀를 보니까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 만나고 난 후 회심했을 때입니다. 이때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때입니다. 얼굴의 늙음과 젊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방금 예수를 믿고 따끈따끈하게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마치 아기가 태어나면 눈도 못 뜨는데 고개를 막 흔들면서 엄마 품을 파고들어서 젖꼭지를 찾아서 딱 물고 그것을 놓지 않고 힘차게 빠는 모습과 같습니다. 똑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섭섭하실 것입니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막 회심을 해서 따끈따끈하지도 않고, 그래서 위로의 말씀을 드리자면 세 번째 기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고 있을 때 입니다. 참 애매하실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은혜 안에 있을 때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막 배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은 도서관을 드나드는 사람입니다. 도서관도 가지 않고 서점도 별로 안 갑니다. 한 5년 전까지만 해도 조그만 서점 매출이 열린 공간 매출보다 항상 많았습니다. 지금은 먹기만을 탐합니다. 열린 공간 매출이 수직상승합니다. 서점은 내려갑니다. 그래서 이제 내년의 목표 중의 하나는 서점의 부흥입니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열린 공간이나 서점을 한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 어린 아이들이 그 말씀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그렇게 책을 읽고 싶어 하고 성경 읽고 싶어 하고 배우고 싶어 하고 사모합니다.
깨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세워지고 싶은 것입니다. 깨어진 것이 훌륭하기는 하지만 깨어진 상태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워지는 것이 있어야 그것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살던 집은 가짜 집이었고 거지같았고 버러지가 득실거리고 비가 오면 비가 새고 냄새가 나고 바람이 불면 계속 바람이 들어와서 추워서 살 수가 없는 집이었습니다. 허물어버려야 합니다. 단 더 좋은 집을 짓는다는 조건하에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허물어버리고 나면 벌판에 홀로 앉아 있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미치도록 완고하게 하나님 앞에 버티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새집을 받을 보증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 내가 다 내려놓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 사상을 확 쓸어버리고, “주여, 이제 나는 벌판에 홀로 있나이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지어주시지 않으면 갈 곳이 없습니다. 아멘.”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막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주일 설교를 듣고 나니까 벽체가 세워집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나니까 구들이 놓입니다. 구역공부를 하고 나니까 정문이 세워집니다. 그리고 신구약개관학교를 듣고 나니까 지붕이 얹어집니다. 교리반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고 나니까 굴뚝이 생깁니다. 기도회에 가서 은혜를 받고 나니까 구들장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자기가 살던 집이 한 번도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쾌적하고 아름답습니다. 밤에 자면서 한 번씩 꼬집어봅니다. “이게 생신가?” 그게 바로 깨어진 사람들이 받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복된 회심의 역사는 회개로 깨어지고 믿음으로 세워지게 합니다. 다시 한 번, 복된 회심의 역사는 회개로 깨어지고 믿음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깨어짐은 이중의 깨어짐인데 첫째는 자기 의에 대한 깨어짐입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다. 내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설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혹은 반대로 “설 만한 사람이 되든지 말든지 있는 모습 이대로 받으셔야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기 의’입니다. 이것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정말 의지할 수 없는 존재이구나.” 하면서 예수를 의존하게 되는 것이 이 깨어진 마음입니다. 두 번째는 나 자신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자기 사랑에 대해서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가르침에도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었고 심지어 이방 철학에도 절대자에 대한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회개의 눈물이 없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품을 파고들어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그 분의 품에서 울고 그분이 눈물을 씻겨주시고 우리에게 새 옷을 입혀주시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는 이런 인격적인 경험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살아온 잘못된 질서에 대해 깊이 깨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Ⅱ(2017.11.12._주일오전 5)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 앞에 예배의 감격이 없습니까? 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오래 교회를 다녀도 부패한 옛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죄악에 발을 담근 채 세상을 돌아가지도 못하고 교회로 달려오지도 못하는 그런 바보 같은 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죄를 꾸짖고 죄인을 중생하게 하시는 이러한 놀라운 깨어짐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이러한 놀라운 능력이 깃드는 것은 교회의 최고의 명예입니다. 그런 영광이, 회심의 영광이, 이런 깨어짐의 영광이 교회에 있을 때 그 교회는 작아도 초라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어서 힘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굴복시키고 교회 안에 있지만 사실상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들과 같은 사람들, 은혜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보다 교회에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모든 사람이 한 번 예수를 믿고 똑바로 살다가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흠도 티도 없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넘어지고 미끄러지기 때문에 목양이 필요하고 누군가 지체들이 그들을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끝까지 믿지 않고 완고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국에 교회를 떠납니다. 심지어는 이교에 정착하기도 합니다. 가슴 아프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능력 있게 선포되면 한 쪽에서는 가슴 아픈 그런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이 또 그렇게 목양 받는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서 용사처럼 살고 완악한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때에 깨어지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여전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교회의 영광을 우리가 사모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각자 한 사람이 오늘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몰랐더라면 지금 어디쯤 살고 있을까? 어디서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오. 복음을 누군가가 이렇게 능력 있게 전해주었더라면 여러분보다 훌륭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을 사람들이 죄악구렁텅이 속에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으로 이들을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온 교인이 이런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져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그날 한 번의 설교로 구원받은 자들의 수가 삼천 명이나 더 했습니다.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되었고 성령의 사람으로 충만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령강림 사건으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교회다운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직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가 이렇게 쇄신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렇게 세워진 교회의 지체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성령의 충만함으로 모든 시대의 교회에 이 일을 반복하신 것처럼 오늘도 이미 오신 성령님이 우리를 충만하게 하심으로 다시 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복음의 빛으로 돌아오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새로운 삶의 길
“…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 2:37-4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복음을 듣던 무리들이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성령 강림과 함께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큰일이란 다른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구원하고 완성하시는 경륜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여러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각각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네 고향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일에 관한 지식이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복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구원과 새로운 삶의 길
A. 죄를 회개하라
성령 강림 사건과 함께 제일 먼저 변화가 일어난 것은 바로 하나님의 교회가 말씀에 대해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강력한 설교가 하나님의 큰일에 관해서 행해졌습니다. 이때에 말씀을 듣던 무리들은 마음에 찔려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교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과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제일 먼저 이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라”고 말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희랍어로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메타’와 ‘노에오’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생각하다. 혹은 후에 생각하다.’ 즉,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그리스 철학에서 이 단어에는 무슨 회개 같은 의미가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지성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변화는 체관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즉, 사물과 공간에 매여 있는 인간의 지성이 한 번에 이것을 뛰어넘어서 천상의 세계에 실제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그 위로부터 아래로 모든 사물들을 해석해 내려오게 됩니다. 그때에 사물 하나하나의 의미가 무엇이고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잘 모르던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체관의 경험을 통해서 그래서 영원한 실제가 사물을 향해 갖는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혜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체관의 대상은 당연히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회개의 대상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인격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연히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에 대한 경험은 생각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것이 바로 ‘메타노에오’입니다.
어떤 생각의 변화일까요? 즉, 자신의 근원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행복을 최고의 선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러한 삶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이 세상에 지으신 목적과 상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회개함으로써 자신이 이제껏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근원이 없는 삶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결국 참 생명인 그분과의 관계를 떠나서 잘못된 삶을 살았던 모든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마땅히 인간에게 지정해 주신 법을 어긴 것이나 혹은 그 법을 알면서도 그 법을 성취하기에 무능한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이것에 대한 첫 번째 조처는 회개함으로써 거기에서 돌이켜 서는 것입니다. 단순히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 앞에서 그 죄에 대해 회개하고 그 날을 살았던 날들을 후회할 뿐만 아니라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킴으로써 회개는 사랑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결국은 회개는 바로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바로 자신이 온 우주의 생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던 생각을 바꾸어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고 하나님이 온 우주의 휘지 않는 법이시며 움직이지 않는 원칙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지극히 인격적이어서 오늘도 당신이 하신 큰일을 이 많은 세계에 선포해 죄인들을 불러 모아 당신 앞에 굴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교회에 이러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고 그리고 각 사람에게 이 복음에 사무치는 마음이 되게 하셔서 그래서 전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바로 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2000년 전에는 이 메시지가 사도들로부터 하나님의 큰일을 듣고 있는 불신자를 향해 외쳐진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세상은 바로 이러한 회개의 웅장한 요청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단체와 구별되는 특별한 점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아니어도 도덕적인 곳은 다른 곳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양심의 빛을 따라 살아가는 더 많은 사람들이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들을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책망하고 죄인들을 거듭나게 하는 놀라운 역사는 순수한 복음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실현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영광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큰일을 체험된 복음으로 외칠 때 사람들이 그 복음을 듣고 실제로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바로 그 교회가 하나님의 집인 것을 알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깊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이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이 세상에 보냄 받은 사람임을 자각하며 사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통용되던 가치관이 교회에 와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만나고 진리의 빛을 받음으로써 사실은 또 다른 가치관이 교회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인간의 본문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여전히 죄를 회개해야 할 필요는 늘어나고 있고 교회가 이 복음을 선명하게 능력 있게 외쳐야 할 필요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때의 불신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여전히 적용되는 메시지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최초의 회개와 함께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생명들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번성하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 말씀의 은혜를 받는 것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최초의 분여 받은 그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라는 메시지는 당시 불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불신자들에게도 필요한 일이며 또한 당시의 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신자들인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18세기 영국과 뉴잉글랜드를 움직였던 영적인 거인 중 한 사람이 조지 윗필드였습니다. 그는 술집의 웨이터였으나 은혜를 받고 아주 열렬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상한 설교자들이 많았던 시대에 순수한 복음의 열정으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던 많지 않은 설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전설적인 설교자였지만 그가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는 것 같은 때에는 항상 자신이 최초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던 교회를 찾아가 회심했던 그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복된 순간을 다시 생각하며 자기가 누구인지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보니 눈이 떠졌습니다. ‘메타노에오’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냥 살아온 인생길은 하나님께 반항한 길이었고, 자기를 사랑하며 살아온 모든 길은 사실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 앞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구원과 함께 주어진 새로운 삶의 길에서 매일매일 죄를 회개하며 새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죄 사함을 받으라
두 번째는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의 확신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실 수 있는 최고의 은총은 죄의 용서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죄의 용서가 단지 그냥 죄 사함 뿐이라면 그것은 겨우 복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회개를 통한 죄 사함의 은총에 자신을 언약으로 묶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의 증표로서 주시는 선물이 성령이십니다.
가끔 교인들 가운데 급하게 전화를 해서 예수 안 믿던 부모님이 이제 막 예수를 믿겠다고 말씀하시고 죽어 가시는데 빨리 오셔서 세례를 주시면 안되겠냐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로마 카톨릭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 받은 자기 자신을 언약 안에서 주님께 묶는 외적인 표지입니다. 세례가 성령을 받는 조건도 아니고 또 세례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는 거듭난 회심자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 성령님은 그냥 잠깐 왔다가 가시는 분이 아니라 영원히 그 안에 오셔서 내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오셔서 예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불신자로 살아갈 때에는 없었던 그 무엇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떠났던 하나님의 생명,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버렸던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돌아가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참 생명과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 생명과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얻게 합니다. “너희가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패역’이라고 하는 말은 ‘도덕적으로 잘못 굽어져서 완고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로 그런 곳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안에 있고 그의 영혼 안에 무언가 다른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굽어진 그 세상에서 자신도 굽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 수밖에 없는 고집스러운 삶이고 그것은 바로 잘못된 사상과 그리고 사고 속에 굳게 묶여 있는 완고한 생활입니다. 구원은 바로 그 세상에서 우리를 구출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자,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자녀가, 여러분들의 부모가, 그리고 여러분들의 가족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성에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지진이 일어나고, 유황과 불비가 떨어지고, 온 성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의 가족을 향해 여러분들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다 버려라, 그리고 너희는 거기서 속히 도망치라, 뛰어 나오라, 아무것도 미련을 갖지 말고 거기에서 빨리 도망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신자들을 건져내실 때에 바라보는 이 세상의 상태입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서 구출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인생과 적당하게 섞여서 살면 무엇인가 개선이 일어나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에 파송 받은 직분을 말합니다. 그러나 파송은 모두 거기로부터 구출 받았던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동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세상이 얼마나 패역한 세상인지, 완고한 세상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그 세상이 기본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가치와 모든 사상의 시스템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한 사람들, 그리고 거기서부터 뿌리쳐 나온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이 다시 이 세상으로 파송을 받은 것입니다. 그 패역한 세상을 하나님의 성령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큰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외침으로 이 세상을 고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죄 사함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이 죄 사함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하시고, 그 성령 안에서 예전에 없었던 삶의 자원을 누리게 하십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지상에 있는 자원으로만 사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그 하늘로부터 충만한 자원을 공급받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그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 자녀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한 인간으로서 참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중의 적용을 줍니다. 첫 번째는 우리 안에 혹은 우리 밖의 있는 불신자를 향해서입니다. 그들에게 제일 큰 문제는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들이 이제껏 살았던 모든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고 다시 하나님의 참 생명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그 성령을 힘입어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또 하나의 적용은 우리 신자들을 향합니다. 우리가 맨 처음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고 첫 번째 죄의 용서를 경험하였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용서는 댐이 터지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물밀 듯 우리에게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때에 단 한번만 이런 죄 사함을 받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죄 사함은 오직 한번이지만 그리스도인은 끊임없는 죄의 용서의 경험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자신의 작은 죄들을 용서받는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위대한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 마음 안에서 먼저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었지만 그것은 실존적으로 오늘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죽을 때에 우리 안에서 다시 그리스도 예수께서 살아나시고 성령의 생명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종종 경험하지 않습니까? 어느 날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정말 눈을 떴을 때 내 앞에 직면하는 것이 어제의 그 세상이라는 사실에 진저리가 쳐집니다.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용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이 시련 때문이듯 혹은 자신 안에 있는 죄 때문이든 상관없습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우리는 그런 상황을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을 모읍니다. 그리고 하나님 내가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살아서 죽은 자처럼 될 봐에야 차라리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다시 사는 자가 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묵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은 언제나 골고다 언덕입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거기서 바로 그렇게 당신이 하나님의 쏟아지는 모든 하나님의 분노를 감당했던 이유를 터득하게 됩니다. 바로 살아있는 당신이 죽으신 것은 죽어있는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생명이신 그 분이 죽음에 종속된 것은 죽음에 매여 있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어지럽게 붙어있던 욕심과 헛된 탐욕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하나님의 큰일에 우리의 마음이 묶이게 됩니다. 파도에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던 작은 배가 부두에 밧줄을 던져 단단히 묶은 후 정박을 합니다. 이제 저 바다에서 어떤 큰 풍랑이 불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의 큰일에 묶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게 됩니까? 죄 지었으나 다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 넘어졌으나 다시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 쓰러졌으나 다시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신자는 매일매일 이미 죄 사함을 받았으나 또 다시 그 죄 사함을 새롭게 경험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과 함께 주어진 새로운 삶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이렇게 불신자들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도 끊임없는 죄 사함의 은총을 경험하며 생명으로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교회의 지체로 살라
마지막 세 번째는 교회의 지체로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말입니다. 자,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맨 처음 하나님의 큰 일이 선포되고 마음이 찔렸을 때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큰일에 대한 소식이 죄인이 그 각 사람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비로소 이런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이 자신에게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가장 원수처럼 미운 것은 바로 거짓이었습니다. 진리가 아닌 거짓 때문에 자신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습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져 메마른 땅을 헤매이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빛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하고 그 빛 안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가기를 힘쓴 말씀에 대한 사모함으로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이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을 받아보고 나니까 비로소 그 사랑이 자기 한 사람을 향한 베타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모든 인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래서 자기를 향한 그 놀라운 사랑이 모든 지체를 향함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형제들을 발견하고 형제들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생활하며 떡을 떼었습니다. 이것은 한 형제 혹은 한 가족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강력한 회심의 능력을 가진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로부터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큰일을 듣는 많은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함께 말씀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교제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자기의 것처럼 나누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주기도문 속에서 기대하신 공동체를 보여줍니다.
신자의 행복한 삶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신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공식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이 선포됨으로써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올바르게 할 희망을 갖게 하였습니다. 살아온 모든 삶의 불행이 하나님과 올바르지 않은 관계 때문이었음을 알고 회개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들의 죄였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큰일에 대한 인식은 사람과의 관계를 바꾸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깊이 사랑하며 서로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완전한 행복을 미리 맛보게 되었고, 그리고 교회는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주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를 회개했고 하나님의 성령을 선물로 받고 죄 사함의 감격 속에 우리들이 들어왔습니다. 이제 무엇일까요? 이제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까요? 이제 외톨이로 믿는 종교에 대해서 성경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얻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은 한 교회의 지체로 삼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인류를 구원하심으로써 이루고자 하셨던 그러한 완전한 사회입니다. 그 사회가 이미 성령과 함께 임하여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었고 또 한편으로는 아직 죄의 요소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아직 옛 사회와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 받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합니다.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다시 교회의 지체로 살아갑니다. 고집스러운 이기심을 가진 인간의 본성이 남아있는 한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로 살아가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기쁜 일만은 아닙니다. 어렵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마다 이런 새로운 하나님의 사회인으로서의 삶이 우리의 자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지체들을 참고 품고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 때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언젠가 하나님의 큰일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살아온 자신의 모든 삶이 어긋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눈물로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이제 주님을 만났습니다. 생각이 바뀌어 이제는 하나님의 천상, 실제로부터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갈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도 모두 폭풍 속에 부러질 날개로 피 흘리며 파고들었던 그 품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서로 그 진리를 사모하며, 서로 선을 경유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큰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회상하며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아, 우리를 이 불완전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교회에서나마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한 지체로 그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신 그 모든 은총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모두 찢어 우리에게 주시기를 마치 자신의 피를 떠 우리에게 포도주로 먹이시고, 자신의 살점을 찢어 우리에게 떡으로 먹여 주시듯이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여 부르신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혜요,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큰일을 생각하며 잠시 들풀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인생이 어떻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잇대어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 생각을 서로 나누고 격려하고, 넘어진 자들을 일으켜주고, 내가 쓰러졌을 때 그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일어서 있는 나는 지금 쓰러지고 있는 사람들을 붙들어 줍니다. 서로의 모든 아픔들을 자신의 것처럼 나누며 모든 사람들이 진리의 빛 안에서 살도록, 사랑 안에서 교제하도록 함께 소유를 나누며 떡을 떼도록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구원과 함께 제시된 새로운 생명의 길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Ⅱ (20171126_주일오전 6)
III. 적용과 결론
성령의 역사로 구원받은 자의 수가 단번에 삼천이나 더해졌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불타는 증거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이 어리디 어린 교회를 아주 전투적인 교회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쇄신되고 그 성령과 말씀으로서 강력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교회가 기도할 때 이런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교회가 어두운 이 시대에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어서 세상과 사람을 바꾸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되도록 여러분들이 함께 기도하며 새로운 삶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행 3:1-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성령의 놀라운 능력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도들은 성도들과 함께 유대인의 기도 시간에 맞추어 성전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침과 낮 그리고 저녁 시간에 시간을 정해 놓고 성전에서 기도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 성전을 올라가는 길에 미문에서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전 미문에 있는 한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이었습니다.
II.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오늘 성경에 보면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었다고 묘사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아마도 후천전인 이유로 어떤 질병에 걸려서 못 걷게 된 사람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동하거나 활동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같이 발달한 시대에도 이런 사람에게 취업의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데 2000년 전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그래도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매일 아침마다 떠메어 성전 미문 앞에 갖다가 두면 거기서 동냥을 하며 하루 종일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면 지인들이 다시 이 사람을 집에까지 떠메어 옮겨주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루 동냥을 해서 하루 먹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장소보다 이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구걸했던 것은 아마도 다른 곳에서는 매정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러 올라가는 이 순간에는 그래도 하나님 때문에라도 다소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 푼돈이나마 던져주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이 문은 미문이라고 하는 이름이었는데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입니다. 아름다운 문에 아름답지 않은 한 사람이 거기에 앉아서 비천하게 구걸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루 만약에 자비로운 사람을 만나 넉넉하게 동냥을 하면 좀 나은 음식을 먹고 하루 따뜻한 방에서 잤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날이면 거친 음식을 먹거나 혹은 그나마 없어 굶고 추운 방에서 하루를 지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희망이 없는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느덧 자신의 불행하고 비참한 삶을 운명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불행했으나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고, 궁극적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무엇인지도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그저 그날 자비로운 사람을 만나 넉넉한 동냥을 받기를 바라며 그렇게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문에 앉아 동냥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이 앉은뱅이처럼 그렇게 인생의 행, 불행을 그저 남들이 던져주는 푼돈에 걸고 살아가는 그 사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 모습 속에서 오늘날 이 세상의 사람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침체에 익숙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미문은 아름다운 문이었으나 거기에 앉아 동냥을 하고 있는 이 앉은뱅이는 아름답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III.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함
A. 예수의 이름으로 명함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앉은뱅이를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건은 오늘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고,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에게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 번째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그들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한 것입니다. 특별한 성령의 시대에 사도의 권위로 이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선포가 있기 전에 사도들에게는 무언가 이 사람의 인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무엇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생래적으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이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이 무엇일까요? 높은 건물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 목회자의 학력이나 그리고 공적으로 인정받은 학위가 교회의 영광일 수는 없습니다. 탁월한 재능과 그리고 교회의 시스템으로 교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교회의 영광일 수는 없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를 위해 말씀과 성령으로 역사하실 때 사용하는 도구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들은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제도나 방법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것은 교회의 시스템이나 그리고 교회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자산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성령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 분의 은혜를 갈구하는 사람, 그 영혼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놀라운 권능의 기름 부으심으로 그는 세상을 향해 성별되고, 하나님을 향해 진지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살아갈 동기를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미 걸어가고 있는 인생길에 무엇인가를 조금 보태주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고 이미 입고 있는 그 옷에 한두 가지 옷을 더 걸쳐 입혀 모양을 내주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한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삶의 동기와 목표,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는 새로운 자원들을 주는 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놀라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인이 됩니다.
문제는 오늘날 교회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이 너무나 악하고 그리고 현대 사상이 너무나 큰 설득력을 가지고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이미 움직여 그들이 더 이상 기독교의 복음을 어리석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엔 거의 미개인들이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2000년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은 미련한 것이요, 자신의 지혜는 슬기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세상은 언제나 그러했기 때문에 교회는 이러한 세상 사람들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은 그저 그리스도의 사도일 뿐 그에게 주어진 무슨 공적인 또 다른 직분이나 세상의 영광 같은 것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일생동안 이 불구의 상태에 매여 구걸을 하며 살아가던 이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을 수 있는 것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고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나오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고, 그리스도는 예수의 인성을 가리키는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나사렛이라는 말이 더 붙여졌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약간은 조소 섞인 반발적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사렛에서 태어났다고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메시야가 태어나실 구약의 예언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이 자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나사렛에는 특별한 인물이 나온다는 예언과 신탁이 없기 때문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느냐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반어적으로 사도는 너희들이 그렇게 우습게 아는 나사렛에서 바로 예수가 그 나사렛 출신이고, 그 나사렛 출신이 너희가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시다. 하나님이 그 분을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아 우리를 통치하는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라고 굳이 길게 묘사했던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이렇게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진리의 능력 그리고 성령의 권능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실패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을 변화시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것, 그리고 어둠 속에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빛의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영광이고 능력입니다. 이때에 예루살렘 교회는 성경으로 충만했고, 그 성령 강림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보는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성령의 강림은 모든 그 사건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와 인류를 사랑하는 가슴 저미는 사랑의 마음을 주었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던 양떼들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던 예수의 그 사랑의 마음을 모두 공유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어서 오늘 운명적으로 불행하게 살아갈 수 없는 이 사람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영광을 이 세상에 펼쳐 보이기 위해 이 세상에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여러분들이 죄와 어둠 속에 살던 옛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경륜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인생의 가치와 목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고 인류를 지으신 그 목적의 빛 아래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고 매일매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을 힘입어 하나님이 나라는 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죄를 이길 용기를 얻고 미움을 극복할 사랑을 발견합니다. 도처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여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곳에서 생명을 누립니다. 그 생명으로 사람들을 살려내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은 이유입니다. 교회가 성령이 충만하고 기도에 헌신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이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이런 교회가 바로 이런 선언을 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 사랑하며 헌신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그를 일으켜 세움
마지막 두 번째는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뛰기도 하고 서서 걷기도 하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기를 그렇게 고쳐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불쌍한 거지가 성전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사도들에게 눈길을 주며 애처롭게 무엇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두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과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말입니다. 더욱이 초대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것 이외에 가장 중요한 일은 과부를 구제하고 고아를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사람들은 그것을 경건의 가장 중요한 표로 여겼습니다. 그러면 이 예루살렘 교회의 이 가엾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이 앉은뱅이에게 던져줄 한 푼의 동전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의도된 선언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몇 푼의 돈을 이 앉은뱅이에게 던져주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필요 없거나 혹은 나빠서가 아니고 더욱이 여러분들이 길거리에서 거지를 만날 때 자기들처럼 한 푼도 주지 말라고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은 모든 유대인들이 기도 시간에 올라가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 그리고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신 하나님이 실패한 인간을 어떻게 고치시려고 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모든 사람이 목격자가 되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선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삶이 너무 버겁고 힘겨울 때에 잠시 쾌락에 몰입하며 힘든 현실을 잊어보려고 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몰입하면서 근심을 잠시 덜어내기도 합니다. 혹은 안일한 즐거움을 여유 있게 누리며 삶의 고단함을 덜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우리 인생의 문제를 잠시 잊게 해줄 뿐이지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풀다 남겨두고 잠든 수학 문제처럼 이튿날 눈을 뜨면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가 그대로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입니다. 이 모든 노력은 현재 인생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결이 아닙니다. 그러나 놀라운 기적과 함께 이 모든 문제들을 한 번에 박차 버리는 방안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이 사람에게 얼마나 문제가 있었겠습니까? 소외와 가난, 멸시와 모욕, 잃어버린 자존감과 상처, 그리고 깨어진 가족관계, 많은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이렇게 고침을 받으면서 기적을 경험했고, 이것과 함께 그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문제를 박차고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은과 금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교회, 은과 금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루나 며칠뿐이었지만 그러나 오히려 은과 금이 아닌 자신에게 있는 그것이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불쌍한 성전 미문에 앉은 걸인의 삶을 통째로 바꿔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은금보다 더 중요한 교회의 고유한 영적인 그 무엇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교회 역사에서 심심찮게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수도사였을 때 교황은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교황청의 금고를 열어 보여주었습니다. 그 안에는 어마어마한 금은보화가 차고 넘치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수도사 아퀴나스에게 말했답니다. ‘자, 보게. 이제 교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 그러자 이 경건한 수도사는 교황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도 말할 수가 없게 되었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의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는 이 기독교 신앙의 신령한 측면들이 매우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혹은 그것을 아예 인정하려고 하지 않거나 자신이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과 사랑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설교자로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기독교는 기독교일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시면 이런 앉은뱅이가 일어날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이 모본은 이런 일들이 언제든지 일어날 테니 너희도 앉은뱅이가 된 사람에게 명하여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말해서 기적을 일으키라고 이 모본을 보여주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문제에 처한 인간을 그 문제로부터 궁극적으로 근본적으로 구해내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가고 있는 사람에게 조금 힘을 보태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잘 하고 있는 사람에게 좀 더 잘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칭찬해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당신이 혼자서도 행복하지만 예수를 믿으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그렇게 가르쳐 주는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 없이 가던 인생의 길을 돌이키고 그렇게 걸어가던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그가 사랑하던 대상을 변화시켜서 그래서 예전에 사랑하던 것들을 버리게 하고 예전에 미워하던 것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통한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분명히 교회에 은과 금이 넘쳤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을 기대하며 교회에 나오도록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이렇게 선언함으로 희망을 끊어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담대하게 선언했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선포와 같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의 동냥에 의지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어나 뛰어 걷고 성전으로 다니며 하나님을 찬송할 때 그 놀라운 기적을 얼마나 많은 동냥과 바꿀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을 때 이 사람은 그렇게 질문하는 우리에게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요? 그는 무엇으로도 이렇게 근본적으로 해결된 인생의 기쁨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교회가 바로 이러한 놀라운 힘을 가지고 도탄에 빠진 영혼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들에게 인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을 복음을 통해 보여주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것이 실제로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스도의 교회를 아직 이 세상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성한 소명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고 교회의 한 지체를 삼으신 이유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결코 완전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모든 시대의 교회가 결함이 없는 교회로 받아들일 최고의 모범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교회에 불결과 오류, 그리고 잘못된 가르침이 수시로 교회를 위협하고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 교회는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넘쳤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은과 금이 있었지만 은과 금으로 선교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그 기대를 끊어버리고 오히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외치는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은과 금이 있으나 은과 금을 의지하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 매순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자신들을 살아있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능력이 불행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인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성령에 사로잡힌 교회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에게 놀라운 변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온 마음을 다해 다시 한 번 그리스도 예수를 붙들고 믿음으로 일어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Ⅳ. 적용과 결론
교회가 기도할 때II (2017. 12 03 주일오전설교 7)
자,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무엇이 저를 저렇게 변화시켰을까 하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고, 이것은 바로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에 의해 예수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앉은뱅이 걸인의 변화에 그는 모두 놀랐습니다. 얼마나 놀랐던지 일어날 일로 심히 놀랍게 여기며 또 놀라니라 이중 삼중의 표현으로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선교는 변화된 그리스도인 자신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최고의 선교는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그리스도 때문에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어떻게 치료받았으며 그래서 얼마나 변화된 존재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을 놀랍게 여기며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에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고백하고 우리를 향하던 그 감탄에 찬 눈동자를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 향하도록 만드는 것이 최고의 선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충만할 때 이렇게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고, 소외된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눈을 뜨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우리의 인생도 예정된 인생의 길이의 1년을 잠식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우리의 참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생명 있는 날 동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 구원의 의도에 맞게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 땅에 주님이 우리를 살려주신 것이 우리에게 기쁜 만큼 또한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입고 살아있는 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우리는 비록 미약하지만 사도들처럼 이 위대한 권능은 없으나 그러나 지구 한 모퉁이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이 섬김을 통해서 몇 사람이라도 이렇게 놀라고 심히 놀라 그리스도 예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의 참된 보람이 아닐까요? 존재 자체가 선교의 증거인 사람, 매일매일 자기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런 그리스도가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 살려주신 그 은혜를 찬송하며 그 감격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정말 성공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주님을 충만하게 만나 여러분과 접촉하는 누구에게든지 예수의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 주어 죽은 자를 다시 살게 하고 불행한 자를 다시 행복하게 하는 예수의 도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 교회가 간절히 기도할 때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 4:3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성령 강림 사건 후 교회의 대 부흥 시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다락방 기도회로 모였을 때 겨우 그리스도인의 수가 120명이었습니다. 그 후 한 번에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세례를 받았고, 이제 여기에 모인 사람만 오천 명이나 될 정도로 기독교는 부흥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되자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사두개인들에 의해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루돌프 불투만이라고 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는 이들에 관해서 해석하기를 그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구약 자체가 부활에 대해 명백히 가르쳐 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의 신앙의 태도가 보다 보수적이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부활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기독교회는 그들의 눈에는 매우 미운 물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이라는 사실을 믿기는 했지만 그 부활을 나사렛의 젊은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들이 매우 화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활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인정을 받은 것인데 하나님을 모욕하고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린 예수가 그런 사람인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활은 제자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그들은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로부터는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박해를 당했고, 또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를 박해하도록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선포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초대 교회의 사람들은 십자가 보다는 오히려 부활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경에서 순서적으로 십자가 사건이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그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 있고 부활이라고 해석하지만 이 사람들은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역으로 추적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해석했고, 이런 예수의 부활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선포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이 부활을 선포하다가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었고 당시 유대인의 공회에 끌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공회 앞에서도 두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경륜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지 심하게 고문하거나 투옥하거나 형벌을 내리지 않고 말로 타일러서 이 사람들을 돌려보냅니다. 사도들은 형제들에게 돌아와서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교회는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II. 교회가 간절히 기도할 때
교회는 이 소식을 듣고 한 마음이 되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성령 강림 사건 이후 공식적이고 조직적인 사실상 첫 번째 박해였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했고 대적하는 세상을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전도하기를 간구했고, 사도들을 통해서 이전에 일어났던 놀라운 기적들이 계속되기를 하나님 앞에 빌었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놀랍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A. 하나님의 임재
첫째는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라고 말입니다. 구약에서 땅의 진동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에서도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출애굽기 19장 18절은 이렇게 보도합니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구약 성경에 익숙했고, 구약의 전승에 통달했던 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방식으로 하나의 징조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거기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임재의 증거였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자 땅이 진동하며 그들은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바로 여기 우리와 함께 임재 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박해를 받았으나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진동의 기적을 통해서 박해를 받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담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순절 강림사건 후 교회는 승승장구했습니다. 복음은 힘 있게 전파되었고, 사람들은 그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께 회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잘 나가던 때에 교회가 커다란 핍박을 느끼며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온 교회가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간절한 교회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바로 거기에 계시기 때문에 핍박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하셨던 것입니다.
기도가 있는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간증들이 있습니다. 기도가 있는 교회에 그분의 임재가 있듯이 기도하는 성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셔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에 대한 간증이 있어서 예수, 예수 믿은 것은 받은 증거 많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자, 한번 오늘날의 상황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 믿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안 믿기로 작정했다기보다는 하나님께 반항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어떤 설득이나 교회의 호의적인 태도도 그들에게는 소용이 없어 보입니다. 이와 같은 불신의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대안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앞에 충만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시며 이 모든 세계의 창조주고 지배자이심을 그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간절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누리며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성령의 충만함
두 번째는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말입니다. 사실상 교회를 향한 유대인들의 공식적인 그리고 가장 두려운 첫 번째 박해였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온 교회는 주님만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의지하던 것들에 대한 모든 생각을 떨쳐 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간절한 그 절대 의존의 마음을 그들은 기도로 표현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앞두고 온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 기도에 전혀 힘썼던 것처럼 똑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이들 교회에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해주셨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공동체였지만 하나님이 이 큰 핍박의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 한분을 의지하게 하셨고, 간절히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 응답으로 하나님은 땅을 진동하는 임재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이 강림하신 사건은 한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건이라고 말하고 심지어 일정한 조건을 갖추기만 하면 성령이 늘 다시 오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교훈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단 한 번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밖으로부터 성령이 부어지는 그런 충만한 역사가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었다면 이후에 경험하는 모든 성령의 충만한 사건은 이미 주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문학적으로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것을 성령의 부으심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성령의 세례라고도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이미 주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오순절 강림 사건은 한번이었지만 그러나 교회가 다시 한 마음이 되어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그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이미 주신 성령이 그들의 마음 안에서 충만해지는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 성령의 충만함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했고, 이웃을 사랑하게 했고, 교회를 사랑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성령은 모든 충만함을 경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부어주시고, 또 그들로 하여금 충만한 생명을 주사 이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도 하나님이 어떤 조건에서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단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지는 전적으로 그 분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어떤 전조가 있는지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 중에 뚜렷한 교훈 하나는 간절히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주실 뿐만 아니라 또 성령의 충만함을 그런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는 하나님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성령을 받을만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주님의 공로에 의해 부어지는 성령의 충만함이지만 그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사람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교회가 위기 속에서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간절한 기도자가 되어서 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말씀을 전파함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말씀을 전파한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담대히”라는 말에 한번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조직적인 박해의 소식이 들렸고,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 두 사람이 공의회에 끌려가 심문을 당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두려움 속에서 흩어지는 대신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당신이 그들과 여기 함께 계시다는 임재의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이들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담대한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두려움은 모두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두려움은 그릇된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그에게서 빼앗아갈 수 있는 것은 잃어버려도 좋은 것이고 정말 잃어버려서 안 되는 것은 세상이 빼앗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간절히 기도하여 성령 충만하게 되자 담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다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협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복음이고 이 말씀은 일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즉, 부활과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난 이 세상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 곧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어떻게 인간에 의해서 죄로 타락하고,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 인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어떻게 구원하여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교회를 세우시고 마지막에 이 세상을 완성하사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모든 인류가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다. 그 경륜을 담대하게 말하기 시작했고,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웃으로 하여금 그 참된 인생의 목적을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잠시 두려움을 느꼈으나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성령 충만함을 체험한 후 그들은 다시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상황에든지 복음을 전파하여야 할 사명을 갖게 하였으니 이는 바로 사도 바울이 어린 목회자 디모데에게 전한 편지에 나오는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말입니다. 신자는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것만큼만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오래 믿은 사람이 아니라 금방 믿은 사람도 아니라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해 한번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한 해에 전도되어 온 사람들의 수를 모두 조사해서 누가 이 사람에게 전도해 예수를 믿게 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는데 예수 믿게 된 모든 사람들의 숫자 중 65%가 열린 교회 출석한 지 1년 미만의 사람들에게 전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 금요 기도회에 교회 등록한 지 1년이 안된 교인들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운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동이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 때문에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가족을 위해 간구합니다. 그 마음 때문에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먼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위해 빌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충만한 체험으로 핍박을 두려워하던 공동체는 담대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핍박에도 불구하고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담대히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전파는 예전보다 훨씬 능력 있고 영향력 있는 전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간절한 기도 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복음의 전파자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적용과 결론
교회가 기도할 때 ∐(2017.12.17 주일오전예배 8)
자, 그러면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빌기를 다하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어리고 어린 이 예루살렘 새싹과 같은 교회를 보호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실체로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 강림 사건 후 승승장구하던 이 교회에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지체들의 마음을 모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아진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분량이 찼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땅이 진동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었고 뿐만 아니라 온 교인이 성령 충만하게 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핍박 속에 잠시 두려워하던 공동체는 오히려 더욱 담대함을 가지고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보십시오. 빌기를 다하매 능력의 하나님이시지만 교회가 간절히 기도하기를 다하였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보내는 시간의 절반이라도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교회와 개인의 삶은 물론 세상이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합시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합시다. 성령의 충만을 경험합시다. 담대한 마음으로 예수의 복음을 전파합시다.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해서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여러분들이 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하나님이 쓰신 사람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0-3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고넬료 집안에서 있었던 성령을 주신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성령 강림 사건 다음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편견을 깨고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성령을 부어주셨을 때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똑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방언을 하기 시작했고, 그 방언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도행전에서는 이방인 한 가정의 회심 사건을 그 전말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보도는 11장에서도 다시 반복이 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당시 예루살렘 유대 기독교인들이 받았던 충격이 얼마나 컸었나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입장에서는 역사가로서 이 사건이 구속사의 한 획을 긋는 엄청난 사건이었음을 보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II. 선교의 새 장을 여심
하나님은 이렇게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선교의 새 장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있어서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베드로를 직접 사용하셨습니다. 만약 그리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나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사용하셨더라면 이 역사가 정말 성령의 역사냐, 하나님이 하신 일이냐 하는 신학적인 논쟁들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든 사태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모든 신자들에게 신망을 받고 있는 최고의 지도자를 택하여 이 일에 직접 관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서만 예수 다시 사셨고, 자신들을 위해서만 예수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방언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여러 민족의 언어로 말했으나 아직 이들은 신학적으로 그 모든 것을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사건을 경험함으로써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차별의 벽이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이 구원받기로 작정된 모든 인류에게 펼쳐질 것이며 그 성령의 위대한 역사도 유대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충만한 부어주심으로 오는 생명과 사랑이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임을 입증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새로운 선교의 새 장을 여시는 일에 평범하지만 신실했던 유대인 아닌 이방인 고넬료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이 성령 부으심의 첫 열매로 삼으셨습니다. 그가 어떻게 유대교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전파 받았을 것이며 그는 그 신앙 속에서 깊이를 더하여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으로 말하면 한 대위 계급 정도밖에 안 되는 직업 군인인 이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와 함께 구속 역사가 전개되는 선교의 새 장을 여는 도구가 됩니다.
A. 기도하는 자
베드로와 고넬료,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서로 면식도 없는 두 사람인데 이들을 엮어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두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한 뜻을 같이 이루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와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방인 백부장 한 사람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각자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둘을 만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어오시지만 언제나 사람을 사용하셔서 그 역사를 이어오십니다. 바로 그 사람들은 때로는 탁월한 학식과 지혜를 가진 사람도 있었고, 군인도 있었고, 혹은 평범한 농부도 있었고 다양한 직업과 자기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시고 그 사람들을 줄이어 당신의 구속의 역사를 전개해 가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 성경에 보면 두 사람이 기도한 시간까지 나옵니다. 베드로는 여섯 시에 기도했다고 했으니 우리로 말하자면 낮 12시였고, 고넬료는 9시에 기도했다고 하니 오후 세시였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기도 관습을 따르는 규칙적인 기도생활이었습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이 그저 깊은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깊은 기도는 언제나 순간의 열정적인 기도가 아니라 일정한 규칙을 가진 기도의 실천에서 나옵니다. 열렬함과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실천을 통해서 그 사람의 기도의 세계는 깊이를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 시간은 언제입니까? 두 사람은 각자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하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여러분들의 골방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러분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인생사에서 불거진 이런 저런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여러 시간들을 고민과 괴로움 속에서 보냅니다. 그러나 그 시간 중 단 절반이라도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기도한다면 그러면 지금과는 훨씬 다른 인생을 여러분들이 살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뜻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순종하는 자
두 번째는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단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순종은 한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내면과 외면을 모두 통합하는 마음의 정신과 그리고 실천, 모두를 하나로 통합하는 인간의 어떤 정신 상태와 생활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주어지고 나서야 순종을 할까 말까 생각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성령이 가리키는 순종은 언제나 그 사람의 내면에서 나옵니다. 좋은 군인이 누구일까요? 상관이 명령을 내리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 임무를 수행할 정신으로 의욕으로 가득 찬 군인이 훌륭한 군인입니다. 그런 군대가 강한 군대입니다. 그것이 순종이고 복종입니다.
한번 고넬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비록 여호와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유대인들의 관습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같은 이방인이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여겨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자신들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떨까요? 고넬료처럼 아주 탁월하게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천국에서 하인의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믿는 것이 유대교 사람들의 기본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런 자기 인식을 가지고 있는 고넬료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서도 최고의 지도자 베드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사람도 달려낸다고 하는 그 위대한 사도를 자신이 부른다고 왔겠습니까?
베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 사건은 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그의 구속과 모든 것까지 보았으나 그러나 아직 여전히 유대교의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도, 부활도 모두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고백하고 있듯이 아직도 여전히 이방인과 말을 섞고, 교제하는 것이 위법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방인이 보낸 하인과 부하가 찾아왔을 때 그를 자신이 묵고 있는 처소에 유숙하게 하였는데 그게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이튿날 길을 떠났습니다.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고넬료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슬기롭게도 베드로는 다른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동행하여 그 일에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교제하고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마지막에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이 유대인으로서 가능하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죠? 이제껏 알고 있었던 신학의 편견보다 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였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복종의 정신으로 충만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구속의 역사의 위대한 장을 여시는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것 같은 똑같은 성령 주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성령 주심을 경험했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있으며 똑같이 성령을 경험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얼마나 커다란 충격이었을까요? 아마 이때 베드로가 받았을 신학적인 충격은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의 충격과 맞먹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베드로와 꼭 같은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두 가지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만이 선택된 백성이요, 그리고 메시야는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편견이 먼저 깨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리시지 않았으면 죽은 예수가 부활할 수 없고, 하나님이 살리실 사람이면 정죄하여 죽이셨을 리가 없는데 살아난 것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깨닫게 된 것이 대속의 교리였습니다. 즉, 예수는 죄가 없으시나 우리 모든 구원 받을 인류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대신 죽으신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살리시기에 마땅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사명이 주어집니다. 너는 이방과 임금을 위하여 이 복음을 전파하도록 택한 나의 그릇이다. 즉시 이방인들에게도 이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베드로는 차례대로 깨졌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 분이 그냥 좋은 선생님이 아니라 실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구나.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분이구나 하는 사실은 성령 강림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의 편견은 부서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만 선택된 백성이라 하는 사상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이 고넬료의 집에서 산산이 부서집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부어주셨던 사도인 자신들에게 부어주셨던 것과 꼭같은 방식으로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들이 똑같이 방언을 하고 똑같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 곧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타락한 이 세상을 어떻게 구원하셨고, 마지막에 어떻게 세상을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믿고 살아야 하는 것을 하나님이 큰 경륜 속에서 보여주신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벽은 무너졌습니다. 흑인과 백인, 유색인종, 그리고 이 나라와 저 나라, 이런 문화와 저런 문명과 상관없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힘입어 살게 하시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 모든 편견을 깨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한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찾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C. 경외하는 자
마지막 세 번째는 경외하는 자입니다. 3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을 깨달았도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나 혈통으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례자나 무할례자,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세상 나라의 백성을 구별하는 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외모나 혈통으로 사람을 보신다고 믿었습니다. 이방인 고넬료 뿐만 아니라 최고 지도자였던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택하셔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유대인만의 죽음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을 모든 인류를 위한 죽으심이었습니다. 육적인 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이 깨어짐으로써 이제 새로운 영적인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교회를 씨앗으로 자랄 것이었기에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을 교회에 모으셨습니다. 교회는 이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과 은혜를 앞당겨 누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과 사랑을 받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참 영적인 이스라엘이 진정한 영적인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방인들도 그 사실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케 하기 위하여 예수를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한편으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알고 두려움 속에 떠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이 자신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서 두렵지만 도망치지 않고 사랑하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서 그 하나님께 이끌리고 싶은 마음이 바로 경외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바로 이 경외의 마음의 지배를 받으며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업하고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보십시오. 두 사람은 이 세상의 번영과 성공, 영광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돈을 넉넉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집안의 배경이 확실한 사람 그리고 얼굴의 미모가 출중한 사람, 남자의 경우에는 사회적인 지위가 받쳐주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쉽게 꺾을 수 없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부인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느낍니다. 돈 많은 사람,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하는 것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돈도 없고, 미모도 그 정도 안 되고, 권력도 없고, 집안에 배경도 별거 아니지만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나는 비록 너만큼 높은 지위나 재물을 가지고 있지 않고 집안의 배경도 대단하지 않지만 나는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티끌만큼도 흠이 없다거나 완벽하게 순결하다거나 어떠한 죄도 짓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구김이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양육할 때 제일 중요한 교육이 자녀들이 조금 능력이 모자라도 부모 앞에서 구김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는 것입니다. 즉, 받아쓰기를 40점 받고 와서도 그 시험지를 자랑스럽게 꺼내며 머리를 긁적거리며 ‘엄마, 여기 40점. 잘했지?’라고 말할 수 있는 자녀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부모 앞에 구김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부모 앞에 자신 있게 부모를 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그럽니다.
왜 두렵습니까? 사랑이 참된 사랑이 아니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그 사랑이 무슨 사랑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든지 형제를 향하든지 참된 사랑 안에는 구김과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이니까. 그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사람들이 갖는 삶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품격입니다. 그들은 화려한 식당에서 좋은 의복을 입고 그리고 우아한 식사를 하는 것이 품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과 품격을 잃지 않으며 사는 자신 있는 삶,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 때 위대한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베드로는 지금은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으나 그는 겨우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나 잡으며 살던 한 사람의 어부였습니다. 고넬료는 그저 로마의 한 하급 장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평범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의 세계를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온몸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을 경외하며 사는 구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동의를 하든 동의하지 않든 한번 흘러가고 끝납니다.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이렇게 고민과 좌절, 욕망과 탐욕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두려움 속에 마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쓰임을 받으며 한 인간으로서의 경외의 품격을 가진 채 인생을 산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밤중에 드린 기도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침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행16:25-3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때는 충만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던 제 2차 전도여행 때였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들린 여자를 만납니다. 그가 따라오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을 여러 날 동안 찬양했습니다.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며 결국 이 귀신에게 명하여 이 여자에 들린 귀신을 쫓아내 버렸습니다. 이 여자는 귀신이 들렸기 때문에 그 신통력으로 점을 쳐서 그 여종의 주인들에게 수익을 안겨주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귀신이 나가자 이 여자 속에서 그렇게 사람들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신통한 능력이 사라졌습니다. 주인들은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사도 바울 일행을 관가에 고소해 버렸습니다. 그들이 유대인임을 알고 유대인으로서 로마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허망한 풍설을 전한다는 모함을 하여 이들을 고발했습니다. 일행은 체포되었고, 옷이 찢어져 벗기우고, 많은 매를 맞은 후 깊은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종들이 이렇게 몇 사람들의 모함에 의해 간단하게 투옥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바로 이런 시련을 통해서 더 큰 당신의 뜻을 이루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II. 한밤 중에 기도할 때
A. 기적을 주심
투옥된 이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투옥된 처지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대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바로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들은 한밤중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고 이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들을 세 가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기적을 주신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함에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토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메인 것이 벗어진지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감옥의 터가 지진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또 문이 열리고, 심지어 죄인들을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고 있었던 차꼬가 벗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29장 6절이나 에스겔 38장 19절을 보면 이 지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사도들과 그 일행이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해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것이 우연의 일치일 수가 없는 것은 지진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문이 다 열렸고, 사람이 직접 풀어주지 않으면 결코 벗겨질 수 없었던 차꼬가 모두 벗겨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믿음이 있었던 사도 바울과 그 일행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핍박 받는 상황 속에 개입해 주시리라고 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핍박과 시련의 때를 만났지만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찬송할 일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복음을 전했고, 복음을 전하다가 옳은 일을 했고, 옳은 일을 했더니 모함을 받아서 옷을 벗기우고 매를 맞고 감옥에 깊은데 차꼬에 채워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찬송은 찬송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현실을 능가하는 찬송의 이유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기독교회의 역사를 보면 심한 전쟁과 환란을 겪었을 때 아름다운 찬송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감사와 기도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것과 같은 상황이었지만 사실은 감옥에 갇힌 사도들과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지혜를 초월하셔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희망이 없는 상황이 하나님의 한계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구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인간의 상식과 사람의 판단으로 측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까지 당신의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막막한 날에 감사와 기도로 매달렸던 이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가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고, 부활의 모든 소망을 온 신자에게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과 박해가 있었고, 감옥에 갇혔지만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나쁜 일이 될 리가 없다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이 없었더라면 절망하고 말았을 한밤중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근심과 염려로 더럽히는 대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해도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한 주, 한 달, 1년을 살아온 것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것과 같았습니다. 목이 없어 갈한 땅에 물을 내시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들판에서 하나님은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곤고할 때마다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기적과 같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한밤중과 같은 인생의 어두운 때를 지날 때라도 우리들은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이 과거에만 행하셨겠습니까? 지금도 인생의 한밤중을 지나는 사람들이 간절히 주님을 신뢰하고 매달릴 때 이런 기적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B. 구원을 주심
두 번째는 구원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간수가 자다가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가 도망한 줄 알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당시 로마 시대 때에는 죄수들을 혹시 도망치게 하거나 놓치면 죄수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것을 지키던 사람들이 대신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옥토가 흔들리고 문이 모두 열려버리고 그리고 차꼬가 떨어져 버린 것을 보고 이 간수는 죄수들이 모두 도망간 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받을 형벌을 무서워했습니다. 절망 속에서 그는 칼을 빼 자결하려고 하였습니다. 물론 사도들은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2장에서 거의 유사한 상황이 되었을 때 베드로는 순교의 위기를 모면하고 감옥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놀랍게도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도망을 친 베드로의 믿음이 도망을 치지 않은 사도 바울의 일행의 믿음만 못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렇게 위기를 모면하고 도망을 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베드로는 사형을 기다리는 처지였지만 이들은 그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사도 바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많은 죄수들을 지켰고, 또한 자신도 지켰고, 간수도 살렸습니다. 그랬더니 도망을 쳐서 자유를 얻은 것보다 더 놀라운 결과를 주셨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여 뛰어 들어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었을까요? 도대체 이들이 누구길래 옥토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떨어지는 기적이 일어났을까?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인데도 도망가지 않고 우리가 모두 다 여기에 있노라고 말하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이것이 바로 이 간수가 두려움 속에 떨었던 이유입니다.
죽음과 그리고 죄수들을 대신해서 받을지 모르는 형벌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자신과는 대조적으로 완전한 평화에 넘치는 마음과 얼굴로 상황을 대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자신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사도 바울과 일행들에게는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근원도 알 수 없는 큰 두려움 속에서 떨며 바울과 신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한낱 죄수에 불과한 사람에게 큰 권력을 가진 간수가 종처럼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조용히 모시고 나가 그는 자신의 고민을 말했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중요한 단서가 하나가 나오는데 25절에 보면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죄수들만 들은 것이 아니라 간수도 들었을 것입니다. ‘아, 이 사람들이 바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구나.’ 그러자 그 상황 속에서 두려움에 떤 이 사람은 바로 저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그 구원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간절히 물었습니다. 사도는 질문만큼이나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여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회개하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더 자세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였습니다.
온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사도들이 감옥에 갇힌 것은 나쁜 일이었고 더욱이 옷을 벗기고 두들겨 맞을 때에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차꼬에 채워서 이제는 깊은 곳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한 계기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난 듯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놀랍게도 나빠 보이는 이 일을 통하여 나빠 보이는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선을 이루셨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 간수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해 줄까요? 그리고 무슨 방법을 사용하면 이 사람이 자신만 믿을 뿐 아니라 온 가족들이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단번에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일어난 나빠 보이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의지하는 자녀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도들이 이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하는 사실을 미리 예상했을까요?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한 가지가 그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록 자신들이 핍박을 받아 옷을 벗기고 많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나빠 보이는 이 일을 통해서 우리가 꿈꾸지도 못하는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평하는 대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원망하고 염려하는 대신 우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찬송과 기도 소리를 들으며 죄수들과 간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평화를 맛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범사에 당신을 의지하며 사는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기도할 마음을 주십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감사와 찬송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펼쳐 보이시는 것입니다.
제가 회심하기 전에 하나님이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두려움과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다가 만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안에 있는 놀라운 평화, 매우 위험한 일이 닥쳤는데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평화로운 모습, 그것이 회심하지 않은 저에게는 무서웠습니다. 간수도 모든 거기 있었던 사람들과 함께 꼭 같은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나빠 보이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그 깊은 감옥에서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래서 간수와 온 가족들이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이 사도들의 시련과 핍박을 통해서 당신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모든 시련과 고난이 모두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자신의 죄를 진지하게 성찰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이 있으셔서, 때로는 형통한 길로 인도하실 수 있는데도 우리에게 밤중과 같은 때를 지나게 하십니다. 좋은 길로 이끄실 수 있는데도 우리를 곤궁에 처하게 하십니다. 영광을 받게 하실 수도 있는데도 때로는 멸시와 욕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위대한 일을 행하셔서 당신의 구원을 보여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들에게 일어난 나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1년도 다 살아보기 전에 그것이 내게는 참 좋은 일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결국은 고난과 시련을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을 하게 하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어떤 일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고 그것이 우리에게 때로는 고통으로, 고통의 의미를 모르는 채 우리에게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 중의 어떤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야 알게 되겠지만 어떤 것들은 한해만 더 살아봐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을 신뢰하는 사도의 일행에게 이 나빠 보이는 일을 통해 놀라운 구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행해주실 것을 믿고 그 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기쁨을 주심
마지막 세 번째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때 감옥의 구조와 모든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데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간수가 사도들을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온 집안 식구들은 이미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근심과 염려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감시하던 관계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존경심은 사도들을 선대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음식을 내왔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 안에서 모두 한 형제가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수와 간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함께 식탁을 나누어 한 형제됨을 스스로 고백하였습니다. 얼마 전까지 있었던 그 무시무시한 두려움, 그리고 공포는 이제 이 간수에게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이 사도들이 죽임을 당할 지도 모르는 핍박의 위기를 기쁨의 축제로 바꾸셨습니다. 잠시 박해를 당하여 옥에 갇히고 그리고 차꼬에 갇혔을 때만해도 그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하실지는 알지 못했으나 좋으신 하나님을 찬송했고, 자신들의 모든 형편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거기서 탈출시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서 간수와 그 가족들을 회심시켜 그 감옥 속에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소식이 알려지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간수와 그 가족들에게도 넘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인간의 기쁨이 번영과 풍족, 그리고 자아의 성취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쁨은 영원하고 마르지 않는 기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간수와 그리고 그의 감시를 당하고 그들에게 얻어맞고 감옥에 갇혔던 이 죄수들이 함께 누리고 있는 이 기쁨과 환희의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이 세상의 번영이나 풍족함, 자아성취에서 온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 모든 죄인들을 회개시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로부터 온 놀라운 기쁨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비록 많이 매 맞고 감옥에 갇혔고,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처지에 있었으나 그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죽임 당할 것을 두려워해야 할 자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두려움은 자기 사랑과 집착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으니 그는 삶에 애착하는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자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고 깊이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셨습니다. 시련이 변하여 기적이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찬란한 기쁨을 자신들 만이 아니라 아무 희망 없이 이방인으로서 죄수나 감시하며 살아가던 이 간수에게도 구원의 빛이 비취게 해주셨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기쁨의 삶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여러분 때문에 많은 이웃들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를 통해서 이 놀라운 기쁨을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이 놀라운 일들이 바로 간절한 찬송과 기도 속에서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그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지체들이 되어 한 마음으로 기도와 찬송을 올릴 때 그 놀라운 환란과 핍박이 변하여 기적을 가져왔고, 원망과 불평대신 감사의 찬송을 드리며 살 때 그들에게는 기적보다 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울하기 짝이 없었어야 할 이 감옥 속에서 왕궁에서도 맛볼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이 가득한 상황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지나온 한 해 동안의 날들 중 원망과 불평으로 보낸 날들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한 해 동안 우리의 신실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신실하셨던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간절한 기도 속에 살 때에 나빠 보이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행하셔서 결국은 우리에게 선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한 해를 보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