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고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2018년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설교기간|2018년 1월 22일-25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2월 7일
목 차
1. 곤고한 자를 선대하심(시 22:24) 2018.1.2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
2. 곤고한 자를 구원하심(시 107:10-15) 2018.1.2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6
3. 곤고한 자가 기도할 때(시 34:6) 2018.1.2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0
4. 곤고한 자의 등불을 켜심(시 18:27-28) 2018.1.2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6
곤고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2018.01.2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1)
곤고한 자를 선대하심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
녹취자: 김세나
시편 22편은 메시아 고난 예언의 시라고 불려 집니다. 시편 22편은 저자인 다윗이 당한 많은 고통,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지만,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탄원의 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를 통해서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고난을 당하고 죽고 우리의 죄를 속하실 것인지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나쁜 일을 한 적이 없으신데,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였습니다.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진리를 말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진리의 빛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어둠 속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예수를 미워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한 이유를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참으로 진리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갈 때 언제나 세상에서 환영을 받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이상적인 삶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이외에 다른 것 때문에 고난을 받지 않는 삶입니다. 즉, 자신의 도덕적인 허물이나 혹은 잘못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것은 이러한 고난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여서 고통과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된 한 중요한 진리를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궁금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곤고’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곤고하다’라는 것은 인간이 매우 고통스럽고 괴로운 상태에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인간이 곤고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반역하였기 때문에 곤고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당연히 뒤로 물러가 미끄러진 사람이 겪는 영적인 깊은 침체와 환경에서 오는 고통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이 곤고한 이유를 신자 자신의 내면생활의 결함이 아니라 원수들, 즉 신자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악한 행동 때문에 곤고하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인은 바로 이러한 곤고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선대해 주셨는가 하는 것을 경험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비록 어떤 곤고함은 자신의 죄 때문에, 어떤 곤고함은 원수들의 압제로 인하여 생겨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결합되어 나타납니다. 이 곤고는 마음이 심히 괴롭고 고통 받는 상태이고 인간으로서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영혼의 생명이 결핍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시인은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된 세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곤고함을 멸시하거나 싫어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곤고한 상태에 있는 자기의 자녀들을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길러보면 이런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분명히 그렇게 많이 경고하였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타일렀는데도 굳이 그렇게 하고야 맙니다. 그래서 자녀가 아주 고생을 합니다. 그때 아이들이 머리가 크면 더더욱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때 자식이 그렇게 하지 말라는 일을 해서 큰 고통을 당하고 그 자식들의 가정이 뒤흔들리는 위기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 부모가 정상적인 부모라면 ‘그렇게 말렸는데도 자신이 했으니 모든 책임은 자기가 뒤집어써야지. 그렇게 당하는 것이 꽤 고소하다.’라고 말할 부모는 없습니다. 그가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고,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많은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입니다. 원인과 상관없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가 지금 궁핍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자체가 부모의 마음에는 슬픔이고 아픔인즉 이것이 바로 자녀를 향한 부모의 긍휼의 성품입니다. 시인은 그 많은 곤고, 때로는 자신의 죄 때문에 미끄러지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 앞에 순결한 삶을 살았으나 넘치는 악인들의 간교로 인하여 시험을 당하고 고통을 겪고 목숨의 위협을 당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 충만하고 은혜 충만할 때만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악인들에 에워싸여 믿음이 견고하지 못하여 곤고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얼굴을 드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당신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엄위로운 심판을 행하시기 위해서이고, 또 한 가지는 자기를 찾는 백성들을 향하여 당신의 은총이 그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얼굴을 그들에게로 향하십니다. 이것은 넘치는 사랑과 은혜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피력할 때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여 얼굴빛을 비추시고, 그 빛으로 만방에 하나님의 도를 알리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의 특권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것이 아주 한없는 신비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으나 이제 성령께서 오셔서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 내주하시는 신약의 시대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게 됩니다. 산이나 들이나 강이나 집안이나 길거리나 아무 곳에서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넘치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곤고한 자들, 영적으로 미끄러져 침체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당신의 임재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곤고할 때 그 곤고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악인들에게 고통을 받을 때에도 곤고함을 통해서 자신들의 믿음의 분량이 이것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매달리기를 원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그렇게 곤고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얼굴을 숨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종종 하나님은 신자들이 지은 죄와 불순종이 얼마나 큰 것인가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종종 하나님은 침묵하실 때가 있지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애달파서 하나님을 더 간절히 찾게 하시기 위함이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곤고하다는 이유 때문에 나를 멸시하거나 나를 싫어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곤고하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사 얼굴을 숨기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로와 우리의 살아온 자랑스러운 삶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가 울부짖을 때 들으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듣는다고 하는 것은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들리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듣는 것입니다. 이 듣는 것은 마음을 담아서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혹은 율법의 말씀을 듣는다,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인다, 선지자의 말씀에 청종한다는 성경의 표현을 많이 듣습니다. 대부분 ‘샤마’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그리고 자주 그 동사는 뒤에 ‘in’ 혹은 ‘into’의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전치사 ‘베’를 동반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 속을 듣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까지도 함께 전수받게 됩니다. 이것이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음성을 들을 때에도 이렇게 들으십니다. 단지 당신의 자녀가 고통 받고 아파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시면서 “너는 거기에서 그 고통을 겪으며 너의 죄 값을 갚을 때까지 너를 돌아보지 않겠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시인은 오늘 “울부짖을 때 들으셨도다” 이것은 남의 경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경험을 3인칭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들으시되 마음을 기울여 당신을 멀리 떠난 혹은 은혜에서 미끄러진, 혹은 악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으며 믿음이 흔들리는 많은 사람들의 곤고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악인의 울부짖음에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에도 귀를 기울이신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얼마나 더 많이 귀를 기울이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울부짖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곤고할 때 운명에 맡기고 자신의 인생을 기만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자신이 곤고하고 악인들로 인한 고통의 상태에 있다고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여기에서 울부짖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곤고한 상태에 있는 고통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구출 받고자 하는 시인의 생명을 향한 열망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간절히 울부짖을 때 하나님이 기도를 듣고 선대해 주셨음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 가지를 명심합시다. 하나님은 곤고하다는 이유 때문에 멸시하거나 싫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곤고한 사람들이 곤고하다는 이유 때문에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마지막으로 그 곤고한 자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곤고한 삶의 자리에서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성령 충만하고 은혜 충만할 때에만 우리를 선대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곤고할 때에도 우리를 선하게 대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니, 어떤 날에든지 우리가 의지할 분이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믿고 회복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곤고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2018.01.2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2)
곤고한 자를 구원하심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10-15)
녹취자: 김세나
시편 107편은 저자가 누구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도 저자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107편에는 하나님 앞에 곤고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을 본 이 시인이 그렇게 곤고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일까, 그리고 왜 그러한 곤고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하는 것은 궁금증을 가지고 탐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그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한 책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에서는 곤고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주목합니다. 시인은 자기 자신도 이러한 경험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주위에서 이렇게 곤고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사슴이 샘물을 떠나고 그리고 고기가 자신이 놀던 그 물 바깥으로 나오는 것처럼 곤고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곤고한 원인들을 다른 것에서 찾습니다. 가난, 질병, 인간관계, 이러한 것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고통이 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틀린 답은 아니지만 그러나 가난한데도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죽어가면서 그 질병 상태에서 천국을 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어려운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가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시인은 많은 사람들과의 경험, 또 자신의 경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통찰을 통해서 곤고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 근원을 명쾌하게 밝힙니다. 사람이 “흑 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지의 어둠과 앞으로 무슨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함과 쇠사슬에 매임은” 이것은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곤고함과 쇠사슬이라는 표현은 곤고함이 곧 쇠사슬이라 표현될 수 있습니다. 두 말이 설명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곤고함 쇠사슬이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그림입니까? 큰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입니다. 가벼울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냥 유치장과 같은 감옥에 가둡니다. 그런데 도망갈 위험이 있고 놓쳐서는 안 되는 중죄를 지은 사람일 경우 감옥에 두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발에는 차꼬를 채우고 손에는 쇠사슬을 둘러 거기에 묶여 절대로 도망하지 못하게 합니다. 곤고함과 쇠사슬이라고 하는 것은 곤고한 상태가 쇠사슬처럼 얽어 매인 웬만하면 자신의 힘으로 탈출할 수 없는 운명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운명적인 곤고함에 메여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이것이 시인의 통찰하는 곤고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곤고함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는 말은 두 개가 똑같은 의미를 반복하는 병행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지존자의 뜻이고, 거역하는 것은 멸시하는 것과 짝을 이룹니다. 그러니 결국 사람들이 곤고하게 사는 이유를 이렇게 본질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기 때문에 곤고하게 살아가는 것인데, 거기에서 찾지 않고 다른 원인에서 곤고함을 찾으니 이것이 해결이 안 되는 이유입니다.
물질로 근심하는 사람은 물질이 넉넉하면 행복하게 살 것 같지만 물질이 풍족한 사람 가운데 곤고한 사람도 많습니다. 또한 지위가 높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 속에서도 곤고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는 것이 운명적인 곤고함에 메여서 살아가는 이유라고 진단합니다. 이 진단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두렵게 합니다. 스스로 암의 증상을 느끼면서도 두려워서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처럼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곤고함의 실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일하에 드러날 까봐 두려워하며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곤고함의 이유를 포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우리의 영혼에 참된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도 되지만, 때로는 그것은 우리를 수술하는 칼이 되고 우리를 치료하는 약이 됩니다. 우리가 건강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맛있는 음료이고, 그리고 아주 잘 차려진 밥상과 같으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방망이가 되고 우리의 불결을 태우는 불이 되고 우리를 찌르는 칼이 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올바르지 않은 우리를 고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욕망과 죄들을 도려내시고 또 한편으로 곤고한 생활 속에 찢어지고 망가진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의 약으로 고치십니다.
그 고치시는 방법이 오늘 나오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겸손하게 합니다. 모든 불의와 죄는 교만에서 나옵니다. 동기는 자기 사랑에서 나오지만 그것을 실현하게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시지만 나는 그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의 판단보다도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이 교만을 낮추시기 위해서 때때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지만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깊은 고통으로 그를 데려가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겸손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엎드러졌는데도 돕는 자가 없게 하십니다. 그래서 천해의 고아와 같이 자신이 버려져 결국 하나님 밖에는 자기를 건질 수 있는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번영하고 성공하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자신에게 많은 친구가 생기지만 그러나 이렇게 곤고함의 쇠사슬에 메여 영혼이 절핍하여 죽어갈 때에는 그 친구들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람이 덜 곤고하면 사람을 만나서 이 얘기 저 얘기 하고 까불고 입술로 죄도 짖지만 진짜 죽음의 지경에 이르게 되면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서서히 다가섭니다. 결국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곤고함의 쇠사슬에 메였으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결국 이렇게 모든 도움이 끊어지고 자신의 마음이 낮아질 대로 낮아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안 찾게 되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 앞에 환란 중에 있으면서 결국 마지막으로 자기가 버렸던 여호와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이에 그들이 그 환란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고 하였습니다. 기도입니다. 마지막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말씀의 빛으로 자신이 곤고함의 쇠사슬에 메여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여주고 그 어떤 것도 그 사슬에 메인 상태에서 자신을 끊어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 그 말씀에 감화를 받아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부르짖게 됩니다.
우리들이 결국 목회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신앙이 깊은 사람은 신앙이 깊지 않은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는 신앙이 깊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합니다. 이것이 신앙이 깊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부르짖게 되면 하나님께서 결국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여 내십니다. 흑 암과 사망의 그늘이 운명 같았는데 거기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를 얽어 맨 운명의 쇠사슬은 숙명처럼 끊어버리지 못할 것 같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줄을 끊어버리셔서 자유의 몸이 되게 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시인이 직접 경험하면서 마지막 도달하는 결론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 지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기적적인 물질의 축복, 기적적인 치유, 기적적인 성공, 기적적인 놀라운 체험, 이러한 것들에서 기적을 찾는데 그 모든 것들보다 더욱 놀라운 기적은 바로 흑 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운명처럼 영혼의 침체를 겪고 있던 사람들이 그 흑 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나오고 그 얽어 맨 줄이 끊어져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 그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은 홍해가 갈라진 것도 기적이지만 그렇게 죄인이 곤고한 상태에 있다가 사슬이 끊어진 것도 지하의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처럼 살다가 다시 진리의 빛 가운데로 나아오는 것을 기적이었다고 오늘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그 놀라운 기적을 주신 근거가 바로 언약을 맺은 자기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놀라운 기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송할 지로다”라고 말합니다. 흑 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는 사람에게는 찬송이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도 이러한 감옥에 갇혔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혼이 이렇게 흑 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고 곤고함의 쇠사슬에 메이기는커녕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유로웠습니다. 몸은 감옥에 갇혔지만 마음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그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하나님에게 감사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들이 삶의 환경이 우리를 곤고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도 언젠가는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예전에 더욱 어려운 때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진리의 빛 아래에서 밝게 살았습니다. 더 많은 환란과 시련이 있었지만 그때에도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지금도 역시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도우시고 붙드시는 분이시니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이 곤고함의 쇠사슬에서 끊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간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곤고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2018.01.2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3)
곤고한 자가 기도할 때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 34:6)
녹취자 : 김세나
다윗은 사울을 미워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은 다윗을 집요하게 미워했습니다. 그를 죽이고자 여러 번 시도하였습니다. 사울의 이러한 박해를 견디다 못해서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도망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숨어 있다가 결국 자신이 다윗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야 맙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자신이 미친 척 하며 침을 흘려 수염에 바르며 쫓겨나다시피 나온 후 그는 광야로 가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사무엘 상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아마도 도망 길에 다윗은 이 시를 썼습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34편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달라는 애절하고 가슴 찢어지는 것 같은 슬픔 보다는 오히려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서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자에게 가까이 계신다는 찬송의 내용이 이 시 전체를 꽉 채우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시인이 이 시를 지을 때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컸는가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자기를 3인칭으로 묘사하면서 이 시를 써내려 갑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곤고하다’라고 하는 것은 환경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도 매우 힘든 상태,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곤고하다’라고 할 때 대부분 신앙에서 미끄러진 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이 이야기하는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하였을 때 이것은 앞뒤 34편의 문맥을 보면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오히려 여호와를 항상 송축한다고 말하고 자기의 입술로 하나님을 항상 찬양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영혼은 여호와를 자랑하고 싶었고 곤고한 많은 자들에게 자신의 간증을 들려주어 그들을 기쁘게 하고 싶을 정도로 오늘날 우리로 말하자면 성령에 충만한 상태에서 이 시를 지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여기에 나오는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오히려 어려움 속에서 고통 받는 있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은혜가 충만하여도 괴로운 일을 당하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면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은 은혜가 없을 때에는 극복을 못하고 시험으로 계속 미끄러지지만 성령 충만할 때에는 그것을 신앙으로 극복하면서 그 고통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성화의 기회를 삼으며 살게 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고통은 역시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승화시킬 수 있는 힘, 그래서 시련을 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간절히 매달리고 어려운 일을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기도하는 것은 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곤고한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인이 사무엘 상 21장에서 이러한 어려움을 만나면서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매달렸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가 탈로 나서 커다란 정치적 위기를 만나게 될 그 절체절명의 때에 하나님 앞에 목숨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이루고자 하시는 사명 때문에라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확실한 것은 그 사건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부르짖었더니 응답하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 훌륭한 증거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하였습니다. 첫 번째 가르침은 고통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에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거나 시련을 당할 때 우리의 마음은 뒤로 물러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대신 염려와 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러한 염려로 우리의 마음에 연기가 가득하고 모닥불처럼 가득 피워나갈 때 우리에게 남아있었던 은혜의 기도마저도 거두어 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 없음으로 받게 되는 하나의 대가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곤고한 자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우리의 인생은 티끌 같아서 하나님이 한번 불어 버리면 날아갈 수밖에 없는 아주 미약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전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 위에 떠 있고 우리의 가랑잎 같고 티끌 같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눈물 위에 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향해서는 담대하고 강하니 이는 그가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랑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담대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담대함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보혈 위에 떠 있는 존재이고, 자신의 매일 매일 일상이 숨 쉬는 것 까지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 위에 떠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한 주님을 본 받아 하나님 이외에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그리고 자신의 기도의 눈물로 자신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온갖 고난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하나님 생명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생애는 빛으로 오셨지만, 빛을 싫어한 사람들, 생명을 주셨지만 사망에 머물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악랄한 비난과 도전, 핍박에 직면하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그 많은 대적 자들에게 에워싸이셨으나 칼 한 자루 품고 다닌 적 없고 오히려 칼을 든 자를 책망하시며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한 모든 고난과 핍박, 어떻게 보면 곤고함에 넘치는 삶 속에서 예수님의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 아버지께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인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치며 자신을 에워싼 모든 환경을 이겨내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 고난을 받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눈물을 흘리는 다윗의 이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 자로 기도하시며 모든 고난을 이겨내실 훌륭한 예 표가 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여호와는 들으신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계시된 이름이라고 여러 번 가르쳐 줬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대신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두 이름이 두 분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기도하는 다윗의 마음속에 여호와와 맺은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다윗과도 언약을 맺으셨지만 그 언약은 앞으로 올 큰 언약의 그림자였습니다. 그 더 큰 언약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맺으신 새 언약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새 언약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도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는 나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면 이미 그 새 언약 안에 들어온 우리들은 얼마나 이 말씀을 더 잘 들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혹시 의심할까 봐 염려하던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주님에게 있어서 당신의 아들은 하나님 자신이 무한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내어줄 수 있는 더 이상 소중한 것이 없는 분을 내어줬습니다.
이 시인이 ‘내가 그렇게 부르짖으면 여호와는 들으실 것이다’라는 확신은 어디에서 왔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자, 한번 보십시오. 믿음이 없었다면 다윗이 수많은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언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겠다고 하였습니까? 임금이 될 야망을 품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목동으로 살면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그 하나님 때문에 충분히 행복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형들 중 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저 들판에서 아버지에게도 잊혀진 바 되어서 양이나 치던 목동으로 일생을 살다가 죽으라고 하여도 그는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불평했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야망이 없었습니다.
(찬양)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의 취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 모든 자연과 세계에서 보는 것이었고 그의 관심은 인류 사회에서 하나님의 그 뜻이 이루어져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며 여호와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만약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면 사울에게 미움을 받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으며, 낯선 블레셋 땅에 와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은밀히 거기에서 거주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으며, 정체가 탄로 났을 때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 미치광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생전 해 본적 없는 광인의 연기를 하며 침을 흘리며 그렇게 바보처럼 정신 나가 치매 걸린 사람처럼 행동했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누가 왕이 되겠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 누가 임금 시켜 달라고 했습니까? 왜 나에게 한 마디 상의 없이 기름 부으셔서 내 인생을 꼬이게 만드시고, 오늘은 블레셋 땅에까지 와서 나그네로 우거하다가 정체가 탄로 나서 미친 짓까지 하게 하십니까? 진짜 힘들고 어려워서 기름 부은 자 역할 못해 먹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독설을 퍼부을 수도 있을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 위대한 믿음의 조상 모세도 그러한 행동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조용히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에게는 둘도 아닌 하나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니
그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말에 기울이사 언어로 모두 표현하지 못한 마음까지 통촉하시는 만군의 왕 여호와이심을 믿는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감사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사울에게 쫓겨나 블레셋 땅에 도망갔다가 거기에서도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고 이제 사람 있는 곳이 두려워 광야로 갈 처지가 되었는데 물이 있습니까, 떡이 있습니까, 친구가 있습니까? 뭐가 하나님을 찬송할 일이 있고 그렇게 기뻐할 일이 있고 가슴이 터지도록 감격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는 인생을 한 토막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수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은 자신이 무슨 일을 겪든 그 모든 상황을 불태워서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와 있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곤고하게 살고 계시는 분들도 한때 믿음이 충만하였을 때에는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은 그러한 상황을 맞이한 때에도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먹고 살만해 지니까 편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니까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내가 부르짖으면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근심과 염려를 안고 교회를 나와 하나님께 매달리며 그 근심과 걱정이 모두 사라지면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되었습니다.
제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을 많이 당할 때면 늘 부르던 찬송이 하나 있었습니다.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당하고 행할 길을 다 가다가 끝 날에 주가 오라 하실 때 영광 중에 나아가리 열린 천국 문에 들어가 면류관을 쓰리라는 찬송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고 여전히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눈물 흘리는 일을 며칠 더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기도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들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 교리는 “그의 모든 환란에서 구하셨도다” 첫 번째 교리는 신자는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한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신다. 세 번째는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곤고한 자는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고통 속에 있는 신자입니다. 그러한 고통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실 때 그 시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시험 속에서 때로는 자신의 현재의 영혼의 상태를 깨닫게 하시고 때로는 잘못 살아온 삶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영혼을 쇄신시켜 다시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따라 살게 하십니다. 그 시험의 목적이 끝나면 하나님이 더 이상 괴롭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시험을 봅니다. 공부를 하라고 닦달을 합니다. 시험이 끝났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엄격하던 부모들도 아이를 며칠 쉬게 합니다. 우리에게 당하는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인은 왜 이러한 시험을 당해야 하는지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인데 이스라엘에서 싫어 버린 바 된 종자처럼 그렇게 취급 받으며 서럽게 살아야 했는지 다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시련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내가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지신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저는 다윗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에 합한 순결한 젊은이였지만 하나님은 그 순결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머리 위에 이스라엘의 왕관을 씌워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동으로 살기에는 충분하지만 그러나 한 나라를 다스리며 어거하기에는 단순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수한 것 가지고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주신 후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입게 하신 후에 그를 끊임없는 고난 속에 장시간 시달리게 하셨습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이 어떤 마음인지 하나님이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었지만 한 마리의 어린 양으로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배웠습니다. 악인들과 싸우면서 악에 물드는 대신 그 악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배웠고, 담대한 용기를 갖게 하였고 그의 순결하였던 마음은 끊임없이 고난과 연단에 담금질 되었습니다. 단단하기는 하나 금방 부러질 것 같은 그의 마음은 이 고난을 통해 연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가끔 사극이나 역사에 보면 칼로 바위를 내려쳤는데 바위는 깨지는데 칼은 흠 하나 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평범한 쇠를 불에 달궈 접고 접고 또 접어 이천 번 접은 후에 그것이 연단되어 한 개의 보검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한 칼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얼마를 만들어야 그 칼을 녹이고 두들겨 다시 2천 번 이상 접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기름부음을 받자마자 그의 앞에 꽃 길을 깔아놓고 아름다운 왕의 복장을 하고 걸어가도록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기름부음을 받은 후 그의 앞에는 고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멸시와 욕 외로움과 고통, 배신과 질투, 그리고 살인의 위협까지 받으면서 그는 비로소 한 나라의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그 사람이 접히고 또 접히고 또 접히며 두들겨지며 무엇에도 부러지지 않는 강인한 제왕의 마음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들을 한 나라의 임금으로 삼으실 계획을 하나님이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끊임없는 연단은 우리를 하나님이 더욱 소중히 사용하시고 더욱 훌륭한 일에 사용하시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는 것을 우리는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교리는 하나님은 성도를 그 환란에서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외에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70년대 그리고 80년대 초까지 사람들이 금요 기도회가 되면 상하고 깨지고 힘겨운 마음을 안고 교회를 찾고 기도원을 찾았습니다. 적어도 금요일 밤만 되면 서울 근교에 있는 대부분의 산들은 기도의 함성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그때 많은 성도들이 상한 마음으로 잘 부르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찬양)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어디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갑니다.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곤고한 성도들을 구원합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곤고한 자의 등불을 켜심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 18:27-28)
녹취자: 김세나
오늘도 본문에 곤고한 백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시다시피 이 시편 18편은 아마 다윗이 쓴 시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애송되는 시 중 하나입니다. 특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고백을 시작되는 시편 18편은 절절히 시인이 시련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당신을 떠나지 않았는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 시를 쓴 것은 이제 자신을 핍박하던 사울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나라를 다시 세우실 그때였습니다. 그 오랜 세월 망명과 도주, 원수의 박해를 피하여 방황해야 하는 모든 삶이 끝난 때였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평온한 마음으로 과거를 회상하며 이 시를 적었을 것입니다.
그가 회상하던 그 일을 겪었던 때도 그렇고 지금 이 순간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은혜가 충만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성경 본문에 나오는 곤고한 백성이 누구일까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들을 모두 지칭합니다.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곤고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들이 흔히 곤고하다고 말할 때 환경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으로 많이 하나님께 물러나 힘들어 하고 있는 상태를 ‘곤고하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러한 의미를 갖은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곤고한 백성과 짝을 이루는 이야기가 뒤편에 실려 있는데 그것이 해석의 어떤 암시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이것은 반어적인 대구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곤고한 백성은 교만한 눈의 반대이고 그리고 구원한다는 것은 낮추신다는 말과 반대입니다. 그러면 구원하신다는 말과 낮추신다는 말은 어떻게 반대가 되겠습니까?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곤고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그러한 상황에서 건져내신다는 뜻이고, 낮추신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서 마음이 비참해지거나 좋게 이야기하면 겸비해져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교만한 눈’은 어떠한 사물을 판단하고 생각함에 있어서 자기가 보는 것을 가장 최상의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의지하여 판단을 내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입맛을 느끼고 감촉을 느끼는 오감 가운데 우리의 정신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는 것이 우리의 눈입니다.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는 것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Ocularlism’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우리 정신에 강력한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사람의 전형적인 삶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든지 간에 그것보다 더욱 권위 있는 것이 지금 자신이 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도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도 그리 중요하지 않고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가장 커다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가 보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것은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인데도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그가 마음속에 한 가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엇이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끊임없이 눈으로 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인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강한 힘을 우리에게 미칩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은혜가 어느 정도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눈앞에 펼쳐진 삶의 상황이 매우 나쁘고 어려운 길로 가게 되면 아주 쉽게 하나님의 말씀의 끈을 놓아버리기 일쑤입니다. 다리의 힘이 풀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아, 이제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구나. 어떻게 할까?’ 단숨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방황하고 떱니다. 그것이 바로 ‘보는 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강인한 영향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경고하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시지만 눈앞에 자신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보이고 많은 사람이 자신을 떠받드는 것을 보이면 이 사람은 한 순간에 어제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가 마음속에서 지워지고 승리와 성공에 도취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여기에서 ‘교만한 눈’은 바로 그러한 의미입니다.
그러면 곤고한 백성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그러한 교만한 눈의 반대라고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겠습니까? 교만한 눈과 반대라고 한다면 낮아진 눈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곤고한 자를 하나님이 구원하는 것은 그냥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인데 하나님 앞에 마음이 겸비해진 사람을 뜻합니다. 그것을 외적인 상황을 묘사할 때 곤고한 백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백성’이라는 이 표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뿐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주님 앞에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관계 안에 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리를 하자면 하나님은 괴로운 일을 당하면서 마음이 가난해 진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형통한 가운데서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많은 시련과 어려움으로 그의 마음을 낮아지게 한다고 해석하면 정확한 해석이 되겠습니다.
이러한 진술은 다윗의 깊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는 수시로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도망 다니고 피해 다니고 사울의 박해에 피신하였던 많은 시절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도 아담의 후손이니 죄가 없었을 리는 없었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모진 시련과 고난,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죄를 짓던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곤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했습니다. 첫째 질문은 왜 그렇게 큰 죄도 없는 사람을 심한 연단으로 인생의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모진 시련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그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이 후에 맡기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의 성품과 하나님을 향한 태도, 그리고 사람들을 이해하는 식견, 이 모든 것들을 그에게 하명하시기 위한 목적이 있는 연단이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시련을 당할 때나 원수들에게 쫓길 때나 남의 나라 땅에 피신하여 도망할 때 그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겸비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시편 전편에 흩어져 있는 그의 시를 보십시오. 그의 마음은 언제나 상한 마음이었고 깨어진 마음, 가난한 마음이었고, 하나님 외에는 어디에도 의지할 것이 없는 고아와 같은 처지로서 오직 그 시선을 하나님께로 고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난을 많이 겪지만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 그래서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겸비할 대로 겸비해진 사람을 하나님이 그 많은 시련에서 그를 건집니다. 그러나 자신이 보고 있는 현실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상황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덮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될 때까지 마음을 낮추십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지니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물질을 주시고 정말 평안한 길로 인도해 주시고 염려와 근심이 없는 때에도 그의 기도의 자리에는 언제나 눈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낮아진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이 상전을 여종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봄과 같이 하나님 이외에는 자신을 도울 분이 없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현실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 편인가, 다시 말해서 자신이 하나님 편에 있는가,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입니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하나님이 목적이 있게끔 연단을 해도 하나님 앞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하나님 마음을 쏟아 기도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으나, 그래서 곤고한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 마음은 낮아지지 않습니다. 구원의 손길은 아주 멀리 있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우리는 모든 환경 속에서 그렇게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고, 그래서 이 세상의 물질이나 자신의 환경을 의지하던 마음을 모두 끊고 심지어 사람에 대한 도움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 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한 것은 그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마음을 잃어버렸을 때, 그는 하나님이 주신 이 모든 창조세계를 잠깐 잊고 그리고 이 모든 창조세계를 맡기셨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과 탁월한 사랑의 관계보다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과실 하나에 마음이 꽂혀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명령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과 연단이 우리의 인생 안에서 왜 그러한 일을 겪는지,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알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 좀 살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지금도 그때 그 일이 왜 일어났는가, 왜 그 가슴 아픈 일이 내게 발생했는지 아직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도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실하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 그리고 나를 위해 자기 아들을 버려 사셨기 때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의 자식들에게 이렇게 가슴 아프고 힘겨운 일이 일어났던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수가 없고 우리를 붙잡아 주실 능력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선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 힘겹고 어려운 일, 곤고한 상황이 우리의 상황을 끝장내지는 못합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으리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곤고할 때마다 감히 우리는 눈처럼 순결한데 악인들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곤고한 일을 당하여 마음 둘 곳 없을 그 때에 나에게 이 일이 일어난 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선하시지만,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나를 보여주시고 하나님 앞에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하려고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며 눈에 보이는 상황에 매몰되기 보다는 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이 내가 당한 이 모든 환경을 능가하시고 하나님이 내게 베푸실 은혜는 내가 당한 그 곤고한 상황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신뢰를 통해서만 이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 충만하였을 때에는 그렇게 살았었습니다. 이렇게 곤고한 일을 당하지만 하나님 앞에 겸비한 마음이 되어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알 듯 모를 듯 하나의 구절을 뒤에 첨가합니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시며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등불’과 ‘밝히시리이다’라고 하는 것이 다윗의 명예, 혹은 영광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고난을 많이 당하고 사람들로부터 없이 여김을 당할 때 그때에는 다윗이라는 이름의 표의 등불이 꺼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다윗을 누가 기억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등불을 켜신다는 의미는 이제 비로소 다윗이 자기의 진면모를 하나님에게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고 명예롭게 되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이 ‘등불’을 마음에 있는 등불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이런 말을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말입니다. 빛은 무엇인가 커다란 광채가 확 비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나무에 꿰어서 앞에 등을 매달고 걸어가는 그 작은 불빛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 실족하지 않게 하는 등불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이 등불은 아마도 예수님이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하셨던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꺼진 빛, 혹은 마음에 어두워진 빛, 그러한 의미로 이것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해석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두 해석 중 어느 것을 취해도 생각하는데, 둘 중 어느 하나가 맞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저는 왜 그런지 첫 번째 해석을 인정하면서도 두 번째 해석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마음의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그 마음의 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열정을 가리키는 것 보다는 판단을 가리킵니다. 등불의 용도는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하고 온 집안을 훈훈하게 하려고 등불을 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용도의 불은 난로입니다. 등불은 그것을 사용하는 목표가 있는데 그것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들을 등불 때문에 보는 것이 바로 등불을 두는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등불은 결국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 혹은 말씀의 빛으로 깨닫게 되는 믿음과 생활의 규칙들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면 곤고함을 당하고 곤고한 상황을 만나고 어려워서 순간적으로 판단이 흐려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함으로 마음의 등불이 꺼질 때도 있습니다. 혹은 사람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하면 등불이 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받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비틀거리며 방황합니다. 차를 몰고 운전을 하다가 어느 한순 헤드라이트가 나가버렸습니다. 주위에 아무 불빛도 없습니다. 그러면 차는 어디를 갈지 모르며 갈지자 주행을 합니다. 결국 멈추어 서게 될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다면 큰 사고가 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등불은 바로 그것입니다. 곤고한 가운데 시련을 많이 당하였으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부르짖고 회개하니 하나님께서 시인의 마음속에 다시 은혜로운 말씀의 빛을 주신 것입니다. 그로써 어둠 속을 걷다가 밝은 말씀의 빛으로 이제는 안전하게 걷게 될 수 있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내 하나님이 흑암을 밝히시리로다” 첫 번째 해석에 따르면 그가 당하였던 모든 불명예와 수치를 뜻하는 것이고, 두 번째 해석을 당하면 잠시 고난 속에서 혹은 죄악 속에서 혹은 눈에 보이는 현실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잃어버렸던 마음의 분별력을 가리킵니다. 그 흑 암을 말씀의 빛으로 비추심으로 밝혀서 이제는 어둠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인생길을 걸어가지 아니하고 빛 가운데 걸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종합을 하면 하나님은 곤고한 일을 많이 만났지만 마음이 겸비해진 사람들을 건져내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어두워진 그 마음을 당신이 밝히어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인생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언제나 꽃길로 걷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만나면서 우리는 마치 계곡에서 흐르는 물들이 돌멩이에 부딪히며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가 깨닫게 만들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있음을 알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사경회 마지막 날 새벽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곤고한 상태에 있습니까? 곤고하지만 마음이 한없이 낮아져 하나님이 그 마음에 말씀의 등불을 켜실 상태에 있습니까? 아니면 많은 어려운 일을 당하지만 여전히 교만한 눈으로 하나님보다 자신의 상식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희망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분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니 오늘도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시련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모든 사람들 가운데 높이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