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예수님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오늘 말씀 전할 것은 7절입니다만 1절서부터 7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사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회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아멘 오늘 읽어드린 히브리서5장은 아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대 제사장 되신 것을 드러내 주는 장입니다. 사람가운데서 세움을 받은 대제사장은 우리의 죄를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고 우리에게 나아오는 사람 이였다면 제사장은 우리들의 죄를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은 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증보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셨어요. 그는 제사장은 대제사장은 무식하고 미혹 받을 수밖에 없고 연약한자 까지도 다 쓸어안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려 주는 사람과 동일한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소망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깜박 잊어버렸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가장 악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그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이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인생들이 저렇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잠시 전에 우리들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가장 소망 없는 인생들을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요. 우리의 삶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대제사장과 같은 그런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그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하고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탄원해야 할 그런 거룩한 의무들을 우리들은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전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도와 중보기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죠. 교회 안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쉽게 정죄하고 그러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자기신앙의 경박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깊이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교회가 그렇게 문제가 많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바르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 내 모습이 바로 저런 모습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바로 오늘도 새롭게 살리셔서 저 모습이 그릇된 모습이라는 것을 사실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라고 하는 사실을 인하여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만양에 우리들을 하나님이 그렇게 모든 세속의 죄를 중보하고 중보자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분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심정으로 오히려 그들의 죄를 구속해주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러나 마치우리의 죄를 구속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세상의 죄를 지고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간구하고 기도하는 그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동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양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이 세상에 구원을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인생들을 바라보며 한심하게만 생각하신다면 그리고 정죄하기만 하신다면 교회도 소망이 없고 세상도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 완전하신 그리스도 앞에 설수 있겠으며 누가 그 순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 흠 없는 모습으로 서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보여 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정죄 그리고 모든 사람을 향한 판단과 이런 모든 것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릴 때는 먼저 대제사장이 자기의 죄를 위해서 속죄 죄를 드려요. 그렇게 드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다음에야 백성들을 위해 속죄 죄를 드릴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가 막히게 율법을 정해 놓였나 보세요. 그러니까 뭐예요 속죄제 드리는 그 순간 깊이 깨닫는 것이 뭐냐면 내가 이 수많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사람인데 내가 그런 똑같은 죄를 짓고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자기를 위해 드리는 그 속죄제사 속에서 깊이깊이 깨닫는 거요. 그러니까 어때요. 그렇게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용서해 주는 것은 두 번째 문제고 우선 자기가 이 백성들을 용서 받게 해주고 싶은 그런 사모함이 드는 거예요. 용서 받지 못할 때의 그 상태가 어떠할지 자기가 알고용서 받았을 때의 참된 기쁨과 평안함이 어떠한지 자기가 아니까 그 백성들이 어떠한 죄를 지고 왔던 지간에 자기를 위한 그 제사가 정말 올바르고 정성껏 드려진 제사라면 그 백성들의 죄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그것을 용납해 주셔야 한다고 탄원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이 그 백성들의 참된 모든 죄를 대제사장이 용납해 줄 수 없었던 것은 결국은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건 무엇 때문이냐면 자기가 그 제사 속에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죄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운데는 우리들이 평범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렇게 무관심한 이 잃어버린 세상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리고 어디든지 복음을 들고 나아가서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하신 그 사실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고 놀라운 감화를 받았던 모든 사람들 그렇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를 드릴 때 용서를 주셨지만 그것은 언제나 임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짐승을 대신 희생시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금방 마음속에 있는 죄와 하나님 앞에 형벌 받아 마땅한 모든 불의가 또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서 다시 우리를 제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갔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시적인 제사를 성취하시고 자기의 몸을 영원히 단번에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받기를 위해서 드리는 제물로 받치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어요. 이제는 그 그리스도 예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스스로 그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의 몸은 십자가에 드려졌고 십자가에서 흘린 그의 보혈의 공로는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새벽에서 죄악을 씻고 그 피를 속죄함을 얻고 그 보혈로 자기 삶이 정결케 되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만은 그러나 그 피와 속죄케 하는 능력은 마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여직껏 그 피와 물이 여러분도 구원하고 이 세상 사람들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을 대속 제물로 드리셔서 우리에게 참된 구원을 주는 이 놀라운 은혜를 이루시고 성취하시기 전에 이 땅에 어떻게 사셨는가 하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성경은 오늘 말하기를 그는 육체 가운데에 계셨다고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 깨서 육체 가운데서 계셨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가운데서 계셔야 했습니까?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육체 가운데서 거하실수 밖에 없었던 것은 곧 그렇게 육체로 오시지 아니하면 죽으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 입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지 아니하시면 우리를 그 모든 죄와 그리고 그 모든 사망에 사슬에서 우리를 풀어 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영광 가운데 천사들의 찬양을 들으며 영광을 받으며 계셔야 할분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늘에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자기가 지으신 들풀과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육체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죄는 없으셨지만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어떤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고 그들이 육체가운데 둘러싸여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며 부르며 사는 일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하는 것들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몸소 체험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시험하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으며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세상에서 주릴 때에는 먹을 것으로 말미암아 목마를 때는 마실 것으로 말미암아 유혹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거룩한 영광의 하나님이신 그들이 부끄럽게도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기 위함 이였어요. 저는 오늘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 커다란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분은 하나님과 본체이시고 그와 동등하신 분이시지만은 그러나 그분은 모두 체험하셨어요.
(찬송) 내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33년을 넘게 사시면서 우리 인간이 경험해야 하는 모든 슬픔과 고통을 다 체험하셨어요. 그리고 당신이 구속해야 할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자기의 온몸으로 마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체험하셨던 것입니다. 그랫길래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은 단지 관념적이고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이세상속에서 살아보신 예수그리스도로 끊임없이 죄와 육신의 유혹과 도전 앞에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대제사장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률 하지 아니하시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이라 그럼으로 긍휼하심을 받고 때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육체로 오신 것은 그런 모든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 과 아픔을 낫낫이 체험 하셨습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 모든 고통과 그리고 그 모든 죄 가운데서 건져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에 길을 걸어가셔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대속재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 장면은 결코 아름다운 장면 일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짐승이 죽는 것 뭐 잘못 보셨겠죠. 옛날에는 아 곳곳에서 닭을 잡는 것은 쉽게 볼 수 있었고 개도 뭐 이제 공터에서 매달아 죽이는 것들을 저는 어려서 많이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런 정도가 류가 아닙니다. 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는 이 짐승은 피를 흘리며 죽여야 했어요. 그래서 옛날에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 동네에서 한참 걸어서 가면은 교회를 지나 가면은 도살장이 있었어요. 도살장에서 수많은 소들이 죽어가요 그런데 그 속에 깊숙이 들어가 보진 못했어요. 어려서 그런데 그 하나는 분명히 봤어요. 뭐보냐면 사람들이 그 뒤 산에서 소의 입을 벌리고 물을 먹이는 장면이 하고 그리고 나서 한 십년 지난 다음에 물 먹인 소 이야기 나오더라고. 뭐 늘 하는 일 이었어요. 그렇게 물을 먹여서 키로 그람을 불리고 그 다음에는 그 소가 도살장에 가까워 오는데 그 기가 막히게 소가 한 번도 와 본적이 없는데 도살장 가까이 온다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정말 그렇게 고삐 끄려가면서 고개를 하늘 높이 쳐들고 그렇게 구슬프게 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들어가면 은 통로가 아주 좁은 곳으로 소를 한 마리씩 들여보냅니다. 그리고 여기에 가로목이 걸쳐져 있고 소가 죽 오면 은 곡괭이처럼 생긴 것을 가지고 소가 쫙 오면 은 그걸로 뻥쳐요. 그래서 소머리를 보면 은 가운데 정수리에 구멍이 큰 구멍이 뚫려져 있어요. 그렇게 손으로 죽였어요. 지금은 모르겠는데 한방에 죽였어요. 그런데 바로 그런 일들이 제사를 드리는 현장에서 행해진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각을 떠야 했어요. 그리고 내장을 전부다 분해해서 그 내장을 끌어내야 했어요. 그게 만약에 소였다고 생각해 보세요. 엄청난 작업이었겠는가! 피가 도랑처럼 흐르는 작업 아니에요? 그것을 그리고 잘라서 그 몸에 일부를 그 말하자면 그 타오르는 불 위에다 가 올려놓고 번제 단에서 그것을 태우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그 짐승의 모습을 보면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를 용서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그 사랑을 발견하면서 말하자면 죄에 대해서 치를 떨고 그리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니라. 결심을 하면 하나남 앞에 속죄 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제물들이 죽지 아니하고는 우리를 속하는 제물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그렇게 우리가운데 오셔서 죽으셔서 바로 우리를 위해 제물이 되셨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오직 그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신 것을 기억을 하면서 우리들이 아무리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낮아지고 가난해지는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만큼 낮아지고 그리스도 예수만큼 가난해 질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믿음에 사람들은 그리스도예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예수의 그 수욕하신 도성인신하신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영광을 버리고 그리고 죄 많은 이 땅에 오셔서 인생들과 같이 슬픔을 경험하시고 이 세상에서 고통을 겪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촉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낮아 지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고 놀라운지를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성경은 그렇게 육체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많은 말을 하시지 않은 것 같아요. 꼭 필요할 때에 진리를 가르치는 그 이후에 자기의 말과 기운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구속을 이루실 때까지 예수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의 방식을 보십시오. 그것은 기도와 또 놓을 수 없는 생애였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때어 놓을 수 없는 인생 이였습니다.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육체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서원을 올렸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기도였고 그 기도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피와 땀으로 얼룩진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그 기도의 모습이 통곡과 눈물로 얼룩진 기도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몸을 대속재물로 주시는 그 순간까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는 철저하게 기도의 생애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사시면서 기도하셨고 기도하기 위해서 사셨고 그리고 삶 그자체가 기도 이었고 기도 그 자체가 삶이었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뵈올 때 우리는 과연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대제사장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읽은 이 오장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한 이 부분을 틀림없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기도하시던 그 장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그리스도 깨서 무엇을 기도하셨는지 아십니까? 예수께서 개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실 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할 만하시거든 내가 이 잔을 피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는 그 기도를 간절히 하신 것은 사실 이였지만은 그러나 그 기도를 하시기 위해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그 밤을 새우셨던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요한 십칠 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기도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개세마네 동산에서 하시던 기도였습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날밤에 겟세마네 찬바람 부는 동산에서 홀로 기도 하셨던 기도의 제목입니다. 십자가의 쓰라린 기도가 다가오고 있고 사랑하는 제자들은 잠들어있었습니다. 유다는 배신으로 다가오고 있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는 자기의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시고 그리고 두고 가야할 이 사랑하는 제자들과 교회와 구원받아야할 이 세상을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의 대속의 유업을 다 이루실수 있었지만 그러나 마치 두고 가야하는 이세상과 공통체가 정말로 당신의 기도가 아니면 은 스스로 서있을 수없는 교회인 것처럼 그렇게 애통해 하며 마치 자기의 사역이 끝나지 아니한 것처럼 그렇게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여러분 때로는 우리들이 지고 있는 문제와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할 때 우리들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지게 됩니다.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간증 있는 신앙생활 체험 있는 신앙생활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더 나아가서 그런 자기의 껍질을 깨고 진정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같고 이 세상과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런데 까지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부흥을 우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그리스도예수처럼 이처럼 깊은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시편에서나 혹은 선지서 에서나 혹은 신약성경에서 그렇게 피를 토하듯이 진하고 간절한 기도로 간구하였던 그 위대한 믿음의 기도를 했던 모든 사람들의 기도는 세상 부귀 아닐 함과 명성 원치 않으며 즐겨 고난 길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기의 삶의 간단한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에 백성들이 백성답게 살아가는 세상이 오기를 사모했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주님이 그토록 간절히 부르짖던 기도의 제목들을 오늘도 우리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찬바람 부는 언덕에서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눈물로 기도하게 하시던 그 기도의 제목들이 우리의 마음을 깨워서 우리의 골방을 기도로 적시게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메말라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한 사랑에 감격하기 보다는 우리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그 사랑보다는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불만족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무런 죄가 없는 분이셨고 그리고 그가 친히 말씀하신대로 아버지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마치 절망의 늪 아래로 떨어진 연약한 사람처럼 심한 통곡과 애처로운 눈물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 모든 눈물은 자기 자신의 설움에 의해서 우는 눈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 죄인인 것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당신이 구원해야할 그 백성들이 죄가 운데 당하는 그 고통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심한 통곡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참다운 기도의 영으로 나아가고 그래서 기도의 문이 놀랍게 열려서 그 기도 속에 깃든 충만한 은혜를 체험하기 전에 먼저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나야 되는지 아십니까? 어느 부인이 저녁이면 교회에 나와서 그 정기적은 아닌데 교회 다니는 부인인데 며칠에 한 번씩 나와서 교회에서 간절히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교회사니까 늘 그런 일들을 보아왔죠 그런데 꾸준히 나오는 것은 아닌데 어쩌다 한번 나오면 진하게 기도하고 가요. 어쩌면 그렇게 대굴대굴 구르다시피 애통하면서 그렇게 기도해요 그때 어렸을 때 생각에는 야 저 사람은 정말 얼마나 그 기도를 깊이 하고 간절히 하면 저렇게 서럽게 울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까 나도 저렇게 기도해 보면 좋겠다. 그런데 이상한 게 기도를 그렇게 하는데 왜 주일을 잘 안 지켜요. 주일을 . 기도는 그렇게 한번 나왔다하면 진하게 하고 가는데 주일을 잘 안 지켜요. 나중에 세월이 지난다음에 알고 보니까 그 집안이 고부간에 부부간에 아주 갈등이 심했어요. 그래서 한번은 남편에게 얻어맞고 나와서 울고 그 다음에는 시어머니에게 욕먹고 와서 울고 그 다음에 애들 때문에 속상해서 한번 울고 그러는 거 있죠. 눈물이 다 눈물이 아니고 부르짖는 것이 다 부르짖는 것이 아니죠. 하나니 깨서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셔서 정말 기도하게 하실 때에는 우리가 먼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보이게 하시는 거요. 여러분 우리는 지난 일주일 동안도 우리의 삶이 왜 이럴까 왜 이렇게 감사가 없고 오늘 말씀드린 것처럼 메마른 삶을 살까 그런 생각을 저는 지난 수요일도 했습니다. 그러나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이냐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감격이 식어갈 때 그때 우리는 메마르게 되고 기도의 영도 살아지게 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마음도 식어지게 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은혜가 넘치고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서 해주신 일들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우리들은 속에서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물 한잔 마시면서 감사 오늘도 아무 일 없이 하루를 지내고 자녀들 건강한 것들로 인해서 감사 .하나님 앞에 감사 그리고 어떤 날은 하나님 앞에 침상 머리 에 앉아서 기도를 하면서 하루를 돌아보면서 내가 정말 이렇게 그 하루를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때가 있죠. 그런 것들이 메마르고 나면 모든 것이 다 한꺼번에 메말라버리는 거죠. 여러분 눈을 들어서 오늘 여러분들이 이 주일에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그 십자가의 놀라운 보혈과 그 우리를 위해서 이 베푸신 구속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늘 이것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감격과 은혜를 우리들에게 새롭게 해야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늘 살아가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그로 말미암는 죄에 대한 예민함 늘 이런 것들이 사라져가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가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아주 딱딱해져 가지고 아무런 감각도 받지 못하는 그러한 무지 모각한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지 않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이 세상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이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경험을 줍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이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예수그리스도를 도와주지 아니하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땅에서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지금 기도하고 계셔요. 예수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고 말씀 하셨지만 못 이루고 돌아가신 일이 하나 있었어요. 그것하신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여전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하늘에서는 눈물이 없고 죄가 없고 슬픔이 없으니 눈물 없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데 이 땅에 계실 때에 그분이 우시면서 통곡하시는 심하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셔야 됐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게 기도 하시고 그렇게 통곡하셔야 되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세상이 예수그리스도를 도와주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를 원해서 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기리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실 때에 이 세상이 그를 도와주지 아니하였고 이 도와 주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할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분은 더 진한 눈물과 더 높은 통곡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 하지 안이하면 안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예수와 함께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마다 이처럼 우리를 돕지 아니하는 세상과 마주해야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세상의 방해를 받으면서 그렇게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걸 따라 가는 거여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는 커다란 감사의 조건이 되는 거예요. 왜 그래요 예수를 믿고 그렇게 우리가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 울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죄인들과 같이 낮아지셔서 이 땅에 우리를 위해서 베푸신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고 또 한편으로는 또 한편으로는 그 그리스도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걸어가신 신앙의 길이 얼마나 아버지 하나님의 도움을 입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인가를 깨달으면서 오늘 우리들도 전심으로 그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도움을 입으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도움을 사모하며 이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기도 하실 때에 기도하신 분이 누구였냐면 예수그리스도 였는데 그분이 누구에게 기도 했냐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 했는데 그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켜서 오늘 성경은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라고 말하십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기도 하셨습니다.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였습니다. 이것은 자기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어서도 당신에게 다가온 십자가 보다는 오히려 당신을 그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뒤에도 자기를 살리실 부활의 능력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자가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자가 될 자신을 그렇게 살리고 다시 구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 이롭게 하시고 모든 만물로 하여금 그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꿀꼬. 온 천하를 다스리게 하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굳게 믿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이처럼 신뢰 하셨습니다. 우리들에 매일 올리는 이 기도도 바로 이렇게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을 바라보며 이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렸습니다. 세상은 나를 못 박으나 그러나 세상은 나를 죽이나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살릴 것이요. 그 아버지는 나를 사망의 고통 가운데 서도 나를 건져내고야 말리라고 하는 이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십자가를 보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지만은 그러나 골고다 언덕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배신의 길을 지났지만은 그러나 가롯 유다로부터 버림을 받고 사랑했던 자들로부터 침 뱉음을 당하며 채찍에 맞으며 골고다의 언덕으로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 같은 생애를 산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런 배신의 십자가와 절대적인 절망의 그 십자가 앞에서도 예수그리스도는 자기를 능히 죽음에서 구할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를 굳게 믿었어요. 그렇게 그는 오히려 죽음에 음침한 골짜기에서 새로 생명을 얻고 그 속에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귀한 구속의 사역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형편에 있고 그리고 우리가 안고 있는 어떠한 고통과 그리고 아픔들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넓던 지간에 분명한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예수의 그 절망과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의 깊이와 그에 받으신 그 모든 배신과 그의 모든 절망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렇게 모든 사람들로 버림을 받고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셔서 생명이신 그분이 사망의 지배를 받으며 무덤에 장사를 되어야 될 그 시간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 했고 그 하나님은 능력으로 자기를 그 죽음에서 건져내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전에 우리를 죽음의 골짝 기에서 그러고 죄와 사망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되었던 우리들을 살리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모든 실현과 고난가운데서 건지셔서 기필코 우리의 소원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게끔 만들어 주실 것 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과 확신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여러분들이 어떠한 문제에 처해 있던지 간에 하나님이 왜에는 문제의 해결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거의 됐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얼굴을 비치시고 그의 은혜로 나에게 비추시옵소서!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 여러분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신앙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문제가 크고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홀로 세우는 거예요. 왜? 크고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 이외에는 우리의 모든 문제와 고통을 풀어주시고 해결해 주실 분이 없다고 하는 사실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철저히 철저히 께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고 호소할때가 없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당하게 대우하셔도 주님밖에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오늘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가 누가 자기를 십자가를 지고 죽어 사망의 무덤에 장사된 가운데서 자기를 건져서 새롭게 살리시고 하늘에 오르게 하셔서 만물을 다스리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제자들을 완전하게 보호하고 그들에게 생명과 은혜를 끊임없이 주어서 하나님의 교회답게 서게 할 것입니까? 누가 죽어가는 그 사랑하는 그 백성들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는 그 백성들을 긍휼이 여기고 사랑하셔서 그들을 끝이 없이 붙들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변함없이 베풀어 주실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자기를 살리실 수 있는 한분 이외는 없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 모든 문제를 내어놓고 기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쓰라린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도 자기를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에 관한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지 아니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여러분이 어떤 형편에 놓여 있던지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말하기를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기도가 예수그리스도의 기도가 기도에 있어서만 모범이 된 것이 아니라 응답에 있어서도 모범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는 거죠. 때론 기도가 간증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간절히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 응답해 주셨다 그것도 간증거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간절히 기도 했는데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을 깨트리는 거요. 그게 뭐냐면 경외하심을 인하여 하나님은 들어주셨다. 그러니까 이거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기도로써의 삶을 가리키는 거요. 어느 교회에서 남편이 죽을병에 걸린 자매가 있었습니다. 유능하고 돈을 많이 버는 사업가였어요. 그런데 경이로웠어요. 돈이 많았으니까 이 의사 저 의사 찾아가봤지만 의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세상의 의학으로 고칠 수 없으니까 이제 밑으로 고쳐야 되겠다는 생각을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믿는 것도 좋지만 평소에 잘 믿어야지 꼭 어떤 계기가 있어서 믿는 것은ㄴ 그만큼 우리가 불순종이 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 믿음에서 믿었어요. 그래서 감사 헌금도 가끔 그런 감사 헌금 있죠. 해주실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헌금을 하잖아요. 이 사람도 그랬습니다. 믿었고 그리고 기도 했어요. 간절히 기도 하라고 해서기도 했는데 굳게 믿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죽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어느 날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당신은 평소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 이고 모든 약속은 분명히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는 적어도 그 많은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한 가지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랬더니 성경구절을 딱 펴니까 요한복음 14장이였습니다. 펴보세요. 요한복음 14장을 보세요. 13절입니다. 같이 읽어 봅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는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이 여인은 주께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셔서 구했고 믿으라고 해서 믿었는데 결과는 남편은 죽고 사업은 망했고 자기는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뜻밖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성경에 무어라고 쓰여 있습니까? 그러자 자매가 말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시행하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거기에 나와 있는 어휘는 자매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입니까? 너희 속에 내가 안 들어간다니요.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뒷부분을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15절을 읽으라고 그랬어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그러면서 한 설명이 뭐냐면 성경이 너희라고 그럴 때 그것은 항상 우리가 아니라 세상을 포함해서 전부다 그것을 가리키기도 하고 믿는 자 전부를 가리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특별한 교회만을 가리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믿는 자들 가운데 특별한 여건을 충족시키는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매가 믿었던 그 성경 본문은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그래서 그의 계명을 지성을 다해서 지키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삶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이며 살아가는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약속이다. 응, 그러니까 믿을 때 그것이 성경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무엇을 성경이 말하는지를 알고 믿지 아니하면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오늘 성경이 말하는 게 그거거든요. 또 이런 거 있잖아요.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루리라” 그런데 어때요?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만 눈에 들어오죠. 그 이전에 뭐라고 그래요.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러면 이루어져요. 그것은 이상형이아니라 진짜 이루어져요. 이런 예를 든 거죠.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고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 예수 안에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일 을뿐만 아니라 또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삶이 예수 안에 있어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깨서 하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의 소원이 뭐냐 하면은 어떻게 하면 성경에 나타난 그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활용을 해서 나를 위해서 사용을 할까 그것을 통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육신의 욕망과 이 세상에서의 어떤 바른길을 이룰까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말이 내 안에 있음으로 그 말씀이 내 안에 있음으로 그 말씀이 나를 지배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계획된 계획이 약속된 계획이 무엇이고 그 계획들을 이루는데 내가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이렇게 하나님 중심적인 자아 중심적인 인생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로 바뀌어가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협박해서 모든 것을 타내는 강도의 손에 들려진 칼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이 얘기에요. 인격적이 하나님이에요. 인격적인 하나님 믿습니까? 어느 집 안에 큰 아들이 있어서 유산을 자기가 물려받는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법적으로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죽었는데 식구들이 다 모여서 변호사 앞에서 유언장을 뜯어보더니 너는 하나도 없다. 왜 그래요. 아버지가 그 유산을 그 맏아들에게 물려주지 않았어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인격적인 관계에요. 그래서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의 인격으로 오는 감화를 받고 그리고 거기에 승복하면서 사는 이러한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응답을 받으신 것은 결론적으로 무슨 얘기냐 하면 그 예수그리스도께서 응답을 받으셨던 것은 기도만 간절히 하신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완전히 그분을 이름을 경외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 하나님의 이름과 그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을 해주셨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전에 어떤 요번에 그래서 올 참여 예배를 통해서 통화를 했는데 8년있던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에서 전도사님 들이나 목사님들도 신학교를 간다고 할 때는 사람을 잘보고 추천을 해야 되는데 어 뭐 대학도 맨날 떨어지고 맨날 그 그러던 청년 이었는데 신앙도 별로 없는데 신학교를 가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부모도 혹시 망나니가 신학교에 가면 하나님의 은혜는 고사하고 주위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좀 사람같이 되지 않을까 해서신학교를 보냈는데 맨날 신학교에 들어가서 당구장에 들어가서 당구나 치고 술이나 먹고 그랬는데 어느 날 뭐라고 그랬냐면 40일 철야기도를 시작한다. 그랬어요. 야, 이제 진짜 뭔가 일어나는 구나 40일 기도를 하면은 그 후에 무슨 일이 있겠구나. 그래서 한 30일쯤 흘렀나요. 그래서 궁금해서 뭣하고 사나 그러고 물어보았더니 아침 6시에 집에 돌아가서 그러니까 밤에 한 8시쯤 와서 차 마시고 좀 놀다가 11시에 기도하기 시작해서 기도하다가 철야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권사님들 안마도 해주고 그러고 4시 되면 이제 새벽 기도 드리고 5시까지 예배드린 다음에 집에 돌아가서 6시서부터 이제 자는 거예요. 6시서부터 자서 아침먹이고 6시쯤 씻고 자서 그다음에 오후 4시 일어난대요. 4시에 일어나서 다시 씻고 밥 먹고 그리고 8시 까지 교회오고 그리고 다시 교회서 그렇게 가고 그다음에 다시 자고 그러니까 그런 거죠. 40일 동안 이렇게 되풀이 되고 있었어요. 물론 우리는 특별한때에는 자기의 모든 생활을 중단하고 온전히 기도에만 전념해야 하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영적인 생활은 이런 식의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기도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고 그리고는 그 분이 그 기도에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사셨던 것이죠. 그럼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응답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터 주시는 기도의 응답을 받아내는 이런 삶을 살았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두 가지가 겸비 되어야 되요. 간절한 기도생활과 함께 헌식 적으로 주를 위해서 사는 삶이 동반 되어야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기도는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로 하여금 이런 삶을 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그렇게 모든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서 구속해 줄때까지 이런 기도의 생해를 사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낮아지심과 희생적이고 고난으로 가득한 삶을 보면서 우리들이 그 은혜로 말미암아 오늘 이처럼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 이것을 기억하면서 우리예수그리스도처럼 그렇게 살아가야할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같이 한마음으로 각자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