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
2022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2년 6월 19일 – 10월 09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2년 10월 28일
목 차
1. 마음이 괴로운 날의 선택(삼상 1:6-11) 2022.06.19. 주일오전 13
2. 그 여자가 마음이 슬플 때(삼상 1:12-18) 2022.06.26. 주일오전 23
3. 기도에 응답 받았을 때(삼상 1:24-28) 2022.07.03. 주일오전 36
4. 위기 앞에 드린 기도(단 6:10) 2022.07.10. 주일오전 46
5. 기도하는 자를 구원하심(단 6:19-23) 2022.07.17. 주일오전 57
6.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주심(삿 15:14-20) 2022.07.24. 주일오전 64
7. 고난 받을 때 기도하라(호 5:14-15) 2022.07.31. 주일오전 77
8. 마음을 찢고 돌아오라(욜 2:12-14) 2022.08.07. 주일오전 95
9. 내 영혼의 신음소리를 들을 때에(시 42:1-2) 2022.08.14. 주일오전 111
10. 그대의 마음이 문제다(시 57:7-8) 2022.08.21. 주일오전 125
11. 새 마음으로 세상을 볼 때(시 57:9-11) 2022.09.04 주일오전 135
12. 그 밤에 떠오른 노래(시 77:2-11) 2022.09.11. 주일오전 143
13. 내 음성으로 부르짖을 때(시 77:1) 2022.09.18. 주일오전 150
14. 헤아리시는 하나님(시 5:1-2) 2022.09.25. 주일오전 161
15. 기도가 하나님 아는 길이다(시 5:3-7) 2022.10.02. 주일오전 171
16. 기뻐하며 사는 길(시 5:8-12) 2022.10.09. 주일오전 180
<설교 프레임>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1 2022. 6. 19 주일낮예배
< 마음이 괴로운 날의 선택 >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6-11)
I. 본문해설
문제만 있는 삶
오래된 문제
기도하지 않음
II. 마음이 괴로운 날의 선택
A. 여호와 앞에 섬
B. 눈물로 기도함
C. 헌신을 서약함
III. 적용과 결론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2 2022. 6. 26 주일 낮예배
< 그 여자가 마음이 슬플 때 >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 1:12-18)
I. 본문해설
II. 그 여자가 마음이 슬플 때
A. 마음의 고통
“나는 영이 괴로운 여자입니다”
a. 상황을 끌고가는 삶
b. 상황에 끌려가는 삶
상황에 끌려가는 삶은 끝이 없다.
B. 영혼을 쏟음
“내 영혼을 야훼 앞에 쏟았습니다”
a. 영혼으로 드린 기도
b. 야훼의 임재 안에서
c. 마음을 녹여서 쏟음
C. 응답을 받음
간절한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심
a. 평안을 주심
b. 응답을 주심
c. 근심을 거둠
III. 적용과 결론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3 2022. 7. 3 주일 낮예배
< 기도에 응답 받았을 때 >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 새 … 아이가 어리더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 1:24-28)
I. 본문해설
II. 기도에 응답 받았을 때
A. 서원을 갚음
“기도하였더니 … 허락하신지라”(삼상 1:27)
“나도 그를 여호와께 … 드리되…”(삼상 1:28)
아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서원을 따라 헌신함.
기도할 때 마음과 응답 받은 후의 마음이 서로 다름.
우리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기도하지만, 주님은 기도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바꾸심.
B. 주께 경배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주께 바치고 경배하였음.
그녀의 신앙이 변화된 것과 순수한 마음을 보여줌.
아들을 주시도록 간구하는 과정에서 주님을 만났음.
여호와께서 세 아들과 두 딸을 얻게 하심.(삼상2:21)
하나님은 간절히 기도하는 자를 돌아보심.
III. 적용과 결론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4 2022. 7. 10 주일 낮예배
< 위기 앞에 드린 기도 >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I. 본문해설
다니엘서는 특별한 책이다. 그 앞의 책들은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다니엘서는 제국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그가 살았던 바벨론과 이후의 페르샤, 그리스, 로마제국이 어떻게 서고 망하는지를 다룬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보여준다.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벨사살 그리고 메대-페르샤의 고레스, 다리오, 네 왕을 섬겼다.
그는 다리오왕 시대에 세 총리 중 하나였다. 그때 왕 이외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질 것이라는 금령이 반포된다.
II. 위기 앞에 드린 기도
A. 기도의 장소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는…” 위기의 때에 기도할 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윗방” 다락방, 종교적 행사에 사용되던 장소였다(왕하 4:10, 행 10:9).
B. 기도의 습관
“…전에 하던 대로” 위기의 때에 갑자기 기도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쓴 다니엘의 견고한 경건생활을 보여준다.
“하루에 세 번씩…” 아마도 이것은 이른 아침, 오후, 해질 때였을 것이다(Berakhoth 4:1). 신약시대 9시, 12시, 3시(행 2:15).
C. 기도의 태도
1.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그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자기 과시나 자만함은 아니었다.
내적 신앙의 한결같음에 대한 외적 표현이었으니 순전한 믿음이었다.
이는 연약한 마음에 열정의 불을 붙이기 위한 것이었다(J.Calvin).
2. “무릎을 꿇고…”
겸비함과 간절함을 상징한다. 진심으로 드리는 모든 기도의 행동이 경건하지만, 무릎 꿇는 것은 특별히 그러하다.
겸비함: 무릎 꿇음은 겸비함을 보여줌. 경배와 복종의 표현.
간절함: 또한 무릎 꿇음은 물러설 수 없는 간절함을 보여줌.
3.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위기 앞에서 다니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평강을 누렸다.
“…감사했다”(mode), “찬양했다”. 위기 속에서 찬양의 이유를 찾음.
III. 적용과 결론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5 2022. 7. 17 주일 낮예배
< 기도하는 자를 구원하심 >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서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단 6:19-23)
I. 본문해설
II. 기도하는 자를 구원하심
A. 기도하는 자의 삶
1. 살아계신 하나님
2. 주를 섬기는 사람
3. 하나님 앞에서 삶
B. 구원하시는 하나님
1. 응답해주심
2. 왕에게 인정받음
3. 믿음을 잃지 않게 함
III. 적용과 결론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6 2022. 7. 24 주일 낮예배
<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주심 >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삿 15:14-20)
I. 본문해설
“사사”라는 말의 원뜻은 “재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재판관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군사적 지도자였다.
사사기는 가나안 정복의 영웅 여호수아의 죽음으로부터 사울이 왕이 된 때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12명 혹은 14명의 사사는 대사사와 소사사로 나뉜다. 대사사는 옷니엘, 에훗, 드보라, 바락, 기드온, 아비멜렉, 입다, 삼손 같은 사람들이다.
삼손은 소라 땅 단지파 마노아의 아들로 나실인으로 서약을 받고 태어났다. 블레셋의 지배를 받던 때다.
사사들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1)대부분 가문이 위대하지 않고 개인의 신앙도 훌륭하지 않다. (2)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압제에서 구원하셨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 11:32-34)
II.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주심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실 때 삼손은 결박을 끊어버릴 수 있었다.
삼손은 평생을 어떤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맨 몸으로 다니며 싸웠다.
삼손은 전투에서 하나님의 큰일을 하고 난 후에 큰 침체에 빠졌다.
A. 샘물을 터뜨림
B. 소생하게 하심
C. 부르짖게 하심
III. 적용과 결론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7 2022. 7. 31 주일 낮예배
< 고난 받을 때 기도하라 >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 5:14-15)
I. 본문해설
호세아 선지자는 B.C. 760년경부터 722년경까지 선지자로 활동했다.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결혼생활을 소재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북왕국의 여로보암 2세 말기였다. 그는 탁월한 통치자로서 약 40년간 북왕국을 다스리면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다.
그러나 북왕국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파멸을 향하고 있었다.
결국 여로보암 2세가 죽고 아들 스가랴가 왕위에 올랐으나 6개월 만에 살룸의 반역으로 살해당하고 여로보암 왕가는 끝난다.
그 후 이스라엘은 30년 동안에 5명의 왕이 죽고 죽이는 혼란을 거듭하다가 주전 722년 호세아왕 때 앗수르에게 멸망당한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호세아의 가정생활, 1-3장 (2)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4-13장 (3)하나님의 용서와 회복, 14장.
호세아는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으면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명령을 받는다(호 1:2).
이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1)가상적 환상설 (2)역사적 실제설이 있는데 후자가 맞다.
첫 아들을 이스르엘, 둘째 딸을 로루하마, 셋째 아들을 로암미로 이름을 지어주셨다.
* 음란한 여자 고멜과 바알 종교의 관계
이렇게 우상을 숭배하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큰 고난을 당하게 된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찾게 된다. 고난의 때다.
II. 고난 받을 때 기도하라
A. 고난의 이유: 죄
B. 고난의 해결: 은혜
1. 죄악을 뉘우침
2. 주의 얼굴을 구함
3. 간절히 기도함
III. 적용과 결론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8 2022. 8. 7 주일 낮예배
< 마음을 찢고 돌아오라 >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2-14)
I. 요엘서의 개요
요엘서는 성경에서 가장 짧은 예언서(豫言書)들 중의 하나이지만, 이 책의 중요성은 길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선지서들 앞부분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왕들의 이름과 시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부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말씀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욜 1:1).
1. 저작연대
이 책의 저작(著作) 연대는 학자들에 따라, 주전 8세기~주전 2세기까지 견해가 다양하다. 많은 학자들은 이 책이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한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王)들에 대한 언급이 없고, 죄를 지적하는 내용이 왕정시대의 정황과 연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대부분의 선지서(先知書)들에 나오는 우상숭배나 제사, 정치에 있어서 구체적인 죄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작 연대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심판(審判)과 은혜에 의한 용서(容恕)라는 영원한 메시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2. 이 책의 구성
요엘서 전체는 “여호와의 날”(the day of Jehovah)이라는 단 하나의 주제를 과거를 반성(反省)하고, 현재를 성찰(省察)하며, 그리고 미래를 전망(展望)하는 방식으로 풀어나간 것이다.
요엘서의 구조(構造)는 세 토막으로 이루어져있다. (1)메뚜기의 재앙(1:1-2:11), (2)회개의 촉구(2:12-17), (3)여호와의 날과 축복(2:18~3:21).
3. 메뚜기 재앙
요엘서 1장에서 메뚜기의 재앙이 예고된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경험한 메뚜기(locust)의 재앙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욜 1:3-4)
여기에 메뚜기와 함께 나오는 또 다른 생소한 이름들, “팥중이, 느치, 황충”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解釋)이 있다.
a. 같은 메뚜기과의 유사한 종류들이다.
b. 메뚜기의 성장과정에 따른 명칭들이다.
c. 메뚜기에 대한 여러 지역의 방언들이다.
지금도 ‘사막 메뚜기’(desert locust)떼의 습격이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종종 발생한다. 2020년에는 동아프리카 케냐, 에티오피아, 우간다, 탄자니아 등을 습격했다. 케냐와 인도에서만 660만ha의 농지를 초토화시켰다.
메뚜기는 매일 자기 체중(體重)의 두 배의 식물을 먹어치우는데, 1km2 넓이의 떼일 경우 약 8,000만 마리쯤 되고, 하루 35,000명이 먹을 작물을 삼켜버린다. 당시 서울의 10배 이상의 면적을 갉아 먹고 지나갔다.
왕성한 번식력으로 3개월마다 숫자가 20배로 늘어난다. 메뚜기떼는 강한 바람을 타면 하루에 150km이상 이동할 수 있어서 한번 습격하면 광범위한 지역에 피해를 준다.
2015년에는 참새만한 메뚜기의 떼가 러시아(Russia) 남부 지역을 습격했는데, 이때 메뚜기는 몸길이가 8cm, 날개를 펴면 12cm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2014년 8월, 전남 해남에도 수십억 마리의 풀무치가 습격해서 25ha가 초토화 시켰다.
이때 또 다른 하나의 재앙이 예고되는데, 가뭄(drought)이다. 온 땅이 황무지가 되어 “매일 드리는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끊어”진다(욜 1:9).
메뚜기 떼의 습격은 애굽(Egypt)의 여덟 번째 재앙이었다(출 10:13-14).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도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재앙의 경고로 제시된다(신 28, 38, 42장).
또한 이 메뚜기는 신약의 계시록(啓示錄)에도 등장한다. 거기서 메뚜기떼는 무저갱에서 풀려나와 환란기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전갈처럼 찌르고 쏘아서 고통을 주는 영적 존재로 묘사된다(계 9:10).
요엘서 2장에서는 이 재앙들을 문학적으로 더욱 섬세하고 무섭게 그려내서 듣는 이의 공포를 극대화한다.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 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욜 2:3-6)
요엘 선지자는 이러한 놀라운 재앙이 우연한 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임을 밝힌다(욜 2:11).
4. 여호와의 날
이 책은 메뚜기 재앙(災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요나서는 고래가 삼켰고 요엘서는 메뚜기가 삼켰다”
그러나 요나서의 주제가 고래 이야기가 아니듯이 요엘서 역시 메뚜기 이야기가 핵심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의 주제는 “여호와의 날”이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1-32)
이 책은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책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을 때 베드로가 이 책의 한 구절로 설교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베드로는 성령강림 사건을 “여호와의 날”과 관련지어서 해석했으며 이 설교를 듣고 3천 명이 세례를 받는 대회심 사건이 일어났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은 이중적 전망을 가지고 있다(욜 2:11).
a.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국지적으로
b. 종말론적으로 온 세상에 우주적으로
이는 역사 속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 끝날에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우주적인 심판(審判)이 있을 것을 보여준다.
* “여호와의 날”의 양면성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세례요한의 설교에 주목하라.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1-12)
여기서 역사하실 “성령”은 하나님의 축복(祝福)이고, “불”은 악을 태우는 하나님의 심판(審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는 축복과 심판의 양면성(兩面性)이 함께 있다.
회개하고 복음(福音)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과 함께 성령(聖靈)을 선물로 받을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요한의 첫 선포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4:17)였던 이유다.
II. 마음을 찢고 돌아오라
A. 마음을 찢으라
B. 여호와께 돌아오라
III. 적용과 결론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9 2022. 8. 14 주일 낮예배
< 내 영혼의 신음소리를 들을 때에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I. 시편의 개요
흔히 사람들은 시편으로 성경 공부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시편은 기독교 역사에서 다른 어떤 성경보다 커다란 감화력을 끼쳤다.
1. 시대와 저자
시편은 B.C. 15세기 모세 시대로부터 바벨론 포로 이후인 B.C. 4세기까지 약 1000년이 넘는 시대에 걸쳐 기록되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편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모세로부터 솔로몬, 다윗, 고라 자손, 아삽, 헤만, 에단 등 언급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여러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2. 시편의 독특성
율법서(律法書)는 인류의 기원과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핵심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다.
역사서(歷史書)는 이스라엘의 왕궁과 나라의 역사들을 통해 언약에 따른 심판과 은혜를 다룬다.
예언서(豫言書)는 이스라엘과 열방의 죄를 보여주고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
그러나 시편은 여러 가지 삶의 상황 속에서 신자의 내면세계의 경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창조와 타락, 구원과 완성에 대한 계시에 대한 시인들의 신앙적 반응을 보여준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아우르는 주관적인 정서가 풍부하기에,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3. 시편의 구성
시편이라는 책 전체가 150개로 이루어진 길고 짧은 시들의 모음집이다.
시편의 표제는 “테힐림”()이다. 이 책의 첫 두 편과 마지막 편은 신학적(神學的) 의도를 가지고 배치되었다.
제1편은 인간의 행복(幸福)에 대해 다루고, 마지막 장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을 찬양(讚揚)하도록 초청하는 것으로 끝난다.
제2편은 구원사적 의도로 배치되었는데 메시아에 대한 시(詩)이다.
여기서 악인과 의인의 구별은 메시아(Messiah), 곧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대적과 순종으로 판별된다. 각 권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찬양(讚揚)하라는 명령이 나타난다.
1권(1~41편): 창세기 – 유일신 하나님과 창조의 영광
2권(42~72편): 출애굽기 – 이스라엘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
3권(75~89편): 레위기 –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성전
4권(90~106편): 민수기 –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방황
5권(107~150편): 신명기 –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말씀의 영광
4. 시편의 인간관
시편은 악인(惡人)과 의인(義人)에 대한 날카로운 대조가 특징이다. 두 종류의 사람들을 구별하는 기준은 율법이다.
율법(律法)은 좁게는 십계명이지만 넓게는 하나님의 흠 없는 계시 전체를 가리킨다. 이 율법을 기준으로 악인과 의인은 구별된다.
그런데 시편은 악인과 의인의 내면세계(內面世界)에 초점을 맞춘다. 즉 악인과 의인의 마음, 곧 내적 감정과 경험이 어떻게 다른지를 제시한다.
시편(詩篇)에 따르면 악인은 하나님을 의지(依支)하지 않는 사람이며, 의인은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의인(義人)은 단지 율법을 외적으로 준수하는 자가 아니라, 전심으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이다.
의인은 선(善)을 행하고도 하나님의 품을 파고 들지만 악인은 죄(罪)를 짓고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5. 시편의 저주
시편에 나오는 저주(咀呪)하는 간구는 논란거리다.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신구약 윤리의 차별성(差別性): 구약 윤리가 신약 윤리에 비해 열등하며 시인들이 영적으로 미성숙해서 나온 결과라는 이론.
종말론적(終末論的) 적용: 시편의 저주가 궁극적으로 교회의 원수인 사탄에 대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론.
두 견해(見解) 모두 시편의 저주에 대한 충분한 이론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약의 저자들은 자기들이 구약 윤리(倫理)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며 신약 성경에도 저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편의 저주는 다음과 같이 해석(解釋)되어야 한다
시인들은 사적인 감정(感情)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다. 가끔 등장하는 시적 과장은 문학적 기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개인의 복수심(復讐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시인들은 신정론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만이 아니라 악인이 번영하고 의인이 박해 받는 상황에 괴로워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義)가 세상에 드러나기를 열망한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죄를 미워한 것으로 해석해야 저주의 시에 참여할 수 있다.
II. 내 영혼의 신음소리를 들을 때
A. 영혼의 신음소리
B. 살아계신 하나님
III. 적용과 결론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10 2022. 8. 21 주일 낮예배
< 그대의 마음이 문제다 >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7-8)
I. 본문해설
시편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는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God)이다. 세상을 그분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주권적 통치를 다룬다.
시편을 읽을 때 성경의 어느 책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그 주제를 일방적(一方的)으로 선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시인(詩人)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그 통치를 모두 받아들이기 기뻐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회의하며 방황한다.
그런 두 마음이 우리 안에 있기에 어떤 시를 읽어도 공감(共感)이 된다. 이 시를 통해 믿음(faith) 없는 자신을 보고, 저 시를 통해 시인과 함께 믿음을 가진 자신을 본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이 시가 공감해줘서 격려를 받고, 저 시의 교훈을 받으며 말씀을 붙들게 된다. 시편(詩篇)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에 쫓겨서 광야로 도망다니던 시절에 지은 시다.
다윗은 자객을 피하여 동굴에 숨어 있었다. 아마도 아둘람굴이나 또는 엔게디굴에 있을 때였을 것으로 추측된다(삼상 22:1, 삼상 24:3).
만약에 이 시가 엔게디(Engedi)굴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면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으나 그를 살려줌으로써 신앙의 승리(勝利)를 거두었을 때 이 시를 노래했을 것이다.
이 시에는 낯선 두 개의 표제어가 등장한다. “믹담”(miktam)과 “알-다스헷”(el-tashchet)이다. “믹담”은 시편의 형식(形式) 중 한 종류로서 “부드럽게 중얼거리며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
“알-다스헷”은 히브리어로 “멸하지 마옵소서”라는 간구로 신명기 9:26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빌던 모세(Moses)의 간구에서 왔다. 후일 이것이 시편을 노래하는 한 형식(形式)이 되었을 것이다.
“믹담”이라는 표제는 이 시를 단지 음율(音律) 없이 읽거나 거칠게 소리 내며 읽으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확한 낭송법을 지금은 알 수 없다.
이 시의 전반부는 탄식(歎息)으로 시작해서(1~6절) 후반부는 찬양(讚揚)으로 끝난다(7~8). 시인은 우리처럼 연약하기도 하고 우리가 바라는 바처럼 강(强)하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수준과 상관없이 공감할 수 있다.
II. 그대의 마음이 문제다
다윗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울(Saul)의 추적을 피해 도망 다녔다. 고난(苦難) 속에서 부르짖고 두려워하는 시인의 모습은 우리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슬픈 탄원에서 승리(勝利)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가는 시인의 모습은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본문에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A. 마음을 확정함
“확정되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nakun)는 원래 “~하도록 준비되었다, 갖추어졌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두 번 반복되는데 이것은 단지 강조하기 위한 반복이 아니다.
앞에 나오는 3절에서 시인(詩人)은 승리의 희망(希望)을 보여주었다.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시 57:3)
이것을 반복함으로써 승리의 희망이 확신으로 바뀐 것을 보여준다.
그는 도망자의 처지였으나 항상 비파와 수금을 가지고 다녔다. 이 구절에 관해, 탈무드(Talmud)에는 재밌는 해석이 나온다.
“비파와 수금은 다윗의 침대 위에 걸려 있었고 이른 새벽이 되면 바람이 불어서 악기의 현의 소리를 냈고 다윗은 그 소리에 맞춰 일어나 율법을 묵상했다. 하늘에서 새벽빛이 기둥처럼 내려올 때까지.”(Talmud, Berachot, B1)
새벽은 다른 왕(王)들을 깨웠지만, 다윗은 그 새벽을 먼저 깨웠다. 새벽은 다윗의 기도와 찬양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그가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확정(確定)하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끌고 다니는 사람이 있고 시간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있다. 또 다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시간이 잡아끌어도 안 가는 사람이 있다.
밧줄에 묶여 쓰러진 채 시체처럼 끌려가는 사람이다. 옷이 찢어지고 살갗이 벗겨져도 그냥 끌려간다. 어찌 그것을 살았다고 하겠는가?
시련(試鍊) 속에서 확정된 마음 없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그러나 시인은 박해의 피바람이 불수록 마음은 더욱 확정되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
마음이 확정되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화(平和)가 찾아왔다. 원수들의 창과 화살과 칼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였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5)
B. 노래하고 찬송함
마음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환경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자객에게 쫓기는 신세였다. 그들은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무기를 가졌고, 시인(詩人)을 잡으려고 그물을 쳤으며 웅덩이도 팠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요동(搖動)치 않는다. 그는 보이는 상황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마음을 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7-8)
여기서 “내 영광”(kebodi)은 “나의 영혼”을 가리킨다(시 30:12).
경건한 시인들은 자기 영혼(靈魂)과 대화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는가…”(시 42:5).
시험 속에서 마음까지 병들어 가는 것은 영혼이 잠들어간다는 뜻이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마음을 강하게 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담대하라.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 말라.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라. 생사 간에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마음을 확정하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 1:6)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묻지 말라. 그것이 당신의 죄(罪) 때문에 받는 벌이든지, 더 큰 섭리 속에서 복(福)을 주시려고 일어난 일이든지 그렇게 묻지 말라. 해결책이 아니다.
있는 현실(現實)을 받아들여라. 하나님의 선(善)하심을 굳게 믿으라.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라도 “내가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물으라. 마음을 확정(確定)하라. 또 확정하고 또 확정하라.
* 결핵에 걸린 선교사 지망생
마음이 확정된 사람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모든 것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 자기 인생(人生)이 하나님 손 안에 있는 줄 알고 겸손해진다.
하나님만 전심(全心)으로 의지하라. 한숨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두려움이 변하여 찬송이 될 것이다.
“노래하고 찬송하리라”(ashira weazammera). 이 구절은 원어적으로는 이렇다. “내가 노래하고 음악을 만들 것이다”
여기서 시인이 “음악을 만든다”고 고백한 것은 두 가지 의미일 것이다.
a. 새 노래를 짓는다는 의미
시편에만 “새 노래”라는 표현이 6번이나 반복해서 나온다(시 33:3, 40:3 등).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을 항한 새로 지은 찬송을 뜻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것들의 시행방식에 대한 지식이다. 그분의 성품에 대한 새로운 경험은 예전에 부르던 노래를 반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새로 받은 은혜(恩惠)는 새로운 찬송을 요구한다. 다윗이 모두 73편이나 되는 시편을 지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b. 악기를 연주한다는 의미.
어떤 주석가들은 앞에 나오는 “노래하고”(ashira)는 목소리로 찬송하는 것을 의미하고, 뒤에 나온 “그리고 찬송하리라”(weazammera)는 비파나 수금을 연주(演奏)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고난 속에서 시인이 흔들리던 마음을 확정했을 때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 남들이 알 수 없는 은혜다.
그는 감격하여 목소리로 노래하고 새로운 시(詩)를 지어 악기로 연주할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고난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III. 적용과 결론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11 2022. 9. 4 주일 낮예배
< 새 마음으로 세상을 볼 때 >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9-11)
I. 본문해설
종종 인생에서 위기의 때를 만난다. 시인도 재앙의 날에 이 시를 썼다. 사람들의 비방이 사방에 가득하던 때였다.
그의 영혼은 사나운 짐승들에게 에워싸였으며, 자신을 불사르려는 자들 중에 있던 때였다.
사울에게서 창과 화살로 죽음의 위협을 느끼던 때였고, 다윗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비난은 칼날처럼 마음을 저몄다. 시인은 아무데도 의지할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확정했다. 생사 간에 하나님만 바라보자 새 마음이 생겼다.
II. 새 마음으로 세상을 볼 때
이리저리 떠다니던 마음을 확정하자 새로운 세계가 보였다. 사울이 아니라, 그가 보낸 자객들이 아니라, 그들의 창과 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그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다윗은 새벽바람이 악기의 현을 스치고 지나는 소리에 일어났고, 비파와 수금으로 새벽을 깨웠으며, 그 새벽은 군왕들을 깨웠다.
A. 감사함
첫째로, 감사함이다. 불안하고 염려하던 마음이 변하여 감사하게 되었다. 갈대처럼 흔들리던 마음을 확정하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무슨 감사할 조건이 있었는가? 무슨 상황이 바뀌었는가? 재앙이 덮쳤고 사방에 원수들의 비방이 가득했다.
그는 여전히 광야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외로웠다. 그러나 마음을 하나님께 확정하자 감사할 조건들이 생각났다.
* 자동차 사고와 감사예배
B. 찬송함
둘째로, 찬송함이다. 원수가 친 그물과 악인이 판 웅덩이 앞에 눌렸던 시인의 마음이 찬송으로 바뀌었다.
1. 주의 인자
2. 주의 진리
3.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삶
III. 적용과 결론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12 2022. 9. 11 주일 낮예배
< 그 밤에 떠오른 노래 >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시 77:2-11)
I. 본문해설
이 시는 고난받는 때의 탄원시(歎願詩)다. 성가대 지휘자의 인도를 따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 부르던 노래다.
개인적(個人的) 탄원으로 이 시는 시작된다. 아마도 그는 고통받던 날에 이 공동체의 노래를 개인적으로 불렀을 것이다.
작자로 소개된 아삽은 레위인으로서 게르놈 가문의 사람이었으며, 다윗과 솔로몬 시대 성가대의 악장을 지냈다(대상 16:5, 대하 5:12).
“여두둔”()이라는 단어는 “찬송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야다”()에서 왔다. 구약에서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다. (1)사람 이름으로서 성전에서 음악을 책임진 레위인 중 한 사람이었다(대상 16:38-42). (2)시편을 연주하는 방식이나 곡조(曲調)를 뜻한다(시 39, 62, 77편). 오늘날 그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개인적인 고통에서 시작된 고민은 옛날부터 교회(敎會) 공동체에 역사하신 은혜(恩惠)를 기억하면서 해답을 찾는다.
II. 밤에 떠오른 노래
이 시는 고난의 때에 기도(祈禱)할 결심으로 시작된다. 구성은 다음과 같다.
a. 기도할 결심(시 77:1)
b. 불안한 영혼(시 77:2-9)
c. 경건한 회상(시 77:10-20)
A. 환난 날의 기억들
이 시에서 진술되는 고통(苦痛)은 특정한 사건을 연결할 수 없으리 만치, 매우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 깊이는 결코 얕지 않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고통에 대한 절절한 묘사가 이를 증거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시가 개인적인 고통이 아니라, 공동체(共同體)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고 해석한다.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 돌아온 이후 유대인들의 절망적인 종교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탄원(歎願)의 이유가 개인적인 것이든 공동체적인 것이든지, 결론(結論)은 동일하다. 시인은 고통 속에서 기도하기를 결심하였다. 낙심하였으나 새로운 확신을 갖게 된다.
시인은 환난(患難) 날에 주를 찾았다. 그의 기도는 끈질겼다. 그는 기도하려고 든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영혼은 단호하게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위로(慰勞)를 거절하였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시 77:2)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시인의 마음은 불안(不安)하며 근심하게 되었다.
불안한 나머지 그의 심령은 상하였고 잠들 수 없었으리 만치 괴로웠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과 변론하기를 포기할 만큼 내적 고통을 겪었다.
그렇지만 이 불안이 시인의 불신앙(不信仰)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큰일을 사모하는 거룩한 갈망을 보여준다.
* 예루살렘의 재건축과 통곡(스 3:12-13)
동시에 그의 불안과 근심의 경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가르쳐준다. 믿음으로 살려고 애쓸수록 더욱 은혜가 필요하다.
B. 밤에 떠오른 노래
큰 고통 중에 시인은 과거의 “지난 해들”(years of ancient times)을 생각했다. 그것은 오래된 이스라엘(Israel)의 역사였다.
그 노래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때들을 기념하는 공동체의 찬송가(讚頌歌)였다.
그것은 성경과 전승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역사(歷史)를 생각나게 하였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그 찬송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때는 밤중이었다. 세상사에서 떨어져 홀로 있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고독(孤獨)은 인생의 마당이다. 앞문은 진리고 뒷문은 쾌락이다.
그늘진 사랑을 우거지도록 하는 것도 외로움(loneliness) 때문이고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것도 고독 때문이다.
* 현대의 쾌락주의라는 질병
인생을 주체적(主體的)으로 살려면 자신을 외롭게 놓아두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쾌락(快樂)을 찾지 말고, 진리를 찾으라.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시 77:6-7절)의 원문의 정확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 밤에 나의 한 노래를 회상하였습니다. 내 마음과 더불어 나는 말하였고, 그때 내 영이 살펴보았습니다”(KNJ 私譯, 시편 77:6)
그는 자기 마음과 대화를 나눴으며, 영으로는 살펴보았다(). 그가 살펴본 것은 자신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의 사태였다.
불안(不安)의 감정은 깊은 곳에서 파도쳤고 마음에는 물결이 일어났다.
이것은 경건한 시인들이 흔히 하던 경험(經驗)이다. 현실에 불안해하는 자아와 약속을 신뢰하는 자아 사이의 대화였다.
그러나 말을 거는 이도 시인(詩人) 자신이었고 대답하는 이도 자신이었다.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시 77:8-9)
그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도 끝났고 약속하심()도 영원히 폐하였는가?
그는 염려하였다. 예전에 그토록 넘치게 주시던 은혜(恩惠)를 이제 거두시고 더 이상 자신과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는가?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대한 의심(疑心)이 아니었으니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는 갈망이었다.
염려(念慮)하는 자아에게 믿음의 자아가 말했다. 그 말은 고통 속에서 외로웠던 시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었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시 77:10-11)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시 77:10). 비록 잠시 고통(苦痛) 속에 홀로 버려진 느낌을 받았으나, 곧 생각을 돌렸다.
시인은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였다(시 77:11).
홀로 버려진 것 같이 외로운 느낌을 받았을 때, 시인(詩人)은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할 뜻을 세웠다.
* 고라의 자손과 예배의 회고(시 42:4)
신앙은 하나님을 추억(追憶)하는 것이다.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빛 가운데 기뻐하던 때를 기억하라. 희망(希望)으로 자신을 설득하라.
믿음(faith)은 의심을 꾸짖고 의심(疑心)은 믿음을 경계한다. 이것은 두 마음이다.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둘은 신자 안에서 공존한다.
우리가 속지 않기 위해서는 의심하는 이성(理性)이 필요하고, 믿기 위해서는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믿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그것은 약속(約束)을 붙드는 마음이다. 신앙의 요체(要諦)는 한 가지 사실을 믿는 것이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너희 중에 행하여…”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Immanuel). 하나님이심과 “함께하심”은 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存在)와 성품은 구별될 수 없다. 성품(性品)에 대한 경험 없이 존재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전제로 한 것이다.
심판(審判)하시는 임재를 “함께하심”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말년에 웃시야가 나병에 걸렸을 때 누가 그를 치셨는가? “…여호와께서 치시므로…”(대하 26:20).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했던 헤롯이 벌레에 먹혀 죽었을 때 그를 면전에서 심판하신 이가 누구였는가?(행 12:23). 우리는 그것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언제나 “절대적 선(善)하심과 영원한 인자(仁慈)하심으로 돌보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와 함께하신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信仰)이다.
* “내가 너와 함께함을 보여주리라”
III. 적용과 결론
인생은 유한하고 시간(時間)은 흘러간다. 즐거울 때는 하나님을 생각할 틈이 없고, 슬플 때는 그분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러는 동안에 자기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닌 것 같은 우리의 인생은 저 멀리 아득한 허공(虛空) 속에 흩어진다.
누구에게나 고통(苦痛)은 있다. 시인은 그 밤에 “지존자의 해,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승리했다. 이 밤에 당신이 부를 노래는 무엇인가?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13 2022. 9. 18 주일 낮예배
< 내 음성으로 부르짖을 때 >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 77:1)
I. 본문해설
II. 내 음성으로 부르짖을 때
A. 음성으로 기도함
1. “내 음성으로”
2. “하나님께”
3. “부르짖으리니”
B. 들으시는 하나님
1. “나에게”
2. “귀를 기울이시리라”
III. 적용과 결론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14 2022. 9. 25 주일 낮예배
< 헤아리시는 하나님 >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1-2)
I. 본문해설
II. 헤아리시는 하나님
A. 내 마음을 아심
B. 왕이신 하나님
C. 부르짖는 기도
III. 적용과 결론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15 2022. 10. 2 주일 낮예배
< 기도가 하나님 아는 길이다 >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3-7)
I. 본문해설
II. 기도가 하나님 아는 길이다
A. 하나님을 바람
1.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2. “아침에 … 아침에”
3.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B. 하나님을 알 때
1. 악을 미워하심
a. 오만한 자를 버리심
b. 거짓말하는 자를 심판하심
c. 잔인한 자를 싫어하심
2. 선하신 하나님
C. 예배할 결심
1. 고난 중에 사랑받음
2. 주의 집에 들어감
3. 하나님을 예배함
III. 적용과 결론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16(끝) 2022. 10. 9 주일 낮예배
< 기뻐하며 사는 길 >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시 5:8-12)
I. 본문해설
II. 기뻐하며 사는 길
A. 주의 길을 곧게 함
1. 원수 때문에 의로 인도하심
2. 주의 길을 눈앞에 곧게 하심
3. 배역하는 자들을 쫓아내심
B. 기뻐하며 사는 자
1.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
2. 주의 보호로 기뻐 외침
3. 주 이름 사랑의 즐거움
C. 은혜로 지켜주심
1. 고난 받는 의인을 복 주심
2. 방패처럼 그를 지켜주심
3. 부르짖는 자를 돌아보심
III. 적용과 결론
1. 마음이 괴로운 날의 선택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6-11)
녹취자 : 조복령
개인기도의 문을 열 때. 하늘 가득 폭풍우와 함께 머물던 먹구름이 물러갑니다. 아직도 구름이 두꺼운데, 그 사이를 비집고 쏟아지는 한줄기 햇살이 찬란합니다. 여전히 하늘은 어둡지만, 그것은 희망입니다. 굴속에 갇힌 것처럼 방황할 때, 우리의 희망은 쏟아지는 햇볕이 아니라 실낱같은 빛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바깥세상으로 통할 길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는 여러분의 개인기도 생활의 부흥을 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기도의 본질을 알게 하고 실천할 힘을 줄 것입니다. 환경을 이기는 간절하고 지속적인 기도생활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을 실제로 누리는 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소서. 기도로 사소서.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한 역사를 기록했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문제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 고통이 넘치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명랑하게 사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가치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많은 것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유력한 가문에 시집을 갔고 남편은 자신을 더 없이 사랑해주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자에게도 한처럼 맺힌 상처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아들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아들이 가문을 이어가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아들을 ‘벤(בֵן)’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벤허(Ben-Hur)’라는 영화 제목이 히브리어입니다. ‘훌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벤(בֵן)’, '아들'이라는 이 단어가 동사 ‘바나(בָנָה)’에서 왔는데 이것은 ‘세우다’라는 뜻입니다. 여자가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음으로 비로소 집안을 세울 수 있는 것이고, 자신의 입지도 확고해지는 것은 성경의 이스라엘이나 우리 조선시대에나 유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에게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위치는 늘 불안했고 엘가나는 당시의 풍습을 따라 가문을 잇기 위해 브닌나라는 여자를 첩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다행히 이 여자는 아이를 낳게 되었고 여러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가나는 변함없이 일편단심으로 본부인인 한나에게 충실했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한나를 시기한 브닌나는 끊임없이 한나를 격동시켰고 괴로움 속에서 이 여자의 시름은 점점 깊어갔습니다.
II. 마음이 괴로운 날의 선택
오늘 성경은 마음이 괴로운 이 여자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보여줍니다.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로 올라갔고 거기에 있는 하나님의 성막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따라 재물의 분깃을 받게 되었는데 그 재물 중 아내 브닌나와 자녀들에게 주고 한나는 자식이 없었지만 갑절이나 그에게 주어서 위로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브닌나의 마음은 더 시기와 질투가 치밀어서 한나에게 복수하듯이 격동시키고 괴롭혔습니다. 한나는 결국 먹을 수도 없었고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괴로운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엘가나가 조용히 다가와서 “그대의 마음이 어찌하여 슬픕니까?”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도 더 낫지 않습니까?”라고 따뜻하게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이 위로 앞에서 한나의 마음은 진정한 위안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이제껏 선택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선택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오늘 세 단계로 구분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A. 여호와 앞에 섬
첫째는 여호와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 1:10) 이 여자는 이 어려움을 처음 겪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년 제사를 드리러 실로에 올라갔고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으니 이는 자신에게 아들이 없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한나는 하나님 앞에 서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삼상)1장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심으로 한나가 아이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한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브닌나에게 멸시와 모욕을 당하였고, 집안을 세우지 못한다는 가책 때문에 이 여자는 자기 자신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슬픈 여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 이유가 ‘마음이 괴로워서'였다고 말합니다. 남편의 극진한 사랑과 따뜻한 위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왠지 이 날은 남편의 그런 따뜻한 말도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괴로움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결국 그는 이제껏 해보지 않은 한 가지 일을 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많은 인생의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며 살아가야 될지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실패에 익숙해진 나머지 체념하고 포기하면서 살아갑니다. 혹은 매일매일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그 괴로움을 어떻게 이기고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지 속에서 젖은 짚단을 태우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문제를 주시는 것은 그 문제를 통해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관심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가 계속 우리를 괴롭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가 계속 문제로 남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하고 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를 더욱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첫 번째 실마리를 잘 풀 줄을 모릅니다. 문제라는 자물쇠로 잠겨진 상자 바로 옆에 하나님은 항상 해결의 열쇠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 열쇠는 우리의 마른 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향하고 세상 앞에 서 있는 채로 우리는 그 열쇠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지만 그런 시도는 번번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주신 데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여호와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문제에 봉착되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행복하십니까?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이 스스로 이끌어 가고 있는 자유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여러분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가끔 기도했는데도 응답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두 기도 응답을 통해서만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제저녁에 아침밥을 먹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어도 아침밥을 먹었습니다. 살아서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제 아침에 눈을 뜬 것처럼 오늘 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우리 인생에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도를 하게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기도로 해결해 주시는 일들이 있고, 매우 특별한 기도를 통해서만 해결해 주시려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일들은 일반적인 기도로는 해결되지만 (특별한 일은) 일반적인 기도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특별한 기도를 원하는 제목은 특별한 기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여자는 결국 아이를 갖지 못했고, 멸시와 모욕을 당했고, 남편의 사랑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괴로움이 극에 달하게 되었을 때 이 여자는 복수를 꿈꾸거나 인생을 접는 것 같은 나약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괴로움은 오래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 선 적은 없었습니다. 특별한 어려움이 지속되었으나 그는 특별한 기도를 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비로소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어떠한 위로로도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마음을 모아 하나님 앞에 자신을 쏟아 놓게 되었습니다.
B. 눈물로 기도함
그것이 바로 그녀가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 1:10) 이 통곡은 히브리어로 ‘바카(בָּכָ֖ה)’라는 동사입니다. 이것은 남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내어서 엉엉 우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그렇게 엉엉 울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럼 이 여자가 이전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까? 상황을 한번 보십시오. 어떤 여자가 눈물을 안 흘리겠습니까? 아이는 없고 남편은 첩을 들이고 첩은 아이를 얻고 아이를 얻었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을 멸시하고 격동케 하고 자기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무시를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날들이 지속되었는데 한나가 왜 울지 않았겠습니까? 어쩌면 그녀는 매일 밤 눈물로 자신의 베개를 적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다만 그냥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눈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이 문제를 통해서 한나에게 매우 특별한 것을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도하며 통곡하며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이 여자에게 아이를 안 주셨겠습니까? 브닌나에게 아이를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한나에게는 주실 능력이 없으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약에서 위대한 인물 네 사람을 꼽으라면 저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사무엘과 다윗을 꼽고 싶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사무엘은 이스라엘에 왕정을 도입한 사사였습니다. 그가 최초로 이스라엘의 왕 사울을 기름 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그릇할 때 또한 그를 폐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다시 왕 위에 세우는 위대한 일을 이루어 이스라엘 왕국의 토대를 놓았던 인물이었습니다. 탁월한 정치가였을 뿐 아니라 뛰어난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선지학교를 여는 시조가 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무엘은 앞에 세 사람과 함께 구약에 위대한 봉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인물이고 그 인물을 통해서 위대한 산줄기들이 이어져 가며 이스라엘의 구약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이런 아이를 낳고 교육시킬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사무엘을 태어나게 하시기 전에 위대한 인물을 태어나게 하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그런 아이로 기를 수 있는 어머니를 먼저 만드신 것입니다. 그는 매우 위대한 인물일 것이기 때문에 평범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평범한 어머니에게서 양육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특별한 섭리 속에서 한나를 (예전에도 경건하고 착했을지 모르지만) 이 어려운 문제를 통해 생애적으로 여호와 앞에 서게 하시고 그분 앞에 마음을 쏟아 놓는 간절한 기도 속에서 위대한 인물을 양육할 수 있는 어머니의 그릇을 만드시기 위해서 기도의 응답을 연기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그날이 왔고 한나는 세상에 모든 의지하던 것들을 버리고 여호와 앞에 서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문제를 아뢰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이 문제를 가지고 예전에도 씨름했지만 해결할 수 없었고, 예전에도 기도를 드렸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녀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구속한 주님만을 바라보는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게 되었고 어느 한 순간에 그 여자의 마음에서 샘물이 터지듯이 기도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자신의 마음속에 한처럼 맺혀 있는 이 기도 제목을 위하여 통곡과 눈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쏟아 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섬으로써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올바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심령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매우 특별한 열심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간절한 기도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모두 쏟아 부으며 인생의 근본적인 동기를 정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인 기도의 제목은 일반적인 기도로 응답해 주시고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위대한 일들만 보며 감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들을 보면서 기도의 응답 속에서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행복을 매일매일 누리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는 사람은 응답을 받게 되고,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강하게 느꼈던 경우가 두 번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여러분이 회개했을 때 하나님이 용서해 주심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증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것을 응답해 주시는 것을 보며 감동을 받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느꼈을 것입니다. 결국 기도와 사랑은 함께 순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기도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응답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그렇게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때로는 기도해도 안 들어주시는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안 들어주시는 적도 있지만 어떤 경우엔 그럴 리가 없는데도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나 혹은 하나님이 특별한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액셀레이터를 밟으라는 뜻입니다. 특별한 기도의 제목은 특별한 기도 속에서만 해결을 볼 수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두 주 동안 미국 출장을 갔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거기에 있는 아들과 아들 가족들과 함께 만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돌아올 때 생겼습니다. 지방 공항에서 뉴욕으로 오고, 뉴욕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로 모두 예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여섯 시에 첫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 여덟 시 삼십 분쯤 도착을 하면 천천히 수속을 밟고 쉬다가 열두 시 오십오 분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오게끔 오래전에 예약을 모두 해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공항에서 여섯시 비행기가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인해서 두 시간 이십팔 분이 연착된 것입니다. 저희가 뉴욕에 도착할 때 이미 비행기는 문을 닫고 떠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도 도저히 그 시간에는 국내선에서 국제선으로 체크인을 하고 갈아탈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뉴욕에 내리면 비행기는 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표를 구할 수 있겠지 하고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표가 한 장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 표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어마어마합니다. 제가 본 표는 딱 두 장이 나온 게 있는데 이코노미석 티켓 두 장이 천칠백만 원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르는 게 값이고 제일 비싼 거는 두 장에 삼천만 원짜리가 나와 있었습니다. 도저히 그걸 타고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난 여기 와서 설교를 해야 됩니다. 생각이 바뀌어서 얼마의 돈을 지불하든지 간에 난 와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서치를 하고 들어가서 예약을 하는 상황에서 표는 계속 팔려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일체 없었습니다. (어떤 자리도) 아는 사람하고 누구의 도움을 받아도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공항에서 좀 혼란스러웠고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한 삼십 분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제 마음속에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지만 해결하실 것이고, 내가 주일날 한국의 강단에 설 수 없다면 그것도 또 하나님의 뜻이 계시겠다고 해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오늘 또 새 가족 환영회가 2년 반 만에 있는 날입니다. 내일은 또 교역자 수련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마음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알아봤습니다. 결국 표가 없었습니다. 돈을 아무리 주어도 살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비행기를 두 번씩 갈아타고 오는 거라도 찾아봤는데 그것조차도 표가 없었습니다. 결국 인터넷에 모두 제로라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비서가 이십여 분 동안 자동 응답기를 틀어놓고 결국 상담원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다 설명했더니 이 사람이 우리를 영순위로 올려놓고 비행기 표를 간신히 두 자리 구해서 기적적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교회 여러분에게 문자를 보내고 교역자들과 사모님들 심지어 당회에까지 올리고 우리의 이 어려움을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놀랍게 응답해 주셔서 여기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서서 지금 오늘 여러분에게 설교하고 있는 것이 꿈만 같습니다. 그렇게 헤아릴 수 없이 수없이 출국했다 입국했지만, 어제처럼 감격적인 마음으로 인천공항에 발을 들여놔 본 것은 처음입니다. 하여튼 그렇게 기적과 같이 왔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 모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위급할 때 우리의 일치한 마음으로 드리는 연합의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가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인생의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그 문제를 그냥 평생 지고 살라고 하나님이 주신 문제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이 나라에 태어난 것, 이 가정에 태어난 것, 우리 엄마 아빠가 바로 그런 사람인 것, 등등 내가 여자로 태어나고 남자로 태어난 운명처럼 주어진 것들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 바꿀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들은 기도로 바꿀 수 있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그 기도를 아직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 일을 기뻐하시지 않으시거나 혹은 여러분에게 특별한 기도를 원하시기 때문에 응답을 연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이용하여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애쓰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어려움을 통하여 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우리를 사람답게 바꾸시려고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여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전에도 흠 잡을 수 없는 경건한 여자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여호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의 기도 샘이 터지고 개인 기도의 문이 열리며 그의 마음은 진심으로 물처럼 하나님 앞에 쏟아졌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이 여자는 변하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아이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한 위대한 지도자를 낳을 만한 여자, 그리고 그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길러낼 수 있을 만한 신앙의 깊이와 넓이가 있는 여자로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오늘날 여러분을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올바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학 입시라는 미명 하에 아이의 교회 출석을 방해하고 심지어는 그 아이를 신앙으로 잘 권면하기 위해서 연락하는 교역자들의 전화를 무시하고 선생님들의 권면을 하찮게 여기며 아이들의 공부를 신앙보다 우선 세우는 부모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런 부모들에게서 어떻게 훌륭한 인물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가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 아이에게 믿음을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대학이 소중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밥은 벌어먹고 살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경쟁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이니까 말입니다. 결국 한나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위대한 인물을 한나를 통하여 주시기에 앞서 그 여자를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꿔놓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어려움을 통해서 여호와 앞에 서게 만들었고 남편의 사랑을 극진히 받으면서도 이 여자는 그것으로 위로받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문제라는 상자 옆에는 해결의 열쇠가 있는데 그 전까지 이 여자는 문제의 상자는 보았지만, 그것이 자물쇠로 닫혀져 있는 것까지는 발견했지만, 열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은 이 여자에게 시름이 되었고, 시름은 상처가 되었고, 마음 깊이 고통은 그의 심령까지 썩어 들어가게 만들었습니다. 살아있으나 사는 것이 아니었고, 결혼했으나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그녀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브닌나에게 복수를 해달라고 천벌을 내려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고, 남편에게로부터 받은 섭섭함에 대해 첩을 들인 사건에 대해 원망하는 기도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며 하나님 앞에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여자인가 하는 것을 돌아보며 주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특별한 기도가 이 여자의 기도의 제목을 해결해 주는 놀라운 응답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특별한 기도를 드리신 적이 언제 있습니까? 여러분 인생에 문제가 많은 것 같지만 문제를 모두 실로 잊고 더듬어 가보면 결국 다른 많은 문제는 하나의 문제에서 온 것입니다. 이 여자에게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자는 다른 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브닌나로부터 받았던 상처나 남편으로부터 받았던 실망 같은 것, 그런 계산하지도 않았고 떠올리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그 자신에게 있는 문제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는 그 한 가지 문제 앞에서 여호와 앞에 섰으며 그 문제 앞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심정을 토하며 주 앞에 눈물과 통곡으로 특별한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 이 특별히 드린 한 번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단번에 이 여자에게 응답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특별한 개인 기도를 드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결코 여러분의 문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시기 때문에 나를 덜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문제를 방치하고 있고 그로 말미암아 나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신세 한탄 같은 거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문제로부터 헷갈리지 말고 문제의 중심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결정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찾아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 앞에 특별한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내 인생의 이 문제에 메여 운명처럼 종처럼 살 수는 없다.’ ‘내가 이 문제를 반드시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고야 말리라’ 결심을 가지고 주 앞에 나아가십시오. 새로운 인생이 여러분을 위하여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옛말에 ‘가난은 자랑하지 말고 병 자랑은 하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어려운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한탄하듯이 털어놓지 마십시오. 열 명 중 아홉 명은 여러분의 문제에 관심이 없고 한 명은 ‘그거 잘 됐다’, ‘싸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 제목을 나누는 일은 놀라운 효과를 가져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여러분의 손을 붙들고 눈을 쳐다보며 간절히 내가 이런 어려운 상황에 있는데 나를 위해 잊지 말고 기도해달라고 하면 그 표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기도 시간마다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기도 부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안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본인이 기도를 별로 안 하는 사람들이 기도 부탁을 안 합니다. 자신이 응답을 받아본 생생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거의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응답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에게 기도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부탁합니다. 그것은 놀라운 힘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 본인은 하나도 감격해 하지 않는데 기도를 해준 나는 감격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위해 기도했고 그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감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해주는 나는 그 의미를 압니다. 결국 그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해도 나는 저를 위해 기도할 때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느끼며 하나님의 생생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못 오면 못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새 가족 환영해 펑크 나고, 교역자 수련회 못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응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할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지를 하나님이 보여주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기도가 오히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분의 품 안에 의지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 기도가 신앙을 가져오는 이유고, 신앙이 결국 우리를 기도로 데려가는 이유입니다. 가난은 자랑하지 마십시오. 친구들 만나서 푸념을 늘어놓지 마십시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이야기하며 신세 한탄하지 마십시오. 남들은 여러분의 일에 관심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형제자매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십시오. 교역자에게 기도를 부탁하십시오. 그들의 기도가 여러분의 인생을 바꿔놓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그들의 기도가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 앞에 타오르는 향기로운 향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에 끊을 수 없는 것들을 끊어버리고, 이 세상에 붙잡아둘 수 없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붙잡게 만드는 놀라운 힘을 가져옵니다. 냉랭하던 가슴에 불을 지르고 동토의 땅같이 얼어붙은 마음에 봄의 시냇물이 흐르도록 만들어주는 놀라운 생명의 능력이 이 기도 속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국 한나는 문제의 상자 옆에 있는 열쇠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열쇠를 가지고 자물통에 넣고 열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간절히 매달리는 과정을 통해 그는 한 시대를 바꾸는 위대한 이스라엘 역사의 인물을 낳을 어머니로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수많은 간증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일반적인 기도 말고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특별한 기도로 나아가 응답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헌신을 서약함
마지막 세 번째는 헌신을 서약한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의 기도 제목이 구체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지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그 많은 문제들은 오직 한 가지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브닌나에게 복수를 구하는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엘가나를 바꿔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거나 혹은 브닌나의 자식들을 저주하는 기도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일에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공기를 가르고 표적을 향하여 곧장 날아가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은 단 하나의 화살을 쏘아 주님의 보좌로 올려 보냈습니다. 그것은 “아들을 주십시오.”라는 기도였습니다. 여기서 배우게 되는 사실은 우리의 기도가 아주 구체적이고 집중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생의 부수적인 문제와 그 부수적인 문제를 생산해낸 근원적인 문제를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도의 화살은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인 문제를 향하여 곧장 쏟아 부어지도록 과녁을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다 쏟아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좋게 해주십시오.' ‘잘하게 해주십시오.' ‘복 받게 해주십시오.' 이런 기도는 백번 기도해도 응답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어려움 속에 있으면서도 기도가 구체적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생각하기 싫어하는 지성의 게으름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문제에 부딪혔을 때 회개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돌이켜) 회개하여 ···”(계 2:5上) 회개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으니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인 것입니다.
이 여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가 아이가 없었어도 아주 착한 첩이 들어와서 자신을 매우 존경하고 사랑했더라면 이 여자는 이렇게 서럽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런 문제가 부수적인 문제임을 이 여자는 알았습니다. 진짜 근본적인 문제는 브닌나도 아니고, 브닌나가 낳은 아들도 아니고, 엘가나도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들이 없다는 하나의 문제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곧장 그것을 위해 하나님 앞에 오직 한 가지만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가야 하는데 비행기 표가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습니다. 절대 없습니다. 모든 비행기가 만석이었습니다.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해졌습니다. 결국 표를 끊다 포기하고, 또 끊었다가 취소하기를 몇 번 하였습니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꼬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기도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 아내의 기도가 재미있었습니다. “하나님! 비행기가 만석이랍니다.” “모든 사람이 토요일 날 한국에 도착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 두 사람만 뽑아내 주시고 빈자리를 만들어서 우리를 보내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비서가 열심히 통화를 했는데 기가 막히게 두 사람이 모든 수석을 끝내고 비행기를 탑승하려고 했는데 탑승 못할 사유가 생겼습니다. 탑승이 거절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자리가 남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상대방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그 두 장의 표를 홀딩하고 있다가 한 시간 후에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토요일 날 도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꼭 토요일에 도착해야 될 사람이었습니다.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그러면 아주 구체적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리고 놀랍게 하나님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우리의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응답을 확인할 수 없는 흐리멍덩한 기도 하지 마시고, 포괄적인 기도 하지 마십시오. 간절한 문제를 찾아내고 거기에 기도의 화살을 집중적으로 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여러분, 한나는 결국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놀라운지 아십니까? 그렇게 아이를 낳게 되었으니 그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안 아팠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젖 뗄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가 아마 돌쯤 되거나 아니면 최장 두 돌 전에는 젖을 떼지 않습니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그 아들을 어떻게 해서 얻은 아들인데 한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갔고 서원한 대로 그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고 홀몸으로 내려왔습니다. 이전에 한나 같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문제를 통해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변화된 한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고 그 아이를 양육하면서 위대한 지도자로 이스라엘을 지키는 위대한 일꾼으로 길러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덜 사랑하시거나 혹은 능력이 모자라서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더 간절해지거라.” “내 앞에 서거라.” “더 특별한 기도를 내 앞에 드리거라.” “내가 특별한 응답을 너에게 주리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을 지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오늘 이 말씀을 깨닫고 새롭게 결심하십시오. 운명에 매어 사는 부끄러운 삶, 자유가 없는 삶을 버리십시오. 개인 기도의 문을 활짝 여십시오. 그리고 언제든지 쏟아지는 폭포수와 같은 기도로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가 자유를 얻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 여자가 마음이 슬플 때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삼상 1:12-18)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인생에 있어서 힘든 것은 무엇이니 해도 슬픔이 제일일 것입니다. 가벼운 슬픔은 인생을 멈춰 서서 생각하게 만들고 세상의 헛됨을 직시하도록 만들어 주어 우리에게 때로는 쉼을 줍니다. 그러나 극도의 슬픔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삶의 의욕을 꺾어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엄습하는 큰 슬픔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설 때 그것은 우리의 피를 마르게 할 만큼 큰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 제3막 5장에서 로미오의 입을 빌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마른 슬픔이 우리의 피를 마시는구나.' 이 대사는 영국에 당시 있었던 격언 중에 한 토막인 소위 ‘슬픔의 목마름'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시로 읊은 것입니다. 여기서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슬픔은 게걸스러울 정도로 우리의 생명을 빨아먹으며 결국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다는 슬픔의 비정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오늘 그런 슬픔을 똑같이 겪었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여자는 모든 인간들이 겪는 극도의 슬픔 때문에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고 심령은 혼란스러워졌고 그의 정신은 파괴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 자신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는 극단의 슬픔 앞에서 올바른 선택을 함으로써 오히려 그 슬픔을 통해 삶의 새 소망을 보았던 여자가 있습니다.
II. 그 여자가 마음이 슬플 때
그러면 도대체 그 여자는 마음이 슬플 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A. 마음의 고통
제일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마음의 고통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삼상 1:15) 이 여자는 너무나 엄습하는 그 슬픔과 고통에 넋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서 오랜만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게 되었습니다. 그는 삶의 호흡에 남은 기운까지도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고 오래간만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자 그는 마음이 후련해졌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어를 초월해서 홀로 입을 중얼거리며 하나님 앞에 묵상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늙은 제사장의 눈에는 이 여자가 술을 먹고 성소에 올라온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힘이 없어서 무의식중에 그렇게 말없이 지껄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대답했습니다.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대답한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결국 이것은 한나의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는 이 구절을 히브리 성경에서는 “나는 영이 괴로운 여자다"라고 ‘루아흐(רוּחַ)’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여러 의미로 쓰이지만 집약해서 말하자면 ‘인간의 마음에 가장 내밀한 곳에 있는 정신의 정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靈)’이라고 많이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 영(靈)이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데 그 “영(靈)이 괴로운 여자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여자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를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상황에 끌려가는 삶’이 있고 ‘상황을 끌고 가는 삶’이 있습니다. 종종 아주 체구가 작고 어린 여성들이 큰 개를 끌고 산책 나오는 광경을 봅니다. 목줄을 당연히 채웠고 가녀린 손으로 개 줄을 두 번 감아서 손목에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가 엄청 큽니다. 그런데 뭔 일인지 주인의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주인은 천천히 걸어가자는데 미친 듯이 뜁니다. 주인은 그만 가자는데 이놈의 개는 계속 잡아당기면서 가는 것입니다. 결국 주인이 이 개를 통제 못합니다. 개가 뛰면 그 주인도 미친 듯이 뛰고, 개가 멈추면 주인도 멈추는 이상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 개 같은 상황이 자기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도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밤까지 쉴 새 없이 상황과 싸우고 뭔가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상황을 전개하기 위해서 애쓰는데 상황이 통제가 안 됩니다. 그리고 개 같은 상황에 계속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한참을 끌려다니다 보면 도대체 개가 사람인지 개 주인이 개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지금 삶이 혹시 이런 삶이 아닙니까? 매일 버르적거리고 무언가 일하지만, 삶을 개선해보려고 애쓰지만, 왠지 나의 삶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서 개 같은 상황이 되고 아주 큰 개가 되어서 자기를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자신의 삶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만 처지에 있는 분들 없습니까? 기도 안 하고 상황이 꼬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죽기 전까지는 이 괴로움이 계속될 것이고, 결국 삶은 어떠한 자유도 없고 매일매일 상황에 이끌려 다니느라고 자기의 계획도 잡을 수가 없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삶의 고삐를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크게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큰일을 하고 아주 크게 무엇인가 임무를 맡았다면 여러분의 삶은 굉장히 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마음대로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든지 간에 어쨌든 개 같은 상황에 주인이 개처럼 끌려다니는 상황이 돼서는 안 됩니다. 거의 말하자면 송아지만 한 개가 사람을 끌고 달리고 사람은 개 줄에 매달려서 땅바닥에 질질 끌려다니면서 옷이 찢어지면서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게 삶입니까? 개를 없애버리는 것이 낫지 그게 무슨 삶입니까? 개한테 끌려다니는 삶이 그게 삶입니까? 그게 주인입니까? 그러니까 삶의 고삐를 놓지 않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건 여러분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러분이 직감적으로 알 것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크고 내가 어마어마한 일을 하고 있어도 삶의 고삐를 내 손에 틀어쥐고 내 마음 하나로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말을 기억해 보십시오. 바람을 가르듯이 기수가 말을 달리지만 한순간에 말의 재갈을 잡아 차면 말은 하늘로 솟구치면서 급정거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자기와 체구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하게 힘이 세고 큰 말이지만 고삐를 자신이 쥐고 있고 자신이 주체성을 가지고 그 말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통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 중에는 이런 삶의 고삐를 놓쳐버린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알량한 자유를 찾는답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고 자신의 안목에 좋은 대로 살다가 결국 이렇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삶은 뭐냐 하면 상황을 끌고 나가는 삶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고하게 잡아주고 언제든지 아무리 상황이 커도 자신의 통제를 받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자유인의 삶이고 주체의 삶입니다. 개가 산책을 할 때 미친 듯이 주인과 상관없이 달리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걸 처음부터 못 하게 해야 됩니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미친 듯이 달려가려고 하면 그걸 확 잡아당겨서 목에다 고통을 줘야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게 아니구나.’ 라는 걸 깨닫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개를 따라서 주인이 산책하는 길이 아니라 주인을 따라서 개가 산책하는 길이라는 것을 아예 정신 속에 확 심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개를 훈련시키는 장소가 우리 어렸을 때 집 옆에 있었습니다. 굉장히 넓은 개 훈련소였습니다. 개를 데리고 가면 반드시 어린 강아지만 오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꽤 큰 게 더 옵니다. 그런데 일단 개 훈련사가 하는 일은 개와의 첫 대면입니다. 첫 대면에서 쏘는 듯한 눈빛으로 개를 제압합니다. 개도 훈련사에게 덤벼들어 꺾어보려고 하는 기세가 있는데 그거를 때리지는 않더라도 채찍이나 냄새 같은 걸로 위협을 가해서 꼼짝 못 하게 꼬리를 내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개들은 막 짖고 난리를 치다가도 개장수가 나타나면 그 냄새를 맡고 모두 꼬리를 내리고 끙끙거립니다. 그게 개장수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무엇인가 카리스마를 풍겨서 첫 번 만남에서 개를 완전히 제압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훈련이 가능한 것입니다. 훈련사를 우습게 아는 개는 훈련이 안 되는 것입니다.
상황이 여러분을 우습게 보지 않도록 그거를 제압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마음으로 정신적으로 그것을 제압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가면 여러분의 인생은 자유도 없고 개 같은 상황에 계속 끌려다니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끌려다니는 것이고 그 속에서 고통은 점점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황에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상황을 끌고 가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상황에 끌려가는 삶은 끝이 없습니다. 미친개가 달려가는데 무슨 목적지가 있어서 달려갑니까? 무슨 의미를 가지고 개가 달려갑니까? 그냥 충동을 받아서 달려가고 싶으니까 달려가는 것입니다. 주인은 아무 이유도 없이 가치도 없이 그냥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산책입니까? 그게 무슨 개와 함께 산보하는 것입니까? 개의 종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대해서 맺는 관계도 바로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나가 왜 이렇게 영이 괴로운 여자가 되었습니까? 정신이 고통 받는 여자가 됐고 마음이 괴로운 여자가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결국 자기 삶의 통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시집을 갔습니다. 애를 못 낳았습니다. 첩은 애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시댁의 관심은 첩에게 쏠렸습니다. 이제 그 첩에서 낳은 자식이 가문을 이을 처지가 되었고 자신은 설 곳이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나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신의 집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여자의 위치는 그 당시에 아들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데 결국 자신의 집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고통, 무시와 원통함과 격분됨을 누구한테 쏟아 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아주 신앙도 없고 못된 여자 같았으면 아마 폭력을 행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가나에게 독촉을 해서 그 여자를 빈손으로 아이만 남겨놓고 쫓아 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막 가는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인생은 오히려 막 가는 여자보다 더 힘들어졌습니다. 결국 상황은 통제가 되지 않고 현실은 개 같은 상황이 되어서 이 여자를 질질 끌고 다니고 피투성이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견디면서 꽤 오랜 세월을 지내온 것입니다.
그런데 참았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이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이 여자가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브닌나의 기세는 점점 등등해졌고 자신을 깔보고 무시하는 것은 마치 종에게 하는 것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스스로의 부끄러움 때문에 결국 자존감은 한없이 낮아졌고 삭이고 삭이고 삭이다가 결국 마음에 병든 여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게 우리의 고통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마지막 사건입니다.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 고통을 받고 그걸 참고 견디고 삭이고 미워하고 원통해 하고 분노해 하는 속에서 결국 상황은 큰 개같이 되어서 여러분을 질질 끌고 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생"이라는 것에 무슨 뜻인지 압니까? 인생은 ‘사람 인(人)’자입니다. 흔히 우리들은 옛날에 알고 있기를 사람 인자는 이게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설을 많이 들었잖아요. 거짓말입니다. 정확하지 않은 것이고 저도 옛날에 그렇게 얘기를 들었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이게 옛날 글자에 보면 사람이 공경을 하고 있는 표시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본분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인’이라고 하는 한자 글자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을 향해 사람을 향해 마땅히 자기의 처지를 알고 공경할 줄 아는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 뒤에 나오는 ‘생’이라는 글자는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 공경할 줄 아는 존재가 공경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면 결국 보십시오. 이 한나의 경우에는 올바른 공경함도 없었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자라고 하는 계시록의 말씀이 바로 생물학적인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생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육신으로 살아있으나 정신은 죽어 있습니까? 마음의 고통은 어떻습니까? 결국 그 마음의 고통을 어디서 해결합니까? 결국 이 여자는 이 마음에 깊은 고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 제사장에게 ‘나는 영이 괴로운 여자입니다’라고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오 여호와 앞에 내 심경을 통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한나는 이 엄습하면 죽음에 이를 것 같은 이 무서운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는 기회로 삼았습니까?
B. 영혼을 쏟음
그 두 번째가 바로 영혼을 쏟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말 성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오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입니다’ 왜 이렇게 변역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에포크 에트나 라아도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여호와 앞에 나의 영혼을 쏟아부었을 뿐입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네페시’라고 하는 이 영혼이라는 단어가 목숨 마음 정서 등등을 가리키기 때문에 약간 의역을 하자면 ‘여호와 앞에 나의 마음을 물처럼 쏟아 놓았을 뿐입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비유입니까? 자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컵을 기울이고 있는 한 물은 컵에서 계속 쏟아지고 한 방울도 남지 않도록 모두 화분에 쏟아집니다. 이처럼 이렇게 자신의 영혼을 여호와 앞에 쏟아 놓았다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께 마음이 기울어져 마음에 남거나 접힌 것이 없이 그분 앞에 모두 다 털어놓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분 앞에 감출 것도 없고 기도가 끝나도 마음에 남은 것이 있어서 마음을 괴롭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있는 모든 찢기를 그분 앞에 물을 쏟듯이 다 쏟아 놓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가장 높은 경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기도의 한 형태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물같이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라’ 혹은 ‘물같이 마음을 쏟아 놓았나이다’라고 하는 이 고백이 바로 이런 기도의 정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들에게 더 설명 드리지 않아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런 기도를 드려본 사람들은 이미 감각적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 나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셨습니까? 그런데 마음을 쏟는 마지막 기도는 언제였습니까? ‘마음에 단 한 방울의 근심과 걱정 후회와 슬픔도 남지 않고 그분 앞에 모두 쏟아 놓았기 때문에 이제 내 마음은 그분 앞에 열납되었고 왕이신 하나님이 나의 심사를 모두 통촉하셨도다’라고 하는 그 시원함을 기도 속에서 느낀 적이 언제였습니까? 응답은 나중 문제이고 우선 심정적으로 내 마음은 이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내 마음은 당신 앞에 물같이 모두 쏟아 놓았으며 이제 내 마음에는 거리끼는 것이나 혹은 내 마음이 당신 뒤에서 움켜쥐고 있는 하등의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전부이고 이제 내 마음은 주님 앞에 모두 고하여졌나이다. 이런 기도를 드린 것이 언제였습니까?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찬양)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찬양)
내가 죽게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이렇게 마음을 모두 쏟아 놓아서 이제는 내 마음이 시원하게 되었나이다.’ ‘이제 내 마음에 당신을 향해 감추어진 사정이 없사옵나이다.’ 이런 마음이 들 정도로 마음을 쏟아 놓은 때가 언제입니까? 물에 젖은 장작이 할 수 없이 불꽃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불꽃보다는 더 많은 연기를 내면서 불 떼는 사람의 눈에 눈물이 쏟아지도록 눈을 파고드는 그 장작처럼 그렇게 기도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게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개같이 된 이유고 여러분이 삶을 끌고 다니는 대신 그 개 같은 상황에 끌려다니는 불쌍한 처지가 된 이유가 바로 이렇게 마음을 쏟는 기도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삶의 자존감도 이 기도와 함께 사라졌고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이 기도와 함께 같이 사라져 버렸으니 여러분은 젖은 짚단을 태우는 것처럼 연기가 가득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에 은혜의 심지는 꺼져가고 있고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었던 여러분의 자존심들은 상한 갈대가 되어서 부서져 버렸습니다. 아무 데도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않습니다. ‘그분 앞에 나는 마음이 괴로운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쏟아 놓지 않습니다. ‘마음을 물처럼 쏟아부어 그분께만 나의 사정을 아뢰리라’ ‘왕이신 하나님 나의 사정을 통촉해 주옵소서’라고 하는 간구의 은혜가 사라졌습니다. 최선의 위로는 잠시 잠깐 세상의 낙에 빠져서 감각의 유혹에 취해서 잠시 슬픔을 잊어보는 것이니 그는 극도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 마약의 힘으로써 잠시 현실을 잊어버리는 것과 유사합니다. 깨고 나면 더 엄중한 현실, 망가진 육체가 자신의 눈앞에 클로즈업되고 그 절망은 또 다른 절망을 부르니 슬픔이 슬픔에 연이어 그의 마음은 야위어져 가기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여러분의 삶입니다.
결국 그것이 여러분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 인간의 삶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감으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향한 예의를 갖추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인생의 존엄함을 깨달아 자기의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데 이바지한 것이 인생의 가치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우리의 머리나 엉덩이 우리의 어깨 우리 무릎이나 발에 쏟아 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는 우리의 마음에 쏟아 부어지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고 빈 마음이 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이오’ 라고 말씀하셨고 또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으니 넘치기 전에 그 마음이 빈 잔이 되었다는 것을 어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은 소위 외설 문화가 판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한 삼십 년 전에 생각할 수 없는 기준들이 영화에 도입되어서 이제는 뭐 외설이 외설도 아닙니다. 그런데 말이죠. 남자나 여자나 끊임없이 벗기려고 하지만 다 벗겨 놓으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론 아름다울지 모르지마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원래 다 벗겨 놓으면 그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건 사실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미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옷을 입는 것입니다. 옷 입은 사람이 벗은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것 그리고 또 적당히 벗고 적당히 입어야 아름다운 것이지 결국 이 벗음과 입음, 이 둘 사이에 조화를 이루면서 인간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여 가는 것입니다. 중동에 가면은 눈도 안 보여주고 여자들이 그 부르카를 이렇게 뒤집어씁니다. 뭐가 아름답습니까? 돈 많은 사람은 한 벌에 몇천만 원짜리를 입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눈에 하나도 안 들어옵니다. 어차피 시꺼멓고 여기에 망사 같은 거 하나 붙이고 눈만 이렇게 내놨는데 뭐가 예쁩니까? 모두 뒤집어써도 안 예쁩니다. 다 벗어도 안 예쁩니다.
결국 이것이 우리 인간은 우주에 버려진 존재처럼 태어난 거다. 그리고 우리의 인간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다. 그리고 인간은 결국 죽기 마련이다.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의 외로움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인간의 외로움의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렸을 때 설교 속에서 결국 인간이 외로운 것은 자기가 고유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내가 네가 아니고 네가 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외로운 것입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인생을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인간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기 위해서 옷을 모두 벗겨 놓고 계속 들여다보는 거와 똑같은 것입니다. 지루하지 않습니까? 옷을 입어야 아름답습니다. 이 옷이 바로 의미입니다. 그 의미를 누구로부터 부여받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의미를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부여받으려고 애쓰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게 안 됐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의미를 주시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유입니다.
그러면 결국 ‘마음을 쏟아 놓았다’는 이야기는 그 의미를 다른 데서 찾을 때 만족함이 없었던 한나가 결국 자신의 인생의 모든 고통과 울분을 하나님 앞에 모두 쏟아 놓으면서 자신의 인생의 고통의 문제를 여호와 앞에서 재해석했다는 뜻입니다. 그게 마음을 쏟을 때 일어나는 변화인 것입니다. 어느 날 마음의 슬픔과 고통을 짊어지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살았습니다. 특별작정 기도가 시작이 됐습니다. 그리고 반은 의무감으로 반은 원하는 마음으로 교회당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신기하게 그날 기도가 됐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통곡이 터져 나오고 자신의 마음을 모두 쏟아내었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쏟아져 나올 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의 고통이 자신 속에 파고들었고 예수와 하나 된 가운데 자신의 마음의 사연들을 주 앞에 모두 토해놓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물로 번복이 되었고 심령에는 텅 빈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을 다 쏟아내었습니다. 신기하게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예배당을 걸어 나갑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피며 걸어 나갔습니다. 교회 바깥에는 바람이 붑니다. 산뜻한 바람을 얼굴에 느끼면서 길거리를 걸어 내려가는데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에 놀라운 사랑이 샘솟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삶의 고삐를 자신이 쥘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 되고 말같이 컸던 개 같은 상황은 아주 작아져서 이제는 고양이만 한 상황이 되어버려서 능히 자신으로부터 자신이 그걸 통제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게 결국 한나가 하나님의 집에서 마음을 쏟아 놓으며 경험한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삶의 주체성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삶의 문제 언제는 없겠습니까?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고,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문제는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가 있는 것을 예전에도 알았고 또 성령 충만할 때는 그 문제가 있어도 오히려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삶의 고삐를 단단히 움켜쥐고 그 삶에 대해서 우리의 주체성을 행사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려움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마치 당구대에서 쿠션을 맞으며 결국 공이 원하는 곳으로 가서 다른 공을 타격하여 홀에 집어넣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게 내 인생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마음이 마음을 주 앞에 모두 쏟아 놓았을 때 받는 밝은 빛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또 이 설교를 듣고 또 그저 잠깐 깨었다 일어난 사람처럼 마음이 좀 위로를 받고 다시 옛날 생활로 돌아가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 그런 인생을 삽니까? 삶의 주인도 자기가 아니고 그렇다고 노예가 되고 싶지도 않은데 사실상은 나도 알지 못하는 것에 노예가 되어서 미친 듯이 끌려가느라고 결국 내 목에는 핏줄이 섰고 그 개의 목에 매여 있어야 할 줄들이 내 목에 묶여 있어서 결국 내 목을 조이고 자유를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지 않으면 그 삶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면서 지루한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무슨 희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꿈을 꿀 수가 있겠습니까? 비전을 말할 여유가 노예로 사는 사람에게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노예는 비전이 있으면 고달픈 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예는 노예 정신으로 살아가야지만 심간이 편합니다. 노예 정신에는 비전이라는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주인에게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폭력이든지 강압이든지 그리고 변덕이든지 아니면 미치광이가 하는 광기든지 간에 무엇이든지 간에 결국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게 비전이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예입니까? 여러분 인생의 노예입니까? 주인입니다. 개 같은 상황에 대해서 여러분이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개 같은 상황에 끌려다니고 있습니까?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그리고 언제까지 그렇게 살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여러분의 머리카락이 하얘져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래도 여러분은 살아야 되겠다는 그 란에다가 도장을 찍겠습니까? 아니면 인생과 이혼을 하시겠습니까? 누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을 한나가 쏟아 놓기 전까지 그는 개 같은 상황에 노예처럼 끌려다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마음을 쏟아 놓으면서 비로소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의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입니다. 더욱이 이 기도는 마음으로 드린 기도였고 여호와 앞에서 드린 기도였습니다. 어떤 기도는 여호와 뒤에서 드린 기도입니까?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모든 기도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아닙니다.
오래간만에 큰맘 먹고 기도하러 나왔습니다. 기도 숙제처럼 주어진 것도 있고 하도 기도하라고 목사님이 설교를 하니까 기도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눈을 감으면 온갖 상상들이 꽃잎처럼 떠돌아다니고 정신을 말할 수도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말은 나오는데 마음은 움직이지 않고 그런 씨름을 한참 하고 있노라니 정신이 피곤해집니다. 그리고는 엎드렸는데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깨어 일어난 자신을 보니까 너무 한심하고 답답해합니다. 두 마음이 싸웁니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자. 내 영혼이 왜 이럴까? 내 기도의 문이 왜 막혔을까? 하나님 앞에 이럴수록 더 매달려 봐야 되지 않을까? 두 마음이 싸웁니다. 어느 날은 이 마음이 이기고 어느 날은 저 마음이 이기기도 하는데 어떤 날은 결국 저 마음이 이겨서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발걸음에 자유가 있습니까? 왜냐하면 그거는 기도의 문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개인 기도의 문이 닫혔기 때문에 그는 기도하는 모양을 취했지만 아무것도 기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돌아가는 길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 같은 것도 있습니다. ‘기도가 안 되게 하신다면 나도 때려 치겠습니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갑니다. 결국 기도의 문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웅변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침묵은 웅변입니다. 네가 기도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돌이키라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은 기도의 문을 엽니다. 결국은 마음이 쏟아집니다. 물처럼 쏟아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며 그의 영혼은 죄의 무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깃털 같은 영혼이 됩니다. 마음을 쏟는 기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스펄전이 말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기도가 됩니까? 그러면 기도하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항상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안 됩니까? 그럼 기도하셔야 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기도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영혼의 위기라고 생각하고 기도의 문을 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여러분이 개 같은 상황에 노예처럼 끌려 다니지 않고 그 상황이 아무리 커도 그거를 움켜잡고 자신의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인생의 비전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 인생의 계획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 여러분의 소원을 자신의 인생에다가 비춰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쏟아 넣는 기도로 이런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응답을 받음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응답을 받았습니다. 간절한 기도에 대해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당시 엘리는 말하자면 사사이자 제사장이었습니다. 엘리는 이 여자의 하는 말을 듣고 대답했습니다. "···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삼상 1:17). 이것은 하나의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일종의 제사장의 축복이었고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한 어떤 의미에서 확증이었던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약에서 사용하던 아주 중요한 하나의 격언과 같은 것이고 평화를 비는 인사였습니다. ‘평안히 가라.' ‘평안’이 ‘샬롬’입니다. 이게 하나님과의 평화 그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사람과의 평화, 만물과의 평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를 누리면서 그 평화 속에서 사람들과의 평안을 경험하고 만물과의 평화를 경험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맛보는 최고의 정신적이고 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 존재 전체를 아우르는 진정한 질서의 안정감과 평안 그리고 행복의 극치를 ‘샬롬’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고통을 당했지만 한나는 샬롬 속에서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는 원통함이 쌓였고 격분함이 증대되었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엘가나와의 관계까지 위협을 받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마음 착한 여자의 이 마음속에서 브닌나를 향한 말할 수 없는 미움과 원망이 고개를 들게 되었고 이렇게 샬롬이 무너진 가운데 있었으니 무엇인들 그에게 기쁘겠습니까? 마음이 즐거운 사람에게 아침에 지저귀는 새는 노래하는 새이지만 한밤을 뜬눈으로 새우며 고통을 받았던 사람에게는 아침에 지저귀는 새는 우는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결국 만물과의 평화도 깨지고 그는 자신의 육체와 정신의 관계도 깨진 가운데 부조화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었습니까?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브닌나에 대한 미움으로 어금니를 깨물며 밤을 지새워도 결국 이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하나님 앞에 그 고통 하는 마음을 안고 나와 그 심정을 하나님께 쏟아놓고 주님께 평안을 주시겠다는 응답을 받기 전까지 이 마음의 번민과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것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심으로만 여러분이 진정으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가슴 뛰지 않습니까? 얽매어 있던 생활 해보셨습니까? 여러분 혹시 빚져 보셨습니까? 그것도 악독한 사채업자한테 빚을 져 보셨습니까? 이자는 끊임없이 늘어나고 수시로 찾아와서 유리창을 깨고 협박을 하고 위협을 합니다. 급기야는 장기 적출을 위한 각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무시무시한 이야기까지 합니다. 그 사람에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빚을 모두 갚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자유가 느껴집니까? 모든 부채에서 완전히 해결되어 이제는 더 이상 빚이 없다는 것을 한번 상상해보라 이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인터넷에 있는 여러분 가운데도 영끌을 하셔서 부동산에 막차를 타시고 또 코인에 투자해서 결국 대부분을 다 날리시고 대출만 남고 이자는 월급으로 갚아야 되는 상황에 놓여있는 분들도 있으십니까? 난 그 상황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부채를 모두 상환한 상태라면 그때의 그 느낌은 지금의 부자유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개념입니다. 빚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선택할 수 없고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실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빛에서 모두 해방되고 나면 이제 스스로 나의 의지로 결정하고 내가 원하는 바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자유입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기 전까지는 개인 기도의 문을 열고 주님 앞에 자신의 심정을 토하여 놓기까지는 자신의 마음의 모든 고통이 끝나기까지는 그에게 절대로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이제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음으로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첫째로 평안을 주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에 아이가 태어난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집에 가면 그 보기 싫은 브닌나의 무시하는 눈빛과 마주해야 될 것이고 그리고 그는 서럽도록 외롭게 그렇게 따돌림을 받은 채 외로운 외톨이의 삶을 살았어야 될 것입니다. 근데 이상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는 기도 후에 평안이 주어졌습니다. 강물처럼 넘칩니다. 그 기쁨의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라면 하나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마 되지 않아서 엘가나와 동침하고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 미래가 응답이 가져다주는 평안입니다. 그 평안 속에 응답을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가서 먹고" 그랬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집에 있는 동안 한나는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왜 기도를 안 하십니까? 문제가 많아서 결국 죽을 생각까지 할 정도로까지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렸는데 거기 떨어져 죽는 것보다는 그래도 기도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무엇으로도 답이 보이지 않으면 금식을 선택하십시오. 오늘날 잃어버린 경건의 기술입니다. 금식을 선택하십시오. 조용히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그리고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사람입니다.'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으시면 내가 살 수가 없습니다.' ‘삶이 수치스럽고 고통이 온 마음에 넘쳐서 내 마음과 몸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의 이 기도에 응답해 주시옵소서.' 특별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특별한 기도 가운데 하나가 금식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모든 시선을 하나님 앞에 모으는 것입니다. 금식하면 기도를 더 많이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며칠 지나고 나면 너무 기운이 없어서 기도를 못 합니다.
그런데 좋은 점은 있는데 그게 하나님을 향한 집중입니다. 정신이 먹는 것 때문에 사람이 분주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먹지 않으니까 시간도 많이 남고 그리고 먹지 않으니까 만지는 거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배가 고픈데 무슨 만지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까? 색깔 그런 거 관심 없습니다. 다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배부르고 나서 에너지가 있어야지만 예쁜 것도 보고 싶고 보드라운 것도 만지고 싶고 향기로운 것도 냄새 맡고 싶고 또 달콤한 것도 먹고 싶은 거지 배가 고프면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정신이 감정과 감각의 소모를 절제한 가운데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금식의 유익입니다. 그렇게 정신에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중해서 기도를 하나님 앞에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한나도 이렇게 기도한 게 처음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까지 한나의 심령을 녹이시고 연단하신 이유는 이렇게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위대한 인물 사무엘의 어머니가 될 심성으로 이 여자를 준비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릇을 먼저 만드시고 하나님의 뜻을 부으시지, 뜻을 부어버리시고 그릇을 찾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빚으시고 그릇이 준비되면 당신의 뜻을 부으십니다. 여러분이 문제 속에서 마음을 쏟아놓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주님을 만나고 마음이 준비되면 그 응답의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의 그릇을 바꾸시고 바꾸신 그 위에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충만하게 부으십니다. 그때 여러분의 삶은 지금 생각하는 여러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한나는 가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먹고 마시는 것을 폐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쏟아 놓았던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를 가르치고 기도회를 인도 해봐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산지사방으로 찢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경 공부하러 나와서 죽도록 밤늦게까지 가르치는데 마음은 콩밭에 가 있습니다. 결국 성경 꼭 본다고 집에 가서 실컷 인터넷에 뒤지다가 새벽에 잠이 들어버리면 그게 거기서 무엇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결국 여러분은 죽은 영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집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집중하고 응답을 받은 후에 어떤 결과가 왔습니까?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아이가 생긴 것도 아니고 브닌나가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 것도 아니고 브닌나가 쫓겨난 것도 아니고 아무 상황도 바뀌지 않았는데 한나는 근심 빛이 사라졌습니다. 그냥 한 번 잠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이게 하나님의 결정적 응답입니다. 마음에 놀라운 평화를 주시고 이제 더 이상 근심이 없는 것입니다. 나의 사정을 그분께 모두 아뢴바 되었고 내 인생은 그분의 손에 붙잡혀 있고 그분이 내 인생을 이끌고 인도할 것이니 나는 그분께 나 자신을 맡기고 나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신앙적인 낙관주의가 이 여자의 마음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어깨를 두드리며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 너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그리고 네 인생은 잘 풀릴 거야.' 솔직히 얘기해서 사탕발림 아닙니까? 그리고 그 사람은 가면 그만입니다. 내 인생을 살아낼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고 털 끝 만큼도 날 도와줄 수 없습니다. 니콜 키드만을 기억하십니까? 절세의 미녀인 배우입니다. 제 생애에서 봤던 가장 아름다운 배우 세 사람 안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키가 186라고 합니다. 그런데 항상 10cm 힐을 신고 나타납니다. 정말 미인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이야기를 고백합니다. 어렸을 때 혼자서 초등학교 때 학원인가 어디를 다니는데 너무 무섭고 힘들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하는 말이 “니키 너는 감당해야 해." “언제까지 너를 보호해 줄 수 없으니 너는 네 삶을 스스로 감당해야 된다." 자기에게 울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체적인 인생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모두 그 불안과 염려를 안고 삽니다. 결국 우리는 그 불안과 염려를 하나님 앞에 맡김으로써 해결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다시는 근심의 빛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에 평안을 유지하는 가운데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을 향하여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의 응답의 초청입니다. 그러니 한번 이렇게 가서 맛있게 음식을 먹고 오래간만에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이 응답을 받은 후에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 한나의 이 모습은 원통함과 격분함으로 마음이 가득 차서 머리를 벽에 찧어박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하던 이전의 한나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 모습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준 교훈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문제는 무엇입니까? 한나처럼 원통하고 격분함으로 마음이 번민하는 적이 있게끔 만드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한나와 같이 마음이 괴로운 사람입니까? 그런데 왜 그처럼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은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고 결국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는데 무엇 때문에 개 같은 상황에 노예처럼 끌려 다니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여러분의 자리를 찾고 그 상황을 개로 만들어서 여러분이 끌고 다니는 사람이 되게끔 하나님 앞에 해결 받는 길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개인 기도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심령을 쏟아놓고 어떤 일이 있어도 노예의 정신으로 현실에 굴복하지 않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나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고유한 자유가 있다. 그리고 이것을 무엇으로도 앗아갈 수 없으며 나는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자유인으로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의 문을 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버려두신다면 그분은 당신이 계시하는 성품과는 모순되게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게 자신을 계시해 주셨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성품을 믿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삶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낙심하고 포기하는 대신 그분을 붙들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절망의 벼랑 끝은 떨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절망과 벼랑 끝에서 우리에게 날개옷을 달아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라고 우리를 벼랑 끝에 세우신 것입니다. 거기서 주님을 부르짖고 이기라고 세워준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슬픈 여러분이여 다시 주님 안에서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로 희망을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기도에 응답 받았을 때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 1:24-28)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인생에는 항상 삶의 상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상황이라는 것은 항상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없으면 상황이라는 것이 있을 수도 없고,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숙고를 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문제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하고 평안하고 풍족한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삶은 언제나 문제투성이입니다. 이 문제가 인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문제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평화롭고 모든 것이 아쉬운 것이 없이 지냈던 날들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없습니다. 인생에 대한 깨달음, 인생에 대한 묘미, 그리고 삶의 환희와 기쁨,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 이 모든 것은 문제와 씨름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보람입니다. 그래서 명랑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문제가 없기를 희망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도 가능하지 않고 실제로 문제가 사라지고 나면 삶의 명랑함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계곡에 흐르는 아름다운 물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 물들은 계곡을 휘돌아 흘러가고,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물소리는 부대끼는 나뭇잎들의 사각거리는 소리와 하늘을 나는 새들의 소리와 어우러져 숲속이 아니면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그만의 정서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만약에 계곡에 소리 없이 물이 흐른다면 얼마나 무서운 계곡이 되겠습니까? 흐르는 수많은 물은 왜 그렇게 소리를 내는 것입니까? 흐르는 물은 크고 작은 바위에 부딪히며 여러 가지 소리를 만들어내고 어떻게 보면 그것은 물이 바위에 부딪히는 비명 소리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아래에 고여 있는 깊고 넓은 물에는 파랗게 멍이 들어있습니다. 조크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흐르는 물이 부딪히는 바위가 있기 때문에 소리를 내고 그 소리 때문에 계곡 사이를 흐르는 물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묘미도 그러한 것입니다. 문제가 없는 인생을 꿈꾸지 마십시오. 문제가 사라지고 나면 인간은 지루해질 것이고, 지루함은 인간에게 허무를 가져올 것이고, 허무의 끝은 낙심이며 절망이고 무의미입니다. 결국 우리가 깨달았던 인생의 의미는 알고 보면 문제와 씨름하면서 찾아낸 것이니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문제는 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기술과 그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풀 수 있는 기술과 문제를 끝까지 붙들고 씨름하며 풀어낼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명랑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오히려 아름답게 하는 아주 아름다운 장식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무슨 엄청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냥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어떤 위대한 기도의 제목도 아니었고, 당시 평범한 아낙네 모두가 한 번쯤은 해봄직한 사내아이 하나를 점지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지극히 아주 평범한 기도였습니다. 한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이를 가져야 되겠다느니 혹은 이 아이를 길러서 이스라엘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놔야 되겠다느니 하는 그 따위 야심 없었습니다. 그냥 아들이 없는 것이 너무 서러웠고, 그 설움 때문에 브닌나가 미웠고, 우유부단해 보이는 남편의 사랑도 그녀의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이 여자가 하나님 앞에 아들을 구한 이유 전부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는 방황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괴로움은 마음에 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왔습니다. 그녀는 여호와의 집에 올라갔습니다. 왜 그런지 그날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지극히 초라한 존재라는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많은 남편을 의지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의 순전한 사랑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브닌나에게 당한 설움과 원통함이 하늘을 찔러 마음으로 복수를 꿈꾸는 날도 있었고,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며 잠드는 날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그녀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이 여자는 그 순간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게 되었습니다.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모두 내려놓으며 아버지께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문제의 상자는 오래부터 있었지만 바로 그 옆에 놓여있는 열쇠는 방금 전에 발견하였습니다. 결국 그 열쇠로 한나는 기도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마음을 물처럼 쏟아 놓았고, 하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나의 마음을 받으시고 그녀의 심성을 고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을 위대한 인물을 양육하도록 맡길 때 기꺼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엄마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녀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었습니다. 집에 가도 여전히 아들은 없었고 기세등등한 브닌나의 염장을 지르는 악행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착하기는 하지만 약간은 우유부단해 보였던 엘가나의 태도에도 무슨 큰 변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더욱 놀라운 변화가 그녀의 마음속에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놀라운 평강이었습니다. 더욱이 제사장까지도 이 여자를 축복하였습니다. “···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삼상 1:17) 축복의 기도를 받고 돌아갔고, 그 후 한나의 마음은 확정되고 확정되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이제는 부질없는 근심과 애태움 그리고 마음의 고통으로 밤을 새우며 자신의 인생을 하얗게 태우는 미친 짓은 안 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삶에 임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굶주림을 피하고 그는 가서 즐겁게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의 빛이 없는 나날을 이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응답을 받고자 안달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기도가 자기 원하는 대로 응답되기를 구하기 전에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입니다. 저는 지지난주에도 이 사실을 아주 또렷하게 경험했습니다. 올랜도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와야 되는데 1시간 연착을 하더니 잠시 후에는 뜻밖에 일어난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2시간 38분 늦게 도착한다는 두 번째 공지가 떴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도 그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 내려서는 도저히 한국 가는 비행기를 탑승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요동치기 시작했고 불안한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교회의 일정과 오도 가지 못하게 된 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때 즉시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공항 한 구석에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한국을 가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으니 제가 한 주쯤 교회에 못 돌아온들 무슨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새가족 환영회가 취소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는 했겠지만 내가 정상적으로 돌아왔어도 만약에 토요일날 매우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으면 어차피 연기될 행사가 아니었겠습니까? 무슨 큰 일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했더니 하나님이 놀라운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평화였습니다. 저는 모든 일정을 주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여기 머물러 있어도 좋고, 가면 더 좋고, 가기를 원했기에 우리 부부는 “모든 사람이 토요일 날 한국에 도착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기도를 하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주님께 맡겨졌고 제 마음엔 평화가 넘쳤습니다. 찬송이 나왔습니다. 염려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인생 전체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일에 불과했습니다. 마음에 평화를 주시고 나의 손을 주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주님이 어린 아이 같은 내 손을 붙들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었고 어디로 이끌든지 나를 가장 좋은 곳으로 데려가실 것이라는 확신이 내 마음을 지배하는 순간 모든 염려는 내 마음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즐기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입니다. 이게 인생을 긍정적으로 사는 비결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매우 쉽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 정답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아주 쉽기도 하고 혹은 매우 어렵기도 합니다. 이런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름다운 풍광이 눈앞에 놓여 있고 그 풍광 앞에 넓은 호수가 있습니다. 날씨는 청명하고 바람 한 점 없습니다. 그때 호숫가에 있는 아름다운 풍경은 호수라는 도화지 위에 그려진 데칼코마니가 됩니다. 굳이 풍경을 보지 않아도 호수 위를 보면 그림처럼 뚜렷하게 풍광이 나타나고 나무 한 그루까지 그리고 나뭇가지에 흔들리는 잎사귀의 하느적거림까지 그대로 물 위에 비칩니다. 그러나 후 바람이 붑니다. 잔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굳이 폭풍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가벼운 바람만 불면 물결은 춤을 추게 되고 아무 풍광도 읽어낼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탐욕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마음의 평화가 깨집니다. 마음의 평화가 깨지고 나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매우 힘든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고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매우 쉬운 것입니다. 탐욕과 두려움에 가득 찬 사람이 오래도록 기도하여 도달한 결론보다는 마음의 평강을 누리고 하나님과 평화를 스스로 지키고 있는 한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 판단이 오히려 더 정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나는 하나님께로부터 평강을 받았습니다.
II. 기도에 응답 받았을 때
결국 그녀가 기도에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기도에 응답을 받은 한나는 삶의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는 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시각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음에 근심과 얼굴에 염려의 빛이 사라졌습니다. 결국 기쁨의 빛이 얼굴에 화색으로 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응답을 믿으며 기다리며 살아갔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엘가나는 한나와 동침하였고 하나님께서 한나를 생각하심으로 아이를 잉태하게 하셨으니 아들이었습니다. 때가 되었고 아주 순적하게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이름을 사무엘이라 불렀으니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신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무엘을 볼 때마다 이 한나의 마음에 제일 먼저 생각났던 사건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 눈물과 통곡으로 자신의 마음을 쏟을 때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그 생각 없이는 사무엘을 볼 수가 없었기에 그 아름다운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던 것입니다.
정말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었겠습니까? 아마 이 한나에게는 꿈꾸는 것 같은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한나에게 이 사건은 꼬집어보고 또 꼬집어보아도 깨지 않는 꿈과 같은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단숨에 그녀는 그의 집 안에서 자기의 집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던 모든 염려와 근심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브닌나는 자신에게 고민거리도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적자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만약에 여기서 끝났더라면 그냥 우리 가운데 흔히 있을 수 있는 간증거리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한나의 믿음은 기도 응답을 받는 데에서만 입증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도에 응답을 받은 후에 한나가 하나님 앞에 한 행동 속에서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A. 서원을 갚음
제일 먼저 그녀는 서원을 갚았습니다. 그녀는 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 마음의 중심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녀의 서러움은 그날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설움이었고, 눈물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수많은 밤들을 뜬눈으로 새우고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며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엘가나의 따뜻한 포옹에도 마음이 차가운 겨울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이때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을 결단을 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은혜는 이 여자의 자유 의지와 신비하게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정하신 그 일들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중심을 쏟아 놓으며 그는 물처럼 자신의 마음을 토하며 하나님 앞에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소원과 인생의 문제를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모두 아뢰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제의 상자 바로 옆에 해결의 열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기 전까지는 문제의 상자는 그녀 앞에 있었지만 그 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는 눈에 띄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을 때 바로 옆에 있는 기도라는 열쇠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녀는 하나님 앞에 중심을 쏟아 놓으며 자신을 녹여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괴로운 마음을 신앙으로 승화시키고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마음으로 절대 의존의 감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도 모자랐는지 그 여자는 그때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였습니다. “···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1) 서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소위 ‘나실인의 서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실인’이라는 것은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이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나실인의 규례가 민수기 6장 2절에서 5절 이하에 나옵니다.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바로 이 나실인의 서원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임시적인 나실인과 영구적인 나실인이었습니다. 임시적인 나실인은 생후 30일 이후에 정한 기간 동안 하나님 앞에 아이를 바치는 한정적인 나실인의 헌신 기도였습니다. 그것을 서원한 후에는 그것을 그대로 지켜야 했으니, 이 나실인의 서원은 대개 부모를 통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두 번째 영구적 나실인은 아이를 여호와께 바치되 한정된 시간에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일생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고 부모는 그 자식과의 인간적인 인연을 끊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 나실인에게는 세 가지 규례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포도주와 포도에서 난 어떤 소산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이런 기회를 주셨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생각하기는 음료처럼 여겨지던 포도주였지만 나실인은 항상 맑은 이성으로 살아야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렇게 저는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의 평생의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머리털을 미는 삭도를 결코 머리에 대지 말아야 할 것이 나실인이니 지켜야 할 두 번째 규례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시체를 가까이 할 수 없었으니 나실인은 부모가 죽어도 장례에 참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서원을 하나님 앞에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한나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고, 한나는 이 아이를 하나님 앞에 데리고 와서 나실인의 서약대로 바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너무나 당연하고 간단해 보이는 것은 우리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자, 아이가 없어서 설움이 되고 한이 맺혔던 이 여자에게 아름다운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온 집안의 시선은 이제 브닌나의 집 아이들이 아니라 한나가 낳은 사무엘에게 쏠렸고 그리고 집 안에는 경사가 났습니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이 아들과 함께 마치 연애하는 것처럼 꿈꾸는 시간들을 보내었을 것입니다. 어린 자식을 품에 안고 섶을 헤쳐 젖을 물리고, 그 아이의 얼굴과 눈을 맞추며 아이는 엄마를 알아가고 엄마는 아이를 알아갔습니다. 아이가 이제 뒤집기 시작하고, 아이가 엉금엉금 기기 시작하고, 아이가 벽을 붙들고 일어서기 시작합니다. 서툰 말로 엄마 아빠를 부르기 시작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뒤뚱뒤뚱 걸음을 떼어 놓기도 하고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평생에 한이 맺힌 한나에게 이 아이는 인생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여호와께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한나가 아이를 낳고 아마 첫 번째 실로에 올라가야 하는 그때는 아이가 어렸던 것 같습니다. 엘가나 홀로 올라가서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한나는 그다음에 실로에 올라갈 때 이 아이를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이제 육신의 아들로서는 마지막 보는 때였습니다. 이 아이를 거기에 두고 오면 내일이고 모레고 글피고 수시로 찾아가서 안고 쓰다듬고 끌어안고 잘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이제는 인간적으로는 이 아이와 절연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때는 군대가 36개월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어디다 데려다 주는 거, 그런 거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기가 알아서 세수하고, 그 전날 깎은 머리로 군대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애들 입대할 때가 되면 온 가족이 논산까지 내려갑니다. 내려가는 동안에도 침울합니다. 그러니까 맛있는 걸 사서 먹이고 입대할 때가 되면 마치 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아이를 끌어안고 엄마가 통곡을 하고 웁니다. 올라올 때 아빠는 눈물을 훔치면서 운전을 하고, 엄마는 손수건을 꺼내서 펑펑 울고, 누나와 동생들은 그렇게 슬프지는 않지만 엄마 아빠 눈치 보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20개월입니다. 그리고 한 달만 있으면 휴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한나는 그 아이를 여호와의 집에 갖다 두고 20개월이 되면 만나는 사이가 아니라 이제 영원히 인간적인 인연은 끊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합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한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으로 살던 여자가 아니었고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가 말합니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삼상 1:27)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삼상 1:28) 제사장에게 고백을 합니다. 결국 아이에 대한 집착을 이제는 버렸고 자신의 서원을 따라 좋으신 하나님께 이 아이를 기쁘게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여자가 전에는 하나님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한나 있고, 한나 마음 안에 하나님이 계셨더니 이 아이를 하나님께 바쳐도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이 아이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었기에 기꺼이 인간 모자의 인연을 끊는 것 같은 모진 이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며 아가페의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역사의 위대한 물줄기를 바꿔 놓을 계획이셨습니다. 예전에 한나로는 그런 사람으로 교육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이 허락을 안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나가 새 사람이 되어 과연 그만한 인물을 양육해낼 수 있는 그릇을 가진 어머니로 변화 받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변화시킨 후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그녀에게 맡기셔서 과연 이스라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는 위대한 인물이 되게끔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지 압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도는 하는데, 응답은 받는데, 기도할 때 들어가는 마음과 응답받은 후에 나오는 마음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할 요량으로 기도는 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 앞에 원하는 것을 얻어낸 후에는 마음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급한 때는 하나님 앞에 수없이 약속을 하고 다짐을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노라고, 이 기도에만 응답해주시면 주님께 순종하겠노라고 다짐을 해놓고는, 막상 응답을 해주시면 그는 딴 길로 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바꾸기 위해 기도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문제는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기도한 후에 서원을 갚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여러분의 인생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그 기도의 제목을 응답해 주실 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약속했습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다짐하지 않았습니까? 다시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주님의 뜻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살겠다고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기도에 응답을 받은 후 여러분의 삶은 진실했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았습니까? 그 서원을 기꺼이 갚았습니까? 인간적으로 절연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기꺼이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아이를 하나님의 집에 맡기고 돌아오는 한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올라갈 때는 사무엘의 손을 잡고 올라갔습니다. 내려올 때는 주님이 그녀의 손을 잡아 주셔서 집까지 내려왔습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저는 요즘 자주 제 인생의 뒤를 돌아봅니다. 돌아보면 눈물밖에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실하신 하나님이 내 손을 잡고 이끌어 오신 생애였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것은 덮어주시고, 잘한 것은 칭찬해주시고, 위기에 놓였을 때 보호해 주시고, 아무 희망이 없는 깊은 웅덩이에서 울고 있을 때 주님은 밧줄을 내려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힘들 때 업고 걸으셨고, 벼랑 끝에서 비명을 지를 때는 기적의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탐욕과 두려움의 감정을 털어 내버리고 고요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반석이신 하나님,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변함없이 인도해 오셨기 때문에 여러분은 여기에 지금 서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 인생의 매 발걸음마다 곁에 계셨고,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거기 계셔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키워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무엇인가 자신의 삶에 대해 욕구 불만을 느끼는 것이 있습니까? 뭔가 불만족한 것들이 있습니까? “나는 희망이 없어. 나는 안 돼." 좌절할 만하게 하는, 해도 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걸 보지 마십시오. 그러면 숨 막혀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문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문제 속에서 인생이 우리 마음대로 흘러갈 때보다는 우리 뜻대로 되지 않을 적이 너무나 많았고, 사실은 그것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믿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라는 것을 하게 되었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여러분은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응답받았던 때를 회고해 보십시오. 그때 어떻게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여러분이 착하게도 원망과 좌절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을 쏟아 놓았던 그때를 추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을 모두 쏟아 놓을 때,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이 어떻게 찾아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셨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러면 지금도 착한 마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놀라운 응답을 받고 새로운 길을 찾았을 때 주님 앞에 무엇을 약속하고 무엇을 서원했는지를 기억할 것입니다.
다시 그 서원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추호도 여러분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니 여러분에게 일어난 모든 좋은 일은 하나님 때문에 온 것이고 나쁜 일은 여러분 자신이 만든 것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신실함을 찬송하십시오. 그리고 큰 응답 속에서 기쁨을 느끼던 때를 회상하십시오. 거기서 하나님 앞에 주님 뜻대로 살기로 한 것을 지금 지키십시오.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다짐한 것을 지키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했던 그때의 그 결심으로 돌아가십시오. 서원을 갚으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은 당신의 살아계심을 여러분에게 지금도 보이실 것입니다.
B. 주께 경배함
마지막 두 번째는 주께 경배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 1:28) 지금 경배할 만한 때입니까? 이 여자의 마음에 과연 경배할 정신이 있겠습니까? 이제 갓 태어났고 정이 들 대로 들어서 엄마의 품을 떨어지기에는 너무나 어린 아들이었습니다. ‘이제 두고 가면 도대체 누가 이 아이를 돌볼까?' 사랑이 깊으면 염려도 깊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을 거기에 떼어놓고 돌아오는 그 순간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경배했으니 실로에 두고 온 아들이 주는 슬픔을 능가하는 하늘의 기쁨이 한나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누리는 특권인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고, 하나님 밖에 있는 것들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잃어버리는 것이 오히려 기쁨이 되기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경험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첫 아이를 낳고 아내가 아이를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아이를 집에 잠깐 저한테 맡기고 목욕을 하러 가면 목욕을 끝내고 오는 동안에 애가 너무 보고 싶어서 목욕을 제대로 못하고 왔습니다. 그게 엄마 마음입니다. 그게 어린 아기를 향한 엄마의 마음입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이 한나는 어땠겠습니까? 기도 응답으로 얻은 그 아이를 인간적으로 절연하고 내려와야 되는 그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경배했던 이 여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것은 한나의 신앙이 변화된 것과 그가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순수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는 문제는 이 여자의 가슴을 후벼 팠지만 그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여호와 앞에 마음을 쏟아 놓으며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거기서 높으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영혼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평생 하나님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 수 있는 담대한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그 문제는 여러분을 고뇌하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 문제 옆에 있는 기도의 열쇠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법을 터득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오늘 용기를 가지십시오. "나의 인생의 문제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문제답지 못하게 다루는 것이 내 인생의 문제다." "나는 문제를 다루는 기술과 그 문제를 극복하는 힘을 우리 하나님께로부터 받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렇게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나는 하나밖에 없는 이 아들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그녀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는데 이제 이 아들이 태어나면서 하나님이 그녀 마음 안에 있었고 그녀는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가 간구하지 않았는데도 여호와께서는 가엾은 여인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아무도 나실인으로 바쳐지지 아니하고 늘 엄마 옆에 있으며 위로를 받고 위로를 하며 살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상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엄한 아버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주 따뜻하고 자상한 어머니 같은 손길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여자였지만 그 여자의 연약함을 보시고 사랑하는 세 아들과 두 딸을 통해 위로를 얻으며 일평생을 하나님이 받으신 사무엘을 위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응답을 받은 후 그녀는 주님을 높이 경배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도움이 필요해서 우리에게 올 때는 온갖 아부와 아양을 다 떨고, 원하는 것을 받아가고 난 후에는 언제 보았냐는 듯이 안면을 몰수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응답을 받은 후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는지 반성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에 응답을 주시는 이유는 주님을 경배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어떤 위기에서 주님께 구원을 얻었든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응답의 경험을 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문제 때문에 명랑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에 명랑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고,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를 지배하는 대신 문제의 지배를 받는 노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자유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그 삶을 어떻게 우리가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여러분 인생의 문제를 위로 올려보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여러분만 못한 존재라고 여기십시오. 그리고 아래로 내려 깔면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그 문제를 밟고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이 문제가 내 인생에 흐르는 아름다운 물소리처럼 바뀌는 상황으로 변화될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따라 흘러가십시오. 그리고 유연하게 그것을 따라 여러분 인생의 갈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것들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지 여러분을 굴복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무릎 꿇을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외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언제나 있습니다. 문제가 우리 인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고 문제의 상자 옆에는 항상 그것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그 열쇠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역전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삶의 명랑함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문제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문제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서 오늘의 삶을 긍정적으로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십시오. 그리고 실로에 올라갔던 한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쏟으십시오. 주님께만 모든 고민을 아뢰고 그분께만 여러분의 문제를 토해 놓으며 그분께만 호소하십시오. 그분이 긍휼히 여겨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여러분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4. 위기 앞에 드린 기도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다니엘서는 특별한 책입니다. 그 앞에 나오는 책들은 대부분 유다와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책들이고 또 언약 백성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에는 인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후로 점점 좁혀 들어가며 이런 식으로 구약성경이 전개가 됩니다. 물론 성경책 속에는 종종 이방나라에 관한 예언이 나옵니다만 매우 짧고 단편적인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서는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1부와 2부로 이루어집니다. 1부는 1장부터 7장까지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8장부터 12장까지는 제국의 흥망 역사를 다룹니다. 바벨론과 바벨론 이후에 일어나게 될 나라들 즉, 바벨론, 바벨론 이후의 페르시아, 페르시아 이후의 마게도니아 왕국으로 일컬어진 그리스, 그 뒤에 이어지는 로마의 역사, 이 나라들이 어떻게 서고 망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이렇게 중요한고 하니 하나님이 단지 조그만 나라 이스라엘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계 나라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주적 전망과 역사관을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이 다니엘서와 친근하기도 하고 또 낯설기도 합니다. 친근했던 이유는 찬송가에도 나옵니다. 옛날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경험과 다니엘이 사자 굴속에 던졌던 이야기 그리고 다니엘의 세 친구와 풀무불 속에서도 살아난 이야기, 그리고 다니엘과 세 친구가 왕의 음식을 거절하고 채소와 물만 먹었는데도 피부가 곱고 아름다웠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은 주일학교 때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나오는 많은 환상을 토대로 한 많은 이야기의 전개들은 우리들을 당혹하게 합니다. 다니엘서는 구약의 요한계시록이고,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다니엘서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책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대한 해석 없이는 계시록을 해석할 수 없고, 계시록의 빛을 통해서 또한 다니엘이 바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계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구상에 200여개의 나라가 있지만 이 나라들 중 원래 있었던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모두 망하고 세워지고, 세워지고 또 망하는 역사를 되풀이 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서는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 멸망시킨 역사 이후에 제국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왕이 하나님 앞에 거만하여질 때 하나님이 어떻게 그 왕과 제국들을 부수어 버리시고 다시 만드시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모든 인류가 그분의 통치 아래 복종해야 할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어떤 정치제도든지 간에 나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복종하지 않고 교만한 정치체제는 반드시 하나님이 끝장낼 것이며,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하나님이 웅변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를 잘 읽으면 우리의 마음이 굉장히 광활해집니다. 세계의 역사 전체를 우리 앞에 펼쳐 보여 주시는 가운데 우리가 상천하지(上天下地)에 하나님 한 분밖에 인류 역사를 다스리는 분이 없다는 겸손한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바벨론이었습니다. 거기서 느브갓네살과 벨사살이라는 왕을 섬깁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지면서 메데라는 나라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 메데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는데, 아마도 야벳의 자손인 마데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카스피해와 그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걸쳐서 메데라는 나라가 서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메데라는 나라가 앗시리아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앗시리아가 약해진 틈을 타서 독립운동을 일으켜 나라를 재건하기 됩니다. 그러나 메데라는 나라는 곧 약해지고 이어서 나타난 바사라는 나라에 의해 통합되게 되는데 바사라는 나라가 바로 여러분이 잘 아는 역사속의 페르시아라는 나라입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제국을 이루었고 사실상 문화적으로 메데와 바사는 거의 같이 흡수되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들이 흔히 메데-바사라고 함께 부를 정도로 하나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잠깐 있었던 메데 시대에 바로 다리오라는 왕이 있었는데 바로 그때 다니엘이 섬기게 되고 이어서 페르시아의 고레스라는 위대한 임금이 나타나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 배운 키루스라는 왕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라를 엄청나게 확장하고 나라의 통합을 이루게 됩니다. 다니엘은 이처럼 나라가 세 번 바뀌는 가운데 바벨론과 메데와 페르시아의 네 왕을 섬기게 되었으니 그가 얼마나 영특하고 유능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다리오 왕 시대 때 있었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세 명의 총리가 있었고 다니엘이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이상한 법률 하나가 반포됩니다. ‘왕 이외에 30일 동안 어떤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라는 금령이 반포됩니다. 이 금령은 왕이 싸인하면 왕도 번복할 수 없는 특별한 명령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겠습니까? 승승장구하며 잘 나가고 있는 이방인 다니엘을 시기하는 사람들의 모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총리들과 다른 관리들이 협잡하여 다리오 왕을 설득해서 이런 법을 만들게 하고 했습니다. 이는 다니엘의 어떤 틈을 찾기 위하여 다니엘의 허물을 샅샅이 뒤졌으나 어떤 점에 있어서든지 다니엘은 결코 흠이나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특징을 파악하고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을 수 없는 법을 만들고 그때 다니엘이 신앙을 올곧이 지킨다면 왕의 명령을 거역하게 될 것이라는 함정을 파놓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30일 동안 왕 이외에 아무 신에게도 기도할 수 없게 만드는 금령정책이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파란만장한 긴 세월을 바벨론과 메대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이 건져주셨고 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위기의 때를 맞이하게 됩니다. 자신은 신앙을 지키면 죽임을 당해야 하고, 죽임을 면하기 위해서는 신앙을 포기해야 하는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바로 그때 다니엘이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위기 앞에 드린 기도
위기 앞에 드린 기도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0절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세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다고 제안하는 바입니다.
A. 기도의 장소
첫째는 기도의 장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다니엘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줄 알면서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기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에게 위기가 찾아왔지만 그에게는 기도하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바로 윗방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락방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는 다락방은 대개 종교적인 행사를 위해 사용되던 방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열왕기하 4장 10절에서도 분명하고 또한 사도행전 10장 9절에서도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성도들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할 때 오순절의 성령님이 강림하신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장소도 바로 이 윗방, 곧 다락방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하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물론 기도했겠지만 관청에서 기도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바쁜 국사에 아침부터 매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으로는 하나님 찬양하고, 마음속으로는 기도했을지 모르지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기도하는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네 집 바로 윗방, 다락방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 장소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한 장소였고, 감격으로 응답받은 장소였습니다.
종종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기도하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그 사람은 말합니다. “저요!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이 없으시잖아요?” “저는 아무데서나 늘 기도합니다.” 그 사람은 둘 중 하나입니다. 매우 매우 탁월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도의 틀이 필요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틀이 필요한데 바로 이 공간의 틀이 장소입니다. 여러분에게 기도하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사랑하는 연인들끼리는 잊히지 않는 장소가 있게 마련입니다. 항상 거기서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추억이 담겨있는 장소 없이 연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헤어져도 생각이 나는 그 장소, 그리고 사귐이 있고 교제가 있었던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장소는 어디입니까? 장소가 없다면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일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뜨내기 기도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되면 하고 안 되면 말고 그리고 할 수 있으면 하고 하기 힘들면 그만두는 그런 기도 생활이 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기도의 정해진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해 계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방으로 두루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말씀을 가르치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런 바쁜 섬김의 생애를 사셨던 예수님이지만 아무 데서는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디가시든지 항상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없고 하나님 홀로 독대할 수 있는 곳을 찾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빈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나아가 마음을 쏟으며 천국의 이슬로 당신의 마음을 적시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으며 기도하셨습니다. 때로는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산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곳에서 장소를 정하여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기도 장소는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추억이 서려진 곳, 그곳을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던 자신이 생각나고,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생각나서 지금 여러분에게 소망을 주는 그곳, 거기에 가면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하나님 앞에 단을 쌓는 장소를 가지고 있었고, 기도하는 장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주님을 만났던 것처럼 그리고 거기서 주님을 다시 찾았던 것처럼 여러분에게 그 기도의 장소는 있습니까? 거기가 어디입니까? 만약에 없다면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게도 기도할 청소를 주십시오.” “주님과의 기도의 추억, 응답의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그런 장소를 나에게 주십시오.” 그것이 교회면 너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일 수 없다면 여러분의 골방일 수도 있고 뒷방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취방일 수도 있고 혹은 아침 일찍 출근한 여러분의 사무실일 수도 있습니다. 헛간일 수도 있습니다. 어디든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정해진 장소를 가지십시오. “나는 여기서 항상 주님을 매일 만나리라.” 이런 결심을 하는 여러분이 된다면 다니엘처럼 인생의 위기도 능히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장소를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기도의 습관
두 번째는 기도의 습관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 기도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위기의 때에 갑자기 기도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말합니다. 평안하게 살다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했는데 위기를 만났을 때 목숨을 걸고 간절히 기도했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서 내 인생은 바뀌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겐 항상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나도 언젠가 인생의 위기를 만나면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기도할 것이고, 거기서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고, 나도 반드시 응답받고 승리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목회를 해 보면 인생의 위기를 만난 모든 성도들이 바로 그 위기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하나님을 찾는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소수의 사람들만 그렇게 합니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불행에 떠밀려 간 것입니다. 불행의 흙탕물에 떠내려간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믿음을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중에야 깨닫게 됐을지 모르지만 위기를 만날 때마다 눈물로 기도하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건 평소 안 하던 것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평소 않았던 것을 할 때는 백의 결단과 용기와 힘이 있어야 합니다. 평소 하던 것은 그것의 절반만 힘이 들어도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바빠도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질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피곤해도 밤에 씻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아침에 일어나면 당연히 양치질하고 밤에는 깨끗이 씻고 잠자리에 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우리 몸에 배인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나쁜 습관은 우리를 급속하게 망치지만 좋은 습관은 우리를 굳건히 붙들어 주는 틀이 됩니다. 그래서 좋은 습관을 지니는 것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매일매일 단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고는 몸이 근질거려서 살 수 없다는 지체들도 있습니다. 굉장히 좋은 습관입니다. 저는 하루에 최소한 5-6킬로 정도를 걷지 않으면 몸도 마음도 불편합니다. 걷는 그 시간이 너무 좋습니다. 아무도 말도 걸지 않고 혼자 어두운 밤길을 타박타박 걸으면서 여러 가지 사유에 잠기고 혹은 좋은 강의를 듣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묵상합니다. 그 시간은 아무도 뺐을 수 없는 너무 좋은 시간입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저도 너무 힘들었는데 이젠 습관이 되었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그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그게 습관입니다.
45년 만에 제가 치과를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보고 내가 45년 만에 치과에 왔다고 하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모든 치아가 아주 건강하고 조금 이상이 있어도 별거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같으면 우리 치과의사들은 굶어 죽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건치가 되었겠습니까? 저는 하루에 열 번 내지 열다섯 번 가글을 합니다. 가글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저녁 먹고 나서 잠잘 때까지 적으면 세 번, 많으면 네 번 가글을 합니다. 낮에는 한 열 번 정도 가글을 하는 셈입니다. 가글을 하지 않으면 입속에 세균이 있는 것 같고 텁텁해서 정신이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날 때는 당연히 기본적으로 가글을 해서 냄새가 안 나게 해야 하고, 책을 읽을 때도 가글을 해야지만 정신이 집중이 되고, 음악을 들을 때도 가글을 하고 난 다음이 너무 좋습니다. 커피 마시면 반드시 가글을 합니다. 가글을 그렇게 좋아해서 제가 온 교회에 가글을 다 설치했습니다. 가글을 설치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맑은 정신으로 설교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마우스 워쉬(mouth wash)를 하고 정신이 집중된 가운데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이런 습관이 건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니엘은 기도의 습관이 있었습니다. 왕의 조서에 도장이 찍혔지만 그것보다도 더 강력하게 다니엘의 마음을 휘어잡은 힘이 있었으니 습관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시간이야.' ‘왕의 조서에 어인이 찍혔던 말았던 어차피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니 나는 하던 습관대로 하리라.’ 그리고 올라갔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다고 합니다. ‘베라코트(berakhot)’라는 유대인의 문헌 제4장 1절에 의하면 세 번이 이른 아침, 오후, 그리고 해질 때였다고 전해집니다. 이 유대인들의 관습이 그대로 전해져서 신약 시대에도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 번씩 성전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그때 시간은 오전 9시, 12시, 3시였습니다. 아마 다니엘이 이른 아침과 오후 해질 때 기도했다면 첫 번째 기도는 출근하기 전에 드리는 기도였을 것이고, 세 번째 기도는 퇴근 후 드린 기도였을 테니까 그는 점심 때 집에 왔음에 틀림없습니다. 집에 와서 점심 때 다락에 올라가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을 붙들어 주었던 기도의 습관이었습니다.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하며 영적인 전투를 연습하는 사람들이 위기의 때에, 영적인 전쟁의 때에 훌륭하고 능력 있게 싸워서 이기는 것입니다. 좋은 운동선수는 늘 운동을 하면서 오늘 오후에 시합이 있어도 바로 시합장에 나갈 수 있도록 몸과 마음과 기술을 단련하는 사람이 훌륭한 운동선수입니다. 좋은 군대는 무엇입니까? 좋은 군대는 언제든지 전쟁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군대입니다. ‘Fight tonight' 오늘 전쟁이 벌어져도 우리는 이길 수 있다는 마음으로 완전하게 준비된 군대가 좋은 군대입니다. 적군이 쳐들어올 때 준비할 시간을 주고 통보한 후에 쳐들어옵니까? 어느 날 갑자기 강도처럼 쳐들어오는 것이 적군이고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 전쟁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전쟁을 연습하지 않은 사람들은 반드시 그 대가를 한순간에 치르게 됩니다. 몇백 년의 문명을 가꾸고 수많은 나라의 재산을 일구었다고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나라를 지킬 힘이 없으면 초토화되고 군대가 능력이 없으면 모두 적군에게 내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요세푸스의 『사기』를 인용하면서 그는 당시 로마의 전성기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로마가 강대국일 당시 로마의 군대는 강력했다.’ ‘로마의 군인들에게 전쟁은 피 흘리는 훈련이었고, 훈련은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기도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아직도 태만합니까? 제가 여러분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정말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 힘든 인생을 영위해 나가면서, 그것을 이길 자원을 손에 가지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은 지난 주간에도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매일매일 정해진 분량의 성경을 읽는 성도들이 여러분 중 얼마나 되겠습니까? 한 절반, 75% 정도 됩니까? 나머지 25% 사람들은 전혀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이 하지 않은 상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지난 한 주간 동안 단 한 장도 성경을 읽지 않았습니다. 뉴스를 보고, 웹툰을 보고, 네이버의 뉴스를 뒤적이는 시간 중 십분의 일 만큼도 기도하지 않은 사람들이 여러분 중 절반 이상입니다.
도대체 세상을 이길 힘을 어디서 충전을 받겠습니까? 여러분 어디서 이 세상을 이기고, 자기를 이기고,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으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기도의 습관이 경건의 습관이 몸에 배지 않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전투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다니엘과 같은 위기가 오면 과연 여러분이 이렇게 탄력성 있게 극복할 수 있는 영적인 순발력을 가질 수 있습니까? 이런 무기력한 기도생활과 게으른 말씀생활 그리고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지 않은 여러분의 안일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여러분이 정말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소유할 수 있는지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기를 바랍니다. 습관이라고는 그저 이 세상과 함께 먹고, 마시고, 예쁜 곳을 보고,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것에 습관이 되고 길들여졌을 뿐 거룩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달콤한 맛에 길들여 지지 않을 때 여러분은 경건의 습관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늘 다니엘을 보십시오. 왕의 조서에 도장이 찍혔습니다. 이제 기도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 쯤 너무 잘 압니다. 이 사람이 평소에 기도의 사람이 아니였더라면 도장 찍힌 그 조서를 기억하면서 두려워 떨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평소에 하던 기도의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뀐 환경에서도 전혀 바뀌지 않은 기도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위대한 습관을 갖기를 바랍니다. 경건의 습관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하루에 세 번씩 기도드리던 다니엘의 기도 습관을 여러분이 소유하고 여러분 인생의 위기를 다니엘처럼 이기고 극복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기도의 태도
마지막 세 번째는 기도의 태도입니다. 오늘 성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1.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제일 먼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창문이 닫혀 있었더라면 안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안에서 기도를 하던 무엇을 하던 성경을 읽던 알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창문을 열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창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이처럼 강력한 신앙이 있다’라는 자기 과시가 아니었습니다. ‘난 죽음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자만함을 보여주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의 행동은 요한 켈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내적 신앙의 한결 같음에 대한 외적인 표현이었으니 순전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왕의 조서에 어인이 찍혔다는 이유 하나로 평소와는 다르게 기도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창문을 열었습니다.
여기에는 다니엘의 연약함도 묻어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 혼자 스스로 기도의 불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는 외부로부터 불을 붙여 주는 자극이 필요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왕권이 행사되는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하나님의 언약이 깃들어 있었고,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라가 살 것이라는 언약이 주어진 성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맺으셨고 그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당신의 왕권을 행사에 나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기억 속에 마지막 남은 예루살렘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약속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말은 원래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평화의 도성에 평화가 깨졌습니다. 바벨론의 군대가 쳐들어왔고 그 말발굽 아래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방인에게도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버리시기로 작정했고,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무너뜨리시고 예루살렘을 파괴시키면서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세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마음속에 예루살렘은 잊을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재건시킬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기도할 때마다 예루살렘으로 향해 난 창문을 열고 자신의 마음에 소망의 불을 붙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을 붙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신앙의 불을 붙이고 현실은 암담해도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소망을 갖겠다는 결단을 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 시간이 바로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여는 순간이었습니다. 연약한 마음에 예루살렘에 열정의 불을 붙이고 예루살렘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예루살렘은 어디입니까? 연약해진 여러분 기도의 마음에 불을 붙일 창문은 어디로 나 있습니까? 그 창문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한번 다니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망한 도성 예루살렘을 생각하면서 포로생활로 암담한 시절을 이겼고, 그렇게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의 마음에 기도의 불이 붙여졌습니다. 여러분, 예루살렘 성전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을 향한 창문을 여십시오. 그분의 십자가 사랑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불이 붙여지게 하십시오. 그 기도의 불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신앙으로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경건한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시시때때로 주 앞에 마음을 쏟으면 매달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무릎을 꿇고...”
두 번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도하는 많은 자세에 대해서 나옵니다. 앉아서 하는 기도가 있고, 서서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엎드려서 하는 기도가 있고, 서서도 그냥 아는 기도가 있고, 손을 들고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서서 드리는 기도는 경건한 기도이고, 손을 들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도인 반면에 납작 엎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하겠다는 복종의 의미가 담겨 있는 기도입니다. 무릎을 꿇는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고 자신을 신하로 여기는 겸비함이 묻어 있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음으로 하나님 앞에 경배와 복종을 동시에 표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경배와 복종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잘 되고 잘 나가는 동안에는 자기가 제일인 줄 압니다. 만사가 자기의 뜻대로 될 것이라고 득의합니다. 그러나 인생에 위기를 만납니다. 사업이 무너지고, 가정이 깨지고, 건강에 위협이 오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비로소 자신은 풀잎 끝에 매달려 있는 이슬 한 방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후우~” 하나님이 털어 버리실 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 자신의 존재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을 보아야 할 시각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는 동안에만 우리가 희망이 있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쾌락과 세상 사랑에 들까불리며 사는 사람들, 그렇게 살라고 하십시오. 어느 한순간에 그 즐거움의 막이 내리고 젊음도 끝나고 육체의 건강도 끝납니다. 잘 나가던 인생길도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어느 순간 그 앞에 털컥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맘대로 될 때는 훌륭한 것 같아도 한마당의 어지러운 꿈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다가 죽으라고 하십시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 사람들에게 인생의 진실을 전하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비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자신을 돌아보며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참 이상합니다.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다른 자세로는 마음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무릎을 꿇었을 때 마음이 가장 편합니다. 자세는 불편한데 마음은 편안합니다. 그리고 심정은 주님 앞에 쏟아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어떠한 사랑을 주셔서 여기까지 나를 이끄셨고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무릎을 꿇을 때 나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그분의 뜻에 복종할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분의 뜻을 모두 받아들일 마음의 각오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영혼은 자유를 받게 되고 하늘을 향해 오르는 날개를 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날개를 타고 우리는 하늘 높이 날며 우리 주님과 대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날개를 다는 은혜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기도 속에서입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아뢰는 불퇴전의 기도, “내 인생은 이제 더 이상 물러갈 수 없습니다.” “앞에는 적군들이 쳐들어오고 뒤에는 천 길 같은 낭떠러지뿐입니다.” “하나님, 이제 나에게는 더 이상 도망갈 것이 없습니다.” “내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옵소서.” 인생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아버지 앞에 기도드릴 수 있는 무릎 꿇는 기도의 믿음, 이것을 여러분이 소유한다면 어떠한 인생의 위기에서도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야기를 잔소리처럼 듣지 마십시오. 그냥 예배시간 하나를 장식하는 설교 이야기로 듣지 마십시오. 여러분 인생의 위기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삶과 죽음 사이, 세상과 신앙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여러분의 비척거리는 발걸음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일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 앞에 불퇴전의 각오를 가지고 매달리십시오. 응답받고 새로운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이렇게 다니엘이 기도를 했는데 마지막에 한 구절이 부록처럼 붙어있습니다. “···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下) 다니엘서는 이상한 책입니다. 구약의 모든 책들이 다 히브리어로 쓰여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옛날 말입니다. 그런데 현대어도 거의 같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로 쓰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에스라서의 일부와 다니엘 2장 4절부터 7장 28절까지가 전혀 다른 언어로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을 원전으로 읽으려면 2개 국어를 해야 됩니다. 그중 한 언어가 바로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는 당시 외교 세계의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였습니다. 그러니까 외교에 있어서 국제 공용어가 당시 중동 지방에서 아람어였다는 것입니다. 이 아람어는 근본적으로 갈대아 사람들의 언어이고, 갈대아 사람들이 바로 바벨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바벨론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사람들에게 이 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학교 다닐 때 배운 함무라비 법전을 기록한 그 언어가 바로 바벨론 사람들이 사용하던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외교적인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국제 공용어는 당시에 아람어였습니다. 현대의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는 영어와 불어입니다. 그래서 독일 사람이든지 한국 사람이든지 일본 사람이든지 대만 사람이든지 베트남 사람이든지 외교 문서를 작성할 때는 두 언어 중 하나입니다. 불어를 사용하던가, 영어를 사용하던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 언어가 바로 아람어였습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다니엘서의 많은 부분, 2장부터 7장에 이르는 아주 중요한 부분을 아람어로 기록하게 하셨겠습니까? 아마도 제 생각에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 글이 이스라엘에게만 읽히지 말고 모든 제국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언어에 계시를 담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감사했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아람어로 ‘모데(mode)’라는 동사입니다. 그게 원래는 ‘찬송했다’입니다. 감사와 찬송이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하게 번역하면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자기의 하나님께 찬송했더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찬송한다는 말인가? 뭐가 찬송할 것이 있다는 말인가? 바벨론에서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만났고, 이제 사자굴에 던져질 운명에 처했는데 무슨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 있겠는가? 이런 반문이 드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나고 다급한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이용해서 이 상황을 모면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이 상황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여 마음을 바꿔 놓아서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신앙의 깊이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그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명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위기에 처했을 때일수록 자기의 상황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송할 조건을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결국 찬송할 이유가 없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에 대해서 잊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찬송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아주 놀라운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아주 아름다운 찬송들이 모두 교회의 역사에서 고난의 때에 탄생했습니다. 핍박과 전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무서운 상황 속에서 아름다운 찬송의 멜로디와 가사들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유산으로 전해집니다. 여러분,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 앞에 그 위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되찾아야 할 신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수많은 사연을 주시고, 우리의 인생에 많은 역경도 주십니다. 믿는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와 당신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껏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어떠한 태도로 주님을 대하면서 살았는지를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다니엘은 인생에 일생일대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도의 장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탁월한 기도의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탁월한 태도가 있었으니 예루살렘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물러서지 않는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 불퇴전의 용기를 가지고 매달리는 끈질김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고난으로 가득 찬 그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니엘로 하여금 어두운 시대를 횃불처럼 자신으로 밝히게 만들어 주었고, 희망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소망을 던져 주었던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 때가 되었습니다. 매일매일 죄에 지고, 세상에 넘어지고, 육신에 지쳐 살면서, 희망이 없는 그런 삶을 반복해서 살지 마십시오. 개나 줘 버리십시오. 그리고 환골탈태 하십시오. 그리고 이전의 쓰레기 같은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향해 담대하게 사는 영적인 군사가 되십시오. 기도의 장소를 정하십시오. 기도의 습관을 기르십시오. 그리고 열렬한 기도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시련 속에서도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이고, 여러분은 거기서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5. 기도하는 자를 구원하심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 굴로 가서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 다니엘이 왕에게 아뢰되 왕이여 원하건대 왕은 만수무강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단 6:19-23)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꽃이 피는 나무의 영광은 그 나무에 꽃이 활짝 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꽃이 지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 이것이 한 나무의 보람입니다. 기도를 많이 해도 그 모든 기도의 꽃은 응답입니다. 응답이 없는 기도는 꽃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응답이 있는 기도는 꽃이 활짝 핀 화초와 같습니다. 응답이 있고 그 응답의 꽃이 지고 나서야 아름다운 열매가 맺게 되는 것이니 이로써 하나님 앞에 우리는 하늘 백성으로서의 부요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목숨을 걸고 왕의 어명을 거역하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위층에 올라가서 평소에 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창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죽음의 위협도 그의 기도에 창문을 닫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변함없는 이 믿음의 태도는 그를 참소하고자 했던 정적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좋은 기회였고 예상하든 바였습니다. 그들은 즉시 다리오 왕에게 직접 고발을 하였습니다. ‘왕이 총애하는 총리 다니엘이 자기의 신께 기도를 드리고 있사옵나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왕도 고칠 수 없는 법에 사인을 했으니 이제 더 이상 변개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로 말미암아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를 구하려고 마음을 쓰며 힘을 다했다고 했습니다. 주석가들은 이것이 아마 율사들을 불러다가 어떻게 법률적으로 다니엘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를 문의한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해결의 길이 없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꼬박 밤을 새웠고 아무 음식도 아무 오락도 금한 상태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실 왕은 이 법령을 세우는 일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이 이 법을 어겼다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괴로워하는 것이 추호도 나오지 않고 오직 다니엘의 안위만을 염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왕도 꼬박 밤을 새웠고 이튿날 새벽에 왕은 급히 달려간 곳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신하 다니엘이 갇혀 있는 바로 사자 굴이었습니다.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을 우리가 읽은 본문이 다루고 있습니다.
II. 기도하는 자를 구원하심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는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구원하신다'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A. 기도하는 자의 삶
첫째는 무엇이 기도를 능력 있게 하는가? 다시 말해서 기도하는 자의 삶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이 다니엘을 찾아가서 한 첫 번째의 언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왕은 슬피 울며 소리를 지르면서 다니엘에게 물었습니다. “···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단 6:20) 이것은 평소에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아무리 예의를 갖추고 마음을 다하여 자기를 섬긴다 하더라도 다리오 왕은 항상 다니엘이 진심으로 섬기는 분은 자신이 아니라 또 다른 분이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그의 경배를 받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포로로 끌려와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는 처지에 있었고 그 위에 하나님이 높여주셔서 그 나라의 총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에게 주었던 인상이었습니다. 다리오왕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을 섬기고 있는 다니엘, 다니엘을 붙들어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더욱이 다리오 왕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라고 불렀습니다. 몸으로는 의관을 갖추고 자기를 섬기고 있었고 그 큰 나라 메대 제국의 국무총리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정체는 하나님의 종이었음을 다리오 왕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신하는 오직 다리오 왕을 신처럼 여기고 다리오 왕의 종을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몸으로는 다리오 왕을 섬기고 있었으나 그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위해 모든 어렵고 힘들고 귀찮은 일도 마지않아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엎드려 봉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 이것이 바로 다리오 왕의 눈에 비친 다니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아름다운 관복을 입고 어마어마한 궁궐에서 엄청난 권세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공경을 받으며 다리오 왕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리오 왕의 눈에 다니엘은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단 6:20下) 이것이 바로 다리오 왕 마음에 있었던 다니엘의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치를 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돈을 버는 장사꾼일 수도 있습니다. 큰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 회사의 직원일 수도 있고, 그 회사를 깨끗하게 하는 미화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적인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자존심의 문제인 것입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생각나게 해주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리 낮은 지위에 있어도 그는 아주 큰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비록 월급을 받고 회사에 다니고,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물건을 팔아 이익을 얻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종임을 잊지 마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이것이 여러분의 본분인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또 무엇으로 섬기고 무엇으로 생업을 삼고 살든지 간에 여러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가슴에 새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정체성이 다니엘의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졌기 때문에 왕의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았지만 아무것도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 정해진 시간에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문을 열고 기도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관된 삶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결국 우리의 삶은 이유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를 지어도 욕망이라는 이유가 있는 것이고, 거룩한 사람이 선하게 살아도 거기에는 은혜라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가, 주님의 크신 은총이 그의 마음을 붙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 은혜의 통로가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여러분! 가뭄에 말라 죽어가던 대지에 수많은 식물들이 비가 오면 모두 소리치듯이 살아납니다. 계곡에는 힘차게 물이 흐르고, 시들어가던 풀잎들은 싱싱하게 돋아나 모두 자기가 여기 있노라고 함성을 지르는 것 같이 생명의 기운이 약동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생명의 힘입니다. 그리고 물이 바로 그렇게 생명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적절하게 내리는 비와 모든 햇빛이 식물들을 싱싱하게 살아나게 하듯이 우리 하나님 자녀의 영혼은 하나님 말씀의 단비와 은혜의 햇빛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드리는 기도의 시간 없이 여러분의 영혼이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일어나는 범죄, 그리고 끔찍한 살인 사건들, 잔혹한 범죄들에 대한 소식이 쉬지 않고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상식까지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되면, 결국 우리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일관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과의 그 언약을 파기하지 아니하고 주님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그대로 변함없이 어디에 있든지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며,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고야 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 없이, 일관된 기도 생활 없이, 일관된 거룩한 삶이 가능합니까?
여러분의 결심이 약하여 늘 넘어지고, 단호하게 결심을 해도 그 결심을 지탱할 힘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결국 기도의 샘이 마르고 나면 은혜도 그치고 하나님의 말씀도 사라져 나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없기는 여러분 같은 평신도나 목회자나 거룩한 성자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의 샘을 찾았습니다. 거기에서 은혜의 샘물을 마시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결국은 지쳐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샘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그 물을 먹고 다시 원기를 얻어 블레셋을 무찔렀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기도의 샘을 터지게 하십니다. 그 은혜의 물에서 한번 샘물을 마셔보십시오. 지금 여러분 앞에 감당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모든 현실이 가볍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러한 현실에 가슴 아파하며 주저앉아 있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죽음의 위협으로도 다니엘의 기도의 문을 닫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열려진 기도의 문으로 메대 나라를 이기고, 다리오 왕을 이기고,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다시 말하노니 기도하십시오.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그분의 은혜를 간절히 찾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구원하시는 하나님
마지막 두 번째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의 이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자기가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것을 믿었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창문을 닫아둘 수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신앙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바로 다니엘의 세 친구였습니다. 치열하게 타오르는 풀무불 속에 던져질 처지가 되었을 때 다니엘의 세 친구는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왕에게 절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이 풀무불 속에 던지셔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하나님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절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사람들의 믿음처럼 다니엘 또한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열려진 기도의 창문을 닫아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많은 것을 주실 때 좋아하는 것은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믿음은 입증되지 않습니다. 두 가지로 입증됩니다. 좋은 것을 많이 주실 때 변절하지 않는 것으로 입증이 됩니다. 또 무엇인가 필요할 때 그것을 주지 않으시는 처지에서 굳게 참아내는 믿음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합니다." “경배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왕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다니엘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다리오 왕을 비록 하나님처럼 섬기지는 않았으나 그는 하나님 안에서 다리오 왕을 섬겼습니다. 그가 얼마나 유능한 사람이었으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과 벨사살를 섬겼고, 그 나라를 망하게 하고 세워진 메대 나라가 되었는데도 그 왕이 여전히 다니엘을 총애하는 것을 보면 다니엘이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이 신앙을 강조하는데도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멸시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나쁘다고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유능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회사에 쓸모가 있는 사람, 비록 나와는 생각이 달라도 일에 관한 한 나를 내칠 수 없는 사람, 사업에 관한 한 내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결코 이득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지 여러분은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없으면 반드시 큰 표가 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가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어디든지 간에, 여러분이 거기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곳이 되도록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과 피가 섞였습니까? 살이 섞였습니까? 다리오 왕과 다니엘이 인척 관계였습니까? 다니엘의 아버지나 형제들이 다리오의 외가와 무슨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근본도 없는 끌려온 이스라엘의 포로 중 한 사람이었고, 내치면 어디에도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왕들이 다니엘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만큼 유능하고, 그만큼 정직하고, 그만큼 진심으로 왕국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여러분 모두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결국 다니엘의 이 아름다운 특성을 사용하셔서 다리오 왕의 마음을 움직여 그를 살려내게 하셨습니다. 다리오왕의 목소리가 이른 새벽에 사자굴 앞에서 울려 퍼졌을 때 다니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아! 왕이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라는 것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리를 질러 왕에게 말했습니다. “··· 왕이여 ··· 만수무강 하옵소서"(단 6:21)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단 6:22 上) 이렇게 다리오 왕을 안심시킨 후에 자기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해석해 주었습니다. “···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단 6:22 下) 이제서야 그는 진심을 털어 놓습니다.
결국 이 해석이 담긴 고백을 보면서 다니엘 마음의 구조를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제일 먼저 “나의 무죄함이 하나님 앞에 명백합니다." 그는 다리오 왕을 섬겼지만 다리오 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분이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에 그 유명한 ‘코람데오(Coram Deo)'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일체의 죄가 없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 앞에서 내게 모든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나이다.' ‘세상에 머물든지 떠나든지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나는 당신의 눈앞에 있기를 원하나이다.' ‘당신의 용안을 뵈옵는 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 신앙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가장 큰 행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최대의 축복은 하나님이 그를 향하여 얼굴을 드사 그의 얼굴빛을 비추시는 것이 신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간절한 기도 생활 속에서 경험합니다.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절히 매달리고 눈물로 부르짖습니다. 뜻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맹렬하게 부르짖으며 그분 앞에 마음을 쏟아 놓을 때는 오직 그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래서입니다. 그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게 괴로울 것이기에 그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지도록 금식을 하며 목숨을 걸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결국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행복은 기도의 응답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가까이 계신 하나님 나를 버려두시지 않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찬송)
어둡고 캄캄한 그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뭔가 기도를 할 때는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했는데 응답이 되고 나면 주신 물질 때문에 감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는구나.’ ‘나를 홀로 버려두시지 않으셨구나.' ‘언제나 내 곁에 계셔서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시구나.’ 이런 사실을 깨달으며 우리는 그분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용안을 뵈옵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달으면서 인생의 자존감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주신 물질과는 상관이 없이 말할 수도 없는 감격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누군가 정성껏 준비해서 보낸 선물을 받을 때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동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결국은 나에게 아첨하기 위해서 보내는 것이구나.'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진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될 때 그것은 선물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관계가 주는 기쁨입니다. 그런 관계의 기쁨으로 돌아오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응답해주셔서 당신의 품 안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구원해주셨습니다.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해 주셨고, 사자들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막 달려오다가 하나님의 천사가 기합을 넣었더니 사자가 석상처럼 딱 굳어진 채로 하룻밤을 보냈겠습니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맹수에 의해서 죄수를 처단하는 방법은 고대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바벨론뿐만 아니라 메대뿐만 아니라 나중에 로마에서도 그리스도인을 처형할 때 짐승의 먹이로 주었습니다. 사람은 먹기 싫어도 음식을 끼적거리지만, 짐승은 배부르면 숟가락을 놓습니다. 그렇다고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딱 놓습니다. 과식하는 동물이 거의 없습니다.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사람을 던져줘도 사자가 배가 고프지 않으면 절대 사람을 해치지 않습니다.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물 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고대에서 짐승의 밥으로 주는 형벌에 처할 때는 사자를 며칠씩 굶깁니다. 그래서 배가 고파서 죽을 정도로 만들어 놓고 먹이를 던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증명이 됩니까? 그 뒤에 보면 다니엘을 건져낸 후에 왕은 명령을 해서 결국 다니엘을 해치려던 사람들과 가족들을 던져버립니다. 그런데 그 굴이 옆으로 수평으로 난 굴이 아니라 밑으로 파진 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밑에 사자들을 모아놓고 위에서 사람을 던진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그 사자들이 점프해서 공중에서 받아서 뼈까지 씹어 아작을 내버렸습니다. 오늘 성경의 기록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놀라운 감동을 사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영상 하나를 봤는데 너무 웃겨서 혼자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태어날 때부터 개하고 사자 새끼하고 함께 놨습니다. 얘네들이 친구인 줄 압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사자는 6개월만 되면 한 팔십 킬로 구십 킬로 나갑니다. 그런데 개는 6개월 돼봐야 안 그렇습니다. 주먹만 한 게 돌아다니는데, 이 개가 생각하기를 자기가 사자와 동급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 소리를 지르며 쫓아다닙니다. 그런데 이 사자들도 이미 꽤 큰 사자가 됐는데 막 도망을 다닙니다. 얘 때문에 귀찮아서 죽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자가 앉았습니다. 그런데 개가 얼마나 심술을 부리는지 계속 가서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턱주가리를 물어버렸습니다. 물고 막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끌고 가는 것입니다. 사자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면서 손을 흔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어쩌면 그런 방식으로 사자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을 것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사자와 다니엘이 기분 좋게 서로 경계하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에서 아마 다니엘은 사자의 앞발을 베고 누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하룻밤을 지낸 것입니다. 누가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왕이 다니엘을 끌어올려 보니 아무 데도 상한 곳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거기에 하나를 사족처럼 붙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단 6:23) 이것에 기초해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니엘을 건져준 것은 하나님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사용해서 사자의 굴속에서도 안전하게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 믿음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 믿음이 변함없이 유지되는 비결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왕의 어명이 떨어졌는데도 항상 열어놓을 수 있었던 기도의 창문, 이것이 준 힘이었습니다. 이것이 준 신비한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기도고 기도는 믿음입니다. 열렬하게 기도하던 시기가 믿음이 충만한 시기요, 믿음으로 살던 시기는 눈물의 기도가 있던 시기였습니다. 기도가 거의 없는 시기는 믿음으로 살지 않는 시기요, 믿음으로 살지 않는 때는 눈물이 말라버린 기도의 시기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던 자리는 곰팡이가 슬고, 거미줄이 쳐지고, 쥐들이 기어 다니는 골방이 되어버린 때가 믿음 없이 살던 때인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 고난 속에서도 이러한 믿음으로 사는 일관된 삶을 보여주었으니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처지에 놓였든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믿음을 주시고, 믿음이 있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만 붙들고, 그만 매어 달리며, 그에게만 사랑을 쏟으며, 주 앞에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난관과 시련이 놀라운 기도 응답의 환기로 바뀌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주심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삿 15:14-20)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사사기는 사사들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원래 사사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쇼페트(שֹׁפֵט)'라고 하고, 복수로 ‘쇼페팀(שֹֽׁפְטִ֑ים)'이라는 단어로 썼습니다. 원래 이 단어는 ‘재판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분사로 사용되어서 ‘재판하는 사람', ‘심판관', 이런 뜻입니다. 사사들의 역사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무엘이 사울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기까지 약 350년 동안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누구에게나 밝은 역사가 있고 어두운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고, 생각하면 너무 수치스럽고 괴로운 어두운 역사의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제시대 때 36년 동안 지배를 받았던 역사는 암울한 역사였고, 누구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흑역사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바로 이 사사 시대는 그렇게 밝히고 싶지 않은 어두운 역사입니다. 제가 유대인이라면 아마 성경에서 사사기를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치욕스러운 역사가 가득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사기입니다.
사사로 활동했던 350년 동안의 인물은 열두 명입니다. 그중에서 어떤 학자들은 사울이 왕이 되기까지 있었던 엘리와 사무엘까지 사사로 포함해서 계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사의 수는 열네 명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사사는 큰 사사와 작은 사사로 나뉩니다. 큰 사사는 덩치가 크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록이 많이 나온 사람을 큰 사사라고 부릅니다. 이름만 간략하게 나오고 살짝 넘어가는 사사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을 작은 사사라고 부릅니다. 작은 사사들은 별로 한 일이 없어서 간략하게 넘어간 것이고, 큰 사사들은 사건이 많았고 많은 역할들을 했기 때문에 큰 사사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최초의 사사는 옷니엘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사사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군가 하니 가나안 정복의 두 영웅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 중 갈렙의 동생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왼손잡이가 큰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당시로 보면 평범한 계층의 사람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 사사 드보라가 등장하게 됩니다. 여자는 당시 사회적인 신분이 낮은 위치에 있었는데도 사사로 등장을 해서 비교적 큰 과오 없이 훌륭하게 사사의 직분을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바락, 기드온, 아비멜렉, 입다, 삼손 같은 사람들이 바로 큰 사사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사실은 옷니엘 같은 사람을 빼고는 한결같이 신분도 미천하거니와 사실 신앙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기드온은 우리들이 흔히 어렸을 때 주일학교 시간에 배운 것처럼 삼백 용사와 함께 용감하게 이스라엘을 지킨 사람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 유명한 양털에 이슬을 내리는 기도를 두 번이나 반복해서 하나님을 시험했던 인물입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이후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고 기드온은 동족상잔의 주인공이 됩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에게 마지막으로 토지를 분배해야 할 사명을 가진 지도자가 내란을 일으키고 동족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으니, 이 사람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입다라는 인물은 태생이 아주 천하고 동네의 비류들을 모아서 다니던 일종의 폭력배였습니다. 그러다가 사사가 되었고 얼마나 경솔한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처음으로 자기를 마중 나오는 그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공언을 하게 됩니다. 불행히도 처음 마중 나온 사람은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으니, 이 사람도 정상이 아닙니다.
더 가관인 사람이 오늘 다루려고 하는 삼손이라는 인물입니다. 다른 사사들은 그래도 조직이라는 걸 알았고 사람들을 거느리면서 나라를 이끌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항상 혼자 다녔습니다. 무기도 없고 이 사람은 정신세계가 4차원의 사람입니다. 태어날 때는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태어났는데, 소라 땅 단 지파 마노아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나실인의 서약을 했으니 그는 술을 먹으면 안 됐습니다. 그런데 술을 몹시 즐겼고, 당연히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되는데 그는 시체를 만졌습니다. 또 여자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수시로 바람을 피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삼손과 들릴라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블레셋 기생의 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신앙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더욱이 일평생 그의 힘이 머리카락에서 나오기 때문에 나실인의 서원을 따라서 머리를 잘라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들릴라의 꼬임에 빠져 유혹에 헤어나지 못하면서 그 비밀을 가르쳐주게 되고 머리를 깎이고 눈이 뽑힌 채 짐승도 아니면서 연자 맷돌을 돌려야 하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던 사람이 바로 삼손입니다.
이 사람들은 결국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역사를 더 어둡게 만들었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결국 사사기가 전부 21장으로 되어 있는데, 21장의 결론이 아주 우울하게 끝이 납니다. 뭐라고 끝이 나느냐 하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요즘 말로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면 나라가 개판이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개판이 무슨 뜻인지 압니까? 흔히 쓰는 말이 개판 5분 전이라고 합니다. 그게 원래 개반(開飯) 5분 전입니다. 개반(開飯)이라는 게 뭐냐 하면 도그(dog)와 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밥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 6.25 때 군인들이 밥을 합니다. 밥을 해서 밥이 다 되면 뚜껑을 열고 차례대로 밥을 먹어야 되는데 전쟁 통에 너무 배가 고프니까 밥이 되기 5분 전에는 질서가 흐트러지면서 너도 나도 그릇을 가지고 밥솥 근처로 모여드는 데서 개반(開飯) 5분 전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게 오늘날 개판 5분 전이라는 말로 변전이 된 것입니다. 이거는 어학적인 근거가 분명한 것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사사의 역사가 개판 5분 전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걸 다룬 시대가 주전 1390년에서 1055년 사이니까 약 350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사기는 21장으로 되어 있는데 세 토막으로 나눠집니다. 첫째 토막이 1장부터 3장 6절까지입니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어두운 역사 속에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서론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3장 7절부터 16장 마지막 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의 사이클을 그립니다. 주기(週期), 타락주기를 그립니다. 그 타락 주기가 뭐냐 하면 여섯 개의 사이클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구원하면 타락하고, 타락하면 고통받고, 고통받으면 울부짖고, 울부짖어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고, 용서하신 후에는 다시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고 나면 다시 타락하고, 다시 고통받고 부르짖는 그 사이클이 아주 조금의 착오도 없이 주기적으로 계속 되풀이되는 역사를 3장 6절부터 16장까지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장부터 21장까지는 나라가 얼마나 개판이 되었는지를 제사장의 제도, 레위인의 성결이 모두 다 무너지고 어떻게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면서 망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그리면서 마지막이 개판이었더라는 말로 끝나는 것입니다.
사사기 1장에서부터 3장 6절까지의 서론에 보면 결국 사사기 전체가 왜 이렇게 캄캄한 역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두 가지 이유가 제시가 되었습니다. 그 첫째가 정치적인 이유고, 두 번째가 종교적인 이유입니다. 정치적인 이유는 뭐냐 하면 가나안 족속을 모두 몰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정치 지도자들이 결단을 하면 군대를 동원하고 쓸어버려서 정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안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완수했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여호수아가 죽을 때도 가나안 정복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정복이 끝나지 않았다는 건 뭘 뜻합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열두 지파의 백성들이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래서 각기 자기 땅을 할당을 받은 것입니다. 정복을 못했다는 이야기는 땅을 못 받은 지파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지파가 단 지파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아낙 자손같이 어마어마한 자손들이 살고 있는 곳도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싹 쓸어버리고 가나안 땅을 주셨으니까 한 번 더 힘을 내어 합해서 싸우러 갔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남기지 말고 진멸하고 이 땅을 거룩한 땅으로 만들라고 하셨으니 끝까지 정복해서 이스라엘의 깃발을 딱 꽂은 후에 아무도 땅을 못 받는 지파가 없도록 다 분배함으로써 가나안 정복의 명령은 끝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안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오니까 가나안 원주민들은 고지대로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수비를 잘할 수 있는 곳으로 도망가는 건 상식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땅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고 거친 산지로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도 여러 번 만나다 보면 얼굴이 친숙해지듯이 맨 처음에는 죽일 놈이라고 공격을 했는데 끝까지 밀고 가지 않고 내버려 둔 것입니다. 그런 휴전의 상태가 오래 지속되니까 이 사람들이 내려와서 물건을 파는 것입니다. 필요하니까 사고 또 자신의 물건을 그들에게 팔기도 하면서 상호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매우 슬퍼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쓸어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을 모두 쓸어버리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부도덕한 것이나 불결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거룩한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고 그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히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이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 거래가 이루어지게 되고 급기야 신앙이 없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가나안 원주민 딸들의 미모에 반해서 걔네들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의 아들을 그쪽에 장가를 보내어서 멸망시켜야 할 원수들 간에 사돈지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고 보니까 가나안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공중에 떠버리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서 자기 사위를 죽이고 며느리를 죽여야 되는 상황이 되니까 이젠 도저히 그런 싸움이 성립을 안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위기가 서론에 실려 있습니다. 이 정치적인 위기는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그게 뭐냐면 심각한 도덕의 타락을 가지고 왔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주신 것이지 이스라엘이 의로워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 땅을 얻은 이스라엘이 그들과 똑같은 도덕적인 상태로 동화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죄와 싸우지 않을 때 어떻게 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적용하자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는데 죄와 싸우기가 싫은 것입니다. 더 이상 성화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전쟁이 없으면 평화가 오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가난한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지?" “나도 안 쫓아내겠다.” “그 대신 그들이 계속 살아서 너희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될 것이다.” “너희들은 계속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거를 말씀하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성화의 노력을 그칠 때 싸움을 안 하는 편안함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남아 있는 죄가 우리의 옆구리를 계속 찔러서 결국은 죄와의 싸움이 없는 성화를 거절하는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계속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였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는 바로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을 열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신 이유는 바로 그 허망한 우상, 그것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홀로 거룩하시며 모든 인간에게 행복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공경하게 하기 위해서 가나안 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능력의 하나님,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바위를 깨뜨려 샘물 나게 하시고, 메추라기를 먹여 배부르게 하시고, 만나를 주시고,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셔서 마라의 쓴물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그 하나님을 버리는 대신 이방의 우상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그랬을까 하는 의구심을 한번 가져보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더 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소위 지역신 사상이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가르쳐준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지역신 사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지역마다 자기 구역을 관장하는 신이 있는데, 그 구역에서는 그 신이 제일 세다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과 광야에서 최고의 신이었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보니까 새로운 세계를 목격한 것입니다. 너무나 풍요로운 사회였습니다. 발달한 문명을 이룩하고 있었습니다. 좀 과장을 해서 이야기하면 저 산골에 있는 사람을 맨해튼 거리에 갖다 놓은 것 같이 충격적인 문명의 격차를 느꼈습니다. 발달된 문명의 뒤에 뭐가 있나 봤더니 농사가 있었습니다. 농업이 있었고 그 농업을 통해 그렇게 발전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생각을 했더니 그 뒤에는 농경신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바로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풍요의 신들이었습니다. 고대의 유물들을 보면 여신상들이 출토가 되는데 가슴이 일곱 개, 여덟 개씩 배까지 아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땅을 기름지게 하고 풍요롭게 하여 어마어마한 문명을 눈부시게 일구게 한 궁극적인 원인이 그 신들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다리를 걸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을 애굽에서 구원하고 여태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굳이 이 땅에서 강력한 다산의 힘을 행사하는 신들을 밉보이면서까지 우리가 살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유일신론 신앙을 버리고 다신론 신앙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가장 경고하시던 바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으로 오늘날 하나님과 세상을 아울러 섬기며 살려고 하는 현대인과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세상의 물신(物神)에게도 나쁘게 보이지 않아서 세상적으로 살 때는 세속적인 방식으로 번영을 꿈꾸고, 교회에 와서는 신앙을 가진 사람처럼 예배를 하자는 이원주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보기에는 당신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을 향한 말할 수 없는 모욕이기 때문에 이런 예배당의 문은 닫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인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사사기는 어쨌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어두운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치욕의 시간들이었는데 이게 성경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사사들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사는 대부분 옷니엘 같은 사람을 빼놓고는 가문도 미천합니다. 왼손잡이, 아니면 당시에 멸시받던 여성, 그렇지 않으면 창기의 아들, 이런 사람들로 태어나고, 나실인의 서원 같은 것들은 하찮게 여기고 짓밟아버리는 미치광이 같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등장하는데, 사사는커녕 성도로서의 가치도 없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니 이스라엘이 개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위대한 장에 이 쓰레기 같은 사사들의 이름이 막 올라오는 것입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히브리서에서 히브리서를 거의 끝내가면서 히브리서 기자의 어조가 막 절정을 향하던 때였습니다. 뭐라 그랬냐면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그 얘기를 하면서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히 11: 32)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름이 먼저 쏟아져 나옵니다. “···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히 11:32)
사무엘과 다윗의 이야기는 충분히 수긍이 됩니다. 그런데 그다음 것은 뭐냐 하면 이 모든 사람을 싸잡아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사를 포함해서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히 11:33)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 11:34) 우리는 어렸을 때 듣기로 이 사사들을 영웅처럼 떠받들고 본받자고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사사들 중에서는 여러분이 본받아야 될 사람이 없습니다. 옷니엘를 비롯해서 그저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별로 본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삼손처럼 산다면 전 열린교회를 퇴직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느끼는 궁금한 점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왜 삼손이라는 이상한 4차원의 인간이, 신앙이 거의 없이 산 이 사람이 여기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사기 전체를 볼 수 있는, 사사기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빛줄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사사기에 나오는 이 사람들의 모든 비행은 전적으로 사실입니다. 백퍼센트 팩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사사가 된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두 어두운 역사만을 쓰고 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가끔, 아주 가끔 불쑥하고 불같은 믿음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의 손에 붙잡아 사용하셔서 실제로 나라와 민족을 이기시고 이스라엘을 고통 가운데서 구해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사들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묘사를 하자면 사사들의 어두운 역사로 새까만 배경을 칠해 놓으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별처럼 찍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절망적인 사사들의 역사를 읽으면서 ‘아 이제 이스라엘도 희망이 없구나!'라고 좌절하게 하는 대신 그런 사사들의 잠깐 동안에 믿음을 사용하셔서 아무도 꿈꿀 수 없는 위대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심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 흑역사의 어두운 밤하늘 때문에 하나님 구원의 은혜가 별빛처럼 빛나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사사기를 읽으면 이 사사기는 너무너무 감격스러운 책입니다. 이 정도 설명하면 사사기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게 이번 설교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읽든지 이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읽던 성경을 딱 멈추고 오늘 저녁부터 사사기를 드십시오. 그리고 사사기를 세 토막으로 나누면서 제 설명을 그림처럼 떠올리며 천천히 읽으면서 예전에는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 어둠 속에서 별을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갑자기 그 별이 찬란하게 빛나면서 이스라엘의 흑역사를 읽으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래도 버리지 않은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자신에게도 소망을 주실 줄을 믿습니다.
사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삼손이라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길게 사사기를 설명했던 이유는 제가 사사기 읽으면서 너무 은혜를 받아서 예전에 나처럼 사사기를 읽지 말고 지금 저처럼 사사기를 읽고, 이 속에서 다 읽고 나면 눈물이 나옵니다. 무릎을 꿇으면서 깜깜한 어두운 이스라엘 사사의 역사가 내 인생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결국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내가 구원받게 되었구나.' ‘그리고 내가 그 많은 시련들을 극복하고 살 수 있었구나.' 그걸 깨닫게 되면서 어떤 사실에 도달하게 되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을 때만 빛나는 성도다.' ‘주님이 놓으시면 나는 어두운 이스라엘 역사의 한 조각일 뿐이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건 또 소망을 줍니다. 어떤 소망이냐 하면 아무리 칠흑같이 어두운 절망 속에서도 그것은 하나님 은혜의 별빛에게는 찬란한 빛이 드러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 믿음을 가지시라고 이렇게 길게 서론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삼손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4차원처럼 온갖 사고를 다 치고 다녀서 블레셋 사람도 싫어하고, 이스라엘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이 된 게 사사입니다. 사사인데 아무도 그를 존경하면서 따르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독불장군으로 돌아다니면서 사고를 치는데 힘이 장사라서 무기가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다니는 것입니다. 결국은 블레셋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삼손 때문에 도저히 어떻게 이스라엘을 지배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삼손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협박을 해서 ‘삼손을 결박해서 우리에게 끌고 오지 않으면 너희 국물도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삼손을 묶었습니다. 그것도 삼손이 동의하지 않았으면 묶였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묶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II.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주심
그런데 여기에서 보여주는 건 뭐냐 하면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이 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갔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십니다. 이 쓰레기 같은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게 가당이나 합니까? 그런데 성령이 임하십니다. 이때만큼은 삼손의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삼줄이 불에 탄 것처럼 후드득 끊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질긴 줄이 나일론 줄이 아니고, 쇠줄이 아니고, 삼줄입니다. 삼줄은 제가 직접 봤습니다. 가느다란 그거를 양쪽에서 잡아당겨도 안 끊어집니다. 특히 마닐라 삼이 아주 강합니다. 그래서 기계 같은 데 넣고 새지 않게 감는 데 마닐라 삼을 씁니다. 그걸로 밧줄을 만들어서 묶었으니까 누구도 못 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불에 탄 것처럼 확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전쟁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물밀듯이 인해전술로 블레셋 군대들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기도 없습니다. 주먹으로 싸우다가 보니까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나귀의 턱뼈가 있는 것입니다. 썩지 않고 튼튼하다는 뜻입니다. 턱뼈를 가지고 춤추듯이 휘두르면서 일천 명을 죽입니다.
그건 사실은 성경에서 볼 수 없는 희한한 전투입니다. 따르는 군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혼자서 일 대 천으로 춤추듯이 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더기 무더기 쌓아서 결국은 모두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큰일을 하고 난 후 삼손은 완전히 탈진한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그 뼈를 던져버리고 그곳 이름을 ‘라맛 레히'라고 불렀습니다. ‘턱뼈의 언덕이다', 이런 뜻입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하냐 하면 “···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삿 15:18下) 이게 순간적으로 신앙이 들어온 것입니다. 뭐냐 하면 자신이 죽는 건 괜찮은데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져서 자기가 치욕을 당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봐 염려하는 마음이 생겨난 거를 보면 삼손이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하고 비슷한 것입니다. 평소에 살 때는 믿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없느냐, 아니 있습니다. 있냐, 그러면 사실 없습니다. 그게 그냥 어느 순간에 가끔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되고 믿음이 항상 마음 안에서 역사를 해서 언제든지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성도가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보입니다. 그런데 불쑥하고 나타납니다. 그런데 또 잠시 후에 그 믿음을 기대하면 안 나타납니다.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한 게 삼손의 삶이고, 이게 오늘날 여러분의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신기하게 그 믿음으로 살았던 한 순간을 탁 포착하면서 그걸 우리가 본받아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람에게서 배우질 않습니다.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구십구 개가 훌륭하고 하나가 결함이 있습니다. 하나의 결함을 거론하면서 구십구 개의 좋은 점을 싹 쓸어버려서 쓰레기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기는 백 개가 다 쓰레기인데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거는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일종의 열등감과 시기심의 발로입니다. 나쁜 거는 배우지 말고 좋은 거를 배우는 것입니다.
전쟁의 역사를 보면 가장 많이 배우는 것이 적국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전쟁의 역사입니다. 적국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방을 통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적국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서관에 가면 6·25 때 전쟁사가 두꺼운 책으로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 무슨 전투였고, 지휘관은 북한군 별 둘 자리 누구였고 남한은 별 하나짜리 누구였고, 몇 명의 군대들과 어떻게 어떻게, 며칟날 몇 시에 어떻게 전쟁해서, 결국은 왜 졌다, 왜 이겼다, 전사가 다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적국이 그걸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걸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로 살아야 됩니다. 성경이 바로 우리에게 그걸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람피우고 오입질하고, 술 처마시고, 4차원 행동을 하고, 그렇게 미친 듯이 돌아다니던 삼손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다 좋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걸 다 인정해준다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결정적인 때 그가 솟구치는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 그거를 포착시키면서 우리에게 이걸 본받으라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삼손은 가끔 그렇게 살았지만 너희는 항상 그렇게 살아라.' ‘이게 바로 믿음으로 사는 인생이다.'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멘. 결국 신앙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그리고 울부짖게 된 것입니다.
A. 샘물을 터뜨림
그랬더니 하나님이 샘물을 터트리셨습니다. 원래 있던 샘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삼손을 위해서 기적적으로 터트려주신 샘물입니다. 삼손이 온 몸이 지치고 피곤하고 갈증 때문에 거의 죽어갈 위치 상황에 도달했는데 펑하고 샘물이 터지면서 맑은 물이 확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리 중에는 그 감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목말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삼손이 그 물을 퍼마시면서 얼마나 감격했을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 이성의 눈을 가지고 보면 천 명을 때려 죽였지만 그거는 거의 정신없는 상태에서 한 일이고, 삼손은 완전히 탈진이 되어서 나귀의 턱뼈조차 들 힘이 없어서 던져버리고 퍼져버렸습니다. 만약에 한 열댓 명만 언덕에서 다시 블레셋의 군사가 무장하고 쳐들어오면 자기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목이 말랐던 것입니다. 이 물은 금덩어리와 바꿀 수도 없고, 아름다운 여인과도 바꿀 수가 없고, 맛있는 음식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샘물이 상징하는 바는 대체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샘물은 시편 42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합니다"라고 한 것처럼 이 샘물은 영혼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비유로 사용하실 때에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샘물을 우리들이 필요로 한다는 사실, 그것 없이는 아무리 힘이 장사라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곤고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곤고한 궁극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합니다. 돈이 없어서 곤고하고, 몸이 아파서 곤고하고, 애들이 속을 썩여서 곤고하고, 남편의 사업이 잘 안 돼서 곤고하고,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아서 곤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런 문제가 다 해결되고 나면 곤고한 게 사라집니까? 아닙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곤고한 것은 영혼이 곤고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이라든지 인간관계라든지 육신의 고통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우리의 곤고함을 보여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샘물이 터지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갈급한 영혼을 어디에서도 해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샘물이 터진 사건을 통해서 구속사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샘물은 삼손이 먹었어도 다시 목마르는 샘물이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심으로써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에 생명의 샘물을 터트리셔서 그 물을 먹고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유지하며 살게끔 하셨으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영혼의 샘물이시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이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헛된 것들을 찾아서 행복을 얻어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 종말이 삼손과 같이 “내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져 죽게 되었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무엇입니까? 결국 여러분 영혼의 샘물을 점검하는 일입니다. 그 샘물이 솟아나 터져서 여러분의 갈한 영혼을 적시고, 여러분의 힘없는 생활에 힘을 주고 활력을 주는,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그 무엇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샘물이 터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소생하게 하심
두 번째는 하나님이 삼손을 소생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 말로 “살게 한다” 이런 뜻입니다. 이거는 시편에서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내 영혼을 소생케 하옵소서" “소생케 하옵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소생케 하시며" “소생케 하시나이다." “소생케 하옵소서" “소생케 하셨사오니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겠습니다." 이것이 소생입니다. ‘소생(蘇生)’이라는 건 무엇입니까? 생명을 얻는다는 것, 혹은 생명이 확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물면 온 나무들이 다 이파리가 마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파리들이 말라서 비틀어지기 시작하고 낙엽이 아닌 낙엽이 되어서 매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비가 쏟아집니다. 쏴아 하고 쏟아집니다. 저는 어제도 비가 펑펑 쏟아지는데 우산을 쓰고 산책을 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물소리가 막 나면서 산천초목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막 살아나는 것입니다. 산천초목이 살아납니다. 똑같이 우리의 영혼도 ‘소생한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소생의 반대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죽는다는 것은 육신이 죽는다는 것과 다릅니다. 육신은 숨이 끊어지는 걸 죽는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영혼은 숨이 끊어질 수 없는 불멸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죽는 건 없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숨이 끊어지고 생명이 멈추는 것이지만, 영혼의 죽음은 육체처럼 그렇게 죽지 않습니다.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웃기는 게 뭐냐 하면 영혼이 죽으면 미친 짓을 합니다. 평소에 안 하던 미친 짓을 합니다.(삼손처럼) 나실인이 왜 기생한테 갑니까? 그리고 기생이 돈 받아가지고 그 힘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한다는 걸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왜 그 무르팍에 누워서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까?
한국교회의 길선주 목사님을 아실 것입니다. 옛날에는 유명한 목사님들이 양반 출신이 많았습니다. 거의 다 양반 출신이었다고 봐야 됩니다. 그분들은 개인적으로 자기를 돌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종이라고 하면 뭐하지만 자기를 돌보는 비서 같은 사람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대부분 젊은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스토리가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어떤 젊은 여자가 회심을 해서 그 목사님을 너무 존경하면 그렇게 수종을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길선주 목사님이 워낙 설교를 잘하니까 평양 기생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술집의 매상이 뚝 떨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난봉꾼들이 다 회심하고 기생집 출입을 끊은 것입니다. 이거는 야사가 아니라 실화입니다. 그 시대에 살았던 분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기생협회에서 모인 것입니다 ‘길선주라는 인간이 누군지 알아봐라.’ ‘유능한 설교로 예수를 믿게 만든다는데 그 사람들 중에 우리 고객이 상당수가 있어서 우리 사업이 위기에 직면하게 됐으니 묘책을 짜라.’ 그래서 나온 게 기가 막히게 예쁜 기생을 회중으로 가장해서 침투시켜서 막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연기를 하고 목사님의 말씀에 은혜받은 것처럼 연극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가서 ‘주님의 은혜로 제가 살리심을 얻었는데 평생 목사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러니까 마침 목사님도 거들어주는 사람이 없던 차에 그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마각이 드러났습니다.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하고 집 마루에서 베옷 차림으로 쉬고 계시는데 이 그림같이 예쁜 여자가 다가와서 품에 살포시 안기는 것입니다. 그때 길선주 목사님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소녀를 받아주소서” 했더니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확 집어던졌는데 그 여자가 대청마루에서 댓돌을 거쳐서 마당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보지는 못했지만 하여튼 스토리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오히려 그 품을 파고들었습니다. 톰 존스가 부른 ‘딜라일라'라는 그 유명한 노래가 성경에 들릴라라는 이름에서 나온 것입니다. 원래 ‘딜라일라'는 영어로 '요부'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졌어야 되는데 이 사람은 안 가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혼이 죽어 있어서 나오는 미친 짓입니다. 여러분 남편이 어느 날 말도 안 되게 성질부리고, 뭘 집어던지고, 막 폭력을 행사하면, ‘저게 미쳤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영혼이 죽은 것입니다. 육체가 죽으면 잠잠합니다. 그래서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죽은 자는 말이 많습니다. 온갖 거짓말, 사기, 시기, 분쟁, 그다음에 당 만들기부터 시작해서 살인, 간음, 모욕과 별 우상숭배와 별 더러운 일을 다 하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런 죽어 있는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성경 읽어라, 말씀 읽어라, 그래도 기도해라, 그래도 매달려라, 끊임없이 목이 터져라 하고 간청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안 하면 삼손의 영혼처럼 죽은 영혼이 될 거고, 죽은 영혼이 되면 여러분이 미친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미친 짓을 하고 나면 하나님 앞에는 벌 받고 여러분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함께 불행해집니다.
그런데 이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언약의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언약은 “너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여러분이 복의 근원이 되어야지 그렇게 불행의 근원이 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 같은 엄마를 만나서 자식들이 찢어진 가정 속에서 불행해진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딸을 두었기 때문에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면, 여러분을 하나님 자녀 삼으신 그 목적과는 정반대에 자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이웃을 만났기 때문에 너무 괴로워서 이사 가고 싶은 사람들이 생긴다면, 여러분은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정반대의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미친 짓을 하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뭐 좋은 게 있습니까?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말은 어땠습니까? 그냥 무너져서 함께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삼손 일대기의 끝입니다. 삼손의 전부를 본받으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빛나던 잠깐 잠깐의 순간, 그거를 본받으라고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거기서 배워서 전체적인 삶은 삼손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쓰레기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보여주는 삼손의 양면성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소생입니다. 이 소생은 생명이고, 이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생명이 충만하게 부어지면 미웠던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원수도 사랑하게 되고,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헨델의 음악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크세르크세스』에 나오는 '라르고'입니다. 얘기하면 길지만 간단하게 얘기하면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이고, 바하는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헨델은 사람의 품을 감싸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헨델의 ‘라르고'를 들으면서 댓글을 썼습니다. ‘4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헨델의 라르고를 듣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음악에 감동을 받아도 원수를 용서할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정말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람들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아내를 보고, 남편을 보고, 아이들을 보고, 부모님을 보고,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내가 살아있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게끔 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의 자녀로 부르신 인생입니다. 그렇게 못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생하지 못한 영혼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켜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C. 부르짖게 하심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때에 이렇게 샘물을 터뜨리시는 기적을 주시고, 삼손의 죽었던 육체와 함께 영혼까지 살아나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까? 그 답이 바로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히 15:19下) 샘물이 터지는 것을 보고 삼손이 얼마나 감동했는지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자리에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건 옛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흔하게 하던 습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뭐라고 불렀냐면 ‘엔학고레(עֵ֤ין הַקּוֹרֵא֙)'라고 불렀습니다. ‘엔(עֵ֤ין)'은 히브리말로 '샘'이란 뜻입니다. ‘하(ה)'는 정관사 ‘the(그)'입니다. ‘코레(קּוֹרֵא֙)'는 ‘부르짖다'라는 동사의 남성 분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면 “그 부르짖는 자의 샘”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삼손이 일생에 잊히지 않는 강력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도 행하신다'라는 도움을 받게 됩니다. 짜증나는 건 그 다음 성경 구절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크고 위대한 일이 일어났고 감격을 경험하고 삼손은 기생집을 또 찾아갑니다. 이걸 보면서 우리 짜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모습이 하나님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이스라엘 백성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싶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사실은 우리가 잘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은 마지막에 눈이 뽑히고 짐승 대신 연자 맷돌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 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괴로웠겠습니까? 이 사람은 말하자면 미친 기운을 가진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자기를 인도해달라고 해서 결국 연회장이 이루어지는 장소의 기둥으로 가서 그거를 밀어버렸습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너져가지고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죽은 숫자가 자기가 살았을 때 죽인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살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힘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들을 이런 사건을 통해서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손에 대해서 두 가지 양면성을 그대로 공정하게 받아들이면서 못된 것은 배우면서 우리들이 따르지 말아야 하고, 좋은 것은 보면서 우리들이 깊이 감동을 받으며 본받는 것이 이 사사기를 올바르게 읽는 방법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셨냐 하면 그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터뜨려 주신 것입니다. 시인들이 그렇게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 앞에 은혜를 빌며 간절히 울부짖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부르짖는 자에게 샘물을 터트리셔서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사람들이 끊임없이 예배당에서 자신이 정한 처소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기독교는 이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하나님 앞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절히 부르짖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샘을 터트리시고 죽은 여러분의 영혼을 다시 살려내실 줄을 믿습니다.
7. 고난 받을 때 기도하라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 5:14-15)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지난주에 여러분은 사사기에 관해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삼손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생수의 샘을 내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호세아서는 그 후에 약 300년 후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주전 약 760년경부터 주전 약 722년경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조금 더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책 두 권을 꼽으라면 저는 시편과 호세아를 꼽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호세아는 구약성경 중에서도 가장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자기와의 관계를 설명하실 때 아버지와 자식의 비유를 드시기도 하시고 왕과 백성의 비유를 도입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서는 놀랍게도 남편과 아내의 유비를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호세아 선지자 하면 그의 결혼생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결혼생활을 소재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 관계를 다룬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호세아서는 14장밖에 안 되고 이야기가 단순하기 때문에 읽기 쉬울 것 같은데 사실 읽을 때마다 어렵게 느껴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두 얼굴로 계속 번갈아가며 나타나시는 데서 오는 혼란입니다. 한 얼굴은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시는 모습이고, 이스라엘을 쓸어버리시고 죽여 버리시는 무서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또 한 얼굴은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셔서 눈물 흘리시고 차마 그들을 놓지 못하시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호세아서에서 어느 부분까지는 A얼굴, 그다음부터 B얼굴이 나와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 하나님의 두 얼굴이 그 장 속에서도 여러 번 반복하면서 마치 밧줄 두 개가 함께 엮이면서 끝까지 가듯이 14장까지 계속됩니다.
이런데서 읽는 사람들은 혼란을 느낍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를 혼내신다는 것인가? 사랑한다는 것인가? 사랑하신다고 해놓고 왜 파멸을 경고하시나? 파멸을 선언하시고 안 버리시겠다고 회복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파멸된 다음에 회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호세아를 읽으면서 느끼는 어려움일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고 나면 호세아를 읽고 싶은 마음이 막 생길 것입니다. 아멘 집에 가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렇게 안개가 싹 걷힐 때 그 책을 딱 붙들고 부지런히 읽어야 됩니다. 전 지난주에 (호세아서를) 세 번 읽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성경 한 권이 마음속에 싹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이때는 북왕국의 여로보암 2세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오래간만에 영명한 군주가 등극했고 북왕국을 전성시대로 이끌었습니다. 이 사람이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으니까 정권이 얼마나 안정적이었고 나라가 부강했으며 또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토는 최대한으로 확장되었고, 국방은 튼튼했으며, 경제적으로 굉장히 부강한 나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번영하는 말기부터 시작을 해서 결국 마지막에 이 나라가 망할 때까지 북왕국의 선지자로 예언 활동을 하게 됩니다. 비록 나라는 강하고 왕성해졌지만, 경제적으로는 강국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은 사사기에서 보는 것 같은 시대로 되돌아갔습니다. 종교적으로 타락했고,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결국은 파멸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여로보암 2세가 죽고 아들 스가랴가 왕위에 올랐지만 6개월 만에 살룸이라는 사람의 반역으로 살해당하고 여로보암 왕가는 끝이 납니다.
그 후부터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약 30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에 스가랴를 포함해서 다섯 명의 왕들이 교체가 됩니다. 그중에 한 왕도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된 적은 없고, 죽고 죽이는 내란 상태에서 왕들이 서로 자리를 다투며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호세아 선지자하고 이름이 똑같은 호세아라는 왕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본 왕이었습니다. 구 강국은 애굽이었고, 신흥 강국은 앗수르였습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운 앗시리아라는 나라였습니다.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호세아는 결국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는데 이때가 주전 722년이었고, 이후로부터 약 180년 후에 남왕국 유다도 멸망의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책은 비교적 구성이 단순합니다. 1부부터 3부로 되어 있습니다. 1부는 1장부터 3장까지인데, 호세아 선지자의 개인적인 결혼생활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부터 13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4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영적인 번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져 있습니다. 첫째는 선지자의 이 결혼생활은 실제가 아니라 가상 내지는 환상 속에서 주어진 풍경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선지자는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음란한 여자를 만나서 가정을 이룰 수가 없고 만약에 그랬더라면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지자의 부르심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결혼생활은 저를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이것은 역사적인 실제의 이야기라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간단하게 설명을 하면 이것을 가상이요 환상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구약에 나오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볍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행동예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소위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이라는 것이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불러주시면 그거를 그대로 가서 복사해서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일정한 메시지를 감동으로 주시면 선지자들은 구약의 율법을 기준으로 그 시대상을 파헤치면서 소위 설교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언의 두 번째 유형입니다. 그런데 예언의 세 번째 유형이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행동예언입니다. 혹은 행위예언이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이 말로 듣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연상하면서 논리적으로 따라와야 됩니다. 그런데 행동예언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저 행동의 의미가 듣고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마음에 다가와서 행동 너머에 있는 어떤 하나님의 메시지를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행동예언입니다. 선지자들은 이 세 가지를 섞어서 예언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행동으로 예언하는 것은 이사야나 에스겔, 이런 사람에게서도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행동예언으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가상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냐, 아니면 실재적인 이야기냐에 대해서 관심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환상이냐 역사적인 실재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거는 모두 소재일 뿐이고 그것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본체가 있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였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호세아의 가정생활이 제 손의 손톱을 가리킨다면 호세아의 결혼생활만 가지고 실재냐 환상이냐를 집요하게 따지고 드는 것은 밤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제 손의 손톱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의도는 뭐냐 하면 저기 있는 달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많이 논쟁할 필요가 없고, 가리키는 달과 같은 그 본체의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거룩한 사람이니 고멜과 결혼하라고 했을 때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창녀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음란한 여자를 취하여 장가를 들라 했는데 결혼하기 전부터 음란하게 살아온 여자냐, 음란하기는 했지만 아직 포텐(potent)이 터지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했고, 결혼한 다음에 포텐(potent)이 터져서 음란한 행동을 하게 되었느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온건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음란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행위로는 나타나지 않은 여자였기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있었고, 그랬다면 그 후에 음란한 행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혼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도덕적인 모순을 가진 결혼은 아니지 않았겠느냐, 이렇게 완화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고멜(גֹּ֖מֶר)이라는 이름이 원래 '가말(גָּמַר)'이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갈 때까지 가다’ 그런 뜻입니다. 참 재밌습니다. ‘끝장을 보다’, ‘갈 때까지 가다’, ‘끝에 이르다’ 이런 뜻을 가진 동사에서 고멜이라는 여자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많은 학자들의 견해는 고멜이 정숙한 여자처럼 살았는데 결혼하고 나서 포텐이 터져서 음란하게 되었다기 보다는 이미 고멜이라는 여자의 이름이 음란한 여자로 널리 알려진 상태에서 이 여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이야기가 실재라는 것을 두 가지만 들자면 이 여자가 구체적으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고 나옵니다. 디블라임이 사람 이름일 수도 있고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장소일 가능성이 많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디블라임이라는 동네 혹은 지역에서 아주 널리 알려진 음란한 여자였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은 경건하게 살기 때문에 전혀 모르지만 밤의 환락 세계 속에서는 잘 나가는 술집의 명단이 있고, 그 잘 나가는 술집에서는 소위 에이스라는 모든 남자들이 함께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여자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매춘의 세계에도 그런 명단이 있어서 그런 여자에게는 6개월 1년 치씩 예약이 밀리고 전국에서 그 도시를 향하여 매춘을 하기 위해 모여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걸 연상하시면 아주 쉬울 것입니다. 고멜이 바로 그런 여자였습니다.
결국 이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을 하게 됐는데 첫 번째로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지으라고 하나님이 아예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의 이름입니다. '이스르엘', 원래 히브리어로 '이즈르엘(יִזְרְעֶ֑אל)'입니다. 이즈르엘은 '흩어버린다', 그런 뜻입니다. 모으는 거는 '은총'의 상징이고, 흩어버리는 것은 '심판'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가르쳐서 ‘파로노마시아(paronomasia)’라고 하는데, 비슷한 말 두 개를 가지고 말재간을 하는 기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이즈르엘'로 바꾸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감정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딸을 낳는데 '로루하마(לֹ֣א רֻחָ֑מָה)'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루하마(רֻחָ֑מָה)’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딸을 낳는데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할 여자애’ 이런 식으로 이름이 지어진 것입니다. 그다음에 아들을 낳는데 이름이 로암미(לֹ֣א עַמִּ֔י)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로(לֹ֣א)'는 '아니다' 이고, '암미(עַמִּ֔י)'는 '내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애정으로 가득 차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실 때 쓰던 호칭이 '암미'입니다. "내 백성들아, 너희는 내 백성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너희는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호세아가 결혼을 했는데, 구체적으로 디블라임의 딸이라는 사람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또 호세아가 자기 아내를 뭔가 팔려갔는지 어쨌는지 값을 주고 찾아오는 광경이 나타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은 열다섯 개와 그다음에 보리를 주고 찾아오는데, 그 가격을 다 합산하면 삼십 세겔이 되고, 그게 그 당시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수치까지 제시하는 것을 보면 이것을 환상이라고 보기보다는 역사적인 실재의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부합하지 않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도대체 이 여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궁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의 학자들도 유력한 견해를 내놓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서 특히 20세기 중반 이후에 들어서서 옛날 가나안의 문자들이 많이 발굴이 되기 시작하면서 베일에 싸였던 역사들이 많이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중앙에 있었던 소위 얘기하는 바알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은 남편이고 이스라엘은 아내입니다. 남편은 한없이 사랑이 많고 아내는 정숙하게 남편을 사랑하며 함께 연합하는 가운데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바람이 납니다. 그런데 바람피운 상대가 누구냐가 문제가 됩니다. 그가 바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깨뜨린 외간남자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바알로 형상화되는 것입니다. 바알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주인' 혹은 '임자', '주'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복수로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결국 이 종교가 다신교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알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유래되었는가는 학자들에 따라 견해가 다릅니다. 아주 다양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바알이 페니키아에서 와서 가나안 본토에 정착하게 된 토속화된 신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견해는 그게 아니라 이미 아모리 족속들이 섬기던 토착신이었고, 그 토종신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결국 오히려 더 번성하게 영향력을 확대해 가서 바알이 되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우리가 확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거 하나는 이 신이 농경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물이 부족한 나라에 분류되기는 하지만 한 50년 전만 해도 물 걱정은 전혀 안 했습니다. 항상 하천에는 물이 흐르고 있고, 댐에는 항상 물이 그득하고, 저수지에는 언제나 물이 담겨 있어서 농사짓는데 어려움이 없는 나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지역이 강수량이 아주 적습니다. 자연적으로 늘 물이 흐르는 하천 같은 거 없습니다. 소위 지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와디(wadi)가 많습니다. 와디(wadi)를 무수천이라고 합니다. 장마철에는 물이 흐르지만 장마가 끝나고 나면 아예 건천이 되어버려서 그냥 계곡처럼 되어버린 그런 천을 와디라고 합니다. 이런 천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흐르는 물을 늘 활용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농사에 있어서 풍년과 제때에 비가 내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관계에 있었고 이 가나안 지역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치명적으로 중요한 생존의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옛날에 가난하던 시절에 천수답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산을 깎아서 계단식으로 논을 조그맣게 만들어 놓고 거기에다 벼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벼를 심을 때부터 제때 비가 와야지만 벼를 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내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그냥 하늘에 맡기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제때에 비가 내려주면 추수를 하는 거고, 비가 안 오면 그냥 누런 흙덩어리로 그냥 끝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처지가 그때 천수답으로 경작을 하던 우리의 처지와 유사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비는 제때 안 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보니까 엄청난 농경문화가 발달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국가의 부였습니다. 그러니까 강가에서 많은 평야를 가지고 엄청나게 많은 곡물을 생산하는 나라가 부강한 나라였고, 그 곡식이 모자라는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약소국이었습니다. 그거를 가지고 온 백성이 먹고 살고 남는 것은 무역을 통해서 온갖 재화와 바꾸면서 그것을 가지고 산업을 일으키고 소비생활을 증진하며 문명을 건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4대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발달한 평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름진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광야에 비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지만 그러나 말하자면 강우 조건이 맞아야 됐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번영한 그런 문명을 이루기까지 그 배경에는 농경문화가 있었고 농경문화 뒤에는 풍년을 가져다주는 풍요의 다신인 바알 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1940년대 50년대 이후에 구약학과 고고학이 발달하면서 어마어마한 문헌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 당시 바알 종교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는지에 대한 실체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1800년대의 학자들이 접하지 못했던 놀라운 자료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한 학술적인 결과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바울 종교는 매춘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높은 곳에 산당을 짓습니다. 바알 신을 섬기기 위한 말하자면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그건 가나안 원주민 때부터 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오고 보니까 엄청난 농경문화가 발달했는데 거기서 일종의 사대사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싹 쓸어버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종교와의 연관을 모두 끊어버리고 거기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그것을 사대사상을 가지고 흠모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지만, 그러나 이 땅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바알의 구역이었으니 굳이 바알에게 밉보이면서 우리들이 농사를 망치면서까지 그렇게 대적할 필요가 있겠느냐 생각하면서 소위 얘기하는 종교적인 혼합주의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도 섬기고 바알도 섬기면서 두 신으로부터 모두 복을 받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가 심해지고 왕과 지도자들까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진하여 그런 성전을 건축해서 바알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른 비가 내립니다. 이른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고 땅을 일굽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씨앗을 뿌립니다. 그리고 늦은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고 결실을 하며 마지막에 추수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당연히 그 사이에는 햇빛이 날 때 일조량이 풍부해서 과일과 모든 곡물을 충분히 익어가게 만들어야 될 것이니까 비가 오고 햇빛이 나고, 햇빛이 나고 비가 오는 사이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이클을 바알이 주관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때가 됐는데 비가 안 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산당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데 고고학적인 자료를 보면 많은 작은 방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바알을 섬기는 제사 속에 한 제의적인 순서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행위입니다. 그 작은 방에 들어가서 남녀가 성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관계를 하는 그 광경이 바알에게 자극이 되어서 농사에 이롭게끔 이 사이클을 조절하여 내리지 않는 비를 내리게 하고, 부족한 햇빛을 풍부하게 비치게 한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 신나는 교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가서 농사를 위한 제사도 드리고, 거기 가면 사회적으로 합법적으로 하나님이 합법화하신 건 아니지만, 자기들끼리 서로 이해해 주는 성적 타락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면서 바알 종교는 농경문화와 함께 번성하게 되고, 결코 이스라엘에서 사라지질 않습니다. 심지어 히스기야 같은 훌륭한 임금, 요시야 같은 임금이 있을 때조차도 그 이방의 신당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왕국이 분열된 다음에 결국 끝까지 뿌리 깊게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살아남는 것입니다.
고멜이 그러면 이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많은 학자들은 추측하기를 고멜이 일방적으로 화류계에서 몸을 파는 여자가 아니라 유명한 신전 창녀였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성전에 일정 기간 거주하면서 제사 드리러 온 참배객들을 맞이하여 대가를 받고 몸을 팔아주는 신전 창녀들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은 여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음란한 여자 고멜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정도로 이름난 여자가 되었고, 그래서 결국 선지자와 이 여자를 결혼시키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행동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저렇게 타락하고 창녀인데도 짝이 있다. 마찬가지로 너희 이스라엘이 이렇게 정조를 버리고 걸레처럼 되어 버렸지만 너희에게는 잊어서는 안 되는 남편이 있다. 이것을 호세아의 결혼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 고멜을 호세아 선지자는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랑한 정도가 그냥 하나님이 아내로 주셨기 때문에, 버리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데리고 있는 사이였다면 호세아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이 여자가 결혼 생활을 파탄내고 음란하게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데도 호세아의 속에는 이 여자를 향한 사랑이 꺼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계속 더 가엽고 불쌍하고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아내가 1장 2장 3장에 등장하는데, 이것도 1장 2장은 같은 아내이고 3장은 또 다른 아내가 아닌가, 그렇다면 호세아는 두 번 장가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이거는 1, 2, 3장의 여자가 동일한 사람이든지, 3장의 여자가 다른 사람이든지 결론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호세아 선지자에게 자기 아내가 그렇게 부정하고 타락했는데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는 불타는 진실한 사랑을 주신 것인데 이 사랑은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이스라엘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가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도 이스라엘이 싫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이 더러운 이스라엘이 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진심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자기가 그 더러운 여자를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의 경험으로 사랑하면서 주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이심전심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메시지에는 뜨거운 불붙는 사랑과 함께 그 심장을 갈아내는 말하자면 절절한 애정이 함께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그거를 선지자에게 보여주시니까 선지자는 자기 심장을 꺼내서 믹서에다 갈아서 빨간 잉크를 만들어서 그걸 손으로 찍어서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오라고 글씨를 쓰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 정도면 심정이 전달이 됩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사랑의 고백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그 마음을 선지자가 자기 아내를 향해 똑같이 이심전심으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이 비극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 행동예언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인 제의와 함께 그런 성적인 행위가 있었다는 암시가 놀랍게도 성경에 나옵니다. 사사기 2장 17절에 보면 어떤 말씀이 나오냐 하면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을 했다"라고 나옵니다. 신들을 따라갔다는 것은 그냥 일반적인 이야기도 되지만 섬겼다는 이야기고, 결국 거기에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처럼 음행이 따라옵니다. 이것이 어떤 사람이 해석하는 것처럼 그냥 우상을 섬긴 건 섬긴 거고 여기서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음행과는 상관이 없는 종교적인 간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앞에 해석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더 기함을 토하는 구절은 아모스 2장 7절에 나오는데 뭐라고 나오냐면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자에게 다녀서"라고 나옵니다. 그게 뭐냐면 한 여자를 놓고 아버지도 관계를 갖고 아들도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이거는 정상적인 결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건 뭐냐 하면 결국 신전에서 이루어지는 매춘에서 아버지나 아들이나 거기에 들어가고 나면 그 다음에 그건 무슨 명패를 붙이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거는 익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도 남자고 아들도 남자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들어가서 술집에 가서 제일 예쁘고 성격 좋은 사람을 골라서 그 여자하고 술을 먹고 싶을 것입니다. 신전에서 이런 일들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주석가들은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으로 그 여자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걸 통해서 이 선지자는 자기의 가정을 초월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찢어지는 마음을 누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마음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구나. 바로 하나님이 이런 마음으로 타락하고 도덕적인 부패의 길을 걸어가고 돌이킬 수 없는 우상 숭배의 죄에 빠졌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을 이렇게 잊지 못하고 사랑하시는구나. 이런 것을 절절히 느끼는 데서 이 호세아서는 다른 어떠한 예언서도 가질 수 없는 파괴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온몸을 찢어서 그 피로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라고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풀어야 할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왜 하나님의 두 얼굴이 이 동일한 성경 속에서 나타나는가? 이것은 호세아서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선지서는 심지어는 역사서 모두 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졌습니다. 1부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없는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리고 2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결국 버리지 않고 싸매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두 하나님의 얼굴이 모든 선지서 속에 1부와 2부로 등장을 하게 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이것이 1부 2부로 나뉘어 졌지만, 그러나 이 모습이 계속해서 언뜻 언뜻 두 얼굴이 나타났다.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면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나는 방식으로 교차되면서 읽힙니다. 이런 지식이 없는 채로 호세아서를 읽으면 도대체 뭐라고 결론을 내려야 되는지,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에 대해서 혼란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호세아의 가정 이야기를 다루면서 무슨 말씀을 하시냐 하면 “음란한 여자에 가서 장가를 들어라." 그러면서 결국은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아주 매정하게 선언을 하시면서 하나님이 이런 이야기를 또 불쑥하십니다. ‘그러나’, 이건 앞에 이야기를 뒤집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호 1:10 上)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내 백성)이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라 하라"(호 2:1) 앞에 이야기를 뒤집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나라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통일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이 말씀을 받았을 때는 남북통일에 대한 비전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남왕국과 북왕국이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찢어집니다. 결국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역사를 보면 안 합쳐집니다. 합쳐지는 게 아니라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당하고 이어서 180년 정도 후에 남왕국 유다가 멸망당하는 것으로 그냥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없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뛰어난 왕이 나오고 이스라엘 자손의 수는 바다의 모래같이 될 거라고 하는 비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건 결국 뭐냐 하면 육적 왕국으로서의 두 왕국이 아니라 이 나라가 역사 속에서 모두 사라지고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오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나라를 초월해서 모여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한 백성이 될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런 구속의 비전이 결국 첫 장에 나오고 그것이 마지막 장에도 나오면서 두 개가 수미쌍괄식(首尾雙括式)의 관계를 가지고 두 비전을 함께 보여주면서 그 중간 2장부터 13장 사이에 스토리를 풀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문학적인 구조로 돼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두 얼굴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이냐? 이거에 대한 의문을 풀면 호세아서가 아주 단순 명료하게 다가오면서 아주 진한 감동을 여러분에게 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설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성경을 미친 듯이 펴고 싶을 것입니다. 아멘. 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에 읽어버리십시오. 그냥 빠르게 감기로 성경 읽기 틀어놓으면 읽는데 1시간도 안 걸립니다. 30여분밖에 안 걸립니다. 한 번에 읽으면 성경이 확 하고 마음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에 한 장씩 한 장씩 곱씹으면서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오면서 이 호세아 속에 나타나 있는 여러분이 예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메시지를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 두 얼굴에 대한 대답은 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는데 그 방식이 언약입니다. 언약인데 원래 히브리 사람들의 말을 따르자면 언약은 그냥 일방적으로 주는 것입니다. 그게 언약이 아니라 계약입니다. 계약을 하시는데 두 개의 계약 전통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함께 흐릅니다. 하나가 사라지고 그다음께 오는 것이 아니라 두 개가 함께 계속 흐릅니다. 첫 번째 언약의 정통이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별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믿음하고 아무 상관이 없이 갈대아 우르에서 그냥 이방신을 섬기며 우상을 만들며 살던 집안의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 사람을 택하셨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개인적으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 속에 살고 있는 그 사람을 떼어내어서 부릅니다. 자기 앞에 세우시면서 하나님이 그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계약을 맺으십니다.
그런데 이거는 둘이 서로 뭘 하면 준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냥 일방적으로 너에게 이걸 줄게.” “그런데 그 계약이 뭐냐 하면 네가 복의 근원이 되고 모든 사람이 너 때문에 복을 받게 될 것이고 너희의 자손은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시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손을 이끌고 밤하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이런 경험은 새로운 경험이긴 하지만 그러나 듣도 보도 못한 경험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때 많은 신들이 갈대아 우르에 있었고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신들을 환상으로 보기도 하고 신탁을 받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내게 처음으로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여태까지 조상과 주위의 사람들이 만났다고 하는 허접한 갈대아 우르의 다른 신들과 무엇이 다른지 처음에는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도 되지 않는 이상한 행동을 하십니다. 그 약속을 하신 다음에 아브라함에게 명령을 하여 짐승을 쪼개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는 뭐냐 하면 짐승을 쪼개는데 이게 그 당시에 있었던 소위 봉신언약이라는 것입니다. 큰 땅을 왕이 차지하면 자기가 다 다스릴 수 없으니까 제후를 임명합니다. 이 사람은 그냥 평범하게 농사짓던 사람인데 ‘내가 널 제후로 부르마.’ 그러고 불러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걸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당신 와서 장관하십시오.’ ‘저는 아무래도 비리가 많아서 못 나가겠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왠지 영광으로 생각하면 나오듯이 나왔던 것입니다. 둘이 같이 작성하는 게 아니라 왕이 일방적으로 작성하는 것입니다. ‘너는 나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를 위해서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봉사해야 된다.' ‘그러면 나는 너에게 이 땅에서 거두는 세금 중 일부를 너에게 주고 이 백성들을 다스리게 해주마.' 증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거는 둘이 서로 사실은 약조를 주고받은 것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왕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서류입니다. 그거를 가지고 큰 황소를 쪼개놓고 피가 질펀하게 흐르는 그곳을 왕과 새로 임명되는 봉신이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우리 둘 중 하나가 서로를 배신하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신들이 이렇게 짐승을 머리부터 꼬리까지 절단을 내듯이 우리에게 저주가 퍼부어지기를 바란다는 걸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언약 체결 의식에 아브라함은 아주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가장 신성하고 심각한 맹세의 형태가 바로 그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짐승을 쪼개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이를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그건 무슨 메시지냐 하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겠다는 약속을 내가 한다." "내가 어기면 내가 이렇게 저주를 받겠다." 사실 말이 안 되는 게 하나님보다 높은 누가 있어서 하나님을 저주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건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그런 식의 화법 이상으로 아브라함에게 호소력이 있는 화법이 없었기 때문에 소위 얘기하는 ‘아콤모다티오(accommodatio)’라는 눈높이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가장 심각한 언약 체결 의식 그리고 이것은 결코 거짓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그 의식을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확신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싹 트고 강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신은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났던 그 수많은 허접한 신들하고 다른 어떤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언약은 아브라함과만 맺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과 모두 맺은 언약입니다. 그 언약의 물줄기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흐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조건이나 우리의 행위나 잘한 것을 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약속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는 거라고 해서 우리들이 은혜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종일관 은혜 때문에 지탱된다고 해서 은혜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결국 많아지기를 최소한 이백만에서 삼백만 명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말하자면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해서 첫 번째 간 곳이 바로 시내산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로 또 율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모세 언약이 체결이 됩니다. 그런데 이 모세 언약의 핵심은 뭐냐 하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따라서 살면 하나님이 큰 복을 주셔서 가나안에 가서 이루어질 너희 나라가 강력한 나라가 되고 부강하고 그리고 부유한 나라가 되어서 너희 나라한테 꾸러 오는 사람은 있지만 어디로 꾸러 가는 나라가 되지 않겠다. 그런데 만약에 너희들이 이 계명을 어기면 죽는다. 그리고 계약 속에 칼이 들어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계약을 어기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칼이 함께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들이 혼란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시는 아브라함의 언약과 지키면 복을 받지만 안 지키면 칼로 목을 찌르리라고 하는 무서운 칼과 함께 들어오는 피 묻은 이 언약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답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언약은 영원한 나라에 관련된 언약이고, 모세 언약은 일시적인 세상 나라와 관련된 언약입니다. 모세 언약은 지켜서 구원을 얻으라고 준 언약이 아닙니다. 처음서부터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주신 이유는 지상 왕국에 한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잘 지키고 온 나라가 십계명을 따라서 살면 하나님이 번영하게 하셔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행위 계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 사는데 만약에 그 계명을 어기고 불순종하게 되면,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하나님이 나라를 파멸로 이끄시는 거고,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멸망의 역사는 이 모세의 언약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휘두르시는 칼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온 세계에 나라가 200여 나라가 있는데 나라마다 각각 형편은 다릅니다. 아주 피나게 독재를 하는 나라도 있고, 인권이 거의 유린되는 나라도 있고, 아니면 성적으로 너무 타락한 나라도 있고, 여러 가지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거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나라만이 아니라 세상 나라도 너무나 타락하고 망가지면 하나님이 그 나라를 정리하십니다. 그래서 산산이 흩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강한 나라들은 자신의 부강함을 믿고 너무 교만하면 안 됩니다. 악이 차면 하나님이 통치자를 죽이시든가 나라를 박살내서 흔적도 안 남기시고 사라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역사의 부도를 넘기면 어마어마한 나라들이 왜 그렇게 몇백 년 만에 먼지처럼 사라지는가 하는 것들에 대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어서 세상과는 상관이 없지만 육적으로는 세상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가 건강하고 하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정의롭고 인정이 많은 나라가 되는 데에 이바지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지만 여러분이 여기에 있어서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자손들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그렇게 보면 문제가 풀립니다. 어떻게 풀립니까?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그렇게 끊임없이 당신을 버리고 도망가도 뼛속까지 타들어가기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잊지 않고 기억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은 결코 물로도 끌 수 없고 모래로도 끌 수 없습니다.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들은 이미 모세의 언약을 파기해 버렸기 때문에 수많은 고난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똑같으냐면 우리가 한 번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이 구원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건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이 구원은 받았는데 여러분이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사랑하여 영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지고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부패에 흐르게 되면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살아있는 동안에 여러분의 삶이 매우 매우 고달프고 괴로운 날들이 연속될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이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안 그런 것 같은데요?’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가정도 파탄시키고, 폭력을 행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직원들을 해고하고, 심지어 폭력을 행하고, 뇌물을 바치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는데, 아주 떵떵거리고 가난하지도 않고 권력자들과 줄이 닿으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경상도 사투리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지둘려." 기다려보라, 이것입니다. 그러면 종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풍비박산이 되고 박살이 나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은 안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그렇게 살았는데 결국은 끝까지 망하지 않고 그 재산을 자손들까지 누리게 되었습니다.’ 비명에 죽지 않았습니까? 비명에 죽었습니다. 돈을 잔뜩 모아놓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았는데 자기는 비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누리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그 재산을 뜯어 먹고 누립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처럼 유한한 존재입니다. 결국 파스칼이 말했던 것처럼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서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후하고 불면 날아가는 게 인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오늘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가족들은 장지를 알아보는 신세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오늘 사고가 나서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행복하던 가정이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깨뜨려지면서 망가지면서 불행으로 쳐들어가는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만나면서도 하나님의 이 은혜언약을 꼭 붙들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힘으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지만 하나님과의 이 언약을 깨뜨린 사람들은 하나님이 끝까지 구원해 주시겠지만 그러나 결국 그의 삶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못 믿는 사람은 예수를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 더 불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파괴하는 데서 오는 불행이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결국 호세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불붙는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게 하시는 것이 이 호세아를 보낸 목적이었던 것처럼 오늘 이 호세아와는 달리 약 2700년 후에 살고 있는 여러분에게 그 마음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저를 여러분에게 설교자로 보내신 것은 똑같은 동일 선상의 목적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극적인 상황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우상숭배의 신전에 올라 그들처럼 우상을 섬기고 그들처럼 성행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 대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쾌락 좋아하기를 하나님의 율법보다도 더 좋아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미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돌이키는 것이 하나님이 설교자를 보내시는 목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되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로소 옛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II. 고난 받을 때 기도하라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4절과 15절에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A. 고난의 이유: 죄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뭐냐면 고난의 이유입니다. 고난의 이유는 한마디로 얘기하면 죄입니다. 사사기서를 공부하며 삼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스라엘에게 돌이킬 수 없었던 큰 두 가지 죄가 있었다고 그랬습니다. 종교적으로 타락한 것과 도덕적으로 부패한 것, 이것이 결국 파탄에 이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의 길로 향하여 치달아 갔던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시대에도 똑같이 종교적으로 타락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처지가 되어서 인륜이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율법이 모두 사람들에게 짓밟혀서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과 세상 백성이 아무것도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까지 이르게 되었고 선지자의 목소리까지도 다 변질되어 버린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종교적인 타락과 도덕적인 부패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것을 하나의 뿌리에서 호세아는 찾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지식이 없음’입니다. 그래서 4장 6절이 호세아 전체의 요절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호 4:6) 이런 무시무시한 선언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게 ‘다트(דַּ֣עַת)'라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런데 동사가 ‘야다'(יָדַ֖ע)'입니다. 첫 번째 쓰인 곳이 “아담이 하와와 동침함에 가인을 낳은지라" 할 때 쓴 게 첫 번째 쓰인 용례입니다. 그래서 영어의 노우(know)라는 단어에 ‘성교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지식은 그냥 과학적이고 이지적인 지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서로 알게 되는 그 지식입니다.
부부 사이에 지식이 없는 부부 관계가 있고 지식이 있는 부부 관계가 있습니다. 지식이 없는 부부의 관계는 그냥 데면데면하고 삽니다. 그리고 내일 헤어진다고 해도 눈물 한 방울 안 나고 모레 죽는다면 신문지로 가리고 웃을 수 있는 관계가 지식이 없는 관계입니다. (신문지로 가리고 웃는다는 게)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새로 시집 갈 수 있으니까 웃는 것입니다. 장가 갈 수 있으니까 (웃는 것입니다.) 그게 지식이 전혀 없는 부부 관계입니다.
그런데 지식이 있는 부부 관계는 어떤 것이냐면 이것입니다. 둘이 서로 사귀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서로 사랑이 깊어져 갔습니다. 6, 7년을 교제를 했는데 대판 싸웠습니다. (자매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 인간하고는 일생을 같이 하면 안 되겠구나.’ 그리고 단교를 선언했습니다. 단절을 선언하고 이제 우리 더 이상 만나지 말자하고 카톡이고 뭐고 다 지워버렸습니다. 전화 오면 연락도 안 받았습니다. '이제 찾아오지도 말아라.' '이제 넌 나와 남이다.' 그리고 받았던 선물을 갖다 팽개쳐 버렸습니다. 남자도 보니까 '이거 6년 동안 내가 속았네.' '인간도 아니네.' '저런 성질머리를 가진 여자하고 살다가는 내가 일생 진짜 불행하게 살 거야.' 자기도 다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선물을 갖다 패대기를 쳐버렸습니다.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한 이틀이 지났는데 궁금한 것입니다. '이 여자가 어떻게 하고 있을까?' 3일이 되니까 보고 싶은 것입니다. 4일이 되니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일주일이 되니까 미치는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서 무릎을 꿇어도 용서 안 해줄 것 같습니다. 관계가 회복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밤거리를 나왔습니다. 터덜터덜 걸었습니다. 터덜터덜 걸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둘이 저녁때마다 늘 만나던 어느 공원에 발걸음이 옮겨진 것입니다. 거기에 앉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자매가 바로 옆 벤치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계속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헤어지려고 결심했는데 지식이 아직 안 없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걸 어떻게 정의를 내렸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다운 행위를 하면서 거룩한 인격으로 살아가게 하는 모든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 속에 있는 그 무엇, 그렇게 저는 정의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자신을 버린 거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부부가 살다가 이제 싸움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 별로 안 합니다. 여러분은 자주 하실 것입니다. 싸움도 하는데 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판 싸우고 말도 안 하고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래도 이 사람 없이 못 살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결정적인 사건을 만납니다. 그래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관계에 도달하면서 진짜 못 돌이킬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뭐라고 합니까? ‘이제 모든 정나미가 뚝 떨어졌어.’ 그럴 때 그 정나미가 지식에 가까운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 가십니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사람 안에 있어서 갈등하면서도 결국은 서로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 그것이 지식의 정체라고 보시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가장 사랑받는 삶은 뭐냐 하면 그 지식이 증진되는 삶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경험적인 지식이 내 안에서 점점 더 견고해져서 이스라엘이 우상을 볼 때 그러니까 어떤 여자가 그 지식이 한 남자에 대해서 아주 넘쳐서 자기 남편을 사랑하게 될 때 그 여자에게는 세상에 남자는 없습니다. 그냥 남편 한 사람과 온 인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게 순결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외에 다른 백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점점 커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그걸 우리말로 성화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어도 변화가 없습니다. 감격도 없고 마치 교회는 나오는데 헤어져야 할 부부가 애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종교 생활입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애틋한 정나미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하고 헤어져도 눈물 나지 않는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끊임없이 외간남자들에게 눈길을 주면서 어디 멋있는 사람이 있나 하고 이스라엘이 있을 때 진짜 멀끔한 남자 하나가 딱 나타났는데 바알입니다. 푹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벌어다 준거 다 갔다가 바알에게 바치면서 몸도 바치고 물질도 바치고 모든 걸 바치면서 삽니다. 하나님께 해야 할 그 일을 바알에게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언약 관계는 산산이 파괴가 되고 이스라엘은 끊임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지식이 없는 것, 그 지식을 버린 것이 모든 죄의 궁극적인 원인입니다. 내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까? 1년 전에 여러분을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정상적이면 여러분이 1년 전에 있는 여러분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 되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방황하며 살고 있구나!’ '그런데 사실은 이런 거란다.' '신앙은 이런 거고 인생은 이런 거란다.’ ‘너도 이제 철 들어보면 안다.' 그런데 그게 전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증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뭘 해도 형식적입니다. 그러니까 진심에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죄가 결국 떠나질 않으니까 하나님은 모세의 언약을 따라서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이 얼마나 지엄한지를 깨닫게 하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언약을 깨뜨리면 결코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고 쓰디쓴 물을 먹고, 양식 대신 모래를 퍼먹어야 하고, 기름진 고기 대신 이 세상에서 나뭇잎을 먹어야 되는 비참한 궁핍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탕자가 타국에 가서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 때에 가장 큰 이익을 보는 당사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은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아는 것 죄를 버리고
주님을 알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고난의 해결: 은혜
마지막으로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 고난을 해결하시는가?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스스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매일 경험하는 것이지만 어떤 올바른 일을 하면서 살려고 결심을 하면 즉시 그것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우리 밖에 환경에서 (일어납니다.)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언약을 받아들이고 그 은혜언약을 따라서 사는 그 자체가 하나님 율법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힘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은혜 언약을 져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타락에 빠지고 부부와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어떻게 돌아올 것인지를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 5:15) 첫째는 죄악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가 곤고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왜 이렇게 곤고하게 살아가는지를 깊이 성찰하는데 그걸 깨닫게 해주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빛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모두 죽어 있어도 이 귀가 있고 우리의 마음이 있으면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진리의 빛이 결국은 우리의 지성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결국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고 전혀 곁길로 나가지 않는다면 최고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한 사람도 모세의 언약을 완벽하게 지킨 사람은 없습니다. 이걸 원래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에 메달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매달리게 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백성인데도 모세 언약의 채찍을 통해서 종아리를 치시고 등짝을 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우리가 주님께로 뉘우치고 돌아왔을 때는 모두 회개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 회개 이미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염없이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아무도 원망하고 싶지 않고 오직 원망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나고 음탕한 고멜과 같이 주님과의 언약 관계를 배반하고 외도에 빠졌던 나 자신밖에는 미운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은 아무리 나를 미워해도 과거에 일어난 일을 고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 관계를 고치기 위해서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한 달을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무슨 말씀을 하는지 한 번 예배드리는 사람이 주님을 더 빨리 만납니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죄악을 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성경이 꿀처럼 달기 시작합니다. 한 번 호세아서를 읽었는데 다시 읽고 싶습니다. 더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감동시켜서 예전에는 고멜을 더러운 년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내가 더러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멀리 떠났을 그때부터 주님의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내가 더 이상 하나님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하나님께로 옮겨놓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두 번째는 주님의 얼굴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시는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우리 인간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난 일주일 동안 30센티 거리에서 어떤 사람의 얼굴을 10초 이상 본 적 있습니까? 있다면 여러분 이상한 사람입니다. 없습니다. 아내하고 남편이 30초 이상 30cm 거리에서 마주 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면 대 면으로 딱 들여다보시는 경우가 딱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게 뭐냐면 너무 사랑하셔서 들여다보시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하나님은 내 얼굴을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30cm 아니 10cm 거리에서 두 눈을 마주 보아도 시간이 멈춥니다. 왜냐하면 너무 사랑스러우니까 나는 그대의 눈 속에 빨려 들어가고 그대는 내 눈 속에 빨려 들어오면서 몸은 둘이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연인처럼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찬양)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너무 사랑스럽게도 여러분에게도 이런 심정이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눈 주님을 보기를 원하고 그리고 주님의 눈이 내 얼굴에 머물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그 얼굴을 구하는 때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인간의 얼굴을 뚫어지게 계속 바라보시는 경우가 한 번 더 있습니다. 악인을 파멸시키기 직전에 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을 대면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한없는 달콤한 교제의 대면입니까?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심판 직전의 대면입니까?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기쁨은 팔복 중에서 최고의 복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얼굴을 어디서 봅니까? 기도 속에서 내 기도를 들으시는 것 같을 때 우리는 그분의 얼굴을 봅니다. 말씀 속에서 내게만 설교하시는 것 같을 때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봅니다. 그 모든 말씀을 듣고 내 마음이 감동을 받아서 주 앞에 회개의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 있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면전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웃으시는 얼굴 앞에서 그분을 뵙지만,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 거역하고 우상 숭배와 간음의 죄에 빠지고 세상 쾌락을 사랑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뿐 하나님의 얼굴과 마주하지 않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을 가졌다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그분과의 교제를 누리며 살아야 될지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찾으시는 분이니 여러분이 주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간절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 5:15 下) 하나님 자신을 찾고 또 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나타난 형태가 기도입니다. 하나님 너무 사랑하면 마지막 나타나는 형태가 감사의 기도입니다. 고난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지막 그 모습이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있고 난 후 그 마지막 열매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생각으로 우리가 아이를 잉태한 후 마지막에는 기도를 통해서 이 아이를 분만하는 것처럼 우리의 죄를 쏟아내기도 하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시공간 속에서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운명적인 사랑입니다.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이고 결코 여러분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차마 하나님이 여러분의 손을 놓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사랑이 많은 어머니 아버지라면 자식이 죄를 짓고 교도소에 갔어도 면회 가지 않겠습니까? 면회 가서 수의를 입고 있는 수염이 더부룩한 자식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질 듯이 잘 살 때 못지않은 더 애절한 사랑이 여러분 속에서 솟아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로 그런 사랑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무리 멀리멀리 하나님을 떠나도 하나님은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나면 여러분은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삶을 살 때 결국 어떤 인생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림처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지막 연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여러분을 고통 가운데 있는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만 하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면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옛날보다도 더 뛰어난 사랑을 변함없이 하나님께 받으며 여러분의 인생을 명랑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이것이 호세아서가 여러분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8. 마음을 찢고 돌아오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욜 2:12-14)
녹취자 : 조복령
I. 요엘서의 개요
요엘서는 성경에서 가장 짧은 예언서 가운데 하나입니다마는 이 책의 중요성은 길이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세 장밖에 되지 않습니다. 선지서들은 앞부분에 대부분 왕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요엘서에는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말씀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저작연대
그래서 저작 연대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오래된 것으로 보는 사람은 주전 8세기 그리고 최근의 것으로 보는 사람은 주전 2세기까지 견해가 다양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책이 바벨론 포로시대 이후에 쓰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유다가 멸망한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언급이 없고 또 죄를 지적하는 내용은 있지만 그 죄가 어느 시대와 연관된 구체적인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지서에 나오는 우상숭배나 제사 그리고 정치에 있어서 구체적인 불의(不義) 등이 지적되지 않은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왕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예언서가 이 요엘서만은 아닙니다. 오바댜서에도 그리고 뒤에 나오는 요나서에도 왕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면 연대를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게 어렵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작 연대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에 의한 용서라는 선지서가 담고 있는 핵심적인 메시지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이 책의 구성
이 요엘서는 전체가 <여호와의 날>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짜임새 있게 쓰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과거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현재에 대해서는 성찰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전망을 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세 토막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토막은 메뚜기의 재앙을 다루고 있는 1장 1절부터 2장 1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12절부터 17절 사이에 회개의 촉구가 나오고 그다음에 2장 18절부터 3장 마지막 절까지 하나님 구원의 약속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메뚜기의 재앙입니다. 요엘서 1장에는 메뚜기의 재앙이 예고됩니다.
3. 메뚜기 재앙
그런데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메뚜기의 재앙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하는데, 그 시작이 심상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말하냐 하면 이런 일이 있을 텐데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욜 1:3) 이렇게 말합니다. 결국 무슨 의미냐 하면 메뚜기의 재앙이 일어날 텐데 이것은 그렇게 흔히 있는 재앙이 아닌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때 어느 정도로 온 땅이 황폐하게 될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욜 1:4) 메뚜기와 함께 등장하는 생소한 이름들 팥중이, 느치, 황충, 이런 것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히브리 성경을 읽어보아도 이 세 단어는 대부분 다 외래어에서 온 단어이기 때문에 성경 안에서 그 기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를 두고 세 가지 견해가 갈립니다. 첫째는 똑같은 메뚜기다. 그런데 그 메뚜기과에 여러 종류의 메뚜기가 있기 때문에 그거를 중복해서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두 번째는 그게 아니라 똑같은 메뚜기인데 메뚜기가 성장 과정에 따라서 아주 어린 메뚜기, 그다음에 어린이 메뚜기, 청년 메뚜기, 완전히 성충이 된 메뚜기에 따라서 각각 이름이 달리 부여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메뚜기에 대한 메뚜기의 성장 상태에 따라서 주어진 이름이다. 세 번째는 그게 아니라 이 네 가지 이름은 메뚜기에 대한 여러 지역의 방언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래서 어느 지방 사람이 있든지 간에 메뚜기가 자기 고장에서 쓰는 용어로 들리게 만들어서 심판에 대한 공포심을 극대화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저는 이 셋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선택할 필요도 없는 것이 세 견해 중 무엇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커다란 해석의 차이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어마어마한 메뚜기 떼의 습격이 이스라엘의 작물들을 초토화시키고 결국은 커다란 흉년이 깃들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메뚜기 그 귀여운 것들이 재앙을 일으키면 얼마나 재앙을 일으킬까?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풀섶에서 뛰어노는 메뚜기 그리고 어렸을 때 논에서 뛰어놀던 메뚜기를 생각하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에 메뚜기는 그런 메뚜기들과는 좀 다릅니다.
지금도 사막 메뚜기 떼들이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종종 큰 습격을 하는 사례가 발생됩니다. 최근에는 2020년 동아프리카인 케냐, 에티오피아, 우간다, 탄자니아 등을 습격했습니다. 그리고 케냐와 인도에서만 약 660만 헥타르의 농지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사람이 먹는 건 얼마쯤 되겠습니까? 한 70킬로쯤 된다고 하면 하루에 먹는 음식을 다 합하면 한 1킬로 쯤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많이 먹는 사람은 돼지고기 다섯 근 먹으면 3킬로니까, 두 끼만 그렇게 먹어도 6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쨌든 자기 체중의 아주 일부에 해당되는 무게만 먹습니다. 그런데 이 메뚜기는 자기 몸무게의 두 배를 하루에 먹어치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먹성을 가지고 몰려다니는데 약 1제곱킬로미터 정도 되는 넓이에 메뚜기 떼가 새카맣게 몰려다닐 때 대충 계산을 하면 그 수가 8천만 마리쯤 된다고 합니다. 1억이라는 숫자를 평생 못 세는 거 알고 계십니까? 그러니까 8천만 마리 정도 되는 메뚜기 떼가 하루에 먹어치우는 작물의 양이 사람 3만 5천 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갉아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2020년에 서울의 열배에 해당되는 면적을 갉아 먹고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마어마한 번식력을 가지고 있어서 3개월마다 그 숫자가 20배로 늘어난다고 합니다. 메뚜기 떼는 날아다니는 게 아니라 날개를 펴고 있으면 바람이 잘 불면 하루에 백오십 킬로미터를 이동한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하루에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범위한 지역을 초토화시키면서 지나갈 수 있는 그런 무서운 메뚜기 떼입니다. 2015년에는 러시아 남부 지역에 메뚜기가 습격을 했는데 그 메뚜기의 크기가 거의 참새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길이가 8cm, 날개를 펴면 12cm가 되었다고 하니, 그것들이 새카맣게 몰려올 때 사실은 벌레가 몰려온다는 느낌이 아니라 박쥐들이 날아온다는 느낌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예외인가? 아닙니다. 2014년 8월에 전남 해남에 수십억 마리의 풀무치가 습격해서 25헥타르의 농경지를 초토화시키고 지나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선지자가 경고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재앙의 예고입니다. 이 메뚜기 떼를 생각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하나님이 열개의 재앙을 애굽 사람들에게 내리시는데 그때 여덟 번째 재앙이 바로 애굽을 휩쓴 메뚜기 떼의 습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주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기억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주실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대신 우상을 섬기고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메뚜기 떼로 심판하시겠다는 경고까지 제시될 정도로 그 경고가 이스라엘에게 섬찟하게 다가올 정도로 그렇게 무서운 재앙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메뚜기는 신약의 계시록에도 등장합니다. 거기서 메뚜기는 무저갱에서 풀려나와 환란기에 들어간 사람들을 전갈처럼 찌르고 쏘아서 고통을 주는 영적인 존재로 묘사가 됩니다. 이렇게 커다란 메뚜기가 전체 국토를 휩쓸고 완전히 초토화시킵니다. 결국 모든 농작물이 다 사라지고, 포도 열매들이 모두 사라지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거워 취하던 포도주를 마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매일 드리던 전제도 소제도 드릴 수가 없게 됩니다. 그 제사는 성전에서 매일 두 번 양을 잡아서 바쳤는데, 그 번제와 함께 곡식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소제였고, 포도주 같은 것을 부어서 액체로 드리는 제사가 전제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가장 거룩한 제사에 바칠 물건마저 없어져 버린 황폐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때 또 하나의 재앙이 동반되는데 그것은 무시무시한 가뭄입니다. 온 땅이 황무지가 되어서 결국은 땅이 모두 말라비틀어져서 아무 작물도 얻을 수 없고, 사람들은 기아와 굶주림에 허덕거리는 그런 때가 올 것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저작 연대가 어느 시기든지 간에 어쨌든 너희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고 모세의 언약을 배반하여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는 심각한 경고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엘서 2장에서는 이 메뚜기의 재앙을 문학적으로 더욱 섬세하고 무섭게 그려서 듣는 이의 공포를 극대화합니다. 요엘 2장 3절에서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 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욜 2:3-6) 이것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1장에 있었던 메뚜기의 재앙을 클로즈업해서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주석가들은 1장에서 제시된 메뚜기 재앙의 그림을 가지고 2장에서는 그 메뚜기의 습격이 그렇게 무서웠던 것처럼 다른 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짓밟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결국 그렇게 수많은 군사들이 성을 공격하고, 성을 기어오르고, 사람들을 살육하고, 이스라엘을 초토화시키는 광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런 놀라운 재앙이 즉, 메뚜기의 재앙과 지독한 가뭄과 그리고 왜적의 침입 같은 것들이 결코 우연적인 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루어지는 사건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4. 여호와의 날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여호와의 날>이라는 개념입니다. 이 책은 메뚜기의 재앙으로 매우 유명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요나서는 물고기가 삼켰고 요엘서는 메뚜기가 먹어버렸다.> 그렇지만 요나서의 주제가 물고기가 아니듯이 요엘서 역시 메뚜기 이야기가 핵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주제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래서 요엘서 2장 31절과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욜 2:31-32) 이 책 전체가 석 장밖에 안 됩니다. 천천히 생각하며 읽어도 이십 분이면 다 읽을 수 있고, 좀 빨리 읽으면 사실은 십이 분이면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짧은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성경의 구속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한 고리가 됩니다. 그 이유가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누구도 예기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이 가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로 그걸 경험한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말씀은 당시 제자들에게조차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무도 그 말씀의 본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루살렘에 모여서 기도할 때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잠깐 왔다 가시는 성령님이 아니라 떠나지 않고 영원히 믿는 자들 안에 계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통치하실 성령의 임재였습니다. 그리고 그 임재는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번져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고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때 이 사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당시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베드로가 해설을 해줍니다. 그 해석할 때 인용되었던 구약성경이 바로 요엘서였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이렇게) 말함으로써 여호와의 이름을 주의 이름으로 연결시키면서 결국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고 이 성령을 받을 것이라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결국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한 고리가 해석이 됩니다. 요엘서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의 개념이 결국 당시뿐만 아니라 종말을 향해 연결될 뿐만 아니라 신약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인 축복을 예고한 말씀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날’, 히브리어로 ‘욤 야훼(יוֹם־יְהוָ֖ה)’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중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날’은 그야말로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이 직접 내려와 계신 것처럼 그런 효과를 가지고 세상의 질서를 정돈하시는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게 첫 번째로는 국지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느 한 시점에 당신의 충만한 임재를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시고, 또 당신의 위대한 선지자들을 통해 보여주심으로써 멀리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이 자기 가운데 내려오신 것 같은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지평입니다. 두 번째는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포함해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심판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그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지만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가 공존합니다. 그리고 전선은 매우 모호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도 그 첩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전선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몸은 교회에 나오는데 그 사람의 마음은 세상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질서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사람들은 때로는 기쁘지만 때로는 박해를 당합니다. 그런가 하면 몸으로는 교회에 나오지만 질서로는 세상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보자면 그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아니라 탈영병들입니다. 그리고 적군에 부역하는 사람들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선이 세상에서도 불명확하고 교회 안에서도 불명확합니다. 이런 질서들이 결국 두 개가 혼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 나라를 사랑하고 세상 나라를 따르는 백성들이 살아갑니다. 이 질서 속에서 서로 갈등하며 고통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마지막 날에 주님이 오셔서 이 질서를 정돈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거슬렀던 것들은 영원한 심판을 통해서 쓸어버리시고,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던 것들은 모든 죄악에서 해방이 되어서 결국 이루어지는 질서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이런 <여호와의 나라>의 양면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적인 생활을 시작하시기 직전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관해 소개하는 설교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 어떤 사람들은 성령과 불이 그냥 하나처럼 묶여서 불같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쉽게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뒤의 구절이 해석이 안 됩니다. “···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下)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해석은 하나의 세례 안에 성령과 불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은 하나님이 역사하실 축복이고, 불은 악을 태우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의 세례 안에 두 개를 함께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세례의 한 국면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그래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에는 축복과 심판의 양면성이 함께 있습니다. 즉,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과 함께 성령을 받을 것이지만, 예수가 오셨는데도 끝까지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그 말씀을 전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세례 요한이 먼저 등장하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십니다. 두 분이 서로 의논하지는 않았을 텐데 첫 번째 설교가 똑같습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당시 처음 이 선포를 듣던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설교였습니다. 그것도 사실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했던 이유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왜 이해할 수 없었냐 하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네 나라가 천국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믿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론가부터 오고 있다는 것은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유대인들에게는 이해가 안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들이 더 황당했던 이유는 천국이 온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고 행복한 일일 텐데 왜 회개하라고 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텐데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천국이 아주 위험한 어떤 브레이크 풀린 커다란 자동차처럼 트럭처럼 언덕에서 굴러 내려오고 빨리 피하지 않으면 그 트럭에 치여서 죽을 것 같은 아주 다급한 경고를 바라고 있는 그러한 뉘앙스로 회개하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답변될 수 있습니다.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줄 모양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모세의 언약을 어김으로 하나님 나라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는 일에 있어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신약시대에 도래하고 종말에 완성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에게는 분명히 역사의 이스라엘은 이미 끝났고 이제 핏줄과 영토에 메이는 나라가 아니라 영적인 나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아브라함 언약의 초청에 응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온다. 그 나라가 오는데, 그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너희가 그날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있다면 그날은 너희들에게 축복의 날이 될 것이며, 원통함을 풀어주는 날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 그리고 심지어 이 세상의 축복까지 쏟아 부어지는 날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너희들이 끝까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지 않고 있다면 그날은 끔찍한 복수의 날이오. 심판의 날이요 재앙의 날이 될 것이라고 종말론적인 선언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요엘서는 메뚜기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우주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의 회복에 관한 전망을 가지고 있는 아주 웅장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서신입니다. 이 설명을 들으니까 막 집에 빨리 가서 요엘서를 읽고 싶지 않습니까? 읽고 싶으십니까? 아멘. 호세아서도 (집에 가서) 읽지 않았습니까? 요엘서는 더 쉽습니다. 호세아서는 14장이나 되는데, 이거는 호세아 한 번 읽을 때 네 번 읽을 수 있습니다. 네 번 반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주 쉽습니다. 집에 가서 가만히 앉아서 삭삭 넘기면서 읽으면 12분 정도, 성격 급해서 이어폰 끼고 2.5배속으로 해놓으면 10분이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명을 다 들은 다음에 요엘서를 한 번에 한 숨에 확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아주 웅장한 그림이 들어올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결국 이렇게 종말에 이루어질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며 살도록 구원받은 존재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죄를 짓고 세상에는 고통과 기근 그리고 끊임없는 재앙들이 이어지지만 그러나 바로 그런 날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구나 하는 확신이 생길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이 우리의 신앙에 미치는 바가 참 클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자, 이 같은 설명이 요엘서 전체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이 들어있는 이 두 번째 토막이 바로 12절부터 17절까지입니다. 불과 여섯 절밖에 안 되는 이 짧은 구절이 1, 2부 사이에 끼어서 2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2부에 넣어버리기에는 너무나 독특한 하나의 메시지가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 재앙이 그냥 재앙으로 그칠 것이냐? 이 재앙을 피하고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이냐? 이것을 좌우하는 중요한 조건이 바로 그 사이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게 바로 회개를 촉구하는 이 여섯 절의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의 핵심은 결국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올바르게 하라. 그러면 너희는 결코 이 세 가지 재앙, 무시무시한 메뚜기의 재앙과 가뭄의 재앙 그리고 외적의 침입이라는 무시무시한 재앙으로부터 너희를 피하게 해주시고 오히려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 때에 너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되게 해주마 하는 메시지를 이 가운데 토막이 담고 있는 것입니다.
II. 마음을 찢고 돌아오라
그것을 요약을 하면 “마음을 찢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하는 바였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욜 2:12-13)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A. 마음을 찢으라
제일 먼저 마음을 찢으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옷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계시록에 보면 성도들이 마지막 날에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 하얀 세마포 옷을 입고 있는데 이 세마포는 곧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성도의 올바른 행실이 그 성도를 주님 앞에 예복을 입고 서게 해준다. 이런 뜻입니다. 옷은 그래서 소극적으로는 수치를 가립니다. 만약에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때릴 뿐만 아니라 옷을 확 찢어서 벗겨버린다면 이거는 그 사람을 육체적으로 폭력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유린하는 것입니다.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옷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소극적으로 이 옷은 우리의 수치를 가려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 옷이 다 벗겨진 채 그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혹시 그런 꿈 꿔보지 않았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멀쩡하게 다 정장을 입고 지나가는데 자기만 벌거벗고 어쩔 줄 모르는 그런 꿈 꿔보지 않았습니까? 그런 데서 느끼는 수치감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의복이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지만, 적극적으로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무 옷이나 입는 시대가 된 것은 얼마 안 됩니다. 이 당시에는 어땠겠습니까? 왕은 왕이 입는 옷이 있습니다. 그거는 누구도 다른 사람이 똑같이 만들어서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왕가에 입는 옷이 있고, 귀족들이 입는 옷이 있고, 상민들이 입는 옷이 있고, 노예가 입는 옷이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이야 그냥 시장에서 가서 사면되고 맞추면 되지만, 그 당시에 옷이 그렇게 사람의 등급을 구별하는 중요한 표였다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소극적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려주고 적극적으로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주는 것이 옷인데, 이 옷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찢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남이 찢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찢는 것입니다. 어떤 때냐 하면 자기 자신의 존재가 매우 매우 수치스럽고 부끄러울 때, 그때 면목이 없어서 옷을 찢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이 큰 위기에 직면했는데 그 앞에 이스라엘이 큰 낭패를 만나게 되었을 경우에 ‘내가 살아서 이 조국의 멸망을 보는구나.’ 라고 할 때 비분강개(悲憤慷慨)하고 비참한 느낌이 들 것 아닙니까? 그런 표현입니다. 또 온 백성들이 죄를 지었고, 그 죄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게 되었다는 절망감 속에서 개인적인 죄 혹은 공동체의 죄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수치스럽고 죄송한 것입니다. 그때 옷을 찢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의 표현이냐 하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너무 비참한 존재라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옷을 찢는 것입니다.
그 위에 재를 무릅쓰기도 하는데, 이 재는 티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티끌은 존재하는 것들 중 가장 값어치가 없는 것입니다. 재를 무릅쓰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가 티끌만큼도 값어치가 없다는 것을 외적으로 고백하는 심리적인 말하자면 표현 방식입니다. 그렇게 표현을 하는데 이건 모두 마음에서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 앞에 그런 마음이기 때문에 옷을 찢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마음이 찢어진다는 경험을 해본 적 있습니까?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진짜 너무 좋아하는데 일방적으로 이별 통지를 받았습니다. 결국은 세월이 지나면 잊히겠지만 당장은 마음이 막 찢어지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거 말고 이런 예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여러분과 관계를 갖고 있는 어떤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될 수도 있고 애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가 급히 왔습니다. ‘나 지금 다쳤어.’ 그래서 미친 듯이 정신 못 차리고 달려갔는데 보니까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뼈가 부러져서 바깥으로 튀어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냥 피 범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의식도 이미 잃었습니다. 죽을지 살지도 모릅니다. 그때 마음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 찢어지는 마음의 깊이만큼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날 저녁 구경거리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찢어질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차라리 저 사람이 무사하고 내가 저렇게 다쳐서 쓰러져 있더라면 오히려 그게 덜 아프겠다.’ 할 정도까지 마음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마음을 마음이 찢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사랑의 깊이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다쳤을 때 마음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항상 그런 마음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를 향해 찢어지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면 하나님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을 이심전심으로 내가 깨달으면서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저렇게 찢어지도록 만든 자신이 찢어 죽이고 싶도록 미운 것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찢는다는 것입니다. 찢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찢는다는 것은 정상적으로 뭉쳐있는 어떤 조직된 물건이나 유기물을 생명의 원리에 위반해서 강제로 떼어내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뜯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가 나서 날카로운 것에 살이 콱 찍혔습니다. 그래서 생선회 떠놓은 것처럼 한 조각이 너덜너덜하게 살에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못된 사람이 와서 그 살을 찢고 확 뜯어버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근육이 딸려 와서 종아리 딴지부터 시작해서 허벅지까지 살이 한꺼번에 찢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찢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 표현이 얼마나 강력한 표현인지 생각해보라 이것입니다.
결국 이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지 않고는 너희들이 결코 재앙을 피할 수가 없다. 메뚜기의 재앙도 피할 수 없고, 무시무시한 불타는 것 같은 가뭄도 피할 수가 없고, 외국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너희들을 짓밟아버리는 그 재앙도 너희들이 피할 수가 없다. 그런데 피할 수 있는 길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살충제를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물통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창칼을 만드는 일도 아니다. 그럼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너희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마음을 찢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에덴동산처럼 만들어 놓으신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황무지로 변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일까 생각할 때, 그때 결국 너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그런 재앙을 불러올 악을 행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결국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마음이 그린 삶의 궤적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30cm도 안 되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서 마음을 살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과거 살아온 삶이 어땠는지를 보면 현재 그가 누구인지를 대충 정확하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어떤 삶을 이 사람이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은 지금 내 눈앞에 현존하고 있는 그의 인격을 통해서 미래가 예측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모르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입니다. 아주 쉬운 것입니다.
그러면 그거를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거를 성찰해보면 볼 수 없는 여러분의 마음이 보이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 위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뵈옵기 위해서는 모든 만물을 초월해서 들어가야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그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을 초월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정신세계 속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 속으로 들어가고, 들어가서 그다음에 모든 만물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상승하여 뵈옵고, 뵈온 그 후에는 다시 평안하게 내려오면서 만물의 모든 질서를 헤아리면서 비로소 내가 어떤 질서를 따라 살아가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특히 마음에 대해서 공부하려는 관심사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곤충처럼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고 그냥 감각만 있고 육체가 있는 중간에 정신 작용이 없는 존재처럼 살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설교를 아무리 많이 해도 많은 사람들에겐 호소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을 꺼내서 들춰서 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공부 같은 걸 하기가 싫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마음이 자기 자신을 꾸짖으니까 굳이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들춰내서 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하냐? 안 행복합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이런 단어를 몇 번 썼는지, 사용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환희, 감격, 감동, 희열, 유열, 기쁨, 가슴 벅참...’ 이런 것들입니다.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의 삶은 여러분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이러한 삶이 계속될 것이다. 정말 그런 삶을 선택하고 싶은 사람 마음속으로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그런 삶을 살 바에 죽어버리겠다. 그럴 용기도 없습니다. 아예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럼 기쁨이 있느냐?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잘못 믿는 사람보다는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의 주관적인 행복이 더 큽니다. 선악? 상관없습니다. 양심적으로 사는 것도 머리 좋은 사람만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머리 나쁜 사람은 그렇게 못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양심이 무엇입니까? 아주 자명하게 우리 자신을 판단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합니다. 남의 집에 가서 꽃을 훔쳐옵니다. 길거리에 화분을 쫙 놔뒀는데, 써 놓았습니다. ‘꽃을 캐 가지 마시오.' 캐가는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다. 화분 째 들고 가지 마시오. 들고 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남의 집에 가서 (꽃을) 캐가지고 온다고 할 때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내가 캐가지고 온다.' ‘참 좋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그러면 다른 사람이 네 집에 와서 네 집 앞에 있는 꽃을 이렇게 캐가도 괜찮은 거야?' 그거를 생각할 머리가 있어야지 양심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볼 정도의 정신력을 가져야만 양심적으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가 아주 비양심적인 사회입니다. 양심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런 사회가 된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들이 생각을 잘 안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양심적이 되는 것도 상당한 사색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모든 사람이 나처럼 행동하면 세상이 얼마나 개판이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내가 꽃을 캐 가고 싶어도 그냥 거기에 놔두고 보는 것, 이게 결국 양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까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 아무 생각이 없이 그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유체이탈입니다.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렇게 함부로 쓰는 것은 진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생각이 없는 삶을 선택하도록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 뭐냐면 결국 자기 자신을 성찰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없으십니까? 없으십니까? 없으십니까? 그러면 그럴 것입니다. 먹고 싶은 음식도 없고, 보고 싶은 사람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습니다. 우울증입니다. 그거는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것입니다. 흔히 있는 정상적인 사람의 마음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자체가 끊임없이 부글거리는 감정과 욕망의 충동을 원동력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살아 있으면, 여기서 건강하다는 것을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게 아니라, 그냥 인간이 정상적으로 살아 있으면 당연히 먹고 싶은 것도 있어야 하고, 보고 싶은 사람도 있어야 하고, 가고 싶은 곳도 있어야 하고, 하고 싶은 일도 있어야 하고, 갖고 싶은 것도 있어야 됩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게 없다면 감정적으로 불구가 되어 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만약에 아무것도 하기 싫다면 정신과부터 가보십시오. 그래서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그 정도로 욕망이 없으면 그것은 욕망만 없는 게 아니라 삶의 의욕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놔두면 우울증 같은 걸로 가는 것입니다. 진짜입니다.
그래서 내가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이 무엇입니까? 그걸 한번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없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가? 참으로 되고 싶은 내가 있는데, 그 나는 지금 나와는 다른 나여야만 소망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된 것에 충분히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자뻑주의자입니다. 스스로 자기한테 뻑간 사람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훌륭한 사람들일수록 자기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현실에 만족을 안 합니다. 현실에 만족을 안 한다는 것은 불만 덩어리가 된다는 게 아니라 보다 나은 날을 꿈꾸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해 보면 벽에 대고 설교하는 것 같습니다. 넷플릭스 영화는 10편, 12편을 연달아 보는 열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설교는 60분을 못 듣습니다. 성경은 다섯 장을 못 읽습니다. 경건서적은 20페이지를 못 읽습니다. 그래서 성경 중 제일 많이 읽은 책이 창세기와 마태복음입니다. 연초에 거기서부터 시작했다가 결국은 출애굽기까진 어떻게 갔는데 레위기 가다가 흐지부지 끝납니다. 그다음 마태복음에서 시작을 했는데 요한복음까지 어떻게 가다가 그 다음 사도행전까지 어떻게 간신히 갔는데 로마서 가서 흐지부지 되는 것입니다. 제일 많이 읽은 책이 신구약의 첫 번째 책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결국 집중을 못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여러 번 드리지 마십시오. 한번을 드려도 마음을 바쳐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맑은 정신으로 (드리십시오.) 성경도 많이 읽으려고 애쓰지 말고 하루에 한 장을 읽어도 좋습니다. 아니 관두고 하루에 한 문단을 읽어도 좋으니까 마음으로 무릎을 딱 꿇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하나하나 읽으면서 이것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지 생각하면서 읽어야 됩니다. 기도도 많이 할 생각하지 말고 깊이 할 생각을 하십시오. 이말 저말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 한없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마십시오. 마음 진심에서 자기의 언어를, 속에서 자기의 진액을 묻히고 피를 묻혀서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말로 토해 놓으라는 것입니다. 한 문장이라도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생각 없이 통성기도 10분 20분 따라 하는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변화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심을 담아야 합니다.
결국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진실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살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만약에 그 진실이 없다면 능력도 사랑도 권세도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전부 헛것입니다. 진실이 토대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랑, 하나님을 떠난 성공, 하나님을 떠난 감정의 충동, 하나님을 떠난 영광과 권세,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고, 매일 매일 하루가 밝으면 예쁜 리본으로 아주 멋있게 포장된 선물을 받아서 그걸 풀어내는 마음처럼 하루를 시작해야 되는데, 그냥 젖은 짚단을 불에 태우는 것처럼 아주 고통스럽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감사한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도 답답하고 무료한 생활에 위로가 되는 것은 그저 핸드폰 손에 놓고 이리저리 넘기면서 한번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텔레비전 찾아보면서, 먹방 보면서, 후루룩거리는 ASMR 소리를 들으면서 대리만족이나 느끼고 침이나 다시고, 그렇게 하면서 그냥 우리의 소중한 인생의 시간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마지막에 죽은 다음에 우리 묘지 위에 놓일 우리의 묘비가 무엇입니까? ‘김아무 아무개는 태어났다가 있다가 그냥 죽었다.'
결국 인생의 길이는, 인간 육신의 생명의 길이는 의미의 길이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주체성도 마음으로 찾는 것이고, 자유도 마음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음을 온 마음과 정신으로 느끼면서 오늘 하루를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어제 죽은 사람 앞에서는 나 혼자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 하루하루의 삶을 진심으로 살아가려고 애를 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살아야 할 삶인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좋아한다고 말을 하면서 편지를 보냈는데, 온갖 유치한 농담과 거짓말이 가득 차 있다면 받자마자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주어진 편지지입니다. 거기를 진심으로 매일 매일을 쓰도록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거기를 가득 메울 사연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메우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매일 매일의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자유롭게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없는 기쁨과 명랑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삶,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라는 공장에서 찍어낸 상품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바깥에서 확 흩어져서 예배가 끝나고 나면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팔고 있는 복음이라는 물건을 살지 말지 교회에 와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복음의 소비자인 여러분의 얼굴을 보면서 결정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이 기쁨이 하나도 없습니다. 매가리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또 불끈불끈 욕심은 솟습니다. 그리고 온갖 못된 일들은 또 불끈불끈 솟아서 합니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삶의 의욕이 없는 것 같은데, 또 어떻게 보면 절대로 세상에서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장도 안하고 꾸미지도 않고 수녀처럼 살아가는데, 신앙은 더럽게 없습니다. 그리고 욕심도 없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살아가는데, 수도사처럼 살아가는데, 생각은 너무 세상적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결국 사람들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아! 교회라는 곳은 어떤 곳인지 내가 가본 적이 없고, 그 교회에 계신다는 하나님은 만나본 적이 없지만 거기서 생산된 물건을 사용한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그닥 그 물건을 추천하고 싶은 아이템이 아닌 것이 분명하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니까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중요한 사명이 뭐냐 하면 사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교회의 복음을 사용해 보니까 내가 이렇게 행복하더라, 이렇게 기쁘더라, 인생에 대한 관점이 이렇게 바뀌더라. 저렇게 시련 속에서, 허무한 이 세상 속에서 의미를 찾고 가치를 찾아서 어린아이처럼 행복하게 사는 사람의 삶의 비결이 무엇인가 봤더니 그게 결국은 복음이더라. (이런) 결론을 내릴 때 자기의 마음도 뭔가 변해서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질 것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셔서 여러분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내가 진짜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가? 진짜 되고 싶은 나는 누구인가? 한번 여러분 자신에게 되물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비유를 하자면 난 이 이야기를 내 심장을 믹서에 갈아서 빨간 잉크로 만들어서 여러분 마음의 벽에 쓰고 싶습니다.
도대체 왜 사십니까?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삶이 계속 됩니다. 그리고 자기도 재미없는 인생을 누가 강요한 것처럼 계속 삽니다. 그런데 그 고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서 끊어야 될지를 모릅니다.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마음의 병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기의 책 속에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내 마음이 내 손더러 들어라 명령하면 들고, 내리라 하면 내립니다." “그리고 내 발더러 가라 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춥니다." “그런데 왜 내 마음이 내 마음에게 명령하면 내 마음은 내 마음의 말을 안 듣는 것입니까?" 그러고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대답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질병이옵나이다." 마음이 불구가 되고 병들었기 때문에 마음이 마음의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속에서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 이걸 주관하는 두 신이 있어서 자기 안에서 쌈질을 하기 때문에 자기도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라 결국 마음이 불구가 되어서 병들었기 때문에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할 때 마음이 건강했더라면 즉시 옳은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말을 들었을 텐데 마음이 옳은 이야기를 해도 불구가 된 마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상 현상 때문에 올바른 말을 마음으로부터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악순환이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병들어서 마음이 고쳐지지 않으니 삶이 바뀔 리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계속 되풀이됩니다. 삶은 결국 마음의 무게를 더하고, 그 무게에 짓눌린 마음은 더 망가져서 도저히 다른 삶을 꿈꿀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결국은 노예의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아주 1센티도 자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게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덩어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고착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짜증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말씀을 펴도 칭찬받을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이 말씀은 찌릅니다. “너 그 따위 마음으로 안 된다." “너 그런 삶으로는 안 된다." “메뚜기의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마음이 병들었다." “너는 불구가 됐다." “넌 그렇게 계속 살면 결국 너의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받게 된다." 이런 이야기밖에 성경 속에서 안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자기를 칭찬하고 격려할 때는 기분이 좋지만, 진리가 자기를 꾸짖을 때는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표독스럽게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 대적하는 현상이 심리적으로 나타나서 그게 결국 기도하기 싫고, 말씀 보기 싫고, 그다음에 심지어 경건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멀리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죄 많이 짓는 사람하고 가까이 지내고 그 사람한테 피해를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매일 매일의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꽃다운 10대가 지나고 20대는 저물어갑니다. 아름답던 20대가 끝나고, 30대가 끝나고, 40대가 옵니다. 기력 있던 40대가 지나가고, 50대가 오고, 60대가 오는 것은 아주 잠깐 사이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소중한 인생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인생이 짧은 것이 아니라 의미를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우리 마음의 병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믿을 겁니까? 안 믿을 겁니까? 안 믿어야 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하면 과감하게 기독교 신앙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오히려 나중에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으려 하고, 마음은 내버려 둔 채로 몸만 교회에 나오면서 ‘나는 제법 잘 살고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 이 선지자의 무시무시한 예언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행한 처지와 같다는 얘기입니다. 한번 난 호소하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뭐냐 하면 기독교인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솔직히 돌아가서 인생에 대해서 내가 왜 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살아야 한다면 그 이유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유만 있으면 안 되고 그 이유를 따라서 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지식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한번 그것을 정직하게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뭔가 인생과 신앙에 대해서 질문하면 돌아오는 답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잘 모르겠어요.' 내가 묻고 싶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것입니까?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아야 될 텐데, 모릅니다. 어렸을 때는 엄마한테 아빠한테 그냥 ‘나 몰라' 하면 엄마 아빠가 대신 살아 주지만 여러분은 성인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이 살아가야 됩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는 것입니다. 흉내 내지 말고 진심을 드려서 하십시오. 열 번 드릴 예배 한 번을 드리고, 열 장 읽을 성경 한 장을 읽고, 열 시간 할 기도 십 분을 하더라도 진심으로 하십시오. 더 이상은 내 진심을 길어낼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승부를 해봐야지만 거기에서 결국 자신의 마음의 병이 보이고 자신의 마음을 찢을 마음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우리 인생의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합니다. 마지막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집요하게 의사를 붙든 손을 놓지 않고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다가 결국은 마지막에 유언도 못 남기고 미끄러지듯이 사라집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은 선물입니다. 어제 죽은 사람들한테 미안하지 않습니까? 활기 있게, 생기 있게,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신 목적을 따라서 살아야 됩니다. 그 비결이 마음을 찢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본래의 마음을 찢으라는 것입니다. 이게 에스겔서에서는 문학적으로 할례를 받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납니다. 난지 8일 밖에 안 되는 아이 고추의 머리 부분을 칼로 도려냅니다. 왜냐하면 그 껍질이 덮여 있음으로써 온갖 더러운 세균이 깃들고 불결한 것들이 깃들면서 미래에 자신의 배우자의 몸까지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려내어 깨끗한 마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찢으라는 이야기와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는 말이 똑같은 것입니다. 더럽고 불결한 것을 갈라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애통하게 여기고, 마음 중심으로부터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는 삶을 살아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B.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모든 사람에게 계시된 이름이 아닙니다. 이것은 언약 백성들에게 계시된 은총의 하나님의 본명입니다. 결국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를 때 이것은 하나님과의 장구한 언약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못하고 죄를 짓고 불순종해도 결국은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게 마음입니다. 난 여러분에게 정말 안타깝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에게 일주일에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주일날 예배를 드릴 때 여러분은 앉아서 설교를 듣고 나는 서서 설교하는 예배가 되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그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여기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분을 높이 드셔서, 아주 높이 하늘 높이 드셔서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떨어질 수도 있구나 하는 걸 깨닫는 것입니다. (정신 차리라고) 그리고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 그리고 어느 쪽으로 가든지 내가 결단하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이 기도제목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은 결국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돌이키고 하나님을 등졌기 때문에 결국 이 사람들이 이런 끔찍한 불행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고는 과거에 흘러가 버린 일화가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등지고 살아서 행복합니까? 주님을 멀리 떠나서 세상에서 그렇게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합니까? 결국은 세상에 가서 쾌락을 즐기자니 신앙이 발목을 붙들고, 신앙의 행복을 누리자니 세상 사랑이 발목을 붙들어서 양쪽에서 서로 잡아당겨서 몸뚱이가 찢어질 지경에 이르게 됐는데 뭐가 행복하겠습니까? 어느 한쪽에 팔뚝을 끊어야 됩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이런 자유를 주십니다. 이게 바로 선지자가 안타깝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울부짖으면서 피어린 예언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며 뜻을 돌이키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고 벼랑 끝에 가 있을 지라도 주님이 여러분을 건지시면 여러분은 건져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울하고 비관적이고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삶, 잠시 즐거워도 마약을 복용한 것처럼 그때만 통증을 잊어버리고 깨고 나면 더 큰 허무감과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이런 식의 삶은 우리의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속하고 여호와께 사랑을 받으며 살기 위해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진지해지십시오. 그리고 깊이 숙고하십시오.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살고 있든지 간에 책임져야 될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감각적인 것들을 조금만 떼어 놓으십시오. 그리고 책을 읽는 시간을 많이 가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담아 기도하십시오. 애써서라도 희망을 가져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이제껏까지 붙들어 주셨고 앞으로도 내가 주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 살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삶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소중한 삶이 여러분을 기다릴 것입니다.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 내 영혼의 신음소리를 들을 때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녹취자 : 조복령
I. 시편의 개요
흔히 사람들은 성경 공부하기 가장 어려운 책이 시편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성경은 대부분 스토리를 가지고 있거나 내용이 일관성이 있어서 서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책 전체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 시편은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시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어느 책보다도 기독교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이 이 시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심령이 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일평생 시인들처럼 기도하기를 원했습니다. 특히 다윗을 자신의 경건의 전범으로 삼은 것도 바로 이 시편을 통해서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시편을 강의하다가 복음의 빛을 보게 되었고 종교개혁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파리에 있을 때 공부하면서 시편을 읽다가 영혼에 큰 변화를 받았고 그가 복음을 위해 눈을 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역사상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고 시편이 그들에게 고난과 역경에서 이기며 살 수 있는 큰 힘을 주었기 때문에 신약에서도 이 시편이 자주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1. 시편의 저자
이 시편은 주전 15세기경 모세 시대로부터 바벨론 포로 이후인 주전 4세기까지 무려 천 년에 걸쳐서 기록이 된 책입니다.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저작 기간에 걸쳐서 기록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우리들이 알 수 없지만 바벨론 포로기 훨씬 이후에 150개로 따로 있던 시들을 모아서 이렇게 시편의 형태를 갖추게 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시편은 다윗이 거의 절반가량을 썼습니다. 그 이외에도 모세, 솔로몬, 고라의 자손, 아삽, 헤만, 에단 등 저자의 이름이 나와 있는 시들도 꽤 있지만 대부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여러 저자에 의해서 기록이 되었습니다.
2. 시편의 독특성
이 시편은 성경의 모든 책 중에서 아주 독특합니다. 율법서는 인류의 기원과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구약에 첫 번째 다섯 권의 책은 핵심이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이어서 이어지는 역사서는 이스라엘의 왕궁과 나라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다루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예언서는 이스라엘과 열방의 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모세 오경의 표준을 따라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어 하나님께 돌아올 길을 제시합니다. 이 모든 율법서, 역사서, 예언서의 공통점은 관점 자체가 사람 바깥에 있다는 것입니다. 종종 사람 안에서 관점을 가지고 쓰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 바깥에서 역사를 보고, 또 하나님을 보고, 이스라엘을 보고, 사람들을 보면서 쓰인 책입니다.
이에 비해서 시편은 사람 속에서 밖으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 보고, 역사에 대해 보고, 사람들에 대해서 보고, 자연 만물에 대해서 살피면서 시편이 기록됩니다. 그런 관점의 독특성 때문에 시편은 여러 가지 삶의 상황 속에서 신자 내면세계의 경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성경에서 유래를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책입니다. 창조와 타락, 구속과 완성에 걸친 모든 일들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시인들이 어떻게 신앙적으로 반응을 했는지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희로애락을 아우르는 아주 뚜렷한 주관적인 정서들이 시편 전체에 녹아 있기 때문에 사실 어떤 성경책보다도 읽을 때 공감이 잘 되는 책이 시편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연조가 깊어질수록 시편을 읽으면 공감되는 부분이 너무 많고 외로운 마음이 덜해집니다. 왜냐하면 나만 이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 시인들도 겪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공감적인 독서를 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시편입니다.
3. 시편의 구성
이 시편은 책 전체가 150개의 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긴 것부터 아주 짧은 것까지 여러 종류의 시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표제는 히브리어 성경에 ‘테힐림(תְהִילִים)’이라고 나오는데, 이거는 그냥 ‘찬송들’, ‘노래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시편 150개가 다 각기 다른 때에 기록이 되어서 따로따로 있던 것들이 이렇게 하나의 책으로 묶일 때 이것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구성을 해서 오늘날의 형태를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150개의 시들을 놓고 맨 첫 번째 머리 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굉장히 중요한 관심사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맨 마지막에 어떤 시를 끝에 두어서 이 책을 마무리할 것인가? 굉장히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 끝에 시편 1편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되는 시가 자리를 잡게 되고, 150편에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내용의 시로 마무리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놀랍게 두 번째 시편도 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앉혀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메시아의 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편 제2편은 구원사적인 의도로 배치되었는데, 그게 바로 <메시아에 대한 시>입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 짧게는 이스라엘의 왕이고 멀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 기름 부은 메시아에게 대항하는 자가 악인이오, 그에게 순종하는 자가 의인으로 구별이 됩니다. 그리고 그 책들이 함께 묶여져서 다섯 권으로 나눠지는 가운데 오늘날 시편의 형태를 갖게 됩니다.
시편의 구성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이야기들을 여러 가지로 하는데, 제가 가르쳐드리는 내용이 가장 머릿속에 잘 들어오실 것입니다. 시편은 모두 다섯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1권, 2권, 3권, 4권, 5권, 이것이 구약성경의 첫 번째 다섯 권의 책인 모세오경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시편을 읽으시면 됩니다. 1권은 1편부터 41편인데, 창세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일신 하나님과 창조의 영광을 노래하는 시들이 대부분 1편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2권은 42편부터 72편인데, 출애굽기와 관련된 노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시들이 제2권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3권은 75편부터 89편까지인데, 레위기와 관련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성전에 관한 노래들이 3권에 모두 모여 있습니다. 제4권은 90편부터 106편까지인데, 민수기와 관련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방황에 대한 노래들이 4권에 모여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5권은 107편부터 150편까지인데, 신명기와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 말씀의 영광을 찬송하는 노래들이 150편에 모두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 아는 하나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고 불리는 시편 119편이 바로 5권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산만하던 시편이 한눈에 싹 들어옵니다. 그래서 1권은 창세기, 2권은 출애굽기, 3권은 레위기, 4권은 민수기, 5권은 신명기와 관련된다고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모세오경에 대한 복습도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 하면 이제 시편을 읽고 싶은 마음이 확 일어날 것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지난 주 요엘서는 달랑 세 장이었는데, 이것은 150편입니다. 큰일 날 것 없습니다. 오늘부터 가셔서 하루에 스물두 편씩 읽으시면 일주일이면 다 뗄 수 있습니다. 스물두 편이 엄청나게 많은 양이겠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117편처럼 몇 줄 안 되는 시도 섞여 있기 때문에 다른 성경에 비해서 장수가 빨리 나가는 책이 시편입니다. 그런데 시편도 우리가 대게 1편부터 5편까지는 많이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시작할 때 시편 1편부터 하루에 몇 장 읽어야지 하는데, 1월 달에 흐지부지 되니까 시편을 다 읽지 않은 것입니다. 하루에 다섯 장씩 읽으면 한 달에 한 번씩 시편을 완독할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것은 시편을 소리 내어서 읽는 것입니다. 천천히, 음악 틀어놓고 천천히 소리 내어서 읽거나 혹은 성경 읽기를 틀어놓고 성경을 들으면서 시편을 읽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놓고 보면 시편이 이제 한눈에 싹 들어오게 됩니다. 아! 시편 전체가 결국은 창세기서부터 신명기까지 관련이 있는 거구나! 그리고 시편을 하나씩 하나씩 읽으면서 창세기를 연상하면서 1권을 읽고, 출애굽기를 연상하면서 2권을 읽으면, 읽었던 구약의 창세기, 출애굽기가 새롭게 가슴에 와 닿게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 와 닿느냐 하면 창세기, 출애굽기에서는 인간이 어떤 사건들을 경험하는데 그 사건들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가지고 그 사건을 해석했을까 하는 것이 시편을 읽으면서 감이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오경 전체가 껍질이라면 사실 시편은 모세오경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껍질이라면 시편 제1권이 그 내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채워 넣는 마음으로 이 시편을 한 권씩 한 권씩 읽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4. 시편의 인간관
시편은 여러 가지 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중요한 주제가 바로 인간에 대한 것입니다. 시편은 다른 어떤 성경 못지않게 악인과 의인에 대한 날카로운 대조를 특징으로 합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을 또렷하게 구별하고 그 두 사람을 악인과 의인으로 구별하는 기준은 율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가장 좁게 보면 십계명을 얘기하는 거고, 좀 넓게 보면 모세오경 다섯 권의 책을 모두 말하는 것이고, 더 넓게 보면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가장 넓은 의미로 보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흠 없는 계시 전체를 율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율법을 기준으로 악인과 의인은 구별이 됩니다.
성경의 많은 책들이 관점 자체가 사람 바깥에서 보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가고,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관점을 우선적으로 보여준다면, 이 시편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마음은 어떨까 하면서 내면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시편의 특징입니다. 즉, 의인과 악인을 겉으로 보이는 행위에 의해서 구별하는 것보다는 그 악인과 의인의 마음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시편을 통해 보여줍니다. 곧 그들의 내적인 감정과 경험이 악인과 의인이 어떻게 서로 다른지를 보여주는 책이 시편입니다. 시편에 따르면 악인은 나쁜 짓 하는 사람이고, 의인은 옳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의인이라는 식으로 악인과 의인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시편도 악인은 나쁜 사람이고, 의인은 올바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편의 관심사는 그들의 행동보다도 악인과 의인의 마음이 어떻게 그 속에서부터 서로 다른지, 그래서 결국은 속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고, 그들의 삶과 행동이라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따르면 악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고, 의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시편이 볼 때 의인은 단지 율법을 외적으로 준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이 의인으로 분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심하게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시편이 볼 때는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행하면서 하나님을 마음으로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악인으로 분류가 되고, 죄를 지었어도 용서를 빌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의인으로 분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격을 다른 성경이 안 보여준다는 게 아니라 이 시편이 아예 처음부터 그런 각도에서 의인과 악인의 내면세계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이 위로가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율법만 보면 '아! 내가 이러이러한 잘못을 했구나!'라고 생각하며 정죄의식을 느끼며 '나는 죄인이다.' 이렇게 딱 분류가 되고, '너는 하나님 앞에 매달릴 자격이 없다.' 이렇게 분류가 됩니다. (그런데) 시편을 읽으면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하나님께 매달렸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분류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자 하는 열망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북돋아 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편이 아주 커다란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제가 회심하고 몇 년 지났을 때 아주 신앙이 뜨거웠을 젊은 시절인데 결혼하기 전이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했는데 진짜 좀 잘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일주일 동안 기도원에서 출퇴근을 했습니다. 직장은 명동에 있었는데 기도원은 동두천에 있었습니다. 퇴근하고 가면 거기 도착하면 거의 9시가 되었습니다. 두꺼운 코트 하나 들고 예배당에 올라가서 밤새도록 기도하고 잠깐 쭈그리고 쪽잠을 자고는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퇴근하면 다시 또 기도원에 올라가는 생활을 일주일 동안 했습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드리고 직장으로 내려오려고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새벽기도를 새벽 다섯 시 정도면 했으니까, 어마어마하게 추운 기억밖에 없습니다. 엄청나게 추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연세 드신 목사님이 올라가셔서 설교를 하시게 됐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기 전에 성경 본문을 읽는데 시편이었습니다. 시편을 읽는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시편을 읽으시는 것입니다. 그때 어린 마음에 처음으로 ‘내가 신앙이 별로 없구나!’라는 걸 느꼈습니다. ‘저 목사님 마음속에는 나와는 다른 무슨 경험의 세계가 있구나!’라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으면서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성경을 낭독하면서 눈물 흘리시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시편이 가지고 있는 그런 감화력의 결정적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면 우리와 공감해주는 힘이 이 시편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이 막 읽고 싶어지십니까! 큰일 났습니다. 150편이니 어떡하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오늘서부터 가셔서 성경 계속 읽고 싶으신 분들은 다섯 장씩 읽기로 다짐을 하고, 다른 데 쉬고 그냥 바로 여기로 들어가고 싶으신 분들은 하루에 스물두 장씩 읽으시면 다음 주에 올 때 시편을 모두 읽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편을 읽어가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정리를 하면 의인은 단지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선을 행하고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는 사람이지만, 악인은 죄를 짓고도 고개를 뻣뻣이 들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이 악인으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기도를 하게 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마음이 됩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기도를 안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기 싫어집니다. 그리고 기도도 안 하게 됩니다. 말씀도 안 보게 되고 한마디로 경건생활을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늘 성경을 보고, 은혜를 받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 모든 심리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절대의존의 심리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내가 의지할 곳이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찬송을 불러도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해도 영혼 깊은 곳에서 기도가 솟아오르고, 예배를 드려도 정말 하나님께 진심으로 영광 돌리고 싶은 마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보다 더 하나님 보시기에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일생 사는 동안 마음을 지키며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가장 예쁘게 보시는 때가 두 번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죄를 깨닫고 마음이 깨어져서 눈물 흘릴 때, 하나님밖에 사랑하는 것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그때가 가장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의 이런 인간관을 우리 마음에 간직한 채 시편을 읽으면 내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 나의 올바른 행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려는 나에게 그렇게 전심으로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을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내 마음이 회개하려고 애쓰지만 내 마음을 깨뜨려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눈물로 기도할 수 있게끔 내 마음을 감동시키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난 후 기도가 끝나고 돌아갈 때의 그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아! 시원하다.’ 이런 마음도 물론 들지만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살아야 되겠다.’라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만들어주는 힘이 이 시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딱딱해지고 설교도 눈에 안 들어오고, 성경도 눈에 안 들어올 때 레위기나 이사야서 같은 거를 읽는 것도 좋겠지만, 시편을 읽으면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워지면서 다른 성경의 말씀도 빨아들일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이 시편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시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인간관 때문에 그렇게 우리에게 강한 호소력을 갖는 것입니다.
5. 시편의 저주
이 시편에서 읽는 사람을 당혹하게 하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시편에 나오는 저주입니다. 시편에 보면 아주 끔찍한 저주를 합니다. ‘저희의 머리를 부수소서’ ‘저희를 깨뜨리소서’ ‘창으로 꿰뚫으리다’ 이렇게 살벌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나옵니다. 이런 시편에 나오는 저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란거리입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대게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신약과 구약에 윤리의 차별성을 이야기하는 이론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구약의 윤리는 신약의 윤리에 비해 열등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는 그런 끔찍한 표현들이 나오는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시인들이 아직 복음을 몰라서 영적으로 미성숙했기 때문에 이런 복수와 끔찍한 저주를 간구하는 기도가 나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두 번째로는 종말론적인 적용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시편의 기록자들은 종종 자기가 당하는 어떤 일 때문에 원수를 원망하고 저주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시편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교회의 원수인 사탄에 대한 것이지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 두 견해 모두 시편 저주에 대한 충분한 해석이 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저자들은 자기들이 구약의 윤리를 계승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저자들 속에서 구약이 그렇게 많이 인용되는 것이고, 모세오경부터 선지자의 글, 또 시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인용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당신 자신이 구약을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고 하시면서 신약에서 당신이 가르쳐주시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윤리가 구약 윤리의 완성이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더욱이 신약성경에도 저주가 나타나기 때문에 이 이론은 모두 맞는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 시편에 나온 저주를 해석해야 될 것인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까지는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를 못해도 다음 세 가지만 염두에 두면서 시편의 저주를 해석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첫째는 이 시인들의 저주는 사적인 감정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원수에 대해서 저주를 퍼붓는 시편을 읽으면서 시어머니를 생각한다든지, 돈 떼어먹은 친구를 생각한다든지, 직장에서 까다롭게 구는 상사를 생각한다든지, 정권을 생각한다든지, 정치인을 생각한다든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북한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다든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시인들의 이 저주는 어떤 인간에 대한 사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하기 때문에 실추되는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래서 가끔 등장하는 시적인 표현들에 과장이 있다고 이해를 하면서 문학적인 기법으로 이걸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말합니다. ‘너 잘 들어.' ‘너 오늘 학교 끝나면 바로 와야 돼.' ‘너 PC방 들렀다가는 너 죽어.' 그 얘기는 엄마가 진짜 칼을 들고 아이를 죽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거는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네가 학교 끝나고 중간에 새서 PC방에 가는 것이 나는 너무 싫으니 내 마음을 네가 이해하고 바로 집으로 오라는 뜻입니다. 이 시편도 그런 끔찍한 저주들 속에는 시적인 과장들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진심을 전하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그들이 그런 말을 토할 수밖에 없었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우리들이 흔히 살아갈 때 그런 화법을 많이 씁니다. ‘나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죽는 줄 알긴 뭘 죽는 줄 압니까? 그냥 좀 어려운 일이 있었다는 뜻을 그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시편이 바로 그런 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특히 저주에 대해서는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개인의 복수심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악인들이 번영하고 의인들이 부당하게 박해받는 상황에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참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회에도 좋고 저런 사회에도 좋고, 저런 나쁜 놈들이 판치고 다녀도 괜찮고, 이런 사기꾼들이 속여 먹어도 괜찮고, 이러면 그거는 너그럽고 인자한 것이 아니라 줏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망가지는 이 세상에 대한 원통함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정의의 감정이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잠시라도 악인이 번영하고 의인이 박해받는 상황이 됨으로써 사람들이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오히려 시인들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하나님의 의(義)를 얼마나 갈망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그 말씀처럼 이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저주의 시를 쏟아 놓은 것이지 개인이 복수하고 싶다는 어떤 적개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을 하면서 읽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그들은 하나님의 의(義)가 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저주의 시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사람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죄를 미워한 것이라고 해석을 하면서 시편을 읽는다면 얼마든지 우리도 이 저주의 시에 참여하면서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이해를 하시면 시편에 나오는 끔찍한 저주에 대한 궁금증을 푸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자, 드디어 이제 우리는 시편 두 번째 권을 열자마자 42편을 만나게 됩니다.
II. 내 영혼의 신음소리를 들을 때
이 42편에는 영혼의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이 시는 ‘고라 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시는 문체로 보나 모든 것으로 볼 때 다윗의 시인 것 같고, 다윗이 지은 시를 고라의 자손이 보관했던 것이 아니겠느냐고 보는 학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표제어를 굳이 의심할 필요가 없으며 고라의 자손이 쓴 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 보더라도 고라의 자손이 썼다고 하는 암시가 42편 속에 나오기 때문에 이 시는 고라의 자손 중 누구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그 후손들 중 한 사람이 쓴 시일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대개 후자를 따르게 되는데, 이 고라의 자손이 누구냐고 할 때 먼저 설명을 좀 드리자면 이런 것입니다. '고라'라는 사람의 이름은 민수기 16장에서 언급이 됩니다. 레위의 증손으로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이 고라가 몇 명의 우두머리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모세를 대적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반역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매우 괘씸하게 보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본보기를 보여주셔서 고라와 같이 모세를 대적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고라의 자손이 모여서 진을 치고 있던 그곳에, 그러니까 광야 시절 얘기입니다. 그곳에만 지진이 일어납니다. 땅이 확 갈라지고 고라의 자손들이 텐트 째 다 밑으로 들어가 버리고 땅이 입을 닫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들이 250명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지도자 모세를 대적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인가 하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어서 모세의 지도력을 세워주신 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 이후로 고라의 집안은 모세에게 반역했다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집안이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안고 이스라엘의 기록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다가 이 집안이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게 바로 다윗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던 때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을 두 번째 왕으로 삼으셨는데, 이때에 다윗은 거의 제2의 건국을 하는 것 같은 힘든 시기를 지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많은 양떼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여주셨습니다. 빚진 자, 억울한 자, 마음이 상한 자, 그리고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모여들었던 것처럼 다윗에게 모여들었습니다. 이때 고라의 자손도 다윗의 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다윗은 이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서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하나님의 성막을 수종드는 사람들로 세워줍니다.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성막시절입니다. 그렇게 해서 고라의 후손들은 성막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거들면서 졸지에 수치스러운 가문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가문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이것이 배경입니다.
시편 42편이 언제 쓰였느냐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많은데, 많은 학자들은 42편이 아마도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황망히 왕궁에서 도망을 쳐 요단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을 때, 그때 쓰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망명의 시기에 다윗 왕을 동행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왕을 모시면서 망명 기간 동안에 겪었던 고통스러운 자신의 심경을 이 시에 담아서 표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왕이 쫓겨나서 결국 남의 나라 땅에 망명을 왔으니까 너무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얼마나 분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는 쫓겨나고 그렇게 악을 행하고 부도덕하고 패륜 무도한 압살롬이 나라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 시인의 마음은 분통이 터졌을 것입니다. 당연히 ‘거짓된 악인들을 쫓아내시고 기름 부은 다윗 왕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소서'라고 탄원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그런 기도제목을 밀치고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심경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고백하는 것으로 시편 42편을 시작합니다.
A. 영혼의 신음소리
그런데 그 이야기가 영혼의 신음소리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갈급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헐떡거리다’라는 뜻입니다. 너무 목이 마르고 숨이 넘어갈 것 같아서 헐떡거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경이 있습니다. 가을철이 되면 사슴이 교미하는 철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이 바로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이때에 수사슴들이 모두 암컷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암컷을 놓고 수사슴들이 때로는 목숨을 건 결투를 벌입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사슴들은 바위에다가 자기 뿔을 문지르면서 뾰족하게 갑니다. 그걸로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해서 짝짓기를 하게 되는데 발정기가 되면 수사슴들이 암컷을 찾아서 대거 들판으로 나옵니다. 이때에 사슴의 신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말할 수 없이 목이 타는 것입니다. 목마름입니다.
세상에는 대치할 수 있는 욕망이 있고, 대치할 수 없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목마름은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떡이나 빵을 먹고 목마름을 잊어버리라고 말할 수 없고, 고기를 먹고 목마름을 가라앉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물입니다. 그 물을 마시면 목에 해갈을 할 수 있고, 물을 못 마시면 끊임없이 목말라서 헐떡거리는 상태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팔레스타인의 들판에서 가을의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목이 말라서 눈을 부릅뜨고 죽어간 사슴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사슴들이 너무 목이 마르면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는데, 신기루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가면 없고, 가면은 없습니다. 마지막에 기력이 진하여 죽을 때에는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 시체들을 수없이 본 이 시인은 그것보다도 목마름을 가장 실감나게 묘사할 수 있는 표현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내가 주님을 만나기를 너무 목말라하는데 ‘시냇물을 찾다가 결국 물을 못 찾아서 땅을 파고 죽던 사슴과 같이 그런 심정으로 내가 주님을 찾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영혼의 신음 소리를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눈을 뜨면 아침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미친 듯이 바쁘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일이 많아서 바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바쁘게 살지 않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바쁘게 사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혼자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성경 달랑 하나 들려주고 넓은 방에 한 사람을 조용히 두면 그는 점점 방이 좁게 느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실 세계에 직면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현실 세계에 직면하는 것이 너무 무섭기 때문에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중까지 정신을 분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인터넷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게임과 미디어에 미친 듯이 몰두해서 시력이 망가질 때까지 몰두하는 이유가 결국은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 너무 두렵기 때문에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묵상의 시간, 명상의 시간이라는 게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은 고도의 정신의 휴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먹고, 입고, 살고, 즐기고 놀고 하는 것들로 생각이 꽉 차 있습니다. 심지어는 있지도 않은 가상 세계를 느끼는 그 즐거움 때문에 현실 세계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정신을 딴 데로 팔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성경을 안 읽고, 점점 더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는커녕 혼자 조용히 자신을 생각하는 시간조차도 없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이 점점 신앙의 깊이가 낮아지는 이유고, 경건의 능력이 사라지는 이유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경건생활을 하기 위해선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혼자 조용히 있어야만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고, 혼자 조용히 성경을 읽어야지만 성경의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을 우리의 귀에 들리도록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에 당신의 손을 건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현대인의 생활이 결국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들고, 그런 속에서 영혼은 아주 깊이 깊이 고함을 치면서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리지 않습니다. 마치 영혼의 신음 소리를 듣지 않기로 결심한 것처럼 음악을 크게 틀어놓듯이 세상사에 번잡한 마음으로 살아가서 영혼의 신음소리를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에 가끔 위기가 찾아옵니다. 미친 듯이 사업에 목숨을 걸던 사람에게 사업의 위기가 오고, 젊음을 마음껏 즐기기 위해서 미쳐 날뛰던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립니다. 그런가 하면 남편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아내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남편과 아내가 자기를 실망시키거나 배신하는 사건을 겪거나 혹은 자녀들을 우상처럼 생각했는데 자식들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고통스러운 순간이 옵니다. 이때 비로소 자기가 몰두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영원한 것과 잠시 있는 것 사이에 구분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종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라고 우리의 마음에 뺨따귀를 때리시는 것입니다. ‘짝"하고 때리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이고 무엇이 영원한 것이며, 하나님께 속한 것이 무엇이고 나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하는 구분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혼란스럽던 정신들이 질서를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혼의 신음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기도 안 합니까? 기도 안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흐느끼고 있는지 그 소리를 못 듣기 때문에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불쌍한 영혼입니다.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지 않고도 넉넉히 살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배고프고 굶주렸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병이 깊어지면 배고픔도 못 느끼고, 고통도 못 느끼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짜 위험한 상태입니다. 인간이 건강하면 차고, 덥고, 아프고, 춥고,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아주 또렷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목마를 때 물을 먹고, 배고플 때 음식을 먹고, 추우면 덥고, 더우면 벗고, 이렇게 해서 자기의 신체를 보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자기가 배고픈지 목마른지를 못 느낄 정도로 그렇게 감각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용히 귀를 기울여서 영혼의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기도하지 않는 여러분의 영혼이 울부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주지 않는 여러분의 영혼이 ‘내가 양식이 없어 주려 죽는구나'라고 탕자가 타국의 땅에서 한탄하며 울부짖었던 그 울부짖음이 여러분의 영혼 속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입니다. 그거를 못 들으니까 기도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게 들리지 않으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를 아무렇게나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지 않고는 오늘 하루 무슨 힘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렇게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사랑을 구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바로 그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마음입니다. 이 시인은 지금 다윗 왕이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의로운지 나쁜 사람인지, 그런 거에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나는 전심으로 당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 뜻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 주시옵소서." “불쌍한 고아처럼 당신의 도우시는 손길을 바라보아야 하는 미천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런 마음이 여기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편에서 인간을 바라볼 때 죄를 많이 지었어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 사람들은 그를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았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는 것을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 분명하게 심어주십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용기를 얻으면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 시편이 그리고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뭘 위해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조용히 자신의 영혼의 신음 소리를 들어야 됩니다. 말씀에 밥 한 숟갈 떠먹여 주지 않아서 완전히 피골이 상접하게 된 영혼의 헐떡거리는 소리, 목이 마른대도 물 한 모금 주지 않았기 때문에 목을 붙들고 눈을 부릅뜨며 죽어가는 영혼의 비참한 상태에서 들려오는 그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이 예배가 하나님 만나는 예배가 되게 해달라고 주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3-4) 예수님이 팔복에서 제일 언급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너무너무 부러운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깨뜨려지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그가 울 때에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그가 하나님 앞에 통곡할 때 그는 사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통 때문에 울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그 고통과 함께 마음속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의 비밀입니다. 영혼의 신음 소리를 듣고 하나님 은혜를 사모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살아계신 하나님
마지막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이 시인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헐떡였던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찾기에 헐떡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나고 싶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겠습니까? 시인이 말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2) 제 책을 읽고 은혜를 많이 받은 후에 교회를 찾아와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가 너무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는데, 하나님이 딴 거는 다 주셔도 얼굴은 안 보여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면 기도는 들어주시는데 하나님이 얼굴은 안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문학적인 표현이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달라는 것은 주시지만, 자신의 영혼은 주린 것입니다. 시편에 시인도 그런 고백을 합니다.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시 105:15) 그래서 어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추라기를 달라고 울부짖으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실컷 먹어라 하고 주셨습니다. 그런데 영혼은 그 불순종의 사건으로 아주 파리해지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게 얼마나 비참합니까? 하나님 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받는다면 우리는 고아요, 거지입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녀들과 친교를 나누면서 섬길 때 그게 진정으로 자녀들의 마음에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주는 감화가 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아무런 사랑이 없이 그냥 의무감 속에서 자녀들에게 그렇게 해주는 것은 쉽게 얘기하면 고아원에 도와주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라고 한 것은 결국 뭘 뜻하느냐면 하나님의 생생한 능력을 직접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도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어지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영혼의 진정한 만족이 충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진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은혜를 정말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소원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위한 소원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때문에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더욱더 깊은 주님과의 사귐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모든 이웃들이 나같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것이 관심사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라고 하십시오. 쓸데없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죽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살아계신 것을 뜻하기 때문에 ‘살아계신’이라고 붙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 생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혼자 읽으시기 위해서 쓴 책이 아니라 지력(智力)이 떨어지는 우리에게 당신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쓴 책입니다. 그러니까 눈높이처럼, 우리 눈높이로 낮아지셔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신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사람 편에서 받는 하나님에 대한 감동이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그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인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는 여기서도 추방되어 남의 나라 땅에 왔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진짜 제사 속에서 찾아와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죄인을 회개시키고, 용서해 주시고, 다시 교제해 주시는, 당신의 임재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살아계신’이라는 수식어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이념 속에 갇혀 있고, 교리 속에 갇혀 있고, 높은 하늘에 계실 뿐 여러분의 마음에는 오시지 않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뒤에서 호박씨 까는 일을 하면서 모순된 신앙생활을 해나갈 것입니다. 앞에서는 이런 얼굴로, 뒤에서는 저런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표리부동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골방에서도 느끼고, 벌판에서도 느끼고, 복잡한 지하철역 속에서도 느끼고, 일을 하면서도 느끼고, 심지어 자리에 누워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불을 덮고 있든지 이불을 제치고 있든지, 그리고 내가 멀리 있든지 가까이 있든지 바다에 있든지, 그리고 하늘에 있든지 어디서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 생활을 이 시인은 이렇게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열망하기를 그렇게 사슴이 시냇물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갈급했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니 더욱 눈물이 났습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 42:4)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너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며?' ‘그런데 하나님이 왜 너희를 예루살렘에서 쫓아내셨냐?' ‘너는 하나님이 있다면서 왜 우리 땅에 와서 나그네처럼 신세를 지며 사냐?' ’너희 나라는 어디 있느냐?' ‘널 지키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있느냐?' 사람들이 조롱할 때 그들과 변론할 수 없었습니다.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으니, 그는 곡기를 끊으면서 눈물만 흘리기를 여러 날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못 만나고 있는 성도들의 영혼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문을 여는 것은 요란 법석한 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진실한 마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고 그분의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마음, 내가 비록 잘못했어도 멀리 멀리 하나님을 떠났어도 혹은 죄를 지었어도 지금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 마음속에 찾아오셔서 당신의 나라를 한 번에 누리도록 통째로 주시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기도의 문을 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이런 목마름을 가지고 주님을 찾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 일을 위해 영혼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영혼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제발 이 어둠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내가 빛이신 주님을 뵙게 해다오." “제발 내 영혼에 쓸모없는 것들을 넣어주지 말고 배부르게 할 말씀의 양식을 나에게 넣어다오." “내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하니 제발 우리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나를 도와다오." 이런 영혼의 울부짖음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여러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주님 앞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 그대의 마음이 문제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7-8)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시편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는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하나님입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분의 뜻대로 운행될 것이고,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증거로 넘쳐나게 쓰신 책이 성경입니다. 시편을 읽을 때 성경의 어느 책보다도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주제를 일방적으로 선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 땅과 하늘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노래합니다마는 시인들의 반응은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그 통치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기뻐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회의하며 방황합니다. 그런 두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기 때문에 어떤 시를 읽어도 공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를 통해서는 믿음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며 회개하게 되고, 저 시를 보면서는 시인과 함께 믿음을 가져 용기가 솟아오르게 됩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이 시가 공감해줘서 격려를 받고 자신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저 시의 교훈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시편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돌립시다.
여러 달 전에 저는 제가 죽으면 뼛가루를 묻을 자리를 어느 기독교 묘원에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시편을 새겨 넣었습니다. 시편은 정말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읽은 성경책 중에 가장 눈물이 많이 묻은 책이 시편일 것입니다. 시편은 우리를 높은 곳에서 훈계하지도 않고, 우리 옆에서 우리와 더불어 울며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며, 어깨동무를 하며, 시편은 우리와 함께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추운 겨울날에 덮는 이불이요, 시원한 여름철에 부쳐주는 부채처럼 우리의 삶에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시편을 읽으며 겸손을 배우고, 낙심한 자는 시편을 읽으며 불끈 솟아나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광야에서 도망자 신세로 살던 시절에 지은 시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풀었고, 다윗은 이유도 없이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시는 아둘람 굴이나 혹은 엔게디 굴에 있을 때에 일어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가 사무엘상 22장과 24장에 등장합니다. 만약에 이 시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엔게디 굴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으나 그를 살려줌으로 신앙의 승리를 거두었을 때 감격에 벅차서 이 시를 노래했을 것입니다.
이 시에는 낯선 두 개의 표제가 등장합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고 나옵니다. ‘믹담(miktam)’이라는 생소한 이 말은 시편의 형식 중 한 종류인데, ‘부드럽게 중얼거리듯이 이 시를 부르는 노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믹담(miktam)’이라는 말은 전혀 소리를 내지 말거나 혹은 음율이 없이 단일한 곡조로 거친 소리로 낭송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음율이 있지만 나대지 말고 부드럽게, 그리고 잔잔히 낭송하라는 지시어입니다. 이에 비해서 ‘알다스헷(el-tashchet)’이라고 되어 있는 히브리어는 직역을 하면 “멸망시키지 마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9장 26절에서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모세가 용서를 빌던 간구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알다스헷’이라는 것도 하나의 형식이 되어서 어떤 시의 작법이나 연주에 관한 지시였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히브리 사람들도 잘 모른다고 합니다. 전통이 끊어진 것입니다.
비록 정확한 낭송 법을 알 수는 없게 되었지만, 이 시의 전반부는 탄식으로 시작을 해서 후반부는 찬양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희망의 시입니다. 시인은 우리처럼 연약하기도 하고 우리가 바라는 바처럼 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믿음의 수준과 상관없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고 연약할 때에는 우리와 똑같이 방황하던 시인들의 슬픈 노래를 들으며 ‘나 혼자만 그랬던 것이 아니야!' 하는 위로를 받게 되고, 마침내 그 방황에서 벗어나 주님을 굳게 붙들 때는 ‘나도 믿을 수 있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괴로운 날이나 슬픈 날이나 시편을 가까이 두십시오. 시편과 함께 울고, 시편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 때로는 사람 앞에 울고 사람 앞에 자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한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II. 그대의 마음이 문제다
오늘의 주제는 <그대의 마음이 문제다 >입니다. 다윗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울의 추적을 피해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고 미친 자 흉내까지 내어야 했습니다. 고난 속에서 부르짖고 두려워하는 시인의 모습은 매일매일 어려운 일들을 만나서 신음하고 괴로워하거나 때로는 교만하고 자랑하다가 주저앉아서 슬퍼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나 슬픈 탄원에서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가는 시인의 이 모습은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A. 마음을 확정함
첫째는 마음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라고 말합니다. 두 번이나 반복해서 “확정되었습니다.”, “확정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나쿤(nakun)이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이것은 ‘무엇은 무엇을 하도록 준비가 끝났다’, ‘무엇 무엇을 하도록 이미 갖추어져 있다.’ 이런 뜻입니다. 이 단어가 두 번 반복되는데, 이것은 단지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앞에 나오는 3절에서 시인은 이미 승리의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구원하실지라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시 57:3) 시인이 범죄했거나 낙심했을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두 개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와 인자였습니다. 진리는 시인의 어두운 마음을 깨우쳐 지혜를 주어 올바르게 분간을 하게 해주고, 인자는 그 진리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까지도 끌어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엄마 같은 사랑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이 진리와 인자를 간절히 구하며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을 반복함으로써 승리의 희망이 확신으로 바뀐 것을 보여줍니다. 내 마음이 확정됨으로 희망을 갖게 되었고, 다시 확정됨으로 그것은 확신으로 변화되었으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하는 노래였던 것입니다.
그는 도망자의 처지였으나 항상 가지고 다니던 물건이 있었습니다. 비파와 수금이었습니다. 항상 그의 곁에 두 악기가 있었습니다. 문헌을 찾아보니까 유대인의 탈무드에 ‘베라코트(Berakhot)'라는 편이 있는데 거기서 다윗의 이 구절에 관해서 아주 은혜로운 해석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너무 아름다워서 들려주려고 여기에 지금 가지고 왔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비파와 수금은 다윗의 침대 위에 걸려 있었다." “이른 새벽이 되면 새벽바람이 불어서 악기의 현의 소리를 냈고, 다윗은 그 소리에 맞춰 일어나 율법을 묵상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새벽빛이 기둥처럼 내려올 때까지." 아멘. 아,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안 아름답습니까?
상상을 해보십시오. 머리 위에 늘 하나님을 찬송하는 두 악기를 걸어놨는데, 들판이나 굴에서 지내니까 바람이 부는 것입니다. ‘휘이익' 그 비파와 수금을 건드리고 바람이 지나면서 ‘지리리링' 하는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다윗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기도를 하고 율법을 낭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은 다른 왕들을 깨웠지만 다윗은 그 새벽을 깨운 사람이었습니다. 새벽은 다윗의 찬양 소리를 들으며 깨어났고, 깨어난 후에 다른 임금들을 깨우기 시작했으니, 다윗이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으로 눈 뜨자마자 하나님을 생각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가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확정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평소에 경건의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세 종류가 있습니다. 살아갈 때 시간과 관련해서 시간을 딱 붙들고 내가 끌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제일 훌륭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급하다고 촐랑거리거나 빨리 해야 할 일에 굼뜨고 게으른 적이 없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뭐냐 하면 시간에 끌려다니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두 팔을 묶고 잡아당기면 하는 수 없이 흐느적거리며 포로 끌려가듯이 끌려가는 사람입니다. 최악의 사람이 세 번째 사람인데, 아예 시간이 잡아당기는 데로 걸어가지를 않습니다. 아예 누워버립니다. 그러면 묶인 그 줄에다가 또 다른 줄을 걸고 말에다 묶어서 시간이 달립니다. 그러면 땅바닥에 끌리면서 옷이 찢어지고, 살갖이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지면서 바닥 위를 끌려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처투성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바쁘십니까? 모든 사람이 바쁩니다. 그리고 나중에 조금만 더 지나면 바쁜 사람이 부러울 때가 옵니다. 아무도 안 불러줍니다. 가족들조차도 안 불러주는 때가 옵니다. 그리고 곰국만 잔뜩 먹어야 되는 때가 옵니다. 지금 바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어저께 부산 수영로교회에 가서 집회하고 11시 집에 와서, 어쨌든 2시에 잤습니다. 그래도 지금 생생합니다. 써주시는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많은 청년들이 회개하고, 주님 만나고, 또 오늘 성도들을 이렇게 만나고,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시간을 끌려 다니지 말고 ‘내 마음이다’ 하고 시간을 꽉 잡고 어디에 쓸 것인가 안 쓸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그 놈을 딱 붙들고 내 원하는 대로 끌고 다니면서 ‘시간, 너는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봉사해야 될 물건이다.’라고 생각하고 땅 아래 놓고 발로 밟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게 주체적인 삶입니다. 뭘 해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인생이 아니라 어차피 똑같은 월급 받는 종업원들이 손님 많이 오면 짜증내듯이 그렇게 인생을 살아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마음이 확정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멘. 째깍 째깍 째깍. 하루가 지나갑니다. 바이런은 그것을 관짝에다 못 박는 소리라고 시에서 노래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흘러갑니다. 이 짧은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서 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간을 못 쓰게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방황입니다. 마음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에 정착할 수가 없어서 이리저리 밀리면서 얼음판 위로 미끄러지듯이 그렇게 우리의 인생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 몇 번만 얼음판 위에 미끄러지고 나면 이삼십 년 흘러가는 건 일도 아닙니다. 그렇게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걸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피투성이가 되도록 끌려가고, 옷이 찢어지고, 살갗이 찢어지고, 뼈가 땅바닥에 갈리는데, 그걸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시련 속에서 확정된 마음이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야박하고 잔인한 시간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박해의 피바람이 불던 때에 그의 마음은 더욱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십여 년 전 어디서든지 부르기만 하면 온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던 복음성가가 있었습니다.
(찬양)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
아멘. 마음이 확정되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시인의 마음에 찾아왔습니다. 시인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풀어 추격하는 사울의 마음은 지옥이었고, 그들의 추격을 받으며 도망 다니는 다윗의 마음은 천국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위급한 때에 다윗의 생애에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위대한 시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아멘. 이 찬송을 부르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하늘 위에 주님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마음이 확정된 사람은 고난 속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B. 노래하고 찬송함
마지막 두 번째는 노래하고 찬송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환경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굴 밖에서는 여전히 사울이 보낸 자객들이 다윗을 찾아 헤매고 있었고, 눈에 띄기만 하면 다윗은 저항할 수 없이 죽임을 당할 신세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무기를 가졌고 시인을 잡기 위해서 짐승 잡을 때 쓰는 웅덩이를 파는가 하면 시인이 지나갈 만한 길에 그물을 쳤습니다. 어디에든지 위협이 도사리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시인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시인의 마음은 요동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보이는 상황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마음을 굳게 정했습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 여기서 “내 영광”이라는 말은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나의 영혼”입니다. 그렇게 바꿔서 읽으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원래 히브리어로 ‘카보드(kabod)’라는 ‘영광’은 ‘가장 중요한 것’, 그리고 ‘가장 값진 것’, 그리고 의미에 있어서 ‘가장 무거운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 존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무게가 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 무게라는 게 실제 무게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의미의 무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것이 영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을 ‘영광'이라고도 불렀는데, 성경에 여러 곳에서 증거가 나옵니다. 경건한 시인들은 자신의 영혼과 대화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42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시 42:5) 시험 속에서 마음까지 병들어가는 것은 영혼이 병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마음을 강하게 하십시오. 담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하십시오.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여러분을 위로할 때 서러움으로 스스로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오. ‘오직 나의 희망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사람이 나를 대하여 무엇을 행하랴.' 이런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들을 만나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사를 건 믿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 1:6) 인생을 살면 어떻게 기쁘고 좋은 일만 만나겠습니까?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만나고, 때로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한 번도 예상한 적이 없었는데 너무나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고, 때로는 죽음을 앞에 두어야 하는 때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가슴 아픈 때도 있는 것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나오고, 저자에는 항상 괄호를 치고 생몰(生歿) 연대가 나옵니다. ‘아무 아무개 1905년에 태어나서 몇 년에 죽다.' 그러고 나옵니다. 저는 그렇게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습관이 항상 나이를 계산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 몇 살에 죽었나?' '아, 무슨 얘기야?' ‘아니 왜 서른여덟에 죽어?' 내가 좋아하는 마리아 란자는 서른아홉에 죽었습니다. 테너 가수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어휴, 그래도 그 시절에 오래 살았네.' ‘어휴, 1900년대 초에 80세를 살았으니까 진짜 많이 살았네.' ‘이 사람은 서른두 살에 죽었네!' 그러면서 갑자기 그 사람들의 생애가 스윽 떠오릅니다. 한 사람은 그렇게 간단하게 죽은 생몰(生歿) 연대를 남겼지만, 그 사람의 죽음은 주위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겠습니까? 그를 미워하던 사람들은 죽는 것을 고소하게 생각했지만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죽는 자의 생명은 산 자의 죽음이 되어서 한지(韓紙)에 잉크가 번지듯이 슬픔의 푸른빛이 그들의 마음에 번져서 울고 웃고 가슴 아파하며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을 잊지 못하다가 그들도 또한 죽어서 누군가의 가슴에 슬픔을 안겨주지 않았겠습니까?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까?' 그거를 묻고 또 묻고 물어도 사실 이 세상에서 답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당신의 죄 때문에 받는 벌이든 혹은 더 큰 섭리 속에서 복을 주시려고 일어난 일이든 혹은 그 중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는 일이든지 간에 그런 식으로 묻지 마십시오. ‘Why me?'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러면 한편에서 이런 질문도 떠오르는 것입니다. ‘Why not you?' '왜 너는 아니냐?'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크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 앞에 그렇게 물으라는 게 아닙니다. ‘Why me?'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게 어려운 것만큼 불행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믿음의 분량이 거기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라도 관심사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 일을 위해 마음을 확정하고 또 확정하고 또 확정하는 것입니다.
20대에 아주 좋은 대학을 나오고 젊고 예쁘고 똑똑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그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너는 캐나다에 가서 선교사들의 자녀를 가르치고 불우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일로 나에게 영광을 돌려라." 가본 적도 없는 캐나다를 가라는 것도 그렇고 고심을 하는데 기도할수록 너무 소명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확실하게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내 인생을 받으소서." “제가 선교의 소명에 순종하겠습니다." 그리고 출국 절차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신체검사를 받는데 결핵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3기를 지나서 4기로 이미 진입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결핵은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여러분 몰라서 그렇지 지금도 결핵은 굉장히 무서운 병입니다. 사망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작은 결핵의 증세가 있어도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초기 단계부터 전문의의 도움을 받으면서 일관되게 치료를 받으셔야 됩니다. 그 당시에는 약도 없고 의료 기술도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결핵에 걸리면 그냥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는 너무나 믿음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냥 웃어 넘겼습니다. ‘하나님은 모순이 없으신 분이다.’ ‘내가 폐결핵에 걸려 죽을 처지라면 선교사로 부르셨을 리가 없다.’ ‘선교사로 부르셨으면 내가 피를 토하면서 선교를 하게끔 하시지는 않을 테니까 날 살려주실 것이다.’ ‘이건 분명히 나를 한 번 연단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일 거다.’ 그러고 굳센 믿음으로 찬송하며 선교 준비에 몰두했습니다. 그런데 몸은 점점 나빠져서 기동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결국은 요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는 깊어졌고 특히 새벽이면 각혈을 심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음식도 먹을 수 없고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문병을 와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해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굳건하던 자매의 믿음도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선하신가?’ ‘하나님이 나를 기억은 하시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나를 이렇게 하셨을까?’ 누군가 회개하라고 해서 죄를 생각해 봤는데 없지는 않은데 절절히 가슴을 찢는 회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병세는 깊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밤중이었습니다. 약간 열린 커튼 창문으로 푸른 달빛이 비치는 밤에 숨도 쉴 수 없어서 침대에 거의 붙어 있는 때에 한 줄기 생각의 빛이 번개처럼 이 자매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마른 몸으로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 무릎을 꿇고 전혀 다른 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제가 아는 한도 안에서는 하나님이 나에게 선교사의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핵에 걸렸어도 치료해 주셔서 선교지로 보내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나의 믿음의 수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저는 이제 아무 희망이 없고 죽음을 눈앞에 둔 처지가 되었다고 의사는 말합니다." “하나님 혹시 내 생각이 하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그래서 여기서 내가 알지 못하고 하나님만 알고 있는 더 큰 이유 때문에 이 요양원에서 쓸쓸히 죽어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당신이 정말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행하시옵소서." “내가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마음 안에서 뜨거운 불길이 솟아오르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 엎드려서 펑펑 울면서 실로 오래간만에 마음을 쏟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 하나님은 언제나 제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내 상식에 가두려고 했던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내 주여!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 기도를 간절히 드렸습니다. 이상한 일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말할 수 없는 찬란한 평강의 빛이 마음속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마음이 생사를 초월하는 마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명랑함을 되찾았습니다. 위문 오는 사람들을 오히려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할 여유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폐가 4분의 1도 안 남았는데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완치가 되어서 결국은 선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가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주권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제 폐를 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명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의 주권을 배웠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주 뜻대로 하소서
마음이 확정된 사람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 인생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줄을 믿기 때문에 겸손해집니다.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십시오. 한숨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두려움이 변하여 찬송이 될 것입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노래하고 찬송하리라’ 하고 말합니다. ‘아시라 와아잠메라 (אָ֝שִׁ֗ירָה וַאֲזַמֵּֽרָה׃)’ 이 구절은 원어적으로 이렇습니다. “내가 노래하고 또 음악을 만들 것이다" 여기서 음악을 만든다고 고백한 것은 두 가지 의미일 것입니다. 새 노래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시편에만 ‘새 노래’라는 표현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새 노래로 부르자 랄라라’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모두 하나님을 향해서 '새로 지은 찬송'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나면 감동이 밀려오는데 옛날에 나온 수천 곡의 노래로는 지금 내가 만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때 음악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악기도 탈 수 있었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만난 하나님이 너무 특별해." “이 새벽에 만난 하나님, 나에게 평강을 주시고 원수 앞에서도 두렵지 않게 해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샬롬의 경험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야." “이전에 내가 지은 어떤 노래로도 또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없으니 하나님 내가 새 노래를 주님께 바치리이다." 새로운 노래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이게 신자의 새로운 생명의 삶입니다. 그분의 성품에 대한 새로운 경험은 예전의 노래를 반복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은혜는 새로운 찬송을 요구하고 새로운 고백을 고백합니다. 다윗이 150편 중 73편이나 시를 지은 것도 그 새로운 경험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경험이 멈추었다면 한 가지만을 계속 불렀을 텐데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노래를, 새로운 체험은 새로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음악을 만들며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하나님을 기리고 찬송하며 자신의 회개를 노래 속에 담았던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앞에 나오는 ‘노래하고’는 목소리로 찬송하는 것을 뜻하고, 뒤에 나오는 ‘찬송하리라’는 대목은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어떻게 해석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속에서 흔들리던 시인의 마음이 확정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음이 확정되지 않으면 예배도 드릴 수 없습니다. 마음이 확정되지 않으면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음이 확정되지 않으면 성경에 장수는 넘길 수 있는데, 그 성경의 내용이 마음에 스며들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확정되지 않으면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는 감격하여 목소리로 노래하고 새로운 시를 지어 악기로 연주할 생각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고난 때문에 그런 일들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 아주 값비싼 악기가 있습니다. 바이올린입니다. 첼로입니다. 수십억짜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만히 세워져 있는 동안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활이 그 줄을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울림통에서 청아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주 명품 악기일수록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그 활이 고난의 활입니다. 때로는 그 활이 길게 현을 긁을 때 애절한 소리를 내며 긴 곡조를 연출합니다. 다급해서 짧게 짧게 끊어 칠 때 이 악기는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를 냅니다. 활이 춤추며 현 위를 넘나들 때 짧고 긴 곡조, 높고 낮은 성조는 함께 어우러져서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던 아름다운 가락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그 고난을 우리에게 노래로 바꾸시는 방법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겹칠 때가 하나님을 노래할 때이고 주님을 위해 음악을 만들 때였습니다. 새롭게 발견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속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길을 걷거나, 가시밭길을 걷거나, 인생의 벼랑 끝에 서거나, 깊은 웅덩이에서 울부짖을 때나, 원수의 그물에서 헤어나지 못해 몸부림 칠 때, 그때 예전에 불러본 적이 없는 노래가 우리의 영혼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하나님이 위기가 크면 클수록 당신의 더 큰 구원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자객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로 이 굴에서 저 굴로 도망을 다니며 비참한 처지가 되었어도 그의 영혼은 누구에게도 도망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노래했습니다. 고난의 활은 그의 마음의 현을 두드렸습니다. 다윗은 아팠지만, 활에 쓸릴수록 그의 마음은 쓰라렸지만, 그 쓰라림들은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곡조가 되어서 온 하늘과 궁창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높고 위대함과 신실함을 찬양했습니다. 삼천 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지금도 우리가 읽으며 그 속에서 다윗이 흘리던 눈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 한숨 소리에서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다윗의 위로를 받습니다. 가슴 벅차 부르는 그의 노랫소리에서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모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의 목자로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든지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온 세상을 주고도 살 수 없이 존엄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의 신음 소리는 그분의 마음에 비명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여러분의 찬송 소리는 그분의 마음에 천사들의 합창 소리보다 기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지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찬양)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의 마음 나의 모든 것 다 드리니 보내소서
어디로? 선교지? 아닙니다. 어디로? 아프리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 현실로 보내달라고 기도를 하십시오. 떠나 있었습니다. 내 현실인데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내 인생에 직면하고 있는 사태인데도 마치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외면하고 싶은 현실인 것처럼,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리고 남의 인생을 사는 것처럼, 그렇게 있었습니다. “날 보내소서." “내 삶의 자리에 나를 보내소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오." “내 마음은 이제 확정되고 확정되었습니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자꾸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시련이 변하여 감격이 되는 축복 받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 새 마음으로 세상을 볼 때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9-11)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바로 지지난주의 설교에 이어서 계속되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57:9)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 57:10)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인생에서 위기를 만납니다. 시인도 재앙의 날에 이 시를 썼습니다. 사람들의 비방이 사방에 가득한 때였습니다. 그의 영혼은 사나운 짐승들에게 에워싸였고 자신을 불사르려는 자들 중에 있던 때였습니다. 사울이 보낸 자객으로부터 칼에 찔려 죽고 창에 찔려 죽을 위험을 느끼던 때였습니다. 다윗을 미워하던 사람들에게 받는 비난은 칼날처럼 마음을 저미며 지나갔습니다. 그는 아무 데도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광야에 홀로 버려진 사람 같았습니다. 바로 슬프고 애잔한 때에 이 아름다운 시를 썼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생사 간에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이던 때에 바로 이 시를 썼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순결한 마음은 하나님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시인은 바로 그런 마음으로 인생의 고난의 때를 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처럼 똑같이 약하고 부족하고 때로는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 쓴 시 곳곳에서는 하나님을 때로는 원망하며 탄식하는 고백도 많이 나옵니다. 그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게 해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악한 사자들이 자기를 에워쌌고 자신은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새 마음이 생겼습니다. 새 마음이 생기자 새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II. 새 마음으로 세상을 볼 때
이리저리 휩쓸리던 마음이 확정되자 새로운 세계가 보였던 것입니다. "···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시 57:7) (이렇게) 주께 고백을 하자 사울이 아니라, 그가 보낸 자객이 아니라, 죽음의 위협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본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다윗은 새벽바람에 악기의 현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에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며 비파와 수금을 깨웠습니다. 다윗은 비파와 수금을 깨웠고, 수금은 새벽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새벽은 이 땅의 수많은 왕들을 깨웠습니다. 다윗은 이런 경건의 경험을 통해서 마음이 확정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요동하는 마음이 확정되었습니다.
아무리 큰 배라도 풍랑 이는 바다 위에서는 장사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요동치고 가랑잎처럼 흔들립니다. 그러나 닻을 내릴 때, 부두에 정박하여 단단히 밧줄로 묶였을 때, 배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자신의 마음의 닻을 하나님께 내렸습니다. 은혜의 포구에 자신을 묶었습니다. 정박했습니다. 그러자 요동치던 마음은 사라졌습니다. 분요(紛擾)하던 마음은 가라앉았습니다. 마음 깊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눈을 뜨고 본 세상은 다윗에게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창조의 권능과 은혜에 넘치는 세계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장 고난받던 때에 하나님께 두 가지를 드리게 됩니다.
A. 감사함
첫째는 감사함입니다.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57:9) 무슨 의미입니까?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합니다."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자기가 진정으로 누구를 경배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알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확정되고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감사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전히 시인은 광야를 도망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죄 없이 수배자가 되었고 의로운 자신은 악한 사울에 의해 목숨이 표적이 되어 자객들의 창과 칼을 피해 도망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뀐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시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합니다."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든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든지,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감사의 뜻이 무엇입니까?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넘칩니다.’ 이런 뜻입니다. 부족한 것이 정말 없었겠습니까? 많았습니다. 고난과 역경, 시련과 눈물, 원수들의 위협과 그리고 도전이 있었습니다. 살해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감사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생각과 사랑이 마음에 그것보다 더 넘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자신의 인생이 멈춰 있어도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만족하게 해드릴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은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욕망은 끝없는 구덩과 같고 무저갱과 같아서 수많은 것을 삼키고 삼켜도 결코 만족할 줄을 모르고 "다오. 다오. 다오"를 연발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욕망을 만족케 함으로써 행복해지려는 사람들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고 꼭두각시가 되어서 행복의 길을 찾는 것은 무더운 여름철에 뜨거운 행군의 길을 걷다가 시원한 설탕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잠시는 목을 축이는 시원함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당분은 자신의 몸속에서 더 많은 물을 필요로 하고 그는 더 큰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욕망을 따라 행복을 좇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시인은 갈대처럼 흔들리던 마음을 하나님께로 확정하자마자 그는 감사할 아무 조건이 없었지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감사가 무엇입니까? 만족입니다. 하나님, 충분합니다. 제게 안 주신 것은 생각나지 않고 주신 것이 생각이 납니다. 넘치도록 받았고 지금 나를 대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내게 감당할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이것이 감사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추한 욕망이 없습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욕에 대한 갈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만족이 있습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고단한 삶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합니까? 끊임없이 욕망에 휘둘리고, 욕망의 노예가 되고, 그것을 얻고 나서는 또 다른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끊임없이 우리의 인생길에 요동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마음이 확정된 자들에게 감사가 넘치게 하십니다.
여러분! 진정한 마음은 하나님께 바쳐질 때에 평화를 누립니다. 거기서 만족을 얻습니다. 거기서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됩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확정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 해 동안 지나온 일들 중에 안타까웠던 순간들이 있고 기뻤던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순간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서 우리에게 생겨났고 믿음이 있었더라면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는 기쁨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했다면 좋은 일 때문에 우리는 교만해져 하나님을 떠나고 나쁜 일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미끄러지지 않았겠습니까? 이제까지 비천한 가운데서도 우리를 기억해주시고 살려주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확정하십시오. 광야에 버려진 자와 같이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며 찬송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확정하고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감사와 기쁨의 시기로 바꾸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찬송함
마지막 두 번째 찬송함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57:9)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원수가 친 그물과 악인이 판 웅덩이 앞에 눌렸던 시인의 마음은 그 마음이 확정되자마자 가슴이 터질 듯이 울려 나오는 찬송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이 왕궁에 있는 위대한 왕인 것처럼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커서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영광은
온 세계에 충만하게 차고 넘치는 것을 시인은 경험했습니다. 세계가 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물결 위에 요동치던 것 같은 그의 마음이 영혼의 닻을 하나님께 내렸습니다. "나는 생사 간에 주님의 것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시는 주님 약속의 말씀에 믿음의 닻을 내렸습니다. 요동치던 인생의 배는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하나님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 지금 이 세계를 향해 하나님이 당신의 어떤 성품을 충만하게 보이시는지를 감격에 찬 목소리로 찬양합니다. 그것은 바로 두 가지였습니다.
‘주의 인자’와 ‘주의 진리’였습니다. 제일 먼저 그는 이 세계가 주의 인자로 가득 찼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 앞에 대듭니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내 인생이 이렇게밖에 안 되느냐고 사람들은 반문합니다. 때로는 표독스러운 말로 하나님께 대들듯이 모질게 하나님께 앙갚음하듯이 이 말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면 왜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야 하고 우리는 왜 제대로 된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없다면 어차피 무질서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이 없다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단정한 세상을 꿈꾸고 평안한 삶을 바랍니다. 그 자체가 유신론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고백입니다. 결국 우리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은 질서로운 세상 행복한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 질서와 행복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 없이 그런 질서와 행복을 꿈꿉니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큰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지나며 눈물을 자신의 음식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바로 그때 마음이 확정되자마자 그는 온 세계가 주님의 인자로 가득 차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히브리말로 ‘헤세드(חֶסֶד)’라는 단어는 아주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치 없는 인간과 세상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자비를 뜻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항상 하나님의 이 인자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처럼 슬퍼하기도 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이 인자하심을 확신하지 못할 때에는 마귀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장 고난으로 넘치는 이때에 시인의 마음은 믿음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어떠한 임재도 보이지 않는 고난으로 가득 찬 시기를 지나고 있었으며 원수들의 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이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인자는 자신에게만 넘친 것이 아니라, 온 세계가 주님의 인자를 힘입어 살고 있는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몰랐고 세상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온 세계는 하나님의 인자를 양식으로 삼으며 그의 사랑을 음료로 삼으며 그렇게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까지 악인들의 나쁜 행실로 뒤범벅되었던 무질서한 세상 속에 놀라운 하나님의 질서가 느껴졌습니다.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주의 인자는 지극히 커서 온 세상을 두루 감싸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날에 시인이 깨달은 바였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느끼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물질적인 것을 주시고 태평하게 하셨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보다는 오히려 시련과 고난으로 가득 찼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 더 많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치가 있습니다.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몸 건강이 살고 있는 것, 그리고 생명을 연장시켜주신 것, 그리고 가족이 있는 것, 나의 일자리가 있고, 내가 아직도 사회에 쓸모가 있는 사람인 것, 모든 것이 다 감사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그것들과 비교 안 되는 감사가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모두 용서를 통해서 절절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사랑의 사람은 죄의 사람이었는데, 죄의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용서의 사람이 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마음껏 느끼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곤고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 같은 때에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 나 같은 죄인을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만들어 줍니다. 죄에 대한 확신의 크기는 용서를 받기만 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크기로 바뀝니다. 이것이 믿음의 진리입니다. 시인은 가장 곤고한 날에 아마 자신의 죄를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옳다 인정함을 받으면서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격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만이 아니라, 온 세계에 가득한 하나님의 인자를 보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찬송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고난의 때에 이런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역경의 시절을 승리의 찬송을 부르는 때로 바꾸었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사랑하셨던 하나님이 오늘도 여러분을 통해 시편 151편을 받기를 원하시는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주의 진리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 57:10) 히브리 사람들에게 궁창은 파란 하늘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하늘은 헤븐(heaven)이고, 궁창은 스카이(sky)입니다. 새들이 날아다닌 파란 대기권의 하늘입니다. "···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 57:10 下) 그 당시 누가 궁창의 끝에까지 가보았겠습니까? 우리 중 아무도 그 궁창을 건너본 사람들이 없고, 비행기를 타도 그 궁창 아래로 다니고, 차를 타도 그 궁창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니 주의 진리가 궁창에 이른다는 뜻은 그냥 무한하다는 뜻의 다름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진리가 온 세상 위에 궁창에 이르기까지 가득 차서 온 세계가 진리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리, 히브리말로 ‘에메트(אמת)’라는 말은 종종 ‘신실함’이라고도 번역이 됩니다. 결국 두 가지는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따르는 사람의 신실함 혹은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믿음직한 성품, 그것이 바로 ‘에메트(אמת)’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가득 차 있습니다. 악한 자들은 모르고 욕망을 따라 날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가득 차 있기에 죄인은 어디서나 죄인이고,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서나 정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사실을 깨달으며 자기가 진리 편에 서 있는 것을 얼마나 감격하였겠습니까? 누구 때문에 진리의 편에 서게 되었겠습니까? 왜 악인의 편에 서지 않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진리의 편에 설 수 있었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시인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은 요동치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새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볼 때는 미움과 원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았을 때, 그 하나님께 마음을 확정하였을 때, 세계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주님의 진리가 가득 찬 세상이었습니다. 조화로운 하늘의 별과 태양이 뜨고 지는 것 그리고 물의 흐름과 대기의 변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시인의 마음은 잊었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사울 따위와 같은 것은 마음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그들이 죄를 짓고 자기의 목숨을 노리는 그따위의 행동은 자신의 마음을 파고들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사건을 통해 궁창 위에 가득 찬 하나님의 진리를 보았고, 하늘에까지 이르게 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경외와 신비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바로 그분의 손안에 있다는 것,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잊지 아니하시고 이 시인들처럼 당신의 품에 자기를 품고 계신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 시인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늘에까지 가득한 주님의 인자와 온 땅에 충만한 주님의 진리를 떠나서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주님의 것이고, 주님은 저의 것입니다. 아멘. 아멘. 찬송할 마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진리는 모든 세상과 사물을 주관하는 원리입니다. 그리고 악인이 악을 행할 때조차도 진리는 살아있어서 악인의 마음에는 두려움을 주고, 악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그 악에 대한 미움을 갖게 합니다. 그 자체가 진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진리를 따라서 살면 활짝 웃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를 거슬러 불의하게 살면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뿐이니 결국 그 분노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사랑의 분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진리를 알게 하신 우리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의 무질서함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그들의 자랑을 우리의 자랑으로 삼지 맙시다. 그들을 시기하지 맙시다. 오히려 진리와 함께 진리와 더불어 고난을 받는 것을 진리 없이 진리를 거슬러 이 땅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시인은 주의 진리가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보면서 한 가지 소원에 마음이 쏠렸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11)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데 어떻게 하나님이 하늘 위에 더 높이 들리시겠으며, 더 높은 데가 있고 그 아랫자리에 있다면 어찌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주의 영광이 원래 충만한데 어떻게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겠습니까? 이것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본체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 보여지지 않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입니다. 두 번째는 발산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장소를 택하셔서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사람들이 느끼게 해주시는 그런 영광입니다. 예를 들자면 모세가 타지 않는 불 가운데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주님을 뵈온 것, 그리고 광야를 지나던 성막 위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함께 있던 것,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 준공식을 드릴 때 박석에 깐 땅에 사람들이 엎드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찼던 것처럼 이런 것들이 발산적인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거기만 계시고 다른 곳에 없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간이 지각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그 장소에서 보여주시는 것을 발산적 영광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효과적 영광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함으로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 그것을 효과적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경우에 바로 이 세 번째 용례로 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내가 착한 일을 하면서 삶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나를 보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 믿어진다.' 이렇게 생각되게끔 만드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십시오. "···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 57:10)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머리로는 사울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성으로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 다윗은 이 진리를 온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시인은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는 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자신처럼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고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가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효과적인 영광이 온 땅에 가득 찰 때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높아지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주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신자의 일생은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고 남이 알지 못하는 인자를 보여주셨고 남이 보지 못한 진리를 보게 해주셨습니다. 원수로부터 받는 핍박과 환란이 가득한 그곳에서 고통보다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를 주셨고, 사랑을 주셨고, 그런 승리를 노래했던 시인들을 만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시련이 넘치는 때에도 주님의 인자하심 때문에 주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낙심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 거는 기대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실망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진정한 희망이 세상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을 확정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그리고 마음을 굳게 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이제 나는 다시 이전과 같이 흔들리고 파도치는 인생의 환경 속에서 요동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작심을 하십시오. 뜻을 세우십시오. 그리고 고난 중에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인자와 그리고 궁창에까지 미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그의 신실하심을 그의 진리를 찬송하십시오. 주님은 오늘도 이런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자의 일생은 마음을 지키는 생활입니다. '무릇 지킬 만한 그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의 마음을 확정합시다. 확정된 마음이 흔들리게 하지 맙시다. 그리고 오직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주의 영광을 위해 삽시다. 인생에는 늘 파도가 치고 풍랑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닻을 하나님께 내립시다. 그리스도의 포구에 우리의 배를 묶읍시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께 찬송합시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날에 가장 위대한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의 일평생 하나님의 그 인자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 신실하심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하나님은 이런 여러분에게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12. 그 밤에 떠오른 노래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시 77:2-11)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이 시는 고난받던 때의 탄원시입니다. 성가대 지휘자의 인도를 따라 이스라엘이 공동체적으로 부르던 노래입니다. 개인적인 탄원으로 이 시는 시작됩니다. 아마도 그는 고통받는 날에 이 공동체의 노래를 개인적으로 불렀을 것입니다. 작자로 소개된 아삽은 레위인으로서 게르놈 가문의 사람이었으며,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가대의 악장을 지냈다고 역대상 16장 15절이 말합니다. 여기서 '여두둔'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시편을 연주하는 방식이나 곡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여두둔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 일종의 음악적인 부호였는데, 지금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고통에서 시작된 시인의 고민은 옛날부터 이스라엘 공동체에 역사하셨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해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II. 그 밤에 떠오른 노래
밤에 한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이 시는 고난의 때에 기도할 결심으로 시작되는데, 모두 세 토막으로 나뉘어집니다. 첫째는 1절인데, 기도할 결심을 보여줍니다. 2절부터 9절까지는 불안한 영혼을 그리고 10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경건한 회상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A. 환난 날의 기억들
환란 날에 기억이 났습니다. 이 시에서 진술되는 고통은 어떤 특정한 사건과 연결 지을 수 없으리만치 아주 일반적입니다. 그렇지만 시인이 느끼는 고통은 결코 그 깊이가 얕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고통에 대한 절절한 묘사가 이를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시가 개인적인 고통이 아니라 공동체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에 정착했을 때 이후에 이어지는 유대인들의 절망적인 종교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픈 시인이 이 노래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탄원의 이유가 개인적인 것이든지 공동체적인 것이든지 결론은 동일합니다. 시인은 고통 속에서 기도하기를 결심하였고, 낙심하였으나 새로운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시인은 깊은 시련과 환란의 날에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끈질겼습니다. 그는 기도하려고 든 손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영혼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만족을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2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시 77:2)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시인의 마음은 불안하며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불안한 나머지 그의 마음은 상처를 받게 되었고 잠들 수 없으리만치 괴로웠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과 변론하기를 포기할 만큼 내적인 고통을 깊이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불안이 시인의 불신앙을 보여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큰 일을 사모하는 거룩한 갈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는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천신만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예루살렘 성전은 재건되기 시작했고 제일 먼저 그 성전의 기초가 놓였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이 성전의 기초가 놓이는 것을 보며 대성통곡하였습니다. 다른 여러 젊은 사람들은 기쁨으로 크게 환성을 질렀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바벨론 포로시대에 태어난 젊은 세대는 예루살렘 성전을 본 적이 없지만 늙은 족장들은 그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을 보았고, 솔로몬 시대에 지어진 그 성전의 화려함을 목격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놓여진 지대는 축소된 것이 없고 초라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통곡했고 젊은이들은 기쁨으로 함성을 질렀던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깊이 만났던 믿음의 사람으로서 이런 시련과 고통의 날에 하나님의 얼굴을 간구하며 더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기를 사모하면서 하나님 앞에 불안했던 것입니다. 동시에 그의 불안과 근심의 경험은 시인을 비롯하여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기로 뜻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진실한 간구로 그 시련의 때를 믿음으로 이기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B. 밤에 떠오른 노래
두 번째는 밤에 떠오른 노래입니다. 큰 고통 중에 시인은 과거의 지난해들 즉 지난 연(年)들을 기억했습니다. 오래된 연수였으며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그 노래는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일해주시던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의 때를 기념하는 공동체의 찬송가였습니다. 성경과 전승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역사를 생각나게 해 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이 끊어진 것과 같은 때에 그는 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위로를 삼았던 것입니다. 그 찬송가를 떠올리면서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때는 밤중이었습니다. 세상사에서 떨어져 홀로 있기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고독은 인생의 마당입니다. 인간은 그 고독의 마당에 오래 서 있지를 못합니다. 그 마당의 앞쪽에는 진리의 문이 있고 뒤쪽에는 쾌락의 뒷문이 있습니다. 인간이 그늘진 사랑을 우거지도록 하는 것도 결국은 외로움 때문이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도 외롭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쾌락에 미친 이 세상은 결국 그들이 얼마나 외로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이 쾌락주의는 하나의 질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시대건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 시대가 없었지만 특별히 산업화 사회가 되고 점점 사람들이 사회적인 관계가 단절되면서 인간은 극도의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쾌락의 뒷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비난만 하지 말고 세상을 사랑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들의 비극적인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러한 쾌락주의라는 질병에 깊이 빠진 현대를 어떻게 치료해서 하나님 앞에 다시 살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려면 자신을 외롭게 놓아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쾌락을 찾지 말고 오히려 진정으로 자신을 외롭지 않게 해주는 진리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때때로 외롭고 혹은 혼자 버려진 것과 같은 그때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 시간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외로울 때보다 하나님 앞에 기도가 잘 될 때가 없습니다. 광야에 홀로 있는 것과 같은 때, 아무도 도울 리가 없는 것 같은 때, 마음은 파산 선고받은 자와 같이 가난해지고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며 내 심령으로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시 77:6)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데, 이 6절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그 밤에 나의 한 노래를 회상하였습니다.” “내 마음과 더불어 나는 말하였고 그때 내 영이 살펴보았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 마음과 대화를 나눴으며 영으로는 자신의 처지를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살펴본 것은 자기가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의 사태였고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불안의 감정은 깊은 곳에서 파도쳤고 마음에는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경건한 시인들이 흔히 하던 경험이었습니다. 현실에 불안해하는 자아가 약속을 신뢰하는 자아와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거는 이도 시인 자신이 없고 대답하는 이도 시인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시 77:8-9) 그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끝났고 약속하심도 영원히 패하였는가?’ 만약에 개인적인 문제로 연결을 짓는다면 막막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공동체적으로 적용한다면 옛날처럼 충만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타나는 주님의 선지자들이 끊어진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떨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한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염려했습니다. 예전에 그토록 넘치게 베풀어 주시던 은혜를 이제는 더 이상 거두시고 자신과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는가 생각하며 그는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대한 의심이 아니었으니 그는 더욱 큰 은혜를 갈망하기 때문에 보다 더 완전하고 커다란 은혜를 사모했던 것입니다.
염려하는 자아에게 믿음의 자아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고통 속에 외로웠던 시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시 77:10-11)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 그는 잠시 고통 속에서 홀로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더 큰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에 잠시 낙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곧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옛적에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상기하였습니다. 홀로 있는 것 같은 외로운 느낌을 받았을 때 오히려 시인은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할 뜻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다윗과 함께 압살롬의 반역을 당하여 요단강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던 고라의 자손의 시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그는 고난받는 날에, 하나님의 성소로부터 멀어진 절망의 날에, 악인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왕과 함께 망명길에 떠나있는 고통스러운 때에 그는 회상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 42:4)
신앙은 하나님을 추억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빛 가운데서 기뻐하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하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의심을 꾸짖고 의심은 믿는 것을 경계합니다. 이것은 한 사람 우리 안에 있는 두 마음입니다.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이 둘은 항상 우리의 마음에 공존합니다. 우리가 속지 않기 위해서는 의심하는 이성이 필요하고, 믿기 위해서는 그것을 뛰어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믿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그것은 약속을 붙드는 마음입니다. 신앙의 요체는 한 가지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성경 전체의 요절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맞습니다. 이 구절이 바로 성경 전체의 요절입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 3장 16절은 창세기 1장 1절을 토대로 놓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과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성경 전체를 바치고 있는 두 기둥과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쪽 지붕은 신약이고, 한쪽 지붕은 구약입니다. 그 가운데를 떠받치고 있는 하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레위기 26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바로 구약은 이 약속이 옛날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고 신약은 이 방식이 새로운 방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라는 지붕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하나의 가운데 기둥이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는 이 하나님의 약속이 옛날에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구약에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현재는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신약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행하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 오셨을 때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심'과 ‘함께하심'은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은 구별될 수는 있지만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경험하지 않고는 그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장소에 있는 것으로 따지자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하실 때도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하심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함께하심'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말년에 웃시아가 교만의 죄로 나병에 걸렸을 때 누가 그를 치셨습니까? 역대하 26장 20절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하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했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벌레에 먹혀 죽게 되었을 때 그를 면전에서 심판하신 이는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셨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심판하기 위해 함께하시는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임마누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언제나 자기의 백성들을 향하여 절대적인 선하심과 영원한 인자하심으로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고난을 겪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슬픔을 겪는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때리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 은혜를 다시금 갈망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고난받는 때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원하였겠습니까? 금이나 은 같은 없어질 세상의 보화를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해주셨던 그 위대한 날처럼 자기가 고통받는 그날에 하나님이 그렇게 함께 해주시기를 구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살다 보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가 있습니다. 보통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고통이 없는데 가슴을 찢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늘 고통을 느낍니다. 신령한 의미의 고통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좀처럼 그 마음이 간절해지지 않기에 종종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때리십니다. 사랑하던 것을 잃어버리거나 아끼던 것을 놓게 되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세상이 덧없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다루셔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가장 어려운 때에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나 기도하기 전까지는 그분이 그렇게 가까이 계신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는 고통스러워서 기도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해야 했기 때문에 마음은 하나님을 오로지 바라보게 되었고 거기서 하나님과 만났습니다. 제게도 그런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날들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사실은 고통이 많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 많은 것들 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이 1987년도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원 3학년 때였고 그때 저는 인생의 벼랑 끝에까지 내몰렸습니다. 사랑하던 할머니는 사형 선고를 받고 암으로 죽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집은 사기를 당해서 길거리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또 아들은 민주화 시위로 체류탄 가스를 먹고 기관지염에 걸려서 이틀에 한 번씩 병원을 가야 하는데 우리에겐 병원비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결국은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게끔 몰아가셨습니다.
그때에도 나태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은 아닌데 하나님이 무언가 큰 경험을 하게 하시려고 저를 기도로 데려가시지 않으셨겠습니까? 학교는 민주화 시위로 휴교 중이었고 저는 목숨을 걸고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공부를 했습니다. 오전과 오후에 공부를 끝내고 저녁 먹으러 가기 전 저는 아무도 없는 채플실에 올랐습니다. 원래 성격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때는 너무 인생이 다급하니까 나도 모르게 간절한 음성으로 통성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짧으면 한 시간 반, 길면 두 시간 반 정도 계속된 그 기도는 하여튼 혼신의 힘을 쏟아붓는 기도였습니다. 기도하고 나면 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 나무 의자에 앉아서 일어나면 거기에 물기가 가득 있을 정도였습니다. 티셔츠부터 바지부터 내복까지 모두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그리고 힘없이 계단을 내려옵니다. 고난은 계속되었고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습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믿음의 각오를 다졌습니다. 그때 제가 즐겨 부르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찬송)
인간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정녕 내 꿈은 참되리라
찬송을 부르며 ‘믿음으로 살자. 믿음으로 살자.' 내려왔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서 두세 번 쓰러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때부터 학교에서 굶는 학생들에 대한 연민이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달은 훨씬 넘었고, 두 달은 약간 안 된 것 같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데, 내 기도를 깨고 하나님의 분명한 응답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고, 그 이후에도 거의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매우 특별한 방식의 응답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너와 함께함을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겠노라”는 응답이었습니다. 즉시로 제 마음은 모든 근심의 사실을 사슬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마음에 고통의 눈물이 사라졌습니다. 슬픔의 이유가 바뀌었으니 이렇게 큰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앞에 내가 이렇게밖에 못 산다는 것 때문에 슬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과연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저의 인생을 인도하셨고, 그 은혜 때문에 오늘 제가 여러분 앞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든 어려움을 통해 간구하는 바는 결국 주께로 더 가까이 나가게 하는 물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의 파도 속에서 마음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외로움의 마당에서 쾌락의 뒷문을 여는 대신 진리의 대문을 여십시오. 그리고 그 속에서 그 풍랑을 인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고 주님 앞에 은밀히 기도하십시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인생은 유한하고 시간은 흘러갑니다. 즐거운 때는 하나님을 생각할 틈이 없고, 슬플 때는 그분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기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닌 것 같은 우리의 인생은 흘러가고 저 멀리 아득한 허공 속에 산산이 흩어져 버립니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있습니다. 시인은 그 밤에 “지존자의 해,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승리했습니다. 인생의 밤중에 여러분이 부를 노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시며 이 노래를 부르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3. 내 음성으로 부르짖을 때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 77:1)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불안과 염려가 엄습하였지만 시인은 밤중에 한 노래를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베푸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은총이 끝난 것 같은 절망감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편 77편은 시의 구성에 있어서 두괄식 양식을 보여줍니다. 결론부터 먼저 제시하고 이후에 그 결론을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이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1절을 다루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문제가 없기를 모두 바라지만 그러나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시인이 노래했습니다. 문제는 그 수고와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다에 부는 바람은 파도를 일으키고 그 파도는 항해를 방해하지만, 익숙한 사공은 그 바람 때문에 배를 더 빨리 가게 할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많은 시련과 괴로움 그리고 복잡다단한 인생사의 변화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 파도를 타고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합당하게 살고,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완성해 가는가 하는 것이 신앙의 요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탁월한 모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인생에 난관을 만났을 때 그는 연약한 사람으로 불안에 떨기도 했지만 결국은 믿음으로 승리했고 그 승리는 기도가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II. 내 음성으로 부르짖을 때
오늘 보여주는 그의 신앙은 자기의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 77:1)라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A. 음성으로 기도함
제일 먼저 시인이 말하는 것은 자기 음성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의 원문을 보면 앞에 부분이 완전한 문장이 아닌 것으로 나옵니다. 즉 ‘나의 목소리 하나님께’ 그렇게 말하자면 쉼표처럼 처리를 하고, 그다음에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이렇게 하면 귀를 기울이시로다’ 이렇게 나오면 됩니다. 시인의 간절한 마음을 첫 구절이 보여줍니다. ‘내 음성 하나님께’ ‘내 음성 하나님께’ 시인은 제일 먼저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자신의 음성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소위 중보기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신학적으로 원래 ‘중보'라는 말은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라는 말은 사람에 대해서는 써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신학적으로) 그래서 저는 ‘섬김기도'라는 용어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성경은 누군가가 남을 위하여 기도해 줄 때에 그 기도에 응답이 된 간증으로 성경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교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가 남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 그 기도가 응답 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생생하게 경험합니다. 기도를 받은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못 느낄지 모르지만 그를 위해 기도한 나는 느끼는 것입니다. 이게 섬김기도의 능력입니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섬김기도의 중요성도 성경이 강조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강조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하는 기도입니다. 남을 위한 섬김의 기도는 그 당사자가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와 부딪힐 때 폭발적인 응답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이 기도해야 할 의무를 면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자신은 기도하지 않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귀엽습니다. 자기 기도의 효과는 믿지만 본인이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만큼의 믿음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기도의 위대한 능력은 본인 자신의 기도가 자기를 위해 섬기며 기도해주는 사람들의 기도와 부딪칠 때, 그때 놀라운 응답의 역사를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문제를 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평범하고 평탄하게 살아온 수많은 날들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읽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문제는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런 문제가 없었더라면 뼈저리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았을 텐데, 문제 때문에 사생결단으로 주님 앞에 매달렸고 거기서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은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위인들 모두의 이야기였습니다. 성경에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들 가운데 인생의 위기를 만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벼랑 끝에 내몰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모두 그 위기를 하나님의 선물로 삼아서 주님 앞에 부르짖는 기회로 삼았고, 거기서 자신이 직접 자기의 음성으로 기도함으로 하나님 앞에 응답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시 116:1) 시인의 고백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시인의 사랑의 확신을 더해주었고, 그 사랑의 확신이 깊어질수록 요동치 않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붙들며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하나님은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기도의 은혜는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지 우리 바깥에서 우리 없이 우리를 거슬러서 하나님이 기도로 우리를 데려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기로 뜻을 세우지 않으면 옛날에 여러분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든지 간에 여러분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셨기 때문이지만 그런 은혜를 부어주신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뜻을 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가상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선택은 우리가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선택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계처럼 사용하셔서 하게끔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인생의 문제와 숙제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문제는 여러분의 수많은 정신적인 힘과 에너지를 소진시킵니까? 그래서 말하지 않아도 마음에 근심이 있는 사람은 얼굴에 모두 나타납니다. 아무리 화장을 짙게 하고 예쁘게 꾸며도 근심이 있는 여자의 얼굴은 화장발도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그대로 어두운 그늘이 드러납니다. 안면의 근육이 약 80개가 넘는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수심이 가득 차면 노폐물이 쌓여서 순환이 안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굳어집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울퉁불퉁하게 자기 형체를 고집하면서 얼굴에 아름다운 윤곽이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고집불통이고 무엇인가 짜증이 난 사람처럼 보이게끔 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이 충만하고 은혜를 받으면 속에서 혈액순환이 잘 되면서 안면의 근육들이 모두 풀어집니다. 그래서 아주 또렷한 윤곽을 만들면서 얼굴 전체에 수십 개의 근육이 조화를 이룹니다. 그래서 마음의 수심을 얼굴은 감추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기쁨과 희락도 얼굴이 숨기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이 선교입니다.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고,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고, 명랑한 삶을 살 때 비로소 여러분이 사용하고 있는 복음이 정말 인생을 잘 사는데 쓸만한 것이라는 인상을 이웃이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왜 저렇게 기쁨과 소망의 삶을 사는지 물어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저녁에라도 집에 가서 거울을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을 한번 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의 자녀다운 기쁨이 충만하고 명랑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얼굴인가? 그렇지 않으면 죽상인가 하는 것을 한번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문제에 시달리는데 들어가는 에너지는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소진하고 탄식으로 나날을 보내면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기도를 못하는 게 아니라 기도를 안 하기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건 불신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항입니다. 어느 때쯤이면 나아지겠습니까? 뭐가 나아지겠습니까? 그렇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그분께로부터 오는 풍성한 은혜의 자원이 없는데 무엇을 동력으로 삼아서 여러분의 인생을 창조적으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에너지를 소진하며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매달리는 것은 언제나 보상이 뒤따라옵니다. 교회에 올 때는 무거운 짐을 안고 걱정하면서 왔는데, 눈물을 펑펑 쏟고 주님 앞에 기도를 하고 돌아가는 밤길은 올 때의 그 밤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시고, 아무것도 상황은 바뀐 것이 없지만 마음속에서 살 수 있는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 비밀을 불신자는 모릅니다. 신자인 여러분은 이미 배웠고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걸 선택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합리적으로 선택을 해봐도 결국은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근심과 염려로 나날을 보내는 것이 자신의 삶을 태워버리는 깊은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음성으로 주님 앞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이유는 결국 믿음이 없는 것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문제에 처해 있는 여러분 당사자의 음성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거를 듣고 싶은 것입니다. 요란한 기도가 아닙니다.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마음으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이 그분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토설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형편을 아뢰고 오직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그 음성을 듣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뜻을 세우고 출발하면 모든 문제는 문제가 크면 클수록 위대한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고, 상황이 절망적일수록 더욱 큰 기적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으로 이 세상을 헤치면서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여러분이 처한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음성으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상에게 기도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사람을 향해 기도할 리는 더더욱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따지자면 우리의 모든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아니겠습니까?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뭐가 실제로 그렇습니까? 예배 시간에도 제시간에 안 나오고 지각을 합니다. 예배 시간에 몸은 앉아 있지만 정신은 딴 것을 생각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그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까? 육체는 교회당에 나와 있지만 정신은 침대에서 파자마 바람으로 뒹굴고 있는 그런 사람이 드리는 예배가 그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라는 이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입니다. 시인이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라고 할 때 생각한 그 ‘하나님께’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는 아득한 저 우주 속에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게 부르짖음으로 도달하고 싶었던 것은 기도할 때 주님이 내 안에 와 계시고, 내가 기도할 때 주님 안에 있어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된 그 친밀함의 연합 속에서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한 적은 더러 있지만 "하나님께", 그분의 임재 앞에서 기도한 때가 얼마나 됐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정성스럽게 깨알같이 손 편지를 쓴 엽서를 받아서 쓰레기통에 넣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슨 사연인지 읽어봅니다. 그런데 수없는 우편물들이 하루에도 수십 통씩 날아옵니다. 그런데 전부 다 인쇄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도장으로 찍혀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DM입니다. 광고입니다. 대출 받으라는 광고고, 아니면 보험 들라는 광고고, 그다음에 물건 사라는 광고입니다. 쳐다보지도 않고 모두 쓰레기통으로 들어갑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드리는데, 그 기도가 향연이 되어서 올라가는데, 천사들이 여러분의 기도를 그릇에 담아서 우리 주님께 바칠 정도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드린 기도가 얼마나 됩니까? 그러니까 기도는 했지만 그 기도는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리고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도대체 언제입니까? 자신의 마음을 깨뜨리며 중심을 쏟아 놓으며 물같이 주님 앞에 자신을 토한 적이 언제입니까? 지난주에 여러분 얼마나 많은 눈물을 주님 앞에 흘리셨습니까? 감사의 눈물, 기쁨의 눈물, 회개의 눈물, 그 눈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드리는 진실한 기도의 탄원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루만지시며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얘야, 내가 네 마음을 안다.” 이런 음성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한 번도 없습니까? 아닙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인생의 기로에 서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붉은 선혈 아래 그렇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모든 문제와 인생의 위기를 주 앞에 물처럼 쏟아 놓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주님의 마음이 내 안에 있었고 내 마음이 예수의 마음 안에 있어서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아붓는 것이 종교의 진수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산 제사고, 그걸 통해서 여러분은 주님 앞에 열납됩니다. 그리고 죄와 타락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정결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구별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찾는 마음 없이 예수를 믿고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사행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제 『어린이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전국 독후감 대회 시상식을 했습니다. 170명의 학생들이 응모를 했는데, 그중에서 20명에게 상을 줬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왔고 그 중에는 우리 교회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몇 학생이 간증을 했습니다. 그중에 한 학생이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어린이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를 읽고 너무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게 너무 기뻤다고 했습니다. 네 번을 읽었다고 합니다. 네 번 읽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김남준 목사님이 쓰신 또 다른 책을 읽고 싶어서 첫 번째로 집은 책이 『성화와 기도』였다고 합니다. 그거를 읽고 엄청나게 울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기도가 왜 하나님 앞에 응답되지 않는지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20분 정도 기도한 줄 알고 눈물을 닦고 시계를 보니까 한 시간 반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그다음에 궁금해서 손에 집은 책이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 너무 어려워서 공과공부로도 채택을 안 한 책입니다. 읽고 너무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집은 책이 철학적 신학을 다룬 『도덕적 통치』였다고 합니다. 그걸 모두 읽고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손에 집은 책이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 650페이지짜리 책을 모두 읽고 마지막 결론이 "신앙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니 그런 어린애들도 하는 그 일을 여러분은 왜 못하는 것입니까? 결국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기 때문에 모든 진리는 어렵고 힘들고 짜증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노스햄튼 교회에서 목회할 때 일이었습니다. 4년 8개월 된 아이가 있었는데, 월요일만 되면 엄마한테 교회 또 언제 가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6일이 지나야지 교회 갈 수 있다.’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자꾸 교회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니?’ 그랬더니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가 듣고 싶어요.’ 두 시간, 세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설교를 4년 8개월짜리가 이해를 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식하고 다른 것입니다. 어떤 단어를 성인이 쓰기 때문에 몰라도 이해에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결이 마음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영국에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 목회를 하셨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다가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습니다. 열 살짜리 교인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할아버지 목사님, 빨리 나으세요.’ ‘빨리 돌아오셔서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 설교해 주세요.’ ‘왜냐하면 목사님은 이 교회에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교하는 유일한 목회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린 아이들도 할 수 있는 것을 여러분은 왜 못하고 있습니까?
쉽게 생각하면 마치 살기 싫은 부부가 억지로 사는 것처럼 마지못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자기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을 일(一)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냥 와서 일반적인 교제나 하고, 사람들과 인간관계나 맺고, 그냥 살아가는 사회활동 정도로 신앙이 전락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령한 은혜의 어떤 정수 속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신앙이 나를 바꾸고 성령님이 나의 본성과 심정을 바꿔서 인생의 문제들을 직면할 때에 하나님과 교통하며 이 모든 것을 이기며 나아가게 하느냐는 간증을 터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래서 그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문제는 그래서 저 사람을 하나님 만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마음이 없는 일만 마디의 기도는 여러분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한마디의 탄식은 여러분의 심정을 바꿉니다. 마음의 방향을 바꿉니다.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만들고, 죄에서 성결로 돌이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정수입니다.
비밀이 있습니까? 이런 사귐의 비밀이 있습니까?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나만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사연이 기도 속에서 여러분에게 경험되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능력으로 인생을 헤치고 살아가도 믿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은데, 이런 기도 전혀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것과 같습니다. 기도 전혀 안 하고 책이나 읽고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새가 한 쪽 날개 없이 날아오르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나마 책도 안 읽고 공부도 안 하는 사람은 두 날개 자르고 새가 땅바닥에서 버둥거리면서 날아오르겠다고 몸부림치는 거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거를 깊이 사모하며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기를 그리워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르짖으리니’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차아크((צעק)’입니다. 이거는 뭔가 비명을 지르는 걸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지근거리에 있어서 작은 이야기를 해도 알아들을 수 있을 때에는 이런 동사를 사용 안 합니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사이에 있거나, 가까이 있어도 간섭하는 소리들이 너무 커서 크게 부르짖지 않으면 상대방의 귀에 들리지 않을 때 이 동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부르짖은 것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를 생각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시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급함의 정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급함의 정동입니다. 여러분이 지근거리에서 모두 들을 수 있는데, 여러분이 뭔가 뜨거운 것을 가지고 있다가 쏟아트려서 손과 발이 그 뜨거운 국물에 확 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이 ‘아 뜨거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위급한 정동이 마음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어울리게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라고 할 때 그것은 그냥 일반적인 기도의 한 형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하고자 하는 의욕과 갈망 그리고 자기가 바라는 희망과 현실 사이에 매우 커다란 격차를 느끼는 데서 오는 슬픔의 정동입니다. 그거를 가지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5편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습니다. “···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시 5:1)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 5:2)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음성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충만해진 슬픔의 정동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슬프지 않습니다. 서럽기는 하지만, 하나님 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서는 안 웁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서럽게 웁니다. 그러나 세상 앞에서는 담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될 삶이 어떤 삶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담대하고 세상 앞에서는 비굴한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상일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는 상한 심령,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간절히 찾는 어린아이같이 연약한 마음이 되고, 세상을 향해서는 사자와 같이 담대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믿음으로 ‘세상이 나에 대하여 어찌하랴' 하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뜻입니다.
마음에 간절한 부르짖음을 가지십시오. 세상에 비참한 사람이 자기가 비참한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을 모르는 그 사람이 진짜 쓰레기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보다 나은 삶, 보다 행복하고, 보다 구김이 없는 삶이 있는데, 그늘진 사랑을 우거지게 하면서 끊임없는 가책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어둠 속을 걸어가면서 그것이 비참한 줄 모르는 그 마음, 그게 하나님 앞에 벌 받은 마음입니다. 물어보십시오.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최선인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음이 없는 삶, 눈물의 기도를 상실한 삶이 내게 돌려준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한순간이라도 진실해지십시오. 수많은 형식이 진실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해지십시오. 자신의 마음을 깊이 무릎 꿇리고 ‘내가 주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엎드려질 때 마음은 물처럼 녹아서 땅에 스며듭니다. 그리고 자신이 티끌이 된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 안에 와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그렇게 우는 사람들 마음 안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르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 심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들으시는 하나님
마지막으로 시인이 믿었던 것은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 77:1) 이 확신을 가지고 모든 불안과 염려를 이겼습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내게’라는 단어입니다. "나에게" 복수를 사용하지 않고 단수를 사용해서 ‘하나님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결국은 한 인간의 자존감이라고 하는 것은 우월감하고는 다릅니다. 내가 돈이 많기 때문에 돈 없는 친구들을 만났을 때 느끼는 우쭐하는 마음, 내가 외모가 예쁘게 생겨서 어디 가든지 저절로 인싸가 되고 사람들이 나에게만 관심을 갖게 되는 데서 오는 우월감, 그런 거 아닙니다. 남이 없는 재주를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박수를 받을 때, 그때 느끼는 상대적인 우위감, 그런 것이 한 인간의 자존감이 아닙니다. 그거는 흔히 있는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우월감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가끔 보면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이 상처를 받든 말든 함부로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에 평화를 깨뜨리고, 자기보다 나은 것을 발견하면 어떻게 하든지 그걸 깎아내리려고 그런 화법을 동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열등감 덩어리입니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전혀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한 것처럼 똑같이 해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마음속으로 딱 접기를 ‘저 사람의 분량이 저 정도 무게밖에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엄청난 열등감 속에서 저런 식으로 반응하면서 사는구나'라고 생각을 하면 교만한 그것은 곧 자신의 자존감이 뚝 떨어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 깊은 연민을 느낍니다.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보다 지식이 뛰어날 수도 있습니다. 사역을 더 잘 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없는 재주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재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기죽지 않습니다. 난 가슴에 손을 얹고 목회를 하면서 아무도 나의 경쟁 상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동역자라고는 생각했지 경쟁상대로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학문을 하면서도 나보다 뛰어나게 공부 잘하는 사람이 부럽기는 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적수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완성을 위해서 공부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주신 소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나의 목회입니다. 그 사람들과 비교를 하라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건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가 있다면 그 달란트만큼 최선을 다해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주셨으면 나는 더 많이 할 것이고, 받은 것이 적으면 적게 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 결과로 하나님 앞에 판단 받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얼마나 진실하고 진지하고 마음을 바친 섬김이었는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이 시인이 인생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것이 공동체적인 위기든지 개인적인 위기든지 혹은 두 개가 경합되어 있는 위기든지 간에 어떻든지 간에 그는 커다란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위기는 얼마나 심각했는지 불안한 마음을 그칠 수가 없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진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엄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되찾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 하는 자존감입니다.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모의 심정이 되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자식이 너무 소중한 이유는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공부 잘해서가 아니고, 얼굴이 예뻐서가 아니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애정을 좌우한다면 그건 부모가 아니라 삯꾼 부모입니다. 참 부모가 아니라 다 삯꾼 부모입니다. 자식을 이용해서 피를 빨아먹듯이 자식을 이용해서 돈이나 챙기려는 부모들이 연예계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거론되지 않습니까? 다 삯꾼들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 아이가 자기의 핏줄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녀들에게는 자존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교육은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찌그러지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적어도 한 인간으로서는 자신과 동급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면서 존중하는 교육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존댓말을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만 존댓말 쓰면 뭐합니까? 존댓말 쓰면서 때리면 사람 더 놀리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한 인간으로서 충분히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부모로부터 배우면서 자존감이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런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모로부터 문제를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해줘야 됩니다. 자유를 주어야 됩니다. 그리고 자율적으로 살게 만들고, 정확하게 책임을 지게끔 만들어줘서 사랑 안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되도록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보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것입니다. 시인이 지금 자신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지 않을 정도가 됐을 때에는 자신이 티끌처럼 느껴지고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고는 이렇게 부르짖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기에 너무 먼 분, 그리고 내가 찾기에는 너무나 아득한 곳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으려고 할 때 우리에게는 두 개의 대적이 나타납니다. 율법의 정죄와 양심의 송사입니다. 끊임없이 가까이에서 속삭이는데, 때로는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보다 더 또렷하게 들립니다. ‘네가 그따위로 살고 주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실 줄 아느냐?’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잘못한 모든 일들이 내 앞에 전시됩니다. 그래서 기를 꺾습니다. 그때 치료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축구에서 선수가 반칙을 많이 하면 심판이 무엇을 듭니까? 빨간 카드를 딱 듭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퇴장입니다. 그런 율법의 정죄와 양심의 송사를 향해 우리도 빨간 카드를 드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나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옥체를 찢으셔서 그 붉은 선혈을 우리와 휘장을 지나 보좌 앞에 이르기까지 핏길을 뿌리신 것입니다. 자기 의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눈물로 회개하며 그 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보혈의 능력이 그들의 죄의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뜨거운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모든 송사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잠재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보혈의 능력입니다. 보혈의 능력이 힘이 있고 그 능력이 우리에게 무기가 되어서 그 모든 것들을 이기고 결국은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때 결국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의존하는 사람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진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죄 있는 나 때문에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을 다 깨뜨려서 피를 쏟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좌 앞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거기서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응답을 듣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방면에서 살 때는 일(一)도 겸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한 한 빗나간 방법으로 겸손합니다. ‘나 같은 기도를 들어주실까?' ‘내가 이렇게 많이 잘못을 했는데 하나님이 안 받아주실 거야.' 겸손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께로 피할 수 있는 길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 사실을 굳게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의 이름 석 자는 주님의 마음에 그리움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라고 믿지 못하는 것이 나의 믿음이 없음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간절히 매달릴 때 이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 그리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모든 출발은 진실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 좋습니다. 기도회, 좋습니다. 그리고 전도, 좋습니다. 그런데 시작은 진실함에 있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면서 소란스러운 세상의 소음에서 자기를 떼어놓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마음이 물이 되어 흙 속에 스며들어 가는 듯한 느낌으로 주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이 기도를 터뜨리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이렇게 자신의 음성으로 주 앞에 부르짖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신인동형(神人同形)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형체가 아니신데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눈높이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듣고 싶은데 잘 안 들립니다. 그러니까 귀를 더 가까이에 내미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귓바퀴를 크게 만들어서 안 들리는 음성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마음이 그 의미를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애정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정 없이 사람에게 뭔가를 줄 수는 있지만 그의 마음으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사랑 없이 애정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최고의 감정 노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난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최근 일주일 동안 누구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있습니까? 누구의 마음에? 쟤가 얼마나 괴로울까? 엄마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혹은 남편이 얼마나 외로울까? 그 마음에 기울어져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별로 없을 겁니다. 한 달 기간을 정하고 물어봐도 마찬가지고, 일 년을 정하고 물어봐도 그런 순간은 기억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게 우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언제나 그렇게 어디서든지 우리가 부르짖으면 마음을 다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죄지은 놈의 기도는 안 듣겠다.' ‘나쁜 짓 한 여자의 기도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겠다.' 그게 아닙니다. 그가 누구든지 간에 당신의 이름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 그 마음 안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런 좋은 분을 어디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결국은 시인이 내린 결론입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시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통째로 아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고치십니다. 고치시는 방식은 속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통째로 드리는 게 아니라 이거를 자기가 해석해서 풀어서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반성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경향성을 약화시키고 사랑의 경향성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우리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 자신의 마음에 괴로움의 실타래가 가득 있을 동안에는 이 심정이 망가진 심정입니다. (그런데) 엉킨 실타래를 풀듯이 언어로 길어 올리고, 길어 올리면서 그 마음에 진심을 담아서 토설하고 고백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깨닫고 그 깨달은 걸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나 기도조차 할 수 없도록 마음을 망가지게 만들었던 죄에서 우리를 떠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 흘리면서 도둑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찬송가 부르면서 간음하는 사람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먼저 마음이 떠나면서 은혜로부터 멀어지면서 죄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심정을 사람들에게 토해 놓아 보십시오. 아마 여러분이 아주 훌륭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으면 몇 사람 정도가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길게 하면 그다음에 안 만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마음을 쏟아부으며 기도하는 모든 사람의 기도를 반복한다고 짜증 내지 않으시고, 길다고 지루해하지 않으시고,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고 하나님이 마다하지 않으시면서 들어주시고, 당신의 마음을 전달해 주시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진실한 신앙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중심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그러면 시인이 그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날들을 은혜로 이긴 것처럼 여러분도 이기리라 확신합니다. 이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4. 헤아리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1-2)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이 시는 다윗의 개인적인 탄원의 시입니다. 표제에는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는데, 원래는 <성가대 지휘자를 위하여 피리들에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생각하기를 이 시는 지어질 때부터 성가대 지휘자의 인도를 따라서 부는 악기에 맞춰서 지은 노래다. 이렇게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다윗이 이 시를 지었습니다. 이 시를 관악기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게 되어 있는데, 그 당시에 악기가 아주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아마 피리 같은 것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정확하게 이것이 무슨 악기를 의미하는지는 잊혔습니다. 아무튼 이 시는 시인 다윗이 언제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이 시를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일반적이어서 사실 이 5편을 보면서 다윗의 생애에서 일어났던 어떤 특정한 사건을 지목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추측하기를 사울에게 쫓기고 고통받던 때인가?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서 많은 사람에게 비난과 배신을 당하던 때인가? 아니면 어떤 개인적인 괴로운 일이 있어서 왕이 된 후에 지은 시인가? 아니면 그 전에 지은 시인가? 추측만 할 뿐이고, 특히 다윗이 이 시를 지은 연대를 추측할 만한 어떠한 단서도 이 시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시는 다윗이 원수들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지은 시입니다. 이 시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입고 있으며,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전을 향하여 예배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까 신앙으로 이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가려는 훌륭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그때 이 시를 지었고, 고난과 역경에 가득 차기는 했지만 마음의 그늘이 보이지 않는 시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은 충만한 은혜 속에서 고난을 극복하며 이 시를 썼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뿐입니다.
II. 헤아리시는 하나님
시인은 앞에 두 절(節)에서 자신의 심정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시 5:1)
A. 내 마음을 아심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을 알고 계시다는 데에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첫 절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구절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라고 하는 이 번역이 옛날 개역성경에는 '내 심사를 통촉하소서'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고(古)티가 나는 표현이지만 상당히 멋있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심사' 그리고 지금 이 성경에 '심정'이라고 되어 있는 단어는 얼핏 보면 우리의 마음을 가리킬 것 같은데,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게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하기기'(הֲגִֽיגִי)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신음소리' 혹은 '중얼거리는 소리', 생각이 너무 많아서 토해내는 '한숨 소리' 같은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번역하면 '나의 한숨을'입니다. 어떤 영어성경에서는 그래서 '나의 한숨을 알아주소서'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사람이 혼자 길을 걸으면서 중얼거리거나 혹은 혼자 속삭이거나 혹은 혼자 긴 한숨을 내 쉬는 것은 생각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그냥 의역을 해서 '내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라고 번역을 했으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역경과 시련의 때를 지나는 시인의 인식이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이 알아주신다고 하는 강한 소망을 붙들지 않으면 절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생기고 역경에 처할 때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즉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나 이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을 때 우리는 구차하게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형편을 아뢰며 또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도움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그 심정을 헤아려주는 부모 자식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어디에서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 너무나 많은 기대를 걸면 언제나 실망이 뒤따릅니다.
다윗은 오랜 기간 동안 연단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토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도 그랬고, 왕이 된 뒤에도 그랬고, 왕으로 아주 부강한 나라를 만든 다음에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여러 시편 속에서 그는 자처하기를 “나는 가난하고 궁핍합니다.”라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어찌 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동시에 나의 처한 처지를 오직 하나님만이 가장 잘 알아주실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이 알려진바 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기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너무 많은 기대를 걸면 사실 섭섭한 마음이 들고 미워하게 됩니다. 사람은 원래 남에 대해서 잘 모르도록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우리 각자 각자가 외로운 이유는 서로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죄가 들어온 후에는 마음과 마음이 교통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을 교통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옛날 성경에는 '심사를 통촉하소서'라고 되어 있는데, '통촉(洞燭)'이라는 단어는 '촛불을 켠다'라는 뜻입니다. 어두운 곳에 뭘 찾기 위해서 맨눈으로 볼 수 없으니까 등불을 켜거나 촛불을 켜서 그것을 깊이 들이밀며 안 보이는 부분까지 살핀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왕의 동작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은 임금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심사를 통촉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애정을 가지고 불을 환하게 켜서 어떤 물건을 동굴에서 찾는 것처럼 자신의 진심을 헤아려 달라는 간구였던 것입니다. 이 시인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찾은 것은 하나님이었고, 그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것은 진실하지 않으면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파헤쳐봐야 거짓과 위선, 죄악과 사기뿐이라면 감히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죄를 지은 사람도 이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죄지은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이 범죄한 것을 후회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돌아가겠다는 그 마음이 진실한 마음입니다. 죄를 지을 때는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할 때는 진실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회개가 가능한 것이니, 이런 기도는 죄를 지은 사람이나 의롭게 산 사람이나 누구든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심사를 통촉하옵소서” 죄를 짓고 나태하게 산 것도 사실이고, 실수하고 범죄한 것도 틀림없지만, 여전히 내 마음 더 깊은 곳에는 "이 모든 것을 뉘우치고 주님의 도움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헤아려 주옵소서."라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우리를 용납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께 돌아가면 우리의 마음을 통촉하고 우리를 헤아려서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 번 마음의 낙인을 찍으면 영원히 그 낙인을 지우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항상 봄날이 있는가 하면 가을날이 있고, 뜨거운 여름이 있는가 하면 눈 내리는 겨울이 있는 법입니다. 악한 모든 사람은 항상 악하게 살지 않았고, 지금 선한 여러분은 항상 선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인생에 구비구비가 있고, 현자처럼 보이는 사람도 언젠가는 짐승처럼 산 때가 있고, 짐승처럼 살고 있는 사람도 언젠가는 현자였던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중에 어느 하나를 찍어서 터무니없이 그 사람을 존경하거나, 어느 한 지점을 찍어서 터무니없이 그 사람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우리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모두 보이도록 현전(現前)하는 것이니, 주님은 우리의 삶 전체를 바라보시며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인이 위기를 만났습니다. 살아왔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최고의 경건한 삶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어려움은 시인이 이전에 지은 죄에 대해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감출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모두 벌려 주님께 마음을 보여드리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사를 통촉해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람에게는 우리의 마음을 감출 수 있고, 또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마음을 전부 보여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일은 부부간에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릴 것은 적절히 가리십시오. 그리고 사람과 사람에게 이야기해서 모두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누군가가 나의 말을 알아듣고 내 마음을 이해해주면 참 고맙다고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우리의 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고백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야 우리에게 당신을 숨길 수 있겠지만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 숨길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고할 때에도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고, 우리가 주께 고백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통촉해달라고 주 앞에 매달려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진심으로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과거에 불의하게 살았어도 이제는 의롭게 살고자 하는 갈망이 없으면 이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거짓으로 행했어도 내 마음을 통촉해달라고 기도하는 이 사람은 지금은 진실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자기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주님께 이렇게 헤아려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기도할 때 “하나님! 나의 마음에는 숨긴 것이 없습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잘 산 것도 못 산 것도 내가 주께 모두 열어 보여 드리오니 있는 그대로 보옵소서.” “잘못한 것은 꾸짖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잘한 것은 칭찬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찬양)
주여 진실하게 하소서
하루 하루 사는 순간에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마음을 드리는 사람, 이 사람이 고난 속에서도 승리할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B. 왕이신 하나님
두 번째 시인은 그 하나님에 대해 고백합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2)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열어 보이며 감춘 것 없이 주 앞에 매달릴 때 시인의 마음에 떠오른 것은 하나님은 왕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시인이 왕이 되기 전에 이 시를 썼는지, 왕이 된 후에 이 시를 썼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 이 시를 썼다고 생각하든지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그 왕이 얼마나 높고 위대한 분인지를 백성으로서 알았을 터이니 이 고백이 실감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 된 다음에는 온 나라와 백성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복종하는 통치자였으니, 이 왕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이 말은 경험적으로든 경험하지 못했던,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왕이라는 이 말은 말하는 그대로 온 천하가 복종하는 광경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왕이 되기 전에 왕을 보는 것조차 꿈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너무 높은 분이었고, 그 왕의 명령을 거스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왕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이니, 자신의 손으로 해칠 수 있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신앙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왕' 하면 그것은 명령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온 나라 구석구석 어디든지 주권이 미치지 않는 통치자를 의미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그는 형식적으로는 왕이었지만 신하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더 높은 왕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왕인데도 종으로 자처한 유일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왕이면서도 슬픈 일이 있고 고통스러울 때는 그 왕복을 입은 채 또 다른 왕의 이름을 부르는 신하이기를 자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주권 사상입니다. 하나님이 왕 되어 내 인생과 내 가족과 온 교회와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나라를 통치하시니 그분이 마음먹으시면 거기에 거스를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이 시인이 가진 주권 사상이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잘못한 것 없이 악인이 기승하고, 그들이 처처에 횡행하여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이 깊은 시련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계를 다스리시고 자기뿐만 아니라 악인의 생명까지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렇게 왕이신 하나님 앞에 굴복한 (다윗) 왕은 그 앞에 가장 가련한 신하가 되어 왕이면서도 또 다른 왕을 부르며 그 왕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1절의 단어가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독점적 사랑을 가리킨다면, 2절에 하나님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신 분을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왕들조차도 마음대로 다스리시는 상천하지(上天下地)에 능력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 왕이신 하나님께 나의 목소리를 토하며 주 앞에 부르짖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다윗의 하나님을 왕으로 삼으며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는 이 모습은 후일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그리스도 예수의 모본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종이 되기를 자처하셨습니다. 왕이시면서도 당신의 왕권을 감추시고 오히려 더 높은 하나님을 왕으로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께 복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왕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종의 형체가 되셨습니다. 능력의 하나님이 갈대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의 불꽃처럼 보이신 것은 당신이 하늘의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모아졌습니다. 일평생 사시면서 그는 성경을 암송하며 사셨고, 기록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사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하니라"고 고백하셨습니다. 거스르려고 하는 제자들에게는 "그리하면 어찌 성경에 기록된 바 이러 이러한 말씀이 이루어지겠느냐" 나무라시면서 자기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으니, 하나님은 왕이오, 당신은 종이기를 자처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왕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그곳에 아버지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될 것이며, 그 안에서 자신과 모든 백성들이 행복해질 것을 아셨기 때문에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목마르게 그리워하셨던 것입니다.
죄 없으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까? 그리고 고난을 당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을 왜 제물로 바치셨습니까? 자신의 죄를 위해서 입니까? 누구의 죄를 위해서 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모두 그 통치에 기뻐하며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이루며 살게 하시기 위하여,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 되기 위하여, 그렇게 이 세상에 오셔서 시련과 고난을 겪으시기를 다윗같이 하셨던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서거하면서 우리는 형식적으로만 보이던 영국의 왕 제도가 가지고 있는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수 킬로미터 줄을 서고 5초를 참배하기 위해 열다섯 시간을 기다리다가 쓰러져 졸도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고 하니 그들이 왕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애틋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 천 명을 합쳐도 고대 시대의 왕에는 비유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형식적인 왕이고 입헌군주국의 왕입니다. 그렇지만 이 당시에는 진짜로 나라를 통째로 다스리고 있는 사람이었고, 왕의 말은 곧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왕에 대한 거역은 꿈도 못 꾸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가지고 2절을 읽어보시라는 것입니다. 이 왕은 그냥 연극에 나오는 그런 왕이 아니라, 입헌 군주국의 왕이 아니라, 실권을 가지신 왕인데, 그 왕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인의 마음과 뜻이 전적으로 왕이신 하나님께 복종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소원을 이루는 것은 곧 왕이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 자신 있게 기도할 수 있었고, 그 하나님을 모든 것을 다스리는 왕이라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왕은 누구입니까?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왕이 되어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런 자신이 믿을만합니까? 항상 자신을 왕 삼고 산 결과는 자신의 인생을 얼토당토않게 이끌어가서 시궁창 같은 데 처박아 버리고 자기에 대해서 지독하게 실망하게 만드는 것이 회개의 기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왕 삼으며, 자신을 최고의 존재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는 동안에 여러분은 왕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을 왕 삼으며 살아가는 동안에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맞서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태양을 등진 어떤 사람이 그림자를 보지 않을 수 있겠으며, 하나님을 등진 어떤 사람이 불행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굳이 벌주시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등진 것은 행복을 등진 것이고, 행복을 등지고 걸어가는 모든 방향, 모든 길은 불행입니다. 자신을 왕 삼아서 불행의 길을 걸어가는데, 그 사람이 어찌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악을 행하면서 살아갈 때 불행해지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신 증거입니다. 그 길을 차마 보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타이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못된 짓을 하고 짐승 같은 행동을 할 때 그냥 껄껄 웃으면서 봐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야단을 치시겠습니까? 웃고 봐줄 수 있다면 자기 자식이 아닙니다. 자기 자식이면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계획이 있고, 선하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자녀가 악한 길로 갈 때 마음을 쥐어뜯고 그를 책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 왕이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면서 인생의 행복을 꿈꾸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는 모순입니다.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을 등지면서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문장의 모순입니다. 그런 길을 선택하며 살아갔던 것이 우리가 예수 없이 살던 때의 일입니다. 그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하기를 바라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이 내 인생의 왕이시며, 나의 진정한 행복은 그분의 뜻을 받드는 데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기도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순종하며 사는 삶이 저절로 되는 삶이 아니라 가만히 내버려 두고 기도하지 않으면 각자 자기를 임금 삼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기 위해서라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을 닥쳤을 때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비로소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고 내가 나를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뉘우치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빌게 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 속에서 왕이신 하나님을 다시 한번 만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가장 고난을 받는 때에 악인들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받고 있는 그때에 눈을 들어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복잡다단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대신 오직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의지하며 찬송했습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 왕을 거스릴 수 없으며 왕의 뜻이 세상에서 내 인생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아멘.” 고백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 왕과 함께 충만한 사랑의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부르짖는 기도
마지막 네 번째는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2) 여기에서 '부르짖는 소리'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부르짖음의 소리'입니다. 원래는 '부르짖음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 부르짖음이 어떤 종류의 것이냐 하면 도움을 구하면서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다. 단순히 큰 소리가 아니라 위기 속에서 구해달라고 정신없이 부르짖는 것입니다. 불이 나서 “불이야”라는 외침이나, 물에 빠졌을 때 소리를 지르며 “사람 살려”하는 그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히브리어에서 '쉐와(שׁוע)'라고 하는 단어인데, 굉장히 위급한 것을 나타내는 명사입니다. '크라이(cry)’, 그러니까 외침입니다. 아주 비명 같은 외침입니다. 이게 번역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부르짖는 소리', 너무 평범합니다. "나의 비명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하면 오히려 더 실감날지 모르겠습니다. 위기를 만나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더이상 살 수 없어서,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에, 생사의 기로에, 갈림길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지르는 비명입니다. “나의 이 비명 소리를 들어주시옵소서” “나의 참음은 한계에 왔고, 나의 견딤은 끝에까지 왔으며, 내가 더 이상은 주께 깨어질 것 같사옵나이다.” “온몸과 마음이 부서질 것 같사옵나이다.” “주께서 이 순간 나를 돕지 않으면 나는 멸망할 것입니다."라는 울부짖음입니다.
영국에 가 있는 동안에 아파트에서 불이 났습니다. 우리가 5층인데, 9층이 홀딱 다 탔습니다. 소방차가 20대가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문자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다행히 위층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조심하십시오. 예초기 있지 않습니까? 잔디 깎는 기계를 충전시킨다고 꽂아놓고 외출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과열되어서 그게 폭발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그렇게 썩 좋은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있는 데서 충전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놓으면 안 됩니다. 믿으면 안 됩니다. 이게 폭발해가지고 완전히 다 태워버렸습니다.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 안 다쳤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거기 사람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옆집에 있는 사람 얼마나 위기를 느꼈겠습니까? 검은 연기가 타고 위층으로 올라갈 때 그 위층에 있는 사람 얼마나 위기를 느꼈겠습니까? 불길이 막 밀려 "사람 살려" 그리고 비명을 (정신없이) 지르지 않겠습니까? 창피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비명 소리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는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간절함은 이렇게 마음의 다급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응답해 주셔도 좋고, 안 해주셔도 좋고, 내버려 두셔도 좋고, 그런 마음이기 때문에 부르짖는 기도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을 찢는 기도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처절한 기도, 비명 같은 기도, 그 기도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들은 일생을 살아도 거의 그런 기도를 한 번도 못 드리고 삽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때는 모두 그렇게 우리 자신을 쏟아부으며 주 앞에 부르짖는 때였습니다.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예수 믿은 증거를 발견하게 되고, 나보다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인들도 그렇게 형통하게 하셨는데, 그렇게 좋은 이 사람은 왜 이렇게 고난의 길을 걸었겠습니까? 오웬 목사님이 말한 바와 같이 다윗만큼 구약에서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는데, 이 사람만큼 죄를 지은 사람도 또 없습니다. 이런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그가 비록 끔찍한 죄들을 지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이 사람보다 간절히 찾은 사람이 없기에 하나님이 이를 용서해주시고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비명의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너무 간절하기 때문에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비명의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물에 물 탄 것처럼 술에 술탄 것처럼 드려온 몇 년의 기도는 여러분이 만약에 이런 비명의 기도로 주님께 자신의 마음을 바쳤더라면 진작 응답 되었을 것입니다. 기도에 성의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간절히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기를 결심하고 뜻을 세우지 않으면 이런 비명의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도 빌드업에 참여하고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기도하라는데, 교인 절반밖에 안 합니다. '평소에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왠지 내 눈에는 참여 안 하는 사람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으로 살려고 그러십니까?
이렇게 매일 나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찾는데,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걸고 주님의 말씀이 내려오면 거기에 인생의 고리를 걸어서 그게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매달리며 하나님 앞에서 비명을 지르는 기도의 경지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데도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우리를 위해 드리셨던 것입니다. 기도다운 기도를 해보신 적이 있습니다. 진실한 기도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비명의 기도입니다. 비명은 거짓으로 지를 수는 없습니다. 비명을 지르는 모든 사람은 사람의 도움에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는 비명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 불길에 휩싸인 사람, 높은 곳에서 떨어질 것 같은 사람, 모든 사람의 비명은 목숨이 걸린 비명입니다. 그런 기도를 드릴 때 거기에서 기도의 능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렇게 비명 소리를 지르며 주 앞에 매달리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그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위기에 처했으면 그 비명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비명 소리를 지르며 여러분이 인생의 위기에 처해 있다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상도 못 했던 방법으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기도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비명의 기도를 드려보셨습니까? "하나님!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옵소서."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아멘. 제가 총각 때였습니다. 목회의 부름을 받았는데, 주일학교 부장 집사를 했습니다. 가난해서 전도사도 못 뽑아서 제가 설교를 하며 주일학교를 이끌었습니다. 성경학교 때에는 항상 하루를 교회에 재웠습니다. 그리고 위층에 수백 명이 모이니까 시끄럽습니다. 동네 사람에게 항의도 들어오고 했습니다. 조용히 시키면서 동화도 들려주고, 공과도 가르치고, 뭔가도 보여주었습니다. 한 조각씩 떼어서 한 삼십 명씩 데리고 일곱 번 내지 열 번에 걸쳐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지하실에 기도실이 있었습니다. 조그만 기도실에 빽빽하게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가 기도 인도를 하는 것입니다. (찬송)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쳐 당하셨네. 찬송을 한 서너 번 부릅니다. 애들이 울기 시작합니다.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은 예수님을 두 번 십자가에 못 박은 거다." "우리가 참된 사람으로 살아야 되지 않겠냐?" 애들이 회개를 합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렇게 회개하는 어른을 본 적이 없습니다. 또렷합니다.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또렷합니다.) 애들이 진짜 비명 소리를 지르면서 회개를 합니다. 그래서 얘네들이 지나가고 나면 장판 위를 걸어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땀과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상태에서 애들이 올라가면 그다음 팀이 내려와서 다시 그걸 밤새도록 하는 것입니다. 집사님 두 분이 애들 간식을 주겠다고 왔다가 지하실에서 아글거리는 소리가 들리니까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펑펑 울고 문을 닫았습니다.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둘이 하는 말이 “우리는 애들만도 못해.” “우리는 애들만도 못해.” “우린 저렇게 기도하지 않잖아.”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변치 않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드리는 비명의 기도를 하나님 들으십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남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비명의 기도를 드림으로 주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5. 기도가 하나님 아는 길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3-7)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원수에게 에워싸여 고통받고 있던 이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실 것을 믿었습니다. 심사를 통촉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왕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기도하기를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잔잔한 바다를 지나 아름다운 때가 있지만, 폭풍과 태풍이 불어서 위태로운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주님을 의지하며 부르짖으면 이때에는 평안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저 때에는 위기 속에서 부르짖을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시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오늘 읽은 이 긴 성경 구절을 통해서 시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II. 기도가 하나님 아는 길이다
<기도가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1절과 2절에서 드렸던 기도를 다시 한번 3절에서 반복합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시인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어줄 사람은 이미 멀리 멀리 떠났습니다. 이 시가 언제 쓰여졌는지 확정할 수 없지만, 아무튼 시인이 위기 속에 있을 때는 항상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배신하고, 충성스러웠던 신하들도 자기를 배반하고, 원수의 무리들과 하나가 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하나님이 시인을 연단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희망이 없음을 다윗이 왕이 된 뒤에도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갔습니다. 기도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매달렸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에게는 고난이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쓰디쓴 고통 끝에 언제나 달콤한 열매를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가 하나님을 아는 길이었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A. 하나님을 바람
제일 먼저 그는 하나님을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여전히 그치지 않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의지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는 것을 그분이 아시니 위기를 만날 때 내가 부르짖으면 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종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연을 털어놓는 것은 우리의 감정을 깨끗케 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주위에는 그렇게 따뜻하게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착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에게 사연이 생기고 고난이 닥칠 때 사람이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이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의 소리를 들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흐느끼며 자기의 목소리로 당신의 귀에 속삭일 때 그는 위대한 철학자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본 선지자도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이긴 장군도 아니었고, 수많은 백성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던 위대한 군주도 아니었습니다. 상처받은 한 마리의 어린 양으로 다윗은 하나님 앞에 위기 속에서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높고 낮은 사람이 있지만 높은 하늘에서 하나님이 이 땅의 인간을 내려다보시면 모두 가엾은 인생이오, 당신의 은총이 한 방울이라도 없으면 사라질 목숨들이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여운 사람들이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마음을 누가 느낍니까? 자기의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 이외에 아무도 이것을 느끼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은 여러 주째 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고민하는 것만큼 마음을 태우고 병들게 만드는 근심거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작바작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태우고 병들어가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우리의 심사는 무엇입니까? 결국 고난을 당하고 역경을 겪었지만 시인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갔고, 우리는 시련과 고난을 겪기 때문에 마음이 강퍅해져가고 우리의 인격이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고난이 우리를 바꿔놓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가 우리의 간절한 간구가 우리의 마음을 바꿔놓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소리로 주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울부짖는 영혼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마음으로 삭이지 마십시오. 병듭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그 목소리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인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아침에 주께서 자기의 소리를 들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자기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겠다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아침에 ··· 아침에 ···”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히브리어로 ‘보케르’(בֹּ֭קֶר)라고 하는 이 ‘아침’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매우 특별했습니다. 깊은 밤에도 기도하는 시편에 기록이 나오고, 낮에도 기도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저녁과 밤은 슬픔, 적막, 고요, 외로움, 두려움, 이런 것들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은 희망, 새로운 일, 변화, 혁신, 이런 것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말했습니다. “···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셔서 어제와는 다른 새날을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역사를 뒤바꾸는 위대한 일들을 하나님이 언제 행하셨는지 기억해보십시오. 홍해가 밤새도록 바람이 불고 모세가 기도했지만 막상 물이 갈라지고 희망의 길이 생긴 것은 아침이었습니다. 소수의 무리들이 간구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자,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도 새벽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도 새벽이었습니다. 새벽은 희망이었습니다. 그 전날 밤에 일어났던 상황과 아침에 일어난 모든 상황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아침에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보며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믿음을 따라 아침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굳게 믿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악랄하게 우리의 마음에 빨대를 꽂고 빨아먹기를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귀에 청진기를 대고 우리 속에 있는 소리를 듣기 기뻐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침에 ··· 아침에 ···’, ‘아침에 하셨던 하나님의 위대한 일’, 어제저녁에는 슬픔과 고통 속에 잠들었을지라도 아침에는 새날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희망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희망으로 절망하는 자신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가 아침입니까? 물리적인 아침이어야 할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언제든지 여러분이 모든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그날, 그 시간, 그리고 이제까지는 내가 슬픔과 시름에 잠겼을지라도 기도하는 이 시간에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꿈꾸지 못했던 위대한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기억되는 그 날, 그 시간이 여러분에게는 아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패한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것도 역시 아침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들은 실패와 좌절과 절망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셔서 물으셨습니다.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 그리고 고기 잡는 비참한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삼아서 예루살렘 교회의 위대한 일꾼들로 쓰셨던 것입니다. 아침에 위대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아침은 언제입니까? 마음을 쏟아붓는 그 시간은 언제입니까? 어제는 슬픔 속에 잠이 들었을지라도 오늘 이 시간은 희망 속에 잠이 깨리라고 마음에 확신하는 그 시간이 언제입니까? 이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아버지 앞에 변화를 기대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다가 마음에 깊이 감동받은 것이 바로 그다음 절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下) 2절에도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라고 나옵니다. 똑같이 기도라고 번역됐는데, 두 단어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앞에 기도는 정말 ‘기도하다’입니다. 그런데 뒤에 기도는 ‘기도하다’가 아니라 ‘늘어놓다‘입니다. 여러분 시편 23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시 23:5 上) 이때 밥상이 '아라크'(עָרַךְ)의 밥상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 베푸시는 것이 반찬 한두 가지 갖다 놓은 게 아니라 왕과 함께 먹는 정찬의 테이블입니다. 수많은 음식들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여기에 그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무슨 뜻이냐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행진할 때 항오를 맞추는 것, 대열을 맞춰서 나란히 걷는 것, 싸울 수 있는 무기들을 쭉 배치하는 것, 여러 개의 그릇을 올려놓아서 줄을 맞추고 행을 맞춰서 진열하는 것, 이런 것들을 모두 ‘아라크’(עָרַךְ)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는 번역이 의역입니다. 정확하게 하면 “아침에 나는 주님께 사연을 낱낱이 고하고 희망을 갖겠습니다” 이렇게 번역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마” 하며 울먹이면서 집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엄마가 깜짝 놀랍니다. “어, 우리 딸 왜 그래?” 그리고 안아주면 애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울음을 좀 그친 다음에 낱낱이 고자질하기 시작합니다.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고, 내가 너무 억울했고, 선생님한테도 섭섭하고, 친구들한테도 섭섭하고, 막 얘기를 합니다. 이 아이는 엄마가 당장 몽둥이 들고 학교로 달려가서 친구들을 쥐어 패주기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을 쏟아놓을 때 자기 마음을 그 뱃속까지 알아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엄마이기 때문에 학교 끝나자마자 억울한 마음에 집으로 달려와서 엄마 치마폭에서 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에 대고 그동안 억울했던 모든 일을 엄마에게 고자질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여기에서 시인이 그리고 있는 그 그림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이 시인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었고, 악인들이 자기를 에워쌌고, 그리고 더러운 인간들이 자기를 박해하고 시련과 고통 속으로 데려갔습니다. 이 시가 언제 쓰여졌는지 알 수 없지만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사울에게 추격을 당하던 그때라고 시간을 설정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된 다음에 반역의 무리들에게 에워싸여서 고통을 받던 망명의 시기라고 설정을 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그는 억울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평생 같이하던 동지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자기의 대적의 편에 붙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자신 혼자 외롭게 광야에서 이 굴에서 저 광야로 도망을 치는 신세에 불과했습니다.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의지할 가족들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고, 아버지는 자기를 지독하게 편애했고 그리고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형들은 어떠한 형제애도 이 다윗에게 보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따돌림을 당하였습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말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었겠습니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큰일을 맡기셔야 했습니다. 큰일은 아무나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신이 큰 그릇으로 준비되어야 했습니다. 그 영혼이 큰 그릇으로 준비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여 연단과 고난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망가진 인간이 되었을 텐데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그는 성숙해 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당신의 위대한 이스라엘 나라를 맡기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사연을 하나님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구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 앞에 당신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연을 누구에게 낱낱이 고합니까? 여러분의 억울하고 힘든 사연을 누구에게 모두 말합니까? 신앙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사연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외적의 침입을 받아 나아가 백척간두에 섰을 때 히스기야 왕이 외교 문서를 가지고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한 것도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는 때였습니다. 한나가 브닌나의 부당한 대우로 고통을 받으며 죽을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성소에 올라 미친 여자처럼 마음을 쏟고 중얼거린 것도 하나님 앞에서였습니다. 그분 앞에서는 못할 말이 없었고 숨길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모두 낱낱이 아뢸 그때에 희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다. 바라리이다.’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희망을 두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는 나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나감으로 결국은 이 시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고 주님께 낱낱이 고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하나님을 알 때
두 번째는 하나님을 알 때입니다. 그는 4절에서부터 5절까지 꽤 길게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악인들을 만나고 그 악인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 시인은 거꾸로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작은 믿음을 가지고 조그마한 어려움을 만나고 내 뜻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안 계시나 보다.'라고 의심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종종 그런 것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어느 고기 집에 갔는데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우리는 정직합니다.’ ‘잘라드린 고기를 다시 달아보셔서 1인분에 5g 이상 모자라면 1인분을 즉시 더 드리겠습니다.' 믿을 만합니다. 그램(g) 수라고 나온 것을 실제로 달아보면 경우에 따라서 3분의 2밖에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심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종종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 위해서 바라보시는 게 아니라 한번 저울에 다셔서 “네 믿음이 이것인 것을 한 번 보아라." 하고 저울의 눈금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종종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꽤 묵직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했는데, 달아보니까 깃털 같습니다. 속이 빈 믿음이었습니다. 그렇게 교회에서 여기저기 얼굴을 보이고 나타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처럼 하더니 진짜 어려움이 와서 한번 달아봤더니 돼지고기가 한 근이 아니라 깃털이었습니다. 그걸 누구 보라고 하나님이 달아주시는 것입니까? “보아라. 이것이 너의 믿음의 무게니라."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종종 우리를 다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는 저울이 무엇입니까?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복 주시고, 모든 것을 주시고, 모든 것을 갖게 하시고, 잘 나가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달아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네 뜻대로 안 되는 상황, 네가 원하지 않는 환경, 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을 통해서 너의 믿음이 이것이니, 보아라." 하고 하나님이 다시는 것입니다. 그걸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측정하시는 것입니다. 그 측정에서 여러분이 어떤 평가를 받고 살아오셨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시인을 이때에 하나님이 달아보셨습니다. 그랬더니 이 시인은 아주 묵직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서 이 시인이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사심이 없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시인은 악인들을 보면서 두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악을 미워하시고 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악을 미워하시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만한 자들을 하나님이 버리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오만한 자들이라는 것은 그냥 교만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만의 원인이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무시하는 마음 때문에 사람들을 향하여 오만불손해진 사람을 가리켜서 ‘오만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인의 끝판왕입니다.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마음속에 ‘하나님, 뭐 그런 존재가 있을 수가 있겠어?' '있다고 한들 그는 내 밑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폭압을 행하고 그리고 압제를 행하고, 사람들을 구타하고, 선한 사람을 핍박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양심의 기능이 마비된 사람들입니다. 세계관이 전도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오만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경험하면서 보니까 하나님이 그런 오만한 자들은 잠시 흥왕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버리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도 그 확신을 더욱 굳게 하였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악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잠시는 악이 번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히 악이 번성할 수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자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을 역사적으로 박해한 사람들은 거의 거짓으로 박해했습니다. 박해자들이 아주 즐겨 사용하는 것이 거짓입니다. 초기 기독교를 보면 어떻게 로마가 기독교를 모함했느냐 하면 ‘기독교인은 근친상간을 하는 집단이다.' 무슨 근친상간입니까? 남녀가 모두 모여서 서로 사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처음 만난 사람도 여자는 자매라고 부르고, 남자는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근친상간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에게는 식인(食人)의 풍습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겠습니까?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바 나의 피니 곧 언약의 피니라 이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 ‘또 떡을 떼이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바가 나의 살이니 이것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 이 말씀을 직역해서 ‘기독교인은 만날 때마다 인육과 인혈을 먹는다'라고 거짓으로 악선전을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그냥 헐뜯기 위해서 거짓말로 끊임없이 모함을 한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 박해의 역사입니다. 시인 때에도 이미 이런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살아온 인생을 보니까 그렇게 거짓말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결국은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위기 속에서도 그는 악을 악으로 이기는 대신 악을 선으로 이길 결심을 합니다. 하나님 의지할 마음을 갖고 거짓말하는 자를 심판하실 날을 기다립니다. 잔인한 자를 싫어하시니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를 싫어하신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잔인무도한 사람들이 원수들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박해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역시 박해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끔찍하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방법으로 나라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고문하고, 죽이고, 손톱을 뽑고, 인두로 가슴과 등을 지지고, 머리를 지지고, 눈을 뽑고, 이빨을 부러뜨리는 악행들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불의한 세상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도 그런 악랄한 고문들이 행해졌습니다. 일제시대 때 그리고 독재정권하에서 최근까지도 우리들이 경험했던 바입니다. 그걸 어떻게 사람 사는 세상 나라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악랄한 사람들은 모두 처단돼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결국은 마귀가 세상 나라를 하나님 나라 대적하여 이루어 가는 방법입니다. 사랑과 감화 그리고 자비와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사뭇 다른 질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악인을 미워하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는 것 이외에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고난을 통해 배웠던 것입니다. 더욱이 이 시인은 선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악을 행하실 수 없으며 당신의 선을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시고 당신의 선 속에 우리들이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고난과 시련의 악은, 악인들이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그 악은 칠판에 불과했고, 하나님은 그 검은 칠판에 선하신 글씨를 쓰셨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이 있기에 빛나는 별이 있는 것처럼 이 시인은 고난의 때에 악인들의 무도함을 보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역으로 배웠습니다.
사랑의 여러분! 선하신 하나님을 찬송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했던 때를 회상해 보십시오. 모두 죽을 것 같이 외롭고 힘든 때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했고, 절망이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으니, 친히 시인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심으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고, 그 지식으로 시련을 넉넉히 이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예배할 결심
마지막입니다. 그는 예배할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7) 악인들이 처처에 횡행하고, 악랄한 박해와 모함들이 가득하고, 거짓으로 자기를 짓밟는 그때에 시인의 영혼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하는 결심이었습니다. 여러분, 코로나 팬데믹이 2년이 넘어 3년이 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우리의 예배생활이 흐트러졌습니다. 처음에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지 못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편안한 인터넷 예배가 우리의 게으름과 짝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아직까지도 교회에는 교인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 기저질환이 있어서 너무너무 두려우신 분들, 집에서 예배드리십시오. 그런데 어쩌면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서 예배드리실지도 모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사유가 아무것도 없는데, 이제는 사회적인 제약도 없는데, 단지 그것이 편하다는 이유로 인터넷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분들, 오늘 제가 설교자로 말합니다. 회개하십시오. 당신의 게으름입니다.
제가 직장 다닐 때 같은 부처에 근무하는 한 동료가 와서 자기 간증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간증했습니다. 잊히질 않았습니다. 육군에 장교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비행단 소속이었다고 했습니다. 비행기가 큰 비행기가 아니라 아주 작은 비행기를 타고 정찰을 하고 있었는데, 그 비행기가 사고가 나서 숲에 떨어졌습니다.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은 죽었습니다. 자기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의식을 잃고 온몸이 다 가루가 되다시피 해서 일 년 반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운 채 연명하면서 치료를 했는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일 년 반이 끝난 그때 처음으로 아직 온몸에 붕대도 풀지 못한 채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간신히 휠체어를 타고 예배당에 들어올 때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드리고 싶었던 예배였던가!' 죽음의 사선을 헤매면서 그렇게 사랑했던 하나님께 도저히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강제적으로 떼어져 있다가 일 년 반 만에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가 드리는 그 예배가 너무 감질이 났다고 합니다. 꽤 긴 시간 예배를 드렸는데 너무 떠나기 싫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의 표징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별로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지금 젊은 분들 가운데서도 아예 이 기회에 온라인 교인이 된다고 하는데, 온라인 교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열린교회 교인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계속하면 여러분은 영적인 유목민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스스로 강한 사람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핏방울 끝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고, 목회자와 사랑하는 성도들의 눈물방울에 겨우 떠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 인터넷 예배드립니까? 변명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 왜 예배할 결심을 하지 않습니까? 예배당보다 더 위험한 음식점과 술집 그리고 유흥가, 극장가를 비롯해서 여러분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곳은 수없이 드나들면서, 왜 그렇게 예배당이 위험한 곳이 되었습니까?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습니까? 두려우면 나오지 마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평생 그런 두려움 속에서 예배당에 못 나오고 종신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젊은 분들은 결코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백신을 세 번 네 번 맞고, 그리고 코로나에 두 번 세 번 걸렸다 나은 사람도 교회에 안 나옵니다. 그게 믿음입니까? 그게 신앙입니까? 겨우 그것입니까?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이 여태까지 목양을 받고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살아왔던 것입니까? 그렇게 예배를 드릴 때 여러분이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한번 보십시오. 지금도 택배 종소리가 울리고 있습니까? 파자마 바람으로 예배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예배할 결심이 서기는 했습니까? 다윗은 고난 속에서도 예배자가 되기로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예배하는 것 이외에 그에게 아무 소망이 없었습니다. 시련 속에서 그는 폭풍과 같은 환란을 만나면서 아버지 앞에 예배할 결심을 이야기했습니다. 한 번 예배드리고 죽는 것을 한 번도 예배드리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보다 사모했습니다.
부끄럽지 않습니까? 얼굴을 들 수 있습니까? 무슨 면목으로 하나님을 봬오려고 하십니까? 게으름입니다. 영적인 싫증입니다.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편의를 신앙의 규칙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위험해지는 상황이 되면 제가 자진해서 나오지 말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그렇게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여러분이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고, 텔레비전에 앉아서 파자마 바람으로 뒹굴며 예배를 드립니까? 그게 시청입니까? 예배입니까? 예배드릴 수 없는 시간에는 그것이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산꼭대기에서 근무할 수밖에 없는 군인들이 드리는 핸드폰의 예배는 큰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사선을 오가는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수술하다가 잠깐 짬을 내어 수술실 구석에서 핸드폰으로 예배드리는 의사들, 훌륭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경우에 속합니까? 파자마 바람으로 슬리퍼를 끌고 맨발로 예배드리고, 여러분이 핸드폰으로 교회에 송금이나 하면 그게 송금이지 헌금입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언제까지 끊임없이 상황에 핑계를 대고 예배자가 되기를 거절하겠습니까? 진짜 예배를 드려야 되겠다는 결심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 시인을 보십시오. 좋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화평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오만한 자들에게 박해를 받고, 거짓을 좋아하는 자들에게 핍박을 받는 때였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 결심합니다. 3절부터 6절까지는 마치 하늘로 말하면 캄캄한 밤중이고 번개와 낙뢰가 떨어지고 우레가 칩니다. 폭풍이 불고 비가 쏟아지는 밤입니다. 그러나 7절은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아침이 밝아옵니다. 그리고 해가 청명합니다. 시인은 새 마음이 되었습니다. ‘고난과 위기 속에서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내가 경배하러 갑니다.' ‘나는 예배할 것입니다.'
(찬송)
주님께 나와 경배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배드림이 기쁨됩니다
아멘.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다가 예배의 감격을 경험하신 분 있으면 교회로 사연을 보내주십시오. 시상하겠습니다. 그 대신 그렇게 보낸 다음 주에는 예배당에 나오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데도 그렇게 감격에 넘치는 예배를 드리니 교회에 오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뭐라구요? 예배의 감격을 온라인으로는 느껴본 적이 없으십니까? 그러니까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시인은 고난 중에 예배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음에 뜻을 세우십시오.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십시오. 주님을 만나기를 예배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6. 기뻐하며 사는 길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시 5:8-12)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원수들에게 에워싸인 가운데 시인이 마지막으로 결심한 것은 예배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라고 시인이 결심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시인은 하나님 앞에 그런 시련과 환란으로 가득 차고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II. 기뻐하며 사는 길
우리에게 오늘 가르쳐주는 것은 '기뻐하며 사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A. 주의 길을 곧게 함
시인은 제일 먼저 주의 길을 곧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말합니다. 시인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었고 매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었으며 인생의 위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 앞에 간절히 바라는 것은 주의 의로 자기를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니 이렇게 불리한 악인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자신을 통촉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심을 보여주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을 벌하시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자기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이 위기 속에서 인도해달라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 때문에 의의 길로 인도해 달라고 하는 이 기도가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우리는 때만 되면 항상 자신이 처해 있는 어려운 형편과 사정 때문에 결국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한다고 변명을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으니 하나님은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옵소서”이렇게 악인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고통을 받으면서 시인의 눈은 하나님의 의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악인들에게 에워싸인 가운데 악을 본받거나,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원수들처럼 악을 행하여 악을 악으로 갚는 대신, 그는 의로우신 주님의 편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시류를 거슬러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장마철이 되면 하천에 고기들이 갑자기 많이 늘어납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은 고기들은 물로 끊임없이 장마철에 떠내려갑니다. 배를 허옇게 하늘에 드러내놓고 물에 둥둥 떠내려갑니다. 고기를 잡는데 어떻게 잡는지 아십니까? 풀섶을 뒤지면서 족대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널찍한 삼태기 같은 것을 물길 위에다 놓고, 야트막한 물에다 놓고 기다립니다. 물이 막 거세게 내려갑니다. 물고기들이 기가 막히게 그 물을 거스르면서 삼태기 속에 들어가서 오글오글 모입니다. 그걸 건져냅니다. 잠깐 잡으면 반 양동이 이상 잡을 정도로 그렇게 고기들이 많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신앙을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환경의 핑계를 대며 시간의 물결에 떠내려가고,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물결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수 때문에 오히려 의의 길을 가기를 원했고, 그 의를 간절히 구하며 하나님 앞에 살고 싶어 했습니다. 환경과 여건에 핑계를 대지 말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시류를 거슬러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간구하기를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라고 주 앞에 호소합니다.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식에 관한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곤란을 많이 겪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보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그래서 맑은 정신이었을 때는 옳다고 생각하고 총명한 길을 잘도 찾던 사람이 어려움과 시련이 겹치고 고통의 날들이 계속되면 눈이 흐려져서 옳은 길이 아닌데 옳다고 생각하고, 굽은 길인데 그 길을 곧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비록 원수들에게 에워싸였으나 영안까지 흐려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주님의 길이 자신의 눈앞에는 곧게 나기를 원했습니다. 인식론적으로 하나님의 길이 아닌 것을 주님의 길로 오해하지 않도록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는 간구가 포함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것과 함께 더 호소력이 있는 것은 바로 두 번째 해석입니다. 그것은 “주의 길을 곧게 하소서”라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 “하나님의 법이 법대로 시행되는 것을 보여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주의 길을 굽게 하지 말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의 길을 굽게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보면 형용모순입니다. 주의 길이라면 굽을 수가 없고, 굽을 수 있다면 주의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이냐면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착각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인이 많으면 그 악을 행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건널목을 혼자서 무단횡단할 경우에는 두려운 생각이 들지만 한꺼번에 한 50명이 함께 건널 때는 왜 그런지 그렇게 무단횡단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이유와 안전감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다수가 그 길을 가기 때문에 그것이 길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고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은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가도 그것은 옳은 길이 아니고, 한 사람도 가는 길이 없어도 하나님의 진리는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그 길은 밝게 빛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길에 대해서 가르칠 때 좁은 길을 가는 사람과 넓은 길을 가는 사람을 대조해서 설명하시면서 “이 길은 좁고 협착하고 저 길은 넓고 사람이 많이 가는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시인은 하나님 앞에, 상황과 관련해서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원수들이 나를 에워싸고 악인들이 처처에 횡행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너무나 많은 악을 오랫동안 허용하심으로 그 길이 마치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거나 모든 사람이 걸어가도 아무 염려가 없는 길인 것처럼 오해하게 되는 상황은 벌어지지 말게 해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바른길을 인식하고 또 그 바른길이 모든 사람에게 바른길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되도록 그렇게 이끌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악인들을 앞에서처럼 다시 한번 고발합니다.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 심중이 심히 악하며 ···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 혀로는 아첨하나이다"(시 5:9) “···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시 5:10) (이렇게) 낱낱이 앞에서 언급하지 못한 내용들까지 고발하며 하나님 앞에 탄원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지만 정신은 원수들에게 굴복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눈을 고정하고 믿음으로 이 모든 상황을 극복하며 나아가 결국은 주의 길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환경에 쉽게 굴복하고 기도 생활을 포기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악을 행한다고 신앙의 양심을 버리고 쉬운 길을 가려고 하는 마음과 일맥상통하는 마음입니다. 환경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는 젊음이 넘쳐 쾌락의 유혹에 빠지고 감각에 이끌려서 경건생활을 하기 싫습니다. 나이가 들면 가정으로 직장으로 너무 바쁜 일들이 많아서 경건에 매진하기 힘이 듭니다. 나이가 들면 이제 시간도 있고 마음의 여유도 있는데, 문제는 마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 나이가 들면 그럴 마음이 있는데, 교회 갈 기운이 없습니다. 무릎은 써금써금하고 관절도 망가져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휠체어를 타야지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됩니다. 결국 우리는 매일매일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제대로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서 상황에 굴복하며 인생을 사는 동안에 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이 시인이 보여준 인생의 대안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그리고 모든 시류를 거스르면서 자기의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결코 절망에 의해서 설득되지 않고 신앙으로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힘입니다. 그렇게 설득되는 깊이가 신앙의 깊이입니다. 이 시인은 사방으로 에워싼 원수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주의 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상황에 탓으로 돌리며 덮어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시렵니까? 열여섯 번의 설교가 끝나는 날입니다. 설교는 끝났지만, 내 설교는 끝났지만, 이 설교는 여러분의 양심 속에 살아서 여러분에게 외칠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들었으니 네가 어떻게 살 것이냐? 네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너 자신의 삶을 개척하며 살 것이냐? 물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 편에 서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상황을 핑계하지 말고 이것들을 딛고 일어서서 반드시 이기고 주님의 목전에 곧은 길을 따라 걸어가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기뻐하며 사는 자
두 번째는 이러한 위기 속에서 기뻐하며 사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11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시인은 자신이 이런 환란 속에서 주님께 피해 보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시인은 자신의 주변에서 경건한 사람들이 어떻게 악인들에게 에워싸였을 때 억울한 일을 만났을 때 주님께 피하는 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결국은 항상 똑같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환란 속에서 주께 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삶의 진정한 기쁨을 회복하게 된다고 하는 것을 그 모든 경우를 통해서 똑똑히 보았던 것입니다.
또 다른 시편에서 같은 상황을 놓고 다윗은 말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19)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 31:20)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까마귀 떼처럼 떠들고 이 시인에게 결국은 그 구설의 다툼으로 괴로움을 주고자 했습니다. 원수들은 에워싸고 있었고, 친구들은 떠났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입은 손해도 자신이 물어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시인은 사람에게 희망을 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는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인 동시에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주님께로 피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은밀한 곳에 시인을 숨기시고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셨으며 비밀스러운 장막에 감추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리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받을 수 없었던 하나님이 쌓아 두신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까마귀 떼처럼 떠들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진실은 밝혀져 시인은 억울함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주께 피하던 시인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살면서 매일매일 우리는 우리의 결심과 배치되는 상황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우리는 항복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결심하고 은혜를 받았을 때에 우리에게 있었던 기쁨을 반납해 버립니다. 그리고 모든 선한 의지는 다시 꺾이고 원점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불신앙과 방황의 늪에서 다시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변함없이 기쁨을 유지하면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 20여 년 전에 대학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그때 설교를 들었던 분을 그 후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억도 안 납니다. (물론 본인은 기억하지만) 그런데 “목사님 설교를 처음 들었을 때 받은 인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난 무슨 좋은 얘기를 할 줄 알았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라든지 뭐 등등 그랬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생전 처음 학교에서 들어가서 목사님 설교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때 받은 첫인상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게 뭐요?” “저 사람은 아무에게도 속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영악하게 보였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그걸 칭찬으로 압니다. 저는 순수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순진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결국 순진과 악은 종이 한 장 사이의 차이입니다. 진정한 순수함은 순진하기 때문에 순수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면서도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내면의 품질이 순수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순진하지도 않고 순수하지도 않거나, 아니면 순진할 뿐 순수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파도 앞에 곧 무너질 모래성 같은 순진함이고, 그 순진함을 순수성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이 시대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샅샅이 알아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대신 그 아는 것에 휩쓸려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들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더 강하게 유지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그게 진정한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살면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목양을 하고 교회를 해오면서 여러 번 저의 인생을 바꾸셨지만, 그중에 한 번이 <염려에 관하여> 시리즈를 설교하면서였습니다. 물론 설교를 하면서 내가 바뀐 것은 아니고 이미 그 전에 바뀌어 있고 그것이 설교로 나타났지만, 어쨌든지 간에 그 설교가 내 마음속에서 리바이벌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부터 저는 염려를 내려놓고 이제까지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너무나 비관적이고 일어나지 않는 일들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내 삶이 위협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 말씀으로 저를 깨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때 은혜를 받은 우리들의 마음에는 그 이후로 결코 모든 염려가 하나도 없는 삶을 사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를 설교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진정으로 명랑한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하늘과 대지 사이에 살면서 균형을 잡음으로써 가능한가 하는 것을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경을 설교해서 여러분에게 그것을 이해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얼마나 알아듣는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설득했고 피와 살을 갈아 넣어서 나는 그 시리즈를 설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대로이지만 어떤 사람은 인생이 바뀌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내가 명랑하게 살았는가? 맞습니다. 항상 명랑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명랑함이 위협을 받지 아니하였는가? 왜 위협받는 때가 없었겠습니까? 너무나 자주 자주 위협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혹은 남편이 아내 때문에 아내가 남편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고, 부모는 괜찮은데 자식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가정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 사업의 문제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고 또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흐트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삶의 명랑함을 헤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용기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내가 어떻게 찾은 명랑함인데 감히 너 따위가 내 인생의 명랑함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호통을 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거미처럼 달라붙으려고 하는 염려와 근심, 삶의 명랑함을 갉아먹는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모든 우리의 마음을 파고들어 오는 이 거미와 같은 것들을 과감하게 떨쳐내 버리면서 ‘네 것들이 감히 어떻게 하나님 때문에 내가 되찾게 된 삶의 명랑함을 훼손할 수 있겠느냐.'라고 손을 흔들어서 거미를 떨어뜨리고 발로 밟아서 문질러서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기대를 사람을 향해 갖지 않는 것은 상처를 덜 받는 비결입니다. 무슨 기대를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합니까? 대지에서 결국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근거는 대지가 아닙니다. 하늘(heaven)입니다. 하늘(heaven)의 근거를 가지고 대지의 우연한 삶을 구축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하는 신앙의 정신을 가지고 그것을 형상 삼아서 시간을 쪼면서 나의 인생이라는 것을 조각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하노라면 무슨 일은 안 만나겠습니까? 바위가 내 마음대로 조각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 모서리인 줄 알고 힘차게 내려친 망치가 엄지손가락을 때려서 피가 나는 경우는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조각을 멈출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나의 작품이니까, 내 인생이라는 작품을 만들어감에 있어서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나의 숙제이고, 그것을 위해서 내가 태어났고,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내가 여기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있어도 내가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한 인간으로 태어나 책임성 있는 주체로 내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삶의 명랑함을 잃어버리거나 다시 염려와 근심에 삼킨 바가 될 때, 그때 중요한 것이 마음을 지키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무시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찾은 이 명랑함이 그까짓 사람의 말 한마디,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삶의 질서 하나가 어긋났다고 해서 이 모든 것들이 다 뒤틀려버리는 것 같은, 그렇게 해서 삶을 포기할 것 같은 그런 생각으로 나를 데려갈 수 없습니다. 그거는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닙니까? 그까짓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까짓 것들이 감히 내 인생을 뒤흔들어 놓고, 나로 하여금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원칙들을 훼손하게 만들고, 거기에 쉽게 굴복하여 이전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깊이 있는 선한 의지의 결단이 물거품이 되게끔 만들 정도로 그렇게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까? 무엇을 기대하는 것입니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자신을 상심시킨 환경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을 응답입니다. 그리고 설령 자기의 뜻대로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히 된 일이지 자기가 염려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은 아닙니다. 염려를 한 들 키를 한 자나 더 길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목숨의 길이를 한순간이라도 연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쓸데없는 것은 내던져버리고 믿음으로 한 번 붙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삶의 명랑함을 유지하며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난 채 자유로운 영혼으로 주체성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한 거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 이외에는 무엇보다도 여러분을 앞서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이라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육체와 영혼을 아울러 모두 통틀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고 나서 그다음에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것이고, 자기가 살고 나서 사람들과의 관계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살지도 못하면서 무슨 해야 할 일이 그렇게 많습니까?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인은 결국은 아무 환경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 기도를 드리는 순간에도 원수들은 자기를 에워싸고 있었고, 근거 없는 비방과 악한 말로 자기를 모함하고, 그리고 명예를 실추시키고, 고통의 고통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이 바뀜으로 말미암아 기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대신에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바로 하나님께 피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한다는 사실을 상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이보다도 더 괴로운 때에 결국은 주님께 피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으며 아버지 앞에 살았던 것입니다. 결국 시인이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보호였습니다. 원수들이 아무리 에워쌀지라도 결국은 나의 생명은 주님의 손안에 있고, 그 생명 싸개로 감싸서 나를 주님의 은혜로 보호하시니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주님의 보호 때문에 영혼이 기뻐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주님의 이름을 사랑할 수 있었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사랑하고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은 수시로 땅에 떨어지는 자신의 이름 때문에 가슴 졸이고, 명예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의 선이 이기실 것을 굳게 믿기 때문에 잠시 악인이 횡행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세상에 종말이 온 것처럼 낙심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 것이라는 굳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즐거움으로 가득 찬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절망의 설득을 받는 대신 희망으로 설득되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서 사는 사람들이 항상 누리는 즐거움인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로 올바르게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기쁨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후회할 기쁨의 삶을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후회할 리가 없는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쁨은 행복의 원천에게서나 오는 것인데, 그 행복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면서 원천적인 기쁨에 참여하며 그것을 누린다고 하는 것은 이거는 말하자면 명제 모순입니다. 명제 모순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결국 그 모든 기쁨의 원천을 떠나는 것인데, 그걸 떠나는 사람이 그런 기쁨을 누린다는 그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샘물을 버리고 멀리 멀리 도망가면서 목을 축였더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것을 터득한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터득했습니다. 떵떵거리고 잘 살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아첨하고 충성할 때, 그때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에게 에워싸여서 외로운 날에, 아무도 의지할 리가 없던 그날에, 내 부모도 자기를 버리고, 아내도 버리고, 자식도 자신을 배신하던 그런 인생의 고난의 때에, 시인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난을 받으면서도 기쁨으로 사는 희망의 길을 배웠던 것입니다. 절망에 의해서 설득되었더라면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사망의 골짜기에서 묻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육신으로 지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기를 위로하시는 것을 터득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그 기쁨은 사실 환경 때문에 염려하는 염려와 우울함보다도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을 배우면서 오히려 어둡고 칙칙한 인생의 현실을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기쁨의 광채를 쏟아내는 배경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누구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신앙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지금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은혜로 지켜주심
마지막으로 은혜로 지켜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시인은 (12절에서)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시 5:12) 찬송의 시를 올림으로써 이 5절을 끝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는 안타까운 기도로 5장을 시작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이 고난의 시를 끝냅니다. 얼마나 놀라운 결말입니까! 결국은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원수들을 고발하고, 그리고 은밀한 곳에서 자신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터득하며 그는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했습니다. 절망에 설득되는 대신 희망에 설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난 속에서도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 잇대어 살아가는 삶의 비밀을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반드시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다시 한 번 체험했습니다. 이 시편에서 의인과 악인의 개념, 다시 말해서 시편에서 말하는 인간과는 다른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좀 다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모순되게끔 다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성경에서 바라보는 인간관이 인간 바깥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라면, 이 시편은 인간 내면의 세계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다른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의인이고 어떤 사람이 악인인가 하는 것을 대체로 그의 삶을 자료로 하여 판단을 하지만, 이 성경에서는 내면의 결이 어떻게 악인과 의인이 다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결'이라고 하는 것은 내적인 구조입니다. 내적인 구조가 어떻게 다른가에 의해서 악인과 의인이 판명이 나는 것입니다. 물론 의인은 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이고, 악인은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이 성경 바깥에 있는 다른 책들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특이한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런 악인도 결국은 의로운 점이 없는 악인이 없고, 의인도 완전히 악이 없는 의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시편에서 말하는 의인은 진짜로 일점일획의 율법도 어긴 적이 없이 살아온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이 마음의 결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주님께 피하는 사람입니다. 시편을 기준으로 볼 때 율법을 아주 잘 지켰는데 마음으로 하나님을 파고드는 의존의 정서가 없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산 악인으로 분류가 되고, 시인처럼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는 마음의 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부도덕하기는 하지만 의인으로 분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의존, 이것이 바로 의인과 악인을 갈라놓는 지점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신앙의 최고의 전범(典範)으로 삼았던 인물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의 무엇을 발견하고 그렇게 감격했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깨어진 심령’, ‘통회하는 마음’,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 그것을 다윗이 전범(典範)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모본(模本)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그토록 진리를 찾아 헤맸던 플라톤의 철학에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존경했던 플라톤에게서도 찾을 수 없었던 그 진정한 행복의 비결이 바로 상한 심령, 깨어진 마음, 그리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마음의 산 제사, 그 애끓는 기도 속에 결국은 그 행복의 비밀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터득했기 때문에 이 사람을 그렇게 존경하고 일평생 자신의 신앙과 철학의 모본(模本)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도 이 시인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이 시인처럼 이렇게 동시에 살인죄와 간음죄를 한꺼번에 저지른 사람은 우리 중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처럼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 중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이 사람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범죄를 두 개나 연거푸 거의 동시에 저질렀지만, 그러나 이 사람은 의인으로 분류가 되었고, 하나님 앞에 당신의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으로 분류가 되었으니, 이는 이 사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내면의 세계는 산산이 부서져 버렸고 내적인 마음의 구조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으니 하나님 없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제국의 왕이 되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거지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의 마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사람의 많은 죄보다 당신을 의지하는 그 믿음을 소중히 여기셔서 그를 은혜로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많이 경험하면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깊이 터득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비록 고난받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의인에게 복을 주신다고 굳게 믿었고 의인이 되게 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는 믿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방패처럼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사방에 적군들이 포위를 하고 화살을 날려 보냅니다. 창을 던집니다. 그리고 수많은 대적들이 밀려와서 칼을 휘두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 주셔서 그의 사면을 보호하셨고 방패로 그를 감싸주셨으니, 마치 사랑하는 엄마가 어린아이를 보자기로 쌓아주는 것처럼 그렇게 시인을 모든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 싸개로 그렇게 감싸주셨던 것입니다. 어떤 악인도 하나님의 의지를 거슬러서 자기에게 해를 입힐 수 없으며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깊이깊이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은혜로 이긴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은혜가 자기를 호위하고 지켜주어서 어떠한 악인들의 시도도 성공할 수 없게 만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결국은 염려를 극복하고 삶의 우울을 극복하며 그렇게 하나님 앞에 명랑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시인이 어떻게 했을 때 이렇게 해주셨습니까? 시인은 항상 이렇게 살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절망밖에 없는 것처럼 느끼고 하나님 앞에 차라리 죽기를 원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시인이 부르짖을 때에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생명 싸개 속에 감싸시며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이 시인을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결국 부르짖는 자를 돌아보신 것입니다. 시편 5편을 시작하면서 그의 마음은 곧 누르면 터질 것 같은 슬픔으로 가득 찼고 마음은 눈물 보따리가 한가득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의 말을 기울이시고 내 심사를 통촉해달라는 기도 속에서 눈물 보따리는 터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쏟아져서 하나님 앞에 물처럼 흘렀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매달리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하며 주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 시인은 바로 그렇게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시련을 당하고 있었으나, 육체는 괴로웠으나, 마음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능가하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버림받은 외로움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교제가 있었기 때문에 시인은 그렇게 이 고난과 역경을 이기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모든 때에 이러한 은혜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결국 개인 기도의 문을 열 때, 하나님 앞에 자신이 당한 모든 사정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쏟아 놓으며 자신의 마음을 통촉해달라고 빌었을 때, 자신의 중심을 주님께 쏟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했을 때, 모든 피난처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품으로 직진했을 때, 그분의 품을 파고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안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로 말미암아 모든 삶이 바뀌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희망에 설득되게 만들어주셨고, 어떤 절망스러운 상황도 이 시인의 마음을 꺾어놓을 수 없는 마음의 결을 유지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살려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도의 은혜를 사모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열여섯 번의 설교를 여기서 끝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동안 들었던 이 말씀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여러분에게 갈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게 영적 생활을 포기한 채, 마치 죽은 물고기의 시체처럼 시간의 강물에 떠내려가는 그런 존재들이 된다면 어제 죽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미안한 오늘 하루를 살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드십시오. 그리고 희망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어 주님과 함께 이 고난의 늪을 통과하십시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이 원수들로 에워싸인 이 역경 속에서 여러분을 건져주실 것을 굳게 믿으며 희망을 갖고 매달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