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소원
2022년
새해말씀사경회
설교기간 | 2022년 1월 17일 – 1월 19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2년 2월 22일
목 차
1. 기도와 소원(히 5:7) 2022.01.17. 새해말씀사경회 오전1 5
2. 기도와 소원(히 5:7) 2022.01.17. 새해말씀사경회 저녁1 17
3. 소원과 간구(마 15:21-28) 2022.01.18. 새해말씀사경회 오전2 33
4. 소원과 간구(마 15:21-28) 2022.01.18. 새해말씀사경회 저녁2 44
5. 소원과 믿음(막 10:46-52) 2022.01.19. 새해말씀사경회 오전3 58
6. 소원과 믿음(막 10:46-52) 2022.01.19. 새해말씀사경회 저녁3 67
<설교 프레임>
기도와 소원1 2022. 1. 17 새해말씀사경회 첫째날
< 기도와 소원 >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I.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는 신앙적으로 냉랭한 시대에 살고 있다. 뜨겁고 간절한 기도, 피를 토하는 설교(說敎)가 사라진 시대다.
그래서 이 시대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신앙(信仰)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나 미미하다. 무엇 때문일까?
“육체에 계실 때에”라고 했으니, 예수님의 생애 전체에 깃들었던 정신을 가리킨다. 그러나 특별히 겟세마네에서 드리는 기도의 광경을 가리킨다.
이 구절 전체를 설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간구와 소원”이라는 구절을 통해 열렬함이 없는 기도의 원인과 처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II. 기도와 소원
그리스어 본문에서 “소원”(ἱκετηρίας)은 “간청, 탄원”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다. 고전 그리스문학에서도 두 단어는 짝으로 자주 쓰였다.
“간구”(δεήσεις)라는 단어는 원래 “기도, 구함”의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기도와 바람” 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기도하는 행위와 기도하게 하는 마음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A. 소원이란 무엇인가?
“소원”(ἱκετηρίας)은 평범한 희망(希望)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 안에서 끌 수 없는 불길처럼 타오르는 간절한 바램이다.
그것은 이루어져도 좋고 안 이루어져도 괜찮은 일반적인 원함이 아니다.
* 연애하는 자, 죽을 병에 걸린 환자, 명운을 건 사업가
희망하는 것들은 많아도, 이런 불길 같은 소원(所願)은 여럿이 아니다.
마음에서 활활 타오르는 소원은 모든 희망사항들을 능가하는 것이다.
B. 능력이 없는 기도
우리의 기도에 힘이 없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 이유(理由) 때문이다.
a. 소원(所願)이 간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b. 그것을 하나님께 가져올 믿음(faith)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열렬히 기도하던 때를 생각해 보라. 그때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그 소원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올 믿음(faith)이 있었다. 직면한 문제 때문에 더욱 주님께 영혼(靈魂)의 시선을 고정할 수 있었다.
진짜 소원이 있다는 증거는 “심한 통곡(痛哭)과 눈물”이다. 그것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망과 지금 있는 현실 사이의 격차에 고통(苦痛) 받는 마음이다. 그것이 있어야 진짜 소원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 통곡과 눈물로 드리는 기도는 소원의 힘과 크기를 보여준다.
이대로 좋은가? 당신의 소원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그것을 벼릴 것인가?
C. 소원이 없는 이유
기도에 불타는 소원(所願)이 없는 것은 다음 두 가지의 원인 때문이다.
a. 마음의 분산: 의지 미약 b. 믿음의 부족: 하나님을 믿지 않음.
간구하는 소원의 크기는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는 크기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는 신앙적 욕구(慾求)다.
M16의 최대 사거리 3600m, 유효 사거리 550m이다. 표적이 어디에 있을 때 관통되겠는가?
간절한 기도는 큰 소원에서 나온다. 불타오르는 소원(所願)에서 비롯된다.
* 기도생활에 게으름
악한 일에 대한 욕망(慾望)은 정욕에서 나오고, 선한 일에 대한 간절한 소원(所願)은 말씀에 감화를 받음으로써 생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받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라.
말씀의 은혜(恩惠)를 받지 않고는, 누구도 영적인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령의 은혜가 없기에 사랑은 간절하지 않고 소원은 줄기차지 못하다.
당신의 소원(所願)이 무엇인지 생각하라. 그것을 하나님 앞에 놓고 간절한 기도제목으로 삼으라.
III. 적용과 결론
무엇을 원하는가? 아무 희망이 없는가? 어떤 인생을 살기를 소원(所願)하는가? 너무 많은 패배로 전의를 상실했는가?
영적 전투의 전열을 다시 정비하라. 인생의 목적(目的)을 다시 생각하라. 구원의 은혜를 되새기라. 마음의 소원을 불타오르게 하라.
기도와 소원2 2022. 1. 18. 새해말씀사경회 둘째날
< 소원과 간구 >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1-28)
I. 본문해설
삶의 벼랑 끝에 선 여인이 등장한다. 자기 딸의 질병 상태로 고통을 받았다.
두로와 시돈은 페니키아 지방에 속한 항구 도시들이다. 본문에서는 “가나안 여자”라고 하였다(마 15:22).
II. 소원과 간구
A. 간구하는 여인
“어린 딸”이 정신병자가 되었다. 정신병(精神病)에는 세 원인이 있다.
a. 뇌세포의 물리적 문제 b. 정서적 충격 c. 귀신들림
그녀의 딸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특히 귀신(鬼神)을 내어 쫓으신 사건에 대해 알았다.
예수님을 찾아올 수 없었던 여인의 처지를 생각해보라. 놀랍게도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오셨다. 그녀는 기회(機會)를 놓치지 않았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가 그분께로 돌아갈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다.
알맞은 때에 마음까지 절박하게 움직이는 경우는 얼마나 드문가? 간절한 소원(所願)은 아무 때나 생기지 않는다.
* 탕자의 비유
삶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가련한 여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마 15:22)
a.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음.
b.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 믿었음.
그녀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간구했다.
그녀의 인생에 어찌 한 가지 문제(問題)만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오직 한 가지 소원에 마음이 불탔다.
그것은 더러운 귀신이 들린 자기 딸을 고쳐 달라는 한 가지 소원이었다.
그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있어도 결코 만족할 수 없는 큰 소원이었다.
우리 마음이 소원에 불붙을 때 기도는 활화산(活火山)처럼 타오르게 된다. 열렬한 기도는 크나큰 소원에서 나온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인가?
B. 거절하시는 예수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을 것이다. 그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 여인은 소리를 질렀다.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부르며 도움을 간구하였다.
예수님은 아무 대답(對答)도 아니 하셨다. 더욱이 제자들은 그녀를 쫓아 보내고자 하였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마 15:23)
두 가지의 난관(難關)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의 소원은 꺾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여인은 더욱 부르짖어 간구하였다.
난관을 만날수록 그녀의 소원(所願)은 더욱 불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도와주기를 거절하셨다.
“…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
세 번째 난관이었다. 예수님의 차가운 거절(拒絶)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소원(所願)이 너무나 강하게 타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뒤에서 앞으로 달려와 예수께 엎드려 절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마 15:25)
그러나 예수님은 더욱 냉담하셨다. 오히려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 들려왔다. 응답을 위한 네 번째 난관이었다.
“…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6)
예수님은 왜 그러셨을까? 이는 그녀를 무시하셔서가 아니다. 믿음(faith)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당시에도 “개들”(κυναρίοις)은 최고의 모욕적인 표현이었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작은 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떡”은 당시 문맥에서 보면, 주식인 “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무리 열렬한 소원을 가진 그녀라도 이쯤이면 물러설 만하지 않은가?
C. 믿음을 보여준 여인
그러나 그 여인은 여기서 자기 소원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예수님께 매달렸다. 자기의 믿음을 보여드릴 기회로 삼았다.
가엾은 그녀가 이제 어디로 가겠는가? 이미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지 않았겠는가?
마음의 소원이 희망사항(希望事項)을 넘어 간절한 기도가 되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다.
그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 해결을 보겠다는 믿음이다.
그런 마음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은총(恩寵)만을 간절히 바라보게 한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 믿음을 보여주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마 15:27)
비록 멸시받았으나 그녀에게 이루어질 소원(所願)은 지금 받고 있는 수치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이었다. 자기 딸을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음을 굳게 믿었다.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있는가? 주님이 아니면 의지할 곳 없는 처절한 믿음이 있는가? 우리에게 이런 절대적인 의존(依存)의 마음이 있는가? 꺼질 줄 모르는 간절한 소원이 있는가?
이 여인을 보라. 자신의 상황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귀신들려 불쌍한 딸을 고치고자 무엇인들 안 해보았겠는가?
어차피 인생은 문제들로 가득하다. 그것을 주님 앞에 가져오지 않는 것이 불신앙(不信仰)이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解決)받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보길 바라신다.
III. 적용과 결론
그녀는 오직 예수님을 만난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기도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가?
기도제목을 찾으라. 그리고 그것이 간절한 소원이 되게 하라. 그 소원을 따라 열렬히 기도하라!
기도와 소원3 2022. 1. 19. 새해말씀사경회 셋째날
< 소원과 믿음 >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46-52)
I. 본문해설
신자인 우리도 인생에서 수많은 문제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초점이 하나님께 모아지고 소원이 뜨거워져야 한다. 그때 비로소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게 된다.
믿음은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오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고민하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겠다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간절히 간구하게 한다.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 맹인이 길가에 있었다. 그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삶이 있었다. 맹인의 삶, 거지 생활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이러한 삶에 온몸으로 항거하였다.
II. 소원과 믿음
뜨거운 소원이 없이 열렬히 기도할 수 없고, 은혜 없이는 뜨거운 소원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자에게 간구할 은혜를 주신다.
A. 예수님을 믿음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믿었다. 그것은 자기의 비참을 자각하는 믿음이었다.
그는 여리고성 길가에 앉아 있었다. 아무 희망이 없이 살아가던 그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렸다. 예수께서 지나신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소식이 생각났다. 그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우리에게도 기회는 있다. 그러나 항상 돌아갈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막 10:47)
그는 예수님이 자기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다.
아무 희망 없던 처지에서 자신의 삶에서 마지막 희망을 발견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불구에서 고침 받는 것이었다.
그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 질렀다. 그런데 이 말은 그가 거지로서 그 자리에서 동냥할 때 늘 하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의미가 달랐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할 때 그것은 음식이나 의복, 푼돈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 부르짖을 때 이 말은 그런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눈 먼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그는 이제껏 운명처럼 주어진 가난과 불구의 처지 속에서 살아갔다. 그런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기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달라는 믿음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아니 하셨다. 오히려 그분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는 바디매오를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나무랐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거기서 꺾이지 않았다. 불타는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거지생활을 면하고 싶었다. 불구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분의 능력을 믿었다. 그 능력으로 자기의 오래된 불구 상태에서 건져주실 것을 믿었다. 가난이라는 운명을 변화시켜 주실 것을 믿었다.
비록 예수님은 대답이 없으셨고 사람들의 꾸짖음이 심했으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바디매오의 소원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에게 믿음이 있었다. 바디매오는 자기의 모든 소원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 얹었다. 예수님이 자기를 긍휼히 여겨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디매오의 단순하고 간절한 믿음은 응답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맹인인 자기를 부르셨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막10:49)
지금도 인생의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운명과 같은 실패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새 삶을 살게 하신다.
B. 단 한 가지 소원
예수님이 바디매오를 부르셨다. 그때 그는 일어섰다.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로 달려갔다.
예수님은 맹인 바디매오에게 물으셨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는 대답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는 여러 개의 소원을 말하지 않았다.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구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52)
바디매오는 거지 생활을 그만두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그것은 눈을 떠서 볼 수 있으면 해결될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 받고 싶었다.
당신 삶의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운명에 얽매인 채 자유도 없이 살아가게 하는 문제가 무엇인가? 그 한 가지 소원이 무엇인가?
바디매오에게는 맹인인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맹인이 아닌 당신의 절박한 소원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실 때 당신은 무슨 소원을 아뢸 것인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지 않은가? 믿음을 가지라. 그 믿음을 보시고 구원해 주신다. 운명과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말라. 운명을 믿고 순응하는 자에게 기적은 없다.
우리의 마음에 불붙는 소원은 믿음의 화로에서 활활 타오른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으로 불붙여진다
III. 적용과 결론
실패와 좌절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던 삶에서 돌이키라. 그런 삶은 낙심하고 포기하는 마음을 먹으면서 진짜로 운명처럼 되어 간다.
여리고성의 거지에게도 예수님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당신에게는 왜 없겠는가? 그를 믿으라.
마음의 소원을 불타오르게 하라. 그분과 함께 자유로운 삶을 개척하라.
기도와 소원1 (2022.01.17._새해말씀사경회_오전)
1. 기도와 소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녹취자 : 조경훈
Ⅰ. 본문 해설
오늘날은 신앙의 열렬함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애끓는 기도도 없고 불타는 전도도 없고 피를 토하는 설교도 사라져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앙은 사람들의 삶에 별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의 모습이 따로 있고 살아가는 모습이 따로 있습니다. 고민은 하지만 고민하는 것만큼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인생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괴롭지만 괴로운 것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지는 않는 시대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많은 메시지가 담겨있는 5장 7절 전체를 설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에서 한 단어를 여러분들에게 설교함으로써 이러한 신앙생활의 난관을 헤쳐 나갈 길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라고 했으니 이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을 입고 살아계셨을 때’ 라는 의미입니다. 5장 7절의 그림은 예수님의 전체 생애가 이런 기도 속에 사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와 함께 이 장면이 매우 특별하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기야 평소에 하셨던 예수님의 기도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시던 기도가 뭐가 달랐겠습니까? 평소에는 예수님이 건성건성 기도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진심으로 기도하셨다고 말할 수 없으니 기도의 정신이 예수님 생애 전체를 지배했던 것입니다.
Ⅱ. 기도와 소원
오늘 본문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도와 소원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A. 소원이란 무엇인가?
그리스어 성경에는 ‘데에세이스 데 카이 히케테리아스’(δεήσεις τε καὶ ἱκετηρίας) 라고 돼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정확하게 옮기면 앞에 있는 ‘간구’ 는 ‘기도’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히케테리아스’ 라는 단어는 번역하기가 참 어렸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petition, ‘탄원’이라고 번역한 영어 성경도 있고 supplication, ‘간구’라고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소원’ 이라는 것은 우리말 사전적으로 보면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혹은 ‘바라는 바 그 자체’ 를 가리켜서 소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소원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면 그냥 단순한 바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바라는 바는 있을 수 있습니다. 사투리지만 ‘바램’ 이라고 쓰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바램은 바라기는 하지만 안 이루어져도 어쩔 수 없는 종류의 바램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희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라는 바를 가리켜 희망사항이라고 말합니다. 희망사항이 모두 소원은 아닙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들, 바라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건 희망 같은 것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정입니다. 원하고 바라는 바는 많이 있지만 진정으로 가슴에 불타오르는 소원은 별로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많습니다. 명품을 수집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무엇인가 육체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면 나름대로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소원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남성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요즘 사랑은 3초 안에 결정이 난다고 합니다. 3초 안에 화학반응이 일어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푹 빠져서 열렬하게 구애를 합니다. 연애감정에 불타고 있을 때 그의 간절한 소원은 다른 것은 눈에 안 들어옵니다. 오늘 일을 나가서 몇 푼을 더 벌고 뭘 먹고 하는 것은 눈에 안 들어옵니다. 오직 소원은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 여성의 마음이 변해서 자기의 사랑을 받아주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이 청년의 마음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소원입니다. 저 여성과 함께 맺어지지 않는다면 사는 것이 의미가 없다. 사랑을 허락받으면 세상 전부를 얻은 것 같은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너무 너무 살고 싶은데 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사형선고를 내렸는데 너무 너무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몸부림을 칩니다. 그 사람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살고 싶은 욕망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장소를 구경시켜준다는 말로 그 사람의 살고 싶은 욕망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전 재산을 기울였습니다. 심지어 빚까지 냈습니다.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사업을 했습니다. 사업에서 망하면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죽을 각오로 사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 사업이 망한다면 나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 나를 믿고 투자한 모든 사람이 다 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소원이 무엇일까요? 먹고 놀고 대표로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이 사업이 성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그런 것을 가리켜서 ‘히케테리아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 고전문학에서도 여기에 나오는 이 두 단어는 대부분 짝으로 나타납니다. 흔히 사용하던 용법을 성경을 기록하면서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소원’입니다.
그러면 이런 소원이 우리의 기도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소원이 기도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B. 능력이 없는 기도
결국 소원이 없기 때문에 능력이 없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소원이 가슴 속에 불타야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아뢸 수 있는데 마음이 줄기차게 타오르는 바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가 능력이 없는 이유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소원이 간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진짜 간절하면 열렬히 구하게 됩니다. 만약에 사랑에 빠진 청년이 상대 여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비책이 있다면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그 방법을 실행하지 않겠습니까? 말 들어보니까 희귀병에 먹는 약인데 한 알에 25억이라고 합니다. 선진국에서는 의료보험을 해서 천 만 원 정도면 사먹을 수 있는데 한 알을 먹으면 확실히 평생 낫는다고 합니다. 그런 약을 우리나라에서도 수탁을 받아서 생산하는 설비를 만든다고 합니다. 도대체 한 알에 25억이면 한 주먹이면 얼마입니까?
그런데 그 부모들의 심경이 신문에 나왔습니다. 방법이 없다면 포기를 하겠는데 25억 약을 먹으면 확실하게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 약을 못 먹여서 죽어가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차라리 그런 약이 발명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50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아파트 한 채를 팔아서 약 한 알을 사서 먹이면 확실하게 사는데 돈이 없어서 자식이 죽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엔가 탄원을 하고 누구에게 가서 매달리면 그 약을 얻을 수 있다고 가정을 하면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소원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소원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희망 말구요. 돈이 많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것 말구요. 이번 사업에 성공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런 것 말구요. 우리 부모가 부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것 말구요. 내가 더 아름다운 얼굴로 태어났으면 인생이 바뀌었을 텐데. 그런 것 말구요. 진짜 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는 소원이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런 소원이 없으니까 기도가 열렬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소원이 필요가 없을까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너무 너무 행복한 상태에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 대부분은 자신의 상태가 불만족스럽습니다. 이것은 충분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 건강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고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건강해지는 게 열렬한 소원은 아닙니다. 그것이 간절하면 뭐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서 계속 낙심하는 것입니다.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또 하나의 이유는 소원은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올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원은 간절한데 그것을 하나님 앞에 그것을 열렬한 기도로 바꾸기 위해서는 소원만 있으면 안 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이 발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을 못 해봤습니까? 너무나 슬프고 괴로운 일을 만나서 눈물이 펑펑 쏟아집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려고 했더니 한 마디도 기도가 안 된 적 없었습니까? 그게 마음에는 원통하고 간절히 바라는 일이 생겼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올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괴롭더라도 그것이 타오르는 기도가 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울고 가슴 아파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용납할 수 없는 이유일 경우에 그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열렬한 기도로 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 간절한 소원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바라는 바가 있어도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해결할 믿음이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기도는 능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군인들이 주력 소총으로 사용하던 M16이라는 총입니다. 이 총에 총알을 장전하고 쏘면 마지막에 떨어지는 지점이 3,600미터입니다. 3.6km까지 총알이 날라간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을 최대 사거리라고 합니다. 유효 사거리는 그 거리 안에 들어와야지만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고 하는 거리는 550미터입니다.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200미터 앞에 있는 사람에게 총을 쏘면 확실하게 살상할 수 있겠지만 3,559미터쯤 서 있으면 그 총알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떨어지는 지점에 가 있으면 안 죽을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도달할 수 있는 것이 꼭 효과를 낼 수 있는 거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열렬함이 모자랄 때 우리의 기도는 하기는 하지만 어떤 문제를 꿰뚫을 수 있는 관통력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족합니다. 경제적인 문제, 건강, 자녀, 심지어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도 불만족합니다. 문제는 그 중에 모든 것이 다 불만족스러운데 아무것도 간절한 기도의 제목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믿음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보려고 마음을 먹는 것이 믿음의 역할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설교를 들어도 객관적인 이야기로 듣습니다. 책을 읽어도 지식 자체를 위해서 성경을 읽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들으면 그것이 자신과 무슨 관계에 있는지를 집요하게 물으면서 설교를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에게 적용을 합니다. 거기에 깨어짐이 있는 것이고 거기에 영혼의 변화가 있는 것이고 거기에서 없었던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책을 읽을 때도 믿음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그 책 속에서 자기가 활용할 지혜를 찾습니다. 어떤 진리를 책이 가르쳐주면 그 진리를 자신의 삶과 연결하고 적용합니다. 그 책이 의도하지 않았던 더 큰 깨달음을 얻어서 자기의 실제적인 삶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그뿐인 줄 아세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우리가 우리 일처럼 대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대해서나 예민하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 삶이 전개되는 상황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읽어냅니다. 그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해주는 신앙적인 사람이 볼 때는 저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환경적인 상황이 저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음성인데! 라고 생각을 해도 정작 본인은 그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만족스럽고 괴로우면서도 운명처럼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꾸역꾸역 살아갑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더 큰 행복을 꿈꾸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더 알고 싶지 않습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더 깊은 기도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세상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경계선 상에서 모호하게 살아가니 세상에 가도 낯설고 교회에 와도 낫선 것입니다. 뜨거운 신앙을 생각해도 자기는 아닌 것 같고 아주 노골적으로 세상을 위하여 타락하는 길을 가르쳐줘도 자기가 갈 길이 아닙니다.
신앙에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입니다. 그 회색지대에서 누구도 참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행복하게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능력이 없는 기도를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정말 마음속에 바램이 있는 탁월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심한 통곡과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체를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때 그 본체를 인간의 본성 아래 감추셨습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스스로 하늘에서 하나님으로 행하시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시고 사람이 겪는 모든 고통과 시련, 죄는 없으시지만 그 고난을 조용히 다 겪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구속해야 할 우리들과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그토록 감격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낮아지셔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하나님이셨으니 엄밀하게 말하면 기도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신학적으로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하는지 아십니까?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 어떤 때는 그 아버지가 성부 하나님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성자인 당신 자신을 포함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너무 재미있지 않습니까?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분이 하나님이신 삼위일체께 아버지라고 부르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현실과 그분의 소원은 같지 않았습니다. 똑같았다면 예수님에게는 간구도 없었을 것이고 소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 잃어버릴 리가 없는 것을 소원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지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향하여 소원을 품고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놓치지 않고 싶어서 그것을 영원히 있게 해 달라는 소원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소원을 가지셨는데 현실에서는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간구였고 소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눈을 떠서 현실을 보면 도처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더럽혀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바라는 소원과 펼쳐지는 현실 사이에 격차가 너무 클수록 예수님의 소원은 점점 불붙었습니다. 그 소원이 크게 불붙으면 불붙을수록 그분의 기도는 심한 통곡과 눈물을 동반했습니다.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현실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라는 소원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 사이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의 소원을 올렸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 볼까요? 다행히 요한복음 17장에 거기서 기도하셨던 기도의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 모든 기도의 중심 제목은 나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니 제자들이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땅에 세워질 남겨두고 가시는 교회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그들이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될 가망성이 없어보였습니다. 자기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제자들조차도 진리이신 당신을 버리고 배신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 되기에는 너무나 생각이 다르고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이기심들이 가득한 것을 예수님은 모두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품고 있는 진리 안에서 모든 제자들이 하나가 되고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해 달라는 소원과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 가시기 직전에 도망간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이 파악하는 현실 사이에는 무한한 격차가 있었습니다. 그 격차가 있는데 예수님이 포기하셨으면 심한 통곡과 눈물이 터져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님의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소원이 열렬하게 타올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욱 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할 수 있었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그 기도를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배우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에게 소원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죽은 신앙생활의 대표적인 본보기입니다. 분명히 소원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소원이 없다면 생을 포기했거나 현재에 완전히 만족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둘 다 아닙니다. 포기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에 완전히 만족하며 하나님!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 있지도 않습니다.
C. 소원이 없는 이유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실제로는 바라는 바가 많이 있는데 소원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소원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의지가 부족한 것입니다. 의지의 부족은 마음이 분산된 것입니다. 마음이 분산되어있기 때문에 의지가 미약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을 때조차도 그의 모든 의지가 총동원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짓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그 죄를 짓겠다는 의욕을 계속 품고 있어야 됩니다. 두 번째는 그 죄를 지을 기회가 됐을 때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둘 중에 어떤 것이 없어도 결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죄를 짓고자 하는 욕심은 계속 품고 있는데 적당한 때가 왔을 때 확 실행할 수 있는 분출하는 힘이 없으면 그 죄는 마음에 있다가 결국 사라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를 똑같은 것으로 보시지 않고 마음으로 짓는 죄와 행위로 짓는 죄를 구별해서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을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고 사람을 찔러 죽이는 것도 살인입니다. 두 죄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지 똑같은 죄라는 뜻은 아닙니다. 죄의 크기가 다릅니다. 사람이 이성을 보고 잘못된 욕심을 품는 것도 죄이고 실제로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런데 전자는 마음에 머무는 죄이고 후자는 실제로 실행하는 죄입니다. 똑같이 소원이 진짜로 기도의 제목이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되겠다고 하는 욕구가 우리 속에서 계속 유지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경제생활을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물건을 살 때만 해도 어느 순간에 그것을 사야겠다는 마음이 확 솟구칩니다. 그때 한 번 억눌러보고 다음 날 다시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신기하게 다음날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옛날에 중고차 시장에 갔는데 자동차가 쏟아져 나옵니다. 500키로 밖에 안 된 차가 중고로 나옵니다. 딜러에게 어떻게 이런 게 나올 수 있냐고 물었더니 사고 일주일도 안 탔는데 마음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이 차를 보기도 싫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잘 못 결정하는 바람에 한 천만 원씩 밑지고 시장에 내 놓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갈 간절한 소원이 없는 이유는 진짜 우리에게 없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없다면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없어야 되는데 바라는 바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타는 소원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분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분산되고 나면 의지는 매우 미약하게 됩니다.
중국 역사에 보면 전쟁을 할 때 심리전을 씁니다. 큰 전투를 앞두고 있는데 공격을 해 오는 게 아니라 어디선가 피리 소리 같은 게 들리는 것입니다. 처량한 곡을 부르면서 고향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적군들이 그 피리 소리를 들으면서 향수에 젖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어떡하고 있을까? 하며 고향 생각에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전쟁에서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된다. 라는 마음의 초점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렬한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여기서 그치지 말고 한 번 집에 가서 조용히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박 아무개 집사! 네. 하나님! 내가 네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 뭘 들어줬으면 좋겠니? 그럴 때 뭘 말씀드릴 게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중에 대부분은 그게 뭐더라. 잠깐만요 하나님! 그러고 주워섬기기 시작할 겁니다. 이것은 간절한 소원이 아닙니다. 간절한 소원은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내가 생각해볼게요. 그렇게 나는 소원이 아닙니다.
25억짜리 알약 하나가 없어서 아이가 온몸이 뒤틀리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엄마에게 하나님이 불쌍한 딸아!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내가 들어줄게. 그러면 그 엄마는 잠깐만요. 생각해보구요. 그렇게 안 합니다. 우리 아이를 위해서 그 알약 한 알만 사주세요. 당연히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엄마입니다. 그런 소원이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교구 목사님들이 기도합시다. 교회 나와도 온 교회가 기도해야 합니다. 담임 목사님이 매일 설교합니다. 마음에 불타는 소원이 없는데 어떻게 열렬한 기도가 되겠습니까? 소원이 없다는 것이 영적으로 보면 병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항상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너무나 간절합니다. 소원이 없다면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겠습니까? 제일 큰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죄를 용서받고 싶다는 소원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잘 못 했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많이 받았으면서도 보답을 못하며 살았는데 나는 나 자신이 정말 싫다. 나를 하나님이 깨끗이 용서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만든 것입니다.
어제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인용하면서 책 많이 읽지 마라. 바보 된다. 전해드렸는데 똑같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설교를 많이 듣는 데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 듣고도 생각을 많이 해야 됩니다. 그것이 의무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없었던 소원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이 말씀을 듣고 조용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이런 삶을 일평생 살아도 괜찮은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이런 삶을 살다가 가면 하나님이 ‘정말 너는 나를 위해 사느라고 애썼다.’라고 천국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를 안아주실 것인가? 그리고 ‘이런 삶을 살면 나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 것인가?’를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소원이 무엇입니까? 소원을 말해 보십시오. 그게 무엇입니까? 그 소원이 있어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들어주신다는 보장은 없지만 일단 하나님 앞에 소원이 있어야 열렬해질 것이고 열렬해져야지만 간절히 기도할 것 아니겠습니까? 소원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통곡하고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 그리고 그렇게 간구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만드는 간절한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기도제목 얘기하라고 하면 가족 구원이라고 얘기하는데 그것도 소원이 아닙니다. 소원이었으면 복음을 전했을 것이고 그들이 예수 믿기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예수 믿고 남편도 예수 믿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나는 기도제목이지만 간절한 소원은 아닙니다. 마음을 온전히 실어서 그것만 들어주시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듯이 그렇게 하나님께 매달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형편이 나아지는 것이 바라는 바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간절한 소원이라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마음이 집중되어있는 상태입니다.
의지의 힘은 집중된 상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도 어떤 죄를 짓고자 하면 짖고 싶은 죄가 자기의 마음 전체를 지배합니다. 다른 게 눈에 아예 들어오지 않습니다. 눈에 뭐가 씌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꽉 채워서 이 사명을 이루지 못하면 모든 것을 가져도 내 삶의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날은 열렬함이 사라져가는 시대입니다. 간절한 기도, 통곡하는 울부짖음, 피를 토하는 설교 그리고 목숨을 건 헌신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마음에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내 인생에 많은 문제들이 있으면 이 문제들이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도 그것을 끌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는 매일 매일 습관적으로 똑같은 죄에 빠집니다. 나는 도저히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일도 이 죄를 그만둘 것이라는 보증이 없습니다. 하나님! 어떡하면 좋습니까? 하고 뒤에서 호박씨 까는 게 믿음이 아니라 가지고 나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오지 못 할 어떤 문제도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오래전에 어느 형제가 말을 하는데 자기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물 한 잔을 먹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제목이 있는데 그게 변비입니다. 변비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하니까 무슨 약을 먹어도 잘 듣지를 않고 한없이 그 약을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고통 받는 게 변비입니다. 물 한 컵을 먹고 오늘도 변비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하루를 여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무가치한 문제는 우리 인생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달린 문제이고 우리의 인생이 달린 문제이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값 주고 사실 정도로 아주 존귀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자녀의 손끝 하나, 발길 하나에 까지 가 있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마음과 신경이 그 아이에게 모두 쏠려있습니다. 혹시라도 그 아이가 다쳤다는 연락이 오면 부모는 혼절할 것 같은 마음으로 병원으로 학교로 달려갑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많은 문제에 봉착해 있은 것을 아시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혼자 씨름하지 말고 모든 문제들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 놓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 자세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너무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마음을 많이 쏟고 아주 몰두하면서 일을 하는데 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님 앞에 기도제목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나는 그 일 자체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사는 일에 너무 익숙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깨달음을 저는 25년 전에 깊이 깨달음을 얻으면서 그 후로 습관으로 삼는 게 있습니다. 요즘 나를 바쁘게 하는 것들이 첫 번째 기도의 제목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책을 쓰고 있다. 그 일이 제일 바쁘다. 대심방 중이다. 그 일 때문에 제일 바쁘다. 그것이 첫 번째 기도제목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나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가장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될 때 나는 책을 쓰든 심방을 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는 상태에서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육아에 온 마음을 쓰고 있다면 첫 번째 기도의 제목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육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육아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도 하나님 앞에 더 깨어지고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빌어야 됩니다.
사업을 하는 일의 대부분이 여러분을 받치고 있다면 그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점검하며 기도의 제목의 위 순위로 올려놓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는 삶과 끊어지고 삶은 기도가 없는 기현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마음을 바쳐서 하는 일을 하는데 하나님은 의지하지 않고 실제로는 마음을 안 바치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앞뒤가 안 맞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생을 이런 기도 속에서 사셨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그분의 마음에는 기도가 그치지 않았고 소원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현실이 당신의 기도하는 바와 다르면 다를수록 예수님의 기도는 더욱 뜨거워졌고 그럴수록 그분의 뺨은 눈물에 젖었습니다. 심한 통곡이 터져 나왔고 아버지의 이름을 슬프게 부르며 현실을 변혁시키기 위해 하나님 앞에 매달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회심을 합니다. 첫 번째 회심을 말고 두 번째 회심을 합니다. 회심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깨닫고 나면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할 제목들이 많은데 내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고 기도하지 않았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이와 연령이 필요 없습니다. 어린아이라도 은혜를 많이 받으면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아무리 어려운 많은 문제가 있어도 간구와 소원을 올리고 그것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드려진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특별한 뜻이 계셔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더 놀라운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앞에 현실이 당신이 바라는 바와 차이가 나면 날수록 그 기도는 강도가 더해갔고 열렬함은 더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난관을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 앞에 아뢰며 응답받으시면서 일생을 사셨고 어떤 예수님의 기도는 당신이 죽으신 후에야 응답된 기도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드린 마음을 바친 기도는 끝날지라도 그것이 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보좌에 올려져서 언젠가는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 실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자녀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가정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여러분들이 섬기는 일을 위해 봉사하십시오. 하나님이 못 하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도와주시지 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이 말씀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저는 기도원에 가 있을 때 이 말씀을 받으면서 여러분들을 생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떠한 바램으로 불타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만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제발 죽어있는 것 같이 살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행복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은 살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지 죽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자들은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은 죽어도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언제까지 우리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시겠습니까?
살기 싫은 부부가 억지로 사는 것처럼 예수 믿는 날들을 얼마나 오래도록 계속해야 되겠습니까? 답답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면 믿든지 없다고 믿으면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든지, 차갑든지 뜨겁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지 그게 무엇입니까? 기도의 제목도 없고 간절한 기도도 없고 바라는 바 열렬한 소원도 없고 그 소원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갈 믿음도 없이 살면서 원망과 불순종, 불평과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서 세상을 향하여 앙탈하는 마음이나 품고 세상에 대해서 시기하는 마음이나 품으면서 살아가는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아! 제가 정말 몰랐습니다. 진짜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신다는 사실을 제가 잊었습니다. 제 삶을 조사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조사해 보는 것입니다. 이루어져야 될 소원들, 그 목록을 가정에서 자녀에 대해서, 남편에 대해서, 혹은 자기의 사역에 대해서, 사업에 대해서 한번 적어보십시오. 그것을 가슴에 불타게 하는 방법은 많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간절히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마음속에서 소원이 됩니다. 소원이 될 때마다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 소원이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이루지 않겠사오니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주 나를 박대하시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할 때 어느 순간에 소원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불길이 되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소원이 우리 안에 발견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을 찾아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내가 진짜 무엇을 간절히 바래야할 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옛날에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됐던 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까짓 꺼 뭐 하러 형제들이 그렇게 다퉜나? 아무려면 그까짓 게 뭔 상관이 있나? 내려놓게 됩니다. 내가 이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 희생할 필요가 있나? 아무려면 뭔 상관이 있나? 그게 뭐가 중요한 것인가? 하고 내려놓게 되면 삶이 명량해집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예전에는 없던 어떤 소원이 열렬하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소원을 하나님이 밝히 보여주십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그 소원을 불러일으키시고 그 소원이 우리의 마음속에 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소원은 정욕으로 불붙고 선한 일을 위한 간절한 욕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에 의해 불러일으켜지는 것입니다. 말씀은 정욕에 불을 끄고 은혜에 불을 붙입니다. 죄는 은혜에 불을 끄고 정욕에 불을 밝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만 내가 진짜 품어야 할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주 또렷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붙들려서 하나님 앞에 물러서지 않을 각오를 가지고 이 말씀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내가 진정으로 바라야 할 소원을 가르쳐주셨으니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나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주신 그 소원은 하나님이 진즉에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기도는 바람이 잘 부는 날 돛단배가 돛을 활짝 펼치고 바람에 밀려서 바람을 항해하는 것처럼 순조롭습니다. 기도할수록 마음의 열기는 더하여지고 기도할수록 간절함은 더해지고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통곡과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연단되게 만들어서 뜨겁게 불길처럼 치솟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죄의 검댕들을 다 태워버리고 쓸데없는 거짓된 욕망들이 다 불타서 먼지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그 기도 속에서 순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사로잡힌 사람들의 소원은 대부분 하나님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할 때 우리는 거기서 기적의 역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소원이 없는 신앙생활, 이것은 너무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입니다. 소원을 받으십시오. 적어도 그 간절한 소원을 위해서 마음을 쏟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와 소원1 (2022.01.17._새해말씀사경회_저녁)
2. 기도와 소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오늘날은 신앙의 열기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사람도 없고, 피를 토하듯이 부르짖는 설교자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구령의 열정에 불타는 전도자를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향하여 사는지 모르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합니다.
저는 오늘 여기에 나오는 많은 메시지가 달린 이 본문을 모두 설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기도와 소원의 관계에 대해 설교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이 구절은 예수님의 생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라고 했으니 그의 생애 전체 동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많은 주석가들이 지지하는 바와 같이 특별히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셨던 그 모습을 특별히 담고 있습니다.
Ⅱ. 기도와 소원
성경은 말하기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기도와 소원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A. 소원이란 무엇인가?
제일 먼저, 여기에 나오는 ‘소원’이란 무엇입니까? ‘소원’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번역하기는 하였지만 참 우리말을 찾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히케테리아스(ἱκετηρίας)’라고 하는 단어는 ‘소원’이라는 말보다는 훨씬 더 강한 말입니다. 소원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혹은 바라는 그 일)’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소원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그리스어에서 ‘히케테리아스(ἱκετηρίας)’라고 하는 이 단어는 그것보다 훨씬 더 아주 절박하고 간절함이 스며들어 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도 이것을 번역하면서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에서는 이것을 페티션(petition), 청원이라고 번역을 하였고, 또 어떤 번역에서는 서플리케이션(supplication), 간구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간구와 소원’이라고 하였는데, 이 간구는 그리스어로 ‘데세이스(δεήσεις)’라는 단어인데, 기도입니다. 결국 앞에 나오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뒤에 나오는 소원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의 내적인 욕구를 보여줍니다. 그리스 고전 문학에서도 이 두 단어가 짝으로 함께 다니면서 쓰이는 경우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소원’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사항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줄기찬 욕구입니다. 아주 강력하고 끈질긴 욕구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소원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꼭 이루어지길 바라는 줄기차게 계속 솟구치는 어떤 욕구를 가리킵니다. 이 욕구가 없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이 욕구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할 때뿐만 아니라 죄를 지을 때조차도 욕구가 있어야 죄를 짓습니다. 죄가 우리 바깥으로 진짜 실행에 옮겨지지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말고 계속 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마음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그 죄를 짓기 딱 적합한 순간을 만났을 때 의지가 불끈 솟아서 죄를 실행할 수 있어야지만 범죄에 옮겨지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사람의 마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외적인 종교 행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과 조상들이 만든 유전을 가지고 그 행위가 옳은가 아닌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것을 깨셨습니다. 결국 외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죄의 뿌리인 우리의 마음의 죄의 문제를 통일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큰 충격이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미움도 살인이고, 살인도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살인하는 것은 그의 존재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아주 극단의 미운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움은 마음으로 짓는 죄이지만, 그 죄가 자라서 그것이 실행에 옮겨질 때 살인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두 죄를 동일하게 보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하면, 미움은 살인과 동일한 성질의 죄이지만, 마음속으로 누군가 미워하고 있을 때에는 마음으로만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행에 옮겨서 그를 찔러서 목숨을 끊어버리면 살인을 옮긴 것입니다. 그 죄의 크기는 비교할 데가 없습니다.
똑같은 교훈이 음욕에 관하여 나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보고 품습니다. 그것은 간음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으로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행에 옮겼으면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죄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그 죄가 없었던 것이 어느 한순간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서서히 자라면서 결국 나오게 된다, 그 죄로부터 떠나려면 그 죄의 뿌리부터 잘라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어떤 죄를 지으려 해도 이 안에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지면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죄를 그 지을 순간에 의지가 분출해야지만 죄를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 우리 속에 기도가 실제로 실천이 되어서 쏟아져 나오려면, 두 가지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기도하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 안에 계속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기도하고자 하는 소원이 뜨겁게 있었는데 내일은 사라져 버릴 경우에 오늘은 기도할 수 있지만, 내일은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기도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즉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저녁에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내일 아침에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기도를 실천할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기도하고자 하는 소원이 계속 불타고 있어야 하고, 실제로 기도가 필요할 때 의지가 떨치고 일어나서 열렬히 기도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두 가지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죄도 지을 수 없고 기도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 중 10명 중 9명은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생각 없이 “주여”하고 불렀는데, 진짜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래. 네가 나를 불렀느냐?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내가 들어줄게.” 여러분 대부분은 “어… 저기…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한번 생각해 볼게요.” 그것은 소원이 아닙니다.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소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소원은 아주 여러 개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가지 소원이 너무 강력하면 나머지는 그 아래 다 종속되어서 사실 아래의 것이 다 이루어져서 제일 큰 소원이 안 이루어지면 만족이 없고, 제일 큰 것 하나가 이루어지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괜찮은 것입니다.
(예화) 어떤 형제가 자매를 보고 마음에 뜨거운 연정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대시를 합니다. 그런데 그 대시를 딱 잘라 버렸으면 꿈에서 깰 텐데, 상대를 해 줄 듯 안 해 줄 듯 미묘합니다. 애를 태우면서 몇 달이 지나갔습니다. 마음은 점점 열병에 타오릅니다. 그 형제에게 지금 직장 일이라든지, 돈 버는 일이라든지, 주민등록을 옮기는 일들은 하기는 해야 하지만 결정적인 일이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그 자매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딱 한 가지만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 자매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가 당신과 한번 사귀어 보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야! 신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나머지는 그냥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정리해고 되었다면, ‘다른 데 구하면 되지. 사랑을 얻었는데 그까짓 것 뭐가 문제겠는가? 지게를 져서라도 먹고 살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화) 자, 더 살고 싶습니다. 생이 포기가 안 됩니다. 그런데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누가 이야기하는 데 희망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것 아십니까? 세계적인 희귀병이 있는데 약 한 알만 먹으면 낫는다고 합니다. 한 알이 25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도 보통 부자가 아니면 그 약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25억 중에서 24억 9천만 원을 나라에서 부담을 하고 천만 원 정도에 사서 먹을 수 있게 해 주는데, 우리는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한 제약 회사에서 그것을 위탁생산을 하겠다고 시설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엄마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이 그 희귀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아무 희망이 없다, 현대 의학으로 도저히 고칠 수 없다고 한다면 사실 체념이 됩니다. 그런데 그 한 알만 먹으면 100% 낫는다고 합니다. 평생 그 병에 안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약값은 25억입니다. 아무래도 돈이 없습니다. 그러한 부모에게 찾아가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벽지도 낡고, 가전제품도 바꿔야 하겠고, 차도 털털거리고, 우리 남편 직장도 좋은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러한 이야기 안 합니다. 엄마의 우선적인 관심사가 안 됩니다. 25억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알약 하나만 사달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엄마도 아닙니다.
한 사람이 사업을 하다 하다 마지막에 몰렸습니다. 기가 막히게 돈을 벌 아이템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돈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았습니다. 집까지 팔아서 전세, 사글세로 내려가고 형제들의 돈까지 다 쓸어 넣어서 꼭 성공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 넣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업에 대해서 걸고 있는 소원. 이 사업에 실패하면 나만 길거리로 나앉는 것이 아니라 형제, 친척, 나를 믿고 투자해준 모든 친구들까지 거리로 나앉습니다.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당신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가 물을 때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오직 하나입니다. “하와이도 가보고 싶습니다.”, “모히토도 가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 사업을 꼭 성공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나는 죽습니다.” 이것이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 소원이 있습니까? 진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진짜 있습니까? 마지막 죽는 순간에도 유언처럼 남겨야 하는 소원, 그것이 안 이루어지면 내 모든 것이 있어도 필요 없다고 하는 소원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묻고 싶습니다. 없으면 둘 중 하나입니다. 생의 의욕을 모두 포기한 사람이든가, 우울증에 깊이 걸린 사람들에게는 소원이 없습니다.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아무 욕구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맛집 찾아다니기 좋아하는데 어느 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우울증인지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그렇게 친구 만나는 것을 좋아했는데, 아무도 보고 싶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욕구가 없습니다. 생의 욕구가 없든지, 둘 중 하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해서 소원이 없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둘 중 아무것에도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입니까?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겠습니까?
소원이 없으니까 간절히 기도하지 않습니다. 소원이 간절하면 현실과 자기의 소원 사이에 굉장히 큰 격차가 느껴집니다. 격차가 느껴지면 더 깊은 시름에 잠기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파스칼도 「팡세」에서 예를 들었지만, 노숙을 하던 사람이 감옥에 잡혀갔습니다. 냉난방 다 되고, 밥 세 끼 다 챙겨 주니까 너무 안전하고 의무실까지 있어서 약까지 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감옥이 자기가 지하철역에서 신문지를 덮고 자던 시절보다 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임금이 있었습니다. 나라라 빼앗겼습니다. 착고에 채여서 지하 감옥에 던져져 개밥이나 먹고 있다면, 그는 눈 뜨기가 싫을 것입니다. 왕으로서 호령하며 살던 사람이 졸지에 죄수가 되어서 자기가 상상하지 못하였던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은 그에게 삶이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왕에게 자기가 누리고 살던 생활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에 현실과 비교가 됩니다. 그 격차만큼 그에게 깊은 고통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공통적인 심리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분명한 소원이 있으면 현실에서는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심한 통곡과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그에게 소원이 있다고 하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이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괴로워서 드리는 기도는 아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은 이 세상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너무나 간절하게 원하였는데, 그래서 그것이 있어서 기도와 간절한 바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했는데 눈을 뜨면 현실은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가운데에서도 짓밟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당신이 꿈꾸는 이상과 눈 앞에 펼쳐지는 현실의 격차가 너무 크니까, 그 격차가 예수님에게 심한 통곡을 가져왔고 눈물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바람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소원입니까? 소원이 마음에 있어야지만 간절히 기도할 것 아니겠습니까?
B. 능력이 없는 기도
결국 이 소원이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소원이 없는 이것이 우리의 기도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능력이 없는 기도생활을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능력은 간절함으로부터 옵니다. 간절함 자체가 능력이 아니라,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시고, 간절히 기도할 때 예전에는 없었던 욕구가 우리 안에 생기게 만드시고, 생긴 그 욕구가 우리 안에서 분출할 수 있는 힘을 갖도록 우리의 의지를 북돋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간절함이 없고, 기도를 해도 능력이 없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째는 간절한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식으로 기도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늘 불만을 느끼는 데도 간절한 소원이 없다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말해 주는가 하면, 우리의 중심이 고정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간절한 소원이 없기 때문에 열렬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열렬한 기도를 드릴 수 없으니까, 가끔은 우리의 마음속에도 착한 생각이 떠오르기는 하는데 우리 안에서 계속 지탱되지 못하고, 아이로 말하면 자꾸 유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들을 때 마음속에 ‘그래, 내가 정말 열렬히 기도해야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비유하자면 유산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를 품고 낙태되지 않고 계속 성장해서 나중에 5-6개월 되어서 발길로 뻥뻥 차고, 그리고 이 아이가 자라야지만 어느 순간에 힘을 얻어서 분만할 때 아이가 태어날 텐데, 선한 마음이 생기기는 하는데 자꾸 유산이 됩니다. 그때에 선한 결심이 생기고 ‘이렇게 해야 할 텐데’라고 하는 소원이 생기는 것은 그것은 분명히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힘이 없는 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유산이 되어 버리고 나니까,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고, 돌아가고, 하면서 결국 행복하지는 않은데 무엇도 소원이 별로 없는, 줄기찬 소원이 없는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광범위하게 보면 그것은 모두 우리의 마음에 끼치는 죄의 영향입니다.
그래서 죄가 우리 안에 역사할 때, 단계가 있습니다. 죄가 우리 안에서 역사할 때 소극적으로는 우리를 뜨뜻미지근한 상태로 만듭니다. 그리고 이 죄가 탈출구를 찾아서 그 사람이 마음의 구조와 성향에 아주 좋은 것을 찾아내면 그쪽으로 뚫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게임, 도박, 심지어 탐욕을 가지고 하는 주식투자, 그것은 거의 도박심리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음란, 거짓, 폭력, 이러한 쪽으로 마음 어느 한구석을 찢고 튀어 나가는 것입니다. 튀어 나가고 나서 막 일이 벌어지고 나면 본인이 수습이 안 됩니다. 그것이 극단적으로 발달하는 형태가 중독입니다. 도박중독, 그리고 사행중독, 포르노그래피에 중독되는 것, 폭력에 중독되는 것, 그러한 것입니다. 결국 그다음에는 자기 자신이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소극적으로는 우리 마음을 뜨뜻미지근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죄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발전해서 점점 그것이, 오늘 통가에서 화산폭발을 해서 8천 킬로미터 바깥에 있는 몇 사람이 익사를 했다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마그마로 인해서 힘이 축적이 됩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에너지를 분출하면서 화산폭발이 일어납니다. 오랫동안 준비된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이 잔뜩 축적된 곳이 후지산이나 백두산 같은 곳이기 때문에 몇 년 안에 터져도 지질학자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은 두 산이 바로 백두산과 후지산입니다. 축적되었다가 터지는 것입니다.
다행히 여러분들 중 많은 분들은 그렇게 터져 나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지만, 자기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행복했던 때를 생각해 보면 아주 분명한 소원을 가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아주 분명한 소원이 생겨납니다. 은혜 못 받았을 때는 가족의 구원 문제에 대해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늘 걸리기는 합니다. 걸려서 형식적으로 기도는 하지만 애달프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을 터치하고 지나가면 가족들의 구원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게 됩니다. 어느 정도 이르는가 하면 사도바울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 가족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바로다.”라고 하는 극단적인 욕구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은 은혜가 하는 일입니다. 결국 능력이 없어집니다. 간절한 소원이 없기 때문에 열렬한 기도를 못 합니다. 교회에서 ‘기도하십시오. 명단을 적으십시오. 시간을 약속하십시오. 당번을 정해서 나오십시오. 매일 1시에 1분씩 기도합시다.’라고 하지만, 못 지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소원이 없습니다. 욕구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립니다. 가장 커다란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의 생각하지 않으니까 마음속에 간절한 욕구가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것을 원합니다. 이것을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간절함과 열렬함이 없습니다. 신령하고 수준 높은 기도 제목이면 너무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모든 사람의 신앙의 수준이 높을 수 있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화) 오래전에 제가 알고 있던 형제 하나는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묻는 것입니다. 뭐냐고 했더니, 일어나자마자 정수기에 가서 한 컵 먹고 간절히 기도한다고 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변비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병원에 가지 않으면 변을 못 볼 정도로 독특한 변비에 시달리니까, 보통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기도할 때 간절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불편하니까 그에게 소원이 됩니다. 그러한 간절한 소원이라도 있으면 기도하게 됩니다.
놀고 태만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큰 시련이 닥칩니다. 사업에 위기가 오고, 가정에서 분열이 생기면서 아이들이 뛰쳐나가고,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생기고,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으셔서 며칠 못 산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집이 차압이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가 들려올 때 덜컥하고 겁이 납니다. ‘내가 정신 못 차리고 살았더니 이런 일을 당하는가 보다.’ 두려운 마음이 생겨납니다. 지금 이러한 것들을 잃어버리면 큰일 난다고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도 나와서 간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왜입니까? 어려움이 그에게 소원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도 별로 없습니다. 평안합니다. 위기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위기가 아닙니까? 무엇이 위기가 아닙니까? 서서히, 서서히 다가오는 시험이 더 무서운 시험입니다. 개구리를 미지근한 물에 넣으면 뛰쳐나옵니다. 찬물에 집어넣고 조금씩, 조금씩 온도를 올리면 곰탕이 되도록 개구리가 안 움직입니다. 다 동물실험 해 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태어났으면 사람이 소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아무 희망이 없이 살아간다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는데, 그러면 무엇인가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뭔가 열망을 가지고 살아야 인생의 보람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위해서 이것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꼭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라는 가슴에 불타는 소원이 있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간절한 소원이 없기 때문에 능력이 없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올 수 있는 믿음이 없습니다. 얼마나 우리들이 웃기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이쪽(왼쪽) 란에는 여러분들의 기도의 제목을 써 보고, 기도의 우선순위를, 아니 기도의 우선순위라기보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1번, 2번, 3번으로 놓고 기도하는 기도제목을 한번 써 보십시오. 그리고 오른쪽 칸에는 실제로 여러분들이 많은 시간, 마음을 쏟으며 하고 있는 일을 적어 보십시오. 둘 사이에 관계가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하얗게 비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어쨌든 기도 안 하는 사람, 여기가 빈칸인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웃기는 것입니다.
저는 20여 년 전에 이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기도하기 전까지 내가 마음을 쏟으며 신경 쓰던 많은 일이 그 일이 끝나고 나서 기도할 때에는 그것이 기도 제목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이상한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와서 그 분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해결하며 산다는 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다음서부터 저는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뭔가 잘못되었구나. 마음에 불붙어서 막 책을 씁니다. 어떨 때는 새벽 2시까지 정신없이 원고를 씁니다. 두 가지인데, 날짜를 지키는 것보다도 날짜는 엄밀히 말하면 제 마음이니까 하는데, 그게 아니라 막 책의 내용이 쏟아져 영감이 솟아날 때 그때 써야 합니다. 그렇게 쓰면 과장하면 이틀 만에도 책 한 권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영감이 없을 때 쓰려고 하면 계속해서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거나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중에 읽어보면 품질이 나쁩니다. 그런데 영감이 떠오를 때에는 미친 듯이 써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날밤을 거의 새고 쓰고 집에 들어가 잠깐 자고 새벽에 기도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지금 마음을 쏟아 하는 일과 기도하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결국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하고 있는 이 일은 기도의 영으로 한 일이 아니고 기도하는 이것은 일하는 영혼으로 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그냥 나는 나대로 살고 하나님 앞에 기도는 기도대로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삶에는 기도가 안 실리고 기도에는 삶이 없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힘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훌륭한 기도는 삶이 얹혀 있는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해 보시면 너무 잘 알 수 있습니다. 잘 못 해도 며칠이라도 전도해보려고 애를 쓰던 사람이 나와서 전도를 위해 기도할 때 눈물이 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교인들 한 명, 두 명,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친다고 애를 쓸 때 그때 그 영혼이 깨닫게 해달라는 기도는 저절로 나옵니다. 그리고 곤고한 사람들을 상담해 줄 때, 그때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할 때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삶의 집중이 우리의 기도에 가져다주는 힘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기도제목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해결해 보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소원에 간절함이 없고 자신이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와서 해결해 보려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일 때에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자기의 힘으로 하려는 것이고,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일일 경우에는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것입니다. 이중적인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내가 지금 열심을 품고 행하고 있는 이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행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니까, 기도로 끌고 나오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끌고 나와야 합니다.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에 제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옳은 일입니까?’ 몰라서 물어보겠습니까? 다 알면서도 물어봅니다. 그러면 즉시 응답이 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을 버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 거라면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삶 자체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능력이 없는 기도는 열렬한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열렬한 삶이 없는 이유는 간절한 소원, 줄기찬 소원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이고,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가져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염려입니다. 우리는 많이 염려합니다. 양쪽에다가 적어 보십시오. 내가 염려하는 순위를 적어 보고, 기도하는 순위를 적어 보십시오. 별로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도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염려를 하면 그 염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믿음으로 해결을 해 보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주님의 도움으로 말입니다. 그럴 때 그것은 염려가 되면 염려가 될수록 간절한 기도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합니다. 밤을 하얗게 새우면서 근심과 걱정으로 날밤을 지내는 일은 가능해도 무릎을 꿇고 밤은 못 새웁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는 영적인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근심은 그냥 인간의 본성이 우리를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각자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온전한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염려하던 일들이 잘 해결되고 나면, 그 사람은 주님의 도움 때문에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재수가 참 좋았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결국 그 일이 안 이루어지면 더 깊은 근심 속으로 들어가고, 그다음에 그 일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을 더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어느 쪽이든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입니다.
우리는 삶에 있어서 명랑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명랑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명랑한 삶을 사는 신앙적인 방법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다 놓고,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소원을 들어달라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는데도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면 쿨 하게, ‘아, 그렇습니까. 하나님, 괜찮습니다. 거기에는 뜻이 있겠죠.’ 사람이 사람에게 “안 돼.”라고 하는 것은 진짜 안 된다는 뜻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 돼.”라고 하는 것은 안 된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길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겠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쿨 하게 자신을 꺾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혼돈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자기의 육신으로 하는 근심을 혼돈합니다. 자기의 육신으로 하는 근심은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 보다 훨씬 깁니다. 그리고 근심은 속을 태우는데, 기도는 속을 태우지 않습니다. 근심은 자기를 아프게 찌르는데 기도할 때 그 간절한 소원 때문에 심한 통곡과 눈물은 안 흘립니다. 만약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은 나중에 해 주시더라도 놀라운 평강을 주십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고, 기도할 때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지만 기도가 끝나고 나면 명랑함이 깃듭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신율적 낙관주의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낙관주의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특징입니다.
모든 일을 염려합니다. 왜입니까?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 일에도 이렇게만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집착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최선을 다할 뿐이지, 그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영적인 명랑성이 주어지게 됩니다. 명랑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없는 사람들이 대개 수녀처럼 살아가고 수도사처럼 살아갑니다. 진짜 본받지 말아야 할 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아름다운 선교가 무엇인지 압니까? 그것은 명랑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는 것은 혼자서 엎드려 우십시오. 눈물을 닦고 나면 명랑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우리를 보고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이 과연 인생을 사는 데 효험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계속 졸다가 기도가 끝나고 나면 계속 세상 죄를 다 짊어진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무서울 게 뭐가 그렇게 있습니까? 뭐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마지막 죽는 것 이외에는 무서울 게 없는데, 죽는 게 뭐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주님께 가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모든 일이 내 인생에 일어나도 나는 두렵지 않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명랑성입니다. 명랑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명랑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하고 말할 수 없이 어려운데 하나님 앞에서 우는데, 사람 앞에서는 생글생글 웃습니다. “너의 모든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그 속에서 마음의 관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C. 소원이 없는 이유
세 번째로 우리들은 그러면 왜 우리에게 소원이 없는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처방은 무엇일까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소원이 없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분산되고 나면 의지가 미약해 집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수많은 삼라만상을 접합니다. 그리고 그것들 속에서 각양인상이 우리의 마음에 아로새겨집니다. 그것에 정신을 팔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정신의 시선이 갈가리 찢겨서 다 분산이 됩니다. 그게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렌즈를 가지고 만약 어떤 물건을 태우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그것이 돋보기를 비춰서 초점을 한군데에 모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영하 20도 추운 날이라도 종이를 태울 수 있고, 오래 붙들고 있으면 나무도 태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점이 확 흩어지고 나면 그것은 아무런 온기가 없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간절한 소원이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초점이 흐트러져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화) 그런데 이 초점이 그냥 흐트러지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아주 나쁜 데에 초점이 모아집니다. 그래서 아주 깜짝 놀랄 죄들을 인간들이 짓게 됩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회삿돈을 횡령하고 공금을, 이번에도 무슨 어느 임플란트 만드는 회사에서 2천억 회삿돈을 거의 거덜 낸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런 범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200만 원이라도 무서워서 못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어디에서 대합실 같은데 앉아서 꾸러미 봉투가 하나 있어서 주웠는데, 5만 원짜리도 아니고 만 원짜리 두 묶음만 있어도 가슴이 쿵쾅쿵쾅 뛸 것입니다. 가지려고 마음을 먹으면 말입니다. 이 사람은 2천억입니다. 금괴를 450여 개를 사다가 자기네 집, 아버지 집, 동생 집에 묻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인가 씌우지 않으면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분산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상황이 나빠지면 한 곳에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공할 죄의 힘으로 나타납니다. 도박, 놀음, 음란, 중독, 알콜, 폭력, 이러한 것들로 나타납니다.
악한 일에 대한 욕심도 집중해서 나오고, 선한 일에 대한 욕구도 집중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에서 멀어지기는 하였지만, 세상에 아무것도 집중해서 살지 않으면 은혜에서 멀어지기는 했는데 신문에 나올 정도의 죄는 짓지 않습니다. 그냥그냥 지루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해서 거기에 깊이 빠지게 되면 그다음에는 엄청난 힘이 솟구칩니다. 악한 일에 대한 욕구는 정욕이 만들고, 선한 일에 대한 욕구는 하나님의 은혜가 만듭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고 싶은 일이 많이 생깁니다. 그리고 정욕에 빠질 때도 하고 싶은 일이 막 생겨납니다. 그게 욕구입니다. 그러한 욕구가 우리 안에서 의지의 힘으로 분출이 됩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그 속에서 인간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선악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악한 일에 대한 의지는 우리의 정욕이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 된 본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 대한 욕구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렇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비유를 하면 이러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많은 의지가 묻혀 있는데, 그것을 쓰레기더미와 먼지 가랑잎에 다 덮혀져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의 빗자루로 싹 쓸고 지나갑니다. 거기에서 그러한 의지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기 안에 원래 있었지만, 죄 때문에 묻혔던 선한 의지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소원이 없는 이유는 마음이 분산되기 때문이고, 의지가 미약하기 때문인데, 이렇게 마음이 계속 분산되고 모아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부족이라는 결론에게 도달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아주 탁월하고 놀랍게 집중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상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면, 초등학교 2, 3학년밖에 안 되었는데 하루 종일 성경을 가르쳐줘도 전혀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걔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미각이 생겨났기 때문에 아주 맛있는 것입니다. 먹방과 비슷한 것입니다. 먹방에 나오는 사람들 인정해 줄 한 가지가 있습니다. 위의 크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평범한 사람이 못 느끼는 현란한 맛을 그 음식 속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그 미각도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선물입니다. 만일 미각이 없다고 하면 우리의 건강은 심각할 것입니다. 거꾸로 그들은 미각이 심각해서 계속해서 옆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저렇게 해서라도 살아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처음에는 부럽기도 하고 같이 먹고 싶다가도 나중에는 측은한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것을 다 먹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란한 입맛 때문입니다.
그렇게 감각이 있기 때문에 애들에게 몇 시간 성경공부를 가르쳐도 자세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른이고 철이 들었어도 말씀의 미각이 생겨나지 않으면 욕구가 없습니다. 그래서 30분이면 몸을 비틀고 생난리를 칩니다. 드라마를 볼 때는 한 시간, 심지어 연속으로 방송하는 것을 세 시간, 네 시간 들여다보면서 설교 30분 지나면 온 몸을 뒤 틀고, 성경공부 한 시간 지나고 나면 입이 부르틀 정도로 이만큼 튀어나와서 빨리 집에 가야 할 생각 때문에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말씀의 미각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는 우리에게 정신의 집중을 가져다줍니다. 정욕과 은혜가 하는 일이 아주 비슷합니다. 정욕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집중하게 만들고,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어떤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은혜와 함께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그게 안 전해지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내가 은혜 받지 못하였을 때는 나의 눈으로 나를 보았습니다. 나의 눈으로 가족을 보고, 나의 눈으로 교회를 보고, 나의 눈으로 나의 친구들을 대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에 전해지는 순간 하나님의 시각에서 나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나를 쳐다볼 때 이전까지는 내가 완전히 내 편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니까 내가 객관적으로 보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항상 말씀과 함께 주어집니다. 말씀의 깨달음과 함께 은혜가 주어집니다. 잣대가 생기는 것입니다. 잣대를 가지고 나를 딱 보니까 나에게 용납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꾸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은 사람에게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꾸짖게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데 자기에 대한 후회, 자기에 대한 꾸짖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깨어짐이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결국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받고 싶어 하시는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열렬한 기도, 그것을 받고 싶으신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이 간절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심으로 예수님이 모본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그 통곡을 받아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 눈물을 받아서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무슨 생수라도 삼으실 것 같습니까. 왜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건성으로 기도하면 안 들어주시는데,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과정을 통해서 분산된 마음이 집중이 되고,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면서, 자기가 그 관계를 고쳐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자기를 처벌하고, 올바른 자신으로 돌아가도록 자기를 꾸짖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 깨어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이 일어나게 되면 자신이 은혜를 받기 전에 사랑하던 것들에 대해서 깨뜨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자기 힘으로 넉넉히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은 잘 살고 있다는 자부심 같은 것들이 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가장 믿었던 것이 자기 자신이고, 자기사랑이고, 자기 의였는데 그것이 깨지고 나면 자기가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그 의지할 곳이 없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를 발견 못 하면 허무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깨지면서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다고 하는 절망이 들었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고 이 문제조차도 주님께 가지고 가서 해결을 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을 먹을 때 그것을 주님은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시련과 역경을 주시고,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애써도 뭔가 해결이 안 되는 것 같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못 들으면 더 깊이깊이 빠져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내가 제법 잘 믿었는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그래도 늘 교회 다니고 주님을 섬기고 가진 재산을 가지고도 주님께 많이 바쳤는데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것이 바로 회개하기 전의 욥의 생각입니다. 깨어지기 전의 욥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는 하나님의 아주 독특한 방법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르는 것처럼 일깨워드리려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도 다 아실 텐데, 왜 우리가 기도하기 전까지 모르시는 척하고 계시는 그러한 느낌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자고 있는 하나님을 깨우듯이 시편에서 “주여, 깨어 일어나소서.” 하나님께서 언제 주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는 이유는 ‘잠들어 있는 네가 일어나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싫어하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명랑성이 아닙니다. 아주 육욕적인 명랑성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아주 나쁜 것입니다. 육욕적 명랑성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것, 씩씩할 수 있는 것, 힘을 낼 수 있는 것, 그러한 것들이 결국은 불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아름다운 덕은 한 기초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날 위해 자기를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마음’입니다.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희망을 싹둑싹둑 다 잘라버리십니다. 돈 찰칵, 아버지의 집 찰칵, 나의 좋은 머리 찰칵, 나의 재능 찰칵, 나를 도와주던 사람들의 연줄 같은 것들을 다 끊으십니다. 고립시켜 버리십니다. 그래서 ‘아무도 의지할 데가 없구나.’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는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고백입니다.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에게 기도하신 것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할 때, 그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나 신성으로는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실 때 그 기도를 들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속에는 자신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이유는 죄도 없으셨는데도 이렇게 기도하셨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선한 의지의 무한한 크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주님의 줄기찬 소원이 꺼질 수 없이 타올랐기 때문에 그 현실과의 격차 속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면서 죄인인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의존의 마음입니다. 주님을 깊이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때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주님을 의존함으로 나는 충분합니다.
(예화) 옛날에 한 교역자가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굉장히 멀었습니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다시피 멀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안 가겠습니까. 동역자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직원들도 가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거기가 어디라고 가는 데 6시간이 걸리고 올라오는데도 6시간이 걸리는데 출근 못 한다. 교회일은 누가 하니. 가지 마라. 정 가고 싶으면 조의금만 보내거라.” 가서 제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누구도 오고 누구도 오고 누구도 온다고 했는데, 너무 힘들고 몸도 약하니까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목사님만 오셨으면 모든 교인이 다 온 것입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모본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때로는 탄식하고 통곡하는데, 예수님은 그러한 것이 하나도 없으셨는데 그 신성을 인성 아래 감추셨다는 이유 하나로 그렇게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면서 일생을 사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본입니다. 그것은 소원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합니다. 여러분, 젊은 사람들에게 꿈이 없으면 그게 살아있는 거냐, 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저도 똑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소원이 없습니까? 그게 무슨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게 산 것입니까? 소원이 없는데 그게 살아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도대체 왜 예수를 믿습니까?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간절한 소원을 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은 한 사람은 엄숙하도록 존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창조하실 때 실수가 없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여러분들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르트르가 말하는 ‘잉여의 존재’가 아닙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데 남은 것으로 생긴 그런 존재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한 명이 죽으면 세계의 의미가 바뀔 정도로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여러분들이 아니면 못하실 어떤 일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영적인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세상이 변한다. 내가 안 태어났어도 이 세상이 아니다. 당연합니다. 자기가 안 태어났는데 이 세상이 그 세상일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내가 안 태어났으면 그 세상은 내가 안 보는 세상이었을 것 아닙니까. 다른 세상입니다. 그러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꼭 필요해서 만드셨고, 내가 없었더라면 세계의 의미가 달렸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필요불가결한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하시기 위해서 나를 창조하셨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나를 살게 하셨고, 왜 태어나게 하셨고, 왜 믿게 하셨고, 왜 구원하셨는가. 그리고 지금도 하늘의 자원과 육체의 자원을 끊임없이 주셔서 나로 하여금 이 생명을 이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소원, 그 뜻이 무엇인가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그것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삶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설교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나에게 숨기지 마십시오. 내가 무지해서 몰랐다면 나를 가르쳐 주십시오. 나도 주님이 나를 보내실 때 불붙었던 그 마음에 나도 불붙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1년을 살아도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 그 기도는 거절될 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여러분들이 그 일을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기도를 거절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목표를 분명히 하고 그것이 자신 속에 타오르는 불이 되도록 그렇게 사는 삶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일 죽음을 맞이해도 가난해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말합니다. 한번 태어난 인생인데 진로와 여러 가지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니 너 하고 싶은 것 해라, 거기에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고 싶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아무리 상관없이 정욕에 미쳐 날뛰는 자기이면, 그것을 따라 살면 그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게 희망이 없고 간절한 소원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송하지만, 심한 말로 좀비 아니겠습니까? 살아있는데, 아무 의미도 없고, 왜 사는지도 모르고 그것을 향해 마음에 불타는 소원도 없습니다. 좀비와 같은 사람 아닙니까? 좀비는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고통도 못 느끼지만 행복도 못 느낍니다. 우리는 고통은 느낍니다. 그러면 우리는 좀비만도 못합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데 그 삶이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무슨 보람으로 그러한 인생을 살아가겠습니까? 떨치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나와서 막 흐느끼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정상입니다. 일 년 365일 지나가도, 설교를 들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마음에 감동도 받지 않고, 아무리 성경을 공부해도 마음에 소원이 생겨나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고 병들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소원이 없는 이유는 마음이 분산된 것 때문이고 또 하나는 믿음의 부족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고, 내 인생은 주님의 손에 있다, 행복과 불행도 주님의 손안에 있다고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소원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해야 소원이 생길 수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불타는 소원이 없다고 하는데, 여러분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마음에는 불타는 소원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다면 여러분들을 태어나게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주 큰 소리로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불타는 소원이 한 개도 없지만, 희망 사항은 많습니다. 집도 큰 데로 가고 싶고, 직장 튼튼하고 능력 있고 성품도 좋고 신앙도 좋고 키가 크고 가문도 좋고, 그런 사람이 올 리는 없지만 그러한 사람에게 시집도 가고 싶고, 차도 바꾸고 싶고, 옷도 사 입고 싶고, 여행도 가고 싶고, 희망 사항은 많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 말고, 불타는 소원 말입니다. 내 인생을 정말 의미 있게 타오르게 하는 소원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분명히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도 불이 생기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마음을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받습니까? 아닙니다. 물론 영국 교회사 같은 곳에 보면 가서 밭에 박혀 있는 나무 둥치를 곡괭이로 캐내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통곡하면서 한 동네가 부흥이 온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그 마음을 전수받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내가 눈물 흘리는 크게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의 은혜를 못 받는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마지막에 도달하는 결론은 여태껏 여러분들이 마음에 대부분 소원이 없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의미의 ‘히케테리아스(ἱκετηρίας)’같은 그러한 소원은 없습니다. 줄기찬 탄원이나 가슴에 불타는 끌 수 없는 열망으로서의 소원은 없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생기겠습니까? 1년 전에도 없었습니다. 3년 전에도, 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없었습니다. 처녀 적에도 없었습니다. 언제 생기겠습니까? 안 생깁니다. 가만히 놔두면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당신을 부어주셔야, 전달해 주셔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을 통해서 전달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가장 탁월한 일은 병을 고치고,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철든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가장 위대한 일이고, 큰 능력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그 안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한 40분 더 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Ⅲ.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소원이 없는 이유는 마음이 분산되어서 의지가 약해지기 때문이고, 그리고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존하게 하기 위해서 일상적인 방법으로 안 되면 그 사람이 애착하는 것을 끊어버리셔서 의지할 데가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진짜 신앙이 있는 우리는 뭔가 불통이 되고 막히는 것 같은 데도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만 의지하라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여서 예수님께만 전적으로 기대면 그 일이 이루어진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소원이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마음에 없는 말을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모든 말씀에는 하나님의 눈물과 탄식과 기쁨과 환희가 담겨져 있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전수받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부어집니다. 철이 듭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소원을 마음에 간절히 품고 열렬한 기도로 한 해를, 아니 일생을 하나님 앞에 불꽃같이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와 소원2 (2022.01.18._새해말씀사경회_오전)
3. 소원과 간구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쌓이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다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1-28)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여기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는 오늘 성경에 보면 가나안 여자라고 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에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이라 되어 있습니다. 즉, 페니키아 쪽에 사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페니키아 지방에 있는 항구도시였습니다. 좀처럼 예수님이 거기까지 가시지 않으셨을 텐데, 거기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벼랑 끝에 서 있던 한 여자는 바로 자신의 딸 때문에 벼랑 끝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딸이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Ⅱ. 소원과 간구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소원과 간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또 이렇게 간절히 간구하고 소원하는데에 필요한 믿음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가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 소원을 통해서 간절히 간구하는 믿음을 하나님께 기뻐하셔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정신병은 크게 세 가지 원인입니다. 뇌 세포에 물리적인 원인이 있어서 정신병이 오는 것과 정서적인 큰 충격으로 정신병이 오는 경우가 있고, 마지막 세 번째 영적인 현상 때문입니다. 귀신이 들려서 결국 정신병 증세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경우에는 진짜 그 귀신을 쫓아내지 않고는 고쳐질 수 없는 그러한 질병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예수 지나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쪽 여자였고, 그 지방에서 살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주로 유대 땅에 두루 다니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여자는 틀림없이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소문 중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큰 권세로 귀신을 내어 쫓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여자는 자신의 커다란 문제인 자신의 딸의 문제를 주님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가운데 놀라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A. 간구하는 여인
예수님이 바로 자기가 사는 그 지방에 오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여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겠지만, 이 여자는 어찌하든지 그 지경에 나아와서 예수의 귀에 들리도록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나이다.” 울부짖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호칭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윗의 자손 중에 한 아들이 태어나서 이스라엘을 재건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소위 이야기 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존재는 메시아적인 기능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이 아직 누구이신지 정확하게 몰랐지만, 확실한 것은 예수님이 매우 특별한 분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오시는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믿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문제를 위해 해결해 주실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불쌍한 것은 자기가 불쌍한 것이 아니라, 자기 딸이 불쌍한 것 아닙니까? 흉악하게 귀신 들려서 사람 구실도 못하고 살아가는 그 딸이 불쌍한데, 왜 이 여자는 자기를 불쌍하게 여겨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이 여자의 마음속에 있는 불타오르는 소원이 딸의 비참함이 자신의 불행으로 여기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 여자가 엄마인데 딸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엄마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아이가 귀신 들렸을 때 저 멀리 갔다가 버리고 온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자기 딸의 비참한 귀신 들린 상황을 자신에게 적용시켜서 주님 앞에 이렇게 울부짖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진짜 ‘나’라고 하는 존재의 많은 인생의 문제는 내 문제만이 아닙니다. 가족들이 얽혀있고, 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예전에는 나 밖에 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나니까 이게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가족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가족의 영혼을 위해서도 간구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이웃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게끔 우리의 관계의 범위가 넓혀지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랑의 확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확장은 우리에게 반드시 더 많은 소원을 가져옵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기도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고, 안 하면 안할수록 자기를 위해서조차 기도할 것이 없어지는 것이 기도생활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은혜가 없다는 것이고, 은혜가 없다는 것은 마음의 소원이 없습니다. 그리고 설령 소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양심이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구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소원이 있어도 그것이 주님을 부르는 계기는 되지 못합니다.
이 여자는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고 자기가 왜 불쌍한지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겠는데,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증상이 매우 험해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심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귀신이 매우 매우 활동적이어서 비정상적인 활동을 너무나 심하게 하기 때문에 그 형편이 매우 흉악하게 되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한번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말고 여러분의 이야기로 들어보십시오. 몇 명의 자녀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딸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귀신이 들렸습니다. 많은 방법을 써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딸이 귀신 들리자마자 이 여자가 예수님만을 찾았을 리는 없습니다. 원래 신앙이 없는 여자였을 것입니다. 소문을 듣고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할 수 있는 한 예수의 소문을 많이 내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 소문이 어떤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서 자신의 상황과 맞물리면서 폭발하는 믿음을 만들어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여자는 어느 시점에 자기 딸이 귀신 들린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증상이 심해져서 매우 험해졌습니다. 아마 많은 민간요법들을 동원해 보았을 것이고, 용하다는 의사나,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까지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벼랑 끝에 몰렸습니다. 이 여자에게 자신이 살고 죽는 것은 기도제목도 아니었습니다. 흉악하게 귀신 들린 이 딸이 정상적인 삶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좋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딸의 이 비참한 상황이 그녀의 유일한 소원이 되어서 가슴에 불타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가 지나신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 만나기 어려운 예수,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예수, 병든 모든 사람을 고치고 눈먼 자와 소경, 귀신 들린 자도 온전케 하신다는 예수의 소문이 온 땅에 퍼져 페니키아까지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그랬나보다 생각했지만, 이 여인은 자신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간 문제와 관련된 소식이었기 때문에, 이 여자의 마음은 불타올랐습니다. 마치 화약에 불을 붙힌 것처럼 그의 마음은 폭발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께 갔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로 에워싸인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뒤에서 그녀는 앞 서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든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개의치 않고 오직 예수 들으시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나이다.” 거의 울부짖으며 예수 그리스도께 간절히 외쳤습니다.
B. 거절하시는 예수님
그런데 그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절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난관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렇게 부르짖었는데도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자가 딱 한번만 예수 그리스도를 불렀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녀는 오늘 처음 취직한 보험회사 직원이 가가호호 방문하며 벨을 누르는 것 같은 조마 조마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아뢰고, 해결 받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여자는 벼랑 끝에 서 있었고, 더 물러날 곳도 앞으로 나아갈 곳도 선택의 다른 여지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를 간절히 불렀습니다. 상식적으로 한번만 불렀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지 않고 지나가셨으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더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다윗의 자손을 외쳤을 것입니다.
실망스러운 것은 첫 번째 난관이 예수님의 대답이 없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울부짖듯이 부르짖는데 예수님은 아무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두 번째 난관은 제자들의 냉대였습니다. 그렇게 울부짖으면 혹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을 부르며 “예수님, 아무래도 너무 가엾어 보이는 여자가 저렇게 울부짖으며 예수님을 찾습니다. 한번 만나 보시죠.”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자들의 마음은 응답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매우 유사하였나 봅니다. 여인이 부르짖어도 제자들은 티끌만큼 도와주지 않았고, 아마 귀찮을 정도로 여러 번 부르짖으니까 제자들은 정 반대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녀를 내 보내소서.” 쉽게 이야기 하면, 저렇게 귀찮게 우리 뒤에서 소리소리 지르는 저 여자를 내쫓아달라고 청원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마음에는 이 여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천국가면 왜 그랬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이해가 안 갑니다. 결국 은혜를 많이 받고 마음을 잘 지키며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큰 능력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는가, 우리는 참 이상하게 보입니다. 아마 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이 이 세상의 왕이 되어서 오는 나라라고 아직 생각하였을지 모릅니다. 왕이 되실 분이 어떻게 저 하찮은 여자를 만날 것인가, 생각하였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이 여자는 이중으로 냉대를 받았습니다. 일체 응답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 냉대를 받았고, 또 부르짖으면 부르짖을수록 제자들은 “저 여자를 쫓아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냉대를 받으면서 이 여자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울부짖는 그녀에게 내쫓아버리라고 간청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호응하듯이 예수님의 말씀이 뜻밖에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여자의 가슴에 세 번째 대못을 박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곳으로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너는 수로보니게 여인, 가나안 여인이다. 너는 이방의 여자다. 나 예수는 이스라엘에 잃어버린 양들을 챙기도록 보냄을 받았다. 너는 외인이다. 내가 너에게 베풀 은총이 없다.’ 이런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여자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일이었고, 가슴을 후벼파는 일이었습니다. 자, 이 정도면 이제 그만둘만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아무리 비참한 가운데 있어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의 거절을 당했고, 마지막에는 “너는 외인이다. 이방인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 보냄을 받았지, 너같은 것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며 가슴을 후벼 팔 때쯤 되면 아무리 비참한 상황에 있어도 ‘에이씨’ 하는 마음이 왜 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접고, ‘아, 그렇구나. 결국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는 예수에 관한 소문은 거짓이었어.’ 심지어는 ‘내쫓아줄 능력이 없으니까 저렇게 핑계를 대나보다.’라고 접고 돌아갔으면 이 여자의 인생은 상처밖에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흉악하게 귀신 들려있는 그 딸, 점점 증상이 심해져 가서 도저히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삶이 전개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예수께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했으니 자신은 이제 정말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굴러 떨어지는 중이라고 하는 생각 속에서 절망을 키워갔을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있어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해결 받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인데 문제가 있을 때 주님 앞에 기도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잠시는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문제가 계속되고 힘들어지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하면, ‘내가 더 기도해야 할 텐데….’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만약 그러한 마음이 전혀 한 번도 들지 않는다면 그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없습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주님을 멀리 떠나서 은혜에서 멀어진 삶을 산다 할지라도 그 마음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이렇게 예수님이 대 못을 박듯이 이스라엘의 잃은 양 이외에 모냄을 받지 않았다, 너는 이스라엘의 잃은 양도 아니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냐고 이렇게 가슴을 후벼 파는 말씀을 하셨는데도 이 여자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소원이 워낙 강하게 타 올랐기 때문에 이 여자가 이렇게 매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소원이 없이 산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 우리의 운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바는 결정된 우리의 운명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사랑해야 할 바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개척해 가면서 전개되는 새로운 운명,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 이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곧 ‘아모르 파티’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주 깊은 철학적 내용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결정된 운명, 그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딸은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고 나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다.’ 이것을 결국 받아들이고 체념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면 이 여자의 믿음이 이 복음서 한 복판에 이렇게 중요하게 떠올랐을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그러한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예수를 만나면 내 딸은 비록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지만, 내가 예수를 만나면, 예수가 나에게 능력을 베풀어 주시면, 내 인생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을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정해진 팔자 같은 운명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예수를 힘입어 내가 바꿔 놓을 수 있는 운명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여자였던 것입니다. 이게 아무르파티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이 여자는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스라엘에 잃어버린 양 이외에는 내가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하는 가슴을 후벼 파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 여자는 짧게 응답했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그리고 간절히 다시 한 번 빌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길었지만 이 여자의 말은 짧았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했다고 했으니 이것은 결국 뒤에 있다가 그 인파를 해치고 예수 앞으로 달려 나왔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께 엎드려 절하며 말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이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고백을 읽습니다. “주님, 나는 더 이상 다른 곳에 갈 데도 없고 그리고 다른 누구에게 부르짖을 수도 없고 다른 데 가서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길도 없습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비참한 형편을 헤아려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여자의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이 여자의 소원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원이 너무 크면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 소원이 가슴에 열렬히 불 타오르면서 이 여자는 예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논쟁해서 예수님을 설득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또 이 여자에게는 그렇게 할 권한도 없고, 그럴 수 없는 능력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잃은 양 이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는 이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나는 어떻게 예외가 안 되겠습니까? 나는 주님 이외에 나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데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여자가 매달렸습니다. “주님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기도를 하는데 응답을 못 받는 우리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난관을 만날 때 쉽게 꺾이는 것입니다. 한 고개는 넘어갑니다. 두 고개 째 꺾입니다. 기도를 했는데 주님이 대답이 없다고 생각하면 곧 꺾입니다. 이러저러한 일들로 인해서 우리의 기도가 거절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쉽게 꺾어집니다. 결국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거기까지 밖에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했는데, 그것은 정말 절박한 소원인데 어느 만큼 기도하다가 꺾어졌는가 하는 그것을 보면서 우리의 소원이 줄기차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의 문제라는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어느 순간에 뒤로 물러가게 될 때 간절한 소원이기는 한데,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부르짖지 않고 실망할 때, 바로 내려놓는 그 지점이 우리의 믿음의 지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다가 그만두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로 하여금 “네 믿음이 여기까지 이니라.”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상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보다 더 나은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번째 난관을 여자에게 주십니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항거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줌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의심이 들 정도로 인격 모독적인 말언입니다. 여기에서 ‘개들에게’라고 하였는데, 그리스어로 ‘큐나리오스(κυναρίοις)’인데, 그냥 잘 생기고 늠름한 개가 아니고 개의 새끼, 강아지입니다. 개의 구실도 못하는 강아지입니다. ‘큐나’라고 하는 말이 ‘지소사’입니다. 작은 것을 이야기 할 때 사용합니다. 그래서 개 중에서도 아주 볼품 없고 체구가 작거나 아니면 나이가 어린 개 새끼를 가리킵니다. 그대로 보면 “자녀의 떡을 취하여 아주 작은 개들에게(혹은 개 새끼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이나 지금 우리나라나 ‘개’라고 하는 표현은 그렇게 좋은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가치 없고 어떻게 보면 분수를 모르고 지저분한 그러한 것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은 다릅니다. ‘개 이득이다.’ 그리고 ‘개 좋음’ 이런 말을 사용합니다. 이 때 ‘개’는 영어로 ‘very’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매우, 개 이득이다. 진짜 개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놀랄만한 이득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엄마 개 좋아.”라고 한다면 “나는 엄마가 너무 좋아.”라고 하는 뜻입니다. “오늘 밤 개 맛있어.” 그 ‘개’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지조 없고, 뭐 등등 분수모르는 그러한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천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가슴을 후벼 판 것이 아니라, 가슴에 구멍을 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심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이, 그 좋으신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가슴을 후벼 팝니다. 가슴을 후벼 판 대상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었으면 보는 우리가 시원하게 박수를 날렸을 텐데, 이 여자는 그렇게 외식하고 위선하는 여자가 아니라 그래도 비교적 진실한 여자입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딸이 귀신이 들려서 그 증상도 매우 흉악해서 인생의 벼랑 끝에 내 몰려진 여자였습니다. 어찌하든지 예수님께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가득 찬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 도움을 구하였는데 어쩌면 그렇게 하십니까. 냉대하며 일체 대답을 아니 하시고, 또 제자들이 와서 저 여자를 당장 내쫓아달라고 오이려 예수님께 간청하지 않습니까? 그러한가 하면 예수님이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 온 사람이지, 너 같은 인간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고 지금 여기에 와서는 “너는 개다.” 그리고 “내가 주는 이 은총은 너 같은 여자가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비인격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품과 과연 어울리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이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차갑게 말씀하셨습니까?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고 불쌍한 많은 사람을 자비롭게 대해 주셨던 예수님이, 따뜻하게 대해 주셨던 예수님이 왜 이 여자에게만 유독 이렇게 심하게 말씀하셨을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이 여자의 믿음을 더욱 더 불타오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몰라서 시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고, 진짜 이 여자가 비참하고 미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이 여자보다도 훨씬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이 득실하였습니다. 세리였던 사람, 창녀였던 사람, 간음하고 온 사람, 그리고 토색질하고 왔던 세리들까지 예수님 주위에서 모두 용서를 받고 긍휼히 여겼는데 이 여자만 유독 페니키아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이렇게 구박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 여자의 믿음을 불일 듯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시련에 시련을 더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안 되도 우리에게 유익이 있습니다. 어떤 유익이 있는지 아십니까? 우선 하나님 앞에 기도를 안 하면 우리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다. 마음의 소원을 품게 됩니다. ‘참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어느 순간에 참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왜 입니까? 너무나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게 됩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하는데 기도가 됩니다. 그런데 덜컥 하고 난관이 나타납니다. 기도하면 뭔가 나를 가로 막고 있는 것들이 무너지면서 빛이 들어와야 하는데 오히려 정 반대로 그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불길한 사인이 덜컥 하고 들어옵니다. 그때 거기에서 기도를 멈춥니다. 혹은 그것은 뛰어 넘었습니다. 더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더 큰 난관이 나타나면서 이 기도가 응답될 리가 없다는 사인이 더 강력하게 들어옵니다. 거기에서 기가 죽습니다. 결국 더 이상 기도할 기력을 잃어버립니다. 거기에서 주저앉아 버립니다. 그렇게 해도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 나의 믿음이 여기까지 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기도하면서 깨닫게 됩니다.
줄기찬 소원이 불타는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여자의 믿음이 맨 처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할 때는 어느 정도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난관을 겪으면서 이 여자에게는 그 마음속에 있는 믿음이 보통 믿음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기도가 응답될 수 없다고 하는 사인이 네 번이나 전개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 없으심, 제자들의 간청, 예수님의 차가운 말씀, 마지막 네 번째 말씀 “너는 개다. 내 떡은 나의 자녀들을 위한 떡이지 개들을 위한 떡이 아니다.”라고 했을 때 이것은 넘기 어려운 가장 높은 장벽이었습니다. 그것을 놓고 이 여자는 꺾어질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면 하실수록 더욱 열려한 믿음이 불타올랐습니다.
C. 믿음을 보여준 여인
그리고 이 여자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이야기를 이렇게 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만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내가 이스라엘의 자손이 아니니, 내가 개라고 하는 당신의 말씀이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여 생각해 보옵소서. 자녀들은 상에서 밥을 먹지만 상 아래에서는 개들이 자녀들이 흘린 음식을 먹지 않습니까? 그렇게라도 나를 먹여 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었으니 먹여달라고 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여기에서 ‘떡’은 빵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넓적한 빵입니다. 사실 등가번역을 하면 밥입니다. ‘자녀의 밥을 취하여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주식으로 먹는 이 밥은 전적으로 자녀를 위한 것이지, 개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여자는 모두 받아들이면서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면서 “나에게 주실 은혜가 남지 않았습니까?”라고 주님 앞에 간절히 울부짖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여자의 이 반응을 보셨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이 여자는 전적으로 예수님께만 기대어 자신이 무슨 권리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여자는 우리가 보기에 정말 큰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 타오르는 소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제껏 해결하지 못하였던 자신의 인생의 문제, 자기를 벼랑 끝까지 몰아 세웠던 딸의 귀신 들린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와서는 예수님 이외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하는 고백으로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간절히 매달리고 있으니, 이 여자는 자신의 믿음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것은 관심도 없었습니다. 믿는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얻을 분이 예수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에 이 여자는 “옳소이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라며 주님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대한 절대 의존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최고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최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간절함입니다. 소원이 얼마나 불탔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소망이 불탔지만, 그러나 문제를 해결할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은총을 구하였습니다.
천사를 꺾는 기도는 힘 센 기도가 아닙니다. 천사를 꺾는 기도는 애절한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은 얍복강가에서 기도하던 야곱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아주 거대한 복을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형과의 문제였습니다. 결국 자기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고, 형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아버지의 마음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가서 복은 받았지만 이제 도저히 할 말이 없었습니다. 어떤 변명으로도 자신의 비열한 행동을 정당화 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야곱은 형이 자신에게 복수할지 모르니까 내가 가서 형과 가족들을 죽여 버리고 후한을 없애리라 할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돌아오니 해결의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도 모든 지혜를 짜서 죽어도 좋은 가축들과 종들을 맨 앞에 보내고, 덜 사랑하는 순서대로 앞으로 다 보내었습니다. 예물도 보내고, 형에게 용서해 달라고, 그런데 형의 마음은 추어도 꺾어지지 않았습니다. 철천지원수였습니다. ‘만나면 죽여 버리리라.’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까지 들었으니 야곱의 마음은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도저히 모사꾼으로 일평생 살았지만 이것은 자신의 힘으로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 천사를 보자 ‘아, 저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면 해결을 받을 수 있겠구나.’하고 자기를 도와달라고 천사와 더불어 씨름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꺾이지 않는 혈기, 자신의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는 그것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천사가 그렇게 힘이 없는지 다윗과 더불어 씨름을 했는데 야곱이 워낙 단단하게 노동으로 단련된 몸이어서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환도 뼈를 내리쳤습니다. 환도 뼈는 허리에서 엉치로 이어지는 이 부분입니다. 거기를 때린 것입니다. 뼈가 어긋났습니다. 거기가 어긋나고 나니까 온 전신의 힘이 쫙 빠지면서 도저히 천사를 붙들고 더 이상 매달릴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야곱은 거기에서 호세아서에서 보면 울며 기도하였다고 나옵니다. 거기에서 사실은 자신이 꺾어지면서 울며 통곡하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였겠습니까? 이제는 천사를 붙들 힘조차 없습니다. 천사는 가겠다고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가 해볼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풀썩 주저앉아 손과 팔의 모든 힘까지 빠진 채로 통곡하고 있는 야곱을 생각해 보십시오. 눈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원통하도다. 내가 왜 천사에게 졌을까?’ 그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천사라도 붙들고 늘어져 보려고 했는데 그 마저 붙들 힘이 나에게 없으니 하나님, 이제 저는 주님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하면서 눈물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이 야곱입니다.” 사실은 ‘붙잡았다.’라고 하는 뜻이고, 그 속에는 ‘사기꾼’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이제는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안 져주셨으면 무슨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럴 리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까지 놀라운 이름을 붙여준 근거가 무엇입니까? 야곱의 힘으로 대들고 정욕으로 대들고 자기의 가진 꾀로 하나님께 대들 때에는 하나님이 지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울며 통곡하며 주 앞에 가난한 마음으로 은총을 간절히 바라니까, 하나님께 “졌다.”라고 말씀하실 정도인 것입니다. 그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자녀들과 어떠한 일로 다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엄마 이거 해 줘.” “안 돼.” 절대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매달립니다. 그리고 바득바득 우길 때에는 오기가 생겨서 아이와 대판 싸우고 절대 안 들어줍니다. 그런데 문을 굳게 닫고 밥도 안 먹고 계속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엄마 마음이 사르르 녹습니다. ‘우리 딸을 가슴 아프게 하면서까지 끝까지 반대해야 할 일인가?’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문을 두들기며 “딸아, 엄마가 졌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원하시는지 결정적으로 보여주시는 대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여자가 말합니다. “옳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이 여인은 ‘저는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만 보내셨는지 주님이 저를 정말 미워하시는지 정말 제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말 주님 밖에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주님 나에게 아주 작은 은혜라도 베풀어 주십시오.’ 이 여인의 마음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에게 얻어맞고 주저앉아서 더 이상 자기가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울면서 통곡하며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던, 회개하던 야곱의 마음과 똑같은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놀랍게 예수를 의지하게 됩니다.
언제입니까? 여러분들이 언제 가슴이 녹아내릴 정도로 주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꽉 찼던 때가 언제입니까? 내가 잘 한 것, 제법 잘 살아온 것, 훌륭하게 주를 섬긴 것, 많은 유혹도 뿌리치면서 믿음으로 여기까지 걸어온 것 잘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오늘 하나님의 은총을 덜 사모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나에게 양식이 없습니다. 내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서서 내 마지막 희망은 주님이 나를 조금이라도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주님이 나를 가엽게 생각해 주시는 것입니다.’라고 기도할 때 우리의 온 마음이 형체를 잃어버리고 물처럼 녹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싶다.’고 하는 마음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의 손에 맡겨 녹아내리는 마음으로 그분의 손에 내 인생을 드려 주님이 다시 빚으시는 그 인생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 운명은 결정된 운명이 아니라, 내가 예수와 함께 개척해가는 운명입니다. 그 운명을 아모르파티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삶의 문제를 대할 때 가슴이 뜁니다. 왜입니까?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제껏 보지 못했던 어떤 놀라운 일을 내게 보여주실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나와 함께 어떤 내 인생을 새롭게 만들어 가실 것인가?’ 라는 것으로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안하게 이렇게 있는 것보다 새롭게 도전하고 새로운 기도제목을 만나고, 거기에서 흩어졌던 나의 마음을 모으고 주님께 내 마음을 쏟아놓고,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의지하며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롯이 구속한 주만 바라보며 내 마음에 그분을 가득 채우는 시간을 갖는 것이 시련의 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너희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뻐하라.”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시험의 때가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으로 꽉 차고, 세상도 없고 나도 없이 오직 그분의 은총만을 의지하는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온전히 그분께 매달리는 일들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끊임없이 흩어지고 나누어지고 찢어져서 공간속에 뿌려지는 우리의 마음은 결국 내가 누구인가 찾지 못하게 할 정도로 분산되는데, 하나님이 내 인생의 어려움을 통해서 나의 조각났던 마음을 한 곳에 모으시고 나로 하여금 간절히 주님만을 앙망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회로 삼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꺾어 놓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완고함과 고집, 이것으로서 주님을 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주저앉아서 이제 의존하던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팔뚝의 힘까지 잃어버리고 주님의 처분만을 구하며 자신의 인생의 이 벼랑 끝에서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칼을 들고 다가오고 있는 저 형을 대면해야 하는 문제 속에서 자기를 구원할 분이 주님 밖에 없음을 깨닫고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보고 하나님이 “네가 이겼다. 네가 하나님을 겨루어 이겼다.” 결국 그것은 이스라엘의 훌륭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그때가 그립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언젠가 그렇게 기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기도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세상도 없고 나도 없이 이 가나안 여인처럼 수로보니게 여자처럼 인생의 벼랑 끝에서 몸과 마음을 모두 쏟으며 몸과 영혼을 모두 바쳐서 우리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 그리고 그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새로운 삶의 가능성, 변화되는 나의 인생의 운명, 예측 불가능한 나의 인생의 새로운 앞날을 발견하고 그렇게 해쳐가는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렇게 만들어져가는 운명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있고, 경배가 있고, 우리의 마음에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말씀을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서 올 한 해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큰 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와 소원2 (2022.01.18._새해말씀사경회_저녁)
4. 소원과 간구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1-28)
녹취자: 이새봄
I. 본문해설
인생의 벼랑 끝에 섰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정신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 여자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이 여자는 예수께 나와서 간절히 간구하여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바로 그 여자가 가나안 여자라고 되어 있는데 그 마가복음에 보면 수로보니게의 여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페니키아 지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항구 도시였고 그리고 페니키아 지방에 속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로 가시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으셨을 텐데 예수님이 거기까지 올라가셨고 이 여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Ⅱ. 소원과 간구
우리는 이 여인의 이야기 속에서 삶의 벼랑 끝까지 내몰린 여자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지 교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원과 간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한 여자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이제 이 여자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게 결국 이 여자는 자기의 형편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주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오’라고 부른 것은 바로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이스라엘이 고통 받는 때에 다윗의 자손 중에 한 사람이 나와서 자기네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아적인 존재로서 큰일을 행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영광을 다시 되찾아서 번영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몰랐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예수님이 그의 인생에 벼랑 끝에까지 내몰린 자신의 인생에 구원자라고 하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그래서 결국은 이 여자는 두 가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가 자신을 구원해줄 분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자기를 인생의 이 벼랑 끝에 몰린 처지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하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이 분밖에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A. 간구하는 여인
자, 이 아이 딸이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정신병은 크게 세 가지인데 하나는 뇌세포가 물리적인 문제가 생겨서 오는 정신병이 있고 또 하나는 정서에 큰 충격을 받아서 오는 그런 정신병이 있습니다. 근데 세 번째 경우는 귀신에 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말하자면은 극단적인 경우겠습니다. 귀신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녀가 자신의 딸의 상황을 표현하기를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흉악하다’라고 하는 것은 귀신이 흉악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귀신이 착한 귀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 흉한 귀신이지만 흉악하다고 하는 것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도저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정신병이 아니라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아주 커다란 정신병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엄마로서 자녀를 위해서 무엇인들 안 해 봤겠습니까 민간의 모든 요법을 동원했을 것이고 용하다는 퇴마사는 다 쫓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병세는 매우 깊어졌고 이제 이 여자는 더 이상 이 딸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갖다가 버렸더라면 그래서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애달을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딸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왔는데 사실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딸의 문제였습니다.
이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얽혀 있는 많은 사람들과의 문제입니다. 나 하나가 별일 없어도 우리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죽음의 위협에 처하거나 아니면 이런 정신병에 시달리게 되면 그러면 내 인생에도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있는 한, 더더욱 내 주위에 있는 가족들이나 내가 아는 사람들의 삶의, 삶의 충격이 내게 가져다주는 요동치는 영향은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결국 이 딸의 문제가 이 여자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예수께 나와서 예수께 간절히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문제는 두 가지, 세 가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린 것. 딸이 그 흉악한 귀신에서 풀려나와 온전하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 이 여자가 원하는 소원의 전부였습니다. 이 여자에게 어찌 또 다른 소원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모두 그 아래로 들어가는 소원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소원이 이루어져도 딸이 계속해서 흉악하게 귀신 들려 있는 한 그녀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밑바닥부터 흔드는 가장 엄청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은 자신의 인생은 결코 평안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병을 고치고 그들을 치료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고 그중에는 귀신 들린 사람들이 나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꽉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소원으로 마음이 꽉 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소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헤아릴 수 없이 수없이 많은 건 아닙니다. 진짜 소원은 한 가지입니다. 한두 가지. 그것이 없으면 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는 여러 개가 아니라 한 개, 한 개입니다. 그런 문제를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습니까?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여자에게 소원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두 가지를 말하겠습니까? 세 가지를 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사오니 주님 고쳐주시옵소서.” 이것 이외에 이 여자에게 소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소원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간구가 간절하지 않은 이유는 결국 소원이 크지 않기 때문이고, 간구하다가 그만두는 것은 소원이 줄기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소원은 억제할 수 없이 솟아나는 소망입니다. 이 소원이 좌절될 때 이 소원과 현실의 격차가 클 때 우리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범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B. 거절하시는 예수님
이 여자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구원자라는 사실과 자신의 인생의 벼랑 끝에까지 내몰린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오직 그분밖에 없다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갔습니다.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뒤에서 큰 소리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반응이 없으셨습니다. 이게 이 여자가 경험한 첫 번째 난관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자신의 비참한 형편을 토로하며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아마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딸이 귀신 들려 있다는 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으며 자신이 그렇게 비참한 여인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커다란 이야기거리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주님은 일체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난관이 닥쳤습니다. 예수님이 멀리 있어서 못 들으셨으면 가까이 있는 제자들도 그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저 가엾은 여자가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데 한번 만나주시죠. 혹은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겠습니까?”라고 할만한데 이 제자들은 한 술 더 떴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청을 드렸습니다. “예수님,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는데 그를 보내소서.” 말은 곱게 했지만 “쫓아버리시옵소서”라고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려도 이 여자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고 아마 이것은 한 번에 그쳤더라면 제자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무 대답 없이 앞만 보고 걸어가셔도 이 여자는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흉악하게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했고, 이것이 너무너무 성가시스러웠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요청해서 자기들의 말은 듣지 않으니 예수님이 권위 있게 물리치셔서 저 여자를 쫓아버려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게 이 여자가 경험한 두 번째 난관이었습니다.
웬만해서 이 여자는 물러날 기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나서셔서 이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집에 잃어버린 양 이외에 다른 곳으로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 여자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 여자였습니다. 페니키아의 여자였고 그리고 가나안 여자였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내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그 능력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 쓸 것이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쓰지 않을 것이니 내가 이스라엘이 아닌 사람이 아니니 어찌 나에게 이런 은혜를 구하느냐’라는 타박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여자가 직면하게 된 세 번째 난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자는 큰 실망을 안고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간절히 부르짖었지만 수없이 간절히 울부짖으며 예수를 불렀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이 없으셨고 제자들도 이 여자를 쫓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 여자를 불쌍히 여기시기는 커녕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내가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하면서 매정하게 잘라내셨습니다. 자, 이 정도면 이제 이 여자가 포기하고 갈 만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끝까지 기도하지 못하는 적이 얼마나 많은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맨 처음에는 간절한 마음이 생겨서 기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은 더 이상 기도할 마음이 들지 않아서 그만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근데 이 여자는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의지의 문제입니다. 죄가 마음에 있는 죄가 실제 실행으로 옮겨지려고 할 때에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가 마음 안에서 계속 사라지지 말고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적당한 기회를 만나면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솟구쳐서 그래서 자기가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해서 죄를 지어야 됩니다. 그래야지 결국은 죄가 바깥으로 나와서 삶으로 표현이 되는 겁니다.
똑같은 원리가 결국 이 기도 속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앞에 자기가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려고 하면은 결국은 두 가지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는 어떤 기도의 소원을 품고 그 소원이 사라지지 않게끔 자신 속에서 계속 살아있어야 됩니다. 그 기도의 소원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딱 때를 만나면 그 소원이 분출하듯이 그 의지가 작동을 해서 그것을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로서 표현할 수 있는 순종이 필요한 겁니다. 그것이 반복될 때에 우리 속의 소원은 계속 불타오르게 되고 결국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이 여자는 세 번이나 난관을 겪었습니다. 부르짖어도 주님은 대답이 없으셨고 부르짖어도 제자들은 이 여자를 쫓아버리고자 했고 더 부르짖으니 이번엔 예수님이 직접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잃어버린 이스라엘에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보냄을 받았지 너 같은 이방 여자를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매정하게 끊으셨습니다. 이 정도쯤 되면 뒤로 물러설 법합니다. 그리고 누가 보더라도 아무리 어려움에 처해 있어도 사람에게 자존심이 있는데 이렇게까지 대접을 받았으면 아마 낙심하고 돌아설 만합니다.
근데 이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 여자는 이 절체절명의 위험한 순간에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와서 다시 달려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께 절했습니다. 그리고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한 번 더 말합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결국 예수 그리스도 뒤에 있어서 그 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다가 예수님이 “나는 너 같은 사람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게 아니다”라고 말하자 이 여자는 달려와서 예수 앞에 절하며 그리고 틀림없이 엎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간청하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토를 달거나 논쟁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문제는 그렇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접고 그리고 “오직 예수님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이 여자의 심정이 되어서 한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이렇게 세 번이나 커다란 난관을 만나고 예수께로부터 차가운 냉대를 받았을 때에 과연 여러분들 주님 앞으로 달려가서 포기하지 않고 엎드리며 “주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라고 할 만한 믿음이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이토록 간절하게 매달리는데 이 여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거는, 여기서 ‘개’라고 하는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에서나 지금 우리나라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개’라고 하는 뜻은 별로 좋은 뜻이 아닙니다. ‘개’라고 하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모욕입니다. 근데 요즘은 좀 바뀌고 있습니다. 개이득, 개이득, 개꿀, 그리고 개좋아. 그때 그 ‘개’는 우리가 말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영어로 ‘베리(very)’, ‘매우’ 그런 뜻입니다. 개이득, 그러니까 굉장히 이득이다. 개좋아, 나 엄청 좋아. 그런 뜻입니다. 근데 여기선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냥 ‘개’입니다. 멸시가 포함돼 있는 겁니다.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는 그런 무도한, 분별없고 무도한 사람을 가리키는 비하어입니다. 더 재미있는 거는 여기에 나와 있는 이 ‘개’라고 하는 그 그리스어가 ‘개’가 아니라 개 중에서도 이렇게 늠름하고 잘생긴 큰 개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지소사입니다. 지소사가 붙었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작은 개’를 얘기하는 겁니다. 크기가 작은 개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그 개가 아직 어려서 개다운 개가 되지 못한 그 개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개만도 못한 그런 형태의 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개 새끼입니다. 이 작은, 작은 개 새끼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이 여자를 개로 비유하면서 자녀의 떡을 취해서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여기서 떡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등가번역을 하면은 밥이라는 게 됩니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의 주식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로 지금 말하자면은 ‘흰 쌀밥을, 자녀의 흰 쌀밥을 뺏어서 그래서 개 새끼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그건 옳은 것이 아니다’라고 이 여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건 예수님이 왜 그러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그렇게까지 대못을 박다가 아예 이 여자의 가슴을 후벼 파듯이 이렇게 모욕적으로까지 이 여자를 몰아붙이실 정도로 이 여자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답은 예수님이 이 여자를 무시하거나 혹은 멸시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종족의 편견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이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의 효과가 모든 사람에게까지 다 그를 믿는 사람에게 미쳐서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는 이방인도 없고 유대인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들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이렇게 쳐다도 안 보시고 제자들은 내어 쫓으라고 예수님께 간청하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이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대못을 받으시고 마지막에 그래도 이 여자가 자기 좀 도와달라고 애원을 했더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줌이 마땅치 않다 라고 하며 가슴을 후벼 판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결국은 내게 그렇게 귀신들린 자식을 고쳐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능력을 덕 입을 사람은 자녀들이지 개가 아니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이 여자의 가슴을 후벼파시기까지 하는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이 여자의 마음에 믿음을 끊임없이 더 불러 일으키시기 위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 속에 묻혀 있는 그런 믿음이 끊임없이 난관을 통해서 작동하고 작동해서 끌수록 끌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 치열하게 타오르는 불길처럼 이 저 여자의 마음에서 활활 타오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예수를 통해 경험하고 나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이 예수를 열렬히 증거하는 그런 증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절하셨지만 이 여인은 주님께 다시 한 번 도와달라고 구했고 예수님은 대못이 박힌 이 여자의, 박혔을 이 여자의 마음을 후벼파듯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꺾어졌더라면 아마 이 이야기는 성경에 실릴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C. 믿음을 보여준 여인
그러나 이 여자는 바로 예수님의 이 엄청난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줌이 마땅치 않다”라고 하셨을 때 이 여자는 재빨리 개와 자녀들이 함께 양식을 먹는 광경을 떠올렸습니다.
방식이 달랐습니다. 자녀들은 상에다가 밥을 차려주고 자녀들이 다 먹고 자리를 뜨고 일어나면 결국 주인은 혹은 일하는 사람은 자녀들이 남긴 밥을 개밥 그릇에 담아서 개에게 던져주면 개가 그걸 먹었던 것입니다. 개가 먹은 밥은 그 주인의 자식들과 함께 먹은 밥이 아니었습니다. 지위가 달랐기 때문에 한 상에서 식구처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개가 엎드려서 먹는 그 개밥은 처음부터 개밥으로 생산된 밥이 아니라 지금처럼 개사료로 따로 나온 것이 아니라, 주인이 먹다가 다 끄적거리고 남긴, 자식들이 그만 먹겠다고 숟가락을 내려놓은 그 밥을 개가 먹었던 것입니다.
광경을 떠올리면서 이 여자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당당하게 주인의 자식들처럼 그렇게 주님의 상에서 이렇게 귀신 들린 자기 딸이 낫게 되는 이 생명의 떡을 먹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 남아있는 작은 은총의 한 조각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받아먹는 개처럼 자기가 그 은혜를 입어서 자기 딸이 이렇게 나을 수가 있다면 그러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라는 이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의존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딸을 낫게 하실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다른 어떤 것에서도 이제 더 이상 희망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뭘 안 해봤겠습니까? 어떤 일을 안 해봤겠습니까? 그렇게 난관으로부터 자기의 불쌍한 딸을 구해내기 위해서 무엇이 아까웠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처지에 있다면 여러분들이 무엇을 마다하겠습니까? 아마 모든 일을 다 해서라도 땅 끝까지 데리고 가서라도 이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 여자도 똑같이 그런 엄마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고 모든 것을 다 했을 것입니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그분이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습니다. 이제 이분을 떠나서 다른 데 가서 자신의 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었더라면 자존심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내가 보내지 않았다. 보냄을 받지 않았다라고 말했을 때 이 여자는 “아 그러세요? 그럼 난 다른 곳에 가보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다른 곳에 만약에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고 또 다르게 치료해 볼 수 있는 길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줌이 마땅치 않다”고 이 여자의 상한 가슴을 후벼팔 때에 “예수님, 됐습니다. 내가 이것만 여기에 당신에게만 문제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줄 아십니까? 내가 다른 곳으로 가고 말겠습니다. 내가 이 모욕을 받으면서까지 내 딸을 고치지 않겠습니다. 나는 다른 길이 있습니다”라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이외에는 아무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나도 믿을 수 있고 사람도 믿을 수 있고 세상도 믿을 수 있고 나의 능력도 믿을 수 있다면 그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그냥 있을 뿐이지 내가 의지할 수는 없다라고 생각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전심으로 매달리며 아버지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요즘 말입니다. 여러분 진짜 조심하셔야 됩니다. 고층 건물에 주차장에 차 몰고 갔다가 차를 대기 위해서 뒤로 백을 합니다. 근데 뒤에 스토퍼 같은 것들이 잘 달려 있어서 차가 더 이상 못 가게끔 딱 막아주면 되는데 이게 자꾸 사용하다 보면 부서지거나 아니면 그런 거 아예 설치 안 하는 데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뒤로 백을 하다가 자기 생각보다 더 멀리 간 것입니다. 그러면 벽에 쿵 부딪혀야 되잖습니까? 벽이 없습니다. 벽이 그냥 이렇게 살짝 세워놓은 가짜 벽입니다. 펑 뚫고 그리고 가서 차가 수시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작년 한 해 동안도 여러 대 떨어졌습니다. 사람도 다치고 죽고 밑에 있는 사람도 죽고 다치고 그러잖습니까? 왜 그런지 아십니까? 차가 부딪혀도 상관이 없을 정도의 벽이 되려면은 콘크리트로 벽을 하거나 아니면은 벽돌로 아주 두껍게 쌓여야 됩니다. 돈이 많이 듭니다. 그런데 그냥 판자 같은 걸로 쭉 치면은 돈이 4분의 1도 안 듭니다. 그 대신 그건 차를 막아줄 수가 없습니다.
근데 운전하는 사람은 그걸 모릅니다. 그냥 허옇게 칠해져 있으니까 튼튼한 벽이려니 생각하고 웅하고 뒤로 가는 것입니다. 쾅 받고 그다음에 뒤로 쏟아져 버리는 겁니다. 보십시오. 그걸 믿으면 안 됩니다. 의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거는 콘크리트 벽이 단단하게 돼 있어서 웬만한 차가 혹시 급발진을 해서 달려갔다고 하더라도 벽이 쾅하고 그 차를 막아줘야 되잖습니까. 의지할 수 없는 것들을 믿을 때에 그렇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 여인은 다른 곳은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이외에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간절히 간구하기를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저는 주님이 나를 이스라엘 백성처럼 사랑해달라, 이스라엘에게 베푼 것 같은 은혜를 다 베풀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총의 작은 조각이라도 남은 것이 있으면 내게 주셔서 내 딸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주십시오”라고 간구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희망이 없는 삶이 운명을 믿고 운명에 굴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내 팔자가 있으려니 그리고 내 인생의 운명은 이렇게 정해졌으려니 하고 거기에 길들여서 살아가는 것이 제일 불행한 삶입니다. 그거는 예수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운명대로 살지 않게 돼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의 일인데 어떤 집사님이 점 보러 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래도 가면 안 되잖습니까. 근데 뭐 그런 사람들 굉장히 많이, 지금도 많이 있을 겁니다. 가서 점을 보더니 굉장히 용한 사람이었답니다. 자기 친구들을 다 점을 쳐주더니 마지막에 자기가 가서 물어보니까 애들이 막 뭘 흔들리니 점괘가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얘기를 하는 겁니다. “너 예수 믿어?” 그러더니 쭈뼛쭈뼛하고 말을 못하니까 소리를 지르면서 야단을 치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데 오는 거 아니라고. 예수쟁이들은 점괘도 안 나오거니와 점괘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서 예수나 잘 믿으라고, 이런 데 따라오는 게 아니라고 그러면서 욕을 퍼붓더랍니다. 정신이 버쩍 났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운명 같은 거 안 믿는 겁니다. 왜? 이제 그 운명을 우리가 개척해 나가는데 어떻게? 우리가 어떻게 운명의 거대한 힘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이 여자 보십시오. 언제인지 모르지만 딸은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습니다. 뭐 집안이 거덜 났을 겁니다. 병을 고치느라고. 그러면 결국은 할 수 있었습니까? 할 수 없었습니다.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바위처럼 벽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그거를 한 번 받아보겠다고 온몸으로 어깨뼈로 들이밀면 어깨가 부서지고 머리통을 갖다가 달려가서 들이받으면 머리가 부서지면서 피가 흐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운명을 믿는 사람들은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배우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한 기술입니다. 체념하고 포기하고 그 운명에 복종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운명에 항거하지 않으려고 할 때에 오히려 평안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그런 운명 따위 같은 것들은 믿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무슨 기계처럼 우리 앞에 딱 정해져 있어서 우리가 아무리 뭘 하려고 하더라도 안 되는 그런 식의 운명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정해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달란트의 비유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겁니다. 마음속에 믿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잘 믿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나의 삶을 개척해 나갈 때에 얼핏 보기에 나에게 정해진 운명 같은 것들은 없고 그것들을 계속 부수면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가능성을 믿을 때에 거기에 희망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 때부터 계속해서 가난했으니 나는 가난하게 살 거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주정뱅이었고 아버지가 주정뱅이었고 내가 마누라를 패고 있으니 내 새끼도 그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그게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 아버지 때까지는 개망나니처럼 살아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있지만 나는 절대로 그런 식으로 대물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야지 삶의 희망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 결혼해서 우리 어머니도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고 불행하고 그리고 아버지를 원수처럼 생각했으니 딸 된 나도 결혼했는데 벌써 싹수가 노랗다, 결국은 집안에 흐르는 저주처럼 그렇게 슬픈 여자의 운명이 할머니로부터 어머니 어머니로부터 나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내 어린 딸도 나의 운명을 계승하겠지’라고 생각하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뭐 있냐 이것입니다. 차라리 운명에 순종하면 되지 아무것도 바뀔 수 없는데 예수를 믿어서 뭐 하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그 순간, 그 따위 그런 삼류의 운명 같은 것들은 이미 다 날려버린 것입니다. 여러분들 누가 10년 후에 여러분들이 무엇이 되고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결국은 그렇게 우리가 모르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그 모르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혼자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볼 때 이 여자는 이미 진작에 포기해도 조금도 누가 말할 것이 없을 정도로 아주 분명히 모든 불행이 정해진 여자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자 오랫동안 병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귀신 들려 있었습니다. 그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뭐가 나아지겠습니까? 모든 방법을 다 했는데 어느 것이 이 여자에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랬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새로운 인생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여자에게 난관의 난관을 넘어오게 넘어오게 하시면서 이 여자의 마음의 믿음을 불일 듯 일어나게 해 주신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자기 딸이 귀신 들려서 비참하게 된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더라면 예수를 찾으러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고 변화 받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긍휼히 여기시는 그 사랑으로 고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를 포기하지 않고 간절히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인생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입니다.
끊임없이 예수와 함께 손잡고 나의 확정된 것처럼 보이는 인생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 그리고 그렇게 개척해 나가는 자신의 처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모르파티’입니다. 운명에 대한 사랑이란 말입니다. 노래도 있잖습니까? 트로트 노래도 있잖습니까? ‘아모르파티’. 아주 깊은 철학적인 사색을 가지고 있는 제목입니다. 그게 거기서는 그런 식으로 쓰지 않았지만 자기가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개척해 나가는 겁니다. 나에 대해서 결정된 운명 같은 거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님의 뜻이 있으면 나를 사용하시고 내 믿음을 사용하셔서 나에게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여실 것이라 믿는 겁니다. 나에 대해서 믿는 게 아니라 나의 자식에 대해서도 믿는 겁니다. 그렇게. 그걸 믿는 겁니다.
나의 실패와 나의 좌절이 자녀에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왜 비관적인 생각을 합니까? 그 자녀가 예수와 함께 동행하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볼 때에 분명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운명적인 일까지도 변화시켜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예수와 함께 동행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021년, 20년, 19년, 18년 계속해서 어려운 일이 있고 뜻을 세워봤지만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라고 하는 그것이 2022년에도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은 그건 아니라 이것입니다. 결국은 필요한 것이 뭡니까? 아무리 수많은 세월이 세월의 바퀴를, 수레 바퀴를 거꾸로 돌린다고 할지라도 실패의 실패의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실패를 바꿔놓고 운명을 변경시킬 만한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삶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런 삶을 몇 년이 되었든지 간에 다 쓰레기통에 내어버리고 그리고 오늘 이제 나는 다르게 살 것이다. 나는 결코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내가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나는 나의 인생에 이런 문제를, 문제 앞에 직면해서 좌절과 시련을 겪으면서 살았는데 결국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나는 그런 식의 삶을 살 수 없다. 이제는 나는 예수와 함께 동행하며 내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었던 벽처럼 느껴진 인생의 많은 문제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의 능력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면서 희망에 도전을 할 때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길 같은 소원이 생겨나는 겁니다.
소원이 없는데 간절한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심한 통곡이 나오겠습니까? 눈물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 쏟아놓고 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차라리 절 데려가십시오, 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주님을 붙들고 씨름한 적이 언제 있습니까? 이 여자는 도저히 운명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생각하기도 싫었습니다. 꺼지지 않는 이 여자의 마음속에 있는 활활 타오르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근데 예전에는 예수 없이 자기 혼자서 그 소원을 이루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살았던 옛날의 자화상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이제 이분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그래서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이 냉정하게 끊어버리려고 해도 이 여자는 결사적으로 매달리며 주님이 거절하실수록 이 여자의 마음의 소원은 불길같이 타올랐고 오직 이 소원은 예수만이 이루실 수 있다라고 하는 강력한 열망에 불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 앞에 태우지 못할 수 있는 우리의 인생에 문제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극복하지 못할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목숨을 내어놓고 주님 앞에 매달리는데 해결되지 않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해서 끝까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건 또 주님의 뜻이 따로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뭘 부탁할 때 노-(No)라고 말하면 진짜 노-입니다. 끝입니다. 너무너무 도움을 받고 싶어서 가서 간절히 도와달라고 그러는데 노-하면 그거 진짜 노-입니다. 근데 하나님은 다릅니다. 우리가 가서 ‘하나님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주십시오. 나는 너무 급합니다. 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주님께 부탁하는데 주님이 노-할 때는 노-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길이 있다. 다른 계획이 내게 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계획이 나에게 있다’ 그거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이 노-하신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노-하셔도 이 여자처럼 더 믿음의 소원을 불태우면 결국 주님이 들어주시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또 다른 길을 보여주셔서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계획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불타는 소원이 왜 없느냐 얘기입니다. 여러분, 야곱을 기억하시죠? 야곱은 자기 아버지와 형을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고 메소포타미아로 도망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도 거기서 엄청나게 고생을 많이 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아서 엄청난 부자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풀지 못하는 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형의 문제입니다. 형은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뒤로 갑자기 굶어 죽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진짜 생명을 잃어버린 것처럼 치명적이었습니다. 당시 족장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모든 복을 동생에게 다 빌어주고 자기는 복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허접한 것만 빌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래에 전개될 자기와 자신의 삶, 자손의 삶은 굉장히 어두운 그림자가 예고되는 그런 기도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 마음속에서 얼마나 분했겠습니까? 그래서 떠나기 전부터 벌써 동생을 죽여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거부가 되어서 돌아온다고 하니 이제 그 맺힌 그 수십 년의 한을 풀어버리기 위해서 군사를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 겁니다.
야곱이 이런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 형이 나를 치겠다 이거지. 아 그러면 간단해. 내가 자객을 보내서 형을 먼저 목을 따야지’ 그렇게까지는 안 했습니다. 신앙이 있고 양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자기가 형을 속인 것에 대해서는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르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어떻게? 이건 도대체 자신의 문제로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야곱은 평생을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심지어는 외삼촌 라반을 속이고 하면서 일생 동안을 사기꾼처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만큼은 그 놀라운 꾀돌이가 풀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 마지막에도 결국은 덜 사랑하는 가축과 종들을 앞으로 내보내고 그냥 걔네들은 죽으면 죽어라 그러고 내버리는 겁니다. 두 번째 보내고 세 번째 보내고 마지막에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제일 마지막으로 보내고 자기는 혼자 얍복강에 남아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근데 그 사람이 아직 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이제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이걸 거기서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야곱이 딱 생각이 딱 그거였습니다. ‘이 천사는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겠구나’ 그리고 딱 붙든 겁니다. 그리고 ‘나를 복 주시옵소서 나를 복 주시옵소서’ 그때 말했던 복이 뭡니까? 낙타 몇 마리 더 해주거나 소 몇 마리 좀 더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건 이미 야곱에게 많이 있었습니다. 뭡니까? 그렇게 불타고 있는 소원을 가지고 천사를 붙들고 매달리는 야곱에게 “그래, 니 소원이 뭐냐?”라고 말하면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내가 형한테 형하고 화해까지는 몰라도 내가 형한테 도륙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내 형을 좀 막아주십시오”라고 했을 겁니다. 이걸 붙들고 매달렸습니다.
근데 뭔 천사가 그렇게 또 시시한지 힘이 야곱에게 딸렸답니다. 뭐 천사가 그렇습니까? 이 야곱은 평생 노동으로 다져진 사람이었으니까 힘이 있었을 겁니다. 매달리는 겁니다. 천사가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왜냐면 날이 밝고 천사는 떠나야 되는데 놓지 않고 매달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천사가 환도뼈를 쳤습니다. 환도는 여기 골반 있는 거기하고 허리하고 이어지는 그 부분입니다. 거기를 때린 겁니다. 뼈가 얻어맞으면서 뼈가 확 어긋난 겁니다. 그러면 여기 등과 척추 쪽에 뼈가 어긋나면서 신경이 가라앉아버리면 이 손에 힘이 풀려서 이 잡았던 손을 놓아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러면서 결국은 야곱은 마지막에 남은 자기의 힘까지도 다 잃어버려서 이제 이 천사 아니면 자기에게 복을 주고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없는데 소원은 가슴 속에 불타서 어떻게 형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나고 벗어나 살고 싶은데 그런데 그걸 마지막으로 복 줄 수 있는 마지막에 단 하나의 천사까지도 이제는 결국은 놓아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겁니다.
그때에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겁니다. 그때에 진짜 오랜만에 야곱이 자기가 깨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겁니다. 그래서 천사와 씨름에서 천사를 이긴 게 그게 믿음이 아니라 결국은 천사와 씨름한 것이 여전히 야곱이 가지고 있었던 육정입니다. 육정. 그런데 환도뼈를 얻어맞으면서 그 천사도 붙들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그가 그 손을 놓고 이제는 아무 희망이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가 깨어지면서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게 된 겁니다. 그게 호세아서가 이야기하는 바로 그 야곱의 회개입니다.
그리고 통곡하면서 울며 회개하는 자기가 깨뜨려지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새 이름을 주십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발뒤꿈치를 잡았다’라고 하는 그 뜻이잖습니까? 결국은 그 이름 자체가 말하자면 함의하고 있는 뜻이 ‘사기꾼’입니다. 근데 사람을 속이고 뭔가 이렇게 부당하게 해가지고 어쨌든 남의 것을 쟁취하는 이름의 대명사가 야곱이었습니다.
근데 “네 이름을 이제 이스라엘이라고 하거라.” ‘이스라엘’이라는 게 뭡니까? 하나님과 겨뤄서 이겼다. ‘이스라’라는 것은 이제 말하자면 씨름을 했다, 혹은 겨뤘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겼다, 이겼다’라는 뜻입니다. 겨뤄서 이겼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을 겨뤄서 이겼다’ 이런 뜻입니다. 이런 이름은 인간이 붙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니면 주실 사람이 없습니다. 주실 분이 없습니다. 근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결국 ‘하나님이 졌다’라고 하셨다는 뜻입니까? 뭡니까?
자, 딸 하나가 그냥 엄마한테 고집을 씁니다. 그리고 엄마는 마음에 정말 안 들고 허락할 마음이 없는데 캠핑을 일주일 동안 캠핑을 가겠다는 겁니다. “가지 마라.” 그러고 “고등학교 이제 3학년이 눈앞에 있는데 거길 왜 가려고 그러냐.” 그러고 어울려 가는 친구들도 마음에 안 들고 하여튼 엄마 마음은 지옥입니다. “가지 마라” 근데 딸이 너무 상심을 해가지고 밥도 안 먹고 울면서 이틀 동안 자기 방에서 문 걸고 안 나옵니다. 우는 소리가 계속 들립니다. 그게 나중에 엄마가 저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내가 이렇게 막아야 되나 그리고 전화를 돌리면서 친구들한테 전화를 걸어서 그 모임이 안전한지 걱정은 없는지 다 물어봅니다. 그러고 나서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잖습니까? 그런데 그냥 딸이 그렇게 우는 소리를 며칠을 들으면서 너무 괴로워하다가 마지막에 문을 두드리면서 이렇게 “딸아, 엄마가 졌다. 그래 내일 떠나거라.” 이 의미가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 때문에 졌다는 겁니까? 힘이 모자라서 하나님이 지신 것이 아니라, 천사가 힘이 모자라 진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는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울며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네가 이겼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주님, 저를 위해 복을 주십시오.” 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면서 그러면서 이튿날 그날 바로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잖습니까?
그게 뭐냐면 자기를 몰살해버릴 줄 알았던 형이 저 멀리서 보니까, 자기를 그렇게 속여서 막 아버지의 모든 축복을 뺏어간 그 야곱이 오는데 다리를 절뚝절뚝하면서 걸어오는 그걸 보는 순간에 하나님이 이 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너무 측은하게 보이게 만드신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야곱의 운명을 바꾸는 얍복강에서의 대 화해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간절히 매달리고 내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없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 주님이 기뻐하시면 나에겐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을 사용하셔서 주님이 당신이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뜻을 품으십시오. 뜻을, 소원이 뭐냐고 한번 본인에게 물어보십시오. 한번 적어보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빌면서 정말 이 소원이 여러분 속에 계속 불타오르도록 그 소원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서 간절히 아뢰십시오. 그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무기는 이 여자처럼 하나님 앞에 예수님 앞에 믿음을 갖는 겁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난관이 오고 심지어는 자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시고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은 말씀을 하셨지만 이 여자는 결국 믿음으로 버텼습니다.
너무나 너무나 자기의 딸이 고침 받았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이 불처럼 타올랐기 때문에 자존심 같은 거 필요 없었고 주님 앞에 부끄러운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주님의 작은 은총이라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놀랍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이것을 믿음으로 보시는 것이었습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랬더니 그때부터 그의 딸이 낫기 시작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놀라운 역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귀신 들린 딸 같은 인생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도저히 변경할 수 없고 고칠 수 없어서 포기하고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았던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이제 그런 삶은 2021년과 함께 모두 세월의 강물에 떠나보냅시다. 그리고 새로운 여러분들이 이제껏 보지 못했던 운명에 메여서 사는 그 복종을 버리고 이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주체성 있게 우리 예수와 함께 동행 하면서 이제껏 살아보지 못한 희망찬 새 인생을 살도록 믿음을 행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간구하여 응답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소원과 믿음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마가 10:46-52)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에 보면은 정말 불행한 사람 한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맹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거지였습니다. 이름도 바디매오인데, ‘바 ’라고 하는 것은 아람어로 아들이라는 뜻이고, 당연히 아버지의 이름이 ‘디매오’입니다. 디매오의 아들입니다. ‘디매오’라는 이름은 ‘부정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바디매오는 이름을 누가 지어준 것이 아니라 이름도 짓지 못해서 아버지의 이름 앞에 아들이라는 이름을 덧붙여서 부정한 자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태생이 얼마나 미천한지를 보여줍니다. 거기에다가 맹인이었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살 길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을 테지만 맹인에게 주어진 일자리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사람들의 자비심에 의존해서 구걸해서 먹고 사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식이 들렸습니다. 여느 때처럼 길거리에 앉아서 구걸을 하려고 했는데, 그때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웬일인가 궁금해 여겼더니 나사렛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신다는 소문이 들린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람은 일시에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는 사건을 꿈꾸게 됩니다. 결국은 이 사람이 그렇게 미천한 가문에 태어나서, 맹인이고 또 거지로 일생을 살면서 남 보기엔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무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길거리에 앉아서 구걸이나 하고 동냥이나 받으면서 사는 그 삶이 무슨 큰 기쁨과 보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의 마음까지도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가 그곳을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으면서 그분을 만나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되겠다는 하는 아주 굳센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아무 희망이 없이 오랜 세월을 지내왔으나 그러나 이 사람은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계기로 삼았던 것입니다. 당연히 이 바디매오도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만약에 듣지 못했다면 나사렛 예수를 누가 알겠으며 또 그분이 지나간다고 한들 자기가 마음이 들뜰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이미 온 이스라엘 땅에 두루두루 퍼졌고, 인근에까지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정 많으신 분으로써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눈 먼 자에게는 눈을 뜨리라는 희망이 있었으니 맹인에게는 눈먼 자를 예수님이 고쳐주셨다는 소식이 가장 기쁜 소식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지나신다는 소문을 듣자 그분께 자신의 사정을 모두 아뢰어서 자기도 한번 이 소경 된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강한 소원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소원과 믿음에 관해서입니다.
II. 소원과 믿음
이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신다는 말씀을 듣자 그는 자신의 인생의 이 오래된 운명과 같은 문제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지가 성하고 예수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도 예수님 만나기가 쉽지 아니하였을 텐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에워 쌓여 있고, 열심 있는 사람들에게 에워 쌓여 있었고, 자기처럼 병 고침을 받고자하는 사람에 의해 에워싸여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눈먼 처지로는 도저히 그 인파를 헤치고 예수를 대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바디매오도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A. 예수를 믿음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비참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비참을 깨닫는데서 믿음이라는 것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전히 자신이 믿을만하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갈 수 있다라고 하는 자신감이 있으면 예수를 믿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혼자 사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고 그렇게 해서는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감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는 비참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언제부터 이 사람이 소경이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나면서부터 맹인이었을 수도 있고, 중간에 맹인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이것은 어제오늘에 생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째든 그는 오랫동안 맹인으로 살았고 가난하여 거지생활을 했으며, 이름도 없어서 그냥 부정한 자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부끄러운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비참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운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지긋지긋한 불구의 삶, 이 지긋지긋한 거지의 삶, 그리고 이 부끄러운 부정한자의 아들이라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이 삶에서 탈출구를 찾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비참을 자각하고 자신은 도저히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께 이 문제를 가지고 나와야 되겠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에게는 예수님은 자신을 충분히 고쳐주실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비심과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자기를 용납해 주실 것과 그리고 큰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주께서 명하시기만 하면 나에게 이 눈 먼 것쯤은 주님이 단번에 고치실 수 있다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디매오의 소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쯤 됐으면 포기하고 자신의 처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 만 했을 텐데 예수에 관한 소문이 들리자 이 바디매오의 마음에는 커다란 소망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개선할 수 없는 그 일에 대해 예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바꿔놓으실 수 있다라고 하는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의 소문을 내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에게 예수가 행하신 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 변화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기대하지 못했어도,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희망을 갖게 되고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던 자신의 처지를 변화시킬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냈습니다. 바디매오에게 와서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있었는지는 알 수없 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어쨌든 그는 단순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눈 먼 자였으니 아마 귀가 발달했을 것이고 사람들이 주변에서 한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갈릴리의 두로와 시돈 지방에 나타나셨다는 이야기, 수많은 병든 자들이 예수께 나아왔다는 이야기, 예수님이 그들을 일일이 고쳐주셔서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그리고 귀머거리가 다시 귀가 들리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귀신 들린 자들이 내어 쫓아 온전한 사람이 되고 특히 소경이 눈을 떠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왜 안 되겠는가 희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내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소문을 내면 어떤 사람의 귀에는 그 간단한 한 토막의 소식이 삶 전체를 바꿔놓을 만한 아주 혁명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전도 열심히 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말은 문자 그대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뜻이 아니라 메시아를 가리키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가운데 큰 인물이 나와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커다란 영광을 가져올 것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을 따라서 오신 분이 바로 이렇게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시고 그리고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시던 예수님이시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는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사람도 한번 딱 부르짖었던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많이 부르짖었을 것이고, 얼마나 그 소리가 시끄러운지 48절에 보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사실상 구박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땠습니까? 그는 사람들의 구박하는 소리에 주눅이 들고 그만 두는 대신에 그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속에 눈을 뜨고 싶다는 소원, 자신의 이 부끄러운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탁월한 소원이 그에게 있었다는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소원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예수께서 대답을 하지 아니하시고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많이 구박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타오르는 불길에 물을 끼얹으면 오히려 그 불길이 더 치열하게 타오르는 기름 화재와 같이, 그렇게 이 바디매오의 마음은 예수님이 대답이 없으시고, 사람들이 구박을 하는데도 오히려 더 치열하게 타올랐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더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간절히 예수를 불렀습니까?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만이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여기에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당시 거지들이 동냥할 때에 늘 하는 상투어입니다. 그래서 “Have a pity on me”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영어를 쓰는 거지들도 똑같이 얘기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소서 ”그게 우리로 말하자면 “한 푼 주십시오”라고 하는 관용어입니다. 늘 쓰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이 언어에 아주 익숙해진 사람입니다. 평생 거지생활을 했으니까 사람이 많이 모일 법한 길 어귀에 어떻게 어떻게 사람의 인도를 받아서 그 자리에 앉게 되면 사람이 지나가는 기색이 나면 했던 말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서 한 푼만 주소서”라고 하는 구걸의 언사였습니다. 그것을 수없이 하던 것을 또 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의미가 다릅니다. 사람에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할 때에는 음식이나 의복, 그리고 푼돈을 얻기 위해서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분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하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울부짖을 때 그것은 예수님께 떡 한 덩어리, 외투 하나, 푼돈받기 위해서 이렇게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고 싶어서 예수님께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먹을 게 없다고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내가 의복이 낡았다고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주님이 정말 나를 불쌍히 여겨야 될 것은 내가 소경으로 거지로 그리고 부정한 자의 아들이라는 이름이라는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삶 전체, 근원적인 문제 때문에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말이지만 이 예수님을 부르기 전까지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말은 떡 한 덩어리, 의복 한 벌, 그리고 푼돈을 얻기 위한 구걸의 언사였지만, 이제 이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이 비참으로부터 건져내달라고 하는 이 바디매오의 영혼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울부짖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바디매오의 소원이 얼마나 그의 마음속에 뜨겁게 불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불평하지 않고 산다는 것과 꿈을 잃어버리고 운명의 노예가 되어 산다는 것은 똑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제껏 까지 내 처지가 바디매오처럼 불행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불행에 익숙해지고 내일도 그 불행이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산다면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나는 오늘 거지로 살아가고 있고, 그 전에도 그랬고 아버지도 그랬고 그러니 내일이 무슨 다른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신앙이 필요 없습니다. 보십시오.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눈을 뜨게 되는 일이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이 눈을 뜨고 싶다는 불같은 소원을 가졌습니다. 거의 전혀 불가능한 일인데도 예수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는 나를 고치고 나의 눈먼 것을 치료하여 보게 하실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 문제를 예수께 가지고 나와서 예수께 호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바디매오의 인생이 바뀌는 첫 번째 중요한 계기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이런 모든 것을 주님이 베푸셔야 할 자격이 있다거나 주님께 의무가 있다거나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거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예수께서 자기를 가엾이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자비심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소원은 불같이 타오르고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더욱더 예수를 간절히 찾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한번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십시다.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가 거지라고 하는 것, 맹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 미천한 자로 부끄러운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문제들에 직면하면서 그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었고 예수 오신다는 소문을 듣자 그는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의 발 앞에 나아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문제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문제가 너무나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제 뭔가 바뀌리라고 하는 생각을 차마 하지 못 할 정도로까지 여러분들이 운명에 복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바디매오의 운명만 같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었고 자기 이름도 없어서 아버지의 부끄러운 이름에 아들이라는 말 하나 얹혀 져서 불렸고, 그리고 더욱이 그는 눈이 먼 소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의학적으로 고쳐질 수 있는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이거보다 더 운명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모든 희망을 앗아가는 상황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바디매오는 예수의 소식을 듣자 그 예수를 만나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강한 소원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 믿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예수께서 아무 대답을 안 하시고 사람들이 그를 잠잠하라고 많은 사람들이 구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수록 이 바디매오는 목소리를 높여 다윗의 자손 예수를 불렀습니다. 그의 마음에 치열하게 타오르는 소원이 충천하는 화염과 같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문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해결을 못 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결국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아니라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까지도 우리 주님 앞에 가지고 나가서 주님은 내 인생의 이 문제를 해결하고 예전에 살았던 실패와 좌절로 얼룩진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실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믿는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비록 우리처럼 성경을 많이 배우고 오래 교회를 다닌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러나 복음을 믿는 단순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모든 소망을 자신의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믿음 위에 걸고 예수 위에 올려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인생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씨름하고 있는 기도의 제목입니까? 여러분들의 고민하는 순서가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기도제목의 순서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자신을 믿을 수가 없어서 예수께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하나님 안 믿고 자기의 힘으로 씩씩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더 못난 사람은 자기도 믿을 수 없고 예수도 믿을 수 없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주저앉아 모든 슬픈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으려고 애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서 불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무신앙과 불신앙은 다릅니다. 무신앙은, 신앙이 없는 것은 믿을 수도 있는데 누군가가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신앙이 안 생긴 것입니다. 불신앙은 뭔가 증거를 보여주는데도 고개를 외면하고 안 믿겠다고 완고하게 고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디매오의 마음속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유대에서 갈릴리에서 두로와 시돈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면 나에게도 행하실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굳게 믿으며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예수 앞에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진정한 우리의 인생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의 소원은 더욱 불타올랐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머물러 서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부르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르시는 소식을 전해주고나서 말하기를 안심하고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전까지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수없이 울부짖으며 예수를 따를 때 그 바디매오의 모습이 정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안정해보이고 얼마나 감정이 복받치는 것으로 보였으면 바디매오에게 안심하고 일어나라고 하였겠습니까?
B. 단 한 가지 소원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는 단 한 가지 소원을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대답했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가난한 나를 부자 만들어 주시옵소서.” 구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부자가 된다고 한들 눈 먼 채 있으면 자신의 삶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의 집안은 미천하고 아버지의 부끄러운 이름 앞에 아들이라는 이름 하나 덧붙인 채 살아가는 그런 불쌍한 처지였지만 비록 가난했지만 자신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가문이나 혹은 재산의 유무가 아니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하는 처지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 예수님 앞에 해결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 예수께 아주 분명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직 한가지만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내 눈을 뜨게 해 주시옵소서. 그것을 원했던 것 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많은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들 중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그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다른 문제들이 좀 나아져도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못합니다. 그거를 바디매오는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경 된 자신이 예수의 능력으로 눈을 뜨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봤던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자신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제까지 자기를 지배해오던 자기를 맡기고 남은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자신의 문제를 모두 가지고 와서 그 분 앞에 엎드리며 그 분 앞에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자신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예수를 찾고 예수를 불렀습니다. 그날 하루쯤은 동냥을 안 해도 상관이 없었고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에게 자비심을 베풀지 않아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온 힘을 다해 예수를 만나지 않으면 자신은 희망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예수께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아주 간단하게 보기를 원하나이다. 핵심을 찔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배우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고민은 많이 하고 염려는 매일 하지만 고민하고 염려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애태우고 있지만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께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좀처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고민을 많이 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고통 받고 낙심할 뿐이지 그것을 토대로 신앙에 도전을 해서 새 희망을 가져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실패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살아가기 때문에 늘 실패에 익숙하고 우리의 오랜 부끄러움을 굴려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에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새로운 인생을 살려고 하면 무엇부터 해야 할 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문제들을 혼자 고민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아까운 것이 무엇이 있으시겠습니까? 그러면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그분 앞에 내어놓고 그 분 앞에 자기 자신을 쏟아 부으며 해결을 기대하는 것, 그게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상이 나잖습니까? 가까운 지인들에게 상이 나잖습니까? 그런데 두 종류입니다. 별로 마음에 살갑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연락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행이다라고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연락이 왔으면 가야되는데 못 받았으니까 좋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너무 아끼고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인데 연락을 안 하면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사랑의 차이가 가져오는 감정의 서로 다른 감정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당신께 쏟아놓으며 예수님의 도움을 구한다고 하실 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면목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예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그래도 부족하나마 의지하며 살겠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분에게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여러분들을 천하보다도 더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혼자서 씨름하던 문제를 예수 앞에 갖다놓고 예수 앞에 토설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할 때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칠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바디매오의 마음을 움직였던 가슴에 치열한 불꽃처럼 타오르던 이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가 무엇이든지간에 혼자 고민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예수께 가져오십시오. 그리고 그 분 앞에 모두 내려놓고 사실대로 고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문제를 만들었어도 괜찮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만들어도 결국은 주님이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면서 여러분들의 영혼도 고치시는 분이시니, 여러분들이 주님께 아뢰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죄 짐 맡은 구주께서 여러분의 문제도 맡아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방황하며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할수록 여러분들은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씀의 은혜를 받기 힘든 사람이 되고, 마음을 지키기 힘든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께 모든 것을 쏟아놓고 그리고 단 한 점도 부끄러움이 없이 주님 앞에 사실대로 아뢰며 오직 나의 희망은 예수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속에는 그동안 맹인으로 살았던 모든 설움이 이 안에 묻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서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참하게 느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자랑스러워지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 어려운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할 때 그는 아주 간단하게 “보기를 원하나이다” 일곱 글자로 말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그래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원할때에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소원은 믿음의 화로에서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소원은 믿음은 화로에서 활활 불타오릅니다. 그리고 그 불길을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음으로 우리의 마음의 화로에 붙여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온전히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의 소원은 계속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길처럼 우리 마음속에서 불타오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원이 크면 클수록 더더욱 예수를 의지하게 되고, 또 환경적으로 그 일이 이루어지기 힘들 것 같은 상황이 생기면 생길수록 오히려 그 믿음은 더 치열하게 타오릅니다. 마치 예수께 용기를 내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울부짖었지만 주님은 대답이 없으셨고 예수를 따르는 많은 사람은 그에게 잠잠하라고 구박했지만 그러자 그는 오히려 더욱 소리를 크게 지르며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울부짖었던 것처럼 우리의 소원도 믿음의 화로에서 그렇게 활활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심한 통곡과 눈물을 부르고 울부짖음을 부르고 주 앞에 매달리게 만들고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찾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찾고 주님을 뵈옵기를 사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희망, 하나님보다 더 믿었던 것들에 대한 모든 소망을 끊어버리고 예수께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는 늘 기도하면서도 거의 기도한 적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진짜 기도하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정말 가엾다 그리고 내가 정말 애처롭게 주님께 매달리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던 때가 얼마나 드뭅니까? 그래서 형식적으로 보면 우리들이 언제든지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지만 우리 인생에서 주님께 돌아갈 기회는 그렇게 많지가 않은 것입니다. 왜입니까? 어떤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 때문에 주님을 찾을 때가 드물고 또 주님을 찾았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분께로 돌아가도록 우리의 마음이 꿈틀거리고 분출하는 때가 너무나 드물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미적미적하면서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으면서 주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한 해를 맞으면서 여러분 어떤 삶을 기대하십니까?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은 무슨 희망을 가지고 계십니까? 절망이 가까이 있습니까? 희망이 가까이 있습니까?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가지십시오. 운명처럼 메어 살던 바디매오도 예수를 만나서 예수께로부터 큰 은혜와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 라고 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바디매오에게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주님 없이 씨름하며 불행하게 사는 일들은 그만 둡시다. 문제에 익숙해지고 절망에 익숙해진 채, 겁을 먹은 채 살아가는 비겁한 생활은 이제 그만둡시다. 나를 얽어 맬 운명 따위는 없다고 믿읍시다. 그리고 우리 주님과 함께 난 나의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고 믿읍시다. 그 일을 위해서는 나의 힘이 아니라 예수의 힘이 필요한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문제든지 그것을 가지고 예수의 발 앞에 나아가 불쌍히 여겨달라고 울부짖는다면 바디매오의 기도를 들어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던 예수께서 오늘 여러분들의 인생에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소원과 믿음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서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46-52)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여기 또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었고, 거지였고, 거기에다가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었습니다.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있어도 인생의 벼랑 끝에 몰릴 텐데, 그는 세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디매오라는 맹인이었습니다. 바디매오, ‘바르’라고 하는 말은 아람어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진짜 그의 이름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그냥 ‘디메오의 아들’이라 불렀던 것 같습니다. 디메오라는 아버지의 이름 또한 좋은 이름은 아닙니다. ‘부정한 자’라는 뜻입니다. 누가 이름을 그렇게 지어 줬겠습니까? 모릅니다. 이 사람은 그의 이름으로 미루어볼 때 제대로 된 이름을 지을 수 없는 부모가 없는 가문이 없는 그런 집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의 운명이었고, 그 사람이 가는 길처럼 엮어졌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Ⅱ. 소원과 믿음
그런데 어느 순간 불연 듯 놀라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것이 이 사람의 마음에 소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는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소문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열렬한 전도자가 되어서 영원구원까지는 못하더라도 예수의 소문을 계속 내는 것,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무심코 전하는 복음 한 마디, 무심코 전하는 예수 때문에 행복하다는 한 마디가 사람들의 마음에 담겼다가 그가 인생의 벼랑 끝에 있어서 주님께 돌아올 그 때가 될 때, 그의 마음에 그것이 스파크가 일어납니다.
바디매오도 예수에 관한 소문을 전혀 듣지 못하였더라면 가난하고, 가문도 미천하고, 눈멀고, 그리고 이러한 거지 동냥이나 하면서 살던 이 처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 시작된 삶이 아니라 얼마나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에게 있어서 운명처럼 따라다니던 일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도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난의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여태껏 거지로 있었겠습니까. 집안이 미천합니다. 이미 태어났는데 그 가문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그는 맹인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눈을 뜨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었으면 왜 못하였겠습니까. 현대 의학으로도 맹인을 눈뜨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매우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필요로 합니다. 시신경이 다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개안수술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2천 년 전에 이러한 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 가지 모두 접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그의 마음에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에 관한 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한 두 가지였습니까?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이 한 두 마디였습니까? 많은 말씀을 전하고, 많은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바디메오의 마음 속 깊이 다가온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병든 이들을 고쳐 주셨는데, 당시 의학으로는 도저히 나을 수 없는 병, 절름발이, 앉은뱅이들이 걷고, 문둥병자가 낮고, 심지어 맹인이 눈을 뜨게 한다, 나병환자도 나았다고 하더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 이 바디매오의 마음은 여태껏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던 이 것이 확실히 바꿀 수 있는 일이구나, 라고 하는 믿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A. 예수님을 믿음
그는 먼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그러한 세 가지 조건이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를 만나고 인생이 바뀐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바디매오의 마음은 불붙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누가 자기를 인도하여 예수께 나아가게 하겠습니까. 마침 거기에 오신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아마 이랬을 것입니다. 자기를 누군가가 데리고 가서 거리에서 구걸을 하려던 참인데,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니까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물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할 때, 이미 들었던 예수에 관한 소식이 생각이 나면서, 이 바디메오의 마음속에 결정적인 마음의 감동이 왔습니다. “내가 예수를 만나야 하겠다. 내가 이제껏 운명처럼 익숙하게 살았던 이 삶에 대해서 반기를 들어야 하겠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아니라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 아니라 나도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생겨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를 왜 믿으셨습니까? 똑같이 살기 위해 예수를 믿었다면 여러분들은 신자도 아닙니다. 예수 믿기 전과는 다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한 인생을 지금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오늘 바디매오처럼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운명에 매여 사는 삶이 자기에게 허락된 삶이 아니라 자신은 예수와 함께 그 능력을 힘입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확신이 바디매오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그 순간 그는 운명에 굴복하는 삶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 해가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달력하나 넘겼다는 이유 때문에 새 인생이 시작될 것이라고 하는 미신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재작년에도 안 그랬고, 그 전에도 안 그랬는데 왜 그 일이 금년에만 일어나겠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새로운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사람은 자신의 비참함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자신의 이 운명과 같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디매오의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허다한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나아오셨다고 하였습니다. 허다한 무리들의 정체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을 보고 감동받아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운집을 해서 예수님을 에워싸고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도 보이지 않는 바디메오가 그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을 대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대면한다 할지라도 그 분이 예수인 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었겠습니까? 누가 그를 데리고 불쌍하다고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갈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가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귀에 들리도록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 밖에 바디매오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예수를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울부짖듯이 불렀습니다. 이제 많은 인파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에워싸인 수많은 사람들의 잡담소리 속에 이 소리가 들리려면 보통 우렁찬 소리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온 힘을 다해 딱 한번 밖에 없는 기회라 생각하고 온 힘을 다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이것도 한 번만 했을 리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야단 쳤습니다. 한번만 그랬는데 야단을 쳤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듣고 무엇인가 대답을 하실 때까지 이 바디매오는 쉼 없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를 질렀고,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자 그는 오히려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울부짖어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디매오의 믿음이었습니다.
머릿속에서 생각만 오가는 것, ‘나는 이런 삶을 살면 좋겠다.’ ‘내 인생이 이렇게 전개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삶이 바뀝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기 전에 어떻게 여러분들이 바뀌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 속에서 ‘나는 이런 삶이 싫어. 다른 삶을 살고 싶어.’ 머릿속으로 게으른 사람이 드러누워서 중얼거리듯 생각만 함으로써 여러분의 인생이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전에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간절히 부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간절히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여러분들이 불신자에서 신자로 된 것입니다. 오늘도 눈이 오는 미끄러운 겨울밤에도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까.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야 인생이 변화되는 것이지, 생각만 해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괴롭지 않은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괴로운 사람은 그런 삶을 살아서 괴로우니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안 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마음의 뜻을 세우고 예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그리고 내가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될 수 없으니 내가 예수를 만나서 운명과 같은 내 인생의 불행을 박살낼 것이라는 결단을 내야 할 것 아닙니까? 언제까지 일어나기 싫은 사람이 게으름을 피우면서 이불 속에서 누워서 중얼거리는 것처럼 그렇게 세월을 보내겠습니까? 세월은 살 같이 빠르게 흘러가고 여러분들의 인생은 저물어갑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그는 간절히 예수를 불렀습니다. 뭐라고 불렀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 생각나는 것 없습니까? ‘Have a pity on me.’ 거지들이 동냥할 때 사용하던 관용어입니다. 혹은 ‘Have a mercy on me.’ ‘나를 가엾이 여기소서.’ 혹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자비롭게 여기소서.’ 라고 하는 말은, 바디매오가 그 자리에서 지나가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매일 매일 하던 말이었습니다. 사람에게 그 말을 할 때와 오늘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이 말을 할 때에 오늘 바디매오의 심정은 달랐습니다. 왜 입니까? 어제까지 사람들을 향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을 때에는 한 주먹의 음식과 한 벌의 외투와 그리고 몇 푼의 푼돈을 바라면서 사람들에게 계속하여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께 그 똑같은 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할 때, 예수님께 빵이나 옷이나, 푼돈을 바라고 이렇게 부르짖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바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을 예수께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사람, 더 이상 앞 못 보지 않고 보는 사람, 그리고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인생이 더 이상 비천하게 전개되지 않도록 인생을 바꿔달라고 하는 간구였고,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이것은 떡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한 관용어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러한 것으로 자신의 인생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바디매오가 너무 비참합니다. 그리고 구걸을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주머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저씨,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해서 그날 너무 운이 좋아 어떤 사람이 커다란 빵 두 덩어리를 주고 가고, 어떤 사람이 멀쩡한 따뜻한 점퍼를 가져와서 입혀주고, 어떤 사람이 맨날 동전밖에 안 들어오는데, 지폐를 넣어주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때에는 지폐가 없었겠지만, 지폐를 넣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집에 가서 안 보이는 눈으로 지폐를 만지면서 세종대왕인가 신사임당인가 만지고 충무공인가 만지면서 돈을 헤아려 돈을 쌓아두고, 빵을 만지면서 만족하며 배불리 먹고, 그리고 따뜻한 옷을 입고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며칠이나 그 자원이 갈 수 있겠습니까. 며칠이나 계속될 자원이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도 주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의복도 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악세사리도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합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채울 수 없습니다. 근원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내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빵을 세 덩어리를 얻고, 지폐를 한 움큼 얻고, 외투를 열 벌을 얻은 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며칠을 가겠습니까. 그것이 이 절망적인 바디매오의 가난한 인생을, 맹인이 된 삶을, 미천한 가문에 태어나 보잘 것 없는 이 사람의 인생을 근원적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을 만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울부짖고 울부짖고 울부짖었을 때에는 이제는 지긋지긋한 하루살이의 삶을 집어 치우고 내 인생이 근원적으로 변화된 인생을 살고 싶다는 결심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믿어도 안 믿는 사람보다도 더 우울하고, 예수를 믿었다는 사람보다 안 믿는 사람보다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 예수를 티끌만큼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우울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바로 사람들이 예수 믿지 못하도록 담장을 치고 있는 그러한 전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고 전도를 하여도 사람이 행복해 보이고, 항상 즐거운 것 만큼 최고의 전도가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긍휼과 평강이 넘쳐나서 모든 사람에게 여유롭게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보면 오지랖이 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쁜 의미에서나 좋은 의미에서. 사방팔방 당기며 사람들을 챙겨 주는 사람은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우울증을 자가 진단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냥 먹방 찾아다니던 사람이 아무 것도 먹기 싫을 때, 영화라면 광이 되어서 시사회까지 좇아 다니던 사람이 아무 영화도 보지 않을 때, 그렇게 예쁜 옷 좋아하던 사람이 아무 것도 그만두고 트레이닝복이나 입고 뒹굴 거릴 때, 놀러 다니는 것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아무데도 가고 싶은 곳이 없을 때, 그때 우울증의 징조입니다. 삶의 에너지가 모두 고갈 된 것입니다. 그런 삶은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럴 리가 없지만,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신뢰를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이 내가 예수의 복음이라는 제품을 써 보니 별로 인생사는 데 도움이 안 되었다고 하는 것이 이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그게 상품이 팔리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너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쓴 편지에서 얘기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물어 보십시오. 어떠한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있는지, 어떠한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디매오는 온 힘을 다해 다윗의 자손 예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빌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할 때는 떡과 일용한 양식, 의복, 푼돈을 원하는 것이었지만, 예수께는 그러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도저히 줄 수 없는 것, 그리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라고 했던 사도들이 줄 수 있었던 바로 그것, 예수께서 권세를 주셔서 주신 그것을 바디매오는 원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요청할 수 있는 분은 예수 한분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온 힘을 다해 이것이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예수를 간절히 불렀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보십시오. 10년, 20년 기도하였던 것도 아니고,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의 이름을 불렀더니, 불과 얼마 몇 십분도 안 되어 이 사람이 놀라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그렇게 간절히 부르자, 예수님이 머물러 서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안심하고 일어나라.”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르시니까 지나가던 사람들도 바디매오를 보고 안됐다라고 하는 생각, ‘저렇게 불안하게 저렇게 애타게 저렇게 간절히 부르짖는 바디매오를 보라, 저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라고 하면서 오히려 바디매오를 가엾이 여기며 마음을 안심시켜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안심하라. 이제는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안 만나 주실까 걱정하지 마라.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 이것이 바로 바디매오에게는 인생이 바뀌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어제 말씀을 들은 것도, 유대인도 아닌 이방 여인이고, 수로보니게 여인 혹은 가나안 여인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도 아니고 매우 특별하게 살아온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딸이 귀신에 들려서 극도의 정신병으로 삶을 이어갈 수 없어서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해야 되는 정도의 처지에 놓인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이 돈 보고 만나 주셨습니까? 가문을 보고 만나 주셨습니까? 학식을 주고 만나 주셨습니까? 성경 지식을 보고 만나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한 순간에 간절히 주님을 향해 부르짖는 간절한 마음의 소원, 꺼지지 않는 마음의 불타오르는 갈망을 가진 사람들을 주님이 만나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어제나 오늘 동일합니다.
예수님 없이 살아 보지 않았습니까. 잘 사셨습니까? 잘 살긴 뭘 잘 살았습니까? 우거지상을 해서 그렇게 우울하게 교회에 나왔다가 세상에 불행한 사람처럼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무슨 새로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주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가는 예배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꾸역꾸역 살아봐도 결국 올해는 작년 같고, 그리고 내년은 올해 같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삶이 여러분들 끝까지 이어져도 좋겠습니까? 그것이 좋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더 이상 변화를 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나는 거기에 굴복하면서 살 수 없다.’ 이런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모르파티’, 운명에 대한 사랑은 정해진 운명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손잡고 자기가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는 운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운명은 사실은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우리가 개척할 수 있는 여지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손잡고 운명과 같았던 나의 불행을 개선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고 새로운 제3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운명에 대한 사랑을 가져다줍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물어 보십시오. “사는 것 힘들지 않아?” “신나요.”하는 사람 없습니다. 어린 아이도 다 힘이 듭니다. 학교 가면 코로나 감염되고, 학원가면 코로나 감염됩니다. 마스크는 계속 쓰고 있으라고 합니다. 안 갔으면 좋겠는데 엄마는 등을 떠밀면서 학원가라고 합니다. 학원에서는 확진자들이 생겨납니다. 아이들도 고달픕니다. 누구는 안 고달픕니까? 그게 고달픈 것이 인생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미다스라는 왕에게 실레노셀레노스라는 현자가 있었는데, 그 현자에게 미다스 왕이 인생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묻습니다. 셀레노스가 말합니다. 아주 현자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안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어쩔 수 없으면 빨리 죽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비극을 다 견디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희망이 없는 줄 알았는데 예수를 믿고 보니 희망이 생긴 자들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어렵다고 생각되면 다른 사람들은 더 힘들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너무 힘들고, 온 몸이 쑤시고… 생각될지 모릅니다. 30년 후에는 지금의 이 시간이 얼마나 고마운 시기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얼굴이 다 무너지고 생각하지만 20년 후에는 그때 지금 사진을 보면서 ‘이 때는 이렇게 젊었어?’라고 할 때가 옵니다. 그러면 오늘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데, 그 긍정이 운명에 대한 긍정이 아닙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내 인생을 예수와 함께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운명에 대한 긍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운명이 우리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 아래 혹은 우리 앞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믿음의 삶을 살면서 신앙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무당이 될 운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수없이 무당에게 가서 점을 봐도 정신이 혼란스럽고 삶을 계속하지 못하니까, 무당 될 운명이라고 하였습니다. 무당이 되지 않으면 죽거나 병신이 된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자매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열렬히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운명을 바꾸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들이 운명에 대하여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여도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나의 운명을 정할 분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 혼자 나의 운명을 정하시지 않고, 나와 함께 손잡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운명을 개척해 나가시길 원한다.’ 이러한 긍정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어려운 자들을 돌아보며 살아가십시오.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한번 투영 시켜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불행은 바디매오의 불행에 근처도 안 갔습니다. 그것이 성경 읽는 법입니다. 투영 시켜서, 이 추운 날에 벌벌 떨면서 깡통 하나를 들고 관양동 길거리에서 쭈그리고 앉아 눈보라를 맞으며 구걸하면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부정한 자의 딸입니다. 나는 부정한 자의 아들입니다. 내 이름이 바로 그 이름입니다”라고 한번 이야기 해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여러분들의 삶은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입니까.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더 힘든 사람이 너무 많다. 나는 그래도 바디매오보다 낫지 않은가. 그렇지만 나는 내 삶이 지금과 같이 조금도 변화 없이 운명처럼 확정되어 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의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그것 자체는 어제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싶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고, 심지어 조금 더 즐겁기 위해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고 죽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 있으면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명제입니다. 누가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처지면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주저앉으면 아무도 돕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이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그 마음을 살아 있는 동안에 항상 불꽃처럼 간직해야 합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사는 길이고,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리는 길이고, 여러분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들을 살리는 길입니다. 그 속에서 그러한 사람과 살아가는 사람은 진짜 복된 것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엄마가 우울증에 걸리면 남편에게 감염이 되고, 아이들에게 그대로 감염이 됩니다. 엄마가 아무 에너지가 없어서 죽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만일 정신적인 문제이면 열심히 치료를 받고 열심히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약을 먹으면 웬만한 것은 다 낫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힘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차피 죽을 것 아니라면 헤쳐 나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고, 여러분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여러분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그 희망의 불꽃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B. 단 한 가지 소원
드디어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 예수님께서 딱 한 마디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맹인인 바디매오에게 요구사항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최소한 세 가지는 되었을 것 않습니까? “가난합니다,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집안이 너무 수치스러울 정도로 미천합니다. 나는 조금 더 존귀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맹인이니까 눈을 뜨고 싶습니다.” 최소한 세 가지는 바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무 것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대답이 간단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딱 한 마디였습니다. 왜 입니까? 가문이 미천한 것, 가난뱅이로 거지 동냥노릇하며 사는 것, 이것은 눈을 눈을 뜨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라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눈을 뜬다고 해서 갑부가 되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빌어먹고 살지는 않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눈을 뜨고 자기가 노동력을 제공하고 노동의 대가를 받으며 살아갈 길이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기 전에는 그러한 것들이 문제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상상을 해 보겠습니다. 거지 둘이 앉아 동냥을 합니다. 바디매오는 맹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나갈 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똑같이 부르짖는데 사람들이 딸그랑 딸그랑 하고 놓고 가는 돈 소리가 친구 깡통 속에서만 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 집에 가서 거지로서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였겠습니까. 자신의 연기에 문제가 있나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목소리를 더 구슬프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에게 돈을 벌 수 있을까? 낙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그런 비교의식이 싹 사라진 것입니다. 그까짓 돈 몇 푼 주는 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었을 때, 간단하게, “보기를 원하나이다.” 딱 한마디로 대답한 것입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바디매오의 마음속에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지 못하였을 때, 예수가 바로 자신 앞에 지나가신다고 하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을 때는 그것은 그저 이미 버린 꿈이었고, 이미 자신의 불행은 운명처럼 굳어졌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소식을 듣는 순간 예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소식을 듣는 그 순간 그 예수가 바로 자기 앞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바디매오의 마음은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타오르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충천한 화염과 같이 줄기찬 소원이 솟구쳐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내가 이 부르짖음을 멈출 수 없나이다.’ 간절히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던 길을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여인에게 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가혹하게 바디매오를 몰아붙이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꾸짖어 잠잠하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그를 불러 오게 하였습니다. 그와 대면하여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친절하게 물으셨습니다.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 오직 한 가지 소원을 우리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 속에 불타오르는 소원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오늘 여러분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랴? 너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냐? 이루어지지 않으면 눈도 감을 수 없는 그렇게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냐? 내가 들어주리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여러분들은 즉시 바디매오처럼 대답할 수 있습니까? 무엇을 대답하시겠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 줄기찬 소원을 예수 앞에 가지고 있는 사람, 어디서든지 그 불이 꺼지지 않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그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이고,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불쌍한 바디매오에게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눈을 뜨게 해 주시거나, 실로암 물가로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가 곧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앞에 펼쳐진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겠습니까? 너무 너무 아름다운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눈을 뜨고 처음 눈이 열리며 온 세상의 풍경이 그에게 들어왔을 때 얼마나 황홀하고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소리로만 듣던 이 세상이 총 천연색으로 그에게 밀려들어왔을 때,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지만 바디매오의 눈에는 예수만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오늘 성경에 보면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돈 벌러 간 것이 아니라, 부자 되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출세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십시오. 주님 없이 수많은 시간을 가슴을 태우며 염려와 걱정으로 여러분 자신을 병들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운명에 매여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거기에 굴복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복종이 아닙니다. 아무도 여러분들을 제외 해 놓고 여러분의 운명을 확정해 놓은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차고 굳세어도 우리의 믿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동행 하는 믿음, 이것이 여러분의 모든 삶을 바꿔 나가고, 예수와 함께 동행 하면서 여러분의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가는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오늘 사경회를 마치면서 우리의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결심합시다. 하나님, 너무 많은 시간 동안을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교회와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그리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삶을 살면서 결국 세상 낙을 즐긴 것도 아니고, 주님께 기쁨을 드린 것도 아닌 삶을 살았습니다. 박쥐와 같은 삶을 살면서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오늘 이 저녁이 바디매오가 여리고성 앞에서 예수를 만난 그 날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 예수의 소식을 듣고 이 바디매오가 온 힘을 다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울부짖었던 것처럼 “보기를 원하니이다.” 고백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이 일어나고 주님을 만나는 날이 되도록 내 인생을 바꿔 달라고, 주님 앞에 부르짖는 바디매오와 같은 믿음을 갖게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