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일 교직원예배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제가 어제 외부의 교역자들하고 만나서 스터디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사람이 뭘 먹고 살았겠냐... 아니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 보면서 살았겠냐... 여러분은 어뗳게 생각하세요? 먹었겠죠? 두 번째 질문... 그 음식은 동물은 아니었겠죠! 그렇죠? 사과를 먹는다 칩시다. 아담이 실컷 먹으면 배가 나왔겠어요? 안나왔겠어요? 나왔겠죠! 절식을 하면 다시 배가 다시 들어 갔겟어요? 안들어 갔겠어요? 세포가 죽었겠어요? 안죽었겠어요? 그러면 타락하기 전에도 죽는게 잇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네요?
그것이 생명의 요소에요. 죽는것 없이 사는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끊임없이 죽는 것이 없으면 사는 것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신체도 끊임없이 세포들이 어디선가 죽기 때문에 분열 할 수 있는 에너지도 받는 거에요. 세포가 분열하는데 오늘 저녁에 잔뜩 먹으면 내일 저녁때쯤 살이 찌거든요. 왜냐하면 분열하는 시간이 23시간내지 24시간 걸려요. 분열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 거에요. 누군가가 죽어서 확 에너지를 줘야해요. 그 에너지를 가지고 분열을 하는 거에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살아있지 않은 것들의 차이는 뭐냐 하면, 살아있는 것은 그 안에 있는 구성 요소들의 끊임없는 죽음, 또 자기 밖에 있는 개별적 사물들의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거에요. 그리고 생명이 없는 사물들은 그런게 별로 없어요.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마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순해요. 그게 생명이에요.
그래서 나는 이 생명을 피조물들안에 피조물들로 하여금 상호 교통하게 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힘이에요. 이게 생명에 대한 나의 정의 에요. 그래서 죽지 않으면 생명이 유지될 수 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암세포 같은 것들이 바로 그렇게 죽는 조절 작용이 깨어진 이상한 세포 덩어리를 가리켜서 암세포 덩어리라고 부르는거에요. 죽어야 되는데 죽질 않는 거에요. 서로 사는 거에요. 그러면서 퍼져 나가는 거에요. 그래서 보면 우리들이 밥을 먹으면 얼굴부터 시작해서 몸 전체에 살이 붙잖아요? 암세포는 증식이 될 때 동그란 형태를 가지고 증식이 되는 게 아니라 불규칙하게 뻗어나가요. 그래서 딱 만져서 동글동글하면 암덩어리가 아니에요. 암덩어리는 불규칙하게 뻗어나가요. 동글동글 하지가 않아요. 규칙없이 뻗어나가는 거에요. 살기 위해서... 그게 온 몸에 퍼지면 결국은 죽는 세포가 없이 살려고 하는 것들이 뭉쳐서 결국은 마지막에 그 인간을 죽음으로 데려가는 거에요. 너무 신기한 거에요.
우주 가득히 하나님이 계시는 거에요. 어디서든지! 털끝 하나에도..! 그러니까, 교회에서 보면 아까 우리 김경해 전도사님도 기도 했지만 사도바울이 교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 할 때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사망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가운데 역사 하느니라! 놀랍잖아요! 그러니까 내 몸이 그렇게 수많은 세포들로 이루어져서 끊임없이 등불이 꺼지는 죽음, 그 세포의 죽음이라는 건 뭐냐 하면 아무것도 안 남겨 놔요. 신기하죠? 아무것도 안 남겨놔요. 어느 한순간에 ‘탁’ 하고 세포가 사라지는 거에요. 물질적인 찌꺼기는 소변이나 땀, 피를 통해서 배출이 되어서 쏟아져 나와버리고, 그리고 그렇게 덩어리로 있던 세포는 탁 하는 화학 에너지를....., 눈에보이지 않죠 에너지는.. 그죠? 그런 에너지를 전달해 주고 자기는 사라지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사라지는 걸 통해서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세포들의 생명을 촉진해요. 죽음은 이 모든 운동이 멈추는 거에요. 그렇게 살아 있어요.
그러니까 아까 사도바울이 교회라고 하는 전체의 한 덩어리의 몸에서 말씀 사역을 하는 자기의 동료들이 그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지는 세포 같은 존재가 되어서 죽으니까 그러니까 영혼들이 수없이 살아나는 거에요. 그게 목회의 영광이에요. 그게 목회의 영광이에요. (찬송) ‘나는 없어도 당신이 곁에 있으면 나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거거든요! 그게 신앙 이에요. (찬송) ‘ 주여 꽃처럼 향기 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주예수 나의 당신이여...’ 그래서 이 삶의 의미를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데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거죠. 사실은 자기 자신이 죽는 것이에요. 의미가 없는 것이에요. 온 우주에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인간으로서 내가 이제껏 산 것이 어떤 사물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꺼져가고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이에요. 나뭇잎이 이름 없이 빛 없이 스러져 죽어가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무를 살릴 수가 있었을 까요! 산에 맺힌 수많은 열매들이 이름 없이 빛 없이 떨어져 자신의 생명을 동물과 식물들에게 나누어주는 생명의 꺼짐이 없다면 과연 살아있는 산, 살아있는 들판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없는 거에요. 비셔 라는 철학자는 생명을 가리켜서 정의하기를 죽음에 항거하는 총체적인 기능이라 그랬어요. 사실 그것도 생명에 대한 정의일 수는 없어요. 생명 현상에 대한 정의죠.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누가 죽으려고 하겠느냐는 거에요. 그래서 이 우주 안에 있는 사람이든지, 사물이든지, 자기 자신이든지, 하나님 이외의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을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이죠. 왜 유익해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이 모든 우주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죽어도 나의 죽는 것 때문에 다른 것들이 사는 것을 보면서 내가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에요.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 온 창조와 우주의 하나님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초월적이고 열렬한 사랑, 이것 아니면 우리들이 절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수가 없는 것이에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면서도 희생을 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희생을 할 때조차도 자신이 희생하고 있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가 죽어가는 그것 자체가 자기가 사는 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삶의 진정한 행복은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의 도구로 주는 거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죽지 않으면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정말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날마다 죽노라 하고 고백하는 사람이에요. 그게 살아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 고백을 한 거에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인간의 육체는 자연적 질서에 속해 있으니까 좋은 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구성 요소들이 잘 죽을때 그때 깜빡이면서, 깜빡깜빡 하면서 죽어가는 수많은 세포들 때문에 아주 활기찬 생명이 유지가 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의 도덕적 질서에 속하는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 잘 들어 보세요. 우리의 영혼 안에는 수많은 경향성과 힘들이 있어요. 그중에 어떤 것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창조목적을 향하여 가는 경향성이고 힘이며 어떤 것들은 반대에요. 패역이 대표적인 거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명령하신 모든 생활의 교훈에 위반되게 살아가는 것이 몸에 배인 것, 이것이 모두다 영원 안에 있는 힘과 경향성들이에요. 이런 것들이 죽어야한다 이거에요. 그러면 그런 것들이 죽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창조의 목적을 향하는 경향성들은 힘을 얻으면서 탄탄하게 살아나는 거에요. 우리의 마음에도 마찬가지 성향들이 있어요. 마음에 많은 성향들이 있어요. 어떤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부합하는 성향들이고 어떤 것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부합하지 못하는 성향이에요. 불친절., 불경건, 부정직, 이런 것들이죠.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편한 삶은 생긴대로 사는 거에요. 그게 제일 편한 것이죠. 생긴대로 사는거... 조금이라도 다른 걸 해 보려고 하면 불편한 거에요.
언젠가 인사성이 별로 없는 직원이 있었어요. 불러서 내가 친절하게 가르쳤어요. 너는 인간이 고난이 오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돼서만 고난이 오는게 아니다 삶의 태도가 잘못되면 고난이 계속 온다. 그러면 영적인 삶도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너 왜 인사 안하느냐! 그리고는 똑바로 하라고 가르쳐 줬어요. 그랬더니 그 지체 얘기가 몇 번을 해보려고 해도 온몸에 닭살이 돋는거 같데요. 왜 그러죠? 성향 자체가 예의가 없는 거에요. 그게 그사람이 편한대로 사는 길이고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 왔어요. 올바른걸 알고 예의를 갖추려고 하니까 힘이 드는 거죠. 제일 편한 거는 생긴대로 사는 거에요. 그게 제일 쉬운 거에요. 근데 그렇게 살면 영혼이 죽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죽는 거에요. 그것이 생명을 가져오는 거에요. 끊임없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 거에요.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을때 잘 죽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모두 다 살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잘 죽을 사람들을 지명해 놓으셔요. 그리고 교회에서 이상하게 그 사람들만 죽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신 순서대로 죽을 사람들을 부르시는 거에요. 교역자가 은혜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들이에요. 어느 정도로? (찬송) ‘이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그게 바로 교역자에요. 그래서 잘 죽는 사람이 될 때 사는 거에요. 가정도 한사람만 잘 죽으면 살아요. 교구에서도, 각 부서에서도, 구역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잘 죽으면 살아요.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죽는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요? 행복한 이유가 뭘까요? 사물이 있다가 ,세포가 있다가 탁 죽어서 없는 걸로 사라져요. 어디로 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요? 어떻게 갈까? 질료 상태로 돌아가는 거에요. 질료는 언제나 성령 안에 있어요. 얼마나 신기해요. 우리들이 영적으로도 주님 앞에 죽으면 그렇게 죽는 것을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그렇게 살아있는 거에요. (찬송) ‘나의 죽음도 유익 함이라’
만약에 한 사람의 신자가 이렇게 영적으로 죽는 것이 없잖아요 그러면 한때는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인데 교회의 암적인 존재가 돼요. 그리고 영혼 전체가 망가져서 하나의 기형적인 암덩어리 같이 돼요. 그리고 생명으로부터 멀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참된 신자의 눈에는 항상 눈물이 흘러야 돼요. 눈물이 흘러야 합니다.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는 죽고 사망은 내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네 안에 역사하고 그러면 그들에게는 없는 놀라운 생명의 세계가 우리에게는 생겨나게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시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고백이 되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