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울노회 시찰회
녹취자: 이경순
역사상 인간이 만든 배 가운데 제일 큰 배가 67만 톤짜리 배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만든 것이고 우리나라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그런 배입니다. 67만톤쯤 되는 배는 축구장이 약4개정도 들어갑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배입니다. 벌크선이니까 사실 별 시설도 없고 위에는 평평해서 컨테이너나 이런 것들을 쌓거나 아니면 아래 탱크에다가 기름을 넣게 되어 있는 구조의 대형 선박입니다. 그 선박이 망망바다위에 떳습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섬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낮이기 때문에 별 도 없고 어딘지도 모르는데 그 배는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이때 북쪽으로 이동하라는 미션이 주어셨습니다. 그랬더니 축구장 네 개는 되는 커다란 갑판위에 서있는 미션을 받은 사람이 나침반을 탁 폈습니다. 그리고는 북쪽을 정확하게 재고 그 드넓은 갑판에서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지금 미션에 충실하고 있어 나는 지금 북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그 거대한 배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남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어느 책에서 읽은 비유가 아니라 제가 사실 만들어낸 비유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아무리 이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목회라고 부지런히 해도 이 시대가 그리고 이 시대라는 조류 속에 떠 있는 거대한 한 시대의 교회라는 배위에서 우리들이 부지런히 북쪽으로 가라는 미션을 받고 걸어가도 배 자체가 남쪽으로 이동하면 우리가 북쪽으로 가는 그 미션에 충실한 삶이 이 교회 전체가 가야할 방향을 바꿔놓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회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한 지식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우리에게 영원한것이고 중요한 것이지만 한 시대의 조류가 어떻게 흐르고 그 위에 떠있는 교회라는 배가 어느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갑판 위를 뚜벅뚜벅 걸어가는 주관주의에만 빠져서는 안 되고 지피에스를 통해서 지구전체를 바라보면서 망망대해인 여기가 지구전체의 바다 중 어디이고 뱃머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진중호씨 글을 읽었는데 그는 크리스천인데 그는 한국교회의 방어나 현상이 너무 심해서 이제는 거의 세상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평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가야할 가치가 있고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내용이 있는데 이것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소통하고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와 생각을 가지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전달하는 그런 능력자체가 상실되었다고 하는 단절성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심각하냐면 지금 대학생들을 보면 정말 똑똑하고 머리가 있는 학생들은 기독교 신앙을 안 가집니다. 그래서 서울대에도 보면 철학과 다니는 학생들 중에 크리스천은 거의 없습니다. 있는 학생들은 철학을 공부해서 신학 쪽으로 가려는 학생들입니다. 철학과에서는 제일 싫어하는 학생들입니다. 도구로서 철학을 하려고 하니까 싫어합니다. 그 이외에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이제 예수 믿는것을 사람들에게 전파한다고 할 때 이것이 점점 더 어렵다고 생각을 하는데 우리는 간단하게 사람들이 너무나 악하고 시대가 너무나 타락해서 그래 하고 간단하게 정의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 세계관과 많은 사상들이 기독교에 호응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는 정신적인 지성적인 기재자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그리고 이런 사상은 점점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한 시대속에 흐르는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상가들에 의해서 주도 되기는 하지만 처음의 시작은 사상가들이 만들어 놓지만 그 사상을 적셔서 모든 세계 속에 골고루 퍼지게 하는 것은 사상가들이 하는게 아니라 그 사상에 영향을 받은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것입니다. 특히 예술, 대중음악, 대중가요, 대중예술 이런데 종사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을 해서 극작가, 문학, 심지어는 과학자 정치가들까지 모두 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이 세계 속에 골고루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데 이 책을 쓰면서 제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퍼즐처럼 돌아 다니는것을 조각조각 맞추어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이 시대는 절대적인 진리를 완벽하게 거부하려고 하는 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이 개신교는 지금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있고 천주교는 사람들에게 비교적 호의를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고 불교는 아주 폭 넓은 관심사를 가지고 사람들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신교가 유난히 비윤리적이다 라기 때문이다 는 것 때문에 그렇다는 전제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교와 가톨릭에서 윤리적인 타락이 매우 심각하고 한 시대의 윤리적인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삼투압현상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어느 종교든지 모두 고루 평균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와 가톨릭은 창구가 단일화 되었고 언론에 대해서 엄청난 공을 들이면서 관리를 합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창구가 없어서 관리가 안됩니다. 그래서 집중적으로 난타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서 우리들이 개신교의 반성의 사유를 찾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이유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더 커다란 이유는 이미 가토릭은 종교다원주의를 폭넓게 받아들였고 그리고 불교도 기본적으로 범신론입니다. 그리고 놀랍게 종교다원주의 뿌리가 사실은 범신론 내지는 수정된 범신론이라고 할 수 있는 데제 신론입니다. 이런 것들이 지금 니콜라스 콜이나 할티션나 아니면 화이트헤드나 이런 과정철학자 과정신학자를 통해서 시카코 학파를 통해서 광범하게 번져있습니다. 그 핵심적인 요지는 인간자신의 본질이 신의 본질과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은 충분히 자신의 능력으로 신을 찾아갈 수 있고 그리고 인간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이 세계 안에서 신과의 합일을 이루어 가는 존재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자체를 아주 굉장히 신과 합일된 존재로 생각하는 이런 철학적인 사조들은 근대에서 스피노자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런 것들이 지금은 광범위한 호소력을 얻고 있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뉴에이지의 사상에 나오는 소위 이야기 하는 2000연식을 가지고 이야기 할 때 2000년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소위 아쿠라리스 별자리의 시대가 결국은 인간이 고도로 승화하여 신과 합일을 이루는 천문학적인 에이지입니다. 그것이 뉴에이지입니다. 이런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이 신학 자체는 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구조에 가장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주 비참하고 그리고 하나님 은혜 아니면 구원 받을 수 없는 아주 절망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전적인 타자성이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은총으로 인간에게 하감하여 주시기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 이런 암울한 인간의 처지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더라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회복시켜주시지 않으면 그 형상 때문에 더욱 불행해 질 수밖에 없는 인간 그 담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 이외에는 어떠한 구원의 길도 없다고 하는 배타적이고 비타협적인 교리 이런 것들은 시대의 정신에 전면적인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모든 종교와 시대의 사상이 사실은 이 기독교에 대해서 배타적은 감정을 갖게 만들어 주는 이 시대의 코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교리의 체계를 가지고 있고 이것을 개신교에서 양보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신교 안에서 커다란 반성이 일어나면서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을 굉장히 치열하게 많이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이런 고민을 이미 50년대 60년대에 끝냈습니다. 그리고 62년 제r2 바티칸 총회에서 50년 후에 도래하게 될 사회에 대한 전망을 끝내면서 이때에 한 스킨이라든지 카알 라든지 이런 사람들의 범신론적은 사상을 받아드리면서 종교다원주의를 과감하게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티칸 총회에 의결이 이루어지고 이것이 합의에 까지 이루어지는데 최소한 이십년에서 이십오 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석가탄신일에 가토릭에서 화환을 보내고 현수막을 걸고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수환 추기경 재직당시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이 분 자신도 제 제2차 바티칸 총회의 신학을 받아들이면서 과감한 전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토릭은 거대한 유턴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카토릭안에서도 많은 목소리가 있지만 그 후로 카토릭은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더 급진적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에 있는 카토릭에 신학들은 그 정도가 아니라 뉴에이지 사상을 그 대로 수용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급진적인 체계를 보이는데 샤로뎅 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오메가 포인트의 교리 같은 것들이 전수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되어서 즉 그런 선교적인 노력은 결국은 세상에 흐르고 있는 이 시대의 정신에 있는데 기독교의 교리는 교리대로 가고 그러니까 서로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들을 변형해서라도 여기에 시류에 상승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상승해서 시류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받아들여서 사람들이 카토릭이나 불교를 받아들이게 하고 그러면서 카토릭속에 사람들이 스며들어오게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체계로 보기에는 교회가 참으로 교회되는 것이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라고 하는 가시적 교회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우리는 선교라고 보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며 들어와서 광범위한 호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모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교회론에 있어서 그런 식으로 교회를 보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실하게 중생하고 회심해서 영적인 그리스도 몸에 접붙여져야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역사를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특히 계몽주의 이후의 교회역사를 보면 결국 기독교의 역사는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다른 대답들이 충돌을 일으키면서 엮어져온 역사입니다. 그 하나의 질문이 후 이즈 크리스천 ? 누가 크리스트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누가 그리스도인이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바꾸지 아니하고는 이런 현대의 사조들을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카토릭처럼 융화되는 이런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카토릭에서는 무슨 중생의 개념이라든지 그것은 원래 희미했고 회심의 개념이라든지 우리들이 개신교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그런 분명한 개념들을 이미 다 포기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종교다원주의가 스며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다원주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 그리고 성경말씀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판단의 기준이 되는 유일한 논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다원주의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산이 있는데 이 산은 봉우리는 하나지만 올라오는 길은 많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불교라는 길로 어떤 사람은 유교라는 길로 어떤 사람은 이런 길로 저런 길로 해서 올라가지만 마지막에 위에서 모두 만나게 되는 것처럼 진리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 아주 많다고 하는 이것이 종교다원주의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조들이 광범위하게 퍼져있기 때문에 사실은 이런 사조들을 수용하지 않고는 이미 신학과 다른 모든 학문과의 대화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에 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제일 심각한 것은 도덕적인 기준들이 폐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중학교나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특히 초등학교 상급학년들 특히 중학교 들어가면서 봇물처럼 이 세상의 문화가 확 쓸려들어 옵니다. 이렇게 하면서 아이들이 조숙해지면서 지적으로 이것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교육이 전혀 안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유교교육의 관성을 통해서라도 이게 유지 되었었는데 지금세대는 우리세대가 그거 하지마라 하면 왜 안 되는데 라고 묻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아이들을 때리는 것이 왜 나쁜가. 지난번에 봣을때도 아이를 왕따 시키고 결국 그 아이가 죽었는데도 히죽거리면서 문자를 보냅니다. 자기가 한 것에 대한 도덕기준이 없기 때문에 양심자체가 실종 된 것입니다. 양심이라는 단어가 라틴어로 콘스께티아 라고 하는데 콘은 함께고 스께띠아는 의식입니다. 지식 속에 붙어서 이것이 작동하는 것이 양심이기 때문에 도덕기준이 서있지 않으면 양심자체가 거의 작동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짐승 같은 삶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어느 한 분야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 역사 문학 과학 예술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기존의 체제가 가지고 있었던 절대적인 기준에 대한 이런 것들이 과감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철학에서 제일먼저 일어나고 철학에서 이런 것들이 먼저 일어나서 절대적인 기준자체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장폴 사르트르는 자신의 일생의 과업은 진리를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앙리 베르드송의 책을 읽으면서 젊은 사르트르는 결국의 이 세상의 모든 진리는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해체주의 길을 여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자기의 일생의 과업을 진리를 허무는 것이라고 믿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진리자체는 원래 없는 거다 사실은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다고 이야기하면 그 말도 맞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다고 하는 말이 맞으면 진리가 없다는 말 자체가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유명한 크레타인의 역설이 나온 것입니다. 희랍시대에 크레타 사람들은 장사를 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짓말쟁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크레타인 이 나타나서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맞으면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크레타인 이 그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맞았으니까 틀린 것입니다. 그런데 크레타인 이 거짓말쟁이라고 말을 크레타인 이 했는데 그 말이 맞으면 그러면 크레타인 이 거짓말쟁이라는 명제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미 진리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 말은 맞아야 되잖아요. 그 말이 맞으면 아까 진리가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다고 하는 그 자체는 맞으니까 이런 모순들이 생겨나면서 허물어지는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허물려고 했던 이유는 간단한 것입니다. 진리 이 자체는 원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살다가 지배계층들이 자기 지배구도를 공고화하기 위해 도덕교육이 필요했는데 그 도덕교육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하나의 아티피셔한 근거입니다. 인공적인 근거를 만든 것이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허무므로서 인간은 자유로워 질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고등학교 때 배운 유명한 명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이냐면 여태까지 인간의 모든 사유가 본질을 가지고 사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는 영원한 세계의 그림자고 투영입니다. 이 세상에 돌아가고 있는 모든 현상들은 영원한 세계의 투영이기 때문에 이 모든 세계들 너머에 있는 영원한 본질들에 대한 인상을 어떤 지식을 가지게 될 때 거기서부터 연역해 내려오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모든 것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들을 더듬어 가고 깨달아 알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져 왔던 동양사상도 똑같이 거기에서 왔던 그런 하나의 전체적인 사유의 순서였습니다. 이것들을 깨뜨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데카르트가 깨뜨렸다고 하는 게 그게 아니라 13세기에 역사적으로 중세까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제론 적인 사유가 전체를 지배하고 학문 전체를 지배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겸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것들을 뛰어 넘어서 인간이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저 높은 세계의 실재들에 대해 거기에 대해서 뭔가 눈을 뜨고 안목을 갖게 될 때 비로소 이 아래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이해하게 되는 현실성에 대한 이해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 전통적인 관점인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것처럼 13세기에 광범위한 분열이 중세의 사상계 속에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그 유명한 실재론 유명론,관련론 등등의 그 유명한 존재론적인 논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윌리엄 고판이나 코사인 니콜라스등 같은 사람들이 등장을 해서 예전에 사물들을 보던 관점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내려오면서 어마어마한 폭발력이 있는 커다란 영향을 분출하게 되는데 그것이 르네상스입니다. 르네상스라는 개신교 목회를 하기 위해서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레나스키멘 토모어 라는 단어 인데. 레는 다시고 레나스 는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재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르네상스입니다. 그러면 그 재탄생이 무엇이냐면 인간 발견의 재탄성입니다. 그것은 중세까지 내려오는 모든 것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고 이 세계의 사물들은 모두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신이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운데다가 물통을 놓으면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는 강강술래같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 코끼리 사물 학문 문화 예술 등이 강강술래하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고 서있는 것은 절대자인 신 하나입니다. 하나님 하나입니다. 그래서 나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이냐 라고 측정할 때에는 항상 신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존재의 의미를 측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중세 말에 와서 왜 하나님 혼자서 중심이 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질문의 제기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인식하는 인간이 없다면 신의 존재도 의미 없지 않는가. 이런 사고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이제 진리가 객관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이던 사고방식이 사람중심적인 사유를 보태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그것이 교환된 것은 아니고 결코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기독교 적인 사고의 테두리를 유지하면서 인식하는 인간이 매우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딱 부각을 시키면서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15세기에 이탈리아에 인문주의 학자 피코텔라 미란 도라 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백작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마어마한 유산을 남겼고 일평생 장가를 안가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데 인류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철학과 종교를 연구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에 이를 것인가를 연구합니다. 그리고 26세 때 그것을 완성합니다. 900개의 논제를 가지고 이 모든 것들을 완성을 해서 유럽에 있는 모든 철학자를 불러서 자기와 토론하자는 도전장을 냅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가로막았습니다. 그 사람이 쓴 유명한 책가 운데 하나가 인간존엄성에 관한 연설 이라는 아주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속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내가 너를 만들었단다. 그러나 나는 너를 위하여 어떠한 문명도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은 없단다. 나는 너를 만들었을 뿐이고 이제 너는 모든 것이 자유이고 독립이다 이제 네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운명을 갖게 되고 이 세계가 어떻게 바뀌고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너에게 달렸고 나는 너에게 이 모든 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게 이러한 내용의 연설을 합니다. 그 연설이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킵니다. 그 연설의 요지는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셨고 인간을 지으셨지만 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로서 자유롭게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고 이 세계가 어떻게 결정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신 것이 없이 인간에게 모두 위임 하셨다는 것입니다. 단 하나 인간이 명심해야할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으로서는 완전하게 지었지만 늘 불완전하게 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첫째는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영혼을 매일매일 정결케 하여야 하는 종교적인 의무가 있고 두 번째는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무엇인가 창조적인 행위를 보태어서 이 세계를 지금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세계로 만들어 가야 할 책임 이 두 가지에 있어서 인간은 완벽한 자율을 즉 오토모닉 을 부여받은 인간으로 묘사가 된 것입니다. 이러면서 르네상스에 들어오면서 르네상스가 결국은 엄청난 폭발적인 인간 재발견에 대한 운동을 펼치면서 예술 이런 것들이 발전을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을 했는데 이탈리아 아래 지방에서는 문화와 예술을 통해서 북쪽에서는 학문적인 르네상스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인문주의라고 하고 이 인문주의 영향이 북구 파에 미치면서 구라파에 미친 인문주의 영향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문주의가 일어나게 되었을 때 이 인문주의에 두 계파가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는 기독교 인문주의라고 하는 기존에 있었던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거기에다 인문주의적인 요소를 첨가하려고 하는 그런 운동들이 일어나고 또 하나는 이 기독교와 단절한 가운데 인문주의 운동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 아래를 세속적 인문주의라고 하고 위를 기독교적인 인문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르틴 루터나 칼빈 이런 사람들이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을 때에 그들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쳤던 멘토들이 전부다 이 첫 번째 기독교 인문주의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아주 각성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프랑스 파리 콜레주와 오르레양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는데 그 때 영향을 미쳤던 알티아지라든지 레타블같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인문주의와 구약해석 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이제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 영향을 준 것은 너무 놀라운 것이 인간에 대한 재발견입니다. 르네상스가 기본적으로 발견한 그 인간은 이상 자체를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두었던 인간상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일반은총 역사 속에서 가장 존귀하게 쳤던 서구라파의 역사의 수난 중 하나입니다. 실재로 그리스의 유적과 문명을 돌아보게 되면 눈물이 나게 됩니다. 어떻게 성경도 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이렇게 깊이 이해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대우하고 살려고 할 수 있었을까 이에 비하면 진리를 안다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을 얼마나 막대하고 있는가 하는 각성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역사가 전개가 됩니다. 그때에 그런 것은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그런 존재가 아니라 거의 신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칼빈이나 루터 페레리우스를 비롯해서 당대에 인문주의 영향을 받았던 버밍글리나 이런 일 세대와 이세대의 종교가들은 그 사상으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그 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실은 이러한 사상의 맥락을 따라서 성경과 인간을 가장 잘 해석했던 위대한 스승 한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제이아이 파크타크가 쓴 기독교 최고의 휴머니즘이라는 책속에 나오는 내용이 바로 이런 요지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게 중세의 교권에 의해서 짓밟혔던 마치 인간이 교회를 세우고 성직자들의 질서를 세우는 부속품 인 것처럼 여겨지던 것은 가상적 전제국가의 제왕적 사고방식을 기독교에 강압적으로 대입한 것이지 성경의 원래의 정신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오래 동안 묻혔던 새로운 논의들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는데 이게 인마고 데이의 문제 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상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타자로서 아주 낮은 피조물임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인간으로서 인간을 무시할 수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도 인간을 절대로 무시하시지 않는 그런 존엄성의 근거를
인간의 임하고 데이에 갖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개념이 존재론적인 개념이나 릴레이션 하는것이냐 관계적인 개념에 대해서 논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털썩 이렇게 넣어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게 된 것이냐 아니면 이런 것은 없고 하나님이 특별한 관계를 인간과 맺고 있기 때문에 이 인간이 존엄한 존재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인간론에서 이러한 논란들이 논의의 역사를 펼쳐 보입니다. 대개 루터 파에서는 관계적인 측면을 강조를 하고 개혁파에서는 존재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데 가장 확실한 것은 이 두 개 모두가 다 함께 양면적으로 이해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 넓은 의미에서는 영적으로 죽은 이 자연인들에게 남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는 존귀하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형상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인간이 누구인가를 규정해 보니까 이것은 중세에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인간이 교회의 부속처럼 여겨지던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르네상스와 개신교가 종교개혁이 근대를 태동시키는 불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7세기에 데카르트라는 유명한 사람이 나타나면서 이 모든 것들을 전체를 이탈 되어온것을 종합을 하면서 혁명적인 논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의 오송의 원리 그런 책속에 원리에 관하여 라는 그 책속에 나옵니다. 그 속에서 인간이 결국은 최종적인 가치의 판단이 인간이라고 하는 교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물론 하나님 이를 인정했고 모든 것을 인정했지만 그러나 아까 이야기했던 피코델라 밀란델라 사상을 갖고 있어서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 속에 그렇게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서 인간이 어떤 사유를 하느냐에 따라서 판단의 결정을 내리는 근거 결국은 진리의 근거를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 속에 있는 것처럼 만드는 인간중심적인 견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간에 있고 모든 것은 패러다임처럼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불러내서 내 옆에 앉히고 내가 거기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중심에 서있고 하나님도 모든 패러다임과 함께 강강술래 하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그 사물들이 무엇인지 내가 규정하기에 달린 거고 신도결국은 내가 규정하고 내가 신의 위치를 갖는다는 것까지 극단적인 생각으로 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그러다가 계몽주의에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계몽주의라는 것인 엔나이트 먼트라고 하는데 엔나이트 먼트는 빛을 퍽하고 미치는 것인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인간이 누군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고 이성에 의해서 눈을 뜨기 전까지의 모든 역사는 어둠속에 있었던 역사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둠속에 있는 역사이기 때문에 진정한 새 역사는 이 계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결국은 미몽에 있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이 인류가 진정한 진리의 빛을 받을 때에는 계몽하게 되고 계몽하게 되면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자신이 이 모든 가치를 판단하게 되어야 할 중심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몽주의 핵심입니다. 이 계몽주의가 17세기 말부터 번지기 시작해서 18세기에 폭발적으로 부흥을 하게 되는데 계몽주의가 결국은 근대주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모더니즘입니다. 계몽주의가 근대주의로 이어질 때 두 갈래가 이어집니다. 첫 번째 갈래가 기존에 있었던 서구사회의 기독교적인 가치의 질서 다시 말해서 신의 존재 신의 도덕률 인간의 유한함 이런 것들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체계를 용납하면서 그러면서 계몽주의를 따르는 부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부류이고 두 번째는 이것과 단절하는 것입니다. 위에 것을 조금 더 설명하면 그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가치 체계를 그대로 수용 한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진리는 누구도 본적이 없지만 있다고 믿고 신의 존재도 있다고 믿고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약해도 좋으니까 인간 모두를 규율하고 있는 보편성의 법칙이 이 세계위에 존재하고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따라야 된다고 하는 것이 법사상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실정법을 만드는 게 결국은 법은 최소한의 양심이다 그것은 실정법이 인간의 양심이 규정하고 있는 최소한의 자연법의 질서를 찾아가는 것인데 그 질서의 저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런 보편타당한 원칙과 규칙들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근대주의로 나간 사람들이 있고 그담에 아예 이것자체에 회의를 품으면서 나아가는 근대주의가 있습니다. 이렇게 내려온 근대주의가 포스 모더니즘으로 그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미 그런 것들은 근본주의적인 것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런 것 들을 강력하게 반박하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도덕과 가치들이 이렇게 인간을 속박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허물고 깨뜨리면 깨뜨릴수록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실존주의 사람들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있는 내가 실존입니다. 그리고 본질은 내 본질이 무어냐 이것인데 본질은 중요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인간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그냥 허공 속에 던져진 존재이다. 이것은 피터슨과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우연적인 존재이다. 그런 것의 의미를 묻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면서 사르트르가 결국은 모든 속박이 되는 진리를 허물어 버리면 인간은 완벽하게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그리고 완벽한 자유로운 존재가 된 상태에서 하나님처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의 가치를 자기가 규정하면서 살아가는 것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면 인간은 자유다 자유는 무시무시한 자유다 그러면서 거기에 현대인의 불안의 문제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철학자체가 유실됩니다. 그게 결국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풍비했던 소위 얘기하는 비추게이의 언어철학이라든지 분석철학은 아날레키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에는 거대한 담론 신은 존재하는 것인가 도덕원칙은 존재하는가. 선은 무엇인가 악은 무엇인가 그런 것들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맨 위에 있던 일부류에 기본적인 도덕의 가치나 진리의 존재 같은 것을 인정하면서 오던 것들이 와해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 일어나는 과학의 발전과 이런 것에서 그 세계관이 형성이 되는데 그 세계관은 은 인과주의 과학주의 그담에 물질주의 이러면서 여러분들이 사회시간에 배운 것처럼 엄청나게 많은 칼 마르크르스와 엥겔스가 있고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이 나오고 이런 사람들이 나오면서 이런 모든 세계는 결국은 정밀하게 인과관계로 되어 있고 그래서 여기에 신의 의지나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이렇게 보면서 결국은 결정론 구조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결국은 이 사회자체에 대해서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사상 자체가 다 허물어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태까지는 그래도 보편적인 가정에서 교육이 되어 왔는데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나쁜 짓하면 안 돼 이러면서 교육이 되어 있었는데 그런데 이런 것들이 부모들이 그런 교육을 못 받으면서 허물어지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이 모든 것들이 다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에 피터징어라는 교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결혼에 관한 새로운 의견을 이미 벌써 80년대에 내 놓았습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는 것인데 왜 꼭 남자와 여자여야 되는가. 이 자체가 편견이다. 그리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결혼을 많은 주에서 허락을 합니다. 그런데 피터징거는 그게 아니라 어떻게 결혼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만 성립하느냐 개하고도 혼인할 수 있고 소 하고도 같이 살 수 있다 이럽니다. 더 무서운 것은 기존의 질서들을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인터넷 사이트에 외국에 들어가면 자기의 친엄마하고 성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연합 사이트가 있습니다. 거기의 자격이 그렇게 했어야 됩니다. 도대체 그게 말이 되느냐고 이야기하면 도대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그게 니가 이 제 것 남아있는 계몽되지 않는 영적 어두움 지적 어두움의 잔재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치는 것이 없이 모든 것들을 허물면서 전진하는 것입니다. 이 결국은 이 세계 전체에 해당되는 거대한 배교와 배역의 사조들이 번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 지금현재 한국을 이야기하면 여태까지는 유교의 관성에 의해서 이런 것들이 존재해 왔는데 이것이 엄격한 실증주의 내지는 과학주의를 지양하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에서는 그래야 하는 어떤 근거의 이성적인 맥락들을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 원천이라고 하는 것과 실재의 우리의 가치의 체계라고 하는 것 사이의 연결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엄중한 가치체제를 가지고 들이대면 그것은 종교의 영역이기 때문에 검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기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인간은 결국은 어느 도덕도 지켜야할 가치를 지닐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유니테리아니즘 입니다. 소위 예기하는 공리주의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대로 살다보면 무조건 상태가 되어서 충돌을 일으켜서 수많은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은 싫습니다. 그것 자체가 자신에 대한 손해이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 그러면 우리 함께 타협을 해서 적정한 선상에서 자유를 지양해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대공약수를 찾아보자 라고 하는 것이 현대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폄하가 최고의 화두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보면 기독교의 교리를 포기하고 불교와 화해하면서 잘 지내는 것 너무 착한 것입니다. 그것이 현대인의 코드에 딱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개혁주의가 어떻고 개신교가 어떻고 인간은 아무 희망이 없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이슬람이고 뭐고 다 아무 구원도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사람들에게 보기에는 가장 가시와 같은 골치 아픈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그렇게 말을 하면 교회가 그 가치를 따라서 철두철미하게 삶을 살면 되는데 박해를 받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논리는 이거다 라고 깃발을 올렸지만 자기의 몸과 모든 생각은 이 깃발이 든 진리에 젖어 있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 살잖아요. 그러니 세상과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다 그러고 자기 자녀들도 그렇게 교육을 받고 가정에서도 그렇게 대우해줘야만 아빠가 살아남는 것처럼 이런 속에서 같이 살아가는 겁니다. 자기는 이 깃발을 들긴 들었는데 내려 놓을 순 없는데 이렇게 살순 없는 것입니다. 이율배반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이 자꾸 까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깃발을 내려놓을 수도 없고 들고 있을 수도 없는 애매한 위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한 현대의 기독교에 대한 묘사입니다. 결론은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이냐 라는 것입니다.
조엘 오스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한국에서 이 사람 설교들을 기회가 별로 없는데 외국에 가면 그는 인기스타입니다. 지금 벌써 오만 명 넘었습니다. 만이천명 넘었다는 적이 얼마 안되었는데 빌하르크리 큰 교회는 완전히 침체입니다. 이쪽 교회로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오는데 그런데 외국에 가서 호텔에서리모컨을 켰는데 조엘 오스틴이 나옵니다. 나는 조엘 오스틴이 누구인지 알고 얼른 끄고 자야지 그러는데 이렇게 들고 30분 동안 있습니다.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얼굴이 송중기 보다 더 예쁘고 목소리가 아주 감미롭고 원고 없이 설교합니다. 그런데 수사학적으로 한 문장 한 문장이 어쩌면 그렇게 물결처럼 흐릅니다. 작품 감상하듯이 얼굴 예쁘지 목소리 부드럽지 연설 좋지 하는 이야기를 회개하라 죄인이다 그런 이야기 안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트도 얼마나 탁월하지 모릅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이 이제 바쁘게 직장생활 하다가 아내와 합의하게 여러분 여행을 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r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이박삼일 휴가를 내서 거기로 차타고 서너 시간가는 가까운 데를 돌면서 가족과 대화를 휴가를 가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옆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휴가 계획을 이야기 했습니다. 어디로 가냐고 물어보기에 우리가 어디 세 시간 정도 거리에 가서 산에서 즐길 거라고 이야기 할 때 이 사람은 자기의 유럽 여행계획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당신은 집에 돌아와서 마치 야유회 간 것처럼 그렇게 초라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한 번도 소리 지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사람들이 들으면서 눈물을 쏟으면서 빨려 드는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설교는 굳이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두 돌보시고 당신을 번영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번영이 60년 70년도에 있었던 번영주의는 한국에서는 생계형 번영주의 였습니다. 그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잘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도 자가용 탈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번영주의는 아브라함 메슬 로우라는 사람이 심리 발달단계를 이야기 하면서 심리의 동기화를 이야기 하면서 인간의 옥구를 다섯 개를 이야기 합니다. 제일 먼저가 생리적인 욕구 먹고 배설하고 성관계 갖는 욕구 그담에 안전하고 싶다는 욕구 세 번째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등등해서 마지막 다섯 번째 최고의 욕구인데 자아실현 욕구입니다. 자아실현이란 자기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서 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카피에 보면 수없이 꿈은 이루어진다. 당신 뜻대로 해라 등등 나오는 카피가 짧은 카피인데도 우리에게 커다란 흡인력을 주는 이유가 우리도 모르게 이 속에 베어 있는 현대정신의 마취제들이 이 속에 베어있는것과 정확한 일치가 일어나서 그 카피 15초에 스파크가 일어나는 겁니다. 아 저거다 그러면서 그런데 그런 정신을 꿰뚫어 보면서 이런 것들을 만드는 것인데 거기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인간이 결국은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것을 모두 이러 이러한 일에 썼습니다. 다니던 평범한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생각해 보았을 때 나는 나의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r,그래서 이제부터는 내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등등 이런 카피들이 많이 나오지만 결국은 자아실현이라는 것은 자기를 이 온 우주의 중심에 있는 존재라고 보고 자기가 이 모든 것들을 가치 판단할 수 있는 판단자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자기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을 한번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자아실현을 극대화 했던 사람들이 황제 들입니다. 특히 중국의 황제 같은 사람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면서 이것을 하기 위해서 결국은 인간은 경쟁구도가 더욱 치열해 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자아실현의 길은 자본입니다. 자본과 권력을 손에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벌들의 회장의 생활은 우리들은 상상할 수 없는 황제가 부럽지 않는 생활을 합니다. 뭐든지 말하면 다 되는 그런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아실현을 충족시켜주는 것들을 인간의 현대인의 그것을 정확하게 집어서 기가 막히게 던져주는 것입니다.
이 년 전에 서부 웨스터민트 신학대에 가서 총장하고 몇 사람이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조엘 오스틴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조엘 오스틴에게 신학이 무엇이냐 하니까 나오는 이야기가 펠라기우스 주의 영지주의 혼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이 언제 영지주의를 연구하고 펠라디우스를 연구해서 그것을 혼합을 해서 나왔겠는가 종합하다가 보니 그 사상이 어떻게 거기하고 맞아 떨어졌다고 학자들이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질문이 나왔습니다. 나는 조엘 오스틴을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레이 킹와 인터뷰한 것을 여러분들이 보면 그는 절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사실을 알 것입니다. 그것을 한국의 개혁주의 학회가 모였을 때 사실 그 때 제가 설교 할 때 그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에 피터 밀덱 웨스터민커 필라델피아 총장이 설교가 끝났는데 나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힐링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개강 예배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설교겸 강연을 했습니다. 그런 사상들이 현대인들에게 기가 막히게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가 회개를 외치는 것이 현대인의 코드하고 너무 안 맞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갈 길은 첫째로 우리가 목회자로서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의 방면과 양이 상당한양이 돼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지금 제가 이야기한 이런 걸쳐있는 학문들에 대해서 역사와 이해를 가지고 그 속에서 우리들이 신학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목회사역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목회의 부흥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교회를 세울 때 ‘내가 약하여 심히 두렵고 떨었노라’ 그랬습니다. 그때가 아테네에서 학자들과 만나서 에피트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와 만나서 치열한 논쟁을 벌입니다. 열매가 별로 없었는데 그것을 학자들은 그게 별로 필요가 없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을 것을 작정했노라 이것을 어떤 개혁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오해를 해서 아 그러면 우리에게 철학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다. 오직 우리는 이 십자가를 외쳐야 된다고 이야기 했는데 사실 그 뒤 이장을 천천히 읽어보면 그러나 성숙한 너희에게는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소피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지혜입니다. 지혜를 이야기 합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철학 속에서 찾고 싶어 했던 그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시다 하고 다시 예수그리스도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성으로서는 해결될 수 없는 거대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중생과 회심이 없이는 안 되고 이것을 위해서는 우리의 목회사역에서 비상한 영적부흥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대구에 집회를 내려갔는데 부교역자 한사람이 자기 교회 자랑을 입에 침이 마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담임목사는 없고 해서 나는 그런 이야기를 고깝게 듣는 사람이 아닌데 그래도 배울게 있나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당신 여기서 무슨 일을 하냐. 그랬더니 장년부 교구 사역을 한답니다. 당신 신학을 총신에서 했느냐 하니까 그렇다고 하기에 회심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맞데요 그럼 당그 신학을 기준으로 갖고 당신이 목회를 할 때 당신 교인이 얼마나 되냐 그랬더니 교인이 500가정이 되면 다고 800명 정도 된다고 하는데 당신 그러면 회심한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느냐 20%쯤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한 시름 놨습니다. 그리고 당신 나한테 뭘 그렇게 자랑하느냐 당신 양떼 중에서 20%만 구원 받고 나머지는 구원이 없다 그런데 나한테 정말 자랑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했습니다. 내가 한시름 놨습니다. 그런데 우리 목회자들에게 서서히 감염되기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구령의 열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70년대만 해도 어떤 중요한 사한이 있었냐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나라 갈수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인간답게 살수 없다 신앙은 없어도 이 단순한 것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목회자 자신이 이미 현대주의적인 정신에 감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을 만나보면 굉장히 혼란스러운 것을 목회의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목표라고 이야기 하는 것들은 대개 보면 교회를 짓고 그담에 3000명을 주소서 이런 것들도 오래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목표가 아닙니다. 치열하게 목회를 해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목표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승부를 하려고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아 저 집사님이 거듭나지 않아서 어떻게 하냐? 회심하지 않는 아이들 어떻게 하냐?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요즘 우리 교회에서 인터쉽 전도사에게 회심에 관한 책을 한권씩 주면서 읽고 가서 자기가 맡은 주일학교 아이들이 몇 명이나 회심했는지 일일이 조사해 오라고 숙제를 냈는데 이게 한 15년 전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데 그 중의 어느 한 전도사는 과하긴 했는데 자기가 돌보고 있는 어린영혼들이 45명인데 딱 한명만 회심했다고 자기는 믿는 겁니다. 그 회심의 퍼센트가 20% 이하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교회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걔네들 교회다 떠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은 목회자 자신에게 이런 회심에 대한 분명한 열정이 불타야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논리나 이것들로 안 되니까 하나님의 큰 은혜를 주셔서 그들이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거듭나야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가 확고하게 이 속에 심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청교도가 이야기 했습니다. 회심하지 않고도 하나님 뜻대로 사는것 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길들여진 맹수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담에 세 번째는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놀라운 감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지속적인 성화 속에서 성장해 가지 않으면 견고한 생활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와 같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가치 융합적인 시대에는 더더욱 그런 것 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아주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상을 세워줘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는 죽어도 공산주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살수밖에 없는 확고한 사상의 틀 내지는 기독교 철학을 세워줘야 합니다. 그것의 시작이 교리교육, 신학교육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인식을 갖게끔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근본적인 인문교육들이 토대가 되는데 교육들을 아이들의 사회에서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교회가 어느 정도 시키면서 어느정도이 사상의 체계를 잡아 주어야 합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의 설교가 좀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이고 학문적 이여야 합니다. 지금은 설교를 들으면 그 안에 대꼬챙이처럼 흐르는 관통하는 신앙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저것들은 쉽게 항거할 수 없다고 하는 사상적인 힘이 느껴져야 되는데 설교가 탈 신학적이 됩니다. 착하게 삽시다. 노숙자를 도웁시다. 하나님 사랑합시다. 너무 추상적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굳이 변화되어야겠다는 영적인 도전들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지합니다. 자기가 받은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차도 지식이 거의 없습니다. 특히 우리교회에서 교리교육하다보면 수평 이동하는 집사 급에 해당하는 사람 20명증 18명이 양태론 입니다. 삼위일체는 어려우니까 그렇다 치고 구원에 관해서 거의 60% 이상은 알미누스 주의자입니다. 이런것들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구원받았다고 고백을 하고 그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교육도 안 시킨다면 질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윤리적인 생활입니다. 다시 말해서 빛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 세 가지 용매로 쓰이는데 하나는 물리적인 빛 신학적인 빛 윤리적인 빛 신학적인 빛은 진리를 의미하고 물리적인 빛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저렇게 살아야 되는구나 하는 그런 기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아야할 분명한 사상의 체계와 가치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학문만 가지고 안 되고 커다란 어떤 성령에 의한 충격이 그의 속에 심겨지고 이것이 매일매일 이루어지는 열렬한 기도생활과 말씀으로 인한 자기 깨어짐이 구체화 되어야 합니다. 최근에 제가 성리학을 읽어보았는데 너무 재미있는 겁니다. 성리학도 주의에 대한 이야기 인데 이게 우리 신학을 하는 것 과 너무 유사한 이론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도가 있다 그 도는 인간의 호기심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를 공경하는 마음 경심을 가지고 도를 찾아야 찾을 수 있다 .경심을 가지고 도를 열렬히 찾다 보면 이가 보이기 시작한다.그 이는 우리가 말하는 신학 내지 학문입니다. 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 속에서 논리와 규칙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이를 찾았다고 해서 도를 소유한 것이 아니다. 그 도를 소유하고 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가 움직여야 한다. 이 기가 움직여 정이 되어서 우리 속에 구체적인 애정을 불러일으킬 때에 우리가 그 도에 합치한 삶을 살 수 있고 이를 실현하는 삶을 살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것을 보면서 너무 부끄러웠던 것은 어쩌면 이렇게 하나님 모르고 성경도 모르던 사람이 자신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그 진리 도를 찾아감에 있어서 특히 이 퇴계 이황의 12학도에 보면 이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밤까지 어떻게 학문을 하여야 하는지 마음가짐을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정확하게 맞춰서 사는 것이 이 진리를 찾아가는 학업의 자세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부끄러웠던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이 사람들은 뭔지도 모르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삶을 깊이 헌신해서 그 일을 바쳤는데 나는 인격적인 하나님도 알고 성경도 하나님의 진리라고 굳게 믿으면서 과연 나는 그 사람들의 열심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에 대해서 들을 뿐 이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참 맛을 모르면서 사는 것이 아닌?. 이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서 그런 도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 도이신 그리스도에게 합치되는 기쁨의 삶 이런 것들을 위해서 우리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을 헌신해야 하는 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회자가 그 길을 가는 모범을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이 길을 따라오라고 가르칠 수 있고 그들이 현실 속에서 고민하는 많은 현실 속에서 시대정신과 부대끼는 문제에 대해서 무엇인가 설교로부터 빛을 받고 도전을 받아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가운데 그들을 치열하게 기도시키고 말씀에 깨뜨려지게 해서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들이 굳이 빛이 되려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그 자체가 빛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목회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여 그들을 진리의 공동체 윤리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도 자신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가르쳐주신 그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대로 살아가는 삶 안에서 가장 커다란 행복을 느끼는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목회자의 목회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