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이기 전에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딤전 3;11)
녹취자: 허혜숙
집사 이야기를 하다가 ‘여자들도 이래야 한다.’ 라고 이야기 했으니까 이것은 교역자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교회의 일반적인 일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상위의 가치는 항상 하위의 가치에 토대를 둡니다. 다시 말하면 특수한 가치는 보편적 가치 위에 토대를 둔다는 뜻입니다. 좋은 아내가 아닌 사람이 결코 좋은 사모가 될 수가 없고 좋은 신자가 아닌 사람이 훌륭한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보면 이 보편적인 가치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정숙하여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우리들이 정조와 관련해서 말하는 그런 정숙이라기보다는 사람이 하나님의 질서대로 생각하고 행하는데서 오는 단정함입니다. 하나님이 질서대로 움직이는데서 오는 일체의 단정함 이것이 ‘정숙’입니다. 그렇게 정숙하게 되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이 하나님의 도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목회자의 아내는 거의 목회자와 똑같이 일평생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모님이 저에게 상담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목사님이 죽어라고 책을 안 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잔소리를 하니까 부부싸움이 자꾸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가끔 조용히 책 읽는 모습을 보여라, 그리고 가끔 질문을 해라’ 그렇게 해서 자극을 하는 지혜로운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저의 지론으로는 목회자의 아내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면 좋겠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아내로서 남편에게 시중이나 들고, 심지어 남편이 목회 하다가 돈 꾸어오라고 하니까 돈이나 꾸어오는 그런 것이 내조가 아닙니다. 그래서 신학적인 판단을 가지고 남편이 하는 일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이런 것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건전하고 좋은 신학 책들을 꾸준히 읽으면서 기독교 교리, 성경, 역사, 실천, 교육, 목회, 상담 이런 것들에 대한 지식을 일생동안 쌓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저보다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친구로서 잘 지내고 있는 마이클 호튼 교수가 있는데 몇 년 전에 조직신학을 썼고 그것이 전 세계에서 8개 국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 사모님을 잘 아는데 한 번 같이 만나서 당신은 목회자 아내도 아니라 시간도 많을텐데 뭘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가 넷인데 한 명을 낳고 그 뒤로 세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기르는데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봉사를 하는데 교회에서가 아니고 평일에 동네에 있는 아줌마들이 같이 모여서 성경공부를 한답니다. 무슨 공부를 하냐고 물으니까 자기 남편이 쓴 조직신학을 가지고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그 책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것을 다 이해를 하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하는 일인데 이해를 못 할 것이 뭐 있겠냐고 그것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서 질문을 하면 대답해 준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이클 호튼의 1000페이지가 넘는 조직신학을 가지고 사람들이 물어보면 자유롭게 대답할 수 있는 교역자가 몇 명이나 될까 생각했습니다. 저도 번역되기 전에 읽었는데 꾸준히 탐구하는, 그래서 사람들을 올바로 가르치고 그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는 것이 여러분들의 사명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공부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남편 하나 바라보고 사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아름다워 보일지 모르지만 신앙적으로는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 독자적인 신앙의 세계를 분명하게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지식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질서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단정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모함하지 아니하며’입니다. ‘모함 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 유익이 될 어떤 의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들 생각하겠지요.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상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로 인간 모두에게는 타락한 다음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일반적으로 여성들에게 이런 시샘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헐뜯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며느리가 둘 있는데 시아버지가 둘 다 똑같이 사랑스러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까 오다가 오우진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 목사님이 딸만 셋이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 딸이 ‘아빠 사랑해요, 이따 만나요, 목사님, 안녕 하세요’ 그 짧은 시간에 수없이 아빠를 보며 애교를 떨었습니다. 세 딸 중에서 그 딸이 제일 예쁘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아부하고 그렇게 살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뚜벅뚜벅 살아가는 것과 사람이 뚱한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냅 둬, 나는 생긴대로 그렇게 살아 갈거야’ 하면서 그것을 합리화 합니다.
(예화) 한 때 제가 아주 존경하던 설교자가 있었는데 18세기의 조지 필드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매일 열다섯 가지의 체크 리스트를 만들어놓고 매일 자기를 점검합니다. 거기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몇 가지가 있는데 ‘나는 오늘도 열렬히 기도를 했는가?’ 또 하나는 ‘나는 매일 매일 성경이나 학문을 부지런히 탐구했는가?’ 그것과 함께 체크리스트에 나오는 중요한 항목 하나를 소개합니다. ‘나는 오늘 모든 사람들에게 붙임성이 있게 행동하였는가?’ 결국은 그런 사람들이 자기 갈 길로 갔지만 제가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 나갈 때까지는 기분이 좋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앉아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 기분이 괜찮습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려서 외국 땅에 발을 밟는 순간 즉시 오고 싶습니다. 교회도 그립고 집도 그립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되어서 교회에 전화를 합니다. ‘여보세요’ ‘네’ ‘거기 열린교회죠?’ ‘네’‘나 담임목사인데?’ ‘네’ 그 다음부터는 전화를 했을 때 그 자매가 전화를 받으면 전화를 딱 끊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자매를 미워한 것은 아닌데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또 전화를 해서 ‘여보세요’ ‘네 목사님, 잘 도착 하셨어요? 시차는 극복하셨어요? 집회는 은혜로우세요?’ 얼마나 붙임성이 있습니까? ‘여보세요’ ‘네’ ‘열린 교회죠?' '네...’ ‘나 담임 목사인데’ ‘네’ 그런 사람들은 어디 가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만 미워해’ 모든 사람에게 소외되지 않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절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붙임성 있게 행동하는 것, 모함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모자란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붙임성 있게 행동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은혜 받는 사람들을 시기할 이유가 없고 그런 마음에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부교역자 생활하면서 정말 많이 봤습니다. 정말 세상 여자들하고 똑같이 싸움을 했습니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절제하며..’ 라고 했습니다. 목회사역을 하면서 걷는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자기 부정의 연속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절제’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그 이상의 욕망을 품거나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는 자신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 한 사람들, 감옥에 있는 중범죄자들을 보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한 순간에 절제하지 못하고 ‘욱’ 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화)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데 몇 년 전에 안양교도소에 갔는데 ‘목사님이 여기에 오시면 꼭 한 사람을 면담해 주십시오.’ 그래서 누가냐고 했더니 교도소에 사형수 한 사람이 있답니다. 본인이 너무 힘들어해서 목사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그 사형수를 꼭 좀 만나달라고 했습니다. 엄마에게 카드빚을 갚아달라고 엄마에게 요구하니까 엄마가 욕을 하니까 엄마를 때려 죽여 버리고 온 집안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사건입니다. 신문지상에 굉장히 크게 보도되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람을 마주하고 앉아있는데 안 믿어질 정도로 제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며 수줍어하는 어린 청년이었습니다. 집안에서 아무도 면회를 안 왔습니다.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이 이상해지면서 못 견뎌했습니다. 얼마나 사람이 선해보이던지 정말 안 믿어졌습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절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꽉 붙들고 모든 것을 절제하며 사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고 이기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발산해 낼 수 있는 자기 나름대로의 통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가족들은 그를 배려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굳게 서서 ‘남편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너무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떤 한 사람에 의해서 내 인생이 밑바닥까지 흔들리고 내 인생의 행복과 불행 모두가 한 두 사람이나 일에 모두 매달리는 것은 좋은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우리의 삶은 기본적으로 자유인으로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얽매여서 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가슴 속에 남편이 이것도 안 해주고, 저것도 안 해주고 하면 한 없이 쌓입니다. 결국은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거기에는 이기심이 깊이 섞인 사람입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 때문에 이 사람을 만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이렇게 아주 작은 생활비를 받으면서 이렇게 거처도 불편한 곳에서 힘겹게 아이들과 살아가는 것이 남편을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보람을 자신의 자리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절제가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목회를 하면서 이상한 목사들도 많지만 설명할 수 없는 망가진 사모님들도 참 많이 만났습니다. 남편이 자기를 소외시켰고 뭐하고 어떻고 어떻고 이유가 많습니다. 한 인간으로서는 가엾은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남편이 없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이 끝나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잖아요?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의 존재의 기반이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있어야 하고 내 삶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든지 간에 그것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힘이 있어야만 거기에서 절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내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어떤 목회자는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정상이 아닙니다. 그럴 때는 재산이 많고 많은 식구들의 도움이 있어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여러분들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경우에라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어떻게 이 현실을 살아낼 것인가? 항상 도달하는 결론은 ‘생명’입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교육은 엄마 아빠에게서 넘치는 생명을 보는 것입니다. 생명을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생명은 유사 생명이 있고 참 생명이 있습니다. 연애도 하고 사랑도 하고 혹은 아이를 낳아서 귀엽기도 합니다. 순간에 삶의 의욕이 생깁니다. 남편이 조금만 잘해줘도 그것은 유사생명입니다. 진짜생명은 한 분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찬송)
큰 은혜를 주신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넘치는 생명으로 자신에게 직면한 현실을 살아내야 합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인턴십을 했습니다. ‘교육 속에서 목회자는 이래야 한다.’ 배우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배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집에 가면 남편이 그렇게 바뀌어있을까요? 같은 시간에 남편들도 인턴십을 합니다. 거기에서 목회자의 아내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웁니다. 그러면 집에 가서 보면 아내가 그렇게 변해있을까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지 뭐가 변하겠습니까? 제일 안 변하는 사람들이 목회자이고 목회자의 아내, 장로와 그의 부인들, 그 다음에 안 변하는 사람들이 신학생, 잘 변하는 사람들이 평신도입니다. 오죽하면 신학생 한 명이 회개하니까 천사들이 모두 모여서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이변이 일어났다고 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남편이 더 신령하고 더 아름답고 더 소중하고 그런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친구들의 남편과 비교를 해서 학력이나 경건이나 설교나 교회에서 담임목사에게 인정받는 것이나 외모나 이런 것들을 보면 비교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비교하면 뭐하겠습니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여러분들은 시집을 가서 한 목회자의 아내가 되었으니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의 수준밖에 안 되는 남편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현실 속에서 그것을 감당해 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 10년, 20년 살다보면 뒤를 돌아볼 때 내 인생인 것 같으면서도 남의 인생을 산 것 같고 그렇다고 내가 안 산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삶의 보람이라든지 추억 같은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자식을 기르는데 이것이 내 새끼도 아니고 남의 새끼도 아니고 그렇게 자식을 양육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자기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제는 누구에게나 힘겹고 눈물겨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약 15년 쯤 전인가 열린 공간 마당을 제가 좋아합니다. 요즘은 거길 잘 안 가는데 옛날에는 새벽기도 끝나면 저는 거기에서 성경 읽고 묵상하고 책 읽고 그랬습니다. 하루는 연락도 없이 후배가 찾아왔습니다. ‘선배님’ ‘어쩐 일인가?’ ‘지나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그래? 차나 한 잔 하고 가’ ‘선배님은 좋으시겠어요’ ‘뭐가?’ ‘다른 사람들은 교회를 개척해도 안 되는데 선배님은 이렇게 교인들이 몇 천명이 모이잖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청빙을 받아도 장로들에게 시달려서 우울증에 걸리고 그러는데 목사님은 마음대로 하잖아요?’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마음대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했고 대충은 하면 맞았습니다. 그래서 ‘그래, 또 뭐가 부러운데?’ ‘다른 사람들은 설교도 못 하는데 목사님은 설교도 잘 하고 또 책도 쓰시잖아요?’ ‘그래서?’ ‘돈도 벌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대는 명색이 청교도를 공부하고 유학도 다녀왔다는 사람이 어떻게 목회사역을 그렇게 보느냐?’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 당신 갖다 놓으면 한 달도 안 되어서 열린 교회 사표내고 도망갈 것이라고, 물 위에 떠 있는 백조가 우아해 보이지만 물 밑에서 두 다리가 불이 나게 움직여야 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사람들은 예쁜 꽃 한 송이를 보고 싶어 하지 피눈물 나는 소쩍새의 사연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항상 이야기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지문이 다르듯이 하나님은 나를 왜 이 세상에 보내셨나 하면 나를 종일 목사처럼 살게 하시기 위해서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고 나를 옥한음 목사님처럼 살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내가 나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일천 억 명 정도의 인류가 존재했다고 하는데 앞으로 더 있을 인류를 생각하면 몇 천억이 될지 모릅니다. 그 중에 하나, 그 사람이 ‘나’입니다. 그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다른 사람으로서 네가 너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참다운 내가 누구인가 그것을 찾아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느끼거나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절제가 좋은 것은 아니잖습니까? 예를 들어서 구령의 열정을 절제하라, 기도의 열정을 절제하라, 예배당이 불 날 것 같다 조금 식혀라 그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령의 열정을 절제하라.. 그러는 것은 아니잖아요? 절제라는 것은 올바르지 않거나 혹은 중립적인데 과도할 경우에 좋은 결과가 오지 않는 것들을 절제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과식이 죄이겠습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은 결과가 나오니까 절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어디에서 나오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비록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의 사모가 되지 않아도 남편 덕분에 일 년에 몇 번씩 외국을 오가는 유명 인사가 되지 않아도 나는 나로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존재다, 내가 혹시 부족하고 특히 어려서 상처가 많아 뭔가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런 것을 다 아시면서도 나를 목회자로, 목회자의 아내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면서 그렇게 연약한 부분들이 하나님의 찬란하고 눈부신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아파보지 않은 사람들은 치유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깊이 죄를 깨달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가난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런 속에서 자신에 대해서 정말 하나님 앞에 존귀한 하나님의 한 형상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상관없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자녀이고 존귀한 자야, 생각하며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절대 기 죽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신앙적인 영적인 자존감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충성’은 그 기초 자체가 사랑입니다. 어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참 잘 합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충성이라고 합니다. 요즘 사건 터지니까 박근혜 밑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 모두 고무신 거꾸로 신고 시켜서 그렇다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을 돌립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섬긴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박근혜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기도제목은 빨리 하야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더 나쁜 사람들입니다. 저는 오히려 장세동씨를 좋은 인간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의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간사한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잘합니다.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신뢰와 사랑이 없습니다. 그것이 아부입니다. 사람은 아부에 가끔 속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아부에 속지를 않습니다. 충성은 그 바탕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충성스럽게 살 수가 없고 그는 충성스럽게 살 의욕도 없습니다. 충성은 사람에게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남편과 함께 어느 교회에서 목회를 하든지 충성스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전도사 때 개척을 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도 여러분들의 담임목사, 여러분들이 자기 교회에서 섬겼던 날들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의 앞날에 갚아주실 것이다.
저는 전도사 때 두 교회를 섬겼지만 저는 단 한 번도 담임목사님보다 교회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때문에 교회를 깊이 사랑하며,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러한 단점, 저러한 단점 때문에 내가 사역을 잘 못한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합니다. 시어머니한테 ‘저두요 내 새끼를 정말 사랑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이 자식이 새벽이면 늘 깨어서 잠을 못 자게 해요. 이 애가 다른 애들처럼 저녁에 먹이고 아침에 일어나는 애 같으면 충분히 사랑하고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어요’ 엄마도 아닙니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가운데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충성스럽다는 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화) 폼페이에 가보면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하면서 화산재가 날았습니다. 인구 5만 이었던 도시 하나가 불과 며칠 사이에 잿더미에 묻혔습니다.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 지금도 아무도 모릅니다. 파면 팔수록 계속해서 유적이 나옵니다. 그것이 발견 된지가 얼마 안 됩니다. 주후 79년에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이 있었는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어마어마한 불덩어리들이 날아온 것인데 발굴을 했는데 속에서 빈 공간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빈 공간을 파보니까 병사가 총을 들고 똑바로 선채 보초를 선 체 화산재에 묻혀서 죽은 것입니다. 그 위에 재가 생기니까 속에 있는 것들은 불에 타서 없어지고 공간이 남은 것입니다. 똑같이 공간이 생겼는데 석고를 집어넣어서 본을 뜨니까 엄마가 아기를 품에 안은 채 그대로 타서 죽은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시련이 오고 힘들 때마다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 동기가 무엇 때문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집을 와서 그러면 그것은 목회자가 아닙니다. 나를 불러주신 분이 주님이시다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충성스럽게 산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의미 있는 일에 쓰실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부교역자가 하도 새벽기도를 안 나와서 부부를 오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를 야단을 친 것이 아니고 사모를 야단쳤습니다. 들어가라, 이 전도사가 너도 알다시피 천성이 게으른 인간이다, 그러니까 퍼질러져서 새벽에 교회를 안 나온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사모라면 그런 이야기를 한 두 번 들었으면 자명종 맞추고 일어나서 나는 남편을 흔들어 깨우다가 안 되면 발길로 차서라도 당신 교역자가 그러면 되냐고, 당신은 그렇게 담임목사님한테 야단맞으면서 자존심도 안상하냐고 그러면서 나는 발길로 차서 현관 밖으로 확 집어던지고 문을 걸어 잠그겠다고,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한다’에서 오정모 여사 이야기 책 읽었죠? 평소에 너무 바가지를 긁으니까 옳은 이야기를 어쩌다 한 번 하려고 해도 남편이 저 인간 또 바가지 긁는다고 생각합니다. 옳은 소리를 하려면 잔소리를 줄여야 합니다.
(예화) 한 번 직원을 불렀습니다. 그대는 관리자다, 둘 다 할 수는 없고 둘 중 선택을 한다면 어떤 것을 할래? 뭡니까? 작은 일에 담임목사 말을 안 듣고 네 맘대로 하다가 크고 정말 중요한 일에 아무 영향도 못 끼치는 참모가 될래? 아니면 작고 쉬운 일은 늘 담임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순종하면서 충성스럽게 하다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에 담임목사님이 선택을 할 때 결정적으로 자기 의견을 내어서 하나님의 일을 올바른 대로 굴러가게끔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냐고 하니까 당연히 두 번째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면 작은 일에 항상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라 그렇지 않으면 크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자네 같은 사람한테는 윗사람들이 물어보지도 않는다. 평소에 아무 얘기가 없고 너무 인내합니다. 그리고 자기 입장을 이해해 줍니다. 그런데 새벽에 안 일어나니까 발길로 차는 것입니다. 벌떡 일으켜 세워서 당신 목회 할 거야 안 할 거야? 그리고 확 밀어서 현관 바깥으로 밀어서 성경, 찬송가를 집어 던져서 문을 잠궈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담임목사가 열 번 야단 친 것보다 더 위대함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까?
어떤 목회자가 바닥을 기면서 쓸모없는 인생을 살면 그 뒤에는 항상 그렇게 살도록 뒷받침을 충분히 해 주는 사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분명하게 깨어있어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주기철 목사님 살아생전에 배운 분에게 직접 들은 증언입니다. 손톱을 다 뽑고 사람을 거의 죽이다시피 해서 석방되고 나서 며칠 안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마지막에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청교도들 탑이 있는 곳에서 창을 조금 열고 예수와 함께 죽으시오. 돌아서서 얼마나 목사님을 사랑했으면 처녀가 홀아비한테 사랑했겠어요? 돌아가셨을 때 자기 마음속에 남편을 너무 사랑하지만 예수가 살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칼을 들고 나타나면 사자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매일 같이 칼을 들고 나타나면 남편이 살 수가 없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칼을 들고 나타나야지 아침저녁마다 칼을 들고 나타나면 칼도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몇 번 그렇게 하면 목을 따라고 하지요. 충성스럽게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