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자수련회 개회예배
녹취자 : 오희열
오늘날은 목회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일이 되다 보니까 목사도 기능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원래는 그런게 아닙니다. 목사는 도의 사람입니다. 도의 사람. 그래서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 깊이 만났기 때문에, 아주 더 정확하게 신학적으로 얘기하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너무 생애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도에 이르지 않으면 인생이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깨닫고 체험한 그 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여러가지 많이 있겠지만 핵심을 간추리면, 오늘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의 관심사 두 가지가 나옵니다. “내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뜻은 자기의 삶에 한 이상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예수화’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신학적으로, 한 사람이 ‘예수화’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처럼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화가 된다는 뜻은 예수 안에 계시된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 계시된 온전한 인간이 된다. 예수는 우리에게 두 가지, 양측을 보여주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한 편으로는 참 사람이 누구인지를, 또 한 편으로는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화’된다고 하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의도하셨던 참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사도 바울의 첫 번째 관심사입니다. 그것을 오늘날 다양하게 신학적으로 표현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내 안에 예수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의 분신처럼 되는데, 그게 도가 저 멀리 있는데 끊임없이 수도하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충만한 영적인 생명이 살아있어서, 내가 참 예수 안에서 계시된 인격을 본받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상입니다.
두 번째 이상은, “너희와 함께 있는 것”,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 나로 만족하지 않고 내 이웃 모두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서 전하는 것이 복음전도입니다. 그래서 그의 회심을 절실하게 기도하는 이유도 그 회심을 통해서 그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것을 자꾸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끝없이 신학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구원파입니다. 성화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중생하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성화될 수 없습니다.
세속주의적인 자기 욕심에 빠진 사람이 자기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서 그 짓을 하는 것입니다. 원래 입신양명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입신’은 자기를 세운 사람입니다. 자기를 완성시켜나가는 것입니다.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천지를 모두 주관하고 있는 그 진리에 자기 자신을 합치시킴으로서 자기를 참된 인간이 되도록 세우는 것입니다. 그 세우는 과정 중에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중에 첫 시작이 공부하는 것, 즉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자신에 대한 자각을 가지면서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양명’은 이름을 드높이는 것입니다. “저 사람 회장이 되었대!”, “저 사람은 총장이 되었대!”, “저 사람 총회장이 됐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양명’은 당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후대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비는 당대에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을 아주 추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외롭게 진리를 말하고 참 인간의 도를 알지만, 당대에는 항상 거치는 돌입니다. 책 이름을 지금 잊어버렸습니다만, 그리스의 어느 역사에 보면 어느 폴리스에서, 민주적인 방법의 도편추방제를 통해서 그 공동체에서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오스트라카(조개껍질, 도자기 조각)에 적어서 내고 그것을 모아서 많은 사람이 적은 이름의 사람을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한 사람이 그렇게 해서 뽑혔습니다. 그런데 그는 굉장히 덕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너 저 사람의 이름을 썼니?”, “응.”, “저 사람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왜 쫓아내려고 이름을 썼어?” 묻습니다. 그 사람의 별명이 “The Just”였습니다. “의”였습니다. “나는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하여튼 저 사람만 보면 짜증이 나거든. ‘의인’, ‘The Just’라는 소리가 지긋지긋해.” 그 사람이 서 있는 존재 자체가 아우라인 것입니다. 그를 보면 그냥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은 것입니다. 불쾌한 것입니다. 룸살롱 옆에 교회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싫은 것입니다. 그렇게 당대에 인정을 못 받습니다. 후대에 흘러가면서 ‘이렇게 신실한 삶을 추구한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 그 사람을 발견하고 그를 존중하는 것이 ‘양명’입니다. 선비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입신양명’이 삶의 목표일 것입니다. 그래서 ‘입신’은 ‘자기완성’이고, ‘양명’은 ‘이웃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완성하는 동기는 ‘인’이고 ‘삶’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짐승처럼 인생을 살아갈까? 정말 가엾다. 너에게는 진리의 빛이 없구나. 진리의 빛을 가진 내가 너에게 빚진 사람이다.’하며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것을 말입니다. 삶의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삶을 참된 인간의 도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든 힘을 다하여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까 O목사님이 물어보셨을 때 출처를 잘못 얘기했는데, 맹자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넓은 집에 살며(大義) 가장 올바른 곳에 서고 가장 넓은 길로 행하라.” 이것은 도리를 따라 사는 것, 대도(大道)입니다. 큰길로 행하라, 뜻을 얻으면 이웃과 함께 그 길을 걷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라도 그 길을 가니, 세상의 부귀가 그 마음을 어지럽힐 수 없고, 세상의 권력과 물욕이 그를 굴복하게 하지 못하나니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대장부라고 부른다. 대장부는 주먹질 잘하는 사람이 대장부가 아닙니다. 똑바른 사람입니다.
영화 ‘사도’에서 영조가 세자를 자르고 싶어서 중량감이 있는 신하에게 “네가 주청을 올려라.” 했더니, 목매달아 죽으면서 편지를 남깁니다. “전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잘 기억해야할 것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죽음은 좌절의 표현이 아니라, 긍정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장부의 언어입니다. 똑바른 길을 걸어가는데 굽히지 않을 수 없는, 의를 버리지 않고는 그 길을 갈 수 없을 때, 그때 의를 취하고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으라고 말입니다. 그 다음 사람에게 시키니까 그 사람도 죽으면서, “전하, 그것은 도리가 아닙니다.”합니다. 그 다음 사람도, “전하, 아니되옵니다.” 유배지로 보내도, 유배지에 가서 조용히 침묵하고 정진하면서 글을 씁니다. 양명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사약 사발이 내려지면 그것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는데, 그것을 발로 차며, “이 새끼, 나한테 사약을 내려?” 하지 않습니다. 선비는 그렇지 않습니다. 선비는 천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비가 되는 순간, 언제든지 죽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잘못된 명령에 사약사발을 먹으면서 죽는데, 그것은 굴복시킨 것이 아니라, 확 쏟아나오는 피로써 그것은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도덕을 구하는 사람은 공명을 하찮게 여기고, 공명을 추구하는 사람은 부귀를 탐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귀를 탐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할 짓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가 뭘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하겠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가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혼자 저벅저벅 걸어갑니다. 거기서 단두대의 칼이 뚝 떨어져서 목이 댕강 잘리는데도 그것이 대의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똑바로 걷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끗이 자기의 신념을 따라서 죽는 것입니다. 모든 유학자가 선비는 아닙니다. 박지원의 ‘호질(虎叱)’에서 보면, 범이 나타나 징벌을 하는데, 거기 한 유학자가 있는데 밤마다 과부 집을 뒤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학자이긴 하지만 군자는 아닌 것입니다. 지식이 잔뜩 들어있지만 이쪽으로 듣고 저쪽을 토해낸다고 해서 ‘구이지학(口耳之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선비들이 가장 추잡하게 보는 것이었습니다. 온 몸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온 몸으로 생각하고 온 몸으로 체험하고 온 몸으로 그것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 대신 삶을 너무 사랑하지 않고, 언제든지 대의를 위해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죽음을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에게 아우라가 없습니다.
뷔페에 가면 요만한 무순이 있습니다. 처음에 그게 무순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입에 넣고 씹으면 영락없는 무의 맛이 납니다. 아우라의 크기는 달라도 그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시할 수 없는 사람으로 똑바로 가는 것입니다. 오만하지 않고, 한없이 겸비하면서도, 부귀에 대한 꿈이 그를 어지럽힌다고 할 때도 한자로 ‘음란’할 때 쓰는 ‘음(淫)’자를 씁니다, 그렇게 음(淫)하게 하지 못하고, 이 세상의 무서운 권세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우라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유학자가 선비는 아닙니다. 선비는 군자들만 선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선비들에게는 학문이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귀를 얻는 수단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 ‘자기를 반성하고 이웃을 참다운 도덕의 질서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퇴계 이황은 자신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이 배워야 할 것을, 하늘을 향한 ‘경’, 하늘을 향해 두려워 떠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모든 학문과 사색 생활의 중심이라고 했습니다. 그 경외심을 가지고 학문, 자연, 자신의 내면의 세계, 이웃의 삶, 국가, 모든 것을 보면서 “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떨어진 남루한 옷을 입고, 조악한 밥을 먹으며 간장국물에 국수 한 그릇을 먹고 허기를 느껴도 누가 범접할 수 없는, 뚜벅뚜벅 걸어가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 사는 인간상인 것입니다. 이것이 르네상스의 인간상과 똑같은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예를 들자면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자크 라캉()에 의하면 미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그렇게 아무것도 상관없이 자신 속으로 파고들어가서 대자함으로서 자신을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관계 속에서 파악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Cogito ergo sum”같이 비합리적인 자세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을 파악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다 떨어져 나오면 인간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 철학자들은 설명하길 포기합니다. 그것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제가 20대 때 죽도록 심취해서 밤새도록 친구들 앞에서 거품을 물고 떠들 수 있는 지식의 양이 있었지만 그게 인생에 무슨 도움을 줍니까?
자기를 완성해가는 과정은 이웃을 세우는 과정과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일치됩니다. 사는 것은 열심히 사는데, 10년, 20년이 지나도 인격이 개떡이라면 그것은 참다운 섬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섬기는 참다운 섬김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섬기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모든 것을 단절하고 내면 속으로 파고들어서 자신이 뭔가 ‘덕’의 일을 요구하는데, ‘덕’이라는 말 자체가 관계적인 것입니다. 영혼의 힘이라고 하는데, 산 속에 있는데 무슨 영혼의 힘이 나옵니까? 무인도에 혼자 있는데, 영혼의 힘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있는지 없는지, 강한지 약한지, 옳은 덕인지 나쁜 덕인지, 즉 악덕인지 미덕인지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과 인간을 끊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보려고 하니 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질서를 하나님께서 다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러한 선비정신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는 것인데, 이 얘기는 선비정신을 기독교에 덧입히자는 얘기가 아니라 원래 그랬던 것이 목사라는 것입니다. 원래 목사가 그런 사람입니다. 학문을 안 하는 목사, 무슨 학문을 하든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학문을 하는 목사를 본 적이 있습니까? 경건인데 이웃과는 분리된 경건, 지식과는 동떨어진 경건을 본 적이 있습니까? 모두 다 통합을 이루면서 하나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온전히 되어가고”라고 고백을 하고,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이것이 너희에게 더욱 좋은 것이니”하면서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이웃의 행복에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사는 것이 자기 자신, 목사, 그리스도인의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3천명, 4천명, 저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몇 만 명 모이는 교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느날 장로님들이 모여서 제가 은퇴하고 나서 후임자가 와서 교회가 더 성장할 것을 어떻게 보느냐고 했더니, 다른 장로님이 자신은 20% 확률로 본다고 했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잘 되면 좋을 것입니다. 그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은혜를 받고, 그 사람의 사역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왜 나쁜 것입니까? 우리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기는 도저히 큰 교회를 할 수 없는 사람이 마음을 비웠다는 얘길 많이 합니다. 마음을 비운 것도 있지만 능력이 안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릇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설교단에 올라가 있을 때만 진리의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산 속에 있을 때 진리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그걸 그대로 원래 생각하던 대로 말하고, 살아가던 삶을 이야기하고, 기회가 없으면 혼자 조용히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물러나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정말 괜찮은 사람은 최고 정점에서 은퇴하는 것입니다. 아까운 상태에서 은퇴하는 것입니다. 최용석(?)교수의 설교, 진짜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인격적으로 훌륭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설교를 들어볼 수 없을 정도로 무르익었습니다. 은퇴하셨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바보같은 사람은 자기가 너무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 자체가 퇴장 사유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며 인생이라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잠간 꽃 피고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큰 교회를 할 수 도 있고 작은 교회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일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주일에 정신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서 빠져나가고 난 후에 혼자 예배당에 서 있을 때 가슴이 텅 비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역이 크고 활발하다는 것과 자기 자신이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 찬다고 하는 것은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한 목사의 길은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있을 때나, 사역을 할 때나, 안 할 때나 동일한 삶의 이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게 목회자의 이상입니다. 그것이 지난 설교에서 말했듯이, 한 사람의 기도는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사람이 열렬하면 기도도 열렬합니다. 사람이 이기적이면 기도도 이기적입니다. 자기 교회, 자기 사역, 자기 부서 밖에 모릅니다. 결국 한 사람의 사람됨과 그의 살아가는 삶이 이렇게 밀접한 관계에 있고, 삶의 모든 행위나 이런 것들이 다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보고서로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고서로 가르쳐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보고서를 잘 쓰면 그 사람이 잘하는지 별로인지 어느 정도는 평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다 평가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누가 감독하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씨름하고 극복하며 가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따끔한 한마디의 충고나 작은 실수 때문에 맞게 된 낭패를 통해서 스스로 새기고 생각하며 큰 교훈을 찾아내서 자기를 완성해갑니다. 그것이 “입신”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입신해 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덕을 후대 사람들이 기억할 만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외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도이신 주님이 자신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상O 교수님을 미국에서 뵈었을 때, 96세인가 94세 되셨는데, “목사님 사모님도 없이 이렇게 혼자 사시는데 외롭지 않으세요?”, “외롭긴 뭐가 외로워? 내가 혼자 있나? 매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돌아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저 나이에 저렇게 고백할 수 있을 까?’ 아내도 없고 나 혼자 90이 넘어서,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했을 때, 내가 과연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말입니다. 제가 “사역 좀 잘 해라, 왜 그렇게 실수를 하냐? 그게 지혜가 있는 거냐?”라고 할 때, 여러분은 담임 목사가 사역에 대해서 지적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덜 된 존재구나, 나의 어떤 모자란 성품과 마음의 경향성이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자꾸 그르치게 만드는구나.’ 하며 생각을 하고 자기 반성을 통해서 입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고쳐나가야 합니다. 누가 이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차피 온전해질 수 없는데, 그냥 되는대로 살지.’ 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실수를 보면서 그것을 빨리빨리 알아차리고 고칩니다. 사람은 보통 똑같은 실수를 세 번, 네 번 하는 사람을 계속 사용해주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키워서 쓰고 싶어 하지 않고 잘 준비된 사람을 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치열한 입사 경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좀 기다려줬으면 하지만, 사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질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사회와 이 모든 세상에 그런 면이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이 정말 그렇게 쓰임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자기를 반성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 기쁨이 부귀를 누리거나 혹은 권력을 얻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완성해 가는 도덕, 그리고 자기 같은 티끌 같은 존재가 있음으로 누군가가 참된 길로 돌아오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끼는 삶, 거기에서 인생의 참된 즐거움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편안한 길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여기 비서가 바뀌었습니다. 참 일을 잘 했습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비서 복은 있습니다. 새로온 비서가 돌아가는 길에, “목사님, 벽 하나 사이가 이렇게 먼 줄 몰랐어요.”, “왜?”, “목사님께서 이렇게 사시는지 몰랐어요. 이렇게 어떻게 사세요?”
(어떤 목사님을 부르시며) “OOO목사,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어떤 목사님의 답변) “네,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내가 안 부럽습니다. 내 인생을 다시 이렇게 살겠느냐고 물으면, Absolutely Not! 절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도 감사하며 된장찌개도 먹고 순두부찌개도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면에서, 한사람의 설교자가 끊임없이 진리를 토해내게 하기 위해서 그를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의 시련이 끝나면 또 다른 고통이 오고, 어떤 때에는 환경이 나를 괴롭혀 진리를 깨닫게 하고, 환경은 가만히 있는데 진리가 깨달아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면서 고통을 받게 만듭니다. 나는 그게 끝나는 순간,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끝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지금도 내 안에 있는 싸움이니”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이라도 그 도를 찾고 걸어가는 사람을, “잘했다, 정말 수고했구나. 이제 내게 와서 쉬어라.”그게 유감스러운 초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정말 원하는 삶은, “아멘!, 마라나타!”할 수 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목사, 기독교 선비로서 사는 길입니다. 사람들에게 도를 가르치기는 쉽습니다. 확실히 공부 잘 하고 똑똑한 사람은 설교를 잘합니다. 제가 외국에서 학자를 수없이 불러서 강단에 세웠는데, ‘저건 아닌데..’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잘 짜여져서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말이 되게 합니다. 허튼 소리는 대개 공부 안 한 사람들이 합니다. 우리교회에는 그런 사람을 부르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일 뿐입니다. 그것은 공부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전하는 그 도에서 뭔가 그 도의 향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도에 자기의 진액을 발라야 합니다. 그것은 설교단에 서서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끊임없이 그 도에 자기를 합치시키기 위해서 치열하게 몸부림치면서 사는 사람이 그 도에 대해서 말할 때, 그냥 깔끔하게 정리된 것이 아니라, 뭔가 저항할 수없이 밀고 들어오는 무서운 힘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가 설교를 통해서 자신을 세워주는 어떤 진실 앞에서 무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존재여서는 안 되겠구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하는 무서움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게 도를 따라 살아온 사람들만의 독특한 향취입니다. ‘아우라’라고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한 두 가지, 즉 입신과 양명에 대한 고민, 수기와 치인에 대한 고민, 자기완성과 이웃완성에 대한 고민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심문 속에서 1번이, “나, 이웃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다른 사람은 맘대로 살라고 하고 나 혼자 이 길을 간다는 것은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한 참 신자는 오지랍이 넓은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너 왜 그렇게 사니?”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 결심문의 1번입니다. “나와 이웃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그러면서 모든 것을 던져서 진리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어디 그렇게 완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상상할 수 없는 부자였습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해보니까 수백억의 갑부였습니다. 땅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이 부귀를 찾아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모두 던져 주지 않은 것은 유감입니다. 그리고 여섯 명이나 되는 노예를 거느렸던 것도 유감입니다. 은수저가 아니면 밥을 못 먹었던 것도 유감입니다. 공동의회 때 사모가 손을 들고 생활비를 좀 올려달라고 한 것도 유감입니다. 이런 것들 모두 인간적인 것들이 묻어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거기로부터 자유롭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김남준 목사가 은퇴하고 난 다음에, “이 나쁜 녀석..”하고 전기를 쓴다면 세상에 쓸모없는 목사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중 누가 안 그러겠습니까?
제가 여수 애향원에 내려갔다가 기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거기서 손양원 목사를 죽도록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가 얼마나 모자란 사람인지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뒤집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얘기를 하는데 절절히 하는 것입니다.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과 원래 실제의 손양원 목사님과는 다르다고 말입니다.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역사에 전해진 손양원 목사님의 이름을 전체적으로 뒤바꿔 놓을 정도의 자료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분이 가진 흠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크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여기서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악한 쪽으로 해석하지 아니하며’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산정현교회에서 권사들과 장로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주기철 목사님을 핍박했습니다. 자녀들이 그것을 보면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결국 그런 것이 모두 없으면 좋겠지만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인물이 태어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럴 것 같습니까? 하나님보다 그 사람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를 완성해 가시는 입신의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드높여 당신의 덕을 선전하게 하시는 양명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제 저는 늙어갑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잘 들으십시오. 교회를 크게 한 사람도 외롭습니다. 세상에서 엄청난 OO(축복?)을 받은(당한?) 사람도 외롭습니다. 도의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로고스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는 외롭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