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감사할까
“만일 그것을 감사하므로 드리거든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고”(레 7: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중추가절입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때가 되면 한 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감사하며 그리고 조상에게 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풍성한 수확에 기뻐하며 이웃들과 함께 그 인심을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이 없었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과 경의를 자신의 조상들에게 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아는 지식의 빛 아래 있기 때문에 이처럼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그 모든 은덕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합니다. 알지 못하는 조상에게 올려드렸던 우리의 모든 공덕들은 우리 하나님께로 돌려져야 합니다. 되돌아보면 올 한 해 만큼 복잡하고 어려움이 많았던 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정치권은 시종 불안했고, 그 뿐만 아니라 유래 없이 쏟아진 물 폭탄으로 많은 수재민들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길거리로 나 앉는 일도 있었습니다. 혹시 큰 흉년이 들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하나님이 올해도 곡식과 그리고 많은 과실들을 두루 여물게 하셔서 먹고 사는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저희를 돌봐주시고, 세계적인 경제의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아주 주저앉지 않고 나름대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음도 하나님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II. 화목제의 규례
이러한 중추 감사절에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무엇보다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성경 본문에는 화목제의 규례가 등장합니다. 이 화목제는 히브리말로 ‘샬렘’인데 이 말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샬롬과 어원이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도 자신과 자신의 모든 이웃들이 함께 평화를 누리는 안녕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죠. 구약의 화목제에는 크게 세 가지 제사가 있었는데 하나는 개인적으로 감사한 일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올리는 감사의 제사가 있었고, 서원과 관련하여 하나님께 올리는 서원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슴 벅차는 감격적인 일이 있거나 누구의 강요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싶을 때에 올리는 낙헌제 혹은 자원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화목제는 개인적으로만 하나님께 올렸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공동체적으로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오순절과 같은 명절 때에 이 화목제를 국가적으로 하나님께 드렸고 국가의 큰 경사가 있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에 헌신하는 마음으로 온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이 화목의 제사에는 레위인은 물론 빈부나 귀천이 없이 노비들까지 모두 참여하였고, 어린 아이들까지도 함께 참여하여 그 제사에 공여되었던 음식들을 함께 나누며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한 가족임을 확인했던 제사의 규례였습니다.
III. 감사로 드릴 제사
A. 기름 섞은 무교병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러한 화목의 제사의 하나님 앞에 올려야 할 제물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설명하는 가운데에 일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제물은 오늘 여기에 세 가지로 나오게 되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기름을 섞은 무교병입니다. 기름을 섞은 무교병, 기름을 바른 무교병, 고운 가루로 빚어서 구운 전병까지 세 가지 특별한 재물이 등장을 하는데 이 세 재물의 공통된 특징은 모두 기름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올려지는 기름 섞은 무교병도 역시 기름을 섞어서 반죽을 지어 만든 그런 종류의 떡입니다. 그리고 그 떡은 누룩이 없는 떡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외식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자신의 명예를 높일 의도로 짐짓 선한 모양을 꾸미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름 섞은 누룩 없는 이 떡 무교병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순수한 신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정이 넘칠 때에 주님 앞에 올바로 감사하는 첫 번째 재물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꾸밈이 없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릴 최고의 예물이요, 그리고 헌신인 것입니다. 거짓과 위선, 그리고 가식들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미 진리의 기준들이 사람들에게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덕목이 되지 않고 오늘날은 개인적인 풍요와 평안이 최고의 가치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진실하다, 꾸밈이 없다, 정직하다라고 하는 것들은 더 이상 덕목이 아닙니다. 세상이 이렇게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에 저는 우리에게 선교할 기회가 더 많아졌다고 감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만약 우리들이 꾸밈이 없는 진실하고 정직한 삶을 산다면 그런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더 잘 알아볼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누룩이 없는 떡, 다시 말해서 외식이 없는 순수한 신앙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릴 최고의 제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활기에 넘치는 생명력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그렇게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먹고 입고 마시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해 동안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며 건강한 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을 북돋을 수 있는 교육과 그리고 문화적인 여가와 예술, 이런 것들을 향유하면서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안정되게 해주셨습니다. 실로 한 해 동안 우리가 받은 모든 좋은 것들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가 겪었던 모든 나쁜 것들 중에 주님이 직접 주신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주 앞에 드려야 할 첫 번째 제사는 꾸밈이 없는 진실한 신앙, 이것이 하나님께 올릴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반듯하고 박수칠만한 아름다운 삶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꾸며낸 것이라면 차라리 버림받고 깨어지고 상처 난 마음으로 하나님께 정직하게 드려진 그 사람보다 더 낫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을 우리에게서 숨길 수 있지만 우리가 어찌 당신에게 숨길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주님에게 알려졌고 감추어진 것이 없으니 우리가 고백하지 않은들 주께 드러나지 않은 무엇이 있겠나이까”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어떠한 허위와 외식에도 속지 않으시는 분이시지만 주님은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우리의 자의식 속에서 그렇다고 고백할 때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려야 될 가장 훌륭한 제물은 꾸밈이 없는 순수한 신앙입니다. 다윗은 범죄했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불결하고 더러운 영혼이 되었지만, 바로 그때 하나님 앞에 올려야할 최상의 예물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죄를 지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속죄의 번제를 올리고 싶어 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었으니 많은 제물이 그 수중에 있었고, 제사장 중 누구도 명령하기만 하면 즉시 왕을 위하여 제사를 봉헌해 줄 참이었습니다. 반복되는 수많은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야 주님께 올릴 최고의 예물이 바로 상한 심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했습니다. “주는 번제를 기뻐하는 분이 아니시니 그랬다면 제가 이미 올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이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 앞에 깨달은 바였던 것입니다.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합니까? 주님께 올릴 최고의 예물은 여러분 자신이 순수한 신앙으로 그 은혜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입니다. 꾸밈이 없고 거짓과 가식과 형식주의가 아닌 내면의 진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신앙을 보여드리는 그것이야말로 주님이 이 감사절에 받으실 최고의 제물입니다. 이 제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B. 기름 바른 무교병
두 번째는 기름 바른 무교병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바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맛사흐’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바로 메시야라는 명사와 같은 어원을 가진 말입니다. ‘맛사흐’는 ‘기름 붓다’라는 뜻이고 메시야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니 ‘기름 부음 받은바 된 떡’이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자 이것은 역시 그 기름을 겉에 부은 것입니다. 충분히 그 기름을 이미 만들어진 떡 위에 부어버린 것이죠.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윤리적인 생활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깥으로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드러나는 그 부분이 하나님의 법에 맞게끔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은혜에 대한 보답이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두 가지입니다.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오디오로 들려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비디오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비디오가 나오는데 오디오가 나오지 않는다면 참 답답할 것입니다. 예전에 그렇게 우리들이 저녁이면 귀 기울여 듣는 라디오 연속극은 지금도 귀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오디오로 들려주는 것이 바로 사상, 신학, 성경지식, 교리, 이런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철저히 무장해서 사상에 빈틈이 없도록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이번에 교리반을 350명을 목표로 모집을 한다고 해요. 근데 나는 그거가지고도 모자란다고 그랬어요. 왜냐하면 작년에 교인이 450명이 늘었는데 350명을 해도 절반 이상은 교리반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리반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들은 교인이라고 생각은 해요. 그런데 참새가 전깃줄에 앉았다 이렇게 생각해요. 전깃줄에 앉았다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의 17년 동안의 목회 경험은 교리반을 성실하게 수행한 사람 중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이 매우 적고, 그리고 성실하게 이 교리반을 수료하지 않고 견고하게 신앙생활을 한 교인도 매우 적더라는 것이 17년 동안의 우리의 목회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은 교리반을 수료하지 않은 사람들은 물론 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전깃줄에 앉았다 생각을 합니다. 언제든지 날아갈지도 모른다 라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의무는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에요. 배우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것만큼만 살 수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에요.
이번 교직원 예배 때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철학자이신 강요한 박사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교제를 나누고 그랬는데 그 분이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이 교회에 모토가 ‘스투데오 에르고숨’이라면서요? “나는 공부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뜻이죠. 먹고 소화시키고, 먹는 순간 즐거워하고 소화시켜서 힘을 내고 배변하는 것은 짐승들도 하는 것입니다. 짐승보다 좋은 음식을 먹고, 더 맛나게 즐기고 그리고 짐승보다 더 깨끗한 집에서 살고, 짐승보다 더 고급 변기에 배변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배우지 못하면 그는 짐승과 다름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히 배우라고 주님이 이 머리도 주시고, 우리의 정신도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인간으로 만드신 목적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다면 그것은 짐승의 행복이지 사람의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죽는 순간까지 죽기 마지막 눈 뜨고 의식이 살아있는 날까지 성경 읽어야 합니다. 그러다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배워야 해요. 사상을, 그거를 철저히 배워서 나는 이렇게 믿을 수밖에 없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른 길은 없다라고 사상이 확고하게 선 것, 이것이 기독교의 위대한 힘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윤리의 힘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듣고 싶으니 하나님에 대해서 충분히 얘기해 보라고 우리에게 시간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3일 여유를 줄 테니 기독교 신앙과 사상에 대해서 나에게 너무너무 듣고 싶으니 전해달라고 기회를 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오디오는 상당히 많은 경우에 틀지도 못하고 들고만 다닙니다. 그러나 비디오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고 보고 보기 싫다고 안 보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뚜렷이 보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윤리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뒤에 우리를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야기는 도덕 운동이 지양하는 윤리와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윤리가 다른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도덕 운동 속에서 강조하는 윤리는 이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한 윤리지만, 우리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거나 존경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과일 뿐이고, 우리는 또 다른 왕국에 속해 있어서 그 왕국의 통치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삶이 윤리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나라에 속해 있는데 그 나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셔서 율법과 그리고 복음으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서도 합당하지 않게 살면 벌이 있고 책망이 있으며 올바르게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종종 우리가 속한 하나님 나라의 법과 세상 나라의 법이 충돌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 세상 나라의 법을 가차 없이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히려 우리를 통치하는 보다 더 완전한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 복종하기를 기꺼이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윤리적인 삶의 힘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삽니다. 속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자기가 만족을 얻는 것이지만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표는 거룩해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하나님께 대한 아는 확고한 지식을 삶으로 표명하면서 이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고 담대하게 살되 그렇게 삶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손해를 받거나 박해를 받거나 때로는 목숨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윤리적인 생활이 기독교의 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이 기독교가 힘이 있습니까? 사상에 있어서도 이미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미개한 지식을 가지고 그리고 자신이 옛날에 겪었던 몇 가지의 체험이나 신념에 신앙을 걸고 생활을 하는데 그 사상의 힘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이익과 충돌하면 언제든지 이런 정도의 사상쯤은 버릴 수 있고 심지어는 이 세상의 세속적인 사조에 의해서 용해되어 버립니다. 윤리적인 힘이 있나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이 세상의 가치를 기독교적인 가치와 뒤섞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이제는 누구도 진실이라든지 진리라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굳게 붙들고 고난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미국을 갔습니다. 바쁜 시간에 잠시 틈을 내어서 시카고 대학을 방문했습니다. 거기에는 인문학 서적으로 미국에서도 정평이 있는 대학입니다. 그래서 책을 꽤 샀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좀 부족한 거 같아서 좀 책을 싸게 살 요량으로 그 골목에 있는 중고 서점에 들렀습니다. 많이 사지는 못하고 그저 한 1000불 정도 책을 사서 패킹을 해서 보내 달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디로 보내야 되냐고 묻길래 한국이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한국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왜 한국에 대해서 놀라냐고 물어봤더니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 달 전 상당한 량의 책의 주문이 들어와서 책을 모두 패킹하고 미국에 있는 고객들에게 보내는 것처럼 그렇게 송장을 넣어서 함께 보냈답니다. 당연히 그 송장을 받고 그리고 받았다는 연락과 함께 입금을 해 줄줄 알았는데 여러 달이 지났는데 화물은 한국에 도착한 것이 확인이 되었는데 연락도 없고 돈도 안 주고 아무런 연락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었어요. 왜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너절한 삶을 살아서 세계 방방곡곡에 돌아다니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먹칠을 하고 국가의 위신에 이렇게 손상이 가는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물론 사정이야 있겠죠. 책을 받은 사람이 갑자기 해고가 됐든지 아니면 죽어버렸든지 무슨 이유가 있겠죠. 그래도 그 신학교 전체가 지진이 일어나서 땅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건 개인이 주문한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한 것이니 누군가는 받았을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답변을 하고 받은바 자신의 상품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잖아요. 난 그래서 교회에서도 일시키고, 때로는 직원들이 늑장을 부리다가 그 공사비나 임금 이런 것들을 한 달씩 있다가 줘요. 제가 항상 야단칩니다. 야고보서를 봐라. 저희의 품삯이 소리를 지르니라 그건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에요. 아주 어쩔 수 없는 경우에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경우라면 일 시켰으면 즉시 돈을 줘야죠. 그게 하나님의 원칙 아닙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 집에 가서 일을 했더니 두 달 만에 끊어주는 어음을 줬는데 교회 오니까 즉석에서 입금을 해 주더라. 그러니까 교회는 참 좋다. 할 수만 있으면 교회에 가서 일하고 싶다. 그렇게 돼야지. 한 번씩 거래하고 난 다음에 세상에 심 흐리고 책임지는 인간 없는 것이 교회구나, 정말 매력 없는 거래처가 교회구나 라고 그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너무너무 화가 나고 얼굴이 뜨거워서 그 사람이 내 얼굴을 쳐다보는데 꼭 얼굴에 침을 뱉는 거 같았어요. 내가 정말 돈 있으면 내가 정말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돈을 대신 내 주고 싶었어요. 왜 그렇게 사느냐 이야기입니다.
4.19 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 정권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에 몇몇 교회들에서는 이승만 독재 정권의 타도를 외치는 설교를 주일마다 퍼부었습니다. 그 중의 한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는 올라가서 이 정권의 부도덕함과 독재적인 만행에 대해서 규탄하고 온 교인이 저항권을 가지고 궐기에 일어서서 이 정권을 타도하자고 외쳤습니다. 강단에는 밝은 빛이 환하게 비취고 있었고 그 전깃불은 사실은 계량기를 통하지 않고 들어온 도전이었다고 합니다. 도전이 무슨 뜻인지 압니까? 바깥에서 전기가 들어오면 계량기를 모두 통해서 집안으로 분배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근데 그때는 전기세가 너무 비쌌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기세가 비싼 게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가난해서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매일 그 전기세 내는 문제를 가지고 쌈질을 하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강단에 비추는 전깃불을 계량기를 통하지 않고 도전을 해서 불을 환히 밝히는 그 전깃불을 받고 주먹을 불끈 쥐고 독재정권을 타도하라고 외쳤으니 그게 어디 하나님 앞에 가당키나 한 삶입니까? 가장 커다란 문제는 무엇인지 압니까?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보다 행복해야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십일조 하는 것 이외에는 이 세상에서 추호의 손해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끊임없는 타협과 그리고 협상을 가져오고, 비굴한 굴복을 가져오고 그리하여 윤리적으로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하는 추루한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우 수치스러운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최근에 되어온 이 역사 가운데서도 나라와 함께 일어났던 굵직굵직한 추문들과 그리고 끔찍한 사건들 뒤의, 앞에, 옆에 모두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윤리의 표준들이 그러하니 보이는 비디오로 사람들이 알게 되는 기독교가 얼마나 지저분한 기독교이겠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고 그리고 하나님이 지구를 떠나면 이 세상의 인간들은 훨씬 행복해질 것이라고 울부짖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디오가 꺼진 것이 사상적인 무신론이라면 비디오가 꺼진 것은 실천적인 무신론이에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이 부정직하게,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수시로 뇌물을 먹이고, 그리고 불교 다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제 이 정권에 들어서서 지들끼리 결탁을 해서 모두 해 먹는다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인의 연줄을 놓아서 정치적으로 행정적으로 어떤 이익을 보고 있을 때 기독교가 아닌 사람들이 느낀 박탈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까? 그런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는 서슴없이 교회 다니는 공직자들의 힘을 빌어서 교회 일들을 처리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비록 뇌물이 오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부당한 방법으로 교회의 편을 들도록 사람들을 지시하고 그리고 그 신앙으로 맺어진 영적인 관계들을 세상의 목적을 도모하는 관계로 사용하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친분관계 속에서 만난 금융계, 정치계, 그리고 사회계 인사들과 함께 밧줄처럼 엮어져서 서로서로 이익을 위해서 활동하는 서로 서로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이것들이 자기들끼리는 성도의 교제요, 하나님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관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볼 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결탁해서 법질서를 훼파하고,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개독교의 전형적인 구태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죠.
제가 아는 한 형제는 감정사였습니다. 감정 평가를 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어느 도시에 내려갔는데 꽤 큰 물건이었습니다. 그 감정의 가격을 10%만 올려주어도 대출이 몇 백억이 좌우될 정도 큰 물건이었습니다. 사장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묵고 있는 여관에 찾아와서 무릎을 꿇더랍니다. “감정사님 나를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이제 이 부동산을 은행에 걸고 대출을 받아서 이 회사를 살리려고 하는데 감정사님의 감정에 따라서 이 회사는 살 수도 있고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방에서 너덜너덜한 10000원짜리 100매씩 묶은 묶음을 두 덩어리 10개씩 묶음 두 덩어리 1500만원에서 2000만원 되는 돈을 신문지를 싸서 앞에 갖다 놓더랍니다. 그래서 형제가 말했답니다. “얼마나 어려우시겠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감정을 해서 회장님 회사가 살아나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회장이 눈물이 글썽거리면서 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돈은 가져가십시오.” “아이 왜 그러십니까?” “저도 돈이 좋고 이거 가지고 가면 쓸데가 많습니다. 근데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세요?” “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세요?” “제가 그리스도인이거든요. 제가 예수만 안 믿었더라면 벌써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뇌물을 바치고, 탈세하고, 부정직하고, 거짓되고, 세속적인 방법으로 그렇게 사업을 하고 회사를 다니고 출세하고 이 비디오를 세상 사람들은 모두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살던 사람이 성경 찬송을 끼고 교회 오는 모습은 그 사람이 교회 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주일에 술집에 갔더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가 예수 믿는 줄 몰랐기 때문이죠.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오디오가 분명하게 정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삶을 사람들이 못 삽니다. 그래서 필요한 제 삼의 힘이 있는데 이게 은혜의 힘이에요.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이 힘이 은혜의 힘이에요.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난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성도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있을까요?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것이죠.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충만하게 차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가슴 쓰라린 감격으로 다가올 때, 그의 마음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습니다. 절대 순종! 주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살아야 되겠다. 그것이 어려울 때는 어떻게?
(찬양) 거친 바다 험한 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그 은혜 이기리.
그 마음이에요. 그거는 아주 어린 유년 주일학교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같은 마음이에요. 그 이외의 마음이 있을 수 없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교회에 왔을 때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십시오. 열렬히 기도하십시오. 무엇이 여러분들을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지 그 장애물을 치우십시오. 주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십시오. 그렇게 목회자가 목 놓아 외치는 이유가 은혜가 없이는 이 둘을 연결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기독교의 힘은 사상의 힘, 윤리의 힘,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은혜의 힘, 그런데 이 두 개는 사람들에게 들리고 보이는데 이 은혜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힘과 자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몰라요.
이슬람만 욕할 필요도 없죠. 우리 옛날 조선시대에도 어린 아이와 여자는 무시당했습니다. 이슬람에서도 그랬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일어나기 전, 바로 일어나던 그 해에 우리 교회 지체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갔습니다. 우리 교회 버스 한 시간 반 차이를 두고 그 유명한 아프가니스탄 인질 납치 사태가 일어난 거죠. 성도들이 여기서 기도 많이 하고 가서 온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알다시피 거기서는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도 밝히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그곳에 있는 아이들을 일주일 동안 돌보았습니다. 마지막 떠나는 날 거기에 부시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우리 모인 모임에 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일주일동안 우리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도 잘 돌보아주지 않는 어린 아이들을 사랑으로 따뜻하게 돌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저 사람들 속에 있는 사랑이 어디로부터 온 사랑인지 궁금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로 부터요” 라고 외치고 싶었죠. 그러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열린 교회 여러분들은 어느 때나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든지 봉사하고 싶다면 여러분들을 받아줄 것을 엄숙히 약속합니다”. 그리고 보증을 해 주었어요. 그게 비디오에요. 그래서 은혜의 힘이 필요한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 그 은혜 깊이 감사할 때 우리들이 드릴 최상의 제물은 기름 부음바 된 무교병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삶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올바르게 된 윤리적인 삶, 생활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으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살기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죠.
C. 고운 가루로 빚어 구운 전병
세 번째는 고운 가루로 빚어 구운 과자라고 그랬는데 사실은 전병입니다. 케잌입니다. 이 특별한 전병은 곡식을 갑니다. 가늘게 빻아지거나 절구로 찌어진 가루들을 체에 칩니다. 그리고 남은 곡식은 더 빻아서 더 가느다란 체에 내리고 그 곡식은 다시 빻거나 갈아서 더 가느다란 체에 쳐서 내리면서 가장 부드러운 곡식의 가루를 만들고 거기에 기름을 넣어서 빚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자기 깨어짐입니다. 자신이 깨뜨려지는 것,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던 죄인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자랑하는 자기 의에서 깨뜨려지고,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던 자기 사랑에서 깨뜨려져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 이러한 자기 깨어짐이야 말로 하나님께 올려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감사의 제물입니다.
여기에 기름이 빠지지 않는 것은 성령이 빠지지 않는 것인데 무한하고 영이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과 교제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중재자는 성령이십니다. 누구도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운 가루로 빚어진다고 하는 것은 철저한 자기 깨어짐을 의미하고, 깨어진 그 위에 기름으로 부어지고 드디어 주인의 손에 한 반죽으로 들려져 주인이 원하는 대로 손으로 빚어져 본래의 형체를 잃어버리고 주인의 손에 빚어져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떡이 되는 것이죠.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뜻을 예수 이용해서 성취하려고 하고 그리고 자기의 뜻에 하나님을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신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를 항상 버리고 십자가를 붙듭니다. 그리고
(찬양)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빚어가는 거죠. 나의 뜻을 다 포기하고 주님의 손에 반죽이 되면 주님이 우리를 빚으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기뻐하는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빚어진 전병은 불에 구워짐으로써 하나님 앞에 바쳐질만한 제물이 됩니다. 오늘 집에 가시면 이제 송편을 빚으시겠죠. 좋은 반죽에 맛있는 소를 넣었다고 할지라도 익히지 않고 생 송편을 먹을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인의 손에 빚어진 이 전병은 불에 구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련과 연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연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자기를 주 앞에 드렸던 사람, 자기 자신을 아무 대가 없이 하나님을 위해 바치면서 예수의 형상을 이루며 섬기며 살았던 위대한 사람들 중 시련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라도로 집회를 내려갔었어요. 책을 보급하기 위해서 한 두세 명의 지체들과 함께 내려갔는데 저녁때 마침 강의가 끝나고 올라오는 길에 군산에 어디 가면 아주 맛있는 횟집이 있다기에 따라 오느라고 고생했으니까 가서 한번 내가 사주마 하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찾아갔는데 명성에 맞지 않게 지저분하고 음식도 별로 였어요. 알고 보니까 딴 집에 갔더라구요. 어쨌든 그랬는데 별로 먹을 것이 없었는데 큰 생선을 노르스름하게 구워서 쇠로 만든 접시에 올려서 내놨어요. 제가 구운 생선을 참 좋아하거든요. 기름에 튀기지 않고 오븐이나 석쇠에 구운 것을 좋아하는데 너무 감칠맛이 나서 젓가락을 딱 찔렀는데 피가 쫙 흐르는 거예요. 그리고는 더 이상 숟가락을 밥을 먹을 수가 없었어요. 욕지거리가 나서 내려놓고 그 후 몇 달 동안 구운 생선을 입에도 대지 않았어요. 잘 빚어진 전병이면 뭐합니까? 익지 않았는데 구워져야죠. 그런데 사람들은 입으로는 자기를 하나님 앞에 헌신하겠다고 하면서 시련은 싫다는 거예요. 고난은 마다하는 거죠. 입술로 고난을 받겠다고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습니다. 고백한 그대로 사는 것은 치열한 고난을 동반하는 것이죠. 하나님께 열납될 만한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성도들 중, 시련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환란과 고난을 겪지 않고도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구워진 그런 성도들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믿음을 따라 윤리적인 삶의 표준을 따라서 살려고 할 때 성도들이 오늘 그렇게 행동하고 저녁때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이지 복음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윤리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큰 희생을 치렀는데 돌아온 대가가 영광이나 박수가 아니라 모욕과 비난일 수도 있고, 때로는 고난일 수도 있고 때로는 윤리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불같은 시련이 신앙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는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찬양) 불같은 신앙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
그렇게 하면서 주님께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순수한 신앙으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윤리적인 생활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깨어짐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것들을 모두 감사의 열매로 받으시는 것이죠.
D. 희생제물과 함께 드림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성경 구절이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감사의 희생 제물과 함께 드릴 지니라”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소제라고 불리웠는데 이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단독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는 없는 제사였습니다. 짐승을 죽여 피를 흘려 드리는 동물의 희생제 위에 겹쳐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이 희생 제물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 죽임을 당하고 찢겨져 먼저 올려진 이 희생 제물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실 예표였습니다. 우리가 순수한 신앙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립니다. 윤리적인 생활로 하나님께 감사의 생활을 올립니다. 나아가서 자기 깨어짐이 있는 회개의 생활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립니다. 이것들이 아무리 아름답게 드려진 제사라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순수한 신앙 자체나 윤리적인 생활이나 회개 자체 때문에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려 이루신 그 속죄 때문에 나머지 것들이 주님께 받아 들여질만한 것이 된 것입니다.
IV. 은혜에 합당하게 살자
그래서 우리는 순수한 신앙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면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윤리적인 생활로 하나님께 헌신의 제사를 올리면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 깨어짐 속에 참여하면서도 우리는 교만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감사의 절기가 될 적마다 많은 감사의 제목들,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 앞에 올리는 희생의 제사는 소제일 뿐이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원래의 기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소제에는 우리가 보탤 것이 있었지만 희생 제물에는 우리가 무엇을 보탤 수 있었습니까?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의 형벌을 감당하신 거기에 우리들이 보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오직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줄을 알고 눈물을 흘릴 뿐이고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에 목 매일 뿐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은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라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회고할 때에 사상에 대한 투철함과 윤리적인 삶에 대한 분명한 표준이 있어서 거기에 자기를 헌신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체험들은 대부분 자기만족적 영성으로 부패하거나 신비주의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V. 결 론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중추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이 무한하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은혜,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신 그 한량없는 사랑에 감사하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온전히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감격을 가슴에 품고 순수한 신앙으로, 윤리적인 생활로, 그리고 깨어짐이 있는 회개로 주께 제사를 올리는 성도들이 된다면 주님은 더 많은 은혜와 사랑을 여러분들에 부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