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각기동대로 읽는 인간론
녹취자: 조경훈
1991년에 “공각기동대(The Ghost in the Shell)”의 애니메이션 원작이 일본에서 먼저 나옵니다. 이것이 인기를 끌면서 TV에서 드라마로 3번 상영됩니다. 그러다가 2017년에 할리우드 영화로 아까 그림에 나온 남자 같은 여자배우인 스칼렛 요한슨을 주인공으로 해서 완성판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될 것은 할리우드판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보려면 애니메이션 원작을 봐야합니다.
인간과 로봇의 지향점이 무엇인지와 관련해서 ‘고스트(Ghost)’라고 하는 개념이 나옵니다. 원래 ‘고스트’는 ‘영혼’을 뜻하고 킹제임스(KJV) 성경버전에서는 ‘성령’으로 사용이 됩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결국 고도의 물질문명과 기계적 인간관을 따르면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인간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영화에서는 ‘고스트’라고 하고 우리는 그것을 ‘영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로봇과 인간 중에서 인간을 먼저 설명하면 인간은 개성이 있지만 기억할 수 있는 기억의 총량이 제한적이어서 정보를 원합니다. 여러분 진짜 공부 잘해보고 싶지 않습니까? 길을 지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쳐다보고 싶을 정도로 공부 잘 해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게 공부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기 때문에 정보를 너무 얻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지향점입니다. 로봇은 네트워크를 통해서 무한한 양의 정보를 가질 수 있지만 개성이 없습니다. 고스트가 없습니다. 그래서 로봇과 인간은 서로 진화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헐 했습니다. 고도로 발달된 첨단 과학의 시대에 무슨 전기코드가 머리 뒤로 들어갑니다. 만든 사람들이 모르지는 않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들에게 무엇인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코드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보면 반드시 전깃줄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타고 통신이 갑니다. 그런 것들을 보여주는 것은 기계라고 하는 이미지를 코드로 형상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쿠제’이고 애니메이션 원판에서는 ‘인형사(puppet master)’라고 나옵니다. 이 사람은 단순한 로봇이 아니라 네트워크 속에서 놀랍게 진화했는데 자기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진화해 버린 사람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깨달으면서 이 사람의 간절한 소원은 주인공인 메이저(원작에서의 이름은 쿠사나기 모코토)와 고스트 융합을 통해서 ‘쿠제’도 아니고 ‘쿠사나기 모코토’도 아닌 제 3의 진화된 인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인류는 기계와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물어버린 존재입니다. 여기서도 헐 하는 장면이 무슨 전선이 이렇게 많이 나옵니다. 말이 맞지 않는 장면이지만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기계적인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형상화 시킨 것입니다.
‘쿠제’와 다른 로봇들과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다른 로봇은 기계를 통해서 수많은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쿠제’는 놀랍게 진화를 해서 사람의 뇌에 연결이 돼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네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인공 ‘메이저 모코토’를 만든 한카 로보틱스에 있는 사람들은 저렇게 진화되고 발달된 기계로 가고 싶어 했는데 ‘모코토’나 ‘쿠제’는 그것을 넘어서서 이쪽으로 간 것입니다.
‘쿠제’는 정보의 확장과 자기보호의 과정을 통해서 진화한 것입니다. 이전에 없던 바이러스인데 온갖 약과 환경을 맞이하면서 진화하듯이 ‘쿠제’도 진화한 사람입니다. 그는 정보의 바다에서 새로 태어난 생명체이며 ‘쿠사나기 모코토’와 고스트융합을 꿈꾸는 것입니다. ‘쿠사나기’의 뇌에 새 의체가 입혀짐으로써 다시 태어난 ‘쿠사나기 모코토’는 ‘쿠제’이기를 거부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공각기동대 경찰인 스칼렛 요한슨이 사건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높은 빌딩에서 점프해 뛰어내리면서 악당을 잡으러 가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것은 원작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애니메이션 원작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 어디로 갈까? 네트는 광대해.” 이 대사로 끝납니다.
여기서 나오는 철학적인 문제들이 ‘도대체 자아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나는 사당동에 살고, 총신대학교에 다니고, 어머니는 박 아무개, 아버지는 김 아무개이고, 세 아들 중에서 둘째로 태어났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자기에 대한 설명은 아니고 모두 주변에 대한 설명입니다. 자기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전통적으로는 자아의 정체성을 기억에서 찾았습니다. 기억의 지속성이 자아의 정체성에 기반이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여태까지의 이런 전제를 다 흔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모코토가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입력된 기억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자신의 원래 기억의 조각들을 계속해서 찾아갔는데 현대 과학발전의 위험성을 감지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과학발전에 반대하는 설명서를 발표하고 체포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체포당한 후에 행방불명처리가 돼버리고 한카 로보틱스는 이 아이의 젊은 몸을 의체로 만들어서 사이버 인간을 만드는 도구로 써버립니다. 이것이 핵심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자기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 다음 질문은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을 짜내버리면 마지막에 움켜쥘 수 있는 것이 자기 복제와 보존의 DNA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생명은 아닙니다. 자기를 복제하고 보존할 수 있는 DNA가 인간이 추적해 갈 수 있는 마지막 육체의 지점이라면 그것은 정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정보가 컴퓨터나 인터넷과 같은 전자적인 기억장치 속에서 찾아내는 정보와 무엇인 다른지를 묻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기계 사이의 차이가 무언인지 묻는 것입니다. 쿠제가 이런 말을 남깁니다.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절점이다.” ‘결절점’은 쭉 이어지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뚝 하고 부러져서 꺾여 저 버린 것입니다. ‘1, 2, 3, 4, 5’ 또는 ‘A, B, C, D, E’ 같은 연결순서가 어느 순간 딱 끊어지고 점프하듯이 새로운 것이 태어나는 것을 결절점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생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정보의 바다 속에서도 그 생명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원작의 고민은 ‘쿠사나기’와 ‘인형사’가 융복합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존재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닙니다. 영화에서 특이한 게 스칼렛 요한슨이 다 벗은 몸으로 여러 번 나오는데 평범한 사람이면 아무도 그 장면을 보면서 성적인 상상을 안 합니다. 그것이 이 영화의 놀라운 기술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영화에서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기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도 아닌, 혹은 기계이면서 인간인 존재가 나옵니다. 여러 번 영화를 봐도 일체 그 안에서는 성적인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영화 자체를 장면이나 색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기획을 해서 연출을 했기 때문입니다. 기계와 인간, 동물 사이에 격벽이 쳐져 있는데 그것이 완전히 철거되어 버린 것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판 마지막에서는 결론을 내지 않고 광대한 네트워크가 있다는 대사로 끝내버립니다. 그 뜻은 “정말 우리가 ‘있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사실 그것밖에는 없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고 이렇게 행동하고 존재하는 것도 내 의지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것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사고와 매우 유사하고 그의 영향을 받아서 후대에 출연했던 실존주의자들의 사상과 아주 유사합니다. 알베르 까뮈(Albert Camus)나 사르트르(Chartres)같은 사람들의 소설에서 나오는 것과 아주 유사한 면을 보게 됩니다. 할리우드판은 정말 이상합니다. 제목이 “고스트 인 더 쉘(Ghost in the Shell)”입니다. ‘껍데기 안에 있는 영혼’ 이란 이름인데 거기에 기동대를 왜 붙였는지 전 아직도 이해가 안 됩니다.
전통적인 인간관은 인간의 영혼이 실재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육체로 사람을 만드시고 영혼을 지어서 그 둘을 하나로 합하여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 기독교의 인간관입니다.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간다는 것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인간관의 관점입니다. 이런 것들이 17세기에 데카르트와 뉴턴의 기계론적인 세계관으로 특히 위협을 받기 시작합니다. 데카르트는 엄격한 이원론을 얘기합니다. 그는 인간이 정신과 육체로 철저히 이원론으로 나눠진다고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아니고 막연하게 정신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정신과 물질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원리가 지배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어떻게 서로 다른 두 개가 인간 안에서 만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과학으로는 풀 수가 없어서 인간의 뇌에 솔방울같이 생긴 ‘송과선(pineal gland)’이라는 곳에서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만난다고 했는데 거짓입니다. 이러한 사유가 한창 있을 때 한 쪽에서 뉴턴은 이 세상의 모든 자연현상은 수학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고 그것은 엄격한 법칙이 있다는 사고를 합니다. 천둥이 치는 게 하나님이 화난 줄 알았는데 전기방전으로 일어나고 어디서 일어났는지 거리까지 측정할 수 있게 됩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 책에 보면 수많은 수학적인 분석들이 나옵니다. 모든 자연현상을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뉴턴이 미적분을 사실 제일 먼저 발견했는데 다른 사람이 발표를 먼저 합니다. 나중에 내 것을 봤다 아니다 서로 싸우는데 발견은 뉴턴이 먼저 하고 발표를 늦게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미적분으로 항아리의 체적까지 다 잴 수 있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각도와 속도를 보면서 빗방울의 크기가 얼마인지도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자연세계를 설명하듯이 인간에게 이것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기계론적인 인관관이고 저런 철학을 토대로 유물론이 나오게 됩니다.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과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라는 용어가 이 현상과 관련해서 나오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휴머니즘’은 문자 그대로 인간이 중심이 되어서 모든 사고를 하고 가치들을 재편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에 의해서 모든 것을 시작하는 것에서 인간이라는 말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될 때가 온 것입니다. 인형사를 인간으로 볼 것인가 쿠사나기를 인간으로 볼 것인가 기계로 봐야 될 것인가 하는 복잡한 문제들입니다. 영화 “로보캅(Robocop)”에서 로보캅을 인간인가 아니면 무엇으로 봐야 되나하는 질문들이 생깁니다. 지금 휴먼은 한 가지 의미로 쓰여 지지 않았기 때문에 ‘포스트휴머니즘’ 즉 ‘휴먼주의 이후의 시대’라고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비물질적 주체와 물질적 주체를 재통합하고 새로운 형태의 인간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 ‘포스트휴머니즘’입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맨날 왕따를 당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눈치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없는 눈치가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에게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는 굉장히 지혜롭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눈치가 없고 교양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칩이 나와서 컴퓨터가계에 가서 ‘교양칩’, ‘눈치칩’, ‘공부칩’, ‘운동칩’, ‘유머칩’, ‘연애칩’까지 다 나와서 딱 꼽기만 하면 능력이 놀랍게 업그레이드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좋을 것이지만 문제도 있을 것입니다. 공부를 누가 잘 하느냐는 누가 비싼 최신 칩을 꼽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 사회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굉장히 어렵고 많은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적극적으로 수많은 코드들을 우리에게 연결해서 업그레이드하고 발전해야 된다고 보는 것이 ‘트랜스휴머니즘’입니다. 그것이 새롭고 우량한 인류로 진화하는 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폰8’ 이라고 해서 스마트폰을 사면 다 똑같습니다. 전부 다 공부 잘하는 칩을 꼽는다면 교수도 우량 교수칩을 꽂아야 될 것입니다. 얼마나 비싼 칩을 꽂았느냐에 따라 교수의 등급도 결정이 되고 연봉도 결정될 것인데 복잡한 문제입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했다고 하지만 휴머니즘이 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일관적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가 나옵니다. 영화 전체에서 쿠사나기 모코토가 분노하는 것은 어떻게 집을 나와서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과학반대운동을 하던 자기를 무자비하게 기억을 박탈하고 단지 자기의 육체를 의체로 만들어서 로봇회사의 한 실용품인 모르모트와 같은 존재가 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존엄성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내재적 인간론은 인간의 존엄의 이유가 인간 안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상황적 이론은 사회질서가 있고 가변적이다. 작위적 이론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아무 근거 없이 자기는 존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존엄성의 근거를 거기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다음 장면을 잘 보시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 일본 아줌마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자기 딸 얘기를 하고 있는데 아무 상관없는 이웃집 아이를 이야기 하는 것처럼 눈물도 없고 그리움도 없이 완전 무표정한 표정으로 얘기합니다. 저게 저 영화의 묘미입니다. 한 영화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코드들이 묻어있습니다. 결국 아는 것만큼 영화도 보이는 것입니다.
(학생에게 질문) 영화를 몇 번 봤습니까? (한 번 봤습니다.) 영화 끝날 때 불이 확 켜지고 먹던 팝콘하고 쓰레기 가지고 일어나면서 영화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기숙사에서 봤는데 먹으면서 봤는데 맛이 없어서 음식을 버려두고 봤습니다. 끝날 때 영화에서 어떤 의미심장한 대사가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설명을 해주신다고 해서 그 대사만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설명해 주실지 알려주십시오.) 강의에 별로 기억을 못했는데 다음 사람 영화관에서 본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기숙사에서 보셨습니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고 영화관에 가서 봐야지만 진짜 감상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영화가 끝나고 일어나면서 느끼는 느낌은 ‘저게 뭐야.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그 다음 사람들은 ‘재미있네.’ 그 다음 사람은 ‘만화 같네.’ 이런 반응입니다. 그러면 이 대사가 지금 의미하는 것은 사람의 관계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화 나중에 단 하나의 예외가 나옵니다. 줄리엣 비노쉬가 마지막으로 모코토에게 도망치라고 보내줍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 영화 전체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사람이 줄리엣 비노쉬입니다. 그 사람은 이 영화 전체의 틀을 깨고 나오는 사람입니다. 여태까지 영화를 보던지 뭘 하든지 관심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스토리가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울고 웃고 지지고 볶는 그런 것들이 이 영화에서는 모두 단절된 상태에서 의미 그 자체를 정보의 바다에서 찾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미는 무엇이 규정하는가?’ Nothing. 단지 의미 있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라는 것이다. ‘근원이 무엇이냐?’ 그것은 의미 없는 질문이다. 의미 있는 것은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현실이고, 내가 여기 살아있는 것은 내 의지이다.’ 전개되는 현실도 내가 가야 하는데 그것도 나 자신의 의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것은 인간의 엄청난 고독입니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대화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는 기억에 집착하지만 기억은 우리를 정의해 주지 않아.” 여태까지 주류 인간론은 기억이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봤지만 이제 그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우리를 정의하지는 않고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현재 사실, 그리고 내가 지금 행동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저는 젊었을 때 거기에 깊이 빠졌었습니다. 그 사람의 철학 이론 중에 가장 중요한 개념이 ‘초인(Übermensch)’의 개념입니다. ‘Über(위버)’는 ‘초월하다’이고, ‘Mensch(멘쉬)’는 ‘사람’을 뜻합니다. 여기서 ‘초인’은 초월한 인간이 아니라 ‘극복인’을 말합니다. 온갖 난관을 겪으면서 그것을 극복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정직하게 자신 앞에 다 까발려 졌을 때에 다가오는 근거 없음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에게 누구인가?’ 영화처럼 조작된 기억일 수도 있고 우리 엄마가 우리 엄마가 아닐 수도 있고 우리 아빠가 우리 아빠가 아닐 수도 있고 다리 밑에서 나를 주워왔는데 두 분이 사랑으로 키워줬을 수도 있고 그들이 식인종이라면 적당하게 다 자란 후에 나를 잡아먹기 위해서 키울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다양한 설정 가운데 우리가 보편적으로 원하고 동의할 수 있는 것 속에서 사실에 해석을 덧붙여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다 까발리고 근거 없는 것들이 다가왔을 때 우리가 복종하고 굴복해야 할 도덕적인 질서라고 하는 것들이 원래 해명되지 않는다고 니체는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이 초자연적으로 주어졌다고 보는데 그런 것들이 없다고 보면 인간은 허무합니다. 하이데거가 얘기했듯이 모든 것을 부인했을 때 마지막에 인간은 자유를 누리는데 그 자유는 무시무시한 자유라는 것입니다. 니체의 초인의 개념은 그 무시무시한 자유의 공포를 다 극복하고 그것을 견뎌내고 이겨낸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내 삶의 의미에 가치를 부여하는 내 밖에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습니다. 나 자신이 그것을 행동으로, 의지로 규명해 나갑니다. 니체가 얘기하는 권력의지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높은 위치에 있게 될 때 자기가 찾은 의미와 가치를 다른 사람들에게 구현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권력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그는 보는 것입니다. 그때의 권력은 정치권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오우레 박사로 나오는 줄리엣 비노쉬의 중요한 대사가 나옵니다. “네가 바로 인류의 미래다. 너는 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인류가 너처럼 될 것이다. 네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이 말을 듣고 마지막에 쿠사나기 모코토의 대사는 “그 말을 들으니 외로워지네요.” 입니다. ‘외로워진다’라는 것은 기계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이 아까 얘기한 무시무시한 자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기, 그러나 자기 의지로 자기의 삶을 헤쳐 나가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기억이 함부로 조작돼 버린다면 미래에 희망, 꿈, 과거에 대한 추억 이런 것들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원하면 언제든지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유가 지금 처음 영화로 나온 게 아니라 “토탈 리콜(Total Recall)” 같은 영화가 바로 이런 것을 내다보고 만든 영화입니다. 거기서는 이것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습니다.
고스트융합을 통해서 자신들이 예상했던 진화의 상태가 있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훨씬 더 놀라운 진화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생물학의 돌연변이같이 폭발적으로 변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과학은 엄격한 법칙이 있게 나아가는데 그것을 깨고 놀랍게 그 이상으로 인간이 진보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과학의 극단적인 발전 때문이 아니라 이미 저렇게 된 사람들은 저 안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서 그 힘에 의해서 추동되면서 과학이 과학에서 탄생했으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것에 대해서는 외면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신, 영혼의 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고스트의 정체가 불분명하지만 정신적이고 영적인 어떤 실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과 동일의 것이냐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의하지 않습니다. 모든 프로그램을 삭제하면 먹통이 되고, 다시 입력하면 돼야 되는데 그 통제가 안 먹히는 그 무엇이 그 안에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나오는 마지막의 대화에서는 고스트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것 때문에 그 인간을 아주 놀랍게 사이버매틱스로 진화시켜서 자기 의도대로 하려고 하는데 통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런 형태의 로봇이 사람의 형상 같은 것을 갖게 되었을 때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주체성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줄리엣 비노쉬는 “이게 너의 진짜 기억이야.” 하면서 손에 쥐어주고 도망가라고 합니다. 쿠사나기는 줄리엣 비노쉬의 호의에 고마워서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도망갑니다. 여기서 압권은 줄리엣 비노쉬가 이 사건을 통해서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이었지만 인간적인 사유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손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도망쳐라. 자기 목숨을 걸고 “이게 너의 진짜 기억이야” 하고 들려줍니다. 결국 그녀는 죽습니다. 그게 진짜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영화 전편에서 진정한 인간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람이 줄리엣 비노쉬입니다. “네트의 바다는 광대해. 자 가자. 광대한 바다로” 하고 끝나는데, 그 네트에서 쿠사나기는 어떻게 됐을까는 우리의 상상에 맡깁니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답을 내려주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강의를 듣고 봤으면 혼자 볼 때와는 달리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정말 누굴까? 무엇이 나를 규정하고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진짜 복제 인간이 나왔을 때 그 인간을 형제로 대해야 하는가? 하는 많은 문제가 나옵니다. 내 개인적인 견해인데 혹시 복제인간이 만들어져도 그 사람은 예수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제인간이 만들어져도 그 영혼은 개별적인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봅니다. 이 전체를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결론은 인간이 한 정체성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찾는다는 것이 이처럼 애매모호하고 어려운 것이고 찾았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신뢰할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주신 누구와도 중복되지 않는 유일한, 내 육신을 아무리 복제해도 복제되지 않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나의 영혼, 그것을 내가 인식할 때나 인식하지 못할 때나 나는 여전히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유일한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일생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