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새벽예배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 대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것이라 하니라
(행 25:6-12)
녹취자 : 이시내
유대인들이 새로 부임한 베스도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재판을 하게 해달라고 한 것은 사실 무슨 재판상의 문제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바울을 이송하는 중에 습격을 해서 살인을 하려고 하는 이런 의도였습니다. 베스도야 그것을 눈치를 못챘겠지만 바울은 이미 앞에서도 겪은 적이 있으니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몰랐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어쩔 수없이 종교지도자들이 베스도를 따라서 가이사랴까지 내려와서 사도바울을 고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소하면서 이제 많은 중죄들을 이야기 하면서 사도바울을 고소했지만 그것은 자기들의 생각일 뿐이고 바울이 그런 죄를 범해서 로마의 법을 어겼다는 것을 입증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바울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예수를 전파하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였고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주의자들이였습니다. 맨 처음에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로 오셨다는 이 메시지들은 전파되었지만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유대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교 안에도 많은 생각이 다른 분파들이 있었으니까 그 분파들중에 한 사람일 것이다. 한분파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로마의 관리들은 유대교안에서 일어난 분파적인 싸움에 자신들이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로마의 법에 의하면 관대하게 대하도록 되어 있을뿐 아니라 또 로마의 법을 특별히 어긴 것도 아닌데 무분별하게 개입을 해서 누구편을 들어주었다고 소문이 나게 되면 그럼 수많은 모함과 투서 이런 것들을 당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종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했습니다. 두가지점에서만 로마를 자극하지 않으면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세금을 정확하게 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황제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황제를 신이라고까지는 않았지만 황제를 숭배하는 것 이 두 가지만 위반하지 않으면 그러면 제국 안에 있는 수많은 종교들을 그대로 끌어안고 가던 나라였습니다. 그랬는데 이제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의 종교문제에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기독교가 맨 처음에 생겨날 때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대교다 라고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기독교가 이런식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교의 그늘아래서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드디어 고소된 죄인으로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기회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쭉 입증을 하면서 자기는 이렇게 고소당할 정도로 잘못한 죄가 없다. 결백하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재판을 받겠느냐라는 베스도의 질문은 순전히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정치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거기를 따라갈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때문이었는데 우선 첫째는 이미 유대인들의 계교를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무모한일을 할 이유가 없고 두 번째는 예루살렘에 와서 이런식으로 포로가 되어서 죄수의 자리에 서게 된 것도 결국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 것인데 처음부터 사도바울에게는 하나님이 그를 택하신 사명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과 임금들에게 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모여있는 그곳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 복음을 이러한 재판과 고소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황제 앞에서 변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황제가 이런 재판의 과정을 통해서 이 베스도나 황제가 눈물을 흘리며 회심하고 예수를 믿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변증의 과정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기독교가 참된 종교이고 유대교의 그늘아래서 영적으로 만족을 얻지못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나님이 구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그 참된 신앙이 바로 이것이다 라고 하는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제 가이사에게 가겠노라고 청구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잘 안갑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로마인들이라고 할지라도 로마사람들도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꽤 될텐데 그 사람이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노라고 하면 심심치 않게 황제가 이것들을 재판해야 할 텐데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로마가 공화정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는 군주국가처럼 지배했지만 자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민주적 공화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왕 혼자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자 들이 있어서 이 사람들이 의회를 구성하고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로마가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의 정치는 정신자체를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상당히 따르고 있었다라고 봐야합니다. 실제로 황제는 아주 특별한 권력을 쥐고 혼자 흔들었던 사람들이 없진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할수 없도록 나라가 되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서 보면 황제가 있었던 궁이라고 하는 것도 중국의 황제가 거하던 곳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작았습니다. 그런 속에서 민주적인 공화정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로마인들의 생명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백성들이 올바르게 판단을 받아야 되겠다고 하겠다는 재판제도 같은 것들도 완비되고 특히 법은 로마에 와서 찬란하게 꽃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국들을 다스리게 됩니다. 민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로마인들에게 허락된 특권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로마의 법에 따라서 자신이 황제인 가이사에게 마지막으로 재판을 청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천신만고 끝에 로마로 건너가는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됩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고백하는 가운데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사람들이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예수가 전파되는데 나는 그것을 인하여 기뻐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이런 몸이 아니고는 그 로마의 중심부에게까지 가서 이 지체높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모두 소모하여 그리스도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마치 연료삼아서 자기를 모두 태워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사실 끊임없이 갈등하고 시달린다고는 하지만 정말 우리에게 복음을 위한 고난이 있는가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적당하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게 될 때 우리의영혼의 찌꺼기들이 사라지게 되고 그리고 그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적절하게 우리의 영혼의 건강을 유지합니다. 편안한 삶은 절대로 축복된 삶이 아닙니다. 감당할 수 있는 적절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받은바 그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게 되고 적절한 시련과 고통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나를 통해 전파되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이 성화되고 변화되며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쁨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히려 그것을 자신이 온 몸으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위해서 철저하게 헌신하면서 전에는 자유한 자로 복음을 전했으나 이제는 죄수의 몸으로 갇힌 자가 되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예수의 복음을 인한 고난이 있는가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안일에 빠지지 말고 이 복음을 위해 살도록 우리자신을 주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