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TS 아침 채플 1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8-11)
녹취자 : 김미현
우리 하나님 말씀 한절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제1장입니다. 빌립보서 1장 8절, 9절, 10절, 11절까지 읽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쓴 것은 로마 옥 속에서였습니다. 제가 지난해에 그곳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옥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서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그 감옥에서 사도 바울은 아마도 주후 61년 봄에서 63년 사이에 이 편지를 썼을 것으로 봅니다. 이 감옥 속에서 쓴 편지가 몇 개 있는데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 가운데 옥 속에서 쓴 것이 가장 신학적으로 깊이가 있는 서신서들입니다. 주님 만나고 정신없이 사역의 길을 달려 가다가 감옥 속에 갇히면서 복음에 관련한 하나님의 웅장한 우주적인 계획들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깊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우리에게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목회자가 성도들을 어떻게,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예수고 바울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랑이나 사도 바울 안에 있는 사랑이나 놀랍게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도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도는 우리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며 살아가던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도록 하는 설득이 진실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모두 허위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지만, 너희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좋겠다.’ 그것이 어떻게 목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화) 제가 신학교에서 선생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제가 작은 책을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읽혔습니다. 어느 학생이 레포트를 썼습니다. 아주 굉장히 반발하는 레포트를 썼습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것을 읽으라고 하셨습니까?’ 그렇게 쓰지는 않았지만 ‘당신이 그렇게 잘났습니까?’ 그런 식의 편지였습니다. 심지어는 ‘이것이 기분 나빠서 나를 낙제시켜도 나는 좋습니다.’ 그렇게 까지 썼습니다. 그러면서 한권 두권 세권 읽혔는데 태도가 늘 그랬습니다. 그런데 항상 똑같은 형태로 레포트를 내기 때문에 그 학생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레포트를 썼는데 그 사람이 쓴 레포트 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직전에 내준 책이 십자가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그 학생이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레포트를 썼습니다. ‘아, 이상하다. 왜 나는 지금 마음이 이럴까? 몇 번에 걸쳐서 이 교수님을 비판했는데, 그런데 이 십자가에 대한 글을 읽는 동안에 나는 계속 울었다. 하나님이 나를 여태까지 나는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다 사람들이 저리로 가보라 이렇게 느꼈다. 그런데 내가 오늘 이 십자가에 대해서 느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는 십자가에서 나를 주님이 부르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회개하는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만나본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사랑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오느냐하면 목회자, 신학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경험입니다. 오늘날 이 신학의 중심을 못 잡는 이 모든 혼란스러운 상황이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 신학자가 되고 목회자가 된다는 것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방식이 바로 어떤 방식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전의 잘못된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간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고 목회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거나 혹은 신학자가 된 사람이 옛날에 하나님을 한번 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현재성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그렇게 감격적으로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사랑했다는 것은 옛날일이지 지금일은 아닙니다. 종종 우리는 목회자에 관한 비윤리적 삶에 대해 혼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화) 최근에 제가 들은 어떤 정보입니다. 선교사 한사람이 아주 굉장히 헌신되고 훌륭한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윤리적인 문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혼란스러워합니다. 옛날에 그렇게 열정적이고 뜨거웠던 것이 사실이라면 오늘 이런 윤리적인 죄에 빠진 것이 사실이 아닐 것이고, 그리고 만약 지금 이렇게 윤리적인 문제에 빠진 것이 사실이라면 옛날에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둘 다 진실입니다. 옛날에는 그랬고 지금은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지금 아주 자신 있게 하나님과 자신의 양심 앞에서 빌립보 교인들 앞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현재형입니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다. 모든 목회에 있어서 이기심과 자만심, 교만 이런 모든 것들이 어디서부터 올까요?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이 자신에게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목회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주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인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지도자로 부르셨을 때 무엇을 부르셨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옛날에 주님을 사랑하고 깊이 만났던 것 가지고 자만하지 말고 지금 현재적으로 주님을 사랑해서 자신 있게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매일매일 신학 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그 사랑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목회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어떻게 충만해진다고 성경이 기록합니까? ‘지식과 총명으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노시스’, 지식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총명이라고 하는 것은 판단력 혹은 신적인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 깨달음,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철학에서 말하는 ‘오성’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의 어떤 이성의 추론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믿음의 행동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지식과 총명이 더해질수록 사랑이 더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예화) 비유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타오르는 불길이 사랑이라면 그 불길이 계속 타오를 수 있기 위해서는 연료가 계속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바짝 마른 지푸라기 같은 것들을 잔뜩 쌓아놓고 불을 질러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강한 불길이 일어나면서 엄청난 열기가 발생합니다. 그렇지만 얼마 못가서 금방 꺼집니다. 왜냐하면 지푸라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타오르기 위해서는 든든한 연료가 계속 공급되어야 합니다. 연료 없이 불 없고, 불 없이는 연료가 탈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비유를 하자면 지식과 총명은 장작과 같고 사랑은 그 장작을 태우면서 계속 활활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기독교에서 신앙의 지식을 습득하는 방식의 독특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지식이 함께 섭취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할 때에 늘 즐겨 사용하던 두 단어가 있었습니다. ‘삐에따스 앤 스켄띠아.’ 삐에따스는 경건이고 스켄띠아는 지식입니다. 경건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지식이 그 다음입니다. 그리고 그 둘은 함께 조화롭게 타올라야 합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 사랑이 없는 지식 모두 올바른 습득 방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늘 말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책을 쓰면서 느낀 것은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공부해야 할 영역이 엄청나게 넓고 광대합니다. 부지런히 공부해야합니다. 공부를 잘 못하고도 진실한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매우 힘듭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기만큼 힘듭니다. 그러면 공부만 잘하면 반드시 진실한 목회자가 되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의 부도덕함과 악함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그것을 능가합니다. 그러니까 둘을 같이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늘 이야기하지만 지금 여러분들은 공부에 온 마음을 쏟아서 5년 정도 정신없이 공부에 자신을 몰두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 다닐 때 한번쯤은 공부하다 건강의 위협을 느껴서 병원에 실려 가야 합니다. 정말 그래야 합니다. 그렇게 공부를 안 하고 진실한 목자가 되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성경을 읽으면서 잘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이 계속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의 본질 자체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지식과 총명을 공급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하게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주님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에 대해서 감격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인격과 삶의 특징인데 첫째는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실이 무엇일까요? 라틴어로 ‘베룸’이라고 합니다. 진실이라는 말은 진리라는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베리따스’, 이 진리를 우리들이 객관적인 것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객관과 주관의 조화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만약에 ‘베리따스’, ‘진리’라고 한다면 인간의 마음과 생활이 이것이 이 진리에 부합하고 있는 상태,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진실이라고 합니다. 진리의 기준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진실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솔직해진다고 해서 모두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기준의 고민이 있고 거기에 자기를 합치시키려고 하면서 솔직해 질 때 그것을 우리들이 진실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자기 자신이 거기에 부합하는지를 고민하면서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 고민들을 늘 하면서 살면 그것이 자신의 인격 속에 베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인격이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을 느끼게 만들고, 또 거짓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면서 열매가 풍성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방식으로 신학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말씀이 가슴에 새겨지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힘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