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직의 영적생활
녹취자: 이 솔
우리교회는 교인 일곱 명으로 시작했습니다. 25평의 지하 예배당 교회가 두 번 하다가 안 되어서 문 닫고 폐허가 된 그곳에 가서 (그때 저는 교수였고 청년들을 이끌고 ‘돈 드릴 이유 없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밀대로 수성 페인트칠을 하고, 나무로 된 의자를 살 돈이 없어서 톱밥을 눌러서 찍은 가짜 나무로 된 무지무지하게 무거운 물이 묻으면 퉁퉁 불기 시작하는 나무 의자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제가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절대 자기가 원하는 사람은 집사를 시키지 않는다.’입니다. 왜? 저는 교회에서 봤습니다. 여전도사들이 심방을 가는데 “집사님, 왜 요즘 교회에 안 나오세요?” 교회를 안 나오면 집사가 아닙니다. 집사라면 그런 전화를 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셨다든지 아니면 이민을 가셨다든지 하면 말이 됩니다. 그런데 교회 앞에 사는데 전도사님에게 그런 전화를 받는 집사라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제까지 한 번도 임명한 적이 없습니다. 아니 임명한 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찍어서 발표한 적이 없습니다. 집사하고 싶은 사람들은 신청하세요. 이 사람들은 교회 출석과 신앙생활과 모든 것을 볼 때 다시 검토를 해봐야지만 집사 자격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방을 붙여 신청서를 제출하면 집사를 하고 10년 동안 신청하지 않으면 아직까지 성도입니다. 우리 교회가 잘나서 그러느냐?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맞을까요? 하나님의 직분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반문하고 싶은 것입니다. ‘꼭 집사가 되어야지만 신앙생활이 가능한 것은 아닌데 왜 그렇게 되시고 싶은가요? 그냥 형제자매로 불리면 명칭도 젊고 신선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좋은가요?’ 권사님들이 모여 있는데 그중에 한두 분은 순간적으로 집사인지 권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매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다니면서 ‘나는 자매다. 우리 담임목사님이 나를 자매라고 불러주었다.’ 이렇게 사모하는 명칭인데 그것은 놔두고 굳이 집사가 되려고 합니까? 지금도 나는 늦지 않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카톨릭에서 신부가 될 때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새에서 보셨지요? 십자가를 지고 엎드려서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지금 이 길은 너무 힘든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에 원하지 않으면 일어나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교육 받은 거 그거 그냥 했다고 치고 동기가 무엇이냐? 교회에 가서 그 직함도 없어서 그것은 아니잖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그런 것이 집사가 되는 동기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권사님이나 안수집사 장로님들은 말씀을 드립니다. 이민을 오셨거나 아니면 교회 목회자가 이단으로 빠졌거나 교회 전체가 이단으로 넘어갔거나 교회가 문을 닫았거나 아니면 도저히 주일날 예배 출석할 수 없는 먼 곳으로 이사를 갔거나 이러한 이유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에는 여러분들은 교회를 떠나시면 안 되었던 분들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항존직입니다. 항존직이 될 때는 ‘이 교회와 나는 나의 여생을 함께 하겠습니다.’ 그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도장을 찍고 그 직분을 받아야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의 교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갈 수 없으면 이제 이 교회가 자기 인생의 마지막의 교회가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오늘 교육을 받고 그 다음에 여러분 마음에 깊이 각오를 하고 집사는 집사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 몸같이 전적으로 섬기기 위해서 집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맘 상하게 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렇게 엄격하게 해도 집사가 되었는데 아무 일도 안 합니다. 그리고 주일예배 간신히 달랑 나옵니다. 전도, 말씀, 봉사 아웃리치 아무 것도 안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실히 집사 교육을 받고 집사가 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을 해야 한다는 목표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 나이에 어디에 가서 (이런 대화를 합니다.) “종교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다녀요.” “저도 교회 나가는데.” “그럼 안수집사님? 장로님?” “아닌데요.” “그럼 집사님이세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닌데요.” 이렇게 되면, ‘이것은 뭐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두 번 그런 일을 당하면 ‘아. 이것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고, 집사가 되어야겠다는 목표를 가집니다. 젊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헐.’입니다. 동기를 올바로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는 집사가 되었으면 그다음에 교회가 ‘무엇을 좀 섬기십시오.’ 하면 ‘네.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쓰십시오.’ 그렇게 하겠다는 서약이 ‘집사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직장 잘 다니는 사람에게 평일 날 와서 밤을 세라든지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 자기 양심상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못 합니다. 그것이 ‘못 해 신앙(모태신앙)’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해보다도 열심히 제직 교육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여러분들은 성실하게 교육을 받으셨으니까 여러분 중에는 그런 분들이 없게 이 집사의 유효기간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1년입니다. 물론 또 내년 11월에 똑같은 교육을 받으면서 당회에 면접을 받고 그렇게는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매년 다시 임명합니다. 그러면 그 명단에 없으면 집사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내가 이것을 받은 것을 정말 깊이 생각하고 예전에 교회에서 충성스럽게 살았으면 여기에서는 보다 더 빛나게 그래서 내가 예전에 있던 교회 이름을 높이도록 살아야 될 것이고 처음 집사가 되시는 분들은 이제 처음이니까 첫 발자국을 잘 드려놓고 집사다운 집사가 되어야지만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제목은 제직의 영적생활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나무의 뿌리가 깊으면 그 나무는 건강합니다. 사람이 둘이서 껴안을 정도의 버드나무 같은 경우 물을 하루에 12드럼통을 끌어당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봄에 고로쇠 물 올라가는 소리를 청진기 대고 들으면 ‘찌르르찌르르’ 소리가 납니다. 청진기 안대고 귀를 바짝 대고 들어도 물 올라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이렇게 늦게까지 교육을 받고 또 여러분들이 제직이 되었으니까 열심히 봉사를 할 것입니다. 교구에서도 부지런히 여러분들의 이름을 불러낼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심의 은혜에서 열심히 봉사해야지만 내년도 제직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이 무엇이냐면 뿌리가 있어야지만 올라옵니다. 그럼 뿌리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그런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받는 것을 영적생활이라고 합니다. 영적생활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아주 쉬운 말로 ‘은혜를 받았다.’라고 말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런 은혜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그 일어난 은혜는 우리 안에서 잘 유지될 수 있을까? 이것이 비밀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 생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에서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언젠가는 지금은 비록 그렇지 않더라도 시들시들해지면서 결국에는 신앙에서 미끄러지거나 아니면 교회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거나 아니면 또 자기에게 맞는 교회를 찾아 떠나는데 벌써 일곱, 여덟 번째 아닙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죽을 때는 장례를 치러줄 교회가 없습니다. 왜 어디 확고하게 속한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새 교회가 냉정합니다. 출석하지 않던 사람이 장례 치러 달라면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왜? 교회가 어느 정도 크면 너무너무 장례가 많으니까. 이것은 제가 최근에도 본 실화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연세되신 분이 한 교회에 다니시다가 요양병원에 가서 오랫동안 계셨습니다. 마지막 인연이 닿은 교회는 그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연락해서 장례를 치러달라고 하니까 교회에 안 나온 지 너무 오래되어서 장례를 치러드릴 수 없다고 칼같이 딱 잘랐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서 지내드렸습니다. 그분의 자녀가 우리 교회에 나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들로 남고 싶습니까? 아직 파릇파릇하고 젊었을 때는 그래도 이 교회 저 교회 다는 것이 아직은 좀 덜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이 들수록 사람의 눈에 하나님의 눈에 영혼의 방황으로 비춰집니다. 그럼 어느 교회가 그렇게 자기에게 완벽한 만족을 줄 수 있을까? 예전의 다니던 교회도 좋았으니까 선택을 했잖아요.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찬양)
그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배에 은혜를 받지 못하면 그 교회에 제직이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오래 있을 교회가 아니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배에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예배를 어떻게 해야지 은혜를 받을까요? 예배드리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서 주님을 만나고 가야겠다. 은혜를 받고 가야겠다.’ 깊은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일주일동안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설교자를 위해 기도하고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예배당에 오는 것은 그리고 예배에 열중하는 것 하나님이 아니라 설교자의 재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예배의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예배에 대해서 배운 것처럼 그런 원칙을 갖고 예배생활을 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배에서 어떻게 은혜를 받아야 될까요? 예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찬송을 통해 기도를 통해서 심지어는 축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통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가장 하나님이 그 예배시간에 우리를 만나주시는 가장 중요한 방편은 설교시간입니다. 그 설교시간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이 교회에 와서 새롭게 깨달아야 하는 것은 지성을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지성은 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은 영어로 ‘mind’ 혹은 ‘intellect’를 말합니다. 기독교는 지성을 통해서 신앙이 잡혀가는 종교입니다. 그러면 지성이 꺼져있으면 30년을 교회를 다녀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접근을 못합니다. 마음이 뜨겁고 눈물이 쏟아지고 이런 저런 체험을 하지만 마지막 삶의 열매는 불신자와 거의 비슷합니다. 삶 전체가 요동치는 것입니다. 유튜부에서 ‘말레이시아 쓰나미’를 검색해보십시오. 도시 전체가 빌딩으로 다 서 있는데 이 밑에서 액상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쓰나미가 지진이 일어나면서 마그마가 올라오면서 이것이 수맥이 떠지고 하면서 속에서 땅 자체가 질축 질축한 밀가루 풀빵 반죽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진과 함께 진동을 하면서 이동을 합니다. 보면 도시 하나가 큰 마을이 빌딩이 큰 빌딩들이 빽빽하게 들어섰고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게 한꺼번에 이동합니다. 물에 쓸려 내려가듯이 떠내려갑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지성을 헌신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공중의 새를 보라”(마 6:26) 그리고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 6: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이 무엇인가요? ‘지성’입니다. 성경이 신약성경에서 여러 번 사람을 책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알지 못하느냐?’ ‘알지 못하였느냐?’ ‘알지 아니하였느냐?’ ‘알지 못하였느냐?’ 계속 나옵니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요? 알지 못하는 것이 결국은 죄를 초래하고 인간을 망가트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멀리 떠나가게 만든 것입니다. 무엇을 하라는 것인가요? ‘알라.’라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죄악입니다. 죄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처음 가르쳐주는 교리입니다. 세상에서는 모르는 것은 죄가 경감이 됩니다. ‘제가 무지하였습니다.’ 그러면 처벌이 면제가 됩니다. 신앙에서는 모르는 것은 죄입니다. 왜 모르는 것이 죄일까? 알지 않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왜? 아는 일이 힘드니까 알지 않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가요? 결국은 깨달은 것이 없으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수없이 많이 나오는 것이 ‘생각하라. 생각하라. 알지 못하였느냐? 알지 못하였느냐? 기억하라. 기억하라.’ 무엇으로 기억하는 것일까요? 머리로 기억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성입니다. 예수님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두 번째 나오는 뜻이 지성입니다. ‘디아노이아’ 그 뜻이 지성입니다. ‘지성을 드려라.’ 그 이야기입니다.
따라 해보세요. ‘나는 공부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 무슨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을까요? 첫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공부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이 누구인지? 세 번째 세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이 무엇일까? 무엇일까? 생각하고 있으면 머리가 까맣고 예쁘장한 청년이 할머니가 되어가도 못 깨닫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정신적으로 방황하면서 결국은 무지 속에서 인생이 끝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배는 무슨 시간이냐?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주시는 시간인데 하나님이 지성의 다리를 타고 건너오시는 것입니다. 지성의 다리를 타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 ‘얘야’ 하고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이 이 손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의 뜻을 보이시고 이 말씀은 인간에게 이해를 요구합니다. 지성을 타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 신앙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까? 근데 믿음도 지식을 얻는 수단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이성으로 생각을 해도 예수님이 어떻게 동정녀로 탄생하셨는지 이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셨을지 인간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종교가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을 하신 분을 내가 만났기 때문에 그분을 너무 사랑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명할 수 없는 지식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 그 자체가 지성의 활동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배시간에 가장 맑은 정신으로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에 기본자세는 부동자세입니다.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눈꺼풀 움직이는 것 정도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부동자세입니다. 자꾸 움직이는 자세는 정신을 흩트리기 때문입니다. 똑바로 앉아야 합니다. 그럼 고문이냐? 고문이 아니라 그것이 기꺼운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강대상에 올라가서 한 시간만 예배를 드리면 기절을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많이 낫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젊고 예쁜 자매들이 예배시간에 하품을 할 수 있습니다. 하~. 충치가 몇 개인지 다 보입니다. 그거 교양 있는 사람 모임에서 가서 한번만 그러면 정말 교양 있는 사람 다시 만나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양 있는 사람보다 더 높으신 분입니다. 예배시간에 슬그머니 신발 벗고 그 냄새를 누구에게 풍기는 것입니까? 진짜 유럽이나 미국사람이 모인 모임에서 한번만 그러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도전적인 것으로 봅니다. 도발적인 행동으로 봅니다. 딱 부동자세로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예배드리는 자세가 대통령 앞에 있는 것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나요? 예배를 부동자세로 하는 이유는 설교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만 가르쳐주는 비밀이지만 나는 25년 동안 열린교회를 목회했지만 앞자리에 앉아서 은혜를 못 받는 사람은 너무 소수였지만 뒷자리에 앉아 은혜 못 받는 비율이 갈수록 짙은 색으로 갑니다. 그럼 나 같으면 아침에 일찍 와서 첫 자리가 고개가 아프면 세 번째 자리 정면에 앉아서 눈동자는 설교자를 보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설교할 때 원고를 보면서 세 줄을 읽은 적 있습니까? 왜요? 저는 못해서 안하는 줄 아세요? 왜 내가 지금 이 강의를 똑같은 내용으로 한다고 해도 고개 숙이고 하면 재미가 있습니까? 재미없지요. 눈을 보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척할 때부터 원고를 보지 않고 설교합니다. ‘준비를 안 한 것이 아니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개척교회 설교 준비할 때보다 25년 지났는데 정확하게 3배정도 시간이 더 걸립니다. 몇 시간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걸립니다. 그러면 한번 보세요. 제가 5600편을 설교한 것이 남아있는데 이정도면 숙달 될만 하지 않나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한 시간 못 때우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설교자는 진액을 짜서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심지어 긴 세월동안 자기 자신이 온몸으로 실험하고 마지막으로 기도하면서 설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친구한테 중요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딴청 피우고 일어났다 앉았다 하고 이러면 이야기 할 일이 있을까요? ‘다시는 너와 이야기 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안하겠어요? 설교자는 왜 예외일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설교시간에 설교자를 바라보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눈을 맞추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제가 만약에 20분만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서 강대상에서 강의하며 원고를 읽으면 쳐다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시한다고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럼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딱 쳐다보잖아요. 사람이 날 안 봐. 그럼 딱 지금 정도에 ‘저 사람이 이 교회 설교에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일까? 부산을 떨어. 아 신천지에서 왔구나.’ 왜 어떻게 그렇게 안들을 수 있습니까? 바로 옆에 사람은 눈물을 흘리는데 이상하지 않나요? 그래서 여태까지 어떻게 예배를 드리셨든지 간에 이 교회에서는 지금 말씀드린 것이 성경적인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통해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항상 새롭게 깨닫는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교회에 그 여러 지체들이 그냥 불타는 마음으로 교회에 왔는데 너무 설교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설교가 너무 어렵다고 그러고 지금은 좋은 시절입니다. 50분밖에 설교하지 않잖아요. 아주 길어야 60분이잖아요. 예전에는 기본이 설교만 100분이였습니다. 보통 뜻을 세운 사람이라면 이 교회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보통이 90분 약간 길면 100분 더 길면 110분 그리고 기록은 1998년 9월30일 주일 낮 예배 2시간 24분이 기록이었습니다. 모든 교인과 설교자가 한 시간을 착각했습니다. 설교만 2시간 24분. 아무도 안 움직였습니다. 나도 사람인데 자꾸 부스럭거리고 벌떡벌떡 일어나고 등을 긁으면 나라고 시간가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교회가 커지니까 교회가 커서 심지어 디자인이 예뻐서 교회에 온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가 예쁜 것은 사실입니다. 안 예뻐요? 맞지요? 기본 디자인은 제가 한 것입니다. 정말 제가 한 것입니다. 공간 하나도 안 바꿨습니다. 재건축했는데 화장실 위치 옮긴 것 외에는 거의 그대로입니다. 제가 1500번을 오르내리면서 디자인한 것입니다. 색깔도 거의 모두 제가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제 허락 없이 아무거나 붙일 수 없습니다. 왜? 그래야지만 통일이 되잖아요. 물론 교회가 예쁩니다. 그것은 저도 압니다. 그러나 그게 교회 오는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에 와서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예전보다 더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 드렸듯이 그래야지만 아무리 무릎을 꿇고 앉아서 껌을 천개를 띄어도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면 이교회를 내 교회로 생각안합니다. 동의되시지요? 껌 띄어보세요. 이 교회가 내 교회라는 생각이 드나. 앞에 이야기한 김목사님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는 김성구 형제가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도 이 교회가 내 교회인가 하는 느낌이 덜 들었는데 껌을 띄다보니까 내 교회라는 느낌이 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예배시간에 은혜를 받았으니까 껌을 띌 때 이교회가 내 교회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지 예배시간에 맨날 졸고 졸다가 성경 떨어뜨리고 심지어는 의자에서 미끄러지면 껌을 천개를 띈들 그게 내 교회라는 느낌이 들겠느냐 이것입니다. 아멘. 당연한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셔야 합니다.
특히 남성분들은 여성분들보다 일반적으로 신앙의 민감성이 확률적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사람의 비율을 보면 남자가 훨씬 많습니다. 이해됩니다. 일주일동안 얼마나 고달팠겠어요. 그리고 회사에서 쪼이고 사업에서 힘들고 교회 왔지요. 인테리어는 편안하지요. 의자는 푹신하지요. 설교는 소리 지르지 않고 조용히 조용히 나오지요. 잠자기 너무 좋은 환경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요 진짜 자녀교육 잘 시키는 엄마는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어려서부터 말귀를 알아듣도록 교육을 합니다. 진정으로 자식이 자식다운 인간이면 소리를 지르고 막대기를 들어야지만 겨우 사태가 어렵구나 생각하는데 몇 학년 때까지 그렇게 교육할 것입니다. 인터넷 들어가서 1993년 교회 개척하고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직전까지 설교를 들어보세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음으로 시작해서 30% 정도 1.5배속으로 빠른 속도로 그리고 더 길게 그리고 고속으로 끝납니다. 오죽했으면 그때 설교를 청취했던 사람이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마지막에는 필기를 감당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때보다 지금은 마음이 식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않는 것인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잘 사람은 잡니다. 안들을 사람은 안 듣습니다. 예배 속에서 설교를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 1층 뒤에서 예배드리지 마세요. 왜 거기서 예배를 드립니까? 아니 3층에 누가 자리를 맡아 놓은 사람 없습니다. 가방 가져도 놓은 거 다 치웁니다. 일찍 오세요. 그리고 정중앙에서 예배드리세요. 앞자리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집중을 하면서 은혜를 받으세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은 회개와 믿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셔야 합니다. 제가 34살에 신학교수가 되고 39살에 교회를 개척했고 교회 개척하기 전에 이미 설교자로써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성장반에서 공부하는 십자가를 경험하라는 원고가 그게 제 나이 35살에 16, 17, 18 고등학교 1,2,3학년 학생들을 모아놓고 설교한 원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8년 전의 원고입니다. 금요일 밤마다 기도원에 가서 밤을 세워서 원고지에 쓴 것입니다. 그게. 수기로.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려요. 그렇게 설교를 하면서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고 이제까지 왔습니다. 솔직히 25년 동안 담임 목회를 하고 200만권 책을 보급을 했습니다. 여태까지 무슨 책이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네 못 들었습니다. 설교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내용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는 안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설교에 은혜를 받고 변화된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 청년들이 지금 안수집사 권사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회심한 사람들이 우리교회 장로님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은 아무도 이교회 와서 깊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보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봤겠습니까?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지금은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그 당시에는 설교 테이프를 지하실 교회에서부터 1000원씩 팔았습니다. 부지런히 만들었습니다. 지하실 교회 1996-1997년도 1년에 테이프를 10만개를 팔아서 1억 원 어치 매상을 올렸습니다. 교회예산이 8천만 원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 테이프를 팔아서 교회를 도왔습니다. 처음 나온 게 지금 여러분이 매달 받아보는 열린 신문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말씀을 사랑했는지 신방을 가면 그 테이프가 기본이 라면박스 2개였습니다. 하나도 안 깎아줍니다. 그리고 다 받았습니다. 물론 받은 돈은 선교사업과 교회를 위해서 썼습니다. 10원 하나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1월 마지막 사경회가 끝나면 말씀 뷔페를 합니다. 설교 테이프를 여기서부터 뺑 돌려서 복사를 해서 산처럼 쌓아놓고 해설을 하면 그 해설을 듣고 사람들이 바구니를 사서 넣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부요.’ 여러분 그 당시에는 150만원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말씀에 거의 미친 사람들이였습니다. 그 뷔페를 이 교회당에 와서도 몇 년 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되면서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 대신 그렇게 애지둥지 해서 말씀을 듣던 열기는 그때보다 못합니다. 그렇게 수천 개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예배시간에 심지어는 회개를 하다 회개를 하다 졸도를 했습니다. 안 믿어지지요? 지금도 증인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다닙니다. 설교를 듣다가 너무 회개를 하다가 졸도를 합니다. 그런데도 미끄러집니다. 놀랍지요.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아무리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설교를 듣고 인생이 여러 번 뒤집어져도 미끄러집니다. 그러면 안 미끄러지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것을 붙들고 집요하게 죽도록 기도하는 사람은 안 미끄러집니다. 그런데 그걸 안 붙드는 사람은 미끄러집니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 훈련 성경공부 손잡고 나오는 부부 중에 이혼한 부부 많습니다. 그런데 둘이 손잡고 새벽기도 나온 부부치고 아무도 이혼한 부부는 없다고 합니다.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새벽기도를 나올까? 그것은 여러분 자유입니다. 매일매일 호흡하듯이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는 시간이 없으면 제가 쓴 모든 책을 머릿속에 넣고 다녀도 미끄러집니다. 기가 막히게 사탄이 다리를 걸어서 보기 좋게 뇌진탕을 걸릴 도록 쓰러트리는 것을 수없이 봤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의 비밀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얻고 옛날의 은혜를 받았어도 왕년에 받은 그것 때문에 자기가 서있다고 못하게 하시고 매일매일 기도하면서 주님 나를 붙들어 주시는 구나 그 신앙 속에서 살게 하시려고 기도하시게 합니다.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1년은 정신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2년쯤에는 뭔가 시들먹하고 3년쯤에는 짜증나고 4년쯤에는 괜히 혼자 열 받으면서 또 어떤 교회를 희생시키기 위해서 또 떠날 것입니다. 그런 삶은 우리에게 너무 불행한 삶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를 해야 합니다. 간절히. 열렬히. 그리고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금요기도회에 나와서 기도에 불을 붙이고 그 불을 가지고 살고 또 예배를 드리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하는 것입니다. 아멘. 꼭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세 번째는 성경을 성실하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아주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학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충격이고 짜증이 날것입니다. ‘아니 힘겹게 교회를 나온 것 만해도 나는 내가 너무 대견한데 무슨 또 공부를 하라고 할까? 여기가 신학교도 아니고.’ 신학공부는 신학생이 하는 공부가 신학공부가 아니라 신학공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신학공부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라틴어 하나를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봤지요? ‘코기토 에르고 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스투데오’ ‘공부한다.’ 입니다. ‘공부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공부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인간의 의무입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인간은 짐승보다 훨씬 못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 강아지 코코 개는 늘 개입니다. 근데 사람은 늘 사람이 아닙니다. 잘 살면 사람 같지 않고 천사 같습니다. 못살면 개만도 못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죄는 도둑은 어두운 시간을 좋아 할까요, 밝은 장소를 좋아할까요? 죄는 도둑과 같아서 여러분들이 무지하고 영적으로 어둡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집요하게 방해를 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설교시간에 계속 자면 뭐가 끼었다고 했습니까? 졸음마귀. 졸음마귀를 물리치게 해주시옵소서. 그 이야기에 100% 동의하지 않지만 졸음마귀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그게 순수한 인간의 정신작용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선조는 꿰뚫어 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도둑이라고 생각하면 무엇을 훔치려고 들어왔는데 누군가 툭 치고 불을 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탁 숨습니다. 언제까지?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영원히 불이 안 껴질 것 같으면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CCTV에 다 찍히는데.
여러분, 예배 은혜를 못 받게 하고 말씀을 읽어도 아무 깨달음이 없게 하고 이런 것들이 이게 다 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대단히 실망스러운데 우리교회 1년 이상 다니고 도서관에 가봐서 대출받은 분이 5분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이런 강의를 마지막으로 도서관에서 해야 합니다. 무조건 대출해서 가야합니다. 줄을 뜨고 해야 합니다. 가서 책을 읽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서 이쪽 서가부터 쭉 만져보세요. 6천권을 갖고 거기 안내하는 사서까지 있는 교회가 우리 정도 규모에서 한국에 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교인들에게 기증받은 책 하나도 없습니다. 안 받습니다. 책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받습니까? 안 받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전부다 제가 선정해서 꽂은 책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위험하지 않습니다. 읽지 못하고 시간을 내서 만지면서 ‘아무것도 읽은 책이 없구나.’ 확인해보세요. 도서관 전체를 누비면서 몇 권을 읽었는지 한번 꼽아보세요. 꼽아도 답이 안 나오는 게 아니라 그냥 만화책을 포함해서 읽은 책이 권수가 없습니다. 책꽂이를 집어보면 시간이 걸리니까 ‘없구나. 없구나’ 그리고 마지막에 책꽂이 다 만지고 난 후 ‘아무것도 없구나. 그리고 음 난 누구일까? 그리고 이속에 무엇이 들었을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책을 안 읽으니까 설교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렵긴 무엇이 어렵습니까? 여러분 첨단 전자제품 하다못해 자동차를 하나 사도 매뉴얼이 이렇게 두껍습니다. 두 권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것은 인생사용 설명서입니다. 여러분 기계가 복잡하겠어요? 인간의 영혼과 사람이 복잡하겠어요? 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이런 무독서 생활 정신을 저당 잡힌 그런 생활 아무거나 여기를 밞고 지나가도록 개방했던 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번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지만 열린교회에서 초등학교 때 회심하고 그리고 중고등부 올라간 학생들과 이야기해보면 여러분들보다 더 뛰어난 영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입니다. 지지난주 고등학생들을 데려다 놓고 고등학생들이 열렬히 원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의 특강을. 첫 번째는 카푸카의 변신을 했고 두 번째는 공각기동대를 해설했고 요번 주에는 마루쿠스 아우넬리우스의 명상록을 했습니다. 눈동자하나 흩트려 트리지 않고 두 시간 동안 주목하고 강의를 듣습니다. 끝나고 나서 소감이 A4용지 빽빽하게 한 장씩입니다. 그런 학생을 놓고 여러분들이 대화를 해보면 무지함을 깨달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하지 않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지성을 헌신하시 않는 것은 지독한 게으름이고 그리고 마치 무엇과 같냐 하면 불꺼놓고 딴 짓 할 때 엄마가 와서 불을 켤 때 아이들이 짜증을 내잖아요. 생각해보세요. 불을 껌껌하게 꺼놓고 거기서 아들 녀석이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엄마가 불을 딱 켭니다. 무엇을 봤겠어요. 뻔하지 않나요? 딱 감춰요. 보세요. 이게 공부를 해야 됩니다.
공부의 첫 비결이 무엇이냐면 지금 하고 있는 공과 공부를 철저하게 하는 것입니다. 덜렁덜렁 나와서 공과공부에 앉아서 구역모임에서 딴 이야기를 해서 구역장 힘들게 하지 말고 가서 철저히 읽고 문제 풀고 그리고 와야 합니다. 거기서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만 열심히 해도 1년에 4권정도 책을 읽어야 합니다.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 670페이지짜리 제작년 공과책이였습니다. 3000권을 사서 전 교인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기독교 고전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에 설교시간에 인용되는 책들 이런 책들 아예 도서관에 가서 제가 처음 열린교회에 왔는데 무슨 책을 읽으면 좋겠습니까? 제 책만 읽어도 3년은 읽어야 합니다. 제가 담임목사가 쓴 쉬운 책부터 어려운 책까지 차례차례 읽으세요. 여러분들은 제가 쓴 책에 1/10도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설교는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나혼자산다’, ‘먹방’ 이런 것 보면서는 이해가 너무 잘됩니다. 수준이 거기까지밖에 되지 않으니까.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어느 교인이 간증문을 썼습니다. 열린교회 오기 전에도 자기가 신앙이 있었고 열린교회 온 다음에도 신앙이 있었는데 딱 잘라 말하자면 그때는 트로트 신앙이었고 지금은 클래식 신앙이다.
생각을 깊이 하면서 기독교의 큰 힘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기둥이 두 개가 있는데 사상과 윤리입니다. 이 사상은 지성의 헌신입니다. 이 윤리는 의지. 당연히 여기에는 감정도 들어갑니다. 감정은 의지의 일부분이니까. 이 두 개를 이것은 사상입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잘 믿고 공부하고 책을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아주 단호하게 무슨 책이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책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당연히 읽어야 합니다. ‘오늘 뭘 좀 드셨어요?’ ‘흰밥이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당연히 흰밥은 밥상에 올라가지요. 아내가 미역국을 끓여주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밥이 이미 들어간 것입니다. 책을 손에 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책을 구입해야 합니다. 읽을 시간이 없으면 사서 모아 놔서 고물상에 주세요. 그래도 여러분들은 기독교 출판이 돌아가도록 이바지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책시장이 없어집니다. 사서 꼭 읽으세요. 그리고 애들이 신앙교육이 되지 않는데 잠시 후 현실로 닥칩니다. 이게 교회 다니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식이 불교신자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엄마 아빠와 맞짱 뜹니다. ‘나 이제 기독교 신앙을 버릴래.’ 여러분들은 ‘이놈의 자식은!’하지만 이미 큰 것입니다. ‘용돈을 안준다.’ 이미 대학생이 되었는데. 그것은 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지 통하는 것이지 고등학생만 되도 ‘너 용돈 안준다.’ 하면 ‘예이. 치사 빤스다.’ 그리고 말 상대도 안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그럼 여러분 자녀들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엄마가 앉아서 TV나 보고 희희덕거리고 앉아 있으면 이 아이는 가서 핸드폰 켜고 그런 거나 보면서 킬킬 거리면서 지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엄마 아빠 수준으로 똑같이 됩니다. 정 자세로 딱 앉아서 책을 읽습니다. ‘구원과 하나님과의 계획’, ‘죄와 은혜의 지배’,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 ‘인생과 잘사는 것’. 너 톨스토이는 인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니? 우리 엄마가 이런 교향이 어디서 나왔을까? 한 두 번은 우습 게 볼지 모르지만 1년만 여러분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않고 들어와서 조용히 책을 읽고 묵상하는 아빠 엄마의 얼굴을 보면 아이가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들 자녀들을 위해서도 여러분들은 책을 읽어야 합니다. 체계적으로 신학공부를 해야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해 나가야 합니다. 설교만 잘 들어도 인문학 책도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면서 읽어나가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봉사해야 합니다. 오늘 김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봉사해야 합니다. 열심히 집사 자체가 영어로 ‘deacon’입니다. 희랍어 ‘디아코니아’에서 온 것입니다. ‘디아코니아’가 무엇이냐면 봉사하는 것입니다. 특히 뒤에다 ‘트라페자에스’를 붙이면 밥상을 차리고 식모처럼 종들이 상전 집안을 섬기고 옛날에 부녀자들이 못하다고 봤잖아요.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 나를 그렇게 안보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성 평등주의자라고 나는 스스로 생각합니다. 올해 남편에게 복종하라 설교를 들었습니까? 충격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해를 해야 충격을 받지 성경 여기저기를 오가면서 이야기를 풀었는데 아주 중요한 저의 남녀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가 담겨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교회에서는 파격적인 설교입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물론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제한된 범위 안에서 신앙을 위해서만 입니다. 여자가 옳으면 남자도 복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 그것은 우열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성을 학대하고 이런 것을 보면 분노가 일어납니다. 어느 시대인데 그렇게 사느냐입니다. 요새는 거꾸로 돼서 여자가 남자를 때린다고 합니다. 실제로 ‘한국 맞고 사는 남자들 연합회’가 있습니다. 이것은 뻥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그렇게 싸이코 같은 여자도 많습니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여자를 본받지 말고 디아코니아 하는 남성과 여성이 되어야 합니다. 집사라는 명칭이 저기서 온 것입니다. 섬기지 않는 사람은 집사가 아닙니다. 절대로 무위도식하지 마세요. 딱 끝나기 전에 나 교사할께요. 아마 여러분들은 자격이 안 될 것입니다. 안 받아줘요. 교리반 수료자 이상이 되어야 할 수 있습니다. 가서 신발 정리하고 보조교사는 허락해 줄 것입니다. 잠시 후 교리반 들어오시겠지만 교리반 안 하면 우리는 마음속으로 아직까지는 교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또 무슨 소리. 집사 교육을 실컷 받았는데 이제 와서 교리반 안하면 교인으로 생각 안 한다니 이게 또 한 단계의 표준을 제공해야지만 여러분들이 도전을 하지요. 거기서부터 다시 출발하면서 신학공부를 해나갑니다. 섬기셔야 합니다. 뭐라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집에서 노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직원이 다 20대였습니다. 저는 40대 후반. 직원들은 20대. 생생했습니다. 우리 교회 직원들 임명할 때 기본적인 기준이 4년제 대학 졸업을 해야 합니다. 그게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지만 마음속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 사랑하고 기본적으로 4년제 대학 나오고 이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그 당시에는 더 많은 청년들이 교회에 직원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때는 직원 임명하면 얼굴과 함께 학력과 교회의 섬김 봉사 이력이 다 떴습니다. 모든 청년들이 보면서 ‘아무나 갈수 있는 자리가 아니구나.’ 했습니다. 진짜 좋은 학교 나오고 열심히 공부하고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일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다니는 직원들에게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정말 많이 훈련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물론 여러분 마음에 덜 드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교회는 아무나 교회 직원으로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깊이 존댓말을 쓰고 존중하고 아무도 여러분들에게 무시를 당할 사람 없습니다. 깊이 존중하고 여러분들은 그분들에게 존중을 받도록 그렇게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섬기셔야 합니다. 하나라도.
마지막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열린 교회에 식구가 되고 은혜를 받았을 때 딱 눈을 떠서 가족부터 시작해서 쭉 이렇게 친한 친구들을 스크린 해보세요. 너무 곤고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따뜻하게 잘 해주세요. 그래서 위로도 해주고 챙겨도 주고 문자도 보내고 밥도 사주고 외로울 때 이야기도 들어주고 그러세요. 그리고 마지막에 신앙생활하자 교회에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데리고 오면 교육자들이 잘 돌보면서 함께 앉아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대리고 왔는데 계속 졸고 졸다가 성경책 떨어트리고 의자에서 미끄러지고 그러면 데리고 온 교인이 덕이 되겠습니까? 진짜 신앙생활을 흐릿하게 하는 사람은 꼭 누구 데리고 와서 자기하고 똑같은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 앞에 열렬히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대리고 와서 그 사람이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거기까지 올라가게끔 만들고야 맙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열혈하게 전도해서 이교회에서 주님 깊이 만나고 그리고 하나님 사랑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