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사
(2009-2010년 설교모음)
감사 1 (2009/11/10 수요예배)
감사 2 (2009/11/22 주일오전예배)
설교기간|2009-201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감사 4 (2009/12/02 수요예배)
감사 3 (2009/11/22 주일오후예배)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감사 6 (2009/12/16 수요예배)
감사 5 (2009/12/06 주일오후)
1. 범사에 감사하는 길(살전5:18) 2000.11.18 수요예배 1
감사 7 (2009/12/23 수요예배)
2. 광야에서 감사함은(시136:16) 2009.11.22 주일오전 9
3. 감사함으로 구함(빌4:6) 2009.11.22 주일오후 17
4. 교제와 감사(빌1:3-5) 2009.12.2 수요예배 21
감사 8 (2009/12/30 수요예배)
5. 은택에 감사하라(시103:2) 2009.12.6 주일오후 29
감사 9 (2010/01/20 수요예배)
6. 교제와 감사 (2)(빌1:3-5) 2009.12.16 수요예배 34
7. 도우심의 돌(삼상7:12) 2009.12.23 수요예배 43
8.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사49:14-15) 2009.12.30 수요예배 53
9.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함(골2:6-7) 2010.1.20 수요예배 62
10. 믿음과 감사(출14:22-24) 2010.2.3 수요예배 75
감 사 1
감사 1 (2009/11/10 수요예배)
감사 2 (2009/11/22 주일오전예배)
감사 3 (2009/11/22 주일오후예배)
감사 4 (2009/12/02 수요예배)
감사 5 (2009/12/06 주일오후)
감사 6 (2009/12/16 수요예배)
감사 7 (2009/12/23 수요예배)
감사 8 (2009/12/30 수요예배)
감사 9 (2010/01/20 수요예배)
감사 10 (2010/02/03 수요예배)
감사 1 2009. 11. 18
범사에 감사하는 길
살전 5:18
I. 본문해설
II. 하나님의 뜻
A. 성도를 향함
B. 그리스도 안에서
III. 범사에 감사함
A. 범사의 의미
B. 감사의 방법
1. 좋은 것 : 자의
2. 나쁜 것 : 섭리
IV. 결론
감사 2 2009. 11. 22
광야에서 감사함은
시 136:16
I. 본문해설
II. 4중의 은혜
선택, 보호․인도․공급
III.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A. 광야를 지남
B. 인자를 경험함
C. 경외케 하심
IV. 결론 : 감사함으로 걷는 길
감사 4 09. 12. 2. 수요예배
교제와 감사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 1:3-5)
I. 본문해설
II. 복음 안에서의 교제
III. 복음 속으로의 교제
A. 회심: 복음의 시작
B. 복음을 알아감
1. 복음의 내용을 경험함
2. 복음의 교리를 배워감
3. 복음의 정신을 따라 삶
IV. 결론: 교제와 감사
감사 6 09. 12. 16. 수요예배
교제와 감사 2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 1:3-5)
I. 본문해설
II. 복음 안에서의 교제
III. 복음 속으로의 교제
A. 회심: 복음의 시작
B. 복음을 알아감
1. 복음의 내용을 경험함
2. 복음의 교리를 배워감
3. 복음의 정신을 따라 삶
IV. 결론: 교제와 감사
감사 7 2009. 12. 23 수요일
도우심의 돌
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I. 본문의 배경
II. 하나님의 도우심
A. 모여 기도할 때
B. 금식할 때
C. 회개할 때
III. 도우심을 기념함 : 에벤에셀
IV. 결론
감사 8 2009. 12. 30 수요예배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사 49:14-15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I. 본문해설
II. 낙망하는 자의 불평
III.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A. 하나님의 사랑
B. 기억과 사랑
IV. 결론: 신실하신 하나님
감사 9 2010/01/20 수요예배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함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I. 본문해설
II. 그리스도인의 삶
A.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함 - 기독교는 삶의 종교
1. 그의 가르침 안에서
2. 그의 모본 안에서
3. 그와의 연합 안에서
B.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함
1. 뿌리를 박음
2. 세움을 입음
C.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함
Ⅲ. 결론
감사 10 2010/02/03 수요예배
믿음과 감사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출 15:22∼24).
Ⅰ. 본문의 배경
Ⅱ. 변하는 마음
A. 감사와 찬송: 홍해
B. 원망과 불평 : 마라
Ⅲ. 믿음과 감사
Ⅳ. 결론
감 사 1
감사 1 (2009/11/10 수요예배)
감사 2 (2009/11/22 주일오전예배)
감사 3 (2009/11/22 주일오후예배)
감사 4 (2009/12/02 수요예배)
감사 5 (2009/12/06 주일오후)
감사 6 (2009/12/16 수요예배)
감사 7 (2009/12/23 수요예배)
감사 8 (2009/12/30 수요예배)
감사 9 (2010/01/20 수요예배)
감사 10 (2010/02/03 수요예배)
1.범사에 감사하는 길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좋은 소문이 많이 들리던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여러 가지 가르침으로 권하고 난 후에 이제 이 사도 바울은 더욱 믿음을 굳게 하고 깨어서 신앙의 벽을 지키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편지 말미에 우리가 아는 유명한 세 가지의 요청,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II. 하나님의 뜻
우리가 오늘 살펴볼 것은 이 세 가지 중 마지막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사도가 강조해서 말했는데 이것은 사도가 자기의 회중들에게 무엇인가 신앙의 의무를 생각나게 할 때 가장 강도 높은 권고 상황이었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런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제일 먼저 “성도를 향한 뜻”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고 사랑을 입고 지금도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서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시는 성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감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A. 성도를 향함
특별히 사도는 이 하나님의 뜻을 성도를 향한 뜻이라고 규정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 가운데 매우 자주 등장하는 이 후렴귀와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가 여기도 등장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하는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사용할 때는 거의 형식화된 가운데 그 말에 담겨져 있는 깊은 의미와 뜻을 모르는 채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중요한 후렴구같이 이 구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감사하는 것인데 이 뜻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는데 이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것이 결국 무슨 뜻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B. 그리스도 안에서
우선 첫째는 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에게 우리 성도가 누구인지 생각나게 만들어줍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을 보여줍니다. 즉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하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그 죽음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게서 구원의 도리를 배울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죽음이 내포적 대신의 죽음이었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내포적 대신’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쉽게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 때문에 형벌을 받으실 그때에 우리를 당신 안에 끌어안고 우리와 당신이 하나 된 가운데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당신에게 전가시키셔서 그래서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고난은 당신이 대신 당하신 죽음, 그래서 그 고난의 유익을 우리들이 누리게 하신 것을 가리켜 내포적 대신이라고 가르쳐드렸습니다. 내포적 대신의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엔 크리스토’ 즉 “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하는 것은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내포적 대신의 죽음을 생각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끌어안고 대신 내포적 대신의 죽음을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너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한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성도들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 구속의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한다. 어디에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두 번째 사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놓고 광야에 두신 다음에 잘 살 때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잘 못 살 때는 주님이 멀리 떠나시고 버렸다, 거두어들였다, 버렸다, 거두어들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신자를 잘 살 때는 붙였다가 잘못 살 때는 떼어냈다. 떨어졌다, 붙었다, 그러지 않습니다. 한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붙들고 계십니다.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를 위하여 구속하사 그를 당신과 연합시킨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떤 일도 그리스도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때도 사실은 하나님의 허용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일은 훌륭하고 좋은 일이 아니지만 따라서 그렇게 우리들이 죄를 짓고 불순종하는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맺으신 이 한번 맺으신 연합의 관계는 끊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너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는 어차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함을 받았고 그분과 연합되어있기 때문에 그분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까닭이란다. 라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신 이 말씀은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우리와의 관계를 생명적인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가 가진 이 관계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생명적인 연합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간에 주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면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결국은 우리의 인생을 이끄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감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III. 범사에 감사함
사도는 이렇게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못 박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이것이 “모든 것이” 이렇게 나옵니다.
A. 범사의 의미
그러니까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게 바로 범사의 의미입니다. 범사는 모든 것, 좋은 것뿐만 아니라 나쁜 것,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난 가슴 아픈 일, 기쁜 일, 즐거운 일 모든 것, 우리가 먹고 마시고 우리의 일생에 일어난 모든 일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의문을 품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여야 한다면 우리가 불순종하고 악을 행한 것으로 인해서도 감사해야 합니까?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악을 행한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 잘못된 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셨던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네 가지 특권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제일먼저 담대함을 가집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다. 라고 하는 담대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하고 죄를 지었을 때는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시니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은혜의 보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명분도 주십니다. 진노의 자식, 마귀의 불순종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분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또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징계 받을 수 있는 특권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친히 택하신 사랑하는 자녀들을 때로는 징계하셔서라도 자기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후사가 되어서 그 아버지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그 아버지 집안에서 상속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불순종하고 잘못한 것 그 자체에 대해서는 내가 이러이러한 일을 했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라고 감히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찾게 만들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얼굴을 구하고 그분의 은총을 받은 그래서 결국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깨닫게 된 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B. 감사의 방법
그러면 이렇게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길이 무엇일까? 나는 이것을 간략하게 두 가지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주실 때 그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1. 좋은 것: 자의
좋은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 일이 맨 처음 발생할 때도 아주 기뻤고 그 일이 우리에게 좋은 유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또한 감사하고 좋은 것을 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것 때문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셔서 또 그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나 같은 인간을 향해 하나님의 그 자비하심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한해를 돌아보면서 아니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의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좋은 것들, 그래서 결국 그 좋은 것들이 우리에게 많은 유익과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건강,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좋은 환경, 주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 좀 마음이 힘들고 상하다가도 일부러 지난 한 해 동안에 내게 일어났던 좋은 일들이 어떤 것일까? 의식적으로 생각해봅니다.
저는 금년에도 감사한 일이 많았지만 작년에 감사한 일 가운데 하나는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는 사람이 내가 옛날에 장님인줄 알면 좀 곤란한데 사실은 장님과 방불했습니다. 그래서 고민거리가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나빠져서 몇 번 차를 타고 올라가서는 안 되는 인도 같은 곳을 올라가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작년 겨울 1월 달인데 어느 날 수술을 했는데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진짜 한 일주일 동안은 진짜 감사했습니다. 저는 달에 토끼가 있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봤습니다. 진짜 있었습니다.
그리고 막 나뭇잎을 한 번도 못 봤습니다. 물론 떨어지는 것을 이렇게 들여다보았지만 나무에 매달려있는 나뭇잎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이렇게 퍼런 덩어리지 그런데 햇빛이 이렇게 비추니까 그(?) 사시나무, 그 다음에 포플라 이런 것들이 반짝반짝 거리면서 비치는 것입니다. 제가 또 굉장히 빛깔에 대해서 예민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시도 많이 쓰고 그래서 상도 받고 그랬는데 안 보이니까 쓸 수도 없고 상상 속에서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어렸을 때, 초등학교 저학년일 경우에는 눈이 나쁘지 않아서 다 보였습니다. 항상 나뭇잎 생각하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시골에 내려가면 여름에 햇살에 반짝반짝 하는 것, 기억나실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햇살에 흔들리면서 반짝반짝 하는 것, 항상 나뭇잎을 보며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것까지 여름이 되니까 다 보이고 나뭇잎도 보이고 여러분 늙은 것도 보이고 다 보였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눈이 좋아지면 십년 정도 일찍 죽어도 좋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바꿀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 수술해주신 의사선생님께 눈 상태를 점검하러 가는데 갈 때마다 내가 넥타이를 하나 항상 가지고 갑니다. 그것도 제일 좋은 것 아껴두었다가 갖고 갑니다. 선생님 정말 제 눈을 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은 저도 많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예? 저는 목사라서 비슷한 편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정중하게 넥타이를 하나 드리고 옵니다.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눈이 두 개 더 있으면 한 번 더 신세를 질텐데, 벌써 수술을 해서, 그런데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때는 마음이 가라앉고 그러다가도 신호대기를 이렇게 보면서 아, 저 빨간 신호등이 하나로 보이니 얼마나 감사한가, 제가 6개로 보였습니다. 제가 오죽했으면 글도 썼습니다. 우울하다고, 그래서 항상 여보, 오늘 날이 흐렸지? 그러면 아니, 그런데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자꾸 감사한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언젠가 글 쓴 책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누가 그랬답니다. 애들이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남자애들이 와일드합니다. 물론 요즘 여자애들도 그렇습니다.만 아주 와일드해서 신발을 석 달이면 험하게 신어서 운동화가 떨어진다고 합니다. 애들 때문에 힘들어서 못살겠다고 투덜거리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동리 아주머니가 사실은 여러 해 전에 아들을 그만 때 교통사고로 잃어버린 자매였습니다. 당신은 행복한줄 알아라, 나에게도 당신처럼 불평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아침마다 일어나라고 이불을 들추고 깨우고 운동화 석 달밖에 못 신고 떨어트려서 나갈 때 등짝을 치면서 살살 좀 끌고 다니라고 잔소리하던 시절이 너무 너무 그립습니다.
사람은 생각한번만 돌리면 정말 좋습니다. 장사꾼이 모이면 장사이야기를 하고 목사들이 모이면 교회를 운영하는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은 많이 없지만, 속상하고 마음이 울적하고 그래서 갔는데 어느 목사가 너무 황당하게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 올 때 위로가 됩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에 저런 사람은 없지, 그래도 우리 교회는 그 정도는 아니지. 계속 물어봅니다. 정말 그래. 그럼요, 정말 그래? 그러면 갑자기 여러분이 너무너무 사랑스러워집니다. 그 정도만 해도 참 대단한 것이지, 어제도 박순용 목사님이 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여러 교회에 강의를 다니는데 열린교회에서 강의할 때가 제일 기쁩니다. 왜요 그러니까 열린교회 교인은 진리를 가르쳐주면 자기가 눈 속에 빨려들 듯이 그렇게 듣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인은 어떤데 그러니까 다른 교인들은 뭔 소리를 하는 것인가, 그러면서 멍하게 쳐다보는데 목사님의 교인 같은 교회는 없습니다. 나도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열린 교회 성도 같은 성도도 없다. 어쩌면 저렇게 안 변할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요즘은 제가 굉장히 성화가 많이 되어서 여러분에게 짐승이라는 이야기를 거의 안 씁니다. 10년 넘었습니다. 사용안한지, 그만큼 제가 이제 많이 성화된 것입니다. 물론 없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돌같이 안 변할 수 있을까. 내가 매일매일 교인들 때문에 절망한다. 이분은 또 다른 의미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일어난 일 들 중에는 명백하게 좋은 일이 일어났고 그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주었는데도 이게 그것을 헤아릴 줄 모르는 것입니다. 받은 복을 왜 헤아릴 줄 모르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더 많은 허황된 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 앞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욕망의 크기를 죽이지 아니하고는 절대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그랬습니다. 끝없이 욕심을 내는 것이 있는데 지렁이에게 두 딸이 잇는데 매일 하는 일이 다고, 다고, 다고 음부도 끊임없이 죄인들을 삼키고 삼켜도 여전히 입을 벌리고 계속 악인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암에 걸려서 죽어가는 환우에게 심방을 갔는데 그러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돈도 필요 없고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제가 남대문에서 지게를 지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사실 남대문에서 지게를 지는 것 굉장히 어렵습니다. 권리금이 굉장히 비쌉니다. 그런데 남대문에서 지게를 지면 그 까짓 것 건강하기만 하면, 저는 건강만 주시면 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사람은 오직 그것 하나를 찾고자 하지만 잃어버린 것이 없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욕망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맨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300만 가량 되는 사람이 광야로 나오고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그게 보통일입니까? 신라면 하나씩만 삶아주려고만 해도 300만개를 삶으려면 물을 얼마나 있어야 하고 한 번 쓰고 버리는 젓가락이 300만개가 필요한데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이 만나로 먹여주십니다. 그런데 자기들도 그게 너무나 감격해서 만나라고 불렀습니다. ‘웬 떡인가’ 하는 뜻입니다. 아니 이것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이게 웬 떡인가. 하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하던 사람들이 새벽마다 만나를 주우러 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차고 서러움에 겨워서 우리는 이제 여기서 만나만 먹고 죽나보다. 그러면서 질질 울기 시작한 것이 진짜 불쌍한 사람들이 되어서 운 것이 아니라 고기를 먹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나니까 감사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욕망의 크기를 줄이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도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에 일어난 일들 가운데 한번 감사한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너무너무 많은 일들이 우리에게 감사한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는데도 감사하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해요, 주님이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것을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나쁜 것 : 섭리
또 하나는 하나님이 얼핏 볼 때 우리에게 나쁜 것을 주셨는데 이것을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좋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랬는데 나쁜 것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서 좋게 사용되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떻게 나쁜 것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셨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지난 번에 태국에서 그랬는지 얼핏 기억이 안 나는데 캄보디아인지, 왜 그 비행기가 한국인을 실고 가다가 여러 명 죽은, 그래서 나라가 발칵 뒤집힌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 사고기를 일행과 함께 움직이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시간 내에 도착해서 그 비행기를 타기로 했는데 그만 그 관광지에서 다른 행동을 하다가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비행기를 놓쳐서 비행기가 떠났습니다. 그리고 혼자 남아서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고 안타까운지 일행은 타고 몇 백 킬로를 가는데 자기는 혼자 남았는데 여러분이 혼자 외국에 남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하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안타깝겠는지, 그런데 결국은 그 비행기를 타고 가던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이 사람만 살아남고,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 적이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칼빈 선생에 의하면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신자의 성숙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모든 환경과 그리고 여건들입니다. 이것이 나쁜 것처럼 보이지 않고야 그것이 어떻게 십자가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십자가는 누구에게도 처음 질 때 달콤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정말 고통스럽고 괴롭고 아픈 것인데 그래서 나쁜 것인데 그 나쁜 것을 짊어지고 갈 때 하나님께서는 섭리 속에서 그 나쁜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시련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매달릴 리가 있겠습니까? 연약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주님을 굳게 붙들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리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완전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은 그 모든 우리의 삶의 여건들을 사용하셔서 때로는 어루만지시고, 때로는 깨우치시고, 때로는 깨트리시고, 때로는 우리를 때리셔서 그래서 나빠 보이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사랑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승리의 장인 로마서 8장에서 “자기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시겠는가” 하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IV. 결론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실수할 적이 있습니다. 잘못할 적이 있습니다. 그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가지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것에 붙잡혀서 사는 것은 절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실패했기 때문에 너는 지금도 실패할 것이고 앞으로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난날에 일어난 일 가운데 안타깝고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 있어도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이미 일어난 일이고 그 사실은 우리가 바꿀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찬송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그게 신앙입니다. 정직하게 잘못된 것은 잘못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가슴 아픈 일은 가슴 아픕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살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면 오늘 내게 일어난 이 가슴 아픈 일이 결국은 나를 주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 것이며 주님의 크신 사랑을 내가 아는 기회로 삼아주실 것이며 지금은 나빠 보이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날로 헤아릴 수 없는 더 크고 좋은 것을 내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나는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가 확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 없이는 주님의 선하심을 믿는 신앙이 없이는 누구도 감사의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굳게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한 해 동안 주님이 베풀어주신 것을 조용히 자기 전에 헤아려보십시오. 1월 달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 감사했구나. 감사했구나. 처음 일어날 때는 괴롭고 아팠는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셨구나. 아멘! 하게 될 때 감사의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충만하게 되고 환경을 능가하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감 사 1
감사 1 (2009/11/10 수요예배)
감사 2 (2009/11/22 주일오전예배)
감사 3 (2009/11/22 주일오후예배)
감사 4 (2009/12/02 수요예배)
감사 5 (2009/12/06 주일오후)
감사 6 (2009/12/16 수요예배)
감사 7 (2009/12/23 수요예배)
감사 8 (2009/12/30 수요예배)
감사 9 (2010/01/20 수요예배)
감사 10 (2010/02/03 수요예배)
2.광야에서 감사함은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6).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노래 부르던 대표적인 시편의 한 절입니다. 136편 시편은 특별히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찬송에 있어서 백미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전장 전부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노래하는 감사의 찬송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과 인자하신 그 긍휼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섭리를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에서의 구원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제목들을 찾아 나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주시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정착시키기까지의 그 모든 구절구절 한 토막 한 토막까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드러내는 훌륭한 도구였고, 이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어찌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할 백성들인가 하는 것을 이 찬송을 통해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Ⅱ. 4중의 은혜 : 선택, 보호, 인도, 공급
하나님께서 당신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베푸신 은혜는 4중의 은혜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 은혜는 바로 선택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유독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당신과의 관계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나라 백성보다 자연적으로 더 좋은 점이 있어서가 아니었고 더 의롭고 훌륭한 민족이어서 주님이 그렇게 택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들을 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셔서 당신과의 관계 속으로 선택하여 불러들이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선택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었습니다. 이 선택은 곧 구원으로 나타났으니,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을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구원해내신 것입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도 우리를 이렇게 죄 가운데서 건져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은혜는 보호의 은혜입니다.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길 내내 보호하셨습니다. 기라성 같은 나라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던 애굽과 광야의 길과 팔레스타인의 모든 지역들 속에서 방금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다면, 그들은 군대도 없고 병기도 없고 많은 부강한 나라의 재물도 가지고 있지 않은 곧 멸망 받을 방랑하는 도망자들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이 사람들을 파멸하고자 하였으나 멸하지 못하게끔 주님이 보호해주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또한 이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에는 하나님이 단지 광야에 두시기 위함이 아니었고, 당신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이 광야에 들이게 하신 이후 그들에게 모든 것을 미리 가르쳐주시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에게는 아주 지혜로운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두 달이면 갈 수 있는 광야 길에서 40년 동안 방황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당신의 계획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40년이 넘는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무렇게나 이끌지 않으시고 매일 매일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며 인도하셨습니다. 낮에는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빛 아래서 그들이 일사병으로 죽을지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큰 구름기둥으로 햇빛을 가려 서늘하게 그들이 그 그늘의 보호를 입으며 광야의 길을 지나게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였던 것입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를 이기게 하시고, 또 그 불기둥으로 빛을 삼으사 그들이 가야할 바를 알리셨고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그들은 순종하며 가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4중의 은혜의 마지막은 공급의 은혜이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를 지날 때에 그들을 홀로 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그 300만은 족히 되었을 그 인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신기시고 길러주셨습니다. 목이 갈할 때 광야에서 반석을 터뜨려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고, 배가 고파 기근 할까봐 그들에게 조상들도 일찍이 먹어본 적이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신령한 만나를 먹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의복이 헤어지지 않도록 입히시고 신기시며 광야의 길을 지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농사도 짓지 않고 가축도 하지 않는데 그들은 먹고 입고 씀에 모자람이 없이 40년 광야의 길 동안 하나님이 그들에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육체를 위해 공급된 물질은 영혼에 공급될 그 은혜의 그림자에 불과하였으니 하나님은 광야의 길을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시시때때로 당신의 종들을 통해 진리의 말씀으로 먹여 영혼을 배부르게 하셨고, 그들이 죄를 짓고 범죄 하였을 때는 때리시면서도 어루만지시는 용서로 그들의 영혼의 양식을 삼게 하셨습니다.
이런 4중의 은혜가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약했으나 어느 민족에 의해서도 파괴당하지 아니하고 가나안 땅까지 인도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비상한 방법으로 공급해주시는 만나의 은혜는 하나님의 성실하신 공급을 잘 보여줍니다. 아름다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신령한 방법으로 만나를 공급해주시기를 그 땅에서 나온 소산으로 열매를 삼아 곡식으로 먹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신기한 방법으로 공급해주심으로써 4중의 은혜를 확증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선택과 구원, 보호, 인도의 이 4중적인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 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선택받을만한 남다른 가치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죄를 덜 지었습니까? 남에 비해서 우리가 훨씬 더 아름다운 자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신앙이 깊어졌는데도 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나 같은 인간을 선택하셔서 구원의 독자적인 은혜를 주시고 나 혼자 결별할 수 없는 이 죄악 된 세상과 작별하게 하셔서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살게 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의 길을 지나는 동안 시시때때로 이 세상은 우리를 삼킬 듯이 파멸하려고 하였지만 주님은 보호하셨고, 그리고 우리는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었으나 우리의 인생길에 더 좋은 계획이 그분의 손 안에 있어서 그분의 인도를 따라 나는 여기에, 여러분은 거기에 서 있습니다. 살아온 인생 모든 길들이 주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로 살아온 길이었습니다.
Ⅲ. 하나님 백성들의 삶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올리는 이 감사의 긴 서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A. 광야와 같은 인생 길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 곳에서 가르치기를 우리의 정체는 다만 이 세상 광야를 지나는 나그네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이르기 전까지 인생을 지나는 동안에 자기의 정체를 묻는 이방사람들에게 나는 잠시 이곳을 우거하는 나그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의 자손 야곱은 바로 앞에 섰을 때에 바로가 그의 나이를 묻자 그는 “내 나그네 인생길이 130년인데 그 연수는 조상에 미치지 못하나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시편 속에서 인생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것은 빨리 지나가는 화살과 같고, 그 인생의 길은 나그네 길이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사시면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 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로 믿어지는 사도 바울은 자신의 그 히브리서 11장에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생애를 언급하면서 그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들이 나그네로 스스로 자처한 것은 그들에게 떠난 고향보다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기 때문이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기의 글 속에서 우리를 향하여 말하기를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가르쳐주었고, 마지막까지 이 땅에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 사도 요한, 제자들 중 마지막 생존자는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전망하면서 감격에 찬 목소리로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지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애굽에 내린 10대 재앙을 열 번만 더 내리셨더라면 아마 애굽을 통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고 모세를 그 나라의 임금으로 삼으실 수도 있었으련만, 하나님께서는 그 큰 능력에도 불구하고 애굽을 통째로 주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 큰 능력으로 애굽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결핍과 고난으로 가득 찬 광야의 길에 들어서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셨기 때문이 아니라 떠나온 애굽보다 더 좋은 약속의 땅을 그들에게 주시고 싶어서인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약속의 땅을 얻고 그곳에서 왕국을 이루어 미래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왕국의 모본을 삼기 위해서는 그들은 광야보다 더 좋은 땅 애굽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 큰 능력이면 우리를 이 세상에 붙어살며 이 세상에서의 존귀와 영광을 한 몸에 누리게도 하실 수 있을 터인데 하나님이 거기를 떠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심은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그에게 복 주실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갈대아 우르에서 주실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하늘나라에서 얻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죄악으로 가득 찬 그 본향을 떠나게 하심으로 더 나은 본향을 얻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생은 광야를 지나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후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능력을 힘입어 광야로 나오게 되었고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온 모든 신앙의 길은 광야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째로 주실 수 있었는데도 우리에게 광야를 지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알라고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광야의 길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수많은 결핍과 고난을 맛보았습니다. 각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이후 우리는 영적으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 수가 있었습니다. 거미줄 같이 약한 믿음이나마 주님을 의존하고 이곳저곳에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섬기느라고 살아왔던 우리의 지난 날 인생의 길은 바로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광야의 길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불 뱀의 위협에 고통 받고, 물이 없어 건건한 땅을 지나고, 때로는 물이 솟아났지만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고난의 땅을 지나기도 하였습니다. 괴로움과 죄가 가득 찬 골짜기를 지나기도 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아래서 고통을 받는 시기도 지났습니다. 이러한 결핍과 고난으로 가득 찬 길을 지나게 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자기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양식이 아까우신 것처럼 때로는 우리를 굶주림의 광야를 지나게 하시고, 물이 아까우신 것처럼 우리를 목마름 가운데 두시고, 약이 없으신 것처럼 우리를 질병의 상태에 내버려두시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광야의 인생길을 지나게 하심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주님은 이런 광야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인자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결핍과 고난으로 가득 찬 광야의 길을 지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너희들이 우상에 갖다 바치는 제물도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것이요, 우상이 너희를 먹이고 입힌 것이 아니라고 눈물로 호소하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도록 그 백성들을 타일렀습니다. 결핍과 고통으로 가득 찬 광야를 지났기에 그들은 아무것도 좋은 것이라고는 없는 허허벌판인 광야를 지나면서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과 물 한 모금 없어 목을 부여안고 목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호멜을 들고 광야로 나아가 만나를 거두면서 그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로 사는 하나님 의존적인 백성이란 사실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하여, 그래서 애굽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광야의 결핍하는 시절을 지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B. 인자를 나타내심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이 인색한 것이 있으시겠습니까? 아무리 퍼 주어도 당신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없으신 분이었으니 인색한 것이 없고, 모든 것을 주어 후히 누리게 하시기에 모자람이 없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아까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을 지날 때에 고난의 땅을 지나고 허허벌판인 광야를 지나며 결핍의 시기를 지나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육체가 곤고함으로 우리의 양식을 위하여 우리의 육신의 괴로움을 위하여 우리를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셨고, 때로는 죄 가운데 불순종함으로 곤고해진 영혼의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버린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으며 주님 앞에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달라고 몸부림쳤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결핍의 때를 지나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그 결핍을 능가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빛이 빛나는 것처럼 결핍으로 가득 찬 광야의 생활이었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가 풍부하신 분임을 배웠고, 죄가 가득 찬 광야의 생활을 지나고 죄와 결별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용서의 위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양식이 되는지를 절실하게 경험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우리된 것이 우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을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견고한 사람들은 그 견고케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고난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은 풍부할 때 바라지 않던 하나님을 고난 가운데 바라게 하신 주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방탕했던 길에서 돌아온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요, 은혜의 길에 살면서 방탕의 길로 들어서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 우리를 붙들어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에 우리들이 살아있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입이 다 있어도 광야와 같은 이 인생의 길에서 무가치한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이 은혜를 다 필설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다 쓸 수 없고, 이 광야의 길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주님께 안 해드린 것이 있어도 주님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들이 없고, 우리가 누리는 좋은 모든 것들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악하고 나쁜 것들은 모두 우리 악함이 불러들인 것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들이 성령이 충만하고 교회에 충성할 때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곤고하고 영혼이 어둠 가운데 있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미끄러져 범죄하고 불순종할 때에도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줄 때나 알아주지 아니할 때나 어머니의 사랑으로 아버지의 자비하심으로 그토록 오래 참으시며 우리의 인생의 길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우리를 붙드시는 그 손을 우리는 놓았지만 주님은 놓지 않으셨습니다.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 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 만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순간도 악을 행하신 적이 없고 우리에게 잘못하신 적이 없음을 정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많은 고통은 대부분 우리가 스스로 가시 채를 뒷발길질하는 것처럼 주님을 거스르고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고, 주님을 거스르고 악을 행할 때에 형통케 만들 수 있지만 그로 인하여 당신께 아주 멀어질까봐 때로는 우리 스스로 때리시고 어루만지시는 당신의 품으로 기어들어올 수 있도록 일깨우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피가 흐를 때 싸매시고 어루만지시고, 우리가 고통을 받아 눈물을 흘릴 때 주님의 마음에서는 피가 흘렀던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인자가 무엇이관데 우리를 이렇게 곤구하실까요? 살아온 인생의 날 중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해온 시간이었건만,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는 마르지 않고 지난 한 해 동안도 우리의 인생 전체를 붙들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며 이 쓸모없는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난망하다고 고백하지 아니하였던 우리의 마음의 악함은 온갖 정욕과 세상의 탐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아낌없이 누리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의지하여 우리가 다만 피조물인 것을 알라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아직 허락하지 아니하신 것들, 우리의 힘대로 살지 아니하고 당신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남겨두신 것들 때문에 주님을 원망하고 산 우리들이었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죄입니다. 우리는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C. 경외케 하심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우리에게 그 모든 결핍의 순간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인자를 보여주셨을까요?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기 원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이런 자비를 베푸심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경외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고난의 길에서 한 편으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고, 한 편으로는 그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인생의 길에서 결핍의 시간들을 지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시간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를 의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우리의 본분은 이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우리를 선택하고 보호하고 인도하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백성들인 것을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난 한 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그 끝없는 은혜, 악을 선으로 갚으시고 불순종을 은혜로 갚으시며 죄악을 은총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은 그 악을 통해 당신을 아는 기회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는 마음으로 바꿔주신 그 한 해 동안의 모든 은혜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지 않은 것이 없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큰 은혜를 베푸심은 우리가 아무리 분수를 모르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입을 막으시고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직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께 고정되도록, 그리고 우리의 삶의 본분은 이 광야의 길을 지나는 동안 주님과 관계를 맺고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본분임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로 하여금 부랑무식하고 짐승과 같이 무지막지한 우리들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고 경외함이 우리 인생의 복인 줄을 알게 하시려고 주님이 죄를 능가하는 은혜로,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갚아주셨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왕궁과 화려한 궁궐이 아니어도 초막에서 무릎을 꿇고 드리는 감사의 찬송을, 화려한 성전에서 올리는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보다 합당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사시는 동안 교회 하나 세우신 적이 없고, 주님을 위해 다윗처럼 화려한 성전을 세우지 않았지만, 당신 자신이 친히 성전이 되어서 그 마음속으로 올리는 감사와 찬송의 노래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합당한 영광을 모두 받으셨으니 그분 자신이 육체를 장막삼아 당신 자신의 심령 안에서 감사의 분향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Ⅳ. 결론 : 감사함으로 가는 길
우리의 마음이 허탄한데 꽂힘으로 분에 넘치는 사랑을 입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데,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여러분이 주님께 해드린 것에 비하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분에 넘치게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베풀어주신 것은 이 어두운 세상을 살며 그분만을 경외하시기 위함이니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노는 자들이 되지 말고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함을 행복으로 알고, 그분을 섬기는 그것이 말할 수 없는 특권인줄 알고,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지셨던 그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사는 그것이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알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결핍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의 길을 지나면서 때로는 울고 때로는 아파하고 때로는 고통을 받지만, 그러나 그 모든 인생의 길에서 자기를 구원해주시고 자기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그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직까지도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남겨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인생길은 감사함으로 걷는 길입니다. 마음을 낮추고 욕망을 줄이고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보려고 하는 탐욕과 방탕의 마음을 포기한다면 여러분은 일 년 동안 죄악 된 여러분을 향해 베푸셨던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입을 다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리스도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알 때나 모를 때나 동의할 때나 동의할 수 없을 때나 언제나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악을 행하실 수 없고, 우리가 어떤 인생의 길에 서든지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내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부끄러워해도 주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향하여 어떻게 여러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하며 주님의 은총과 표독하게 주님을 대적해온 날들을 비교하십시오. 주님을 수시로 버렸고 배신하고 그 앞에 침 뱉었지만 주님은 언제나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저항할 수 없는 사랑으로 복시키고 붙드셔서 결국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주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리십시다. 그리고 베풀어주신 모든 것이 분에 넘쳤다고 고백하십시다. 그래서 우리의 남은 인생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며 남은 인생을 주님께 제물로 드리십시다.
감 사 1
감사 1 (2009/11/10 수요예배)
감사 2 (2009/11/22 주일오전예배)
감사 3 (2009/11/22 주일오후예배)
감사 4 (2009/12/02 수요예배)
감사 5 (2009/12/06 주일오후)
감사 6 (2009/12/16 수요예배)
감사 7 (2009/12/23 수요예배)
감사 8 (2009/12/30 수요예배)
감사 9 (2010/01/20 수요예배)
감사 10 (2010/02/03 수요예배)
3.감사함으로 구함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우리는 흔히 기도에 있어서 열렬하고 절신한 기도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응답 받은 간증들을 많이 접합니다. 특별히 목숨을 걸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생결단의 기도는 우리에게 비장해 보이기도 하고 연약한 기도생활을 이어 가는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이러한 영웅적인 기도의 목어는 마치 무용담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에는 이러한 강한 생즉사 사즉생의 결단이 필요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기도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을 쏟지 않으니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도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인지 재수가 좋아 된 것인지 이렇게 오락가락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요즘에 나 자신을 돌아 보면서 우리가 만약에 좀더 사생결단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인생의 위기에서 사역의 위기에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면 우리의 인생과 그리고 교회는 얼마나 다른 모습이 될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사역을 하면서 벌써 20년이 넘게 설교 사역을 해 왔지만 설교 사역을 하면서 절실한 한계를 느낄 때가 언제인가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부어 주셔서 이 속에서 발전이 되고 그리고 나는 충분히 하나님의 마음으로 설교 하는데 이것이 저 끝까지 가지 않는 다는 느낌을 받을 때 이것은 나의 학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말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좋은 음향 시스템으로 소리를 지른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때 아주 절실한 한계를 느끼고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그래 이렇게 백번을 설교 하느니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한번 설교 하는 것이 더 큰 성과를 가져 오겠다 결국은 기도를 더 많이 해야 겠구나 하는 반성들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견디기 힘든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고정 시키고 생명을 거두시든지 기도에 응답을 해 주시든지 이러한 결단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특별히 위기를 만났을 때 꼭 필요한 기도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믿음대로 살 사람들은 평소에는 순종을 하지 않는 것 같아도 이런 인생의 결정적인 마디가 나타날 때 그 때 자기를 꺾고 온전히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가 하면 반대로 안 그런 사람들은 평소에는 믿음으로 사는 것 같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기도 안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고통스러울 정도로 많은 희생을 치른 후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에 있어 그런 처절함은 어떻게 보면 인간이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음을 그렇게 녹이시니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우리들이 100% 인정을 하고 그러한 기도의 세계속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우리 모두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사도 바울이 이러한 기도의 세계를 충분히 알고 있는 영적인 거장으로서 우리에게 훨씬 다른 기도의 국면을 보여 줍니다. 그것이 뭐냐면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거라. 이 빌립보 교회가 일차적인 기도 제목이 뭐가 있을까요? 아니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 빌립보에 가보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편지는 왜 이 편지를 지금 보내게 된 것입니까? 사도바울이 옥중에 갇혔다니까 빌립보 교회가 정말 걱정을 해서 에바브로디도라는 전도사 같은 사람을 보냈습니다. 바울의 안부를 묻고 면회 가니까 무엇을 싸서 보냈습니다. 이 사람이 바울에게 와서 병이 깊이 들어서 사경을 헤맬 정도로 병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그랬다는 이야기를 듣고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슬픔에 잠겨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그것이 마음이 아파서 이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고 싶다 그래서 사정을 정확히 알려 주어서 너희의 걱정도 면하게 하고 또 그 사람들의 사정도 사도바울이 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런 문맥에서 편지가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에게 큰 기도제목은 두 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자기들의 영적인 아버지인 사도바울은 옥에 갇혔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중죄인처럼 취급을 받는 옥살이였고 또 교회의 심부름꾼으로 간 에바브로디도 전도사는 갔다가 큰 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이것이 그들이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라구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할 수 있게끔 해줘 보세요. 우리가 왜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이 신앙의 전혀 다른 국면을 우리에게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이루어 져도 괜찮고 안 이루어져도 괜찮은 것은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의 제목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뼈가 녹듯이 간절하게 기도할 때에는 그 기도가 안 이루어져도 괜찮은 것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 기도의 제목이 실현되고 있지 않는 상황 자체가 우리에게는 괴롭고 고통스러워야지만 절실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만큼 감사하기는 힘들어 지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오늘 뭐라고 합니까?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거라. 그런데 이것은 완전한 역설입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은 기도에 있어서 양보 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더 간절해지고 더 절실해 질려면 그것이 더 절실하게 필요해야 하고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아직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고통스럽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기술적으로 굉장히 어렵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기도해 보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때로는 간절히 기도해도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육적인 간절함입니다. 육적인 간절함은 그 안에 반드시 불평과 원망의 요소가 어느 정도는 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기름이 순결하면 연기 없이 불꽃만 내지만 기름이 불순물이 섞여 있으면 그을음이 많이 나면서 불꽃을 일으키듯이 우리의 기도가 간절해도 거기에 얼마든지 육적인 요소가 결합 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랬더니 이것 주세요 이것 주세요 하나님도 이런 것 없이 한번 살아 보세요 얼마나 불편한지. 제가 결혼하고 나서 봉급을 조금 밖에 못 받았습니다. 그리고 장가 갈 때 빚을 얻었으니까 우리 집 사람이 월급봉투를 가져 오니까 이렇게 조금 가지고 올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당에 펴 놓고 하나님도 이것을 가지고 한번 살아 보세요 했다고 하는데. 그런데 사실은 간절하게 기도하면서도 응답이 없거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때 오늘의 설교를 가슴에 새겨 보십시오 아마 놀라운 변화가 일어 날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러면 어떻게 결핍 때문에 고통스러운 상황인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느냐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좋은 상황에 있어서 감사할 때에 그 감사가 오래 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감사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면 우리에게 일어나거나 주어진 많은 상황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수도 있고 나빠 보이는 일이 일어날 수 도 있고 결핍일 수도 있고 풍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단지 하나님 자신이 우리 자신을 향한 선하심을 전달하는 도구라고 생각을 하면 우리는 그 환경을 넘어서 하나님께 결핍 속에서도 그래서 그것이 불편해서 간절히 기도 하면서도 없어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안 들고 달라고 기도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모든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큰 사랑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렇게 될 때 내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익이 될 때도 있고 고뇌가 될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향해 얼마나 선하신 분이시고 그리고 자비로운 분이신지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 상황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편이 가득 찬 사람이 은혜를 받고 나면 가정의 문제나 아니면 직장의 일이나 교회에서 일어나는 어렵고 힘든 일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는 간증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아뢰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간절해지면서도 일체의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고통 없이 이 기도의 제목의 성취를 통해서 하나님이 더욱 더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열렬함이 양립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에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지연시키시는 것처럼 더 기도해라, 더 열렬히, 더 간절히, 그래서 우리의 온 힘을 바쳐서 기도할 때까지 우리를 기도시키시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힘을 빼어야 주시는 인색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불평과 원망의 찌꺼기 같은 것들을 자기 깨어짐 속에서 깨끗이 갈아 내시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더 많이 경험하고 이제는 내게 돌아오는 이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선하심 때문에 감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레위기 24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의 등불을 밝히는 기름을 백성들에게 모으도록 지시 하시면서 그 기름이 어떻게 조제된 기름인지를 설명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디 한번 볼까요? 레위기 24장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찌어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내게로 가져 오게 하고 이렇게 됩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감람을 찌어 낸 순결한 기름이라고 했습니다. 기름인데 순결한 기름인데 그 순결한 기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감람을 찌어 낸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 성경에 까띠뜨 라고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때리다 깨뜨리다 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올리브 열매에서 기름을 짜면 그 올리브 열매를 탁 하고 치면 그 자체 안에서 기름이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기름만 모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람유를 만드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감람유를 만드는 방법은 이것을 빻아서 압착기에 집어넣고 압력으로 누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젠가 내가 자료에 보니까 우리 수퍼에 가면 콩기름 같은 것을 팝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의 콩 값을 가지고 계산을 해서 방앗간에서 해서 찌면 도저히 그 가격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기름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그것을 볶아 가지고 그것을 프레스에 눌러 짜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약을 넣어 기름을 뽑아낸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름하고 약하고 섞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거기에서 약을 뽑아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름을 남기면 보통 눌러서 짜는 것 보다 훨씬 많은 기름을 빼 내기 때문에 그렇게 싸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것은 깨든지 콩이든지 볶아서 기름집에서 하든지 아니면 집에서도 짜는 기계가 있던데 그렇게 해서 먹으면 비싸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압착기로 눌러 짜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것은 성소에는 불을 밝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름이 많은 대신에 거기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기 때문에 불을 붙이면 그을음이 나는 것입니다. 성소에서 쓸 것은 깨뜨려서 흐르는 기름만 조금씩 조금씩 모아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전한 불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도 역시 무조건 열렬해 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순전해 질 필요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모든 오류를 벗어나면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쪽으로는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고통하면서 안타깝게 기도 하면서도 대표적인 것이 회개의 기도, 영혼의 구원을 위한 기도, 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기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 엄마, 아빠 예수 안 믿어도 아무 상관없어. 지옥 가면 가는 것이지. 그러면 열렬히 기도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 엄마가 아직도 예수를 안 믿을 수 있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렇게 괴로워 할 때 열렬한 기도가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주 아름다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입니다. 우리들이 한번 오늘 저녁부터 기도할 때 우리 열렬해 지는 것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면서 그 분이 우리를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가 그분께 기도할 수 있는 관계를 갖게 된 것에 대하여 먼저 감사 합시다. 이 감사가 우리의 마음에 가득 찬 가운데 간구의 소원을 올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감 사 1
감사 1 (2009/11/10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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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9 (2010/01/20 수요예배)
감사 10 (2010/02/03 수요예배)
4.교제와 감사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 1:3-5).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옥에 갇힌 죄수의 입장에서 편지를 쓴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편지 서두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감사와 기쁨이 가득한 가운데 이 편지를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본문을 해설하기도 전에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상황이나 환경, 그것 하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도저히 감사하고 기뻐할 수 없는 그런 감옥살이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서 우리에게 진정한 감사와 기쁨이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오늘 그 감사의 기쁨의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때 어떤 사람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마음에 근심과 걱정을 끌어 안고 기도해주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빌립보 교회에는 사도에게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처음 편지를 받았던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은 두 번째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목회자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생각할 때 마음속에서 기쁨이 솟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를 사용하셔서 영혼들을 붙들어주시는구나 하는 기쁨과 보람을 안겨주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교만해질 때 겸손해지게 만들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법 잘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믿을 그때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나는 정말 무능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자각을 갖게 만들어주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혼들을 돌보아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영혼을 섬기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낙심해서 영혼을 섬기다가 지칠만하면 구역의 식구들 가운데 한 두 사람이 흔들리면서 변하기 시작할 때 그때 하나님이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사용하셔서 영혼을 움직이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으며 다시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싶은 새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전도도 잘되고 구역의 식구들도 은혜를 잘 받으면서 점점 구역의 식구들이 늘어나게 될 때 그때 어떤 지체가 미끄러지면서 침륜에 빠지고 그리고 은혜를 잃어버리고 마음이 악하게 변할 그때는 우리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섬기는 것은 우리의 몸으로 섬기지만 우리의 입으로 말하고 우리의 마음으로 기도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도구일 뿐이고 주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은밀히 사랑하는 지체들의 영혼 속에 역사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더 많이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 위로가 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하니까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그들을 생각나게 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잘 생각이 안 납니다. 지겹게 미운 사람은 머리를 흔들어도 어쩜 그렇게 또렷하게 떠오르는지 모릅니다. 그 모습, 어투, 말, 나에게 상처를 주던 그 행동의 그림까지 선명하게 세월이 그렇게 오래 흘렀는데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자주 떠오릅니다. 가까이 있으면 가까이 늘 있기 때문에 떠오르고 멀리 있으면 그리워하기 때문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은 바울의 마음에 근심을 끼친 교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자주 생각날 때마다 옥 속에서 받는 고난도 잊어버릴 정도로 감사하고 싶은 그런 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교회를 떠나서 어느 교회를 가더라도 목회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되는 교인들이 되지 말고 여러분을 생각할 때 기쁘고 감사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 복음 안에서의 교제
사도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교인들이 복음 안에서 교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면밀히 살펴보아도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사도 바울이 감사했다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서 감사했다거나 아니면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이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옥 속에 갇힌 노사도의 마음속에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 돈 많은 교회, 자기가 가면 대접을 잘해주는 교회 그런 교회로 생각난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 하면 떠오르는 것은 복음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교통입니다. 성도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빌립보 교회보다 돈이 많았고 에베소 교회는 빌립보 교회보다 더 큰 능력을 경험했으며 고린도 교회는 빌립보 교회보다 어쩌면 더 많은 은사로 넘친 교회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교회들보다 더 큰 기쁨의 마음을 빌립보 교회가 목회자인 사도 바울의 가슴속에 안겨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안에서 그것들이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교제, 코이노니아 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오늘 성경에 보면 “복음에서 교제함이니라”고 나오는데 희랍어 성경에 보면 “그 복음 속으로 교제함을 인함이라” 이렇게 나옵니다.
III. 복음 속으로의 교제
그래서 성도들이 함께 교제를 하는데 그 교제가 어느 방향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하면 성도들의 교제가 복음의 저 속을 향해서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이스라는 사격전치사가 쓰였는데 희랍어에서 이 사격전치사는 이동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삼격 전치사는 정지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으라, 할 때 복음 안에서 믿는 것입니다.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복음 속으로의 교제는 무엇인가 하면 복음이 있고 성도들이 함께 교제하는데 교제하면 교제할수록 그 교제가 각 사람을 성도들 전체의 연합을 복음의 깊은 핵심 속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끌고 간다기보다는 그 속으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렇게 있으면 여기에서 이 교제가 복음 속으로 쑥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오한 표현입니까.
오늘도 낮에 기독교 신문을 이렇게 보니까 그 신문에 상담 코너에 예수 믿은지 얼마 안 된 사람 같은데 목사님에게 지면에 상담을 올렸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제가 지금 교회에서 새가족반을 하고 있는데요? 하면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새가족반이니까 예수 믿은지 오래 되지 않은 사람이겠지요. 그런데 하는 이야기가 새가족반에서 여러 주를 공부를 하고 있는데 너무 처세술만 많이 가르쳐주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하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 꿈을 가져라.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라. 심형(?)을 쌓아라. 뭐 건강관리를 잘해라. 이런 식으로 가르쳐주는 내용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복음 속으로의 교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느 청년이 열린 신문에다 그런 글을 썼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자기는 원래 예수를 잘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교회에 와서 예배가 끝나면 지체들과 함께 주일날도 교제를 하고 수요일도 밤 10시에 끝났는데 안 가서 오죽했으면 내가 막 등을 떠밀었습니다. 그 청년의 고백이 무엇인가 하면 혼자 있을 때는 모르겠는데 지체들과 함께 서로 교제하고 사귀다가 보면 마음속에서 두 가지 생각, 나는 성경을 정말 모른다. 라는 생각, 두 번째는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다. 이 두 가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을 떠날 때는 아, 나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 저 지체들은 얼마나 좋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들처럼 주님을 생애적으로 만나고 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마음으로 예배당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무엇인가 하면 복음 속으로의 교제입니다. 그래서 이 교제의 수준은 한 교회의 영적인 수준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교제를 복음 속으로의 교제라고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 속으로의 교제가 잘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도구입니다. 여러분, 비디오가 마음속에 빨리 들어옵니까, 오디오가 빨리 들어옵니까? 비디오가 빨리 들어옵니다. 요즘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핸드폰으로 툭 켜도 TV가 나오는 세상이니까 글로 쓰여 있는 것은 더 늦게 들어옵니다.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생하게 보는 그것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 아주 빨리 들어오는 것입니다. 교제가 바로 그렇게 사람들에게 아주 잘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거룩한 교제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참된 행복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돈이 이 세상에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가치와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생생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아무리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기 위해서 교회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모습으로 끊임없이 바꾸고 또 바꾸려고 해도 그것으로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심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항상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과 구별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씀해주시지 않고 자꾸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별된 자들로 하나님도 보아주셨고 주님도 보아주셨고 또 우리 자신도 그렇게 생각해야지 되고 세상 사람들도 우리를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단어는 희랍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게 무엇인가 하면 불러내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내는 것처럼 그렇게 죄악 속에서 살던 사람들을 구별해내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가루와 누룩으로 비교를 하면서 우리를 보여주십니다. 가루가 세상이라면 누룩은 교회, 곧 그리스도인들의 무리입니다. 그들이 복음 안에서의 교제를 통해서 그 가루를 누룩으로 다 부풀게 해서 그래서 부풀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세상은 어둠이라고 말하시고 너희는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썩는 음식처럼 말씀하시고 우리는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된 사람들로 불러내셔서 우리를 그렇게 구별된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도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밖에 있어본 사람입니다. 교회 밖에서 지독하게 방황하고 21살 때 회심을 하게 되었는데 회심을 하기 2년 전서부터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막 고민하다가 결국은 기독교로 뜻을 정하고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때 내 마음에는 저 빨간 벽돌로 지은 모든 교회가 빨간 벽돌로 지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빨간 벽돌로 지은 저 예배당 속에 사는 사람들은 껍데기는 저 교회가 우리 집하고는 훨씬 달라도 저 속에는 나 같은 인간들이 모여서 살거야. 이런 생각을 했으면 난 교회에 안 갔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나와 그래도 달라보였습니다. 내가 고민하고 괴로워할 때 그들은 평안했습니다., 내가 두려워할 때 성도는 담대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혼자라고 생각할 때 그분들은 자기는 주님과 함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 안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생각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내게 매력을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똑같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다른 것들을 통해서 선교하는 사람들입니다.
A. 회심 : 복음의 시작
그 복음 속으로의 교제가 이루어지기 위한 그 최초가 무엇인가 하면 회심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자신들이 차별이 없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문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문턱은 교회가 만들어놓은 문턱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놓은 문턱입니다. 어느 교인이 우리가 통로를 이렇게 해놓았는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다니는데 이렇게 다니는 사람들 중에 단 한사람이라도 자기가 지금 남의 땅을 밟고 자기가 지금 아침에 출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면서 담배를 버리고 가래침을 버리면서 지나가는데 그래서 안 되겠어서 우리 교회의 어느 지체가 아저씨, 여기 교회입니다. 그렇게 지나가시면서 담배를 버리시면 안 되지요. 그랬더니 이 양반 하는 말이 이게 교회입니까? 골목길이 아니고? 나는 골목길인줄 알고 계속 다녔는데,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지나갑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 교회를 이렇게 해놓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왜 그러나 했더니 전에 있던 자기의 교회가 이런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담뱃재를 버려서 담장을 쌓아버렸다고 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마당은 깨끗해졌습니다. 욕을 바가지로 먹은 것입니다. 돌아갈 때마다 교회 욕을 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절대로 교회가 세속화된다고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닙니다. 끌어서 사람들이 교회에 올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원리하고는 정 반대입니다. 너희는 가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라고 하시는데 교회 안에서 세상 나라가 가득해서 두 나라를 한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 그러면 그런 세속화가 일어나는가. 사람들은 세속의 물결이 넘어와서 그런다고 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세속화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교회나 세상은 구분은 되지만 나누어집니까? 이렇게 모여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지만 내일 아침에는 불신자들이 더 많은 세상에 일하러 갑니다. 그리고 집에 또 아직 복음을 듣지 않은 불신자가 많은 가정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진정한 세속화의 원인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 각자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복음의 시작은 회심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회심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믿는 이런 우리의 영혼의 변화, 회심을 통해서 우리가 비로소 복음과 관련을 맺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것이 나의 죄 때문이었고 그리고 나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 된 그 구원을 받아들이면서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여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은혜로서 살아가야 된다고 하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속에서 비로소 이제 복음 속으로의 교제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각자 각자가 중생하고 주님을 만나서 깊이 회심한 가운데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와 접붙여져 이루고 있는 이 연합을 공동체적인 지평 속에서 출현해가는 것이 복음 속으로의 교제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각자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깊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믿고 따르면서 그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이것이 바로 복음 속으로의 교제의 시작입니다. 이 복음 속으로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가장 커다란 이유는 근본적으로 오늘날 이 모든 사람들 속에서 진정한 회심이 없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복음 속으로의 교제가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교회가 복음 속으로의 교제를 통해서 교회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공동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사실상의 불신자들이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했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냥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마음에 안식을 얻기 위해서 수양 차원에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정신의 위안의 차원에서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참 복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인간의 언어와 모든 말로서는 다 설득될 수 없는 성령 안에서 이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죽으신 것과 그분이 피 흘려 죽으신 보혈의 공로로 자신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 사실, 자기가 철저하게 더러운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버려진 완전히 파멸될 존재이며 그래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막대 먹은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있지 않고는 도저히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죽은 영혼이라고 하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그는 마음속에 복음의 사실이 믿어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진지하게 회개하기 전까지는 그는 밀밭에서 자라나는 가라지요, 그물에 끌어올렸으나먹지 못하는 고기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찾아내서 그들의 영혼의 위험한 상태를 가르쳐주고 그리고 교회는 온 마음을 다해서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을 향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사랑의 마음을 전달해주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래 참기를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아이를 해산하는 것처럼 그렇게 오래 참으면서 그 영혼이 변화되기를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닭이 달걀을 품고 20일이 지나면 병아리가 나옵니다. 물먹을 때 이외에는 절대 자기의 둥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미 닭이 달걀을 한참 품고 그것들이 병아리가 되어 깨어날 때까지 시간이 흐르면 어미닭은 뼈만 남을 정도로 바짝 마릅니다.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먼 곳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 물론 필요합니다. 그리고 정말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시대에 영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없는 것은 우리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교회 안에 끌어온 사람들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 한사람이 오래 참고 기다리는 가운데 사람들이 회심하게 될 때 거기에서 복음 안에서의 진정한 복음 속으로의 진정한 교제가 거기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복음의 강력한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 이야기는 세미나에 가서 한 번씩 꼭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기네 교회의 자랑을 어느 부목사님이 막 합니다. 우리 교회에 이 도시에서 뜨거운 교회입니다. 정말 교회가 굉장히 많이 성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우리보다야 훨씬 후배입니다. 목사님은 신학을 어디서 했지요? 당연히 총신에서 했습니다. 그럼 개혁신학을 하셨겠네요. 예, 그렇습니다. 회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 압니다. 목사님. 그럼 예외적인 경우가 있지만 성인의 경우 회심 없이 구원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장년 교구 하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교인이 얼마나 됩니까? 5-800명 정도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돌보고 있는 영혼들 가운데 정직하게 말해서 회심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러니까 한참 있더니 20%쯤 될까 말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따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나에게 지금 무엇을 자랑하려고 합니까? 당신에게 하나님이 돌보도록 맡겨주신 영혼들 가운데 20%만 구원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교구의 영혼들, 죽어가는 영혼들 때문에 얼마나 고민하고 있습니까? 내게 무엇을 자랑하려고 합니까? 따끔하게 얘기해주었습니다.
교회의 영광은 교제의 영광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교인들의 수의 영광이 아니라 교제의 영광입니다. 다수여야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순결한 다수는 순결한 소수보다 낫습니다. 그래서 스테판 차녹이라고 하는 청교도도 그 예배자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이라면 소수가 예배하는 것보다는 다수가 예배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교회의 영광을 우리는 다른 곳에서 찾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교회의 영광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본질을 양보하고 세속화되어서 얻어낸 그 많은 성장들은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장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수만 명의 사람들이 여의도에 모였다고 해서 나는 감동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내 마음이 오늘날 한국에 있는 불신자들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했다고 생각합니다. 천만 명이 여의도 광장에 모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가질리는 없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단 하루만이라도 몇 십만 명이 모였다가 흩어지려면 여러분의 머리로는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의 천문학적인 액수의 비용이 들어갑니다. 뭣 하러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교회의 영광은 교제의 영광입니다. 그 교제가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는 영광이 되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사람이 진실하게 회심하지 않으면 그 교제가 주님을 보여줄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한공동체의 교제의 주님 닮음은 한 사람, 한사람이 주님을 닮은 모든 총합계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사람이 주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께 온전히 붙어 있으려고 하는 어린아이 같은 순순한 믿음이 복음 속으로의 교제의 첫 번째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을 보고 어떻게 보면 좀 채신없이 보일 정도로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간구할 때 너희 무리를 위해서 기쁨으로 항상 간구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가 복음을 전해준 그 첫날 그때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그러면서 막 감격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게는 가짜가 거의 없었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정말 자기가 죄인인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것을 깊이 믿으면서 그분만을 의지하는 한 사람, 한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이 함께 만났을 때 그들이 마치 숯불과 숯불이 모인 것처럼 활활 타오르면서 그러면서 서로 서로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활활 타오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활활 타오를 때는 옆에 있는 지체들이 식어 그래서 함께 모여서 교제하면 그 마음속에서 위로를 받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식을 때는 사랑하는 지체들이 우리를 덮여줍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타오르는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제의 영광입니다. 그 복음 속의 교제는 바로 이 회심을 통하여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 정말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 공동체 안에서의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교제여야 하고 그 일을 위해서는 우리가 뜨겁게 한 사람도 회심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교회가 그렇게 한 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와 만나고 그분과 생명적인 관계를 갖게 될 때 이 사람들을 뭉쳐놓은 교제가 이게 복음 속으로의 교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복음 속으로 교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감 사 1
감사 1 (2009/11/10 수요예배)
감사 2 (2009/11/22 주일오전예배)
감사 3 (2009/11/22 주일오후예배)
감사 4 (2009/12/02 수요예배)
감사 5 (2009/12/06 주일오후)
감사 6 (2009/12/16 수요예배)
감사 7 (2009/12/23 수요예배)
감사 8 (2009/12/30 수요예배)
감사 9 (2010/01/20 수요예배)
감사 10 (2010/02/03 수요예배)
5.은택에 감사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103:2).
시인은 그 모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특히 다윗이 쓴 시편 속에서 자기가 영혼이고 자기인데 마치 둘이 나뉘어진 것처럼 영혼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서도 그러한 기법을 보여 줍니다. 마치 자기의 영혼이 제3자인 것처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라고 노래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의미는 매우 심오합니다. 그러니까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안에 있지만 그 영혼은 사실 육신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말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어떠한가에 의해서 그 영혼이 선장처럼 우리의 육체를 이끌어 간다고 하는 것이 구약 사람들의 생각 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 송축하고 또 그의 은택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청구를 하면서 굳이 내 영혼아 라고 부르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선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시인이 자신의 영혼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며 은택을 잊지 말라고 말한 이 부분부터 우리들이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여호와를 송축한다고 하는 것은 그의 뛰어난 선과 장점을 인해서 그 분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이 송축은 일차적으로는 악기나 혹은 우리의 목소리나 목을 가지고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전체적인 의미에서 보면 인간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송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정신으로 볼 때 어떤 사람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노래해도 만약에 그의 마음이 그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지 않거나 또 삶이 하나님을 향한 송축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면 그 입술로 하나님께 올리는 송축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한 모독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입술과 행동으로 일어나는 모든 작용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겉과 속이 모두 똑같은 그런 일치를 이루었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올려 질 때 하나님께는 송축이 되고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 백성의 의무라고 오늘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송축하면서 사는 것,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운 것들을 인해서 그 분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것은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하고 아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놀라운 특권을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학문이 뛰어나고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결코 그 하나님의 이름을 온전히 높여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알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만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아서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난 한 해 동안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매년 한해가 지날 때 마다 다사다난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사건도 많았고 어려움도 많았다는 뜻입니다. 어느 한 해도 심심했던 한 해는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그렇게 일도 많고 사연도 많습니다. 지나간 날들은 기억에서 많이 잊혀졌기 때문에 중요한 사건 몇 가지만 생각이 나지만 가까운 과거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에 항상 2. 3년전 보다는 방금 지내온 한해가 다사다난했던 것으로 느껴지고 가시밭길처럼 여겨지는 것이고 사건도 많고 추억도 많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 일중에 어떤 일들은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일도 있었고 기쁜 일도 있었고 아주 불쾌한 일도 있었고 유쾌한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일은 내년에도 계속 일어났으면 하는 일도 있고 어떤 일은 죽을 때 까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만 했다면 그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시는 훌륭한 도구로서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은혜 안에 있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은혜 안에서 맛보며 그 교제의 깊이와 넓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의 면전에서 사는 신자의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고 우리가 미끄러지고 불순종해서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낼 때에는 하나님이 얼마나 엄격하신 분이시고 거룩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때로는 징계로 인하여 때리시고 피 흘리기 까지 우리를 채찍질 하시면서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사람을 만드시려고 하시는지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선택의 의도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일 년 동안 우리에게 일어난 일 중에 몹쓸 일이 있는 것 같지 우리가 온전한 믿음으로 살기만 하면 우리의 일 년 동안 살아온 우리들의 삶은 때로는 우리에게 아프게 가르쳐 주었고 때로는 우리에게 달콤하게 가르쳐 주었고 때로는 쓰라리게 우리를 교훈 했지만 결국 믿음으로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쁨 속에서 좋아 하고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것은 짐승도 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짐승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은 기쁜 일을 만날 때나 큰 고통을 겪을 때나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의미를 생각함에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하나님의 섭리의 큰 구도 속에서 내게 주신 축복의 의미와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의미를 해석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지난 한 해 동안에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은 은혜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불순종하고 악을 행해서 우리 삶의 상황이 어려워졌다면 그것은 우리의 불의와 악 때문이고 그래서 그것은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받은 당연한 결과 였고 또 하나님이 우리의 과오와 어리석음을 통해서 아프게나마 우리에게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게 새로운 마음을 주셨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을 선하게 사용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들,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 드린 것 가운데는 나쁜 것이 많이 섞여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들 가운데는 나쁜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았던 좋은 삶은 메아리처럼 우리에게 선으로 돌아오고 우리가 악하고 나쁘게 했던 것은 하나님이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한 순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베푸셨다고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좋아 보이는 것도 결국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은 나쁜 것이 되고 나빠 보이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결국은 좋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송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은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아직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지 않아도 주님의 높으심과 선하심,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노래하다 보면 우리의 마음이 세속에 끌리기보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에 끌려 찬송이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놓은 경우도 우리는 경험 합니다. 그래서 찬양과 매 순간 드리는 짤막짤막한 기도는 우리의 영적인 순발력을 위해서 매우 필요한 경건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해가 저무는 이 마당에 여러분이 마음을 바꾸어서 우리의 다사다난했던 한 해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아름다운 성품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을 송축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제로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잊는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잊어 버리다 라고 하는 것은 기억하다의 반대입니다. 성경에서 자카르 라고 하는 기억하다 라고 하는 동사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찬송하다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자! 보십시오 찬송한다 누구누구를 높인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마음속에 잊지 않고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것의 표현입니다. 그 사람을 좋게 기억하는 것의 표현입니다. 저를 이렇게 잊지 않고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이야기 할 때 원수를 찾아가서 그렇게 이야기 하는 법은 없습니다. 복수 하려고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은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잊지 않고 기억한다 라는 것은 호의를 가지고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잊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은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와 혜택인데 하나님 덕택에 일 년을 그리고 일평생을 살지 않습니까? 영적으로는 구원으로부터 인도와 보호와 그리고 유업을 누리게 하시는 그것까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제 실제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먹고 입고 마시고 그의 영혼과 마음 육체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공급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육체는 하나님의 그런 일반 은총적인 공급으로 힘을 얻고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하늘의 특별한 은총으로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우리들이 힘을 얻으면서 일생을 살아 왔으니까 사실 금년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이후 우리의 살아 온 모든 삶이 하나님의 그런 은택에 빚진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하면 언제든지 자기가 그런 하나님의 은택에 빚진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면서 어떠한 희생과 수고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제가 직장다닐 때 직원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경찰관 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위에서 내려 온 북한의 군인들 뿐만이 아니라 땅에 있었던 자생 공산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색출해서 국군이 후퇴하면 그 자생 공산주의자들이 일어나서 마을사람을 골라내서 죽이고 또 다시 국군이 밀려 내려오면 자유민주주의자들이 일어나서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해서 죽이고 하는 피비린내 나는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때 일입니다. 생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못 들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자식들이 다 모였을 때 누구 이름 석자를 적으라고 불러 주더랍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이 사람을 찾아 봐라. 나는 못 찾았는데 너희들이 찾아보고 만약에 이분을 만나면 그가 무엇을 해 달라고 하든지 해 드려라. 은혜를 갚아라. 그것이 무슨 사연이 있는가 했더니 그 아버지가 경찰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이 피난을 못 간 것입니다. 대식구였는데 결국은 피난을 가다 보니까 북한군들이 앞서서 간 것입니다. 그래서 피난 가는 것을 포기 하고 모였는데 그야말로 말하자면 빨갱이 천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생 공산주의자들이 누구누구 사람들을 지목했는데 이 집안사람들을 지목한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경찰관 집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모두 끌려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온 가족이 총살을 당하기 직전 이었는데 그 중에 붉은 완장을 찬 사람이 아주 높은 사람은 아니고 중간쯤 되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조리있게 설명을 하면서 이 사람들이 경찰관 집안 이었지만 경찰관인 이 집 아버지가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서 동네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 해 주었는지를 더 깊게 칭송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적으로 그 집안 식구들이 모두 죽음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이름을 기억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이 사람이 일평생 자기의 가족에게 베풀어 준 생명의 은인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그 은택을 잊지 않고 살아 가는 사람은 그가 필요할 때 무엇이든지 희생하고 그를 위해 봉사 할 그 헌신의 마음이 이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 모든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베풀어 준 그 모든 은택 하늘 자원으로 네 영혼에 공급해 주고 용서해 주신 것과 이 땅의 자원으로 너희의 육신을 보호하고 이제껏 이끌어 오신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그런 은택을 간직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감사하라고 이야기 하는 것 보다 더 훨씬 더 깊은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시인이 스스로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 그러한 모든 은택을 하나님께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좋은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아직 살아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건강한 것도 주님의 은혜요 수없이 복음을 전해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완악한 내 마음을 녹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해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애를 쓰며 노력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 때문에 우리들이 한 해 동안도 먹고 입고 쓰면서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가 얼마나 감사 합니까?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제 재미있는 것은 오늘 시인이 자기 자신이 그 이야기를 자기의 영혼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마치 자기는 제3자인 영혼에게 정신 차리라고 이야기 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과 코와 입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이 모든 지식들은 우리의 육체를 통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육체를 통해서 들어오고 마음을 거쳐서 그래서 우리의 온 몸과 작용을 하고 우리의 영혼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아주 잘 들어오지만 또 잘 잊혀지는 것입니다. 우리 옛 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 물에 새긴 것은 새긴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떠내려가니까. 돌에 새긴 글씨는 수천 년이 지나도 좀처럼 사그러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고 만져 보고 감사하는 좋은 일이 있어도 인간의 마음은 늘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눈물을 그렇게 철철 흘리며 감사했던 그 마음이 오래 가지 않습니다. 즉시 잊혀집니다. 그러니 오늘 이 시인은 자기가 비록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아서 그래서 주님을 지금 송축하고 있고 또 자기의 마음속으로 주님께로부터 베풀어 준 모든 은택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감사하고 있지만 이것을 육체와 마음에만 맡겨 둔다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영혼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영혼아! 하고 타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영혼은 눈도 귀도 살갗도 없습니다. 이 사물을 이렇게 접촉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직접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영혼이 우리의 육신에만 의존하지 말고 선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직관함으로서 그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육체는 끊임없이 변덕스러운 성향 때문에 수많은 사물들이 스쳐가서 번잡함속에 잊어버릴지라도 너 영혼은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과 사랑과 공급과 은혜와 자비를 잊지 말아라 하고 타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은 송축하고 베풀어 주신 은택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육신에만 의존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말고 우리의 믿음을 곤고히 하여 그분이 얼마나 선하시고 아름다우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믿음으로 굳게 붙들며 살 때 우리는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많은 환경들은 수시로 변해도 우리의 마음이 그것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고 영혼을 통해서 바라보는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신앙생활 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영혼에 의해서 설득되며 믿음에 의해서 해석 되어서 해석 하는 가운데 우리의 과거를 바라 볼 때 우리의 눈으로 볼 때에는 괴롭워 보이는 일도 우리의 마음의 눈으로 볼 때에는 감사할 수 있고 우리에게 일어 난 가장 가슴 아픈 일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보면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감사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생각이 나타남이지만 우리가 생각을 모아서 하나님을 향하여 언어로 그분께 감사하고 송축할 때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적으로라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한 해 동안의 은혜, 매일매일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이것을 깊이 찬송하고 감사 하고 높이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 사 1
감사 1 (2009/11/10 수요예배)
감사 2 (2009/11/22 주일오전예배)
감사 3 (2009/11/22 주일오후예배)
감사 4 (2009/12/02 수요예배)
감사 5 (2009/12/06 주일오후)
감사 6 (2009/12/16 수요예배)
감사 7 (2009/12/23 수요예배)
감사 8 (2009/12/30 수요예배)
감사 9 (2010/01/20 수요예배)
감사 10 (2010/02/03 수요예배)
6.교제와 감사 (2)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1:3-5).
Ⅲ.복음 속으로의 교제
지난주에는 제가 해외에서 사역을 하느라고 말씀을 못 드렸고 지지난주 제가 이 본문을 설교를 했습니다. 내용은 서로가 하나님께 아주 감사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은 바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복음 안에서 교제하고 또 자신도 그들과 교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받은바 물질 건강 질병으로부터의 구출 위기로 부터의 구원 이런 것들로 인해서는 우리들이 감사하지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첫머리에서 그거보다도 더 큰 감사의 조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이 교제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이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지난 시간에는 복음 안에서 라고 되어있는 이것이 희랍어 성경에는 복음 속으로의 교제라고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 복음 속으로의 교제라고 하는 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교제하는데 그 교제의 영향이 서로를 복음 속으로 데려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 속으로의 교제의 시작은 바로 회심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회심하지 아니하면 복음 안에서의 교제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만 회심하지 않은 사람과의 회심한 사람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교제를 통해서 그를 복음으로 가까이 데리고 올 수는 있습니다.
A. 회심: 복음의 시작
그래서 성도의 진정한 교제는 회심을 통해서 그 사람 안에 복음을 아는 신비가 시작되고 난 후에 비로소 성도의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이 성도간의 교제, 그 교제가 우리를 복음 속으로 데려간다는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이러고 마쳤습니다. 맞지요? 약속대로 지금부터 시작을 해야죠?
B. 복음을 알아감
그 복음 속으로의 교제는 회심과 함께 시작되지만 그 복음 속으로의 교제의 본질은 복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교제를 통해서 복음을 알아간다는 그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교제를 통해 복음을 알아간다고 하는 것은 핵심적으로는 세 가지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1. 복음의 내용을 경험함
첫째는 뭐냐 하면 복음의 내용을 경험하는 것. 교제를 통해서 복음의 내용을 경험하는 것, 복음의 내용은 뭐라고 했죠? 복음이 뭐라고 했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게 가장 짧게 복음을 집약한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줄이면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하로는 줄일 수가 없어요. 두 글자기 때문에. 복음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지식을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알고 자시고 말고 할 게 없어요. 한 줄입니다. 어려운 글자도 아니고 (Jesus Christ for us)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렇게 간단한 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경험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인간이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이것을 탐구해도 이것을 거기에 담겨진 신비를 알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라고하는 그 문장 중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예수가 누구고,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죽으셨다는 말이 무엇인가, 위해서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를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의 교제는 이렇게 복음의 내용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은 그 복음의 경험 속으로 데리고 간다 이거야.
그래서 한 사람은 회심하고 복음을 안 사람, 또 한사람은 복음 밖에 있는 사람인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 교제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면서 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무엇인지 데려가요.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이미 회심한 성도들이 함께 넓은 의미에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포함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이미 회심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사귀면서 이 복음의 내용,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그 복음의 내용 속으로 우리를 경험하며 들어가게 만들어 준다 이거야.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너무나 너무나 감사했던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조건이었습니다. 이게 성도의 진정한 교제였습니다. 그러면 복음의 내용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죠. 우리는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한 사람이 대부분이고, 회심을 했다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깊이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복음의 내용을 똑같은 정도로 경험을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이 벌레같은 나 위해 큰 은혜 받으셨나
막 눈물 흘려요. 그리고 이 아무 쓸모없는 만물의 찌끼와 같고 그리고 정화조의 썩어가는 거름덩어리보다 못한 이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왜 죽으셨을까, 그리고 그 분이 과연 이 벌레 같은 인간을 건져내시기 위해서 죽으셨구나, 내가 이런 인간을 향한 이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내가 어떻게 할까 그리고 마음이 확 녹아내릴 때, 그 때 우리의 마음 속에 드는 것은 무엇이냐면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분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순종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내용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1월 달엔 이것을 경험했는데 가을에 가서는 거의 이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아니 뭐 그렇게 장구한 세월을 잡을 필요도 없어. 주일날 그걸 경험하고 펑펑 울고 은혜를 받더니 월요일부터 기도할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돌아치면서 장사하고, 회사다니고, 돈 벌고, 집안에 우환이 생겨서 얼굴을 붉으락 푸르락하고 부부 간에 다투고, 아이들을 쥐잡 듯이 하고, 이러면서 마음이 갈리고 막 이런 일이 있게 되면 복음의 내용을 주일날은 경험했는데 금요일쯤 되면서 마음이 건조해지고, 그렇다고 해서 원래 주일날 알았던 복음의 내용을 잊어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경험하지 못한 거지,
그런데 그것을 교제가, 성도의 교제가 그것을 회복시켜 준다는 거. 그래서 여기서 교제는 구역예배 드리고 이런 정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큰 의미로 교회 안에서 성도가 함께 성도가 교통하면서 살아가는 전체의 그림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으로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도 교통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 영으로 하나 되는 거지. 그 때에 마음이 건조하고 막- 외로웠었는데 수요일 날 이렇게 날도 추운데 텔레비젼을 보면서 그냥 따뜻한 아랫목으로 들어가다가 그래도 이러면 안 되지 하고 나왔단 말입니다. 그리고 또 주님은 수요일 날 아주 추운 날 오신대요. 교회로. 그리고 이제 교회 나왔단 말입니다. 별 기대감도 없이 나왔는데 말씀을 듣고 그리고 또 성도들과 함께 예배 전에 와서 교제를 나누고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일주일 동안 살았던 얘기를 하니까 마음속에서 그 교제를 통해서 복음의 내용 속으로 우리가 경험해 들어가게 되는 거야. 뭐 우리가 늘 일상에서 경험하는 거겠죠. 그 이것은 사람이 우리를 데리고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교제를 기뻐하시는 성령님이 복음의 내용을 경험하게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성도의 교제가 우리를 이렇게 복음의 내용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주 신선한 음식이라도 부패한 음식을 가까이 두면 신속하게 부패하는 것처럼 성도라고 할지라도 마음이 굳어지고 은혜가 식고, 복음의 감격이 사라진 사람하고 깊이 사귐을 갖게 되면 그러면 이렇게 복음의 내용을 경험함으로써 그 교제를 통하여 복음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 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따뜻하고 복음에 대한 감격이 남아있었던 사람이 마음이 차갑게 식고 하나님과 교회와 지체들에 대한 원망, 이런 것들이 생겨나서 마음속에 자기 의를 녹이듯이 따뜻한 은혜의 감사 같은 것들이 신속하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누구와 어떻게 교제하느냐 하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틀림없이 꽤 신앙생활을 해오신 분들은 이 두 가지 경우를 다 경험했을 거야. 내가 영혼이 건조하고 식어가고 어떻게 일어설 수가 없는데 그냥 나오라고 해서 끌려 나갔던 구역 모임에서 조금씩 조금씩 영혼이 회복되는 경험을 하지 않았어요?
(예화) 저는 21살에 회심을 했지만 얼마 안 있다 깊이 방황했거든요. 교회에 가도 안식이 없고 그리고 설교도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그 잘되던 기도는 안 되고 교리적인 지식도 없으니까 지금 내 영혼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도 없고, 그런데 직장에 다니는 한 사람이 김남준 씨, 교회 다니죠? 우리 점심 시간에 성경공부 하는데 공부하러 나오실래요?
그냥 직장은 직장이고 교회는 교회지 직장에까지 와가지고 성경 공부를 하겠다고. 꼭 교회에 가서 직장 다니는 사람들 만나는 거하고 비슷한 거 아닙니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안 갔어요. 그런데 하도 애원을 하는 거야. 그래서 이제 마지못해서 하러 갔는데 모이는 장소도 계속 구석으로 끌고 가더니 창고로 가는 거야. 뭔데? 했더니 물품 창고 선반 사이에다가 의자도 없어가지고 무슨 노트 같은 거, 이런 거를 한보따리씩 쌓아놓고 거기 쭉 둘러앉아서 한 너뎃 명이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별로였어요. 근데 그래도 또 나오라고 나오라고 그래서 갔는데 사실은 내가 체계적으로 성경공부를 한 최초였어요. 보니까 꼭 유익이 되더라고. 또 열두시 정각에 모여서 거기서 도시락을 같이 먹고 그리고 차한잔 마신다음에 30분 동안 이후에 오는 사람들하고 같이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걸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변화를 받기 시작했어. 그래서 직장에서 선교를 귀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나서는 나를 인도하던 그 형제가 허리가 아파가지고 꽤 오랫동안 직장을 못나왔어요. 1년 6개월 정도 못나왔어요. 결국 1년만 지나 내가 그 모임을 인도하게 됐어요. 그러다 난 또 신학교를 가게 되고 자연히 사람들이 나를 전도사님, 전도사님 불러줬어요.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있고, 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주 놀랍게 사람들을 손에 붙여주셔서 나같이 그렇게 방황하는 사람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남자 직원, 여자 직원, 청년, 아줌마, 처녀 할 것 없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렇게 회심하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 형제는 어느 날 나를 만났는데 눈물이 글썽글썽하면서 나는 사랑에 실패한 사람인데 자살해버릴거라고 비장합니다. 근데 내가 그러면 안 된다 우리 성경 모임에 나와라 그랬더니 나왔어요. 그러면서 은혜를 받고 지금 목사가 되어서 아주 훌륭하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교제를 누구하고 하느냐 하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중요합니다.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의 운명을, 일생을 좌우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이 시간에 시간이 없어서 그리고 다 개개인의 얽힌 이야기들을 내 말하지 않는데 교제를 잘못했기 때문에 완전히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거야. 대표적인 게 이단 속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거 이 무서운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경험하게 만들어줘요. 참된 교제는 그래서 그 사람의 삶을 보면서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 사람의 가르침을 통해서, 삶을 보면서, 모본을 통해서 그렇게 복음의 내용을 경험하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래서 그 복음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복음에 대한 경험은 아주 신비해서 마치 햇빛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요.
아주 찬란하게 눈부셔서 그 자체를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태양의 찬란한 빛이 이 만물을 비춰서 생명의 기운을 움트게 하고 우리를 살아있게 하듯이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 복음이 우리 마음 안에서 계속 역사해서 이 벌레 같은 인간을 하나님을 향해 살아있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의 교제예요.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게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인간이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일이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을 이렇게 복음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복음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을 우리들이 뭐라고 하죠? 전도라고 합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매주 화요일 마다 여리고 전도가 110명 많이 나오면 120명 나온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어느 시절에 한 100명 나와서 전도하나 했는데 120명 안양에다 풀어나와 봐야 완전히 무슨 가마솥에 파 서너 알 던진 격입니다. 사람이 모자라. 요새 노래를 합니다. 언제쯤 한 300명쯤 나와서 매주 화요일마다 전도하나 근데 이 세상에서 그거 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어. 한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은 거예요 예? 사람들이 이렇게 마지막 시대가 되어서 전도 하다보면 사람이 우리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예수 안 믿으려고 뜻을 세운 거 같지만은 그러나 사람들이 내면의 세계는 예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많이 곪아 있고 고통 받기 때문에 겉으로는 그렇게 강력하게 배척하는 거 같지만 사실은 그 속에 그렇게 느끼는 그 배척하는 반감이 사실은 그 속에서 견딜 수 없는 참된 종교를 향한 그리움과 그리고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사랑 받지 않고는 해결 될 수 없는 인간의 철저한 공허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철저한 공허를 보여 주는 거야. 바로 현실 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모욕 받는 거 같고 어려운거 같아도 그렇게 문을 두드리면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익어서 추수할 때가 되어있는 영혼을 드물지만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시는 거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확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고 복음 속으로 그들의 데리고 들어갈 때 그들이 느끼는 그 행복과 희열과 인생의 감격은 여러분이 처음 회심때 느꼈던 그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요즘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변하고 이것입니다. 은혜를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일이 바로 그렇게 사람들을 근원하고 또 구원받은 성도들이 끊임없이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이러한 교제가 필요한데 그런 교제의 도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몰라요.
나는 여러분이 은혜를 많이 받고 모두 이렇게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사람들은 하늘에 별과 같이 빛나는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슴 저미는 하나님이 큰 사랑과 매순간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그 세밀한 사랑을 가슴이 저리도록 놀라는 그 사랑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복음 속으로 데려 들어가는 교제의 도구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아직 신앙의 신력이 없고 교리적인 지식이 일천합니다. 만약에 구역을 맡을 정도가 안 된다고 한다면 한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양육교사 응? 그래서 한사람 위해 매일 기도하시며 어떡하던지 그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모하는 마음 얼마나 놀라워요 응? 저도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면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모두 이루어졌어도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이렇게 우리를 바꾸는 놀라운 힘이 있잖아요. 그걸 위해서 헌신해야 되요. 교역자 수련회를 바로 마치고 지금 오는거 거든요. 거의 새벽 1시 가까이 회의를 하고 하면서도 깊이 느끼는 게 뭐냐면 사람이 부족합니다. 마당을 쓸고 밥하고 하는 사람은 부족하지만 더 부족한 것은 뭐냐면 교역자들이 손을 뻗칠 수 없는 그 그늘진 곳에서 그 교역자의 마음으로 보다 더 원천적으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모세혈관까지 뻗쳐가서 그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고 미끄러진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저들을 복음 속으로 가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지혜와 능력을 구하고 예로 그들을 섬길 사람이 절실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너무 너무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까짓 거 교회가 몇만 명이 모이면 무슨 소용 있겠어요.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릴지도 모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먹고 마시며 노래해도 결코 복음 속으로 들어 갈수 없는 그런 교제 되겠습니까?
(예화) 어느 교회에서 야유회를 갔다오고 나서 교회가 발칵 뒤집혔데요. 옛날에 제가 총각집사로 있을 때 실제로 들었던 얘기예요. 같은 교회에는 교회가 왜 그렇네 했더니 남선교회 주최로 야유회를 갔는데 많이 먹을 거 마실 거 싣더래요. 마지막에 봉고뚜껑을 열고 뭐 짐짝이 하나 올라가는데 목사님 눈에 딱 띄었어요. 그게 뭐냐면 진로소주였어요. 그래서 목사님이 “교회에서 야유회를 가는데 무슨 진로소주야?” 그랬더니 거기 남전도회 임원들이 “목사님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우리가 이교회집사들이 안수집사들인데 우리가 이걸 먹겠습니까?” “그걸 왜 가져가?” “아이 목사님 오늘 믿지 않는 불신 남편들을 초청하라고 했잖아요. 그 사람들한테 맞춰줘야 전도가 되지요” 그리고 인제 야유회가 거의 멈췄대나 끝났대나 그랬는데 다 파장하고 일부는 버스타고 가는데 저 뒤에서는 대판 싸움이 벌어졌어요. 이게 뭐냐면 불신자 초청에다가 먹인다 그런 진로소주를 불신자보다 더 맛있게 먹은 사람들이 그 교회 집사들이였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믿음이 있어 따라갔던 사람들이 실족하고 교회를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교제와 정반대의 교제가 아니겠어요? 복음의 내용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교제를 통해 복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2. 복음의 교리를 배워감
두 번째는 복음의 교리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교제를 통해서 복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결국은 논리적이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의 우리가 믿는 신앙이 무엇인가 믿는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에 의해서 우리들이 사는 것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규칙에 대한 지식은 생활의 교훈에 대한 지식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어야 될거를 아는 지식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지식위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지식이 구축되기를 토대위해 건물이 서는 것과 같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차피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냐 하는 믿음에 대한 소원은 매우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럼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게 바로 교제를 통해서 얻게 되는 유익입니다.
그래서 복음 속으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는 성도의 교제는 우리가 성도들과 함께 교재하고 나면 마음속에서 아~ 나는 참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무지하구나 하고서 어떻게 하면 내가 성경을 잘 깨달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면 좋을 텐데 하는 이 마음이 이 속에서 솟구치기 마련입니다.
3. 복음의 정신을 따라 삶
마지막 세 번째는 복음의 정신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 이게 바로 복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회 내용을 경험하고 복음의 교리를 이해하고 그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 이게 바로 복음을 알아가는 거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단순한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감정의 문제도 아니고 의지만의 문제도 아니고 인간전체를 아우르는 그런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를 향한 모이는 성도들의 사랑입니다. 보이는 성도들의 사랑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이제 네 살 다섯 살 요렇게 되면 얼마나 예뻐요. 제일 예쁠 때 잖아요. 그쵸? 아빠 아빠 그러고 말도 하고 그러면 얼마나 예뻐요. “아빠 이뻐?” “아빠 이뻐?” “아빠 이뻐?” 그러면 애들이 뭐라고 대답을 할수 있어요? 누군가가 보고 싶고 그립다고 하는 것은 코나 입이 그립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지갑이 그리울 수도 있겠지 그거는 그런 게 아닙니다. 아무리 자기 생각에 눈이 예쁘게 생겼다고 하더라도 눈만 빼서 공중에 띄어 놓으면 그건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눌 수 없는 정인예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도 그런 거라는 말이죠. 그리스도 안내는 수많은 성품이 있는데 그중에 한두 가지를 사랑하고 몇 가지는 사랑하지 않는다 이런 건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닙니다. 정인으로써의 사랑 그리스도 전부에 대한 사랑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우리 사랑을 주님께 드리고 싶어 하는데 우리의 코나 귀를 드리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지갑만 드리고 도망쳐 오고 싶은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다 드리고 싶은 그런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복음은 바로 우리를 그렇게 그리스도의 사랑 속으로 인도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신에 대해 생각하고 절대자에 대해서 들어왔지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복음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데려가게 해주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요 또 능력이었습니다.
참 지난 구역장 수련회 때도 그렇고 이번 구역장 수련회도 그렇고 그 수련회 속에서 나오는 얘기들이 교회 안에서 알 수 없는 많은 일들 중에 일부겠죠. 또 교회 안에는 그런 좋은 일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마음 아프고 어두운 일들도 있겠죠. 그렇지만 전 무슨 생각을 하냐면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양자들 목자나 유사한 일을 하는 부교역자나 구역장이나 이런 사람들은 설교할 수 있을 때만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을 때만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도 있지만 기도하지 않는 시간도 많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을 때만 영혼을 위해 봉사하고 할 수 없을 때에는 봉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언제나 성도들 교제 안에 계셔서 목회자가 설교할 수 없을 때에도 성령은 설교하시고 목회자가 기도할 수 없을 때에도 성령은 친히 안타깝게 탄원하시고 간구하시고 성령은 목회자가 그들을 찾아가서 돌볼 수 없을 때에도 주님은 친히 홀로 있는 그에게 찾아가셔 가지고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어루만지시고 마음을 싸매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큰 사랑 속으로 데려갑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이 이일을 너무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일을 당신 스스로 행하시지만 언제나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이 일을 행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디베랴 바닷가에서 곧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하고 저주하면서까지 자기를 버린 약한 베드로를 부르셔서 너는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많은 은혜는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쓸 수 없을 정도 그 놀라운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은혜를 입는다면 마음속에 되새기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슴에 항상 세기면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베푸신 그 은혜 가운데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를 그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교제 안에 살게 하셨어요. 우리는 그 교제를 우습게 여기고 그 교제를 마땅히 해야 할 헌신은 다 하지 않았지만 약할 때마다 그 교제를 통해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그리고 나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나에 영혼을 보며 눈물 흘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셔서 그래서 나를 권면하고 나에게 충고하고 그리고 나를 위해 함께 울어주고 이렇게 교제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에서 멀어졌지만 다시 복음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 접붙여 진자가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때가 되매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접 붙혀서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중 하나가 되게 만들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 하나님에 놀라운 은혜이며 우리는 한해가 저물어 가는 이때에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IV. 결론 : 교제와 감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넘치도록 교제에 축복을 주셔서 우리가 약할 때마다 그 교제를 통해 우리를 그 복음 속으로 데려 가셨지만은 그러나 우리는 그 교제 속에 살면서도 우리는 감사하지 않은 적이 너무나 많고 또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아름다운 교제도 거절하고 복음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그런 신실하지 않은 교제를 사랑하면서 우리의 교제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과 합당하지 않은 쪽으로 우리의 교제를 사용하셔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리고 지체들의 마음에 영혼에 손해를 끼친 적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살면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 붙들고 살아가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강하게 붙들어 주셔서 우리를 세상 끝 날까지 승리하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이 알수 없는 신비한 도구를 선택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나누는 이 교제의 영광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넘어졌던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고 쓰러진 자리에서 성령의 은혜를 의지하여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런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런 교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는 무리들을 이 교제에서 끊어냄이 마땅한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썩은 자와 같은 우리들을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들을 연기만 내며 매운 냄새를 풍기며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와 같은 우리를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익 때문에 건지시지 아니하시고 당신 자신의 자비하신 성품 때문에 상한 갈대는 싸매시고 꺼져가는 심지에 그 등불은 돋우심으로써 우리를 다시 살아나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이고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우리의 교제를 통해서 허락을 해주셨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인하여 깊이 감사하고 광야와 같은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이런 교제가 있기 때문에 영원히 짓밟히지 않고 일어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마음을 열고 따뜻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주님께 예배드리고 있지만 지금도 이 추운 겨울날에 미끄러진 영혼으로 쓰러진 지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우리가 관심도 갖지 않은 채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엎드려진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모두 교제함으로써 복음 속으로 데려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이미 이러한 교제를 주신 주님께 깊이 감사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벌레 같은 죄인들이 이 영광스러운 복음 속에서의 교제 속에 살도록 허락해주신 이 큰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이 교제로부터 멀어져 엎드려진 영혼들 하나 하나를 불러 그들과 교제하므로 복음 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인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감 사 1
감사 1 (2009/11/10 수요예배)
감사 2 (2009/11/22 주일오전예배)
감사 3 (2009/11/22 주일오후예배)
감사 4 (2009/12/02 수요예배)
감사 5 (2009/12/06 주일오후)
감사 6 (2009/12/16 수요예배)
감사 7 (2009/12/23 수요예배)
감사 8 (2009/12/30 수요예배)
감사 9 (2010/01/20 수요예배)
감사 10 (2010/02/03 수요예배)
7.도우심의 돌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7:12).
I. 본문의 배경
오늘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무엘시대 때에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무엘시대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많이 괴롭히던 족속이 있었는데 그들이 다름이 아닌 블레셋 족속 이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주 강력한 군인들로 이루어진 기동성 있는 군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척박한 땅에서 살면서 이스라엘백성 국경을 넘나들면서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이스라엘백성들이 힘들어하던 그러한 나라였습니다. 그들이 심지어는 법궤까지 빼앗기는 상황에 이르는 곤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6장에서 그 법궤가 돌아오는 장면이 나오고 이제 이속에서 백성들이 블레셋을 인하여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 할 때 선지자 사무엘은 정치적으로 찾은 것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찾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아스다롯을 섬기는 이방신앙을 버리고 하나님 한분만을 오로지 섬기도록 강력하게 촉구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이제 블레셋 군대가 처 들어오는데 군사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열세였음에 틀림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 개입하셔서 큰 우레를 바라시며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므로 이스라엘백성들에 큰 승리를 안겨주셨고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미스바에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갈 때에 그들을 추격해서 백길 아래까지 이르러 쳐부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늘 짓밟히고 패배하고 심지어는 법궤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다가 이제 통쾌하게 이들을 무찌르고 이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하는 놈들을 추격해서 그렇게 강력한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스라엘백성들의 이 감격이 얼마나 컸는지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놓고 그들은 이제 큰 승리를 거두어 기뻐하고 있을 때에 사무엘 선지자는 그들에게 명령하여 큰 돌을 취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구약에서 자주 있었던 기념비를 세우는 사건 이였습니다.
II. 하나님의 도우심
그리고는 미스바와 세웅 사이에 세워놓고는 이돌 이름을 에벤에셀 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에벤은 돌이라는 뜻이고 에셀은 도움이란는 뜻입니다. 사람이 조금씩 도와주는 종류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응원군이라는 뜻입니다. 패배 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승리로 바꾸어놓는 그런 종류의 응원군과 같은 도움 그 큰 도움의 돌 이것을 세워 놓은 것은 이스라엘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께로 입은 은혜와 그로 맘미암는 승리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 이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동안 자라난 아이들이 그 돌을 보면서 물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저 돌이 뭐예요? 에벤에셀 이란다. 그게 뭐지요 블레셋을 도저히 이길 수 없을때 그 블레셋 군대와 전쟁에 패배 할 수밖에 없었을 때 하나님이 거기까지 오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원수인 블레셋을 멸하고 큰 승리를 거둔 바로 그 사건에 대한 기념 이란다 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벤에셀의 의미하는 바였습니다. 이것을 그 이름을 에벤에셀 이니라 하면서 돌을 세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무엘의 마음속에 두 가지를 생각나게 하기 위함 이였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위기와 하나님의 큰 도우심 이두가지를 대조시키기 위함 이였습니다. 위기가 닥치고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그때 비로써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되고 이제것 사는 것이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리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믿음인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우리들이 깊이 깨달을 때 그때에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은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이 당신의 도우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큰 도우심을 베푸셨을까요. 자 이 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불신앙인가 하는 것을 잘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고 도움을 의지하고 계산하며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들을 도우셨을까 나라가 공동체가 큰 위기에 처했 을때 사무엘선지자는 그들을 미스바에 모두 모이게 했습니다.
이 미스바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 말로 미쯔바인데 계명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명부터가 아주 범상치 않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생의 위기를 만나서 괴로워하고 풍요하고 있을 때 사무엘선지자는 마치 모이는 장소를 통해서라도 그들을 깨우치려는 듯이 그들을 미쯔바라고 하는 것으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기전에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계명을 지키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죠. 자 그런데 그들이 언제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났는가 세 가지로 나타나게 하고 있습니다.
A. 모여 기도할 때
첫째는 그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엄밀하게 말하면 여기에서 성경은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이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무엘이 혼자기도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인 이 사무엘의 기도에 함께 동참 하므로 써 온 민족이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그들이 함께 모여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의 큰 도우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개인적인 기도 생활과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주님 앞에 간구하는 이 기도의 생활이 두 개가 매우 밀접하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큰 도우심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위기가 닥치면 우리의 몸과 마음 안에 있는 모든 작용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될 인생의 위기 시련의 때 그 시련의 때를 믿음으로 극복 하고자 하나님 앞에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매달릴 때는 우리의 몸도 많은 변화가 오게 됩니다.
예전에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에 끌리던 우리의 눈과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눈은 오직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귀는 오직 들리는 것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듣고자 하는 집중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일어나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모든 기관이 일치를 이루는 것처럼 동일하게 교회가 어려움이 있을 때 온 지체들이 한 마음으로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을 찾게 될 때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공동체 적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도우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주님의 도움을 염두 해둘 때 우리는 도전할 수 있고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목표에 도전할 수 있고 그리고 남들이 모두 낙심할 때 거기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을 가질 수 있지 않겠어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믿음이 없는 사람과 다른 이유는 남들이 계산에 넣지 않은 이것을 계산에 넣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소망을 갖는 것 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눈에는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믿음은 이상하게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이상하게 강한 확신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이유는 설명할 순 없지만 그 일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루실 것 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새로운 소망을 걸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 아니예요? 신앙생활이죠.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도전과 어려움에 직면해요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염두 해 두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금식할 때
두 번째는 이들이 하나님 앞에 금식 할 때에 하나님이 이들을 도와 주셨습니다. 이 금식은 우리의 육체의 욕구를 중단하고 우리의 영혼이 육체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갈망하도록 하나님께 집중하게 만드는 한 수단인 것입니다. 금식자체가 하나님 앞에 내세울만한 공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영혼이 육체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도록 도와주는 그런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들이 좋은 가락을 들으면 더 많이 듣고 싶고 예쁜 빛깔을 보면 그 빛깔과 닮은 어떤 물건을 갖고 싶거나 옷을 입고 싶거나 다양한 욕망들이 생겨나고 그렇죠. 또 어떤 보드라운 것이 느껴지면 그 감촉의 좋음 때문에 그 좋은 감촉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 그것을 옆에 두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 입니다.
그런데 이런 욕망을 계속 느끼기 위해서는 육체의 힘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곡기를 끊고 육체의 에너지를 현저하게 줄이고 나면 그러면 이것들에 의해서 이끌리는 그 욕망의 크기가 현저히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잘 묘사하는 속담이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아무리 좋은 것을 보여줘도 배가 고프면 보고 싶질 않아요. 영국에 집회를 갔을 때 “목사님 여기 오셨으니까 이걸 보셔야 됩니다. 점심시간이 됐는데 밥줄 생각을 안 합니다. 여기서 밥을 먹으면 좀 그러니까 두 시간쯤 더 가서 밥을 먹자고 하며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자기는 젊으니까 제때 밥을 안 먹어도.. 나도 뭐 옛날에는 일주일씩 밥 안 먹고 그래도 일주일씩 기도원에서 금식하고 친구들 가방까지 어깨에다 짊어지고 산에 내려 왔어요. 뛰기도 했어요. 그런데 나도 한창땐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기운이 없잖아 힘들잖아 시간에 음식이 안 들어가면 당이 떨어지면서 눈도 잘 안보이고 입술이 발발발 떨리고 그래요. 그런데 밥줄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어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구경 못해도 좋으니까 밥 먹고 하자 기운이 없어서 안 되겠다. 그래서 앞으로 모든 순서는 밥 먹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그 시간을 지키고 나머지를 거기다 맞추자 그때를 놓치면 들어오는 것들이 느끼고 해석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어지는 거예요 힘들어져요.
똑같이 그러면 악하고 그런 욕망만 없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을 해야 할 적극적인 에너지 이런 것들도 별로 없어요. 잘 안 나와요. 그 대신 조용히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집중 할 수 있는 큰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금식 속에서 실제로 금식을 해보면 밥을 먹었을 때 기도를 더 많이 하지 그렇잖아요. 그러면 기도를 막 열열이 땀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 못 하잖아요. 기운이 없어서 그냥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 졸지는 않아요. 왜냐 하면 금식하면 잠이 더 안와요 배가 고프니까요. 그래서 그저 교회 앞에 가서 강당에 엎드려 있으면 졸지는 않지만 기운이 없어서 그냥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 하게 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집중의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를 들어 봅시다. (예) 카메라를 삼백만원, 오백만원, 천만 원 좋은걸 샀다고 쳐요.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고 쳐요 요즘 다 자동이라서 잘 나오지만 옛날엔 수동 이였잖아요. 찍는다고 칩시다. 그런데 수천 장을 찍었어요. 그런데 초점을 안 맞췄어요. 그러면 한 장도 쓸 사진이 없어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예요. 이른 아침서부터 밤까지 주일날부터 시작해서 토요일까지 쉼 없이 주의 일하고 또 성경을 읽고 또 기도를 하고 모임에 참석을 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봉사활동을 하고 전도를 하고 그래도 마음의 초점이 하나님 앞에 맞춰져있지 않으면 하나님에게는 그가 해낸 일들이 초점을 안 맞추고 찍은 수백 장의 사진과 같은 아무 때도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장이라도 호흡까지 멈추면서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고 한 장 찰칵 찍었을 때 선명하고 깨끗하게 나온 그 사진은 왠지 크게 확대해서 걸어두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되잖아요. 그런 거라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살아가는 그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우리의 일의 양의 크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각자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집중된 그 무엇이 있을 때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도 교역자 들이나 구역장 들이나 늘 보면서 제가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그저 주어진 일들을 해 나가는 것은 그저 웬만한 성실성이면 해나갑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흔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 영혼의 놀라운 변화 하나님의 큰 부흥 그리고 사람들이 놀랍게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등 돌렸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심의 역사 그리고 잘못된 생각과 그릇된 견해 속에서 잘못 길을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길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커다란 영적인 각성 그리고 무엇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고하던 자기 자신의 마음을 내다보면서 이것이 하나님 앞에 옳지 않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 변화 되는 것. 이런 모든 크고 놀라운 변화들은 하나님 앞에 집중할 때 나타나며 자연적인 능력이 좀 모자라고 부족해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온전히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보좌에 두고 온전히 집중된 사람.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나뉘어지고 갈라진 체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허락하시지 않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영혼변화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너도 나도 은혜 받았다고 그러지만 주위를 이렇게 돌아보면 정말 생애 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된 영혼의 커다란 쇄신의 때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물론 여러분도 교회에서 여러 사람을 보지만 그러나 절대 다수에 비하면 그 사람들은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그걸 여러분이 기억을 해야되요. 만약에 교회에 발길을 들여 놓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변화 됐다면 미끄러진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고 그 은혜를 계속 유지 했다면 지금 아마 우리교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교회가 됐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때 우리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었다 할지라도 그 하나님 옛날에 만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살게끔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지요.
어느 한 순간에 교회에 큰 부흥을 주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옛날의 그 부흥의 추억과 불실을 간직하며 사는 것으로 충분하도록 하나님이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셔, 내버려두지 않으셔요. 유럽에 건물이 팔리는 그 많은 오래된 건물들이 지금은 유지할 비용이 없어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팔리지만은 그러나 사실 그 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성령의 강력한 역사 속에서 교회가 주님을 만나고 부흥하던 과거에 역사가 있는 교회들 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핍박과 고난을 이기면서 목숨보다 더 신앙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핍박을 견뎠던 것입니다. 문제는 일상적으로 우리들이 살아가고 주님을 믿는 것 말고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이렇게 본성적으로 착실한 사람들 있잖아요 뭐 특징은 없어도 착실한 사람들 있잖아요.
(예) 학교가면 선생님 말씀이라 면 껌벅 죽진 않아도 튀지 않고 선생님 시키는 대로 하는 학생들 있잖아요. 모범생이라고 하진 않아도. 어째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다 잘해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모범생 아니야. 그렇지 않아요? 마치 농담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무용도 잘하지만은 전쟁나면 싸움 못하는 군인과 똑 같은 것 아닙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 있잖아요 교인들도 그런 사람 있습니다. 자 등록 하십시오 하면 아예 등록해야 하는거군요. 등록이요 등록했으면 저 새가족 반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아예 그럼 해야죠. 새가족 끝났습니다. 성장반 들어가야죠. 아 좀 길긴 하네요. 그래도 해야죠. 끝났으면 이젠 선교학교 들어오세요. 아 그래요 네 알았습니다. 뭐 하십시오 해도 꼬박 꼬박 따라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변화가 안돼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뺀질거리고 등록한지 2년이 됐는데도 성장반도 안 나오고 심지어는 교회에 등록한지 7년이 됐는데 교회 집사가 안 된 사람이 있잖아요. 그 얼마나 뺀질거리겠어요. 그럼 한 2년3년 놀다가 교역자가 아주애원 애원 해가지고 새 가족 성경반에 들어와 들어와서 몇 주 만에 생애적으로 회개를 하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럼 그 앞에 있는 그 착실한 사람이 볼 때에는 하나님이 차별대우를 하시는 뜻한 난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저 사람은 그렇게 뺀질대고 말성 다 부리더니 어떻게 와가지고 저렇게 변화되고 참 그러나 말이지. 그런 걸 이렇게 보게 되잖아요.
옛날에 어떤 얘기 들으니까 사경회를 하는데 부인이 그랬데요. 남편이 하도 뺀질거리고 교회를 안 다니니까 남편한테 막 그냥 아부를 하고 아첨을 하고 비유를 맞춰가지고 열린교회 사경회를 하니까 가자고 하니까 안 간다고 했겠죠. 당연히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꼭 가자고 해서 남편이 와서 회심을 했어요. 그게 어려운 설교였거든요 아 그리고 심방을 했는데 그리고 아 그 어려운 설교가 이해가 됩니까. 예 거의 다 이해가 되고 제가 은혜가 되어 이제는 제가 신앙생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을 데리고 온 자매는 그 설교가 무슨 설교인지 잘 모르겠다네요. 얼마든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이겠어요.
중요한 게 뭐냐면 집중하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집중 하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를 하던 예배를 드리던 무엇을 하던지 간에 집중 하는 거 그래서 거기에 마음을 다 쏟아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C. 회개할 때
세 번째 마지막으로는 회개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고백 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나이다. 그랬습니다. 왜 범죄 했을까요. 우상을 섬겼어요 우상을. 그래서 우상을 섬겨서 우상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고 복을 받으려고 했고 하나님도 섬기려고 했고, 이것 이였어요.
이것은 사실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겠죠 그래서 이들은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 앞에 살다가 하나님 앞에 사무엘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깨닫고 나니까 회개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우상을 섬긴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오네요.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그랬어요. 그다음에 뭐라 그랬나 하면요. 물을 길러서 여호와 앞에 붓고 그랬거든요. 물을 길러서 확 부었어요. 이게 뭘 뜻하는 것일까 이게 뭘 뜻하는 것 일까 하면요 (예화) 음 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뭐 그런 강태공 이야기에 나오나 기억이 아무튼 가물가물해요 어 별 볼일 없이 남편이 놀기만 하니까 이제 부인이 보따리를 싸서 도망을 갔는데 후에 이 사람이 입신양면해서 큰 지휘에 오르게 됐어요. 그러니까 이 부인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옆에 있었으면 지금쯤 아주 높은 사람의 부인이 되어 있었을 텐데 본전 생각 안 나겠어요.
여기 자매들 많은데 어느 형제를 둘이 놓고 이리견주고 저리견주고 해봐서 그러다가 그저 이쪽이 좀 난 것 같다 해서 이리 갔는데 나중에는 별 볼일 없는 그런 부담스런 존재가 됐는데 자기가 버린 그 남자를 자기 친구가 줘 갔는데 그 사람은 승승장구 해가지고 사회적으로도 존경을 받고 아주 신앙적으로도 아주 훌륭하고 아주 잘 사는 사람이 됐다고 그러면 자기 선택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되겠죠. 야 참 간발에 차이로. 내가 그 사람을 붙들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겠어요.
이 여성도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래서 여기 와서 그 화려한 행차를 하는 그 자리에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서방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날 좀 다시 받아주십시오 그랬겠죠. 그랬더니 얘들아 물을 한 그릇 떠 오너라 그래놓고 물을 그 질그릇 채 확 부었어요. 그러니까 질그릇이 떨어지고 물이 확 쏟아 졌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가 하고 있을 때 주서 담아봐라 주서 담을 수 있겠어요 주서 담을 수 없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물을 확 부은 것이 무슨 소리냐 하면 우리가 저질은 죄는 이제 돌이킬 수가 없는 주님 앞에 저지른 죄입니다. 그 고백입니다. 그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뭘 보여주는 것이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피하자 않는 것 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을 때가 되면 자지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가슴 아프지만 정직해 집니다. 그래서 사람이 당신 이것 잘 못했습니다. 그럴 때 혹시 그 잘못 했습니다. 라고 지적하는 하는 태도가 맘에 안 들거나 혹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야 마음이 상할까봐 아주 애절한 마음으로 당신이 이런 것은 잘못했다 이렇게 얘기를 하겠지만 평소 그 인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은 오우 기회가 왔구나 하고 와가지고 너 이것 잘못됐지 이렇게 이야기하고 오히려 너가 이렇게 잘못 될 때는 너 속에 이런 마음으로 이런 잘못한 거지 그리고 포대기로 확 씌우잖아요 그죠.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을 지적 하실 때 우리도 그렇게 반발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 증거가 뭐죠?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이 하와를 찾아오시고 아담을 찾아오실 때 그들은 내가 잘못했나이다.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 아니 둘이 그렇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사이였으면 내 남편은 아무 죄도 없어요 제가 꼬시고 제가 줬어요 그렇게 해야 될 것이고 아내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가장인 내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먼저 언약을 맺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죽어도 내 아내는 살려 주십시오 그래야지 거기서 치사하게 저 여자 때문에 그랬다고 말이지.
그래서 온 인류의 역사에 남성들의 망신을 다시키고 그 할아버지 왜 그런지 몰라요 그래서 되겠어요? 그런데 여러분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 앞에 돌이킬 때가 되면 이상하게 나를 잘못하게 만들었던 환경 다른 요인 이런 것 하나도 안보이고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나 때문입니다. 라는 고백이 생겨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런 표시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확 부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큰 잘못을 했습니다. 우상숭배라고 하는 끔찍한 큰 죄를 저질렀고 그것을 돌이킬 수 없이 물이 쏟아져 부어진 것처럼 되어서 그 마지막에 남은 유일한 희망은 무엇이죠? "하나님의 용서“ 그것밖엔 없는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하는 거죠? 하나님 앞에 회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죄와 강박감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어라하시네
하나님 앞에 간절히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들을 도와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 한 것은 직접적으로는 사무엘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또 멀리 보자면 블레셋 백성들의 끊임없는 위업 앞에 그들이 누구를 의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스바에 모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 할 때는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블레셋 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지 하는 그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죄는 물 쏟은 것처럼 쏟아졌고 이제는 하나님용서 밖에 없다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 하게 되었던 것 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실 지는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의 생각을 초월해서 우리를 도우실 때 하나님의 영광은 오히려 더 크게 나타납니다.
III. 도우심을 기념함 : 에벤에셀
그러면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념하며 에벤에셀의 도를 세웠던 것입니다. 한번 우리의 인생 전체를 돌아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때 마다 우리의 마음 안에 기억의 에벤에셀을 세웠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 도움의 때를 한번 오늘 저녁에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내 인생이 블레셋과 같은 대적을 만나서 도저히 나 혼자의 힘으로 지탱할 수 없었을 때 주님이 거기서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가장 곤고한 때 고난과 시련이 꼬리를 물고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우리 자신을 세울 수 없을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고 새로운 힘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도 했습니다.
IV. 결론
우리는 세월은 많이 흘러갔지만 그때의 그 기억은 우리의 가슴속에 선명하게 새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갔던 그곳에 다시 갔을때 또 우리가 위기를 만났던 그 시간을 회고 할 때 우리는 정말 하나님 은혜로 일생을 살아온 사람들뿐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감사함이 넘치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감사함이 넘치게 되지 않습니까. 가끔 주님의 일을 하면서 또 크진 않지만은 작은 믿음이나마 가지고 신앙대로 살아보려고 할 때 우리에게는 괴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가슴에 새겨야 됩니다.
주님 주님과 함께 가는 이 믿음의 길에서 생기는 가장 치열한 어려움이 주님 밖에 있는 동안의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져온 인생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해요 그래서 그 은혜를 잊지 않는 여러분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생은 주님의 도우심에 빚진 인생이고 우리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인생임을 기억하면서 주님 의지하고 매일 매일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감 사 1
감사 1 (2009/11/10 수요예배)
감사 2 (2009/11/22 주일오전예배)
감사 3 (2009/11/22 주일오후예배)
감사 4 (2009/12/02 수요예배)
감사 5 (2009/12/06 주일오후)
감사 6 (2009/12/16 수요예배)
감사 7 (2009/12/23 수요예배)
감사 8 (2009/12/30 수요예배)
감사 9 (2010/01/20 수요예배)
감사 10 (2010/02/03 수요예배)
8.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4).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나라의 영적인 회복이 있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이사야 40장서부터 서술하는 가운데 나오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과 죄악 가운데 고통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후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 낙망하는 사람들의 불평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II. 낙망하는 자의 불평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거니와” 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낙심 혹은 낙망하는 것은 매우 커다란 잘못입니다. 우리는 이 낙심하는 것을 흔히 죄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어떻게 보면 낙심하는 것은 아주 지극히 인간적이고 그리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낙망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영혼의 질병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낙망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기보다는 그 영혼이 병들어 있는 상태가 낙망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실제로 낙망될 때에 뒤따라오는 일들에 대한 적절한 은혜로운 처결이 없다면 그 낙망은 더 큰 범죄와 실패로 사람들을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낙망이라는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낙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쉽게 얘기하면 희망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서는 절망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절망은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를 우리에게 보여주죠. 희망이 끊어진 것이고 이것은 희망이 떨어진 것이니까. 어쨌든지 간에 두 가지는 매우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희망이 사라지는 것, 낙망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불신앙입니다. 그러면 그 불신앙의 정체는 뭘까요? 불신앙은 믿지 않겠다는 마음의 완고한 고집입니다. 그래서 불신앙은 하나님 앞에 아주 명백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연약함이 아니라 안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 믿고자 자기 자신이 마음 속으로 의지를 행사해서 자기 삶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엮어서 마지막 귀결이 희망이 없는 것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해전 민수기 14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어떻게 시작되고 마지막에 우리를 어떻게 파괴하는지에 대해서 여러 주 동안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렇게 낙망하는 것은 그 마지막 끝이 오직 하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망의 끝입니다. 절망한 모든 사람들이 항상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죠? 죽음입니다. 그리고 절망의 마지막에서 죽음을 찾는 사람들이 결국 마지막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마음에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욥기에서 잘 나타납니다. 부자이고 부족한 것이 없이 잘 살던 욥에게 큰 환난이 닥쳤습니다. 재산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리고 자식들이 죽고 자기의 몸은 큰 질병 상태에 걸려서 기왓장으로 헌데를 긁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 아내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려라.’ 그리고는 욥을 떠났습니다. 그게 바로 절망의 끝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도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실제 죽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고 마음으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는 그것이 곧 죽음이다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유의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어떤 식으로 낙망 속에서 희망을 가질 것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자기 암시적인 희망과 그리고 신앙적인 희망을 분리해서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암시적인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자신을 격려하고 스스로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잘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반드시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반드시 행복하게 될 것이다.’ 끊임없이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암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게 뭐가 나쁘냐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쳐있고 기죽어 있는 자신에게 ‘너는 잘 할 수 있을 거야, 잘 될 거야, 이 세상에서 반드시 성공할 거야. 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승리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나 자신을 격려해서 희망을 갖는 것이 뭐가 나쁘냐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은 매우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먼저 한다면 이것이 왜 좋은 것이 아닌 줄을 깨닫게 됩니다. 자, 우리들이 신앙의 관점에서 참된 행복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것들을 소비하고 그리고 부족한 것 없이 사는 것, 이것이 행복한 것일까요? 물론 행복에는 그런 그림이 포함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행복의 본질은 그런 식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참된 복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태양 하나가 빛을 비추어 수많은 식물들을 자라게 하고 동물들을 번식하게 하고 온 땅에 따스한 온기를 비추어 생명을 깃들게 하듯이 생명의 현상은 다양하고 햇빛이 만들어 내는 작용은 끝없이 많지만 오직 태양은 하나인 것처럼 우리의 행복도 그것은 모두 햇빛이 비친 결과처럼 꽃이 피고, 잎이 피고, 가지가 뻗고, 그리고 생물들이 번식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 그 자체가 태양은 아니듯이 하나님만이 참된 복의 근원이시고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 사랑의 질서에 따라 누리게 되는 그 복이 진정한 행복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이 잃어버리지 않는 행복이란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매우 좋은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졌기 때문에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 혹은 그것으로부터 배신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떨림이 있다면 그것을 가진 것을 어떻게 우리가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아주 귀한 보물을 손에 넣기 위해서 죽고 죽이는 치열한 추리극 같은 것을 봅니다. 그걸 손에 넣은 사람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찾는 행복입니다. 복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은 누구도 뺏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은 하나님은 누구도 뺏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은 하나님과 관계된 질서 속에서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 잠시는 낙망한 우리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주인 삼은 삶의 대표적인 표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우리로 하여금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자기 암시적인 희망 속에는 이런 것이 없어요.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점점 더 독립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 하던 어떤 사람이 일이 잘되었을 경우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지만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가 참으로 자신을 믿은 결과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믿게 될 때 그때 그는 하나님을 더 의지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이 되겠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희망을 갖게 하시는 방식은 자기 암시적인 방법이 아니라 신앙적인 방법입니다. 신앙적인 방법은 뭐냐 하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성품 앞에서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으로써 그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 희망은 하나님 때문에 발견한 희망입니다. 돈이 몇 푼 있다고 갖는 희망이거나 내가 마음먹은 것이 한두 가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갖게 되는 희망이 아닙니다. 만약 그러한 근거한 희망이라면 그 희망은 얼마나 빈약한 것일까요? 마치 벼랑 끝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붙든 썩어가는 뿌리 같지 않을까요?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누가 그런 비유를 들었어요. 죄인의 처지가. 벼랑 끝에서 미끄러지다가 간신히 뭘 하나를 딱 잡았어요. 그런데 뭐냐 하면 절벽 아래로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붙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붙들고 간신히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데 붙들 것도 없고 오직 그거 하나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정을 다해서 움켜쥐고 자기 손을 거기에 붙들어 매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쥐가 두 마리가 와서 갉아먹는 것입니다. 하얀 쥐가 한번 와서 갉아 먹고 가면 한참 있다 까만 쥐가 와서 갉아 먹고 가고 그 다음에 흰 쥐와 검은 쥐가 교대로 하루에 한 번씩 와서 갉아 먹고 가는 것입니다. 하얀 쥐는 낮이고 검은 쥐는 밤입니다. 낮과 밤이 그 희망을 계속해서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계속해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발견하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은 것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신으로 남았을 때 그때 자신의 마음은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과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되게 하고 싶은 내가 나도 내가 되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것을 나도 가지고 싶은 상태가 될 때, 그때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 때문에 희망을 갖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적인 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신앙적인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앙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그렇게 불평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사물들의 질서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에 우리가 교만이 꺾였을 때에,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꺾어져서 뉘우치는 마음이 없을 때에 생겨나는 우리의 마음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왜 우리도 사귀다가 보면 잘 삐치는 사람 있죠? 여자만 그런 줄 알았더니 남자도 그래. 남자도 그렇게 잘 삐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좋은건 아니죠. 결코 좋은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삐치는 사람들이 장점도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잘 풀려요. 제가 회심하기 전에, 회심하고 나서도. 아마 지금도 아마 그런 기질이 있을 것입니다. 아주 굉장히 잘 삐쳤대요. 제가 생각해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아주 미세한 것까지 느낄 수 있는 더듬이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저의 할머니가 그러셔요. 같은 말씀을 하셔도 사랑이 있으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어려서 참 잘 삐쳤다’ 그렇게 말씀을 안 하시고 ‘얘야, 너는 어려서부터도 틀렸단다.’ ‘왜요?’ 그랬더니 네가 뭘 심통이 나서 맘에 안 들면 소리소리 지르면서 운대요. 그러다가도 막 울고 있는 거를 ‘남준아’ 하고 부르면 눈물을 씻고 ‘응’ 그런대요. 자기가 울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또 잘 삐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게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잘 삐치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귀담아 들으면 ‘화를 자주 내고 자주 풀어지는 사람이 결코 화를 안내지만 결코 풀어지지 않은 사람보다는 훨씬 훌륭한 사람이다.’ 한번 누구하고 틀어졌다하면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절대. 쇠뿔은 단김에 빼라는데 쇠뿔 뽑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합니다. 쇠뿔이 골통하고 붙어있는데 어떻게 뽑겠어요? 절대 못 뽑습니다. 그렇게 쇠뿔처럼 단단하게, 좀처럼 흔들리지 않지만 한번 비위장이 틀리면 확 꽂혀서 절대로 변화되지 않는 사람, 결코 좋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뭘 얘기하다 일루 갔지?
낙망을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낙심을 하고 있는데 그 낙심한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 원망하는 상태로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이키면 될 텐데 돌이키기는 싫고 지금 펼쳐지는 자신의 상황은 맘에 안 들고 하니까 이제 의인화 된 이스라엘 백성이 뭐라고 말하냐면 ‘여호와께서는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는 나를 잊으셨다.’ 이게 무슨 뜻이예요? 이제 신앙적으로 올바로 하려고 애를 쓰는 모든 것이 쓸데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뭐죠?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시로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풍설들은 초대교회 때부터 늘 있었어요. 이번에도 2012년이란 영화가 나와서 종말에 대한 개념들을 확 이렇게 일으키잖아요. 그런데 11세기경에도 이런 종말 사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천년마다 우리가 천구백 팔십 몇 년도에도 종말이 온다는 사상이 확 우리나라에 퍼져서, 집에도 안 들어가고 하얀 옷 입고 교회서. 교회도 아니지, 이단들의 집합소에서. 그런데 금방 종말이 오는데 헌금은 왜 하라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성전을 짓는다고. 종말이 올 텐데 그건 뭐하는 짓는지. 그런 사람들이 늘 있었어요. 그런데 종말이 온다고 선포가 되면 사람들이 굉장히 두려워하면서 벌벌 떨며 하나님을 찾을 것 같죠? 안 그래요. 항상 종말이 온다는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면, 무자비한 약탈과 살인, 특히 약탈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잖아요. 그리고 얼마나 TV에서 우리가 감동을 받았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자원봉사 하겠다고 몰려들었잖아요. 구조대가 진짜로 땅속으로 들어가 보니까 돈 통은 다 털어갔대요. 첫 번째 들어간 사람들이 그 속에까지 생명을 무릅쓰고 들어가서 돈통은 다 털어간거야. 그게 바로 절망적인 상태에서 인간들이 행하는 그러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이 절망은 불신앙의 모습이다. 이런 얘기예요. 이런 것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떨쳐내야 되요. 떨쳐낼 수 있는 방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자신을 타이르며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오히려 ‘하나님은 너희를 잊지 않으신다’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그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제시를 하면서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이게 갓난 아기란 뜻이거든요.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 그런데 이 말도 사실은 안 맞는 말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신문을 보니까, 양수까지 묻어있는 아이라니까, 아마 낳자마자 갖다가 어느 빌라 앞에다가, 그것도 갖다 놓으려면 따뜻하게 포대기를 많이 싸서 놓지, 하나만 싸서 남의 빌라 계단에다 놓고 간 것입니다. 세시쯤 돼서 자장면 배달하러 온 사람이 보니까 애기가 거기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가지고 지나가는 대학생 하고 둘이 이 아이를 데리고 점퍼로 그걸 감싸고 그리고 이제 경찰선가 병원으로 뛴 것입니다. 병원에 도착하니까 애가 체온이 30도까지 떨어졌더래요. 죽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한 시간 안에 죽을 텐데,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살았는데. 목욕도 안 시킨 애야. 양수가 묻었다니까 낳자마자 갖다가 버린 것입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아이를 잊겠느냐’ 젖 먹기도 전에 잊어버렸잖아. 갖다 버렸는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버렸잖아요. 인간에게는 이런 것들이 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이, 불신자들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는 죄의 엄청난 힘을 설명할 때에 이렇게 인륜까지 끊어버리는 죄악들이 얼마든지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예증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소위 얘기하는, 가장 하나님 사랑을 닮았다고 하는 인간의 모정, 부정 이런 것들도 이렇게 죄와 악이 가득 차게 되면 아주 비정하게 그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단서를 달잖아요.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그런 부모 자식 관계에 충실한대 소수의 사람들이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A.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랑입니다. 여기서 잊는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아주 쉽게 얘기하면, 성경에서 특히 구약 성경에서 ‘안다’라고 하는 것은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경험적인 앎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입니다. 부모보다도 친구가 나를 더 사랑하면, 부모보다도 친구가 나를 더 잘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아는 것은 사랑한 사람만이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아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언제나 커다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예요. 여러분, 가만히 회상을 해보세요. 여러분이 죄악 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어느 순간에 깊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나아왔을 때, 그때 여러분의 마음에 커다란 감격이 되었던 것이 무어죠? 내가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알아보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견고하지 않을 텐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깨닫고 보니까, 하나님이 이러한 사랑으로 나를 만나주시기 위해서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을 가지고 나를 이렇게 세밀하게 내 인생에서 나 스스로 생각하기엔 우연이라고 생각되었던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면밀한 계획 속에서 나는 지극히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왔지만 하나님의 그 치밀한 계획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셨구나 하는 그것이 우리에게 감사의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내가 주 예수를 알기 전에, 주님이 나를 먼저 아시고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원 전에 있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약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예정의 교리예요. 그래서 예정의 교리는 누가 구원받았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교리가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만의 교리예요. 구원받은 성도들이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무궁한 계획 속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께 영원무궁한 찬송을 돌리기 위한 찬송용 교리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난을 만나고 고난을 당하고 외적의 침입을 받아서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놓이고 하는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그러나 그중 어느 하나도 하나님이 모르고 계신 일이 없었고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 발생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고 피바람이 부는 큰 전쟁에서의 패배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되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실 때,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악과 선의를 달아보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기도 하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공동체적으로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주 못된 사람만 하나님이 골라서 죽이시고 그 다음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사자들을 묶어보니까 쓰레기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죽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중엔 신실한 사람들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하나님이 공평하시지 못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개인으로도 다루시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를 공동체적으로 보고 다루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신약에 와서 똑같이 하나님이 개개인을 보고 다루시기도 하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다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공동체성을 떠난 개인의 삶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아무리 올바라도 그 올바름의 상당 부분은 교회의 올바름에 기초하고 있고, 또 교회가 많이 부패했는데도 자기를 하나님이 건강하고 온전하게 신앙을 보존해 주셨다면 건강하고 온전한 신앙이 썩어져가고 있는 교회를 위해 이바지 하는 그런 것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약에 나에게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은혜를 특별히 주셨다고 한다면 그러면 더더욱 교회 같지 않은 교회에 머물도록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예요. 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흘려보내셔서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께서 지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의 몸에, 암세포가 웬만한 사람의 몸엔 다 있습니다. 십만 개만 넘지 않으면 별로 문제가 안 된대요. 그것도 뭉쳐있지 않으면. 뭉치면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때요? 몸이 병들수록 건강한 세포들이 많아야지 몸의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마찬가지로 이 교회를 하나님께서 공동체적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오늘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의 교회론이 잘못 되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교회를 생각하고 자신을. 그리스도도 교회와 관련시켜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하신 일들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자기의 개인의 구원도 교회와 관련시켜서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온몸의 일원이 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그 다음에는 사고 자체가 교회와 밀착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몸인 전체의 교회 속에 자신이 붙어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생각해야 되는데, 오늘날 교회론을 올바로 배우지를 않아서 자신들 맘대로예요. 그래서 전혀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들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와서 교회에 불만 있다고 확 털어놓고 휙 가버리고, 그 다음에 마치 동호인 클럽에 나오는 것처럼 맘에 안들면 집어치우고 싸우고 나가버리고. 다 마지막 날에 문제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데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교회가 자기에게 충분히 해주지 못하거나 이러면 말이지 교회를 아주 우습게 알고, 목회자도 자기에게 말씀에 은혜를 끼치면 목사님이고, 은혜가 별로 없으면 목사가 되고 말이지. 그렇게 하면서, 자기에게 유익한 무엇을 끼치는 여부에 따라서 모든 판단 기준을 갖는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개념이 머릿속에 거의 살아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서 그렇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련과 고난을 만나서 많은 환난을 당하고 심지어 외적의 침입을 받아서 백성들의 다수가 죽고 하는 그런 일들이 있었어도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셨다고 판단하는 증거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몸으로서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헌데를 잘라내고 망가진 것들을 끊어내고 하지만 다시 새 살이 돋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을 유지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공동체를 다루실 때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께 옳지 않아서 주님께 징계를 받아야 되는데, 징계를 받는 과정에서 내가 맞는 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내가 주님께 맞고 징계를 받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온전해 질 수 있다면 그것도 기쁨으로 받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러면서 ‘너희의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 있어도 나 하나님은 너희를 잊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억과 사랑을 연관시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B. 기억과 사랑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잊는다의 정반대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너희는 기억하라’ 혹은 ‘잊지 말라. 나 여호와가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낸 것과 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를 인도해 들인 것을 잊지 말라, 잊지말라’ 그것이 기억이잖아요. 기억하라, 잊지 마라 끊임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사랑은 강력한 기억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랑이 워낙 강력한 기억이기 때문에 너무나 사랑하면 그 사람이 없어 졌는데도 있는 것처럼 영향을 받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버릇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너희를 그렇게 기억한다, 그리고 나 여호와는 너희를 그렇게 사랑한다 이 뜻입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흘러가지만 하나님은 불변하고 영원하신 분이세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일은 끊임없이 변하게 하시지만 당신의 뜻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현재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충만히 느껴요. 그러나 주님께 불순종하는 주님을 떠나는 사람들은 주님이 자신을 사랑하신 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방황하고 번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기가 선택한 백성들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고 흘러가지만 언제나 하나님은 거기 계셔서 우리들이 어느 때든지 돌아가면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시죠.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들이 하나님과 살았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여러분 중 어떤 사람에게는 주님의 사랑과 도우심이 일 년 동안 필름이 끊어지는 것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어쩌면 어느 한 순간 절망 속에서 하나님은 이제 나를 버리셨는가, 그 사랑은 다 하였는가, 이제 그분은 나를 잊으셨는가 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사랑의 기억들이 필름이 끊어졌을 때 그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들을 붙들고 계시고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들에게 한결 같이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태양은 언제나 거기서 찬란하게 열과 빛을 우리에게 주지만 공전하면서 태양으로부터 멀어질 때 겨울이 오고 가까워질 때 여름이 오고, 적도 끝에서는 뜨거운 작렬하는 햇빛이 내려쬐도 몇 천 킬로미터 떨어진 북극과 남극에서는 강력한 추위로 얼음이 얼고 눈이 쏟아지잖아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눈앞에 일어나는 상황과 현재의 모든 일들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데려가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수단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현재 일어나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통해서 이것을 해석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가장 우리 홀로 버려졌고 힘들고 내 인생에서 가장 필요 없는 일들이라고 생각됐던 일들이 사실은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에게 있어서 꼭 필요하고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었을 것 같은 그러한 해석들을 우리들이 경험하잖아요. 그러면 오늘 우리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그렇게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닥치고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생겨날 때마다 우리는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우리의 고통스러운 삶의 상황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수가 없으시고 능력에 모자람도 없으신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 인생을 붙드셔서 당신이 가장 기뻐하시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길이 지금은 아프게 보여도 가장 평안한 길이고, 그 길이 지금은 고통스럽고 쓸모없는 길 같아도 사실은 그 길 때문에 우리가 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로서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로서 변화되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결국 우리는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수도 없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그릇행하시거나 혹은 잘못 행하는 일도 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찬송하고 또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 : 신실하신 하나님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믿음으로 살기를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낙망하고 불평하면서 우리의 영혼을 더럽히고 우리의 마음을 썩이는 동안 소중한 세월은 흘러가고,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방황하고 괴로워하면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원망하는 죄를 짓게 될 뿐 선한 일을 위해서 힘쓸 시간을 아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일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내일은 우리 수중에 있어서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날들이 아니기 때문이죠.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이고, 순간순간 주어진 그 시간들의 연속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죄에 미끄러졌던 시간들, 죄에 미끄러지지는 않았지만 방황하며 번민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행할 수 없었던 시간들,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육신의 질병 상태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시간들, 힘은 있었지만 그 방향이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 행하였던 일들까지 다 염두에 둔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며 사랑한 날들은 얼마나 짧은 순간들이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언제나 우리를 붙드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어 당신 앞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주님 앞에 우리가 언제나 기억되고 잊혀지지 않는 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주님 앞에서 감사하고 희망을 갖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감 사 1
감사 1 (2009/11/10 수요예배)
감사 2 (2009/11/22 주일오전예배)
감사 3 (2009/11/22 주일오후예배)
감사 4 (2009/12/02 수요예배)
감사 5 (2009/12/06 주일오후)
감사 6 (2009/12/16 수요예배)
감사 7 (2009/12/23 수요예배)
감사 8 (2009/12/30 수요예배)
감사 9 (2010/01/20 수요예배)
감사 10 (2010/02/03 수요예배)
9.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함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I. 본문해설
여기에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의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모르고 살 때에 고통하고 괴로워하였던 이유는 그러한 삶의 방식, 곧 삶의 기술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고, 또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그 행복이 후회가 되는 행복이 아닌 참된 행복에 이르는 삶일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의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사는 기술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어두웠고 불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참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어떤 원리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기독교 생활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II. 그리스도인의 삶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A.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함 - 기독교는 삶의 종교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즉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 들였으니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지식적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라고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셔서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놀랍게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가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그러니 너희는 무엇을 행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신자의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1. 그의 가르침 안에서
우선 첫째로는 우리가 그의 가르침 안에서 생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아주 심오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철학을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참답게 사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죽은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산자들에게 있었습니다. 또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을 살리시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살아있는 자들은 계속해서 살게 하시는 것이 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은 생명이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한다고 하는 것은 제일 먼저 그 분의 가르침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가르침이 삶의 표준이 되고, 또 울타리가 되어서 그 분의 가르침을 범하거나 넘어서지 않고 그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삶입니다.
2. 그의 모본 안에서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모본을 통하여 구체화되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수공하는 기술을 익힌다면 방법만 상세히 알려주는 것보다는 실제로 그것을 실행해 보는데서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요리를 배운다고 할 때 어떤 요리를 하는 방법을 아무리 말로 설명을 해서 레시피를 외웠다고 할지라도, 그것보다는 그 레시피를 들으면서 가르쳐 주는 사람과 함께 직접 요리를 해본다면 그 습득하는 지식은 훨씬 뛰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렇게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참다운 삶의 방식을 말로만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 자신이 모본을 보이심으로써 그것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이 어떤지를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할 가장 아름다운 삶이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았던 삶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그런 고결한 삶이기 때문이 우리들이 성경, 특별히 신약성경을 가까이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매일매일 그의 본보기를 보게 될 때에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그 모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고, 그것에 감동을 받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 일들을 하시는데 때로는 글자와 그리고 말 속에 담겨있는 것들을 이해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감동을 받게도 하시지만 때로는 우리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말씀에 기초한 예수님의 삶의 모본을 떠오르게 하심으로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셔서 불순종의 길을 버리고 순종하며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생활한다고 하는 것은 그의 모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모본을 우리가 완벽히 똑같이 복제해 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정도의 훌륭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분의 모본 안에서 온 마음을 다하여 살아가므로 그런 모본 없이 아무렇게나 사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게 훌륭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잖아요. 근데 하도 오래 써서 의자가 낡아서 이제 편하지 않아요. 그래도 요기는 좀 의자가 편해졌을 거예요, 옛날에 비해서. 그죠? 왜 그러냐하면 저 뒤에 사람이 안 앉는 의자를 바꿔서 옮겼어요. 여기는 항상 로얄석이라서 하도 앉아 가지고 저 뒤에 보다도 수요예배도 여기 안 앉잖아요. 앉아가지고 막 눌리고 눌려서 내가 한번 앉아보니까 너무 허리가 아파요. 이걸 바꾸려고 하니까 돈이 많이 든다고 해서 돈 좀 아끼자 해가지고 아이디어를 내서 그래서 뒤에 거를 이리로 바꿨어요. 뒤에 늦게 오면 이제 허리가 아픈 것입니다.
근데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렇게 기다란 장의자를 놓잖아요. 근데 그게 작게 만들면 돈이 많이 들고 길게 만들수록 한 사람당 단가가 적게 나와요. 그러니까 이런 예배당이면 이쪽에 하나씩 놔서 앉았잖아요. 옛날에 그렇게 했잖아요. 근데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 이게 의자가 이렇게 있는 게 아니라 애들이 툭툭 치고 이러니까 줄이 삐뚤삐뚤하잖아요. 근데 그 안에 앉는 사람은 비뚤어졌는지 안 빗뚫어졌는지 몰라요. 근데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정면에서 쭉 보니까 그게 눈에 보통 거슬리는 게 아니거든요. 다른 사람이 다 의자 줄을 맞추는 것을 목사님이 싫어하고 제가 맞추는 것을 제일 좋아하셨어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눈으로 맞추는데 나는 눈으로 안 맞추고 압정 두개와 실패를 가지고 와서 첫째에다가 딱 압정으로 누르고 실을 쭉 끌어가서 맨 뒤에 가서 꽂아놓고 그 다음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부 잘라놓은 것처럼 정확하죠. 그래서 내가 의자 맞추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제 성격도 하면하고 안하면 안하지 그걸 삐뚤빼뚤하면 다른 전도사들이 맞추면 삐뚤빼뚤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제 쭉 의자를 맞춰요. 그래서 이렇게 어떤 때 청년들이 들어와서 다섯 번째 의자 2mm, 1mm, 3mm 이렇게 해 가지고 탁 맞춥니다. 왜 그러냐 하면 줄이 있기 때문에, 그 줄을 기준으로 의자를 밀면 그 줄을 기준으로 하나, 하나 맞추면 이쪽 열은 맞출 필요 없이 똑같이 이쪽만 맞추면 이쪽은 저절로 맞아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정하게 예배당이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모본의 삶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많이 생각해야 되요. 특별히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 사셨던 삶을 통해 모본을 발견하고, 주님이 비천해지셨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이 고난을 감수하고, 존귀하게 되신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이 소망을 가지며 이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3. 그와의 연합 안에서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분과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한다 라고 하는 것은 그 분과의 영적인 연합 속에서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은 거듭나는 그 순간 그리스도,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영적으로 접붙여진 지체가 된 거잖아요.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지체가 되었는데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그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또 마음을 쏟아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하면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지고 뜨거워져요. 그때에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은 훨씬 더 밀접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밀접해 질 때 주님의 은혜와 생명은 우리에게 더 풍부하게 부어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더 탁월하고 놀라운 깨달음을 주시고, 주님의 마음에 아주 쉽게 움직여서 주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이 되고, 또 주님께 예전에 은혜가 없을 때에는 순종할 수 없었던 그것을 순종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놀랍게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 언제 한번 교인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같이 생활을 하는데 그 시어머니가 자기를 되게 힘들게 하더래요. 그래서 다른 때 같으면 분명히 안 좋은 일이 있었을 텐데 그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 많이 하면서 은혜생활을 하니까 자기가 이길 수 없는 폭발할 거 같은 때에 은혜 중에 있으면 그거를 하나님께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데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똥마려운 애들이 못 참고 똥을 싸듯이 그걸 폭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절제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더니 이길 수가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 자기의 성질로 미루어 볼 때 절대 이길 수 없는데 그래서 내가 그 얘기를 들으면서 그 말은 진실이라고 나도 생각은 한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은혜는 그렇게 놀랍게 내가 이길 수 없는 것을 이기게 해 줍니다. 그 간증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삶이란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랬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붙어있는 영적인 사랑의 연합 속에서 우리들이 견딜 수 없을 때에는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고 은혜를 달라고 매달릴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함
또 하나 사도가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서 행하는데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1. 뿌리를 박음
그러니까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이라고 하는 것은 뿌리를 박고 그 다음에 세움을 입는 것입니다. 뿌리는 박는다는 것은 그게 무슨 뜻일까요? 뿌리를 박는다는 것은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되잖아요. 뭐냐 하면 나무가, 큰 나무는 자기키에 비례해서 깊고 긴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뿌리와 위에 뻗어 오르는 나무 가지와 잎은 나뉠 수 없는 생명이 동일체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뿌리에서 물과 양분을 빨아올려야지만 그 큰 나무가 이 영양을 섭취하면서 계속 줄기, 가지 뻗어가고 잎이 무성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력하게 밑에서 물과 양분을 빨아들일 수 있는 힘은 뿌리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파리를 통해서 광합성 작용을 해서 거기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 줄 때에 그거를 쭉쭉 빨아들일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뿌리가 그렇게 힘을 쓸 수 없을 때가 오기 때문에 나무는 스스로 그 나뭇잎을 모두 털어버려요. 그래서 나뭇잎을 모두 털어버려서 에너지 대사 량을 줄이고 그리고 뿌리는 겨울이기 때문에 생장이 더뎌지면서 아주 자기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양분과 물로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자기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맨 처음에 와서 이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마당을 이제 어떻게 만들까 그래서 저렇게 만들었어요. 나무를 심어놓고, 그리고 그늘 광장을 만들어서 그 밑에 들어와서 탁자도 놓고 앉아서 차도 마시고 공부도 할 수 있게 해 놓으니까 참 좋아요.
근데 가보니까 그 나무가 말이죠. 나무의 값은 크기와 모양에 달렸어요. 직경이 20cm짜리 나무면 제일 좋겠다, 그래서 골랐는데 직경이 같은 20cm라도 나무 한 그루가 20만 원짜리부터 400만 원짜리까지 있는 거야. 그러면 도대체 똑같은 크기의 나무인데 왜 그렇게 값이 차이가 나냐? 그게 생긴 게 20만 원짜리는 시골서 올라온 머슴같이 생겼어요. 그리고 400만 원짜리는 아주 예뻐요. 뭐 차마 그거는 상상도 못하고 해서 그거보다는 비교도 안 되는 적은 한 그루 살 돈으로 9그루를 살 정도로 싼 걸로 해서, 그래도 고르고 골라서 그렇게 해 가지고 갖다가 세워놨어요. 참 예뻐요. 근데 그 중에서 제일 예쁜 거 2그루가 외국 갔다 오니까 죽은 거야. 여기에 이제 적응을 못하고 죽은 거야. 마치 새 가족 반에 왔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이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죽은 거를 보고 그리고 외국을 가면서 이거는 계약서 쓸 때 죽으면 즉시 똑같은 크기의 나무로 갖다가 A/S를 해주기로 하고 계약을 했으니까 빨리 연락해서 심으라고 그래라. 그리고 중국인가 어디를 외국인가 갔다 왔어요. 거기에서도 계속 궁금해, 나무가 잘 들어왔을까 궁금해. 근데 두개를 진짜 갖다 세워 놨어요. 근데 들어오는 순간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나머지 6그룬가 7그루는 예쁜데 그 두 그루는 진짜 20 만 원짜리 어디 머슴같이 생긴 거를 두 개를 꽂아놨는데 그거는 정말 아닙니다. 그거는 마치 그게 뭐냐 하면 서울에 올라온 호리호리 하고 예쁜 여성들이 아주 그림 같은 투피스를 입고 그렇게 7명이 서 있는데 두 명이 몸빼 입고 와서 그러고 있는 것 같이 그래서 당장 뽑아버리라고 그러고, 우리 식구들에게 어울리는 그런 새 가족을 찾아주자 그래가지고 전국을 수배해서 그 두개를 갖다 놨어요. 그러면서도 늘 걱정이 아, 죽은 자리에 또 죽는데 또 죽는데, 아 근데 이게 세월이 지났잖아요. 이게 이제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쭉 뻗어내려 갑니다. 이제는 성성합니다. 벌써 이제 8년이 됐으니까 이제는 상당히 견고해져서 죽는 거 같았는데 다시 성성하게 살아나서 그렇게 보입니다. 그래도 한 그루는 저 구석에 머슴 같은 애가 하나 서 있습니다. 구석에 있어서 그냥 내버려 두었어요. 근데 그렇게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많은 양분을 빨아들이면서 점점 더 다른 사람을 의존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뿌리를 박는다는 의미에요. 뿌리는 박는다는 것은 결국은 생명현상으로서 뿌리는 내리는 것이지 우리들은 잘 심겨진 나무가 줄기, 가지 튼튼해져서 열매를 맺으면서 서 있을 때 견고하다고 하지 콘크리트에 박혀있는 전봇대를 보고 견고하다고 우리는 그런 말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한 사람의 신앙이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렸다고 하는 것은 견고해 진다고 하는 것인데 그러면 도대체 뭐가 견고해진다고 하는 것일까 그런 얘기죠. 뭐가 견고해진다는 것일까? 그건 세 가지 의미에서 견고해진다는 것입니다. 우선 뭐냐 하면 첫째는 지성적으로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도 잘 이해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영양이 될 만한 진리의 요소를 섭취하게 되는 것, 이게 바로 뿌리를 박은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많이 받아도 처음 믿은 사람들은 아직 견고함이 부족합니다. 오늘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거 같은데도 내일 어떤 사람이 거짓된 이설로서 사람을 꼬이면 거기에 넘어가 버리는 것이 이게 바로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뿌리를 내렸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세 가지로 구성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요소로서 내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상세하게 알아서 그것과는 반대되는 주장들을 펼칠 때에도 거기에 의해서 미혹되거나 속아 넘어가지 않을 정도의 견고함을 가질 때 그 사람이 바로 뿌리를 내린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향에 있어서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성향에 있어서 견고해진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 까요? 자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술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너무너무 술이 먹고 싶은데도 매 순간 결단을 하면서 그렇게 술을 먹지 않겠노라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각오를 하고 술을 먹을 바에 차라리 순교를 하겠다 그렇게 비장한 각오로 술을 먹지 않는 것은 훌륭한 신앙의 실천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건 늘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술을 좋아하는 성향이 그 사람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또 매 순간 그렇게 삶과 죽음 사이에 결단을 내리면서 살지는 여전히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 안에 새로운 생활에 적합한 성향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향을 주시면 그러면 술을 안 먹겠다고 깊이 사생결단을 할 필요가 없어요. 왜? 원래 그 술을 싫어하니까 그렇게 먹고자 하는 강력한 유혹을 못 느끼니까 그러죠.
최근에 신문에 보니까 술 한 병에 1억 이천 몇 백만 원 짜리가 있더라고요. 한잔에 750만원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그거 누가 날 거저 갖다 줘도 참 걱정일거 같아요. 남 주자니 아깝고 먹자고 그럴 욕구가 없고, 그러니까 조금도 그런 것에 유혹을 받거나 그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서 결단을 내릴 필요가 없어지는 상태, 그게 사실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화 생활의 궁극적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지만 성향 면에서 본다면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도록 살아야 할 인간 안에 요구되는 성향이 그게 자기의 좋아하는 바가 되었을 때 그게 가장 훌륭한 인간의 상태인 것입니다. 뿌리를 박는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 성향이 되고, 나쁜 일, 불순종하는 일의 성향이 뽑혀져 나와서 선한 일을 위해 창조함을 받은 대로 성향이 굳어지는 것, 그것이 참 훌륭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비난하지만 사실은 습관 그 자체는 너무 좋은 것입니다. 주일이면 세상없어도 성경 찬송을 들고 예배당에 오지 않으면 안 되는 습관이 사람에게 형성됐다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이 습관적인 신앙을 공격하는 것은 그 선한 습관이 잘못됐다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합당하고 맞는 내용이 없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판하신 것은 회칠한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죽은 사람의 뼈다귀가 있다는 것이 잘못됐다는 거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접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박은 신앙은 그렇게 성향에 있어서 견고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생활의 실천입니다. 구체적으로 성향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향화된 그것이 충분히 삶으로 흘러나올 정도로 실천에 익숙해진 상태가 될 때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은 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세움을 입음
여기서 세움을 입는다고 하는데 이게 꼭 식물을 생각나게 만들잖아요. 그죠? 나무를 맨 처음 심어놓으면 반드시 부목을 댑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사각 틀을 만들고 그 나무를 부목을 땅에다가 견고히 세워주는 방법이 있고, 나무가 여러 그루일 경우에는 그 나무를 서로서로 대나무 같은 것들로 연결시켜주어서 그래서 그 약한 나무가 서로를 의지해서 쓰러지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아무리 큰 나무라도 그렇게 부목을 대고 있는 나무를 보면 즉시 아 저게 새로 갖다 심은 나무구나 라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를 새로 옮겨 심을 때는 두 가지 일을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나무 전체를 헝겊으로 감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습기를 빼앗기지 않도록 나무를 보호한 후에 부목을 대어 주어서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해도 이게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 수 있도록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린 나무라고 하는 증거입니다. 커도 방금 갖다 심어놓은 연약한 나무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교회라고 하는 산에서 거기에서 나무가 한 그루씩 한 그루씩 옮겨 심어집니다. 처음에는 부목을 대고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 나무를 더 많이 돌보아 주고 또 가꾸어 주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식목일이 있고, 그리고 10월 달인가 9월 달쯤 되면 육림의 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식목일에는 가서 나무를 심고 육림의 날에는 자기가 심은 나무가 있는 데를 찾아가서 그래서 그 육림에 날 가서 그 나무에 병충해도 제거해 주고 물도 주고 비료도 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돌보아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예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이 지상 교회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의지하면서 신앙생활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교인들이 자라서 그래서 다른 지체들을 덜 의존하고 자기 홀로 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섬김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돌봄의 시기가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신앙이 성장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에 덜 의지하고 오히려 교회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세우고, 그리고 다른 사람을 붙들어 주는 유익한 일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것 비유로 들자면 이런 거 아니겠어요.
우리들이 이제 나무가 자라고 있는 산인데 아직 군데군데 나무가 심겨지지 않은 황무한 곳이 있어서 거기에다가 나무를 심습니다. 우리가 몇 십년동안 나무를 심고 그 나무를 망가뜨리지 않았더니 이제는 비행기를 타고 올라서 우리나라를 들여다보면 전체가 푸릅니다. 이게 북한하고 너무 대조가 됩니다. 북한에 가서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보면 푸른 숲이 별로 보이지 않아요. 산꼭대기까지 나무를 다 땔감을 하고 거기를 개간을 해서 감자라도 심으려니까 비가 오면 한 번에 토사가 쓸려 나와서 커다란 사태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군데군데 황량하던 곳에다가 나무를 심습니다. 그러면 그 나무는 산의 신세를 지면서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큰 나무들이 가을이면 이제 나뭇잎을 떨어뜨려주면 그 떨어뜨린 나뭇잎들이 날아가서 이제 땅에 떨어지고 그리고 그것이 썩으면서 부엽토가 되면서 거름이 되죠. 그리고 그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면서 거기에서 벌레들이 자라게 하고, 새들이 깃들고, 그 새들이 와서 이 나무에서 씨앗을 실어다가 저 나무로 꽃가루를 옮기면서 말하자면 접붙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무가 어렸을 때는 산의 신세를 집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드디어 크게 자랐을 때 그때 그 나무는 산에 신세를 지는 게 아니라 산에다 도움을 주는 나무가 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강원도 같은데 들어가 보면 숲속에 들어가 보면 한번 실험삼아서 한번 파봤어요. 한 30 cm는 넘을 정도로 새카만 부엽토들이 쌓여있습니다. 그것이 덮으면서 흙에 있는 수분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웬만큼 가물어도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저수지는 숲입니다. 비가 오면 그 물을 다 머금어요. 그래서 온 산이 그 물기를 먹으면서 생명을 유지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나무 때문에 풀들이, 그리고 벌레들이, 벌레 때문에 들짐승들이 날짐승들이 이렇게 깃들면서 커다란 산이 생태계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서 성숙한 어떤 사람이 자기는 추호도 교회의 신세를 지지 않고 교회에 베풀기만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다는 것은 이렇게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어서 다른 사람을 덜 의존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자기고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눠주고 유익을 끼쳐서 그래서 주께로부터 받은 것들, 다른 지체로부터 받은 것들을 자리로 말미암아서 유통하게 함으로써 그렇게 함으로써 이 교회를 기름지고 비옥하게 해서 많은 열매가 맺게 하는 이런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삶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C.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함
이러한 삶을 이야기하면서 사도는 마지막 오늘 우리들이 가장 강조하여 살펴보는 한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라’ 그래서 말하기를 ‘감사함을 넘치게 하거라’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는 생활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놀라운 감사의 조건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그러한 특별한 사랑을 우리들이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질상으로는 하나님께 이런 사랑을 받을 아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런데 주님의 그 큰 사랑을 힘입어서 우리들이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시고 은혜 베풀어 주신 모든 것들이 오늘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좋은 것들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물러감은 결국 이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와 큰 감격으로부터 뒤로 물러나간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바 그 큰 은혜와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구원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는 거,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에게로부터 떨어졌고, 끊어졌고, 약속으로는 외인이요 이방인이었던 사람이었음을 생각하고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일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것에 대해서 한없이 감격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 생활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이것을 우리들이 묵상하게 될 때 하나님의 각양 많은 성품들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며 주님의 공의를, 나 같은 죄인을 주님이 살려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그리고 그 주님이 한번 나를 구원하신 후에 변함없이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신실하심을, 이렇게 우리들이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생활이 율법을 붙들고 억지로 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고 하면서 계속 지식을 키워가는 이런 것이 신앙의 근본적인 발전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위에 나 같은 죄인을 살리셔서 이렇게 예수를 향하여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이 놀라운 은혜를, 그리고 이렇게 산후에 우리가 이미 누리고 있고 앞으로 주님께 얻게 될 그 무한한 기업에 대해서 한없는 감사와 찬송을 감격 속에서 부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하나님 우리에게 원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세상이 커 보이면 주님이 작아 보이고,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인 생활이 우리에게 유별나 보이면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총은 하찮은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장 큰 사랑은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끊어진 사람들, 예수 안에서 절대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어서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이 교회를 통해서 주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새롭게 바꾸는 그 일을 위해서 결코 이바지 할 수 없는 그런 인간을 주님의 큰 사랑으로 구속하시고 그 은혜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를 주님 앞에서 살아가게 하신 그 은혜보다도 우리에게 더 큰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로는 불평하고 원망하다가도 억지로라도 주님 앞에 감사의 찬송을 부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변화가 옵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런 거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죠? 자기도 어려운 일이 있어서 불평과 불만이 가득 있는데 곤고하다고 그러면서 자기 같은 인간에게라도 도움을 좀 얻어보겠다고 이야기 좀 나누자고 그러고 요청이 들어오죠.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사람 사정도 참 딱해, 그 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러지 말고 생각을 바꿔봐, 그래도 지금 불행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얼마나 감사한 게 많아. 그러고 이야기 할 때 처음엔 우리의 양심을 콕콕 찌르죠. 너는? 너나 잘해라, 그러죠. 그래도 어떻게 해 얘기를 계속 해줘야죠. 그러면서 이것도 봐, 이것도 생각해봐 얼마나 감사해, 이것도 생각해봐, 이것도 생각해봐, 그러고 한 한 두 시간 대화를 하고 나면 그 사람은 별로 해결을 받지 못하고 슬픈 기색으로 돌아가는데 오히려 나는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참,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서 이렇게 투덜대고 있는 거지’.
내려오기 전에 어느 교회에서 온 잡지를 잠깐 읽었어요. 근데 그 목사님도 정신없이 교회를 세우고 애를 쓰셨어요. 그때 한번 만났는데 한 번도 안식년을 못가셨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제 안식년은 못가고, 한 6개월 쉬고 오려고 한다고 그러고 이제 안식년을, 휴가를 떠나셨어요. 이제 사모님하고 둘이서 그래서 6개월 동안 친척 교회를 돌아보고 유럽 가서 쉬셨대요. 그런데 이제 자기가 회상을 이렇게 적은 것입니다. 근데 이제 뭐냐 하면 외국에 있는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고. 그 다음에 이제 자기네 교회에 휴가가 끝나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모님하고 둘이 얘기했대요. ‘여보, 돌아갈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해’. 사모님도 똑같이 얘기를 하더래요. ‘여보 내가 바로 그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우리가 다시 돌아갈 수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것이 몰라요’. 그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생각을 바꾸면 힘들고, 고생하고, 어려운 것처럼 느껴지는 일들도 생각을 바꾸어 놓고 보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감사한 일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좋은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을 받으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때로는 나쁜 것을 통해서도 아주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그러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Ⅲ. 결론
그래서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감사함으로 넘치게 하라’는 말 앞에 뭘 덧붙여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렇게 믿음에 굳게 서지 않으면 우리가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 내 인생의 모든 계획이 그 분의 수중에 있다는 것, 그 분은 내게 지금 일어나는 가장 나쁜 일들도 가장 좋게 바꾸어 놓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 이런 사실들을 우리들이 믿고 그 분을 깊이 신뢰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에 굳게 서 있을 때에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견고해지게 되면 우리의 눈에는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 때문에 오히려 미래에 일어날 아름다운 일에 대해서 오늘 미리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할 때에는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면 비관적인 미래에 대한 전망이 생겨나면서 그러면서 힘겨워요. 그러나 믿음이 충만할 때는 어려움이 생기면 기대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 이러한 어려움이 생겼는데 하나님이 어려움을 통해서 이전에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놀라운 신앙의 간증을 갖게 하실까? 아, 하나님은 좋은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구나’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좋은 것이 너무나 많이 있지만, 그러나 과거를 이렇게 돌아보면 좋은 것을 통해서 주신 좋은 것은 대부분 큰 게 아니었어요.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주신 그것이 사실 우리에게 정말 큰 것이었어요. 연단한 후에 맺은 신앙의 거룩한 인격, 그리고 큰 고난과 박해 속에 열매 맺게 하신 인내와 연단의 열매, 큰 징계와 고통 속에서 열매 맺게 하신 올바름, 커다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에 대한 깨달음, 고통과 견딜 수 없는 시련 속에서 사랑의 중요성을, 관계의 중요성을, 용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셔서 나의 인생관을 바꿔 놓으신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좋은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을 주신 게 아니라 오히려 나쁜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 아주 아름다운 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우리 삶의 환경을 보고 한번 웃고 한번 슬퍼하고 요동치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며 어린 아이와 같은 삶이라고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믿음에 굳게 서서 너무나 자주 우리의 삶을 얻고, 잃고, 미워하고, 좋아하고, 뺐고, 빼앗기는 작은 이익에 의해서 요동치는 삶으로만 보지를 말고, 높이 비행기를 타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우리의 이 개미와 같은 인생이 주님의 수중에 있고, 그리고 이 인생의 고비를 넘으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은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 분께 사랑받고, 그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면 가장 좋은 것으로 나의 인생을 채우실 것이고, 그리고 내가 그분을 선하다고 믿고 그분을 의지하는 나의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배반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는 굳센 믿음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삶의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잠시 폭풍이 몰아쳐도 그것은 모두 잠시요 폭풍이 지나간 후에는 고요가 찾아올 것이라는 것, 어두움이 지나간 후에는 빛이 올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주님 앞에 신앙으로 살아가며 그런 소망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게 우리의 신앙이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칼빈 선생님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하다가 쫓겨났어요. 그래서 스트라스부르그라고 하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마틴 부처라고 하는 선배 목사님 밑에서 이제 부목사처럼 일하면서 목회를 배우고 있을 때였습니다. 거기에서 칼빈이 많은 것을 배웁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 목회의 열정, 반대자들을 가슴에 품는 이 부처의 폭넓은 인격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돼요. 그리고 그 부처 선생 목사님이 중매까지 서 줘서 이 노총각이 장가까지 들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제네바 교회에서는 막 큰 요동이 일어납니다. 너무 엄격하게 교회를 한다고, 그 목사 싫다 그러고 내쫒고 나가지고는 교회가 막 혼돈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무질서하게 되고. 그렇게 진리의 말씀으로 사자처럼 싸우던 사람이 물러가고 나니까 이제는 막 방종이 도시를 엄습하면서 사람들의 생활들이 무질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이것을 개탄하기 시작하는데 이 때 무슨 일이 있었나면 카톨릭의 샤돌레트라고 하는 추기경이 있었어요. 이 사람이 개혁파 교회의 사람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내요. “야 너희들이 믿는 게 진짜 올바른 건지 한번 붙어보자. 그리고 내가 묻는 질문에 답을 해봐라” 그리고 공개 질의서를 내요. 그 편지를 제네바 교회가 받았는데 답변할 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교회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 고민하고 의논을 한 결과 이런 공개적인 도전장에 대해서 진리의 말씀에 입각해서 유능하게 답변을 해서 그래서 우리의 이 참된 개혁신앙을 지켜줄 수 있는 목사님이 칼빈 선생밖에 없다. 칼빈 선생이 오실지 모르지만 우리가 간절하게 청탁을 하자. 그리고 거기다가 간곡하게 청탁을 합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봉해 그 위에다가 봉인을 하고 도장을 찍어요. 그때 도장에 찍힌 그 내용이 뭐냐 하면 “Post Tenebras Lux” 라틴어로 그게 뭐냐 하면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
그래서 그게 그 이후에 아주 유명한 구호가 되요.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어두운 후에 빛이 온다고 했는데, 우리가 지금 있는 이 상황은 어두움입니다. 당신이 오셔서 주님과 함께 우리에게 빛을 주십시오’ 그런 뜻이죠. 그러니까 진리의 말씀이 풍부할 때는 깨닫지 못했던 사람이 오히려 칼빈 선생님이 가고 나서 혼란해 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분이 빛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신들은 지금 어두움 속에 있지만 이 어두움은 결코 영원할 수 없고 이 어두움이 물러간 뒤에는 반드시 밝은 빛이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또 소망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찬 양) 걱정과 슬픔이 어딘들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많이 복을 받아도 여기는 영원히 머물 본향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꿀을 빨아먹듯이 성도가 완전한 사랑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배신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쓴물을 먹으면서 그러면서 주님 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데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우리는 충만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생활!
그래서 하나님 우리에게 어려움을 통해서 더 좋으신 것을 주어 여태까지 그렇게 바꾸어 주셨던 것처럼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하셨던 우리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눈에 보이는 환경보다는 우리를 붙들고 계신 주님을 굳게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보호와 그리고 인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면 이것을 통해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며, 이 고난이 더 심해지면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고, 그러다가 죽으면 우리는 이 세상의 수고와 슬픔을 끝낼 것인데 하는 감사한 마음,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 사 1
감사 1 (2009/11/10 수요예배)
감사 2 (2009/11/22 주일오전예배)
감사 3 (2009/11/22 주일오후예배)
감사 4 (2009/12/02 수요예배)
감사 5 (2009/12/06 주일오후)
감사 6 (2009/12/16 수요예배)
감사 7 (2009/12/23 수요예배)
감사 8 (2009/12/30 수요예배)
감사 9 (2010/01/20 수요예배)
감사 10 (2010/02/03 수요예배)
10.믿음과 감사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출 15:22∼24).
Ⅰ.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의 압제 아래 있다가 열 개의 큰 재앙이 있고나서야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는 수 없이 놓아주었습니다. 이때에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중다한 잡족들이 함께 이제 애굽을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을 탈출했을 때에 그들이 처음 도달한 곳은 홍해였습니다. 이 홍해 앞에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커다란 위기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의 변심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지만 후에 생각하니 그렇게 도망치는 수많은 노예들이 너무 아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급히 애굽의 특별병거 아마도 바로의 휘하의 직접 있어서 왕궁을 수비하거나 아니면 특별 경비하는 부대의 군인들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 병거를 600승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쫓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600개의 전차가 그리고 군인들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쫓은 것으로 흔히 알고 있지만 특별 병거만 600승이고 그 외에 또 다른 병거들이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했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천 개도 넘었을 그 군대를 실은 마차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앞에는 건널 수 없는 큰 바다요 뒤에는 미친 듯이 추격해오는 애굽의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이에서 백성들은 막막한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기적을 행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진 홍해 그 사이를 마른땅처럼 건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널 때에 뒤따라오던 애굽의 병거와 군사들은 합쳐지는 그 물 속에서 수장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은 이전에는 물론 없었고 이후에도 다시 없을만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영원히 기억에 남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주 하나님의 은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이 의심될 때마다 홍해에서 바다를 가르시고 자기 백성을 무사히 건너게 하시고 대적들을 그 바다에 묻으신 이 홍해의 사건을 자주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능력과 그분의 은총을 입는 언약 백성의 특권을 동시에 찬송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눈을 조용히 감고 그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에서 열개의 재앙은 그야말로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지만 그것은 모두 대적하는 자들에게 본때를 보이기 위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파괴적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기이하고 놀라웠다고 하더라도 홍해가 바로 눈앞에서 갈라지는 이 사건처럼 충격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놀라운 기적 앞에 하나님의 그 탁월하신 엄위와 영광 앞에서 경외심으로 두려워 떨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해석할 때에 홍해가 갈라진 것이 아니라 수초들이 있는 얕으막한 바다를 그런 늪같은 곳을 지났을 것이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심할 여지없이 좌우에 물이 벽처럼 섰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른 땅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뒤에서는 물이 합쳐지면서 애굽의 병사들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자신들은 그 갈라진 물사이로 육지같은 바다의 땅을 건너 이제 홍해 건너편 언덕으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경험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놀라운 사건을 경험했다면 얼마나 오래도록 그 크고 놀라운 기억이 여러분 마음속에 남아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가 홍해에서 이 큰 기적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삼일 길 쯤 갔을 때에 그때에 사소한 일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물이 없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지요 광야의 길에서 물이 없는 것은 그렇게 사소한 일이 아니죠.
(예화) 저는 아직 성지순례를 못 가봤습니다만 다녀온 사람들에 의하면 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땅의 광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황량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종 매스컴에 광야에서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 보도가 된답니다. 핸드폰은 물론 안 터지고 통신수단이 없습니다. 바위나 혹은 이런 돌가닥길을 지나는 광야인데 그거를 또 탐험하고 여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아는 사람이 있답니다. 그래서 그들이 탐험하러 들어갈 때에는 배낭 가득히 물과 먹을 것을 가지고 들어간답니다. 종종 조난사고가 일어나는데 그 사고의 대부분은 물이 떨어졌는데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조난당해서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 경우라고 합니다. 그
그러니 물이 없는 것이 그렇게 사소한 문제일 수는 없었지요 그렇지만 제가 사소한 문제라고 하는 이유는 객관적으로 볼 때 물이 없는 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물을 마시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에게 큰 일이겠습니까 아니면 그 어마어마한 홍해바다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사히 건너고 애굽의 병사들이 따라올 때에 수장되게 하는 그 일이 더 어마어마한 일입니까? 아마 두말할 필요도 없이 후자가 어마어마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Ⅱ. 변하는 마음
그런데 이들의 마음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변하는 이 사람들의 마음은 홍해와 마라에서 대조를 이루게 됩니다.
A. 감사와 찬송: 홍해
홍해에서 그 크고 놀라운 일을 보았을 때는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모두 그 홍해를 건넌 후 건너편 언덕에서 미리암의 소고에 맞추어서 수백만 명의 성가대가 우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지극히 높으신 영광과 능력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 찬송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기쁨과 감사는 얼마나 큰 것이었겠습니까? 일평생 애굽 사람 밑에서 짓밟히고 학대받고 짐승처럼 취급을 당했다가 애굽에 끌려온 이후로 최초로 애굽사람을 이겨본 겁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행하셨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사히 건너게 하시고 따라오던 애굽의 병사들은 깊은 물에 수장이 되게 하셨으니 한쪽은 하나님의 징벌하심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었고 또 한쪽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사랑과 보호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속 깊이 사무쳤던 그 찬송소리가 오늘 우리의 귀에도 들리는 듯 하지 않습니까? 삼백만 명 가까운 성가대가 일치하게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의 이름을 올려드렸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호와 같은 신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느냐고 노래하며 원수를 멸하시고 언약의 백성들을 붙드시는 하나님을 송축하였던 것입니다. 아마 그 울려 퍼지는 소리는 홍해의 파도 소리와 어우러져 어쩌면 지상 최대의 성가대가 부르는 찬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꼭 삼일 길 떨어진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과 불평의 마음으로 변하였습니다.
B. 원망과 불평 : 마라
(예화) 가보지를 않고 이런 얘기를 하니까 말발이 안서지만 그렇게 물이 귀하답니다. 우물을 파도 물이 안나오고 또 우물을 파서 물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물이 먹을 수 없는 쓴물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마철에 한국을 와서 보고 한강다리를 건너면서 ‘아휴 저 물 저 아까운 물 아까운 물’ 했다는 건 아주 유명한 얘깁니다.
그래서 아마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물이 없는 것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겠죠. 그리고 어디엔가 이르렀는데 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물을 먹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써서 먹을 수가 없는 식용으로는 쓸 수 없는 물 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그 이름을 마라 ‘쓴 것’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쓴물을 먹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쓴 마음으로 변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삼일 전까지 가슴에 한~없이 울려 퍼졌던 하나님을 향한 영광과 감사가 찬송이 사라진 것이죠. 그리고는 원망과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 대하여 원망하여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며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난 이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읽을 때마다 새삼 불쌍한 사람이 모세에요 아니 이게 누가 모세가 자기를 하나님 보고 크게 써달라고 그랬습니까? 오늘날 큰 교회 좋아하는 사람들 많은데 이 큰 교회 목회자의 마지막이 어떤지를 보여줍니다. 남전도회원만 60만 명이 넘었습니다. 전체 주일학교까지 합하면 200만에서 300만은 됐을 텐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야말로 고생 고생 정말 고생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도대체 모세가 물이 나오지 말라고 그랬습니까? 모세가 물을 감췄습니까? 아니 모세한테 지들이 언제 물을 맡겼습니까? 그런데 왜 물이 없는데 모세를 그렇게 원망을 합니까? 홍해바다 갈라졌을 때 무슨 모세한테 인사나 한 번 했습니까? 잘나갈 때는 생각도 안하다가 못나가니까 모세를 원망하면서 여기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앞에서 나온 그 어법대로 라면 차라리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게 좋았는데 왜 편히 사는 우리를 끌어다가 여기에서 목말라 죽게 만드느냐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그리고 거품을 물고 수십만 명의 사람이 대들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신앙의 사람이고 그리고 하나님 의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 내가 이 인간들을 낳았습니까? 내가 이 애들 엄맙니까? 내가 왜 이 인간들을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야되겠습니까? 충분히 살았습니다. 차라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그게 바로 크게 목회하던 모세의 고백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런 경우를 만났을 때야 모세도 산전수전 화생방전까지 겪으면서 이제 교인들인 이 인간들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았으니까 덜 힘들었을 것입니다. 여기는 목회 초년생 시작입니다. 그러니 목회 처음 할 때는 저기에서 정신 나간 교인이 눈만 부릅떠도 가슴이 오그라들던 때일 텐데 교인 중에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 당신 설교가 은혜가 안 된다 그래도 심장이 오그라들 때가 초창기인데 그 초창기에 이 수많은 인간들이 이제 모세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고 원망을 하고 어쩌면 욕설을 퍼부으면서 이제 이를 갈았을 텐데 그때 그 모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떨거지 같은 인간들을 하나님이 언약 백성이라고 불러서 무슨 새 나라를 건설하시겠다고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가나안을 향해 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하나님의 그 마음은 어떠셨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이렇게 엉터리 같은 인간 거기에서 가슴 졸여 했을 지 모르는 아직까지는 어리고 혈기방자한 모세와 같은 지도자들을 이제 여기서부터 시작을 해서 광야 40년 가까이 걷는 동안 교인도 변하고 목회자도 변하고
조금 아까도 내가 편지하나 쓰고 왔어요. 어느 목회자가 간곡히 나한테 무슨 편지를 썼길래 답장을 했어요. 내 그랬어요. 당신이 변하는 것만큼 교회가 변하고 당신이 안변했는데 교회가 변하면 그것은 굴러오는 커다란 바윗덩어리와 같다 결국은 교회가 당신을 누를 것이다. 참 그 감사와 찬송이 석 달이나 삼주쯤 지나갔다면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러지만 삼일이면 은혜가 떨어지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 아닙니까? 우리 열린 교회 교인만도 못합니다. 열린 교회 교인 어떤 사람이 그래요 목사님 신년사경회 은혜빨이 두 달은 갑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당신은 두 달 가지만 일 년 이상 간직하는 교인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래요 목사님 두 달에 한 번씩 사경회를 하면 계속 되겠네요 그렇게 하면 아마 한 달 가겠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큰 기적을 보고 삼일 만에 마음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원망과 핏빛 불평이 가득한 야수와 같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겸손합시다 겸손합시다 오늘은 여러분이 이스라엘 백성처럼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할 때 손은 또 왜 그렇게 드는지 하나님을 만져보려고 그러는지 그렇게 찬양을 하고 무슨 신비의 무슨 경지에 들어가는 것처럼 눈을 지긋이 감고 그렇게 천사처럼 찬양을 해도 얼마나 갈까요? 얼마나 갈까요 삼일 만에 이 회중들은 야수의 본능을 드러내며 이 모세에게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그러면 도대체 이렇게 원망하는 마음 속에는 추호의 감사나 찬양이 있을 수 없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영광 돌린다 그러는데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영광 돌린다 그러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제일 영광 받으시고 싶어 하시는 것은 사마리아나 혹은 땅끝이 아니라 그 시작이 여러분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가득차 있어서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감사로 가득 차 있어서 그 나 같은 인간을 선대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눈물이 가득 고인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은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그렇게 삼 일전에 그 기적의 영광을 보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감사와 찬송으로 어우러졌던 그들의 마음이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결국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믿음과 감사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Ⅲ. 믿음과 감사
살아가면서 자기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꼬리를 치고 행복해 하는 것은 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화) 강아지를 어렸을 때 참 많이 길렀는데 강아지도요 주인이 딱 들어가면 주인 얼굴을 쳐다보고 눈치를 봅니다. 주인이 화가 나있거나 마음이 찌그러져 있으면 쳐다보다가 꼬리 몇 번 치다가 마루 속으로 들어갑니다. 근데 가끔 사람도 그런 사람 있듯이 눈치가 전혀 없는 개가 있습니다. 이 개는 그 주인이 굉장히 안좋은 심정으로 안색이 변하여 들어왔는데 그렇게 까불다가 얻어맞습니다.
모든 짐승들이 자기에게 선하고 좋을 때 기뻐하고 꼬리치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기쁜 일을 만날 때도 의미를 생각하고 슬프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도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환경만을 생각하지 않고 이것들이 나의 마음과 영혼에 미치는 영향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기쁘고 혹은 슬픈 일들이 왜 일어났는지 원인을 찾아내려고 하는 정신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짐승과는 달리 기쁜 데도 절제할 줄 알고 그리고 슬프고 가슴 아픈데도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멸망 받을 사람들의 특징이 감사치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해 영혼이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을 때는 마음의 놀라운 특징이 티끌만한 감사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감사하는데 정작 자신은 그 큰 은혜를 입으면서도 추호도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불신앙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사라진 마음이에요
기뻐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악을 행하려하다가도 좋은 환경을 만나거나 악을 함께 행할 수 있는 돕는 자를 만나면 기뻐합니다. 그 기쁨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기뻐하는 모든 마음이 감사하는 마음 아닙니다. 이 감사는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감사는 보이는 좋은 일들을 보고 기뻐하는 것을 넘어서 그거는 동물도 할 수 있는 거니까 그걸 넘어서 그것을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며 그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감사이고 거기에서 더 나아간 감사는 비록 지금은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났지만 이것이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의지하며 따라가면 오늘 이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그것은 더 큰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는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인생에 그렇게 간섭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와 찬송을 돌리게 되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감사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기쁨을 찾고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슬퍼하고 하는 삶을 살아서는 진정한 감사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우리가 흔히 그런 이야기 하죠 내려다보고 살아라. 그러죠? 내려다보고 살아라. 그러면 참 감사하게 된다. 그런데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지 않으면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내려다보고 살게 안 됩니다. 자꾸 허황되게 올려다보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에요 옛 말에 그런 말이 있잖아요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 말 타면 걸어다니다가 말만 타면 그것으로써도 감지덕지였는데 그담에는 그 말을 모는 사람을 앞세우고 한 번 에헴 해보고 싶다 그런 뜻입니다. 그 사람이 주어지면 다음에는 마차를 타고 싶겠죠? 한 마리 마차 타다가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마차를 탑니다.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도 만족시켜 줄 수 없을 정돕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결국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그렇게 모세를 원망했는데 이거는 모세를 향한 원망이 아니라 모세를 향한 미움이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에요 원망이라고 하는 건 무엇이냐면 자기가 원하는 질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원망의 마음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을 향해 이런 마음을 품었는데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께 나아올 때에 우리의 환경과 사정에 불문하고 하나님을 향해 한 마음을 품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을 당해도 자기의 분수를 알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마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거지요
자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물이 없는 것이 매우 큰 일이기는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홍해의 바다를 가르시고 애굽의 수많은 병사들을 가랑잎처럼 그 물에 떠내려 보내시는 그 일만큼 큰일이겠습니까? 앞에서는 물이 너무 많아서 시험에 들고 이번에는 물이 너무 적어서 시험에 들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진정으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를 위해 홍해도 가르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까짓 먹을 물 하나 예비하시지 아니하겠느냐 아마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두려움 속에서 모세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마음 속에서 감사를 잊어버리고 침체에 빠져있다면 아마 그것은 지금 여러분이 놓여있는 환경이 여러분이 원하는 그게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상황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지금 그 상황에서 여러분이 마음속에서 주 안에서 원하는 그 환경으로 가는 그것이 어려운 것일까요?
Ⅳ. 결론
그렇다면 여러분이 예수 믿기 전이든지 예수 믿은 후이든지 간에 어차피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었으니까 여러분의 인생 중 가장 곤고했던, 지옥과 같은 그 날들을 한 번 회상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에게 그런 날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날이 있습니다.
첫째로 지금이 그때보다는 감사하지 않습니까? 지금이 그때보다는 감사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그 때 하나님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했다면 가슴이 저미도록 하나님께 감사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식구들 아무도 예수 믿지 않는데 죽어라고 박해를 받을 때 주일날 교회만 자유롭게 나아갈 수만 있다면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던 때도 있었죠. 이제 신앙의 자유를 얻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두 번째는 지금 여기에서 여러분이 원하는 주 안에서 이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라고 바라는 그 상황으로 여러분을 건져내어 이 환난과 어려움에서 바위에 숨기시고 손으로 여러분을 덮으신다면 충분히 하실 수 있겠죠 하나님에게는 어려운 일도 쉬운 일이고 쉬운 일도 쉬운 일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2키로짜리 쌀자루를 하나 들으라는 것과 4키로짜리 쌀자루를 들으라는 것은 엄청난 차이지만 건장한 청년에게는 둘다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지극히 큰 능력의 하나님이시고 모든 것을 당신의 능력으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어려운 것도 쉬운 것이고 쉬운 것도 쉬운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만약에 원하시기만 한다면 하루 아침에라도 우리를 건져내실 수 있으니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오히려 과거에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고 미래에도 우리는 그런 희망을 갖게 되는 거에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안도우신다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믿음이 없음이에요 이것이 우리에게 패배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심리학이 아주 잘 이용되는 곳이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이 전쟁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이 모든 것의 총화에요 이 뭐냐 하면 옛날에 전쟁의 역사에 보면 이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이 자기들과 싸우는 군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패배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강하게 갖게 할 때 그 전쟁은 이긴 것이에요 그러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영적전쟁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 속에 낙담하게 만들고 그리고 이제 나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리고 과거의 하나님이 내게 행하셨던 그 크고 놀라운 일들이 더 이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 궁극적인 유혹과 자극이 어디로 부터 오겠어요? 어디로 부터 오겠어요? 그래서 성령의 은혜는 우리에게 소망을 갖게 만들어주지만 마귀의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낙심하고 좌절하게 만든단 말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마음 속에 믿음을 모두 박탈해 버리고 나면 우리는 짐승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향하여 밖에 반응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서 신앙이 사라지고 나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면 그것 때문에 교만해서 넘어지고 길을 잘 안 열어주시면 좌절해서 주저앉아요. 그런데 은혜가 있으면 길을 잘 열어주시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길이 열리지 않고 어려움이 오게 되면 전심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주님의 은혜를 구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하나님과 합일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 크고 놀라운 홍해의 기적을 보고도 그들의 믿음이 없었더니 삼 일 만에 물 한모금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함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나를 더 어려운 인생의 길에서도 하나님이 건져주셨기 때문에 지금도 주님이 내 인생을 붙들고 계시고 내 인생의 계획은 그분의 수중 안에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인생이 풀려나가지 않아도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의 손 안에 내 인생의 계획이 붙들려 있기 때문에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 인생을 이끄실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그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며 살면 그분의 손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신앙을 가지고 살게 될 때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그 자리가 원망하는 자리가 아니라 어린아이 같이 주님을 더 많이 의지 하는 자리가 되어서 홍해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적을 그 물가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감 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