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2010년 설교모음)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1 (2010. 11. 07 주일오후 예배)
설교기간|2010년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2 (2010. 11. 14 주일오후 예배)
편집내용|녹취원본
돌아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3 (2010. 11. 21 추수감사절 예배)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4 (2010. 11. 21 주일오후 예배)
2010. 11. 24 수요 예배
1. 입히시는 하나님(마6:30, 계19:8) 2010.11.7 주일오후 1
2. 먹이시는 하나님(마6:26, 신8:3) 2010.11.14 주일오후 7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6 (2010. 11. 28 주일오전 예배)
3. 바다를 지나게 하신 하나님(시136:13-14) 2010.11.21 주일오전 13
4. 마시게 하시는 하나님(시78:15, 요7:28) 2010.11.21 주일오후 21
5.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레22:29) 2010.11.24 수요예배 26
6. 가장 큰 감사의 이유(롬6:17:18) 2010.11.28 주일오전 32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7 (2010. 11. 28 주일오후 예배)
7. 섬길 자리를 주심(딤전1:12) 2010.11.28 주일오후 43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8 (2010. 12. 01 수요 예배)
8. 복음 안에서 교제함(빌1:3-5) 2010.12.1 수요예배 50
9. 이김을 주신 하나님(고전15:57-58) 2010.12.5 주일오전 59
10. 유리하던 자들을 인도하심(신26:5-10) 2010.12.5 주일오후 66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9 (2010.12.5 주일오전)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1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1 (2010. 11. 07 주일오후 예배)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2 (2010. 11. 14 주일오후 예배)
돌아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3 (2010. 11. 21 추수감사절 예배)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4 (2010. 11. 21 주일오후 예배)
2010. 11. 24 수요 예배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6 (2010. 11. 28 주일오전 예배)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7 (2010. 11. 28 주일오후 예배)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8 (2010. 12. 01 수요 예배)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9 (2010.12.5 주일오전)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10 (2010.12.5 주일오후)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1 2010.11.7 오후예배
입히시는 하나님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I. 본문의 문맥
II. 염려가 아닌 은총으로
A. 들풀을 입히시는 하나님
B. 헐벗지 않게 하신 하나님
1. 입히시는 하나님
- 타락한 아담에게
- 은총으로 공급하심
2. 옳은 행실로 입히심
III. 결론: 감사하라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2 2010. 11. 14 주일 오후예배
먹이시는 하나님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줄을 너로 알게 하려하심이니라”(신 8:3)
I. 본문의 문맥
II. 염려가 아닌 은총으로
A. 새들을 먹이신 하나님
B. 굶주리지 않게 하신 하나님
1. 먹이시는 하나님
-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 은총으로 공급하심
2. 말씀으로 영혼을 먹이심
III. 결론: 감사하라
돌아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3 2010. 11. 21 추수감사절 예배
바다를 지나게 하신 하나님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편 136:13-14).
I. 본문 해설
II.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III. 바다를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
A. 갈라진 바다 사이로
B. 견고한 땅을 밟고 지나게 하심
C. 모든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
IV. 결론: 감사하라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4 2010. 11. 21 주일 오후예배
마시게 하시는 하나님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 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시78:15)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8).
I. 본문해설
II. 반석을 쪼개어 물을 주심
A. 목마름: 르비딤에서 다툼
B. 반석을 쪼개어 물을 내심
III. 십자가 고난과 성령
A. 찢기신 육체 사이로
B. 성령을 보내심
C. 생수: 성령의 은혜
IV. 결론 : 언제나 만나주시는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5 2010. 11. 24 수요예배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 희생을 드리거든 너희가 열납되도록 드릴지며”(레 22:29).
I. 본문해설
II. 감사: 선과 인자하심의 회고
A. 교회적 회고
B. 개인적 회고
III. 감사의 방식
A. 희생함으로써
B. 열납되도록
IV. 결론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6 2010. 11. 28 주일오전 예배
가장 큰 감사의 이유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I. 본문 해설
II. 가장 큰 감사: 구원
A.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됨
B. 의를 위해 섬기는 자가 됨
1. 복음이 전파 됨
2. 마음으로 순종함
III. 의를 위해 살아감
IV. 결론: 소명을 따라 살자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7 2010. 11. 28 주일오후 예배
섬길 자리를 주심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I. 본문 해설
II. 섬길 자리를 주신 하나님
A. 충성되이 여기심
B.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1.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2.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C.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어도
III. 결론: 직분에 합당하게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8 2010. 12. 1 수요 예배
복음 안에서 교제함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 1:3-5).
I. 본문해설
II. 감사의 이유: 복음의 교제
A. 감사와 기쁨
B. 복음 안에서 교제함
III. 결론: 교제 안에서 자라감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1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1 (2010. 11. 07 주일오후 예배)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2 (2010. 11. 14 주일오후 예배)
돌아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3 (2010. 11. 21 추수감사절 예배)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4 (2010. 11. 21 주일오후 예배)
2010. 11. 24 수요 예배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6 (2010. 11. 28 주일오전 예배)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7 (2010. 11. 28 주일오후 예배)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8 (2010. 12. 01 수요 예배)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9 (2010.12.5 주일오전)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10 (2010.12.5 주일오후)
1.입히시는 하나님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0).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I. 본문의 문맥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유명한 공중 나는 새 들에 핀 백합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저는 오늘은 입는 것에 대해서 다음 주에는 먹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차례대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제 이 마태복음 6장은 아다시피 산상수훈의 맥락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특권을 많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친근히 하고 가까이 해 주시는 복도 누리고 또 하나님에 의해서 은혜를 공급 받으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이길 수 없는 상황들을 극복하면 살 수 있게 하는 은총도 주셨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큰 은총은 우리들이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뉘우치면 하나님이 무제한으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셔서 다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신 언약의 은총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의 놀라운 특권들을 주님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간구할 수 있고 또 응답을 받고 하나님을 힘 입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모든 특권과 함께 언약백성들에게는 의무를 주셨습니다. 그 언약백성들에게 주신 가장 커다란 이 지상에서의 의무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설교를 그것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그 다음에 이어질 설교의 이해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리고 오늘 설교의 주제인 입히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하나님이 주인인 나라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나라와 예수님 시대의 나라라는 생각의 개념은 같은 것도 있지만 사뭇 다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거의 없는 시대이고 또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다고 하더라도 북한같이 그런 형태가 아닌 다음에야 왕은 일종의 하나의 명목이고 실질적으로는 국민들이 주권을 행사해서 나라를 끌어가는 민주국가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로 돌아 가 보면 세상의 모든 나라들 중에 그런 나라는 없고 왕이 다스리는 국가였습니다. 그러니까 한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왕의 소유이고 그 왕이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그 자신의 소유에 빌붙어 사는 모든 백성들을 인자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통치하고 주유를 세우는 그것이 바로 당시의 왕국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그림을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 가져다 대입을 시키면 예수님이 그의 나라 혹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에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림은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되어서 그분이 다스리는 영토 안에서 살아가는 그런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첫 번째 개념이었습니다. 여러분 학교 다닐 때 배우셨지만 국가의 성립의 요소가 무엇입니까? 우선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두 번쨰는 국민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토와 국민과 주권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입한다면 영토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통치 안하셔도 되는 영역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니까 소유주 자체가 하나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영토입니다. 두 번째 국민은 우리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입니다. 주권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주권을 행사하는 방식이 세상나라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방식하고는 다릅니다. 이것을 혼동한 사람들이 바로 중세의 로마 카톨릭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그 권세를 가지고 안 믿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기도 하고 사형시키기도 하고 불 질러 버리기도 하고 이렇게 하면서 국가의 권력과 교회의 영적인 권력을 혼동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존경하는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한탄을 했습니다. 어떻게 예배하는 방식이 자신과 다르다고 죽이고 고문하고 불지르고 그럴 수 있겠는가? 이것은 순수한 영적인 역사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의 능력으로 그것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 어떻게 국가의 권력으로 예배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불지르고 화형시키고 사람을 죽이고 그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탄식을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종교가 국가의 권력을 사용하면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주 세속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의 주권을 어떻게 행사 되는가 하면 은혜에 의해서 통치되는 나라입니다. 어떻게?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 참 웃기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지 세상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천국이 있고 하나님이 어디 있어? 있으면 한번 보여 다오. 이렇게 자기가 자기 주인 삼으면 살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사람이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공갈이나 협박이나 이런것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 깊이 감화를 받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이 사람이 그분의 나라의 주권에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사람 왕을 무서워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나라입니다. 그의 뜻은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의지가 의입니다. 그분의 그 의지가 의 이고 그분의 의지를 따르는 것은 옳은 것이고 그분의 의지를 거스르는 것은 틀린 것이고 그릇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우리가 산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서 은혜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적인 나라가 굳건히 서게 되도록 그것을 위해서 이바지 하면서 사는 것이 그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이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파하러 가는 사람들이 전투병이라면 그들을 위해서 교재를 만들고 하는 사람은 보급부대 병참부대이고 그리고 그들이 그 속에서 다치면 치료해 주고 이런 것들은 후방에 있는 의무부대이고 이런 식으로 전쟁을 하는 것처럼 연결이 되어서 궁극적으로는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구원하신 백성들의 의무입니다. 그것이 최대의 의무이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위해서 살지 않고는 우리의 인생이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위해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대적이 있는 것입니다.
II. 염려가 아닌 은총으로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염려입니다. 염려와 근심이 그렇게 자기를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을 따라서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염려와 근심입니다. 염려와 근심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탐욕을 양산하게 만들고 또 염려의 대부분이 우리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면 근심과 염려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집착이 강하고 애착이 뚜렷하기 때문에 안해도 될 염려를 하게 되고 그렇게 마음의 염려가 차지하는 동안 우리가 정말 염려해야 될 것은 마음에 공간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염려입니다. 지금 문맥하고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문맥하고는 조금 우리들이 조정을 해서 성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지금도 절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끼니를 염려하고 그리고 정말 추위가 다가오면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얼어 죽는 사람들이 가끔 나왔습니다. 올바른 옷을 입지 못해서 추워서 벌벌 떠는 것입니다. 저희 어렸을 때 생각해 보면 정말로 무명솜을 누벼서 입힌 바지 저고리 입고 다니는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추위는 그 당시에 어마어마하게 추웠습니다. 그러니까 그 옷을 보온할 수 있는 재료들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솜 같은 것으로 하는데 그 솜이 별로 따뜻하지 않습니다. 추위 없는 방에서 뒤집어쓰고 있을 때 효과가 있는 것이지 바람이 많이 불면 그 무명솜도 그렇게 보온이 안 되는 것입니다. 화학섬유가 최고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을 때 이니까. 지금은 우리들이 옷에 대해서 한다고 할 때 대게 어떤 것입니까? 올 겨울에 옷이 없어서 얼어 죽으면 어떻게 하나? 그렇게 염려 하는 사람들이 소수는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고 계절이 바뀌면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것이 구식인데 이것 입은 지가 벌써 7년이나 되었는데 여기가 나달나달 떨어지는데 창피해서 어떻게 입고 나가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염려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인 염려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모양이나 스타일 디자인 패션 그리고 사람들에게 가서 창피할까봐 이런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몸을 보온하고 유지 하면서 살아가는 이것 때문에 자기의 의복 때문에 염려를 했으니까 문맥이 조금 다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입을 염려, 먹을 걱정, 마실 걱정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엄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무슨 말씀을 하다가 공중 나는 새, 들에 핀 백합 이런 이야기를 하셨죠?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아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네가 만약에 땅에 보물을 쌓아 두었으면 네 마음이 땅에 있는 것이고 하늘 나라에 쌓아 두었으면 하늘나라를 위하여 네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반지 하나만 새로 끼어도 눈길이 자꾸 가죠? 구두 하나만 새로 사 신어도 왜 그렇게 땅 바닥을 자주 쳐다보는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성경은 새로 샀다고 자주 쳐다보지는 않습니다. 옷이 아니어서 그런지 보물이 아니어서 그런지. 근심과 염려를 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 자녀의 삶은 염려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A. 들풀을 입히시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하도 염려를 하니까 그 염려를 바라보시면서 들풀을 입히시는 하나님을 예로 든 것입니다. 들에 핀 백합을 보거라 사실 거기에 백합이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지역마다 다르지만. 그런데 그 백합이라는 것이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백합이 그렇게 예쁜 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특별한 색깔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얀 꽃인데 냄새가 향기롭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예쁜 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들에 나면 그것을 꽃꽂이를 해서 탁자 위에 올라오고 해야지 사람들이 보기도 좋다고 말하고 예쁘다고 말하지 들에 피어난 꽃들이야 인간의 눈에 한번도 안 띠고 있다가 사라지는 들풀 들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치로 보자면 사실은 사람들의 시선도 끌지 못하고 존재에 무엇이 있는지 대답도 못한 채 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없어지는 이러한 들풀의 무가치함을 생각할 때 그 들풀에 예쁘게 피어나는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영혼도 없고 이렇게 보아주는 사람도 없이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때를 따라 햇빛을 주셔서 그렇게 아름다움으로 자신의 자태를 뽐내게 하신다면 하나님이 들풀을 그렇게 입히신다면 영혼을 가지고 당신과 관계를 맺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당신의 나라를 위해서 살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서 헌신하며 살겠다는 사람들인 너희를 주님이 헐벗게 하시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그런 성품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입니다.
(찬송)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B. 헐벗지 않게 하신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입히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1. 입히시는 하나님
여러분 맨 처음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타락하였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벗었음을 알고 심히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그 다음부터 인간은 벗고 살만한 존재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황망해 하는 그들의 눈을 가리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그렇게 자신들의 명령에 복종하고 순종하던 자연의 세계가 인간에게 반항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의 육체를 보호 하시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친히 옷을 지어서 타락한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 입히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몸을 염려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죄로 말미암아 다 망가뜨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의 심판을 이 자연세계에 불러 오게 만들었던 장본인들인데도 주님께서 그들이 가시에 찔리고 상하고 추위와 더위에 상한 몸이 될까봐 주님 친히 옷을 만들어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셨으니 이것은 단순히 옷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헤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살아온 일 년을 이렇게 돌아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철을 따라 입히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유 있는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내 돈으로 내가 사 입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님이 지혜를 주셔서 사람들에게 각양 옷들을 만들게 하시고 우리의 손에 복을 주셔서 물질에 여유가 있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들이 옷을 사입고 의복으로 우리의 몸의 추위를 피하고 더위를 피하고 사람들에게 인간적으로 기본적인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먹고 입는 모든 것이 그렇게 온 것처럼 우리의 의복도 그랬습니다. 루이스 배일리라고 하는 영국의 청교도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책을 보면서 한 없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는 매일 식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옷을 입을 때는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합니까? 그것입니다. 루이스 배일리는 아침마다 옷을 입으면서 그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나 이렇게 눈을 뜨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끝날 텐데 그 날에는 내가 주님의 나라에서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땅을 위해서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게 해주십시오. 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 옷을 없습니다. 옷을 입으면서 하나님 나 같이 이런 못난 인간에게 입을 수 있는 의복을 나에게 재산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생활할 수 있도록 나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감추는 것처럼 하나님 오늘 하루 몸에 의복은 내가 입었으나 나의 행실의 옷을 주님의 은혜로 덧 입혀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복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보면서 번역되기 전의 영어로 된 책이었는데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그것을 읽으며 정말 이 세상에 똑같은 성도들인데 어떤 사람은 짐승처럼 살고 이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옷을 입으면서도. 저는 아직 한 번도 옷을 입으면서 기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늘 하시죠? 그래서 오늘부터 한번 해 보십시오. 하나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한 것처럼 우리 몸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의복을 우리에게 주셔서 추위와 더위를 피하게 하시고 이웃들에게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의복을 공급해 주셔서 이제까지 헐벗지 않고 입으면서 살았으니 이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감사의 조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옷 입고 북한에 가면 전부 다 배우입니다. 정말 탁월 합니다. 어쩜 그렇게 예쁜 옷들, 할머니들일수록 그렇게 예쁜 옷을 좋아 한다고 합니다. 어디 선물한데가 있어서 옷을 사러 갔더니 할머니가 입을 것인데요 했더니 “빨간 것을 사 가세요 노인들은 빨간 것을 좋아 하세요” 그래서 빨간 것을 사 가지고 갔습니다. 우리 교회 색깔도 빨간 색깔인데 우리 교회는 노인들이 좋아하는 교회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옷들도 모두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셔서 그래서 우리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한번 반성해 보십시오.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께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을 만큼 주님께 잘한 점이 없는 종인데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이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진짜 감사할 것은 이것만은 아닙니다.
2. 옳은 행실로 입히심
이것만이 아니라 오늘 이 옷이 계시록에 보니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그랬습니다. 주님이 우리가 헐벗지 않고 옷을 입고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신것이 주님이시지만 주님이 그것만 해 주시고 우리의 영혼은 헐벗도록 내버려 두셨다면 그것은 옷 잘 입은 짐승이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저는 가끔 길거리에 보면 강아지에게 옷을 입히더라구요. 그리고 어떤 강아지는 아예 아랫도리 윗도리 입히고 혁대까지 채워서. 그런데 저는 그것을 집에서 다 만드는지 알았더니 강아지를 위한 패션 스토어가 있다고 합니다. 비싼 옷을 60만원, 70만원도 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입으면 정말 개팔자입니다. 그것을 입히는데 사실은 그것은 털 가진 짐승에게는 고문입니다. 그래서 절대 털 가진 짐승은 그런 것을 안 입어도 충분히 자기 자신의 온도를 조절하며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털을 깎고 거기에 옷을 입히더라구요. 그것은 정말 잔인한 동물 학대 같습니다. 개한테 삔을 매달아 주고 목걸이를 해 주고 하는데 그것이 개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자기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자기가 좋으니까 자기나 하고 다니지 개를 그렇게 못살게 굴고 그렇게 귀까지 뚫고.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그런데 어쨌든 그런 것을 개에게 거추장스러운 것입니다. 동물은 의복과 같은 털만 있으면 춥지 않게 살 수 있지만 인간은 옳은 행실로 덧입지 않으면 부끄러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실수로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드러냈을 때도 수치스러운데 성도다운 행실을 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때 그 수치는 훨씬 더 커다란 정신적이고 영적인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래도 일 년 동안 이렇게 신앙생활을 유지하면서 살아 왔는데 물론 우리는 잘못한 적도 많았고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년 지나고 보니까 심하게 다른 사람에게 네가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네가 어떻게 인간일 수 있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되기 전에 사람이나 먼저 되거라 이렇게 심한 욕설을 듣지 않으면서 살게 된 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를 주님의 은혜의 옷으로 덧입히신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었다 생각이 됩니다. 부족하고 잘못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데 우리를 덮어 주셔서 다른 사람에게 심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시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을 향해 올바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가 하면 나는 순종할 가능성이 없는 인간인데도 주님이 나에게 말씀으로 기도 속에서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그래서 나에게 선한 행실, 올바른 행실을 순간순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셔서 그것으로 우리의 생업보로 삼아 불결하고 더러운 부분을 감추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나는 이 설교를 할 때마다 나이가 많은 제사장을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성소에서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수종 들던 그 제사장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이가 많아서 호호 할아버지가 되었는데 그 할아버지를 홀딱 벗겨 버린다면 그 모습이 그 몰골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몸의 형체는 다 틀어지고 뱃가죽은 축축 늘어지고 뼈는 앙상하고 군데군데 검버섯이 묻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 드리러 나올 때에는 모든 옷을 다 갈아입고 하얀 세마포를 입고 그리고 연기가 피어나고 그리고 짐승들의 피가 튀고 죄를 회개하기위해 울부짖는 기도소리가 들리는 그 사이사이를 오가면 자신을 더러운 것에 물들이지 아니하고 성소에서 수종을 들며 하나님께 대신 제사를 드려 주님을 만나게 해 주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얀 옷을 입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섬길 때 그것은 주님이 입혀 주신 옷이 아니었습니까? 가끔 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도 생각할 것이지만 가끔 사람들을 만났는데 나를 너무 사실 이상으로 높여줄 때 여러분 행복합니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너무 부자연스럽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못된다고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안 믿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가 행한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은혜로 덧 입혀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우리의 존엄과 가치를 유지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옳은 행실의 옷을 입히시고 때로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서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행실을 가지고 주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로 나타나게 하셨으니 이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몸에 의복을 입히신 것보다 더 은혜스러운 하나님의 옷 입히심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III. 결론: 감사하라
이렇게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시고 옳은 행실의 옷을 늘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기 때문에 올 한해도 여러분이 지체들에게 가족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살 수 있었으니 이 의복이 저 의복보다 얼마나 더 훌륭한 의복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영육간에 입혀 주신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찬송) 많이 내게 있어도 그 입다가지고 우리 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아멘
그러면 어떤 고백이 나오는가 하면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더욱 많은 복을 누리고 의로운 행실을 덧입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먹이시는 하나님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 하지 아니하냐" (마 6:26).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3).
I. 본문의 문맥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마태복음 6장은 산상수훈 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가운데 사실 6장에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후반부에서 중요한 메시지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것이 천국시민들의 삶의 목표이고 또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목적을 삼고 살아가야 할 삶의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을 이것을 말씀하시려고 6장 하반부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결론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기 전에 제일 먼저 땅의 보물을 쌓아두지 말거라 그리고 거기에는 좀이나 동록이 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이런 보물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하셨습니다. 보물을 사람들이 자꾸 쌓아 두려고 하는 이유는 무슨 이유 때문인가 하면 적극적으로는 미래의 쾌락을 즐기고 편안한 삶을 위해서지만 소극적으로는 미래에 대해서 자꾸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니까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서 물질을 쌓아 두는 것입니다. 6.25때 미군들이 한국에 있는 고아들을 많이 실어 날랐습니다. 그때의 일인데 길거리에서 부모를 잃고 방황하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깨끗이 씻기고 미군 구호물자 옷을 입혀서 미군 막사에 재웠습니다. 물자가 풍부한 나라의 군인들이니까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으로 먹였습니다. 그래서 잠을 재우는데 아이들이 잠을 안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통역을 세워 물어 보았더니 아이들의 대답이 “아저씨 내일은 무엇을 먹어요?” 난리통에 저녁에는 배불리 먹었어도 아침에는 굶는 일을 수시로 경험했기 때문에 내일에 대한 염려가 그들을 잠들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도 이렇게 맛난 음식을 많이 주고 삼일 밤을 자면 비행기가 와서 너희들이 전쟁도 배고픔도 없는 미국으로 데려 갈 것이라고 설명을 해 주어도 아이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더랍니다. 그래서 취사병에게 부탁을 해서 머리통만한 햄버거를 만들어서 내일 먹을 것을 미리 나누어 주었더니 아이들이 그 빵을 가슴에 안고서야 잠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염려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염려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건전한 염려와 집착 사이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서 과도한 생활에 대한 염려는 반드시 재물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도록 받은 천국시민들이 마치 나라를 지키기로 부름을 받았지만 탈영하고 자기 배를 부르는 빚나간 군인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개인의 삶도 불행해 지고 주님이 세우시려는 나라의 계획도 방해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바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 공중나는 새의 비유를 들에 핀 백합화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 오후에는 입는 문제를 가지고 염려 한느 것에 대하여 말씀 드렸고 오늘은 먹는 문제에 대하여 염려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II. 염려가 아닌 은총
예수님의 결론은 그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염려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아주 쉬운 예를 드셨습니다.
A. 새들을 먹이신 하나님
누구나 다 볼 수 있었던 들판을 날아다니는 많은 새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중에 나는 새를 보거라 그 새는 심은 적도 없고 거둔 적도 없고 창고에 곡식을 쌓아 둔 적도 없는데 그런데 어떻게 그 새들이 계속 생존하고 자손을 퍼뜨리고 해서 멸절되지 않고 이렇게 오늘도 공중을 날아 다니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들을 기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약관계 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가 되시고 또 창조주로서는 이 모든 인간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에 대해서도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마구 다루어도 하나님은 자연을 아주 조화롭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상한 어머니 같은 창조주의 손길이 이 창조 세계에 뻗쳐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생물들이 멸절되지 않고 보존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생존하고 번영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새들을 그렇게 기르시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새가 사실은 인간하고는 비교 될 수 없는 하챦은 미물인데도 하나님이 그렇게 굶겨 죽이지 않고 그렇게 먹이신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인간인 너희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으로 불리움을 받아서 하나님의 천국백성으로 살아 가도록 소명하신 너희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느냐? 그러면 너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너희들의 먹을 것을 책임 지시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너희는 마음의 염려와 집착 사이에서 방황하며 너희를 구원해 천국백성 삼으신 그 뜻 곧 그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생활을 양보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B. 굶주리지 않게 하신 하나님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이 굶주리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1. 먹이시는 하나님
굶주리지 않도록 먹이시는 그 하나님은 인간은 그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지만 자연의 모든 세계의 사물들까지 그렇게 먹이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손길을 생각한다면 우리를 먹이시는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을 만합니다. 사실 농업학자들에 의하면 얼마나 놀라운지요. 전 세계에서 식량이 생산되면 전 세계의 모든 인류가 충분히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벌어지는가 하면 농사를 지어서 많은 곡식을 생산해 낼 수 있는 나라들이 곡물 값이 떨어지면 생산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맛있는 고기를 먹기 위해서 곡식들을 짐승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이 1kg의 고기를 내려면 수십kg의 곡식을 먹어 치워야지만 1kg의 살코기를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탐욕들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남북한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느 해에나 예외 없이 남쪽에서 생산하고 남는 양 만큼이 북한에서 모자랍니다. 그래서 남는 것을 전부 북한에 가져다주면 남북이 골고루 먹고 살 수 있는 만큼 곡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수년째 올해는 조금 났다고 하는데 북한이 계속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십 킬로미터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남한에는 계속 풍년이 드는 것입니다. 남한, 중국, 일본 전부다 풍년이 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탐욕을 줄이고 곡식을 나눈다면 굶주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해 동안을 볼 때 이제는 살기가 원만해 져서 더 이상 먹고 생존하는 문제만을 가지고 그렇게 애달파 하지 않을 정도로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식사기도 할 때 그렇게 뼈아프게 우리 옛날 어렸을 때처럼 눈물로 감사하는 광경을 보기가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를 먹이신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을 우리는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농사는 짓지 않았어도 만약에 우리의 몸에 기력이 없어서 이 사회에 노동을 제공하지 못했다면 임금이 없었을 것이고 임금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식생활의 문제에 대하여 자유로울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1년동안도 살아 오면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적부터 먹을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잘 가르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삼시세끼에 밥상을 받으면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우리의 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행할 때에만 먹이신 것이 아니라 그 밥을 먹고 기운을 차려서 불순종하고 있는 때조차도 우리를 굶기지 아니하고 먹이시고 때를 따라서 우리에게 마실 음료를 주셔서 우리 육체의 생명을 연장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아마도 당장은 그 음식을 먹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더라도 이 음식을 먹고 우리를 생존 시키는 그것이 언젠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는 방법이라고 주님이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는 이해 관계를 초월해서 그래서 집 나간 자식에게도 좋은 밥을 해 먹이는 어미의 심정으로 그렇게 우리를 먹이시며 우리 인생의 길을 인도해 오신 것입니다. 산업화된 사회에서 고도의 물질문명을 누리면서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어머니 같은 사랑을 느낄 수 없다면 우리는 바로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인 이스라엘 언약 백성들을 광야에서 어떻게 먹이셨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때보다도 더 놀랍게 현실로 나타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여러 가지 재물들과 먹을 것을 가지고 온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것이 며칠이나 갔겠습니까? 거의 삼백만 명 가까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최소한 이백만명 이상이라고 여겨지던 그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는 문제는 최대의 숙제였습니다. 아마 그들은 생각에 준비한 식량을 먹고 빨리 가면 가나안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달포 정도면 갈 수 있었던 그 길을 그들은 39년이 넘어 40년 가까운 세월동안을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이집트나 이스라엘을 가본 사람들은 이해 할 것입니다. 아무데나 양식을 구할 수 없습니다. 끝도 없이 사막으로 그리고 벌판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광야의 땅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자신의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을 것이 필요 했습니다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양식을 공급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일찍이 이스라엘 조상들이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는 방법으로 그들을 먹이셨으니 그것이 바로 만나로 먹이시는 것입니다. 만나라고 하는 그 뜻이 이것이 왠 떡이냐 이것이 뭐냐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벽에 그 만나를 내리셔서 서리 같이 내리셔서 먹이시고 그 아침에 사람들은 호매를 가지고 나아가서 각가 자기가 필요한 것만큼만 걷어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서 먹고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한 달에 한번 배급 주시지 않고 매일 거두어 오게 하심으로서 자신의 육체의 생명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양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그리고 연약한 인간들을 먹이고 돌보시는 어머님 아버지 같은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주님이 매일매일 만나로 먹고 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도 보지 못했던 그 양식으로 배를 불리며 그렇게 하나님 인도를 따라서 가나안 가는 길을 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구의 힘으로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셔서 그것들을 매일매일 거두며 먹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부유한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애달프게 한 끼의 양식을 위해 예전처럼 눈물로 기도해 본적은 많지 않지만 이럴 때일수록 마음 깊이 아로새기기를 매일매일 대할 때 마다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온 것이요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단 한순간을 주님을 의지 하지 않고 살 수 없는 인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우리의 육체를 먹이신 것은 하나님의 정말 큰 은혜요 그것도 우리에게는 갚을 수 없는 놀라운 은혜이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영혼의 양식을 가리킬 예표적인 사건에 불과 했다는 것입니다.
2. 말씀으로 영혼을 먹이심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만나를 먹이시면서 그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매일 만나를 먹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의 지도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 그래도 은혜를 받고 정신 차린 교인들은 아침마다 가서 만나를 거두면서 동시에 자신들은 이 만나만 있으면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들판에 거둔 이 하얀 만나는 육체를 위한 양식이요 육체 말고 자신들에게는 영혼이 있으니 이 영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영적인 양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침마다 직면하였을 것입니다. 바가지로 만나를 담을 때 그들은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너는 너의 육신을 위해 이 이른 새벽에 내 명령에 순종해서 바가지를 들고 나와 오늘 먹을 양식을 담고 있구나 그렇다면 네 영혼을 오늘 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내 마음에 담겼느냐? 라는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해를 이렇게 돌아보면 우리가 우리로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하나님이 미끄러질 때마다 우리를 붙들어 주신 말씀, 상처를 입고 쓰러질 때마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셨던 하나님의 말씀 심지어는 우리가 영적으로 병들어 우리의 영혼의 배고픔과 굶주림을 느끼지 못할 때조차도 주님이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때려서 우리가 헐벗고 굶주린 것을 보게 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찬송)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III. 결론 : 감사하라
주님이 우리 육신의 굶주림보다도 우리 영혼의 굶주림을 가엽게 여기셔서 쓰러질 때마다 말씀을 우리에게 떠 먹여 일어나게 해 주시고 눈이 어두워 그릇된 길을 갈 때마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떼어 주심으로서 우리의 눈이 밝아지게 해 주셨기에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일년을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내 본성으로는 끝까지 사랑하지 않았지만 주님의 말씀의 양식을 먹임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해 주시고 마음에 원수를 맺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먹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때로는 넘어져도 아주 쓰러지지 아니하고 말씀의 지팡이를 들고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며 육체의 허기는 한끼의 음식으로 모면할 수 있고 그리고 육체의 허기는 한잔의 음료로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혼이 가라고 우리의 영혼이 굶주렸을 때 우리 육체의 배부름은 우리에게 결코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히 주신 말씀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요 떡이 없어 기근이 아니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 나지 않았습니까? 굷주린 영혼으로 몇 년을 방황하고 마음 둘 곳 없이 이리 까부리고 저리 까부리며 우리의 인생이 요동칠 때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 앞에 차려진 그 말씀에 성대한 식탁을 대하고 그 말씀에 배 부른 이후에 우리는 비소로 우리의 눈이 밝아져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달았고 말씀의 양식이 없어 주린 영혼으로 할 수 없었던 그 섬김과 봉사를 그 말씀에 힘을 얻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수 없지만 백번 양보해서 육체의 양식은 농협에서 여러분이 번 돈으로 쌀 팔아 먹었다 치더라도 여러분 영혼의 양식은 여러분이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성실 하심으로 우리들이 올바르게 주님을 위해 충성할 때뿐만 아니라 때로는 미끄러지고 쓰러질 때 조차도 거기에 적합한 음식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깨우고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료해 주셨기 때문에 오늘 성도로서 그렇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 살 수 있도록 일년간 하나님이 보살펴 주신 것입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여기에서 레칼르트라치오의 교리를 가지고 겨울 사경회를 하던 신년초가 엊그제 같은데 벌해 한해가 마지막으로 저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몇 번 더 한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면 우리의 인생은 마감하고 말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분 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육체의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의 기근이 들려 굶주린 우리의 영혼의 양식을 주시는 유일한 영혼의 목자이심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한해가 저무는 감사주일을 앞에 둔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워야할 감사의 제목은 여러분의 육신을 먹이셨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양식을 시시때때로 공급하여 아직도 성도로 남게 하신 하나님 너무나 부족하고 모자라는 부분이 많지만 감히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가 되어서 거미줄 같은 연약한 믿음인데도 때로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용서 받고 은혜 받은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내가 용납되게 하심으로 그 은총을 긍휼을 우리에게 먹이심으로 성도로서 남아 있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여러분이 감사해 될 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들이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배반으로 갚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배신을 항상 사랑으로 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게 하시고 돌아 온 자들은 용서해 주시고 용서한 자들에게는 다시 은혜를 주셔서 주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공급해 주시는 영혼의 양식을 우리 입에 떠 먹여 주시지 아니하였던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성도로서 주님 앞에 남아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이렇게 단정하게 주일 오후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한때는 여러분의 지체요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방황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물이 없고 떡이 없어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목마름과 기갈 때문에 그들은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보다 못한 것이 없으되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하나님은 저들은 계속 주리게 하셨고 우리는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때마다 시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앉은 그 자리에서 주님 앞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해 주시고 또 주님의 뜻대로 살아 갈 때에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해 주시고 사람들에게 배신과 버림을 받아서 외로울 때에는 주님 홀로 내 곁에 계시는 것을 날마다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로 살아 왔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내게 사랑을 받고 있다면 나에게 영혼의 양식을 먹이신 주님의 은혜 때문이고 못난 목회자가 여러분에게 고임을 받는다면 그것도 여러분 본성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과 같은 영혼에게 말씀을 먹이신 주님의 은혜의 힘이 맺은 사랑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의 사명은 어찌하든지 주님의 마음으로 교회 안팍에 있는 핍절한 영혼을 끌어안고 어미가 자식에게 미음을 떠먹이듯이 하나님의 잘 준비된 말씀을 도리질 치는 그들의 입을 벌려 사랑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먹고 회복된 사람들을 보십시오. 한때는 핍박자요 포악자 이었으나 충성스런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한때는 주님을 배반하고 악한 사람들이었으나 선한 사람들이 되었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쓰레기 같은 죄인들 예수 안 믿을 수 없이 망가진 인간들을 한 대 모아서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도들이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서 아주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룬 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날마다 그들의 입을 벌리고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 굶주리지 않고 우리가 배부르도록 매일매일 먹여 주신 말씀의 식탁, 공중 나는 새에게 모이를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육체를 돌보실 뿐만 아니라 육체 보다 더 소중한 우리의 영혼을 그렇게 먹이시는 주님의 말씀에 은혜로운 식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끔찍한 부패성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까리따스의 일치를 이루며 예수의 몸을 이루어 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 속에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비결을 배웠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주님이 용납하게 하시는지 은혜의 비밀들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실패 속에서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 무엇을 붙들고 일어서야 되는지를 배웠고 주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붙들고 나아갈 때에 시련과 비바람이 몰아 칠 때 그것을 이기는 위대한 인내의 힘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터득하지 않았습니까? 그럼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세웠고 우리를 다듬었고 우리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그럼으로 이 감사절에 여러분이 주님 앞에 감사해야 될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육신을 이토록 평안하게 먹이신 주님께 감사하는 것과 동시에 쓰러질 같은 여러분의 영혼을 말씀으로 붙드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다짐해야 합니다.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고 매일매일 그 말씀을 먹고 매일매일 그 말씀의 은혜로 사는 그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왕년의 말씀의 은혜는 왕년에 우리를 살게 하였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은 오늘 우리를 붙들어 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매일매일 이 비천한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먹이시는 그 하나님을 향한 감사하는 성도들의 반응인 것입니다.
3.바다를 지나게 하신 하나님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편 136:13-14).
I. 본문 해설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은 아마 시편 가운데 가장 애송되고 있는 감사 시로 생각되는 136편의 두 구절입니다. 시인은 이 136편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되 주님의 인자하신 속성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로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모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II.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여기에서 시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있었던 한 가지 사건 즉,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이 그 물 가운데를 건넜던 홍해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애굽의 열 개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바로의 초태생의 자녀부터 시작해서 모든 짐승에 처음 난 것까지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심판이 있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애굽을 탈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일 먼저 가로막은 것은 깊고 넓은 홍해였습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움직이시자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준 것을 후회하게 되었고, 병거 600승을 명령하여 이미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도록 분부하였습니다. 질풍과 같이 병거들은 달려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 큰 물결 앞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구름 기둥을 이동시켜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그들을 앞에 가로 막으시고 어두움을 드리우시지 아니 하였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작에 멸망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곳은 찬란한 낮이 되게 하시고, 따라오는 애굽 병거들이 있는 곳은 캄캄한 흑암의 어두움이 드리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접근하기 극난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기둥까지 가세하여 애굽 병사들을 혼란케 하여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접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크고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결치는 홍해의 파도 앞에서 두려워 떨며 모세를 원망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세를 통해서 이 홍해의 바다를 가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자연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느라 홍해의 기적을 어떻게 하든지 축소시켜 보려고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이 홍해를 가르셨고, 좌우에 바닷물이 벽같이 섰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이로 난 땅을 건너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적 적이고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이 행하셨습니다. 언제행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렬히 기도할 때 행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굳세게 믿을 때 하나님이 그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이 놀라운 일을 행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모세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애굽에 우리를 죽일 데가 없어서 이 바다 끝에 끌어다가 우리를 수장시키려 하느냐고 모세를 향해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믿음이 그렇게 위대한 능력을 가지는 것도 하나님이 그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시겠다고 하는 우리와의 언약 관계가 토대로 있기 때문에 그 믿음이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들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을 때에도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심으로 오히려 우리의 믿음이 우리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근거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종종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늘 이 상황이 바로 이러한 상황이었습니다. 모세는 코너에 몰려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과 불평을 하나님과 지도자를 향해 쏟아내고 있었고, 어디에서도 믿음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신앙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눈앞에서 보란 듯이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바다 가운데로 난 마른 땅으로 행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 기적의 갈라진 바다사이를 지났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사도바울은 신약의 교회가 받을 세례를 예표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 라고 말하였습니다.
III. 바다를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으로 갈라진 그 바다를 통과하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의 신약의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의 찢어진 육체 사이를 지나는 피의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로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한 자녀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열렬히 필요로 할 때에 그런 위대한 일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말입니다.
A. 갈라진 바다 사이로
아무튼 하나님은 바다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갈라진 바다 사이로 이스라엘 백성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벽처럼 높이 바다는 서 있고 그리고 그 사이로 난 땅을 지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유히 홍해를 건넜고, 뒤쫓아 오던 애굽의 군사들은 불기둥과 구름 기둥의 극난한 역사 속에서 감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할 수 없게끔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신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신 바다 밑의 육지의 길이 ‘야빠시아’라고 기록을 합니다. 이것은 마른 땅입니다. 이백만명은 족히 넘었을 백성들이 함께 대열을 지어서 걸어가는 길이었으니 그 하중은 어마어마했을 것입니다. 바다를 갈랐어도 바다 밑바닥이 뻘이었다든지, 밟으면 꺼지는 진흙이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의 물기둥 사이에서 매장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다는 기둥처럼 벽처럼 세우시고 땅은 마른 땅이 되게 하셔서 수백만의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건널 때에 안전하게 건너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B. 견고한 땅을 밟고 지나게 하심
이렇게 견고한 땅을 밟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나게 하심으로 바다를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의 그 모든 뜻들을 이루어 주셨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도대체 역사상 어느 백성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이러한 대접을 받은 일이 있으며 이런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민족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조상들에게서도 본 적이 없고, 후손들에게서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이 크고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왜 그렇게 대해 주셨습니까? 이 모든 구원의 은혜는 언약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은총은 구속으로부터 온 것처럼 그들이 받은 모든 은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 관계를 통하여 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당신의 품으로 불러 주시는 크고 놀라운 은총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의무가 없으셨지만, 즐겁게 언약을 맺으셔서 당신 자신을 의무로 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온갖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면서 그들을 이끄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이들을 인도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오래전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언약을 아브라함이 받은 이후로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변덕을 부리며 하나님께 돌아갔다가는 등지고, 등졌다가는 돌아가는 가는 이 배반의 삶을 되풀이 하였지만 하나님은 시종일관 변함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같은 자비하심과 선하심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셨고 그들의 처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적 성실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오셨던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이 위대한 기적은 바로 그렇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인생에 항상 좋은 날만 있기를 바라고 나쁘고 어려운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좋은 것들을 통해서만 좋을 것을 받을 수 있다고 믿지만 하나님은 나빠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주님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바로의 손에서 이끄실 수 있는 하나님이셨고, 600승의 병거를 혼란 속에 몰아넣어 이스라엘에게 범접할 수 없도록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렇게 홍해 앞에 위기를 만나 두려워 떨은 순간을 허락지 않으시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수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리 하신 것은 바로 이 위기를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스라엘과 모든 애굽 백성들에게 위험 중에 나타내 보이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위기를 만났을 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난관 앞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크고 위대하신 능력을 보여주심으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속에 그 순간이 아로 새겨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들 앞에 만나는 어려움과 환란이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했던 난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능히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배역하고 주님을 향해 모진 원망을 쏟아놓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셔서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안전하게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좇아난 하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크신 사랑과 놀라운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드시고 그리고 이후에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과 불순종을 초월하여 그들을 구원의 가나안으로 들이고자 하는 주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친히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바다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기적을 회상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지난날을 회고해 봅니다. 주님도 모르고, 선과 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죄악된 물을 먹고 마시며 살던 짐승과 같은 인간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우리들 중에 누가 있습니까? 우리 모두 한 때는 짐승과 같은 인간들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그 놀라운 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우리의 그 본 모습을 잊어버리고, 표독하고 모질게 주님을 대적하고 보란 듯이 악을 행하며 모든 사상에 주님이 없다고 부르짖으며 용감하게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위해 간절히 매달릴 때 우리에게 복음이 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싫은데도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셨고, 우리는 마음에 원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사람들을 통해, 복음의 말씀을 통해, 목회자를 통해, 심지어는 우리의 환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러한 반복되는 일들 속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이미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구원하고자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예정 가운데 두신 주님의 섭리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믿고 중생하고 회심한 이후에 비로소 그 은혜가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덕분에 우리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예수를 믿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친히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끔 만들어 주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이 친히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우리 마음 안에 행하심으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보텐 것이 없는 수혜자들이 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시간도 맨 처음 회심하던 그때를 회상합니다. 그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주님이 아니면 하루도 더 살 수 없는 절망의 벼랑 끝에 있는 낙인 찍힌 죄인들이었습니다. 삶은 짐승 같았고, 그리고 모든 사상에 하나님을 찾지 않으려고 하는 배역의 마음으로 가득 찬 못된 존재들이었습니다. 근데 그 짐승 같은 마음을 누가 녹였습니까? 그 깨뜨려지지 않는 돌 같은 마음을 쪼개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 누구 앞에서도 굴복할 줄 모르던 사악하고 교만한 인간으로 하여금 무릎을 꿇어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주님의 인자하심 앞에 부복하도록 만들어 주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홍해 앞바다를 가르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것도 보텐 것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원망과 좌절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지만 주님이 어느 순간에 우리 앞에 우리의 마음을 보게 하시고, 우리를 깨뜨려 홍해를 가르신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갈라 우리로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못을 받고 떠났거늘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당신께 돌아오게 하실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아들이 십자가에서 아버지를 반역하고 지은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 목적은 죄인인 우리를 감동시켜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손해를 입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는 그 모든 명예와 손해를 보상해 드리고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드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인들을 어찌하든지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를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보시고 푸시고 그 마음이 화목케 되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께 돌아올 수 있는 힘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자격 없는 죄인들에게 그 크신 사랑이 임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갈라진 바다사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났던 것처럼 우리는 갈라진 주님의 육체 사이로 난 새롭고 산 핏길을 걸어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찢어진 휘장을 지나 거룩하신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건널 수 없는 커다란 깊은 수렁이 있어 도저히 하나님께 우리의 의로서 우리의 교육으로, 우리의 선행으로, 우리의 사상으로, 우리의 공로로 건너갈 수 없는 그 깊은 굴곡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건널 수 있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이 쓸모없는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고 넓은 사랑, 그리고 이 벌레 같은 인간이 이미 만세 전부터 주님의 그 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크고 넓으신 사랑과 은혜 안에서 우리 주님을 찬송하고 또 경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는 우리 모든 사람 위에 넘쳤고 그래서 우리는 그 주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믿음 생활을 해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는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주님을 믿고 살아오는 길이 설교자가 말하는 것처럼 항상 행복한 길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마냥 평탄한 길을 걷기만 했던 것이 아니듯이 그렇게 기적적으로 바다를 지나 세례를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된 이후 우리 앞에 펼쳐진 순례의 길도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우리가 1년 동안 살아오면서 고난과 시련을 당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우리가 선한 뜻을 세웠기 때문에 그런데 세상은 아직 악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이 당한 고난일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게 하나님을 배반하며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 품으로 돌아오도록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시기 위해서 때리신 회초리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것이든지 언약 백성들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일을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허락하시는 줄 압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일 백 번 주님을 위해 죽고 싶다고 고백을 해도 주님은 그런 더러운 목숨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을 은사 중 최고의 은사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영광스러운 특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 어떤 사람에게는 주님이 그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자기를 구원받게 하시고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주님의 그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알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소명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들만이 허락받을 수 있는 그 고난에 여러분을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옥 속에 갇힌 바울이 일생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모하던 그 영광스러운 일들을 여러분에게 허락해 주셨기에 사도들은 핍박을 당하고 매질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고난을 견뎠습니다. 일생을 시련과 비바람 속에 살아도, 일생을 눈물과 탄식 속에 지내고 가슴을 뜯으며 고통을 받아도, 정말 주님을 위해 가슴을 찢은 적이 며칠이나 되고 주님을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나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매질을 당하고 핍박을 받은 날들이 일생을 살고 나면 우리 중에 며칠이나 될까요? 그래서 과연 우리도 죽을 때에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주님을 위해 고난 받은 사람들은 바로 주님이 이런 흔적을 아로 새겨 주기 위해서 여러분을 특별히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교회와 잃어버린 영혼들, 병든 영혼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셨으니 이 어찌 감사의 제목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쓰레기같이 주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한 귀퉁이를 타락과 정욕으로 더럽히다가 눈을 부릅뜨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을 개 같은 인생들을 변화 시켜서 감히 영광스러운 성도들에게나 허락되는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자리에 우리를 세워주셨으니 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크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의 고난과 시련이 우리의 불순종과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더 많이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주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면 주님이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거스를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를 권고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불순종하는 우리에게 사랑의 회초리를 들어 우리를 모질게 때리심으로 우리의 마음를 변화시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주셨겠습니까?
평생을 고아로 자란 제가 아는 한 형제가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잔소리 듣고, 아빠에게 매 맞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때로 우리를 징계하시고 무섭게 때리신 것은 그 아픔의 크기만큼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당신 없이 고통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을 깨우치고 목회자에게 탄식과 애원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호소하고 사랑하는 지체들과의 교제를 통해 끊임없이 그대들의 양심의 마음을 두드렸지만, 세상을 향한 사랑이 너무 크고 자기의 위업을 구하는 사심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도록 귀 멀고, 볼 수 없도록 눈먼 자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만약에 여러분을 편하게 내버려 두시면 여러분을 구원하실 때 약속하신 여러분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하신 주님의 언약은 파기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을 때 당하는 고난과 끔찍한 시련은 주님의 신실하심의 또 다른 표현이요, 사랑의 또 다른 나타남입니다. 인간들은 버림받은 밤 길에서 채찍에 피 흘리며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지만 버려진 밤길 거기에서 주님이 계시고, 얻어맞는 그 회초리가 있는 바로 그 곳에 주님은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해를 돌아보면 주님이 때리신 것은 정말 아팠지만 때리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어루만지시는 위로는 때리실 때 맞은 상처보다 항상 컸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사람의 회초리는 가슴에 상처가 돼엉 남아도 주님이 우리를 치신 그 채찍질은 한 번도 우리의 마음에 상처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찬양)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인간의 모든 타락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 지려는 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스러운 추수감사 주일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아직까지도 주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며 방황하는 지체들이여, 오늘 이 시간에 갈라진 이 홍해의 바다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금식하며 매달릴 때도 아니었고, 눈물로 회개한 때도 아니었는데 주님은 그들이 도망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제껏 여러분을 인도해 오셨습니다.
C. 모든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한 해 동안도 베풀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의 1년 중 굶주리지 않도록 우리의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고, 사람들에게 우리의 품위를 잃지 않도록 우리의 입을 것들을 보내 주셨고, 갈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생수를 먹이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송하고 순종할 때만 우리를 선대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할 때도 심지어는 주님을 원망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입히고 마시고 먹이셨습니다. 주님을 모질게 대적하고 악을 행할 때도 주님이 주신 밥을 먹고 힘을 내서 주님을 대적했고, 주님이 입은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으며 주님이 마신 물을 먹고 우리가 힘을 내어서 주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신실하신 성품 때문에 변함없이 신실하게 우리를 대해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없도록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자기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모두 주신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아끼실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안 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아서이고, 이미 주신 것이 있는데도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불신앙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불만족스럽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에게 눈을 들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는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실존은 사치 그 자체인 적이 너무나 많습니다.
IV. 결론: 감사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받으실 최고의 추수감사절의 제물은 아름드리 곡식단이 아니라 흩어져 버려진 것 같은 여러분의 마음을 이삭처럼 주워서 그래서 주님께 다시 드리는 것입니다. 1년 동안 일어난 모든 좋은 일은 주님의 은혜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 나쁘고 가슴 아픈 일은 모두 자신의 악함 때문이었다고 고백하며, ‘주님은 과연 의로우시다’고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주님을 멀리 떠나지 않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주께 가까이 함이 나의 복입니다.’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주님만이 제 곁에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찬양) 주여 꽃처럼 향기로운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무슨 나쁜 일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언제나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다 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어 선한 길로 이끌고자 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속으로 주님을 기뻐하지 않고 미워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욕망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여러분에게 베푸신 그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한 해 동안 여러분을 영혼과 육체를 돌보아 주신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을 모두 묶어 우리 주님 앞에 드리고 ‘이제 나의 참된 행복은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고백하며 새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 바랍니다.
4.마시게 하시는 하나님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 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시78:15)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8).
I. 본문해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간을 회고 해 보면 입히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입은 것인데 우리가 육신의 옷을 입은 것도 주님의 은혜이지만 그 옷은 무엇입니까? 성도의 행실, 그래서 우리가 성도다운 행실을 하며 살 수 있었다면 그것이 우리의 수치를 가리는 영광이었고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었다 또 지난주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셨는데 우리가 농협 쌀을 먹고 산 것도 주님의 은혜였지만 그것 못지않게 더 소중한 것은 우리의 영혼을 굶주리지 않도록 먹여서 이제까지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말씀이 우리를 지탱해 오게 만드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은 그럼 마시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II. 반석을 쪼개어 물을 주심
그래서 오늘 읽은 이 본문은 구약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을 명백하게 우리에게 제시 합니다. 그것은 바로 반석을 쪼개어서 물을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원인은 목마름 때문이었습니다.
A. 목마름: 르비딤에서 다툼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이라는 곳에서 큰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사흘길 쯤 갔을 그때에 거기에서 그들은 물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 갔던 광야를 보면 정말 물이 나올 가능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곳입니다. 아주 드물게 샘이 있기는 한데 우물을 깊이 파서 샘물을 깃고는 하는데 파는 샘물마다 항상 마실 수 있는 단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먹을 수 없는 쓴물이 나오는 그런 샘들이 있기 때문에 물이 있어도 식용으로는 쓸 수 없는 물이 많이 있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배가 고프면 그래도 참을 수 있는데 목이 마른 것은 견딜 수 없습니다. 그냥 목이 마르면 견딜 수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 탈수 현상이 나게 되면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음식도 중요하지만 일단 물하고 소금기만 조금 있으면 몸이 완전히 해체되지 않고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이 없으면 인간이 버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서 또. 홍해 바다 앞에서 그 난리를 치고 건넌 다음에는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했냐는 듯이 미리암의 소고에 맞추어서 수백만 명이 성가대가 되어서 찬송을 부르니까 홍해 앞바다에 메아리 친 것입니다. 얼마나 장엄한 광경입니까? 그 성가대가 믿음이 없어 며칠 가더니 그 다음에 또 물이 없다고 원망을 하는데 우리가 여기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우리가 지난번에 권사님들하고 성지순례 가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삼일 길에 원망했다는 것은 굉장히 좋은 믿음이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삼일을 참는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종종 사고가 납니다. 이집트 같은 곳에서. 취미로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막이 항상 사륜구동차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못 들어가는 광야가 많습니다. 그리고 바위 같은 것으로 되어 있으면 더더욱 차가 못 다닙니다. 그래서 이제 광야 여행 갈 때 페트병을 한보따리 지고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광야에 들어가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핸드폰도 안 터지고 우리 한국사람 성미 같았으면 그 까짓것 손바닥만하니까 기지국을 쫙 깔아서 어디든지 터지게 할 텐데 안 터지니까 위치도 못 알려주고 물은 떨어지고 길을 잃어버리고 엄청난 뜨거운 햇살을 내려 쫴서 죽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르비딤에서 다툴 때 사실은 그럴 것 아닙니까? 우리를 똑바른 길로 인도하라든지 아니면 너무 빨리 가지 말고 천천히 가자고 하든지 그것은 지도자가 맞추어 줄 수 있는 것이지만 물을 어디에서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까? 모세가 무슨 물 공장 하는 사장입니까?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것도 한명이 아니라 2-3백만 명이 먹을 물을 내려면 물이 얼마큼 되어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여기에서도 하나님이 상식을 깨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물을 내십니다.
B. 반석을 쪼개어 물을 내심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는데 사실 출애굽기에서는 쪼개졌다는 말이 명확하게 안 나오는데 여기에 보면 반석을 쪼갰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주 분명하게 반석을 쪼갰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그 할아버지가 얼마나 힘이 세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 할아버지가 든 지팡이가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아무리 화가 나서 쌔게 친들 그것이 쪼개질 정도면 거기에서 이백만명정도가 먹을 물이 나왔겠습니까? 그러니까 쪼개진 것 차체가 이적을 동반한 사건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쪼개집니다. 쪼개진 다음에 마치 깊은 수원에서 물이 나오는 것처럼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셨습니다. 이렇게 시인이 과거의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경배의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건이 사실은 홍해 사건만큼 큰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목마름을 면했으니까.
III. 십자가 고난과 성령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구속 역사에서 이 사건이 얼마나 오래도록 이스라엘 구속의 사건에 기억에 남아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그렇게 바위를 쳐서 명령하여 물이 쏟아진 사건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사도바울이 그 사건을 기독론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다 같이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A. 찢기신 육체 사이로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자기의 육체를 찢으심으로 찢기신 그 육체사이에서 흐르는 피로 우리들이 구속을 얻게 될 것처럼 똑같이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이 사건을 예표하셔서 바위를 터뜨려 그들을 찢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물이 솟아났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친히 징계를 받으심으로 육체를 찢기신 그 육체 사이로 보혈이 흘러 넘쳐 우리를 구속받게 하셨는데 그 구속의 사건이 성령을 보내신 사건의 토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부활하신 것 승천하신 것 성령이 오신 것 이 사건은 모두 구속사적으로 하나로 연결되는 사건입니다.
B. 성령을 보내심
그래서 결국은 구약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와는 다른 방식의 충만한 내주의 축복으로서 성령의 시대가 도래 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고 당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성령의 충만한 시대가 도래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교회의 연합이 성령 안에서의 아주 아름다운 유기체적인 연합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두 가지를 이루셨는데 인간에 대한 완전한 구원을 이루시고 두 번째는 인간에게 완전한 위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인간을 위해서 하신 일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의 동기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구원의 토대였고 성령의 역사는 예수께서 이루신 그 구원사역을 우리 각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작용이었습니다. 그 작용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자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찢으신 육체의 고난과 성령의 보내심은 떼어 놓을 수 없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하게 된 것이고 중생이후에 성령의 내주도 성령을 통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매우 특별한 교통의 관계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으니 실질적으로 이 구원의 사역은 예수님이 이루셨지만 그 구원사역을 날라서 우리 각 사람에게 적용시켜 구원받은 축복 안에서 살게 하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삼위일체적인 구원입니다.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이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 가시고 성령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셔서 말씀을 통해 우리를 성화시키셔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날마다 거룩하게 해 가시는데 삼위 하나님이 각각 우리에게 다른 위격적인 특성들을 드러내면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성품들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부와의 교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고 성령과의 교통을 통해서 성령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 주님이 무엇을 주셨습니까? 후~~ 성령을 받아라!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라져서 깊은 실망감에 잠겨 있는 이 제자들에게 가장 탁월한 것은 성령의 위로 였기 때문입니다.
C. 생수: 성령의 은혜
그래서 이제 이 성령을 성령의 이러한 놀라운 위로와 구속사적인 사역을 성경 여러 곳에서 생수에 비교합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예수님의 말씀에 나옵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배는 창자를 가리키는데 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이 깃들어 있는 자리가 심장이 아니라 창자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그 좌소로부터 성령으로 말미암는 생명력이 충만하게 흘러나온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생명 중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은 생명이시고 다른 모든 생명은 창조된 생명입니다. 그래서 창조된 모든 생명은 창조되지 않은 원 생명이신 하나님의 덕을 힘입어서 살아 있고 기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주님이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밤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데려 가시는 것입니다. 순서도 없습니다. 올 때는 순서대로 오는데 갈 때는 순서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엊그제도 상가집에 가보니까 영안실에 사진이 붙어 있는데 활짝 웃고 있는 자매, 무슨 사연일까? 29살밖에 안 되었는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옆에 있는 남자는 이제 35살밖에 안 되었는데 떠났습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일까? 미국에 가서도 공원에 가자고 했더니 묘지에 데려 갔습니다. 가니까 공원은 확실히 공원인데 묘지들이 잔뜩 있는 공원입니다. 공원 숲은 좋은데 한쪽에 묘지들이 쭉 있고 벽돌들이 쭉 있습니다. 제일 궁금한 것이 몇 살 살았나 하는 것입니다. 이 할아버지는 80세, 90세, 100세까지 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19살, 20살, 21살, 23살, 33살. 다 가버렸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명이 하나님이 살아 있게 하시는 동안에만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거두시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생수와 같이 솟아나는 역사는 하나님에 덧입은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활기 있게 하시면 활기 있어집니다. 하나님이 살아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도 보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시편 42편에서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목마름을 적셔주는 생수는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한 성령의 은혜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이렇게 전 세계에서 물을 이렇게 펑펑 쓰는 나라가 없습니다. 물하고 전기 쓰는 것을 보면 겁이 납니다. 몇 달 전에 유럽에 집회가 있어 가다가 김종순, 정경아 가정을 들렀는데 컴컴한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왜 이러냐 했더니 불을 다 키고 살면 한 달에 전기세가 100만원이 나온다고 합니다. 전기세를 그렇게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백만원을 주인에게 맡겨 놓으면 주인이 그것을 통장에 넣어 놓고 자기가 일년 동안 지불을 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알아서 전기세를 낸 다음에 연말에 실제 낸 돈 빼기 맡긴 돈 오백만원 계산을 해서 더 냈으면 돌려주고 모자라면 더 받고 그렇게 오백만원 예탁금을 받는데 잘못하면 오백만원을 맡기고 칠백만원을 더 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다 침침합니다. 조그마한 불을 키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환한 것이 좋은데 정말 갑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펑펑 쓰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물도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막 쓰는 나라 없습니다. 틀어 놓고 노래 부르고 양치질 하는 동안에 계속 내려갑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 같은 것을 인간이 필요한 양을 아주 싸게 하고 그것을 넘어 가면 왕창 비싸게 해서 한번 물세를 물고 나면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 정도가 되어야 이제 아껴 써야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우리는 물에 대해서 고맙고 귀한 것을 모릅니다. 그런데 어젯밤에 가족들하고 잠깐 텔레비전을 보니까 물이 없어 고통을 받는. 물을 먼 곳에서 길어 와서 수건 하나를 빨아 여러 식구가 세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물 쓰듯 쓰면서 살았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닙니까? 넓은 의미로 하나님이 안 주신 것을 우리가 어떻게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참 감사했습니다. 요즘은 그 물도 모자라서 정수를 해 먹고 생수를 사다 먹고 수돗물은 발 씻을 때나 쓰고 하는데. 물질적인 물도 하나님의 은혜로 공급된 것이지만 그 보다 더 큰 영혼의 생수가 우리에게 일 년 동안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숨이 탁탁 막힐 정도로 어렵고 시련이 올 때 주님이 그때마다 목마른 우리의 영혼을 기억하셔서 생수와 같은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갈급한 영혼을 채워 주시고 그래서 우리의 지친 영혼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IV. 결론 : 언제나 만나주시는 하나님
물은 때때로 떨어지면 얻을 수 없는 때도 있지만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은 언제든지 우리가 주님 앞에 가난한 마음으로 나아가 은혜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런 생수와 같은 주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도 이기고 역경도 견디면서 이제까지 믿음의 삶으로 살아 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베푸신 크고 놀라운 축복이며 은혜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마시게 하시는 그 하나님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 때를 따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실 물을 공급해 주셔서 육체의 삶을 영위하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 그 많은 사람이 목말라 르비딤에서 다투고 하나님을 원망했음에도 미워하셔서 목말라 죽이지 아니하시고 원망하는 그들을 믿음을 갖지 않은 그들에게 반석을 쪼개어 물을 내셨으니 이는 후일에 예수님이 찢으신 육체 사이로 우리를 위한 피를 흘리시고 성령을 보내실 것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령의 은혜로 지난 한 해 동안 크고 작은 주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도 이기고 미력이나마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일 년 동안에 미끄러져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갔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육체로 마쳤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지만 목마른 영혼을 만나주시고 생수와 같은 성령의 은혜를 시시때때로 주님이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부끄럽지만 이 만큼이라도 떠나지 않고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섬길 수 있었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이미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주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5.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 희생을 드리거든 너희가 열납되도록 드릴지며”(레 22:29).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규례를 담고 있습니다. 제사의 방법에 따라 제사가 구별되기도 하고, 또 제사의 목적을 따라 제사가 구별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불에 태워서 드리는 화제, 혹은 번제, 혹은 흔들어서 드리는 요제, 가루로 드리는 소제, 등등은 제사를 드리는 방식과 관계된 것이고, 속제제, 서원제, 낙헌제, 등등의 제사의 이름은 제사의 목적을 기준으로 한 분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한 제목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감사의 희생을 드렸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II. 감사: 선과 인자하심의 회고
먼저, 이 감사의 제사가 하나님 앞에 받으심직하게 성립을 하려면, 제사 이전에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의 마음, 즉 제사를 올리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감격이 가득 차는 것이 이 합당한 이 감사제사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 감사의 핵심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회고입니다. 감사 그 자체가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이미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과 우리 인간 혹은 자신과의 관계, 거기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감격이 가득 차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감사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 제사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글을 가르쳐 주고 있는 모세도 마찬가지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회고가 바로 하나님께 감사의 희생을 드리는 가장 훌륭한 준비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회고는 이제 공동체적인 회고, 오늘 우리로 말하자면 교회적인 회고와 개인적인 회고로 나뉘어집니다.
A. 교회적 회고
먼저 교회적인 회고,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공동체적인 회고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인하여 감격하는 첫 번째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국가와 교회가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기 전에 모두 함께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며 동일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의 그 크고 위대한 능력을 보았고, 열대 재앙을 통하여서 애굽의 모든 신들을 허무한 것으로 만드시고 여호와 한분만이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난 탁월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애굽도 아니고, 다른 나라도 아니고 짓밟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시기 위해서 자기의 종, 모세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큰 능력을 모두 함께 보고 함께 홍해를 건너고, 함께 광야에 들어서고, 함께 가나안을 향해 가고 모세의 리더십 아래 있었습니다. 그럴 때 그 백성들을 전체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생활하고 함께 이동하면서 함께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과 영광을 동시에 보았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큰 영광과 위대한 능력을 보았고, 그로 인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한 공동체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서 개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공동체의 삶과 나뉘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굶어도 같이 굶고 목이 마르면 같이 목이 마르고, 전쟁이 나면 함께 싸워야 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 공동체의 생활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신 속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되는 아주 중요한 통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의 공동체적인 연결의 역사를 통해서 신약시대의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서 그렇게 동일한 영적인 연합을 이룰 것을 예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홍해를 건넜으나 우리는 함께 한 세례를 받았고, 그들은 반석에서 나오는 샘물을 마셨으나, 우리는 한 분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함을 얻어 성령으로 충만케 채워주시는 성령의 내주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길을 지났으나 우리는 현대 사회의 한 복판을 영적인 유대 속에서 지나게 됩니다. 그들은 창과 칼로 싸웠으나 우리는 영적으로 싸우며 피흘리기 까지 투쟁하며 이 현대, 불신앙에 에워싸인 이 시대의 한 복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씨름은 육에 속한 씨름이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씨름은 영에 속한 씨름입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적 생활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드러나는 아주 훌륭한 하나님의 도구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희생을 드리기에 적합한 마음 안에 감격이 가득차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한 해 동안에 공동체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이셨는지를 회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근원적으로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세우신 교회의 제도,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와 성령의 그 탁월한 신비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것이며, 가깝게는 내가 이 한 교회에 몸을 담아 지난 한 해 동안도 내가 누리고 받았던 모든 좋은 것들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진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의 부요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감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B. 개인적 회고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수많은 소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인류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인류에 소속된 사람 중에 여러분은 황인종입니다. 물론 흑인처럼 검은 빛이 많은 사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황인종이고, 많이 화이트 발라서 하얗게 된 사람도 있지만 절대 백인이 아니고 황인종입니다. 누렁둥이고 거기에다가 또 한 회사에 속해있고, 한 나라에 속해있고 한 회사에 속해있고 수많은 소속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모두 의미있는 것이긴 하지만, 한 가지 소속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것, 내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것. 왜냐하면 그 모든 연결들은 이 세상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으면 다 끊어지는 인연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영원히 끊어질 수 없는 소속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 교회와 관련지어서 자기 자신의 한 해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시대의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 태어나서 그래서 그 시대 동안에 이 한 시대 안에 있는 교회가 이 전 세계 흩어진 보편 교회가 어떻게 한 해 동안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덕 입으며 살았는지. 우리들이 시야가 그렇게 넓지 못해서 그렇게 우주적인 보편교회까지 연장해서 생각할 수 없다면, 여러분이 한 지역 교회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이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을 인도해 오셨고 우리의 교회를 하나님이 인도해 오셨는지 그리고 그 모든 한 해 동안의 인도를 통해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어떻게 우리의 교회에 풍부하게 나타났는지를 회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에요. 의무. 끊임없이 그것을 회고하는 것. 그러면서 어떻게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이 교회를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다루셨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내가 발견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의 부녀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교회에서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조차도 그때도 깊이 하나님이 이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어떻게 충만하게 드러내셨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그 교회의 한 지체로 있는 것이 주님의 몸인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데에 이바지 하도록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틀 안에서 개인적인 회고를 하는 것입니다. 멀리는 영원 전부터 나 같은 인간의 이름을 기억하셔서 구원해 주시기로 하신 하나님의 예정부터 시작을 해서 그래서 나 같은 인간을 지난 한 해 동안도 이 교회 안에서 인도해오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충성스럽지 못해서 끊임없이 변덕을 부릴 때에도 주님은 신실하셨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날들이 많았어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악을 선으로 갚으셔서 그래서 끊임없이 불순종하는 인간들에게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또 온전하지 못한 삶을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 수 있는 기회, 섬기며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어요.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하시면서 매번 우리를 이끄시고 돌보시면서 한 해 동안을 인도해 오셨어요. 주님이 한 해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영육간의 자원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마시우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핍절하여 쓰러지지 아니하도록 우리를 매 순간 붙들며 우리를 선대해 주신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이 공기와 그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몸의 건강을 그렇게 가슴깊이 감사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람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고 또 우리를 여기까지 살아오게 하셨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좋은 것을 위해서 주님이 나쁜 것을 짊어 지셨고, 나의 좋은 것을 위해서 주님의 그 사랑에 감읍하는 성도들이 나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 나쁜 것을 짊어지는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사람으로부터 받은 친절과 모든 위로와 섬김이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여주신 것임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III. 감사의 방식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러한 감사의 방식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A. 희생함으로써
첫째는 감사의 희생을 드리거든 이라고 말합니다. 그, 여기에서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제사를 가리키는 것인데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한데, 나 안에 있는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이 타오르는 진실하고 순수한 감사의 이 정을 주님께 고백하여 드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재물입니다. 그래야지만, 진정한 의미의 감사의 제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야말로 모든 섬김의 피할 수 없는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척하면서 이제까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의 모든 성화된 삶의 동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으로부터도 항상 신세를 지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러한 신세들이 마음속에서는 분에 넘치는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정말 가난하던 시절에 우리를 도와준 사람, 정말 곤고하고 어렵던 시절에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고 섬겼던 손길들, 정말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죽 했으면 제가 설교 시간에도 두 번 이야기 했었습니다. 제가 첫째 아이를 낳고 난산 끝에 수술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너무너무 가난합니다. 그랬더니 어느 집사님이 와서 기도를 해주고는 봉투를 하나 놓고 가면서 병원비에 보태 쓰라고 하는데, 그때 돈 4만원이 들어있었습니다. 월급을 7만원 받았을 때였으니까 4만원이 얼마나 큰 돈이었겠어요? 정말 요긴하게 썼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벌써 얼마나 지났을까. 20년쯤 지났을까. 그 옛날에 있던 교회 앞으로 서울여대에서 특가을 할 기회가 있어서 갔는데 출발할 때까지는 생각이 안 났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요. 그래서 가서 그 집사님 집을 찾아 갔어요. 돈을 가져가면 받겠어요. 20년 전에 4만원 준 것 여기 있다고 하면 받겠어요. 10만원이라도, 40만원이라도 줄수 있지만, 그래서 과일가게에 가서 제일 비싼 게 뭔가 봤더니 오렌지에요. 그래서 오렌지 한 박스를 샀는데, 그것도 공교롭게도 4만원이래.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가서 그 집에 앉아서 옛날이야기를 했더니 목사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잊어 버렸어요. 생각도 안나요. 그래서 내가 간절히 기도해 주고 왔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러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그분이 참 고맙긴 하지만, 그러나 뭐 4만원을 보태주셨으니 제 인생은 집사님 것입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그러한 감사의 마음을 우리에게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떠한 고백이 나오느냐 하면, 다른 사람들이 받은 모든 은혜는 정말 크다고 감사할 수 있어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십자가의 사랑의 은혜 만큼은
(찬양) 늘 울어도 눈물로는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형언할 수 없는 최고의 감사입니다. 고맙다고 말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불가능한. 자신의 전 존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사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시고 그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당신은 하나님께 멸망을 당하신 십자가에요. 그때에 주님을 위해 정말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감사는 끊임없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영적으로 참여하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가장 훌륭한 희생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나 홀로라면 참을 이유가 있는데, 그리스도 때문에 참고 나 홀로하면 복수를 하고 싶은데,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자기를 모두 버리신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그를 용서하기 위해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감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다양한 섬김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고, 그리고 자기가 살아있는 것은 십자가 사랑을 알고 난 후에 덤으로 살아있는 것이라고 하는 감사의 고백이 있을 때에는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고통을 받을 때,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하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주님이 맡겨주신 많은 직분들이 있지만, 한 해 동안도 정말 우리의 섬김에 눈물이 배어있었습니까. 우리의 섬김에 땀이 배어있었습니까. 우리의 섬김에 피가 배어있었습니까. 그렇게 우리의 섬김이 끈적끈적 했다면, 그것은 우리안에 주님을 향한 그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11년 전에 교사 리바이벌을 쓰면서 은혜를 많이 받고 그 책 표지에다가 이러한 말을 썼어요. 우리 교사들이 하루에 두 번씩 펑펑 울 수 있다면, 영혼들은 정말 변화될 것입니다. 한번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펑펑 울고, 또 한 번은 주님이 위하여 죽으신 어린 영혼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우리가 비록 훌륭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정말 영혼들을 살리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크게 보이고 십자가가 정말 위대하게 보이면 세상도 작아 보이고, 이 세상에 붙은 헛된 욕심들도 티끌만 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최고의 감사의 제사에는 반드시 죽음의 냄새가 깃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주님을 섬기며 우리가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할 때마다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일 뿐이다. 예수의 비천한 종일뿐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희생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진정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B. 열납되도록
마지막, 또 한 가지는 하나님 앞에 열납되도록 우리의 자신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열납이라고 하는 것은 기쁨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주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납입니다. 그러면 사람이라면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있기 때문에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크고 좋은 것이어서 자기의 궁핍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라면 기뻐하겠지만, 하나님은 없는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시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신이라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때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재주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우리가 누릴 수도 있는데도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신자의 하나님 은혜의 감읍하는 마음이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감사를 열납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입니다.
IV. 결론
우리는 한 해 동안도 주님의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티끌만큼이라도 주님을 섬기지 않은 사람이 우리 중 누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일이라는 것도 일이기 때문에 일을 하면 일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을 향한 섬김이 주님의 마음에 아주 기쁘게 열납되신 적이 지난 한 해 동안 우리가 섬기는 섬김의 현장에서 얼마나 있었을까요. 우리 안에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으로 정말 구김이 없이 하나님 앞에 순전한 섬김으로 주님께 드리면 우리의 마음속에도 지금 주님이 나의 섬김을 정말 구김 없이 기쁘게 받으시고 계시다는 주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전해져 와요. 여러분, 기도할 때 그러한 것 경험하지 않습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더 봉사하겠다고 하는 헌신의 맹세이든지, 혹은 능력을 달라는 간구의 소원이든지, 혹은 지나간 날의 자신의 과오와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비는 사죄의 기도이든지 간에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지금 나의 간절한 이 기도가 주님의 귀에 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무도 듣지 못하는 당신의 귀에다 대고 우리가 간절히 부르짖는 것이 그분의 마음에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도 속에서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찌 기도만 그렇겠어요. 우리의 섬김과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열납되도록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어떻게 보면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가로막아요.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서 피가 터지도록 싸울 때에 싸우는 사람들이 모두 주일날 늦게 예배 나왔다가 축도 전에 도망가는 사람들이 그러는 법은 없습니다. 그 교회에서 집 팔아 받히고 건축헌금 하고, 자녀들 세례주고 결혼시키고 그렇게 교회를 섬기며 살아간다고 한 사람들이 그렇게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에. 자기 죽음은 사라지고 일만 남고 그 섬김은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 없는 섬김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받으심 직한 감사의 제사를 삶으로 드리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친밀함을 보이시고, 티끌 같은 섬김인데도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축복을 내려 주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섬김을 통해 유익을 받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큰 나무가 씨앗도 큰 것은 아닙니다. 티끌 같은 씨앗인데도 그 씨앗을 사용해서 하나님께서는 정말 큰 나무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계절을 지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은혜는 한 해 동안도 너무 많아서 만입이 다 있어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찬송을 드려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인데, 그 감사의 제사로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을 희생하면서 감사했는지.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와 모든 섬김 속에 주님이 그것을 기쁘시게 받으실만한 것들은 얼마나 소수였는지를 생각하면서 주님의 은혜와 우리의 감사의 제사 사이에 격차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나 주 위해 갚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한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저물어 갑니다. 아직 해가 있을 동안에 아직도 해가 있을 동안에 주님 앞에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큰 은혜에 어울리는 섬김을 단 일년 만이라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빌어야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6.가장 큰 감사의 이유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7-18).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로마서 중에서 가장 애독되는 성경 장 가운데 하나인 6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5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범죄했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드러내는 기회로 삼으셨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사도바울의 이 같은 설명을 들으면서 그러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우리가 죄를 지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면서 그럴 수는 없다고 잘라서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우리의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죄를 향하여 살던 우리들을 의를 향하여 살도록 하기 위해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이 구원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일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무한한 감사로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선언하면서 가장 큰 감사가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II. 가장 큰 감사: 구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받는 모든 나머지 은혜의 기초이고 또 핵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감사의 제목인데 오늘 성경은 이 구원의 사실을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A.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됨
제일 먼저 죄의 종살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전에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누구의 종이었습니까? 죄의 종살이라고 했는데 그 죄의 종살이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죄를 지은 인류가 제일 먼저 경험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는 안에서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에게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일 먼저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대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칠게 반항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가 파괴되어 버려서 이제는 사람이 사람 때문에 사람다워지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 때문에 오히려 불행하고 고통스러워지는 갈등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연과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고 자기가 다스리던 세상이 반항하고 저항해 인간은 자연 속에서 아주 왜소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커다란 재앙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 마음 안에 온갖 무질서의 상태가 생겨나게 된 것이고, 영혼과 정신이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여 밝게 빛나고 주님의 진리를 응시할 수 있었건만 죄의 종이 된 이후에는 인간의 영혼에 어두움이 들어왔습니다. 영혼의 어두움은 영혼의 기능의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성은 눈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많은 사실들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설령 더듬어 알만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안다 할지라도 이것을 자신에게 올바로 해석하고 연결 지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오히려 미친 듯이 우상을 섬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도 지극히 혼란스럽게 되어서 이제는 하나님의 신령한 빛과 선, 그리고 아름다움, 그리고 참된 것에 의해서 자극을 받고 사랑의 정동이 일어나기 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정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의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는 대신 거칠게 저항하고 충동을 따라 움직이는 모순으로 가득찬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종 된 모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친 듯이 자신을 주인으로 삼고 자신에게 봉사하지만 자신을 주인으로 삼아 봉사하면 봉사할수록 자신은 자기에게 섬김을 받는 대신 오히려 거칠고 더 무서운 죄에 종속되었습니다. 이렇게 죄에 종속되어 살아가면서 인간의 비참함은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과 더불어 복되게 살도록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중세가 끝나고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 하였을 때에는 이제껏 까지 하나님의 은총 아래 사는 것으로 인간의 행복을 삼았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이성으로 떠받들며 살아갈 때에 인간이 과연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인간의 이성을 주인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굳게 믿기를 인간이 만약에 거친 감정과 충동적인 의지를 버리고 온전한 이성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면 세계는 인간에 의해 확실하게 파악될 수 있고, 인간은 이성적으로 인류의 갈 길을 잘 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나라와 나라가 선한 질서를 이루고 또 그들이 서로를 정복할 마음을 버리고 평화를 추구하면 인간의 힘으로 얼마든지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한 두 번의 세계 대전이었고 , 그로 말미암아서 인간은 이성을 신뢰할 수 없는 광기에 가득찬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랬으면 주님을 더 의지하고 탕자처럼 아버지께 돌아갔어야 했는데 돌아가기에 너무 먼 길을 떠나왔기 때문에 인류는 이제 이성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해 끌어내리고, 그 다음에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우위로 내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 모두를 시대를 초월하여서 규율할 수 있는 가치의 체계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를 억압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구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이러한 가치의 체계들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에 있어서 20C에 커다란 역할을 했던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그 중에 우리들이 손꼽을 수 있는 한 사람을 굳이 들자면 하이데거라는 철학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이 모든 가치의 질서를 모두 허위요, 거짓으로 보았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근원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내동댕이쳐져서 우주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던진 자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던져진 존재이고, 자신은 꼭 필요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고 근원을 물을 수 없는 존재인데 중요한 것은 근원이 아니라 지금 부딪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절대적인 가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데 이 자유를 인간이 온전히 직면하기 위해서는 모든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부셔버려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샤르트르는 그래서 일평생을 가치의 질서들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허무는 것이 자기의 평생 과업이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해체주의적인 많은 철학자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후예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이렇게 모든 가치를 다 부정하고 나면 인간은 지극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데, 그런데 그 자유는 무시무시한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근원도 알 수 없고, 왜 존재해야 되는지도 알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내가 왜 해야 되는지 근거를 댈 수 없는 무한히 열려진 우주의 공간 속에 나 홀로 던져진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두 이렇게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모두들 혼자라는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던져진 존재가 자유롭긴 하지만 무시무시한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이 눈을 똑바로 뜨고 직면할 수 없을 정도의 무서운 자유이기 때문에 그 무시무시함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이제 현대의 많은 인간들은 쾌락에 탐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꼭 성적인 쾌락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가치 있지도 않는 그 일에 자신을 몰두하면서 그 속에서 시간을 허비하며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 그것이 이 무시무시한 자유를 잊어버리는, 잠시 잊어버리는 수면제요 그리고 마약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맨 정신으로는 들여다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쾌락의 진통제, 쾌락의 마취제를 섭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종살이를 하며 살던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러한 우리 자신의 처지에서 우리를 구해낼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우리를 그곳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래서 운명적인 종살이에서 우리를 해방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로마서를 받고 있는 로마의 수신자인 그리스도인의 형편이었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처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최고의 제목은 바로 우리를 이 끔찍한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크고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기에 우리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복음 안에서 되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몇 분이나 지난 한 주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이 벌레 같은 인간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림으로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해 감격하며 기뻐하고 주님께 감사했는지 한번 묻고 싶습니다. 신자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사라질 때 인간의 마음속에는 온갖 정욕과 더러운 욕망이 싹트기 시작하고, 자기를 주인 삼는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 자신의 인생의 보위를 다투고자 하는 사악한 마음이 우러나게 되고, 이렇게 마음속으로 주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야 할 존재가 마음속으로 주님을 시기하고 대적하게 될 때에 그의 정신과 영혼에는 안정이 사라지고 삶은 무질서와 모순들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통 혼란스러움이 그의 삶 속에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종살이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바로 그런 운명적인 죄의 노예살이에서 지극히 큰 능력으로 해방시켜 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그 사람들보다 선하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가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더라면 믿었을 거 보다 더 훌륭히 주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주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셨기에 당신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죄의 종살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언젠가 야생 동물들을 포획하는 민간인들의 횡포를 취재하기 위해서 기자들이 깊은 산 속을 들어갔습니다. 쇠줄을 나무에 걸어놓고, 묶었습니다. 그리고 쇠줄 끝에 짐승이 밟으면 확하고 채워지는 그런 올무를 놓았습니다. 작은 새끼 멧돼지 하나가 그 덫에 걸렸습니다. 얼마나 그 덫에 걸리고 나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을 쳤는지 그 나무를 얼마나 뱅글뱅글 돌았는지 그 나무의 껍질이 허옇게 벗겨졌습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 올무는 양쪽이 날카로운 톱니처럼 되어 있고, 가운데를 밟으면 뛰어올라서 무서운 힘으로 콱 하고 조여 버립니다. 이 아기 돼지가 거기에서 살아 나오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랬더니 여유가 생기면 생길수록 이 올무는 점점 깊이 파고 들어가서 살가죽을 찢고, 나중에서 뼈까지 허옇게 드러내고 피를 흘리며 죽었습니다. 기자가 찾았을 때에는 이미 죽어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 꽁꽁 얼어 있었고, 그 아기 멧돼지는 눈을 뜨고 죽었는데 눈물이 상당부분 흘러서 눈가에 얼음으로 맺혀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전 그것을 보면서 죄에 매여서 사는 죄인들의 처지를 생각하였습니다. 죄인들이 처음에는 죄가 좋아서 선택하지만 항상 그 죄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술꾼들이 처음에는 술을 택하지만 나중에는 중독이 되어서 술을 찾는 것처럼, 고통을 잊기 위해서 죄를 찾게 되는데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면 칠수록 오히려 그것들은 숙명적으로 그의 마음과 영혼을 조여 와서 도저히 스스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존재가 바로 죄에 사로 잡혀서 종살이 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처지였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올무에서 우리를 벗겨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낚싯대를 메고 나갔지만 한 번도 고기를 낚인 적이 없어서 그게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캐나다에 집회 갔을 때 하여튼 고기 잡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목사님이 저를 데리고 호수에 가서 송어를 낚았습니다. 아예 이 분은 교회 봉고에다가 보트를 싣고 다녀요. 순간의 바람을 넣더니 모터를 다니까 훌륭한 모터보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던졌더니 정말 고기가 물리더라고요. 이만한 송어가 집어넣자마자 물렸는데 그거 정말 짜릿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거를 몇 분 동안 씨름을 해서 잡아당기니까 낚싯대가 부러질 것처럼 휘더니 결국은 팔뚝만한 송어가 올라왔어요. 얼마나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지 끌어올렸는데도 몸부림을 쳐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낚시 바늘을 입에서 빼주면서 다시 물에다가 놓아주었습니다. 잘했죠? 세 마리 잡아서 세 마리 다 놓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신나라 하고 물속을 헤엄치면서 갔습니다.
결국은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 죄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들이 믿음 안에 살아가는 삶이 좀 어렵다고 생각될 때마다 죄의 종살이하던 그 비참한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그 고생에 비하면 오늘날 이 고생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B. 의를 위해 섬기는 자가 됨
우리의 구원의 또 다른 측면은 주님이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의를 위해서 섬기며 살아갈 사람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죄에 매여 종살이를 하면서 마지막으로는 그 죄에 봉사하다가 사망을 삯으로 받을 수밖에 인간들이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구원한 다음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의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의 섬김을 사용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전한 영적인 번영을 누리게 하시고,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게 하는 데에 미력이나마 이바지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해방된 우리들을 다시 의를 위해서 섬길 수 있는 종, 혹은 군사로 불러주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1. 복음이 전파 됨
그런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이루셨으니 이 교회는 영적으로 보자면 이 세상에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복음과 사랑으로 정복하여 주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며 주님의 창조하신 뜻을 따라 살도록 그렇게 만들기 위해 부름 받은 군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참 기도를 많이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최근에 일어난 사태를 보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모두 불안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들이 기도를 많이 해야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이 시간에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취하든지 간에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에 관한 것입니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기의 백성들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리고 위험이 있을 때에는 충분히 그 국민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고, 이것을 위해서 국민은 막대한 세금을 내고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국가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우리 앞에 전개되는 이 모습을 보면 참 비통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어저께 신문을 보니까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내용이 나왔습니다. 만약에 다시 연평도 폭격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비행기를 동원해서 적의 진지를 격파해야 된다는 주장이 제기가 되었는데 한쪽에서는 과연 그렇게 했을 때에 후에 일어날 상황을 한국군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확신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있었기 때문에 결론을 내지 못하고 회의가 끝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고, 그리고 부정확한 기사이기를 바라지만 마음속으로 참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그 많은 돈을 사용을 하면서 국가는 백성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백성들은 누가 지켜주나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역사를 보면 아무리 많은 무기와 발달한 군 체제를 가지고 있어도 정신이 해이해진 군대는 절대로 나라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러한 나라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희의 교회를 보라고 경고해 주시는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소비를 기준으로 해서 거의 삼 만 불의 고소득 시대를 살고 있고 번영을 구가하며 살고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번영하고 부를 많이 가진 나라가 항상 승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국 그 큰 나라가 열강 앞에 무릎을 꿇고 그리고 서구 세력에 의해서 짓밟혀 침타를 당하고 있을 때 전 세계의 부를 중국이 30%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달한 과학 기술을 앞세운 서구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호화로운 빌딩이나 사람이 타고 다니는 고급스런 승용차, 좋은 화장품에 반들반들해진 얼굴이 나라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평화로울 때의 국가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지만, 전시에서는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투철한 군인 정신과 어떠한 전쟁 상태에도 대비되어 있는 국가의 체계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는 교훈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우리 교회만 해도 제법 큰 교회가 되었고, 이번 당회 수련회에서도 밤새도록 고민한 것이 오는 교인들을 위해서 공간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라는 것이 당회 수련회의 주된 주제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참 감사한 것입니다. 왜? 아직까지도 방황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고 교회가 세워져도 사람들이 모이지 않아서 문을 닫는 교회가 허다한데 이렇게 새롭게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오게 되어 앉을 자리가 없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 이제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으면 목회자는 점점 더 군대의 수가 늘어나는 것 같은 뿌듯함을 느낄 수 있어야 되는데 이상하게 군대가 커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대신 병원이 커지거나 고아원이 커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나만의 기우일까요?
수없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가끔 눈물을 찔끔찔끔 흘려도 절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인들, 그리고 티끌만한 일에 상처를 받고 그리고 교회를 향해 복수하듯이 대들거나 아니면 교회를 떠나버리는 이 막무가내의 교인들, 이런 사람들이 과연 진정한 교회의 번영을 위해서 얼마나 봉사하는 사람들일 수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전쟁이 앞에 벌어져서 지금 전투에 나가야 되는데 같이 뛰어나가던 동료가 자기의 발을 좀 밟았다고 신경질 내면서 총을 팽개치고 마치 군대를 뛰쳐나가 탈영을 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 교회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웃지 못 할 이 바보 같은 상황들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정말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긴 된 것입니까?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아서 그래서 주의 의를 위하여 자신의 병기를 드려진 사람들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소위 성숙이라고 하는 그것도 교회에 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주지 않고 잘 적응하며 자기 스스로를 챙기면서 교회에 붙어있을 수 있는 것, 이런 정도를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슬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그려지는 교회의 그림이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려내고 있는 교회의 그림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감사하리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가 본래는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우리가 의를 위해 섬기는 자가 된 이 신분의 놀라운 변화를 두 가지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 세상에는 아직도 이 복음을 전파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착하게 산 것도 아니고 그들이 예수를 믿었더라면 살았을 그 삶보다 우리가 훌륭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유도 알 수 없이 그들에게는 전파될 수 없는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복음의 혜택을 입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외 없이 금칠로 입힌 성경을 가지고 교회에 다닙니다만 은 원래의 성경은 이렇게 붉은 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책 모서리가 이렇게 붉게 된 것은 한 마디로 이 성경의 복음이 당신에게 전달되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경이 붉은 책으로 칠해져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서 꽃다운 젊음을 바치며 선교지에서 쓰러져 가면 이후에 밀알같이 솟아난 젊은이들이 선배들의 뒤를 이어 아무도 알지 못하던 은둔의 땅 이 조선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들이 전해준 복음의 혜택을 입어서 전파된 그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대치할 수 없는 소명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이 먼 곳에 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러분 이웃에서 주님을 믿지 않고 어둠 가운데 방황하는 사람, 매일 매일 자살을 생각하면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이웃들, 심지어는 아직까지도 불신 남편과 아내인 여러분의 가족들, 죽음의 날이 임박하고 있으나 여러분이 결코 예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해준 적이 없기 때문에 이제 서서히 죽음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여러분의 부모들, 그리고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의 자식들에게 만약에 여러분이 이렇게 복음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것이 너무나 기쁜 혜택으로 알아서 그들을 위해서 하루에 한번이라도 눈물로 기도하고 그들에게 거절을 당할지라도 한 번이라도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예수의 십자가 사랑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과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에 마지막 소망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눈물로 증거해 주었다면 아마 여러분의 가족들 중 상당수는 이미 예수 믿게 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의 부모들이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지옥의 불길로 떨어지는 불행한 일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가장 중심적인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이 녹을 줄 모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뜨거워질 수 없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으로 하여금 끓어오르는 젊은 피를 느끼게 만드는 그것은 무엇이냐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과 육체의 자랑이 여러분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다면 끓어오르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마지막에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결과밖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복음을 증거해 준 것처럼 이제 이 모든 후기 근대주의를 살면서 자기를 주인으로 삼아 더욱 더 사단의 종이 되어가는 이 현대인들을 향한 유일한 희망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맨 처음에 그런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종노릇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 복음을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여러분을 위해 자기의 편안함을 희생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러분에게 이르게 되어서 여러분은 그 복음에 빚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입어서 죄의 종으로 살아갈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 섬기며 살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지겨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죄의 노예살이를 미워하고 이제는 의의 병기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가장 가까운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들이 여전히 죄의 종노릇하며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복음의 전파를 위해 얼마나 수고한 적이 있느냐고 나는 묻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한 교회가 사람은 늘어나고 그리고 인원은 증가하여 더 많은 건물과 예배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어도 오히려 작은 교회일 적에 세상을 향해 뛰쳐나가는 군인들이 많았다면 이 교회는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 베푸신 이 구원의 가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깊이 감사하며 어찌하든지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이 복음을 나에게 전파해 준 것처럼 나도 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해야 되는 것입니다.
2. 마음으로 순종8함
사도는 또한 말합니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었다”고 말입니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전파 받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에 어떤 사람들은 더 완강히 그 복음을 거절하고 마음이 강퍅해 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은 그 복음이 전해졌을 때에 마음으로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의 자녀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종과 같은 삶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한 것입니까?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움직이시지 않았더라면 골수 깊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려고 하는 죄인인 우리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기나 했겠습니까?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의지와 연합을 이루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힘은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움직여 복음을 받아들이게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그리스도의 교훈에 순종할 마음을 갖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기에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었으니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파 받은 사람이 수없이 많지만 오히려 거절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주님은 우리에게는 믿을 마음을 주셨고, 그리고 순종할 의지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복음에 기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무시무시한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없이 달콤한 자유를 누리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 의를 섬기는 자들이 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가 넘어질 때도 있고 쓰러질 때도 있었지만 넘어지고 쓰러진 것은 우리 스스로 악해서 하나님을 버림 때문이요.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이 변화무쌍한 우리를 사로잡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결심을 주셨기에 우리는 이제껏 믿음 생활을 이어올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의를 위해 살아감
결국 이러한 구원의 사실을 전체적으로 종합해 볼 때에 우리들이 살아 선택할 수 있는 우리의 미래와 현재의 삶은 여러 가지가 아닙니다. 단 하나, 의를 위해서 사는 것, 그것 이외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그 아무것도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구원받은 우리의 소명이 이제는 다시는 죄를 위하여 죄의 종살이 속으로 다시 돌아가 사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하여 주님의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는 삶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갈등과 번민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목적대로 순종하며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고 돌보지 않기 때문에 곤고하고 그리고 비참한 삶을 이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거꾸로 말합니다. 사람이 사망의 그늘에 앉아 곤고의 쇠사슬에 매이는 것은 스스로 지존 자를 멸시하기 때문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이것이 진실인 것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얻어 보려고 하고, 신자의 의무를 집어치워버리고 그리고 세상에서 번영을 누려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항상 성공보다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의 고침이 없이는 우리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의를 위해 살지 않고 죄를 위해 살고 있다면,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대신 불순종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관심사인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인 번영과 이 세상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영달과 자신의 번영을 위해 살고 있다면 시련과 고난을 만나고 번민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효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자는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시기 전까지는 사람이셨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안 그 분은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많은 것을 체득하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죄는 없으셨지만 죄인들이 유혹을 받고 죄의 결과에 시달리며 사는 비참함이 무엇인지를 인간과 똑같이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굶주림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까? 죄는 없으신 그 분이 굶주림으로 죄 없이 죄의 결과를 경험하셨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 슬픔도 죄의 결과이거늘 죄는 없으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슬픔도 경험하셨습니다. 불멸할 육체가 피곤해 지는 것도 죄의 결과이거늘 그 분은 죄는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피곤을 경험하심으로서 우리 죄인들의 처지가 어떠한 지를 온 몸으로 체득하셨습니다. 그럴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는 이 불쌍한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속에서 넘쳐났습니다. 이렇게 인성 안에서 이 세상에서 인간들과 함께 계시며 경험한 모든 슬픔과 이별과 눈물과 결핍과 고통에 대한 모든 체험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미 하늘 보좌에 오르셔서 통치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이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은 당신의 탁월한 사랑을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도 아니시고 당신 자신도 아니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 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교회가 받는 그 모든 사랑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분여된 하나님의 사랑의 부은바 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렇게 우리 인간들을 가장 잘 알고 계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인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는 없으신 분이었지만 이 세상의 인간들이 어떻게 넘어지는지도 아셨고, 그리고 죄의 종살이 되어서 살아갈 때에 인간이 자신을 구원해 내기에 얼마나 무력한 지도 스스로 잘 아셨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세상에서 낙인찍힌 악인들의 이웃이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자들을 외면하시고 오히려 영혼의 병든 자들과 먹고 마시며 그들의 친구와 가족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은 당신의 이런 사랑을 당신의 교회를 통해 베푸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죄의 종살이하며 살 때에 누가 우리의 영혼을 위해 울어주었고, 누가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습니까? 살과 피가 섞인 가족들도 우리에게 상처의 흠집을 내고 고통의 칼을 꽂은 사람이 있는데 살도 피도 섞이지 않은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 울어주고, 우리의 불쌍한 영혼, 우리 스스로도 자신을 위해 울 수 없었을 그때에 우리를 위해 울어주고 보듬어 주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아가던 신실한 성도들의, 그리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던 성도들의 섬김이었습니다.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구원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교회의 한 지체로 삼으신 것은 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여러분이 이 세상에 영광스러운 존재들이 되게 하기 위해, 성공한 사람들 되게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오늘날 누가 전해주는 것처럼 여러분을 번영하게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을 세워주신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가장한 오늘날의 이 번영주의와 성공주의는 사실은 복음이 아니라 인간의 거짓이고 사단의 속임수인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성도들은 이 가짜 복음 그리고 이 거짓에 가득 찬 성공주의와 그리고 번영주의를 혐오하고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향취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IV. 결론: 소명을 따라 살자
그래서 날마다 죄의 유혹을 받지만 그때마다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붙듭니다. 험한 세상에 나를 혼자 두지 말아달라고,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손을 붙들 때 우리가 거절할 수 없는 유혹들을 거절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시련을 만났을 때에도, 나의 힘으로는 인내할 수 없는데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은혜가 나를 인내하게 만들어 주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니 만약에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이 은혜에서 미끄러졌다면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나와서 진실한 기도가 하늘의 문을 엽니다. 자신의 잘못과 부주의함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주님의 은혜로 나를 다시 세워달라고 기도할 때 주님이 어찌 여러분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죄와 오래된 불순종으로 돌아오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졌다고 느끼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어떤 죄인들을 멸시하셨으며, 당신께 가까이 오고 싶다고 하는 더러운 죄인을 더럽다는 이유 때문에 내치신 적이 언제가 있었습니까? 그래서 죄인일수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희망이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그때가 사실은 하나님께 돌아오기에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불러 당신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채워주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렇게 당신의 교회를 살피시며 미끄러진 지체들을 일으켜 세워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는 은혜에 감격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 벌레 같은 우리를 위해 큰 해를 받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찢으시기까지 아낌없이 버리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우리 자신을 버려야 할 때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최고의 기쁨은 주님을 믿게 된 것이라고, 그리고 내 생애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잊어버릴 수 없는 찬송의 제목은 이 쓸모없는 죄인을 구속해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그 사랑에 감격하고 나면 여러분이 오늘날 고민하는 많은 고민들이 하찮은 것이 될 것이고 이 사랑과 감사에 붙잡혀 복음과 함께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7.섬길 자리를 주심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I. 본문 해설
오후예배 때마다 감사의 조건들을 생각하는데 첫날은 입히시는 하나님 그 다음에는 먹이시는 하나님 지난주에는 마시게 하시는 하나님 오늘은 섬길 자리를 주신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감사의 제목입니다. 이 디모데서를 쓸 때에 사도바울을 옥석에 있었고 그리고 어떻게 보면 옥석에서 사로 잡혀 있는 죄수로서 미래에 자신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그런 죄수의 몸으로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서 사도바울이 하나님 앞에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하고 있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섬길 자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II. 섬길 자리를 주신 하나님
섬길 자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맨 처음 사도바울이 나름대로 자신도 봉사한다고 생각하는 사명자였습니다. 그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단자들이니 이단자들의 괴수인 예수가 처형되었으니 여전히 이 예수가 부활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리고 유대교를 혼란시키는 것을 정리 하여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에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정말 예수님을 미워했던 사람이고 복음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주 원한 가까운 감정을 품고 대적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다마섹으로 가는 길에 직접 빛으로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로소 자신이 커다란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 커다란 변화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그 두 가지 모두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올바로 아는 것에서 비롯된 변화였습니다. 그 첫 번째 변화가 심리적인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유대인만 최고로 알고 나머지는 전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라는 유대인 우월주의에 빠져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유대인들하고 사업을 같이 하고 있는 어느 사업가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우리들은 유대인이 부자로 생각하는데 소수만 부자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데 지혜롭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 이야기를 유대인이 하더랍니다.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해서 너무 부풀려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모든 유대인이 그렇게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모든 유대인이 다 그렇게 지혜로운 것도 아니고 우리들이 아는 것처럼 모든 유대인이 다 그렇게 자녀 교육시키는 것도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어쨌든 그런 유대인 우월주의 사상에 사로 잡혀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깨뜨려지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은 혈통으로서의 유대인이 아니라 영적인 유대인을 사랑하시는구나 그 혈통의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피로서 이루어진 유대인이었지만 이번에는 예수의 피로 이루어진 유대인이 정말 유대인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영적인 교회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에 대하여 가장 멸시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이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이방인 선교회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두 번째 편견은 무엇인가 하면 나사렛에서 자라서 그리고 자기 죄 때문에 죽은 예수가 절대로 메시아 일수 없다는 편견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결국은 자기와 유대인들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예수님 자신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렇게 대신 형벌을 받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커다란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편견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눈이 어두워져서 보지도 못하고 죽은자 처럼 엎드려 있는 사울에게 예수님이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이 바로 나는 너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도구로 너를 택했다. 그래서 너를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이 복음이 전해지게 하겠다. 주님이 이 사울을 복음을 지독하게 배척하고 대적하던 인간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에게 진짜 섬길 자리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섬기는 것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차피 종처럼 섬기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자라서 직업을 가지게 되면 그 직업으로 섬기고 봉사 합니다. 가정을 갖게 되어서 자녀를 낳게 되면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자식을 위해 그렇게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 교리반에서 누가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솔트라는 영화가 나왔는데 여자가 나와서 난리 치는 영화입니다. 그런 영화가 그렇게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 영화는 앞으로도 계속 인기를 얻을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현대인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존재감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특히 남성들의 경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가장으로 권위가 있었습니다. 권위가 아무리 없어도 25일은 권위를 확실히 세울 수 있었습니다. 월급날 주머니에서 누런 봉투를 꺼내 놓는 순간 조그만 아이들이 모여서 아빠가 우리를 먹여 살리는 구나 이것을 확실하게 아빠 품에서 내 놓은 누런 봉투 그리고 두 손으로 그것을 받는 엄마 그리고 무릎 꿇고 용돈을 받는 자신들이 직선적인 체계 속에서 아버지가 우리를 먹여 살리는 구나. 그러니까 아버지가 가서 장사를 하고 회사를 다니고 해서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우리를 기르시기 위해서 애쓰시는구나! 그래서 그만 때에는 아버지에 대해서 무엇을 써라 엄마에 대해서 무엇을 써라 하면 맨날 아버지 어머니의 은혜가 우리를 먹여 살리시는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 아이들이 그런 생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는데 통장으로 돈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가 갔는지도 본인은 모릅니다. 열심히 일하고 돈은 휭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침마다 여보 나 용돈 좀 줘! 아니 어제 줬는데 벌써 다 썼어요? 누구 만나서 밥먹고. 아니 왜 당신만 밥값을 내?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한 푼만 줘? 그것을 아이들이 보고 자신도 매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존재감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남성들 편만 든다고 할 것 아닙니까?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는 아침에 회사에 나가 다니고 고달프지만 사회생활을 합니다. 아이들은 다 가고 아내는 거기에 남아서 청소나 하고 집안일이나 하는 데에서 존재감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노래에도 나왔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위한 노래 중에 집 잘 지키고 기다릴게요 그런 노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여성들은 그런 노래는 강아지나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텔레비전과 모든 매체들에서 그런 것은 너의 본질적인 소명이 아니다 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재감이 없는 것입니다. 서로 존재감이 없으니까 영화를 보는데 솔트라는 여자는 소련에서 파송한 첩보원에 불과한데 사실 지위로 따지자면 거기에 소련 대통령, 미국 대통령 이런 수많은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의 초점은 죽을 뻔하다 다시 살아난 소련 대통령도 초점이 아닙니다. 바보처럼 멍하고 테러범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미사일 발사 하라고 강요를 당하고 있는 멍한 미국 대통령도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 여자가 주인공입니다. 보면 호리호리하고 연약한 여자에 불과합니다. 처음부터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레스링 선수 같은 모습으로 안 나타납니다. 그런 여성이 상상할 수 없는 의자 다리를 가지고 폭탄을 만들고 별 난리를 다 치면서 나라를 온통 헤집어 놓는 것을 보면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너무 없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이 자기와 똑같은 소시민인데 그 사람이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존재감을 그 영화를 통해서 채워 나에게 선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영화를 볼때 누구에게 자신을 투사 합니까? 총 맞고 죽는 엑스트라에 자신을 투사해서 난 이제 죽었구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비록 얼굴은 영화배우같이 못생겼어도 자신을 거기에 투사해서 끝까지 안 죽고 살아남는 주인공에 자신을 투사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에게 자신을 투사해서 시원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세계평화가 그 여자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실 세계 속에서 채워지지 않은 존재감을 그런 데에서 세우는 것입니다. 보고 나면 일반은혜가 밀려 와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봐야 집에 가보면 똑같은 현실이 기다리고 아침에 돈좀 달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현실이 채워지지 않은 현실입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종살이입니다. 우리가 언제는 섬기지 않고 산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 믿기 전에 오늘 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죄를 섬기며 살았습니다. 사단을 섬기며 살고. 세상 섬기며 살고 자신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언제 우리가 스스로 주체가 된 적은 없습니다. 종살이입니다. 사람들은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면 엄청 좋은 줄 알아도. 좋은 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생각해 보십시오. 둘이 좋아 한다고 하면 수 많은 사람에게 종노릇하다가 한 사람에세 집중해서 종노릇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사랑 아닙니까? 그것이 올바르고 신앙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질 때에는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쏠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들도 보면 연애 하면서 같이 신앙이 좋아 지는 사람도 있고 아주 신앙을 팽개치는 사람도 있고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섬기는 사람들이었고 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짜 이름을 내 놓을 만한 섬길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결과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울에게 섬길 자리를 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그렇게 깊이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명은 은혜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만 그 소명을 깨닫지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그 소명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명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재미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사울에게 소명을 주셨고 그래서 그것이 결국은 사울에게 있어서 후에 바울이 되어 섬길 자리가 되었는데 이러한 섬길 자리를 주님이 주셨는데 그것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말년이 되어 이제는 순교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쁜 감사의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연세 드신 분들 보면 명퇴하실 때가 다가 옵니다. 그러면 제가 가슴이 서늘합니다. 요즘 우리 총회에는 매년 헌의가 올라옵니다. 총회에 이 법을 고쳐주십시오 하고 계속 헌의가 올라옵니다. 그것이 무슨 법인지 아십니까? 목사 70세는 너무 빠릅니다. 왜냐하면 그 70세를 만든 것은 평균 수명이 72-73세 밖에 안 되던 때에 만든 것이고. 그것이 확정된 것이 25년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70세에 은퇴하시는 목사님이 산을 펄펄 날아다닙니다. 같이 가면 숨을 헉헉거리느라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정말 건강합니다. 교회도 별고 크지 않고 일도 그리 많지 않으시니까 늘 시온산을 올라 다니듯이 해서. 튼튼하십니다. 은퇴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5년 늘려 달라고 매년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매년 기각 당하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통과 되지도 않게냐 하는 이야기도 들려오는데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어느 시점이 되면 역사는 우리에게 일거릴 거두어 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열렬하게 목회하고 사회적으로 활동하던 목사님들도 70세가 되어 물러나고 나면 언제 그런 분이 있었느냐 하는 것처럼 조용합니다. 왜냐하면 노회에도 안 나오고 총회에도 안 나오고 당회에도 못 들어 가니까. 장로님들도 교회를 들었다 놓았다 이렇게 힘쓰던 분들도 70세가 되면 그 다음에 는 조용해집니다. 이제 역사가 섬길 자리를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섬길 자리를 그만큼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섬기며 살 수 있는 자리를 주신 이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 너무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안식년을 갔다 아내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오면서 정말 꿈만 갔더라고 합니다. 다시 돌아가서 섬길 수 있는 자신의 섬기는 자리가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귀한 줄 몰라도 다 잃어버리고 이제 역사 속에서 그 의자가 거두어지고 나면 그때 비로소 그것이 정말 귀한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섬길 자리를 주님이 주셨는데 왜 주셨는지 나오는 것입니다.
A. 충성되이 여기심
그것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하는데 나를 충성되이 여겨서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사도바울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직분을 맡기셨는데 그 직분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사도의 직분입니다. 또 복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는 사도의 직분입니다. 그것을 사울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인턴사도로 부르셔서 한 5년 해 본 다음에 진짜 너는 충성되구나 이제는 인턴하지 말고 진짜 사도로 취업을 해라 이러셨다면 말이 되지만 단번에 예수님이 사도로 임명하셔서 사도의 직을 수행했는데 어떻게 충성되게 여겨서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것입니다. 두 가지로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데 좀더 철학적으로 생각을 하면 하나님이 시간과 모든 현재 과거와 미래 모두를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삼위일체로 가르쳐 주신 단수지 안에서 이미 사울이 사도가 된 이후에 충성되게 살 것을 이미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에게 직분을 맡기셨다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는데 왜 그런지 우리의 마음이 시원한 해석은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이 사명을 맡겨 주신 사람은 모두 충성되이 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은 현실적으로 안 그런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 해석은 가능성은 있는 해석이지만 그렇게 우리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그런 해석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좋은 해석은 무엇인가 하면 나를 충성되이 여겨 이 뜻이 마치 고린도서에 나오는 것처럼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충성스럽게 나타나기를 요구 받느니라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다는 것은 단순지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고 충성할 것을 아셨다는 해석도 가능성은 있지만 보다 더 그럴듯한 해석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직접 이 사울을 사도로 삼으셨을 때 이 사도의 직분을 충성되게 감당할 것을 기대하시면서 맡기셨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 가장 은혜로운 해석이라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보십시오. 사울은 그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 열납될 만한 복음적인 헌신이 없는 사람이었고 오히려 거꾸로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충성스러운 집사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전력밖에 없는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사도로 직분을 맡기시면서 충성되게 이 직분을 감당해 갈 것을 기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는 비단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만 기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당신을 통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요구하시는 바가 바로 일꾼들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충성스럽게 산다고 하는 것은 말은 쉽지만 실제적으로 충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고자 하고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얽매인 것이 없이 그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일보다 일을 이루고자 하는 에너지가 그 사람의 마음속에 클 때 맡겨준 것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 클 때 그때에 그 사람이 비소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면서 당신을 위해 섬기라고 하나님이 섬길 자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감격으로 다가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섬길 직분을 주시고 봉사할 자리를 주시고 아직 우리를 그곳에서 떼어 놓지 않으시고 계속 섬길 기회를 주실 때 주님의 마음속에는 우리가 충성스럽게 당신을 섬길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이렇게 당신 앞에서 우리가 충성된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기대하시고 또 충성된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여기시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섬길 자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우리에게 섬길 자리를 주실 때 우리가 그렇게 섬기지 못할때가 많이 있는데도 우리에게 그 직분을 주신 후에는 당신을 충성스럽게 섬기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기대하시면서 하나님이 은혜도 주시고 깨달음도 주시고 때로는 위로해 주시기도 하고 격려도 주시고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당신을 충성스럽게 섬길 수 있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섬김의 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섬김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이 충성스럽게 섬길 것을 기대하면서 헛으로 섬길 때에도 하나님이 한 번 더 기회를 주시고 또 여러분이 게으를 때에도 하나님이 즉시 거두지 않고 거기에 두셔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 또 하나님 앞에 섬길 기회를 주시고 하면서 여러분이 섬길 수 있는 시간들을 연장해 주십니다. 그러니 과거에 헌신되게 섬겼다면 지금도 그 섬김을 계속하여야 할 것이고 그러지 못했다면 오늘이라 일컫는 이날 동안에 섬김의 태도를 바꾸어서 그래서 주님 앞에 이제는 섬길 자리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충성되게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B.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두 번째는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복음의 복자도 몰랐던 사람이고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대적했던 사람인데 맨 처음 부르심을 받아서 복음의 의미는 깨닫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선교사역에 대해서 목회사역에 대해서 복음진리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준비되어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준비되지 않았지만 이 사도바울이 이제 인생의 황혼의 때가 기울 지경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위해 가족도 없이 아내도 없이 혼신의 힘을 다해 섬기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도바울을 이 일에 아주 적합하도록 능력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한다 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한다고 사도가 고백할 정도로 섬길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살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셔서 돕는 사람도 붙여 주셔서 당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이끌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겨 주시면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만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과 모순이 됩니다. 문제는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충성스럽게 섬기지 않기 때문에 능력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도구의 역사를 보십시오. 대부분의 많은 도구들은 그 일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섬기고 일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발명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일을 위해서 마음을 쏟고 완성도가 높게 일하려고 하다 보니까 온갖 도구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6층에서 공사를 하고 있는데 가끔 가서 일하는 것을 보면 사용하는 도구들이 옛날에는 보지도 못한 도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전에는 긴 길이를 재려면 줄자를 들고 뛰어야 했습니다. 저 끝에 대고 10미터, 20미터 했는데 지금은 레이저가 있어서 불을 비추면 그 빛이 돌아와서 여기에 몇 미터 몇 센티미터라고 표시를 해 줍니다. 그런 것 가지고 놀랄 필요도 없습니다. 더 발달한 도구들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못을 하나씩 박았는데 이제는 권총 같은 것으로 쏘면 못이 수십 개가 한꺼번에 박힙니다. 더 훌륭한 도구들이 아주 많습니다. 전에는 사람들이 회전 톱을 돌리면서 손을 베고 손가락도 잘리고 했는데 이제는 절대 손가락을 벨 수 없도록 이제 레바를 누르고 나무가 잘라지는 것만큼만 톱의 뚜껑이 열리는 그런 전기톱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도구들이 무한대로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부 다 그 일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이 지혜를 얻어 만든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능력이 부족해도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능력이 있게 만드셔서 하나님이 사용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우리들이 수없이 볼 수 있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우리와 조금 차이가 있지만 워치만이라고 하는 중국의 전도자가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게 만들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충성스럽게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가르쳐 주는 사람 없고 배운 적이 없어도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지혜를 주시고 또 한편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또 한편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자원을 주셔서 당신의 교회를 위해 섬기고 봉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난 한 해 동안 섬겨 오시면서 보람이 있었고 잘 섬긴 선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여러분을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어찌 이 감사가 사도에게만 해당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많은 교회중 이 교회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여기서 작은 직분이나마 크게 알고 섬길 믿음을 주시고 그래서 주님을 위해 봉사하게 하셨습니다.
C.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어도
물론 우리가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 은혜를 받고 보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를 바꾸실 것 같고 큰일을 하실 것 같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나라고 하는 이 존재는 함께 부름을 받은 교회의 많은 지체들, 형제 속에 한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어도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 주신 작은 섬김의 자리를 통해서라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충성스럽게 살아가서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겠다 하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희생과 고난 그리고 섬김의 집중과 모든 헌신은 누구에게나 요구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직분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공평하게 강조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직분이 다 주님의 것이지만 크게 하나님 앞에 큰 직분도 있고 작은 직분도 있는데 큰 직분을 맡은 사람은 큰 직분에 더 어울리는 진실하고 정직하고 은혜로운 삶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고 작은 직분을 맡은 사람은 그 작은 직분에 합당하도록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삶을 살며 어느 직분을 맡든지 충성스러움에 있어서는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최선의 충성을 드리는 사람들로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III. 결론: 직분에 합당하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섬길 교회를 주시고 봉사할 자리를 주셨습니다. 지금도 머리가 하얀 노인이 되어서 아끼는 목자 없이 정해진 교회 없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고 그러다 숨을 거둘 때 자손들은 어느 교회에 이 장례를 부탁해야 할지 망설이고 방황하는 자녀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맡겨 주신 그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살아 갈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 죄인 중에 괴수요 또 전에는 회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섬기며 살 수 있는 교회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기억하고 마음에 담으며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8.복음 안에서 교제함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 1:3-5).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사도바울은 감옥 속에서 이 편지를 썼고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이 충만하여 기쁨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옥 속에 갇혀 있는 죄수가 옥 밖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렇게 타이르면서 기쁨의 삶을 살도록 격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복음의 교제 때문이었습니다.
II. 감사의 이유: 복음의 교제
사람이 목회를 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마찬가지이지만,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할 때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구의 이름을 떠오를 때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에게는 이러한 경험이 뚜렷합니다. 그래서 누구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하고 그리고 그 영혼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또 그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마른 막대기만도 못하는 인간을 써서 어떤 때는 나에게도 주시지 않는 은혜를 저 지체에게 주시는구나 하는 감격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A. 감사와 기쁨
이러한 사람들은 목회자가 위에서 기도할 때 기쁨과 감사함으로 기도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목회에 있어서 위로가 되죠.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위에서 기도해 줄 때, 오히려 더 많은 번민과 고통이 밀려옵니다.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할 때에는 인간적인 감정으로 힘들어 하며 그를 위해 빌게 되고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면, 성령 안에서 그가 하나님을 향해 완악하고 거칠게 살아가는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주님의 중심이 기도하는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우리들이 아파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사자의 문제인데도 당사자는 주님의 아픔을 몰라도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주님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서 오히려 남의 통증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기도는 우리에게 정말 우리가 몸으로 한 교회에 모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한 몸이 아니라, 정말 영적으로 하나의 몸처럼 하나의 지체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기도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많은 교회,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눈물이 나는 교회였고, 갈라디아 교회는 마음이 떨려서 부르르 떨며 외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사도바울에게 고통을 주었던 교회였습니다. 아마도 인간적인 감정에 있어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로부터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한 때에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자신을 목회자로 존경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다가 어느 시점에 그 사람이 정말 사도냐고 되물으면서 도전하는 그 모습 속에서 아마 우리들이 오늘날 경험하는 것과 똑같은 배신 같은 것들을 경험했지 않았겠습니까. 이러한 많은 교회, 많은 교인들이 사도바울의 기억 속에 있었습니다. 그 중의 많은 교회들 위해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할 때 가슴이 저미게 하고 아프게 하고 쓰라리게 하고 부르르 떨며 의분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그러한 잘못된 영적인 상태를 가진 교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빌립보 교회는 예외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감사와 기쁨이 넘쳤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문제를 하나 내볼까요. 해야 하는 기도가 열렬할까요. 되는 기도가 열렬할까요. 왜 대답을 못해. 해야 하는 기도가 열렬할까요. 되는 기도가 열렬할까요. 그렇죠. 그래서 사랑도 되는 사랑이 열렬하지. 해야 하는 사랑은 덜 열렬합니다. 그래서 좋은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해야 하는 사랑이 되는 사랑하고 일치를 할 때. 그 때 좋은 것입니다. 성화의 최고의 목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해야 하는 사랑인데, 그 사랑이 되는 사랑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성화에요. 여러분이 생긴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러면 음식에 약을 안 쳐도 썩는 것처럼 내버려둬도 주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식어지고 부패하고 처음 사랑, 여러분 가운데 처음 사랑 잃어버리려고 전당포 갔다가 맡긴 사람 있어요? 살다 보니까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입니다. 기도도 해야 하는 기도가 있고, 되는 기도가 있습니다. 못된 녀석 말이야. 못된 교인입니다. 저 지질이 속 썩이고 어디를 굴러다니다가 우리 교회에 굴러 온 거야. 참 저 교인 떠나보낸 교회는 복도 많지.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저 사람에게 떠날 마음을 주셨을까. 아이고.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겠죠. 그렇지만,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치면, 여러분 중에는 없습니다. 내가 확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람이 가정적으로 있다고 하면 그러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는 대부분 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는 기도겠죠. 그런데, 너무 사랑스럽게 신앙생활하고, 회심을 하고 변화되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섬기고 그리고 자신의 안일함과 그리고 자신의 좋은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고 하는 이러한 사람들은 정말 되는 기도잖아요. 그러나 그 두 개가 줄긋듯이 똑바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면 자신을 그렇게 원수처럼 여기고 미워하는 대도 기도하는 내 마음 속에서는 그 사람이 밉지 않습니다. 어떠한 때는 미워하려고 노력을 해도 잘 안됩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서 미움을 이긴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것과 상관없이 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착하고 좋은 사람은 되는 기도가 되고, 신통치 않은 교인은 해야 하는 기도가 된다. 그러면 여러분, 금방 쫙 갈라질 것 아닙니다. 어, 나는 목사님한테 하는 기도 대상자야. 너는 되는 기도 대상자. 되는 사람은 이쪽에 앉고 하는 사람은 이쪽에 앉고.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화시키면 원수를 위해서도 그렇게 뜨거운 눈물로 기도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셔요.
그래서 절대적으로 선을 그을 수 없지만 그러나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되는 기도의 대상들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을 너희들 참 감사하다. 너희들이 있어서 참 감사하다. 그리고 야, 너희들을 생각하니까 참 기쁘다. 그러는데 두 군데 전부다 간구한다는 말을 써 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 사람들을 위한 기도들이 흘러나왔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도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도 있을 거고, 특별히 구역자, 교사들이 있습니다. 또 그렇지 않더라도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노심초사하는 성도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길 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전도해야 할 사람, 자기가 돌보아야 하는 영혼들에 대해서 상처받은 마음을 가지고는 그 영혼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그것을 이기지 아니하고는 영혼을 돌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을 먼저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실 때, 그의 삶이 어떠한 모습이냐와는 상관이 없이 그 사람이 되는 기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교회가 그러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이들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했고, 간구할 때마다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기쁨이 꽉 찼어요. 되는 기도가 은혜와 사랑이 넘치면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축복을 빌 수 있을 정도로 기도가 되지만, 그 기도가 되는 양상이 항상 기쁨 속에서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끊임없이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셔서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셨다고 하더라도 그가 악을 행하기 때문에 내 마음이 기쁨이 생기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주님이 은혜를 많이 부어주실수록 자신도 모르는 체 악의 길을 달려가고 있는 그 인간이 불쌍하다는 마음 때문에 그가 울어야 하고 아파해야 할 통증을 은혜받은 내가 느끼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 그를 위해 섬겨주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그러한 면에서 사도바울은 높은 수준의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마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선교헌금을 보내주었다고 해서 마음속에 감동이 일어나가지고 눈물이 쏟고,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조금 까칠하게 굴었다고 해서 이 자식들 하는 마음 때문에 어금니를 깨물면서 기도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시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빌립보교인들을 생각하면 마음에 기쁨이 막 솟아났어요. 솟아났어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한 영혼을 전도하고, 그 영혼을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하고 그가 예수를 잘 믿게 하기 위해서 그를 돕는 그러한 과정에서 만나는 그의 희로애락에 동참하고 그리고 그가 경험하는 많은 쓰라린 고통에 함께 참여하면서 그러면서 그를 보듬고 신앙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그 모든 과정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순수해지는 때가 두 순간 있다고 했죠. 자기의 죄 때문에 마음이 깨뜨려 질 때와 남의 영혼을 위해서 가슴 아프게 눈물을 흘릴 때. 그때에 정말 순결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쉽지만, 그 사람을 떠올리며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 남의 영혼이 내 영혼처럼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해서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그러한 것, 그것이 그러한 경험이 우리 신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정말 이 세상의 종말이 와도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선행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 쓰러진 영혼을 다시 세우고 병든 영혼을 고치고 그래서 그 영혼을 주님의 사랑으로 잘 세우기 위해서 그는 살고 나는 희생하는 것. 그 속에서 그를 위하여 기도할 때 마음속에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이 경험, 이게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간직하며 살아가야 할 교훈입니다. 교훈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생각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자신의 영혼을 진정으로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신의 영혼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경험한 사람들이 남의 영혼도 잘 돌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B. 복음 안에서 교제함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속에서 이러한 기쁨이 확 솟아올랐습니다. 그리고 만입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참 다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느냐 하면, 복음 안에서 교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교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교제, 코이노니아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로 교제하면, 남녀 교제 아니면 사회생활에서 사람과 사람이 사교하는 것, 그렇게 생각이 되잖아요. 코이노니아라는 것은 그러한 단어가 아니라 삶의 나눔입니다.
물건을 나누어 가져도 코이노니아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죽어서 유산을 두부 자르듯이 딱 잘라서 등을 돌리고 돌아서는 형제들, 나눴기는 나눴는데 코이노니아의 나눔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법정 싸움까지 해서 나눴다 할 경우에는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코이노니아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코이노니아는 우리 말로 번역할 수 있는 적절한 번역이 없습니다. 교제는 적합한 번역이 아니고, 그래도 근접하게 하고 삶의 나눔이라고 할까. 나눔. 그러한 정도에요. 완전히 어울리는 뜻이 없습니다. 그게 코이노니아의 의미에요. 그러니까 코이노니아는 함께 사귀고 교제하는 것, 음식을 떼고. 음. 이렇게 생각하면 좋겠네요. 가족들, 가족들이 코이노니아의 아주 대표에요.
예를 들자면 이러한 거잖아요. 정말 가족이라면, 애들이 룰루랄라 노래 부르면서 신나게 집에 돌아왔어요. 왜, 아들 녀석 하나는 너무 시험을 잘 봤고, 딸내미는 남자친구가 생겨서 데이트를 하고 돌아가는 중이었고, 룰루랄라 하면서 집으로 돌아와요. 아내도 말입니다. 장사를 하고 오는 길인데, 매출이 확 올라서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세 식구가 기분이 좋아서 룰루랄라 부르면서 문을 열고 들어와요. 그런데 아빠가 표정이 영 슬퍼요.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봐. 아니면 몸이 어딘가가 아픈가봐. 여보, 왜 그래? 근심되는 일이 있어. 아빠 왜 그래요? 내가 조금 힘든 일이 있단다. 아빠, 왜 그래? 내가 좀 요새 힘들구나. 이말을 했는데, 세 사람의 기쁨이 싹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빠의 마음속에 있는 괴로운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게 코이노니아에요. 이게. 이게 대표적인 코이노니아에요. 이게.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닌데, 횡재했네. 이런게 코이노니아에요. 코이노니아. 그러니까 성도들이 와서 안 그러한 집안도 있잖아요. 콩가루 집안. 안 그러한 집안도 있잖아요. 안 그러한 집안도 있잖아요. 그러면 아이는 딸내미는 서울로 유학하고, 아들은 부산으로 가고, 아내와 남편 사이에 식구 네 식구가 셋으로 떨어져 살아도 이러한 코이노니아가 있을 수 있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자고 가도 아무 코이노니아가 없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죠? 그러니까 교회의 진정한 이상은 무엇이냐 하면 그러한 종류의 코이노니아가 한 몸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교회의 성숙의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화) 전에 제가 있던 교회가 있는데, 항상 청년들이 따로 예배를 드려요. 따로 예배를 드리는데, 그렇게 안하려고 교역자와 교회에서는 많이 노력을 하는데 청년부 모임이 은혜롭다 하니까 주일 예배도 안드리고 주일2시 청년부 모임에만 참석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있던 안수집사 한 사람이 윗층에 뛰어 올라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임대료 내놔라. 임대료 내라. 너희 청년부가 교회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임대료 내놔라. 이러한 것들은 교회의 참다운 이상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함께 그 코이노니아가 그 코이노니아가 여자는 여자끼리 잘된다. 30대는 30대끼리 잘된다. 그리고 남자는 남자끼리 잘된다. 그 다음에 실직자는 실직자끼리 모여야 한다. 변호사는 변호사끼리 모여야 코이노니아가 잘된다. 그러한 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의 코이노니아이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하는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그 한 피로 구속을 입고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각각 달라도 모든 고통을 함께 경험하는 것 같은 그러한 종류의 코이노니아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코이노니아를 더 깊이 느껴서, 그래서 그 고통과 기쁨, 수취와 영광을 함께 기뻐하고 함께 누릴 수 있는 그러한 영적인 연결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 교회의 영적 성장의 아주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한 코이노니아가 있을 때, 내가 다른 사람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이 자체가 나에게 부채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들에게 저 무지한 많은 사람들을 볼 때에 나는 저들을 섬겨서 어떻게 하든지 주님이 내게 주신 이 지식들을 저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돈이 많이 생기면, 모든 사고가 코이노니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돈이 많이 생기면, 자식들, 돈도 없으면서 말이지 교회야 말로 정말 돈이 필요한 곳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하나님께서 돈을 많이 주시면 그러면 궁핍한 사람들을 보면서 저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더라면 불공평하게 되었을 나눔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내게 그러한 물질을 주신 것은 그것들을 골고루 나누어서 사람들에게 부족한 사람은 모자람이 없게 하고 남는 사람들에게는 남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내게 주셨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눔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전부다 다 그렇게 소유에 있어서도 코이노니아를 중심으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자라가는 것이 바로 교회에요. 교회. 심지어 이것은 어떻게 말하자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영혼들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하는 것도 이 코이노니아의 복됨과 이 코이노니아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비참함을 대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간절한 열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훈련 받는 사람들이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기쁨이 마음 가운데 요동치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에 참된 기쁨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아가고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오늘 재밌는 것은 뭐냐 하면 오늘 우리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나와요. 이제까지 첫날부터 이제까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그런데 희랍어 성경에는 이렇게 안 나오고 이렇게 나와요. 이제까지 그 복음 속으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무슨 뜻이냐 하면, 복음이 이렇게 있는데 교제가 이렇게 복음 안에서 교제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여기 있는데 복음을 통해서 교제가 이렇게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제를 복음을 모르고는 복음적인 교제 자체가 불가능하잖아요. 구원받았고 복음의 의미를 아니까 복음적인 교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 안에서의 교제를 통해서 복음의 의미를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지식만으로가 아니라 삶 전체를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서 나눔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내포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깊이 이해하게끔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경험하는 것.
(예화) 머릿속에다가 그림을 하나 그려 드릴게요. 아주 노랗게 잘 익은 레몬이 있습니다. 너무나 싱싱해서 눌러도 안 들어갈 정도로 탱탱한 레몬입니다. 그것을 하나를 받았어요. 그리고 여러분이 뭣도 모르고 레몬을 콱 깨물었습니다. 우리 모두 흘린 침이 1리터는 될 것 같아요. 그것을 글로 표현해 보라. 그러면 아마 A4용지 한매를 써도 그것을 읽는 누구에게도 신물을 내게 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죠. 가장 좋은 것은 뭐냐 하면 너도 한 번 똑같이 해봐. 입을 벌리고 그것을 확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 꽉 눌러 버리는 것입니다. 신물이 확 퍼지면서 과육이 씹히고 그러면서 그 즙이 목젖까지 확 젖을 때, 확 자지러지는 그 신맛 그러면 이제 그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 설명을 하고 사람들에게 지성으로 이해를 시키는 것은 먹어 본적이 없는 레몬의 맛을 종이에다 깨알같이 쓰고 논리적으로 1,2,3,4를 써서 사람들에게 읽어주는 것과 같아요. 그것보다도 더 좋은 것은 뭐냐 하면, 입을 벌리고 하나를 집어 넣고 꽉 턱을 오므라뜨려서 우지직하고 한번 그것을 깨물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맛이 확 번져서 살이 달달 떨리도록 한번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맛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을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관통해 들어가듯이 복음의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요. 혼자서, 혼자서 예수 믿고 혼자서 성경 읽고 혼자서 기도 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절대로 복음의 의미를 몰라요. 저는 목회 하면서 이러한 사람들 교회도 오고 많이 만났거든요. 그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의에 꽉 차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고 구원은 받았는지 모르지만, 구원받은 것은 복음을 아는 것의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복음 그 자체가 이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을 때, 그 깊은 그 것의 정체가 복음입니다. 천사들도 다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들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가 되매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그 비밀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로 남아있는 부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코이노니아의 교제를 통해서 복음을 깊이 아는 것입니다. 오늘 시간이 없어서 길게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데, 한 두 시간만 내게 주면 설명을 할 텐데. 조금만 더 할게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복음은 뭐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해 죽으셨다. Jesus died for us.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런데 우리가 그 말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면 구원도 받을 수 없겠죠. 그렇죠. 그래서 그것을 믿고 아멘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모두 알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혼들을 위해서 짐을 지면서 남을 위해 자기를 끊임없이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생활입니다.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끊임없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옳은 대도, 내가 옳은 대도 세상에서처럼 나의 옳음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낮아져서 무릎을 꿇고 옳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꺾는 가운데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그때에 하나님이 내가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죽을 때, 내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놀라운 소생의 은혜를 경험하게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 이라
그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자기가 깊이 죽을 때, 나는 아프게 죽었는데 주님이 내 안에 충만하게 살아계신 그 거룩함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죽었는데, 또 다른 의미로 내가 살았다는 확신이 들어요. 생명이 충만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죽음도 무섭지 않은 그러한 상태가 됩니다. 주님과의 완전한 평화 속에서 거룩한 기쁨이 밀려 오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게 되겠어요. 솔직히 이야기해서 오늘날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가 깨어지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한 번도 태어나서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다 낯선 것입니다.
(예화) 우리 교회에서는 조국 교회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그래서 이제 같이 교제하는 목사님들이 우리 조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하니까. 설교 끝난 다음에 어느 청년이 와서 목사님, 조국 교회가 어느 동네에 있어요? 조국 동에 있겠죠. 말이 안 통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떻게 되는가 하면요. 꼭 뭐와 같은가 하면, 밤을 먹는 것과 같아요. 밤을 잘 삶아서 티스푼으로 파 먹어봐. 얼마나 맛있나. 구워 가지고 껍질 까서 먹어봐요. 겨울에 요즘 같이 선선한 때 따끈따끈 한 것. 옆에서 까주면 더 맛있습니다. 그죠. 그런데 그것을 밤이 맛있다고 하니까 입에다 놓고 계속 굴리는 것입니다. 그냥 혀가 닳도록 빨아 봐요. 그게 맛이 나나. 먼지나 실컷 빨아 먹는 것입니다.
복음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에이스라고 나오는 전치사가 복음 속으로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들어가야지, 그 맛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체험하는 거잖아요. 교제가 그것을 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교회 생활을 날라리처럼 하고, 마음이 교회에 없고, 은혜를 받아도 마치 현금 인출기에서 현금 서비스 받은 것처럼 뒷주머니에 끊고 가는 것처럼, 그렇게 은혜를 받아가지고 자기 주머니에다가 집어넣고 자기 개인의 계좌에 들어온 용돈인 것처럼 이러한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절대 복음 속으로 교제할 수 없습니다. 복음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려고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죽으라고 명합니다. 우리는 게으르기를 원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충성되게 살라고 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마음을 두지만, 복음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만, 복음은 예수를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한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포기하고 죽는 자기 포기와 자기 버림 속에서 그 속에서 남을 위해서 사는 성도의 이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 고통과 모든 것을 경험하면서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화) 기가 막힌 예화가 생각났어요. 안 그러한 사람도 있습니다. 안 그런 사람도 있는데 자매들은 시집가면 대부분 철이 든대요. 가서 연달아 애 둘 낳고, 억수로 고생을 하면 그때 엄마라는 이름이 그리움으로 확 다가오게 돼요. 그게 뭐예요? 엄마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애 둘 낳기 전에는 엄마가 엄마인 줄 몰랐나? 그리고 뭐 좋은 신랑 만나서 뭐 돈 많은 집에 시집 가서 떵떵 거리고 살 때에는 엄마가 엄마인줄 몰라봤나? 그런데 엄마가 뭔지 몰라요. 그런데 애 연달아 둘 낳고, 가난해도 보고 외로워도 보고, 애들 아파서 밤 중에 일어나서 뛰어도 보고, 무릎을 꿇고 체온계와 약하고 들고 밤을 새워도 보고, 그러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보고 그러는 가운데 엄마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 엄마가 된다는 것이 이러한 의미이구나. 아, 그러면서 어머니라는 이름 한 마디만 들어도 눈물이 확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얼마나 커다란 비밀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복음을 그렇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빌립보교회를 보니까 빌립보교회가 그러한 교회였어요. 빌립보 교회는 절대 부유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또 한 교회가 있습니다. 마게도니아 교회가 그러한 교회였어요. 환란을 많이 만나고 시련을 만나고 극도로 가난한 교회였는데, 부자인 교회인 고린도 교회를 창피하게 할 정도로 분에 넘치는 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려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렸던 것입니다. 왜, 그들 속에 자기를 온전히 버려서 흉년을 만나 고통을 받는다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향해 자신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이러한 정신과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예화) 엊그제 CRTS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 학생들이 여기 와서 2주일 동안 수학여행을 하고 온 다음에 수업태도가 달라졌대요. 그게 뭐였죠. 언제 우리가 그 학생들 왔을 때, 교회 정문 들어오자마자 무릎 꿇어 앉혀 놓고 수업 똑바로 들으라고 우리가 몽둥이 든 적 있어요?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코이노니아를 보여주었더니 교회란 이렇게 섬기는 곳이구나. 교회란 자기를 포기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곳이구나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과 목회가 무엇인지를 이러한 방식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빌립보 교회가 절대 부유한 교회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를 포기하며 지체들 속에 코이노니아를 이루고 그 코이노니아가 자기들 속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자신들을 희생해서 물질로 돕는, 그래서 바울을 돕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복음을 전해야 할 영혼들에게까지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이들의 신앙이 정말 아름답게 자랐을 때, 그 때 사도바울은 코이노니아를 인하여 하나님 앞에 그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의 눈물이 흐르고 기쁨의 샘이 솟는 경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가 한번 두 가지로 적용을 해 봅시다.
III. 결론: 교제 안에서 자라감
한편으로는 우리가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신세를 지는 사람들이었고, 우리 자신은 남을 위해 나누어 준 적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는데도, 은혜 받은 성도들이 섬김과 나눔을 통해서 영적으로 끊임없이 유익을 얻게 하시고 또 육적으로도 유익을 얻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셨어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바와 같이 교회가 영적인 자선인 용서와 육적인 자선인 나눔을 통해서 부유한 사람은 없는 사람을 위해 가난해 지고, 가난한 사람은 그들로 인해서 부해지고 또 한편으로는 죄 지은 사람들은 용서받고, 또 죄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당한 사람은 용서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으면서 그렇게 주님의 교회의 나눔을 이루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의 지체들이 끊임없이 나를 섬기고 나를 용납해 주는 섬김 속에서 한 해 동안을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때로는 주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지체된 것의 소중한 것을 몰랐을 때도 있었겠지만, 돌아와서는 다시 주님의 교회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다시 신앙을 되찾을 수가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한 해 동안의 은혜에요. 눈에 보이지 않은 곳에서 우리를 섬긴 많은 사람들,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도 사랑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누어 줌으로 그들은 복음 속으로의 교제를 경험했어요. 그러한 교회의 한 부분이 되어서 거절당하지 않고 아직도 남아서 지체들에게 섬김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신 그 한 해 동안의 은혜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돌보심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고, 또 한편으로는,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한 해 동안 살아오면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섬기고 나누어 주는 코이노니아가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감화 때문이었습니다. 이기적인 나를 주님의 은혜로 감동시키니까 나는 아파도 다른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를 역사하니까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할 마음이 생겨나게 해주시시고 이기심과 자만심으로 가득했던 내가 무릎을 끓고 영혼을 섬기고 그들을 돌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나눌 수 있을 때에만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받고 나눔을 입어야 하는 때조차도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를 사람들이 전부다 이기적이고 각기 찢어지는 사람들인데도 주님의 은혜가 아교같이 그 모든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묶어서, 그래서 이 사람에게 은혜가 식으면 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저 사람이 식으면 이 사람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래서 주님의 교회가 하나 된 끈끈한 성령 안에서의 끈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모두들 혼자인 사람들, 상처 받고 버림을 받았던 사람들 하나하나 모아서 그래서 한 우리 안에서 서로 가슴을 기대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으니 만약에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이 몸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정말 얼마나 황량한 삶이 되었겠어요. 이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오고, 이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적시고 이 연합을 통해서 우리 모두 함께 한 은혜를 받고 함께 걸어가야 할 삶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무엇 때문에 모질게 주님을 대적하고 악을 행해야 했던 이러한 허랑방탕한 인간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공로와 우리의 덕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우리를 당신의 피로 사셔서 당신의 한 몸으로 삼았기 때문에 머리에게 주신 그 은혜와 많은 혜택들을 그분께 붙어있는 몸으로서 누리는 것이 우리는 이 모든 은혜를 인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때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가 되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 머리이신 그 분을 통해서 하늘의 각양 모든 좋은 것들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게 하신 그 큰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주 앞에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이김을 주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7~58)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은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인간이 한 번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생각하던 현세주의자들에게 죽음 너머에 영광스러운 영생의 세계가 있음을 가르치면서 부활을 노래하고 있는 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이 실려 있는 15장의 맥락에서 이김을 주신 하나님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육신이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사라진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름을 받은 우리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까지도 예외 없이 부활하게 될 것임을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차이가 나는 것은 우리 주님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보다 더 완전한 몸을 입고 더 영원한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기 위해서 부활하지만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적합한 몸으로 부활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끊임없는 고난을 경험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졸지에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것 속에서 우리가 만약에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요동치며 좌절하고 낙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영원한 세상이 아니요, 오히려 이 세상은 보다 더 완전한 삶으로 나아가는 한 나그네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며, 또 그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셔서 미래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부활의 증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들이 우리의 인생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육체의 많은 시련을 당하고, 혹은 질병을 경험하고, 혹은 육체 속에 스며들어오는 죽음의 기운들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보다 더 완전한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 때문에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거나 혹은 주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거나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려면 이러한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하고 완전한 부활의 기쁨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젊음이 사위어 가고, 죽음의 기운이 우리 속에 스며들어오는 것조차도 우리가 보다 완전한 육체를 덧입어 우리 주님을 즐거워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데려가시는 한 과정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죽음도 우리의 친구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두려움뿐만 아니라 죄의 능력을 이기게 하십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 안에 끊임없이 살아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어쩌면 죽은 후에 우리들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동안 분리된 상태에서 한 동안 지내야 할 텐데, 그것도 어찌 보면 죄의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구속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속의 완성은 우리의 몸의 부활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완전한 몸과 완전하게 된 영혼이 함께 만나 완전한 인간의 존재를 이룬 그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보다 더 완전한 영생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과의 신비한 교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 죄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질병처럼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역사하여 우리의 육체도 장악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떠나게 만들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만드시기 위해서 베푸신 아버지의 크신 은혜를 대항하며 살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이후 우리 속에 끊임없이 융성하게 솟아오르는 부패한 이 죄를 이기지 아니하게 하셨더라면 아마 우리는 지금쯤 배교자가 되었다든지, 아니면 배교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마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죄와 싸울 선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싸움이 힘들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고난을 기억하며 죄와 싸우고 그나마 경건을 추구하게 만드셨습니다. 때때로 마음의 죄와 야합하여 하나님께 범죄하는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지난 한 해 동안도 우리를 붙들어 주셔서 시시때때로 우리는 이 예배당에서 주님께 예배하며 우리의 죄와 악함을 토설하고, 그리고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가 하나님께 얼마나 마음 아픈 것인지를 뉘우침으로서 힘차게 역사할 죄의 기를 꺾고 우리로 하여금 착한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해 주신 은혜의 계획을 따라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쓴물이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면서도 그 고통 때문에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 죄를 이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기 힘든 사람들을 용서하며 살 수 있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들이 열렬히 그 은혜를 구했기 때문에 주셨던 적도 있지만 때로는 마음에 그 은혜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조차 없을 그때에도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때려서 그 은혜의 자리로 돌아오게 만드셨습니다. 열렬하게 간구하지 않아도 우리가 영혼이 죽은 자와 같이 되었을 때에는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그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당신에게 행한 대로 갚으셨다면 이렇게 죄를 이길 은혜를 베푸실 이유가 추호도 없으셨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행한 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예수가 우리를 위해 당신께 행한 대로 갚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죄를 이길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때로는 유혹에 굴복하기도 했지만 보다 더 많은 때에 우리는 유혹과 더불어 싸울 수 있었고, 고통에 굴복하기도 했지만 보다 더 많은 경우에 이 고통을 견디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본분에 따라 살려고 애썼으니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힘과 의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시시 때때로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주님을 생각했지만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생각하셔서 우리가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때가 결코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간구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그 큰 사랑으로 이끄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하셨습니다. 공포와 채찍으로 그 죄를 이기게 하신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로 이끄셔서 예수께서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 지신 그 큰 고난의 십자가가 지금 내가 추구하려고 하는 이 죄 때문에 피 흘리신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도 우리가 주님 앞에 신실하게 살 때뿐만 아니라 혹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났을 때에도 우리의 모든 처지와 환경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의 속성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한 해 동안도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성화의 삶을 살아오도록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정신의 작용과 우리의 몸 물질로서의 우리의 몸과 정신으로서의 우리의 심리작용들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야를 연구하는 것을 수반 물리학이라고 해서 부지런히들 현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에 있는 여러 가지 많은 분비물 가운데 엔돌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주 기쁘거나 행복하거나 할 때에 솟아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그것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생성되고 어떻게 작용을 하는지는 베일에 쌓여있는 부분이 많이 있겠지만 그러나 그런 몸에 있는 엔돌핀이 우리가 기쁜 일을 만나고 웃고 반가운 사람을 만나고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 기쁜 것은 바로 그 엔돌핀이 솟기 때문입니다. 이런 엔돌핀이 우리의 몸에서 가장 많이 분비되는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죽는 순간이랍니다. 그래서 죽을 때에 그때에 온 몸에 남아있는 엔돌핀이 모두 솟구쳐서 그래서 그 육체의 죽음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거나 혹은 말하자면 마음속에서 이게 죽음 직전에 큰 쾌락이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아이들에게 유행하던 게임이 있었는데 목매달기 게임이었습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여러 명의 청소년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들보 같은 데에다가 줄이나 목을 다치지 않을 수 있는 부드러운 수건을 걸어놓고 자기가 거기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 대신 언제든지 그것을 벗어날 수 있도록 높지 않은 곳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버티는 것입니다. 그럼 처음에는 목을 조르니까 피가 여기 모이면서 막 고통스럽다가 일정 시점이 지나게 되면 놀라운 환각 현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쾌락이. 그러다가 미쳐 자신을 목을 두르고 있는 그 줄을 끄르지 못해서 여러 아이들이 죽었습니다.
이 육체의 죽음과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죄의 죽음 사이에도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어떻게 연관이 되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감화를 받아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내가 이러 이러한 잘못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기가 깨뜨려 질 때에 그때에 고통스러워요? 기뻐요? 기뻐요? 그러면 그걸 누가 자기 죽음이라고 이야기 하겠어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00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영적으로,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재현이 되어서 우리 안에 있는 죄 된 성품 혹은 육신의 성품 혹은 죄를 추구하고 정욕을 추구하는 나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육체를 칼로 찌르는 것에 못지않은 커다란 고통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진다’ 라고 말했겠습니까? 그런 고통이 육체의 죽음이 밀려오는 것과 꼭 같은 고통이 영혼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깨어짐이고 자기 죽음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만약에 그것이 고통뿐이라면 누구도 그것을 즐겁게 당할 사람이 없는데 놀랍게도 그렇게 자기 자신이 깨드려져 깊은 고통 속에서 죽어갈 때 형언할 수 없는 쾌락이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 죽어가는 그 신자의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파할 때 그 회개가 아주 심하면 기절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슬픔과 고통이 너무 커서 육체가 이런 슬픔과 고통을 다 감당을 못해서 육체가 반란을 일으키고, 툭 쓰러져서 기절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가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데 신기하게 그렇게 철저히 회개하고 뉘우치는 사람 가운데 그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빨리 집어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회개의 순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신기하잖아요. 그래서 진실하게 참회할 때 가슴을 쥐어뜯는 것과 같은 고통이 밀려오지만 그게 신경질 난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기쁨이 마치 영혼의 엔돌핀 같은 것들이 솟아나서 그것이 뭐냐 하면 자기를 그리스도와 더 친밀하게 연합을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잘 믿고 열심히 섬길 때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참한 가운데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한 해 동안 주신 복을 먹고 입고 마시고 쓰고 즐기는 이 세상의 물질의 공급에서만 찾으려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당신의 큰 사랑을 우리의 물질의 영역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영역에서 더 많이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율법을 이기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이 율법의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정죄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이미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때로 이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큰 영향력을 우리에게 행사합니다. 그래서 신실하게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죄와 잘못이 발견되었을 때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도피성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도망치고 그래서 그 분의 은혜의 품에서 주님을 찾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의도이거늘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가 되었는데도 때로는 이 율법의 정죄에 사로잡혀서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무 희망이 없는 것처럼 낙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절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율법을 대면하고 나의 행한 잘못에 대한 율법의 정죄가 무엇인지를 확인한 다음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바로 이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이루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나의 잘못을 그 분께 진실하게 아뢰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구속의 공로를 의지하면 이 율법의 정죄로부터 나를 은혜로 구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신학적인 지식도 없는 우리들을 만약에 주님이 도와주시지 아니하고 방치하였다면 우리의 삶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율법도 없이 제 맘대로 주님의 말씀을 짓밟고 경계를 넘나드는 그러한 아주 폐륜적인 신자가 되거나 혹은 그 율법의 정죄에 사로 잡혀서 두려움 속에 벌벌 떨며 그리고 절망을 느끼며 주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감히 하나님을 미워하거나 하는 둘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 신학적인 지식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지난 한 해 동안에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때로는 목양의 속에서,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때로는 사랑하는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때로는 이 모든 것 중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그냥 직접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율법을 이기도록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 홀로 내버려 두셨더라면 올바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었을 이 율법을 시시때때로 주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바꾸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이 율법 때문에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기 위한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을 무시하며 악을 행하며 불신자처럼 살거나 혹은 그 율법에 사로 잡혀서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으리만치 그 율법 앞에 정죄당한 자가 없도록 주님이 시시때때로 우리를 돌보고 이끄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한 해 동안의 삶 속에서 시시때때로 이기며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 홀로 내버려 두셨더라면 패배 속에서 짓밟혔을 우리들의 인생을 시시때때로 보살피시고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이김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패배하고 진 것은 우리의 죄와 의지가 악함 때문이었고, 우리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넘어지긴 했으나 아주 짓밟히지 않도록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교재 속으로 이끄신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로서 이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영역에서 주님은 세심하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형편을 살피시며 우리가 감사할 때나 감사하지 못할 때에나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당신과의 언약에 충실하셔서 하나님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오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불순종과 악을 보시지 아니하시고 아들이 우리를 위해 당신에게 보이신 그 신실하신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이제껏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닫혀진 마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이 한 해 동안도 어머니와 같은 사랑으로 우리 모두에게 베푸셨던 그 세심하신 은혜, 시시 때때로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에게 하도 많이 베푸신 그 세밀한 사랑과 돌보심에 대해서 감사의 찬송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늘 패배하지만 않고 이길 수 있었으며 우리의 믿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이 세상을 감당하여 때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신자의 삶을 그리워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한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 영혼의 정신의 아름다움이라면 한 사람의 가치는 그가 가진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누가 우리의 마음을 그 선한 의지로 채울 수 있겠으며 주님의 사랑이 아니면 한 번 받은 그 선한 의지가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제처럼 보호해 주실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난 한 해 동안에 일어난 모든 나쁜 일은 우리의 잘못과 악한 의지 때문에 생긴 일이고, 그리고 한 해 동안 일어난 모든 좋은 은혜는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한 해 동안 경험한 패배는 모두 우리의 약함과 악함 때문이고, 승리가 있었다면 그것은 이김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은혜에 깊이 감격하며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들이 주님이 이 못난 인간들에게 이김을 주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될 텐데 이런 주님의 크신 은혜에 깊이 감격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도는 말합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말합니다. 충성은 어느 한 순간의 불끈 솟아나는 욕망으로 행하고 쉽게 사라져 버리는 것은 우리들이 충성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충성하는 사람은 흔들리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충성은 쾌락처럼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저절로 된 본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에서 하고 싶을 때까지만 하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충성이라는 말 속에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을 때에도 그렇게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하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하기 싫을 때에도 그런 자신을 채찍질하며 어떤 객관적인 가치에 붙들려 사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충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흔들리지 않는 충성스러운 삶의 모본이었습니다. 그 분의 마음 안에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의 요소가 있을 수 없었지만, 환경은 끊임없이 그 분의 마음 에 있는 충성스럽게 살고자 하는 의욕을 방해하여 더 큰 고통을 겪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매 순간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기면서 진리를 증거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상심한 자를 위로하고, 주린 자를 먹이시면서 일생을 종처럼 사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분이 흔들리지 않고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충성되게 살고자 하는 그런 분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는 그 분의 별명을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생애였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도 이 세상에 주님을 향해 올곧은 충성의 삶을 살고자 했을 때 그 분을 뒤흔들었거늘 그 분만 못한 우리들, 더욱이 우리 안에 죄의 소원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는 부패한 인간들인 우리는 얼마나 이 충성된 삶을 사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우리가 의지적으로 결심하고 용기를 내야 할 줄 알지만 이 위에 이런 선한 뜻을 계속하게 만들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의 부음이 없이는 누구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 가운데 누구도 충성스러운 삶을 산 사람이 없습니다. 매 순간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모든 좋은 것이 나 자신 안에서는 솟아날 수 없고, 주님의 은혜로서만 주어질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내 안에 있는 죄를 누르고 그것을 죽이기 위해서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거절하는 이 세상의 집요한 방해와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것을 이길 수 있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 이미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이미 붙잡았다함도 아닌 줄 알고 주님의 은혜의 손에 붙들려 있는 동안에만 내가 주님 앞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아버지 앞에 연약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매순간 그 분의 손을 꼭 잡고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주를 붙들고 의지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주님의 일에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많은 은혜들을 우리는 어디에다가 사용했습니까? 당신을 위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도록 부어주신 그 은혜를 혹시 그냥 죄와 더불어 싸우는데 모두 소모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좋은 기회들을 불충성함과 게으름 속에서 낭비하지는 않았습니까?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는 그 놀라운 승리를 주셨으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에는 사망의 위협에 사로잡혀 죄에 순종했지만 이제는 죽음 너머에 영원한 부활과 그리고 영생의 면류관이 기다릴 줄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충성되게 살아가는 것이 헛되지 않을 줄을 알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주신 각자의 분량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해 동안 주님이 여러분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이었습니까? 가정에서는 주님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셨나요? 교회에 와서는 여러분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이라고 주님이 여러분에게 일러주셨습니까? 여러분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모든 은혜는 소명을 완수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지극히 충성스럽게 마음을 다하여 주님 앞에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한 해 동안도 우리의 의지를 초월하여 이기게 해 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래서 주님 앞에 충성되게 사는 사람들이 됩시다. 마음을 다해서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정말 한이 없지만 갚은 것은 너무 적으니 이제 이 남은 우리의 몸이라도 주님이 받으시도록 은혜를 내려 달라고,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0.유리하던 자들을 인도하심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 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신26:5-10)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의 절기가 되면 하나님 앞에 드리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규례를 따라서 신앙고백을 하도록 만들어 주셨기에 이 부분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시신앙고백이라고 부릅니다. 모세가 이제 가나안을 바라보고 죽을 때가 가까워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너희가 가나안 땅을 얻게 되면 거기에 들어가서 감사의 절기를 드리고 또 첫 번 거둔 곡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할때에 이 고백을 공동체적으로 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백이라는 것을 잘 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기껏해야 죄의 고백정도나 알고 있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힘의 능력과 위대성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고백은 아주 굉장히 커다란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고백은 입술의 고백이지만 이 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내면이 고백에 합당하게끔 우리를 쇄신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물론 그 고백을 마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으로 올려야 한다는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것이었습니다. 종종 고백은 우리가 현재 있는 상태와는 아주 동떨어진 사실의 고백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모세가 이러한 감사의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정해 줄때 그들이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주님 앞에 이 신앙을 고백하는 때에는 광야에서 유리 방황하던 때가 아니라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착을 했을 때입니다. 만나로 먹고 살던 때가 아니라 그들이 가꾸고 기른 논밭에서 곡식을 거두어 먹고 살 때입니다. 기적의 메추라기를 먹을 때가 아니라 그들이 짐승을 기르고 또 목축을 해서 그 고기를 먹을 때 그때의 일입니다. 이러한 때에 그들은 뭐라고 고백을 했어야 하는가 하면 우리 조상은 유리하던 아람사람이었습니다. 아람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메소포타미아 지역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민족의 실질적인 시조입니다. 그 사람이 원래 갈데아우르 그것이 바로 아람입니다. 거기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던 그 아버지의 집에 살던 아들이었습니다. 많은 신들을 섬기는 가운데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아브라함을 삼으시고 그리고 그를 이스라엘 민족을 일으킬 실질적인 시조로 삼으셨습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서신에서 이 사람을 종종 인용하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아브라함이 무슨 특이성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이 사람도 별 수 없이 그 시대에 태어나서 우상이나 섬기고 하던 그 문화 속에 있는 사람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우선성을 보여 주는 것이고 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칭찬을 잘 하였으니 의심이 많고 변덕스러운 신들에게 속임을 많이 당하던 그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 되었을 때 그분을 굳게 믿었다는 한 가지 사실은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갈데아우르를 떠나서 이제 드디어 이스라엘 민족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었는데 그 후로부터 그의 집안은 계속해서 나그네의 생활을 계속하여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약속하셨지만 자신은 그 땅을 유업으로 얻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즐거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은 유리하던 아람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유리하던 아람사람이었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에 의해서 선택되어 애굽에서 구출해내시기 전까지의 이스라엘 백성의 원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유리하던 아람민족, 민족이라고 말하기에는 그저 한 집안의 많은 식구들로서 그렇게 소속도 별로 없이 떠돌아다니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셔서 거기에서 정착된 생활을 하게끔 인도해 주셨습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보면 이제 동물들이 아프리카에서도 그렇고 엄청나게 많은 동물들이 이동을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건기와 우기를 따라서 물을 얻기 위해 이동을 하기도 하고 먹을 양식을 얻기 위해 이동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동할 때 모두가 홀로 이동하는 짐승은 없습니다. 모두 떼를 지어서 수백만 마리 수십만 마리 무리를 지어서 이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나마 자신들의 생존을 잘 보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리를 지어서 살아가야지만 안전하다는 것이 거의 동물적인 본성이었는데 옛 시대로 돌아가 보면 사람들의 경우 더 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민족들이 있어도 오늘날은 민족과는 상관이 없이 나라가 이루어져서 중국 같은 경우도 53개나 되는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보면 항상 민족 간의 통합을 이루는 것이 국가의 과업입니다. 원래는 어땠을까요? 민족들끼리 모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민족들이 가장 힘을 쓰는 민족은 숫자가 많은 민족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본문을 보면 여기에서 유리하던 아람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신들의 설움이 베인 조상들의 설움이 베인 고백입니다. 그래서 땅이 없이 유리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족장들이 머물러 사는 원주민들에 대한 고백은 우리는 나그네요 라는 것이 고백입니다. 땅을 얻으면 그 땅을 얻기 위해서 값을 지불해야 했고 가축을 치기 위해서도 그래야 했습니다. 땅이 없다는 것이 유리하던 민족이었다는 것의 표현이라면 소수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힘이 없는 민족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때는 바로 이스라엘의 과거와 같이 우리도 한때는 그런 과거를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우리는 유리하고 방황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속된 것이 많이 있었지만 어느 소속도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가 진정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없었고 심지어는 가족들 속에서도 우리가 오히려 상처를 받고 그런 소속감을 누리지 못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불러 주셔서 그래서 사랑해 주신 것처럼 그렇게 유리하고 방황하던 우리 같은 사람들을 주님이 건져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때의 달콤한 시간들을 생각하지 말고 유리하고 방황하면서 살던 때의 극도의 고통스러웠던 시간들 그래서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시간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리하고 방황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히 세 가지로 나타났는데 첫째는 선택하신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선택하셨지만 그 갈데아 지방에서 아브라함이 가장 도덕적이고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증거는 성경에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을 선택하셨다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상을 만들어 팔고 사는 그 집안의 자식을 택하셨겠습니까? 아마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어쩌면 주님 앞에 가서도 왜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를 선택하셔서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을 삼으시고 예수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 우리가 한 지체가 되게 하셨는지에 대해서 아마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전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남들보다 더 의롭지도 않고 남들보다 더 훌륭하지도 않고 남들보다 더 충성스럽지 않은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하시지 않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에 대해서 아마 그 이유를 밝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우리를 하나님이 선택하셨을까를 연구하는 대신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우리를 향한 최고의 사랑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을 확인 하면서 그분께 찬송과 경배를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고 선택되었어도 구원받지 못하고 선택되지 못한 그 사람들 보다 우리가 어떤 이점이 있거나 훌륭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선택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제일 기쁘고 즐거워해야 할 것은 그 선택들 통해서 나와 하나님은 상관이 없는 사이였는데 선택을 통해서 나를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고 친 자녀를 삼으시고 그래서 주님의 고난에 내가 나의 고난에 주님이 동참하셔서 함께 한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공동체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만약에 선택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하나님께 선택 받은 사람들이 한 교회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교회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만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각자각자가 도저히 자신 혼자서는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각자가 하나님 앞에 깊이 깨뜨려져서 주님을 믿게 되었더니 그렇게 주님께 선택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예전처럼 유리하고 방황하는 양떼들을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그 교회의 지체들과 한 몸을 이룸으로서 우리들이 서로를 섬기며 보호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카톨릭 신자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거기는 여기처럼 부목사, 전도사, 남전도사, 여전도사 이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교인들을 다 돌보냐고 했더니 별로 돌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방 안 하냐고 하니까 그런 것은 카톨릭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미사드리고 예배드리면 각자 원하는 사람이 교회에 와서. 물론 사람이 죽었다든지 아프다든지 하면 교구의 식구들이 가지만 거기에 굳이 교역자가 따라 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가 성경대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개신교가 많은 잇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들어 올 때는 이것으로 인생의 방황 끝 그렇게 하지만 사실 실제로 살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가 그랬다고 합니다. “엄마 나 교회가기 싫어!” 하니까 엄마가 “그래도 가야지 안가면 되니?” “싫어 엄마 나 다른 교회 갈 거야! 교회 가기 싫어” “가거라 그래도 가야된다. 네가 담임목사인데 교회가 가기 싫으면 어떻게 하겠니?”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글을 썼습니다. 때로는 목사도 교회를 떠나고 싶은 때가 있다 라는 책을 썼습니다. 읽어 보지 않았지만 안 읽어 보았어도 그 심경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성도들이 당연 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지 말아야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고도 끊임없이 방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심방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끄러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광야의 생활에서 그렇게 변심한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다양한 교회에서의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지 않고 끝까지 붙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보여 주시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고 믿음생활입니다.
두 번째는 유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의 두 번째는 인도하심입니다. 선택만 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이 감격스럽고 은혜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목적이 없는 은혜는 없습니다. 은혜 그 자체가 소명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선택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획이 있으셔서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꽉 붙드셔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디로 이끌던지 하나님의 큰 계획을 가지고 인도 하시는데 이때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과 순종입니다. 그래서 나의 판단과 생각보다는 주님의 계획이 훨씬 훌륭하고 아름답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인도를 따라갈 때 유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한 평화와 자유를 누리게 된 것처럼 우리들도 더 이상 유리하고 방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 신앙의 길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방황하고 고생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의 인도하심을 올바로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기에 있기를 원하시는데 저기로 갈 때 주님은 이 길로 행하기를 원하시는데 저 길로 행하게 될 때 그때 거기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시련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하나님의 유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보호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유리하던 소수의 아람민족이었는데 다른 민족에 의해서 한 번에 멸절될 수도 있었는데 고비고비 위기를 넘기면서 강한 번식력을 주셔서 많은 백성들이 태어나도록 민족을 붉히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들어가게 만드시고 애굽에서 그 민족들이 계속 번성해서 가정이 들어가서 민족이 되게끔 만드셨습니다. 한 나라를 이루기에 적합할 만큼의 숫자가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시키셔서 그래서 광야의 길을 지나 가나안을 유업으로 얻게 하셨는데 여러분도 아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한 이후로 일찍이 애굽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수많은 환란과 전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끔찍한 환란과 전쟁 그 많은 고통을 다 겪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큰 팔고 능력이 있는 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시던 하나님의 보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고백 속에서 자신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을 독수리가 자신의 세끼를 업어 나른 것 같았다고 고백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유리하던 아람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한 민족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의 역사를 오늘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백성된 사실에 비추어 보고자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선택해 주셔서 우리로 예수 믿을 마음만 갖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내버려 두셨더라면 우리는 아마 지금쯤 가졌던 신앙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크신 사랑과 은총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끄셔서 살아온 결과 오늘 우리들이 여기에서 만나게 되었고 앞으로는 우리의 인생이 어찌될지 알 수 없지만 여기에 만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섬길 소명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회상할 때 우연히 살아온 것 같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먼저 철길처럼 깔고 우리를 그길 따라 인도하셨다는 신비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이었습니까? 지난 한 해 동안도 우리는 신앙의 손해를 받을 만한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가난과 시련, 근심과 걱정은 물론이고 풍요와 넉넉함 속에서 은혜로부터 부패할 위험들도 많았습니다. 주님이 만약에 우리의 의지대로만 하라고 맡겨두셨다면 아마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도 많이 주님께로부터 미끄러지고 악을 행하고 불순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우리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세균 속에 에워싸여 살면서도 면역력으로 그것을 이기며 사는 것처럼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가 면역체가 되어서 그래서 우리가 그 모든 시련과 고난도 이기고 고통도 이기면서 주님 앞에 살 수 있었고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고난이 오면 올수록 더욱더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여야 할 바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모든 선택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회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질 때마다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방황하며 살 때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였는지를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회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분수를 알게끔 만들어 주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만들어 주어서 우리의 분수에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끔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사랑을 생각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밖에 있어서 방황하고 유리하던 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안에서 나를 선택하시고 인도하고 보호해주신 주님의 크신 사람을 찬송하면서 그래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단 하루라도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셨을까?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나를 창조하시고 이제껏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은혜를 주신 우리 하나님께 보탬과 도움이 되는 삶일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생각하고 돌아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