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녹취자: 이 솔
I. 본문해설
이제는 목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대답할 만한 나이도 되었고 경험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목회를 하기 위해서 여기에서 공부하고 계십니다. 혹시 선교를 하기 위해 여기에서 훈련을 받고 계시다고 하더라도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럼 목회란 무엇일까요? 목회라는 그림은 아주 쉽게 교인들을 신방하고 설교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교회를 건축하고 디자인하고 미래의 교회에 계획을 세우는 일에 이르기까지 어마어마한 스텍트럼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목회에 본질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럼 목회의 본질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목회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걸 하려고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설명에 따르면 전도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양이란 하나님을 이미 사랑하는 사람들을 좀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신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결혼과 매우 유사합니다. 결혼할 때에 사랑하지 않은데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사랑은 결혼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결혼생활을 지속하면서 계속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일은 쉽지만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인류는 추상명사고 한사람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는 예전에도 하나님을 사랑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목회가 왜 그렇게 힘든지 아십니까?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고 하니까 무엇인가가 안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기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안타깝고 그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인도하고 싶은 것입니다.
소명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소명을 받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각자의 주관적인 체험입니다. 객관적으로 중요한 것은 소명을 받은 사람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여야 합니다. 그래서 소명을 받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도저히 이 세상에서 다른 직업을 갖고는 살수가 없어서 그래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그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 소명이 평신도의 소명과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의무는 목회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평신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질의 차이라기보다는 수준의 차이입니다. 동질의 것이지만 목회자는 그것을 보다 더 심오한 차원에서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강제력에 붙들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II. 목회란 무엇인가?
그럼 오늘 첫 번째 말씀드릴 작은 명제는 이것입니다. 목회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점점 더’(μᾶλλον καὶ μᾶλλον) 라는 것은 그야말로 점점 더 정도를 더해서 어제 하나님을 사랑한 것보다 오늘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풍성하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어로 ‘페리쉬에’(περισσεύῃ)인데, 무언가 울타리 커다란 용기에 물을 부으면 물이 꽉 차고 꽉찬 후에 더 부으면 그 울타리를 넘어가버립니다. 그런 동작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한 시인의 고백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많이 부어졌는지 경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흘러 넘쳐서 바깥으로 쏟아지고 있는 그 모습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목회란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그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랑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가 ‘헤 아가페’입니다. 문자적으로 하면 그 사랑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인도주의적인 사랑이 아니라 온 인류가 돌아가야 할 단 하나의 사랑 그것이 바로 ‘헤 아가페’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사람들에게 넘치게 되는 그것이 바로 목회의 목표입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큰 교회를 하거나 아니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거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자신의 말씀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계속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회개해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 이것이 목회자의 영광입니다.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없습니다.
III. 사랑이 풍성해지는 길
두 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목회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러면 무엇을 수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이런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그것은 오늘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모든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라고 말합니다.
A. 지식(ἐπίγνωσις)
여기서 지식은 그리스어로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입니다. ‘에피’와 ‘그노시스’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사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입니다. 사물에 대한 정확하고 철저한 지식입니다.
한번 이 질문에 답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에 시간적인 순서로 말할 수 없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 창조된 세계가 먼저이겠습니까, 창조하실 하나님의 지식이 먼저 있었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하나님의 관념 안에 이 모든 창조하실 만물에 대한 지식과 만물들이 서로 맺게 될 관계에 대한 지식이 함께 있었습니다. 모든 지식의 근거는 하나님 자신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자신에 있는 사물에 대한 관념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의 관념 안에서는 모든 만물들이 하나 하나를 아실뿐 아니라 모든 만물들이 관계가 없는 사물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호 연관을 갖고 있고 그 연관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독특한 질서로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해서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당신의 장중에 넣고 다스리시기를 들에 핀 한 송이 백합화와 공중에 나는 새부터 시작해서 인간과 온 우주의 이르기까지 그분의 주권 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에피그노시스 라는 말은 사물에 대한 철저하고 완전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모든 창조된 사물은 창조한 하나님의 관념에 기초하고 따라서 창조된 모든 것들은 그 관념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학문이 무엇이던지 간에 올바르게 공부한다면 헤르만 바빙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결국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들이 배우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목회라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목회 행위는 그러한 일들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것이 지식입니다. 사물에 대한 지식. 자연적인 지식부터 시작해서 저 멀리 신령한 세계에 이르는 지식까지 그 모든 보편적이고 개별적이고 추상적인 구체적인 사물에 이르기까지 그 사물에 대한 지식을 정확하게 전달함으로써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그럼으로써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목회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우선 철저한 학문입니다. 그래서 특히 목회를 하는 모든 사람이 목회하면서 그 엄청난 학문에 자신을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목회하면서 끊임없이 죽는 날까지 공부를 해야 하고 그 두 가지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은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학문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이때에는 사정 볼 것 없이 자신을 학문에 깊이 헌신해서 그래서 어떻게 이 모든 이 세상의 사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지를 터득하고 배워야합니다. 그리고 더욱이 하나님에 대해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성경과 성경과 아주 직접 연결되어 있는 신학의 분야들에 대해서 아주 철저하게 공부하려고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독서하기가 싫으십니까? 목회의 소명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공부하지 않는 것은 매우 악한 것입니다. 매우 악한 것이고 미래에 자신에게서 목양을 받을 많은 사람들의 영혼에 매우 나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설교하러 올라갔을 때 여러분은 이런 것을 느낀 적이 없습니까? 뭐가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저 사람은 과연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정돈해서 알고 있을까? 라는 느낌. 그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개별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어떤 특정한 사실에 대해서 개별적인 지식이 너무 없는 경우입니다. 공부를 너무 안 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공부를 많이 했는데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부한 것을 통합해서 묶어줄 수 있는 방식에 훈련이 안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 지식은 다른 공부와 다릅니다. 수학을 전공한 교수가 수학적으로 살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신학적으로 살지 않으면 그 지식은 자기가 어디 가서 설파할 수 있는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신학적인 사실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인격에 묶으면서 그렇게 자기화 시키는 가운데 진리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주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실천적인 것들만 공부하지 말고 이론적인 것들 열심히 공부해서 사상의 토양을 만들어야 합니다.
왜 목회가 공부를 많이 한 것과 상관이 없을까? 이런 의문을 저는 신학교 다닐 때 많이 했습니다. 그것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공부를 많이 한 것과 목회를 잘하는 것이 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매우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화이트리스트에서 우리나라를 배제하고 그리고 몇 가지 물건을 팔지 않기로 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재를 가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을 문제없이 극복을 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를 전공해서 십년씩 공부해서 박사 논문을 쓰는 것은 비유하자면 아주 훌륭한 부품 생산업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는 그 부품 어느 특정한 부품을 잘 만드는 것이 목회가 아니라 여러 부품업자가 생산한 부품들을 갖다가 조합을 해서 새로운 디바이스를 만드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그런 부품업자 기질이 아주 잘 맞습니다. 그래서 몇 대째 기가 막힌 부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LG나 삼성은 처음부터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런 부품을 잘 만들기 위해서 투자하기 보다는 만들어야 하는 것도 있지만 그런 부품을 아주 기가 막히게 생산하는 것과 그 부품을 조합해서 새로운 디바이스를 만드는 것은 완전히 필드가 다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학자들이 생산한 부품들을 자기 목적에 맞게 어셈블리 해서 목회라는 새로운 디바이스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만을 전공하는 것이 목회에 큰 도움이 안 되는 이유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목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 식의 공부가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덜 깊으면서 넓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서로 묶어내야 합니다. A를 만드는 부품업자는 C라는 부품에 대해서 거의 몰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부품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번에 737맥스 보잉 항공기 같은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비록 직접 내가 직접 부품을 만들지 못하지만 그 부품을 보면서 써도 되는지 안 써도 되는지 분별할 줄 아는 부품의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칭의에 대해서 10년을 공부하고 온 학자를 목회자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분들에게 머리 숙이고 배워야 합니다. 존중해고. 후원도 해드리고. 그렇지만 그것을 일정부분 알면 됩니다. 더 깊은 것은 개인적으로 여쭈어보거나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올바르지 않은 것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라는 디바이스를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공부하라고 하니까 휙하고 유학을 가버립니다. 가서 10년 동안 그리스어 단어 하나 가지고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따갔고 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방향에 있어서 이바지 할 수 있습니다. 목회를 잘할 의도가 있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공부하는 방향으로 잡으면 안 됩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폭넓게 아주 깊이 읽으면서 학문에 정진해야 합니다. 한 학기에 한 키의 책은 읽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공부하다가 쓰러질 때 까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를 빌려서 여러분들에게 약속합니다. 혹시 공부하다가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모든 후원을 열린교회가 책임지겠습니다.
B. 총명(αἴσθησις)
두 번째는 총명입니다. 모든 총명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모든’이라는 말은 깊이 보다는 범위에 관계된 것입니다. 여기서 ‘총명’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로 ‘아이스데시스’(αἴσθησις)라는 단어입니다. 현대 그리스어 성경에는 ‘노에시스’라고 되어있고 노에시스는 누수(nus)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말입니다. 아이스데시스는 아주 쉽게 말하면 ‘아이스다노마인’이라는 두려워하다는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아이스데시스는 많은 논의가 필요한데 간략하게 결론만 말하면 아이스데시스는 이성의 추론을 통해서 얻는 지식이 아니라 통찰을 통해서 획득되는 판단력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초의 인간에게 두 가지 지식의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두 가지 지식의 가능성은 하나는 이성이고 또 하나는 신앙입니다. 이성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의해서 우리들이 사물을 아는 체계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지식이라고 부르고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것을 사변적 지식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변적 지식과 반대되는 것이 초월적 지식입니다. 그런 초월적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에 설명에 따르면 이성의 작용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추론적인 지식이지만 이런 총명은 아주 쉽게 말하면 변증적인 지식입니다. 번쩍하는 빛으로 이성을 넘어서는 초월적 지식들이 한사람의 지성 속에 수납이 되는 것입니다. 수납된 것을 기초로 이성적으로 추론을 하면서 신학이라는 학문을 발전해 가는 것이 일생의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목회를 해서 말씀 사역을 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사물에 대한 철저하고 완전한 지식을 통해서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총명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제대로 알게 만들어주고 믿음을 갖게끔 만들어 줌으로써 그들이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그림을 그리시면 됩니다. 지식과 총명을 두 개의 장작이라고 보고 이 불이 계속 타는 그림을 그립니다. 이 타오르는 불길을 장작을 갖다 놓은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활활 타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보고 그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두 개의 장작이 있는데 하나는 에피그노시스고 하나는 아이스데시스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가연제가 없는데 불길이 솟을 수 없습니다. 가연제가 있다고 해서 불길이 솟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모든 의자는 가연제입니다. 그런데 불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불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있던 일처럼 장작이 놓여지고 거기서 불이 내리는 것입니다. 그 불이 계속 타오르는 것이 두 개의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IV. 목회의 목표
그러면 세 번째 그렇게 목회 활동을 하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을 못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A. 분별함
첫째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키마조’(δοκιμάζω)라는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무언가 시험을 해서 그 물체의 성질을 파악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지극히 선한 것’이라는 번역은 좋은 번역이 아니고 올바르게 번역을 하면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악인이라도 가치가 있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미학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흉악범들조차도 그 행위가 아름다운 것이 있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통해서 획득하고자 하는 목표가 아름답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 입장에서 보면 목회의 싸움은 진정으로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고 거기에 자기 자신을 불태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빨리 죽어도 오래 산 것이고, 그렇게 못 찾은 사람은 오래 살아도 짧게 산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지금 마음속에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인가, 그 가치를 생각하면서 가슴이 뛰어야 할 시기입니다. 목숨이라도 내어 놓을 만큼 내 인생을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그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과 정확히 부합하는 가치를 붙잡을 때 그가 인생을 올바른 방향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B. 진실함
둘째는, ‘진실하며’라고 말하는데 그리스어로 에일리크리네스(εἰλικρινής)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놓고 학자들은 두 가지의 해석을 말합니다. 첫째는 에일리크리네스 라는 단어가 에일로스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크리네스 단어는 판단입니다. 그래서 에일로스는 햇빛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이 단어는 ‘햇빛에 비춰본’이라는 뜻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짜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햇빛에 비춰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의 가능성은 이것을 엘리노스가 아니라 엘리아스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인데 엘리아스는 그리스어에서 곡식의 가루들을 털어내는 고운 체를 가리킵니다. ‘체의 걸러진’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의미가 다가옵니다.
여기서 ‘진실하다’라는 것은 진실하게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 그러한지를 진리의 빛에 비추어서 그래서 틀림없이 참되다는 것을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해석 중에 체를 쳐진 것은 크기가 구별할 수 없었는데 체를 치고 흔들어보니까 남은 것들은 굵은 것이고 떨어진 것은 고운 것들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해석 중에 어느 하나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적으로 진실이라는 것은 많은 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중세의 신학자들과 심지어 종교개혁자들에게 이르기까지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주제였습니다. 여러분 학교의 표어가 코람데오 로 문장이 되어 있습니다. 늘 보는 것이지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사람 앞에서와 하나님 앞에서가 항상 동등하다면 굳이 그런 구어가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참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수가 지지해줍니다. 그런데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보면 그것은 틀렸고 그리고 소수의 사람밖에 지지해주지 않아도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그렇게 갈라놓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을 비롯한 많은 교부는 이 ‘진실’이라는 덕목을 진리와 관련짓지 않고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즉 ‘베루스’, 곧‘진실’은 ‘베리타스’, 곧 ‘진리’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진실이란 객관적인 진리에 마음과 정신이 합치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를 진실하게끔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입니까? 진리이신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니까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기준을 삼고 사람이 보든지 안보든지 그 위에 자기 자신을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합치된 그 상태가 에일리크리네스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신앙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해야만 목회 성공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 자본주의적입니다. 내가 진실해지는 이유는 목회의 성공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써 존엄성과 자존심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지만 그러나 살아 숨 쉬는 한 하나님의 진리에 합당하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해해주든지 이해해주지 않던지 그것이 목회에 성공을 가져오든지 고난을 가져오든지 그것은 나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인들을 목양할 때 얼마나 높은 표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떻게 모든 교인을 24시간 감시할 수 있겠습니다. 각자 알아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든지 진실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신학교 때 거기 엎드려서 흘리는 눈물은 30년 동안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지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을 향한 몸부림이 깊이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C. 허물없음
마지막 세 번째는 ‘허물없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프로스코포스(ἀπρόσκοπος)라는 단어인데 ‘흠집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사과 하나에 이 만원 짜리도 있습니다. 이 만원 짜리 사과가 오천 원짜리 사과의 네 배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 만원 짜리보다 더 큰 사과가 만원에 팔릴 수도 있습니다. 이 만원 짜리 사과의 외관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어떠한 흠집이라도 없어야 합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아무리 커도 아무리 맛있어 벌래가 파먹은 적이 있는 그 과일은 극상품의 과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흠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흠은 무엇일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는 신학적인 흠, 윤리적인 흠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사람들이 흠이 있어도 그것을 별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는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주 중대하게 하나님에 나라를 훼방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의든 타의든 어떤 경우에든지 그 신학적인 순수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가르침이 아주 능란하지는 않지만 그의 가르침을 잘 따르면 성경이 말하는 신앙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그러한 신학적 순수성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윤리적인 순수성입니다. 우리 모두가 완전한 인간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는 죄를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윤리적으로 할 수 있는 한 흠이 없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사람들을 가르쳐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