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 50;19-21)
녹취자: 이 솔
요셉은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았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당했으나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요셉에게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나쁜 일도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신앙의 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일을 통해서만 아니라 나쁜 일을 바꾸셔서도 좋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오늘 요셉은 해를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요셉은 많은 고생을 했고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의 나쁜 일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을 때에 그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는데 이는 잊어버림이란 뜻입니다. 애굽에서 겪었던 많은 일들을 잊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그럴 정도로 잘못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그에게 악을 행하였습니다. 상인에게 팔았고 결국은 사랑받던 가족의 품을 떠나 생전 가보지 않은 나라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그는 충성을 다했습니다. 히브리에서 팔려온 정말 하찮은 종이였으나 그 집에서 보디발이 인정할 정도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에게 돌아온 것은 성추행범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던져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거기에 있는 전옥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 옥에 있는 모든 일을 맡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옥 속에서도 배반을 경험합니다. 술 맡은 장의 꿈을 해석해주었고 자신이 여기에 억울하게 갇혔다는 사실을 하소연했습니다. 술 맡은 장은 요셉을 감옥에서 내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는 요셉에게 받은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정말 그의 인생은 사랑하는 부모의 품을 떠난 이후부터 인생은 꼬일 대로 꼬였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 고통을 주었으니 인복도 없어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악과 배신을 당한 인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꾸셨습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선하신 분이기에 결코 악을 행하실 수가 없습니다. 모든 악은 인간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인간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악까지도 사용하셔서 그것까지 결국에는 선하게 바꾸셔서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어 갔던 사람이면 오늘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인생이 꼬이고 자신은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불행해졌고 자신은 복되기를 원했는데 외로웠기에 원하는 바와 다른 인생이 전개되었기에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야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눈으로 인생을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눈으로 인생을 보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무지합니다. 더욱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더욱 무지합니다. 결국은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근원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르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라는 것은 악입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무지라고 하는 것은 알지 않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 무지는 결국 인간을 한없이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때 불신자였을 때에는 무지했으나 신자가 된 이후로는 새로운 지식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모든 불행이 모든 생각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살았던 때에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태만한 모든 삶은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자기를 찾고 추구하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하찮게 생각했기 때문에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과거는 쉽게 잊어버리고 미래는 알지를 못합니다. 사람의 눈은 시간과 공간에 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미래에 대해서는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모여 있는 여러분들 중 언제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떠날지 하나님 앞에 미리 본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꼭 필요한 경우에는 아주 조금만 미래의 일을 부분적으로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미래를 보여주시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현재를 바꾸게 하기 위해서 미래의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미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부분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여러 선지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도 극히 일부분의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하나님은 미래에 대해서 안 보여주실까요? 보여주시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미래에 대해서 보여 주실 때 첫째, 미래의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미래에 나쁘게 될 것이라면 이미 그 일이 확정되었다면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잘될 것이라면 교만해질 것이고 안 될 것이라면 좌절하여 하나님 앞에 미끌어질 것이니 미래에 대해 알게 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시간과 공간 때문에 가려진 미래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미래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개방되어있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내가 비록 지금은 연약하나 열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강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지금은 시련을 당하고 있으나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면 어떻게 좋아질 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에 경험하고 있는 이 모든 나쁜 것들이 변하여 좋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인생은 알지 못하는 길의 연속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이 세계와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면 결국은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로 나를 인도하셔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할 것이라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볼 수 없어도 그분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기초로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을 내가 모두 이해할 수 없어도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신뢰하는 마음이고 따라서 사랑은 믿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서로 사랑하면 깊이 신뢰하고 그의 말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는 길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길도 있고 원하지 않는 길도 있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요셉의 많은 고난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를 기다리기 위해 준비시키신 그분의 섭리였습니다. 창세기 41장 46절과 4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애굽왕 바로 앞에 설 때에 30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일곱 해 풍년 해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 지라” 했습니다. 확실하게 정할 수는 없지만 어림잡아 성경의 문맥으로 짐작하건데 아마도 요셉은 17살쯤 되었을 때에 애굽에 팔려갔고 13년 동안을 보디발의 집에 11년 감옥에 2년 정도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 사람을 결국 바로 앞에 서게 하셔서 애굽의 국무총리로 삼으셨습니다. 당대에 그 땅에서는 가장 강력한 나라였고 어마어마한 부를 가진 광대한 영토였습니다. 사실 임금 바로는 자신도 고백했듯이 명목상의 왕이었고 나라의 실권은 이 요셉이 맡아서 모든 도와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안보 모든 문제를 주관하여 다루어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채색 옷이나 입고 아빠 무릎에서 사랑을 받으며 가끔 형들이 가축을 치는 그곳에 왔다갔다하던 그 소년이 17살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면 과연 그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표면을 보면 형들의 시기심 때문에 요셉이 팔려갔고 그 못된 여자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감옥에 투옥되었고 은혜를 모르는 술 맡은 관원장 때문에 그 오랜 세월을 감옥 속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풀려나지를 못 했지만 뒤집어서 보면 그 모든 과정이 한 지점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위 대장인 보디발의 큰 집에 처음에는 아주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종들 중에 가장 아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주어졌겠지요. 그러다가 점점 능력을 인정받고 충성심을 인정받아서 마지막에는 자기가 먹는 음식과 아내 이외에는 모두 요셉에게 맡겨서 그 시위대 장의 모든 집과 경제 담당하게 했고 미루어 보건데 그 정도 높은 지위에 있으니 정재계 인사들이 수시로 드나들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정치의 이치를 깨우치고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 혹독한 수련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 후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놀라운 것은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인간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훈련이 없었더라면 과연 남의 나라에서 끌려온 종이 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정치적인 대적관계에 있는 수많은 사람을 다룰 수가 있었을까요?
그렇게 철저하게 훈련되고 마지막에 억울한 처지에서도 참고 인내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본성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본성으로 한 것이었다면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을 불러내는 히브리서 11장에 그의 이름이 올라갔을 리가 없습니다. 그는 불굴의 믿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지혜로워졌고 하나님 때문에 대적들을 견디고 하나님 때문에 억울한 일들을 당하면서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순간순간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마 형들의 의해 팔려서 노예로 들어간 그 첫날 밤은 생각하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무슨 이유로 사랑하던 아버지 집에서 떠나와 이 남의 나라 땅에 노예로 팔리게 되었는지를 그가 설명할 수 있었을까요? 설명할 수 있었다면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당신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결코 선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후에 그것도 20세기 들어서 애굽의 고고학적인 발굴들이 이루어 졌습니다.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궁중의 문헌이 나왔는데 30세가 애굽의 공무담임권의 최소 연령이었습니다. 30살이 되어야 공직에 취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국무총리가 되는 그 지점을 정해놓으시고 그 일에 필요한 모든 도덕성, 인격, 그리고 행정,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것을 배우게 하시면서 그를 한 지점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당연히 만약에 그가 믿음으로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을 다하지 않았더라면 누명이나 벗겠다고 끊임없이 보디발의 아내를 향하여 고소하는 이야기나 하고 감옥 속에서 원망하고 한을 품으며 자살을 시도했더라면 결코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었겠지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때든지 이해할 수 없을 때에든지 믿음으로 살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형들은 이전에 요셉을 팔아버린 악한 일 때문에 그에게 보복을 당할까봐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의 거짓 유언을 지어내면서까지 요셉에게 용서를 받고자 하였다고 창세기 50장 17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37장 9절에는 형들이 와서 엎드리며 스스로 당신의 종들이라고 고백했는데 50장에 이것은 결국 창세기 37장 9절에 있었던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절하는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때에 요셉의 고백을 들어보시겠습니까? 2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날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소인배 같은 사람은 눈앞에 이익을 갖고 다투며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모든 사람과 원수가 됩니다. 그러나 대인배 같은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는 것입니다. 쉽게 사람과 원수를 맺지 않습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는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분명히 저 사람이 나에게 매우 나쁜 일을 했습니다. 내가 많은 손해를 봤고 때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쉽게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내가 지금은 아직 알 수 없는 어떤 방법으로 이 일들을 사용하셔서 결국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더 놀라운 당신의 뜻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당신 자신이 선이시기 때문에 악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분이 악을 행하신다면 자해하는 행동이 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그러실 수 없습니다. 모든 나쁜 것은 사람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만약 인간 때문에 생겨난 나쁜 것도 좋게 하실 수 없다면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리가 없습니다. 악인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악으로 악을 갚으며 악하게 살아서 또 다른 악을 낳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이 나쁜 것을 좋게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원수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죄 때문에 망가지지만 하나님은 죄 때문에 망가진 것을 고치셔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절망은 하나님에 자비로운 얼굴 앞에 살지 않으려고 하는 불신앙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요셉은 형제를 용서합니다. 자신을 팔아 애굽의 노예가 되게 만든 형들이었습니다. 이때에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지 9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을 때였습니다. 9년 동안 그는 부귀와 영화를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9년의 세월이 그렇게 영화로왔어도 그 이전에 사랑하는 부모로부터 떠나서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그 고통스러운 세월이 준 아픔을 그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팔아 노예가 되게 만든 그 형들에게 복수하는 대신 진심으로 용서하고 화해했습니다. 형들을 보고서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의 유언까지 거짓으로 지어내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나쁜 본성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용서할 수 있도록 바꾸어 놓은 것은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결코 자기를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해서 악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단련 받게 하시고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마지막에는 애굽을 다스릴 수 있는 국무총리 자리에 이르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섭리라는 측면에서 보면 형들이 행한 이 나쁜 악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건너간 징검다리와 같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의 너그러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그의 불타는 신앙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50장 19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눈물로 대답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겪은 모든 시련이 넓게 보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형들은 자신에게 악을 행했고 일평생 잊을 수 없는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무엇보다 더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던 아버지의 품에서 때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면서 그는 결국 뒤를 돌아다보니 왜 일어났는지 몰랐던 그 일이 결국 자신을 이렇게 애굽의 국무총리로 삼아 자신이 국무총리가 되지 않았더라면 죽어갔을 수많은 사람들을 건지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위로하고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돌보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맺힌 것을 가지고는 영혼이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사람들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아주 쉽게 원수를 맺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신이 멀리 던진 부메랑이 되어 멀리 가면 갈수록 돌아서 더 큰 힘으로 자신을 때리고야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복 받기를 원한다면 미워하던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더 높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보십시오. 눈에는 나빠 보이는 모든 일들을 통하여 결국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둠이 없이 빛이 무엇인지를 알 사람이 있을까요? 순간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과연 영혼(영원)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결국 현상적으로 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을 보여주시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악을 당해도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조차도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자신의 인생을 전체적인 하나님의 시야에서 자신의 인생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준 이 모든 형들의 죄를 용서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관점에서 넓은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인생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내가 비록 어떤 나쁜 처지에 있던지 내가 믿음으로 살면 이 나쁜 일들은 좋게 되기 위해서 꼭 필요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인생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인간이 나쁘게 만든 일도 좋게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붙잡히지 말고 오히려 그 현실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좋은 것은 결국 나쁘게 되는 길이고 하나님과 함께라면 나쁜 것들도 결국은 좋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기의 뜻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길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이런 생각만을 갖고 그 인고의 세월을 요셉이 견딜 수 있었을까요? 매일매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는 매일매일 믿음으로 살 수 있었고 그랬더니 수없이 나쁜 사람을 만났지만 그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올 한해를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모든 나쁜 것을 통해서도 좋게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