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8~11)
녹취자 : 구문회
Ⅰ. 본문해설
저는 이 시간에 목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목회라는 그림 속에는 설교와 심방부터 시작해서, 교회 건물을 짓고 심지어 문화 사역을 하는 일까지 광범위한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예전의 목회는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는데 현대사회의 목회는 너무 복잡하고 거의 천재를 요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곁가지들을 다 치고 나면 목회란 무엇인가는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쓸 때 사도는 이미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비밀을 깊이 터득하고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에 이 편지를 썼습니다. 이 구절과 11절, 물론 시간이 없어서 10절과 11절을 모두 못 하겠습니다. 10절만 다루려 합니다. 결국은 요약을 하자면 목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교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전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definition을 내리면서 “전도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명쾌하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러면 목회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사랑이 계속 불붙듯 타오르게 만드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목회의 성공 여부는 그가 (목회)한 교회의 규모나 그가 행한 업적이나 당대가 기억해주는 이름에 대한 기억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목회의 성공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사람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목회의 성패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점점 더 많이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서 오늘 본문에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했는데, 희랍어로 ‘카이 말론’, 정지된 개념이 아니라 점점 더 점증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로서 ‘이 빌립보 교인들이 어느 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제 내 목표는 성취되었다’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말론 카이 말론’ 그것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끝 날까지 점점 더 풍성하게 되는 것이 사도바울의 목회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동시대를 목회했고, 혹은 여러분들보다 좀 더 일찍 목회를 하고 이제 목회의 끝자락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목회 할 때에 정신을 집중해서 한 가지에 고정시키시기 바랍니다.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에 고정시키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돌보는 모든 양떼들이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하는 것,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어떤 목회자가 설교하고 말씀 사역을 할 때 교인들이 세상 사랑을 접고 하나님을 점점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 목회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냉담하기 그지없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변해 ‘말론 카이 말론’,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사랑’이라고 언급된 이 ‘헤 아가페’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헤 아가페’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굳이 그리스 철학에서 ‘에로스’와 ‘에피투미아’와 ‘스톨게’와 ‘아가페’의 구별을 우리들이 굳이 들먹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단수, 정관사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서방신학으로 들어가서 좀 더 그 연원을 살펴보면 이 아가페는 사실상 사랑을 포괄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원래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분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고유한 사랑이 하나님의 원천적인 사랑이라면, 죄인이 그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됨으로 갖게 되는 그 사랑도 또(한)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을 라틴어에서는 서방신학자들이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를 믿는 게 아닙니다. 내가 처음 예수를 믿게 된 것은 혼자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너무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그 동기가 ‘에로스’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은 믿음으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갔더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되니까 그 사랑이 너무 크고 놀랍기 때문에 자기는 잊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게끔 자기를 움직인 그 사랑과, 만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과,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자신이 갖게 된 사랑이, 그 사랑이 결국은 하나의 사랑 안에 있지만 서로 다른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 뒤에 있는 두 가지를 구별 없이 신약성경에서는 아가페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너희 사랑을”이라고 하는 (문장에서) 소유격이 ‘너희’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뭘 의미하냐면 어거스틴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것은 라틴어로 ‘까리따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갖게 된 사랑, 이 사랑은 놀랍게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를 이룹니다. 그래서 이 아가페의 사랑을 통해서,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아가페의 사랑을 통해서 성도가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여기서 말하는 ‘헤 아가페’인 것입니다. 이것이 ‘까리따스’(caritas)인데, 이 ‘까리따스’는 ‘아마레 데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마레 데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하나님이 이 온 인류를 하나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는 매우 긴 역사적인 논의가 있지만 생략하고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할 때 한 사람만 창조하고 나머지는 신체의 일부를 사용하시거나 생육의 방식으로 인류를 만드셨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큰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인류 전체를 하나의 몸으로 처음부터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17세기 개혁신학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원리를 이야기하면서 – 지금은 신학자들이 창념하지 않는 것인데 - ’본성적 연합‘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뭐냐하면 하나의 인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온 인류의 인성이 연합을 이루고 있고, 이 연합 때문에 인간은 존엄성을 갖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결국 육적 이스라엘을 통해서 마지막에 교회에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져 찢어졌던 사람들을 한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의 모델 케이스로서 주어진 것이고, 이 사랑이 expansion, 확장됨으로써 그것이 결국은 선교가 완성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 완성은 모든 인류가 하나의 몸처럼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완성된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이 말씀은 매우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목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갖게 하고, 그것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는 중간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두 번째로 넘어갑니다. 그럼 ‘왜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한결 같이 목회를 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사람들의 마음속에 풍성해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아가페가 사람들 속에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에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계속 논의를 끌고 가는데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여”라고 나옵니다. 지식과 총명이 도구가 되어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사람들 속에 사랑을 점점 더 크게 불러일으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주어진다고 에드워즈는 정리를 합니다. 첫 번째 방식이 physical한 방식입니다. 적합한 번역할 말이 없지만 저는 힘적인 방식으로 주어진다고 번역합니다. 이것은 중생이론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중생할 때 하나님이 동력적으로 그 사람의 영혼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슈네르기즘(synergism)이 아니라 하나님이 동력적으로 심으시고 그것을 받음으로써 사람은 중생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 존 오웬도 강조하고 있는 바인데 – 이것은 persuasion, 설득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란 엄밀하게 말하면, 전도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거듭나고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고, 목회는 그것을 포함해서 이미 믿은 사람까지 함께 있는 사람들 마음속에 사랑을 풍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자 심겨진 사랑을 위해서는 복음을 선명하게 전하고 성령의 역사를 기대해야 할 것이고, 후자를 위해서는 사랑의 저자이신 성령의 역사와 함께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지식과 총명으로”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지식’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희랍어로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아시다시피 ‘에피’는 무엇 무엇에 관하여 등등의 뜻이고, ‘그노시스’는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그노시스는 결국은 히브리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것이 ‘다하트’라고 하는 명사입니다. 아마 구약의 히브리어 단어 가운데 가장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는 10개의 단어를 고른다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가 ‘다하트’,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지식은 오늘날 정보화 시대에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분석적인 개념에서의 사물에 대한 information으로서의 지식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호세아 선지자가 호세아 4장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나도 그들을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하트’는 무엇인가 사물에 대한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 그 심오한 정신의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에피그노시스’라고 하는 것은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사물에 대해서 대충 아는 것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독사’(doxa)라고 불렀고, 사물을 끝까지 모두 알아서 그것을 자신의 말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에피스테메’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에피그노시스’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모양, 색깔, 크기 같은 것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그 사물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것이 다른 사물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철저한 지식입니다. 그 지식을 통해서 (사람들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불러 일으켜 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한번 생각해봅시다. 모든 사물들의 지식을 추적해 들어가게 되면 결국은 그것은 이 모든 사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여줄 것이며, 더욱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하였으니 그 모든 만물들을 실존하고 지탱하고 질서정연한 작용을 할 수 있도록 붙들고 있는 원리가 있을 것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 원리를 그리스도라고 본 것입니다. 결국은 이 모든 인간의 학문의 가능성은 이 모든 개별적인 사물들 속에 깃들여 있는 신적(神的)인 원리 때문에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학문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에피그노시스’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믿는 신앙의 어떤 사실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설교만 한다고 해서 항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점점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이 일들이 효과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 고민해야할 첫 번째 과제가 무엇을 설교하고 가르치든지, 그것이 영적인 사물이든지 아니면 또 다른 무형적 사물이든지 간에 그것을 철저하고 정확하게 가르칠 수 있는 ‘에피그노시스’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공부해야 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총명’이라고 했는데 희랍어로 ‘아이스데시스’라는 단어이고, 이 명사는 ‘아이스 다노마이’, ‘놀라다’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이 ‘아이스데시스’라는 단어가 현대 그리스어 성경에 보면 ‘노에시스’라고 나옵니다. ‘노에시스’는 지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전적으로 이 단어를 해석한다면 이 ‘아이스데시스’는 총명이라고 번역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오성(悟性)입니다. 그것도 데카르트와 칸트 이전의 고전 철학에서 이야기하던 오성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믿음도 이 오성의 기능에 속하는데 결국 이것은 자연적인 것을 뛰어넘어서 초자연적인 것들을 판단할 수 있는 감각, 혹은 능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틴어 벌게이트 성경에서는 이것을 ‘생수스’라고 번역했습니다. 결국은 ‘감각’이라는 뜻입니다. 이성은 어떤 사물의 원인과 결과를 추적해서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지만, 이런 ‘아이스데시스’는 한순간에 모든 논리를 뛰어 넘어서 진리를 포착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문제를 제기한 바와 같이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어느 순간에 행복해지면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에 대한 전(全)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선포될 때 ‘아! 저것이 진리구나’라고 하는 것을 인간이 어떻게 인식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처음 듣는 진리인데. 그러니까 무엇인가 그 사람 속에 그 진리를 진리로 알아볼 수 있는 그것을 주셨기 때문에 결국은 그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진리가 우리에게 전달될 때 우리는 그것을 (그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방식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결국은 사도바울이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을 풍성하게 한다”라고 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떤 사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 그리고 또 하나는 결국은 초월적으로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는 신령한 세계에 대한 지식을 포착하는 그 총명을 통해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 앞에 점점 더 풍성하게 된다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잊어버리시지 않기 위해서 그림을 그려드리자면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이것이 만약에 하나님에 대한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하면, 이 불길을 지속적으로 타오르게 하는 두 개의 장작이 놓여 있는데 그것이 하나는 ‘에피그노시스’이고 하나는 ‘아이스데시스’라고 하는 장작이 놓여서, 성령의 역사로 이것이 계속 타오르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사물에 대해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기준으로 그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잘 믿게 되는 작용이 일어날 때 사람들 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점점 더 뜨겁게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작용은 내가 하나의 수단으로서 저 사람에게 행할 것이 아니라 목회자 안에서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가 일어나서 하나님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계속 현실화될 때에 비로소 그는 보다 풍부한 ‘에피그노시스’와 보다 풍부한 ‘아이스데시스’로 가는 그 길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목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공부를 많이 한 것이 목회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에는 학문적으로 취득한 지식이 결국은 ‘에피그노시스’가 되고 저절로 ‘아이스데시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한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의 미래에 대해서 매우 불확실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한 우물을 파서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 일에 헌신했던 일본은 뒤쳐지고 있습니다. 이미 한국의 영리한 기업가들은 문제가 무엇인지를 빨리 파악했습니다. 왜냐면 미래의 산업은 훌륭한 부품을 생산하는 데 있는게 아니라 글로벌 사회에서 생산되는 이 부품을 경쟁을 통해 조달할 수 있고, 관건은 이것을 assembly해서 새로운 device를 만들어 내는 데에 미래의 산업의 청사진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측은 정확하게 맞았습니다.
하나의 논문을 10년 동안 쓰고 그것만 전공하는 세계적인 학자는 부품생산업자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그 부품을 모두 구해다가 조립을 해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이것을 조합을 할 때 부품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면 말도 안 되는 부품을 가져다가 조립을 해서 device 전체를 망가뜨립니다. 그게 바로 보잉사에서 이번에 나온 맥스737 기종이(의) 생산이 중단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100만개 가까운 부품으로 만들어지는데 몇 개의 부품이, 한두 개의 부품이(을) 불량을 썼기 때문에 벌써 500명 가까이 사람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죽고 보잉사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보상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겁니다. 우리는 부품 생산업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너무 부러워 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철저히 알고 어느 부품이 훌륭한 부품인지 파악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을 가지고 새로운 device를 만들어서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그런 회사처럼 우리가 목회 사역을 그렇게 감당하면서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일이 목회자가 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 문단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목회가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고, 그렇게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그러면 결국 목회는 무슨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문제를 답변하기 전에 먼저 사랑과 올바른 판단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개의 논리로 설명을 합니다. 그의 책 19권 29권 24권, 신학대전에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첫째는 진리가 있고 – 성령이 신자에게 진리를 주십니다. 그러면 두 번째, 이 진리를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신데 성령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성령 진리가 주어지고 결국은 그 진리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사랑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주고 이 지식은 우리에게 선한 성향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심으십니다. 이 올바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 사물들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지식과 사랑과 판단력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신자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이어가게 한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럼 목회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사도는 여기서 세 가지를 제시하는데 첫째는 분별함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분별하다’라고 쓰여진 단어가 ‘도키마조(δοκιμαζω)’라는 단어입니다. 무엇인가를 시험해 보아서 그것의 진실성을 입증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는 나무가 매우 귀하기 때문에 이미테이션이 많습니다. 저런 것들이 진짜 나무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요. 얼마나 흡사하게 만드는지 몰라요. 가장 좋은 방법은 칼로 한 번 북 긁어보는 겁니다. 그 때 진짜 나무 부스러기가 떨어지면 나무이지만 플라스틱 조각들이 쏟아지면 이미테이션입니다. 그렇게 시험해 보는 행위를 ‘도키마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피터 오브라이언이라고 하는 주석가는 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라는 이 구절이, 원래(의) 의미가 ‘많은 것들 중에서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뱅겔은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들 중 진짜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기독교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이 생겨나고 또 그 견해들 중에 어떤 것들은 다양성이라는 입장에서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지만 쓰레기와 같은 신학적인 견해들이 생겨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결국 우리들이 성도들을 길러내는 이유는 그들이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터튤리안이나 이레네우스나 어거스틴을 비롯해서 키프리아누스나 교부들이 한결 같이 행복론을 이야기 하면서 행복의 최대의 조건을 지혜에 두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지혜를 소유할 수 있고, 이 지혜 때문에 인간이 행복하게 된다는 것을 설파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논의들이 이미 사라져버린 때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인간이 현재, 잠시 어떠한 은혜의 체험을 하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사람의 인생을 궁극적으로 움직여 주는 것은 그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역사를 바라보느냐 하는 판단력이 그 일생 전체의 삶의 방향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목회의 목표는 그런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시간이 없어서 넘어가면 진실함입니다. 히랍어 성경에 ‘에일리크리네스’라고 되어있는데 이 단어는 ‘크리노’, ‘판단하다’라는 단어와 ‘에일리’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에일리’는 아마도 ‘에일레’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보고 이 ‘에일레’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해석은 이 ‘에일레’를 햇빛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햇빛에 비추어 판단한 이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그림이나 글씨, 제품 같은 것들이 위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햇빛에 비추어 봄으로써 사물의 진위를 판단했습니다. 또 하나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에일레’라는 단어를 가루 같은 것들을 걸러내는 채로 본 것입니다. 그럼 ‘에일리크리네’라는 단어는 이 ‘크리노’라는 단어는 어떤 가루를 비슷해 보이는 가루를 채에 넣어서 흔들어서 어떤 것들이 크기가 작은 것인지를 채질을 통해서 구분하는 거, 그렇게 걸러내는 작용을 ‘에일리크리네스’라고 보았고 이것을 여기서 진실함이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실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솔직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합치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진리에 합치한 상태를 가리켜서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진실은 성공과 이 세상의 행운 같은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마음으로서는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이런 질문에 답해 보십시오. 유능하나 진실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은 쓰실까요, 덜 유능하나 더 진실한 사람을 쓰실까요? 하나님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났을 때 그렇게 기뻐하신 이유는 그가 진실함이 아니었나요? 라틴어로 ‘베룸’이라고 부르는 이 단어는 ‘베리타스’, 즉 진리와 밀접하게 떨어질 수 없습니다. 결국 사도가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그들을 점점 더 사랑으로 풍성케 한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어떤 것이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이고 결정적이 아닌지를 올바르게 판단해서 인생을 낭비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진실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진리를 정확히 알고 사랑하고 자신의 모든 삶을 그 진리에 합치시켜서 살아가는 데서 하나님과의 교통의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 목회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제 허물이 없음인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 흠집이 없는 것, 과일 같은 것에서 흠집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사실로 적용이 되는데 하나는 신학적인 면에서 흠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즉 이 성경 전제가 가르치는 이 진리의 측면에서 결함이 있는 것을 가르치면 지금 당장 나타나는 효과는 어떨지 몰라도 혹은 그것이 눈에 보일 때는 좋을지 몰라도 결국은 그러한 가르침을 섭취한 사람이 잘못되게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최선을 다해서 목양에 있어서 신학적인 흠이 없도록 그렇게 말씀 사역을 해야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번째는 윤리적인 흠이 없도록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목회자가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목회자의 두 개의 기둥에서 나오는데 하나는 사상의 힘이고 하나는 윤리의 힘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하나되게끔 아치로 묶어주는 것이 은혜의 힘입니다. 이 세 가지의 연관 관계를 모르고 지식만을 주장하거나 윤리만을 주장하거나 은혜만을 주장하게 될 때 우리는 결국은 허물이 없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하는데 실패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순간에도 마지막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빌립보 교인들을 포함해서 모든 양떼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 속에서 점점 더 풍부해 지기를 원했고, 그 일을 위해서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그 일을 수행하려고 애썼습니다. 목표는 그렇게 하나님의 지식과 총명으로 충만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 분별하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었으니 우리 목회자들이 그 과업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에 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