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양식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4)
녹취자: 박윤정
아마 식사 때가 되었겠죠?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가르치시다가 시장하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아마 모두 함께 식사하기 위해서 먹을 것을 준비하러 제자들이 갔다 왔고, 드디어 음식이 준비되자 예수님께 드렸더니 예수님은 내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하나의 비유 혹은 은유였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영적인 진리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물질들을 자주 사용하셔서 설명하셨습니다. 예를 들자면, 4장에는 영생의 본질을 생수와 관련지어서 말씀하시고 또 당신이 우리의 영혼의 생존에 얼마나 필요하신지를 당신 자신을 떡으로 설명하셨고, 우리와 당신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떨어질 수 없는 생명적인 관계인지를 살과 피의 이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이 온몸이 성해도 빛이 없다면 눈먼 사람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사실을 8장에서 빛으로 설명하셨고, 6장에서는 당신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에게는 또 다른 양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런 공식이 성립합니다. “양식과 육체에 대한 관계에는 하나님의 일하는 것과 ( )과의 관계와 같다.” 그럼 마지막 오른쪽 항에 있는 괄호가 무엇이 될까요? 그것은 영혼입니다. 음식의 육체에 대한 관계는 하나님 일하는 것과 영혼의 관계와 같다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에 음식이 필요하듯이 영혼에는 하나님의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을 두 개를 함께 섞어서 말씀하심으로 짧게 보면 헷갈리게 말씀하시지만 깊게 보면 오히려 영적인 측면의 교훈이 육체와 물질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해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화법이었습니다. 그 특징을 본다면 아주 이 구절은 명쾌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구절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얼핏 보면 우리가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3장 14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첫 번째 이유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 부르셨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자녀로 당신의 품에 불러들이신 것은 그냥 우리가 모두 그 안에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은혜로 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을 물에서 건져놓고 내가 너를 은혜로 건졌다고 말하고 그러니까 이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게 은혜일 수 없습니다. 건져준 그 사람은 보따리를 갖기 위해 사람을 건져준 셈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명하고 운운하고 이야기하지만 이건 구원에 대한 대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우리가 생각하는 사명에 대한 것은 다분히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건져내신 것은 우리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생각과 너무 찢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의무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나마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막 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래저래 불행한데 결국 일하는 것이 토대는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세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그렇게 동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멀리 오는, 어깨가 축 처지고 굶주린 불쌍한 아들을 보고 눈이 번쩍 띄는 것 같았을 때의 느낌이 요새 인건비도 비싼데 일꾼 하나 보탰구나! 그런 마음이겠습니까? 물론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놀고먹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놀고먹으면 아버지가 아들을 가만 안 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버지가 한사람 품삯을 위해 그것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놀고먹는 아들의 삶이 행복할 수 없고 미래를 위해서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간에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게 하지 않겠어요? 잔치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해서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그대로 우리의 구원에 대입해 보세요. 당연히 하나님은 여러분이 놀고먹는 걸 원치 않아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에 축이 나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면 여러분들이 행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명도 없고, 자기가 왜 인간으로 태어났는지 그리고 왜 신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것도 부르심도 없고, 교회에서 녹은 먹고 있지만 자기의 의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엇을 위해서 여기서 일하는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안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걸 그냥 내버려 두면 그 사람 자신이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이야 누가 한 사람이 그 일을 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그릇되겠습니까? 물론 우리에게는 그런 긴장도 필요하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죽기 이틀 전에 자기를 염려한 친구에게 답장을 쓰면서 그랬습니다. “나는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한 사람의 천한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여러 번역이 이상하게 되어있는데, 그때 그 그림이 뭐냐면 존 웍스가 타고 다니던 그런 겔리선입니다. 노예선. 그 밑에서 노예들이 북에 맞춰서 노를 젓는데 고도의 훈련을 해서 이 노를 젓는 거로 전후좌우로 움직이고 이러면서 전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예에 불과하다 그러니 나 하나가 죽은들 그리스도의 교회에 무슨 커다란 손해가 있겠느냐 이런 식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보면 나 없어서 뭐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먹은 생각이 바로 그러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것을 나의 양식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는 것과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복한 삶은 안 이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지 열심히 알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 사랑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동거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양식이라고 번역된 것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도 이야기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부로마’라는 단어입니다. 부로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이게 원래 의미는 양식이 아니라 먹는 행동, 먹는 행위입니다. 취식. 그러다 이것이 계속 뜻이 추가, 변화하면서 결국에는 먹을 행동에서 먹을 것으로 의미가 변천되었습니다. 이게 완전한 먹을 것, 먹을거리, 먹거리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고 먹을거리가 그 의미가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나의 양식은, 나의 먹을거리는 육체의 생존을 위해서 너희가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나를 살게 하는 먹을거리가 있는데 그것은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면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그의 뜻이라는 단어와 그의 일이라는 단어가 모두 단수로 나옵니다. 그래서 ‘토 엘레마’, 그다음에 ‘타 엘레곤’ 둘 다 뜻과 일이란 단어가 모두 단수로 등장합니다. 결국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위해 양식을 드셨지만, 그의 영혼은 그 양식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그의 영혼에 생명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텔레마’라는 단어는 신비한 단어입니다. 모두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언제나 단수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경륜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고, 그다음에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시고, 만물을 창조하고,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시고, 마지막에 그 모든 인류와 만물을 완성하시는 그 전체의 하나의 프로젝트를, 플랜을, 그 자체를 뜻이라고 보는 이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서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걸 놓고 어떤 사람이 만민구원론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그것이라기보다는 마지막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는 당신이 원하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결국 구원에 이르는 그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여기에서 계시가 되는 의지와 그의 고요한 의지 사이에 그런 구별 같은 번쇄철학적인 논의들도 들어오는데 아무튼 결국 하나님의 그 뜻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 질문하겠습니다. 그럼 당신 혼자 일하시지 왜 제자들을 뽑으셔서 그들을 사도 삼으셔서 일평생 데리고 다니시고, 마치 당신에게는 힘이 모자라는 것처럼 그들과 함께 사역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는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당신 자신이 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동시에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그 경륜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도록 이바지하며 살아야 할 인간의 참된 모본을 함께 보여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예수그리스도만 그 뜻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제자들도 그 뜻을 위해 살았고 오늘 우리도 그 뜻을 위해 사는 것이 됩니다.
뒤에 나오는 일이라는 단어는 ‘에르곤’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에너지라는 말도 오고, 에네르기아라는 말도 옵니다. 일입니다, 일. 그냥 일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입니다. 결국은 이것은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룬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그분이 만들어 작정하신 경륜이 있고, 그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실 때 당신이 그 일을 그리스도와 모든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그 일들, 더 넓게 말하면 불신자까지 사용하셔서 당신의 그 일들을 이 세상에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온전히 이룬다고 했는데, 그것은 결국은 ‘텔레이 오시’인데, ‘텔로스’라는 명사와 관련됩니다. 텔로스는 목적입니다. 텔레올로지라고 하면 목적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목적을 완성해가는 것. 어린아이에게 이 말을 쓰면 성장하는 것,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이러한 우연으로 가득 차 보이는 이 역사가 뚜렷한 하나님의 뜻(경륜)이 있고, 그 경륜을 하나님이 이루어가실 때 이 역사를 사용하셔서 역사 속에 있는 인간을 사용하셔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자신도 모르는 채 하나님에게 사용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뜻을 알고 하나님에게 사용되게 하셔서 결국은 이 역사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최종적인 목표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루어가는 그 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다 이루어질 때 마지막에 인류의 최종적 완성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일이 이루어지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반드시 목표를 달성합니다. 더 훌륭한 지도자는 목표까지 이르는 과정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무능한 리더는 결코 목표를 달성 못 합니다. 훌륭한 리더는 목표를 달성합니다. 더 훌륭한 리더는 목표까지 가는 시간을 추억이 되게 만듭니다. 환상적인 리더죠. 목표를 향해 가는 그 순간이 찬란하게 빛나고 심지어 함께 가는 사람들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도 행복하다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목표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사용하셔서 그렇게 당신의 위대한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예수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서 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 밥을 먹을 욕구도 잊을 정도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는 것에 기쁨을 갖게 했을까? 그게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 이게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 구절에 보면 답이 나옵니다. 우리 같이 읽어봅시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요 4:35-36)”
이 세상에서는 씨를 뿌려도 금방 나지 않습니다. 뿌리면 싹이 나고 줄기, 가지가 나고 열매가 매달리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예를 들어 벼를 4월쯤 심었다고 한다면 거두려면 9월 말 정도가 돼야 합니다. 5개월 정도를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뿌려졌고, 뿌리자마자 밭이 희어진 것입니다. 한쪽에서 뿌리면서 뿌리자마자 희어져 추수하게 되는 곡식들이 낫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뿌리고 자라고 거두는 이것의 원리는 똑같은데 뿌리자마자 거둘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하나님의 나라가 뿌리고 거두는 사이에 간격 없이 막 뿌리면서 거두어지고, 거두면서 뿌리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놀라운 축복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관심사가 뭐였다는 것입니까? 원리는 가깝게는 예수그리스도가 생각하시는 그 뜻을 행하고 그 궁극적인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것이 결국은 가깝게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영혼들을 추수하는 그 기쁨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놀라운 열심을 품으며 하나님 앞에 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에 책 한 권을 읽었는데 ‘하버드의 새벽 4시 30분’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썼는데 그 책의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버드 학생들은 실제로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데 하버드 졸업생들은 실질적으로 대우도 엄청나게 다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신감의 원천의 비결을 많은 사람은 수제성에서 꼽는다는 것입니다. 하버드 들어갈 정도가 되면. 그런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하버드에 들어온 학생은 물론 우수하긴 하지만 하버드에서는 결코 우수성이 수치상으로 입증된 사람만 뽑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가 총신 총장님으로 지내시던 김의원 박사님 이야기입니다. 조카가 여럿 있었는데 다 똑똑해서 아이비리그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중 하나가 쳐지는 조카가 있었습니다. 친구가 하버드에 있어서 만나기 위해서 하버드 캠퍼스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시간이 아직 안되어서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창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안경 쓰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너 이리 좀 와봐” 그래서 갔더니 “너 여기서 뭐하냐?” “아직 친구를 기다려요.” 이렇게 보더니 “여기는 학교 입학처 사무실 앞인데 네가 계속 서 있어서 혹시 우리 학교 지원서를 내러 왔나 난 그렇게 생각했다. 너는 뭐 하는 사람이냐?” “저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고졸자입니다.” “그래? 그럼 우리 학교 원서 한번 좀 내볼래?” 그래서 “할머니 저는 공부를 그렇게 썩 잘하지도 못하고,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어마어마한 학비를 낼 형평이 되지 못합니다.”라고 했더니 할머니가 안경을 싹 벗더니 “공부야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판단하고, 그리고 들어와서 공부를 못하면 당연히 학교가 너를 내보낼 것이고, 돈은 우리 학교에 얼마든지 있으니까 네가 자격이 된다면 돈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러더니 쭉 찢어서 써서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엉겁결에 와서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했는데, 몇 가지 절차를 밟았는지 모르겠지만 면접을 보러 왔다고 합니다. 면접관이 “넌 꿈이 뭐냐?”라고 물어봤는데 “저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는데, 미국 최대의 이탈리안 체인을 만들어서 경영해보고 싶다.”라고 하면서 비전을 죽 이야기하더랍니다. 그러고서 합격했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 식구들이 저게 1학기 안에 쫓겨나겠지. 그랬답니다. 그런데 버텼습니다.
그런데 그분 이야기가, 그 책 저자의 이야기가 뭐냐면 절대 하버드생은 바깥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방식으로 수제를 불러 모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 들어온 사람들은 어느 방면에서 뛰어난 학생들인 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수제만의 결합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논쟁하고자 하는 건 뭐냐면 훌륭한 학생들이 들어오는 건 맞지만 그것만이 하버드 학생들이 자신감을 갖는 비결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뭐냐? 4년간의 하버드 생활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 학교에 와서 삼삼오오 앉아서 쉬는 시간에 모여서 떠드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수건 학생이건 간에 모두 자투리 시간에 책을 본다는 것입니다. 식당에 가면 밥을 먹으면서 여기에 이렇게 써놓은 책이나 노트를 계속 보면서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교수 한 사람이 하버드 4년을 버티기 위해서는 적어도 4년 동안은 일광욕하러 갈 시간은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탐구하고, 사색하고 토론하고 결론을 만들어내고 하는 일들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하는 것입니다.
새벽 4시 반이라는 게 무슨 뜻이냐면 새벽 4시 반에 도서관이 환하게 불이 밝혀있습니다. 밤새도록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자의 분석은 이것입니다. 뛰어난 학생들이 모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들의 자신감의 비결은 4년 동안 미친 듯이 공부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신감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내가 아는 하버드 출신의 한 목사는 거기에서 공부했는데 어떤 주제를 가지고 에세이를 쓰다가 그 주제에 가서 언급한 세계의 학자가 43명이 있는데 41명까지 조사를 하고 에세이를 냈더니 두 사람이 빠졌다고 리포트를 돌려주더랍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철저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저는 지금 그런 학문에 불을 태우고 하는 거야 이제 접을 나이가 됐지만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통찰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정확하게 사실입니다. 내가 만난 동역자들 가운데 자신이 넘치는 사람은 경건이 모자라서 자신이 넘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감이 아니잖습니까? 오만이지. 자신감은 좋은 뜻이란 말입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모든 사람은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무엇이냐면 오늘 이 말씀만 드리고 말씀을 마치려고 하는데 우리가 맥아리가 없는 삶을 살고 힘이 없고, 자신감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무슨 자신감도 없고 결국은 이런 사역을 하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은 매일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그런 슬럼프에 빠져본 적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잘 치유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어거스틴의 설명은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굉장히 주의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순종하는 게 먼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어거스틴이 은혜 없는 순종을 생각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의지론을 생각해보세요. 결국은 이유야 어쨌든 간에 삶의 태도를 바꾸는, 순종하면 마음이 정돈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진리가 파악되고 이렇게 가는 순서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은 성실하게 부지런히 우리에게 맡겨진 그 사명을 열심히 성실하게 감당해 나가는 데서 모든 자신감이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겸손도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바로 그 열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자기를 다 버려서라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보셨잖습니까? 그러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끌려가실 때 베드로가 칼로 말고의 귀를 자르잖아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칼을 집에 넣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입에 달고 사셨던 말씀이 “기록된바, 기록된바” 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어찌 이루어지겠느냐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말도 되지 않게 당신은 세례를 받으십니다. 죄인이 용서받는 표시인데 당신이 세례를 받으십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열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