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의 모본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 20;31)
녹취자: 이 솔
I. 본문해설
사도 바울 자신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 목회자의 심정으로 볼 때 아마 사도 바울이 사역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마도 이 에베소에서 목회했던 시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이제 사도가 이미 고백하는 바와 같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당하게 되었던 많은 유대인의 간계와 핍박에서 겪었던 모든 겸손과 눈물들이 넘친 기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돌아다니면서 사역을 하던 바울이 이 에베소에서 약 3년 동안을 머물면서 고정된 곳에서 목회를 하기 시작합니다. 두란노라는 곳에서 가르쳤는데 원래 거기는 철학을 토론하는, 말하자면 공회당이었습니다. (이 기간은 사도 바울이) 많은 사람에게 박식한 학문과 투철한 복음의 정신으로 신자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던 기간입니다. 어디에도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장기간 머물며 목회를 한 적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 점에서 고난이 많았지만 넘치도록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죽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이게 마지막 전도 여행이라고 하는 심정을 갖게끔 만들어 주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이제 사도 바울이 떠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던 것은 이제 자신이 떠나가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가 이미 눈에 환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떠난 후에는 사나운 이리가 와서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고 또 어그러진 사람들이 나타날 줄 안다고 하였으니 이건 교회 안에서의 변절이기도 하고 교회 바깥으로 오는 핍박이나 혹은 또 세속화에 대한 위협을 함께 경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가 사람을 꽉 붙들고 은혜의 영향을 끼치고 있을 때에 잘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목회자가) 떠나고 나면은 모든 상황이 어려워질 것을 이미 바라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가야 했습니다. 만난 사람은 반드시 언젠가는 헤어지도록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되어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침에 이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에 깊이 은혜로 다가왔던 것은 바울이 바로 이 31절에서 자기가 어떤 방식으로 이 에베소에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섬겼는가 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으로 압축되어서 나타나는 것이죠. 그것을 간략하게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므로 어려운 때 여러분들이 어떻게 영혼들을 돌봐야 할지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이곳에서 사도 바울의 사역의 핵심은 훈계였습니다. 훈계라고 우리말로 번역이 되었지만 쉽게 그리스어 성경에는 ‘누대톤’이라는 분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누대 태오’라는 동사에서 온 분사인데 이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누스’와 ‘티대미’라는 동사가 합쳐진 것입니다. ‘누스’는 여러 차례 설명을 드렸으니까 인간의 정신을 가리키는 거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티대미’는 놓다, 두다, 보관하다 그런 뜻입니다. 평범한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말의 의미를 보면 누스 티대미, 정신을 바탕이 있어야 할 곳에 놓게 해주는 것이 훈계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훈계밖에 없어서 훈계라는 말을 썼지만, 이 누스 티대미 단어의 뜻을 충분히 다 담지 못합니다. 언어의 한계입니다. 의미가 그런 겁니다. 이런 거 아닐까요. 대화를 나누고 또 많은 이야기를 누가 합니다. 그래서 듣습니다. 근데 그냥 그저 그렇습니다. 즐거운 얘기도 있고 뭐 별로 안 그런 이야기도 있지만 그냥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는 듣고 나면 정신이 바짝 납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그게 훈계입니다.
이 훈계라고 하는 말은 결국은 사도 바울이 이것이 정통적인 신앙이라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그냥 설교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설교의 목적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성도의 정신을 제자리에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목양이 안 됩니다. (신자가)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이 자신의 마음에 감동시켜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정신이 제자리에 돌아오는 것. 그럼으로써 지혜를 갖게 되고 올바른 판단력을 갖게 되고 그럼으로써 결국은 그 정신의 작용이 사람과 화합하여 하나의 경건이 됩니다. 그것이 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목회할 때에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서 사역에 성공의 비결이 두란노에서 말씀을 강론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근데 말씀을 강론하는 것만으로써 그런 사역의 성공을 거두었을까요? 아닙니다. 말씀 사역을 했는데 누스 티대미. 정신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그 훈계가 그 사람들을 제자리에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이르기 전에 그 도시의 정신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세요. 기본적으로 거기는 많은 신을 섬기던 다신의 도시였습니다. 가보시면 알지만 어마어마한 국제 항구가 있고, 그 항구 앞에는 2000여 년이 지났는데 어마어마한 국제 시장터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거기다가 어마어마한 물건을 풀어 놓고 각 나라 사람들이 와서 교역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뱃사람들이 와서 그 항구에서 회포를 풀고 그 위에는 아폴로 신전이 있어서 거기에 가서 창녀들과 함께 부도덕한 생활을 하면서 신을 섬기는 풍조가 가득 했습니다. 또 한쪽에서는 지혜를 가르친답시고 그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서 철학을 토론하던 곳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주 혼란스러웠던 도시였습니다. 사람들 정신이 제자리에 안 가 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기독교의 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아주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어렵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어려운 말로 격파해 버리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딱 사람들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돌아가야 할 그 정신으로.
여기는 대부분 구역장이고 여기는 교육자들이지만 하나님 앞에 빌어야 할 것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우리의 목회를 잘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내용 오늘 내 설교를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이 진짜 인생 다 할 때까지 내 곁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강물처럼 흘러가면서 지나갑니다. 구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나의 설교가 나의 양 떼들을 향한 가르침이 결국은 그 사람들의 정신을 제자리에 되돌아오게 만드는 파워, 그것이 깃들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떠나면서 이리떼들이 몰려와서 교회를 뜯어 먹을 것이라는 아주 우울한 예고를 하며 작별 인사를 합니다. 그때 교인들은 그 의미를 몰랐겠지만 사도 바울은 두 가지 면에서 훤히 보고 있었습니다. 일어나고 있는 일들 조짐들 그리고 자기한테 말씀을 3년이나 먹었지만 (성도들이)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그런 본성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앞날이) 훤하게 들어왔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가 3년 동안 훈계에 힘쓰면서 살아왔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목회는 누가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이긴 사람이 되냐 하면 많이 쏟아 놓은 사람이 이긴 게 아니라 이 말씀을 가슴까지 실어다 준 사람이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걸 우리들이 배우게 됩니다. 이런 때일수록 말이 사람들의 영혼 깊은 곳에 전달됩니다. (그래서)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진 정신들이 제자리에 돌아오게 그런 말씀의 돌봄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저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은 각 사람이라는 이 평범한 단어입니다. ‘해마 해카스톤’이라는 단어인데 평범한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일일이 보고 하느니라” 할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도 보고할 때 그런 단어. 낱낱이 하나하나 그냥 평범한 뜻입니다. 그것이 결국 뭘 보여주느냐면 사도 바울의 사역이 소위 정치학에서 이야기하는 상징 조작적인 사역이 아니라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 사역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대중 숫자, 엄청난 교세 이런 것에 관심을 갖는 목회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돌봤던 사역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생애 전체가 누구 하나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르쳐준 사역이라기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고난도 봤던 사역이었잖습니까.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도 엄청나게 많이 돌아다닐 때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설교하고 밤중에 차를 몰고 새벽에 양평에 와서 설교하고 또 홍천으로 넘어가고 운전해 주는 사람 없이 혼자 다녔습니다. 많은 사람의 관심사는 설교 듣는 사람들이 많이 은혜받아 변화되고 저는 빨리 떠났습니다. 누구 한 사람 한 사람 돌봐 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 그런 식의 사역을 하다가 한 곳에서 3년이라는 기간 동안 머물면서 심방도 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알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돌봤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조혜 비키 목사님도 한 번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설교 준비 더 나무랄 때 없이 자신은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다 했고, 설교도 최상으로 최선을 다 했고 기도도 많이 했고 그런데 열매가 없을 때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때 우리가 반성해야 할 점이 뭐냐면 ‘내게 설교를 듣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말을 가슴까지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하는데 그게 인간의 신비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을 해도 염려와 사랑으로 하는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오해되지 않고 들립니다.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했던 사역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때에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사역을 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눈길을 끈 것은 “3년이나” 하고 그다음에 “밤낮 쉬지 않고” 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는 제가 설교 속에서 몇 번 인용했던 단어입니다. ‘에파오싸맨’이라는 단어인데 ‘에타오사토’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가복음 11장에서 기도하고 쉬시매 라고 되어있는 기도하고 마치시매 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에 ‘샤바트’입니다. 여기에는 ‘우크’라는 부정사가 붙여서 ‘쉬지 않고’라고 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이 왜 쉬지 않았겠습니까. 그도 인간인데 잠도 잤겠고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밥도 먹었겠고 휴식의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반성하기에 돌아보기에 쉬지 않았다. 그 사역에 대한 마음과 모든 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 계속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결국은 불굴의 헌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모키는 몸과 마음을 모두 쏟아부어도 안 되는 경우는 있습니다. 근데 그렇게 안 해서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됐다면 그건 그냥 일에 열매이지 목회의 열매는 아닙니다. 목회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그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목회의 열매입니다. 그게 인격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이 열매입니다. 일을 잘하면 일이 잘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가 그냥 저절로 잘되는 법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쉬지 않고 한 사역이었습니다. 중단 없이 계속한 사역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서 많은 세월이 흘러갔고 그 후에 온갖 많은 시련을 겪어서 그때만큼 공부하지 못하지만, 제가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를 쓸 때 나이가 만 40세, 42세였는데 그때 제가 그랬습니다. “나는 고3이다. 모든 좋은 것은 대학 가서 한다.” 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영혼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더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마지막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의 사역 방식에서 배운 게 뭐냐면 “눈물로”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어 성경에 ‘메타다끄리온’이라고 되어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눈물이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목회 사역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요구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메타’라는 단어는 몇 가지 뜻이 있는데 후에, 다시 한번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말하면 눈물을 흘린 후에 혹은 그런 뜻이 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메타’가 그냥 평범하게 함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눈물들과 함께 훈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상품이 이렇습니다. “사면 사고 말면 말고” 그것은 메타다끄리온의 훈계가 아닙니다. 이게 인간이 사는 길이다. 살든지 말든지. 그렇게 하는 것은 훈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 목회자들이 있지만 어느 경우에도 설교할 때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을 얕잡아 보는 설교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연약한 한 마리의 어린 양이 또 다른 양들에게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세움을 받았던 이유 때문에만 설교하는 것입니다. 칼빈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매일 한 마리의 양으로 또 다른 양들에게 설교한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연약함과 때로는 어리석음 심지어는 죄까지도 사도 바울이 다 해봤거나 자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으셨지만 인간의 연약함을 체험하면서 결국 그들을 가엾게 여기시는 것 같은 그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처음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만났을 때에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몇 달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춘추화에 유혹이됩니다. 내가 이렇게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이 있으니 나는 이 시대에 이름이 있는 것이 틀림이 없다. 존 낙서 같은 사람이 그런 환상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확실히 이렇게 사랑이 많으니 이 시대에 내가 요한으로 부름 받은 게 틀림이 없다. 다 쓰레기 같은 생각입니다. 그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닙니다. 예레미아는 예레미아로 살다 죽었고 나는 김남준이고 너는 존 낙스지 무슨 거기에 다시 제2의 예레미아고 이 시대의 요한이 될 수 있겠습니까. 다 마음에서 지워버리고 연약한 인간으로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눈물이 납니다. 모든 목회에 전능한 목회자는 없습니다. 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걸 못 합니다. 꼭 그렇게 되기를 성도들에게 원합니다. 그 사이에서 사랑이 많으면 눈물이 나오는 거고 사랑이 없으면 남의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의 총량이 결국 사랑의 총량입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느냐 전승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아주 무섭도록 차가운 사람이고 그리고 직관적이고 독선적이고 그리고 뭐 아주 잔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성격이 다 개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 바울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한 장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다메섹에서의 회심 사건을 보도하는 사도행전에 세 장 6장부터 26장까지 얘기하는 거고 그다음 두 번째 9장부터 26장까지 얘기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내면을 보여주는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자전적인 고백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람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난히 눈물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큼 그의 생애가 고난으로 넘쳤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그가 얼마나 사랑의 삶을 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만나고도 눈물 흘리지 않았던 사람이 그렇게 영혼들을 만나면서 다끄리온 복수로 tears 눈물 방울과 함께 자신은 하나님의 교훈으로 성도들을 훈계했던 것입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던 날이었어요. 동료들보다 한 7년 늦게 안수를 받아 88년에 졸업했으니까 그렇죠 6년 7년 늦게 받았습니다. 강도사 고시를 보러 갔더니 감독하러 오신 많은 목사님이 저를 보고 “목사님 아유 김목사님 감독하러 오셨군요.” 사실 응시하러 갔는데 제자들 많이 만났습니다. 그다음에 강도사 고시를 보고 그다음에 안수를 받는데 청년 교회에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안수를 받으러 가기 전에 ‘내가 정말 이 안수를 받아야 하나.’ 그런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매일 저녁 예배당에 나왔습니다. 지하실 예배당에. 기도하는데 마지막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그거였습니다. “너는 너는 부족한 게 많다. 부족한 게 많은데 내가 세운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예배당 중간에 앉아서 밤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때 쓴 시가 십자가를 경험하라 첫 장에 나오는 그 시입니다. 그리고 이제 결국 안수를 받으러 청량리에 있는 청년 교회에 갔습니다. 안수를 받는데 참 잊혀지지 않습니다. 꽤 많았습니다. 경기 노회였는데 한 40명 안수를 받았던 것 같은데 한 30명 넘게 받았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들이 와서 안수를 하면서 안수를 했습니다. 연세 드신 목사님들이 쭉 있었는데 그중에 한 목사님이 안수 기도를 해주다가 뭐라고 막 나무라셨습니다. 요즘 목사가 되는데 눈물도 안 납니까. 그러면서 등을 때리면서 연세가 꽤 있으신 목사님인데 누군진 잘 모르겠습니다. “좀 울어라. 너희들이 죽는 날이다.” 그때 저는 ‘생에서 이제는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진짜 가는구나. 그리고 내가 이 목사가 될 자격이 죽어도 없는데 내가 세우니 너는 목사라 그러시는구나.’ 그 받았던 은혜 감격들이 밀려왔습니다. 정말 많이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나의 앞길을 뭐가 기다리는지 간에 주를 위해 내가 기쁘게 가자.’ 한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시고 나를 진심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목회에 하나님의 큰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많은 눈물과 함께 목회하던 바울을 하나님이 사용하셨어요. 그 훈계가 훈계가 되게끔 만드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 마음으로 목회를 한다면 큰 복이 있을 것입니다. 목회의 결실이 있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그게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과정과 자기 자신이 양 떼를 돌보는 과정이 일치해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짜 참된 목자 그 자질을 자신이 확인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런 어려운 때를 더 많은 시간을 여러분들이 기도로 보내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훈계하고 각 사람을 돌보고 쉬지 않고 눈물로 가르치고 이것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에 했던 사역의 모범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