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날에 만나는 하나님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난주에서 이어지는 시편입니다. 이 시는 시인이 악인들 때문에 큰 시련을 만났을 때 하나님 앞에 올린 탄원시(歎願時)입니다. 그들은 시인을 그물 치듯이 잡아 파멸에 이르게 하고자 하였고(시 31:4), 또 13절에 의하면 그들은 비방으로 이 시인의 명예를 더럽혔고, 마지막에는 그의 생명까지 노렸다고 하였습니다. 눈을 뜰 수 없는 그런 환란의 날에 이 시인이 택한 것은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일생에 예기치 못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과 믿음의 비밀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II. 환란 날에 만나는 하나님
그러면 그가 환란 날에 만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었을까요? 이 구절은 본문 중 시인이 가진 경건의 백미를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고통(苦痛) 받고 억울할 때 하나님께 피한 자가 받은 은혜입니다. 본 구절은 크게 다음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자를 만나주신다. 둘째는 고난 중에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선(善)하심이 있다. 세 번째는 결국 많은 사람 앞에서 은혜(恩惠)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A. 경외하는 자
첫째는 경외하는 자를 만나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말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라고 말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라고 하는 이 번역은 ‘리 레이까’(lireyka)라고 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전치사와 동사와 또 동사의 목적어가 함께 붙어있는 하나의 단어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말씀이 바로 번역을 하면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경외심을 가진 사람을 위해서 환란 날에 그에게만 보일 당신의 은혜를 예비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이번에 N번방 사건으로 올라온 그 범인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마음속으로 그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드렸습니다. 사는 게 얼마나 시시하고 외로우면 그런 범죄에 가담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더 많이 사랑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사람의 사랑은 때로는 되돌아오지 않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사랑은 언제나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자신이 최초의 수혜자가 되도록 만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경외하라고 하신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가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이 경외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태도가 경외로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보면 신약이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향한 바람직한 태도보다 가볍게 느껴지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한 맥락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경외심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려움과 사랑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감정은 두려우면 사랑하기 어렵고, 사랑하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인 감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것이 올바른 믿음이면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을 낳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그가 가진 믿음의 진실함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신학자들 속에서 오랫동안 즐겨 써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timor tremens et amor fascinens)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경험하는 것이 경외심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무한한 존재의 격차를 느끼면서 두려워 떨고, 그러면서도 그 높으신 하나님이 자기 같은 인간을 기억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분에게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분께로 잡아 당겨지는 사랑을 느끼는 것이 신앙심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사랑하는 사람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기 전에도 하나님 여러분 사랑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후에야 그 사랑이 여러분들을 붙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그럼 하나님께서 자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돈 많은 부자,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 아닙니다.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 아닙니다. 그러면 미천한 사람, 아닙니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누굴까요? 하나님을 이렇게 두려워하고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사람입니다.
시인은 환란의 날에 자기를 괴롭힌 악인(惡人)들을 고발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악인들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지만, 악인을 탄핵하도록 고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괴로움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뼈아프게 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31장 10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그러면 지금 시인이 방금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죄를 짓는다고 하나님이 그 순간에 후려치십니까? 그러면 이 세상에 남아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무신론자와 그리스도인이 논쟁을 했습니다. 무신론자가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니 앞에서 1분 안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마.” 그리고 신을 향해 온갖 욕설을 다 퍼부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신론자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없다.” (그러자) 그리스도인이 말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계신 증거다. 그렇게 참으신다.”
(시인은) 이전에 그가 지은 죄를 회개(悔改)했겠죠. 그러나 시인은 이 환란을 당하면서 자신의 마음의 밑바닥을 탐색하듯이 돌아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 때문에 약해지고, 죄 때문에 자신의 뼈가 쇠약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뼛속 깊이 남겨져 있는 마음 밑바닥의 죄를 보면서 그는 회개의 시간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이게 시련을 만날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상황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고난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 이처럼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든 현재든 죄악(罪惡)을 저지른 사람이 어찌 주를 경외하는 자일 수 있겠습니까? 시편 31편의 내용만을 가지고는 이 시간 쓰여진 때가 언제인지를 다윗의 생애에서 정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주석가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추측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가지 가능성을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의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거나, 더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마도 압살롬의 반역을 당해서 고난 당하고 있을 그때 아마 쓰여졌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상당히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든 현재든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 어떻게 주를 경외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사람에 대해 평가할 때 한두 토막의 삶을 보고 그 사람을 모두 평가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를 끝까지 미워하거나 혹은 끝까지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16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과는 달리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도 아마 범죄했을 것이고, 지금도 여전히 그 밑바닥의 죄가 남아 있었지만,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했고,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입어 불완전하지만, 이 순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도를 히브리어로 ‘핫시드’(hasid)라고 합니다. ‘헷세드’ 곧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성도된 것이 성도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그가 입은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에 달린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예상치도 못했던 반란을 겪으면서 그 괴수가 아들이라는 소식을 들으면서 왕궁을 떠나 망명길을 오를 때의 일이었습니다. 비록 다윗이 범죄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가 인생에 많은 시간들을 하나님 사랑하고, 자기의 백성들을 목자처럼 아끼면서 돌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왕궁을 황급히 떠나 망명길을 오를 때 그가 당했던 악담을 기억해 보십시오. 시므이라는 작자는 그렇게 눈물로 망명길을 떠나는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계속해서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사무엘하 16장 7절이 말하기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계속 돌을 던지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악담을 다윗에게 쏟아놓았습니다. 왕이었던 시절에는 입도 놀리지 못하던 인간이 이제 망명길에 떠나는 신세가 되고, 왕국을 잃어버릴 상황에 이르게 되니까 그를 개무시하면서 이렇게 비루한 욕설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그때 다윗에게 그런 인간 하나쯤 목을 칠 힘이 남아있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하가 ‘단칼에 목을 벨까요?’ ‘하지 마라. 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야단치시는지 어찌 알겠느냐. 놔둬라.’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피를 흘린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도대체 다윗이 누구의 피를 흘렸습니까? 반역한 압살롬이 죽었을 때 아버지인 시인은 통곡하며 문루로 올랐습니다. “압살롬아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옷을 찢고 울며 금식하였다고 사무엘하 1장 11절에서 12절 사이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악을 악(惡)으로 갚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큰 시련 속에서 어찌 괴롭지 않았겠으며 어찌 고통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환란의 날에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선하신 주권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시인의 이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의 인생이 있다고 하는 이 절절한 신앙은 법궤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당시 법궤는 왕권의 정통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솔로몬 시대 때 남 왕국과 북 왕국으로 후에 나뉘게 됩니다. 북 왕국이 훨씬 더 커다란 영토와 지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항상 이 여호와의 종교에 대한 콤플렉스에 둘러싸여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성전과 법궤가 자기 나라에 없고, 유다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부하들은 당연히 망명길에 오를 때 다른 것은 몰라도 법궤를 챙겨가야 국민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이 다윗을 치셔서 왕권을 압살롬에게 넘겨주셨다, 증거는 법궤가 그(압살롬)의 손에 있는 것이다’(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법궤에 대한) 당시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보편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법궤를 가지고 함께 망명길로 떠나려고 옵니다. 그때 제사장 사독에게 다윗이 정말 아름다운 고백을 합니다. 사무엘하 15장 25절에서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환란 날에 사람들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한 증거였던 것입니다. 모든 백성의 지지를 얻는 것도 왕으로서 중요한 것이었으나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이 시련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는 저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신앙의 자연스러운 고백으로 자기가 생사 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임을 입증하였던 것입니다. 시련의 날에 이렇게 하나님께로 피하는 큰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감추신 선함
두 번째는 감추신 선함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이렇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누구누구를 위하여 쌓아둔, 혹은 저장한, 혹은 감추어둔 당신의 선(善), 히브리어 ‘토브’(tob)라고 나옵니다. 은혜라기보다는 선입니다. 좋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위해서 그가 가장 시련과 고통을 겪고 있는 순간에도 그가 당신의 품으로 달려올 때 베푸실 선을 감추시는 것처럼 쌓아두시고 계셨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눈을 뜰 수 없도록 고난(苦難)을 겪고 평생 섬겼던 백성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피붙이처럼 사랑하던 동지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끔찍한 죄를 저질렀는데도 용서해준 자기 자식으로부터 반역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앞에 무엇이 선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극심한 고난의 날들은 배신과 음모, 모욕과 비방으로 얼룩져 버렸습니다. 자기를 대적하는 악인들은 사방에 가득하고, 자신은 하지도 않은 악한 일로 자신을 송사하면서 인간쓰레기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아 저주받은 자로서 홀로 남겨진 것처럼 그렇게 여겨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시인이 어디서 하나님의 선함을 발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시인이 자신의 비참한 바를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12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깨진 배와 같사옵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폭풍 속에서 배 한구석이 부서져서 기울며 물이 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침몰은 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간신히 간신히 그 배가 갈아질 순간을 기다리면서 생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은혜가 있습니까? 무슨 선이 보였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금방 주시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감추시는 것처럼 쌓아두시는 선을 믿었습니다. 이 일들이 나중에 20절에 보면 비밀이 장막에서 일어나는 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눈에 띄지 않게 감추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시련 속에서 베푸실 당신의 선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기로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란을 당한 시인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께 피하기까지 시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흩어졌던 인간의 마음이 시련을 통해 모아지기도 하고, 모아졌던 마음이 시련을 통해 더욱 흩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신앙에 달린 것입니다. 그날에 주를 경외하는 자는 오직 주께 피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찾는 모든 자녀들에게 결코 악을 행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는 비열한 방법으로 악인들이 자신에게 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악으로 앙갚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더럽히는 대신 자신을 위해 선을 예비하고 계신 그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며 그분만을 의지하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읽어도 ‘다윗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작 (시인은) 자신을 없는 말로 비난하는 그 많은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벙어리와 같이 귀머거리가 된 것처럼, 그리고 맹인이 된 것처럼 그 모든 사연을 홀로 가슴에 묻고 일체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자기의 마음을 쏟아놓았습니다. 그때 그는 한 나라의 제왕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 앞에서 눈물을 쏟는 한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이 기도 속에서 물같이 녹으며 예전에 알지 못했던 그분의 깊은 사랑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런 시련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끝없는 선하심, 하나님의 그 광대무변한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마음이 고통 때문에 산란해지는 대신 그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이 감추어진 선(善)을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되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이 내가 당신을 의지하는 한 하나님이 항상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 그것이 신앙(信仰)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C. 사람 앞에서
마지막 세 번째 하나님은 이 놀라운 위로를 사람 앞에서 베푸셨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본문 속 “인생“)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사람의 아들들 면전에서’라고 나옵니다. 시편에서 “사람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은 그냥 별 의미 없이 사람의 아들들이라고 가끔 쓰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창세기 6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이에 비해서 대조적으로 사람의 아들들은 사람의 악함과 누추함을 본받아 그렇게 불경건한 인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종교적인 의미로 사람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잠시 (다윗을) 그 사람의 아들들에게 눈을 뜰 수 없는 모욕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기에도 다윗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지나는 과정입니다. 결국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상을 베푸심으로써 그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시인이 무수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며 경험한 바입니다. 그래서 시편 23편 4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악심(惡心)을 품는 자들은 그가 옳았던, 그른 사람이었던 이런 고백이 없습니다. 선인이 악인을 대적해서 악을 꿈꾼다면 그는 그 일을 통해 악인과 꼭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악인을 이런 식으로 대적해서 이긴다면 그는 교만해질 것이며 만약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니 자기 뜻대로 되던 뜻대로 되지 않던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부패한 자신을 노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전에 시련을 받던 날에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에게 은혜를 주셨는지를 회상(回想)했습니다. 그리고 그 좋으신 하나님이 자신의 일생을 인도하신 것처럼 이 시련 속에서도 자기를 붙들어 감추신 선하심을 보이실 것이라고 믿으면서 이 시련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자기를 비웃던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이 원한을 풀어주시고 그 부끄러움이 변하여 변함없이 당신을 경외했던 사람들에게 베푸는 상급이 되기까지 인내하고 참고 기다리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가진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감추신 선을 우리에게 베푸실 뿐만 아니라 결국은 우리를 부끄럽게 했던 모든 사람 앞에서 인정해 주시는 분인 줄 믿고 시련을 이기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인생에는 시련의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때 우리의 믿음은 기로에 놓이기 쉽습니다. 사단에게는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을 기회이며 하나님에게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새롭게 하실 기회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순간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불신앙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지만 신앙은 피난처이신 하나님께로 달려가게 합니다. 거기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선(善)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련은 마음에 간직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입증할 훌륭한 기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임을 시련 속에서 입증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를 전심으로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시련을 통해 더 깊은 은혜의 비밀스러운 세계로 여러분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