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세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1-2)
녹취자 : 이 솔
I. 본문해설
하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알지 않고는 하나님을 믿을 자가 없지만, 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난 후에도 끊임없이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지식의 성장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성장은 한 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만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 속에 하나님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들이 많이 오염되었고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의 지성도 죄 때문에 많이 물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잘 해석해서 어떻게 그게 하나님이 계신 증거를 드러내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 하나님 때문에 살아 있고 하나님 때문에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선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있는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빛이 있어라고 말씀하시니까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쓰여진 히브리어 동사나 아마르라는 동사예요. 마이호멜 아 엘로힘 이히오르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어라 하셨다 말씀하셨다. 이거죠. 이 아마르 동사는 공기의 음파를 울려서 사람들에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속으로 생각하는 언어 활동을 모두 아마르 동사로 지칭해요. 다바르 하고는 좀 다르죠. 다바르는 딥페일로 쓰이는데 직접 발화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예요. 목소리를 내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언어를 사용해서 말 하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의 하나님의 자기 생각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은 성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지성이 하나님이라면 지성에서 나오는 생각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을 하게끔 한 것이 의지인데 그 의지는 지성으로부터 혹은 기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삼위일체가 된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시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것이 당신 자신 안에 울려 퍼진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의해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을 하고 난 다음에는 그 일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많은 요소와 싸우면서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 내야지만 비로소 존재하게 됩니다. 근데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어라. 빛이 있기를 하나님이 희망하시는 것입니다. 의욕하시면 그 빛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속에 있는 이 인식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 말씀은 당연히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생각이 존재의 기원이 다르다면, 생각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멍한 분으로 계실 텐데 그런 분을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생각은 혹은 지식은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한순간에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 이전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말하자면 세계의 시작이 되는 것이고 그 시작과 함께 이제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이나 모든 있는 것들은 우리의 시야 속에 있거나 관념 속에 있거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분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돌멩이, 흙, 물, 공기, 나무들뿐만 아니라 사람 눈에 보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심지어 눈에 보이지 않은 천사나 그리고 또 더듬어 만질 수도 없는 사랑, 도덕, 인내, 자비 이러한 모든 인간에게 있는 정신적인 가치들도 그분에 의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그렇게 모든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올바르게 해석할 수는 없지만 그럴 능력이 없지만, 그러나 올바르게 이 지성이 최고의 인간에게 주신 이 지성이 타락하기 전같이 최고의 기능을 발휘한다면 결국은 모든 것들을 사물의 이치를 발견한 후에는 결국은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거꾸로 뒤집으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제대로 안다면 그러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관념 속에 있던 것들이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인간의 의식 속에 쏟아지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있겠어요? 사람들은 희미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구약의 사람들은 그저 모세 오경이 하나님의 말씀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목숨을 걸었지만 그러나 누가 그 말씀의 본질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럼 만약에 말씀이신 그분이 사람을 입고 내려오셨으면 하나님 안에 있는 성자이신 그분은 어디로 갔을까요? 거기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안 계신 곳이 없이 편재하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어도 하나님으로서 계십니다. 거기에라고 말할 수 없이 어디에나 성부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 하나님이 계시는 모든 곳에 계십니다.
그래서 인제 어떤 신비한 점들이 나오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치는데 이건 성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은 성부가 아니라 삼위 일체 하나님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는 성자이시고 그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라고 기도할 때 그 안에 자신도 이미 기도의 대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삼위 일체의 신비입니다.
톨스토이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 정교회의 당시에 신학을 비판하면서 아무 쓰잘데기도 없는 교리라고 삼위일체를 내던졌습니다. 그 이유는 민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교리다. 나는 묻고 싶어요. 삼위일체를 민중들이 이해할 수 없었다면 자신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참회록에서 그렇게 강력하게 고백했는데 그것을 세계에 민중들은 이해할 수 있는 진리였느냐? 사람이 좋고 옳은 것을 알지 못할 때 자신의 능력을 한탄해야지만 그것이 겸손한 인간이고 지식에 발전이 있는 것이지 자신에게 이해하지 못하는 책은 마크 트웨인이 조나단 에드워드 전집 제1권 프리덤 어브 위를 읽다 집어던지면서 미치광이가 쓴 책이라고 욕했던 것처럼 그런 자세를 가지면 자기 수준 아래에 있는 사람들하고만 놀아야합니다. 더 높은 지성의 단계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내 책 도덕적 통치를 읽다가 던졌습니다. 나는 너무 좋은데 왜 그 사람들은 던졌을까? 물론 그 당시에 정교회에 도덕적인 타락이나 이런 것들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에서 그 글을 썼으니까 그런 신학에 대한 울분이 있기 전에 이미 도덕적인 울분이 있었겠습니다.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신앙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을 겨우 느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배당 바깥에서 펼쳐지는 자연의 세계 속에서 코스모스의 하나님을 느끼고 학문을 하면서 그 모든 학문을 탐구 가능하게 하셨던 모든 만물 속에 남겨진 하나님의 흔적 정확하게 말하면 로고스로 남으신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의식 속에서 떼어 버릴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 그리고 거기에 함께 계시는 성자 하나님 그것을 경험하면서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를 볼 때 그때 눈앞에 펼쳐지는 사물들과 우주 자신의 심지어는 인생에 대한 반성까지 모든 삶의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고통 슬픔과 아픔까지 하나의 웅장한 교향곡이 되어서 ‘내 주는 살아계셔서’ 라는 찬양을 울려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걸 예배 속에서 그것을 무한히 높으신 하나님을 절절하게 의식하는 것은 타락한 삶을 살다 돌아온 사람이 그걸 더 많이 의식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안 계신 곳 없으신 하나님을 보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위대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 천하 만물을 그 사랑의 하나님이 만드시고 그리고 어디에도 당신을 감추지 않고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들은 어디 있든지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 안 계신 곳 없이 만드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어느 한 곳에서도 그분의 이름이 인정받지 못 하는 일이 없도록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 문화를 변화시키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그 문화의 변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크라이스 오브 컬쳐를 얘기한 어거스틴이나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들의 주장은 우리들이 또 받아 들이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아무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며 살아도 그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온 세계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고 그의 이름을 찬송하고 있음을 아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 있는 동안에 그분의 이름을 이 세상 속에서 높아지게 하는데 이바지 안하고 살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우리는 다시에 트랜스포머 문화 변혁론자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의 슬픔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욕스럽게 살아감으로써 결국 이 땅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 지지 못하게 방해하는 나 자신 안에 있는 이 죄된 욕망을 보면서 그런 욕망을 보면서 우리는 결국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하자면 어떤 면에서는 앤타이져컬춰 세계관을 이해하면서 그래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중심은 서 있으나, 그러나 그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 서서 그래서 펼쳐지는 상황 속에서 계시 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면서 우리는 다양한 국면의 세계관들을 이해하면서 우리들이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에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바지하고 그 나라가 이 세상에 우리의 힘으로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라고 하는 사실은 그 나라가 임할 때든 임하지 않았을 때든 타락했을 때든 타락하기 전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을 위해서 사는 것은 이 세상의 형편이 어떠한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그 아름다움을 해치는 인간의 추함을 고발하고 학문을 하는 사람은 학문으로서 이 세계에 있는 아름답고 선한 질서를 발견해내고 그다음에 그 질서를 잘못 해석하는 것들 비평 비판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여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죠?
한 사람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았다는 한없는 위대함. 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 엄숙하리만치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왜 그런 사람들이 남도 존엄하게 여길 수 있으니까 그러나 역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들에 피었다 지는 풀꽃과 같아서 잠시 있다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도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바로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고 나 자신조차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거야. 왜 이 사실을 그렇게 알려주려고 하는가? 요한복음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으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왜 모든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바 되었고 그 때문에 지탱하고 있고 그분께로 돌아가는 분이다. 그 예수는 나사렛에서 젊은이 정도가 아니다. 그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서두의 그 얘기를 하는 얘기는 뭐냐면 기독교 신앙은 그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조차도 이 세계 모든 것조차도 그리스도를 통해 만드셨으니 우리가 있는 것과 지탱하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돌아가는 그 모든 것이 결국은 그리스도를 의존하고 있나이다. 그것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이 뭐냐면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공급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