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생명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3-4).
녹취자: 이새봄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가 창조되었고 만약에 그렇게 창조가 되었다면 각각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대로 창조되었을 것이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서로서로 모든 것들을 이렇게 연결되게 하셨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도 하나님께 창조되었다는 점에서는 그 모든 창조된 사물중 하나로서 그런 위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아는 것이 비로소 자기를 올바르게 아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뒷 절은 지난주와 함께 걸쳐있으면서 이제 이런 뜻밖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고 “그 안에” 이것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A. ‘로고스’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어 성경에서 ‘로고스(λόγος)’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는 당시 헬레니즘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가슴에 다가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이 ‘로고스’는 모든 세계를 붙들고 있는 원리, 모든 세계를 창조한 원리, 그리고 그 창조된 세계를 지탱하게 하고 있는 원리, 그렇게 사람들은 이해를 했습니다. 자신들이 아는 ‘로고스’의 개념이 나오니까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가 ‘로고스’에 대해 말할 때에는 사실 그런 ‘로고스’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로고스’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되었으나 하나님은 아닌 하나님 가까운 존재입니다. 신에게로 유래되었으나 신은 아니고 그러나 또 물질도 아니고 신에게 가까이 있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너무 거룩하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악한 이 세상의 물질을 창조하기보다는, 말하자면 자신의 밑에 있는 로고스를 시켜서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헬라 세계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모든 만물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만드셨고 그 중보를 통해 붙들고 계시고 중보를 통해서 만물을 회복시키신다고 하는 그런 개념을 설명할 수 있는 도구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개념이 그리스 사람들이 사용하던 ‘로고스’라고 하는 개념이었습니다.
‘로고스’는 ‘말’이라는 뜻도 있고 ‘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히브리어로 옮길 때 ‘다바르(דָּבַר)’라고 하는 이 단어의 1차적 의미로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말’ 중에서도 ‘발화된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게 ‘일’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7장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면서 맨 도입부에 “아헤르 엘레 하 데바린”이렇게 나옵니다. ‘다바르’의 복수입니다. “이런 일들 후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말과 일, 말과 행위, 이런 것들이 히브리 사람들의 생각에는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닌 한 덩어리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놓고 보니까 요한이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 사람들이 사용하는 ‘로고스’의 개념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개념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가장 가까우니 일단 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도 ‘로고스’라는 단어를 차용해서 이것을 가지고 워드 플레이(word play)를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로고스’를 이야기하고 그 ‘로고스’는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하던 그 철학에서의 ‘로고스’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함으로써, 출발은 ‘로고스’에게서 해서 마지막에 맺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맺도록 하자, 다시 말하면 그들의 이해를 붙들기 위해 ‘로고스’라는 말을 던지고 이 ‘로고스’에 대한 그리스적인 해석이 아니라 성경적인 해석을 설명함으로써 마지막에 그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게 하자, 라는 것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요한복음은 유대인의 특정계층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헬라세계의 모든 사람들에 읽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독자로 사용했기 때문에, 마치 마태가 ‘하나님’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하늘’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처럼 이 사람 요한은 그리스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로고스’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한 용어로 차용했던 것입니다.
B. ‘로고스’ 안에 있는 ‘생명’
1.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그다음 줄에 나오는 성경구절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랬습니다. 우선 아주 생경스럽게 느꼈을 단어가 이 ‘생명’이라는 단어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로고스’도 ‘로고스’ 자체가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길’에 대해서는 소위 이야기하는 도로잖습니까? ‘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종교에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는 주전 3세기에서 5세기의 그 탁월한 철학자들에 의해서 탐구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사실 그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분적으로 영혼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고 그 영혼의 힘 때문에 생명이 살아있다고 이렇게 믿었지만 그러면 그 영혼과 생명은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 생명은 영혼의 어떤 방식으로 누가 부여하는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와 같이 신들을 힘입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기동합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그들도 인정했습니다. 헌데 그 신이 어떤 방식으로 생명을 주셔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기동하게 하느냐, 그것에 대해서는 그들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탐구하고 있는 탐구의 제목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생명이라는 것은 신비한 것이고 그 생명은 이성의 추측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신비입니다. 생명이 이어지는 것과 끊어지는 것 사이를 과연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실 생명은 실질적으로 자신들이 누리며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학문에 있어서 중요한 논제가 될 수 없으리만치 신비한 것입니다.
지금도 아무리 의학이 발달되고 과학이 발달되어 양자물리학이 발달되었다고 하더라도 누가 어느 학문도 생명의 본질을 밝혀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든 생물학이나 생명학이나 심지어는 생명공학이나 하는 것도 살아있는 것들 속에서 그 생명이 있는 범위 안에서 무엇인가를 변화를 주어서 다른 작용을 하게 만들고 다른 기능을 갖게 만드는 것이지, 생명이 없는 것을 생명이 있게끔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물론 있는 생명을 죽일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만큼 ‘도’나 ‘진리’는 인간이 이성으로 추구하고 찾아서 어느 정도 유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은 그 비슷한 것도 발견하거나 찾아낼 수 없고 다만 있는 생명의 현상에 대해서 경탄할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그 안에”, 즉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대목에 있어서 그리스 사람들은 전혀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선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생명은 아주 신비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생명을 아주 존귀하게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모든 생명의 직접적인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푸른 하늘을 나는 공중의 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나님에 의해서 주관되며, 사람의 생명도 심지어는 황제의 생명도 왕의 생명도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처분이 되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생명은 경외심을 가지고 우리들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가 『생의 외경』이라는 책을 씁니다.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봉사하면서 겪었던 모든 일들을 나누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것은 생명이고 이 생명의 존귀함은 모든 만물에 해당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직접 그 모든 것들을 창조하고 붙드셨다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생명’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요한이 모든 생명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요한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가 그토록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는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도 생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성경 전체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일보다는 그것이 어떤 기능을 갖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눈에도 독자들의 눈에도 숨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미워하고 다투고 싸우고 분쟁합니다. 그것을 아주 간단하게 생명이 모자라고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기쁨의 삶을 삽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바로 로고스 안에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말할 때 그 ‘생명’은 일차적으로는 사람들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생명이지만 하나님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창조하실 때, 태어나게 하실 때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생명이 모든 이 세상에 있는 살아있는 사물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창조하신 분이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하셨으면 당연히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된 생명을 주시고 마지막에 그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을 통치하실 때에도 그리스도를 통해 통치하고 마지막에 그 모든 만물들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실 때에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돌아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들이 만약에 지성의 눈이 열린다면 우리는 그 파릇파릇 돋아나는 5월의 새싹들을 보면서, 그것이 아주 왕성한 생명의 기운으로 우거지는 6월의 녹음을 보면서,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을 들으면서,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다시 꽃피우고 마지막에 결실하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그 강인한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들은 좀 더 생태신학적으로 넓히면 그 모든 생명이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얼마나 존중해야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극단적으로 비관주의자들이 될 수는 없지만, 살아있는 짐승, 살아있었던 모든 것, 풀을 비롯해서 짐승을 비롯해서 그것들이 식탁에 올라올 때에는 엄숙한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나를 위해서 죽음을 당한 생물과 식물에 대한 숙연한 생각을 가지고 꼭 필요한 만큼만 소비를 하는 그런 절제된 삶을 가져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들도 그 생명이 인간을 위해서 비록 사용된다 하더라도 살아있는 동안 그 생명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계란을 먹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A4용지 한 장에 닭이 네 마리가 앉는답니다. 일체 못 움직이게 하고 거기서 살을 찌우게 만들어서 계육을 만들고 그렇게 아주 비좁은 환경에서 움직일 수도 없게끔 해서 24시간 등불을 켜놓고 알을 낳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이 자신의 생명을 동물답게 누리는 가운데 자연의 거대한 사이클 속에서 새끼를 낳고 알을 낳고 하는 그 속에서 인간이 그 혜택을 보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달걀 하나에 천원쯤 줘야 먹을 수 있겠습니다. 천원이 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이런 식으로 동물들을 학대하고 동물들을.. 닭가슴살 다들 좋아하잖습니까? 젊은이들이 (많이 좋아합니다.) 이 닭가슴살만 자라게끔 형질을 바꿔서 가슴이 커져 계속 앞으로 꼬꾸라지는 닭들로 사육이 되다가 마지막에 가슴살만 베어내고 나머지는 아무렇게나 처리해버리는 행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적인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 정말 생명에 대한 예의 없음, 무자비함 이런 것들을 토대로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2.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자, 그러면 이것은 신학적인 이야기는 아니고 생물학적인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요한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여기서 변곡점을 이루면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연결고리가 뭐냐 하면 뒤에 넘어가면 이 ‘빛’은 당연히 그리스도입니다.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먼저 보내셨는데 그분이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그 빛을 인하여 자기를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요한이라는 사람에게로 넘어가고 요한이 증거했던 예수 그리스도로 넘어가면서 드디어 이제 도입부의 계획이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 모든 인류의 구세주로 오셨던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면서 그가 일으켰던 수많은 생명의 역사가 자기 자신 안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광경들을 이제 요한이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의 빛이라” 이러는데 무슨 의도겠습니까?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안에”,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닭의 생명이 있고 쥐의 생명이 있고 풀의 생명이 있고 꽃의 생명이 있고 또 여성의 생명이 있고 남성의 생명이 있고 그다음에 동물의 생명이 있다, 라고 할 때에 설마 로고스 안에 다양한 개별적인 생명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어서 그것을 주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피노키오』에서 보면 피노키오를 만들고 요술지팡이로 팡 때리니까 피노키오가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만약에 그 사람에게 그 능력이 있다면 피노키오처럼 만들지 않고 도날드덕처럼 만들었어도 때렸으면 생명이 주어졌을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이것은 개별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던 나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명이 생명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그분 안에 있었고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깊으신 뜻을 따라서 그 모든 것들을 살아있게 함으로써 생명을 지니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게 육체의 생명입니다.
자, 여기서 매우 중요한 힌트가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이 그런 방식으로 주어졌다면 엄마가 아이를 낳는 것이 저절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죽은 상태로 태어난 아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형태는 엄마가 아이를 가져서 이 아이는 속에서 심장박동도 뛰고 꼬물럭거리고 움직이게 되다가 태어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그 아이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 있는 엄마도 역시 하나님이 생명을 부여하셔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건강하다가 죽는 사람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거두심으로써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물리적인 육체도 그런 식으로 생명이 주어진다면 우리의 영혼에 있는 얼마나 더 놀라운 방식으로 생명이 주어지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은 우리의 영혼에 전달됨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는 영혼이 된다고 하는 것은 눈으로 매일 보는 원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이가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인간이 도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고민하고 고뇌했지만 ‘도’를 발견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혹시 발견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피할 수 없던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죽었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죽었고 위대한 플라톤도 죽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정신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죽습니다.
어떤 인문학자가 키이츠(John Keats)라는 영국 시인을 전공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머리는 하얀 백발에.(→ 머리는 하얀 백발의 사람이었습니다.) 후학들에게 하는 말이 “여러분 나는 이렇게 죽을 날이 가까워 오도록 키이츠를 연구했지만 하면 할수록 이 사람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나는 다 알 수가 없습니다.” 키이츠는 26살 때 죽었습니다. 26살. 그러니까 얼마나 놀라운 정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면 스무 몇 살에 요절한 키이츠를 그런 능력이 있는 학자들이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80이 되도록 공부를 했는데도 그 세계를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겠습니까? 그런 위대한 정신의 놀라운 힘도 결국은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인간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혼의 생명도 그런 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참 이해되지 않은 것은 ‘왜 이 생명을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할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라는 질문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생명과 빛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사람들의 빛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인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말합니다. 그러면 먼저 사람들의 빛이라고 부른 이유는 이게 결국은 여격적인 소유격입니다. 소유격에는 소유격적인 소유격이 있고 여격적 소유격이 있고 목적격 소유격이 있습니다. 소유격적 소유격은 ‘나의 마이크’, 이것은 ‘나의 소유’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대격적 소유격은 “아버지의 사랑이 너희 안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할 때 아버지가 사랑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없다 그 뜻이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게 없다는 것입니다. 여격적 목적격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할 때 ‘사람들 안에 빛이 있다’ 그 뜻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빛이라’입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이라.
그 빛이라는 게 뭐냐, 그걸 성경 전체로 찾아보면 성경은 크게 서너 가지 뜻으로 씁니다. 첫째는 물리적인 빛입니다. 횃불을 들었기 때문에 빛이 나는 것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윤리적인 빛입니다. 어떤 부도덕한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도덕적인 삶을 살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 이게 빛입니다. “롯은 의로운 사람이라” 했을 때 사회가 아주 타락하니까 그렇게 쓰이는 말입니다. 윤리적인 빛입니다. 또 하나가 뭐냐 하면 이게 신학적인 빛입니다. 신학적인 빛이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혹은 하나님의 존재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기독론적으로 해석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을 때 결국은 이 빛은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화신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에 대한 용례를 다 통틀어보면 사실 물리적인 빛으로 쓰이는 것은 그렇게 주목할 게 아닙니다. 또 빛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을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든지 (그렇게 주목할 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폭 넓게 사용되는 것은 빛은 진리입니다. 진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이방의 빛이라”고 할 때 그것도 결국은 이방인들의 진리 아닌 삶에 대조되는 진리적인 삶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만든 것은 진리입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진리라’, 사람들에게 비추어서 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길을 가게 만들어주고, 어그러진 길을 가던 사람들이 그 빛 때문에 깨닫고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바로 이 진리가 생명과 하나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사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진리를 말하고 철학자들이 진리를 찾아왔고 이렇게 해왔지만 거기에 근본적으로 생명이 결핍되어있었기 때문에 참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진리는 그 안에 이미 생명이 있어서 진리를 알고 진리를 깨닫는 사람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능력이 들어와서 그 생명을 가지고 사람들이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진리가 주는 생명이란 무엇이기에 그렇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진리요 생명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