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4)
녹취자 : 오지윤
사도가 15장에서 신자의 부활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종말론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심코 자주 지나치지만,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이 이 안에 숨어 있는데, 그게 바로 "아버지께 나라를 바칠 때라"라는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의 논리는 이런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우리 모두가 부활하게 된다. 그 부활에는 순서가 있다. 제일 먼저,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고,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믿는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러한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셨고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마지막에는 신자만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까지 모두 부활하게 됩니다. 순서를 놓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고 믿는 자의 부활이 있고 불신자의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악인은 심판받기 위해서 부활하고 의인은 즉,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부활하는데, 하나를 심판의 부활, 하나를 영생의 부활이라고 우리는 부릅니다.
그렇게 해서 모두 부활하면, 각자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을 견디기 위해서는, 이러한 몸이 아니라 변화된 몸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영원한 행복에 적합한 몸이 될 것이니, 그것을 위해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부분을 그림처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틀림없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을 보는 그대로, 내가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셨고, 떠날 때 많은 제자들 앞에서 승천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변화된 몸이었지만 사람의 형체로 하늘에 오르셨으니, 오실 때 또한 그렇게 오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육신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굶주리고 고통받고 결핍 속에 있던 육체는 아니겠지만, 영광스럽게 된 육체를 입고 오실 텐데, 이것은 사람의 아들로 오시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설명하면서, 그분은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다시 오시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데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불신자들은 오직 사람의 아들로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아들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악인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것이 되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이 됩니다. 악인들은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 심판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그분과 만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악인과 의인의 부활이 있고, 이때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멸하신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셨다고 하는데 통치, 권세, 능력 이러한 것들은 마귀에 딸린, 종속된 세력들의 여러 가지 이름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도 나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놓고 사변적으로 이 명칭에 따라서, 마귀에 종속된 그것들의 지위가 어떻게 되느냐고 논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충분한 계기가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아는 것은, 마귀에게 딸린 세력들에게 다양한 계급이 있고 종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뿐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한 것이고, 천사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다양한 말로 사용이 됩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악에 속했던 영적인 세력들까지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파멸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모든 것들을 다스리십니다. 언제부터였겠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는 안 그러신 적이 없었지만, 공식적으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우주를 통치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진 일입니다. 빌립보서 2장을 보면 "그러므로 그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의 발아래 엎드려 주라 시인하게 하셨느니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신 것은 부활을 통해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주가 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도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여러 예가 나오는데 그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라고 말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주는, 물론 사람들이 그 주를 어떤 사람은 그 당시에 존중하는, 존칭으로써 주라고 부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경외심에 사로잡혀서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고 주라고 부른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것이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 주라고 하는 영예를 주시고 만물을, 성자를 통해서 성부 하나님이 통치하시게 된 공식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구원에 대해 업을 이루시고 승천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는 것과 이후에 교회 공동체가 믿음으로 그분을 주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주라고 하는 명칭이 그리스어로 '퀴리오스'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의 동치어가 '아도나이' 입니다. 이 사람들이 야외라는 네 글자 테트라그라마톤을 써놓고 그 이름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테트라그라마톤 네 글자를 자음으로 ‘요두 헤 브아브 헤'이렇게 써놓고 그 밑에 모음은 아도나이에 해당되는 모음을 넣었습니다. 전자를 ‘케티브', 후자를 ‘케레'라고 합니다. 쓰여진 것 케티브와 읽히는 것 케레가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당시에 구약 히브리어 성경에 익숙해져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그분을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 주라고 불렀을 때,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여호와의 이름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였던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도 자신의 설교에서 이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라고 부르는 그 어감과 유대인들이 주(아도나이)라고 부르는, 퀴리오스라고 부르는 그 어감은 굉장히 신학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성부께서 성자에게 그 권한을 주시고 성자가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여러분께 말씀드렸듯이, 어느 한 위격은 다른 두 위격 없이 일하거나, 다른 두 위격이 함께 일하고 하나의 위격을 소외시킨 적이 없습니다. 삼위일체에서는 그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느 위격이 주로 그 일을 하시는지에 따라서 그가 고유하게 일하는 것처럼 묘사하기는 합니다. 천지 창조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사역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교의학에서 간명하게 표현합니다. "세계는 성부에 의해,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성부가 주로 관여한 사역으로 간주되는 것이고, 구속 사역은 삼위일체의 사역이지만 성자의 사역으로, 그 구속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사역은 성령의 사역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계획, 성부의 계획 없이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고, 그리스도의 구속이 없었어도 구원받을 수 없었지만, 우리가 실제로 구원받는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설명하면 길지만, 그러한 논리입니다.
성자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는 것도, 성자만 다스리시고 성부와 성령은 제외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언급이 나옵니다. 성자께서 다스리던 그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자가 성부에게 나라를 바치신다고 되어있다. 모든 심판이 끝나고 구속의 모든 사역이 끝남으로써 그분의 중보 사역도 끝나는 것입니다. 그분은 더 이상 구원할 인류가 없고 모든 중보사역이 끝납니다. 그때 아들은 아버지께 나라를 다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께 나라를 바친다고 해서 아들은 이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로써 모든 세계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모든 구원 사역이 완성된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친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이 나라를 다스리신다고 할 때, 그 본질은 무엇인가? 아버지께 나라가 바쳐졌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을 봅시다. 2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말합니다. 이것과 연관시키면서 아들이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고 하는 것은, 그 결과 나라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중재 없이 하나님을 직접 뵈옵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븨지오 브에티픠카'라고 하는데, '븨지오'는 본다는 뜻이고, 거기에서 비전이라는 말이 왔습니다. '브에아티픠카'라는 말은 '븨에아티틔우드' 지복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지복직관'이라고 부릅니다. 지복은 더이상 도달할 수 없는 행복이라는 뜻이고 직관은 무엇을 매개체로 하지 않고 직접 본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직관하게 된다면 더이상 매개체가 필요 없을 텐데, 그렇게 하나님을 직관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두 파악되는 것일까? 그럴 순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와 하나님은 동급이 되거나, 어쩌면 우리의 지성의 크기가 하나님의 존재를 능가한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는 하나님이 계시해주시는 한도 안에서 우리는 그분을 직관하면서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명시적으로 바랄 수 없지만, 아마 하늘나라에서도 우리의 지성의 크기는 각각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의 별들이 다양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우리의 지성의 크기는 각각 달라서, 아마 더 큰 사람은 더 많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한도 안에서 더 많이 보게 될 것이고, 그것보다 미약한 사람은 적게 보게 되겠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처럼 지식이 뛰어난 사람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거나, 지적인 능력이 적은 사람 때문에 우월감을 느끼거나 하는 그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에게 지복의 순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성자가 구속 사역을 모두 완수하고 아버지께 넘겨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컨텐플라치오'라고 합니다. 적절한 말이 없어서 아주 마음에 끌리지는 않는데, 전통적으로 관상이라고 번역합니다. 관상기도에서 말하는 종류의, 탈혼적, 탈화적, 그런 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관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직관은 아무 매개 없이 바라보는 것이지만, 컨텐플라치오는 매개물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혹은 매개물 없이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는 것 모두를 포함해서 드넓은 의미에서 사용합니다.
컨텐플라치오(관상)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도대체 왜 나를 이 나라에 이 교회에 보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계획은 이렇게 교회에 와서 목사가 되는 것이 원래 저의 인생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영문학자가 되고 싶었고, 수필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결코 종교의 귀의에서, 거기에 나 자신을 위탁할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회심시키셔서 모든 꿈을 포기하게 하시고 목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신학교 교수로 부름을 받았는데, 어느 날 삼일 동안 잠을 안 재우시고 교회를 개척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셔서, 말도 안 되게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뭔지 몰랐습니다. 지금 와서 이렇게 바라보면서, 그때는 몰랐던 한 가지, 한 가지 일들이 모두 구슬처럼 꿰어지면서, 결국은 여기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라고 깨닫게 되면서 예전에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이 신비스럽게 느껴지게 되고, 어떨 때는 가슴이 떨리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으로 내 인생을 섬세하게 인도하셨구나 라고 하면서, 예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예전에는 더 중요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분을 아는 지식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컨텐플라치오 입니다.
컨텐플라치오가 없는 삶은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신앙은 사랑이지 않습니까? 생각을 안 하는 사랑이 있습니까? 하종훈 목사님, 아기 생각납니까? 안 납니까? 잊어버릴 때 있습니까? 핸드폰에도 사진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까? 왜 그런 겁니까? 사랑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생각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생각을 차지하는 넓이는 사랑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누군가가 생각나지 않으면 마음에서 사라진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하려고 애를 써야 겨우 생각나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개나 줄 사랑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면 무엇을 보아도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 당연히 그 사람이 생각나고,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면 자꾸 그 사건과 연관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차지하는 횟수와 반복되는 작용의 크기만큼 그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상과 모든 것을 끊임없이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을 직관하게 된다고 할 때, 무엇을 직관하게 되느냐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가슴 시릴 정도로 나의 인생을 하나하나 인도하셨고, 그때 눈물을 쏟으면서 괴로워하였고,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냐고 몸부림을 쳤지만, 알고 보면 그 모든 것들이 연결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지복직관의 본질은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고 하면, 마음에서 엄청난 사랑의 정동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무한히 극대화해봅시다. 몇 년 동안을 가슴앓이하며 따라다니는데, 그 사람이 나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그랬을 때 벅차오르는 기분을 생각해봅시다. 그것을 무한대로 확장시키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움이 무한하시므로, 아무리 많이 우리에게 보여주셔도 그것은 거의 안 보여주신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무한대 분의 일, 무한대 분의 천, 무한대 분의 일억이라고 해도, 그것은 거의 똑같은 것입니다. 0으로 수렴하는 숫자입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아무리 많이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셔도, 보여주심에 있어서 다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천국의 행복의 상징입니다.
그 나라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에서 우리가 진리를 직관하고 최고의 선을 직관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사랑의 감동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우리가 그러한 일을 겪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일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면서 순간순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의 질서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신다는 사실을 보면서, 은혜를 받고 변화 받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이,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께 붙어있으려고 하는 은총을 구하는 우리의 많은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여전히 구리나 청동으로 만든 거울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것처럼, 희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우리가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처럼 보게 될 것이니, 이 말씀은 하나님을 무한히 알게 된다는 뜻보다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사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던 그때의 명료성과 비교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붙들고 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기쁨과 은혜를 지금 내가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이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가치에 매이지 않고 하늘의 가치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매일매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들이 아버지께 나라를 바칠, 그때를 사모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나라가 그렇게 그리운 나라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많은 어려움의 때에 오히려 마음을 평화롭게 갖고, 이 세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가까이 있는 많은 불행과 죽음을 보면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하면서 살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