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감사할 것은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두 번째 보내는 편지 속에 나타난 구절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이그나시아 라고 하는 커다란 도로가 있었습니다. 이그나시아 고 하는 도로는 로마로부터 시작을 해서 알바니아를 지나서 그리고 저기 아시아와 유럽이 맛닫는 그 이스탄블에까지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이 데살로니가는 말하자면 지금으로 치면 그리스 쪽에 있는 한 도시였고 이 도시가 바로 이그나시아 라고 하는 큰 도로가 지나가는 한 곳에 위치해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그리스 북쪽에 있는 속주여고 그 데살로니가는 이 속주 안에 있는 큰 도시였습니다. 거기를 가로질러서 이 이그나시아 라고 하는 도로가 지나갔습니다.
로마에 가서 이 도로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야말로 대단한 도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 판단으로는 그 위에 오늘날 커다란 탱크가 수십 대가 줄지어 몇 백 년을 다녀도 전혀 함몰되지 않을만한 그런 어마어마한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이 도로는 원래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었고 이제 로마는 이 길을 따라서 제국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반란사건들을 질풍과 같이 달려가서 진압을 하고 그 도로를 통해서 조공들이 들어오고 그리고 변방들을 정복하고 정보라는 아주 유용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면 이 도로가 발달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군사 도로가 만들어지고 나면 군인들이 지나가고 군인들이 지나간 다음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그렇게 하고 도시가 형성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그 길을 이용했습니다. 이 도로가 완비되었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도로를 따라서 치안력이 미치기 때문에 범죄와 여행의 위협이 현저히 줄어든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제 이차 전도 여행 때 데살로니가를 찾게 되고 여기에서 많은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크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서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이제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어린 신자들을 두고 사도 바울이 계속 돌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떠나와 있었으면서도 항상 마음 한구석에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을 향한 염려가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별히 이 그리스 지방에 있었던 많은 유대인들, 그리고 이방인들 중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새로 태어난 어린 교회를 박해하는 주된 적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세계에서 오는 일반적인 박해와 사상적인 핍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워하던 나머지 데살로니가 전서를 써서 이제 그 교회를 든든히 붙잡아주려고 노력했고 두 번째 이 편지는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또 다른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이렇게 고통 받고 박해를 받는 어려운 신자들을 다시 한번 붙들어주려는 목양적인 의도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핍박이 워낙 심하게 되니까 사람들의 신앙이 피안적인 신앙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핍박이 너무 심하고 고통을 받게 되니까 주님이 곧 다시 오신다. 불과 몇 년 안에 오실 것이니까 이제 우리가 직장도 다닐 필요가 없고 일할 필요도 없고 함께 모여서 주님을 기다리면 된다고 하는 아주 많이 치우친 배타적인 내제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주님의 오심을 바라는 참된 재림 신앙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반드시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를 설명하고 교리적으로 그들을 바로잡고 판단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이런 교리적인 목적으로 데살로니가 후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쓰는 가운데 이제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제 2장에서 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는 가운데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이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 속에서 우리들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 매몰되기가 매우 쉽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기의 책, 리바이벌 케닛 햇픈(?)이라고 하는 그런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교회 역사에 보면 이렇게 크고 위대한 부흥들이 일어나는데 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역사가 있다는 것을 잘 모를까?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를 역사하는 사람들의 눈에도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 이 지상의 역사에 하나님이 장엄한 임재로 간섭하시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해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조차도 잘 모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렇게 질문을 하고 난 다음에 그분이 직접 자신이 답한 내용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현재에 매우 몰두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고 이것은 늘 있는 일이다. 그렇게 답을 합니다. 그래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할 수 없을 정도로 현재의 일에 모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고 타락한 인간의 또한 지성의 궁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항상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만 역사를 회고하고 미래를 전망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삶을 사람들이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역사에 일어난 사건들은 오늘 자신에게 적용시킨다거나 혹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갖는 의미를 오늘에 비추어서 역사를 인식하는 지혜 같은 것들을 갖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 앞에 각각 마음의 모두 소원을 가지고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사실 우리는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도 인생에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이만큼 돈을 벌어야지 되겠다. 이만한 지위에 올라야지 되겠다. 이런 일들을 내가 더 해서 재능을 키워야지 되겠다. 등등의 목표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없다면 그야말로 정말 죽어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목표를 가질 때 그는 부지런해질 수 있고 그리고 자신의 여러 가지 욕구들을 억제하면서 정해진 목표를 향해서 돌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늘 남보다 더 많이 분투하고 덜 자고, 덜 먹고, 덜 쓰고, 그리고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일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에게도 이런 목표는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어떠어떠한 성화의 상태에 도달하고 싶다고 하는 마음의 간절한 바람이 있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많이 헌신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이런 자기를 향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자기 깨어짐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객관적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오늘날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런 것이고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구나, 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을 보며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하면서 거기서 좌절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깨어짐의 원인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사명의 자리에 서서 어떤 목표를 정해놓지 않고 사역을 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세워놓으셨으면 거기에서 질적으로는 어떤 존재가 되고 양적으로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봉사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지 되겠다. 라고 하는 목표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곧 탐욕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목표를 정해나야지만 자신을 절제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자원들을 그 한 가지 집중된 목적에 쏟아 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무기력하게 사는 것이고 무기력하게 산 50년의 인생보다는 계획을 가지고 산 30년의 인생이 더 많은 인생을 살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을 위한 경건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분투하는 삶의 표증이 있고 목표가 있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갈등이 있고 거기에 대한 자기 자신의 채찍질이 있고 도달하지 못했을 때 자기 깨트려짐과 은혜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이고 주님 안에서 분투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이렇게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몰두하며 살다가 보면 가끔은 우리의 눈이 머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달려오게 되었는지도 잊어버리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지 될 것인가 하는 전망도 흐려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끔 자기가 매진하고 있는 일상사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그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생각을 바꾸고 감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항상 목표를 가지고 분투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이런 목표에 다다르지 못한 갈등과 고민이 있게 마련이고 목표에 도달했을 때는 언제나 뿌듯한 자기성취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목표에 도달했을 때는 하나님의 대한 은혜를 잊어버리고 쉽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분투할 때는 하나님이 거기까지 다다르도록 베풀어주신 그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상실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 외곬으로 파고들고 있는 우리 자신의 정신을 한번 흔들어서 그래서 땅에 있는 것들로 주목하며 하나님 앞에 매진하던 자신의 인생에서 씻음을 들어서 한번 자기가 하고 있는 이 모든 일들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존재를 바라보며 그 성품을 묵상하고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인생 전체에 베풀어주신 크신 은혜를 생각하는 것도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요긴하다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때는 종종 한번씩 인용되는 예화입니다만 아무리 인용해도 진력이 나지 않는 예화가 있습니다. 1620년에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이제 대서양을 건너서 미국 신대륙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17세기에 신대륙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벌써 한 1세기 전에 이민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제가 기억하기로는 약 94명의 사람이 거기를 간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그들이 건너간 뒤에 나중에 이제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 연수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영국에서 그 사람들이 잘 살고 있는지 다시 갔을 때는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죽어있었습니다. 아마 어떤 풍토병 같은 것에 걸렸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째든 메일플라워를 타고 그 사람들이 신대륙에 건너갔습니다. 1년을 거기서 살면서 예배당을 제일먼저 짓고 학교와 병원을 그리고 자신의 집을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 추수를 모두 마친 다음에 모두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모인 모든 사람들이 침통해졌습니다. 그것은 1년 동안 애써서 농사를 지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병들어서 죽었고 그리고 곡식도 흉년이 들어서 내년까지 지낼지 심히 걱정이 되는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모였을 때 그 중에 한 사람이 손을 들어서 제안을 했습니다. 이렇게 흉년이 들고 우리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고 어려움을 당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일주일 동안 기간을 정하고 금식하며 참회하기를 나는 제안합니다. 이렇게 믿음을 따라서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에 동의하며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성도가 손을 들어서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고 반대의견을 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여기 건너올 때 농사를 지어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건너왔다면 오늘의 이것이 실패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건너온 것은 신대륙에서 돈벌고 잘 살기 위해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 위험을 무릅쓰고 대서양을 건너서 모든 재산을 버리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 해주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에 언제나 우리가 마음을 먹을 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었고 우리가 옳다고 믿는 성경의 방식대로 우리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의 자유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너무나 크고 놀랍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오히려 일주일 금식하지 말고 우리 모두 놉시다. 그래서 일주일을 감사주일로 정하고 우리에게 여기 정착하도록 도움을 준 인디언들도 모두 초청해서 우리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한 주간을 갖기를 제안합니다. 그랬더니 침통한 얼굴로 슬픔에 잠겨있던 수많은 사람들 속에 기쁨의 희색이 돌기 시작했고 모두 그 일을 박수치며 기뻐했습니다. 그것이 더 포이스트 댄시 기빙 데이 첫 번째 추수감사절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을 좀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에 매어서 막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것이 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잃어버릴 정도로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현실에 대한 몰두에 묻혀져서 급기야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감사치 않음으로 이어지기까지 내버려두는 것은 그것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열심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멀리 떠난 열심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분의 간증내용: 보석상을 하는 분인데 주일날 문을 열고 장사를 하며 돈을 벌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새해부터는 주일을 지키기로 다짐하고 주일을 지키 자 수입이 줄고 그러면서 마음의 갈등이 생겼지만 그러나 생각해보니 주일을 지 키지 않던 예전에는 수입은 많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고가 많아 나가는 돈이 많 았지만 그러나 주일을 지키며 장사하지 않은 지금은 수입은 줄었지만 나가는 지 출이 줄어 오히려 수입이 늘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며 감사했다는 내용)
결국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불만하고 원망하면 마음이 강퍅해지게 됩니다. 그러지 마시고 주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해보십시오, 주님이 주신 것에 인해서 깊이 감사하고 기뻐하고 좋아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삶의 자세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한 직장을 경영하고 있는 큰 회사의 주인이라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사람의 직원이 근무를 합니다. 한 사람은 자기가 이런 직장에 다닌다는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어찌하든지 자신과 그리고 회사가 함께 발전하기 위해서 성실하게 수고하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한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다른 직원이 이 회사에 들어온 것은 실력이 없어서 들어왔고 자기가 여기 근무하고 있는 것은 재수가 없어서 근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는 이 회사에 어울리지 않고 자기를 담기에는 이 회사가 너무나 후지다고 생각하면서 불만에 차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사람이 어느 사람과 함께 손잡고 그 기업을 함께 경영해가려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조건을 모두 잃어버리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할 수가 있고 또 감사하던 사람들이 반대로 그 감사를 모두 잃어버리고 상실감에 빠져서 좌절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목표를 세우고 분투하지만 가끔은 눈을 들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를 헤아리며 우리의 살아온 인생 전체를 위해 신실하신 그 은혜의 사랑에 힘입은 생애였다고 하는 것을 고백할 때 그 고백이 우리 자신을 쇄신시키는 커다란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이렇게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깊이 권면하는 가운데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우선 첫째는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선택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크게 세 가지로 대두가 되는데 첫째는 민족에 대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리고 그 후손들을 택하셔서 한 민족을 이루시는 선택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선택된 민족이었고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었고 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두 번째 선택 사상은 개개인을 하나님의 특별한 직무로 부르시는 선택입니다. 다윗을 불러서 왕을 삼으신 것이라든지 혹은 사무엘을 불러서 선지자로 삼으신 것이라든지 이런 등등의 일들이 바로 개개인을 향한 선택입니다. 성경에서 보다 폭넓게 사용되는 것이 구원과 관련된 선택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그런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구속하실 백성으로 선택해놓으셨고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희망적인 경험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의지를 따라서 이루어진 선택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믿게 된 것도 역시 하나님의 선택에 기초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이 선택은 결론적이고 기계적인 선택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그리고 우리와 함께 상호교통하시는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선택되었지만 이 선택을 하나님께서는 당신 홀로 이루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선택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올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시고 그리고 성령의 감화와 말씀의 지식을 통해서 그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시고 그래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런 선택의 은혜를 받은 교회였습니다. 이그나시아 도로가 생겼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도 아니었고 그리고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그 길을 따라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러나 그 도로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일행이 눈물로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지만 그들의 헌신 때문이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에 기초한 것이었고 그 선택을 이루는데 이 모든 문화와 문명은 로마제국과 그리고 그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목자인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의 헌신적인 그 수고가 도구로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너희를 선택하신 그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하라고 깊이 감사하라고 오늘 그들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그 크신 선택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선택해주신 이 선택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선택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소용돌이치는 역사 속에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아니하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치면서 영감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선택사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영적인 자존감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자존감이 다른 민족을 멸시하거나 우습게 여기고 자민족 우월주의에 빠지게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강력한 자부심을 갖는 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용기 있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훌륭한 원동력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너무 힘들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안 살아가는데 나는 왜 고달프게 힘들게 살아가야 하나. 이런 불평을 하는 이유도 결국 무엇 때문입니까? 선택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고 언약에서 제외된 사람들이지만 나는 약속의 백성이고 나에게는 다른 민족이 가까이 할 수 없는 탁월한 특권이 있고 그 하나님은 내 가까이 계시고 내가 기도할 때 내 기도를 들으시며 언제나 내 옆에 계시며 동행해주시는 이 특권을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민족이 이렇게 누린 적이 있는가.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 앞에 매우 특별한 백성이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특별한 의무를 행하며 특별한 사명을 지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놀라운 특권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선택 신앙이 이 어두운 시대를 용기 있게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저것도 못 갖고 우리는 저런 즐거움도 없이 왜 우리는 무슨 낙으로 살아가나 이런 사람들은 마치 광야에서 죽어간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고기국물도 못 먹고 애굽을 떠나서 고난의 가시밭길과 같은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애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광스러운 땅을 기업을 얻기 위해서 가는 길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것이 남들이 지지 못한 무거운 짐만을 진 형극의 길입니까, 아니면 특권입니까? 말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언약사상, 언약 신앙의 힘이 일생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언약백성으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에게 선택해주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화되기 위해서 고민합니까? 웃기지 말라고 하십시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짐승처럼 먹고 마시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고민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귀한 피조물로 만드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백성들로 삼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의무를 주어주신 것입니다. 이게 말할 수 없이 놀라운 특권입니다.
옛날에 전도사를 할 때 어느 집사님이 나보고 그랬습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우리 딸은 학교에서 늦게 온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예 그래요. 왜 늦게 옵니까? 속 썩는 줄 알았더니 그 애는 10시 반인가 11시 전에는 학교에서 못 나온다고 그래서 왜 그러는가 하니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기 반에서 10등 안에 드는 애들만 딱 잘라서 도서관에서 넣고 문을 잠거 버린답니다. 요점은 자기 딸이 그 10등 안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서관에 갇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선생의 감시를 받으면서 11시전에는 못 나온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가 만약에 테러범들에 의해서 갇혔든지 속을 썩여서 선생님이 애들을 창고에 가두었다면 그렇게 자랑하겠습니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전도사님 우리 딸은 도서관에 갇혔습니다. 왜요? 못 가게 해서요. 왜요? 10등 안에 들어서요. 이게 아주 즐거운 특권입니다.
그러니까 선택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게 놀라운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도 참 감사합니다.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의도와는 좀 빚나갈지 모르지만 나는 적용을 하자면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참 감사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이 감사한가. 이 나라가 그렇게 좋은가. 안 좋습니다. 나는 이 나라 하나도 안 좋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사한가. 그러니까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다시 태어나도 이 나라에 태어나고 싶은가 하니까 2-30대의 젊은이들이 80%가 싫다고 그랬습니다. 옛날에 얘기하는 게 그것입니다. 상품도 100명이 먹어보고 83명이 맛이 없다고 말하면 그 가게는 망합니다. 나라가 어떻게 꼴이 되었기에 그 젊은이들이 한참 나라에 대한 사랑에 불타야 될 젊은이들이 100중에서 83명이 죽어도 이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상품가치가 없는 나라로 만들었을까.
한 나라의 애국심이라고 하는 것은 핏줄이 같다는 사상 때문에 애국심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2차 대전 때 미국이 2차전에 개입하지 않습니까? 개입해서 그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일전선으로 이태리 전선으로 공수되어서 거기에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 중에는 이태리 태생도 있었고 독일 태생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기 고향에 가서 자기 동리사람들과 싸웁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렇게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도 꼭 이 나라에 태어나고 싶은 경쟁력이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각 시대에 사람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사명입니다.
얼만 전에 신문에서 리서치를 했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한국의 미래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삼성그룹이 나왔습니다. 제일 많이 나왔습니다. 아니 어떻게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가 있는가. 이 백성이 어떻게 된 것인가. 그랬더니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대통령에게 나라를 맡기겠다는 사람은 5%입니다. 그러고 종교계에 미래가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6% 그러니까 그것을 두개 다 합쳐도 삼성만도 못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속으로 눈물이 났습니다. 어떻게 이 나라는 이럴까? 내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곳,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나라인데 나라가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몇 달 전에 뉴스위크지에서 중국의 번영을 특집으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것을 읽으면서 저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중국을 지금 다스리고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테크노 크라트들입니다. 기술 관료들입니다. 그런데 그 글을 쓴 사람이 이야기가 자신은 중국의 미래를 그렇게 밝게 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조금 더 잘 살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왜냐하면 나라가 움직이는 자들이 테크노 크라트들입니다. 그래서 중국에 가면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이 전부다 30초반이 아니면 중반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돈으로 외국에 가서 물을 먹고 세계정세에 빠삭한 사람이 와서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합니다. 그런데 그 글쓴이가 주장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나라를 효율화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경제대국으로 만드는 그 일에는 그 사람들이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지고 있지만 그 테크노 크라트들에게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어떤 철학을 가진 사상적으로 통일된 민족이 그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게 하는 그런 궁극적인 가치를 가진 나라로 만들 것인가 하는 이상형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는 결국 발전해도 치열한 경쟁만 있는 그런 사회가 될 뿐이고, 조금 번영한 사회가 될 뿐이지 그런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가치를 갖고 그런 아름다운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은 철학이 있어야 한다며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미래의 어두운 전망을 입증했습니다. 아주 깊이 동감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성실하고 창의성이 있고 그리고 순발력이 있는 놀라운 민족입니다. 순발력 하면 우리나라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놀라운 민족의 성질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는 혼이 없습니다. 모두 기회주의자가 되어가는 듯한 인상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나라의 미래를 삼성그룹에 걸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것이 하나의 오늘날 동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한국백성들의 자조적인 투표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 절망을 봤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종교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신문의 통계를 보면서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내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이 나라, 우리 스승들이 살아간 이 나라는 어떻게 할까? 결국은 한 시대가 지나가고 나서 2-3살 박이들이 청년이 된 다음에는 100중에서 95명이 이 땅에 나를 낳아준 내 부모를 원망할 수도 있는 나라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너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처에 불의와 그리고 거짓, 비능률과 불안, 그 더러운 추문들과 합리화되지 않는 이런 불안전한 시스템, 그 속에서 기생하는 수많은 악들 이런 것들을 봅니다. 그러면서 모두 정신적인 지도자가 없는 때 마치 목사 없는 교회의 교인들이 유리하듯이 이렇게 살아가는 이 민족을 보면서 어떻게 이 나라를 좋은 나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이 나라에 태어나고 지금 이 순간에 이 나라에 있다고 하는 것을 감사해요. 왜냐하면 할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국적을 취득하기 가장 어려운 나라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스위스입니다. 스위스의 국적 취득하는 요령이 엄청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설령 귀화하고자 해도 법적으로 모두 여건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요즘은 어떨지 모르지만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12억의 현찰을 내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이 나라가 스위스같이 좋은 나라라면 휴지를 안 버리고 코 안 풀고 야유회 가서 콜라병 안 버리는 것, 주의하는 것 이외에는 아마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조상들이 다 해났으니까. 그러나 이 나라는 얼마나 할 일이 많습니까? 진짜 선교 초기와 같습니다.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금수강산에 일하러 가세, 할일 많아 일군을 부르니 반도강산에 일하러가세, 그때 땅을 개간하고 그래서 먹고 산다고 애를 썼지만 이제는 혼을 불어넣고 이 사회를 고치기 위해서 해야 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이 어두운 역사의 최고의 보루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지 예수 믿는 사람들까지도 거기에 휩쓸려서 협착하고 사기 치면서 그렇게 부정직하고 불의하게 살면 이 나라가 너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이제 이 나라는 누구에게 의지하며 누구를 믿겠습니까? 이일로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을 받은 다음에 담을 넘어간다고 하는 것은 무슨 (?)하듯이 담 넘어 간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 속에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신 속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하는 그 무엇이 그 안에 깃들어있고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올곧은 삶이 아니면 결코 역사의 현실과 한번 맛 붙어도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렇게 타협해서 맛 잃은 소금으로 불 꺼진 등불로 한 세대를 살다가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조국교회의 문제에 대한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을 다루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어제도 출판사에 경영자가 와서 그 글을 이렇게 들으면서 목사님, 목사님은 조국교회라는 말을 많이 쓰시는데 목사님 말고는 관심 갖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교인들은 다 자기의 문제에 골몰해있어서 자기 문제를 해결해주는 방향을 찾는 글들을 원하지 조국이 어떻게 조국교회가 어떻고 민족이 어떻고 다 귀신 씨알아 까먹는 소리로 알지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니엘이 모든 백성들이 잠들어 있을 때 예레미야의 서책을 보고 감동한 후에 눈물로 하나님 앞에 그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일해주시기를 간구하고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 역사의 어두운 한 마당에 얼굴을 구하면서 매달리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시작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할 수 있으면 우리들이 이 나라를 고쳐야 합니다. 이 민족에게 혼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이 불쌍한 내 동포의 가슴에 정말 어떻게 살아야지 이 나라가 그래도 아름다운 나라가 될까?
여러분, 신문이나 외국의 잡지들을 읽으면서 분노를 느끼지 않습니까? 어느 정신 나간 녀석이 그랬습니다. 한국은 6마리의 큰 코끼리에 둘러싸인 작은 동물이다. 그가 아마 말하고 싶은 것은 생쥐였을 것입니다. 생쥐다, 6마리의 코끼리에게 다 잘 보여야지 한두 마리 잘 보이면 다른 코끼리들이 성내고 한번 밟으면 국물도 없다. 그런 식으로 글을 썼습니다. 분노를 느끼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나라에 발길로 휘둘리고 저 나라에 발길로 휘둘리고 말이지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라는 그만두고 개인적으로 살아도 그렇게 사는 것은 사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정신을 차리고 살지 않으면 그 다음에 우리 후손들도 똑같습니다. 6마리가 아니라 17마리의 코끼리에 둘러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와 거룩의 자원들을 활용해서 어떻게 하든지 혼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이 백성들 속에 진정한 혼을 불어넣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의로운 민족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힘써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삶이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살아가야합니다. 그렇게 문제가 많은 나라에서 태어나게 하셨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주님 할일이 많은 나라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올바른 길을 걸어가면 정신을 차릴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엉터리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혼이 빠진 사람들이니까. 그러니 감사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좀더 작게 생각하면 열린 교회에서 우리 만나게 된 것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닫힌 교회에 갔으면 어떻게 할 뻔 했습니까? 이렇게 만나서 들어올 때는 열려서 쉽게 들어오고 나갈 때도 열렸으니까 쉽게 나가고 그런 열린 속에서 위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힘을 얻으면서 생활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목회자와 온 교인들이 이제 적어도 이 교회당의 마당에 발을 딛고 들어서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신앙의 도리가 무엇인지 올바르게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던 불행한 사람들은 없게 하려고 하는데 모두 합의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힘쓰고 애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렇게 영역을 작게 줄어만 가도 하나님의 선택의 사상은 모두 적용이 되고 이렇게 되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 서있는 것도 우연히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감사한지 생각해보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아멘도 못하고 말이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구원해주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성령으로 거룩케 하시고 진리를 믿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이 선택의 기초에서 일어난 사건이 구원사건이 아닙니까? 사실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에 죽음의 기원에 대해서 많이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여러분 나이가 들게 되면 몸이 아픕니다. 젊어서는 빨리 달려갈 수 있는 길인데 나이가 들면 잘 못 달려갑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운동이 따로 있고 나이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운동이 따로 있습니다. 저는 꼭 해보고 싶은 운동이 스카이다이빙입니다. 대게 해보고 싶은데 여러 사람이 말립니다. 하는 게 아니라고, 그 다음에 또 해보고 싶은 것이 또 있는데 그것은 인라인 하키, 온 몸으로 부딪히면서 퍼그로 밀어내는 그 아이스하키 말입니다. 그것을 인라인 타고 하는 것이라고 인라인 하키입니다. 여러 사람이 진정하시라고, 왜냐하면 젊은 사람들도 수시로 뼈가 부러지는 운동이 바로 그런 운동입니다. 그러면 게이트볼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다 나이마다 하는 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사는 것인데 사실은 도처에 죽음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여러분, 나이 들면 몸도 마음도 움직일 수 없고 치아도 성치 않고 걸음을 걸을 때도 조심해서 걸어야하고 심지어는 지팡이를 붙들고 걸어야 합니다. 죽음의 기운이 온 몸에 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쇠현상이 오는 것입니다. 또 노쇠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젊은 날에 며칠을 일하다가 며칠동안 앓아서 끙끙 않습니다. 죽음의 기운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내면에 누구에 대한 미움이 생겨납니다. 독버섯처럼 미움이 자라고 먹구름처럼 뭉개 뭉개 피어올라서 자신의 마음과 영혼 전체를 어지럽힙니다. 죽음의 기운이 번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독이 들어간 주사를 맞으면 그 주사 때문에 온 몸에 독이 퍼져서 그래서 결국 그 독이 느껴지듯이 죽음의 기운이 퍼져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런 죽음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그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사람들은 그런 죽음의 기운을 어떻게 이깁니까? 사람들을 막 미워하게 되니까 그 속에서 복수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제거함으로서 자신을 극대화시키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그렇게 이 세상에 있는 죽음의 기운이 자신의 온 몸에 번지면서 그것을 어떻게 저항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수많은 자원을 가지고 거기에 한번 맞서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황제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서 수많은 어린 젊은이들을 우리나라까지 보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정신 나간 녀석이지 불로초가 어디 있다고, 황제보고 녀석이라고 해서 안 되었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정신 나간 것입니다. 불로초가 어디에 있어, 안 늙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최근에 신문을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김일성이 자기 자신의 몸을 잘 보호하기 위해서 덮고 자던 이불이 있었는데 그게 참새 목덜미에 있는 작은 털로 모아서 만들었는데 김일성 혼자 덮고 자는 이불을 하나 만들기 위해서 70만 마리의 참새가 봉사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결국은 그 몸 전체를 덮고 오는 죽음의 기운을 이길 수 있었습니까?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죽음의 기운 속에 완전히 삼켜버리고 그는 죽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결국은 이길 수 없는 죽음의 기운들을 이기면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영생이라고 하는 통로입니다. 영생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자원들이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이 정해준 가운데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는 죽음의 기운이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육체가 죽음의 기운에 의해서 삼킨바 될 때 그의 영혼도 함께 삼킨바 됩니다.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그 하늘자원을 영생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공급받으면서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누리고 살아가는 동안에 그 하나님 앞에 육체는 죽음의 기운에 의해서 영원히 감싸짐을 당해도 영혼은 그것으로부터 훨훨 날아서 자유로워지고 오히려 육체가 죽음의 기운이 삼킨바 되면 삼킨바 될 수록 영혼이 더 밀착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붙듭니다. 그리고 그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그래서 살아갑니다.
그런 경험을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하나 속사람은 새롭도다.” 그랬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하늘자원을 공급받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입니다. 미움과 원망 같은 것이 밀려와서 자기를 모두 소진시킬 것 같은 그런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라는 통로에서 은혜의 자원들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지체가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신앙적인 박해를 받았습니다. 너무 심하니까 나중에는 아버지가 미워졌습니다. 뭘 했다고 사명감을 가지고 자녀들을 핍박하는지 하여튼 너무나 핍박합니다. 그때 이 자매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하루는 그날도 교회에 갔다가 아버지가 심하게 모독을 주면서 책망을 하는데 잠시 침묵이 흘러서 아버지를 쳐다보는데 아버지의 완악한 옆얼굴이 보이는데 그 순간에 성령의 역사가 확 밀려오는데 가슴이 미어질 것처럼 그 아버지가 불쌍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서 자기 자식을 모질게 핍박하는 그 영혼 안에 없는 하나님과의 평화, 그 영혼에 오히려 가득 찬 피곤함과 하나님을 향한 증오, 이런 것을 보며 저 영혼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피곤할까? 그러면서 막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더랍니다. 야단을 맞아서 우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자기를 그렇게 핍박하는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서 우는 것입니다.
그 후로부터 아버지가 미워지지 않고 너무나 불쌍한 마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영생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공급되어지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게 우리를 그렇게 바꿔놓습니다. 할렐루야!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약에 구원에서 소외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수 있을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살아가는 그 삶이 어떤 종류의 삶이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데살로니가 교회, 핍박과 고난에 에워싸인 이 어린 교회를 바라보면서 사도가 그 많은 근심 중에도 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마땅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런 것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난주간 내내 한 두 주간동안 내 입술에 계속 맴돌고 있는 찬송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교회의 역사를 쭉 읽으면서 제 머리 속에 계속 맴도는 찬송이 있었습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지혜와 사랑과 생명 구원의 하나님 우리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며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도 슬픔도 이기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그 영생의 통로를 통해 공급되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힘이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악바리적인 깡다구의 기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과 육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용감하게 살고자 하는 자마다 더 많은 영혼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을 이기고 슬픔도 견디기 위해서는 더 많은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피어린 역사의 현장에서 고난과 모욕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약도의 길을 걸어가는 위해서는 더더욱 영혼을 움직이시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축복들이 구원을 통해서 온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공급하시는 은혜입니다. 바울의 예상을 깬 것입니다. 그 어린교회가 박해가 오면 정말 힘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 핍박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꿋꿋하게 살아갑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무슨 힘으로 그 데살로니가 교회가 살수 있었을까? 공급해주시는 것이 없이 그렇게 살수가 있었겠습니까? 자신 안에는 그런 자원이 없는 게 인간입니다. 공급해주시는 은혜가 있었으니까 산 것입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 그리고 한번 접붙인 교회를 버리지 아니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그 신실하신 교회의 머리되신 그 사랑, 이것들이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고난도 이기고 시련도 이겨나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핍박과 고난이 오면 올수록 그들의 신앙이 더 연단되어서 강화되어지고 자신들에게서 영생을, 생명을 빼앗으려고 하는 자들을 만날 때마다 과연 자기 안에 주신 영적인 생명은 육신의 목숨을 버리고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역설적으로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핍박이 그들의 신앙을 오히려 견고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담대하고 강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 세워지도록 만든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들이 걸어온 길이 아마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해도 쉬운 길은 없었지만 지난 한해도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죄 때문에 그랬고 또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걸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평탄한 길을 떠나서 가시밭길을 택했고 융성이 대접받는 길을 떠나서 고난을 받는 그 시련의 가시밭길을 택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 한해는 이만한 인생을 살면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그런 한해였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생각해보면 지난 한해를 살아온 것이 어떻게 살았는지 정말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돌아보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도 너무 많고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도 많고 막상 고난의 길에 섰지만 믿음으로 그 고난을 끝까지 인내하지 못한 것도 아마 여러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우리들이 할말이 없는 이유는 고난보다도 주님이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영혼의 은혜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진멸되지 않고 거미줄 같은 믿음을 붙들고 지금 여기 서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정말 맞닥뜨릴 때는 생각하기 싫은 매일 매일의 현실이었고 그리고 수시로 이 땅에 살면서 발뒤꿈치를 들고 하늘나라를 앙모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않고 살게 할 만큼 그렇게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 찬 시기들이었지만 어쩜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할 수 있겠으며 그분이 이 세상에서 전적으로 소외당하신 그 외로움에 우리들이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많은 고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불평할 수 없는 이유는 고난의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두시거나 시련에 때에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런 성실하신 하나님을 날마다 새롭게 만나는 고난의 길이었지만 경험하는 은혜도 예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새 은혜였기 때문에 거기서 새 힘을 받았고 그래서 시련도 이기고 고난도 견디면서 여기까지 부족하나마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오게 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안 해주신 것이 무엇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모두 베풀어주셨고, 그래요. 그런데 인간의 생각이 너무 간사하기 때문에 때로는 모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안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이것도 저것도 결핍되어 있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면 감사가 다 사라집니다. 생각을 바꾸어보십시오. 그러면 정말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모두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모릅니다.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생명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날 생각하네
감사합니다. 주님의 공급해주시는 은혜가 우리를 여기까지 미끄러지지 않고 살게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공급하신 가운데 우리에게 영적인 것만 공급해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이 땅의 자원들도 하나님이 공급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영생의 통로를 통해서 하늘 자원을 공급받으며 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하늘자원으로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십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영생을 통해서 공급되며 누리는 또 하나의 특권이고 기업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물질적으로 부족하거나 이 땅의 자원이 모자랄 때도 세상에 가서 구하지 아니하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이 땅의 자원도 누리게 해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큰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모든 것이 자기의 뜻대로 안 되어서 만족하지 못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있고 또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지금도 애쓰는 사람도 있고 사업이 어려워서 시련을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이야기하듯이 얻어먹고 살 기운만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좋은 직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감사하고 또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보다 더 나은 기회를 기다리면서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젊음을 주신 주께 감사하고 그리고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미래를 기다릴 수 있는 인내를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한번 지난 한해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안 주신 것이 없습니다.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공급해주시고 하나님께 채워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베푸신 그 많은 물질의 축복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런 물질의 공급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한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였고 얼마나 크신 사랑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난 한해 특별히 돌아볼 때 교회적으로도 너무 감사합니다. 이 땅에 교회가 있기 때문에 하늘의 자원으로만 충분하지 않아서 땅에 있는 성도들이 이 땅의 자원인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그것으로서 미래의 교회를 준비하고 선교를 준비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길러내는 목양을 위해서 기여하도록 자리도 마련하고 건물도 사고 필요한 것들도 취득을 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나가는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주께 하듯이 물질을 드리고 그리고 자신은 궁핍한 자가 되어서 성도들을 부요케 하려는 그런 착한 마음을 가진 성도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교회를 있게 했고 그리고 우리들이 이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이 공급해주신 것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주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공급해주시는 은혜와 사랑 때문에 믿음으로 이제껏 살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이 이제껏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셔서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넘치도록 누리며 살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오늘은 주께로부터 받은 것들을 헤아리면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리고 주님 한분 때문에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던 그 첫사랑 때의 감사의 정을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기고 우리의 얼마 남은 인생을 그분의 신실하심을 끝까지 붙들고 사는 인생이 되도록 우리가 그렇게 결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추수 감사절에 여러분이 해야 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