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이 없고 교만함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5-16)
게으른 자의 두 가지 특성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핑계와 나태입니다. 사자가 길에 있다는 핑계 돌쩌귀를 따라서 문이 계속 도는 것 같은 나태함이 인격적인 특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다음에 나오는 인상 깊은 두 절의 말씀에서 큰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그 중 첫 번째가 뭐냐면 게으른 자는 열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배가 고픕니다. 음식을 먹어야 되겠죠? 음식이 그릇에 가득 있는데 게으른 자는 그 음식 위에 손을 얹고 그거를 들어서 입에 놓는 이 일이 매우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게으른 모든 사람이 음식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할까요? 아니죠. 이것은 하나의 문학입니다. 게으른 사람도 억수로 먹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절대로 그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괴롭다고 느낄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게으른 사람으로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 방법으로 꼭 인간이 음식을 먹어야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거 같이 꼭 필요한 일인데 그 의무를 게으른 사람은 매우 매우 힘겨워한다는 뜻입니다. 원인은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정이 있으면 아이디어가 샘솟듯 솟아납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만약에 지적 검사나 인성 검사를 해보면 창의력이 원래 뛰어난 사람이 있고 많이 쳐지는 사람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검사를 해보면서 하나 느끼는 게 있었습니다. 문제지들이 요새 많이 발달되어 기가 막힌 것도 많이 나옵니다. 일본 회사에서 다 시험을 보고 그 검사를 하고 결과지를 회사에서 받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몰랐던 부분을 평가하는데 자료로 활용합니다. 이번에 우리 교역자들 채용되는 사람부터 그 검사를 받게 합니다. 근데 그 검사가 놓치는 게 있습니다. 못 찾아내는 게 있습니다. 뭐냐면 어떤 특성이 본성적인 것인지 은혜로 변화된 것인지를 못 찾아냅니다. 이분들은 은혜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으니까 본성은 운명이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따라서 이건 절대로 안 바뀌는 것이라고 보는 데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음악을 못하는 사람이 연습을 통해서 파바로티가 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 마리아 칼라스가 된다든지 한번 해보세요. 강성경 전도사님 한번 해보세요. 마리아 칼라스가 되나. 한 달에 1억 원짜리 과외를 해도 절대 안 됩니다. 근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러나 하면 됩니다. 제 소원이 네슨 도르마를 한번 C 코드로 불러보는 것입니다. 어느 음대 교수가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두 가지에 달렸습니다. 목젖이 얼마나 긴가 하고 얼마나 두 번째 얼마나 연습하나 입니다. 전자는 마음대로 못하지만 후자는 연습하면 가능하겠습니다.” 해보진 않았지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때 놀랍게 바꿔놓습니다.
여러분, 믿으시겠어요? 제가 학교 다니는데 제일 싫은 시간이 개학하는 날이었습니다. 새롭게 얼굴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게 너무 쑥스럽고 싫었습니다. 세 명을 모아 놓으면 말을 못하던 사람입니다. 지금 30만 명을 모아 보세요. 그럼 내가 말을 더 잘하면 잘했지 못하겠느냐고. 그럼 이렇게 잘하는 것과 그렇게 세 사람 앞에서도 부끄러워하던 것 중 어느 것이 내가 타고난 본성이냐 물론 그노시스 검사하는 사람들은 이제 두 번째라고 이야기하겠죠. 근데 나는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느 작가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천재성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천재성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 자기 시대의 문화와 끊임없는 교류 속에서 태어난 그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진짜 나는 창의성 같은 거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필요한 것을 따라서 계속 노력할 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열정도 결국은 ‘나는 원래 이렇게 사람이 좀 쿨한 사람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누구나 뜨거운 사람이 됩니다. 그 뜨거운 것을 어떤 방식으로 퍼붓느냐는 사람에 따라서 각각 다르겠지만 그러나 이 뜨거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지푸라기가 타는 것도 불입니다. 그래서 나무가 타는 것도 불입니다. 플라스틱이 타는 것도 불입니다. 쇳덩어리가 시뻘겋게 녹아내리는 것도 불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불이 있겠지만 사랑하면 열정이 없다는 게 그게 말이 됩니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면 당연히 같이 있고 싶고 그리고 헤어지고 헤어지면 보고 싶고 그게 사랑입니다. 아무렇지도 않다? 원래 사랑하지 않았던 겁니다. 사랑 이꼴 열정입니다. 열정적인 모습이 곧 사랑은 아니지마는 사랑하면 반드시 열정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박철웅 목사도 아마 프러포즈할 때 열정적이었겠죠? 한 여자의 마음을 낚는데 열정적이 아닐 리가 있겠어요? 뭐 오려면 오고 말려면 말고 그랬어요? 아이는 저절로 태어나지만, 아내는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열렬한 구애 속에서 얻어지는 거죠. 반대도 마찬가지죠.
그럼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며? 그럼 열정이 있어야 할 그거 아닙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어떤 일이나 의무가 그 음식의 다 이게 올려만 놓고 이렇게 먹기만 하면 되는데 이게 그렇게 괴로워할 정도라면 결국은 진짜로 이 일이 괴로워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실 이제 부흥에 대해서 깊이 심취하고 제가 청교도들 읽을 때 가장 많이 탐구했던 어떤 주제가 열정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열정. 모든 사람의 동일합니다.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에게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웨스턴 민스터 채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는데 가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의 전기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떻게 이렇게 차가운 겨울 벌판 같은 교회가 있을 수 있을까요? 후에 많이 변화되고 금요일 밤마다 그 냉철한 영국 사람들이 천이백 명씩이나 모여서 로마서 강해를 듣습니다. 설교를 하다가 말문이 매어서 이 세상에 타락상들을 이야기란 말문이 매여서 “오, 주여. 세상을 가엾이 여겨 주시옵소서.” 탄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열정이에요.
의사들이 진단할 때 그냥 온 사람을 전신 PET 촬영을 합시다.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CT 같은 거를 다 촬영하는 것입니다. 그게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200만 원씩 하는데 자주 받으면 안 됩니다. 엄청나게 많은 방사능 피폭량이 이루어진 것 그 대신 0.5cm까지의 모든 암을 위치에 상관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찾아냅니다. 근데 그 사람이 오자마자 그렇게 놓고 그렇게 PET를 집은 넣어 암 검사를 하자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그리고 그게 바람직합니까? 그게 뭐 만 일 년에 한 번씩 받는다 그럼 그거 때문에 암에 걸리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아예 거기서 “이거 자주 받으시면 큰일나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선생님, 혹시 가족력이 위암인데...” 의사 선생님이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게 “어떤 징후가 나타나세요? 밥 먹고 속이 더부룩하세요? 변은 보세요? 피가 섞여 나와요?” 물어봅니다. 이게 뭐냐 증상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증상을 물어봐서 증상을 추적해가지고 속에 문제가 뭔지를 타진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들으십시오. 신앙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남들이 간과할 수 있는 증상을 보고 그 질병의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 영적인 목회입니다. 그런 방면에서 청교도들은 아주 뛰어났던 것입니다. 그럼 보십시오. 음식조차도 이렇게 손에 딱 들어서 먹는 게 괴롭게 느껴집니다. 그러면 그런 현상이 계속된다면은 그건 증상입니다. 그래서 속이 더부룩하거나 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증상입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얼마나 이 사람의 영혼이 망가졌으면 이렇게 될까? 그걸 더듬어 가 보니까 여기서 영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정이 없는 것은 정신 전체가 병든 것입니다. 교사 리바이벌을 1999년에 썼는데 그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 아주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였습니다. “그가 누구든지 간에 못 배워 뜬지 감에 혹은 뭘 좀 부족하든지 간에 하루에 두 번씩만 펑펑 울 수 있는 교사라면 영혼을 맡겨도 된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십자가에 구속 때문에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울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열정으로 무엇이든지 그 영혼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총신에 1억 원 기증하러 갔다가 우리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교구에서 보면 어떤 사람이 진짜 예수 맞는 사람인지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콘택트 시대가 아니라 언 콘택트 시대, 콘택트 시대에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예배도 모일 수 없고 구역 예배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니까 어느 구역장이 진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속에 사랑이 있고 열정이 있으니까 그걸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정이 없는 것은 그 자체가 삶 자체가 상한 음식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뭐 고베 스테이크를 먹었다고 칩시다. 고베 스테이크가 나는 못 먹어 봤는데 얘기 들으니까 도쿄에서 1인분에 55만 원이라고 합니다. 또 2달 전에 예약 안 하면 자리도 없답니다. 아무것도 안 주고 샐러드 하나, 수프 하나, 토스트 하나, 그 다음에 스테이크 하나입니다. 크지도 않아요. 300g 정도 되는 거 하나 주는 것입니다. 그 대신 10등급으로 굵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근데 아니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어마어마하게 귀한 식품이라고 할지라도 썩었는데 먹겠습니까? 상했는데. 사실은 열정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불쌍한 게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불쌍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느 음식점 사장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올린 것을, 인터넷에서 올린 것이 아니라 신문에서 봤습니다. 음식점을 차려 놓았는데 손님이 안 오는 겁니다. 너무 괴로운데 한 사람이 와서 먹고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SNS에다가 정말 맛있었다고 올렸는데 그 핸드폰을 가슴에 품고 밤새 그 청년이 내내 울었답니다. 그 사람이 보내준 한 통의 리뷰가 자기가 주저앉지 않게 해주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밥집을 해도 그거 하나를 붙들고 가슴에 안고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음식 장사를 하는 사람의 열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데 이 섬김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섬김인가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해야 합니다. 매번 열정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 열정이 바로 우리가 얼마나 은혜생활을 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 가고 없는 교역자지만 어느 직원인 평신도에게 이야기했답니다. 자기는 청년 때에 열린교회에 왔는데 목사님이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설교시간에 눈물을 흘리는 것에 대해서 너무 생경스러웠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자기도 그렇게 눈물 흘리지는 못하지만, 어렴풋이 이해가 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더 세월이 흐르고 주님을 깊이 만나면 자신도 눈물을 흘리게 되겠죠? 그게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깊이 89년도에 만나고 깨달은 건 뭐냐면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담는다는 게 상당히 거짓말이 많구나 였습니다. 한순간에 주님이 곧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이식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배를 가르고 당신의 마음을 쏙 집어넣고 뚜껑을 딱 닫아버립니다. 그렇게 주님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진짜 행복한 사람은 대접을 받고 뭘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은 여러분 모두가 다 동의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 주님을 위해 살고 싶어. 근데 진짜 그럴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난 날 위해 살고 싶은데, 세상을 위해 살고 싶은데 근데 주님을 위해 살도록 삶이 주어졌습니다. 끊임없는 고통이고 괴로움입니다. 만약에 끈을 탁 풀고 자기 원한 대로 살게 됐다고 칩시다. 삶이 뭡니까?
어려운 일이 있다고 교회를 안 다니겠다고 상담 온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이렇게 남자 비겁하냐? 차라리 배교를 해라. 목사가 배교하라는 게 말도 안 되지만 니가 하나님 없습니다. 난 안 믿고 무신론자로 살겠습니다. 이렇게 교회 안 가면은 남자다운 거다. 근데 하나님은 있고 두려워하면서 어려운 일 만났다고 니가 교회를 안 다녀? 그런 비겁한 겁쟁이가 어딨냐? 성경 봐라. 잘나서 주님 만나서 주님의 품에 눈물을 흘린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봐라. 모세도 자기가 모자랄 때 주님의 품에서 울었고, 엘리야도 그 큰 능력을 주었지마는 굶어 죽을 지경이 돼서 주님의 품에서 눈물을 흘렸고, 사도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라 그럴 때 주님의 품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아니 니가 잘못했으니까 지금 예수님을 한창 찾아야 될 때지 잘못한 게 뭐니? 아니면 니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거 아니냐?”
근데 이렇게 말하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은 아픈 게 뭐냐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이렇게 열정이 없는 것이 영혼의 중병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중병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한 자매가 여러분들을 열렬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뭘 해도 다르지 않습니까? 도시락 하나를 싸가지고 와도 다르고, 양말 하나를 선물로 갖고 와서 신겨줘도 다르지 않습니까? 싸늘하게 식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뭘 한들 똑같겠습니까? 무슨 인연입니까? 살이 섞였습니까? 피가 섞였습니까? 돌아서면 남입니다. 부부싸움에 대해서도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입니다. 이렇게 정이 남아 있는 사람은 이게 맞습니다. 근데 돌아서면 남입니다. 왜냐하면 성이 다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저희 정말 여러분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그게 자기 욕망에 의해서 불어넣어 진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에 의해서 감화를 받은 열정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없습니다. 게으르다고 하는 것은 이 열정이 없는 아주 중요한 징후입니다. 의학에서 이야기를 심프톰(symptom)입니다. 그 증후를 보면서 여러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생각하면서 다시 하나님 앞에 열정을 회복하고자 하는 삶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