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와 나태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잠 26;13-14)
녹취자 : 허혜숙
잠언에서 이런 예는 흔히 있는 일이 아닌데 네 절을 연달아서 게으름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잠언에서 무수히 경계하는 것, 그리고 지혜로운 삶에 위반되는 심각한 도전을 ‘자기 사랑’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사실 잠언 전체가 자기사랑과의 싸움이라고 보면 됩니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사물에 대한 오성적 인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인식을 방해하는 것이 지성적 사물에 대한 감각입니다. 그래서 칼빈도 자신의 기독교 강요에서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에 대한 인식도 오성에 들어오고 감각도 오성에 들어오고 믿음도 오성에 들어오기 때문에 여기에서 많은 혼란이 생겨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전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마이클 호튼이 저의 책 게으름에 대한 추천서를 쓰면서 첫 마디에 자기는 성경을 읽으면서 잠언이 이렇게 자기사랑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고 있는 줄을 몰랐다. 게으름이 뭐냐 하면 자기 사랑이 육체로서 표현된 것입니다. 그것이 게으름입니다. 그 게으름의 뿌리는 싫증입니다. 그것과 전체적인 싸움입니다.
첫 번째 게으른 자는 끝없는 핑계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무슨 뜻입니까? 잡아먹힌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자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무섭고 용맹스럽기 이를 데 없는 짐승이었으니까 잡히면 찢어 먹히는 것입니다. 끔찍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핑계를 끊임없이 대면서 이 문장이 그 다음 문장과 짝을 이룹니다. 나가서 남자가 일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은 안 하고 가난뱅이의 삶을 살면서 아내가 어떻게든지 나가서 밭일이라도 해서 살면서 밥을 얻어먹으면서 남자는 침상에서 뒹굴뒹굴 구르고 있는 그 상태를 생각하면서 13절과 14절을 이야기 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계속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함께 사역을 해 보면 잘 알지만 열렬히 부지런하게 일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핑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격적으로 자기 일에 열정을 품고 일을 하는 사람은 핑계를 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관심사는 핑계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이 핑계입니다. 그러나 열렬하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과오에 변명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들이 이루어지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사람은 끊임없이 과거 지향적이고 진취적이지를 못합니다. 열정을 품은 사람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핑계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냥 내가 잘못했다고 해서 마음이 풀릴 것 같으면 해 주고 싶고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들은 끊임없이 핑계거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변명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고 이런 태도가 본성 전체에 베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심리학적인 검사에서 이야기하는 진취적인 기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리더가 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훌륭한 핼퍼가 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늘 리더에게 끊임없이 부담이 되고 조직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읽은 이야기이지만 쉐클턴의 ‘위대한 항해’에서 보면 쉐클턴이 극지를 여행을 합니다. 결국 배가 좌초가 됩니다. 1200km를 오직 지도 한 장 들고 바다를 가로질러서 어느 섬에 가서 구조요청을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 때 대원들이 약 40명이 있었던 것 같은데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단합이 안 되고 분열이 됩니다. 대원들이 굶어 죽어가다가 방법을 찾아 낸 것이 물개를 잡아서 먹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그러면서 물개를 잡아서 찢어서 햇빛에 말려서 먹고 했는데 리더 쉐클턴이 가만히 생각을 합니다. 자기가 있으면 통제가 되는데 자기가 떠나고 나면 대원들이 서로 분열이 되어서 서로 잡아 죽이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일으킬만한 사람들을 모두 뽑아서 구조요청을 하러 가는 배에 태웁니다. 차라리 자기가 제압을 하던지 자기가 제압을 못 하면 바다에서 죽더라도 이 대원은 살려야 되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절대 리더가 못 됩니다. 헬퍼? 안 됩니다. 궁금하죠? 뭐가 될까요? 명성인 강도사님, 리더도 안 되고 헬퍼도 안 되고 뭐가 될까요? 그냥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없어도 괜찮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묻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도 사랑하지 않습니까? 물론 사랑하십니다. 모든 공동체 대원들이 하나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는 사랑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분명히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사’ 하셨습니다. 끊임없는 핑계, 그래서 게으른 사람의 특성이 앗쌀함(어쭙잖게 얄팍하게 굴지 않다-편집자주)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나중에 조사를 해 보니까 그가 잘못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것을 뒤집어 쓴 것입니다. 그런 예가 게으른 사람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예입니다. 앗쌀함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핑계, 이유, 변명, 이런 것들 속에 사는 것입니다.
수정같이 맑은 사람들에게는 아니면 ‘아니요’ 예면 ‘예’입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판단력이 명료하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생활의 태도라고 보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게을러서 돈을 조금 적게 번다고 한다면 아버지가 돈을 물려줘서 돈을 적게 번들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그런 문제가 아니라 손과 발이 움직이는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세계의 반영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진실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앗쌀한 사람, 그리고 칼 같이 누군가의 신세를 지기 싫어하는 사람, 싫습니다. 제가 왜 그런 도움을 받겠습니까? 딱 자르는 주체성,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 정도만 하겠습니다.
두 번째 마지막으로 14절 ‘문짝이 돌쩌귀를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돌쩌귀’라는 말은 지금은 거의 안 쓰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과학이 발달하지 않던 시절 문을 달아야 되는데 문을 수없이 돌려야 되는데 축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문틀을 이렇게 세우고 여기에다가 문을 다는데 여기 아래에 돌멩이를 이렇게 해서 구멍을 팠습니다. 위에도 구멍을 파고 아래에도 파고 그 속에 문을 짤 때 나무를 각목을 대고 나무를 돌쩌귀에 들어가게끔 해서 쇠로 쌉니다. 나무만 하면 금방 닳아서 떨어집니다. 그래서 돌쩌귀를 그것을 끼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새 발당해서 힌지라고 하잖아요? 요즘은 쇠로 된 힌지가 다 있습니다. 아주 탄탄합니다. 그래서 문을 항상 힌지를 축으로 해서 돌게 합니다. 어떤 문은 90도 어떤 문은 180도, 360도 항상 힌지를 따라서 돌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은 침상을 힌지로 사용합니다. 앉아있을 때도 침상에, 누웠을 때도 침상에, 엎드렸을 때에도 침상에, 구르다가도 침상에 복귀, 오늘 여기에는 도느니라 그랬는데 예전에는 구르느니라 고 했습니다. 침상에서 왔다갔다 떠나지를 못하고 그것이 축이 되는 것입니다. 허리가 아플 때까지 드러누워 있는 것입니다. 배가 고파야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게으른 사람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돌쩌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냐? 일반적으로는 게으른 사람이 잠을 많이 잔다는 것도 되지만 결국 끊임없이 자신의 본성에 매여서 살아가는 노예 된 생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2006년도인가 그 때쯤 교역자와 직원들에게 전체적으로 20명 정도를 교회 일을 그만두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 나름대로 많은 생각 속에서 내보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던 와중에 어떤 한 교역자에게서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새벽예배를 절대로 안 나왔습니다. 야단을 치고 심지어 면담을 하면 며칠 나오다가 나뒹굴어지고 안 나옵니다. 그래서 왜 그러나 봤더니 밤 12기 새벽 한시까지 교구 실에 앉아서 컴퓨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넷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이 침대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은 일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며 거기 묶여서 살기 때문에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모든 삶의 그림이 여기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 가장 게으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리모컨으로 TV를 보고 있다가 TV가 망가져서 리모컨이 안 듣습니다. 그것이 낙인데 TV가 망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TV를 번쩍 들고 전파상으로 뛰는 것입니다. 너무 부지런하죠? 그런데 역설적인 것이 그것은 게으르기 위한 부지런함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우리에게는 죄인의 기질이 있기 때문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에만 우리의 가슴이 뛰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전혀 없거나 하면 절대로 안 되는 일인데도 가슴이 뛸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죄인 된 본성인데다가 그것과 더불어 싸우지 않아도 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도를 지나쳐서 아예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어떤 목표를 가지기 위해서 달려갈 수 없을 정도로 그를 무기력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삶이 아닙니다.
예전에 연구실에 직원이 있는데 비싼 원서가 자꾸 복분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 왜 복분이 들어 오냐?’ ‘목사님이 써 주신대로 샀습니다’ ‘내가 수만 권의 책을 어떻게 외우냐?’‘체크를 해 주면 그것을 모두 두드려서 찾아서 이것이 있나 없나 그것을 확인을 하고 있으면 여기 있습니다 라고 하고 표시를 하고 없는 것을 사야 되지 않냐?’ 그랬더니 왈 ‘목사님,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굉장히 힘이 들어요’ 그래서 내가 그 다음에 그랬습니다. ‘야, 니 돈이라도 그렇게 쓰겠냐?’ 그 다음에 말이 없습니다. 저는 그 자매가 무엇을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화장하는 것을 좋아해서 립스틱을 고른다든지 아니면 남자들이 당구를 좋아해서 큐대를 고른다든지 볼링을 좋아해서 볼을 고른다든지 골프를 좋아해서 골프채를 고른다면 그런 식으로 골랐을까? 안 그랬을 것이다. 보는 것입니다. 결국은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 자기를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은 제가 단언컨대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게으른 삶을 살면 됩니다.
제가 몇 년 만인가 12년 만에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는가’ 개정판을 만드는데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이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나열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쓸모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 준비가 필요 없습니다. 굳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내키는 대로 게으르게 살면 아주 확실하게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부지런하게 산다고 했는데도 별로 쓸모가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이 가슴에 불타는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을 게으른 삶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심각성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묻고 싶습니다. 그대의 마음을 불붙게 하는 것이 무어냐는 것입니다. 전도냐? 기도냐? 학문의 탐구냐? 진리의 추구냐? 무어냐는 것입니다. 무언가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내가 영혼들을 돌보고야 만다라든지 무언가는 뛰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없다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내가 그 책을 다시 개정판을 만들면서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소명 아닙니다. 아무 일이나 해서 밥 먹고 살면 됩니다. 제일 비굴한 것이 종교 언저리에 얹혀서 밥 먹고 사는 것만큼 추하고 더러운 것이 없습니다. 소명이 아니라면 소명을 받은 사람은 게으르게 살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시계추를 20년 전으로 돌린다면 여기 있는 모든 직원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열렬하고 직설적이고 마음에 안 들면 보는 앞에서 펀치를 날리고 그랬습니다. 오죽하면 새벽기도 안 나오면 사모와 둘을 함께 불렀습니다. 면전에서 이 친구가 게을러터진 것은 너도 알지? 그런데 니가 발로 차서라도 니 남편을 깨우지 않은 네가 이해가 안 된다. 같이 죽을래? 같이 망할래? 자기는 자더라도 시간이 되면 답답해서 남편을 발로 차면서 당신 새벽기도 나가야지, 발로 차야 되지 않냐? 그런데 너희들 둘 다 죽을래? 게으름을 쓸 때가 2002년도인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그 때도 나는 글을 써야지 연구도 해야지, 밖의 사역도 어마어마하게 많지 몸이 셋이라도 모자랄 정도로 몸이 쪼개지도록 일이 많았고 허리는 아파서 매일 기다시피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아이스크림 푸는 스푼으로 어깨를 확 떠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체계적으로 치료를 받으면 좋을텐데 그 시간이 아까워서 우리 집이 3층에 있었고 내 서재는 2층에 있어서 새벽 한시까지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맘이 편했습니다. 애들이 아빠 어디 있어요? 하면 바로 아래층에 있다, 농담이 아니라 집하고 서재하고 구멍을 뚫고 봉을 타고 올라가고 싶었는데 우리 집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집에 들어가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야 되는데 죽겠는 것입니다. 저는 월요일도 없습니다. 그 때 그 글에 나도 그렇게 싫을 때가 있다. 그 때 내가 하는 것이 있다. 두 발로 이불을 뻥 차면서 ‘충성’하면서 일어난다. 지금은 못 합니다. 그것도 한 때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3년 전에 3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아야지만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내 체력이니까 버텼지 웬만한 사람은 죽었을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여러분들이 약 30년 정도 흐르고 나면 ‘충성’하고 이불을 뻥 차고 일어나면 몇 번 하고나면 뇌졸중으로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저녁 때 가서 기도합니다. 그렇게 게을러서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저는 정말 걱정이 됩니다. 열린 교회에 누를 끼치는 것은 크게 걱정을 안 합니다. 왜? 다른 충성스런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회를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어떻게 이 목회의 바다를 헤치고 지나갈까? 그렇게 연약해서, 그렇게 결심이 없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요즘 들어온 사람들은 못 들은 이야기라서 다시 합니다. 스물여섯 살에 결혼을 하고 스물일곱 살에 신학교에 들어가고 정확하게 스물아홉 살에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늦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사와는 상관이 없이 전도사도 아닌데 섬기던 교회에서 어느 날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결혼한 지 신혼생활 약 1년쯤 지났을 때인데 ‘김전도사 사찰 구할 때까지 교회 안에 살면서 교회를 좀 돌봐주면 안 되겠냐?’ 아버지 같은 목사님이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핑계를 댈 수 있겠습니까? 집에 가서 아내한테 이야기를 하는데 교회가 필요한데 그렇게 합시다, 해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석 달 있다 온다는 사찰이 3년 반이 지나도 안 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너무 편한 것입니다. 새벽 네 시 반이면 일어나서 난로를 여섯 개를 피워야 됩니다. 연기하나 없이 피워야 합니다. 지금도 난로 피우는 데는 일인자입니다. 그래서 저녁때 깨끗이 준비를 했다가 새벽에 거기에 갈탄을 탁탁탁탁 올려놓습니다. 난로 여섯 개가 활활 타도록 만들어서 불을 켜놓고 15분 만에 불을 켜고 새벽 다섯 시 45분에 목사님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일을 3년 반을 했습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게으르면 소명을 확인하라 이것이 정말 내 길인가? 소명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대해서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본적인 소명입니다. 거듭난 사람에게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경우에도 안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소명 받은 사람에게는 그 가슴이 뛰는 일이 어떤 경우에도 없으면 소명이 아닙니다.
내가 그 책을 쓰기 전이었는데 소선지서를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김경애 전도사님도 그 때 강의를 들었던 사람입니다. 첫째 그 클라스에서 한 학기에 다섯 명 정도가 내 강의를 듣고 신학교를 휴학을 했습니다. 그 중의 한 학생이 말했습니다. 제가 그냥 신학교에 들어왔는데 선지자가 이렇게 엄청난 소명이 큰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제가 1년 동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소명을 확인하겠습니다. 너무 잘했다, 이 길이 소명의 길이 아니라면 뭘 해서 벌어먹고 살아도 이것 보다는 낫다, 진짜 이것 보다는 낫다, 가라. 단병호라는 노조 투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잡지에서 읽었는데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신학교를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인터뷰하는 마지막 기사가 제 눈을 끌었습니다. ‘저는 공부도 많이 못 했고 나이도 너무 많고 소명을 받았다고 해서 신학교를 갔는데 나이 든 사람을 누가 써 주겠습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가슴을 울렸습니다. ‘저는 매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는 공부도 많이 못 했고 별 볼일 없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주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교회의 일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냥 게으른 사람 고쳐서 쓰시려고 애쓰시지 말고 그 사람 빼 내고 그 자리 날 주시면 제가 딴 것은 못 해도 부지런하게는 섬기겠습니다.’ 그것을 전철에서 옆 사람이 읽는 잡지를 곁눈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가슴을 쾅 때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기도가 응답이 안 되니까 다행인 것이지 응답이 된다면 교회 안에서 실직할 사람이 나를 포함해서 얼마나 많을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데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우리가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때 게으른 삶이라는 것은 꿈꾸지도 않은 것입니다. 자기를 다 드려서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러분들을 야단치는 것도 아니고 혼내는 것은 더욱 아니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엾은 사람이 게으른 사람입니다. 목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겠습니다만 게으른 사람은 자기 욕망대로 삽니다. 그래서 원함대로 안 이루어지면 그것이 힘들어서 더 무엇을 할 수가 없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그것은 굴러 떨어지는 삶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도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냥 나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부지런하게 살아야 됩니다.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그 짧은 시기를 미친 듯이 살아야 됩니다. 한 인생을 올곧게 산 사람, 그리고 들려줄 지혜가 마음에 가득한 사람, 그리고 내가 너무 부족했지만 이만큼 살았으니 참 감사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중에는 게으른 사람이 없습니다. 게으른 자는 열렬한 자의 회중에 들지 못하나니, 바꿔 말하면 악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듯이 게으른 자는 하나님을 열렬하게 경외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그 자리에 들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압니다.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러나 하나는 기억하십시오. 게으르게 산 날은 아무리 편했어도 세월이 흘러갔을 때 아무것도 남겨준 것이 없고 목표를 세우고 분투하며 산 날은 실패했어도 남겨주는 것이 있습니다. 교훈이라도 남겨줍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표준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이 다 일찍 죽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칼빈도, 스펄전도 조지 휘필드도 50대 중반에 죽었습니다.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가문이 그렇다구요? 아닙니다. 왜 그런 가문만 모아서 하나님이 소명을 주셨겠습니까? 과로입니다. 과로사로 죽는 것입니다.
박원순 시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틈만 나면 기자들에게 이야기 한 것이 내 평생소원은 과로사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시민을 위해 봉사하다가 과로사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리학적인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과로사라고 했습니다. 내가 말합니다. 우리가 맡은 소명이 서울시 일만 못합니까? 이웃을 위한 봉사만 못합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열정을 간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모두 건강하게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 김목사님 그렇게 훌륭하게 사셨는데 중풍 걸려서 반신불수 되셨다면서? 아무개 뇌졸중으로 쓰러 지셨데. 아무개는 치매가 와서 요양원에 계시데, 아무개는 암에 걸려서 지금 죽을 날을 기다리신데,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가 하면 박윤선 목사님이 자기 자서전에서 말하기를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다 왜? 올지 안 올지도 모르고 그 때는 내가 오늘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될지 못 하게 될 지 그것도 모릅니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