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의 정욕(1)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잠언21:25)
녹취자 : 이경순
제가 오늘 25절에는 히브리어 성경에 거의 대동소이합니다만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게으른 자의 욕망이 혹은 탐욕이 게으른 자의 욕망이 그를 죽인다. 이는 그가 손으로 일하기 싫어함이라 그랬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렇게 번역할 수도 있지만 그의 두 손이 만드는 것을 거절할 때 게으른 자의 욕망은 그를 죽여 버린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씩 생각해보겠습니다. 욕망이라고 번역되었고 예전에 개역성경에서는 이것을 정욕 이렇게 번역했는데 히브리말로 ‘타아바’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긍정적인 뜻으로도 쓰이고 부정적인 뜻으로도 쓰입니다. 예를 들면 시편에서 내가 생명을 구하였더니 주께서 주셨나이다. 이것은 나쁜 뜻이 아닙니다. 내가 내 영혼에 혹은 내 육체의 생명을 주님께 구한 것은 나쁜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쁜 뜻으로 더 많이 쓰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3장에서 보면 하와가 선악과에 접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보니까 보암직하고 할 때 단어가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보기에 즐거웠다고 하는 것, 특히 세상의 안목의 정욕을 이야기할 때에 이 타아바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 이외에도 죽 나열해보면 이 단어가 긍정적인 뜻으로도 쓰이고 부정적인 뜻으로도 쓰이지만, 부정적인 뜻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결국은 문맥에 따라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게으른 자의 욕망이 그를 죽이나니 할 때 이것은 욕망이라고 할 때에는 중립적입니다. 예를 들어서 살아야 하겠다는 욕망, 병이 낫고 싶다는 욕망 아니면 더욱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욕망, 우리말에서는 차이가 안 납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게 아닌데 욕망할 때 한자로 팔자 두 개를 쓰고 입구 자를 쓰고 옆에 이렇게 흠 자를 쓰고 밑에 마음심을 달면 욕 자가 됩니다. 마음심 변이 달리는 욕 자가 있고 심 변이 안 달리는 욕 자가 있습니다. 마음심 변이 달리는 욕 자는 죄를 구성하는 욕망이고 신변이 안 달리는 것은 그냥 순수한 욕망입니다. 예를 들자면 색욕 할 때는 마음심 변이 들어가지만, 식욕 할 때는 마음심 변이 안 들어갑니다. 먹는 욕구는 죄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생존 욕 생존하고자 하는 욕구라고 할 때는 마음심 변이 안 들어갑니다. 이 차이를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오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마음심 변이 들어가면 죄가 구성되는 욕망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타아바라는 단어는 정확하게 뭘 의미할까 생각해보면 결국은 이 문맥으로 보면 정욕입니다. 그러면 정욕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성적인 욕망, 죄를 구성하는 성적인 욕망을 가리키지만 그러나 넓게 보면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위에 놓고 살고 싶은 욕망입니다. 자기를 중심 삼아서 살고 싶은 욕망을 총체적으로 가리켜서 그래서 정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 특히 사도바울이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정욕이라는 말과 항상 짝을 이루면서 나오는 단어가 세상 정욕이라고 나옵니다. 굉장히 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욕망의 덩어리고 그 세상 욕망의 정체는 하나님을 이 온 우주의 중심, 하나님을 이 온 존재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제 소견에 옳은 것을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데 결국은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명예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고 돈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돈을 가장 높은 가치에 놓고 살아간다고 치면 진짜 돈이 가치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것을 원하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것은 모두 다 하나의 분신일 뿐이고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이 그것을 정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있어야 될 자리에 자기를 놓는 것이 죄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이 정욕이라는 것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욕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게으른 자의 욕망이라고 그랬는데 사실은 이 타아바가 진짜 그런 종류의 욕망만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것은 둘 다 포함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정욕과 넓은 의미의 정욕이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이 특별히 성욕이 강하다고 하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성경에 보면 태만한 사람이 이런 죄에 빠지게 되는 예가 다윗에게도 볼 수 있습니다. 치열하게 자신이 전쟁에 참여하고 나라를 건국할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상당히 부강하고 여유롭고 한가하게 그렇게 지낼 때 이런 정욕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인다고 했습니다. 하나씩 생각해봅시다. 정욕이라는 말은 설명했으니까 그러면 히브리 성경에 아체르라고 나오는 게으른 자인데 영어로 슬러프(sloth) 라고 합니다. 동물원에 가면 나무늘보가 있습니다. 늘보가 다 번역할 때 슬러프(sloth) 라고 번역합니다. 게으름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기가 막힌 게 지혜 자는 오랜 세월을 사람들을 대하면서 정욕, 탐욕에 가득 찬 자와 게으름이 깊은 연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파악한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부지런한 사람들도 정욕에 빠질 수 있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어떤 의미에서 게으른 사람은 뭔가 큰 꿈도 없고 욕망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초연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만 그런 구도로 이 구절을 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사람 이런 그림을 가지고 이것을 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첫 시간에 제가 이야기했듯이 이 잠언은 처세술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이 잠언에서 책망받는 사람들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에 두기 싫어했기 때문에 생겨난 타락한 인간의 관습들이고 이 잠언을 통해서 보여주는 인생의 길은 모든 세계가 구속되고 창조의 목적을 회복했을 때 그때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 그 질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아담과 하와에 의해서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인간이 그냥 벌거벗은 채 기타나 치면서 과일이나 따 먹으면서 물가에서 놀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식한 성경해석입니다. 왜냐면 노동 그 자체가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노동 그 자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그러니까 나이가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일하고 있는 젊은이들 되게 부러워합니다. 노동 그 자체가 특권입니다. 그럼 이렇게 고달픈데 무슨 특권이냐고 하는데 노동은 특권인데 죄가 들어오면서 노동에 고통이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 고통 때문에 노동이 저주처럼 여겨지는 것이지 노동 그 자체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어도 그 후손들은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지 빈둥빈둥 거리고 노는 것은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삶의 태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하면 너무너무 길지만 대충 그 정도 해서 정리를 하고 넘어가 보면 결국은 게으른 자의 정욕이라고 그럴 때 게으른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 그 뜻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에 푹 빠지게 되면 일정이고 다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딱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인생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됩니까? 전 아무 계획 없습니다, 주님 인도해 주시는 대로 갑니다. 어디로 가시는데요? 어디로 가시는데요,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갑니다.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타아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심각한 타아바가 그 사람에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게으른 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냥 노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향해 삶의 목적이 정의되지 않은 사람, 위치를 못 잡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타아바입니다.
게으른 사람이 모두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겠습니까. 부자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는 사람들은 가서 열심히 일하고 돈 법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여기 게으른 사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 모든 사람은 게으른 자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정욕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태미태누 라고 나옵니다. 죽인다는, 죽인다고 나오는데 여성으로 나오는 이유는 탐욕이 여성용 명사이기 때문입니다. 탐욕이 그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우습게 여기지만 여기에 ‘무츠’ 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나오는 것은 처음 나오는 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공포 속에서 주어집니다. 그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아주 엄중하고 무섭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죽는 것 오늘날 우리는 죽음을 수없이 보면서 사니까 사실은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던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자식의 죽음을 경험했을 때 그 충격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렇게 무서운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육체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게으른 자도 살아있으니까.
사실은 게으른 사람들이 오래 삽니다. 막 치열하게 불꽃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다 조기에 죽습니다. 일찍 죽습니다. 늦게 산 사람들이 다 불충성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스펄전 , 칼빈, 마르틴 루터 다 50대 중반에 죽었습니다. 웨슬리 같은 사람 빼놓고 휫필드 50대 중반에 다 죽었습니다.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시며 라고 시편에서 이야기했는데 중년에 다 데려가신 것입니다. 과로로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죽는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러면 우리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타아바’ 그 정욕이 그 탐욕이 혹은 욕망이 죽음과 바꿀 정도로 그렇게 소중한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결국은 죽이는 것은 그의 정신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일 안 하면 돈 못 벌어서 먹지 못해서 굶어 죽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한 인간으로서 충만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박지선이가 자살했습니다. 잠깐 동안이지만 마음이 너무 불쌍하더라고요, 좋은 대학 나오고 자기 얼굴 못생긴 것 가지고도 화제로 삼기도 했지만 그러나 어딘가 그 자매를 좋아하는 형제가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햇빛을 쏘이면 피부병이 도지는 그런 고질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결국은 불행해서 죽은 게 아니라 죽은 모든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살 힘이 없어서 죽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비참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죽는 게 결국은 정신의 힘이 모자라서 마음이 죽으니까 죽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가 이야기했듯이 절망이라는 병에 걸려서 결국 인간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친척 중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무슨 병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심각한 병은 아니었습니다. 심방을 갔는데 환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아니고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나 퇴원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나한테도 인사를 하면서 그렇게 사분사분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전혀 환자 갖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3일 뒤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 다 돌아가셨으니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부인이 병원에 있으면서 남편 직장에다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랬는데 남편이 어마어마하게 화가 난 것입니다. 직장에다가 자기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무슨 이해는 안 가는데 무슨 감정 상하는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와서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한테 퍼부은 것입니다. 남편이 간 뒤로 바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거의 뇌사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의사는 이해할 수 없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무것도 못 움직이는데 내가 가서 이야기하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뇌사 상태라고 하나 정신이 없이 의식이 없이 누워있다고 하는데 다 듣는답니다. 나중에 깨어나서 다 회상한답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약을 먹어야 되는데 간호사가 와서 약을 입에 넣어주려고 하는데 이빨이 움직이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될 것은 아무리 누군가가 나에게 나쁘게 했어도 그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해서 가슴에 대못을 박아야지만 시원한 것입니다. 시원한 게 진짜 시원한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복수가 보복을 부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영래 목사가 서너 살 될 때 일이었는데 사람이 저렇게도 죽을 수 있구나! 친정에서는 제일 황당해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도저히 모르는 것입니다. 의사들도 모릅니다. 그게 결국은 죽음입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렇게 그 사람의 정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는 자신은 자기가 죽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래서 지난 설교 시간에 ‘셋툼 모탈리아’ 라고 ‘7죄 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7은 일곱이고 죄는 죄이고 종은 최고다 이런 뜻입니다. 가장 높다, 머루종마루종 자입니다. 마루가 높다는 뜻입니다. 산마루처럼 높다는 뜻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살인은 7대 종에 안 들어갑니다. 그런데 게으름은 7대 종에 들어갑니다. 뭐냐면 죄들의 어머니들을 모은 것입니다. 그 새끼들이 살인 도둑질 등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역사에서도 게으름의 심각성을 본 것입니다. 그냥 일을 안 한다. 남에게 피해를 준다. 가난하게 산다. 이런 게 아니라 정신의 엄청난 질병 상태 라고 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결국은 인생을 살면서 무엇인가 한 획을 긋고 인생의 어떤 기록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일반 은총 차원에서 보아도 게으르게 산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썩 좋아하지는 않는데 정주영 씨 자서전을 쭉 읽으면서 확실히 비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시골에서 부모님 몰래 소 한 마리 끌고 훔쳐서 남한으로 옵니다. 소 한 마리가 그까짓 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결국은 다 쓰고 오갈 데가 없는데 지금 고대 앞 종암로에 쌀집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써 붙여서 육체 건강하니까 나 좀 써주세요. 그랬더니 쌀 두 가마닌지를 싣고 자전거를 탈 수 있어야 한다고 하니까 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으니까 자네는 안 되겠네 하니까 주인한테 사장님 제게 이틀만 시간을 주십시오. 이틀 안에 배워서 쌀 두 가마닌지를 배달하겠습니다. 하니까 주인이 못한다. 그게 그렇게 금방 배워지는 게 아니다 혼자 탄다고 해도 이틀에 못 배우는데 거기다가 오토바이나 자전거에 쌀을 실으면 완전히 다른 교통수단이 됩니다.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가마니면 160킬로 입니다. 혼자 탔을 때 쓰러지면 발로 집으면 되지만 160킬로가 쓰러진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되겠는지, 매우 어렵습니다. 내가 쌀을 싣고 떡 장사를 해봐서 압니다.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틀 만에 해낸 것입니다. 그리고 배달을 한 것입니다. 몇 년 흐르고 나서 주인이 쌀집을 정리하고 장사를 그만둘 때 그 쌀집을 정주영 씨한테 물려준 것입니다. 너는 참으로 사람이 되었구나. 너는 뭘 해도 될 거다. 하면서 이 쌀집을 네가 물려받아라. 그게 씨앗이 되어서 그 사람이 사업가로서 크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일반 은총 차원에서 봐도 의욕이 없는 사람들은 정신이 병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는 게으르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가 반짝반짝하고 머리에서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이 한 절을 다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반절만 하고 반절은 다음 주에 하겠습니다.
반절에서 하는 얘기가 이겁니다. 결론을 내리면 그러면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살아라.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살아라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를 가르치고 있는 중입니다. 지혜가 뭡니까? 지혜는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게으른 삶이라는 것은 너무 혐오스러운 삶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게으르게 살 때도 너무 눈물 나도록 슬픈 것입니다. 왜 저 고귀한 인생을 저렇게 인생을 허비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게으르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문제가 아니고 게으른 자는 정욕에 붙들린 자다. 두 번째 그 정욕은 그 사람의 정신을 죽인다. 한 인간으로서 자존감 있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정신을 죽이는데 한번 제사에서 짐승을 죽이는 것이나 아니면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돌로 쳐서 죽이는 그 광경을 생각해 보세요. 너무 끔찍합니다. 그 무섭고 끔찍한 일이 우리의 영혼을 향해서 일어난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너무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결론은 게으른 자는 정욕에 붙들리게 된다. 그 정욕은 우리의 올바른 정신을 파괴한다. 그것을 용납할 때 그 위에 건전한 삶을 수립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행복한 삶이 되겠냐 우리는 의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왜 그렇게 되는지를 하반 절에서 설명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