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의 정욕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 21:25)
녹취자: 김라영
지난 시간에는 “게으른 자의 욕망이 그를 죽이나니”를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욕망의 정체인 ‘하바’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부정적으로도 쓰이고 긍정적으로도 쓰였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 결정해야 될 문제인데 여기서는 자신의 정욕을 가리킵니다. 좁은 의미의 ‘정욕’은 성적인 욕망이지만 넓은 의미의 ‘정욕’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것이 그를 죽인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하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많은 메시지가 담겨있어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반절을 들어가기 전에 여기에서 보면 “그를 죽이나니” 그랬습니다. 여성 미완결형의 삼인칭 남성 단수가 목적어로 붙어있는 한 단어입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라고 했을 때 죽인다는 의미는 알겠는데 그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게으른 자입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자기를 죽이나니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죽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 꽂혀서 피를 흘리고 죽는 것만 죽는 게 아닙니다. 지혜자가 볼 때에는 한 인간이 멀쩡하게 살아있어도 산 모든 사람이 산 것이 아니요, 죽어가도 죽어가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인다는 것은 물리적인 죽음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죽음인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게으르게 삶으로써 자기 자신이 죽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게으르게 살고자하는 자신의 욕망에 굴복함으로써 그나마 계시록에 나와 있는 것처럼 죽게 되었지만 아직은 살아있는 것까지 죽여 버리는 것이 게으른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목회를 해보면 천성이 게으른 사람은 은혜를 받아도 별로 큰 소용이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도 은혜가 죄에 항거하고 의무를 완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싫증하고 싸우면서 거의 다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여러분들이 수영을 아주 잘 한다고 가정합시다. 물이 흐르지 않는 호수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다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앞으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꽤 세게 흐르는 강물에서 헤엄을 치고 위로 올라와보라고 한다면 미친 듯이 팔이 빠지도록 수영을 해도 제자리에 있을 겁니다. 대단하니까, 올라가려는 힘이 있으니까 제자리에 있는 것이지 웬만한 사람은 신속하게 떠내려갈 겁니다. 은혜를 받아도 물 흐르는 것 자체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게으름의 천성 속에서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은혜를 받아도 그냥 그 자리에 있을 정도지 앞으로 진전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누구 돈을 훔치고 구타를 하고 이런 것들은 기억에 또렷하게 남는 죄로 여기지만 게으름 피우면서 하루 산 것에 대해서 뼈저리게 후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더 큰 죄입니다. 그 그늘아래 모든 죄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7대종죄에 살인은 안 들어가는데 게으름은 들어갑니다. 이것은 옛 사람들이 얼마나 지혜로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속에 깃드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게으름이 자기사랑이라는 것이고, 결국은 게으르고 싶은 욕망을 따라서 순종하기 때문에 의무를 버리는 것 아닙니까?
후반부에 보면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 이니라”라고 나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그의 손들이 거절하기 때문이다” ‘아사’에서 온 부정사 연계형이 쓰였습니다. ‘아사’(השָָׂעָ)는 ‘만들다’입니다. 구약성경에 ‘만들다’라는 대표적인 단어가 세 단어가 나오는데 바라, 야찰, 아사입니다. ‘바라’(בָּרָא)는 무에서 유를 만들 때 사용하는 것이고, 혹시 유에서 유를 만들어도 문맥상 재료에 대한 언급이 없으면 ‘바라’라는 단어를 쓰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을 열면 첫 번째 나오는 단어가 ‘바라’입니다.
두 번째 단어가 ‘야찰’(רצַיָ)인데 “하나님이 아담을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 할 때 도자기 만드는 도공같은 사람들이 이미 있는 흙을 잘 만져서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것을 야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사’는 훨씬 넓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들다’, ‘행하다’ 심지어는 ‘일생을 살다’ 등의 모든 뜻이 이 안에 들어갑니다. 악을 행할 때도 이 단어를 쓰고 선을 행할 때도 이 단어를 씁니다. 그래서 행하는 것 이런 의미를 할 때 쓰는데 결론적으로는 ‘행동하기를’ 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의 두 손이 행동하기를 싫어하느니라” 그런데 말이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것을 “그의 두 손이 만들기를 거절함이라”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아주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손은 무엇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손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이런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손으로 만드는 모든 일이 이겁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 손으로써 뭔가를 만드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주신 노동의 명령이 바로 그런 겁니다. 어떤 것들을 다듬고 돌보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것들을 잘 만들어서 창조의 세계를 아름답게 수놓는 것이 인간의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손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제유법입니다. 꼭 손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손, 발, 그것을 주관하는 모든 정신까지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냉면집을 하는데 저녁 9시쯤 문을 닫습니다. 그 다음날 11시쯤 가보면 드디어 냉면을 시작 했습니다. 사먹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냉면집이 9시에 닫고 11시에 여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 식당의 사람들은 잠깐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쉼 없이 일하면서 내일의 장사를 준비하는 겁니다. 다큐멘터리에서 부산에 있는 어느 냉면집을 소개하면서 어떻게 냉면을 만드는 지가 나오는데 새벽2시에 잔다고 합니다. 매일. 그리고 거기 고명 담당 제자, 반죽 담당 제자, 면발 담당 제자, 육수 담당 제자 등 다 제자들이 따로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거의 1시 그리고 주인인 자기는 마지막 육수 만들 때 제자들 다 보내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다음날 문을 열고 또 나머지를 준비해서 11시에 냉면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어떤 장사라는 목표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은 쉼 없이 무엇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이 삼성전자 임원이었던 시절얘기인데 이건희 회장한테서 새벽 2시에 전화가 온답니다. “진임원 뭐하나” “자다가 전화 받았습니다.” “자넨 그렇게 잠만 자서 사업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내가 이번에 일본에 갔다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했는데 한 번 적어봐”하면서 막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답니다. 미친듯이 적는데 메모지가 한 장이에요. “회장님 죄송합니다. 메모지가 다 떨어져서 제가 메모지 한 장 더 가져오겠습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자넨 준비성이 없어서 어떻게 사업을 하나. 잘 거 다 자고 줄일 수 있는 거라곤 잠밖에 없는데 자네 그렇게 해서 기업을 경영하겠나?”
쉼 없이 무엇이가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게 사실 인간의 본분입니다.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목표가 있는 사람은 너무 바쁩니다. 그런데 목표가 없는 사람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 고귀한 시간은 흘러가는 겁니다. 손이 무엇을 거절하겠습니까? 어거스틴이 말한대로 손이야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마음이 발더러 명하여 이리가라 하면 가고 손더러 들어올리라 하면 들어올립니다. 그런데 마음이 마음에게 명하여도 마음은 듣지 아니하니 이는 어찌 된 일입니까? 이것이 나의 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결국은 마음의 병입니다. 손에 핑계를 댔지만 손이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거절하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이 일하기를 거절한다는 이야기는 결국은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삶의 목표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오길 그렇게 살아와서 그럴지 모르지만 고민을 해도 좀 치열하게 고민을 하고 뭔가를 해도 좀 치열하게 하고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인생을 뜻있게 살아가지 이것도 목표가 없고 저것도 목표가 없으면서 떠밀려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이 됐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모두 다 구원하시고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도 하나님이 원래 주신 창조의 목적은 계승되는 겁니다. 거기서 그냥 생명나무 물가에서 벌거벗고 뒹굴면서 기타나 치고 과일이나 따먹고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거기가 어떻게 천국일 수 있겠습니까? 일을 해야 거기가 아름다운 천국인 것입니다. 그래야지 뭔가 세상에 변화를 볼 것 아닙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의 노동의 수고와 슬픔은 사라지지만 여전히 우리는 거기서도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겁니다. 영원히. 그 속에서 무엇인가 뜻깊은 목표를 가지고 일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게으름을 미워해야합니다. 그리고 명심하십시오. 예수님은 게으르신 적이 없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신 생애를 사셨고 쉼 없는 노동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부름을 받은 겁니다. 그런데 얼마나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노동을 기쁘고 즐겁게 보람을 느끼면서 사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잠언에 나오는 많은 인생에 대한 가르침은 처세술이 아닙니다. 구속이 완성되었을 때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이상적인 삶을 그려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식을 섭취하는 일이든지 영성을 위한 많은 일이든지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을 드리고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가 결코 죽을 때 까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감동적인 연설을 할 수 없습니다. 살아본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