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과 궁핍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6:6-11)
녹취자: 송미옥
지혜자는 오늘 게으름과 궁핍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면서 시선을 흔히 볼 수 있는 개미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개미는 부지런히 일하는데, 그렇게 일 함으로써 가을에 양식이 궁핍하지 않도록 겨울을 준비하고 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계속해서 게으른 사람에게 경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개미의 이야기를 했지만 핵심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9절, 10절, 11절이었습니다.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게으른자의 모습은 누워있는 것입니다. 가장 에너지가 덜 소비되는 누워있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바로 ‘게으른자는 침상을 구으느니라.’ 라고 할 때의 그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게을러서 마냥 잠자는 사람만 생각하지만 육체적인 게으름을 통해서 일하지 않음으로 궁핍하게 산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사실은 이것이 영적으로도 일치하는 것임을 설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좀 더 자자 좀 더 눕자’ 하는 것이 육체적으로 보면 움직이기 싫어서 그냥 누워있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을 할 수 없고 일을 할 수 없으면 수입이 없고, 수입이 없으면 결국 궁핍하고 겨울이 오면 양식 걱정하느라고 온 가족이 고생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난한 시절을 지내본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그래도 우리 사는 골목은 빈민들이 모여 사는 골목은 아니였는데, 지금보면 빈민 이하의 수준입니다. 저녁 때 골목에서 놀다가 보면 저녁에 사람들이 들어오고, 늦게 오는 사람은 어둑어둑해질 때 들어옵니다. 머리에 무엇인가를 이고, 아저씨는 무엇인가를 짊어지고 양쪽 손에 이쪽에 누런 봉투에 쌀 한 봉지를 들고 이쪽에 연탄 2개 들고, 퇴근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벌어서 그것을 가지고 가서 그날 저녁하고, 아침하고 끓여먹고, 그것으로 연탄 갈아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연탄을 100장을 사놓을 능력도 안 되고 쌀을 10kg이라도 사서 먹을 수 있는 상황도 안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설득해도 이해가 안됩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미아리 삼거리에서 다녔는데, 거기를 시작해서 제기동까지 번듯하게 올라가는 건물이 대부분 소방서 아니면 학교, 경찰서 관공서였지 나머지는 전부다 1층짜리 나즈막한 판자집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난하면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건지 풍요 속에서 자라난 세대는 모릅니다.
여러분들 펄벅여사가 지은 대지를 읽어보십시오. 1800년대인가요? 1800년대 후반에 중국을 휩쓸고 지나간 대기근 때를 배경으로 쓴 소설입니다. 사람들이 흙을 삶아서 먹었습니다. 진흙을 빚어서 먹고, 나무껍질을 까먹는데 그것도 사람들이 수 없이 매달리고 불태웠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가난한 시절을 지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체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에게 오는 결과입니다. 누군가의 은총을 힘입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하고 곤고한 때가 반드시 찾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들 중에서도 시집을 가서 제일 힘들어 하는 사람이 생활능력이 없는 남편 생활능력이 없다는 말이 팔다리가 없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게을러서 일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직장 들어가면 금방 사표내고 나오고 금방 사표내고 나오고 젊어서는 그래도 사직을 하면 다른데 취직을 하지만 나이를 먹고 나면 받아주는데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여기서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더 큰 메시지는 영적인 생활에 적용했을 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만히 누워있는데 누가 자꾸만 일을 하라고 시킵니다. 귀찮다고 하면서 돌아누우면서 계속해서 잠을 청합니다. 영적으로 적용해 보면 우리가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돌이켜야 하는데 돌이킬 수 있는 힘이 자신의 영혼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도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그것은 운명처럼 그를 얽어매서 같은 침체에서 머물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해야지 기도해야지’ 하는데 마치 농부처럼 도둑이 들어왔는데도 ‘넘어오기만 해봐라 뭘 가지고 가기만 해봐라 넘어가니까 다시 오기만 해봐라.’ 하는 것처럼 ‘기도해야지 기도해야지’ 생각은 계속 들지만 실제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은혜를 받아야 되는데 생각은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단은 ‘좀 더 이대로 있자’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영적으로 궁핍해 지기 시작합니다. 사실은 육체적인 가난도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정말 끼니가 간데없이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어려움을 모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가난한 것은 더 무서운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살아갈 힘이 있으면 희망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살아갈 힘과 의욕이 있으면 어떠하던지 살아냅니다. 그런데 영혼에 그럴 힘이 없습니다. 절망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날은 굶어서 죽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만약에 시간을 한 50년 전으로 거꾸로 돌려놓으면 몇 백 만원씩 남기고 유서를 쓰고 생활을 비관하고 죽는 그런 사람들은 그 시대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끓여먹고 살 수 있는 죽만 있어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금도 생생합니다. 정말 가난한 시절의 사람들이 비지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싼 게 비지떡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비지인데 콩비지가 아니라 두부를 다 만들고 난 찌꺼기입니다. 그것도 그냥 주는 법이 없습니다. 다 돈 받고 팔았습니다.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를 조금 넣습니다. 밀가루 살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김치를 집어넣습니다. 비지는 아무리 붙여도 붙지를 않습니다. 붙을 수 있을 정도까지 밀가루를 넣고 김치를 넣고, 두툼하게 부칩니다. 기름도 없으니까 그냥 부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맛이 있겠습니까? 솥뚜껑에 부쳤다고는 하지만 그게 비지떡입니다. 그리고 식으면 먹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런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고, 10년 전으로 올라가면 사람들은 진짜 미군들이 이쑤시개 던져놓고 담배꽁초 던져버렸던 뜬 물을 가져다가 거기에서 그것들을 건져내고 그것을 끓여서 시장에서 팔아서 그것을 먹고 단백질을 보충했던 것입니다. 너무 비참한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자살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이혼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버틸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갑자기 힘이 없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이 흔히 무엇인가를 염려할 때 환경이 나에게 염려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신앙의 저항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신앙이 충만할 때는 어려움이 생기면 우리 교회의 한 지체의 고백에 의하면 어려움이 생기면 기대감이 업 된다고 합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까? 그게 이 안에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것입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을 보여주실 것이다.’ 라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그 사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충만할 때 어려움이 생기면 아주 저 아래로 보이는 것입니다. ‘생기라고 하지 뭐 어차피 살든지 죽든지 내가 주님의 것인데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 결국 뭔가 역사하시겠지?’ 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우리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정말 주님의 생명이 충만하면 교회의 어려움이 생겨도 사람들이 근심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무엇인가 놀라운 뜻이 계셔서 이 어려움을 주시나보다.’ 라는 생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저항력이 거의 없어진 상태에서 어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 한 순간에 ‘쿵’ 하고 고꾸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순간에 열심히 목회하던 사람들도 한 순간에 사표 던져버리고 선택하지 말아야 할 길을 선택해버리는 것입니다. 굉장히 커다란 비극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충만하던 우리안의 생명이 그렇게까지 고갈될 수 있느냐? 바로 그 태도가 좀 더 자자 손을 모으고 좀 더 졸자 좀 더 눕자. 이러한 상태가 계속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 안했다고 하루 아침에 기도 안한 벌이 내리거나 싸인이 오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서서히 서서히 자신의 몸에서 이것들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저는 코로나라고 하니까 매일 열심히 걸었습니다. 많이 걸으면 2시간 짧게 걸으면 언덕길을 1시간 정도 걸었습니다.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했습니다. 요새 걸어가면은 느낌이 너무 다릅니다. 남의 다리로 걷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덕이 나타나도 숨은 조금 찬데, 똑같은 속도로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어떤 느낌이 드는가? 하면 티코였는데 아반떼 정도로 급수가 올라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산악을 달리는 사람들이 이런 나의 느낌이 4~5정도 증가한 사람들이니까 산악길을 쉬지 않고 달리는 것입니다. 김신조 일당이 1966년입니까? 청와대 뒤로 넘어올 때 그 사람이 침투한 시점과 청와대 도착한 시점을 군관계자들이 지도를 놓고 계산할 때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 앞에 총알 300발과 군장을 지고 산길을 시속 10km로 뛰었다고 합니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도저히 남한 군인들의 계산으로서는 이 속도가 나올 수가 없는데 도착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훈련을 하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쉬지 않고 훈련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영적인 힘을 기르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합니다.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엊그제 비서하던 은정자매를 만났습니다. 은정자매의 말이 옛날에 유별 떠는 아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학교 때부터 미스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뿌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네들은 유별도 떤다. 어린나이에 공부는 안하고 매일 미스트나 뿌리고 다닌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 20년 만에 만났는데, 걔네들이랑 우리는 완전 다른 얼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인 근력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만 꾸준히 공부하면 공부 안한 사람이랑 둘이 앉아서 대화의 접촉점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건강, 미용 등 모든 것이 다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에도 역시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거듭난 사람이 어찌 기도하기가 싫겠습니까? 거듭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 싫겠습니까?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는데 ‘저는 싫습니다.’ 라고 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 원합니다. 그러나 실현한 만큼 충분히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인간이 죄를 지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욕망의 크기가 죄를 산출하기에 충분히 커야하고, 두 번째는 실행에 옮길 때까지 힘이 지속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럼 똑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 받아야 할텐데, 내가 나태한 삶을 돌이켜야 할텐데..를 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렇게 하고자 하는 욕구가 커야 하고 실제로 순종할 때까지 힘이 지속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래서 결국 은혜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받은 은혜를 아무리 작은 은혜를 받았어도 그 은혜를 불씨 삼아서 자신이 영적인 게으름을 떨쳐버리고 주님 앞에서 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매순간 순간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고 신앙의 삶입니다. 그렇게 한동안을 살고 나면 몇 달만 그렇게 살면 옛날에 그까짓 것을 가지고 근심을 하고 이겨내지를 못해서 쓰러지고 괴로워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이야기해드릴 수 있는데, 왜? 그랬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이 되지 말고 주님 사랑으로 부지런한 사람들이 되어서 영육 간에 큰 힘을 누리면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