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와 일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 6:6-8)
녹취자 : 김지혜
확실히 지혜자는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회생활 그리고 심지어는 이렇게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작은 현상 이런 것을 보면서도 그의 관심사는 마지막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였습니다. 그것이 우리 목회자들의 성향이어야 합니다. 무엇을 보든지 설교 예화가 생각이 나고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줘야 합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신학책만 읽기에도 우리에게 버거운데 과학이나 사회나, 인문학이나 심지어 그리스신화 책을 읽는 것이 우리의 설교와 신앙에 도움이 됩니까?” “나도 처음에는 도움이 안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어느 계기가 오다 보니까 모든 것이 도움이 되는 심지어는 이교도들의 책이나 혹은 점치는 책을 읽어도 나는 신앙의 도움을 받는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 의문은 그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던 초기에 그렇게 겸손하고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람이 후에 매우 타락하고 결국 나라가 쪼개지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궁금한 건 어느 시기에 이 시를 썼는지 궁금합니다. 학자들은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모든 설명이 사실 증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시점에서 놓고 보면 이 사람은 집요할 정도로 지혜를 구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눈길이 개미에게로 옮아갔습니다. 그 당시에 그 지방에 있었던 개미의 크기나 종류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바가 없습니다. 개미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여왕개미, 일개미, 또 다른 종류의 개미, 이렇게 세 종류의 개미가 있다고 합니다. 여왕개미는 번식을 담당합니다. 덩치도 굉장히 큽니다. 개미들을 다 놓습니다. 개미가 일을 합니다. 여기에 보니까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성경을 펼치고 원전으로 읽으면서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상당히 깊은 신앙이 이미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연을 관찰하는 것은 감각이 있는 모든 사람이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가서” 의미심장하죠? “게으른 자여 가서” 거기 그렇게 게으르게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서 떨쳐버리고 일어나서 개미에게로 가라. 그리고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한번 들여다보라. 그러면서 지혜를 얻으라.
늘 말씀드립니다만 지혜는 미국이나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처세술에 관한 책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한편으로는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또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심지어 동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엮어져서 그 한 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떻게 인생을 사는가가 인간의 행복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밀접하다기보다 행복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지혜를 얻으라고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흔히 지혜를 나눌 때 영적인 지혜, 육적인 지혜, 학문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나누고 신령한 지혜, 혹은 자연적인 지혜, 본성적인 지혜, 초자연적인 지혜 이런 식으로 나누지만, 결국 알고 보면 우리 인간의 삶의 이치에 통할만 한 처세술에 관한 이치조차도 결국은 그것이 참되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고 특히 도덕 계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키케로라는 인물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마 시대 때 유명한 정치가이고 사상가였습니다.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라틴어로는 딱 네 글자로 쓰여 있습니다. 짧으면서도 강렬합니다. “사랑받기를 원하면 사랑하라. 그렇게 되면 너도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촌철살인의 이런 지혜는 그림자이고 궁극적인 실체는 한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그 삶을 살아가는 이교도들의 덕스러운 생활도 모두 이렇게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지혜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겠지만 일단 게으른 사람을 보면서 두 가지를 배우라고 말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보았으니 이미 이 말을 했을 때는 오랫동안 이 지혜자가 열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죠? 한번 물어봅시다. 엄격한 상사와 밑에서 일하는 부하 직원이 고달플까요? 게으른 부하 직원을 부리면서 일하는 엄격한 상사가 고달플까요? 대답을 못 하시네. 어떨 것 같습니까? 정미. 내 눈치 보지 말고. 둘 다 고달플 것 같습니까? 그래서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엄격하지 않은 사람은 지혜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지도자를 만나서 일하는 것 같고 일 안 하는 것 같은 사람이 둘이 만나서 회사를 차리면 그 두 사람은 행복할 것 같습니까? 행복한 것이 아니라 회사가 망합니다. 둘 다 실직자가 됩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첫 번째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면,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되 일한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보면 모든 것이 위계질서로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두령은 군대로 말하자면 소대장이나 분대장이나 이런 정도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감독자도 없고 그 위의 등급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통치자는 임금이나 그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높은 최종적인 책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없는데 개미는 일합니다. 끊임없이 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현대 학자들은 이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합니다. 실험을 해봤습니다. 유리 속에 개미들을 넣고 자세히 관찰하면 모두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20%는 일을 안 합니다. 그렇다고 완전 놀지는 않겠지만 게으른 개미들이 있다고 합니다. 20마리를 핀셋으로 다 꺼내놨더니 80마리 중 다시 20%가 나오더라는 겁니다. 인간 같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미는 비교적 인간들에 비해서 열심히 일하는 개미들이 많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동의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 당시에는 그런 수리적인 관찰까지는 못했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 개미의 그 당시 모든 사람이 받는 장면이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고 있어도 누워있는 개미는 본 적이 없잖아요. 대부분 그렇게 부지런히 일합니다. 감독도 없습니다. 현대 리더십에서 최고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리더가 모여 그러는데 그 비율을 보면 그게 리더십이라고 합니다. 리더가 말도 안 되는 때에 모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새벽 2시에 일도 없는데 화장실 공사 때문에 회의하자고 하는 그런 것 말고 일반적으로 모두 타당한 이유가 있는데 모이라고 했는데 모이는 숫자가 리더십이라고 합니다. 그게 안 되면 이미 그 사람은 지도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네 단계 정도가 있습니다. 마지막에(그 다음 단계는) 룰에 의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대로 안 하면 내가 큰 어려움이 당한다. 마지막 다섯 단계는 심화적 단계입니다. 리더는 없는데 없을 때 오히려 리더가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가장 확실한 표본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셨을 때보다 예수님이 안 계셨을 때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더 깨닫는 것도 많았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오셨지만요. 그게 리더십입니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는데도 열심히 일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이야기입니다.
시키면 딱 그것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뒤로 어떤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 또 “뭐 좀 알아봐 주십시오”라고 이야기하면 딱 그것만 알아 와서 옆의 것을 물어봐도 전혀 대답을 못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윗사람들의 입장에서 자기가 할 수 있을 만한 일이면 자기가 해버리고 그 사람을 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키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내가 직접 가서 해버리는 에너지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꾸 다른 사람을 찾습니다. 그것은 본인을 위해서나 조직을 위해서나 매우 불행한 이야기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게으른 사람들은 남이 하는 일에 끊임없이 딴지를 걸고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냅니다. 왜냐하면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군대 졸병으로 오래 있으면 창의력이고 뭐고 묻힙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생각을 못 하게 하는 것이 군대의 방식인 것 같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라. 생각을 내가 할 테니 생각 없이 손발이 움직이는 것처럼 하라. 그런 생활을 오래 하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굳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어느 집단이든지 자유롭게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집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집단의 품질은 그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것만큼 비례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전혀 창의적이지 않은 아랫사람들이 있고 윗사람들 몇 사람이 창의적일 때 그 집단은 전체적으로 창의적인 집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창의적이라는 이야기를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것 아닙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키는 사람 없어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시키는 사람이 없으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키는 사람이 있으면 할 수 없이 그 일을 하는 겁니다. 우리의 일생을 세 번째처럼 살아가는 것은 비극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커다란 하나님의 계획에 한 부속품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한 인격체로서 하나님의 꿈에 나도 함께 가슴이 설레며 이 길을 가고 싶지, 부속품처럼 쓰임 받다가 어느 한순간에 버려지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수단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존엄하게 생각하고 존귀하게 생각하고 그 사람이 이 사역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과 인생을 완성해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고 그렇게 하도록 목양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 일뿐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월급만을 위해 직장을 다닌다면 얼마나 짜증 나겠습니까? 우리 교인 중 한 사람이 저 남대문 쪽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내가 따져보니까 제가 83년도에 거기를 떠났으니까, 그 전에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아는 가게였습니다. 그때는 서로 알 리가 없고 만난 적도 없고. 70년대 말이라 그랬나. 보석 가게를 차렸는데 진짜 보석 말고, 이미테이션 액세서리 가게였습니다. 얼마나 손님이 많이 오는지 하루를 장사하고 나면 200만 원씩 돈이 남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200만 원은 저의 6개월 치 월급이 넘었습니다. 나중에 어느 시점이 되니까 재밌는 게 아니라 지긋지긋하더랍니다. 그래서 가게를 넘겨줘 버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후회 비슷하게 간증하셨는데 인간이 그런 돈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잠깐은 설레게 할 수 있습니다. 연봉을 1억을 준다. 2억을 준다. 이러면 설레게 할 수 있지만. 연봉을 작게 주고 보람을 찾을 수 없는 회사는 돈 많다는 이유 때문에 결혼한 여자와의 결혼 생활만큼 힘든 겁니다. 무슨 보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신앙 안에서 여러분들이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게으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의 온 피와 살이 묻어나는 간증입니다. 불가능합니다. 게으른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감독자도 없고, 두령자도 없고, 그리고 통치자도 없는데도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압니다. 개미는 본능에 의해서 움직이겠지만 우리는 매 순간순간을 자기 삶의 보람으로 느끼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일하다가 제일 어리석은 사람 중 하나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어떤 희생적인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은 사실은 남을 위해 돕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돕는 것입니다. 평생 모아왔던 760억을 기부한 여성 사업가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전 재산을 기부하고 나니까 가장 행복한 것은 나 자신이다. 760억 나중에 이 사람 저 사람 장학금을 받고 사업 자금을 가져간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 죽고 나면 기억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본인 자신이 행복한 것입니다. 왜 그것을 인생의 보람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느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나는 몇 교회를 지나왔습니다. 부교역자 생활을 세 교회에서 했지만 난 단 한 교회에서도 담임목사님이 나보다 더 교회를 사랑한다고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내가 더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그분들을 무시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담임목사님도 교회를 사랑하시지만 내가 담임목사님보다 훨씬 덜 사랑한다고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나를 움직이는 건 사랑이었습니다. 감독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가 토요일에 와서 영혼들을 위해 철야를 하는데 목사님을 위해 철야를 하는 것일까요? 장로님이 나를 봐줘서 연봉을 올려달라는 그렇게 하겠습니까? 사랑이 시키는 것입니다.
(찬양)
사랑을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내가 죽어야 하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랑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한구석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후면 모두 먼지처럼 흩어져서 사라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복은 두령이나 감독자나 통치자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시는 그분 때문에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이 내가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그분을 위해 섬기는 것이 좋기 때문에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 비유가 가지는 한계는 이것입니다. 개미는 사랑에 의해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종종 효도에 관한 설교, 부모 자식 사랑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짐승의 예를 듭니다. 그건 외관상이지, 짐승은 자기 새끼를 보호하지만 그게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합니다. 인간은 그것을 알아서 자연적인 현상에 도덕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지성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중국 동북아 사상에서도 보면 물이 흘러가잖아요. 물 수(水) 입니다. 지나갑니다. 지나갈 거(去) 자입니다. 두 개를 붙여서 법(法)이라는 글자를 만듭니다. 그리고 가슴에 새깁니다. 내가 나라의 법, 그리고 이웃과의 사랑의 법, 그리고 도 앞에서의 나의 법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역사가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받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 그러셨을 때 예수님이 경전을 펼치신 것이 아니라 “공중에 나는 새를 바라보라 들에 피는 백합을 보거라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고 길상 수거 안 하는데도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시지 않더냐 그러면 사랑하는 너희는 얼마나 잘 돌보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보호와 사랑을 받는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8절을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