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하고 모으는 자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 6:8)
녹취자 : 송미옥
I. 본문해설
‘먹을 것을 여름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두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예비하며, 모으며.’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항상 예측할 수 있고 똑같다면 예비할 필요도 없고 모을 필요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에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더라도 인생길이 힘들지만 모두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특별히 힘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일상적으로 남이 하는 것처럼 나도 특별한 생각이 없이 그냥 해 나가는 목회로 교회가 굴러갈 때도 있지만 항상 그렇다면 목회를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위기가 나타납니다. 꼭 위기라고 해서 교회의 커다란 싸움이 일어난다던지 그런 것만이 아니라 마치 평탄한 길을 달려가다 비포장이 나오듯이 정신 바짝 차리고 운전대를 꽉 잡아야 할 때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모든 것을 더 많이 요구합니다. 더 많이 기도해야 되고, 더 많은 체력 더 많은 지혜 더 많은 협력 더 많은 비젼, 보다 분명한 태도, 용기, 결단, 희생, 심지어는 더 많은 돈이 들어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예비한 것이 없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루 먹고 하루 살아온 것입니다.
목회를 7년, 8년 했다가 왔다고 하는데, 목회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1년차나 7년차나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는 결국 변화된 상황을 감당해 나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처음에는 설교하러 올라갔더니 목사님의 말씀이 천둥처럼 울려 퍼지고, 그리고 나를 하나님 앞에 세워줍니다. 하늘처럼 높아 보입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설교를 듣고 1년, 2년, 3년, 4년, 5년 듣다보니까 말은 안하지만 마음속으로 ‘니나 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는 것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난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의 마음이 부패해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배가 고프면 아무거나 맛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진짜 내용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는 하나님께 판단을 맡길 일이고, 설교자인 우리의 입장에서는 5년, 6년 7년, 8년 그렇게 10년씩이나 설교를 들은 사람이 별로 은혜를 못 받고 별 내용이 없다. 라고 말 할 때 모든 사람을 다 영적으로 맛이 가서 그런 것이다 그렇게 일률적으로 생각해서는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그런가? 자신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겠습니까? 오래 목회하면 목회할수록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은혜 더 많은 신앙의 세계 그리고 이제껏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은혜의 세계를 보여줄 것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배 목사님들이 한 교회에서 3년만 목회하고 떠나면 늘 새로운 설교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자 그럼 보십시오. 어느 교회에 오래 있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교회에 오래 있었는데 온 성도들이 나가주기를 바라는 사람으로 남아있었다면 다음 교회도 그 사람의 오랜 교역자 생활을 통해서 받을 도움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나나 여러분이나 모두 교회에 항상 도움만 주거나 교회에 항상 누만 끼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도 끼치고 도움도 줍니다. 그런데 끼치는 누보다 도움이 휠씬 더 클 때에 그 사람은 그 교회에서 놓아 주고 싶지 않은 교역자가 되는 것이고, 반대가 될 때에는 떠나가기를 바라는 교육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세수를 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데 어떻게 살든지 간에 나의 마음은 너무 편안했습니다. 그래서 마당을 밟고 한 6년 뒤에 떠나고 다시 열린교회 마당을 밟지 않아도 괜찮고 다시 밟아도 괜찮고, 하나님 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개미를 보면서 지혜자가 깨달은 것은 부지런히 모으고, 부지런히 거두는 것입니다. 요새 더해빙이라는 책이 나와서 40반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제대로 된 영화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갖고 있는 다는 것’ 아니면 ‘갖고 있는 물건’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 쓰는 즐거움에 살지만 돈을 모으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내가 쓸 수 있다는 능력을 가진 것에서 쾌감을 느끼며 산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내가 쓰고 무엇을 하고 싶다 그러면 나는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여기에 만족을 느끼고 가난한 사람들은 진짜로 그것을 써야지 겨우 만족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열심히 모으고 거둡니다. 그것을 내일이나 오늘 당장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쩌면 안 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능히 감당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유익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영적으로 충만한 자원이 있어서 그런 현실정도는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는 자원이 내게 있고, 용기도 있어서 그 정도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는 담대함이 지도자로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탁월한 지식이 있어서 감히 누구에게 견주어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지식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격도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피터지게 싸우고 서로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그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슬기로움도 있습니다. 필요할 때에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지만 결단을 내려야 할 때는 비겁하게 사람들 뒤에 숨어서 핑계나 대고 그리고 눈치나 보고 자기가 무엇인가 지도자로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 때에만 얼굴을 비추고 곤란한 상황에서는 슬그머니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미루고 모르는 척 하고 그렇게 비굴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제가 잘 못했습니다.” 아니면 “모든 것이 제 책임입니다.” 아니면 담대한 용기, 그런 것들을 다 가지고 있을 때에 그것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서 ‘목회’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보면 보입니다. 저 사람은 어느 정도 목회를 하겠다. 개인적으로 알고 싶으면 나에게 찾아오십시오, 가르쳐주겠습니다. 거의 정확하게 가르쳐 주겠습니다. 왜 정확하느냐? 하면 내가 여러분들의 선배들에 대해 예측한 것이 거의 다 맞았습니다. 한 두 사람을 빼놓고 거의 다 맞았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목회와 개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야말로 정말 잔인한 방법으로 획득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고 깨뜨려지고 진리와 합치되는 과정 속에서 변화되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되어서 설교할 때에는 마치 자신이 신앙의 세계를 꽉 잡고 있는 것처럼 설교하지만 그러나 그 눈에 한 달이 지나도 눈물 한번 흘리지 않는 얼굴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위선입니다. 거짓입니다. 진리와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서 자신이 부지런한 삶을 살기 때문에 지식이면 지식, 영적인 은혜면 은혜, 인격이면 인격 아니면 목회의 기술이면 기술 그것들을 모두 거져 되는 것이 없이 치열한 몸부림 속에서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쌓여지는 것입니다.
개미가 운송회사에다 부탁해가지고 어디에서 식량을 트럭으로 실어 나르는 것 보았습니까? 여름에 일하는 개미들을 보십시오. 빵 조각 하나를 들고 자기가 먹고 가는 개미는 없습니다. 개미하면 인상이 그 빵 부스러기 같은 것 자신의 몸보다 더 큰 것을 지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동족들을 위해 모으는 것 아닙니다. 혼자서 안 되면 3마리 4마리를 불러 잡아끌면서 그 음식을 가지고 한사코 땅 속에 있는 작은 굴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보기 바랍니다. 그런 몸부림 속에서 남보다 나은 모은 것이 있고, 있는 것이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연이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결국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만약에 어떤 사람이 기질적으로 마음이 너무 연약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당연히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힘이 없습니다.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에 이르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게으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14장을 펴보기 바랍니다. 13절을 제가 읽고, 14절을 여러분들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이 14절이 큰 칼이 되어서 우리의 심장을 찌르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하는 문맥은 데살로니가전서의 저술 배경이 주의 날이 곧 온다. 이런 임박한 종말론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럼 무엇이냐하면 일을 안 합니다. 그리고 몰려다니면서 쓸데없는 논변이나 펼치고, 이단이나 떠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들을 야단치면서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맥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사랑가운데서 서로 행하라. 어려운 일이 교회에서 일어나도 형제들에게서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잘 참으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엄마와 같은 목소리로 사도가 다독이는 것입니다.
마음이 약한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멘탈이 튼튼하지 않은 사람, 보면 알지 않습니까? 저 아는 목사님 한분이 그때 제가 교역자들 많이 혼을 낼 때인데 나한테 보고 가서 혼을 냈더니, 그날로 바로 사표내고 안 오더랍니다. 멘탈이 약한 사람은 야단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쓰읍” 이렇게만 해도 “이게 뭐야” 그리고 야단친 사람보다 더 큰 충격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양떼를 아는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눈치만 주어도 멘탈이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결국은 여기서 이야기 하는 마음이 약한 자들입니다. 피블 마인니드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격려해야 합니다. 격려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잘 못해도 북돋아 준다는 것입니다. “넌 할 수 있어. 잘 할 수 있을 거야. 잘 했어. 그만큼만 해도 휼륭한 거야.” 이렇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힘이 없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며 마음을 늘 먹어도 늘 힘이 없습니다. 불쑥하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서 꽉 붙들어주라. 어떻게? 붙들어서 쓰러지지 않게 꽉 붙들어서 그나마도 힘을 발휘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뜻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별의 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될 텐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아라.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게으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라고 하는지 보십시오. 게으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권계하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히랍어로 ‘뉴데이테’ 라는 명령형 동사가 쓰이는데 혼을 내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경고하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큰일 납니다. 저기 밑이 낭떠러지입니다. 경고할 때 “가지 마세요. 좋은 말 할 때 가지 마세요.” 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안돼. 안돼.” 그리고 막아설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 큰일 납니다. 바로 낭떠러지입니다. 길처럼 보이지만 큰 씽크홀이 생겨서 앞에 자동차가 3대나 빠졌습니다. 안돼. 안돼’ 라고 해야 합니다. ‘뉴테이테’ 라는 단어가 바로 그 단어입니다. 마음이 약한 것도 마음이 약한 사람도 힘이 없는 사람도 별의별 사람도 다 오래 참고 돌보아 줄 가치는 있지만 게으른 사람은 그런 식으로 다루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버전의 이 단어를 warn ‘경고하다’ 군부대 담벼락에 위험하다는 warning이라고 나오지 않습니까? 접근하면 발포한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경고의 ‘warning’입니다. warn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덕과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약한 것 힘이 없는 것 지식이 조금 모자라는 것 다 양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게으른 것은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엊그저께 우연히 성철스님의 법문을 보는데 시종일간 설법하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게으름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악의 근원이다. 세상 욕심이 감각적인 세상인데 키에로 케고아가 참된 기독교인이 되는 길에 대해서 3가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감각 경험에 대한 복종을 벗어나야 한다.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욕망을 느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 다음은 윤리적 경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규약을 따르고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러해야 한다는 통칭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규율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윤리적 경험입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참된 인생을 살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뛰어 넘어서 무엇을 경험해야 하느냐 하면 그런 감각적 경험 윤리적 경험을 뛰어 넘어서 초자연적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신령한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 신령한 은혜의 세계의 핵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면 그는 사람을 사랑할 수 밖에 없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결국 게으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그 자체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게으른 것에 대해 회개하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마음이 약한 자도 힘이 없는 자도 희망이 있다. 그런데 게으른 자는 희망이 없다. 결국은 구원 받지 못한 표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게으르지 말고’ 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수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까지 말입니다. 게으르지 말고, 게으르지 말고, 게으르지 말고, 게으른 삶은 인생의 목적도 모르고, 삶의 사랑이 없었을 때에 살았던 삶입니다. 나 자신만을 사랑했던 삶의 과거의 흔적입니다. 그 삶이 습성처럼 그에게 배어있다면 구원받은 사람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삶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기억력이 좋아서 하루에 라틴어 단어를 외워도 아침이면 절반 정도는 생각이 나던 때가 있었는데, 저녁에 150개 외우고 자면 아침에 75개정도는 건집니다. 상태가 안 좋으면 50개, 좋으면 80개정도, 지금은 그런 시절이 다 지나고 책을 보면 누가 이곳에 줄을 그어 놓았지? 분명히 내 글씨인데? 내가 책을 열심히 읽었구나? 깨알 같은 메모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때 내가 좀 더 어학을 열심히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쯤 내가 이태리에 단테의 신곡이나 베리길리우스나 에우리피데우스 이태리어로 히랍어로 그렇게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지만 이제는 세월이 모두 지나지 않았겠습니까? 돌아보면 정말 흘러간 시간은 오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산 시간만이 오늘의 나를 내가 있게끔 만들어 준 것입니다.
더욱이 정신적인 게으름과 영적인 게으름은 우리의 인생을 심각하게 좀 먹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영적인 성장이 있는가? 를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일을 하면 그 일로 유능해 지는 사람들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는 그 일은 돈만 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해 나갈 때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목회의 진수를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을 아껴 쓰고, 최선을 다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일에 적합한 사람들로 빚어져 가도록 부지런히 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