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직업인가?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1-12)
녹취자 : 김지혜
오늘 설교는 ‘직업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직업인가’라는 이야기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잘못된 종말론에 미혹되어서 교회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고 종말에 가까워져 왔다는 사상에 미혹되면서 무질서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미 벌써 60년대, 80년대, 심지어는 2000년대에도 임박한 종말에 대한 사상들을 이단을 통해 배워왔지만, 그 특징이 세상 직업을 그만두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올 텐데 왜 또 그렇게 건물을 지으려고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이렇게 삐뚤어진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평범한 언어로, 어조로 이런 때에 무엇을 하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외인들에 대하여 단정히 하고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간략하게 이야기합니다. “조용히 하고” 그리스어 성경을 찾아보니까 그대로 조용히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좀 심하게 말하면 “닥치고 일이나 해라”, “떠들지 말고 조용히 침묵하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일은 안 하고 말만 많아졌습니다. “좀 닥쳐라. 이제”, “입 닥치고 조용히 해라. 그리고 일을 하라.” 왜 그래야 할까요? “외인들에 대하여 단정히 하고 궁핍이 없게 하려 함이라.” 두 가지 목적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까요?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임박한 종말론이 오니까 직업을 버리고 하나님을 안 믿는 부자의 자비심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풍습이 생겨났습니다. 그런 것들은 단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사랑에 기본적인 시작은 나 때문에 누군가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북아 사상에서는 예(禮)의 기본입니다. 예의 시작이 나 때문에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위에서 사랑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랑은 내가 남에게 무언가를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남에게 내어주기 위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사례금을 받을 권리가 없겠느냐?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너희들이 주는 생활비로 생활할 자격이 없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러면서 자기 스스로 직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천막을 수리하는 일을 하면서 그들에게 본을 보였노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의 문맥이니까 오늘날 우리 목회자보고 그렇게 살라고 하기엔 곤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기본적으로 누를 끼치기 싫어서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기본적인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개기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계속 신세를 지고 그 사람을 괴롭게 하기까지 의존하는 그런 방식의 삶과 예수님의 성품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얻어먹는 한정식 밥상보다는 내가 벌어서 먹는 잔치국수가 훨씬 맛있습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자존감입니다. 그러면 단정히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일을 해야지 궁핍을 면하잖아요. 사도가 보기에도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믿지도 않는 부유한 사람들의 자비심에 의존해서 그 우산 아래 들어가서 그 부스러기로 사는 모습이 결코 단정한 모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 직업의 동기가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생계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도 이야기합니다. “아무도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상하잖아요. 사랑을 가르치는 사도가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일을 해라. 그래야지만 너희들이 궁핍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 먹여주면 되지 않습니까? 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까요? “누구든지 궁핍하거든 교회에서 먹여주라”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교회가 엄연히 있는데도 일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궁핍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일하지 않으면 궁핍해도 싸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가장 기본적인 직업의 윤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합니다. 그것을 남에게 기대며 사는 것은 매우 비굴한 삶입니다. 어쩔 수 없이 노동력을 상실해서 도저히 아무리 노력해도 직업을 가질 수가 없는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질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생계를 위해서 우리는 노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생계가 어디까지입니까? 생계라고 하는 것도 불확정합니다. 어디까지가 생계입니까? 밥을 먹고, 따뜻한 집에서 자고, 춥지 않을 정도로 여름에는 뜨겁지 않을 정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이 생계의 전부일까요? 여기 젊은 간사들은 극장 가는 것도, 핸드폰 요금도 생계이지 않습니까? 취미활동도 생계고 경우에 따라서는 보석도 생계에 들어갈까요? 돈이 안 된다고 그랬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기본이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가? 여기서 욕망의 문제가 나옵니다. 욕망이 커지고 나면 만족이 없습니다. 아무리 벌어도 도대체 쓰는 것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까딱 정신없이 살면 수입을 거기에 다 써버리거나 자기 수입을 능가하는 소비생활을 하고 맙니다. 이럴 경우 미래가 없습니다.
생계를 위해서 우리가 직업을 가진다고 할 때 그럼 넉넉히 생계를 벌어놓은 사람들은 왜 직업 활동을 할까? 부모로부터 굉장한 유산을 받아서 일 안해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왜 미친 듯이 직업 활동에 종사하고 경쟁을 할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생계가 직업 활동의 동기에 전부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성취입니다. 성취를 위해서 직업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보람을 느끼지 않는 곳에서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일하는 것은 영원한 직장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관심사도 다른 곳에 있는데 그곳에서 일하기가 쉽겠습니까? 예전에는 교역자나 간사나 그만둔다고 하면 사정을 하고 어르고 말리고 그랬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마음 떠난 유능한 사람은 가라고 하고, 좀 덜 유능해도 마음이 여기에 있는 사람과 일한다.’ 못생긴 소나무가 산을 지킨다. 여러분들이 못생겼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캐가는 사람이 없어서 거기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이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일곱 번 여덟 번씩 말린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은 안 그럽니다. 마음이 떠난 사람은 붙여봐도 소용없습니다. 성취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연예인을 하다가 갑자기 인기도 누렸는데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사업가로 변신했습니다. 그렇게 인기를 누렸는데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라고 물어보니 자기가 이렇게 연기 생활을 해서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을 때도 기분이 좋았는데, 사업에서 자기가 구상했던 대로 이루어졌을 때의 기쁨은 수많은 사람들 박수소리 못지않게 자기를 행복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취를 위해서 계속 일합니다.
그런데 그 성취가 결국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이 높아지고 경영 능력을 인정받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펼쳐지고 인간이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요? 질문하게 됩니다. 카카오 김범수 회장이 10조 재산을 모았다고 합니다. 물론 주식이지만.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했는데 꼭 그렇게 되기를 나는 바랍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더 이상 일할 필요 없습니다. 계산해보니 그 양반이 40년을 더 산다고 볼 때 10조를 다 쓴다면 이자 없이도 하루에 6억 8천만 원을 써야 합니다. 이자가 있다면 그렇게 쓴다고 해도 돈을 도저히 소진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6억 8천만 원 주면 쓸 수 있겠습니까? 첫날은 집과 차를 사겠죠. 그 다음 날도 집과 차를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누구를 주기 전에 다 못 쓰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정미가 좋아하는 목우촌에 가봐야 6억 8천만 원 도저히 못 쓸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 교인 다 때려 넣어도 6억 8천 못 쓸 것입니다. 못 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계속 직업 활동을 합니다. 결국 성취에서 오는 자기만족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배웠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나로 창조하셨을 때 영원한 목적이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만족을 얻으라 하셨습니까? 하나님 때문에 만족을 얻으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라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만족과 성취를 느끼는 것의 정체는 자기실현입니다. 매슬로우가 이야기하는 자기 성취, 자아가 실현되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마치 신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은 생각에 빠집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성취에 머무르지 않고 야망까지 나아갑니다. 이렇게 많은 직업 활동을 통해서 돈을 모으고 그것을 수단으로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법적으로 계급은 존재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돈의 힘으로 높은 지위에 오릅니다. 경영을 하고 돈이 많아지게 되면 권력도 뒤따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기업체에서 열심히 정치인들에게 돈을 대고 심지어 자기 출신 사람들을 국회의원에 내보내서 인맥을 쌓는 모든 것들이 권력의 정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인간이 마음껏 자기 뜻을 펼치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이런 질서로 만드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분의 뜻과) 이 사람의 뜻이 같아지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질서를 이루어가는 데에 자신의 권력과 금, 돈, 모든 것들을 사용합니다. 그게 바로 야망을 다시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그렇게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반드시 충돌을 일으키는 지점들이 나옵니다. 이럴 경우에는 절대 양보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력과 권력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미가 선지자, 이사야 선지자가 부자에 관해서 강력하게 탄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이유가 돈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부자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창조목적에 대한 저항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이 기독교 역사에서는 직업의 문제를 혁명적으로 재정립하는 계기가 주어집니다. 마르틴 루터로 시작된 종교개혁입니다. 직업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집니다. 중세까지는 직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것을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밑에서 노동자 같은 사람들이 있고, 서서히 학자, 거쳐서 마지막에 사제들과 교황까지 있습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육적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영적이며, 영은 선에 접해있고 육은 악에 접해있습니다. 그런 플라톤적인 이원론인, 정통적인 플라톤주의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어그러진 플라톤주의의 이원론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사회 질서를 보면서 직업 활동을 아주 천시한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마르틴 루터나 칼빈에 의해서만 이 세상에 정립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 거의 최초로 이런 사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것들을 바꾸어놓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12세기 이미 벌써 아시시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가 나타나서 평민, 성직자, 수도사, 사제 이런 식으로 되어있던 수직적 구조를 확 허물었습니다. 평등한 자리에 놓았습니다. 횡으로 펼쳐보며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수평면 위에서 다양한 영역에 서로 따로 봉사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서로 모두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다는 사상을 전개합니다. 그것이 르네상스의 기폭제가 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의 공로가 굉장히 큽니다. 그런 사상들이 구체화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마르틴 루터를 비롯해서 종교개혁가들 직업을 보케이션(vocation)이라고 합니다. ‘보카치오’, ‘보카레’ ‘부르다’라는 뜻입니다. 소명이라고 보았습니다. 직업이 곧 소명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내가 농부이든지 장사하는 사람이든지 뭘 하는 사람이든지 간에 하나님 아래 수평적으로 있으면서 자기 각자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무리 영적인 일에 종사해도 그런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합하는 질서를 구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내가 땅을 가르고 오늘 시장에서 장사하고 있어도 그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목적을 인식하면서 이 직업 활동을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매우 신성한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봅니다.
종교개혁 때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라 처음 원시기독교가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초대 교회를 지나서 중세 로마의 기독교의 자유, 기독교의 공인, 국교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잃어버린 것을 종교개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 교부들을 통해 다시 찾아낸 것입니다. 기독교 전통을, 끊어졌던 기독교의 맥을 종교개혁이 이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그런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직업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약 우리가 자기 성취 수단으로서 직업 활동을 하고 그걸 통해서 거대한 높은 아성을 이루고 그걸 통해서 사람을 지배하고 심지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면 그것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충만하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흩어져야 합니다.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습니다. 높은 탑을 쌓고 사람들이 그 중심에 모입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을 때 “우리의 이름을 내자.” “우리의 이름이 모든 온 세상에 알려지게 하자.”라고 하며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징벌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사업에 재능이 있고 성공하는 사람들이 이런 바벨탑을 쌓으며 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데 누군가에게 원한을 맺히게 하고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고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면서까지 자기의 사업을 키워가는 구조 속에서 결국 그 사람이 얼마나 영원한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많이 벌어도 왜 버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경쟁해서 이기고 그렇게 해서 번 돈을 결국 자신이 쓰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사람들이 나누어 갖는 꼴을 죽으면서 보는 삶이 행복한 삶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제 직업이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생계의 수단만으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 비굴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국에 하원의원이 있습니다. 매일 국사에 시달려 괴롭습니다. 기사가 대기하고 있는 큰 차 뒤에 딱 타고 가는데, 아침부터 너무 괴롭습니다. 여러 가지 국사부터 시작해서 개인적인 일, 나이가 드니 몸도 신통치 않습니다. (그런데) 아침마다 출근하는 그 시간에 늘 그 골목에서 쓰는 환경미화원이 있습니다. 늘 반갑게 인사하고 늘 노래를 부르며 웃습니다. 의원이 가다가 차를 세웠습니다. “뭐하나 물어봅시다” “네 의원님” “나는 한 나라의 국회의원인데도 이렇게 아침마다 머리가 아프고 늘 불만에 차 있는데 당신은 뭐가 그렇게 좋아서 이 청소부를 일하면서 그렇게 아침마다 그렇게 행복한 얼굴로 골목을 씁니까?” “의원님, 저는 이 도시의 청소부가 아닙니다.”“매일 당신이 청소하고 있지 않습니까?”“의원님, 저는 동네 주민을 위해서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가 아니라, 하나님 창조하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정화하고 있는 정화부입니다.”
결국 자기 직업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가 너무 중요합니다. 돈을 많이 벌면 하나님 앞에 개평 주듯이 “하나님이 돈을 많이 벌게 해주셔서 제가 떼어서 드리겠습니다.” 그런 걸 가지고 직업의 무슨 엄청난 영광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나에게 기업의 사장이시고 하나님이 내 장사에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내 직장에 오너시다.’ 그렇게 하나님을 그 자리에 놓고 ‘하나님이라면 이 기업, 직장, 사업, 이 장사를 통해서 어떻게 이 망가지고 주름진 세상을 펴고 편안하게 하실까?’ 생각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직장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너무 하나님이 써주셔서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저는 공무원 생활을 정확하게 76년도 3월 6일에 들어와서 83년도 8월 19일에 그만뒀습니다. 8년 정도 다녔던 것 같습니다. 우체국 국장하고 그만뒀는데, 3년 동안은 사표를 포켓에 써두고 다녔습니다. 너무 불행했습니다. 이런 직장에 다닌다는 것이 너무 싫고 일 배우고 싶은 의욕도 없었고 정말 너무 싫었습니다. 나머지 4년 정도는 너무 행복하게 다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굉장히 높여주시고 써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요셉이 되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로 범사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내가 승진을 했기 때문도 아니고 돈을 많이 받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자기의 직업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너무 중요했습니다. 보람을 느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지위가 높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의 직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며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얼마나 짧은지 생각해보십시오. 특별한 경우를 빼놓고, 한 20세부터 시작해서 60세 정도에 끝납니다. 길게 잡은 것입니다. 재벌이 아니라 학교 선생으로 기준으로 잡은 것입니다. 교수가 되면 65세까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봉사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고 자신도 인간이 완성되어 가는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벌어먹기 위해 사는 그런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존경받는 직업이면 너무 좋겠지만, 누가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적어도 내가 이 회사에서 이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의 창조하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원래 창조된 의도대로 돌려놓기 위해 쓰임 받고 있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