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란 무엇인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녹취자 : 김지혜
I. 들어가는 말
농경사회에서는 인간의 소비 욕망이 일정하게 한정되어 있었지만 2차 산업혁명과 3차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바야흐로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어떤 형태로든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자본주의가 많은 폐해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물질 생산을 촉진하고 경제를 증진해서 많은 사람들의 삶의 여건을 개선했다고 하는 측면도 우리는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제와 사회 시스템입니다. 자본은 곧 돈입니다. 이 돈은 처음에 찍어낼 때부터 신용을 전제로 찍어내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달러를 찍을 때 달러만큼의 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해놓고 언제든지 그 달러를 금으로 바꿀 수 있는 시스템으로 돌아갔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 미국 그것을 포기하면서 기축 통화국이면서도 사실은 환불이 보증이 되지 않는 종이짝들을 찍어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또 화폐론에 들어가야겠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이것이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 물질주의 사회에서는 결국 돈이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지고 있고 돈 없으면 못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창출력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를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하고 있다면 사실은 지금 이런 경고보다 사실은 서너 배나 더 강력한 경고를 들어야 할 정도의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에 잠드는 순간까지 아니 정확한 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렌탈로 빌린 침대 위에서 잠드는 순간까지 계속 돈이 돌아가면서 여러분들은 생명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돈에 대한 이야기와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연관이 될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인생이 물질을, 재화를, 용역을 소비하면서 지탱되는 삶이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는 어디선가는 돈을 벌고 그 돈을 소비하고 우리의 소비는 누군가에게 수입이 되고 수입한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또 소비함으로 누군가에게 수입을 얻게 하고 하면서 사회 전체 시스템이 돌아갑니다. 결국은 그 한복판에 돈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런 순환 경제적인 순환 속에 있고 자본의 회전 속에 있기 때문에 사실 돈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 질문은 우리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이 문제를 질문함에 있어서 답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II. 돈이란 무엇인가?
그런 돈이란 무엇인가? 우선 성경이 이 돈에 대해서 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가 먼저 살펴봐야겠죠.
A. 청빈주의와 번영주의
기독교의 역사를 개관하면 돈에 대한 생각은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청빈주의입니다. 즉 물질을 소유하고 재산을 소유하는 것 자체를 악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실은 기독교가 태동하던 스토아주의 그리고 플라톤주의에 소위는 물질개악설 같은 사상들이 알게 모르게 많이 스며들어온 것입니다. 특히 스토아주의에서는 물질의 소유를 매우 인간이 비참하게 되는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그야말로 무욕의 삶을 살고 그렇게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게 되는 것을 인간의 이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희로애락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소유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된다. 그럴 때 우리가 인간의 자연 본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플라톤주의는 모든 가치의 존재의 구조가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으로 향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물질들일수록 그럴수록 결국은 영적인 선을 결핍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그 물질 자체에 악이 들어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만큼 정신과 육체, 물질과 영의 세계를 대립적인 관계에서 본 것입니다. 그런 사상들이 굉장한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철학자들 사이에 속설이 있습니다. 한 제국이 망할 때가 되면 금욕주의를 사람들이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스토아주의가 만연하게 되면서 사실은 로마의 종말을 알렸습니다. 오늘날 이런 사상들이 아주 굉장히 문명적으로 발달한 나라에서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문명적인 조짐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첫째의 견해는 청빈주의입니다. 이런 사상들은 수도사들의 삶에 의해서 아주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로 최소한의 생명을 이어지게 하는 그 일을 위해서만 물질을 소비하고 그다음에 재산을 소비하지 않는 것은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이 부패한 인간 속에서 모두 실현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은 결국은 한편으로는 그런 교리를 부르짖었고 또 그 안에서는 온갖 탐욕이 횡행하는 그런 부조화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시스는 밥상이 나오면 재부터 뿌렸다고 합니다. 모든 음식의 맛을 없애기 위해서.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어거스틴에게서도 이런 금욕적인 요소를 많이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돈에 대한 견해하고는 좀 잘못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번영주의입니다. 번영주의는 하나님이 인간을 인정하시는 증거를 다분히 물질적인 번영에서 찾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몸 자체가 건강하다면 건강함이 그의 활동을 통해서 바깥으로 증명이 되듯이 그가 정말 하나님의 보고를 받은 사람이라면 마지막 증거가 물질적인 증거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증거라기보다는 그가 정말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이 세상에서 번영하게 될 것이다.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형통하지만 감각적인 관점은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사실은 성경이 지지하는 관점은 아닙니다.
B. 성경에서 말하는 부
성경은 기본적으로 부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증거라고 가르치거나 혹은 가난이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을 만한 미덕이라거나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이 관심을 갖는 것은 돈이 있고 없고 그 사람의 소유가 넉넉하고 넉넉하지 않고, 높은 지위에 있고 낮은 지위에 있고, 이런 것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양상이라고 봅니다. 여러분 보면 복음이 맨 처음에 전해질 때 가난한 사람에게만 전해진 것은 아니잖아요. 사도행전에 보면 귀족들, 왕족들도 예수를 믿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결국은 세례 요한은 선포했지만 중요한 청중들이 일반 대중들이 일뿐만 아니라 왕궁에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이 왕궁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모세조차도 사람이 돈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불공정하게 대우받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아주 분명히 했습니다. 자신이 왕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 자신은 왕족이면서도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었는데 결국은 자신의 신앙을 가져다주는 것이 물질적인 환경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소 체득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부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관심은 그 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됨에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가지고 있는 부보다는 또 그가 처한 가난보다는 그 가난한 사람 그 부한 사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가 무엇에 부유한 사람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나사로는 부자의 집에서 빌어먹고 사는 거지였습니다. 소유로 말하자면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은 그 나사로를 당신의 품으로 불러들이셨습니다. 결국 무엇을 보여줍니까? 부와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소유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도 그런 관점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일차적인 관심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부유하게 될 것인가? 그것이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사 혹은 이렇게 살면 가난하게 사는 것은 아닌가? 그런 관심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고 살 것인가? 이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비정상적인 주식의 열풍으로 한국의 주식시장이 보통 뜨겁게 달아오른 게 아닙니다. 그리고 기관투자자들이 매물을 던져도 개미들이 그것을 미친 듯이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매우 위험한 일들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다행히 저의 이런 예측이 빗나가서 주식시장이 계속 성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벌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반드시 거품이 꺼지는 때가 옵니다. 이번에 미국의 국채 금리가 올라가고 나니까 어마어마한 돈들이 빠져나가고 비트코인이 1,500만 원 이상 가격이 떨어지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이런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우리가 돈을 벌고 안 벌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사는가 하는 것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돈 몇 푼 벌자고 1천만 원 2천만 원 집어넣고 하루에 340번씩 주식시장을 들어가서 휴대전화를 보면서 사는 것도, 또 신용대출 받아서 몇천만 원 집어넣고 마음을 들끓으면서 핸드폰을 340번씩 들여다보고 사는 삶이 그게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결국은 돈을 좀 벌게 된다고 한들 그 돈을 벌기 위해서 팔아버린 마음의 가치는 돈보다 얼마나 값진 것일까요? 주식에 투자하지 말자든지 집을 사지 말자든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의 삶의 양상이고 그건 그것대로 노력을 해야겠지만 과연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그렇게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물질은 소유했으나 마음은 더 이상 하나님의 것이 절대로 아닌 그런 사람이 될 때 결국은 주님이 하신 말씀, “무릇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이 잊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신조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에 대한 기대심을 불어넣기보다는 경고를 많이 합니다. “돈에 대해 관심을 좀 가져라.”, “경제에 관심을 가져라.” 그런 얘기는 성경에서 안 합니다. 왜냐하면 안 가르쳐줘도 인간은 당연히 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돈을 벌고 싶어 하고 모으고 싶어 하고 그런 욕망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에 폼페이에 갔을 때, 참 그때가 한 주전 2세기 정도 됐을 텐데 그 전에서부터 도시는 물론 당연히 있었겠죠. 그리스 시대 때 헬라시대 때부터 있었던 도시입니다. 가서 보고 ‘이야, 어떻게 2700년 전인데 이렇게 사람이 자본주의에 밝았을까?’ (생각했습니다.) 폼페이가 아직 발굴이 다 안 끝났지만 어마어마합니다. 그 당시에 인구 5만 정도가 살고 있었다고 하니까 세계인구가 얼마나 됐겠습니까? 로마 인구 전체를 1억 정도로 보는데, 5만 명이 살고 있는 도시였으니까 어마어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마을에 전부 다 돌을 깔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쪽 땅은 이렇게 어 진흙이 되게 많습니다. 여러분 글라디에이터 같은 데 보면 로마의 군인들이 어디를 공격하면서 진흙탕에 빠져서 막 곤욕을 치르는 걸 보잖아요. 왜냐하면 땅이 그렇습니다. 로마에서 세금을 걷을 때 현물로 많이 오잖아요? 밀이 많이 나면 밀을 세금으로 내는데 그게 로마로 들어와야 하는데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만 오면 마차가 다닐 수가 없습니다. 이미 벌써 사도바울 시대 때 밀라노에서부터 로마에 이르는 300km 가까이 고속도로가 놓입니다. 깊이를 거의 한 7m 정도를 파서 거의 봉고만 한 바위들 밑에다 채워놓고 위 전체를 바위로 덮어서 마차가 막 휘몰고 달려도 절대로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빠지지 않는 도로를 만드는 것입니다. 로마에 그 당시에 다 덮었습니다. 돌멩이로. 우리 같은 보도블록으로 덮으면 땅이 물러서 다 주저앉으니까 돌멩이 이렇게 만들어서 이렇게 꼽는 것입니다. 30cm 길이로 사각기둥을. 그래야지만 겨우 빠지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만들었는데 얼마나 재미있냐 하면 바깥에서 외부에서 마차를 가지고 들어오면 마차를 들고 폼페이 시내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못 들어가게 하는 게 아니라 돌멩이로 길을 만든 다음에 바퀴가 지나갈 수 있는 홈을 팠습니다. 그런데 그거를 일부러 폼페이 마차만 지나갈 수 있게 좁게 판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게 들어오면 이게 안 맞아서 못 다니게 만들었습니다. 주차장에다 세워놓고 모두 폼페이 택시를 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디서 왔든지 아무리 훌륭한 마차를 가지고 왔든지 폼페이에 오면 공용 주차장에 세워놔야 했습니다. 길이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폼페이시에서만 만든 작은 마차를 타고 이동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에 대해서 얼마나 눈이 밝은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것을 그 당시에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엄청난 돈을 사람들이 벌었습니다. 그런 것이 결국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인간 본성 속에 있는 것입니다.
III. 돈을 사랑하지 말라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뭐를 경고하냐 하면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입니다. 그러면서 디모데후서에서 3장 2절에서는 자기 사랑이 곧 돈 사랑이라고 규정을 합니다. 한 번 봅시다. 디모데후서 3장 2절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거의 동격으로 나왔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게 결국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나옵니다. 결국 인간이 돈을 사랑하게 되면 결국은 인간의 마음은 돈이 지배를 하게 됩니다. 돈 그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내일이라도 화폐 개혁이 되어서 돈을 바꾸지 못한다면 어제의 지폐는 한낱 휴짓조각이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돈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돈으로 살 수 있는 재화를 사랑하는 거고 그거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걸 소비함으로써 내가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돌고 돌아서 결국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를 디모데에게 썼습니다. 또 편지를 디모데가 동역자들과 함께 돌려보기를 기대하면서 보냈겠죠. 가르침의 교훈으로 삼기를 (바라며 보냈겠죠.) 뒤집어 보면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 특별히 노력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거의 우리의 본성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 점이 있어서 나는 이 모든 것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극복하던 때도 있고 아니면 극복하지 못하던 때도 있고 극복한 듯했는데 다시 옛날의 욕심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주위의 본성에 비춰볼 때 너무나도 당연하잖아요. 과거에 단칼에 내리치면서 극복하던 죄를 어느 시점에서는 은근히 받아들이는 일은 인간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 중에 누가 여러분 재산을 전부를 팔아서 주님 앞에 드리겠다고 생각이나 해본 적이 있는 분을 한번 손들어보시죠. 집이고 땅이고 유산이고 모두 팔아 정리해서 주님 앞에 데리고 나는 그 혈혈단신으로 예수를 따라야겠다는 그런 마음 가진 사람들, 우리 중에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처음부터 사도들을 속이려고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그만큼 헌신적인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랬는데 집을 팔고 나서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나서 돈을 보자 마음이 변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절반을 감추고 절반을 내놨습니다. 그것도 오늘날 그런 사람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사도가 지적해서 죽은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교회의 순결을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말합니다. “팔기 전에도 네 땅이 아니고 팔고 난 후에도 네 땅이 아니었더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꾸짖은 것은 사실은 돈을 조금 낸 것 때문에 꾸짖은 게 아니라 마음이 돈을 사랑하고 있는 그 병 때문에 지적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게 꼭 아까 말한 것처럼 아주 청빈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청빈도 있고 청부도 있고 탁부도 있고 탁빈도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의 마음이 순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방해받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마음이 쏠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항상 당신에게 쏠린 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시면 누리고 가지면 소유합니다. 그러나 사랑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지 그것들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두 번째는 “믿음에서 떠나갈까” 떠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딤전 6:10). 돈을 사랑하면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 믿음의 제일 좋은 자리는 사랑이라는 화로 안에서 믿음이라는 불씨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의 믿음의 기능은 가장 잘 작동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하나님을 잘 믿을 텐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신뢰가 갈 텐데 마음의 사랑이 돈으로 이동하고 나면 결코 신령한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경건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랑이 가장 첫 번째 발걸음은 누구를 막 도와주는 게 사랑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때문에 누군가의 피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기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 그게 사랑입니다. 치덕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기 자신이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누를 끼치는 일은 없도록 자기 스스로 자신을 챙겨야 합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못 살았을지라도 앞으로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어떠한 상황을 만났을 때 혹시 나의 존재가 가족에게 친구에게 이웃에게 교회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를 염려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기본적인 인간의 의무입니다. 누를 끼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람 사랑의 원리입니다. 누군가에게 물질을 주고 누군가를 마음으로 돕고 혹은 행위로 섬겨서 그를 이롭게 하고 하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나는 한편으로 누군가의 끊임없이 치덕거리면서 누를 끼치고 존재 자체가 성가심의 대상이 되고 그러면서도 누구를 돕는다고 하는 것은 오지랖 넓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챙겨서 누구도 자신 때문에 누를 끼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남의 도움으로 차린 성대한 식탁보다는 내가 벌어서 먹는 한 끼의 라면이 더 맛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결국 돈을 사랑하게 되면 결국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현실보다도 더 확실하게 계시되는 것을 내가 의식하는 거 아닙니까? 확실히 눈에 보이는 사람들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내가 진짜 사랑하는 주님 때문에 기꺼이 버릴 수 있고 그분의 사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가 죽음의 강을 건너도 좋다는 것이 믿음이잖아요. 믿음이 지배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반입니다. 그런데 그걸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삶의 모든 기반이 하나님이고 그리고 나인데, 그 하나님께 유한한 내가 무한한 하나님, 보이는 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리고 하찮은 내가 위대한 하나님을 어떻게 소유하고 할 수 있습니까? 결국 믿음입니다.
밤에도 와보니까 성도들이 많이 나와서 그 밤늦은 시간에 이게 눈물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안 하고도 살 수 있는데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교회를 찾아서 자신이 하나님한테 기도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렇게 안 하면 믿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안 하면) 종교는 결국 빈껍데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 경건을 강조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에서 경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말한 것 같이 사랑의 믿음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믿음이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곳에는 사랑이 생겨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떠나가게 된다. 이게 사도의 통찰입니다. 수많은 돈 많은 사람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동역자 중에서도 공금을 횡령하는 사람을 왜 안 받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결국 돈을 사랑하면 결국은 믿음을 떠나게 되는구나 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경고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경고가 우리에게도 적실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근심하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딤전 6:10).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이겠습니까? 빚을 얻어다가 영끌까지 해서 투자를 하고 떨어지고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마음 졸이고 마지막에 자살할 생각까지 하고 이렇게 사는 것은 우리의 삶이 우선순위가 잘못된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반드시 근심하게 됩니다. 지금 제가 잊어버렸는데 영어에서 가장 긴 단어가 있습니다. 수십 글자로 되어 있는 단어가 있었는데 ‘뜬구름같이 여기다’라는 단어였습니다. 돈 자체가 끊임없이 한 곳에 고정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고 더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결국 자본을 움직여야 하잖아요. 거기에서 오는 불완전한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끊임없이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도 있느니라.” 여자들이 반지 하나 예쁜 거 사서 끼워 보십시오. 하루에도 몇 번씩, 주식 투자한 사람 핸드폰 보듯이 계속 볼 것입니다. 남자들이 구두 하나만 새거 살 수 있어도 몇 번씩 자기 구두를 쳐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도 돈을 사랑하면 돈을 따라서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잃어버리고 믿음을 잃어버리고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린 후에 그러고도 우리가 가져야 할 것 중에 그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Ⅳ. 적용과 결론
규모 있는 삶을 사십시오. 조금 벌어도 늘 저축하십시오. 그래서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남에게 누를 끼치며 살지 마십시오. 그렇게 살도록 자신을 준비하십시오. 그러나 사랑하지 마십시오. 돈 때문에 믿음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돈 때문에 경건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은 일종의 영적인 매춘 행위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 고귀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소비되도록 창조된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교제하고 근심보다는 평안을 누리면서 요동치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어디에 우리의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하고 돈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