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란 무엇인가?
“그가 모태에서 발가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이것도 큰 불행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의하랴”(전 5:15~16)
녹취자: 황인준
이번 주에 다룰 내용은 ‘불행이란 무엇인가’입니다. 불행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행복하지 않은 것. 그것이 불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행을 안다고 하는 것은 이미 불행을 불행으로 안다는 이야기는 이미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경험을 통해서 습득되는 것. 즉, 다벨라라싸, 백색 석판의 상태에서 경험에 의해서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이 창조될 때부터 인간의 본성 속에 행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각을 하나님이 심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은 그렇게 주관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살인을 하고 강도 짓을 하고 나쁜 짓을 하면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행복 속에서만 계속 사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사이코패스라서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일체없고 말입니다. 일종의 마음에 늘 조증에 들떠서 그저 무슨 악을 행하든지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바랄 행복이 없다고 해봅시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복이 꼭 가져야 할 객관적인 요소를 결핍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행이라는 뜻에는 아까 말씀드린 행복하지 않은 상태라는 주관적인 의미와 함께 행복하지 않은 상태를 가져오는 어떤 일이나 상황이라는 것도 불행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오류나 편견이 없이 인생 자체를 가만히 바라다보고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불행의 연속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꼭 목회에 있어 교인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자신들의 목사님이 아홉 번 설교를 못하다가도 한번 설교를 잘해서 모든 회중이 하나님께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지극한 행복을 맛보고 나면 그 다음 설교도 항상 잘못한 아홉 번의 설교 같지 않고 열 번째 설교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수없는 불행을 대부분의 시간에 겪었고 행복한 시간은 극히 찰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는 그 대부분의 불행한 시간이 반복될 거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반짝하고 빛나던 그 행복한 시간에 그런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불행에 대한 인간의 망각의 기능입니다. 그리고 이 망각의 기능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온 우리의 인생에 대한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불행해질 것입니다. 신기하게 행복했던 기억은 잘 잊히지 않고 불행했던 기억도 잊히지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시간들이 잊힙니다. 죽음을 결심하게 만들었던 그런 고통스러운 기억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결국 떠내러 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우리 자신을 내다보면 사실 이것은 끝없는 불행의 연속입니다. 우선 제일 먼저 우리들이 관측할 수 있는 사실은 참 허무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존재에 있어서 정말 너무나 허무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모기나 말벌 혹은 개미 같은 곤충들을 발로 밟아 죽인 적이 아마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물들도 살기 위해 태어났는데 졸지에 생이 끝나리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존재에 있어서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크기의 존재인지 한 번 생각해 봐야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시간과 존재의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린란드에 사는 상어는 400살을 산다고 합니다. 증명여부는 알 수 없지만요. 일본은 자국에 세계 최고령 나무가 있다고 자랑하는데 나이가 7천500만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최근에 나온 과학뉴스는 아주 작은 생물체를 북극해에서 발견했는데 아마 1억2천년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바닷가재조차도 아주 오랜 기간 사는 경우 1백년가까이 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나이 80세를 살고 죽는다고 해도 그 안에 무슨 일을 만났는지 알 수 없고 작은 차 하나만 정확하게 한 군데를 부딪쳐도 즉사하는 것이 인간이니 인간에 존재의 미약함이라는 것은 어디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오죽했으면 팡세가 ‘파스칼에서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한 방울의 수증기면 충분하다.’라고 했을 정도였겠습니까?
그렇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존재론적으로 강한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이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하찮은 것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언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몇 년 전 목과 어깨의 통증으로 병원에 가 진찰을 받았습니다. 담당의사는 목 수술을 하지 않으면 운전 중 충돌사고로 인해 전신 마비가 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하고자 마음을 먹고 노의사를 만났더니 “절대로 하면 안 된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제적 수술이라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 하는 것이 아니며 “매우 위험한 수술”이라고 했습니다. 막을 수 있는 발생 가능한 불행한 사태에 비해서 너무나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수술이기 때문에 얻는 것 보다는 잃는 것이 많다하여 수술을 하지 말기를 당부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병원을 나오면서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내가 멀쩡한 육신으로 걸어 다니느냐 안 걸어 다니느냐 하는 것이 뒤차를 무슨 차를 만나느냐에 달렸구나! ‘뒤차와 충돌이 나면 목을 다쳐 전신이 마비가 될 수밖에 없는 거구나’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의학적 사고에서 철학적 사고로 넘어 가고 ‘주여 나를 도우소서! ‘폭풍우 흑암속 해치사 빛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종교적인 사색으로 넘어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라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수첩에 나의 지인 중 누가 암에 걸렸고 몇 살에 죽었고 반신불수가 됐고 요양원에 누워있고 30대인데 치매가 와 지금 수갑을 채운 채 격리되어 있고 누구는 시집간 지 몇 달 만에 남편을 여의고 이런 것들을 우리는 수첩에 적어 놓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행복한 일들은 일기에 적어 놓아도 불행하고 가슴 아팠던 일, 이것들은 우리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우쳐주는 중요한 자료인데도 적어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파스칼에 의하면 “디베르티스망”입니다. 그런 사실을 보면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에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큰 불행이 닥쳐도 결국 사람들은 그 불행을 이겨내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 적은 없다. 특성만 사랑할 뿐이다.’ 대표적으로 남성들이 미모의 여성을 보면 호감을 가지는 것인데 미모의 여성을 보면 0.3초 안에 호감을 가지게 된다고 심리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이에 파스칼은 ‘그것이 사랑인가? 결국은 그 사람의 특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짜 사랑인가? 그로 하여금 장점을 느끼게 하는 나에게 장점을 느끼게 하는 모든 것이 사라져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얼굴 예쁘던 사람도 한순간에 사고가 나서 얼굴을 다치고 병상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하고 불구가 되었는데도 어머니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런 점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내 손가락으로 튕겨져서 떨어지는 파리 한 마리 내 발아래서 짓밟힐 때 비명소리 한마디 못 내고 죽는 개미, 그런 것과 인간이 무엇이 다를 바 있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오늘 하루 살아있는 그 자체가 놀라운 기적의 연속인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죽음의 위협들이 있는데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교역자와의 대화 중 그 당시 평균 연령이 남자가 72.8세이었는데 계산해 보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지 않습니까?”라고 이야기했더니 허를 찌르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그것도 평균일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절반의 사람은 그 전에 죽습니다.”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72.8세라고 하니 내가 72.8세까지 살겠구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 분은 확률이 절반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더 빨리 죽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그렇게 생각해 보니 내가 살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여실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가치적인 측면에서도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허무하기 그지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제껏 무엇을 하며 살았나? 진짜 내가 태어나서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더 선한 세상이 되었는가?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진심으로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혹은 선생님이 있어주셔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참 좋은 시간들이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고백이 나올 수 있게 해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선한 일도 했고 나쁜 짓도 했겠지만 나쁜 것이 선한 것보다 훨씬 크지는 않은가? 오히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 누를 덜 끼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까지 하고 나면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나야 할 어떤 필연성이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정말 나는 그렇게 별로 가치도 없는 존재로서 그렇게 미약한 존재로서 일생을 살아왔고 앞으로는 꽃다운 시절에도 그러했으니 이제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육체도 자유롭지 못하고 정신도 망각의 기운에 삼킴바되는 때가 되면 더욱더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에 인간은 정말 아무것도 일어났으면 좋았었던 일,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었던 일들이 별로 없고, 원하지 않는 상황, 원하지 않는 만남, 원하지 않는 일, 원하지 않는 나 자신의 모습 이것들을 끊임없이 마주하며 살아야 하니 그것을 국어사전에 도움을 받아 찾아보면 결국 불행한 존재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모든 사람들이 귀를 막습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밥이나 먹으라고 합니다. 사실은 그것이 듣기 싫어서 그런 것이지 그게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인생의 진실을 일깨워주는 그 요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세월은 속히 흐르면서 있는 것을 사라지게 하고 갖고 싶었던 것들은 빼앗아 가고 한사코 원하지 않은 것들은 우리에게 안겨주어서 우리 인생의 무게를 더하게 됩니다. 그러니 인간이야말로 끝없는 불행의 직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가끔 용감한 사람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비겁하게 살지 않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 불행한 모든 일을 직시하며 살겠노라’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알만한 철학자 강의를 하면서 인생에 대해서 설파합니다. 그렇게 하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 허무한 존재다. 내가 지금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지만 결국에 나도 죽는다는 겁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말자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니 이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생각을 하자 그리고 그렇게 죽는 건 그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살자.
운명은 또 어디서 온 것일까요? 운명은 눈에 들어오는 것일까요? ‘용감하게 죽으면 죽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용기를 가지고 삶의 모든 불행을 직시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눈 바로 뜨고 그 모든 것을 당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용기가 있다는 것은 그 용기를 사용해서 무엇인가 더 좋은데도 갈 때에 가치가 있는 겁니다. 용기를 사용해서 나쁜 곳으로 간다면 비겁한 사람이 훨씬 더 좋은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서 멀쩡한 국가를 미얀마처럼 정복하자 죽으면 사형당하고야 말리라. 사형당해도 나는 좋다. 이러한 용기가 불쑥 솟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결과 쿠데타가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데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숫자는 실제 죽어간 사람의 숫자의 십분의 일도 안 될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살인, 강간, 약탈 속에서 죽어가는 겁니다. 그러한 것을 똑바로 뜨면서 보고 살아간다. 용기가 우리에게 선을 찾아가게 할 때 그것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허무하게 죽는 존재다고 하는 것을 다 삭제해 버리고 그냥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용감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주 극소수 있다고 했을 때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대표적인 사람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이렇게 노예가 되었는지도 생각하기 싫어했고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이 기다리고 있는 새 땅이 주어졌다는 것도 생각하기 싫어했습니다. 채찍에 맞으며 무거운 벽돌을 나르고 어마어마한 노동으로 수많은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지만 고된 노동 끝에 주어지는 한 사발의 멀건 고깃국 그리고 마늘 몇 쪽 먹으면서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싹 잊어버렸습니다. 그런후 광야에 나왔을 때 어려움을 만나면 그 시절을 회상했으니 여기서 그 시절이라고 함은 등에 채찍을 맞고 피 흘리며 동료들이 죽은 시체로 끌려가던 그 시절이 아니라 그 끌려가는 사람 옆에서 고깃국 따뜻한 국물 한 모금에 몸의 피로를 달래던 그 아주 짧은 한 토막의 즐거운 시간들을 상상하면서 그렇게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의 삶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용감한 사람들은 용감해서 용감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몰라 용감한 것입니다.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고 죽은 후에는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것도 모르니깐 마음을 독하게 먹고 용감해질 수 있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용기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도리를 위해서 죽는다고 함은 그 도리가 우리 인생 안에 있는 것입니까? 밖에 있는 것입니까? 오늘 그 도리를 위해 인생을 버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죽은 그 사람은 다음 세대에 쓸데없는 일 한 사람으로 기록될 것이고 그 다음 세대에는 아주 몹쓸 일을 한 사람이라고 기억될 수도 있는데 과연 우리의 생명을 그렇게 버릴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이는 현실 안에서 이것만 인정하고 용감하게 살자, 대의를 위해서 살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를 향해 가고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인 죽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면 인간은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은 방식으로 용감하게 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용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이러한 불행을 직면하기 너무 무섭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것을 회피해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미친 듯이 돈을 벌고 높은 지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디베르티스망’ 회피를 위해서입니다. 누구보다 더 강력하게 더욱 힘 있게 더욱더 우리의 마음을 확실하게 회피시킬 수 있는 자원이 바로 돈과 권력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입고 먹고 쓰지도 못할 거면서 그렇게 엄청난 재산을 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이 참 허무하고 너무 비참하구나! 나! 이 생각에 계속 직면하기가 싫어! 그리고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재미도 없는 드라마가 나옵니다. 이게 확실히 회피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181일 1인당 6억짜리 호화 크루즈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회피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육체적인 쾌락이나 마약에 빠지는 것은 더 이상 경쟁자가 없을 정도의 확실한 회피입니다. 그래서 인류가 멸종하는 그 날까지 마약산업은 번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인생의 회피입니다.
결국은 끊임없이 생각으로 피해 가는데 정리를 해보자면 그 모든 회피는 인생이 정말 존재에 있어서 허무하다는 것. 가치에 있어서도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 그리고 심지어는 맨 정신으로는 자기 앞에 있는 현실의 불행,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이 많은 불행 앞에서 자신이 독립된 인간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무참하게 짓밟아 버립니다.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서 비관적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진짜 현실적이지는 않습니다. 사실 현실적이 되어보고 나면 모든 사람이 비관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한 때 매우 좋아하고 탐닉하던 작가가 쇼펜하우어였습니다. 거의 모든 책을 읽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망각 속에 흩어졌지만 그때의 인상들은 또렷이 남아있습니다. 그렇다 고해서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자니깐 아무렇게나 살자는 주의는 아니었습니다. 역설했던 것은 이 세상이 얼마나 비참하고 희망을 가질만한 것이 털끝만큼도 없는가 하는 것을 한 번 똑바로 봐라 이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직시하여서 그 안에서 일종의 동정, 사랑 같은 것을 배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라는 것을 보고 나면 나는 그 허무를 극복했지만 모든 사람을 볼 때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이렇게 허무하게 사는 사람이고 저 사람도 허무하게 사는 사람, 허무한 사람들이 서로 가엽이 여겨주는 것도 그것도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한 밑바닥까지 깊이 인간의 불행을 들여다보고 나면 결국은 우리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생각을 끊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나방처럼 나비처럼 살던가 아니면 미쳐버리던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근데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인간이 그런 깊은 의지할 곳이 없는 불행에 직면해서 자기가 의지할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에는 생각이 나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 정신의 고향입니다. 영혼의 고향. 안 가본 곳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 하나님의 품안에서 태어나서 하나님의 품안에서 있었던 그 안식과 쉼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깨어나지 못한 것을 우리가 미몽이라고 합니다. 미몽에서 깨어난 것을 우리가 계몽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한 번 계몽하고 나면 인간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비참한 존재이고 희망을 가질 수 없이 불행해 둘러싸여 있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익숙했던 수많은 관계들, 아내, 남편, 부부, 아이, 교회 심지어 신에 대해서까지 철저하게 나일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 계몽인 것입니다.
어제까지 안 그렇던 아이가 완전히 다른 아이로 보이는 이유가 계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첫 번째 계몽으로 깨어나서 혼란이 오기 시작하면서 추후엔 자리를 잡게 되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바로 회피의 방식, 체념의 방식, 포기의 방식 혹은 잘못된 확신의 방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불행이 극도에 다다르게 될 때에 자기 자신이 얼마나 존재에 있어서 미약하고 가치에 있어서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며 자기가 정말 이 세상을 맨 정신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그 극도에 다다른 사람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미치는 사람들이 여러분들과는 매우 다른 환경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보다 더 행복한 환경 속에서 살면서도 그러한 자아를 감당할 수 없어서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상황 속에서 도저히 자기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가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를 건져낼 수 없는 그런 비참한 인간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고향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파스칼이 말했던 바와 같이 하나님이 행복이 아니라면 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밖에 행복해 질수 없는가? 묻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신이 새카맣게 잊어버렸던 옛 고향을 생각하게 됩니다. 고향 생각하면 나쁜 것은 별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 기억의 끝은 4살쯤에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4살 그때가 행복했던 기억밖에 안 납니다. 특별히 가슴 아팠던 기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린 아이가 볼 수 있는 인식의 대역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춰진 환경 내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은 항상 행복으로 떠오릅니다. 결국은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 영혼의 고향은 하나님의 품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불행을 통해 이 세상에 앞으로 내가 나의 인생이 두 배쯤 늘어나 산다고 하더라도 살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살았던 일보다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보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에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인생이 이 세상에 왔다는 원인이신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에 이 세상에 불행과 슬픔과 모든 수많은 사연을 안고 살아가다가 결국에 돌아가게 될 그 본향이신 하나님의 품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을 통해서 행복으로 이끌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행을 통해 행복으로 이끄시는 것이니 이런 새로운 각도에서 자신의 인생을 보며 행복을 통해서는 행복을 못 찾아 가지만 불행을 통해서는 행복을 찾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행복과 불행의 이면을 보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은 의미를 해석해내는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이 생겼을 때 그 상황 자체가 기뻐서 기뻐하고 슬퍼서 슬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닥친 그 불행을 보면서 그 불행 너머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의미를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유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허무주의나 신앙주의자나 다 똑같이 도달하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정말 허무한 것이다.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주께서 제 인생을 이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불이요 그 영화는 불의 꽃과 같도다! 꽃은 지고 불은 시드나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로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