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란 무엇인가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 18;24)
녹취자:이 솔
사람들이 미친 듯이 물질을 추구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격언이 있습니다. 남이 나에게 돈 주고 사지 않을 수 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든지, 두 번째 그게 없으면 그것을 살 수 있는 돈을 갖든지, 셋째 둘 다 없으면 권력으로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지위를 갖든지 셋 중에 하나입니다. 나머지 네 번째 사람은 루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본주의의 현실입니다.
재능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닙니다. 높은 지위를 갖는 것은 재능을 갖고 타고나는 것만큼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열 명의 직원이면 부장까지 올라가는 사람은 세명 밖에 안 됩니다. 그 위에 상무까지 올라가는 사람 셋 중에 0.5명밖에 안 되고, 0.5명도 안 됩니다. 그 위에까지 올라간 다음 얼마가 되겠는가 한번 생각해보세요. 육군 사관 학교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가지만 한 클라스에서 스타가 한 명밖에 안 나옵니다. 그렇게 지위를 얻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가장 쉬운 방법이 뭐겠습니까?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그래도 쉬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게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돈을 미치는 것입니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지위도 어느 정도 살 수 있고 뇌물을 줘서라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능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미친 듯이 돈을 법니다. 그것이 인간의 삶을 어느 정도 개선해주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정신의 위안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육체를 어느 정도 편안하게 해서 괴로움을 면하게 해주고 에너지를 절약하게 해주고 개인적인 평안을 누리는데 어느 정도에 도움을 줄 뿐입니다. 돈이 많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말할 수 없이 허한 삶을 사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를 하면서 11번째까지 왔고, 지금 12번째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는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친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친구를 국어 사전을 찾아 보니까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아니면 친구가 아닌 사람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근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깝게 오래 사귀어 친근해진 벗. 이게 가장 정확한 친구에 대한 정의라고 봅니다. 그래서 친구라는 말이 한자어인데 친할 친자에다가 오래될 구자입니다. 친구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친구는 즉석에서 만든 활어 게 무침 같은 게 아니라 숙성된 간장 게장 같은 게 친구입니다. 게 무침을 나는 썩 좋아하지 않는데 옛날에 잘 아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펄펄 살아 뛰는 게를 막 칼로 도막을 내가지고 도막을 낸 다음에도 게가 막 움직입니다. 거기에다가 고춧가루하고 양념을 부어가지고 막 해가지고 먹습니다. 그 때 그 살이 답니다. 활어 회에서 먹는 맛 같은 그런 맛이 납니다. 그런데 친구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래서 금방 사귀어서 마음에 쏙 든 친구보다는 오래 사귀어서 고운정 미운정 들고 슴슴하게 느껴지는 친구가 오히려 더 깊은 친구입니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이 논란이 많이 되는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해석과 관련해서 우리말 성경에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이건 전혀 틀린 번역입니다. 비슷하지도 않은 번역입니다. 그리고 각주에는 “해를 끼치는 친구들이 있으나” 이 번역도 아닙니다. 다 헛빵입니다. 내가 원문을 읽어 주고 해석해 주겠습니다. “이쉬 레인 레 히틀로에아 에 애쉬 베 애쉬 오헤프 라베크 메 아.” 직역을 하면 ‘친구들의 한 사람은’ 입니다. ‘친구들의 한 사람.’ 무슨 뜻이겠어요? 어떤 사람이 있는데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어에서 연계형으로 사용될 때에 오브 플러스(+) 무엇이 나오면, 형용사처럼 쓰입니다. ‘many friends having man’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a man who has many friends’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쉬 엘로힘’ 그러잖아요. ‘이쉬’는 사람입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경건한 사람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쓰인 것입니다. a man of many friends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런데”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고 “그러나”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왜 “애쉬”는 ‘there is and there is’ 혹은 ‘but there is’ 이렇게 되고, ‘오 해브 이어 아하브’ 사랑하다의 남성분사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오 해브 사랑하는 자가 있다. 사랑하는 친구 그 사람을 사랑해 주는 친구가 있다. 이런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다베크 메아흐 메’는 ‘them’입니다. ‘아흐’는 동생입니다. 아흐. 남동생, 형제보다도 더 친밀하게 사랑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친밀하다가 ‘다베크’라고 나옵니다. 다베크는 다바크, 달라붙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직 여호와를 부종하니라 할 때 ‘부종하니라’가 다바크를 번역한것입니다. 현대 히브리어에서 대베크가 되면 풀입니다. 그러니까 딱 달라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연합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아주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정말 사랑이 있겠느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뭐냐면 특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쁜 여성을 보면 사랑에 빠져요. 과연 그에 피부 2cm를 모두 벗겨내도 사랑하겠는가? 질문을 해보는 것입니다. 사랑할까? 그 예쁘다는 특성이 사라져도 사랑할까? 그걸 사랑해야지 진짜 사랑하는 것이지 예쁘다는 특성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게 그런 건 다바크의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건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최성기 목사님만 한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고운 정만 든 사람들이 잘 이별을 안 할까? 아니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사람이 못 헤어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우리 부부가 그렇게 살잖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매우 어려운 단어가 “친구들의 사람” 뒤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딱 한 단어인데 래 플러스 부정사하고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래 히트 로에아”로 되어 있습니다. 번역이 혼란스럽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가 참 이상합니다. “라아라”는 단어가 친구라는 뜻도 되고 적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리고 또 악을 행하다, 심지어는 망한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친구도 되고 적도 되고 그 다음에 또 친구를 사귀다도 되고 망하다도 됩니다. 해를 당하다도 됩니다. NIV 성경에서는 라아를 ‘망하다’라로 해석을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번역을 했냐면 많은 친구를 가진 사람도 망하지만 그러나 형제보다도 더 친밀하게 사랑하는 친구가 있다. 친구도 있다. 이렇게 번역을 한 것입니다. 저는 번역들이 논란을 일으킬 때에 일단 원문을 보고 그 다음에 조사를 해봅니다. 그래서 판결이 잘 안 날 때는 제일 그래도 권위 있게 참고하는 것이 KJV입니다. KJV은 제가 독일어까지 포함해서 이십 몇개 국의 성경을 놓고 구약 성경을 읽고 오경을 읽었습니다. 객관적으로 얘기할 때 가장 정확한 번역입니다. KJV을 보니까 역시 다르게 해석을 했습니다. “a man who has many friends must show his friendship friendly”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아까 나온 어렵다고 하는 “래히트 로에 아흐”를 어떻게 해석한거냐면 “should”로 해석한것입니다. 그리고 “라”를 ‘친구를 사귀다’라고 한 것입니다. 친구가 많은 사람은 마땅히 그들을 친구로 그러니까 친구가 많은 사람은 마땅히 그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듯이 살아야 하는데,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해석이 원문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제 좀 더 본문 비평에 대한 책들을 보고 더 파헤쳐 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내가 본 자료로서는 이 번역이 그래도 맞다 이렇게 보여집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이걸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많은 친구를 가진 자는 마땅히 그들을 친구로서 대해야 하지만 친구로서 대해야 하고 그런데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더 친밀하니라. 잠언 18장에 문맥이 후반부에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쭉 다룹니다. 그래서 그 바로 위에 보면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해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 뒤에는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입니까? 가난한 자가 간절한 말로 구해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는데 평소에 그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의 눈에 쏙 드는 사람이었다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어도 그 친구들이 모두 자기와 같은 마음으로 자기를 대해주는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해주든지 상관없이 그들을 우정으로서 대해주어야 하는데 그들 중 전부가 아니라 가끔 어떤 사람은 형제보다도 더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서 우리들이 발견하게 되는 게 우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라는 것입니다. 친구를 갖는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모험입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인생을 살면서 친구를 친구 때문에 망한 사람들, 친구 때문에 인생에 큰 위기를 겪은 사람들, 빚보증을 선다든지 사기를 당한다든지 그 사람이 사기치려고 그러진 않았겠지. 친구니까. 물에 빠졌는데 그냥 한 손 붙잡고 함께 물에 빠져들어가는 경우죠. 우리는 그런 경우를 자주 보잖아요. 그래서 10년 동안 친구 보증 선 빚 갚느냐고 월세 방을 전전하면서 죽을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든지 뭐 등등 친구를 도왔는데 사기의 공범으로 몰려서 감옥에 가게 되었다는 등등 별의별 이야기를 다 들어요. 친구는 항상 이런 위험한 모험입니다. 그래서 일종의 도박과 같아요. 친구를 사귀는 것은.
왜냐하면 그런 경우도 있지만 또는 친구가 의도적으로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사람을 사귄다는 자체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게 만들 정도로 힘든 것이 우정을 갖는다는 친구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다음과 같습니다). 친구는 집안에 들여놓은 화초와 같아요. 그냥 갖다 놓으면 저절로 자라는 게 아니라 물주고 그 다음에 비료도 주고 분갈이도 해주고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그렇게 화분을 좋아하던 여성들이 나이가 들고 할머니가 되면 하나씩 갖다 남을 줍니다. 왜냐면 가꾸기가 너무 힘든 것입니다. 많은 수고와 노동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어느 집에 들어가서 베란다에 그런 식물이 싱싱하게 살아 있으면 그 집 주부가 보통 부지런한 사람이 아닙니다. 계란을 먹어도 다 그 계란 껍질을 모아놨다가 말려서 다른 할 일도 많은데 그걸 우리 집사람은 그걸 절구에 찍고 앉아 있습니다. 그걸 그리고 곱게 빻아서 또 갖다가 뿌려주고 그 시간에 성경을 한 장 더 읽지. 그런 것입니다. 그것도 기분 전환입니다.
친구로부터 큰 배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너무 위험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에서도 마찬가지고 로마에서도 마찬가지고 친구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그래서 키케로의 작품 중에 우정에 관하여라는 유명한 명문이 있습니다. 라틴어 공부하는 사람들이 교과서처럼 읽는 책인데 아주 우아한 명문입니다. 결국은 과연 친구가 없는 사람의 인생을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친구를 사귀는 것 자체가 자기를 완성해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싱글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싱글로 사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싱글 생활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중요한 조건 몇 개를 듭니다. 안정된 직장. 경제적인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건강한 몸, 그 다음에 꼽는 것이 평생 사귈 수 있는 친구입니다. 사실 그 세 가지만 있으면 어느 정도는 삽니다. 그리고 새로 배우는 걸 좋아할 것 등등등 일곱여덟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 중에 제일 으뜸이 되는 게 경제적 안정과 그다음에 친구 그리고 육신의 건강입니다. 뭐 당연히 정신적인 건강도 필요하겠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친구가 꼭 필요한것입니다.
그러면 우정에 유익이 무엇인가? 친구를 사귀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는 우리가 훌륭하게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갈 때에는 친구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친구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우리들이 함께 그래도 밥을 먹고 그럴 수 있는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혹은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좀 그런 경우가 없다지만 불신자들에게 뭐 사람은 결혼 생활에 큰 위기를 만날 수 있잖아요. 이혼을 해야 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사업에 큰 위기를 만나서.
이제 뭐 도망을 다니는 신세가 된다든지 뭐 등등등 만나잖아요.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의 인생에서위기를 만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있어서 친구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사귀어서 곰삭은 친구는 바로 그런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그 사람에게 돈을 도와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진심으로 그 사람을 염려하면서 그러면서 그 사람이 편이 되어 주어서 함께 생각해 주는 거지요. 밧줄을 생각해보세요. 성경에서는 삼겹줄은 쉽게 끊은 삼겹살이 아닙니다.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느니라. 삼겹살도 그렇잖아요. 고기, 비계 그 다음에 껍데기까지 세 개 합쳐져 있으면 잘 안 끊어질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가위로 자릅니다. 수육은 잘 찢어져도 삼겹살 잘 안 찢어집니다. 근데 성경에는 삼겹살이 아니라 삼겹줄입니다. 줄 세 개가 있으면 안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을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사실은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떤 친구가 그 사람의 문제를 자기 문제처럼 생각해 주면서 연합이 되어서 같이 고민해준다는 것은 그건 하루 아침에 생긴 게 아닙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오랫 동안 투자를 한 것입니다. 강원도에 가면 속사에 가면 제가 종종 들르는 꿩 만두집이 있는데 김치찌개도 합니다. 김치가 너무 맛있습니다. 그 동네 원래 김치가 맛있습니다. 추워서. 땅에 담아 묻어서. ‘아주머니 어쩌면 김치가 맛있습니다. 찌개를 했는데 정말 맛있습니다.’ ‘어 손님 이거 2년 된 김치입니다.’ 그래서 ‘2년씩이나 보관하셨어요.’ ‘아닙니다. 우리 집에 7년 보관한 김치도 있습니다. 서울에서 사러 옵니다. 그건 김치가 아니라 약입니다.’ 먹어 보고 싶었습니다. 7년 된 김치는 어떤 김치일까? 그게 어느 날 하루 인상 좋게 봤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그 가능하겠습니까? 술 먹고 전화합니다. 아무개야 나 죽을 것 같아. 왜? 아무래도 이혼해야 되겠어. 나 지금 경찰에 수배됐어. 그럴 때 달려와서 자기 문제처럼 생각하면서 그래도 낙심하지 마라. 길을 찾아보자. 그리고 내가 뭘 도와줄 수 있겠니? 라고 하는 건 그 사람이 오랫 동안 그 친구를 위해서 헌신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위기를 닥쳤는데 친구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일생을 어떤 식의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친구가 많다는 것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았다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나라에 통계가 있습니다. 부조를 합니다. 자기가 뿌린 돈의 70%가 들어오면 성공적입니다. 천만원을 뿌렸는데 1,500만 원이 들어왔다.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있으려면 높은 지위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키칠 수 있을 때에는 한푼 안 뿌렸는데도 들어오는 것입니다. 부조 아닌 뇌물입니다. 한 만큼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생의 위기를 맞습니다. 그때 인생에서 방황하거나 위기를 만났을 때 자기를 진심으로 염려해 주며 함께 있어 주는 친구의 가치는 어느 정도 될까요? 때로는 가족 전체보다도 더 클 수 있습니다. 무게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에게 그런 친구가 있는가? 정말 그렇게 염려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어디를 가도 늘 사주고 베푸는 사람에게 친구가 많지, 빈대 붙어서 얻어먹으려는 사람이 친구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호의를 베풀면서 많은 사람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이 다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형식적으로는 많지만 그러나 절대 그렇게 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아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많은 친구를 가진 사람은 마땅히 그 우정을 친근하게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지만 어떤 사람은 형제보다도 더 친밀하게 사랑하느니라. 그래서 끊임없이 뿌리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 친구의 도움은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하나님 의지하고 믿음으로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런 친구가 옆에 있어 주어서 함께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어주면 그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손해 볼 확률이 매우 높지만 그래도 친구는 필요합니다.
두 번째 친구는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지만 사실은 자기 일은 자기가 잘 가장 잘 알지만 그러나 자기 일이기 때문에 사실은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그것에 대해서 충고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인가 가치가 흔들리고 올바르지 못할 때 친구가 해주는 그 충고는 아주 놀라운 이걸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에게 간지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엄청나게 불을 받고 1960년대 말에 굉장했습니다. 거의 뭐 신화적인 존재였습니다. 엄청난 성령의 역사가 있고 이 분이 설교도 무지하게 빠릅니다. 이 사람이 설교 시간에 반말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동안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친구 한 사람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조목사. 니가 은혜 받은 것도 알겠고 너 설교 진짜 잘한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함께하는 것도 맞는데 너 절대 반말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다. 니가 성도들을 깔보며 교만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 양반이 편지 한 통을 받고 자기가 깊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반말을 딱 멈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이제 존댓말로 설교를 다시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속에 깊이 들어가면 이게 잘 나갈 때는 잘 나가서 못 나갈 때는 못 나가기 때문에 나 자신을 정확하게 못 봅니다. 그때 친구의 충고는 우리에게 아주 깊은 유익이 됩니다. 큰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절할 때 충고를 해줌으로써 그걸 모두 듣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근데 평소에 나와 늘 저 사람이 나의 성공을 시기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와서 너 잘해 너 그것이 절대 너 잘하는 게 아니야 그 지금 건방져지고 있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면 심적으로 내가 그걸 받아들이겠어요? 너는 평소에도 나한테 늘 열등감을 가졌는지 늘 시비를 거는 놈인데 결국은 내가 니 말을 어떻게 믿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공을 너무 기뻐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잘 되었을 때 자기보다 더 기뻐해 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더 잘되기를 바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 친구가 어느 날 그건 아니지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이런 충고가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삶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아주 다른 방면에서 매우 뛰어나도 어느 한 지점에서 매우 잘못된 것을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흘러갈 수 있는 정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때에 그걸 엄마가 하면 잔소리로 여겨지고 애들이 하면 건방지다고 느껴지고 선생님이 하면 고지식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가 할 때 그 말이 가장 큰 강력한 호소력이 있는 것입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교회 나온 애들이 선생님이 전도에서 교회 나오는 애는 희귀합니다. 친한 친구가 나도 너무 힘들었는데 교회에 가니까 답이 있더라. 애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매우 커다란 위험 그리고 지뢰밭이 놓은 벌판을 건너가는 것 같이 위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우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기서 알 수 있는 거지요.
그다음, 우리는 공감이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답은 뻔히 압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 불이 나는 것입니다. 너무 화가 나고 막 이게 막 쏟아져 나옵니다. 그래 가지고 엄마한테 얘기를 하니까 네가 참아라. 남편한테 얘기하니까 당신 요새 기도를 안 하더니 드디어 일이 터졌구나. (그런데) 친구한테 얘기하면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어느 정신과 의사나 고백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시누이가 너무 맘에 안 들어서 시누이를 막 욕을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남편은 자기 누이니까 ‘걔가 진심이 아닐거야. 나부터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난 여동생이 없지만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시동생에 대해서 사람이 왜 그래 라고 뭐라고 투덜대면 걔 원래 그런 애 아니야 그런 거랑 마찮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디서 배웠는지 남편이 그래 걔 미쳤구만. 인간이 어떻게 그래. 자기가 5% 욕하면 남편이 10% 욕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하니까 그다음에는 얘기만 꺼내면 앞서서 말도 안 되는 인간이라고 패대기쳐버리니까 그 자체가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서 아내가 시어머니 흉을 보면 옹호하지 말고 ‘야 진짜 내가 당신이면 못 살겠다. 그런 시어머니가 있냐.’ 같이 욕을 합니다. 치유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한테 얘기해 주면 니가 참으라고 얘기하고 남편한테 얘기해 주면 경건한 남편한테 얘기해 주면 혈기 부리지 말고 기도하라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런데) 친구는 들어줍니다. 친구가 해줄 것도 없습니다. “정말, 대박. 헐.” 몇 마디만 해주고 가만히 들어만 주면 다 이야기하고 나와서 친구하고 헤어지고 나오면서 ‘내가 잘못했지. 내가 잘해야지.’ 그리고 돌아온단 말입니다. 그렇게 들어 줄 사람이 누군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선생님한테 얘기할 것입니까? 길가는 아저씨 붙들고 얘기하시렵니까? 심지어 목사를 붙들고 얘기하기도 참 어렵습니다. 친구는 그 얘기를 들어줍니다. 그래서 친구들도 어떤 사람에 대해서 신상을 알고 싶으면 그 사람에게 물어보지 말고 친한 친구를 잘 꼬셔서 그래서 어떻게 생활하니 물어보면서 은근히 물어보면 그에 대한 정보가 다 나옵니다. 친구에게 마음을 털어놓잖아요. 우리 모두에게 그러고 싶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계속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나 같은 어차피 1년 남았는데 뭐 누구 안 떨어지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전 세계에. 치솟다가 끝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떨어지지. 떨어지면 어차피 그만둘 텐데. 그게 아니랍니다. 부시 대통령이 자기 회고록에서 글을 썼는데 임기 말년에 부시 가문이 굉장히 강인한 가문입니다. 근데 아들 부시 얘기 하는 것입니다. 지지율이 떨어질 때는 친구 어깨에 기대여서 펑펑 울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대단해 보이는 지도자들도 심정이 그런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지지율이 떨어지면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의 지지율이 떨어집니다. 그럼 다음 대선에 그 당 이름을 걸고 나온 후보가 떨어집니다. 떨어지면 그 비난이 자기한테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설정해 놓은 국가 운영의 방향은 다 다른 당에 의해서 다 뒤집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생각을 해보십시오. 거기는 그 정도 아니라 정권이 바뀌잖아요. 하원 의원의 모든 위원장을 승리한 당이 독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걸 생각할 때 이거는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기의 문제가 아니라, 당의 미래가 걸린 문제고 국가의 미래가 걸린 문제입니다. (그러니) 그 대단한 사림이 친구의 어깨에 기대어서 흐느끼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외롭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친구는 공감을 해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공감해 주는 사림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스승은 공감해주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면 스승이니까. 올바른 길을 가라고 얘기를 해야되는 것입니다. 아 그 말이 맞다. 그렇게 뭐 사역을 하다가 퍼졌는데 퍼진 자리에서 푹 쉬어라. 이렇게 스승은 얘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일어나서 정신 차리고 사명의 길을 가야지. 그렇게 얘기를 해야합니다. 그런데 친구는 얘기할 수 있습니다. 니가 중요하지, 뭐가 더 중요하냐? 그리고 같이 근심해 주는 게 친구입니다. 그런 사람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인한 사람 사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친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인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친구는 일반적인 친구가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함께 하나님을 찾아가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때로는 친구가 서로가 언쟁을 해도 그 언쟁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논리를 다듬어 주고 사랑에 열정을 더 해줘서 결국은 하나님을 잘 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게 신앙 안에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신앙 안에서의 친구를 갖는 것입니다.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친구 진리에 동지 그런 사람 중에 친구가 있어서 자기를 특별히 사랑하고 함께 진리를 찾아 가도록 만들어 주는 친구가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보람되겠는가? 그렇게 해서 내가 연약할 때 그가 나를 붙들어 주고 또 네가 연약할 때 내가 그를 붙들어 주고 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