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팔리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마26:1-2)
녹취자 : 김경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을 잠시 멈춰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주가 종려주일이고 고난주간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그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잠시 멈추고 십자가 설교를 하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제목은 ‘인자가 팔리리라’ 라는 제목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앞에 23장부터 25장에 이르기까지 꽤 긴 설교를 하십니다. 이것이 한 번에 모두 설교한 것일 수도 있고 듬성듬성 설교한 것을 모아놓은 것일 수도 있는데 우리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어째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팔리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첫 번째 살펴 볼 것이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거꾸로 보면 당신이 뭔가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서론적으로 그 긴 설교를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본론적으로 꼭 하시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팔리리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혀 팔릴 것이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시면 되지 왜 이 긴 말씀을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이 의문은 곧 풀립니다. 23장부터 25장까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한번 쭉 읽어보면 ‘이래서 예수님이 서론적으로 이 말씀을 하신 후에야 비로소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23장부터 25장까지의 내용의 전부가 종말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세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종말, 말세 이것은 무엇일까? 종말 그러면 끝날 종(終)자에 끝날 말(末)자입니다. 종말이라는 것은 있었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종말을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개인적인 종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종말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개인적인 종말입니다. 그런데 이 개인적인 종말보다도 신약성경이 더 많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주적인 종말입니다. 파스칼은 이 우주적인 종말보다는 인간 개개인의 실존이 그 삶을 끝내야 하는 개인적인 종말을 가지고 인생의 허무함을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종말에 대해서 균형을 가져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의 개인의 종말이 엄연하다는 사실을 깊이 숙고하면서 살아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결국 우주적인 종말이 올 것이며 그때는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판단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종말에 관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의 사상은 이러했습니다. 종말은 사람들에게 각기 달리 오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종말이니 그 우주적인 종말이 있을 때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악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측면이 드러나고 그래서 그날은 말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의 날이 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주를 의지하며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상급의 날이요, 오랫동안 맺혔던 원한을 풀어주시는 축복의 날로 지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종합해 보면 결국은 말세라는 개념에 이르게 됩니다. 말세는 그 종말을 세상이라는 지평에 비추어 본 것입니다. 말세는 도대체 언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종말이 바로 끝나는 그날이라면 말세는 그 종말을 향해 바짝 다가간 시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말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말세의 끝에 있기 때문에 말세지말 혹은 말세의 끝자락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니 말세의 끝자락으로 가까이 갈수록 말세가 무엇인지를 알고 종말의 날이 어떤 날인지를 알면서 얼마 남지 않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가지런히 하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히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바로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만이 아니라 말세의 끝에 있는 사람들이 어떠어떠한 삶을 살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십자가를 말씀하시기 전에 이 시대를 분별하도록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 말세의 끝이요 언젠가는 이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며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오늘 혹은 내일 혹은 모레 어느 때든지 우리의 개인적인 종말은 도적과 같이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자, 이런 생각을 하고 나면 결국 세계를 바라볼 때 이 세상이 곧 없어질 세상이라는 것을 연민에 찬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 곧 다가올 세상에서 사람들은 악착같이 살아가고 아귀다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니 비유를 하자면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딪혀서 4시간 반 후면 완전히 침몰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벽벽이 구멍을 뚫고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배가 5°, 10°, 15°, 20°로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카드놀이를 하면서 돈내기를 하는 사람들이 게임의 룰이 공정하지 않다고, 속임수를 썼다고, 멱살을 잡고 싸우는 동안에 배는 다시 45°로 기웁니다. 카드도 밑으로 흘러내려가 떨어지고, 판돈도 쏟아지고, 자기들도 고꾸라질 처지에 뺨을 때리고 멱살을 놓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제자들 너희는 그러지 말아라. 때를 분별하라 이때가 말세인줄 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숨도 아침 이슬과 같아서 이 세계의 종말이 오기 전 잠시 후라도 사라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옛날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알프레드 노벨이 폭약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것은 인류역사에서 10대 발명품 중의 하나입니다. 곡괭이로 파야 할 땅을 폭약으로 터뜨려서 수십 명이 수개월을 일해도 못할 일들을 폭약이 해냈기 때문입니다. 처음 발견될 때에 니트로글리세린은 액체 상태였습니다. 폭발력은 굉장한데 불완전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그릇에 담아서 옮겼습니다. ‘공포의 보스’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바로 니트로글리세린을 옮기는 운전수를 모집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가다가 출렁거리다가 폭발할 수도 있고, 어디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막대한 보수를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운전수들이 꼬불꼬불한 산 아래 있는 절벽을 끼고 있는 길을 지나서 약속된 장소로 약속된 시간까지 폭약을 옮기는 광경이었습니다. 하나씩 둘씩 사고로 죽습니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 성공합니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달했을 때 그만 차가 언덕에서 구릅니다. 그리고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면서 죽어갑니다. 그때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돈다발을 손에 꽉 쥐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죽으면서 손을 펴니까 그 돈다발이 바람에 흩어지면서 날아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파스칼이 이야기했듯이 미치지 않고는 들여다볼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의 종말에 대한 처방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유월절과 관련지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유월절이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패셔흐’ 라는 단어인데 다름이 아니라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혹은 건너뛴다는 뜻입니다. 애굽의 포로로 잡혀있던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정확하게 그 인구를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이 각기 다르지만 그러나 성경의 내용을 진실하게 믿는다면 남자만 20세부터 60세까지가 67만 명이었으니까 최소한 2백만 명이고 많이 잡으면 3백만 명 정도 되리라고 믿는 그 노동력을 놓아준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일이었고 국가의 산업이 움직일 수 없는 악수였습니다. 그들을 놓아줄리 없습니다. 하나님이 본때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열 번의 재앙을 일으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러다가 횟수를 거듭하면서 이제는 도저히 애굽의 술사들이 따라갈 수 없는 여호와의 사자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애굽 사람들의 믿음을 하나씩 둘씩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 결정적인 시점이 태양이 빛을 잃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그들은 ‘레신’ 즉 태양신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낮에 그 빛이 사라진다는 것은 애굽 사람들에게 태양신을 능가하는 더 위대한 신이 있다는 것 혹은 태양신도 막아줄 수 없는 엄청난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학적인 선포였습니다. 이것으로도 모두 굴복하지 않자 하나님이 마지막에 애굽에서 태어난 모든 처음 난 것들을 죽이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죽음의 소식이 미리 전해지고 사람들은 어린 양을 문지방에서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집안에 바르면 죽음이 그 피가 발리어진 그 집을 건너뛴다고 하는데서 ‘패셔흐’, ‘Pass over’, 혹은 유월절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유월절은 맥추절, 유월절, 수장절. 맥추절은 밀을 처음 거두는 때고 그 다음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우리가 아는 유월절이고 그 다음 마지막이 수장절 혹은 초막절, 수확절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것은 곡식을 거두고 광야에서 했던 것처럼 숙곳이라는 임시 텐트를 치고 거기서 광야생활을 기념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는 3대 절기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3대 절기중 하나인 유월절은 그 나머지 두 절기보다 가장 성대한 절기였습니다. 이때에는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이 하나님 앞에 얼굴을 보여야 했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특별히 하나님 앞에 영생을 누릴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원래는 모두 죽어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육체의 죽음에 예외가 없었던 것처럼 영혼의 죽음도 예외가 없고 지옥으로 가는 심판에도 예외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목적을 더럽힌 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이라는 방법을 허락해주셔서 그 죽음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방에 첫 아이를 잃어버리고 혹 짐승의 처음 난 새끼를 잃어버린 통곡이 저 가난한 노비의 집에서부터 바로의 왕궁에까지 가득하였는데 울지 않는 동네가 있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동네였습니다. 이 사건을 바라볼 때 이스라엘 백성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마 두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서움, ‘하나님이 이렇게 두려우신 분이구나!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까불고 모세가 해방의 소식을 전하였을 때 멸시하였구나!’ 하는 탄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두 죽어야 마땅한 처음 난 것들을 살려주셨구나! 그 살려주신 원인이 고작해야 발에 채일 듯이 많은 어린 양 한 마리를 잡아서 목을 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양 때문에 우리 아들이 살았다고 말할 정신 나간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살려 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주목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깊은 속에서 그 두려움은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가득 차올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서로 서로 약속한 약조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죽이자.’ 모두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에는 하지말자.’ 또 모두 합의 했습니다. ‘죽이되 유월절에는 하지 말자.’ 왜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예루살렘에 모일 텐데 혹시라도 그분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분께로부터 보리떡을 먹고, 물고기를 먹고, 병 고침을 받고, 문둥병이 낫고, 이런 많은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이것은 옳지 않다고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면 민란이 될 터인데 그러면 이 사태는 빌라도도 책임을 질수 없는 사태이고 그때에 우리 유대교는 멸문지화를 면치 못하리라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절을 신성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유월절에는 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일 년 중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날을 하나님이 정하셨다면 가장 죽으시기 좋은 날이 유월절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2000년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성경본문의 시기로부터 1500년 전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 중 처음 난 것들을 위해서 그래서 문지방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어린양의 그 죽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모두 맏아들이 될 인류 전부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전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른 날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에 합당하신 날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그 유월절이라는 절기에 예수는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틀 후면 유월절 절기가 시작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유월절 그 사건 속에서 그들이 늘 찬송하던 유월절 사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아직 볼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고두고 찬양했던 두 가지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유월절로 자기들을 구해주신 하나님, 홍해를 건너게 해주신 하나님, 이 두 가지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 즉 아브라함 이래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본 가장 위대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들도 유월절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고 잠시 후에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예수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예수님은 유월절에 팔려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그 유월절이 바로 자신이 죽음으로써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심판이 넘어가게 될 그날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십자가의 못 박히기 위해서 팔리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구원을 바라보는 몇 가지 틀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팔고 사는 개념입니다. 그 팔고 사는 개념은 무엇이냐 하면 구원을 보는 단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구원을 보는 서너 개의 관점중 하나의 관점인데 각 관점들은 구원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을 최대한 훌륭하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관점이라는 구원 모델을 우리들이 함께 사용하면서 보는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팔고 사는 모델입니다. 즉 사람들은 죄를 지음으로 사단에게 팔렸고 팔린 그 사람들은 대가를 지불해야만 다시 사오실 수 있었는데 이 모델을 설명하기 위해서 당시 로마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가슴에 착착 와닿는 잊어버릴 수 없는 비유를 사용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속전의 비유입니다. 부자가 화려한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시장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저기서 채찍질을 당하는 노예가족들이 서있습니다. 노예상인이 소리를 지르며 오늘 저녁 떨이라고 싸게 판다고 네 명의 가족을 얼마에 팔겠노라가 소리를 지릅니다. 만약에 돈이 없으시면 하나씩 사 가셔도 판다고 합니다. 부자가 좋은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인데 너무 측은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종을 보내서 노예 넷의 가격이 얼마인지 물어보아라. 하니 지금 돈으로 환산하며 천만 원이랍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가져가서 사오너라. 그래서 노예가 돈을 지불하고 4명을 사옵니다. 집에 가서 깨끗이 목욕을 시키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잠을 재웠습니다. 가족들은 끌어안고 우리가 헤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너무 다행이라고 흐느껴 울면서 이 집에서 함께 살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다음날 아침 조반을 잘 먹인 다음에 이제 우리가 결국 이집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데 하고 있는데 주인이 부르는 것입니다. 뭔가 글씨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집안에는 더 이상 노예가 필요 없다. 너희들은 노예로 쓸려고 산 것이 아니라 불쌍해서 산 사람들이니…….’ 하며 증서를 각기 나누어 주는데 노예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주인의 도장이 찍힌 문서입니다.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 둘은 어리고 어른이 ‘주인님 우리는 가지 않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이 노예 시장에서 우리를 구해주겠습니까?’ 하면서 ‘주인님은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셨지만 우리는 주인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이집에서 그냥 품꾼처럼 있겠습니다.’ 그러면 증서를 찢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신분이 대등한 관계에서 고용계약을 맺은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월급은 받지만 이 식구들은 이 주인을 생명의 주인으로 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속 모델중 하나입니다. 거기서 팔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그 팔리는 방식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느냐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인류역사상 인간이 발견한 최악의 형벌제도가 십자가입니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최대한의 고통을 맛보다가 최대한의 고통으로 죽게 된다는 점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기에 로마인들에게는 이 형벌이 가해지지 않았고 더욱이 로마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라에 반역하거나 가정을 파괴하거나 하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그 형벌에 처하지 않았고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스타우라스’ 십자가라는 말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금기시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독일 사람들을 만났을 때 히틀러 이야기를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것은 금기어입니다. 히틀러를 비판하더라도 그 말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실례입니다. 그런 단어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팔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당신이 구원받을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신앙의 타락은 십자가의 구원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눈물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일을 하면 일이니까 할 것입니다. 봉사하면 할 것입니다. 봉사도 결국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자기 원래의 모습이 무엇이었는가? 주님을 위해 살면서 고난을 당해도 이 고난보다도 예수 없이 이 세상에서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갈 때 받았던 고통이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컸다는 사실을 상기하는데서 흐르는 눈물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자녀가 하루에 두 번씩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구원의 감격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이런 구원을 받지 못한 영혼을 보며 흘리는 눈물이 있다면 누가 뭐래도 그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를 친구로 여길 것이며 그가 어떠한 잘못을 했다고 소문이 나도 나는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고난의 주간에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