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팔리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마 26:1-2)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언처럼 남기신 강론입니다. 23장부터 계속되는 주제는 세상의 종말에 관한 교훈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말세의 끝 곧, 가깝게는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될 사건 멀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세상의 심판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자기의 시대를 분별하며 신앙적으로 깨어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가르치고 계십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더욱이 그분에 대해서 온 백성들이 칭송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그들은 정치적인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만 유월절을 피하고자 했으니 이는 자칫하면 백성들이 큰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II. 인자가 팔리리라
오늘 이 말씀은 "인자가 팔리리라"는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오랫동안 따라 다녔지만 사상적으로는 아직도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상은 성령강림 사건이 있고 난 뒤에야 바뀔 예정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큰 기적과 능력으로 지상 나라인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을 기대하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다른 나라를 꿈꾸셨으니 유월절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께서 이미 고난 받으실 때가 임박하였음을 알고 계셨고 이때부터 비로소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실 그리스도의 계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말씀을 마치실 때
제일 먼저 말씀을 마치실 때에 이 교훈이 주어졌습니다. 마태복음 26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씀은 곧 세상의 종말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말세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말세의 끝자락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 오실 때가 매우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어떤 자는 생명의 부활로 이르고 어떤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이르게 되어 최종적인 심판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 충분히 언급하신 후에 비로소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는 우리가 말세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십자가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세에는 참된 경건 대신 외식이 유행하고 구원에 대해 그릇된 안전감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과 믿음이 식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탄식하셨습니다. 말세의 끝에는 신앙적으로 깨어 있는 자들보다는 잠들어 있는 자들이 많은 시대가 될 것이라고 슬퍼하셨습니다. 또한 형식적으로는 주를 믿어도 충성스럽게 사는 자들이 드문 때가 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종말은 이제껏 세상을 다스리던 그릇된 질서가 급격하게 끝나고 올바른 새 질서가 도입되는 때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심판과 함께 이루어질 것입니다. 잘못된 권세는 끝나고 새로운 영적인 권세로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세를 지나는 우리는 영적으로 잠들지 말아야 합니다. 늘 깨어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구원의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잠들기 위해서는 노력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육신을 따라서 살기만 하면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깨어 있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번영보다는 종말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경건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잠시 지나가는 세상일 뿐이며 결국은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그 이전에 우리가 개인적인 죽음으로 그 종말을 미리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문화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놀러 다니고 즐기는 것들로 온통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은 인간은 태어나고 태어난 인간은 늙고 늙은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늙음이 아니어도 사고와 여러가지 이유로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만나는 일들은 우리의 인생에 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종말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가라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우리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아가기 위해서 이 때를 분별하고 종말 의식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경건히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유월절이 이를 때
두 번째는 유월절이 이를 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는 3대의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과 맥추절과 장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밀을 수확하고 난 후에 드리는 때인데 유월절부터 49일이 지난 다음 날이고 그래서 이날을 오순절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첫 번째 곡식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장막절은 초막절 혹은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이 때는 추수를 하고 광야 생활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초막을 짓고 지내는 절기라고 해서 초막절이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절기는 회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베푸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이 각박하고 어려운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감사를 잊어버리고 메마른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물질적으로 번영한 시대에 살기에 예전 같았으면 꿈도 꾸지 못했던 것들을 갖고 싶어하고 또 누리고 싶어하고 그리고 정말 특별히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당연히 많은 것을 보니 탐욕도 늘어나게 되고 인간의 욕망은 증대하게 됩니다. 이런 그릇된 희망을 많이 가질수록 인간은 감사를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이 불행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교훈입니다. 신앙을 떠나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잊어버린 채 방황하며 살면 자신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면 그것은 불신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보는 시각과 추호도 차이가 없습니다. 신앙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재해석하는 힘입니다. 비록 어려움이 있고 때로는 질병에 시달리고 세상의 고난이 있어도 그 속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어려움을 통해서 어떻게 자신의 영혼을 다루시고 결국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잠잠히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이 진짜 신앙인 것입니다.
'건너뛰다'라는 의미를 가진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이라는 말 자체가 '건너뛴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베푸셨던 10대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도록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전했지만 바로는 마음을 강퍅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10대 재앙을 베푸심으로 한편으로는 애굽 사람들에게 천상천하에 오직 하나님이 유일한 주이심을 드러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자기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정말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신앙을 일깨워주고 싶으셔서 행하셨던 일입니다. 아홉 가지 재앙이 내렸지만 끊임없이 바로는 마음을 바꾸며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열 번째 재앙을 내리시면서 이 재앙 있고 난 후에 바로가 비로소 너희 이스라엘을 놓아줄 것이라고 예고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애굽에서 처음 난 것들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위로는 바로의 첫 아들로부터 짐승의 처음 난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된 사건이었으니 원래 이스라엘도 이 법칙에서 예외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써 죽음이 그 피를 보고 넘어가는 유월의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그리고 어린양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며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하실 것을 보여주는 예표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위해 누군가 다른 구세주가 대신 죽음으로써 속죄를 받게 될 것을 보여준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월절은 이 세 개의 명절 중 가장 중요한 명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자신들이 그때 죽었어야 될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부정하거나 여행하는 자를 제외하고 모든 유대인들은 반드시 유월절을 지켜야 했으며 민수기 9장 13절에 의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 모든 남자는 세 절기에 반드시 하나님께 나와야 했고 제사를 드려야 했다고 출애굽기 34장 23절은 말합니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처형하되 유월절은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은 오직 자신들의 정치적인 안위를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 일로 인하여 폭동이 일어나면 자신들이 로마 당국으로부터 매우 커다란 문책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마태복음 26장 3절부터 5절까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분을 의인 혹은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이었으니 그런 분을 처형하면 폭동이 일어날까 봐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결심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제물로 바쳐지도록 예정되어 있었고 이미 애굽에서 이루어진 유월절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가리킨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겪은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사건은 바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할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었기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양이라고 부릅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입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우리는 모두 죄 때문에 엄위하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대가로 마땅히 죽음의 형벌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이 영생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요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새로운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유월절을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모든 천지의 애굽 백성들 가운데 죽음이 없었던 집안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죽음을 피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가슴 졸이며 지나가는 죽음을 보고 그 속에서 구원받은 은혜에 감격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로 고통받는 세상의 인류를 보며 우리는 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하실 위대한 일을 기대하며 죄와 비참에서 우리와 이웃을 구원해 주시기를 갈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몰랐으나 지금 살고 있는 우리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는 유월절을 생각하며 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어린양들의 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은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과 은혜가 새로워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십자가에 못박히심
마지막 세 번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감당하고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최고의 형벌에 처하게 하셔야 했습니다. 이는 그가 짊어진 우리 모든 인류의 죄의 크기가 무한했기 때문에 그렇게 큰 형벌의 죽임을 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원래 이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기 위한 사형집행 방법이었습니다. 로마가 변방의 야만인이었던 시절에 만든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사형제도였던 것입니다. 목을 잘라 죽이는 참수 능지처참과 같은 것들은 끔찍하게 고통스럽지만 순간에 고통이 끝나는 형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형벌은 목숨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 최고의 고통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 사람들은 대화 중에 십자가를 뜻하는 '스타우로스'라는 말 자체를 금기시하였습니다. 매우 불쾌하고, 기분 나쁘고 불길한 단어로 여겼던 것입니다. 로마의 법이 엄격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죄를 지은 사람들은 사형을 시켜도 십자가 형벌로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민란을 일으키거나 나라에 반역을 하거나 그리고 아주 끔찍한 인륜 파괴적 범죄 이외에는 십자가 형벌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잘못을 하셨습니까? 누구를 때리셨습니까? 누구의 것을 빼앗으셨습니까? 누구의 명예를 더럽혔습니까? 아닙니다. 일생을 자기를 다 주셔서 종처럼 섬기셨습니다. 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우는 자들의 눈에 눈물을 씻겨주시고 외로운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끔찍한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신 우리 인류의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웠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형벌에는 두 가지 규례가 따랐습니다.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질 사람들은 제일 먼저 끌려 가서 죽도록 채찍에 맞으며 백성들에게 조롱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형장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세로 막대를 먼저 세워놓고 가로 막대 위에 두 손을 벌여 손에 못을 박는 것이었습니다. 무거운 몸을 못 두 개로 지탱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커다란 크기의 못이 박혔습니다. 기차 레일 위에 침목을 고정하기 위해 사용하던 그런 못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맨처음엔 손바닥 한 가운데에 박았지만 자꾸 손이 찢어지면서 시신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손목에 못을 박아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밧줄로 묶고 도르래로 들어 올려 이미 서 있는 세로 막대기에 끼워 십자가를 만드는 형태였습니다. 그리고 몸을 더 고정시키기 위해 두 발을 모으고 거기에 큰 못을 박아 발 두 개를 관통해서 나무에 박혀 세 개의 못으로 체중을 지탱하게 하는 형태였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못 박기 위해서는 뼈가 깨지면서 들어갔고 또 동맥을 건드려 출혈이 심하게 생기게 되었습니다. 출혈이 일어나게 되면 두 가지 몸의 현상이 나타나는데 타는 듯한 목마름과 지옥을 넘나드는 것 같은 무서운 두통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못 박힌 그 자리가 나무에 매달려 무거운 몸을 지탱하고 있으니 살이 찢어지는 데서 오는 무서운 통증은 세 부위에서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오래 매달린 죄수들은 3일, 4일씩 죽지 않고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혼절했다가 깨어나고 깨어났다가 혼절하면서 십자가에서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갔던 것입니다. 최고의 고통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고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형벌은 그렇게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죄 없으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죄인들을 위해 대신 당하시는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생명을 주시기 위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4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그분은 하나님이었으나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기 위함이었으니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으로 오셔야 했고 그분의 죽음이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그분이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죄인으로 오해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빌립보서 2장 7절과 8절은 말합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다고 로마서 5장 10절은 말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는 죄 많은 세상에 살고 있고 구원 받았지만 우리의 마음 안에도 죄가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에는 굴곡이 있게 마련입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경건하게 사는 때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불경건하게 살 때가 있습니다. 은혜의 생명에 충만한 때가 있는가 하면 심령이 고갈되어 미끄러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을 회고해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은혜 속에 살았던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 은혜에 대한 감격이 우리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기쁨과 슬픔은 한 인격 안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잃어버린 슬픔과 유산을 홀로 물려받게 된 기쁨이 공존한다면 그는 인간도 아닙니다. 둘 중에 하나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경험에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주님을 믿었던 때는 바로 이 십자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입니다. 구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그때는 우리의 마음에 고통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그분이 죄인인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죄 많은 흉악한 나는 그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에는 항상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구원이 당연히 주어지는 것같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생각해도 자신이 받은 구원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이 한 번도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찬양)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십자가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값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있을 때 기쁨도 용솟음쳤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고난을 생각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세상에서는 멸시를 받으나 우리 하나님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소중한 자식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격하여 세상에 살고 있으나 세상을 섬기는 대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면서 구원 얻은 나의 일생이 이제는 덤으로 얻은 일생이기 때문에 내 평생 소원은 주님의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라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은 그 십자가의 은혜에서 멀어졌어도 가슴 깊은 곳에는 모두 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원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순수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말씀을 읽으면 언제나 눈물이 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쓸데없는 욕심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때문에 감격했고 그래서 그리스도는 여러분들의 인생에 전부인 것처럼 크게 보였고 그만큼 세상은 작아 보였습니다. 소원이 있다면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본 받고 그분의 사랑 안에 붙어 있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이 순간에도 기억납니다. 휴지가 수북하게 쌓이도록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 감격하고 죄를 지은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를 보며 내가 사랑하는 그 죄 때문에 예수가 그렇게 죽으셨다는 사실에 죄를 미워하고 대신 예수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다가 고난을 받을 때 그 고난이 크게 보였지만 예수 나를 위해 당하신 십자가의 큰 고난을 당하면서 나의 고난은 고난도 아니고 이 고통을 통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드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울고 웃었습니다. 기도 속에서 세상의 모든 설움을 녹여내고 그리고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하나님의 그 넓은 사랑을 받으며 산다는 사실 때문에 인생의 모든 시련의 가시밭길을 찬송하며 지날 수 있었습니다. 가시밭에 백합화는 가시에 찔리기 때문에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고 마침 부는 동남풍이 그 향기를 멀리멀리 실어 나르듯이 여러분들은 한 것도 없었는데 많은 이웃이 여러분의 삶을 보며 하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도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행복했고 자신도 불행하면서 더 불행한 사람을 위해서 티끌만큼이라도 섬기고 싶어 했습니다. 나는 그런 처음 사랑의 때의 여러분들을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만의 경험이 아니라 또한 나의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고단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내는 깊이 코를 골며 잠이 들었는데 저는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침대 아래에 내려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기도하는 가운데에 하나님이 그림을 보여주셨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들이 온통 세상에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눈물을 지으시며 "누가 나를 위하여 갈고"하며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처음으로 "하나님 제가 교회를 개척하도록 힘을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꿈을 꾼 적도 없었습니다. 나의 성향이나 모든 것으로 볼 때 저는 그냥 교수가 맞는다고 생각했고 혹시 목회를 하더라도 이미 잘 되어 있는 교회에 좋은 설교자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밤을 하얗게 세웠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의식이 돌아오면서 내가 무슨 기도를 한 것인지 내가 지금 교수로서 주님을 잘 섬기고 있는데 무슨 개척인가 개척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잤는데 그날 밤 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내려와서 침대에서 똑같은 기도를 밤새워 드렸습니다. 그런 경험이 3일이 계속 되고 나서 비로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양떼를 거두는 개척교회를 하는 사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순종했습니다. 모두 부러워하는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얼마 후 교수직을 내려놓고 열린교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의 감격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그 죽음을 설교할 때 사람들이 예수를 만났던 내 마음같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해서 안 먹어도 배불렀고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한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모두 그렇게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사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목을 끌어 안고 흘러내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에 젖은 얼굴에 볼을 비비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전했고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이 교회를 섬김으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충성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단지 지식의 깊이가 아닙니다. 이런 저런 직분을 많이 맡은 것도 신앙의 깊이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십자가에 감격하는 깊이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니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속상하고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흘릴 눈물이 없습니다. 은혜가 모두 사라진 후에 불평의 쓴 뿌리가 돋아 나오는 것이고 그것이 자라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되고 심지어 배교의 열매를 맺기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 마음대로 안 돼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사라졌기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18세기의 영국에 전설적인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저는 30대 시절에 그분을 너무 존경했고 그분의 설교를 모으는 일에 정성을 기울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조지 휫필드라는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설교하는 사람으로도 유명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인도했습니다. 여러 해 전 영국에 갔을 때 그분이 설교했던 하남 마운트라는 곳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당시에는 거기가 탄광지역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광부들이 중노동을 하며 겨우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휫필드 목사가 나타나면 많은 사람들이 잠시 일을 멈추고 서서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탄광 안에서 나온 새카만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구원의 은혜를 설교하는 소리를 들으며 새카만 사람들의 얼굴에 두 줄의 하얀 자국이 생겼으니 눈물 자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분도 때로는 은혜에서 멀어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자기가 회심했던 교회를 찾아가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구원을 받으며 눈물을 흘렸던 그 의자에 키스를 하면서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되새겼다고 합니다. 원래 술집의 보이였습니다. 술이나 팔고 객적은 농담으로 술꾼들이나 웃기며 허무하게 살다가 죽을 자기를 바로 거기서 만나주셔서 그 피로 속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복음 전도자로 삼으신 것을 되새겼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회심한 의자는 어디입니까? 그리고 거기에 입 맞추시겠습니까?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여러분들의 인생에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에 원하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일부 손에 넣는다고 칩시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원하는 어떤 지위에 올랐다고 칩시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이 다소 해결되었다고 칩시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영원한 행복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던 일은 예전에도 많았습니다. 그때는 성령 충만하여 그 모든 시련들을 이겨내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찬송을 올렸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많은 고난은 타오르는 찬송의 불길에 던져지는 장작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그 큰 시련으로 인하여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어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못 박히시고 창에 옆구리를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리신 것이 나 때문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펑펑 운적이 언제였습니까? 주님이 날 위해 모든 것을 주셨는데 제가 이만큼 밖에 살지 못해서 너무 죄스러워 주님 앞에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마른 눈을 가지고는 천국을 볼 수 없고 십자가의 은혜로 눈물에 젖은 성도의 눈에는 세상이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세상의 철학 그리고 손에 넣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없다면 우리는 사실상 살아 있으나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주시고 싶었던 것은 영생이었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연 만물을 너그럽게 대하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타락은 죄를 짓는 것만 타락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생각할 때 눈물이 나지 않는 것도 타락입니다. 구원을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예수께서 나를 위해 고통당하고 죽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신앙의 능력이 있겠습니까?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신자는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을 잊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은혜와 긍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의인이 되게 하셨고 마귀의 자식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으니 이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때문이었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며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