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1:80)
녹취자: 김경애
회심을 하고 성경을 읽었지만 저는 유난히 누구를 꼭 닮고 싶은 사람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서 사도 바울이 훌륭한 사람처럼 보였는데 아내를 만나고 나서 결혼을 하니까 자기는 다윗의 팬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좋아하다가 가만히 보니까 다윗보다는 조나단이 더 매력적인 인물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보니까 사도 바울보다는 오히려 사도 바울을 이 세상에 소개한 그 사람이 더 위대해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사실 특별히 누구를 좋아하지를 못하다가 지금으로부터 한 삼십년 전쯤 성경을 읽다가 세례 요한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 생애에 있어서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온 세례 요한이라는 이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었고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 못지않게 정말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생애를 살다가 죽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나바나 요나단보다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이 사람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로서 예수님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구약의 정경 말라기는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으로 끝나고 복음서는 세례요한이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중요한 인물이 예수님 오시는 앞길을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 예비 되었습니다. 확실히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앞으로 목회를 할 사람들인데 우리는 누구입니까? 청교도들은 이점에 있어서 분명했습니다. 우리 목회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 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의 후예라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학교의 문을 나와서 목회를 하지만 정말 평범하게 살다가 갑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매우 특별히 완악한 시대이고 진리를 멀리 떠난 시대이기 때문에 어떤 때보다도 더 특별한 목회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 특별한 사람으로서 준비된 세례 요한을 보면서 우리가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이라는 말이 그리스어 성경에 ‘파이디온’이라고 나오는데 어린이를 의미하지만 때로는 ‘Baby’ 갓난아이를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세례 요한은 제도권이 아닌 광야로 보내졌고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양육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이 아니는 점점 자라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예수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도록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에게는 무슨 준비가 필요하겠습니까? 우선 첫째는 육체적인 준비입니다. 사십이 되기 전에 인생의 철학을 세우고 삼십이 되기 전에 건강에 대한 철학을 세워야 합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내가 없는 것을 많은 지체들을 통해 빌려서 쓸 수 있습니다. 지혜가 모자라면 똑똑한 사람의 도움을 받고, 기술이 모자라면 기술자의 도움을 받고, 돈이 없으면 은행에 신세를 지면됩니다. 그러나 건강을 잃어버리면 누구에게도 그것을 빌려서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자신의 육체의 건강을 돌보는데 많이 마음을 써야합니다. 저는 그러지 못했던 것을 매우 후회하는데 여러분은 열심히 운동하십시오. 특히 남성들은 그냥 평범한 운동이 아니라 아주 격렬한 운동에 자신을 헌신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과 일대 삼으로 붙어도 한방에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의 무예실력을 익힐 정도로 그렇게 철저히 체력을 연마하십시오. 그러나 어디다 사용은 하지 마시고 그렇게 탄탄한 체력을 갖추십시오. 목회자가 6개월 정도 병상에 있으면 교인들은 녹용을 끊여온다, 아니면 고기를 사온다, 심지어는 보약을 지어온다고 하지만 2년 정도 아파서 누워있으면 ‘언제쯤이면 교회의 자리를 비워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열심히 운동하며 건강한 습관 속에서 강인한 체력을 길러가야 합니다. 이것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것은 육체의 순결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건강이 있는데 그 육체가 정욕에 빠져 범죄하고 간음하게 된다면 한 번에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점에서 육체의 순결을 잘 보존하면서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깨끗한 그릇들로 갖추어가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준비는 인격적인 준비입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라는 청교도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설교는 본문이고 삶은 각주입니다. 본문이 좀 어려워도 각주의 설명이 상세하면 논문을 이해할 수 있고 학문의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본문을 먼저 보지 않고 각주를 보면서 논문의 깊이를 가늠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만약에 여러분들이 설교는 그럴듯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인격과 삶으로써 그리스도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설교는 훌륭할수록 위선적인 설교가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어떻게 설교를 훌륭하게 할 뿐 아니라 삶과 인격이 그에 따라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인격과 삶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인격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 역시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간 사람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한 가지 질문을 세 번 반복해서 하셨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혹은 이것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이야말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인격입니다. 생활은 사랑의 생활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데서 진리를 붙들고 그 진리의 질서를 따라 자신의 온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볼 때나 골방에 홀로 있을 때나 동일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인격과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람들에게는 담대한 자유가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끊임없이 믿음으로 살고 기도 속에 살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끊임없이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어가야 합니다. 때로는 고난이 있지만 그 고난을 믿음으로 견디면서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는 기회로 삼고 ‘고난 받기 전에는 그릇 행했으나 고난을 당한 후에는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고백했던 시인처럼 모든 삶에 고난을 경솔히 흘려보내지 아니하고 자기 성숙의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1년 혹은 2년 전의 자신을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인격적인 진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고, 말씀으로 살고, 성령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어려도 거기에서 예수의 냄새가 납니다. 목회자의 기풍이 풍겨납니다.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런 교우들과 교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을 갖출 때 언젠가 기회가 올 때 여러분들은 과연 사는 대로 설교하고, 갖춘 인격 그대로 말하는 자연스러운 설교자들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지적인 준비입니다. 신학교 시절은 그야말로 신, 학, 교 시절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학문을 배우는 학교에 있는 시간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공부하지 않고 이제 전임사역을 하게 되고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정말 공부할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바쁘다고 하겠지만 그런데 여러분 인생에서 제일 한가한 시간일 것입니다. 만약에 이후에 더 한가한 시간이 생긴다면 여러분들은 사역의 세계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역자라면 지금이 가장 한가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공부해야 합니다. 진리를 전하는 사람은 진리를 배우는 일에 흥미를 느껴야 하고 그 일에 흥미가 없으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씀하셨듯이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갈 길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소명을 받은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학업을 연마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만나는 신학생들마다 말합니다. ‘목사님 무엇을 공부해야 합니까?’ 그런 질문을 할 시간에 책을 한권 더 읽지! 지금 신학교 2학년, 3학년이 되어서 겨우 그 질문을 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학문을 할 때에 우리는 진리를 찾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진리는 성경 말씀이 그 진리의 정수이지만 성경만 진리는 아닙니다. 성경을 핵심으로 해서 이 진리들이 온 학문의 세계에 퍼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가 모든 만물 안에 계시기에 그 모든 것들은 원리를 가지고 있고 그 원리가 지적으로 학문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진리의 핵심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모든 지식의 중심에 놓고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 밖으로 원을 펼쳐가면서 인접 학문들을 공부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신학의 4분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역사신학 혹은 교회사, 마지막으로 실천신학입니다. 이 4가지 모든 학문은 철저하게 성경을 중심에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많은 책의 사람이 되기 전에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신학과 관련된 책을 철저히 읽으면서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하고 이것을 위해서 성경의 배경이나 고고학이나 이런 것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성경을 그렇게 공부하려면 원어를 읽어야 합니다. 원어는 맑은 샘이고 번역된 것은 그 맑은 물을 여러 통에 여러 번 옮긴 것입니다. 당연히 그 맑은 샘의 물이 가장 청징(淸澄)합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열심을 내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해야 합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아람어가 다니엘서와 에스라서에 나옵니다. 그래서 아람어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과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리스어는 할 수만 있으면 코이네성경 그리스어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고전 그리스어까지 공부하면 아주 좋겠습니다. 코메르스 그릭까지는 나가지 않더라도 앤틱그릭까지는 공부를 해서 동방교부들의 책을 자유롭게 어느 정도라도 읽을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어려운 언어이기는 하지만 한번 공부하고나면 그 노고에 대한 훌륭한 보답을 해주는 학문입니다. 그리스어는 사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언어이고, 히브리어는 시를 묘사하기에 좋은 노래와 같은 언어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를 많이 공부하면 단어 하나 해설에서 아주 훌륭한 설교가 쏟아져 나옵니다. 저는 신대원을 다닐 때 작심하고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구약 전권의 1/3을 파싱하면서 모두 읽었습니다. 지금도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강대에서 설교하러 올라가기 전에 한번 읽는 히브리어성경은 나에게 말할 수 없이 많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열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히브어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더 공부해야 한다면 우가리더어나 아카리더어를 공부해야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추천할 만합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히브리렉스칼리지를 위해서 필요한 언어이기도 합니다.
조직신학으로 넘어가보면 이제 여러분들은 조직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중 내가 원하는 칼빈파의 신학만이 아니라 종교개혁, 그 이전, 멀리 가서 교부들로부터 시작해서 중세시대의 신학자들 어떻게 신학이 잘못 흐르게 되었는지 그 속에서도 어떤 것들은 보석처럼 빛나면서 정통 기독교의 물줄기를 이어왔는지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의 17세기에 화려하게 꽃피웠던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학과 18세기의 합리주의와 싸웠던 정통신학들을 공부해가면서 19세기 현대신학까지 거슬러 와야 하니 공부할 분야가 한, 둘이 아닙니다. 놀 시간이 없습니다.
역사는 또 어떻습니까? 만약에 역사를 공부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자기만 아는 사실에 갇혀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이것을 포물선의 신학원리라고 부릅니다. 신학을 할 때는 모두 자기가 출발한 시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장로 교인으로서 신앙고백을 하고 신학을 출발합니다. 감리교인은 감리교에서 출발하고 성결교인은 성결교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자기 신학만 갇혀 있지 말고 여기에서 쏘아 올려서 자기까지 이 신학이 오게 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교부들에게로 포물선을 그리면서 가고 또 내 신학을 떠나서 교부들의 신학을 시작해서 어떻게 나의 신학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양쪽으로 포물선을 그리면서 공부할 때 우리는 비로소 기독교인 전체가 무엇이고 어느 만큼이 양보할 수 있는 내용이며 어느 만큼이 양보할 수 없이 파수해야 하는 진리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런 모든 이론신학을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열매를 맺어야할 것은 실천신학분야입니다. 기가 막히게 성경을 수없이 많이 읽고 공부하고 많은 언어를 습득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설교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면 그 사람을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무엇에 쓰겠습니까? 아마 언어나 가르치는 학원 선생님으로서 적합하지 목회자로서는 적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실천을 위해서 우리는 설교를 실천하고 목회를 실천하고 선교를 실천하는 것을 몸소 체험할 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토대들을 놓으면서 스스로 습득해서 그래서 신학을 가진 그런 나무가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나무가 되어서 많은 새들과 짐승들을 깃들이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성장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여러분! 현대 언어는 어떻습니까? 현대의 언어는 영어는 기본으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말로 쓰인 신학서적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오역 투성이의 번역들이 많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신뢰할 수 없는 내용들을 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드시 영어를 읽고 영어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적인 업적들을 우리들이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20세기, 21세기 영어만 가지고는 안 되고 에드워즈를 읽으려면 18세기 영어를, 존 오웬을 읽으려면 17세기 영어를 공부해야 합니다.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 추천할 언어로 영어뿐 만아니라 독일어를 공부한다면 신학의 자료를 대하는 한 세계가 또한 열리게 될 것입니다. 또 프랑스어는 어떻습니까? 네덜란드어를 공부하게 된다면 여러분들이 제2종교개혁 이후에 보존되어온 네덜란드의 칼빈신학의 어마어마한 자원들에 접근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언어들을 부지런히 습득하고 공부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꼭 충고하고 싶은 말은 신학 공부하는 내내 여러분들은 철학을 부전공이라고 생각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학의 내용과 철학의 내용은 다르지만 언제나 신학은 그 내용을 담는 도구로써 철학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미 초대교회 때에 아니 더 멀리가면 사도 바울 때부터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래서 철학을 이해하면 신학을 잘 담을 수 있는 도구가 마련되는 것이고 왜 성경을 사람들이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지 그 시대정신을 비판할 수 있는 비판의 능력까지 함께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철학을 도구 삼아서 우리가 진짜 전하고자 하는 신학의 내용을 아주 훌륭한 형태로 전달하고 그 신학에 입각해서 오늘날의 현대문화들을 비평하면서 모든 세계의 영역에, 문화의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부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 해 전에 여러분들에게 학교에 가서 공부 열심히 해라 쓰러지면 치료비는 열린 교회에서 책임져준다고 했습니다. 제가 5년, 10년 전에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유효합니다. 몇 사람이 쓰러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치료비를 청구한 적은 없습니다. 여러분! 공부하셔야 합니다. 치열하게 공부하여야지만 나중에 진짜 능력 있는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공부한 모든 사람이 능력 있는 설교자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공부하지 않은 사람의 능력 있는 설교는 대부분의 경우 속임수로 끝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절대로 그런 길로 빠지지 말고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정말로 열렬히 책을 읽어야 합니다. 제가 34살 때 신학교 교수가 되고 2년쯤 지났을 때 한 학생이 제게 와서 말했습니다.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읽으라고 소개해준 모든 책을 읽으려고 애를 썼는데 한 학기에 저의 한 키였습니다.’ 그 학생은 한 키씩 책을 읽은 것입니다. 이렇게 세워놓은 한 키가 아니라 눕혀놓은 한 키입니다. 그렇게 해서 10년을 읽고 나면 읽지 않았던 학생과는 대화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의 지적인 격차를 가지게 됩니다.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진짜로 공부하셔야 합니다. 정말 쓰러질 듯이 그렇게 지독하게 공부하셔야 합니다.
제 경험을 하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신대원 다니던 시절에 제 기록이 22시간 동안 안 움직이고 에세이를 쓴 것이 기록입니다. 책상아래에 오강, 책상 위에 물병 하나 빵 하나를 놓고 22시간 에세이를 썼습니다. 두 번째 기록은 17시간 동안 히브리어 성경을 읽은 것입니다. 역시 책상 아래에 오강 하나, 빵 한 덩어리와 물 한 병을 놓고 안 일어나고 17시간이었는데 한창 창세기를 읽을 때였습니다. 여러분! 미국에 갔더니 어느 설교학 잡지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어느 신학교 모집요강을 내면서 다 낡은 설교자의 의자 하나를 사진 찍어놓았습니다. 거기에 타이틀을 붙였습니다. ‘It is not a easy chair.’ 이 설교자의 의자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쉬운 의자가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학문적으로 준비되십시오. 여러분 같은 클래스에 있는 동료들을 경쟁대상으로 삼지 마십시오. 적어도 여러분들은 외국에 있는 굴지의 신학교의 학자들을 여러분들의 적수로 생각하고 그 수준에 맞추어서 공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보태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어느 한 학생이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첫 시간에 신학교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책, 저책 읽지 말고 존경할 만한 한 사람을 선택해서 끝까지 파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훌륭한 목회자가 될 것입니다.’ 눈빛이 초롱초롱한 신입생이 그 교수의 첫 강의에 깊은 감동을 받고 에드워즈를 파기로 결심합니다. 후에 훌륭한 목회자가 되는 데 그 사람이 존 파이퍼입니다. 존 파이퍼는 무슨 책을 읽어도 다 깊이가 있습니다.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지 않습니다. 그와 함께 숨 쉬고 그와 함께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현대의 언어로 풀어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기를 권합니다. 한 사람을 선택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존경하고 사랑할만한 사람을 택하십시오. 한글저자든 영국저자든 미국저자든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 그 대신 신학이 건전하고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파서 그 한 사람을 거의 다 읽을 때 여러분 속에 놀라운 신학의 세계들이 형성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영적인 준비입니다. 이렇게 준비한 이 사람이 어느 날 기말고사 치르고 설교하러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누가복음 3장에서 말하기를 ‘세례 요한이 빈들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구약성경에 선지서가 시작되고 선지자들이 소명을 받았을 때 나오는 그 내용과 똑같은 내용의 패턴이 나옵니다. 선지서들에 나오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개에게 임하니라.’ 이런 방식으로 세례 요한에게도 임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의 큰 임재 속에서 그 시대를 향한 불타는 하나님의 음성을 그 선지자에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안타까운 심령이 되어서 한 사발의 피를 쏟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쏟아놓지 않으면 안 될 한 사발의 피가 있습니까? 있습니까? ‘내가 차라리 이 말을 쏟아놓지 못할 바에야 죽는 것이 낫다. 내가 어떻게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랴?’ 하는 그것이 있습니까? 이것을 사도 바울은 복음의 비밀이라고 불렀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의 중심에 불붙는 말씀이라고 칭했습니다. 그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불타오르는 것 같은 그 열정적인 말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에 이야기한 세 가지 준비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열심히 운동하고 죄 짓지 않고 산다고 해서 그 불붙는 말씀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하게 살고 예수 닮아간다고 해서 피 묻은 복음이 자기 가슴속에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언어를 터득하고 히브리어 성경을 여러분들이 통달한다고 하더라고 그 불붙는 말씀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가시나무떨기 속에서 불꽃으로 임재하신 주님을 만났던 것처럼, 엘리야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처럼, 이사야가 성전에서 스랍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것처럼,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처럼, 요한이 밧모 섬에서 계시의 음성을 들었던 것처럼 그렇게 여러분의 인생 전체를 흔들어놓는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그발강가에서 하늘이 열리고 여호와의 말씀이 특별히 임하는 이상을 체험하고 소명을 받았듯이 여러분도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경험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학문적인 준비는 마치 갈멜산 위에 벌여놓은 장작과 같습니다. 불이 떨어지니까 장작이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 장작은 그냥 소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주님을 깊이 만나기를 무엇보다도 갈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실 그 방법을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그분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대부분 목숨을 걸고 그분을 만나기를 원하던 사람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대원을 마치고 THM에 재학하던 2학년 때 주님을 깊이 만나고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을 깊이 만나야겠다는 마음을 들게 하는데 도움을 준 방법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티끌같이 별것이 아닌 인간인가? 그리고 내가 만난 하나님이 얼마나 작은 하나님인가? 신앙의 세계는 얼마나 무궁무변한가? 하는 것을 발견하면서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정말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학교 한 학기를 마치고 항상 금식기도를 갔습니다. 1학기를 마친 다음에는 여름성경학교를 앞두고 금식기도를 해야 했고 가을 학기를 마친 다음에는 신년계획을 위해서 금식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아무 쓸모 없는 마른 막대기와 같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때 주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신학을 읽을 때는 흑백사진처럼 보였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총천연색 영상으로 보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설교가 구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지식은 그 설교를 이루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이 사건은 화룡정점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준비하고 마지막에 용의 눈에 점을 찍으니까 진짜 용이 되어서 날아가 버렸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모든 일들의 가장 화려한 마무리, 생명을 불어넣는 그 마무리를 화룡정점이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화룡정점과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내가 전도사입니다. 이렇게 사역을 해도 별 성과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완악하고 나의 설교는 말라깽이와 같습니다. 나를 살리시겠습니까? 죽이시렵니까? 나에게 정말 소명을 주셨으면 재능도 주시고 재능을 주셨으면 이 재능이 꽃 필 수 있는 영적인 불꽃을 나에게 주십시오. 나에게 쏟아지는 눈물과 흐르는 피와 쏟아지는 땀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혼을 위해, 교회를 위해 장렬한 최후를 마치게 달라고 주님 앞에 몸부림쳐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생사를 걸고 목숨을 건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를 아무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식하면서 여러분들이 매달려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가 교회당이든지 혹은 산속이든지 기도원이든지 여러분들의 골방이든지 아무 상관없습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진심으로 자기를 찾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 찾아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그렇게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앞발로 땅을 파며 죽어가는 목마른 사슴처럼 그렇게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거기에 진리의 능력이 있고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의 피 냄새가 나는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한번 살고 가는 것입니다. 제가 총신에서 MD부 합격증을 받고 정원에서 7명 발표를 하는데 아무도 MD부가 안되었습니다. 7번이었는데 열어보니까 MD부에 합격했습니다. 그 당시에 경쟁률이 지원자 대 MD부 입학률이 20:1이었습니다. 1200명이 와서 60명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잠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오늘의 이 설교를 그때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아! 잠깐 지나갔구나!’ 오늘 하루 온 힘을 다해서 주님의 종으로 준비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