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강해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녹취자: 김명진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목자가 양과 함께 하는데 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양들이 들어갈까, 또 양들이 그렇게 들어가도록 내버려 두는 이유는 무얼까’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날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목자는 자기의 양떼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해서 풀을 뜯게 합니다. 그리고 거기의 풀을 모두 먹고 나면 또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합니다. 또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하게 되는데 그 거리가 가까울 때도 있지만 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자는 양들을 이끌고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을 따라서 다른 목초지로 이동을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협곡사이를, 양쪽에 말하자면 사막의 돌무더기나 흙들이 쌓이고 그 사이의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나오는 골짜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나무가 무성하고 물들이 흐르는 그런 아름다운 생명의 골짜기는 아닙니다. 그것을 여기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합니다. 그곳을 지납니다. 당연히 목자들은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맹수들의 습격이나 도적들의 위협이 있을 것을 알고 자기의 양떼들을 단단히 보호합니다. 그러나 양들은 자신의 목자가 그렇게 자신을 충분히 지킬 능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집중된 마음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양떼들은 그 계곡 사이를 이동하게 됩니다. 그때 양을 치는 목자는 아주 집중된 마음으로 주변을 두루 살피며 양들이 안전하게 그 골짜기를 지나가도록 돕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 우리의 인생이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펼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인생은 어차피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우리가 우리 인생을 향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도 두 가지 마음이 늘 싸웁니다. 하나는 이제 주님의 그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이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우리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하는 삶이고, 후자는 인간의 욕망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이 두 마음이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서 싸웁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삶의 상황과 실제로 우리가 직면해야하는 삶의 상황은 같지가 않습니다. 자기는 이런 삶을 살고 싶은 데 실제로 전개되는 것은 또 다른 삶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매우 특별한 뜻이 있어서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당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빚으시기 위해서 때로는 시련도 당하게 하시고 고난도 겪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그 뜻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 앞에 전개되는 삶을 통해서 거기에 무슨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개되는 삶을 항상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전개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시인의 경험을 통해서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상황을 많이 겪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에 양떼들을 이끌고 돌보았던 목자의 삶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목자가 양을 이끌고 그 양떼를 돌보면서 살던 때를 회상했습니다. 그 양떼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던 때가 있지만 목자는 그 양떼들을 지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양떼들을 지켰고, 혹시 양떼들을 위협하는 맹수나 도적의 위험이 있어도 능히 그들과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과연 양떼의 목자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그렇게 양떼를 지켰던 것처럼 자신의 인생의 상황,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보호해 주셨던 것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이새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고난 다음에 전개되는 모든 일생은 그 전개되는 모든 삶에 있어서 끊임없는 고난과 시련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 다윗이 죽으면 자기 딸이 과부가 되는데도 집요하게 자객을 풀어 그를 죽이고자 하였고 그 때문에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끊임없이 방황하고, 심지어는 남의 나라로 가거나 광야로 도망가는 그런 정처 없는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왕이 되기까지 그는 많은 고난을 겪었고 왕이 된 후에도 연속된 많은 전쟁들을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커다란 반역이 두 번이나 일어나서 왕국이 위협을 받게 되는 시련도 겪었습니다. 가정적으로도 첫째 날 말씀드린 것 같은 그런 가슴 아픈 가정사를 겪을 때도 그의 영혼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하나 깊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히브리어 성경은 “재앙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나옵니다. 그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들어가지만 재앙이 자신에게 임하여 자신을 멸망시킬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항상 좋은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통해서 좋은 것들을 받고 싶어 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을 주시기도 하지만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오히려 좋은 것을 주시기도 하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실제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살 때는 좋은 것도 좋은 것이고 나쁜 것도 좋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고 살 때 나쁜 것도 나쁜 것이고 좋은 것도 나쁜 것으로 변합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편안한 것이 싫고 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삶을 살면서 때로는 불안한 일이 일어나고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 상황이 옵니다. 그때 신앙이 없으면 그냥 그 자체로서 우리의 인생에서 괴로움이고 나쁜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을 때에는 그런 어려움을 당함으로써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을 붙들고,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어려운 시련이기 때문에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는 자기가 당한 어려움 때문에 어떻게든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참 힘든 시간으로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어려움을 만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든 일이 자기의 뜻대로 되는 상황 속에서 깨닫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면서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이 시인이 고백을 합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입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제가 그릇 행했었는데 고난을 당한 후에는 제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가끔 두시는 이유입니다.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시인은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배운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아도 결국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많이 가르쳐준 시간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시련과 역경 속에서 좌절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몸부림치던 때에 그 모든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고 배려하시는 지, 긍휼히 여기시는 지를 배우게 됩니다. 원래 긍휼이라는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는 인간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동행이라고 하는데, 구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동행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비록 시인으로서 몇 가지 중요한 범죄를 하여 넘어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다윗의 생애를 평가할 때 역사가들은 항상 성경에서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늘 이겼더라.”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 에녹을 하나님이 동행해 주셔서 65세 동안 살다가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앞까지 인도하고 남긴 유언적인 설교 속에서도 “이제까지 하나님이 너희와 동행하셨다.”고 말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최고의 이상은 하나님이 자신과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과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때문에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성공하고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자신과 동행하는 삶, 그 속에서 자기가 주님의 성품을 닮아 거룩해져 가는 것이 자신의 존재의 의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가치관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는 것, 그 하나님이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우시고, 또 죽은 것과 같은 영혼의 때에 당신의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주셔서 우리를 살리고 변화시키고 이기게 만드시는 그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해 주시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돈이 많은 사람, 성공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탁월한 자연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과만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그 사람이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시인은 그 인생의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해주신다는 사실을 일생동안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시인은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붙들며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 쳤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어떻게 자기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보호하고 지키시는지를 이렇게 묘사 합니다.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위로합니다. 혹은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에게 위로가 됩니다.”라고 표현합니다. 위로한다는 것은 어떤 상황으로 보면 자기가 낙심하고 깊이 괴로워할 상황인데 그런 마음을 달래 준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냐면,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눈에 보이도록 자신을 낙심시키고 실망을 주지만, 하나님이 이제껏 자기와 함께해 주셨고 말씀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신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며 믿음으로 살 때 이런 사실이 이런 두려움과 고통을 덜어줍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로, 그것이 어떤 기대였는지 성경이 말해줍니다.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에게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왜 같은 내용의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썼는지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당시의 문맥으로 보면 두 가지의 물건은 완전히 다른 의미입니다. 그 당시에 목자들이 애용하던 지팡이는 산신령이 짚고 다니는 그런 지팡이가 아니라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매우 길고 끝이 둥그렇게 휘어있는 지팡이입니다. 그 지팡이를 가지고 목자는 자신의 발걸음을 옮기는데 사용하기도 했고 무언가를 해치는데 사용하기도 했지만 중요한 용도 중 하나는 양이 대열에서 이탈해서 가면 둥그런 지팡이를 거꾸로 들고 그 지팡이로 양의 목을 겁니다. free size입니다. 어느 양이든 목을 걸고 목을 잡아당깁니다. 왜냐하면 양은 습성상, 우리나라의 양떼 목장에 가서 봐도 좋고 외국에 가서도 보면 양은 하는 일이 없습니다. 자거나 깨어있으면 똥을 누거나 풀을 먹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외국에 가면 양들이 있는 풀밭에 가면 들어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이 있는 풀밭에 들어가면 똥 천지입니다.
제가 영국에 가서 너무 아름다워서 혼자 산책을 하러 나갔습니다. 집사람도 따라가고 싶다고 해서 따라 왔는데 풀밭으로 일단 들어갔습니다. 저 쪽에서는 푸르스름하게 보이는데 그 풀 숲 사이에 폭탄들이 잔뜩 들어있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양이 있는 풀밭은 절대로 가지 않습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진짜 아닙니다. 그렇게 먹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짐승중의 하나가 양입니다. 끊임없이 먹습니다. 하늘 한 번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지치면 잡니다. 그것이 양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이탈하는 이유가 현실에 골몰하면서 삽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공부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직장을 다니면 거기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렇게 다니다가 그냥 큰 죄를 지었다기보다는 자기 일에 몰두했을 뿐인데 시간이 지나 보면 신앙에서 멀리 와 있는 것입니다.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고 그렇게 멀리 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깜짝 놀랍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멀리 떠났구나.” 양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고개를 박고 풀만 먹었을 뿐인데 “이 풀이 맛있겠지, 이 풀이 맛있겠지.” 하고 먹고 가다 보면 친구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 양떼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두려움 속에서 이탈하는 양떼들입니다. 쭉 뻗어서 목에 걸어서 인도하십니다. 왜 그럽니까? 이탈할 때마다 막대기로 후려치면 양떼 전부가 부상자 집단이 될 것입니다. 머리가 깨진 양, 다리가 부러진 양, 얼굴을 한 대 얻어맞아서 부은 양,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 양들을 선한 목자라면 치료를 해 줘야 합니다. 여러분도 그래 본 적 있지 않습니까? 아빠한테 종아리를 맞아서 퉁퉁 부었는데 자결에 보니 엄마가 연고를 발라 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너무 무서워서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을 못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물론 두려워해야 하지만 그 두려움은 사랑으로 승화된 두려움입니다. 신앙을 이렇게 생각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 무지하게 맞을 것 같다.’ 그런 무시무시한 두려움 속에서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데서 위로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팡이를 펼쳐서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어떤 난관에 있든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재앙을 만나지 않을 가장 훌륭한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십시오.”라고 하면 “너무 상황이 어려워서 기도할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아직도 살만하다는 뜻입니다. 진짜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가서 도저히 살 수가 없는 지경에 왔다고 생각 되면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바쁘다는 것은 전부다 소용없고 사람이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하는 것입니다. 하기가 싫으니까 바쁘고 어렵고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려가는 것입니다.
제가 낮잠은 절대 자지 않는 형이고, 저녁에 12시 반 쯤 자서 5시나 5시 반쯤 일어납니다. 그리고 새벽기도를 가고, 가서 기도를 적게 하면 한 시간, 많이 하면 두 시간 정도 합니다. 그리고는 교회 연구실에 올라가서 아침에 간단한 빵을 하나 먹든지 우동을 하나 끓여 먹든지 한 후 공부를 하고 제 할 일을 합니다. 그리고는 저녁을 먹을 때나 집에 들어갑니다. 그렇지만 약속이 있거나 일이 많으면 저녁을 먹을 때도 집에 들어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손녀딸이 생긴 후에는 매일 들어갑니다. 너무 보고 싶습니다. 4시 반쯤 들어가서 애기 하고 한 시간 놀다가 5시 반쯤 밥을 먹고 다시 나오거나 운동을 하러 갑니다. 결국은 아무리 바빠도 자기가 보고 싶고, 하고 싶고, 사랑하는 일은 합니다. 교역자 회의를 하는데 어느 부목사님이 자기가 요즘 얼마나 바쁜지를 설명을 하면서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다고 했습니다. ‘열심히 사역을 하는구나.’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날 밤에 심야극장에서 두 부부가 만났습니다.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시련과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는 더더욱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이탈한 자신이 하나님의 지팡이로 자신을 제자리로 끌어 옮겨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지팡이의 용도입니다. 인생의 시련과 어려움을 당할수록 차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헤쳐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려움을 만납니다.
저는 어려서 서울에서 태어나서 강원도에서 자라고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 한다고 서울로 유학을 왔습니다. 방학 때는 부모님이 사업하시는 곳으로 내려가서 일이주일씩 있었고, 그 당시에는 중학교 시험이 있었기 때문에 오래 놀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앞에 커다란 개울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예쁘지는 않은데 그 당시에는 참 예쁜 개울이었습니다. 어렸을 적엔 동네도 커 보이고 골목도 넓어 보이지 않습니까? 친구들과 미역을 감는데 위험한 데가 한 군데 있었습니다. 푸르스름한 물이 휘도는 곳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까불고 놀다가 한 아이가 그런데 물에 빠지니까 헤엄도 못 치는 아이가 살려달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수영하러 나온 사람들이 달려 나갔는데 어린 마음에도 살려달라고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는데 아이가 배꼽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저렇게 난리를 치지 말고 배꼽이 물 위로 올라왔을 때 이렇게 이렇게 하면 나올 수 있겠구먼’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우리의 대적들의 크기가 아니라 대적들을 두려워하는 마음 자체가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많은 인물들이 그 두려움과 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막대기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지팡이가 휘어져서 양떼들을 목으로 걸어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면 막대기는 나무인데 양쪽 끝을 뾰족하게 만든 무기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맹수들의 습격을 막고 양떼를 헤치려고 하는 어떤 짐승이나 위해를 가하는 것과 더불어서 목자가 싸우는 호신용 무기입니다. 그것이 여기에서 막대기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좋은 번역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용도로 당시에 사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팡이는 대열을 이탈하는 양떼를 제자리로 돌리기 위한 인도용 도구라면 막대기는 양떼를 위협하고 공격하는 맹수들과 싸워서 그들을 무찔러, 심지어 죽이기 위한 도구입니다. 목자는 단지 양을 마음속으로는 사랑하지만 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무엇을 해줄 수 없는 순정녀 같은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목자는 용사여야만 진정한 목자입니다. 여기도 순장들 많이 있습니까? 진짜 사명감이 충만한 순장은 단지 “내게 와라. 그러면 내가 가르쳐 줄게.” 그 정도가 아닙니다. 내 삶에 깊이 개입해서 그들이 뭔가 그들이 영적으로 위기를 만나거나 어려움을 만날 때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목자입니다. 저도 예전에 전도사 사역을 할 때 아이들이 이상한데 빠집니다. 어디 이상한 데 빠져서 집단생활을 하면서 영어를 배운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정말 아닙니다. 아이들이 영어를 배우려면 집에서 배우면 되지 왜 아이들을 집단적으로 몰아넣고 그렇게 가르칩니까? 그래서 내가 가서 끌어내왔습니다. 목자는 아주 공격적으로 그렇게 자신의 양떼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들과 더불어 목숨을 놓고 일전을 벌여서 쓰러뜨릴 수 있는 그런 담대한 힘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시인의 일생을 되돌아 보니까 바로 그랬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원수를 이길 수 없는데 하나님이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자신을 에워싸시고 자신의 원수들과 더불어 싸우시며 그들을 무찌르셨기 때문에 그 용사이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고난과 시련을 이기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다윗이 범죄 후 미끄러졌을 때 사단은 이때가 시인을 멸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던 부하들이 배신하고 그 많은 백성들이 마음을 돌리고 자신의 영혼에도 어두운 밤이 찾아왔을 때 그는 사면을 둘러보아도 자기편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이 시인과 함께 하셔서 지팡이와 같은 것으로 시인을 인도하시고 막대기와 같은 무기로 이 시인을 괴롭히는 모든 무리들과 싸우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도록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시인은 일생에 이런 일들을 경험하면서 정말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 자신은 하나님을 떠나도 하나님은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이야 말로 자신이 믿을만한 자신의 영원한 목자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처한 어려운 상황, 여러분이 처한 힘겨운 상황이 오히려 이런 사랑의 목자를 다시 한 번 깊이 만날 수 있는,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좋아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