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강해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녹취자 : 조원정, 김명진
여호와가 자기의 목자가 되어 준다는 사실을 1절에서 선언하고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지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시라는 사실을 논증했습니다. 5절에서는 굳이 제목을 붙인다면 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 것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사실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당신이 하고 나옵니다. 당신께서 나의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고 말합니다. 중간에 수식어를 다 빼버리면 주께서 내 잔이 넘치게 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잔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주 명백하게 잔치집의 문맥입니다. 다시 말해서 1절, 2절, 3절, 4절을 지나 5절을 기록할 때 시인의 마음 속에는 신랑 신부가 혼인을 하고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넘치도록 잔에 포도주를 가득 부어서 함께 마시고 있는 기쁨으로 가득한 잔치집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륜에 있어서 가장 큰 경사의 날, 그때 바로 이 사람들이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 그 문맥 안에서 오늘 시인은 여호와를 목자로 살아가고 있는 자기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큰 기쁨의 은혜를 부어주셨는가 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징하고 있는 잔이라고 하는 것은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 아니고서는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어떤 빈 공간,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영혼의 빈 잔이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을 가만히 살펴보면 불행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다가 불행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대부분 인간의 불행은 자기를 행복하게 하려고 애를 쓰다가 인간이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도록 창조된 존재인데 하나님 없이 행복해 보려고 애를 쓰다가 보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불행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끊임없는 갈망을 봅니다. 끊임없는 갈망 속에서 그것을 채우고자 애를 쓰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모으고 더 많은 곳을 여행하고 자신이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더 놀라운 쾌락을 맛보아야지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모두 우리 영혼 안에 있는 빈 잔을 인식한 우리의 마음이 무지 속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되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코 그것이 자신의 본래의 그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체스터턴이라고 하는 영국의 유명한 사상가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는 중이다. 얼핏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말이지만 가만히 곱씹어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는 말입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기를 행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든 쾌락의 몸부림과 욕망에 사로잡힌 삶은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을 하나님이 지정한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누려보려고 애쓰는 것이 그런 수많은 육체의 쾌락과 문제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한 2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서울에 가면 지금은 변두리라고 말할 수 없지만 서울의 북쪽 가장 자리에 수유동이라고 하는 곳이 있고 옛날에는 거의 경기도였을 때 거기가 수유리였습니다. 제가 너무 예민해서 지금 설교가 오락가락 하고 있습니다. 원고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막 산만하면 정신이 혼란스러워서 설교가 자꾸 헷갈립니다. 좀 안정을 취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일어났다가 왔다 갔다 하지 말고 가만히 계셔주시면 좋겠습니다. 엄청 방해가 됩니다. 집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의 지론은 설교 듣는 자세는 부동자세여야 합니다. 될 수 있으면 눈도 깜빡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프니까 눈은 깜빡 거려도 됩니다.
병원이 있었는데 그 의사가 쓴 신문에서 글을 읽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급히 택시에 실려서 어떤 환자가 실려 왔습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친구들이 선생님 이사람 방금 전에 쓰러졌는데 좀 봐 주십시오. 응급실에 눕혀 보니까 이미 벌써 죽었습니다. 가망이 없는데 확실하게 부검을 해봐야 알겠지만 지금 보기에는 심장마비 쇼크사 같습니다. 한 시간 반 있으니까 새벽에 택시를 타고 가족들이 와서 울고불고 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야 울고불고 하지만 의사는 환자들의 죽음을 늘 보니까 객관적으로 이렇게 보고 있는데 자기는 의사지만 저렇게 이상한 폼으로 죽은 사람은 처음 본 것입니다. 대개 태어날 때 아이들이 이렇게 태어나고 죽을 때는 사람들이 이렇게 손을 놓고 편안하게 죽습니다. 이 사람은 이쪽 손은 쥐고 이쪽 손은 펴고 죽은 것입니다. 20년이나 의사를 했는데 저런 폼으로 죽은 시신을 처음 보는 것입니다. 의사가 너무 궁금한 것이 도대체 저 주먹 속에 뭐가 있을까? 보는 사람이 없기에 손가락을 이렇게 펴 본 것입니다. 투두둑 하고 화투 두 장이 떨어진 것입니다. 실화입니다. 화투를 펴 보니까 의사가 자기도 모르게 자기도 모르게 삼팔광땡이네. 스토리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밤새도록 그 근처 상가 집에 와서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스톱을 친 것입니다. 고스톱이 아니라 난 화투를 잘 모르는데, 섰다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수상합니다. 목사가 모르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압니까? 저는 민화투 밖에는 모릅니다. 하도 화투 잘하는 사람한테 물어 봤습니다. 그것이 왜 그러냐 하고 물어 봤더니 섰다는 두 장을 돌리고 두 장을 가지고 합해서 랭킹을 매깁니다. 랭킹 중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것이 3자와 8자, 그중에 광 붙은 것이 같이 들어 왔을 때 그것을 삼팔광땡이라고 그럽니다. 내가 물어 봤습니다. 삼팔광땡은 서로 룰을 정하기 나름인데 맨 처음에 만원씩 돈을 내고 한다고 그럽니다. 맨 처음에 배팅을 만원씩 하는 것입니다. 열 명이 두 장씩 돌립니다. 이중에는 이 얘기가 너무 지루한 설명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삼천 만이 다 아는 것을 뭘 저러나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래도 이것 가지고는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거기서 배팅을 더 이상 포기하고 스스로 기권을 하는 것입니다. 기권을 안 하는 사람은 다시 배팅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시 또 겨루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한번은 배팅을 했는데 두 번째는 질 것 같아서 내려놓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없으면 세 번까지 배팅을 하고, 룰을 다섯 번까지 정하면 다섯 번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최악의 경우 열 명이 아무도 기권을 하지 않고 다 배팅을 했다고 하면 십만 원이 들어가고 세 번을 배팅하면 삼십 만원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펴보는 것입니다. 펴봐서 제일 높은 랭킹을 가진 사람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삼팔광땡일 경우에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팅을 하는 사람이 자기 배팅 금액의 몇 배를 페널티로 더 내어 놓아야 합니다. 설명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정확하다고 합니다. 이것도 거기에서 쓰던 것입니다. 그건 정하기 나름인데 대게 통상적으로 삼팔광땡이면 세배를 요구합니다. 십만 원, 십만 원, 십만 원 하면 삼십 만원이 쌓이는데 내가 삼팔광땡이가 나와서 내가 1등을 했다. 그러면 삼십 만원의 세배니까 다시 구십 만원 더하기 삼십 만원 하면 백이십 만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밤새도록 화투를 쳤는데 계속 진 것입니다. 막판에 돈이 계속 쌓였는데 딱 펴 보니까 삼팔광땡이가 나온 것입니다. 한 사람이 물어 봅니다. 야 너 펴 봐? 너 뭐야? 하고 그러니까 딱 펴보고 삼, 삼, 그러더니 심장마비로 툭 쓰러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자손들이 엄마한테 물어봅니다. 엄마 우리 아버지 어떻게 돌아가셨어? 손자가 물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 할아버지 그렇게 훌륭하셨다면서요? 마지막에 어떻게 죽었습니까?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건 다 묻혀 버립니다. 누구는 유명한 학자였고 대단한 정치가였고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가였다.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하고 끝나는 전기는 없습니다. 빈민가에 태어났지만 하고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진짜 그 사람은 황당하겠다. 인생을 어떻게 그렇게 살다가 죽나? 여러분은 깔깔거리고 웃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요만한 동양화 두 장을 놓고 쪼다가 으악 하고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보다 조금 더 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대학 나왔다는 졸업장, 새로 산 아파트 문서, 땅문서, 집문서, 면허증, 혹은 자격증, 그것 만지작거리다가 가슴 졸여하며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인은 한 나라의 제왕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솔직히 계산을 안 해 봤습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들었는데 그 계산이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다윗이 바친 금을 현대 도량형으로 환산을 했답니다. 성전 바칠 때입니다. 그랬더니 정확히 80조 원어치의 금이랍니다. 금 한 돈의 오만 원 할 때 계산법이었습니다. 지금은 18만 원 정도, 20만 원정도 올라갔습니다. 네 배를 곱하면 320조원입니다. 우리나라가 1년 동안 세금을 한 푼도 안 걷고 빚을 내지 않을 정도의 돈이고 10년 동안 국방비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입니다. 금만 그렇습니다. 은. 동, 철, 백향목, 이런 것 말고 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을 다 누린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이 자기의 진정한 목자라고 하는 사실을 넓은 영토, 전쟁에서의 승리, 어마어마한 물질의 획득을 통해서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시인은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우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여기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열다섯 살 때의 이야기를 둘째 시간에 했습니다. 펑펑 울면서 인생을 왜 살아야 하나? 죽는 것은 그때도 안 무서웠습니다. 사는 것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것도 인간으로 사는 것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 두려움이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기가 인생의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사실은 마땅히 직면해야 할 두려움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공부를 잘한다고 할지라도 여자로 말하면 얼굴이 그림 같이 예뻐서 수많은 사람들이 대시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행복을 좌우하지는 않습니다. 목사님이야 어차피 그중에 아무것도 해당 사항이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얼굴이 그림 같이 예쁘면서 얼굴 예쁜 것 아무 것도 소용없다고 얘기해야 하고 어마어마한 재벌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부모가 부자인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해야지 아우라가 섭니다.
어느 텔레비전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생각이 납니다. 너희들이 스펙을 쌓겠다고 온 난리를 치지만 아무리 스펙을 쌓아봐야 아버지가 부자고 할아버지가 훨씬 부자인 집 아이들을 당하지 못한다. 진짜 명대사였습니다. 아버지가 부자인 것으로 안 끝나고 할아버지가 더 부자인 집, 아 그건 감당이 안 됩니다. 그런 식의 인생을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조건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참된 가치는 자기가 인생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이 스마트폰을 사니까 그냥 할부로라도 끊어가지고 최신형으로 가슴에 품어야지만 살맛이 나는 것은 자기가 주체가 된 인생이 아닙니다. 네가 볼을 깎아서 그렇게 예뻐졌다면 나는 코를 밀 거야! 턱을 세울 거야! 그래서 엄마한테 졸라서 아랫방 전세 줘서 그것을 밀었다. 좀 더 예뻐졌다. 그것이 자기가 주체가 된 인생입니까? 아니 나는 극단론자는 아닙니다. 성형수술 자체를 정죄하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너무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하십시오. 항상 할 때마다 가슴에 새길 것이 있습니다. 본판 불변의 법칙, 항상 자기 분수를 알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뒤에다 눈, 코, 귀, 입을 새길 수는 없습니다. 이쪽 뒤에다 다시 새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을 모두 한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자기가 주체가 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 주체가 세상 사람들은 절대적 주체입니다. 나 이외에는 주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로 관계를 맺은 주체입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자신의 인생에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왜 살을 빼십니까? 다들 살찐 사람 싫어해서입니다. 그건 주체가 아닙니다. 왜 그렇게 나팔바지 입고 다니십니까? 통자 입고 다니면 쪽 팔립니다. 그건 자기 주체가 아닙니다.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일류회사 들어가려고 하십니까? 그래야지 승자가, 위너가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키 높이 구두를 신으십니까? 텔레비전에 나오는데 키 작은 사람은 루저랍니다. 자기가 주체가 된 삶이 아닙니다. 남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자유로운 삶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욕심대로 맘껏 방탕한 삶을 살라고 촉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면서 사람들을 이기고 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영혼에 채워지지 않는 빈 잔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채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목마른 날 햇볕이 뜨겁게 내리 쬐이고 물 한 모금 없는 광야의 길을 타박타박 걸으며 목이 너무 마를 때 시원해서 그릇에 이슬이 맺힐 정도의 시원한 물입니다. 매우 진한 설탕물입니다. 마실 때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먹고 나면 더 타는 듯한 갈증을 온 몸이 느끼는데 생리학적으로 당연합니다. 농도가 짙은 것이 들어가니까 더 치열한 갈증을 느낍니다. 결국 영혼의 빈 잔을 채울 수 있는 것이 하나님 자신으로서 그분께로부터 와서 인간에게 누리도록 허락된 그 무엇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채우지 못한 채 살아가는데서 인간에게서 수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서울에 가면 반포대교라고 있습니다. 남산 2호 터널과 1호 터널을 와서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있는 자리를 연결하는 반포대교이고 반포대교 옆에 새빛 둥둥섬이라고 인공으로 만든 APEC 정상회의 한 거기에, ASEN인가? 그 회의를 한 새빛 둥둥섬이 있습니다. 거기에 고속으로 달려가는데 다리 위에서 차가서고 난리입니다. 택시에서 사람이 내리고 버스에서 사람이 내리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사람들이 막 다리에서, 오래 전의 일입니다. 다리 이쪽에서 저쪽으로 막 뛰어 다니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했더니 하늘에서, 그 당시 오만 원 자리가 없을 때였는데 만원 자리 초록색 비가 막 내리는 것입니다. 그때 25년 정도 되었습니다. 새빛 둥둥섬이 생기기 전입니다. 그것이 자동차 와이퍼에 막 걸립니다. 거기 가서 한번만 쓸어서 담아도 일당이 충분히 되는 돈이니까 사람들이 다 나와서 만원 자리 줍느라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달리면서 창문을 열고 만원 자리 다발 네 개를 하늘에다 뿌린 것입니다. 붕 달리면서 확, 확 뿌린 것입니다. 회전해서 88고속도로 미사리 쪽으로 빠져나가면서 자기는 떨어지는 돈을 줍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을 보면서 쾌감을 즐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했습니까? 1번 품위 있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조용히 팔짱을 끼고, 기사 양반 빨리 갑시다. 2번은 막 뛰어 내려가서 줍는다. 3번은 주우려고 내려갔다가 몇 개만 주머니에 넣는다. 몇 번입니까?
제가 이 설교를 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교인이 거기는 반포가 아니라 강북이었는데 주일날 가족들과, 그때는 차가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까 가족들과 전철을 타고 교회에 오려고 성경 찬송을 들고 막 나오는데 하늘에서 만 원짜리가 비같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서울에 오십시오. 서울에는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만 원짜리 비가 막 쏟아지는데 이 사람이 만약에 이 설교를 듣지 않았으면 자기도 성경 찬송을 놓고 기어 다니면서 주우러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멋있습니까? 가족들과 내려오면서 돈이 옆에 떨어져서 뭐 하나 했더니 어떤 사람이 옥상에 올라가서 건물은 지어졌는데 주인이 돈을 조금만 주니까 술을 먹고 올라가서 “너나 먹어라.” 하고 돈다발을 던져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돈이라고 주냐.”라고 한 것입니다. 쏟아지니까 동네사람들이 신나게 나와서 주운 것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은 돈이 떨어지니까 얼마나 멋있습니까? 뚜벅뚜벅 돈을 밟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아우라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말씀을 전하고 앉아있는데 어떤 사람이 왔습니다. “목사님,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 재산을 주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저의 재산이지만 집 한 채를 바칠 테니까 목사님 선한 일에 사용하여 주십시오.”, “신앙생활이나 열심히 하세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아우라입니다. 저는 정말 한 번 해보고 싶은데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 일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기회를 갖고 싶은데 주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에게 100억의 유산이 있습니다. 이것을 한 번 목사님 마음껏 사역을 하시게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하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네 영혼이나 챙기십시오.” 그리고 그 봉투를 발로 툭 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이 100억보다 당신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대개 헌금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목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대개 그렇습니다. 목사님, 누가 아멘이라고 했는지 기억하십시오.
그러한 영혼에 있는 빈 잔이 오직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채워지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 이외의 것으로는 절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잠시 그런 갈망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정말 자매 복도 지지리 없던 사람이 이상하게 예쁜 자매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면 그 고민을 잠시 잊을 수 있습니다. 사업을 했는데 불붙듯이 사업이 잘 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대박이 났으면 잠시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즐겁고 흥겨운 것이 어느 한 순간에 끝납니다. 그러면 다시 자신의 영혼이 비어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것이 무엇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을 채웠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아직 한 번도 결혼을 못했는데 이 여자는 다섯 번이나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자의 마음속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에게는 목마름이 있다. 그런데 이 물은 먹어도 목마르다. 그리고 너에게는 목마르지 않도록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위대함은 바로 이런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있는 은혜, 이것이 신앙의 유익입니다. 완전한 만족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충만한 사랑, 그 은혜로 우리 자신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입니다.
오늘 시인이 그렇게 자신의 영혼이 가득 차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잊어버린 단어들이 있습니다. 기쁨, 희열, 환희, 감격,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단어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기뻐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행복을 느꼈던 때가 언제입니까? 돈이나 입사, 그리고 로또의 당첨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해주시기 때문에 그런 것을 느낀 적이 얼마나 됩니까? 정말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한 최고의 선교는 환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기쁨의 삶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돈 때문에 기뻐하는 삶을 살고, 명예 때문에 즐거워하는 삶을 사는 것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 사람들도 기뻐할 수 있는 조건 때문에 기뻐하고 희열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에게 선교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전혀 그들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그 무엇 때문에 우리가 환희에 벅찬 삶을 살 때 그 기쁨과 소망의 이유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묻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 있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신앙이 없이는 안 됩니다. 이런 기쁨을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 시인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가슴 벅차오르는 희열을 경험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에, 두 번째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에 이 시인의 가슴에 터질 것 같은 환희를 느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두 가지 조건, 즉,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신 것과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신 것은 무슨 깊은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가 된 것입니다.
첫째,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이것은 옛날 번역입니다. 지금은 “차려주시고”로 번역이 되었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옛날 성경 시절에는 열 사람 중 일곱 사람은 그 “상을 베푸시고”를 학교에서 졸업할 때 주는 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 말이 히브리어로 ‘슐한’이라는 단어입니다. ‘슐한’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dining table’, 혹은 ‘eating table’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처럼 좌식으로 아빠다리를 해서 앉거나 책상에 앉아서 밥을 먹은 것이 아니라 침대가 아니라 긴 소파 같은데 비스듬히 기대어서 티 탁자 같은 정도의 높이에 음식을 차려놓고 밥을 먹은 것입니다. 그 상을 가리키는 것이 ‘슐한’입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당신이 나의 원수, 나를 괴롭히는 자들, 나를 괴롭히는 자들의 면전에서 나에게 한 밥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부으셨기 때문에 나의 한 잔이 넘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다윗이 인생을 살면서 기름부음을 받기 전까지는 그렇게 다윗을 원수처럼 생각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걸어가면서 수많은 대적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많은 대적들을 만나면서 다윗이 때로는 그 원수들에게 지는 것 같은 고통의 때가 있었고, 그런 속에서 시편의 그 수많은 신음 소리와 탄식소리가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원수들의 면전에서, 원수들의 면전이라는 것은 원수들이 빤히 쳐다보는 바로 그 앞에서 하나님이 보란 듯이 나에게 밥상을 차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내 잔이 넘칩니다. 즉, 네 마음이 터질 것 같은 환희를 느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이 고백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밥상입니다. 그러면 밥상이 무슨 의미가 있기에 하나님이 차려주신 밥상 때문에 이 시인이 가슴이 터질 듯한 환희를 느끼게 되었을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밥상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어린 사람들은 태어나서 기껏해야 다섯 식구가 모여서 사는 정도의 가정밖에 경험 하지 못했지만 우리 옛날의 어른들은 많이들 모여 사는 대가족 사회였습니다. 저희 할머니께서 시집오실 때 집 식구가 마흔 몇 명이었다고 합니다. 한 집에서 다들 사는 것입니다. 그 사시던 집에 가보니까 집이 꽤 크고, 친척들이 나서 분가를 하지 않고 계속 거기에서 모여서 사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그런 대가족들이 밥을 먹습니다. 그러면 절대로 한 방에 모여서 사십 명이 밥을 먹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방이 없기도 했지만, 돈이 있으면 그런 방을 만들 수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나라 조상들의 입장에서는 밥을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밥상이 몇 개가 차려집니다. 첫 번째 밥상이 마당에서 멍석을 깔아놓고 먹는 머슴들입니다. 부엌에 돗자리 같은 것을 깔고 먹는 여종들, 며느리도 거기에서 밥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루에 차려지고 그 다음에 건넌방에 차려지고, 그리고 안방에 차려집니다. 거기에는 우리 엄마도 들어가지 못하십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만 들어갑니다. 가끔은 제가 아주 어렸을 때 깍두기처럼 기어가서 할아버지 무릎 팍에 앉으면 깍두기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깍두기는 열외입니다. 받아줘서 무릎에 앉아서 먹여 줍니다. 거기는 상과 반찬, 그릇부터 다릅니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우리 어머니가 들어가고 제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내는 여기에 남아야 합니다. 승진하듯이 서열이 계속 바뀌면서 들어갑니다. 우리나라 동양 문화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상황이 어쩔 수 없으면 양반이 상민들과 함께 잠은 잘 수 있지만 절대로 같이 밥을 먹는 법은 없습니다. 같은 밥상에 숟갈을 올려놓고 밥을 먹는 법은 없습니다. 동양에서 밥을 먹는 것은 브라더후드 형제됨을 의미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초창기였는데 선생님이었던 그 분이 선교사를 가르치면서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글로벌 사회가 되어서 어느 나라 언어든지 웬만하면 배우고 선교지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같은 경우 수많은 소수 부족 언어들이 있는데 글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갑니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언어를 배우고 글을 만들어서 성경을 번역해 주는 사역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누가 거기에 대해서 가르쳐준 적도 없고 배운적도 없는데 말만 듣고 거기에 가서 지도를 펼쳐서 설명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먼 나라 미국에서 왔는데 나는 당신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같이 살고 싶다. 나는 하나님을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왔다. 언어가 통하지 않지만 세 시간만 같이 있으면 언어가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어학의 기본적인 경험입니다. 결국 의사소통이 되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수염이 긴 노인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촌장회의, 원로들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한참 회의를 하더니 웃으면서 나옵니다. 당신들을 이제 우리 가족으로 맞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면서 너무 기뻐하면서 어디론가 이 사람들을 데려가더니 마을 회관 곳에 데려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식사가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식사가 시작이 되었는데 문명사회에서는 도저히 먹어 본 적이 없는 음식들이 나옵니다. 지금도 중국은 그렇습니다. 고양이, 뱀 같은 것은 기본이고, 전갈까지 요리로 나온 것을 봤습니다. 그 스프를 먹는데, 계속 국물을 따라서 먹는데 너무 맛이 있어서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서 뚜껑을 열어보니까 거북이 한 마리와 바퀴벌레를 푹 삶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서양 사람들은 못 먹습니다. 지금도 만주에 가면, 시집장가를 가는 결혼식 때 국수를 먹는 날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요즘은 국수는 주지 않고 갈비탕을 합니다. 거기는 결혼식을 할 때 반드시 먹어야 하는 국이 있습니다. 뱀 국입니다. 뱀도 작은 뱀이 아니라 팔뚝 같은 뱀을 동태를 자르듯이 툭툭 쳐서 무를 집어넣고 큰 가마솥에 집어넣고 끓여서 한 그릇씩 먹어야만 혼례를 치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 먹은 자매들을 보면서 국수 먹을 때가 되었다고 하는데 거기는 뱀 국을 먹을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에 싫다고 의사표시를 한 것입니다. “나, 이것 안 먹을 것이다.” 갑자기 화기애애하던 잔치 자리가 싸늘하게 식으면서 고함이 오고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끌고 가서 죽여 버립니다. 마지막까지도 자신이 왜 죽는지를 모릅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동양 사회에서 밥상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형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밥상을 거절한다는 것은 같이 살고 싶지만 너희의 형제가 되고 싶지는 않다. 스파이입니다. 그래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똑같이 이 문맥이 들어온 것입니다. 라반의 집에서 잔뜩 부자가 되어서 야곱이 도망을 쳤을 때 삼 일만에 쫓아와서 잡힙니다. 다 털어보는데 결국은 드라빔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사정 이야기를 모두 했더니 삼촌이 승복을 했는데 주님이 나타나셔서 굉장히 엄중하게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너 그 아이에게 손을 대면 내가 가만 두지 않겠다.” 서로 화해를 하고 마지막에 한 일은 증거의 무덤이라고 하는 ‘여갈사하두’라는 무덤을 쌓아 놓고 “우리 서로 여기를 넘어 서서 복수하지 말자.”하고 마지막에 한 것이 식사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헤어져도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화목제를 드린 후에 함께 음식을 나눕니다.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갈릴리바다에 나타나셔서 고기잡이 하다 실패한 사도들을 만나서 예수님이 떡과 물고기를 먹이십니다. 그것도 똑같이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찬으로 다가옵니다.
성경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 중에서 “네가 나와 더불어 먹고 나는 너와 더불어 먹으리라.” 만약에 너희가 정말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예수님과 그들이 생명적인 관계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형제 된다는 것은 한 가족으로서 생명과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물론 하나님이 다윗이 배가 고플 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피곤할 때 쉬게 해 주셨습니다. 약점을 알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영혼이 침체되었을 때 회복시켜 주시고 죄를 지었을 때 용서해 주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보호하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 위에 뛰어난 것은 하나님이 이 시인을 자신과 생명적인 연합을 가진 사람으로서 인정해 주시고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이 시인을 당신의 가족으로 여기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이것 때문에 시인은 가슴 벅찬 환희를 느끼게 되어서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고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다는 것이 이런 놀라운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과 누리는 이 생명적인 연합이 이 다윗으로 하여금 온갖 시련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승복하는 인생을 살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식탁을 그에게 공급해주셨는가.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이 이 시인이 정말 배가 고플 때 커다란 상에 줄 네 개를 달아 통닭을 비롯해서 온갖 음식을 잔뜩 차려서 구름을 뚫고 이 땅에 내리셨더니 시인이 혁대를 풀고 퍼먹었나보다 라고 생각할 만큼 여러분의 문학적인 상상력이 빈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시인이 식탁이라는 그림을 차용해서 하나님이 자신이 곤고한 인생으로, 굶주린 영혼으로 인생을 살아가던 고비고비 마다 하나님이 얼마나 풍성한 말씀의 식탁으로 굶주린 자신의 영혼을 만족시키셨는지를 경험했고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과 사랑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환희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가 뜻밖의 행운을 얻었을 때 그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 가슴 벅찬 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로또에 1억 쯤 당첨 되었다고 하십시오. 며칠 쯤 기쁘겠습니까? 다 쓸 때까지? 아닙니다. 얼마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이 두 가지 있습니다. 섭리적인 복과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섭리적인 복은 인간들을 둘러싼 물질과 모든 것들을 움직여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인간의 영혼을 직접 만짐으로써 인간의 영혼에 기쁨을 주시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도들이 받는 고유한 복은 두 번째 복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조금 낫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런 영적인 복을 다윗이 깊이 누렸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시련과 고난, 상처로 가득 찬 인생을 살면서도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어느 날 히브리어 성경으로 이것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3장 5절에 와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환희를 느꼈습니다. “차려주시고”라는 동사입니다. ‘아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히브리어로 ‘아라크’는 단어는 사물들을 정돈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릇 같은 것을 똑바로 줄을 맞추어서 놓는다든지 대표적으로 군인들이 열과 오를 맞추어 진영을 짜는 것을 ‘아라크’라고 합니다. 왜 이 단어를 보면서 그렇게 가슴이 벅찼느냐면 이 밥상은 음식물이 몇 개 올려 져 있는 구내식당에서 차려주는 간편 밥상이 아닙니다. 이 밥상은 많은 반찬들이 올라와 있는 정식으로 차려진 정찬을 의미합니다.
어느 자매가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딸이 시집을 가겠다고 해서 한 번 데려와 보라고 했는데 정말 별로인 녀석을 데리고 왔습니다. 진짜 딸을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내지 않으면 늙을까봐 그냥 치워 버리고 말자라는 마음으로 보냈는데 엄마 아빠 마음에 하나도 차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보냈습니다. 그리고 둘이 신혼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신혼여행 잘 다녀왔습니다.”, “응, 그러니?”, “엄마, 내일 인사하러 갈게.” 엄마의 대답에 힘이 없습니다. “그래라.”, “엄마, 우리 점심시간에 맞추어서 갈게.”, “그래라.”, “맛있는 것 차려줄 거지?”, “오너라.”하고 전화를 툭 끊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남편이 배고파 밥 달라고 하니까 “자기야, 조금 만 참아. 엄마가 엄청나게 차려 놓고 자기를 기다릴 거야.” 아침을 차리기 싫으니까 우유 한 잔 마시고 참으라 하고 갔습니다. 선물 하나를 들고 집에 들어갔는데 “딩동”해도 대답이 없고 문이 열려 있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습니다. 지금쯤 전을 부치고 떡을 만들 줄 알았는데 조용하고 아빠도 없습니다. 문을 두드려도 소리가 안 나서 보니까 엄마가 베개를 베고 낮잠을 아주 곤하게 주무시는 것입니다. “엄마, 우리 왔어.”, “어. 왔구나.”, “장모님 절 받으십시오.”하니까 “절은 뭐.”하면서 절은 받았습니다. 딸은 기대에 들뜬 마음으로 “엄마, 배고파. 점심 차려줘. 그런데 아빠는 어디 갔어?”, “응, 아빠는 일이 있다고 나가셨다.”, “그래도 우리가 인사를 오는데.”, “내가 받았으면 됐지.”, “우리 그러면 밥 줘.”, “그래.”, “엄마, 밥 있어?”, “걱정 마. 금방 차려 주마.” 그러면서 밥상을 차려오는데 3분 만에 차려오는 것입니다. 조그만 한 상인데 귀퉁이가 떨어지고 아침에 먹던 밥풀이 묻어 있는 밥상에 먹다 만 찬 밥 하나에 냉수를 부어서 숟가락을 제사 지내는 것처럼 꽂고 그리고 젓가락을 놓고 사위에게 들고 오면서 “들게.”하고 갖다 놓는데 반찬이라고 는 딱하나, 수많은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딱 하나입니다. 밥상 그 자체로 “너는 손님 축에도 들지 못한다. 나는 네가 너무 싫어. 왜 우리 집에 장가를 왔니?” 그 밥상이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23년이 지났으니까 심방을 많이 했습니다. 요즘은 교인들이 너무 많아서 심방을 잘 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부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 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제일 싫어하는 것이 심방을 갔을 때 그 집에서 밥을 차리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합니다. 평소에 자기 남편과 아이들 뒤치다꺼리 하는 것도 너무 힘든데 왜 목사가 왔다고 밥을 차립니까, 하지 마십시오. 밖에서 갈비탕을 먹든지 짜장면을 먹든지 하고 집에 가서 예배만 드리고 차는 한 잔주면 내가 마시겠습니다. 그것이 제 원칙입니다. 자매들이 하루는 무슨 일이 있어서 집사님과 권사님들이 섞였고 제가 점심을 사주기로 했습니다. “우리 어느 식당에 갈까? 그대들은 어디가 맛있습니까?”그 중에 자매 하나가 진심을 이야기 합니다. “목사님, 우리는 우리가 하지 않는 모든 밥이 맛있습니다.” 남이 차려 주는 밥이 제일 맛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야기를 하는데 경상도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 가사 노동을 한 시간 반을 더 한다고 합니다. 경상도 남자들은 각성을 하고 지금부터 보험료를 잘 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내에게 잘 해야 그것이 노후의 보험료입니다. 지금 착실하게 붓지 않으면 나중에 보험금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잘 보여야 합니다. 뭐가 그리 좋아서 고개를 끄덕 거립니까? 남편이 다 보고 있는데. 잘 해야 합니다. 서울에서는 아내들에게 꼼짝도 하지 못합니다. 진짜 그렇게 잘 해줘야만 가정이 평화로운 것입니다. 잘 해주십시오.
그런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아무개 집사님 심방을 하는데 집에서 점심을 하겠다고 합니다.”, “하지 말라고 해라.” 그 자매는 오십대 초반의 자매인데 교회에 와서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심방을 하게 되었는데 점심을 하겠다고 합니다. 보고가 들어왔는데 “그래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한다고 합니다.”, “힘든데 하지 말라고 해라.”, “그래도 한답니다.”, “냅둬라. 할 수 없지 뭐. 그렇게 말을 듣지 않는데 어떻게 하니”하고 심방 날이 되어서 갔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벌써 15년 이상 지났는데 그 식탁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앞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밥상을 가져오는데 세 사람이서 교자상을 들고 오는 것입니다. 들고 오는데 한 사람이 더 받쳐서 네 사람이 들고 미리 상을 차려서 옵니다. 밥상을 보는데 마음이 상했습니다. 너무 화려한 식탁인데 얼마나 반찬을 많이 차렸는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젓가락의 사정거리 밖에 있는 것입니다. 미치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 다른 반찬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아니, 왜 이런 일을 합니까? 내가 무엇이라고 이런 수고스러운 식탁을 받겠습니까?”하면서 제가 마음을 상해했더니 “아닙니다. 목사님, 이번 말고 언제 목사님을 또 식사를 대접하겠습니까? 준비했습니다.” 거기에서 제가 끝났어야 하는데 또 토를 달았습니다. “아니, 왜 한 인간을 위해 이렇게 정성을 쏟을 필요가 뭐있습니까? 이 시간에 차라리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지.” 그랬더니 이 자매가 화가 났는지 공손하던 말이 바뀌었습니다. “목사님, 성경도 읽었고 기도도 했거든요. 빨리 드세요.” 그리고 먹었는데 이 밥상을 어떻게 차렸냐고 했더니 한 달 전에 계획을 하고 그 계획을 잘 정리해서 확정을 하고 열흘 전에 김치를 담기 시작하고 일주일 전에 밑반찬을 만들고 3일 전부터 장을 보고 그 다음에 음식을 만들기 전 날에 언니 두 사람이 와서 함께 장만을 하고 심방 날은 아침부터 마지막 반찬을 준비하면서 예배가 끝나는 그 시간까지 온도까지 재서 모든 음식을 내 놓은 것입니다. 사정거리가 되지 않으니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저쪽에 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으면 담아서 주는 것입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우리 부모님에게서도 그런 식탁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결국 한 집안에 온 손님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받은 밥상은 찬밥에 냉수를 붓고 숟가락을 꽂은 고추장 하나 올라와 있는 귀퉁이가 떨어진 소반에 있는 밥상이 아니라 이런 아주 엄청난 정탁을 차립니다. 이 시인이 고난 속에서도 일평생 살아오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와 그것을 통한 인격적인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런 은혜를 시인은 경험한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로부터도 이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그렇게 자기의 자녀를 지극히 사랑하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아주 세심하게 아주 작은 것까지도 배려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이 시인이 영혼의 식탁인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니까 하나님이 성막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정말 위대하신 하나님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그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말할 수 없이 행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수많은 난관과 시련을 지나면서도 하나님이 선한시다는 사실, 그 하나님이 자기를 눈물겹도록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꽉 붙들고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그 믿음의 길을 걷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신앙 없이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의 위대한 식탁을 받으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과 자유를 누려 만족을 얻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그 속에서 영혼의 환희를 느끼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기쁨이 우리의 영혼에 주시는 기쁨인데 이 영혼에 주시는 기쁨이 마음에 전달이 되면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기쁨이 없었더라면 살아갈 수 없는 삶을 살도록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는 인간의 지성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어거스틴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는 분입니다. 깨달음이 없는 신앙은 절대로 행복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 진리의 말씀에 붙잡힌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는 원수의 목전에서 기름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이라는 제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는 세 가지 직분이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독특성을 유지해 갔습니다. 첫 번째가 왕, 두 번째가 제사장, 세 번째가 선지자였습니다. 이 세 직분은 서로 누가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직분이었고 이 세 직분은 서로 달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부복하는 신앙심과 경외심으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그 나라의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왕의 임무였고,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임무였고, 제사장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 도저히 나아갈 수 없는 불결한 백성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용서받고 교통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제사장들이 감당해야 하는 임무였습니다. 이 세 사람들은 그 직무가 매우 독특하고 영적이었기 때문에 자연적인 재능만으로는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일꾼으로 세우실 때에는 그들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그 기름이 바로 감람유입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행동이었고 그 상징적인 행동에는 실제로 성령이 그들에게 부어지는 영적인 역사가 동반되었습니다.
성령의 경륜에 관해서 우리들이 기억해야할 한 가지 사실은 구약시대에 인간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방식과 신약 시대에 역사하시는 경륜은 사뭇 다릅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믿는 자에게 한 번 오시면 영원히 떠나지 않고 성령이 그 사람 안에 계시는데 이것을 성령의 내주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시대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이후 오순절 성령 사건으로 이어지는 이 모든 맥락 속에서 인류에게 부어진, 신자에게 부어진,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교회에게 부어진 특권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할 때 성령이 개인적으로 부어졌고 그 성령이 오면 그는 정화된 동기와 순수성을 갖게 되고 또 이어서 탁월한 지혜와 용기, 이런 것들을 갖게 만들어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에 합당하도록 세우셨습니다. 일이 끝나면 하나님이 그 성령을 거두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윗이 이런 기름부음을 통해서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다. 일평생 그는 세 번 기름부음을 체험했는데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것은 첫 번째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 부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기름을 붓자 여호와의 성신이 그에게 충만히 임했고 그럼으로써 다윗은 탁월한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다스릴만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시인이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가슴이 터질 것처럼 환희에 벅찹니다.”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경험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꽤 지식도 늘어나고 나름대로 신앙의 체험도 하고 특히 훈련도 많이 받고 교회에서 이런 저런 직분도 받고 봉사를 하고 또 선교도 했는데 왜 그런지 그 사람 마음속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 사람 마음속에 왜 그런지 정화된 삶의 동기가 부족합니다. 그것은 모두 그에게 모자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입니다.
이 성령의 충만은 우리들이 어떤 인위적인 방법으로 어떤 일을 한다고 해서 성령이 오시고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고 우리가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음으로써 성령 안에서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교통이 우리에게 충만히 이루어질 때 이것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충만한 생명과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 생명력으로 이길 수 없는 삶의 사태들을 극복하며 살게 만들어주고 그 사랑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영혼과 정신의 힘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15살에 통곡하는 슬픔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눈물을 씻고 무신론자가 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이제 저는 어떻게든 하나님 없이 내 인생을 꾸려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것이 문학작품들이었습니다. 그 문학작품들을 계속 읽으면서 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예전에는 나만 너무 유별난 생각을 하면서 인생을 산다고 생각했었는데 문학작품을 읽고 보니까 나같이 인생에 대해서 고민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적잖은 위로가 되었고, 그리고 그 문학작품들을 통해서 삶의 지혜, 고민들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내가 비정상이 아니라 고민과 근심이 없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몇 년 읽다 보니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냐면 계속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문학은 이야기할 뿐이고 나도 너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라고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는 하는데 어차피 그 사람도 답을 찾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는 혼자 하던 고민을 이제는 그 작가들과 함께 고민한다는 차이뿐이지 어차피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것이 철학책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떤 것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냥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실존주의가 휩쓸고 지나가던 시대였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제가 고등학교를 다녔으니까 사르트르를 읽지 않으면 어디 가서 말을 붙이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읽어 봤는데 정말 거기에서는 치열하게 답을 찾아갑니다. 문학에서 제기한 질문을 토대로 놓고 답을 찾아갑니다. 어떤 때는 박수를 치며 “놀랍다. 답을 발견했구나.” 그런데 답인가 보다하고 살아보면 답이 아닙니다. 여전히 영혼의 빈 잔이 하나님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것을 향락과 쾌락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기껏해야 우리들이 생각하는 문학적인 예술성이나 사상적인 것들로 채워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진리 비슷한 것들이 섞여 있을지 모르지만 내 영혼의 갈증은 점점 깊어져 갔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어느 계기에 깊이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사상가들이나 철학자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설명하자면 길지만 돌아오게 되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혼자 조용히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밤마다 밤을 새워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새벽이면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뎅그렁, 뎅그렁’ 밤새도록 공부하다가 일어나서 뒤뜰에 가보니까 저 멀리 들판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입니다. 그런 종소리를 들으면서 정말 종소리가 아름답다.
(찬양)
깊이 스며와 닿는 구원의 저 종소리
그러면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제가 톨스토이를 한 참 읽었을 때였는데 어떤 책을 읽어도 마음에 평안이 없었는데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고 인생론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마음의 평화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께 귀의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혼자 제 발로 걸어서 교회당에 갔습니다. 이 교회의 사분의 일쯤 되는 조그마한 예배당이었고 가보니까 꽤 추운 가을이었는데 콘크리트 바닥에 비닐 장판을 깔고 누덕누덕 기운 방성을 깔고 앉아서 한 20명의 교인이 나이 드신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수요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설교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배 중에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내며 풍금을 치는데 그때에 들리는 그 반주소리, 성도들이 부르는 그 노래 속에서 저는 인생 최초의 안식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니 그 한 삼십 명도 안 되는 교회에 멀끔한 청년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제 발로 걸어왔으니 목사님이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교회에 다닌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목사님, 교회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세례를 받습니까?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너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학습을 받지 않아도 된다. 세례를 받아라.” 그래서 목사님을 거역할 수 없어서 세례를 받기로 했는데 그때부터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겠다고 교회에 올 수는 있지만 이제 세례를 받는 것은 그 분과 혼인을 하는 것인데 나같이 더러운 인간이 어떻게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을까?’ 집에서부터 매일 밤 30분되는 거리를 걸어서 오면서 밤중이면 교회당에 촛불을 켜놓고, 전기세가 많이 나오니까 촛불을 조그만 것을 켜놓고 엎드려서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저 같은 것도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습니까? 주님과 결혼하면 진짜 좋은 신부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제가 육체적으로 심하게 타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걸레와 같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이 문학과 저 철학과 무신론과 유신론 사이를 오가면서 쓰레기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받아주시렵니까?”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드디어 세례 받는 날이 왔습니다. 그때 저는 인생에 있어서 수많은 좌절을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 살 힘을 잃어버렸던 젊은이였다가 예수님을 막 만난 때였습니다. 일주일을 그렇게 기도하고 목욕을 깨끗이 하고 제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교회당에 나왔습니다. 무릎을 꿇었는데 목사님이 세례를 주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런데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내려오기 시작해서 온 몸을 불같이 아니라 따뜻하게 감싸면서 마치 교통사고가 났을 때 링거를 맞는 것처럼 따뜻한 기운이 확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고 났더니 내 몸이 공중에 뜬 것같이 가벼워지고 눈물이 막 쏟아졌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이 더러운 인간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이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기를 찢어 피흘리고 죽으셨던 사실이 밀려오면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얼마나 울었는지 교인들이 다 흩어졌고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 12월 셋째 주 쯤 되었는데 굉장히 추웠습니다. 바깥에는 차가운 기운이 역력하던 때인데 추운 바깥을 보면서 마음속에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야망, 그리고 예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인생의 수많은 꿈은 하나도 없고 소원이 뭐냐고 주님이 물으신다면 오직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살든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만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찬양)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그것이 예수님을 믿고 처음 경험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이제 신앙의 중심을 잡고 직장을 다니다가 소명을 받아서 신학교를 갔습니다. 그리고 직장을 다니면서 밤에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 한 지 몇 달 안 되었는데 너무 커다란 기도제목이 생겼습니다. 새벽마다 가서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응답의 징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새벽에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동네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교인들도 다 가고 목사님도 가셨습니다. 12월의 어느 겨울이었는데 굉장히 추웠습니다. 빈 예배당에 이러고 앉아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 걸까? 내가 이 편한 의자에 앉아서 배불리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안 들으시는가보다. 저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땅바닥에 내려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엎드려서 두 손을 땅바닥에 대고 얼굴을 묻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냉기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내장까지 얼어붙게 하면서 치고 들어왔습니다. 그때 어린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얼어 죽어도 주님이 응답해 주시지 않으면 일어나나 봐라.” 그러고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번에는 따뜻한 기운이 아니라 강력한 불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뜨거운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이상한 언어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는 혼자 조용히 기도하다가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다가 이상하게 내가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기도의 제목은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주님이 내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 이 벌레 같은 죄인을 베푸신 사랑, 앞으로 나의 일생이 어떠한 시련과 난관에 처하든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겠습니다하는 절실한 고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체험은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얼마나 추운지 비닐로 씌운 유리창에 하얗게 성에가 끼었습니다. 그런데 보면서 마음에 느끼는 것은 ‘일평생 변함없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자. 그리고 내 있는 모든 것을 드려서 그분을 위해서 살자.’ 그 마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유사한 경험을 많이 하면서 살았지만 언제나 그런 성령의 깊은 경험을 하고 난 다음에 밀려오는 것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환희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조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마치 오십 대의 부부가 진짜 살기 싫은데 자식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것 같이 그렇게 우울하기 짝이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일에 머슴이 되어서 인격적인 기쁨, 영적인 희락이 없이 기계처럼 봉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복음적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안에서 주님이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하늘의 기쁨이 얼마나 이 세상의 고난과 시련을 이기게 만드는지를 경험하며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깊이 인격적으로 모시고 주님과 함께 살 때 오늘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노예와 같은 신앙생활이어서는 안 됩니다. 인격적인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을 받고 주님이 이 땅에서 이루고 싶은 일이 나에게도 소원이 되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나에게도 절실한 기쁨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 사는 것을 얼마나 아름답고 기쁘게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을 인격적으로 모시고 그 안에서 복된 성도의 삶을 살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