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토하는 기도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62:8)
녹취자:송미옥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다윗의 시이고 고난 당 할 때 쓴 시입니다. 시인은 8절에서 고난을 당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두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라고 했는데 ‘시시로’라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 ‘콜에트’ 모든 시간에 every time입니다. ‘모든 시간에 그를 의지하고’ 라고 했는데 ‘의지하다.’라는 단어는 ‘바타흐’ 입니다. 시편에 수없이 나오는 단어이고 이것은 ‘하나님을 바라다. 의지하다. 의탁하다.’ 라는 말로 쓰여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뒤에 나오는 전치사인데 ‘그분 속으로’라는 전치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아 항상 그 하나님 속으로 의지하라’ 이런 뜻입니다.
로마서 8장 7절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나옵니다. 이게 ‘에크스라 에이스데온’ 입니다. ‘에크스라’ 는 ‘반감, 적의 특히 적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에이스데온’입니다. 하나님의 겉모습에 대한 적의가 아니라 하나님 속속들이 파고 들어가는 적의입니다. 이 화법 자체가 구약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래서 ‘에이스’가 바로 여기에 나오는 ‘에헤’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되 하나님 겉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속속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에게는 겉이나 속이 없으니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을 적대하거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심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육신의 생각은 그 사람 속속들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고난을 만났을 때 마음 속 어느 한 구석도 그렇지 않은 부분이 없으리만치 속속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10년, 20년을 했는데 거의 기도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 하는데 자신이 불신자보다 행복하다는 마음이 없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태어나서 남자를 수없이 만나보았는데 한 번도 사랑한 남자는 없는 여자처럼 말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은 신앙의 양식이 문제가 아니라 시험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시험의 상태가 1년이나 6월 정도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주위에서 일평생을 시험에 살다가 시험에 죽는 목사도 보았고, 신학교 교수도 보았고 장로도 보았고, 권사도 보았고, 전도사도 보았습니다. 물론 평신도도 보았습니다. 너무 가엽습니다. 그는 세상으로 나갈 용기가 없어서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익숙해진 삶의 방식으로 사역, 익숙해진 방식으로서의 교회 생활 이미 수십 년 살아오는 동안에 그런 식으로 질서가 잡혔기 때문에 그것을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용기도 없는 것입니다. 살던 집 한 번 이사 가는 게 얼마나 힘들지 아십니까?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삶이 구성되어서 이제껏 살아왔는데 송두리째 두들겨 엎는다는게 하나님 믿는 것보다 더 엄청난 에너지가 들지 모릅니다. 결국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존 오웬에 한참 몰두해 있을 때였습니다. 여기 이사 오고 2002년경부터 그 전까지 존 오웬을 좋아해서 읽었지만 특히 여기 건축할 때는 정신이 없었고, 2002년 건축이 끝나고 존 오웬에 몰두하고 읽었을 때 어느 날 밤, 책을 읽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설교했더니 장로님 한 분이 자기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말씀에 충격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을 받는 순간 자기가 수십 년 동안 왜 그렇게 허우적거리며 살아왔는가? 라는 것이 한 번에 싹 드러났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지 아십니까? 존 오웬이 신자가 시험에 든 상태를 정의하는 것이 내가 신학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충격이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저는 시험에 든다는 것은 신앙에서 미끌어진다는 것이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존 오웬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청교도의 경험신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몸밖에서부터 시작을 하는데 존 오웬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시험을 시작할 때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깨끗이 정리하기를 ‘시험이란 하나님께 즉각적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모든 상태가 다 시험이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이 살아가는데 잘못해서 뜨거운 것을 만진다고 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뇌가 분석을 큰골 작은 골을 걸쳐오는 동안에는 손이 다 탑니다. 그래서 탁 놓습니다. 저는 저녁때마다 뜨거운 물주머니에 물을 넣고 자는 게 몇 년째 되는데 항상 그것을 아무데서나 넣지 않고 씽크대 속에서만 물을 부어 넣습니다. 왜냐하면 물을 넣다 잘못되어 손을 데면 전기 포트하고 물주머니를 집어 던져도 되는 장소에서 그래도 내가 안 다칠 장소에서 물을 붓는 것입니다. 뜨거우면 그냥 내려놓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똑같이 우리가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이면 내가 순종할 것이라는 것이 반사행동처럼 이 안에 꽉 차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찌그러진 모든 것이 시험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러한 존 오웬의 정의를 보면서 반감을 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시험에 안 든 사람은 몇 사람이나 될까?’ 심지어는 ‘자기는 얼마나 잘하길래?’ 라는 반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령 충만하게 사는 것 그래서 기도가 필요할 때에는 상황이 말씀을 필요로 할 때는 머릿속에서 말씀이 수없이 연상되면서 자기가 붙들 말씀이 생각이 나고 기도가 필요할 때는 반사적으로 기도가 튀어나오고 선행을 해야 할 때에는 순식간에 일어나서 봉사를 하는 몸에 배어있는 호텔맨처럼 그렇게 봉사할 수 있는 정신이 꽉 차있는 상태가 시험에 안 든 상태라는 것입니다. 새벽에 교회는 나왔습니다. 그런데 기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험에 든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서 술집으로 간 사람보다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기준으로 보면 시험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주일 새벽에 교회 안 나오고 술 마시러 간 사람과 자기를 비교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어려운 때에 간절히 기도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받던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에게나 결단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나태하고, 태만하게 산다는 것은 그냥 세상 낙이나 즐기면서 죄를 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시험에 든 것이 아니라 타락한 것입니다. 지금 타락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든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혀갈지도 모르는데 겟세마네 동산까지 따라갔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제자들은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여기서 기도할테니 내가 죽게 되었으니 너희도 기도하라,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 말씀을 받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가 불길같이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하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그 이야기는 제자들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예수님의 유페미즘입니다.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돌려 말하는 것입니다. 증거가 무엇입니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 그 이야기는 이미 시험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잠시 후 보기 좋게 결판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었고 죽기까지 따라간다는 사람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고 그리고 우리도 모두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하던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고 제일 높은 곳까지 예수님을 따라왔던 사람들은 그 일의 으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체포되기 전까지는 성령 충만했는데 예수님 체포되자마자 시험에 든 것입니까? 그런 정신 구조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시시로 나는 번역을 반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시인이 고난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은 ‘나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다. 언약백성은 한시도 쉼없이 그분을 속속들이 의지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큰일을 만났는데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없을 때에는 생을 포기하거나 누군가를 의지합니다. 그러면 저 사람이 모든 일의 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 앞에 서면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당신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고 초라해지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당장 집을 쫒겨 나게 되었을 때에 돈이 있는 사람에게 가서 돈을 빌릴 때의 그 마음 여러분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분이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 길거리에 쫒겨나게 되었을 때에 혹은 당장 구속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그 작고 초라해 지는 마음을 느껴보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것을 느끼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람 앞에 그것을 느끼는 것이 비굴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것을 느끼는 것이 그게 신앙입니다. 초라해지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기도라는 것은 마음에 항상 있는 것에 대한 시간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언제나 주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영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목회의 기본이 아니라 사역의 기초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 명분을 가진 신자의 기초입니다. 거기서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전셋집에 들어가 살고 있는데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신앙의 세계를 부인할 수 없게 만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를 사랑해 주시던 할머니가 수면 중 기절하신 것입니다. 이유가 연탄가스였습니다. 그때는 연탄가스에 중독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연탄가스였으니까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돌아가신 큰 고모가 할머니를 깨우면서 너희 할머니 이상하다 하며 딸 둘이 일어나서 막 깨웠는데, 거구이시다보니 병원으로 모시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큰 고모가 나가서 넓은 마당이 있었고 거기 여러 집이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스낵을 만들어서 팔고 있는 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 뛰어가서 도움을 구했더니 새벽에 뛰어나왔습니다. 3시쯤 되었습니다. 그 남자분이 할머니를 업고 병원으로 뛰었습니다. 그때 고모가 큰 소리로 기도를 하면서 같이 뛰어가셨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주여 하나님 살려주시옵소서.’ 캄캄한 골목을 뛰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뒤따라가면서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가보다.’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마음에 가득합니다. 그 아까운 인생의 때를 왜 저렇게 다 보내고 있을까? 마음 속속들이 그분 속속들이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특히 고난을 받을 때에 신앙에 착실하게 자기의 영혼에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를 공부해야 합니다. 이게 여러분들의 생명이 달린 일입니다. 그까짓 것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문제를 탐구하는데 일주일도 걸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근본적으로 자신의 신앙의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피하는 것입니다. 바쁜 일에 먹고 싶은 것에 가고 싶은 곳에 놀고 싶은 일에 친구들과의 만남에 이러면서 자신의 영혼은 감옥에 갇힌 채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날들이 무슨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겠습니까? 속속들이 그를 의지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히브리말로 ‘샤파크’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토한다는 말보다는 토한다는 말은 울컥해서 올라온다는 말입니다. ‘샤파크’ 라는 단어는 확 쏟아버린다는 뜻입니다.물이나 액체 같은 것을 천천히가 아니라 한방에 확 부어버리는 것이 ‘샤파크’ 입니다. 그래서 ‘엎지르다’ 물건 같은 것을 잘 못 건드려서 깨뜨려져서 그것이 쏟아져서 흩뜨려져 버리다.‘ 이럴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마음이 돌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돌은 쏟아지는 법이 없습니다. 쏟아지려면 기본적으로 액체여야 쏟아지는 것입니다.
결국 비유를 하자면 우리의 마음이 돌덩이 같을 때에는 쏟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뜨거운 불로 다 녹아버리지 않습니까? 녹아버리고 나면 쇳덩어리를 비교하자면 쇳덩어리를 쏟을 수가 있습니까? 내려놓을 수는 있고 던질 수는 있지만 쏟을 수는 없습니다. 가지고 있을 때나 던져 버렸을 때나 형체가 똑같습니다. 그런데 액체는 가지고 있을 때는 용기에 담겨있지만 쏟아버리면 허공중에 흩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쇳덩어리 같은 마음을 쏟기 위해서는 1,200도의 열을 가해서 물이 되어야 합니다. 쇠가 녹으면 눈부신 빛이 나면서도 물과 똑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국자로 뜨면 떠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부으면 물과 같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물은 땅에 스며들어가지만 쇠는 굳게 됩니다. 그러나 쏟아지는 동작은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마음을 토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샤파크 쏟아버리라’ 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버리라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 단순히 죄를 내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감추인 것이 없이 모두 그분에게 진심으로 쏟아내라 그 뜻입니다. 그 속에는 ‘감정의 찌꺼기 이랬으면 좋겠다.’ 라는 선입견의 찌꺼기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 쏟아내서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주님의 뜻을 담으소서 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확 쏟아놓으라는 것입니다. 감추고 여러분이 주인이 되어서 관리하는 마음의 결과가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끊임없는 하나님을 향한 머뭇거림 겉으로는 순종하는 것 같지만 뒤에서는 호박씨를 까고 사명이라고는 하지만 자기를 다 드리기는 싫고 그렇다고 세상으로 달려갈 마음은 아니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 세상 비겁한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윤동주가 예수그리스도를 표현했을 때 행복했던 사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당신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믿는 바대로 자유롭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루를 살고 죽어도 그렇게 살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부자 되려고 예수 믿은 것 아니고 물론 가난하게 되려고 예수 믿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 것은 이 세상의 자원으로만 살 수 없고 하늘 자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믿었고 이것을 수많은 사람에게 알게 해서 그들의 영혼을 살려야 된다는 마음 때문에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아니 예수를 믿고 그게 인생의 보람 있는 일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목사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18년 전 일이었습니다. 교회 복사기가 망가졌습니다. 복사기 아저씨가 다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우리 주일인데 복사기 못 쓰면 안되요. 오늘 쉬시는 날이지만 꼭 와서 고쳐주세요.” 라고 행정실 직원이 애원을 하다시피 하니까 고맙게 달려왔습니다. 얼마나 지혜롭습니까?“’아저씨 정말 애쓰셨습니다. 물 한잔 드세요. 그런데 오늘 주일이잖아요 교회 다니세요?”, “옛날에 다녔습니다.”“아저씨 오늘 꼭 주일예배 다니고 가세요. 한 시간 일찍 집에 가셔서 무엇 하시겠어요 꼭 예배드리고 가세요.” 행정실 여직원이 간곡하게 권해 이끌고 본당 가운데 자리에 앉혔습니다. 펑펑 울면서 그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마음으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속속들이 의지해 본 적이 없으니까 자기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불쌍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 앞에 물같이 쏟아놓은 적이 없으니까 그 상한 마음을 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거기서 그런 뜨거운 전도의 열정이 나오겠습니까? 목회자의 최고의 무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 아닙니다. 사람? 믿지 마십시오. 어제 충성스러웠던 사람이 내일 배신자가 됩니다. 그들을 의지합니까? 개나 주라고 하십시오. 무엇을 의지합니까? 사람의 마음을누가 알겠습니까? 목회자의 최고의 자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입니다. 속속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속속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목회가 잘 될 때나 안 될 때나 심지어 교인들이 나를 존경할 때나 오해하고 나를 멸시할 때나 설교에 감동을 받을 때나 내 설교를 무시할 때나 상관없이 언제나 속속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마음 그것이 목회의 자산입니다. 그 사람은 광야의 벌판에 혼자 가져다 놓아도 거기서 자립합니다. 살아날 수 있습니다. 모든 도움이 완벽하게 끊어져도 하나님이 먹이십니다.
광야에 있던 엘리야처럼 자산이 뭔지 아십니까? 인격이 아주 고상할 수 있고 거칠 수도 있습니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을 수 있는 정신의 세계를 가진 목회자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심지어 실수를 했을 때 한걸음 나아가서 죄를 지었을 때 조차도 즉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물처럼 쏟아 놓으며 간절히 매달릴 수 있는 것 이것이 목회자의 자신입니다. 기도 많이 해주는 부모님? 없어도 됩니다. 우리 부모님이 평생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시간이 두 시간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삽니다. 왜?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사는 것이지 남의 기도 먹고 겨우 사는 것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는 사람에게나 중보기도가 위력이 있는 것이지 자기가 하나님 버리면 천만 명의 중보 기도도 소용없습니다. 돈 많은 장인어른 없어도 괜찮습니다. 개척교회 안 도와주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십니다.
이 두 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버려도 하나님이 구해 주실 것이고 사람이 싫어해도 하나님이 예뻐하십니다. 부족하면 하나님이 부족한대로 쓰시고, 거칠면 거친 대로 쓰십니다. 그러면서 다듬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 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 기도가 필요한 때를 살고 있습니다.그래서 기도를 해 보려고 두드려 보니까 기도의 비결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줄기 가지가 뻗으며 특히 뿌리가 뻗으며 밑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에게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무엇이더냐 나 여호와는 너에게 무엇이더냐?” 이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주는 언제나 내가 속속들이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이시며, 내 마음을 항상 물 같이 쏟아 놓을 그분이십니다.
그의 앞에 라고 되어 있는데 ‘레파나오’라는 단어입니다. 그의 두 얼굴 그의 면전 앞에서 라는 뜻입니다. ‘그의 얼굴을 향하여 혹은 그 얼굴을 마주하며’ 이런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면전에서 마음을 쏟아 놓으라는 것입니다. 슬플 때 유행가에 마음을 쏟지 말고 알지도 못하는 이성에게 마음을 쏟지 말고 신뢰하지도 않는 친구에게 마음 쏟지 말고 사람에게 마음 쏟지 말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이 그분만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신앙으로 마음을 쏟아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어려울 때는 이 모든 것을 헤쳐 지나가라고 우리에게 주실 은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난관의 크기는 주실 은혜의 크기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교회를 기도로 다시 세우는 이 과정을 통해서 오래된 시험의 상태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착실하다고 말하는 것에 배불러하지 말고 가슴에 손을 얹고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는가? 예수의 피가 내 혈관에 흐르고 있는가? 내 안에 그분의 사랑이 숨 쉬고 있는가? 를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속사람이 정말 살아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유산된 것 같은 상태에서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사는 것 같은 신앙생활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인생 중 하나님과 관련되지 않은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먹고 마시는 모든 일 몸이 여기저기 아픈 모든 육신의 상태에서 비롯해서 정신의 고뇌 나와 연관된 수많은 사람들의 가엾은 형편에 이르기까지 우리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들을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두 가지를 점검하십시오. 마음 속속들이 그분만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마음은 물 같이 녹아 있습니까? 주님 원하시면 언제든지 그분 얼굴 앞에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버릴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이든지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인도하여 내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들은 깊이 생각하십시오. 내 인생의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숙고하십시오. 그리고 왜 설교자가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렇게 마음 깊이 주님을 의지하고 마음을 물같이 쏟아 놓는 일이 나에게는 낯선 일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 직접 물어보십시오. 주님께서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