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자를 부르심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5)
녹취자: 조경훈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확인했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생업이었던 고기를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세상으로 돌아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특별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고기잡이 하는 일로 돌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찾아오셨습니다. 밤새도록 애써서 고기를 잡았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찾아오셨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데로 순종하자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마치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 겪었던 일과 똑같은 일이 데자뷰 처럼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실패한 자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크게 네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첫 번째로 제일 먼저 예수님은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실패했고 결국 베드로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께 달려왔고 제자들이 모두 피곤한 고기잡이에서 마지막에 많은 물고기를 수확해서 뭍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어디에서 준비하셨는지 예수님은 이미 그 바닷가에서 떡과 물고기를 굽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식탁을 차리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흔히 있는 선지자나 랍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가 들어오는 자녀들을 위해서 식탁을 차리는 것처럼 애정을 가지고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너희에게 물고기가 있느냐? 하고 물으면서 제자들이 잡은 생선 일부를 취하셨지만 그것은 예수님께 먹을 것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예수님과 어색한 관계 속에 서 있는 제자들에게 심리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한 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을 건네셨고 침묵 속에 아침 식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하게 묘사되어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이미 떡을 굽고 고기까지 굽고 계셨으니 세심하게 타지 않도록 이리저리 돌리면서 굽고 계셨을 것이고 다 구워진 후에는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이것을 먹어라. 그리고 이것이 맛있다. 더 먹지 왜 조금만 먹느냐? 이런 대화를 건네셨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실패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이런 새벽에 숯불을 피우고 아침 식탁을 차리고 계셨을까요? 여기에서도 무엇인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구제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식사에 대한 생각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떡을 함께 나누고 식탁을 나눈다는 것은 단순히 함께 먹는 것이 아니라 가족 내지는 좀 더 확장을 하면 공동체적으로 형제가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서양에서도 어느 정도 그런 문화가 있지만 동양에서는 특히 그런 문화가 매우 강합니다.
우리가 개화되기 전 조선시대 근대 말까지만 해도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뚜렷했습니다. 양반과 상민이 함께 여행을 할 수도 있고 상황이 어쩔 수 없으면 한 주막에서 한 방에서 섞여서 잠을 잘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양반과 상민이 절대로 같이 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양반에게 매우 커다란 수치였고 따라서 상민은 상민대로 밥상을 받고 양반은 양반대로 밥상을 상황이 안 되면 굶더라도 상민과 함께 밥을 먹는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양반이 상민과 형제가 될 수 없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만나의 사건입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배타적으로 만나를 공급하셨고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 만나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역사를 타고 건너오면 예수님 시대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으셨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왜 너희 선생님은 죄인과 세리 같은 부류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는 비난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 왔노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도대체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과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요? 종교 지도자들은 세리와 죄인 특히 창기들을 자기와 함께 형제가 될 수 있는 부류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회개시키는 일에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받을 수 있는 형제들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식탁을 나눈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믿었을 일은 없지만 주님의 마음에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하나님 앞에 형제 자매가 될 수 있는 소중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파격적으로 식탁을 나누며 그들과 함께 한 형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으니 이는 죄인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더 넓은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벽에 식탁을 준비하심으로써 비록 제자들이 당신을 버리고 배신했으나 여전히 당신은 거기 계셔서 그들을 형제로 여기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식탁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여러분들이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살과 피를 기림으로써 우리가 한 형제 된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부들 중에 이러한 격언이 있었습니다. The water is thicker than blood. 물은 피보다 훨씬 진하다. 우리가 흔히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물이 피보다 진하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그들은 그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여기서 물은 세례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되는 그 물을 가리키는 것이고 피는 육신의 혈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혈통으로부터 난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니 그들의 세례가 이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한없는 사랑을 그 식탁을 통해 보여주셨고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을 한 가족으로 계신 하나님의 심정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친밀함을 어떻게 나누고 계십니까? 멀리 멀리 떠나갔어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부르십니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주님을 멀리 떠나 절그렁거리는 쇠사슬에 메이듯이 죄에 메여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생각하고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구원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여러분들이 이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와서 주님과 가족의 관계의 풍요로움을 누릴 때입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멀리 멀리 세상으로 떠나가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고 불순종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순종하고 사랑하면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뿐 누구도 자기가 자기를 떠나서 어디로 갈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서 어딘가로 도망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그분이 주신 은혜로운 가족의 관계를 누리며 그분 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다시 여러분들에게 오셔서 여러분들을 강가나 호숫가로 부르셔서 다시 생선을 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을 통해서 생명의 떡을 여러분들에게 나누어주시고 그것을 기쁘게 받아먹는 여러분들에게 다시 영원의 생명을 누리게 만들어 주십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 떡을 먹으며 생명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특별히 어떤 절차를 밟은 것은 아니지만 왜 그런지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셨고 왜 그런지 셋 중에 베드로를 머리 제자처럼 다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식사가 끝난 후 베드로에게 물으셨는데 이 질문은 베드로 개인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베드로가 대표하고 있는 모든 제자들을 향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침묵 속에 아침 식사가 끝났고 누구도 감히 말문을 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다정한 음성으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라고 말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요나 시몬이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가졌던 자연인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물어보시고 난 후 여러 대답을 들으신 후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사실 앞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라는 질문은 이 질문에 대답을 들으시기 위한 예비적인 질문일 뿐이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정확하게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너의 이름을 더 이상 시몬이라고 하지 말고 베드로라 하라고 계명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요나 시몬은 예수님이 버리게 하신 이름이었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갖게 하신 이름이었습니다.
바요나 시몬이라는 이름은 바르는 당시 사용하던 아람어로 아들이라는 뜻이고 요나는 아버지의 이름이고 시몬은 베드로 자연인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버리게 하신 그 이름으로 베드로를 부르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당신이 버리게 하신 그 이름을 그토록 오래간만에 다시 소환하여 당신이 붙여주신 거룩한 이름을 제치고 “바요나 시몬아!”라고 다시 불러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베드로 라는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반석이라고 붙여주신 이유는 그의 훌륭한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과 관련이 있습니다. 건물을 반석 위에 세워야지 홍수가 나도 흔들리지 않고 든든히 서 있는 것처럼 교회는 그 신앙고백 위에 서 있을 때만 튼튼하다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이 후에 세워질 모든 교회들이 바로 베드로의 고백의 터 위에 세워져야만 진정한 교회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베드로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처지는 어떤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모든 제자들 중에 으뜸이 되었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야비하게 배신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예수님께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부인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죽는 데까지 가더라도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장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보기 좋게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고 비겁하게 멀찌감치 서서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지를 구경하며 따라가다가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베드로야! 라고 부르면 이것은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수치와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남겼던 사도의 이름으로 그를 부르지 않고 자연인이었던 바요나 시몬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요? 이것은 바로 우리가 훌륭한 고백을 남겼어도 항상 그 고백대로 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 사람이 훌륭하게 살았던 한순간을 기억하며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잘못 살았던 한순간을 기록하고 인간도 아닌 것처럼 매장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사람 전체를 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항상 하나님 앞에 칭찬만 받으면서 산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한 때는 누구보다도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한 때는 자신도 돌아볼 때 부끄럽기 짝이 없는 배신자이기도 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지 하나님이 아시고 여러분들의 양심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의 모습을 굳이 부정하려고 하지 말고 뭔가 다른 모습으로 꾸리려고 하지 말고 실패한 그 모습 그대로 내게 오라는 메시지가 그 안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그 사람을 바요나 시몬아! 라고 부르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계십니까? 예수 믿고 나서 이제껏 살아온 일생 동안에 가장 주님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주님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입니다. 마음껏 그 교제를 즐기시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만 그렇게 하지 말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이 사랑을 전해서 주님과 함께 동행을 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보여주십시오. 이것이 최고의 선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곤고한 영혼이 되어있고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매우 지친 영혼으로 영혼의 길을 잃어버린 어두움을 지내고 있다면 지금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올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당신께 돌아오라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저 같은 사람을 여기에 보내어 여러분들에게 설교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한 가지 기억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무엇인가를 꾸미고 변장하고 위장한 모습으로 당신께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께 오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납되는 것은 우리의 의로움을 통해서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보혈의 피로 씻어주심으로 우리가 주님 앞에 용납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름을 불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름으로도 우리를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들은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특별히 주님 앞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돌아오십시오. 양심에 구김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깊이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그러나 만약에 부끄럽다면 오늘이야말로 회개하고 돌이켜 설 때입니다. 여러분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기 위해 이름을 불러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부름 앞에 여러분들이 응답할 때입니다. 그 분께 돌아와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를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이름을 부르신 후에 예수님은 또한 모든 제자들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현재형으로 물으셨습니다. Do you love me? 만약에 네가 나를 사랑했느냐? 하고 과거로 물었다면 베드로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했으면 주님을 배신할 리가 없고 사랑했으면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부인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모순을 설명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네가 앞으로 나를 사랑하겠느냐? 라고 물어도 대답하기 굉장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과거가 예수님을 얼마든지 버릴 수 있음을 입증했는데 어떻게 미래의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미래에 주님을 사랑해서 목숨을 버리기까지도 하겠다고 한 사람이었는데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할 것이냐? 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도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제를 현재로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부인한 것도 사실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분이 차려주시는 밥상을 먹으며 당신의 사랑에 품으로 불러주시는 넓으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 것도 진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느냐는 질문이 세 번이 반복됩니다. 쓰인 그리스어가 모두 다른 단어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한 때 그 세 개의 질문이 각각 다른 종류의 사랑을 물어본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 지나친 공상입니다. 단어가 다르게 사용되었어도 그것은 반복을 피한 어법이었고 결론적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이고 한 때 너희 스승이었던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것을 한 번씩 지워버리기라도 하시듯이 예수님은 세 번 같은 질문을 하셨고 베드로는 세 번 같은 대답을 하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진심이 의심받는 것 같아서 매우 슬픈 표정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모두 흘러가고 시간 속에 우리가 있다고 믿는 모든 것들은 사실은 나타났을 뿐이지 시간이 흐르면서 함께 사라져가는 것들이고 오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설교자와 듣고 있는 여러분 모두도 같이 사라져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 사랑하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역시 나타났다가 사라져가는 것들이고 손에 붙잡았는가? 하면 어느덧 그 손 사이에서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이 세상의 영광과 영화입니다. 공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사랑할 것을 제시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블레이즈 파스칼은 말하기를 ‘사람이 우주 공간을 바라보고 미치지 않는 이유는 이미 미쳤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설명을 해 드릴까요? 온전한 정신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노라면 끝없이 무한한 우주 앞에서 자신이 티끌일 뿐임을 깨닫고 자기가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뿌리가 없는 존재인지를 알면 미쳐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미쳐버렸기 때문에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친 사람은 두 번 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 나옵니다. 무엇을 위해 나오는 것일까요? 나오지 않는다고 벌 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교회에 나오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받을 수 없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목양의 유익입니다. 나오면 여기에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며 목양을 받고 여기서 목회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돌봄을 누리게 됩니다. 같은 형제자매들이 또한 자기를 돌보아 주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목회자와 상담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집에 슬픈 일이 생겼을 때 목회자들이 친히 심방하여 예배를 함께 드리고 말씀으로 권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연약한 여러분들을 격려하여 기도하게 하고 봉사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돕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전체는 목양이라는 말로 집약이 되고 목양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전도는 하나님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설득해서 사랑하게 만드는 게 전도이고, 목회는 이미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게 하기 위해 돌보는 것이 목회라고 정의를 내렸던 것입니다.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결코 사랑을 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우울하고 힘든 청소년기를 보낸 것은 여러분들이 사랑을 적게 해 주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 나이에는 모두 그렇습니다. 행복은 사랑을 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워서 자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아지 한 마리라도 너무너무 예뻐하는 사람은 결코 개를 두고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똑같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사랑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한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누군가가 개 한 마리를 길에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개는 특성이 주인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어디에다 개를 버리면 거기를 떠나지 않고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며칠이 지나도 주인은 돌아오지 않고 개는 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개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개를 유기시킨 그 사람을 아주 심하게 원망을 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런데 얼마 있다가 개 목줄에 뭐가 있는 것이 발견됐습니다. 목줄을 열고 보니까 깨알 같은 편지 한 장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 개의 이름은 무엇입니다. 나는 이 개를 너무 사랑해서 긴 세월 동안 나의 반려자처럼 함께 살아왔는데 제가 더 이상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없는 홀몸이 되었고 육체적인 질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돼서 국가에서 제공하는 보호시설로 들어가는데 개를 데리고 갈 수가 없어서 이 개를 남겨두고 떠납니다. 누구든지 이 개를 발견하시는 분은 나의 처지를 기억하셔서 가족처럼 따뜻하게 돌봐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할아버지 글씨고 꼬불꼬불하게 깨알같이 글을 쓴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개를 유기한 사람을 욕하던 그 사람이 편지를 읽고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개 한 마리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행복은 사랑을 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그 사랑을 가지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었던 질문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여러분들이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무어라고 답을 하시겠습니까?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 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 질문에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지금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희망을 가지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대부분 한 때는 불신자였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순간 천둥 치듯이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 때문에 예수를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이 치열하게 타오르는 불꽃이라면 죄는 그 배경이 되는 어두운 밤입니다. 대낮에 불꽃놀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밤하늘이 어두울수록 불꽃은 찬란하게 빛납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은 모두 한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큰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모세도 그랬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던 그 일의 증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오늘 모든 사도들과 함께 또한 그 증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신자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신성모독의 죄는 술을 마시거나 흡연을 하거나 혹은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자기를 구원하신 거룩한 하나님을 신성모독을 하기까지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구원받은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구원은 십 원보다 모자라는 구원밖에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정말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유 때문에 감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일상은 매 순간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실감이 나지 않는 마음이 되는 것이 정상적인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주님을 만난 순간이 있습니다. 저도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중학교 때 교회를 스스로 떠나 무신론자를 자처했고 전도하는 사람 없이 스물한 살 때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올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젖내 나는 얼간이 짓을 하고 주님의 이름을 표독스럽게 모욕하며 주님을 부인하는 이설들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을 교회 다니지 못하게 했던 나쁜 나였지만 곤고한 마음을 안고 찾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을 때 그분은 저를 받아주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경험일까요? 그것이 바로 용서의 경험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우리에게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예배의 감격이 있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이 믿는 형제들 속에 있어도 괜찮을까? 의심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구원하셨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늘 마음속에 생각나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무엇이든지 순종하고 싶었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가엾어 보였고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여러분들입니다. 그런 적이 없었다면 여러분들이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는 모두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요? 그 사랑이 내 마음속에 계속 머무는 것입니다.
(찬양)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 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오늘 밤새도록 고기잡이에 실패한 제자들에게 따뜻한 아침을 먹이시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주님이 오늘 허기진 여러분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의 음식을 떠먹이며 여러분들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회개하고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세 번을 질문하신 후에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리고 내 양을 치라. 모두 같은 의미의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부분 목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을 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유인 것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들을 목자로서 양을 돌보는 것처럼 자기들을 돌보아 주셨는지를 제자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돌보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영혼들을 돌보라는 말씀임을 명백히 알 수 있었습니다. 실패한 사람을 불러서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잘 살펴보면 20장에서 사실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20장 마지막 절의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자기를 믿게 하기 위함이요 이렇게 하면서 요한복음의 마무리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20장 마지막 절입니다. 아주 훌륭한 끝맺음입니다. 그런데 21장이 거기에 매달려 있는데 부록입니다. 이 부록은 넓게 보자면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 아주 좁게 보자면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부록이 매달린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베드로의 리더십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좀 더 넓게 보면 사도들의 지도력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21장이 없었다면 20장으로 끝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끝납니다. 거기까지 끝나면 복음서 전체에서 마지막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하고 도망간 걸로 끝납니다. 이상하게 그다음 장 사도행전 1장 2장에서는 도망갔던 배신자들이 교회의 지도자들로 등장합니다.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부인하고 멀리 떠난 사람들을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들이 될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지도력을 누가 인정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 모든 염려를 한 방에 해결해 준 것이 부록과 같이 매달린 요한복음의 마지막 21장입니다.
우리는 머릿속에 이런 그림을 그려봅니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더라면 아주 멋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채찍에 맞고 돌멩이에 맞고 칼에 찔렸는데도 예수님 십자가 아래까지 좇아가서 예수님 대신 나를 못 박으시오. 나 죽기 전에는 예수님을 절대로 못 박을 수 없습니다. 라고 외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더욱 때리고 찌르고 돌로 쳤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은 베드로를 메고 갔습니다. 알고 보니까 숨이 붙어 있었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제자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기까지 따르고 단 한 번도 부인한 적이 없는 단 한 명의 순결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할 만합니다. “너희들은 모두 주님을 부인했지만 봐라. 이 베드로는 단 한 번도 부인한 적이 없이 목숨을 모두 내어주기까지 하며 예수를 위해서 자기를 모두 버렸다. 그러니 이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에 담임목사로 삼고 너희는 모두 부목사가 되어서 이분께 순종하라. 베드로는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를 용서해 주노니 다시는 예수를 배반하지 말고 부목사 일이나 잘 하거라.” 이렇게 했더라면 우리는 영웅전을 보는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쳐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누구도 그럴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를 높이기보다도 절개를 지켰던 베드로의 용기를 그리고 그의 충성스러움을 더 높이 사서 베드로를 예수보다 더 높이게 만들었고 가톨릭에서는 그를 첫 번째 교황으로 여긴 것을 정당화하기에 훌륭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모든 제자들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으뜸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을 오히려 용서하셔서 예수님께서 사도로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실패하고 주님을 멀리 떠났던 우리들도 다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잃어버렸던 사명으로 다시 돌아가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에 있는 한 교회에 초청을 받아 주일예배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예배를 마쳤을 때 장로님과 목사님이 로마 구경을 한 군데 시켜 주었습니다. 거기가 꿔바디스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에 들어가니까 믿어지지는 않지만 베드로가 밟고 서 있던 발자국이 돌멩이 위에 찍혔는데 그것을 떠서 교회 강대에 올려놓고 베드로를 기리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가톨릭교회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로마의 박해가 너무 심해서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자기 제자들과 함께 불탄 로마를 등 뒤로 하고 급히 빠져나오고 있을 때였습니다. 건너편에서 한 분이 걸어오고 계셨는데 낯익은 분이었습니다. 주님이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한 질문이 ‘꿔바디스 도미네’ 였습니다. 라틴어로 주님이시여! 어디로 걸어가고 계시나이까? 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나는 네가 버리고 온 로마에 있는 나의 양떼를 위해 못 박히기 위해 가노라. 거기에서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통독하며 제 2의 회개를 했고 예수님 대신 로마로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죽었다는 것이 전승이고 예수님과 베드로가 만났던 지점에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과 다르지 않고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사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물들 가운데 이유가 없이 존재하는 것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설교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고, 저 꽃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고, 이 마이크는 나의 작은 목소리를 크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어서 모두 만들어졌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이유가 있어서 창조되었고 이 세상에 왔고 그 목적과 이유가 끝나면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거둬 가시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의 존재의 이유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살았지만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은 어제 죽은 사람보다 오늘 살아있는 것이 더 불쌍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죽는 것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인 것입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고 여기까지 발전해 오게 되었고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누군가 사명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돌보았기 때문에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잃어버리지 않고 여기에 살아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존재의 목적이고 사명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사명을 무엇입니까? 잠시 주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던 사명이 있다면 오늘 그것을 회개하며 발견하십시오. 거기에 여러분들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의 불안과 불만족 고통은 여러분들이 사명의 자리를 떠난 때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다시 한 번 사명을 맡기는 예수님을 만나고 생명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