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하는 삶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창 8:20)
녹취자 : 장미연
이 장면은 노아의 홍수가 모두 끝난 다음에 일어난 광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디어 이제 깊음의 샘이 닫히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가 멎었습니다. 서서히 물이 빠지고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방주에서 나오게 된 그 때에 제일 먼저 노아가 무엇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예배하는 삶입니다. 노아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은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제단은 짐승을 잡아서 죽이기 위한 제단이었겠지요. ‘미즈베아흐’라고 하는 그 히브리어가 ‘자바흐’ ‘죽여버리다’라는 동사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제단을 쌓은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죽고 자기 가족만 살아남은 상태에서 첫 번째 한 일이 제단을 쌓은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 배우는 일은 신자의 삶. 하나님 자녀의 삶은 수시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어야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건 생활은 개인 예배이고 공적으로 드리는 집회는 공적 예배입니다. 사적인 예배를 잘하는 사람들이 공적인 예배에 은혜를 받고 공적인 예배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돌아가서 풍성한 사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우리들이 경건 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성경을 읽으면서 내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훌륭한 예배입니다. 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훌륭한 예배입니다. 그 때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세상으로 향하던 우리의 마음을 잘 가다듬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개인 경건의 생활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없습니다. 이유는 뭐냐하면 개인적인 예배 생활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조금씩이라도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은혜를 갈망하는데 그 은혜가 끊어지고 세월이 길게 흘러버리면 갈망까지 함께 사라져버립니다. 죄는 우리한 마음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결코 우리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 생활에 질력이 나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 개인의 경건 생활을 잃어버리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뿌리가 잘린 식물같이 번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생활이 우리에겐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걸 조용히 묵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온 천지가 물로 가득하고 방주하나 둥둥 떠 있는데 그렇게 하면서 정말 오랜만에 육지를 밟아본 것입니다. 그리고 집짐승과 모든 것들이 내린다고할 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다 물에 잠겼었는데. 물에 잠겼다가 드러난 그 땅을 축축한 땅을 밟는 그 느낌을 생각해보십시오. 제사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예배드리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예배드리기에 적합한 환경이라는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을 때에든지 나쁠 때에든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공적으로 가정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속에서 끊임없이 주님을 크고 작게 만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할 때에는 제일 먼저 자기가 어떻게 기도한 후부터 기도할 때까지 살아왔는지를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진솔하게 아뢰는 것입니다. 다른 기도제목에 앞서서 먼저 그것을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어제는 정말 힘든 하루였습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님도 아시지요? 제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생각나지 않는 하루였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짧게라도 기도하고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래야 예배가 되는데 그냥 잊어버린채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다가 뭔 일이 있어서 하루 기도 건너뛰고 말씀 건너뛰면 그 다음 날 지나가고 며칠 지나가고 나면 내가 진짜 하나님 앞에 기도생활을 하던 사람인가? 잊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새겨야될 것이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라.
두 번째는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제단을 쌓은 다음에 준비한 것은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했습니다. 그것으로써 하나님을 제사하는 것입니다. 제단만 쌓아놨어도 만약에 제물이 없다면 제사가 되지 않겠지요.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 생활을 통해서 제일 기쁘게 받으시는 헌신은 나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드린 사람은 나머지 물질적이고 이런 것들을 헌신하는 것들은 그냥 따라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은혜를 많이 받고 처음 회심했을 때 제일 교회에 나가면 서러운 게 내가 주님께 드릴 게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돈도 없고 특별히 재능도 없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제물은 상한 심령입니다. 개인적인 예배나 공적인 예배 속에서 자기의 마음을 주님 앞에 드리고 그 마음을 임마누엘 샘에서 그 피로 씻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순수한 삶의 동기, 순수한 인생의 동기, 순수한 사역의 동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그 피에 자신의 심장을 담구어 그래서 나의 피는 씻어내고 주님의 피로 적셔져서 그것이 오늘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이유가 되고 오늘 하나님 앞에 숨 쉬는 이유가 되고 오늘 내가 무엇인가 꿈질거리면서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는 이유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의 수고를 그치고 잊는 내게 오라.” 할 때에 그때에 기쁘게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은 제사를 드린다라고 하는 그것은 제물을 죽이잖아요. 자기가 기르던 양, 자기를 다 알아보는 그것이 죽임을 당할 때 비참하게 피를 흘리고 죽어가잖아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이 메멘토 모리입니다. 네가 죽어야 할 존재임을 알아라.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제사 드릴 때마다 그 제물이 황소든 작은 양이든 더 작은 비둘기든 간에 어떻든 죽임을 당해야 하잖아요. 그 피를 보면서 짐승이 죽을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죽을 존재라고 하는 것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것 아니에요? 그리고 정말 바람직한 죽음이라는것은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병으로 죽든가 사고로 죽든가 그런 일은 없어야되겠지만 다른 살해당하든가. 그 서너가지중에 하니입니다. 어느것도 우리에게 바람직한 죽음이라는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족들에게 충분히 유언을 남기고 아프지는 않고 그리고 물위에 떠내려가듯이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싶어하지만 뜻대로 되는 사람은 정말 희귀합니다. 결국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에 끊임없이 의미를 연결시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삶이 그렇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먹고 입고 그리고 내가 오늘 생활하고 마지막에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죽음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죽음 위에 누가 계십니까? 죽음은 하나의 문과 같은 것입니다. 이쪽 방에 있다가 저쪽 방으로 문을 열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만날 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거기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추스르면서 믿음으로써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첫 번째는 예배를 드리고 두 번째는 자신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번제물로 제물을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제사를 받아주신다는 표현을 흠향하신다고 표현합니다. ‘흠향’이라고 하는 것은 향기를 맡는다. 향기를 받아준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맨 처음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습니다. 각기 자기의 수확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벨과 그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과 그 제사는 거절하셨다고 했습니다. 제사와 헌제자는 떼어놓을 수 없이 하나로 묶여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받아들여지지않고 헌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아니라면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는 결국 삶이 묻어있는 제사입니다. 삶이 묻어있는 제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서 살려고하는 일주일동안의 삶이 묻어있는 제사. 예배. 그걸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이 그 예배를 흠향하실 때 그 향기를 받아주실 때. 그 때에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받아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받아드려진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무한한 친교속으로 들어간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무섭겠습니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것이 예수님이 어떠한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예배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이 그 제물의 향기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헌신을 주님이 그 향기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 제사가 연랍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단점을 열거하자면 한 두가지가 아니겠지만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하나님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니까 예배 속에서 마주해야하는 하나님이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분입니다. 낯설어요. 친밀감이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 지겨워서 조는 겁니다. 졸고 그렇지 않으면 멍하게 눈뜨고 딴생각을 하고 전혀 말씀이 그 마음속에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게 되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헌신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받으실만한 향기가 없습니다. 그런 삶이 계속 수레바퀴 도는 것처럼 도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내가 이런저런 직분을 맡고 바쁘게 돌아가지만 그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고 말은 하지만 진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마음을 싣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예배의 실패는 우리 자신의 삶의 실패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너무너무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노아의 이 태도가 이후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여기를 시작으로해서 “단을 쌓았더라. 단을 쌓았더라. 단을 쌓았더라.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더라.” 수없이 나옵니다. 이게 결국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 사람들이 자기의 육정을 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그 충만해진 사랑으로 자신을 드리고 하나님이 그를 받으시고. 그게 오늘날 신약의 용어로 말하자면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런 영적인 아주 극도의 민감함을 가지고 그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두려울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무엇과도 작별한 준비가 되어있고 사도바울이 말했듯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 좋은 사람인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모든 태어난 사람은 모두 자라게 되고 자란 사람은 늙게 됩니다. 늙은 사람은 죽게 됩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늙지 않을 줄 알고 늙은 사람들은 자기가 죽지 않을 줄을 알지만 그러나 결국은 젊은 시절이 없던 늙은이가 없고 죽은 사람 중에는 태어나지 않았던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흘러갑니다. 모두 변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가 그런 변함없는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노아가 우리에게 홍수 이후에 보여주었던 삶입니다. 사실상 인류의 실질적인 첫 번째 조상이 된 것 아닙니까?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 모두다 멸망하고 하나님이 노아를 선택하셔서 새로운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하며 헌신하며 주님 앞에 열납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