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양을 먹으라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출12:7-11)
녹취자: 김경애
애굽 전역을 뒤흔들어 놓은 전대미문의 재앙이었습니다. 9개의 재앙이 펼쳐졌는데도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들이 죽는 재앙이 있고서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바로 그 직전에 죽음의 사자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어린양의 규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어린양을 잡아서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그것을 보고 이스라엘을 피해 갈 것이고 그것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증거를 삼고 애굽을 탈출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은 ‘어린양을 먹으라.’입니다. 피만 바르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 피만 바를 뿐만 아니라 그 어린양을 먹어야 했습니다. 애굽에서의 마지막 식사였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단순히 피만 바르는 것이 아니라 그 어린양을 모두 불에 구워서 먹고 출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과 연결을 지으면 아주 심오한 의미가 이 안에 담겨있는 그리스도 예표론적인 구절입니다.
제일 먼저 고기와 함께 먹을 것이 나오는데 무교병이 나옵니다. 무교병이라는 것은 누룩이 없는 떡입니다. 그 누룩은 곰팡이의 일종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집어넣으면 말하자면 녹말을 당으로 바꾸어주는 효과를 냅니다. 그래서 아밀라아제나 이런 성분을 만들어내면서 술을 담그는 데도 쓰고 빵을 만들 때 그것을 넣어서 만들면 이것이 부풀면서 훨씬 더 먹기 부드럽고 식감에 좋고 몸에도 좋은 요리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 누룩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인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묵은 누룩을 말씀하시면서 당시 사람들이 믿던 잘못된 구약의 교훈들, 구약을 올바로 믿었으면 괜찮은데 구약을 잘못 믿고 있는 교훈들입니다. 핵심을 짚자면 구약을 오해했기 때문에 거기에 담겨진 내적인 생명은 상실하고 형식만을 고집하는 것을 묵은 누룩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누룩은 악한 누룩이라고 부르셨는데 여기에서 누룩의 의미는 단순한 교훈이나 신앙의 양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악과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5장 8절을 보시면 이 의미가 명백해집니다. 5장 8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그래서 앞에 나오는 묵은 누룩은 구약을 오해한 형식주의를 가리키는 것이고, 뒤에 나오는 누룩은 죄와 악이 섞인 행동이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해서 예수가 유월절에 죽으시는데 구약의 명절을 지킨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지켰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맞이하는 새로운 유월절은 이런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형식과 구태의연한 형식에 매여 있는 그런 누룩을 버려서 영적인 누룩이 되고 악의와 죄가 없어서 순전하고 아주 진실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이 모든 삶에 펼쳐지게 하자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가르쳤던 복음과 인간의 윤리적인 삶의 관계입니다.
결국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 사람들이 늘 무교병을 먹는 것은 아닙니다. 유교병을 먹는데 특별한 날에 무교병을 먹음으로써 이제 자신들이 늘 익숙해져 있는 오류와 악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순결한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믿는 순간 칭의가 우리의 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그 예수를 먹는 삶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먹을 때 예수만 먹는 것이 아니라 무교병과 함께 먹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렇게 형식과 구태에 매여서 실질을 양보하는 삶이어서도 안 되고 또 악과 죄에 물들은 혼탁한 삶이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는 우리들이 복음과 구원이 주는 진정한 영적인 유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모든 사람은 오직 순전함과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말과 삶과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진실하고 그렇게 순전한 삶이 되려고 노력할 때 그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를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삶을 적당히 살고, 죄 지을 것 짓고, 우리의 마음가는대로 살면서 영적인 충만한 예수의 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것을 버리는 것이 불편하다면 그만큼 내가 아직 순전한 무교병과 함께 예수를 먹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원리가 예수의 피를 우리의 마음에 바르고, 두 번째 원리가 누룩이 없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벽하도록 죄 없는 삶을 살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리들이 죄인 줄 알고 죄를 짓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없어서 죄에 빠지지는 말자. 그리고 고집스러워서 죄인 줄 알고 죄의 길에 머물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예수의 생명을 우리들이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쓴 나물입니다. 이 나물은 그야말로 나물입니다. 그래서 잘라다가 식용으로 삼거나 무치거나 혹은 굽거나 볶거나 해서 먹을 수 있는 식품이 식물입니다. 이것은 욥기 30장 4절에서 보면 이 나물을 먹는 것은 아주 궁핍한 삶의 표본입니다. 그리고 잠언 37장 27절에 보면 이 나물은 본질이 풀입니다. 그래서 하찮음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떠나기 직진에 그냥 나물이 아니라 쓴 나물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쓰디쓴 나물입니다. 씀바귀, 고들빼기 등은 봄에 먹으면 미각을 돋우는데 아주 도움이 됩니다. 굉장히 씁니다. 거기에 새콤달콤하게 양념을 해서 먹으면 입에 침이 돌면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미각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왜 쓴 나물을 먹으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반추와 전망입니다. 반추는 무엇이냐 하면 그냥 쓴 나물을 먹으면서 애굽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난의 연속이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쓴 나물을 먹으면서 이 사람들이 앞으로 만나게 될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를 여행하며 가나안 복지의 복된 땅에 이르기 전까지 많은 고난을 거쳐야하는 것을 하나님이 전망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쓴 나물을 먹으면서 무교병을 먹으면서는 일체의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살아야한다는 자각을 얻고, 쓴 나물을 먹으면서는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이 너무 쓰라리고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회상하여야 했습니다. 앞으로 될 일은 아직 이스라엘 백성이 겪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떠난다면 꽃길만 걸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이 쓴나물을 먹여주심으로써 그것을 예고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양고기를 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이한 것은 물에 삶으면 안 되고 내장부터 머리, 다리까지 다 불에 구워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고난과 함께 그렇게 구운 것을 자신들이 먹으면서 결국 자신들도 그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요소는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먹는 자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이것은 밖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제껏 살았던 집에서 신발을 신고, 띠를 띠고, 그리고 지팡이를 잡고 곧 떠날 차비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그 집에서 양고기를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 애굽을 버리고 떠나가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말하자면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살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혜 없는 사람은 인생을 빛으로 해석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을 죽음의 빛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사람의 자각이 생기면서부터 삶에 대한 지혜를 갖게 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지 아마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의미를 묻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리고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이 현실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결국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으로 갈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갔을 때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지를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며 그리고 우리가 그런 대답을 준비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천국에 대한 소망, 때로는 세상에 대한 하찮음을 함께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슬픈 일에 너무 슬퍼하지 말고 기쁜 일에 너무 기뻐하지 말고 우리의 신앙이 이 세상을 잠시 지나는 순례자의 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차림을 하고 드디어 고기를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 요한복음 6장 55절에서 57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53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는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떡을 가지고 말씀하시지만 여기서는 고기를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서 성찬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떡과 포도주를 우리들이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먹고 나면 그 다음에 떡과 포도주가 비유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에게 떡은 간식입니다. 그리고 포도주는 그야말로 가끔 먹는 음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포도주는 물이었고, 떡은 그 사람들의 밥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것은 밥과 물입니다. 그것 없이는 생명을 지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씹고 먹으면서 그것이 몸 안에서 흩어진 다음에 찌꺼기가 소화되고 난 다음에는 우리 몸의 어디에도 밥알도 없고 물도 없듯이 그렇게 떡과 포도주는 먹은 그 사람 속에서 에너지가 되고 생명이 되어서 그와 일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떡을 먹지 아니하면 예수의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먹으라고 하신 이유는 그 비유가 마치 우리들이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나면 그것이 모두 용해되고 우리 몸에 흡수되어서 우리 자신과 구별이 안 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가 우리 속에 스며들어서 나와 일체의 삶을 살게 되는 것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하나님의 자녀의 신비로운 일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생명의 일치입니다.
핵심을 이야기하자면 결국 여기의 모든 것의 핵심은 양을 먹는 것입니다. 어린 양을 먹는 것입니다. 그 어린양을 먹는 것은 결국 그 양이 우리 안에 다 소화되어서 음식이 우리에게 음식의 찌꺼기는 모두 사라지고 에너지는 남아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처럼 예수가 그렇게 우리 안에 살게 하시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영적 생활입니다. 예수를 매일 매일 먹는 삶. 그래서 나 혼자 살았더라면 도저히 내가 가질 수 없는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위한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복음적인,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생활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 세상에서 무슨 업적을 이루고 살고 또 무슨 커다란 성과를 남기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 자체는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생명입니다. 큰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생명이 역사해서 예수를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린양 예수를 먹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먹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그 예수를 먹고 배부르고 그 예수를 먹고 힘을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예수의 살점이 어디에 남아 있으며 예수의 피가 어디에 남아있습니까? 결국 이것은 영적으로 해석되는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께서 그의 영혼에 떡과 고기를 주셔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사셨을 삶을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위로가 나오고 용기가 나오고 거친 세상을 살면서도 잠시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야하는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교병과 함께 우리 앞에 상이 차려져 있는데 무교병을 보면서 우리가 일체의 진실함과 순전함으로 살아야하는 사람입니다. 옆에 있는 나물을 보면서 밥상에 올라와있는 나물을 보면서 우리가 주님 없이 살아온 날들은 쓰라린 날들이었고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는 삶도 때로는 고난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 구워진 양고기를 보면서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구나!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최고의 보답이 내가 그분을 먹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예수를 먹고 내가 힘을 내어 예수의 분신이 되 사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차려진 유월절 식탁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현실이 무겁고 힘들다고 하지만 결국 진짜 힘든 것은 예수가 없어서 힘든 것입니다. 예수가 충만하게 계신 사람들은 순교의 길을 가면서도 기쁨으로 가득 찼는데 결국 현실이 힘든 것은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우리의 믿음이 약해진 것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정말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식탁입니다. 그래서 무교병 한 접시와 쓴 나물 한 접시, 그리고 구운 어린 양을 밥상에 놓고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취하여 먹으면서 그 맛없는 무교병을 먹으면서는 진실과 순전함을 배우고, 쓴나물을 먹으면서는 이 쓰디쓴 나의 인생길을 걸어오게 하셨던 앞으로도 걷게 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어린양을 먹으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또 이것을 먹음으로써 내가 살 수 있다는 소망을 하나님 앞에 갖는 것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도 어려워도 예수가 내 안에 충만히 계시면 나는 능히 살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살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세 가지를 차려서 성도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목회입니다. 그러니까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담긴 음식을 어린양의 식탁에서 충만히 먹은 목회자가 힘을 내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 순전하고 진실한 사람, 그리고 걸어온 인생길을 많은 고난 속에서 살아오고 그 고난 속에서 자기를 붙들어 주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 그 사람이 똑같은 식탁을 사람들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그 일을 위해 교회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경회를 앞두고 여러분들이 마음속에서 동그란 밥상을 하나 그리십시오. 그리고 무교병을 보면서 ‘내가 진실하고 순전해져야지!’ 쓴 나물을 보면서 ‘어차피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주님의 은혜가 나를 붙들어주셨다.’ 구운 양고기를 생각하면서 ‘어린 양 예수가 나를 위해 죽임을 당했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아서 자기 살을 모두 찢어 우리에게 먹여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힘을 얻고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살 수 있는 힘 있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위로와 용기를 얻으면서 예수를 바라보며 예수가 우리에게 밥이 되신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밥이 되며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그것이 신자의 영적인 삶입니다. 사경회는 이 일을 위해서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먼저 이 식탁을 충만히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