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알이 죽을 때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녹취자: 배미라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 몇이 예수를 뵙기를 원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소식을 전하는 제자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연결되는지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오늘 말씀은 아주 분명합니다. ‘당신의 때가 가까웠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유명한 말씀 ‘아멘 아멘 레고히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잘 살펴보면 그 당시에 널리 사람들이 농사를 짓던 밀을 예로 드셨습니다.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을 얼핏 보면 정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 같지만, 그러나 감감히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콩이든지 곡식들을 보면 씨눈이 있습니다. 쌀에도 맨 끝에 쌀눈이 붙어있고, 밀에도 밀 눈이 붙어있고 두 쪽으로 쪼개지는 콩 같은 것은, 땅콩같은 것은 두 개로 벌려보면 속에 작은 이파리 같은 것이 나와 있는데, 그것 역시 씨눈입니다. 그리스어로 ‘스페르마타’라고 합니다. 그것을 배종이라고 부릅니다. 배, 배아라는 말입니다. 배종이 다 죽어버리면 그 열매를 맺을수가 없습니다. 다 죽는 게 아니라 그 배종만 살고 나머지 것들이 죽을 때에 그 배종이 나와서 그것이 큰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쌀 한 알을 심으면 몇 알갱이쯤 나올 것 같습니까? 종류별로 다르지만 어떤 종류는 2300개에서 2700개의 알을 맺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농사를 짓고 부자가 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장사나 사업이나 2000배 3000배 남는 장사가 어딨겠습니까? 그런데 어쨌든 떨어져서 그렇게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은 이스페르마타라는 배종이 일종의 로고스라고 봐왔습니다. 그래서 ‘그 로고스가 있고 그 로고스가 풍성하게 번성해서 열려진 것이 바로 이 세계다’이렇게 본거죠. 그것을 요한이 그 사상을 차용하다가 로고스이신 예수님을 설명하는데 이런 설명방식을 사용하는 것이죠.
결국 무슨 뜻이냐하면 겉으로 보이는 우리 안에는 ‘나’라는 걸로 이렇게 되어있는데 내 안에 스페르마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로 말하자면 ‘나’를 참으로 ‘나’로 되게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하자면 ‘내 안에 있지만 내 것은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이고, 중생한 사람을 요한복음 혹은 바울신학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내 안에 있는 예수입니다. 그게 내가 있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혹은 ‘내 안에 있는 예수’가 있는데, 이게 곡식이 땅에 떨어져서 죽습니다. 땅에 떨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습기, 온도, 습도, 영양 이것이 꼭 맞지 않으면 싹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맨 처음 씨눈이, 밀의 눈이 땅에 떨어졌을 때 이 밀의 눈은 스스로 땅의 성분을 빨아들여서 영양으로 만들어서 자기를 성장시켜줄 자원으로 삼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밀이 땅에 떨어지면 적당히 여기 히랍어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땅속으로’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땅에 똑 떨어진 게 아니라 땅을 파고들어가서 아예 묻힌 겁니다. 그러면 무슨일이 제일 먼저 일어나냐면 습도와 온도가 맞으면 이제 한 알의 밀이 썩기 시작합니다. 거기에서 양분이 나오는 그것을 먹고 그 밀의 씨눈이 그 양분을 자양소 삼아서 성장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밀의 대부분이 습기와 온도의 딱 맞춰서 썩기 시작하면 여기서 영양가 있는 국물을 만듭니다. 이 끝에 달려있는 눈이 그거를 빨아먹으면서 여기서 생명의 작용을 하면서 이게 싹이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바깥에 있는 많은 대부분을 차지하는 커다란 밀 덩어리는 씨눈을 키우기 위한 양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만약에 씨눈을 다 떼어내고 땅에다가 몇 트럭을 뿌려놔도 그건 그냥 썩는 냄새만 나지 거기서 절대로 밀이 나오질 않습니다. 한 알의 밀의 존재의 목적은, 그 밀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밀 눈을 싹틔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게 죽는 것입니다.
만약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이 씨눈이 매달린 모든 밀 알갱이 하나 전체가 방부처리가 되어서 그래서 어떤 사유로든지 어떻든 이게 썩지 않는다, 이 밀 덩어리 자체는 생명을 가진 게 아닙니다. 이 알갱이 자체는 생명을 가진 게 아닙니다. 씨눈이 생명을 가진 것이지 이 자체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이유로 안 썩습니다. 그러면 이 안에 있는 밀 눈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런 오묘한 이치가 이 안에 함께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나, 불신자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나, 신자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나 아주 오묘한 이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현상에서 모든 생명을 누리는 피조물들은 다른 생명을 파괴하면서 그 생명을 생명력을 확장해 갑니다. 그게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모든 살아있는 남아있는 원료가 되는 많은 것 들은 전부다 죽은 것들입니다. 나무가 잎이 떨어져서 그래서 그 나무가 마르고 떨어져서 이 생명에서 끊어져서 마르고 부패하고 썩으면서 기름진 부엽토가 되고, 동물들이 죽은 사체들이 이렇게 쌓이고 곤충들이 죽어 쌓이고 썩으면서 이제 유기물이 되면서 생명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 여기서 보다시피 한 알의 밀도 몸통 자체가 썩으면서 한 알의 씨눈을 틔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아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도저히 길게 자라서 수백 알 수천 알을 맺고 있는 밀대와 밀 한 알을 비교할 때 이것(밀대)이 이것(밀알)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변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결국 우리가 죽어야 될 것은 그냥 단순한 육체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뒤편을 보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여기서 후시케라는 단어인데 ‘생명’으로 번역될 수도 있고, ‘영혼’으로 번역될 수도 있고, 혹은 ‘삶’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무엇이 가정 적합한지 확정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명쾌합니다. 아주 명확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생각해보더라도 우리의 영혼은 하나의 영혼으로 되어있지만, 그 영혼에는 아주 고등한 기능이 있고 하등한 기능이 있습니다. 최고의 고등한 기능은 하나님을 믿고, 알고, 사랑하는 기능입니다. 하등한 기능에는 그야말로 동물적으로 육체를 통솔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영혼의 기능입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여기에서 이것은 만약에 ‘영혼’으로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 영혼 전부를 잃어버린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우리의 영혼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부분, 그런 힘과 경향성들이 우리의 영혼에 많이 있는데, 이것들을 만약에 우리가 사랑하면 그래서 우리가 끝까지 집착하고 이것을 위하려고 할 때에 그때에 우리는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거다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결국은 말씀하고자 하시는 핵심이 이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바와 같이 이것은 우리의 육체, 육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영혼 중에서 우리의 육신을 위하는 그런 육욕적인 부분을 사랑할 뿐,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를 닮은 그 형상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되다가 보니까 결국은 그렇게 사랑했지만 결국은 죽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그런 말도 합니다. ‘사람이 육체와 영혼을 함께 사랑하지 않고, 육체만을 편애하게 되면 그는 필연적으로 진리의 빛으로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진리의 참된 빛이야말로 우리가 영혼과 떨어진 육체만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보면 나는 이것을 세가지로 적용해보고 싶습니다. 우선 하나는 우리의 성화와 관련해서,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의 공동체와 관련해서, 세 번째는 우리의 목양과 관련해서입니다.
우선 첫째로,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성화와 관련해서 이야기해보자면 결국 다가오는 한 해 동안에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할 진리는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다는 것, 내 안에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내가 너무나 많다는 것, 그것이 썩고 죽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고 원하시는 나의 영혼이 충만하게 살지 못한다는 것, 사도 바울의 용어로 말하자면 로마서 8장 12절과 13절에 나와있는것처럼 “너희가 만일 영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이지 아니하면” 그 말과 같이 죽지 아니하면 그러면 우리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년 한해를 바라보면서 우리들이 잘 자기 안에 있는 영혼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나’는 죽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는 살게 하는 그런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성화의 삶이고 근본적으로 신앙생활을 뜨겁고 열렬하게 잘 해야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이에요. 그래서 목회자에게 자기 깨어짐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많이 깨트려진 사람들은 결국 많이 그 밀이 죽은 사람이고, 그 밀이 죽는 것만큼 정확하게 밀의 눈은 생명을 잉태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놀라운 밀의 씨앗을 맺는 밀대가 되는 것이니 여러분들이 자신은 많이 죽고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공동체적으로 이것을 적용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공동체적으로 적용하면 항상 공동체는 누가 모인 곳이든지 욕망과 자기의 욕심이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건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결국 자기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성취하려는 사람과 욕망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람들 사이에 항상 분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 안에 일부 10%나 20%만큼이라도 그 욕망을 억제하고 그 공동체가 잘 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려는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안 죽습니다. 폭발하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안죽으려고 할 때입니다. 그럴 때에 죽는 것입니다. 그게 암에 대한 설명입니다. 뭔가 변이가 일어나서, 세포자체가 약 60조개 정도로 되어있는데 세포는 6개월 이상 살아있는 세포가 없습니다. 뇌세포는 한 번 죽으면 영원히 없어지고 나머지 세포는 죽으면 다시 살고 살면 죽고 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우리의 인체의 생명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거 보면 니체가 세계와 인간을 설명할 때에 끊임없는 죽음과 생명, 모순과 갈등에 의해서 이 세계는 존재하는 것 같고, 굴러간다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가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죽습니다.
세포의 자살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생물학적으로, 그 아포푸토시스의 죽음이 있고 네크로시스의 죽음이 있습니다. 네크로시스는 타격을 당하거나 뭔가 세포에 질병이 들거나 결함이 생겨서 죽는 겁니다. 세포의 사멸입니다. 그런데 아포푸터시스의 죽음은 아직까지도 설명이 안됩니다. 그 기전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생명이라는 게이지로 보면 아직까지 충만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세포가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세포가 스스로 죽습니다. 그게 아포푸터시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으면 죽을 때 내는 화학에너지를 가지고 옆에 있는 세포에 전달을 하면, 옆에 있는 세포는 그거를 말하자면 에너지로 사용해서 세포가 분화하고 성장하는 그런 동력으로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세포에 변이가 와서 아무 세포도 안 죽겠다고 버티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죽으려니까 어떻게 되냐 하면 끊임없이 영양분과 세포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원들을 다른데서 빨아들여와야 합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빨아들이면서 세포가 안 죽으려하고 그 근처에 있는 세포는 이 안 죽으려고 하는 세포에 감염이 돼서 자기도 안 죽겠다고 버티면서 뭉치는 것입니다. 그게 의학적으로 암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충만한 생명력이 사람을 죽음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공동체적으로 적용을 하면, 아무도 안 죽겠다고 버티는 공동체는 그게 암세포처럼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공멸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집안에서도 아빠가 바람피고, 애들이 불량배가 되고 또 뭐 딸이 나가서 나쁜 짓을 하고 콩가루 집안이 돼도 엄마 한사람이 탁 신앙으로 버티고 있으면 시간이 좀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 자식과 남편들이 다 돌아옵니다. 그 남편이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허탄한 짓을 하고 애들이 방황하고 그래도 아빠가 딱 지키고 앉아있으면 한 사람 한 사람 돌아올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집안에 하나도 없을 때, 뿔뿔이 흩어져서 죽을 때까지 못 만나는 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면서 우리는 항상 두 가지 고민을 함께 해야되는 겁니다.
‘내가 참 주체성을 가진 인간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책임감 있게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것과 또 하나는 ‘내가 가족을 비롯해서 사회의 공동체,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내가 적절한 시간에 잘 살고, 잘 죽을 수가 있을까’ 그거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를 자기를 위해서 살고 죽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 나라에 있을 때 그건 간신이 되고 교회에 있을 때 배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하나님 앞에 살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 죽음이 필요할 때 그때에 내가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목회적으로 이것을 적용하자면 결국 이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는 ‘씨눈’이고 밀의 씨눈이고 우리는 밀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은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고 희생시키셔서 그래서 교회의 밀눈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양떼들의 생명을 잉태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밀의 알갱이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죽고, 성도는 살아야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도 한때 그렇게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교회 다녔지만 사실상 불신자이고, 믿기는 했지만 영혼의 변화를 받지 못해서 싹 틔우지 못한 밀의 눈 같았는데, 성도들을 사랑하는 목회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다 버리듯이 나를 사랑해서 고난을 받고 기꺼이 자신을 ‘나를 위한 희생의 제물’로 바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썩은 그 물을 자양분으로 삼아서 그 자양분을 도구 삼아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주시고 성령을 주셔서 나를, 죽었던 나를 살리시고 보지 못했던 나를 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 할 수없이 놀라운 은혜와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 안에 살아계신 이 주님이 나의 행복이신데 이 주님이 내가 그렇게 할 때에 가장 기뻐하시고 충만한 사랑과 은혜의 영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주십니다. 그러니까 사실 자신이 썩을 단계에 온 사람은 이미 자신의 행복과 이웃의 행복이 나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양떼가 주님을 만나서 우리의 목양을 통해서 양떼가 주님을 만나고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누렸는데, 그 행복에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은 목자도 아닙니다. 심지어 같은 지체라고도 말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원하는 바는 내가 사랑하는 지체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혼의 변화와는 관계가 없는 일들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으나, 육으로는 육을 좇아 사는 사람이니 그 육의 소욕에 메어있는 그 사람이 어떻게 그런 영적인 기쁨에 동참할 수가 있겠어요. 영혼이 병들어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목회자가 죽는 것만큼 목양을 하는 사람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만큼 영혼들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그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기쁨을 누리고 열매를 맺으며 자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눈물을 먹고 우리의 기도를 먹으면서 겨우 싹을 틔운 그들이 결국 은혜가 충만해져서 또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한 알의 밀을 자처한 삶, 이것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해가는 방식입니다. 결국 목양적으로 적용해보자면, 우리의 가장 큰 숙제는 우리가 깊이 주님을 만나고 양들의 영혼에 변화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섬기든지 간에 항상 그 정신을 가져야됩니다. 교회에서 책을 만들든지, 영상을 만들든지, 쓰레질을 하든지 아니면 그 세면대를 한 번 수건을 닦는다 할지라도 이렇게 해서 나는 죽고 나는 한 알의 밀이니 내가 죽고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그 싹이 밀 눈이 살아나듯이 나는 죽고 성도들이 그렇게 살게 될 때 내 안에 있는 진정한 나, 예수 그리스도도 함께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죽으면서 남을 살리는 사람의 행복은, 남이 죽은 댓가로 자기가 살아가는 사람의 행복에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행복과 기쁨을 충만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심오한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친히 모본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고난은 그 밀을 위해서 그 한 알의 밀의 눈을 위해서, 죽어가는 그 밀알 전체를 보여주신 것 중에 핵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 밀의 눈을 위해서 밀 자신이 죽는 정신을, 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때부터 마지막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 모두 보여주셨고, 그 정신이 핵심적으로 함축된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은 죽음을 선고받으시고 실제로 자신을 받쳐 죽음에 내어주신 사건이 바로 그렇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얼핏 보면 자신은 죽고 남은 사는 것 같으나, 사실은 남도 살리고 자신도 살리는 것이니 그래서 예수는 죽으심으로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 한해를 마감하며 내년 한해를 맞이할 때에 여러분은 이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기십시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육체를 누린 ‘나’는 모두 소멸하고 부패하고 사라져가고 주님을 사랑하는 내 마음의 스페르마타만 남는 것이니,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사셔서 나의 육체를 도구삼아 당신이 하실 그 모든 위대한 일들을 이루며 지나가시도록 그렇게 자신을 드림으로 주 앞에 칭찬 받고 여러분도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