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2018년 가을말씀사경회&주일오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8년10월22일-12월16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9년 2월 21일
목 차
1.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 10:12) 2018.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2. 하나님만 의지하라(호 10:13-15) 2018.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3
3. 사랑의 줄로 이끄심(1)(호 11:1-4) 2018.10.24.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25
4. 사랑의 줄로 이끄심(2)(호 11:1-4) 2018.10.25.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35
5. 불붙는 사랑을 알자(호 11:5-8) 2018.10.28 주일오전 45
6. 다시 돌아오게 하심(호 11:9-11) 2018.11.4 주일오전 53
7. 기다리시는 하나님(호 5:15) 2018.11.11 주일오전 62
8. 때리시고 어루만지심(호 6:1) 2018.11.25 주일오전 70
9.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호 6:2) 2018.12.2 주일오전 78
10. 신실하고 복 주시는 하나님(호 6:3) 2018.12.9 주일오전 86
11.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2018.12.16 주일오전 93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1 2018. 10. 22 가을말씀사경회 첫째날 저녁
< 묵은 땅을 기경하라 >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 10:12)
I. 본문해설
- 이스라엘이 분열된 지 약 150년 후 북왕국의 선지자로 부름 받음.
-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번영기에 선지자로 소명을 받았음.
- 북왕국 이스라엘은 번영할수록 신앙에서 멀어져 갔음.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호 10:11)
- 에브라임은 북왕국의 애칭. 영적으로 번성하던 시절을 회상함.
- but, 언약을 배반하고 앗수르에게 패망할 것을 예언함.
- 지금은 묵은 땅이지만 한때 소출을 내던 땅이었음.
- 묵은 땅은 처녀토가 아닌 풍성한 소출을 내던 옥토였음.
- 우리 마음밭은 모든 삶과 섬김을 수확하는 땅이다.
II. 묵은 땅을 기경하라
- 세속적으로 번영했으나 신앙에서 멀어짐.
-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자비와 공의를 버림.
- 이스라엘의 예전 신앙은 묵은 땅과 같이 되어 버렸음.
A. 묵은 땅을 기경하라
- 기름지지만 버려두어 잡초가 무성하게 된 땅을 일굼.
- 다시 경작하기 위해선 그 땅을 기경해야 함.
a. 무성한 잡목들을 태워 버림.
b. 그 뿌리들을 모두 파내어 버림.
c. 힘센 소에 쟁기를 지워 땅을 갈아엎음.
d. 그것들을 두드려 부드럽게 고루어 줌.
e. 새롭게 기경한 땅에 곡식의 씨를 뿌림.
- 영적인 침체에서 무감각한 삶의 연속됨.
- 딱딱해진 마음으로 굳어진 교회도 기경되어야 함.
- 지체들의 영적인 각성과 심령의 부흥이 필요함.
- 기경하지 않고는 잡초만 무성해져 땅만 버림.
- 이스라엘은 불신앙과 우상숭배를 심고 악을 거둠.
- but, 그것은 진정으로 “자기 위한 것”되지 못함.
B. 여호와를 찾으라
- 묵은 땅처럼 돼어 버린 마음을 스스로 회복하지 못함.
- 세상의 즐거움과 개인의 평안을 추구함.
- but, 그 마음에 진정한 만족이 없음.
-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의하고 사랑 없음 보여줌.
- 우리가 간헐적으로 받는 은혜는 쉽게 소진됨.
* 수렁에 빠진 자동차 비유.
- 침체 속에 묵은 땅 같은 마음이 되어 감.
-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써 영혼이 회복되는 것 아님.
- 경건의 실천들은 하나님의 회복을 받아들이는 도구임.
-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
-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때니…”
a. “여호와” : 타락해도 포기하지 않으심.
b. “지금” :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때에.
c. “찾으라” : 절대적 갈망으로 구함.
* 영적 침체로 분산된 마음과 내적인 갈등.
- 차분히 마음 깊이 잠잠하라.
- 그 비참한 영적 상태를 생각하라.
- 고요히 하나님을 묵상하라.
- 하나님과의 깊고 큰 사랑의 때를 회고하라.
- 현재를 그 사랑의 때와 비교하라.
- 이때, 마음의 초점이 모아지게 됨.
-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라.
- 말씀의 빛으로 자신을 보라.
III. 우리를 찾아오심
- 우리를 찾아오시는 여호와를 제시함.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下)
- 우리는 욕망에 이끌려 변덕스럽게 그 분을 떠난다.
- but, 하나님은 간구하는 자에게 찾아오신다.
- 언약의 하나님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으신다.
- “공의를 비처럼 내리시리라”
- 이스라엘에 정의와 자비가 실현될 것을 예고하심.
- 그 정의는 개인의 심령이 변화됨으로써 이루어 짐.
- 하나님은 선택한 자기의 자녀를 버리지 않으심.
- 영적인 침체기에 빠지게 하신 경륜이 있다.
- 당신과의 평화, 친교의 소중함을 알게 하신다.
- 진정한 삶의 열매 맺는 보람과 기쁨을 잊어 버렸음.
- but, 하나님은 잊지 않고 다시 우리를 부르신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下)
- 잊혀지지 않는 사랑은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 나타남.
- 그 사랑은 내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분이 찾아오신 것임.
- 잊지말라!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 바로 지금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라!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나 묵은 땅 같이 되었지 않았는가?
- but,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를 만나주신다.
-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라. 만나주시리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2 2018. 10. 23 가을말씀사경회 둘째날 저녁
< 하나님만 의지하라 >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 (호 10:13-15)
I. 본문해설
- 번영할수록 여호와를 떠남. “뒤집지 않은 전병”(호 7:8)
- 세속적 삶 속에서 하나님 사랑을 잊고 자기 본분을 떠남.
-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의도와 전적으로 배치됨.
- 세속적 번영 속에 두 가지 죄로 타락하였음.
“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리니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리라”(호 10:10)
II. 이스라엘의 두 가지 죄
- 두 가지 죄 : 하나님 떠난 죄와 우상 숭배.
A. 하나님을 떠남
- 이는 하나님 아는 지식을 버리는 것으로 나타남.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 이 지식은 율법에 관한 단순한 이성적 지식이 아님.
-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인 지식임.
- 이 지식이 마음 안에 살아 역사함으로써 거룩하게 살아감.
- 하나님을 향한 사랑 + 정의‧자비로 나타나야 함.
-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고 가나안을 주심은 소명 때문임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사 42:6)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행 13:47)
- 여전히 율법과 제사가 있었으나 하나님께 거절됨.
- 종교적 지식은 있으나 삶은 하나님께 바치지 않음.
- 한 때 소명을 따라 살게 하던 지식은 기억의 창고에서 버려짐.
- 무엇이 하나님을 떠난 것인가?
- 말씀을 통해 참 지식에 붙들리지 않는 것이다.
B. 우상을 숭배함
- 많은 번영과 복을 주셨으나 그것으로 우상을 숭배했음.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호 10:1)
- 여호와를 아주 버리지는 않았음. 혼합주의를 선택함.
- 이는 가나안에서의 번영을 바알이 주관한다고 믿었기 때문임.
a. 지역신의 개념.
b. 바알제의 쾌락.
- 단지 믿음이 침체되었을 뿐 아니라 세상 쾌락을 좇았음.
- 풍년이 들수록 바알 제단을 쌓고 바알 우상을 만들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호 2:8)
-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을 향해 복되게 살아야 함.
- 그 거룩한 삶을 요구함 : 미천함 + 비천함.
- but, 은혜에서 멀어져 부패할 때 세상을 사랑함.
- 신약에서는 우상 숭배의 근원이 신자 마음 속에 있음을 밝힘.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5)
- 진정한 세속주의는 세상 아니라 부패한 마음 안에 있음.
- 신자의 마음은 굳어져서 말씀, 책망, 징벌에 움직이지 않음.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 (호 4:16)
- 두 가지 죄에 대한 심판 : 하나님 떠남+우상 숭배.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호 10:14)
- 백성들이 요란하고, 산성이 붕괴되며, 나라가 파멸함.
- 주전 8세기 앗수르 살만에셀 5세의 침공의 예언임(왕하17:3)
- 왕가와 백성들의 멸망을 함께 경고함.
- “새벽에 망하리로다” 새벽에 나타난 은총의 역사와 대조 됨.
a. 애굽 군대를 물리치심(출 14:24)
b. 홍해가 갈라짐(출 14:29)
c. 여리고성이 무너짐(수 6:20)
d. 느헤미야의 말씀 부흥(느 8:3)
e.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마 28:1)
f. 그리스도의 별명 “새벽 별”(계 22:16)
III.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음
- 이스라엘의 죄의 뿌리는 교만이었음.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호 10:13下)
a. “네가” : 그릇된 고집의 주체성.
b. “네 길” : 자기 방식대로 살아감.
c. “네 용사의 많음” : 세상나라가 믿는 것임.
- 그들 힘과 지혜, 거짓 주체성에 대하여 심판하심.
- 하나님 의지하지 않는 교만에서 경건이 사라졌음.
- 하나님은 모든 지혜와 강함, 참된 주체성의 근원이심.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시 31:23)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는 무엇일까?
-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많은 고민을 함.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 6:6-7)
- 하나님의 뜻 :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라”
- 주님을 멀리 떠난 죄와 세상 사랑한 죄를 회개하자.
-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회개하라. 여호와께 돌아가자.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3 2018. 10. 24 가을말씀사경회 셋째날 저녁
< 사랑의 줄로 이끄심(1) >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호 11:1-4)
I. 본문해설
- 주님을 떠남과 우상 숭배에 대한 심판 예고함.
- 호세아와 가족 이미지 : 남편 + 아빠.
-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 하나님은 아직 어릴 때부터 이스라엘을 사랑하심.
II. 선지자들을 보내심
A. 말씀을 통해 부르심
- 타락할수록 뛰어난 선지자를 보내시는 하나님.
-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요나가 활동한 세기임.
- 그들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전함.
- 호세아의 말씀은 간절한 사랑의 극치를 보여줌.
- 가슴 아픈 가정사를 통해 행동으로 예언함.
- 말씀을 통해 부르심 : 환경과 마음을 사용하심.
a. 점점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남.
b. 바알에 제사하고 우상에 분향함.
- 반역한 이스라엘에게 쉬지 않고 말씀을 주셔서 부르심.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반역하는 마음의 표현임.
- 이스라엘은 하나님 존재와 진리의 빛을 가볍게 봄.
- 죄악 속에서 사고와 생활의 자기중심성을 고집함.
- 여러분의 처지는 어떠한가?
B. 팔로 안아 가르치심
- 갓난아이를 양육하는 그림을 제시.
a. 걸음 가르침.
b. 팔로 안으심.
- “그들의 팔로 안았다”
- 하나님이 선지자들의 말씀으로 안으심.
- 옛적부터 이스라엘을 말씀으로 양육하심.
- 타락한 지금도 그 사랑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름.
-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눈에는 병든 아들이었음.
- 진리로 그들을 고치고자 선지자들을 보내심.
- but, 이스라엘은 결코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았음.
-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신다.
III. 적용과 결론
- 두 가지 죄로 타락의 어둠 속으로 들어감.
- but, 그 뿌리는 하나님 없이 살려는 교만.
-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직전까지 선지자들 보내심.
- 그 사랑의 줄에 발 떼던 때 생각하라.
- 가슴 저미는 사랑으로 꼭 돌아오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4 2018. 10. 25 가을말씀사경회 넷째날 저녁
< 사랑의 줄로 이끄심(2) >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호 11:1-4)
I. 본문해설
-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음.
-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다시 회복시키심.
- 호세아의 설교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의 극치.
- 하나님 떠난 죄와 우상 숭배에서 돌이키라.
- 말씀을 보내심 + 사랑의 줄로 이끄심.
II. 사랑의 줄로 이끄심
- 타락했으나 선지자들을 보내어 말씀을 주셨음.
- “선지자들의 부름”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심.
- 궁극적으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함.
- 지성으로 미끄러진 자의 손 붙드심.
- “사람의 줄” 두 가지의 해석이 있음.
a. 어린애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줄.
b. 정든 소의 목에 매단 부드러운 줄.
- 그래서 4절 묘사 혼란스러워 보임.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4)
- “사람의 줄” + “멍에를 벗김”
- 어린아이와 가축 두 이미지가 중첩되기 때문임.
- 어린 아기와 함께 한 아버지의 모습.
- 충직한 암소를 선대하는 농부의 모습.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호 10:11上)
- 어릴 때부터 이스라엘을 말씀으로 붙잡아 주시고 안아주심.
- 또한 풍성한 소출에 기뻐하는 충직한 일꾼과 같았음.
- 농사일이 끝나면 멍에를 풀어서 먹을 것을 주었음.
-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 but, 이제 죄 때문에 죄의 멍에를 지고 패망함.
- 그러므로 육신의 번영 위해 세상을 사랑 말라.
- 염려 속에 불신을 배워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
- 우리 진정한 삶의 무게는 죄의 짐이다.
- 인생 원래 가볍지 않다. 생명과 힘의 부족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 영생 누림은 예수와 한 멍에 지고 배움으로써다.
-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찾으신다.
- 자기 신앙의 비참을 알고 주께 돌아감.
III. 적용과 결론
- 두 가지 죄로 하나님 사랑에서 떠남.
- 그 뿌리는 하나님 없이 살려는 교만.
- 심판 앞두기까지 선지자들 보내심.
- 그들은 자신이 병든 줄 알아야 했음.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호 11:3)
- 그 사랑의 줄에 발걸음을 떼던 때를 생각하라.
- 가슴 저미는 사랑으로 꼭 돌아오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5 2018. 10. 28 주일 낮 예배
< 불붙는 사랑을 알자 >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11:5-8)
I. 본문해설
- 타락한 이스라엘을 말씀과 사랑의 줄로 인도하심.
-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음. 소명 버림 + 세상 사랑.
- 다시 심판을 경고하시며 주님의 마음을 보여주심.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호 11:5)
- “애굽에 돌아갈 수 없음” 광야의 불순종을 회고함.
- 결국 이스라엘의 앗수르의 칼에 패망할 것을 예고하심.
- 이스라엘에 선지자들을 보내심. 말씀으로 불러도 회개치 않음.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 다”(호 11:7)
II. 불붙는 하나님 사랑
- 이스라엘이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당신의 마음 보이심.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호 11:8上)
A. 차마 버리지 않으심
- 죄 때문에 심판 받을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심.
- 이스라엘 향한 주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보여줌.
- 하나님이 약해서 아니라 사랑 때문에 호소하심.
- “내가 어찌…놓겠느냐…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호 11:8中)
- 이스라엘을 보시면서 아드마와 스보임을 기억하심.
-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한 성읍들(신 29:23).
- 이스라엘이 그렇게 멸망하는 것을 아파하심.
- 회개가 사라진 시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 복수가 아니라 징계하시는 하나님이다.
- 그 징계가 있기까지 여러번 말씀으로 경고하심.
- 신앙은 “차마 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
- 말씀을 보내심으로 부르신다. 하나님께 돌아오라.
B. 불붙는 긍휼하심
- 죄악으로 멸망할 이스라엘 대해 마음 아파하심.
- 그 마음을 호세아 선지자에게 부어 말씀하심.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下)
- 直譯 “나의 마음이 나를 거슬러 변하니 나의 긍휼들이 모두
함께 일어나도다”
- nichumai 1인칭 복수. “위로, 동정, 불쌍히 여김”
- 하나님 정의와 사랑이 공존하는 것을 보여줌.
- 단지 후회가 아닌 하나님의 박애적 사랑임.
- 원인인 죄악 아닌, 현재 비참에 대한 애끓는 마음.
- 불쌍함에 불붙듯해 멈춤이 없는 사랑.
- 그 긍휼이 우리 위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심.
- 하나님의 이 절절한 사랑이 오직 말씀에 담겨 있음.
- 특히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셨음.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잘못하셨나?
- 이스라엘을 낳으시고, 젖 먹여, 걸음 가르쳐 양육하셨음.
- 신앙은 하나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말씀으로써.
- 더 늦기 전에 회개하라. 이 사랑으로 돌아오라.
III. 적용과 결론
- 이스라엘을 차마 버리지 못하시는 사랑을 알라.
- 불붙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6 2018. 11. 4 주일 낮 예배
< 다시 돌아오게 하심 >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 11:9-11)
I. 본문해설
- 반역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불붙는 긍휼을 보이심.
-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하시나 그의 사랑은 변함 없음.
- 그 사랑으로써 이스라엘을 다시 돌아오게 하심.
II. 다시 돌아오게 하심
A. 다시 멸하지 않으심
- 에브라임을 다시 진노로써 멸하지 않으심.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9)
- 비록 앗수르에 패망하지만 다시는 그렇게 진노하지 않으심.
- 영적 이스라엘인 신약교회가 받을 사랑을 보여줌.
- 지상 나라인 이스라엘은 망하나 영적 이스라엘을 세우심.
- 그 나라는 결코 대적에게 패해 멸망하지 아니할 것임.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 12:28)
-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신실하심으로 맹세하심.
- 불순종하는 자는 곤고하며 회개치 않는 자는 징계를 받음.
- but, 그것은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부르심임.
- 징계는 죄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마음을 고치시려는 것임.
- 이 말씀은 방종하라는게 아니라 불붙는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것임.
- 영적 침체 속에서 느끼는 하나님의 거절하심.
- 다시 마음이 강팍해짐. but, 전심으로 구하게 하심.
- 고난과 시련을 통해 고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라.
-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버리겠느냐”(8)
B. 여호와를 따르게 함
- 이스라엘이 타락과 우상숭배로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됨.
- but, 때가 되면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실 것이다.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호 11:10)
- 이스라엘이 포로된 땅에서 고국으로 귀환할 것을 보여줌.
- 사자가 새끼를 부르는 울부짖는 우렁차고 두려운 소리.
- 그리스도 통해 택한 백성을 부르실 위엄과 영광을 보여줌.
-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서쪽은 “바다에서부터”
- 복음을 통해 열방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떨게 됨.
- 그리스도의 영광 때문에 다시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보여줌.
-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시는 우렁찬 복음을 듣는 때임.
- 교회의 말씀 선포가 그처럼 영향력이 있어야 할 것을 보여줌.
- 말씀 선포와 함께 사랑의 삶이 어우러져 울려 퍼져야 함.
- 교회의 선교적 목표는 온 인류를 하나님 경배하며 따르게 하는 것.
C. 자기 집에 머물게 하심
- 사방으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심.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호 11:11)
- 집은 평화와 안전을 상징. 하나님께 돌아와 누릴 평강 뜻함.
- “새 같이…비둘기 같이…오리니” 둥지를 찾아오는 새들.
- 이는 멀리까지 이르게 될 복음 전파와 신속한 순종을 의미함.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구원의 안식을 뜻함.
- 구원의 안식을 공동체로서 함께 누리게 될 것을 예고함.
- 포로로 끌려가 노예로 살도록 운명 지워진 땅에서 자유 얻게 됨.
- 자신의 삶에 희망이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음.
-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불러 고쳐 새롭게 하심.
- 우리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집은 진정한 우리집이 아니다.
- 그것이 참으로 내집이라면 편안할텐데 그렇지 않다.
-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집으로 돌아오라. 몸만 아니라 마음으로.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징계 하셨음.
- 그러나 불붙는 사랑으로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
- 풍성한 긍휼로 다시 여호와께 돌아와 함께 살게 하신다.
-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7 2018. 11. 11 주일 낮 예배
< 기다리시는 하나님 >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호 5:15)
I. 본문해설
- 호세아는 북왕국 선지자였으나 남왕국 유다에 대해 깊은 관심 가짐.
- 그의 눈에는 두 왕국이 하나의 나라였으나 전쟁을 예고해야 했음.
- 에브라임이 앗수르에 도움을 청할 것이나 멸망할 것을 예고하심.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심.
II. 기다리시는 하나님
A. 하나님 얼굴을 구함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심.
-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했음.
- panimi “나의 얼굴” 하나님의 면전.
a. 하나님의 진노.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2)
b. 하나님의 친밀함 : 영광, 은혜, 기쁨.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시 102:2)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80:19)
- “하나님의 얼굴”앞에 사는 것이 이스라엘의 특권이었음.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
- 우리의 일생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하던 순간들의 연속이었음.
- 그 얼굴의 빛으로 도우셨고 원수 앞에 쓰러지지 않게 하셨음.
- 그 얼굴 빛으로 지혜와 용기, 은혜와 능력을 주셨음.
- 이스라엘은 번영했으나 주님의 얼굴 빛 안에 살지 아니함.
- 결국 모든 것 잃어버리고 우상이 돕지 못함을 깨닫게 될 것임.
- 주님의 얼굴 빛 안에서 사는 삶의 행복을 알아야 함.
-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하려 하심이다.
- 주님의 얼굴 빛을 구하며 살자.
B. 그 죄를 뉘우침
- 다시 그의 얼굴 빛 앞에 살기 위해서 죄를 회개해야 함.
-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와 함께 경험된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호 5:15上)
-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눈높이에 맞춘 말씀이다.
- 온 우주를 당신 안에 두신 하나님이 어디로 가시겠는가?
- 하나님에게 가깝고 또 먼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 모두 이스라엘이 주님과의 친밀함에서 멀어졌기 때문임.
- 하나님의 얼굴 빛 앞에 있는 것과 같은 친교를 회복하여야 한다.
-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은 자신의 불결을 보게 함.
-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할수록 죄를 미워하게 됨.
- 고난을 받을 때 비로써 주를 떠나서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달음.
- 자신들이 섬겼던 우상들이 지켜주지 못함을 알게 될 것임.
- 그러므로 고난 받게 하시는 섭리를 기억하라.
-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죄에서 돌이켜 당신을 바라게 하신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시 119:75-76)
-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곤고하게 하심.
- 고통을 통해 우리의 돌이키지 않는 마음을 변하게 하심.
-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두려움에 직면하게 하심.
- 번영할 때 하나님을 잊었으나 고난 당할 때 기억함.
- 우리가 인격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 다시 돌아와 당신의 얼굴 빛 앞에 살도록 부르신다.
III. 적용과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나,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신다.
-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움직여 회개하게 하신다.
- 하나님의 얼굴 빛을 간절히 구하라.
- 회개하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8 2018. 11. 25 주일 낮 예배
< 때리시고 어루만지심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1)
I. 본문해설
- 번영과 평화를 주셨으나 하나님 버리고 우상을 숭배함.
- 나라의 패망과 고난을 겪은 후에야 뉘우칠 것을 예고하심.
-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이 행복인줄 알게 될 때를 기다리심.
- 고난을 받을 때에야 비로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됨.
II. 때리시고 어루만짐
- 고난 속에 뉘우치게 하심으로 다시 살게 하신다.
-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언약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심.
A. 때리시는 하나님
- 찢으시고 치심으로 징계하시는 하나님.
*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下)
- 넓은 의미에서 치셨으나, 자기 죄악으로 스스로 고통 받은 것임.
-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이 받은 고통 보여줌.
-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선지자의 해석을 보여줌.
- 평안할 때에 죄와 정욕에 고정된 마음을 고통으로 흔드심.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시 107:12-13)
-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베푸신 은총을 생각해보라.
- 만물은 우주적인 선(善) 안에 있음. 불순종할 때 고통 받음.
- 당신의 자녀들을 바르게 하심은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임.
-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역설적으로 사랑의 깊이를 보여줌.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셀라)”(시 39:11)
-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줌.
- 징계가 자녀라는 증거이며 아버지 사랑의 표현임.
- 징계에 있어서 육신의 아버지와 하나님을 대조함.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0-11)
a. 육신의 아버지 : 자기의 뜻대로.
b. 하나님 아버지 : 우리 유익 + 거룩하심에 참여케 함.
- 징계를 통해 주님의 성품을 깨닫고 평강에 이르게 하심.
B.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 아버지처럼 때리고 어머니처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징계의 엄중함보다 더 큰 사랑을 보여주심.
- 징계가 단지 죄에 대한 복수가 아니었음을 보여줌.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下)
- 죄는 미워하시나 사람은 사랑하심. 더 큰 목적이 있었음.
-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적 시술의 문맥임.
- 하나님은 당신을 병든 자들을 치료하시는 분으로 묘사함.
-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 육신뿐 아니라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심. shalom의 회복.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 하나님은 단지 의사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치료하심.
- 타락한 자를 다시 부르시고, 미끄러진 자를 세우심.
- 이스라엘의 비참에 마음 아파하시는 사랑을 보여줌.
- 이스라엘과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심.
- 시인도 욱여쌈을 당한 고난 속에서 이 믿음으로 살아갔음.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10-11)
III. 적용과 결론
- 이스라엘은 번영과 물질적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렸음.
- 우상숭배는 나라의 패망과 질병적 죄악뿐이었음.
-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갈 곳은 오직 하나님의 품이었음.
* 상가의 법적 분쟁과 소유주의 사망.
-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은 없음.
-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9 2018. 12. 2 주일 낮 예배
<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 >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 6:2)
I. 본문해설
- 징계로 때리신 이스라엘을 주님이 어루만져 주심.
- 언약의 하나님. “낫게 하시고…싸매어주실” 것임.
- 우리를 치료해 주실 뿐 아니라 다시 살게 해 주심.
II. 살게 하시는 하나님
- 우리를 다시 살리고 일으키시는 하나님.
- 살아 있다고 해서 진정으로 산 것이 아님.
- 하나님 앞에 사는 것만이 참으로 사는 것임.
A. 살리심 : 생명
-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 “이틀”은 빠른 시간, 약속의 확실성을 의미함.
- 육체의 죽음 vs 영혼의 죽음.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a. 세상풍조를 따라 불순종함.
b.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음.
-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이 힘들다.
a. 살아갈 길 모르고 살 힘도 없음.
b. 살아갈 길도 알고 살 힘도 있음.
- 살아갈 힘을 하나님께 받으며 살아야 함.
- 우리 살리기 위해 그리스도 보내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 생명을 주심. 삶을 헤치고 나갈 힘이 필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 종교는 길(道)을, 철학은 진리를 찾아감.
- 그것들은 종종 인류에게 빛과 확신을 주기도 함.
- but, 종교와 철학이 “생명”을 주지는 못함.
- 그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옴. 하나님의 사랑.
- 인생은 곤고하지만, 은혜를 받으면 이길 수 있다.
- 충만한 생명은 사랑. 인생을 살게 하는 힘.
B. 일으키심 : 소명 따르는 삶
-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 살리실 뿐 아니라 일으켜서 의미 있게 살게 하심.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시 145:14)
- 넘어지는 자를 붙드실 뿐 아니라 일으키심. 다시 살게 끔.
- 절망 중에 일어나서 다시 살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심.
-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 향해 의미를 찾아서 사는 것임.
- 그리스도를 통해 왜 태어났는지 깨닫게 하시고 살게 함.
- 살아갈 힘을 주실 뿐 아니라, 기쁨의 삶을 살게 함.
- 인생의 슬픔과 죽음. 겁을 내지 않고 살아가게 함.
* “죽음이 두렵지 않으세요?”
- 허무와 두려움 이기는 길 : 천상까지 이어지는 의미를 따름.
- 지금 여기 나를 살게 하신 뜻을 생각하라.
-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 : 구원 받고 삶의 의미를 알라.
- 인생의 길을 잃은 이들은 다시 주를 만나라.
C. 하나님 앞에 살게 함
- 우리를 살리고 일으키심은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심임.
-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
- 인간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창조되었음.
-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창조됨.
-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임.
- 살아 있어도 하나님 앞에 살지 않는 것이 고통임.
- 돌아오는 자를 다시 당신 앞에 사랑 받으며 살게 하심.
-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살라.
III. 적용과 결론
- 인간은 바람처럼 지나가는 인생을 산다.
- 하나님은 죽은 자와 같은 자도 다시 살리신다.
- 마른 뼈 같은 자들을 다시 일으켜 주님 향해 살게 하신다.
- 다시 살아나 충만한 생명으로 하나님 앞에 살자.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10 2018. 12. 9 주일 낮 예배
< 신실하고 복 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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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 6:3)
I. 본문 해설
-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을 다루심.
- “우리를 살리시며 일으키시리니…그의 앞에서 살리라”(2)
- 인생의 비극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a. 살아갈 힘이 없음 : 영혼 + 의미.
b. 하나님 앞에 살지 않음.
-본문은 궁극적 해결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함.
II. 신실하고 복 주시는 하나님
A. 신실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은 죄와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떠남.
그러나 정한 때에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심.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호 6:3)
- 범죄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줌.
- “새벽 빛” 어김없이 오는 시간. 어둠의 시간들.
-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찾아오심.
어두움을 경험하지 않는 신자는 없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 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 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a. 영혼의 어두움.
b. 환경의 어려움.
- 믿음은 자신에게서 주님을 향하는 것이다.
그 어두움 속에서 자신과 세상을 보며 충분히 절망하라.
but, 거기서 멈추면 불신앙이다. 아무것도 없다.
칠흑같이 어두운 영혼의 밤에도 새벽은 가깝다.
거기서 우리가 당신을 간절히 찾기를 기다리신다.
어둠 속에서 진리의 빛을 보고, 병든 중에 치료를 경험함.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바라라.
B. 복 주시는 하나님
- 영적 어두움 속에 있는 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심.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나타나심”이 성품이고, “임하심”은 성품의 시행방식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복 주심을 가리킨다.
- 이른 비에 파종하고, 늦은 비가 온 뒤 결실하여 수확함.
우상숭배로 번영한다고 믿었지만, 복은 하나님이 주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생의 승부수를 보라.
회개하는 마음으로 복의 근원을 깨달으라.
풍성한 수확은 자연의 혜택인데, 하나님에게 달렸다.
인생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꼬이는 인생의 상황들과 씨름하지만 말고 자신을 돌아보라.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 1:5-6)
왜 우리에게 회개와 의무, 헌신을 요구하시나?
아무것도 모자란 것도, 필요한 것도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이는 우리를 당신 앞에 살아서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1-2)
인생의 문제는 땅에서 생기나, 해결은 하늘에 있다.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통해서 만복의 근원을 바라보라.
다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복을 받는 자가 되라.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당신 앞에 다시 살게 하신다.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참으로 사는 것이다.
- 하나님은 생명의 힘을 주셔서 소명을 따라 살게 하신다.
- 신실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
- 그러면 어찌 할까? “하나님을 알자”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11 2018. 12. 16 주일 낮 예배
< 힘써 여호와를 알자 >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 6:3)
I. 본문해설
-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다시 만나주신다.
- 모든 복이 오직 하나님께로서 온다.
- 타락한 이스라엘이 어떻게 주님을 만날까.
II. 하나님을 아는 지식
-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그를 아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 백성의 타락은 그 지식을 버렸기 때문임.
- 그 지식이 우리를 살리고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임.
-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 “여호와” 하나님의 본명으로 언약관계 안에서 계시된 것.
- “지식”의 첫 용례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 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 히브리어 “선과 악의 그 지식의 나무”
- 악을 경험함으로 생기게 되는 선과 악의 대조를 가리킴.
- 타락 후 인간은 어둠과 무지 속에서 자기 근거를 모름.
- 계시를 주심: 하나님+세계+인간에 대해 알게 하심.
- 그 지식은 하나님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지식임.
- 지식의 궁극적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심. 만물의 근원이심.
-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왔음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개인-가정-민족에게 주심.
- 지식은 은혜로 주어지나 받은 자의 책임이 뒤따름.
- 이 지식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는 원동력임.
-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으로 그 질서에 따라 살게 하는 힘 : 은혜
- 이스라엘의 멸망은 “지식”을 버렸기 때문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 4:6)
- 신약시대가 되면서 이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전환됨.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7-18)
- 지상 생애에서 시작된 지식은 십자가와 부활, 승천에서 극치.
- 신약시대에 와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전환됨.
- but, 여전히 눈먼 자들이었음. 성령 강림을 통해 눈 뜨게 하심.
-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신자 안의 하나님이 보게 하심.
- 하나님 알기 위해 문학과 철학, 예술과 학문을 헤멜 필요없음.
- 어린 아이같은 마음으로 예수님 만나는 자들이 하나님을 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구원 계획 속에 있다.
- 그 지식이 더 알수록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게 됨.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을 아는 것에 인생의 길이 있다.
- 그리스도를 만나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2018.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1)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2018.3.11 주일오전1)
한 해를 시작하며(2018.01.01. 송구영신예배1)
묵은 땅을 기경하라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당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 10:12)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이 분열된 지 약 150년 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 호세아입니다. 그는 북 왕국 2세의 뛰어난 군주 여로보암 2세 시대 때에 거의 모든 시기의 선지자로 활동을 하였으니 그 기간이 약 40년이나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여로보암 2세는 아주 영명한 군주였습니다. 그 이전에 이스라엘의 솔로몬시대 때의 최대의 판도를 다시 회복했고 그리고 산업은 발전했으며 국가는 부강해졌습니다. 그러나 북 왕국 이스라엘은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신앙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이 상황을 호세아 선지자는 애끊는 마음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에브라임’이라는 이 호칭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애칭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번성하던 시절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번영할수록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멀리멀리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잘못을 두고 보지 않으시고 그들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래서 신은 앗수르 왕국에게 비참한 패망을 겪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원래 에브라임은 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고 풍성한 수확을 함께 기뻐하던 가축이었으나 이제는 그 위에 멍에를 지우고 사람을 태우고 힘겹게, 힘겹게 그렇게 죄의 집을 짊어지고 하나님의 징계의 멍에를 매개될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Ⅱ. 묵은 땅을 기경하라
그러면서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지금은 묵은땅이지만 한때는 풍성한 소출을 내던 땅이었습니다. 묵은 땅이라는 것은 처녀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거기서 곡식을 거두어들이던 기름진 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잡초와 엉겅퀴들로 우거진 그런 땅을 묵은 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속적으로 번영했으나 그들은 신앙에서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중요한 표인 정의와 그리고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포도원으로서 아름다운 정의의 열매,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옛일이 되어버리고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이스라엘이라는 밭은 황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A. 묵은 땅을 기경하라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다시 명령하십니다. 기름지지만 버려두어서 잡초와 엉겅퀴로 가득하게 되어버린 그 땅을 다시 일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묵은 땅을 다시 경작하여 풍성한 소출이 다시 나기를 기대하시는 마음으로 너희 묵은 땅을 다시 기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문전옥답이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그 마을을 떠나고 그렇게 기름진 밭과 논에 온갖 엉겅퀴들이 자라고 잡초가 자라 길 같이 풀이 우거져 사람이 헤치고 나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면 그런데도 다시 한 번 기경하여 씨앗을 뿌린다면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합니까? 당연히 우선 불을 지펴서 무성한 잡목들을 다 한 번에 불태워 버려야 합니다. 일부분으로는 안 되고 모두 불 질러 확 다 태워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요? 이미 벌써 그 기름진 땅에 잡초 그리고 엉겅퀴 심지어는 관목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 태워버리고 난 다음에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센 소에 쟁기를 지워 그리고 힘차게 땅을 갈아 엎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는 일일이 하나하나 갈고리나 혹은 이런 도구들을 이용해서 그 잡목의 뿌리가 더 이상 거기서 뿌리를 내려 또 다시 싹을 내지 못하도록 아예 다 거둬버려야 합니다. 그런 후에 그것들을 부지런히 두드려 부드러운 흙으로 만들고 그리고 써레질을 해서 씨를 뿌릴 수 있는 보드라운 땅으로 만든 다음 홈을 파고 거기에 정성껏 씨앗을 뿌림으로써 이제 묵은 땅은 새롭게 기경하여 씨를 뿌릴 수 있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나서 그 다음에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정성껏 돌보면 그렇게 황폐하게 묵은 그 땅은 놀랍게 변하여 황금물결이 일렁거리는 아름다운 추수의 현장이 될 것이고 혹은 밭에서 각종 아름다운 과수를 거두게 되거나 혹은 그 뿌리의 열매들을 거두어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 속에서 우리는 무감각한 삶이 계속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딱딱하게 마음이 굳어진 그 밭에는 무슨 말씀의 씨앗을 뿌려도 아무것도 거기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가가 그의 마음에 말해도 일단 그 마음이 황폐하게 되어 묵은 땅이 된 그 상태에서는 갈아엎는 일을 안 하고는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에게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문전옥답이 있다고 칩시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났더니 묵은 땅이 되었습니다. 이제 궁핍해져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죽어도 일하기 싫습니다. 그렇게 불 지르고, 정리하고, 그것을 쟁기질하고, 다시 호미로 두드리고, 죽어도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있는 그대로 씨를 뿌려보자. 그리고 그 묵은 땅에다 씨앗을 뿌렸다고 칩시다. 싹이 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이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영혼의 침체 속에서 묵은 땅과 같은 심령으로 묵은 땅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지라도 추호도 은혜를 못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 언제는 찔리기도 하고 찔끔 눈물이 나기도 하고 마음에 감동도 있습니다. 그것은 묵은 땅에 여기저기 던져진 씨앗들입니다. 절대로 결실할 정도로 자랄 수 없습니다. 은혜는 주어지는데 잠시 죄를 억제할 뿐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내는 소출에까지 이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가끔 찔림을 받고 감동을 받는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아직 살아있는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의 위안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렇게 무성하게 자라서 땅의 지력을 계속 빨아먹고 있는 그 잡초와 가시와 엉겅퀴 같은 것들이 땅을 망치고 있으니 이제 거기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석유를 끼얹으면 안 됩니다. 그 땅에서는 결코 씨앗이 자라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그냥 불을 질러야 합니다. 그리고 힘차게 바람을 타고 타들어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불쌍하게 여기지 말고 그냥 타들어가게 놔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 태워버려서 그 땅위에 하나의 잡초와 하나의 엉겅퀴가 없도록 새까만 재만 남을 때까지 불태워버려야 합니다. 그리고는 살지고 힘세고 성실한 소 한 마리를 빌려다가 거기에 잘 갈려진 땅 깊이 들어가는 제대로 된 장인이 만든 쟁기를 지워서 소에게 메우고 소에게 채찍질을 해서 앞으로 가게하고 힘센 사람이 위에서 깊이깊이 눌러야합니다. 겉에만 파면 안 되고 깊이 파서 힘차게 소가 달려가면 파도치듯이 땅이 거꾸로 일어나면서 뒤집혀야합니다.
그런 일이 없이는 매주 예배에 나와서 뜨끔뜨끔 자극을 받지만 그러나 삶은 돌이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대형교회에 집회를 갔습니다. 그 교회는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설교는 이상하게 쨉입니다.” 교인들이 은혜를 못 받는 것은 아닌데 무수히 쨉은 받는데 쓰러지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한방에 날려서 KO되는 것인데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70년대 초에 한 세기를 휘어잡았던 Boxer가 있었는데 무하마드 알리입니다. 그 사람이 조지 훠먼이라는 새로 등장한 사람에게 무참하게 패했습니다. 저는 그 KO패를 당하던 장면을 잊을 수 없는데 그 조지 훠먼이 잘못 맞춥니다. 그런데 한방을 제대로 맞췄습니다. 그런데 130㎏의 거구가 펀치 하나에 공중에 붕 떠서 캔버스에 개구리처럼 뻗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다독다독하는 설교나 기대하고 스스로 ‘이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 그리고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지.’ 그러면서 돌아가는데 괜찮습니까? 여러분들의 영적인 각성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마음의 밭, 자신의 삶의 밭을 보면서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번쩍 눈을 뜨고 이것이 각성이라면 그 다음에는 쟁기가 깊이 들어가서 여러분들의 마음의 밭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이것이 심령의 부흥입니다. 기경을 하지 않고 잡초만 무성해지는데 거기서 그냥 소출을 못 낼 뿐만 아니라 땅의 지력을 엄청나게 빨아들이며 그 땅을 몹쓸 땅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불신앙과 우상숭배로 죄를 심고 악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그 자신들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지금 삶의 밭은 어떻습니까? 그 삶의 밭은 마음의 밭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 마음의 밭은 어떤지 한번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비추어보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풍성한 소출을 거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기저기 피들이 돋아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제는 곡식보다는 피들이 월등히 많고 그리고 이제는 잡초가 훨씬 더 많아져서 사실상 곡식을 거둘 수 없게 만들어버렸습니까? 아니면 완벽하게 어떤 열매도 없고 이제 가시와 엉겅퀴 덤불만이 가득하여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땅이 되어 버렸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을 생각하기를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갇혀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많이 가고 악을 행해도, 세상을 사랑하여 타락해도, 사랑이라는 창살에 갇혀서 눈물만 흘리시고 아무것도 못하는 분으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별명은 사랑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불행한 결혼생활을 통해서 끊임없이 멀리 떠나는 이스라엘을 그래도 변함없이 사랑하며 부르시는 하나님의 헤세드, 그분의 인자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거룩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죄악으로 치닫는 이스라엘 사이에서 그는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그 형극의 고통과 같은 가정생활의 비극을 통해서라도 온몸을 교재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가슴 절절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선지자가 아주 명백하게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 곧 우상의 신상들을 허물어 버리시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첫 출발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두려운데도 그분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분께 사랑받고 싶은 이유는 그분의 인자하심에 끌리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면서도 멀리 떠나지 못하는 그 마음에서 신앙은 싹이 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이 없으면 설교자는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옥토와 같은 땅이 묵은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기경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으로도 무엇을 통해서도 새로운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영혼의 침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은혜의 소외감 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보드라운 요람 같은 것으로 여러분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안아서 은혜의 세계로 옮기시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마음 그대로 가지고 은혜만 받고 싶은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가능했다면 왜 선지자가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쟁기처럼 박혀서 파도처럼 땅을 뒤집으면서 지나가는 그런 심령의 부흥을 기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끝나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의 기도소리는 그 쟁기가 그들의 묵은 밭을 파고 지나가는 고통에서 오는 울부짖음입니다. 그리고 자기 같은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묵은 땅과 같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다시 옥토로 만들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저미는 눈물인 것입니다. 왜 또 내일입니까? 왜 또 다음입니까? 왜 하필이면 이번에 말고 또 언제를 왜 기다립니까? 그때 주님을 만날지 못 만날지 어떻게 압니까? 정말 자신의 묵은 땅을 기경하고 싶은 성도는 그렇게 미루지 않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나님 앞에 변화되기를 갈망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여호와를 찾으라.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묵은 땅을 기경하는 방식에 대해서, 그런 묵은 땅을 기경하는 마음에 대해서 오늘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여호와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묵은 땅이 되어버린 마음은 스스로 어루만져 회복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너무 단순합니다. 인간은 기쁨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이 없으면 그 기쁨을 대신할 또 다른 기쁨을 세상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즐거움과 개인의 평안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고 더욱이 처음 사랑의 추억이 뼈 속 깊이 아로새겨진 사람들은 절대로 세상사랑에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법칙입니다. 절대로 만족을 거둘 수 없습니다. 순간순간 가슴속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공허와 소외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걱정에 어두운 그늘이 그들을 떠나지 않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재산을 늘리고, 외모를 가꾸어도 그것으로써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져보셨습니까? 한 사람이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면 남녀일수도 있고 사랑하는 아들딸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강아지일수도 있습니다. 저는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직원들이 농수산물센터 앞에서 부부가 개를 데리고 건널목을 건너려는데 개 줄이 풀어지면서 뛰쳐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달려오는 차에 한방에 치여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가 땅에 털썩 주저앉아서 못 일어나더랍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눈앞에서 바퀴에 갈려서 피를 쏟으면서 죽었는데 그러면 그렇게 어느 짐승이나 가축이나 애완동물에 대한 애착이나 혹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 진짜 그 사랑이 꽂혀있으면 그가 사라진 빈 공간을 채울 수 있습니까?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 아마도 실연을 경험하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 스키드데이비스가 노래했듯이 ‘아침에 눈을 뜨면 정말 이상하구나. 왜 태양은 어제처럼 빛나지? 왜 파도는 어제처럼 밀려오지? 그들은 이 세상이 끝난 것을 모르나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소원이 있다면 사랑하는 그 사람이 없는 세상에 오래 살기보다는 조용히 눈을 감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사랑도 살 깊이 새겨지면 그 그리움을 잊을 수 없는데 만약 이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것이 살과 뼈가 아닌 영혼 깊은 곳에 새겨진 것이라면 무엇으로 그것을 덜어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선지자는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이것은 정의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자기 속에 우러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웃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애정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는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나의 이익을 포기하고 정의롭게 살아야 하고 나는 권력과 힘이 있기 때문에 내 자식을 백으로 집어넣어서 공공기관에 취업시킬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피 튀기게 경쟁을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 전화 한통으로 들여보내줄 수 있는 권력이 있는데 미쳤다고 정의를 추구하겠습니까? 사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정의가 좀 유야무야된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그 이익을 왜 포기하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을 위한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런 것은 너희를 위하는 길이 아니다. 결국은 그 모든 죄와 악이 불의가 그리고 그 무정함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도 이스라엘은 그렇게 살지 말도록 부름을 받은 선택된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너희가 자기를 위해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즉 너희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정의를 행하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따뜻하게 자비롭게 대한다면 마지막에 그 모든 이익은 너 자신에게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무슨 소원이 있겠습니까? 간절히 여러분들에게 눈물로 설교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되는 것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버리고 부자 되는 것이 여러분들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난해도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말하고, 인생이 꼬여도 그 꼬인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인생이 꼬이고 시련이 닥칠 때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도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다른 사람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순풍에 돛단배같이 잘나가고 만나는 사람다고 칭찬을 하고 좋아하고 그러면 아무도 그 사람의 본색을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이 한번 꼬여보면 만날 앞자리에서 두 손을 들로 손바닥에 피맺히도록 찬양시간에 박수를 치던 사람이 사실은 별것 아니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인생이 꼬이게 되면 항상 뒤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예배를 드리러가던 사람이 사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의를 행하고 인애를 거두는 것은 자신의 희생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자신들에게 가장 커다란 유익을 거두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차피 잠깐 살다가 죽는데 전능하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의 돌보심을 입고, 그리고 인생이 꼬일 때는 그분을 깊이 의지하면서 내 예상 밖의 어떤 일들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꼬인 인생의 발자취를 따라갈 때 그것보다 행복한 삶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생의 불행은 여러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복을 하나님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데서 인생의 모든 불행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많은 재산으로, 사회적인 지위로, 그리고 남 보기 좋은 외모로, 젊음으로, 그리고 권위로 여러분들이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여 남들에게 부러움을 살 수 있으나 그 사람은 부러워하는 사람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유유상종으로 과시하고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의미 있는 삶이겠습니까?
이런 속에서 이런 묵은 땅과 같은 마음을 기경해야 할 텐데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자꾸 나이가 먹을수록 산 물건을 또 삽니다. 그리고 살다가 뒤져보면 진짜 필요해서 산 것이 이미 있습니다. 그리고 옷도 ‘뭐가 없는데…….’ 하면 어느 구석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옷이 양말도 아닌데 왜 자꾸 잃어버리고 세탁소를 원망합니다. 세탁소가 그런 실수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찾아보면 차 트렁크에서도 나오고, 창고에서도 나오고, 오래된 여행가방 속에서도 나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진짜 찾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어디 있지? 어디 있지?’ 그러다가 끝낸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처음사랑으로 돌아가라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고 심지어 예배시간에 흐느끼는 소리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이 설교를 듣는데 방해를 받았습니다. 무엇입니까? 아침의 구름과 같아서 그때 잠깐 그렇게 하고 6시간 후에 저녁때가 되면 다시 코미디 프로를 보면서 다 잊어버리고 웃으면서 잠자리에 들 때는 다시 공허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니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지 신앙생활이 코미디도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기서 찾는다는 것은 안 찾으면 절대로 안 되는 절체절명의 갈망을 가지고 찾는 것입니다. 이 정신 나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찾았습니다. 세상의 부와 세상의 쾌락 그리고 우상을 섬기면서 그것들한테 복을 받고 이미 있는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더 풍성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라는 주님의 존함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만 아는 암호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라고 부를 때에는 하늘 높이 계신 절대자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이신 그분이 이스라엘과 언약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붙들면서 하나님의 본명과 같은 존함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 계시되진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하나님의 존함입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가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를 찾을 때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방탕한 길로 가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너희와 맺은 그 언약에 충실 하신다. 그래서 묵은 땅이 계속될 때 너희를 하나님이 책망하고 회초리를 때리시는 것도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너희가 아무리 하나님을 떠나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를 찾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끊임없이 떠났어도 돌아오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여호와를 지금 찾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때’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애트’ 라는 것인데 그냥 아무 때나 때가 아니라 의미를 가진 시간입니다.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아주 중요하고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시간 그 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이 시간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상황이었습니다. 주님을 멀리 떠났고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습니다. 겉으로는 번성하고 있지만 이미 저 밑에서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선지자는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절망의 때가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규정하면서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절호의 기회라고 주님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신앙의 결단은 그만두고라도 신앙에 있어서 어떤 선한 것을 하기 위해서 마음에 결심만 해도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내게 없던 놀라운 힘이 생깁니다. 이것이 은혜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죄의 위험만 감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할 때 주님이 주실 놀라운 능력과 힘에 대해서 못 보도록 감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절대 못한다. 절대 안 된다. 그러니 시도하지 마라.’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으로 멀리 떠나가고 아직 돌아올 마음이 없으면 놀랍게도 결심하는 것 자체를 안 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좀 더 고통을 받아봐야지만 결심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를 다시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많은 사람은 그 따뜻함을 경험하기 전에 때리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리고 이후에 어루만지시는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께로 돌아가기 싫다면, 내 마음이 다 분질러져 버리고 말씀의 시퍼런 쟁기로 깊이 박혀 땅이 파헤쳐지는 것 같은 혁명적인 변화가 내 마음에 오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사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행복하지 않습니다. 기쁘지 않습니다.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안 죽을 텐데 무슨 낙이 있습니까? 이미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가슴 저미는 주님의 처음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그 삶이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하자니 세상을 버려야하고, 이렇게 하자니 주님을 버려야하고 그러면서 갈팡질팡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은 갈팡질팡 이라도 합니다.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 다시 연속극이라도 한번 틀어놓고 세상 돌아가는 뉴스라도 보노라면 아주 고맙게도 그 갈등과 고민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관성에 이끌려서 그냥 어제처럼 오늘처럼 내일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에 잠깐 출렁거림은 있었으나 찻잔속의 태풍이고 나는 그냥 오던 삶을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0대가 20대로, 20대가 40대로, 40대가 60대로 가는 것입니다.
짜증날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2008년의 목사님 설교를 들었어요. 진짜 젊으시던데요?” 그런 이야기를 무엇 하려 합니까? 얼굴 보려고 그것을 본 것입니까? 한마디를 해도 ‘정말 그때 말씀이 은혜롭습니다.’ 말하면 되는데 그렇게 말하는 자기도 지금 40대가 넘었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너를 볼 때 두 번 충격 받았는데 눈 수술을 하고 네가 젊은이인 줄 알았는데 중년이더라. 지금 다시 10년이 갔으니 너도 날 따라오는구나.’ 자기 변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크게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짜증이 좀 났습니다. 왜 관심사가 그런 대로 돌아갈까? 내가 꽃다운 청년 같은 얼굴이 된다고 해서 누가 그 유익을 누리겠습니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너나 잘하세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가는데 잠시 이 세상은 바람같이 지나가고, 까맸던 머리는 희어져가고,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세월의 흐름이 얼굴에 묻어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갑니다. 나는 게으름 책을 쓰고 4부작 시리즈 신학실종, 윤리실종, 위대하신 하나님 시리즈로 유명하신 저자 데이비드 웰즈 박사에게 책을 보내면서 두통의 답장이 왔는데 그중의 한통은 잊히지 않습니다. “교수님 한국에 꼭 한번 오십시오. 제가 교수님 책을 보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꼭 한번 오십시오.” 그랬더니 건강이 안 좋으시다고 합니다. 그 편지 말미에 “I am at the end of the road.” ‘내 인생길이 끝나고 있습니다.’ 그 구절이 생각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잘살아왔으면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잘 살아야 하고 못살았다면 이제는 남은 이 생애만이라도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절대적인 갈망으로 여호와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것은 어마어마한 대형집회에서 큰 밴드소리에 맞추어서 발을 구르고 춤을 추는데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형식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하나님께 마음의 초점을 모으고 그분의 은혜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주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너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간절히 매달리느냐?’ 물을 때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주님 자신을 내게 주시옵소서.’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영적인 침체가 오면 놀랍게 마음이 분산이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신령한 것을 향해서는 초점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춥고 얼음이 꽝꽝 얼어도 돋보기에 초점을 맞추면 종이에 불이 붙고 나무도 태웁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초점을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금식기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젊을 때 금식은 영적인 침체서 벗어나는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조용히 하나님 앞에 침체에서 벗어가기 위해서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하실교회에서도 너무 곤고하면 나한테 부탁을 해서 나에게 교회의 키를 달라고 하고 40일씩 와서 철야를 하는 지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피곤하고 건조한 삶을 살면서 그런 결심 같은 것은 아예 엄두도 내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때만큼 간절하기 않기 때문입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주위에서 그렇게 하는 본을 보지 못하니 그러니 더더욱 꿈도 못 꾸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편한데 세수는 어디서 하고? 출근은 어떻게 하고? 내 건강은 얼마나 상하게 될까? 나는 아마 길거리에서 쓰러질 거야.’ 이러한 분산된 생각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초점을 모으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은 주님께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는 마음을 고쳐야 하는데 솔직히 마음을 고치는 것은 망가진 몸을 고치는 것보다 정말 힘듭니다. 몸이 망가지면 치료가 가능한 것은 치료를 하면 다시 신체를 자유롭게 쓸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은 마음에게 명령하면 마음이 듣지 않는 것이 마음의 병입니다. 지금 그 마음을 고치는 일이 쉽겠습니까? 그러면 마음은 그 사람의 운명이어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갈아죽이고 싶었던 그렇게 미웠던 그런 사람들이 한 번의 깊은 회개와 십자가 사랑 때문에 가엾어지고 불쌍해지는 일들은 우리들이 경험해본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전공이 인간의 마음을 갈아엎어 새로운 마음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공입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런 비참한 영적 상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내가 바뀌고 변화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결심을 하지 않으면 물론 결심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바뀌게 해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이 수없는 결심을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 결심은 언제나 공허한 장담으로 끝납니다.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죽는 데까지 가겠습니다.’ 결단은 있었는데 그 안에 신앙과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공언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면 여러분들의 결단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들의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적인 침체에서 물러간 뜨뜻미지근한 생활 그리고 설교시간에 나긋나긋 설교할 때는 괜찮지만 가끔 잡아먹을 것같이 설교하면 뜨끔뜨끔 찔립니다. 그러나 잠깐입니다. 좀 더 지나가면 절대 안 찔립니다. 단련이 되어서 웬만한 것으로 찔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갑옷을 싼 것처럼 그렇게 찔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생각은 합니다. ‘내가 변화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후의 결심이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러한 뜨뜻미지근한 신앙, 부패한 신앙에서 다시 살아있는 신앙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어차피 여러분들은 뭔가를 버리고 그리고 찾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찾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에 이미 익숙해버린 자신을 고치고자 하는 희생이 뒤따라야하는 것입니다. 잘 것 다 자고, 먹을 것 다 먹고, 내가 즐거워하는 스마트폰을 붙들고 두시가 세 시간씩 그렇게 밤까지 보내고, 먹방, 노래방, 개방까지 다 보면서 어떻게 기도할 시간을 갖겠습니까? 청년들과 앉아서 대화를 하는데 회사가 너무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물리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성경을 볼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덜 자라. 한 시간씩만 덜 자면 하나님이 힘을 주신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물리적으로 죽어도 시간이 나지 않으면 방법은 6시간 잘 것을 5시간 자면 그때 하나님이 숙면하게 하셔서 나에게 체력을 주실 것입니다. 뭔가 희생을 하면서 도전을 해야지 어떻게 그것 없이 우리의 마음의 묵은 땅이 기경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고요히 떠들썩하게 말고 고요히 자신에게로 돌아와 침잠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에게 돌아온 시선을 몰아서 전능하신 하나님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는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익숙해진 여러분들의 경건을 잃어버린 생활은 그 집중이 안 되도록 아주 부지런히 여러분들의 마음을 흩어놓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극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크지 않은 교회에서 청년사역을 했습니다. 한 자매가 있었는데 무역회사를 다니는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높은 지위를 가진 것은 아닌데 어마어마하게 일이 바쁜데 아침 7시에 출근해서 퇴근하고 교회에 들러서 기도하는데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시간이 빠르면 10시 반 늦으면 11시였습니다. 여자는 11시 반에 집에 들어가서 11시 반에 못잡니다. 씻어야하고 크림이라도 발라야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냥 갈 수 없으니 화장하고 가야합니다. 죽어도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해야 할 것을 다하고 기도가 살아있습니다. “너 어떻게 하는 거냐?” 회사에서는 눈코 뜰 새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기도는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 “아니 제가 문제가 아니라 제가 딸린 순원들이 있는데 얘네 들은 정말 눈물 나는 애들이에요.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애들이에요.” “어떻게 하냐?” 점심시간에도 한 시간을 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15분씩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고리를 붙들고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못한다는 것은 할 마음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자매가 시간이 없는 자매인줄 아시니까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고리를 붙들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기도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지금도 정말 신앙적으로 주님 앞에 돌아오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다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고자 하는 의지를 요만큼 가지고 돌아가지 말고 크게 가져서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엄마는 그 아이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 아이가 때로는 속을 썩여도 야단은 치지만 그 아이를 버릴 생각 하지 않고 그 아이가 교통사고로 영구히 장애가 되어도 옆에 있어줍니다. 한때 날리는 카레이서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전신이 마비되었습니다. 하반신 전체가 마비되었는데 키가 188㎝에 몸무게가 100㎏입니다. 요양원에서 무겁다고 받아주지 않습니다. 뇌병변이 와서 말도 못합니다. ‘아빠 미안해’ 그것이 다입니다. 그런데 아빠가 그 아이를 평생 돌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새끼를 버릴 수 없다는 의지의 크기가 크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의지의 크기보다는 작습니다. 그래서 극복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의 의지가 작으면 더 큰 일이 일어나면 부모도 버리고, 자기 자식도 버리고, 다 버리는 것입니다. 왜? 의지의 크기가 작으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의지의 크기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잠시 주님을 떠났지만 이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다시 한 번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Ⅲ. 우리를 찾아오심
이렇게 할 때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다고 말합니다. 호세아서 10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구원이 이스라엘에게 임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놀라운 구원을 우리에게 비 오듯이 부어주시는 것으로 성취됩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주님을 멀리 떠났지만 그러나 그 이스라엘에 다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 사랑을 안 이스라엘 사회가 다시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변화의 정의는 이스라엘 한사람 한 사람의 심령이 변화됨으로써 이루어질 것을 보여줍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기의 자녀를 절대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분은 자신의 성품에 모순되는 일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잘 안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여러분들의 욕심대로 살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회초리로 때리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회초리는 ‘네가 나의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했으니 너도 한번 아파봐라.’ 하고 홧김에 후려치는 폭력이 아닙니다. 하도 굳어진 우리 마음을 당신께 돌이키기 위해서 영적인 것은 무감각해졌으니 회초리라도 때려서 혹시 그 마음이라도 움직이시려고 사랑하는데도 우리를 그렇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들인데도 하나님은 종종 그들을 영적인 침체기에 빠지게 하십니다. 그 침체의 시기를 통해서 자신의 부주의함,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 하나님과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하고 친교가 얼마나 귀한지를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진정한 삶의 열매를 맺는 기쁨과 보람을 안겨주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끼게 하시고, 기도해도 그분이 돌아앉으신 것처럼 때로는 나의 이 슬프고 외로운 마음을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잊어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우리의 잘못으로 먼 길로 떠나서 길을 잃고 헤매었습니다. 가시에 찔리고 상처가 나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때 주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바로 우리가 여호와를 찾아야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잊히지 않는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불순종으로부터 돌이키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은혜를 통해 나타납니다. 그 사랑은 내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분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간절히 ‘주님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주님께 돌아가되 무엇으로 돌아가겠나이까? 말을 타고 돌아가겠나이까? 마차를 타고 돌아가겠나이까? 내 마음과 내 마음의 거리가 한 뼘도 안 되는데 이렇게 멉니다. 주님 내 마음을 고쳐주시옵소서.’ 그렇게 간절히 주님을 찾으면 반드시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또 이 설교를 듣고 훌쩍거리다가 마음에 뜨끔한 느낌을 받다가 그냥 옛 생활로 돌아가지 마시고 오늘 이 자리를 떠나기 전 결심을 하십시오. ‘내 힘과 결심 약해서 이것을 결단해도 나는 못 지킵니다. 그러니 주님 나를 붙들어 주셔서 내가 주님을 만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무엇인가 이제껏 계속 침체 속에 여러분들을 데려갔던 그 고리를 담대히 끊고 내가 이것이 없어도 우리 주님과 살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단절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많은 편안함, 나의 많은 소유, 내 마음의 즐거움을 잃어버려도 그 상실은 되찾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클 수 없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용기가 생깁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촉구하고 어떻게 삶을 스스로 개혁해야 할지 마음의 변화를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갈망해야 할지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이 있다는 것보다 아주 멀리 계십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바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렇게 믿음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Ⅳ. 적용과 결론
한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나 이제는 마음과 삶이 묵은 땅처럼 되지 않았습니까? 옥토일 때만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황폐한 밭이 되어버려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에게 모욕을 안겨드리고 있는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으나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에게 형극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고 그 가정에 뼈를 파내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비극을 겪게 하면서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기억되었고 여러분들이 수십 번 주님을 잊고 떠나도 그분의 마음에는 여러분들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마음을 고쳐 당신께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간절히 찾으면 반드시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 주님을 찾고 만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2018.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2)
하나님만 의지하라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 (호 10:13-15)
녹취자 : 오희열
I. 본문해설
이스라엘은 번영할수록 하나님을 멀리 버렸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7장 8절에서 이스라엘을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했습니다. 전병을 번철 위에 올려놓고 계속 불을 때면 밑은 타고 위는 익지 않아서 어떤 부분도 먹을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세속적으로는 모두 타버릴 정도로 부패했고 종교적인 부분은 너무나 차디차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신앙이 되지 못했습니다. 세속적인 삶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본분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속적 번영 속에서 두 가지의 죄로 타락했습니다. 호세아 10장 10절에서 선지자는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리니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리라”(호 10:10) 이스라엘의 두 가지 죄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죄와 우상숭배의 죄였습니다.
II. 이스라엘의 두 가지 죄
A. 하나님을 떠남
먼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예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던 처음 사랑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국이 분열되고 왕국이 여로보암 2세의 치하에서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무역으로 부강하고 산업이 발전하게 되자 그들은 풍족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보다 자기들이 강성하게 이룬 이 땅의 유업들을 누리면 사는 일에 더 골몰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호세아 4장 6절에서, 선지자는 애끓는 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그 두 가지 죄를 하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 짧은 말씀 속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 셔서 그들이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임무는 죄를 지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중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 지식으로서 무지한 많은 열방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부름받은 공동체였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들이 먼저 이 지식을 가져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리킵니다. 이 지식은 단순히 율법에 관한 이성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그 원동력이 되는 지식이었습니다. 이 지식이 마음 안에 살아 역사함으로써 그들은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삶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더해주고 그들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어 그들도 하나님의 구원으로 들어오도록 만드는 것이 이스라엘의 임무였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해야 했고, 이웃들을 향해서는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신 것도 바로 이 원대한 계획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애굽의 치하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에 가서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만을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서 주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게 하시려고 거기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심으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사 42:6). 사도행전 13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행 13:47). 그들은 타락했으나 여전히 율법이 가르쳐지고 있었고 제사도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껍데기는 남아있었으나 그들의 마음과 삶은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았습니다. 한때 이스라엘로 하여금 주님이 주신 그 거룩한 소명을 따라 살게 하던 그 지식이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심장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기억의 창고에서조차 내동댕이쳐 버려졌습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큰 두 죄를 이야기하면서 제일 먼저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명백히 말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을 떠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내 곁을 떠났다.”라고 말씀하십니까? 걸어서 주님을 떠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마차를 타고 주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껍데기로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으나 그들 마음에 하나님에 관한 불붙는 지식의 말씀이 사라졌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물리적인 거리로 하나님을 떠난 것이 그 떠난 것이 아니라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거기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순종하며 살면 그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기에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그 참 지식에 의해 살아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교회에 있으나 사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탕자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상적인 표현으로 “나는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손에 붙들려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수중에 붙들려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반대로 우리가 주님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한 가지 이상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에 굳게 붙들려서 그 말씀에 감화를 받으며 그 말씀 앞에서 자기를 매일 꺾고 그 말씀 앞에서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 앞에서 자기의 혈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좇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붙들려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직도 나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시겠습니까? 나는 아직 예배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내가 구역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에 혹은 이런 저런 일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시렵니까? 그렇게 따지면 이스라엘 백성중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명백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고 말합니다. 예전에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던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들이 더 이상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고동치게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을 때 우리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누가 우리를 붙들었습니까? 그리고 누가 우리를 강제력으로 사로잡았습니까? 그것은 주님께 붙들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붙들렸다는 것은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는 하나님의 그 말씀의 뜻을 알고 이해하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어서 우리의 마음속에 불처럼 타오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께 붙어있던 때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교통수단이 매우 발달했습니다. 처음 증기기관차가 나왔을 때 증기기관차 앞머리에는 커다란 화실이 있었습니다. 쉼없이 석탄을 퍼부어 물을 끓이면 증기를 내뿜으며 육중한 기차가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만약 우리의 인격, 삶, 그리고 삶의 태도, 이웃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공동체에 대한 헌신, 이런 것들이 모두 따라오고 있는 매달린 기차의 차량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그 화차의 불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은혜와 감격 속에서 가슴은 그 사랑에 불타면서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의 삶 전체를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로,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로 움직이는 놀라운 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한 번 오늘 여러분들의 인격과 삶, 전체의 생활이 매달린 시커먼 기차라고 생각해 봅시다. 많은 차량들이 다양한 의무와 짐을 지고 마치 화물을 실은 열차처럼 선로 위에 멈춰있습니다. 이제 어떤 기차는 출발합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 화차 안에서 엄청난 석탄을 태우며 힘차게 기적을 울리며 칙칙폭폭하며 기차가 떠납니다.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온 삶을 움직이는 그 증기기관차의 화차칸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마음의 용광로가 어떤 상태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거의 짐 하나 싣지 않은 빈 차이고 기차나 차량도 두세 개밖에 달리지 않았는데 힘겹다고 가지를 못합니다. 진짜 무거운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엔진이 차갑게 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정말 사람으로는 견딜 수 없는 수많은 시련들을 통과하고 승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 여러분에게 많은 의무와 짐, 심지어 핍박과 고난이 있었고 속에 근심, 밖에 걱정이 그치지 않았지만 여러분은 달렸습니다. “칙칙폭폭!”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불길이 그 화차칸에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뜨겁게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기 때문에 증기의 양이 어마어마했습니다. 그 큰 증기의 힘으로 “쉭!, 쉭!” 하면서 발동을 걸며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가뿐하게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너무 힘듭니다.” 원래 인생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가뿐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또 그럴 리 없겠지만, 우리 중 누가 우리가 살아온 삶을 한 번 더 살게 해 주신다면 기꺼이 다시 한 번 살겠다고 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저는 ‘No Thank you.’입니다. 한 번으로 충분히 살아봤습니다. 원래 인생은 그렇게 무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인생의 무게를 덜어보려고 몸부림을 쳐봐야 한계가 있고 덜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각 없이 마구, 마구 인생의 무게를 덜어낸다고 걷어내 버리면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혼자 있습니다. 그 외로움이 이번에는 더 큰 무게가 됩니다. 그러니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인생의 문제는 그렇게만 해서는 풀 수가 없고 이 힘의 문제에서 풀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그 성품으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배우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꼬인 인생의 그 대목에서 우리로 하여금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우리의 인생을 데려가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예기치 않았던 길로 접어들며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그분과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멀리 떠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야 할 삶 전체를 움직이는 인생의 기차의 화차칸은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여러분은 절대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꽉 붙들려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우상을 숭배함
두 번째는 우상을 숭배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그들이 그 광야의 길에서 이제껏 조상들이 먹어보지도 못한 만나를 먹으며 반석에서 나는 샘물을 마시며 의복이 해어지지 않고 신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님이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까지 데려오셨습니다. 그때 가나안은 빈 공터가 아니었습니다. 발달한 문명을 가진 전투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으니 믿음이 없는 정탐꾼들이 원주민을 보며 자신들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고 메뚜기와 같다고 고백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은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는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고 거기에서 많은 번영과 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번성하면 번성할수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세상으로 갔고 그들은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10장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호 10:1) 이들이 하나님을 아주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종종 논쟁의 패턴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는 여호와를 버렸다.”, “우리가 언제 여호와를 버렸습니까? 우리에게 율법이 있고 제사도 드리고 절기를 지키고 성전에 모이나이다.”
그들은 여호와를 아주 버린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혼합주의를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셨으나 가나안에서의 번영은 하나님이 아닌 바알이 주관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지역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즉, 다신교를 믿던 사람들은 신들이 있고 그 신들은 각각 자기의 구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역에서 그 신이 가장 힘을 쓴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바알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타협을 해서 하나님도 버리지 않고 바알에게도 밉보이지 않는 혼합주의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매우 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알종교가 가진 제의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교리는 이러합니다. 바알을 섬기는 성전에는 그 예배 의식 속에 신전에서 봉사하는, 좋게 말하자면 “성직녀”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성전창녀”라고 부릅니다. 수많은 방들이 있고 제사 의식 속에 성행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인간들이 그 신전에서 남녀가 성전창녀와 함께 교접을 하게 되면 그 광경을 보면서 바알은 흥이 돋워지고 기분이 좋아져서 절기에 맞춰서 비를 내리고 햇빛을 준다는 이상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이것은 매우 신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바알에게도 잘 보이고 즐길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알신교는 일찍이 이세벨의 헌신적이고 선교적인 수고를 힘입어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이 약속의 땅을 강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단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침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쾌락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거둬들인 수입으로 바알제단을 쌓고 신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바알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슬픈 것은 그 모든 풍년과 그 모든 풍족한 재물들은 사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2장 8절에서 고멜과의 사건을 염두에 두면서 눈물로 예언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호 2:8)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세상에 아부하여 얻은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얻은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이 복을 베푸시는 이유는 복을 주시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의 소명을 이루며 살게 하시려고 그 복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혹은 재물이나 혹은 재능이나, 혹은 지식이나, 혹은 또 다른 명예나, 이런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은 그것을 주실 때 그 사람에게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복되게 살되 행복하게 살기만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그 강복의 계획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때 그 복은 진정으로 그를 풍요롭게 하고 그 풍요를 통해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발달한 문명의 땅 한복판에 이스라엘을 심으시고 그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요구하셨습니다. 바알을 비롯해 모든 이방의 신들에게는 그 추종자들이 뇌물을 바치는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면 받아들여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함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것을 알고 자기가 얼마나 티끌 같은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매우, 매우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 날 밤사이에 유명을 달리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코끝에 달린 호흡이, 내가 숨 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미천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그 완전하신 도덕적인 성품의 빛 아래에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내세울 것이 없는 비천한 인간인지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본받아 경건하게 살고자하나 거룩하신 하나님께 비춰보면 자신은 오염투성이의 더러운 인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처럼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미워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내세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충성스럽게 살지만 진짜 충성하셨던 그리스도를 뵈오며 충성이라는 단어 자체를 내 입에 올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존재적인 미천한 의식과 도덕적인 비참한 의식이 바로 온땅과 하늘 위에 높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 의식 속에서 그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은혜에서 멀어져 부패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자기를 사랑하게 되고 그 자기 사랑은 세상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이 선을 행하고 진실하게 살기위해서는 모질게 자신을 채찍질하며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마음 속에 타올라야 합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며 세상을 사랑하고 육욕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아무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원래 인간 자체가 속속들이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과 열기에서 멀어지게 되면 그는 저절로 그렇게 굴러 떨어져 비참한 인간이 됩니다.
신약에서는 이러한 우상숭배가 결국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숭배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사실 우상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이렇게 할 때 우상이 반대급부로 줄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누리게 될 나의 이익을 위해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우상들은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뇌물처럼 드리는 제물에도 굶주려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따위의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실 뿐더러 그런 제사를 계속 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을 향한 모욕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 진정한 세속주의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 인간 안에 있는 세속이 밖을 흘러나오며 흘러나온 또 다른 세속들과 만나서 세속주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때 신자의 마음은 굳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멀어지고 자기의 사랑을 따라 탐심을 가지고 살게 되면 신자의 마음은 굳게 굳어져서 하나님의 말씀, 말씀의 설득, 책망의 감화, 때로는 하나님의 준엄한 징벌에도 마음이 꿈쩍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그런 상태에 들어섰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 다시 말해서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목양을 받는 어린양들이 아니다.”라고 선지자가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양은 양을 돌보는 것을 목양이라고 하지 같은 짐승이라도 사자나 늑대를 돌보는 것은 목축이라고 하지도 않고 더구나 목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선지자는 두 가지 죄, 곧 하나님을 떠난 것과 우상을 숭배한 것에 대해 중대한 선언을 합니다. 10장에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질 것이며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호 10:14) 백성들이 요란하다는 것은 나라의 질서가 무너졌다는 뜻이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성을 보호하던 산성이 붕괴되었다는 것은 적군들이 마음 놓고 쳐들어온다는 것이며 결국은 나라가 파멸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여기에 나오는 “살만”이라는 사람은 주전 8세기 앗수르 살만에셀 5세를 가리킨다고 보고 그들의 침공을 통해 북왕국 이스라엘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을 예언했다고 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열왕기하 17장 3절에도 등장합니다. 왕가와 모든 백성들이 함께 멸망할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도 느껴지고 하나님의 위엄도 느껴집니다. 비록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서 커다란 철퇴를 휘두르시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삶 속에 함께 계셔서 나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돌이키지 않고 악을 행하고 완고한 상태에서 주님께 대항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준엄하게 심판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떠나고 하나님을 멀리 버리고 우상에 대한 유혹에 빠져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의 눈은 진리의 빛을 잃어버리고 어두워집니다. 마음속에 있는 죄는 그 사람의 마음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악인의 특징은 담대한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 눈에 보이는 것에는 벌벌 떨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대담함을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죄에 빠진 사람의 마음속에는 미친 기운이 있습니다. 도저히 신앙을 떠나서 이성을 가지고도 저렇게 할 수가 없는데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종종 사람들을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용서를 빌고 은혜를 갈망하며 자신의 존재가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핏방울에 매달려 있는 티끌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눈물어린 음성으로 가엾게 여기시고 붙들어주시지만 대담한 마음으로 미친 기운을 가지며 하나님 앞에 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준엄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것을 여러분에게 허언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시대에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이 워낙 많으시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무슨 나쁜 짓을 하고 하나님께 악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해를 끼쳐도 하나님은 눈물만 흘리며 쇠창살을 붙들고 “하지 마, 하지 마…”하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이 뉘우치고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깊이 깨어져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종종 영원히 참지는 않으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사도들의 시대에도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심판이 나타났습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두려워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향해 사랑하는 마음은 그 둘이 하나가 되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합니다. 그 사랑 안에서 주님의 엄격하심을 보고 그 엄격하심 안에서 우리같이 연약한 인간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오늘도 목메는 음성으로 그들이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준엄한 음성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애굽에서 건져내어 그 긴 광야 40년의 방황을 끝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비로소 그들은 땅 없는 긴 설움이 끝났습니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정착된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가 우리나라다. 여기가 우리의 성전이다!” 라고 부를 수 있는 땅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은 이 교회가 여기 지어진 후에 오신 분들입니다. 교회가 생기고 나서 약 10년 만에 땅이라는 것을 “우리 땅이다.” 하며 이 땅을 마련하고 다 부서져가는 공장건물이 있었는데도 우리는 괜히 저녁때마다 여기 와서 땅을 밟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구나! 저는 마음속으로 그렸습니다. “비록 우리가 많은 어려움 속에서 이 땅을 마련했지만 하나님, 이 땅에서 수많은 믿음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어 짐승처럼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성도가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망나니 같던 사람들이 양순한 사람들이 되어서 예전에는 쓸모없는 자 같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심복들이 생겨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끄러져 신앙적으로 침체를 겪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세상으로 떠나갔을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단정한 사람들이 되었고 유치장에 있을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운 감람나무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지푸라기와 같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그 일들을 이루어 오신 것입니다. 창칼을 목에 대지 않아도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자 하나님을 이 세상의 권세자들보다 두려워했고 이 세상에 있는 성공과 보화보다 더 그리스도를 사랑했으니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그리스도를 얻기 원했던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호 10:15) 이것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하나님의 확정된 심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우리의 마음이 저미는 이유는 이 시간이 새벽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지 않은 사람들도 성경에서 새벽에 일어났던 수많은 위대한 일들에 대한 기억들이 있습니다. 큰 것만 몇 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 이스라엘을 추격하는 애굽의 병거와 군대들을 흩어져 파멸되게 만드신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뒤로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하고 앞으로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는데 모세의 기도를 통해 갈라진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하나님의 분부를 받들며 여리고 성을 돌았을 때 그 마지막 날 여리고 성이 큰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는데 그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지만 신앙이 많이 물러가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때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는 타는 것 같은 애국과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열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그 말씀에 은혜를 받으며 회개하기 시작했는데 그 집회도 새벽에 시작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도 새벽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요한계시록 22장 16절은 그리스도의 별명을 ‘새벽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스라엘백성들의 구원사에 있어서 이 새벽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복이 부어지는 구별된 시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멸망하는 시간이 이 새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애굽의 군대를 물리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고 예수 부활하게 하신 그 구별된 새벽의 시간에 멸망이 임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 사랑에 빠져 우상을 숭배함으로 돌이키기 힘든 큰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그들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부하였습니다. 자 이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호세아가 “지금이 너희가 여호와를 찾을 때이니” 라고 말했던 이유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멸망하지 않고 주님의 이 애끓는 음성을 듣고 회개의 막차라도 타기를 원하셨습니다.
III.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음
그러면 도대체 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던 두 가지 큰 죄는 어떤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까? 이에 대해서 선지자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지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이스라엘의 죄의 뿌리는 결국 교만이었습니다. 원래 이 교만의 처음 시작은 지적인 것입니다. 즉 이 교만은 지성으로 짓는 죄라는 뜻입니다. 거기에서 발전을 해서 그 교만이 삶 전체를 지배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미친 기운을 가지고 대담해져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왜 교만이 지성의 죄입니까? 모든 교만의 처음 시작은 하나님의 판단을 거부하고 자신의 판단이 훨씬 더 옳다고 믿는 데서 교만은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사단이 뱀을 통해서 인류 전체를 타락으로 몰아넣는 그 큰 계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 사람 하와와 아담을 교만하게 하는 일에 있어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하와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저 과일은 우리가 처분할 수 없고 더욱이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뱀은 유혹했습니다. 그 말이 절대적이지 않은 것처럼, 정말 하나님이 그러시더냐? 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그 과일은 먹음직하고 보암직했습니다. 이 인류의 최초의 죄를 도입한 이 여자는 하나님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이 훨씬 훌륭하며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놀랍고 좋은 결과를 자기에게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그것은 간발의,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것은 마치 기차가 두 선로로 갈려서 만날 수 없는 지점으로 간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겸손과 그 판단을 거부하고 자신의 판단을 더 훌륭하다고 믿는 교만 사이에는 만날 수 없는 갈림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몸으로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고 온 몸이 부딪치고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불행해지고 심지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때 비로소 덜컥 죄에 대해 무서운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두려워하는 것도 자기가 고생할까봐 자기에 대한 사랑 때문에 무서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죄의 뿌리가 바로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릴 때부터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나 여호와는 너의 기업이다” 무슨 뜻입니까?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농토이고 직장 다니는 사람에게는 일터이고 사업하는 사람이고 사업의 원천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업이라는 것은 아주 천성적으로 물려받아서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그 무엇, 그것이 “기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땅이 있었기 때문에 그 설움을 면하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열강들과 어깨를 겨루며 살 수 있었고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는 작은 나라들이 수없이 와서 조공을 드리고 군주의 예를 표했습니다. 땅이 없었으면 그 광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나라가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조공을 바쳤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기업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너희들을 이 세상에서 빛나게 하시고 훌륭하게 하시고 든든하게 하시고 때로는 이 세상에서 시련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인생이 꼬이는 것 같은 힘겨운 상황을 지나지만 하나님이 그 기업이 되시는 한 너희는 안전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이 기업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당신을 대신해서 뭘 하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이 세상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이끌어가고 백성들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거의 죽은 지경으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이유 중 하나가 인구조사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잘못되었습니까? 그 조사가 나쁜 것이 아니라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다윗의 마음이 사단적이었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아예 처음부터 자기 힘을 의지해서 살도록 되어있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그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인구를 조사해서 얼마나 나라가 부강해졌는지 봐라, 전쟁에 나갈 군대가 이렇게 많고 이렇게 어마어마한 말들이 우리에게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정말 다윗답지 않은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그 이름 없는 목동이었을 때 아무것도 볼 것이 없었지만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하나를 보시고 없는 능력은 그에게 주셨고, 없는 지식은 하나님이 알려주시고, 없는 지도력은 하나님께서 갖게 하시고, 온갖 것을 주셔서 그를 이스라엘 역사의 불세출의 지도자요 선지자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 몇 가지 결점을 빼고 나면 이스라엘의 열왕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때 그 나라를 진정으로 번영하는 나라로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고의 모델이었습니다. 그와 맞먹는 사람이, 신약의 에베레스트 산처럼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놀라운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고 유대교와 로마, 헬라주의에 대해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당대의 뛰어난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깨어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기도를 한번하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사람이었지만 어린아이처럼 주를 의지하기를 살 소망이 끊어지기까지 한 지점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고까지 고백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향해 기대하시는 바였고 여러분을 향해 기도하시는 바이고 진정으로 여러분을 복 주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탁월한 사람들이 죽어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무지랭이 같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뜻들을 이루어감으로써 그 인간이 추호도 자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게 하셔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 고집의 주체성을 가지고 내 길, 자기 방식대로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들의 용사가 많다는 것을 의지하면서 처음 사랑의 때에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기대고 의지하던 그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루어 놓은 번영, 그들이 모아 놓은 많은 무기와 길러놓은 마필들, 그리고 그들이 소집해 놓은 수많은 군대들을 “훅!” 하고 한 번에 불어버릴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용사를 많이 모으고 부강한 나라를 이루고 이웃나라들과 친선을 맺기 위해서 이방종교를 가진 여자들을 집안으로 들이고 민족들을 뒤섞는 잡스러운 일들을 통해서, 그 세속주의로 이스라엘이 살아남았습니까? 앗수르에게 모두 짓밟혀버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이 모든 지혜와 강함, 그 모든 힘의 근원이심을 노래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만을 의지하며 살 때와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어떤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시 31:23)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은 없어지고 그냥 탐욕으로 가득한 짐승같은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가 그 번영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 모든 죄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으니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했더라면 그들은 말씀을 사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한 순간도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없이는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물론 예전에는 큰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힘으로 살았고 지금은 지금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번영해보기 위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끄는 관심사가 세상의 것이라면 우리는 쇠로 만든 우상이 없어도 이미 우리의 마음의 종이 되어 우리 자신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에게 회개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많은 죄를 지었고 때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도저히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난관에 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기도가 막히는 것 같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의 문이 열리며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마음이 깨지면서 물같이 쏟아져 내립니다. 눈물이 쏟아지고 내 마음이 물같이 녹아서 하나님께로 흘러들어갑니다. 그때 그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생각은 단 하나입니다.
(찬양)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그런 주님을 향해 녹는 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의존의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 되면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돌아올 것이고 세상을 사랑했다면 끊게 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IV. 적용과 결론
도대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내가 무얼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1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물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가 허물이 있는데 그 허물을 위해서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 즉 내 자식을 제물로 바쳐볼까?” 이 모든 것은 이교도들이 꿈꾸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자는 이 모든 이스라엘의 고민을 한칼에 잘라버리면서 하나님이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 보여주십니다.
(찬양)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모자라도, 때로는 악해도, 때로는 주님을 멀리 떠났어도, 심지어는 이 세상에서 우상을 섬겼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그 죄를 회개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높고 위대하심 앞에서 나는 다만 티끌이고 내 코에 붙어있는 이 호흡도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붙어있는 것임을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기도하지 않을 리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을리가 없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곤고해 졌습니다. 말씀을 떠나 지식에서 멀어졌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이 뿌리를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여러분의 삶을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큰 일을 겪지 말고 이제 눈물로 나의 말씀을 너희에게 보내니 너희는 진심으로, 마음으로 돌이켜 나 여호와에게로 돌아오라. 너희 묵은 땅과 같은 그 마음과 삶을 완전히 기경한다면 잡초와 가시 엉겅퀴로 엉망이 되었던 그 밭에서 너희는 추수철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풍성하게 열린 그 곡식을 보며 행복해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의 줄로 이끄심(1)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2018.10.24 가을말씀사경회 저녁3)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1-4)
녹취자 : 조원정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의 큰 죄는 두 가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과 음란하듯이 우상을 섬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큰 두 죄의 뿌리는 그들이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왕국의 번영을 믿었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돌 같은 마음에 깨닫게 하려고 가족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두 개의 가족 이미지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남편, 또 하나는 아빠입니다. 남편은 이미 호세아 선지자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미 전해졌습니다. 경건하였을 선지자에게 주님은 가혹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는 바로 유명한 디블라임의 딸 고멜에게 장가들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여자는 당시에 이름 난 신전의 창녀였을 것입니다. 이 여자와 함께 결혼해 자신의 온 몸으로 이 여자가 어떻게 자기를 버려 더러운 삶을 사는지, 자기가 어떻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다시 찾아오고 또 나간 자를 다시 찾아오는지 온 몸으로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반역을 대조해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행동 예언이라고 부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린 이스라엘이 즐겨 따르던 아빠’로 등장합니다. 그 아빠의 자식을 향한 가슴 저미는 사랑과 끊임없이 외도하고 방탕한 길을 가는데도 그 여자를 잊지 못해 다시 찾아가는 아름다운 남편을 그림으로써 이스라엘의 돌 같은 마음을 녹여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지자는 11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가 없을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II. 선지자들을 보내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 사랑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선지자를 보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멀리 떠나기 쉬운 습성이 이스라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왕이나 제사장들과 함께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제사장은 불결한 죄를 지은 자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해주는 사람이라면 선지자는 과감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우편배달부나 혹은 법원의 통고인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되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통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여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받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다가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다시 주님을 믿고 그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선지자를 보내신 이유였습니다.
A. 말씀을 통해 부르심
그래서 선지자들은 말씀을 통해 부르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하고 부패한 시대일수록 이에 비례해서 능력 있는 걸출한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혹은 더 많은 수의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어느 때보다 이 때가 북 왕국이나 남 왕국이나 깊이 타락한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어두운 시대에 이름만 들어도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는 걸출한 선지자들을 한 시대에 쏟아 붓듯이 보내어 하나님 말씀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바로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요나, 이런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8세기였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온 마음으로 전파하였습니다. 요나 같은 선지자는 선지자들 중에 약간 급수가 떨어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못마땅하며 말씀을 전하다가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서 회개하는 경험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분은 매우 예외적인 선지자였고 나머지 모든 선지자들은 불타는 마음으로 ‘주 뜻 이루어지이다.’라는 심정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더욱이 호세아의 말씀은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과 그 사랑 때문에 질투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이스라엘에게 같이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호세아 선지자의 별명이 사랑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호세아서 전체가 흐물흐물한 사랑이야기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마음속에 누군가를 향한 이성의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의 깊이만큼 질투의 정이 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신이라고까지 말씀하셨으니, 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독점적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한편으로는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눈물겹게 온 몸으로 피를 흘리며 전했고, 또 한편으로는 이 사랑을 등지고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비례하는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그들이 한편으로는 주님이 때리시는 채찍을 맞으며, 또 한편으로는 당신의 품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아버지 사랑 안으로 돌아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하나님께 나아가게 도와주는 제사장 같은 사람만 필요로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들에게는 왕도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데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어도 그들 홀로 내버려 두면 반드시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나는 예외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외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고, 그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하고 수시로 세상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에 줄을 끊어 하나님만 붙들어 살게 만들어 주는 선지자의 예언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는 요리사도 아니고 더욱이 제사장은 더더욱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제사장이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나라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단 한분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누구도 우리의 죄를 위해 중보하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할 구속의 공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를 말씀으로 붙들기 위해 하나님이 이전의 선지자들의 기능을 목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령들이 되게 하셨고 그 말씀을 전함으로 하나님은 그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고 그 말씀으로 여러분들을 먹여 참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시기 위해 목회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셔서 주님을 멀리 떠나가고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어리석은 신자들을 부르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당신께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굳어졌을 때 그들에게서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 버려 그들의 마음이 무너지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바꾸기도 하시고, 때로는 그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게 하심으로써 이 상황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이제는 주님께만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양하게 환경과 마음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다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반역하고 세상 사랑으로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부지런히 타락할 때에도 쉼 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믿지 않으십니까? 우리들은 잠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들풀의 이슬처럼 사라지는 유한한 인간이고,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갈 수 없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구속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들풀에 맺힌 이슬과 같은 존재들이고, 우리의 육체의 영광은 이슬 끝에 잠시 반짝이는 아침 햇빛에 불과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있으니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인가 하는 것 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가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명백한 사실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따윈 세상에 없다고 말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아직 이 세상에서 고통을 덜 받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사람이 고통을 받고 주님께 돌아갈 때가 되면 그는 입을 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 앞에 자신의 죄가 드러났고, 그 말씀의 빛 앞에 자신이 사실은 얼마나 주님을 멀리 떠났는지를 모두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눈물을 흘리며 말씀을 통해 깨달은 자신을 뉘우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언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저와 저의 일행이었던 선교사 한 분과 외국의 한 공항에서 비행기를 함께 갈아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혹시 비행기를 놓칠지 모르기 때문에 게이트 가까운 곳에 있는 커피숍에 앉아 있었습니다. 시간은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랜만에 밀렸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며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 비행기 탈시간이 되었지 하고 보는데 비행기는 30분 전에 떠났습니다. 비행기에 사람이 안 타면 복잡한 일이 생깁니다. 그 사람의 짐을 내려야하기 때문입니다. 짐을 실었는데 사람이 안 탔다는 것은 그 짐이 폭발물일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타려고 했던 비행기는 그렇게 엄격한 나라의 비행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짐만 싣고 비행기는 가버렸습니다. 사람이 안 탔을 때 틀림없이 방송에서는 수없이 미스터 김남준, 미스터 아무개, 수없이 불렀을 것입니다. 우리가 달려가서 비행기가 떠났는데도 우리한테 알려주지 않느냐고 했더니 수없이 방송을 내보냈다고 합니다. 들렸으나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안 들은 것입니다.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설교를 진정으로 들을 때가 얼마나 되는지 양심적으로 대답을 해 보십시오. 저도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고 젊은 날의 충천하던 혈기도 많이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목회를 하면서 돌아다니면서 내 욕을 하는 것은 참아도 설교 시간에 안 듣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하도 그러는 사람을 붙들고 ‘너는 이 교회가 안 맞으니 짧게 예배드리는 교회로 빨리 옮겨라. 더 힘들지 말고, 똑바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려면 다른 방에 가라.’라고까지 했습니다. 들리는 것은 곧 듣는 것은 아닙니다.
(예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자매가 남자친구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서 교회 왔습니다. 죽을 맛입니다. 연애하는 사이였는데, 남자친구가 지하실 교회에 와서 예수를 깊이 만났습니다. 이제 회사 생활 하면서 만날 시간이라고는 (당시에는 토요 휴무도 없으니) 일요일 밖에 없는데, 남자친구가 이른 아침부터 교회 가서 어두워 질 때까지 교회에 가서 안 나타납니다. 하도 답답한 마음에 자매가 형제를 찾아서 교회로 왔습니다. 같이 교회를 다니자고 찾아왔습니다. 자매와 형제가 나란히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수없이 자매를 툭툭 칩니다. 자매의 관심은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그 형제와 더 잘 되려고 교회 왔는데, 오전 예배드리고 점심 먹고 전도 갔다 와서 오후 예배를 드리면서 끝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가 예배 시간에 계속 조니까 형재가 자매를 툭툭 쳤습니다. 급기야 저는 자매와 상담을 하게 됐습니다. “목사님. 정말 이 짓은 못하겠습니다. 내가 깨끗이 결혼 계획을 접고 시골로 내려가겠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렇게 해라. 그런데 결혼 적령기도 되었는데 사랑하지 않니?”라고 물었더니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겠니? 그러니 지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형제에게 “너는 이 자매가 주일날 교회 오든 말든 눈길도 주지 마라. 될 수 있으면 따로 떨어져 앉아라.” 자매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교회에 몇 달 나왔지만 설교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러니 세 번째 자리 정 가운데 앉아서 주일 설교 네 번만 듣고 그 다음에 시골로 내려가든지 다시 잘해보든지 결심을 해라.” 지금 같으면 조심스러워서 그렇게 말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예배의 자세는 부동자세다. 눈길을 무릎에도 주지 말고 나만 쳐다봐라. 그렇게 네 번만 예배 드려라.” 정확하게 3주 만에 깊이깊이 회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했습니다. 열린교회 집사까지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온통 마음에 자기가 겪고 있는 힘든 상황과 환경에 대한 말하고 싶은 사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인생의 문제는 그렇게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속에 들어가서 자신이 누구이고 왜 이런 일을 겪게 되었고 하나님은 나에게 이제 나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하시는가? 그것을 깨닫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때 인생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이사람 붙들고 저사람 붙들고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배설하듯이 쏟아내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야 불쌍하니까 들어준다고 하지만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너 틀렸어.’ 하고 삿대질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끄덕 거려 준다고 한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변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똑같이 그들도 듣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없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빈말로 말씀하시는 적이 있습니까?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냥 좋게 읽으라고 하신 성경이 있습니까? 위에 분이 말씀 하실 때 깊은 마음이 밑바닥에서부터 끌어 나오는 말로 충심을 담아서 눈물과 아픔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그 높으신 분이 우리 같은 하찮은 인간이 말을 그것을 들을 때 어떤 태도로 듣기를 원하시겠습니까? ‘내 꼭 들을 건 아니지만 한번 이야기 해 보슈. 쓸 만한 것 있으면 내 참고하리다.’ 이렇게 하고 두발을 꼬고 팔짱을 끼고 거만한 태도로 들으시기를 기대하며 절절한 이야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겠느냐 이것입니다. 무슨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깊이 듣지 않는 것은 죄라는 이야기라는 것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체 높고 여러분들이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와서 도움을 구하는데 그렇게 거만한 태도를 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이 잘못된 것이라고 전혀 생각을 안 합니다.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만 들은 적은 한 번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내어 당신의 중심을 전하셨습니다. 선지자들 중 요나와 같이 c급 선지자들은 전하는 말씀과 하나님의 심령이 일치했다가 떨어졌다 반복했지만 호세아는 그런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복, 가정의 즐거움, 아내와 누리는 성적인 기쁨, 아름다운 부부의 이런 것들을 모두 그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 사랑 전해주는 데 사용해 버렸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 말씀의 화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준엄한 심판을 경고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인생에 한번 넘어지는 씻지 못한 큰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이 있었다면 그 커다란 넘어짐이 있을 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 그때 나를 회개하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이 나를 위한 마지막 말씀이었구나. 그때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라면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을 텐데.’ 누구에겐들 이런 경험이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니 말씀을 듣는 분들이 되십시오. 비록 그 시절처럼 내가 그렇게 담대하게 여러분들에게 제안하지는 않을지는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이 예배 생활을 확 뜯어 고치고 진짜 바른 정신으로 진정한 예배 자가 되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이제껏 여러분들이 만나지 못했던 더 위대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개가 와도 안 받을 것 같은 그런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고통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최고로 표현하셨는데 그것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여러분들도 고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팔로 안아 가르치심
이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선지자를 보낼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갓난아이를 양육하는 그림입니다. 3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 그들은 알지 못하였다” 갑자기 갓난아이를 양육하는 그림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 고사리 같은 아이의 두 손을 손으로도 붙들 수 없어서 손가락으로 붙들며 걸음마를 아이에게 걷게 하고 넘어질 것 같은 아이를 팔로 안으며 그렇게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를 번역한 것이 권위 있는 성경에서는 “그들의 팔로 안았다”라고 나옵니다. 그들의 팔은 하나님의 팔이 아닌 선지자들의 팔이었다는 것이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서 신앙으로 간신히 일어선 이스라엘이 마치 기저귀 찬 갓난 아이 같은 아이를 손가락 두 개로 두 주먹을 붙들어 주고 걷게 하다가 넘어질 것 같으니 선지자들이 안아주어서 다시 똑바로 세우고 절대로 다치지 않도록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선지자들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주어서 그 주신 말씀으로 붙들리고 말씀으로 안겼으니 결국은 이렇게 해석하나 저렇게 해석하나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조금 받은 사람은 설교자가 어느 교회 목사님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를 캐묻습니다. 그러나 진짜 은혜를 많이 받은 분은 설교자가 누구인지 생각이 안 납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아마 조국교회라는 표현을 제가 최초였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 저 때문에 보편적인 명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요즘은 조금 덜 사용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조국 교회는 이러면 안 됩니다. 조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돌아와야 합니다.” 설교를 하고 퇴장을 하는데 청년 하나가 따라오더니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조국교회 담임 목사님이 누굽니까?” 진짜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은 사람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찬란하게 비추어 주셔서 그 말씀에 빛만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말씀이 그를 넘어질 것 같을 때 붙들어주고 쓰러질 것 같을 때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신자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걸음을 떼어 놓을 때 당신의 종들을 통해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혼자 성경을 읽으며 말씀을 새록새록 깨닫게 됩니다. “비록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러나 주님 내가 어떻게 믿고 살아야 할까요?” 신기하게 하나님이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가락 다섯 개로 손가락 하나를 붙들고 뒤뚱뒤뚱하며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던 아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성장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군사와 같이 자라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힘으로 가나안의 나라를 세우고 자기 힘으로 땅의 판도를 넓히고 자기의 힘으로 풍년이 들어 번영했다고 생각하는 북 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 사실은 하나님이 옛적부터 그들을 그렇게 돌보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타락한 지금도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잊었으나 하나님의 마음에는 그 갓난아기 적에 이스라엘이 그리움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세상 번영을 취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즐거움으로 매일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몸집은 컸으나 다 병든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걸출한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의 병든 몸과 마음을 진리의 영약으로 치료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은 한사코 선지자들의 진리를 거절했고 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결코 선지자들이 전해주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으니 이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싫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큰 구원을 베푸시고 온갖 복을 주신 하나님이신데 그들은 왜 그렇게 하나님을 싫어하시는 것입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덕을 보려면 아부라도 하면서 가까이 가려고 애를 쓸 텐데 그 부자, 그 권력자보다 뛰어난 하나님을 알면서 그분을 그렇게 지겹게 싫어하고 그분께로부터 도망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존 오웬 목사님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나님이 막으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많은 복과 은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것과 양립할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신 평안과 하늘의 신령한 복은 우상숭배와 양립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너무 좋았고 그들은 하나님 없이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너무 신났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세상의 복보다 하늘의 복을 구할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인생에 큰 문제는 물질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물질이 많으면 인생의 문제가 없어집니까? 고뇌하는 부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재산을 남기고 이슬처럼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힘든 것은 사람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 사람 때문에 인생 꼬인 사람 많습니다. 왜 역지사지는 생각 안합니까? 자기는 다른 사람 때문에 꼬여서 힘들지만 자기는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 자기 때문에 인생이 꼬여서 힘들어 합니다. 그냥 하나님이 특별히 붙잡아 준 사람이 아니면 서로 꼬이고 꼬고 그렇게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한테 꼬였을 때 이변이 일어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원래 일어나야 하는 일이 이제야 일어나게 된 것만으로 감사하십시오. 그렇게 꼬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대해야 합니다. 새벽에 안 나오시니까 무슨 설교인지 모릅니다. 인생이 꼬였을 때 기대하라. 새벽시리즈입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되고 꼬일 때 항상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오늘 회개하십시오. 우리 엄마 때문에, 우리 아빠 때문에, 내 자식 때문에 동기간 때문에 심지어는 동서 때문에 별의 별 사람을 다 끌어들이면서 내 인생 꼬였다. 진짜 원하기는 여기에서 탈출하고 싶다. 탈출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을 꼬이게 하는 수보다 여러분들이 꼬이게 한 사람 수가 훨씬 더 많습니다. 절대로 아멘을 안 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꼬였을 때 믿음을 가지고 하나하나 주님 앞에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기한 방법으로 그 꼬인 매듭을 완전히 새롭게 푸시면서 안 꼬였더라면 뻔한 길로 갔을 텐데 꼬여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 저의 원래 꿈은 영문학자였고 수필가가 되는 것입니다. 철저한 무신론자로, 지금쯤은 정년퇴직했을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신이 낫겠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좋았겠습니까? 꼬이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영문학자보다 더 좋은 신학을 공부하고 글도 쓰고 더욱이 이렇게 설교할 때 이렇게 많이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오늘도 설교 준비하면서 내 인생이 꼬이게 하신 하나님 찬양하라.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번영하고 있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병든 아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불쌍한 아들을 고치고 싶었습니다. 간절히 눈물 어린 마음으로 사랑하는 호세아 선지자를 보내어 누구도 역사상 그 전에도 후에도 이렇게 처절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전하였던 선지자는 없습니다. 차라리 한번 불속에 던져져 순교를 당하는 게 낫지 않은가요? 그 과정이 갈갈이 찢어지는 그 형벌 받을 고통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진짜로 감동을 받아야 되는 지점이 이것입니다. 호세아의 결혼 생활은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반대하는 학자도 있지만 제가 말씀 드린 학설이 훨씬 더 유력합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의 명령에 너무 순종했기 때문에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데려다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뛰쳐나갔습니다. 많은 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선지자 호세아가 신전 창녀로서 거의 스타급의 여자에게 장가를 간 것은 온 동네에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여자가 호세아와 결혼했지만 예전에 거기에서 맛보던 즐거움과 신전에서 그렇게 몸을 팔던 시절을 잊지 못해서 돌아간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아이들을 낳습니다. 호세아가 그 가족도 값을 주고 다시 사옵니다. 고멜은 이 일을 반복하는데 이 선지자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시기 때문에 이 여자를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하나님의 메시지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도덕으로써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선지자에게는 잔인한 일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호세아가 그렇게 방황하면서 타락하고 외도하고 심지어는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자식을 낳아 그러고 있는 그 여자를 가슴 저미는 애정으로 사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냥 데려 온 것이 아니라 절절이 그 여자가 불쌍하고 너무 가엾고 너무 그리워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한 사람은 호세아를 거의 다 이해한 것입니다. 절대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서신입니다. 제가 죽기 전에 다른 주석은 몰라도 호세아 주석을 쓰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호세아가 음탕한 아내라고 조차 할 수 없는 그 여자를 그렇게 절절히 사랑하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그 여자에게 어떤 아름다움이 있었을까? 세월이 흐르도록 그렇게 하고 다녔는데 여자가 그림 같이 예뻤으면 얼마나 예뻤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그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 여자에게 좋은 점이 있어서 그렇게 사랑스러웠던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부어주신 불타는 사랑이 도저히 이 여자를 붙든 그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거의 뼈 속 깊이 사무쳐서 타락하고 더럽게 되었는데도 호세아의 마음속에는 말하자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고백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그런 사랑으로 이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도 그렇게 당신의 말씀으로 처음 신앙의 발걸음을 떼어 놓게 하셨고 그 말씀으로 우리들을 일으켜 세워 뒤뚱뒤뚱 걷도록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쓰러졌을 때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지 않도록 당신의 팔을 펼쳐 우리를 막아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잊어버리면 신자일 수가 없습니다. 일평생 세월이 아무리 많이 변하고 세상이 나를 속이고 내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이 나를 떠나도 이 가슴 저미는 사랑을 주께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서 있는 이 삶의 상황이 나는 정말 싫지만 나를 그렇게 말씀으로 양육하여 그 진리의 품안에서 나를 자라게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그 사랑으로 그 불쌍한 인간들을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냥 그들을 위해서 울어주는 것이 하나님 사랑을 안 자녀들의 삶입니다. 감사가 없고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 좀 틀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때가 있습니다. 생각을 바꿔 보십시오. 하나님이 뭘 잘못하셨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뭘 나쁘게 하셨습니까? 아우성치며 소리하겠죠? 은혜의 물에서 멀어지면 원래 입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남들은 금수저 물고 좋은 집안에서 훌륭한 덕을 갖춘 엄마 아빠 밑에서 좋은 교육 받으며 자라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상처가 많은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믿음으로 살았더라면 좋은 가정에 태어난 사람보다 더 놀라운 일을 걷게 하셨을 것입니다. 어느 시절인데 지금 그 긴 세월 동안 똑 같은 타령을 하며 살아갑니까? 버리지도 못할 남편 헤어지지도 못할 아내를 두고 나는 왜 좀 더 좋은 사람을 못 만났을까? 더 좋은 사람 만났더라면 더 좋은 사람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꼬인 것은 대부분 하나님이 꼬아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죄짓고 불순종하고 교만해서 하나님 말씀 버리고 상식으로 판단하다가 저 멀리 아브라함과 헤어졌던 롯처럼 하나님의 응답 없이 그냥 넉넉하고 좋은 땅을 선택하여 가다가 전쟁이 나서 쫄딱 망해 도망을 가고 포로가 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불신앙과 잘못으로 지혜 없음으로 꼬인 인생인데 왜 하나님을 원망합니까? 마음의 태도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의 위로나 치덕치적 사람들에게 치대면서 위로나 구하고 자기 편의나 들어주는 것에 위로를 받고 우리의 인생에 그따위 싸구려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인생이 근본적으로 변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인생의 방향이 바뀌고 물이 없어 건조한 땅을 지나며 목말라 죽어가던 사람들이 사막에서 샘물이 터지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편을 들어주고 돌아서면 사람들이 ‘아이고. 저 철없는 것….’ 합니다. 그것이 인생에 도움이 됩니까? 무슨 도움이 됩니까? 뜨거운 여름에 마신 진한 미지근한 설탕물 한 모금입니다. 신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살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려니 하면서, 너무 사는 것이 힘듭니다. 원래 사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앞으로도 힘들 것입니다. 그것이 펙트입니다. 그렇다면 ‘난 어떻게 그렇게 힘든 세상을 헤치면서 살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말씀으로 부르십니다.
III. 적용과 결론
나는 오늘 한가지만을 말씀드렸습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사랑의 첫 번째 표현으로 선지자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 곤고한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마음을 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는 더 멀어질 것이고 세상을 사랑하여 우상을 섬기듯이 세상으로 간 사람들은 더 깊이 그 일에 매진하다가 세상에게 배신을 당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유혹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믿음이 있기 때문에 유혹하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파산하고 나면 세상이 보기에 그런 사람들은 유혹할 가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정말 존귀하게 되었을 사람들이 그렇게 버림받고 내동댕이쳐진 채 살아가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고 그 팔로 안으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은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을 향한 지루함과 심지어 반감을 느끼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아파합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우상을 숭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값진 보물로 유혹을 하며 ‘내가 더 많이 줄게.’ 하며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미련한 방법으로 그들을 부르셨으니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처절한 선지자의 결혼 생활을 통해 그의 마음에 피눈물 나는 메시지를 통해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돌이키는 복으로 가까이 다가왔고 듣지 않는 사람은 심판의 어두운 길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2018.10.24.가을말씀사경회4
2016
사랑의 줄로 이끄심(2)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1-4)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2018.10.25 가을말씀사경회 저녁4)
녹취자: 이경순
Ⅰ.본문해설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은 두 가지 죄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첫째는 여호와를 멀리 떠난 것이었고, 둘째는 우상을 숭배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 선지자를 보내어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마 심판으로 가는 것을 보실 수가 없어서 그들의 악이 크면 클수록 더욱 강력한 말씀의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을 하나님께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로 이 일을 하셨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모세시대에 주신 율법이 특히 시내산에서 주신 두 개의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이 이제 700년이나 후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준수되어야 할지를 해석해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호세아 선지자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시대에 좀처럼 행하시지 않는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호세아의 비참한 가정생활을 통한 생생한 그림 같은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두 가지 이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Ⅱ. 사랑의 줄로 이끄심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이 하신 또 한 가지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줄로 이끄신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우상을 숭배하여 타락했지만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선지자들은 불타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하나님의 심정으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선지자들을 하나님이 불러 그들에게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신 것은 오직 단 하나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 하나님이 그들을 애급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심어놓으신 목적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미끄러졌습니다. 그들은 그런 소명을 따라 살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갔고, 소명에 헌신하기에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미끄러져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한 손에 작대기를 드시고 그들을 징계하려고 하시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애끓는 음성으로 그들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았어도 미끄러질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미끄러지게 한다고는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죄의 저자도 아니고 죄를 짓도록 여러분들을 미혹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모두 우리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미혹됨으로 우리는 은혜에서 미끄러져 죄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 죄의 결과는 쓰디쓴 고통과 하나님의 끔찍한 징계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죄로 미끄러져 가는 동안에는 죄가 놀라운 보상을 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에 취해서 사람들은 죄가 몰고 올 마지막의 큰 위험에 대해 눈을 감은 채 매일 매일의 즐거움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어느덧 헤어 나오기에는 너무나 깊이 빠져 들어 가버렸습니다. 이따금 어떻게 좀 사는 것이 너무 힘겹고 다른 삶을 살고 싶어서 허우적거려 보지만 마치 깊은 진흙 수렁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릴수록 공간이 생기며 몸 전체가 더 빨리 미끄러져 내려가듯이 절망적인 상황이 되풀이 됩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해야 될까요? 그래서 어떤 때는 ‘아. 이거는 정말 아니구나.’ ‘이런 식으로 해서 될 것이 아니구나.’ ‘능력 있는 종이 어디 있다더라.’ 그리고 가서 설교를 듣습니다. 혹은 손바닥에 피가 터져라 찬송을 부릅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지성의 스위치를 끄고 무슨 신비적인 일이 일어날까 기대하며 그렇게 박수를 칩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에 밀려오는 허망함은 죄 가운데 미끄러져서 받았던 절망감보다 작지를 않습니다. 저의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그런 일들이 지금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서 좀 변형된 형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70년, 80년대의 어마어마하게 사람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던 많은 기도원들이 매각절차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20년 전부터 ‘수양관, 기도원 저렇게 크게 짓는 것은 20년 후에 아닐 것이다.’ 저의 이야기를 들은 지체들이 여기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손바닥에 피터 져라 박수칠 장소도 없습니다. 대신 이제 주먹만 한 핸드폰 안에 그런 신앙을 끊임없는 자기의 죽음과 회개가 아닌 마치 설탕에 꿀을 바른 것처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가르침들이 유행합니다. 이단이 가장 매력적입니다. 이단에 빠진 많은 사람들은 한 번에 그것을 믿은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교회에서 영혼이 살아나는 경험하기가 힘들었던 사람들이 그렇게 빠져가는 것입니다.
난 오늘 여러분들에게 평생 잊으면 안 될 중요한 한 가지를 말씀으로 가르쳐드리면서 이 설교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미끄러지는 것은 아주 다양한 이유로 미끄러집니다. 근본적으로는 죄 때문에 미끄러지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매개체를 사용해서 미끄러집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미끄러진 방식을 주목합니다. 그런데 미끄러진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일어나느냐하는 것입니다. 미끄러지는 원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도 그 미끄러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그것은 지성에 말을 거시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진흙탕 수렁에 빠져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시는데 내미는 손은 말씀이고 그 사람이 안 미끄러지겠다고 붙잡는 손은 그 사람의 지성입니다. 마음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끌어내어 일으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인생이 그렇게 수렁에 빠진 것 같고 넘어진 것 같은데 이번에 그냥 해결을 안 하고 넘어가고 3년, 5년, 6년 뒤에 사태가 훨씬 더 심각하고 파괴적이 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여기에 다시 모인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똑같이 손을 내밀고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똑같이 하나님은 말씀의 손을 내밀고, 여러분들은 지성으로 그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성은 마음으로 흘러들어가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도저히 자신은 꿈도 못 꾸던 그 인생의 수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설교자의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거나 그 일이 너무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면 온몸을 던져서 실행해 보십시오. 피투성이가 되고난 그 때 ‘그 말씀이 내게 주시는 인생의 매우 중요한 경고였구나.’, ‘그 때 그 말씀을 들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엄청난 시련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신앙은 남이 넣어 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가졌던 바울의 설교를 듣고 졸았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을 전할 때 귀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은 누구였을 것이고 그 성령 충만했던 하나님의 사람 스데반의 구속사를 꿰뚫는 설교 앞에 귀를 막고 소리를 질러 돌멩이로 쳐 죽였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신앙은 자기가 싫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다고하는데 하나님은 믿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 감화를 주십니다. 믿고자 해도 안 믿겨질 수 있지만, 하나님이 믿게 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려고 하는 사람 마음속에서 자기가 깨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서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라.’ ‘주께 돌아오라.’ ‘내 마음을 찢으라.’ ‘통회하라.’ ‘애통하라.’ 왜 그런 명령을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믿는 것은 여러분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지만 안 믿고 곤고하게 사는 것은 여러분 덕분입니다. 그 책임성을 못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도 못 느낍니다.
저도 연초에는 가을 사경회 때 호세아를 설교하리라고 상상도 안했습니다. 우리 연구실의 직원들이 증인입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주석서들을 복사했는데 복음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굳이 제 마음을 움직여 이것을 설교하게 하셨습니다. 우연일까요? 어떤 분들에게는 이 설교가 맑은 정신으로 듣는 마지막 하나님의 경고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지성에 말씀을 건네시고 그 말씀을 알고 그분을 붙들려고 하는 사람들을 건져내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상을 섬겼던 죄를 사해주셔서 다시 돌아온 탕자처럼 아버지의 유업을 누리며 그 사랑을 받으며 살게 해주십니다. 세상에서는 전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차위반하고 과태료 낸 정도는 호적에 기록이 안 남지만 음주운전을 하거나 만약 이웃을 모욕해서 벌금형을 받으면 예외 없이 그 범죄기록에 남습니다. 우리 임직자를 당회에서 모두 추천했습니다. 그리고 투표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중직 자를 임명 할 때에는 범죄사실 증명을 반드시 첨부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순전함을 할 수 있는 한 우리가 추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무엇을 해도 반드시 그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면 깨끗이 지워주십니다. 그리고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지만 그들을 건져내실 때 선지자를 보내어 그 말씀으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히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하든지 은혜를 받고 자기가 일어나야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사실 그런 사람이 다시 이런 놀라운 하나님 은혜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성으로서 미끄러진 자의 손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서 사랑의 줄로 이끄신다고 표현합니다. 정확하게 묘사를 하면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줄’과 ‘사랑의 줄’은 똑같은 이야기를 풀어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줄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을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본 적이 없지만 주석가들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옛날에 아이들이 이제 막 뒤뚱뒤뚱하면서 걸음마를 배울 때 줄로 아이를 매어 주어서 안 넘어지고 걸어갈 수 있도록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줄로 띄워서 아이가 안 넘어지도록 하는 일종의 보행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해석이 있는가 하면 둘째, 주인집에 정든 소 같은 짐승에 이렇게 고통을 주는 줄을 매단 게 아니라 부드러운 줄을 묶어준 것을 이 사람의줄 사랑의 줄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짐승을 묶을 때는 짐승이 많이 고통 받을까 이런 거 옛날사람 별로 생각 안 하고 그냥 묶어버리지만 사람에게 묶을 때에는 아프지 않을까 등등을 고려해서 묶는 그런 자비로운 행동을 짐승에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의 묘사가 좀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이 구절이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두 가지 표현이 중첩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줄’과 ‘멍에를 벗김’입니다. 그래서 이게 만약에 짐승이라면 이것을 사람의 줄과 사랑의 줄이라고 표현한 것이 적합하지 않고 만약 이것이 사람이라면 멍에를 벗겼다는 것이 적합하지 않은데 저의 판단은 이 구절이 혼란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어린아이와 가축 두 이미지가 한꺼번에 이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설교 말씀 전할 때 하나님이 마음이 굳어진 이스라엘을 설득하기 위해서 두 가지 가족의 비유를 사용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아내와 남편 그리고 아들과 아버지의 비유를 사용하셔서 은유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설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제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어떤 말씀을 하냐하면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지만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는 밭을 갈고 야곱은 흙덩이를 깨뜨리리라”(호 10:11)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에브라임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애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암소 같은 이 에브라임이 그리고 원래 북 왕국 이스라엘 그 지방이 소들로 유명한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아주 소들이 살이 잘 찌고 발육이 잘 되는 지역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종자적인 이유도 있고 환경적인 목초지나 이런 것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아주 힘이 좋고 그리고 우량한 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힘센 사람들 혹은 세력을 가리켜서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성경이 표현합니다. 그 암소가 그렇게 우량하고 힘이 센데 주인에게 고분고분하면서 그리고 주인이 일 년 동안 농사를 함께 짓습니다. 추수철에 곡식이 무르익었습니다. 그러면서 소가 함께 가면서 곡식을 밟아서 떠는 것입니다. 탈곡 같은 것을 하는데 이 소가 동원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그 수확의 기쁨에 한없이 즐겁고, 주인이 보기에 이 소가 너무 충직하게 일을 잘 해주어서 이런 소득을 거두었으니 주인의 눈에 이 암소는 너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이스라엘이었단다.’라고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즐거움의 때가 끝나고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었는데 원래 소의 임무는 밭을 가는 것인데 사람을 태웠으니 지금 뭔가 잘못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 글을 쓸 때, 선지자의 눈에는 이렇게 사람이나 물자들을 싣고 전쟁에 동원되는 소에 대한 그림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고 또 유다는 밭을 갈고 야곱은 흙덩이를 깨뜨리는데 이게 결국은 자기네 밭을 갈고 기분 좋은 농사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혹사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서 본래 누렸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관계의 기쁨, 하늘의 복만이 아니라 땅의 복까지 받았던 상태에서 심한 고통과 심한 고난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멍에’란 본문에 나온 멍에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4절의 뜻은 어떤 뜻이 되냐면 4절의 앞부분은 “내가 사람의 줄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이것은 아버지와 어린아이와 메타포 은유가 되는 것이고,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멍에를 지고 고통하고, 고난을 받는 상황 속에서 그들을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이 고통의 멍에를 벗겨주고 그렇게 혹사당하면서도 먹지도 못해 고통을 받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줘서 원래의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 있을 때 누렸던 행복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아주 두 개의 은유가 함께 섞이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 하고 세상을 사랑할 때 마지막에 우리가 짊어지게 되는 그 멍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주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함께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면서 또 충직한 암소를 사랑으로 대하는 농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11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니…”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붙잡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맨 처음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그냥 갈대와 우르에서 그렇게 우상을 섬기던 집안과 도시에서 태어나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당신 자신이 여호와이심을 알려주시고 그 무지한 아브라함을 하나하나 깨우쳐 신앙을 갖게 하셨습니다. 드디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그는 약속의 땅을 여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지식의 빛에 반응하는 훌륭한 신앙이었고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요 주님은 그 믿음을 보면서 그를 의롭다 여기셨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별빛처럼 희미했던 지식들은 그의 자식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 이르기 까지 점점 분명해졌고 그 과정에서 그 처음 믿음의 사람들은 무수히 넘어지고 범죄하고 미끄러졌습니다. 하나님이 팽개쳐 두시지 않으시고 쓰러질 때마다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의 손을 내미시고 그들은 믿음으로 주님의 손을 붙들어 넘어진 자는 일어섰고 미끄러진 자는 다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어린아이와 같던 이스라엘의 믿음은 점점 자랐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청년 같은 믿음이 되어서 믿음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을 정복하기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걸출한 지도자 모세가 사라졌는데도 그들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믿고 따르며 그 위대한 가나안 정복의 위업을 달성해 냈으니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얼마나 크게 성장시켜주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 역사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 자기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까마득한 그 옛날 주전 22세기경의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8세기 주전에 이르기까지 약 천 사오백년 되는 기간 동안 하나님이 그 어린아이 같이 태어나 걷지도 못하는 그 어린 아기를 하나님이 양육하고 기르고 길러서 이제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나라였습니다.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셔서 거기서 자기들을 그렇게 인도하신 말씀의 하나님 자기들을 그렇게 사랑하신 자비의 하나님을 온 세상에 선포하여서 그들에게도 구원의 빛이 비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동안에는 풍성한 소출에 기뻐하는 충직한 일꾼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농사일이 끝나면 무거웠던 멍에를 풀어주고 가축을 쓰다듬으며 쉬게 하시며 먹을 것을 주었던 선한 농부처럼 그렇게 그 짐승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어린 아이의 은유가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이 암소의 은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충직한 일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러분들은 그저 자기인생의 무게 하나가 너무 무겁다고만 투정을 하고 힘겨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어떤 위치에 불러 주셨고 또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떠한 사명을 주셨는가 하는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힘들고 인생의 무게가 무겁다고 하는 것 하나로 모든 것을 퉁 치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면 퉁치고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과연 우리를 그렇게 하실까요?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이스라엘을 향해 같이 있었습니다. 버릴 수 없는 내 아들, 아무리 멀리 떠나도 내가 불러와야하는 내 어린 아들의 그림과 그들이 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라는 당연한 두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련과 고난 속에서 자기를 지탱하는 것조차도 힘들어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많은 시련과 고난 역경 그리고 가슴 아픈 갈등들을 이겨내면서 ‘내가 하나님의 나라의 암소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부름 받은 일꾼이다.’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붙들며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여기실까요?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느껴집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이 설교를 들으면서 ‘아, 하나님 저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반드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과 함께하셔서 그렇게 고난과 시련 갈등 속에서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놓지 않고 어찌하든지 충직한 일꾼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여러분들의 착한 마음을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과 함께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이런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번영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기를 일찍이 하나님을 경배한 것보다 더 큰 열심 으로 그 일을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번영을 위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두 번 잘못하는 것입니다. 한 번은 날 위해 자기 몸을 버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마음에 다시 한 번 못을 박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행복할 수 없는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거나 달콤한 게 많아서 주님을 버리고 멀리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비록 세상을 향한 불타는 사랑은 없으나 염려와 근심 속에 미끄러지며 불신을 배워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습니다.”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얼마나 다행입니까? 전 14살 2달 때 깨달았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죽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서운데 사는 게 오금이 저리도록 무서웠습니다. 원래 인생이 토할 것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고 게임이나 하고 있어야 할 그 어린아이가 누구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자지러지도록 그렇게 인생의 무게를 느꼈다면, 이제 알 것 다 알고 온 몸으로 그런 무게를 경험해보고, 믿었던 관계에서 버림받는 경험까지 해본 여러분들이 아직도 인생의 무게를 못 느낀다면 천사든지 바보든지 둘 중에 한사람입니다.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생의 무게가 참 무겁다고 생각이 될 때 길거리에 나가보십시오. 그리고 오가는 사람을 모두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아, 저 사람들도 다 나 같은 무게를 짊어지고 대하소설을 쓰며 이때까지 살아왔겠구나!’ ‘저 사람은 초 장편소설 한 편 나오겠구나.’ ‘여기는 중편소설, 여기는 지금 제1권 겨우 나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우리는 초등학교 아이들을 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인생을 맨 정신으로 보고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럽고 비참한 것을 통해서도 자기를 보여주시고 예쁘고 아주 아름다운 것을 통해서도 자기를 보여주십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잠시 쉬는 시간에 창문을 열었는데 학교 교정에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단풍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그런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가을 풍경 혹은 장엄한 자연을 바라보며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외로운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소외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아름다움은 완전한 아름다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소외감을 느낍니다. ‘나는 저렇게 아름답지 않은데….’ 단풍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 그 자연의 세계의 아름다운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당신을 희미하게나마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는 동일할 수가 없기 때문에 거기서 소외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한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혐오감을 갖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이 그 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서가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식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아. 난 그런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요.’ ‘그냥 아름다운 단풍 보면 그 밑에서 삼겹살 구워먹고 싶은데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왜 단풍나무 앞에서 삼겹살 먹고 싶다는 생각은 우리 코코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 말고 사람 아니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그런 생각을 비집고 들어갈 때 거기에서 꽃망울이 터지듯이 영혼의 쾌락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거였구나.’ 그리고 ‘정말 하나님은 아름다운 분이시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잘 알 수 있어요
단풍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이 도저히 자기 정신으로는 짊어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짐은 돈이 없어서 인간관계가 깨져서 성질이 나빠서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해서 생긴 짐이 아닙니다. 그런 짐은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그냥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원인입니다. 당구대에서 큐대로 때리면 세 개, 네 개, 다섯 개, 어떤 때는 여섯 개씩 공을 때리면서 방향이 바뀝니다. 그런데 아무리 빨간 공, 파란 공, 노란공이 서로 머리를 때리고 부지런히 움직여도 원인은 그 공이 아니라 큐대를 손에 쥔 사람이 최초로 때렸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 거슬러 올라가면 뭐가 있을까요? 그 마지막에 있는 것은 결국은 죄의 짐입니다. 인생의 무게는 원래 가볍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만 36분에 한명씩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등집니다. 인생은 원래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그 생명과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한계를 곳곳에서 노출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옛날보다 훨씬 못 참는 세대입니다. 천원을 빨리 안 거슬러 준다고 칼로 서른두 번을 난자해서 아르바이트 학생을 살인해버렸습니다. 그 서른두 번은 바로 ‘친구’라는 영화에서 사람을 찔러죽일 때 찔렀던 횟수와 이상하게 동일합니다. 어떻게 그 횟수까지 찾아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의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생명과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욱하는 성질에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이 매일 한 건 이상씩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그분은 우리의 이런 인생의 문제를 꿰뚫듯이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고통 받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온유한 분이시고 당신의 멍에는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당시의 문화적인 맥락이 있습니다. 기술을 배우는데 지금은 많은 사람을 학교에 모아놓고 배워서 기술자를 배출하지만 예전에는 장인 밑에 들어가서 기술을 배웁니다. 그런데 이 장인은 아무 사람이나 자기의 제자로 영입을 안 합니다. 이런 현상이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똑같이 일어납니다. 산업혁명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시대입니다. 로마시대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가서 이것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부살이 하듯이 하면서 눈치를 보면서 쓰레질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아무도 안하는 허접쓰레기 일들을 하면서 천천히 그 장인의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제자가 됩니다. 그래서 이 제자는 스승을 아버지처럼 모시며 그 기술을 습득하고 심지어 그분의 삶을 존경하며 그분처럼 훌륭한 로마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로마시대의 문맥에서 ‘두 사람이 멍에를 함께 졌다.’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당시 로마 문화에 매우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당신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럴 때 우리는 머릿속에 그리는 그림이 곡괭이 망치 삽 힘들게 살아오던 모든 것 다 팽개치고 ‘야, 이제 해방이다. 이제 거저 먹여 살려주는 완벽한 복지의 나라로 풍덩!’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멍에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온유하다 그리고 나의 멍에는 가볍다 그런데 멍에가 없다.’ 라고는 말씀안하십니다. 그리고 그 멍에를 메고 이제 예수와 함께 배우는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멍에가 신비합니다. 어떤 신비를 가지고 있느냐면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런 멍에 없이 어떻게 인생을 살았을까요? 그리고 이 멍에가 정말 인간으로서의 고귀한 특권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리 떠나고 말씀의 미각이 사라지고 나면 이게 옛날에 눈물 흘리며 주님께 나왔을 때 짊어졌던 죄의 멍에보다 훨씬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왜? 이미 마음이 하나님 사랑에서 떠나서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벗어버리고 그것을 짊어지면 신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짊어지고 세상으로 갈 수도 없거니와 그것을 짊어지고 다시 세상으로 가도 세상에서는 이미 낙인 찍혔습니다. 마귀의 나라에서는 ‘배신자: 성도 아무개’ 이렇게 낙인 찍혔습니다. 가봐야 유혹하지만 그 유혹의 목적은 진짜 세상 나라로 오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멀어져서 그분에게 버림 같은 것 같은 존재로 살아가게 하려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그 수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님과 함께 가벼운 멍에를 메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 사랑을 배우고 삶으로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같이 티끌 같은 인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 삶을 포기하고 쓰레기 같은 수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간 사람들을 보고 또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신의 방탕했던 삶을 회고하고 신앙과 세상 사이에 갈등하면서 고통 했던 날들을 회상하면서 이 어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인간의 삶일 수가 있겠나이까?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사랑 안에 살며 믿음과 순종으로 그 언약의 관계를 붙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체의 신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순전하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께 진정한 책망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온 몸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압니다. 그에 비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 그분의 음성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인간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에 보람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꽃다운 청년이 중년이 되고, 눈부신 청년의 때에 만났던 사람들이 권사 명단으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얼굴을 보면 권사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미소년 같은 청년들이었는데 안수집단 명단에 올라옵니다. 충분히 안수집사해도 될 것 같은 얼굴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사는 그 사람들은 꽃보다 아름다운 단풍입니다. 그들은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그렇게 비바람 불고 눈보라 치고 그리고 수없이 자신의 믿음을 흔들어 놓으려고 하는 그 무서운 시간들을 다 통과하면서 주님이 자신과 함께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분의 멍에를 지고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맘먹은 대로 되지도 않고, 어차피 세월은 흘러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탄생과 함께 자라고 성장하고, 그리고 절정에 이르러 젊음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노쇠하고 소멸되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누가 감히 제가 꽃다웠던 시절에 받았던 하나님의 사랑이 단풍의 계절처럼 세월이 묻어난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이 탁월했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날마다 그가 누구이든지 당신의 말씀으로 일어서는 모든 사람들을 붙드시며 아무리 이 세상을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도 당신의 사랑을 못내 잊지 못해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은 그들이 고멜과 같아도 주님은 용납하셔서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렇게 주님을 멀리 떠나고 세상을 사랑한 자기비참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부르시는 그분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두 가지 죄로 하나님 사랑에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힘을 믿고 살아보려는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 심판을 준비하시면서도 차마 이들을 그대로 아프게 하실 수가 없어서 당신의 마음 안에 사랑의 불붙은 이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병든 자 인줄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호 11:3)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들을 향한 말씀이 되지 않기를 나는 간곡히 빕니다. 아무리 멀리, 아무리 깊이 그리고 아무리 크게 멀리 떠나고 넘어졌어도 그리고 여러분들이 망가졌어도 주님은 여러분들을 고치실 수 있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의 줄에 붙들려 한 걸음씩 주님의 손에 이끌려 신앙의 발걸음을 떼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나 주님은 우리를 그 원수들의 수많은 덫에서 건져주시고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에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지금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말합니다. 더 이상 헛된 일로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늘 진심으로 뉘우치고 우리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돌아와 행복한 삶을 이어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2018.10.28. 주일오전5)
불붙는 사랑을 알자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11:5-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이 번영케 하실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주님은 이 두 가지 죄의 뿌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교만에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될수록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가진 선지자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로 이 하나님의 찢어지는 마음을 그의 비참한 가정생활을 통해 온 몸으로 보여주었고, 그리고 하나님 사랑의 분신이 되어서 삶으로 예언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미 심판이 확정되었으나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당신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시며 돌아오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것이라”(호 11:5)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앗수르는 여러분들이 학창 시절에 배운 앗시리아의 성경적인 이름입니다. 북왕국에서 그들은 신흥 세력으로 나라를 키웠고, 무서운 기세로 왕국을 확장해 갔습니다. 그리고 기름진 땅을 얻기 위해 남하 정책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래서 북왕국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광야 시절에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어려운 일만 생기면 모세에게 대적하며 지도자를 세워 애굽의 종살이로 돌아가겠다고 한 과거의 사실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수르의 칼에 멸망하고, 번영했던 도시들은 파괴될 것이며 그리고 향락에 취했던 사람들은 노예로 끌려가고, 부녀자들은 겁탈을 당하고 그리고 화려했던 도성은 모두 흙더미가 될 것을 주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확정하시기 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날 동안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을 경고하시는 동시에 당신의 언약 안에서 살 때에 그들을 복 주실 것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치 멸망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처럼 이스라엘은 말씀 앞에서 돌이킬 줄 몰랐습니다. 이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서 호세아는 말했습니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나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 11:7)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데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심판을 준비하고 계시는데 선지자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편으로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이에서 찢어지는 것 같은 심정으로 이제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피력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향해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우상을 섬기며 그분께 돌아오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타는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II. 불붙는 하나님 사랑
그러면서 거의 탄식조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에브라임이여…” 이것은 이스라엘의 애칭이었습니다. “내가 어찌하여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라고 탄식했습니다.
A. 차마 버리지 않으심
여기에서 우리는 제일 먼저 ‘차마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너무나 많은 죄들이 누적되어 있어서 회개하지 않는 그들을 심판하시면서 하나님은 그 날이 임박하기 전 다시 한 번 애끓는 심정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우리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돌아오기 싫다는데 이제 하나님보다 세상이 좋다는데 그리고 여호와보다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희망이 있다고 고집을 하는데 왜 하나님은 자존심도 없으신 것처럼 이렇게 떠나가는 이스라엘의 옷자락을 붙들고 애원하는 것처럼 당신의 사랑을, 애끓는 마음을 전달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어찌…놓겠느냐…어찌 버리겠느냐”라고 반문하시면서 역사상 일어났던 가장 참혹한 심판의 현장을 소개하셨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호 11:8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범죄하여 회개할 줄 모르고 당신을 떠나는 완고한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면서 가슴 아프게도 하나님은 아드마와 스보임이 생각나셨습니다. 신명기 29장 23절에 의하면 이 두 성읍은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유황과 불비로 완전히 파멸될 때에 함께 불태워진 성읍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죽기 위해서 태어난 짐승처럼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멀리 떠난 이 롯이 그 도시에서는 그들의 악행을 보면서 괴로워하던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과 인륜을 넘나들면서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끔찍한 모든 죄를 자행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전례에 없던 큰 심판을 작정하십니다. 그리고는 모두 그들을 유황불비로 태워 온 땅에 멸절이 이루어졌습니다.
많은 구약을 보는 사람들이 아마 이것이 신화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놀랍게도 1980년대에 발굴단이 어디에도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소돔과 고모라가 뚜렷하게 심판을 받았는데 흔적이 없을까? 사해 밑바닥에서 거대한 도시가 발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완전히 망해 버린 후 땅이 꺼져서 그 소금 바닷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이 없는 그냥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이 사랑하신 그들과의 추억이 담긴 수많은 과거가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무지한 짐승 같은 자들과 똑같이 그렇게 극렬한 심판에 처해지는 것을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시면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이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쏟아 부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회개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회개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시대일수록 모든 믿음의 선조들은 회개야말로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부족하지만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라고 하는 인물은 말했습니다.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라고 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우리는 죄를 피할 수 없고, 그래서 매순간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서 그렇게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냥 율법 신앙이라고 뭉개버리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오늘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공경은 진정한 경배는 아니라 아부입니다. 자신의 번영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잘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태도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그렇게 복수하실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복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떼어놓기 위해 때로는 당신이 너무 사랑하는 자녀들인데도 징계를 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사생자라고까지 말하면서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이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라고까지 설명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계속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악을 행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때리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잘못을 하고, 그리고 어떤 죄를 짓고, 심지어는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커다란 잘못을 해도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갇히셔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그냥 그 창살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하지 말라고 호소하다가 힘을 잃어버리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교리에 갇혀서 힘을 쓰지 못하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온 우주를 당신의 권위로 통치하시고 당신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심으로써 주님 뜻대로 사는 자들을 격려하십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을 징계하심으로써 그렇지 않은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운 마음을 주어 떨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이 거룩함을 깊게 깨달은 후 자기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시 4:4)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때문에 함부로 주님 앞에 악을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년쯤 되는 어느 날 저는 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강북에 볼일이 있어서 승용차를 몰고 강남의 한 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뭔가 커다란 굉음이 일어나고 그리고 어마어마한 먼지가 하늘로 치솟는 게 보였고, 뉴스에서는 다급한 속보를 때리고 있었습니다. 강남 중심에 있는 큰 백화점 하나가 5초 만에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 후 저는 그 건물주가 다니는 교회에 깊이 관여되어 있는 목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의 정확한 사실이라고 덧붙이며 저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 그 건물주는 그 교회에 안수집사님이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이름만 대면 아는 아주 유명하신 분이었습니다. 기도를 하시다가 집사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집사님. 지금처럼 신앙생활하다가 큰 일납니다. 회개하고 똑바로 믿으십시오.” 그 일이 있고 정확히 한 달 후 그 건물주는 불과 몇 초 사이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스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깔보는 것이 복음을 깊이 이해하는 것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복음만 모를 뿐 아니라 율법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복음과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렇게 죄를 미워하시면서도 차마 자기의 백성을 마지막 순간까지 버리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차마 당신의 사랑 때문에 택한 자들을 버리지 못하시지만 끝없이 당신에게로 돌아오고 똑바로 예수를 믿도록 말씀으로 수없이 부르신 후에 그래도 돌이키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때리십니다. 이것은 그 자식이 미워 죽이기 위해 복수하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로 해서 깨닫지 못하는 내 자식이 이렇게 한차례 때림으로써라도 당신을 향해 굳은 마음을 돌이켜 새 삶을 살지도 모른다는 마음 때문에 주님이 그리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분이니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할 때 비로소 하나님 같은 분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얼마나 감격적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죄 짓고 악을 행하고 주님을 욕보이는 것밖에 없는데도 차마 우리를 버리시지 못해서 오늘도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여러분들에게 당신께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찬양)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신앙은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 미천한 인간이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당신의 불타는 심정을 당신의 말씀 속에 담아 보내십니다. 어떤 사람은 그 애끓는 경고의 기회를 수없이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커다란 징계의 벼랑 끝에 서지만 복 있는 사람은 주님의 그 말씀을 들으며 주님을 멀리 떠나 어둠 속에 방황하는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온갖 시련을 당할 때에 완악해져서 그래도 돌이키지 않던 마음이 주님의 세미한 음성 앞에 녹아지며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미아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저희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심했습니다. 벚꽃 놀이 구경을 하겠다고 가족들이 삼삼오오 수없이 모여서 창경원으로 갑니다. 아이는 너무 새로운 풍경에 한손엔 풍선을 들고, 한 손에는 사탕을 들고, 엄마 뒤를 졸졸 따라갑니다. 눈에 들어오는 진귀한 광경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한눈을 팝니다. 그리고 잠깐 지나고 나니 인파에 떠밀려 엄마는 어디 갔는지 없고 자기만 낯선 사람들의 지나가는 물결 속에 밀리고 있습니다. 이때 아이는 그 좋아하던 풍선도 놓고 가지고 있던 사탕도 내버립니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엄마를 부르며 목 놓아 울기 시작합니다. 무엇으로도 그 아이의 울음을 멎게 할 수 없습니다. 더 큰 사탕이나 더 화려한 풍선이 아니라 엄마가 필요한 아이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이 세상에 원하는 모든 것을 한번 해보아도 주님을 떠난 그 마음이 만족을 얻을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습니다. 신앙은 바로 이 말씀을 통해서 자기 손에 풍선도 있고 사탕도 있지만 엄마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하나님이 없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내려놓고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불붙는 긍휼하심
두 번째는‘ 불붙는 긍휼하심’입니다. 두 가지 죄악으로 멸망을 향해 치닫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셨고, 선지자는 주님의 그 마음을 전수받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정의 행복을 초월한 이스라엘의 행복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다 던져서라도 범죄한 이스라엘과 그들을 부르시는 거룩한 하나님 사이에서 자신의 살과 뼈가 산산이 찢어지고 깨어져도 그 둘을 화해시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으니 이것은 명백히 호세아를 통해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그 마음을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下) 히브리어 성경에는 훨씬 더 감동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직역을 했습니다. “나의 마음이 나를 거슬러 변화하나니 나의 긍휼들이 모두 함께 일어나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긍휼히’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이후마이(nichumai)’라고 하는 단어인데 ‘인정’, ‘동정’, ‘위로’, ‘연민’, ‘불쌍히 여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고 1인칭 복수 명사입니다. ‘내가 많은 긍휼들을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겪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마음의 정동은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성품과 마치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한분의 인격 안에서 사랑과 정의가 어떻게 만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의 성품으로써 판단을 하자면 이스라엘의 죄는 심판을 받기에 충분했고, 그리고 그 심판이 실행되어도 하나님께는 추호도 비난 받을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마음에 있는 이 사랑의 성품은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을 당신에게서 끊어지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후회가 아닌 하나님의 박애적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정글에서 돈을 벌기 위해 원숭이를 사냥한다고 합니다. 어린 원숭이는 아직 날쌔게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잘 잡히고, 엄마나 아빠 원숭이는 비교적 잘 빠져나가고 도망을 하는 것이 많은 사냥꾼들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그렇게 사냥꾼에게 잡혀 포승에 묶여 자루에 담겨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어미는 울면서 계속 따라가는 것입니다. 과장이 좀 있는 이야기겠지만 그렇게 따라가다가 보면 결국 어미도 잡히고 마는데 이는 어미에게 더 이상 도망갈 기운이 없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과장이야 있겠지만 그렇게 결국 자식이 끌려가는 것을 본 어미를 해부해 보면 온 장기가 다 끊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감동적으로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이게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갖는 단장의 슬픔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로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을 멀리 떠나 당신의 심판 아래 있게 되었을 때 경험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긍휼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한 국면입니다. 이 긍휼은 비참의 원인이 아니라 비참한 현 상태 때문에 가슴아파하는 마음입니다. 정당하게 죄를 지었고, 정당하게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만 주님의 긍휼한 마음은 그렇게 끔찍한 국가적인 재난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며 통곡하는 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당신을 멀리 떠나 죄에 빠진 이스라엘을 일체의 사랑으로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이렇게 마지막으로 당신께 돌아오도록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랑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보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몸을 입고 온 아드님은 하나님의 마음 전부를 물려받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사도를 세우실 때 주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고 하셨습니다. 그때 희랍어 단어 ‘에스프랑크니스테’라는 단어가 바로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으니…’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스프링크나’는 ‘창자’입니다. 창자에 영혼이 있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믿었으니 그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슬픔의 고통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무리 선지자들을 보내어도 당신의 마음에 그 타오르는 긍휼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급기야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사람의 몸을 입혀 볼 수 있도록, 만질 수 있도록, 접촉할 수 있도록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아래 단장의 슬픔을 담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나타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절절한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그려낸 성경에 가장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2000년 전에 그렇게 목자 잃은 양처럼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던 예수의 마음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 오오 어서
큰 고통을 당할 때 그리고 마치 누군가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내 인생이 계속 꼬일 때, 그때 신자는 조용히 자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죄가 오늘 고통이 되고 있습니까? 나의 눈을 열어 나의 죄를, 나의 불순종을 보게 하셔서 회개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으며 티 한 점 없는 순백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크고 작은 죄를 짓고, 크게 혹은 작게 불순종합니다. 크기는 다르지만 죄의 질은 똑같아서 결국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은혜에서 멀어져 마음이 굳어져 가게 합니다. 기도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에 헌신할 힘이 없는 상태가 되어가게 합니다. 거기에서 괴로워하고 주님께 돌아오면 다행인데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세상의 즐거움으로 그 고통을 달래보려고 할 때 이스라엘이 갔던 똑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렇게 집요하게 당신을 떠나는 이스라엘을 향해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의 실질적 시조인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그에게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았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그리고 야곱과 요셉과 같은 족장들의 신앙을 하나님이 조금씩, 조금씩 키워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낳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걸음마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의 줄로 묶어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사랑에 매여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바로의 치하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홍해를 갈라 광야 40년의 세월동안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고, 신발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마르지 않는 삶으로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오합지졸과 같은 그들이 가나안의 그 강성한 나라의 군대를 무찌른 것은 그들의 실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넘어질 때마다 그들을 안아서 보호하시고, 기르셔서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다. 무엇을 잘못 하셨습니까? 여러분들의 인생에 하나님이 무슨 실수를 하셨습니까? 그리고 비난 받을만한 어떤 일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하셨습니까? 죄 가운데서 죽어가는 여러분들을 십자가 사랑으로 불렀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 살과 피도 섞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오히려 살과 피가 섞인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던 사람들조차 살과 피가 섞이지 않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 사랑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위로하고 긍휼히 여기며 하나님 사랑의 혜택을 보게 하셨습니다. 마음이 미끄러질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여러분들을 붙드셨고, 그리고 방황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들을 다시 십자가 앞에 세워주셨습니다. 그분 때문에 죄의 길에서 벗어났고, 그분 때문에 먹고 살만해졌습니다. 그분 때문에 인생의 많은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하게 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제까지 여러분들을 어떠한 사랑으로 구원하여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여러분들은 왜 그분을 미워합니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왜 그분에게 관심이 없습니까? 그리고 왜 여러분들은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그분 밖에 도대체 어떤 행복이 있길래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고, 불순종하고, 그리고 죄를 지어도 회개할 줄 모르고, 이렇게 예배 시간에 나와서 침묵으로 한 시간 지내는 것으로 임무를 대신하려고 합니까? 누가 그런 예배를 받으시겠으며 또 여러분들에게는 그것이 무엇을 주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히 찾고 그렇게 예배드린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갈망을 보여 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언제나 설교가 울려 퍼지면 뜨끔하고 자극을 받고는 그 다음에 더 깊은 잠에 빠져 버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귀에 들어오는 설교는 듣고, 마음에 거슬리는 설교는 거절하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선택한 삶입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행복하세요? 기쁘세요? 즐거우세요? 그러면 그렇게 사세요. 그런데 안 행복합니다. 안 기쁩니다. 이미 기쁨, 환희, 희열, 감격, 이런 단어들은 나와 상관이 없는 단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인가요?
수없이 말씀이 울려 퍼져서 이스라엘을 덮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일어서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선지자는 탄식합니다. 우리는 안타깝습니다. 도대체 이미 자신들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다가오고 있는 이때에 도대체 어느 선지자가 이렇게 자신의 가정을 산산이 찢으면서 가슴 저미는 눈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적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 차라리 자신이 대신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찢어져 버려도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외친 사람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깊이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마음속에 일어나는 불만과 슬픔, 열등감, 분노, 이런 것들의 근원은 성령님이 아닙니다. 여러분 맘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살아서 마음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옳지 못한 감정들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신자의 가장 큰 유익은 평화입니다. 그 속에서 당신에게 이루신 그 평화를 온전히 누리며 이 세상의 어떤 커다란 변화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잠잠히 예수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신앙은 하나님 움직여 자기 원하는 것 타내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그렇게 자신의 맘대로 되지 않을 때 자신의 마음이 올바르지 않음을 점검하고, 그리고 인생이 꼬이는 것 같았을 때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면 하나님이 자신이 생각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인생을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꺼지지 않는 불붙는 긍휼하심으로 주님을 멀리 떠나 죽도록 고생하는 여러분들을 가엾이 보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설교자를 통해 주님의 마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이 사랑으로 돌아오기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차마 버리시지 못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심판이 임박한 때조차 하나님은 불붙는 사랑으로 철없이 살아가는 완고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음성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랑과 생명, 그리고 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 잘 믿고 복스러운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2018.11.4. 주일오전6)
다시 돌아오게 하심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 11:9-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패망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배반했으나 하나님의 불붙는 긍휼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전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는 주제를 가지고 전개됩니다.
II. 다시 돌아오게 하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이 메시지는 본문에서 크게 세 가지의 진리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A. 다시 멸하지 않으심
첫째는 다시 멸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자녀들이었으나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은 결국 앗수르에게 패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십니다.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제 비록 앗수르에게 패망했지만 하나님이 다시는 이스라엘에게 이런 진노를 내리지 아니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적인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이스라엘인 신약의 교회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나라는 신약의 영적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 교회의 뿌리였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고 썩었는데 그래서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육적 이스라엘이라면 그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잎, 가지, 줄기가 두루 퍼져 큰 숲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지상 나라인 이스라엘은 망하지만 영적 새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육적 이스라엘을 향해 부어진 하나님의 패망하게 하시는 진로는 영적인 이스라엘을 향해 내리지 아니하실 것이며 그 나라는 결코 대적에 패망하지 아니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은혜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너무 당연한 말씀을 하신 것은 이 모든 언약을 당신의 신실하심을 걸고 맹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지금도 불순종하는 자들은 곤고하며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징계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세상을 사랑하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평안이 없고 진정한 영생의 기쁨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는 죄를 지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징계는 보복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애정의 표현입니다.
영적인 침체를 경험할 때 사람들은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잠시 세상 즐거움에 취하거나 쾌락에 즐거울 때에는 영적인 현실을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진정한 평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듣고 마음의 찔림을 경험하게 되면 불끈 이러한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봅니다. 역시 기도해 보면 차갑게 돌아앉으신 하나님의 거절감이 경험됩니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해도 그냥 울 뿐이지 하나님에 의해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인격적인 포근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몇 번 시도해 보다가 그만 두어버립니다. 내가 말씀을 읽지 않는 것은 말씀의 은혜를 안 주시기 때문이고, 내가 기도를 안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과 그런 관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는 잘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회복되고는 싶지만 진실한 회개를 하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그는 세상과 하나님과의 교회 사이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고통은 점점 깊어져 가고 때로는 환경의 깊음도 동반이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환경에 대한 해석의 능력입니다. 신앙이 깊을수록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들을 해석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은 현실 자체를 직시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그 현실들을 이해하는데서 생겨나오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의 기도를 거절하시는 것이 느껴지게 될 때에는 도덕적이고 완전하신 하나님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수많은 언어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철이 들게 하시고, 그 침묵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수많은 언어들을 읽어내고 당신이 마음을 이해하게끔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침묵을 깔보지만 주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 침묵 앞에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불편함 때문에 혹은 면피용으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반응하지 않으면 뭔가 영혼의 회복을 위해서 애쓰고 포기한 마음은 즉시 예전보다 훨씬 더 강퍅해진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영혼의 깊은 침체에 있을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둥글고 매우 크고 무거운 물체를 움직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혼자 힘으로는 그 큰 바위와 같은 물건을 굴릴 수 없을 것입니다. 온 힘을 다해서 조금씩 바위가 움직이고 나면 그러면 바위 자체에 움직이는 힘에 의해서 진동은 점점 폭이 커집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바위를 굴려버리는 힘이 생겨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주 적은 은혜라도 받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의 움직인 적은 은혜를 놓치지 말고 간직하고, 다시 한 번 주님을 찾고, 다시 한 번 주님을 찾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두꺼운 우리의 얼음장 같았던 의지들이 깨어지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진심이 솟아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까지 힘을 발휘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뒤로 물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마음을 고치기 전에는 우리가 삶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때리십니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예전에 없던 아픔을 겪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이 세상 끈끈이에서 떼어놓고 그리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돌이키도록 우리를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백성을 다시는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 언약을 따라서 영적인 이스라엘은, 우리는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안도 주지만 우리에게 엄중한 말씀이 됩니다. 왜냐하면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그 분을 떠날 수 없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이렇게 여러분과의 관계를 결코 끊을 수 없는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B. 여호와를 따르게 함
두 번째는 여호와를 따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우상 숭배 때문에 망해서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불러 고토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선지자는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호 11:10)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 고국으로 귀환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자가 새끼를 부르는 울부짖는 우렁찬 음성은 모든 짐승들이 듣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교회의 복음은 위험과 영광 가운데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서쪽에서부터 떨며 나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히브리어 성경에서 서쪽은 ‘바다’라고 나옵니다. 그들이 볼 때에 바다가 서쪽에 있으니까 이것을 서쪽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 열방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깨닫고 떨며 나아오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영광 가운데 선포되고 온 세상이 피부 색깔과 문화, 국경에 상관없이 주님께 돌아와 순종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시는 우렁찬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때입니다. 교회의 말씀 선포가 그처럼 온 교회와 세상을 향해 영향력이 있어야 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외침은 울리는 꽹과리나 소리 나는 징 같이 그렇게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 소리는 아주 비밀스럽고 조용할지라도 그 복음이 실려 전달된 사람의 마음속에는 천둥소리처럼 들립니다. 영혼의 모든 기관이 아무도 듣지 않을 수 없도록 온 수풀 두루 울리는 사자의 울음소리처럼 들립니다. 잠잠하던 마음에 복음의 천둥소리가 들리고, 어둡고 캄캄한 마음에 복음의 번갯불이 치며 찬란한 빛이 비췹니다. 그래서 도저히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진 선교적인 목표는 온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예배하는 것과 꼭 같이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 분을 따르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육적인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서 다시 생겨나게 될 영적인 이스라엘이 이렇게 우렁찬 복음의 선포를 듣고 여호와를 따르게 될 것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이 세상에 사상을 따랐고, 철학을 받아들여 살았습니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을 만들고 거기에 갇혀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실려 옵니다. 아주 미세한 바람소리 같았는데 그 복음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떨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너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음성이 사자의 소리처럼 변하며 우리의 영혼 전체를 흔들어 깨웁니다. 급기야 이 세상의 철학과 사상을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아집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우리 주님을 의지해서 여호와를 따를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그 본을 가장 잘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희망을 갖는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실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예기치 못했던 커다란 행운보다는 뜻하지 않았던 어려움에 직면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과거는 우리가 이미 살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알려졌고, 현재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합니다. 그러나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줄은 우리 중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그때에 일어날 일입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우리의 모든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몰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식으면 두려워집니다. 은혜 안에 있는 동안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며 사는 한 하나님이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을 것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에 저는 야간 신학교를 다녔고, 그리고 과대표였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모두 데리고 그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절친한 친구로 4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알고 지냈습니다. 신부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자매였습니다. 한창 목회에 꽃을 피워야 될 나이에 하나님이 암으로 불러가셨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너무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그 장례 예배에 처소를 참여했습니다. 그러자 사모님이 달려와서 아내를 끌어안고 한참을 우셨습니다. 장례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우리를 만나니까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우셨습니다. 멀리는 목사님이 활짝 웃으시는 영정이 걸려있었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고단한 모든 수고를 끝내고 하늘나라에 쉬고 계시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분이 부럽습니다. 그러나 남아있는 사모님에게는 얼마나 힘든 날이 될까요? 매일매일 생각이 나서 매일매일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이 저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매이시니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68년도에 일어났던 프랑스의 학생 혁명은 유럽 세계 전체를 흔들어 놓고 현대 정신의 씨앗을 온 구라파에 폭넓게 뿌렸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처럼 그렇게 정치적으로 뒤집어 놓은 것이 아니라 이제 사상적으로 모든 권위에 저항하고 인간의 완전한 자유를 외치며 그리고 평등을 주장하는 사상의 씨앗들을 뿌렸습니다.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많이 있지만 어쨌든 혁명은 그렇게 유럽을 그리고 미국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불행히도 혹은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비껴갔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이 극심한 차별과 그리고 이 극심한 자본주의 폐해들은 그런 사상적인 변화를 안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 68혁명이 모든 좋은 것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68년도를 기준으로 철학사는 현대 철학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 운동의 사상적인 자양분을 제공했던 철학자 중 한 사람이 질 들뢰즈(Gilles Deleuze)라고 하는 해체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말년에 극심한 치매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병원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나 잠깐 정신이 들어온 사이 그는 창을 열고 몸을 던져 자신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이는 자기가 의식을 가지고 살아있지 않는 한 그것은 자기의 인생이 아니라고 하는 평소의 철학적 신념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인생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만약에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더라면 아마 스위스를 선택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위스에 죽음을 예약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사는 것이 너무 힘들거나 혹은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왜 만드시고 자기라는 인간을 창조하셨는지를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목적이라는 것이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사실은 삶을 목적이 없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으면 그런 질문에 대해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예전에는 세상에서 목적 없이 살았고 이번에는 교회에서 목적 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그 신앙과는 얼마나 다른 것입니까?
평온한 얼굴로 스위스행 비행기에 타는 어느 부부의 인터뷰는 저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제 충분히 살았습니다. 저희에게는 살아가는 낙이 없어요.” 65세의 부부였습니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자살을 두고 탄식했던 시인의 표현처럼 우리는 무엇이 서러워 이렇게 세상을 떠나는 것일까요? 한 주간 동안 제 마음을 깊이 울렸던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언제쯤 되면 내 앞에 전개되는 삶이 내가 원하는 상황이 될까?’ 그런 일은 저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되었으면 좋았을 그 상황이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경우가 너무나 많고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어도 우리의 마음으로는 또 다른 것을 의욕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 일들이 전개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한 20년 후에 건강이 나빠지고 그리고 중증 치매가 왔다고 치자. 그래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요양원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조용히 죽음을 기다린다고 치자. 그거는 그때 일어날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미래에 대한 그 두려움이 오늘 이렇게 살아있는 기쁨을 빼앗아 가게 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지금 숨 쉬고 있고, 눈을 뜨면 사물이 나의 마음에 들어옵니다. 항상 추하고 나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워하던 지체의 얼굴들이 있고 내가 뿌려놓은 인생의 열매들이 보입니다. 살아오는 길이 후회되는 날이 훨씬 많지만 내가 살아온 날들이고 그리고 아직은 내가 책임지고 살아가야 할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은 어제 죽은 사람은 누릴 수 없는 특권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살아서 지금도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더군다나 아직은 나의 지성이 살아있어서 나의 마음에 말을 거시는 주님의 심정을 나의 영혼의 생명으로 붙들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언젠가는 볼 수 없는 날이 올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는 인지 능력이 사라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펴도 읽을 수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냐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매일매일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우리에게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내가 오늘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고 있는 한 나의 인생은 주님의 수중 안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로 받는 위로가 없다면 신앙이 무엇이겠습니까? 너무나, 너무나 살고 싶었던 다른 사람의 인생 보다 내가 너무나 살기 싫었던 나의 인생을 사는 것이 나의 존재의 의미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은 남의 인생처럼 생각하고 결코 자신이 인생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비교하고 부러워하고 자기가 살고 싶은 것처럼 마음을 갖지만 그것은 자신의 인생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숨쉬고, 이 공간에 이 시간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이것이 엄숙한 현실이고 죽은 자들은 도저히 누릴 수 없는 특권입니다. 여기에서 나 자신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내가 주체가 되어서 그래서 나의 인생에 대해 결정하고, 그리고 주님의 뜻을 물으며 내 자신이 내 삶에 대해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나의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의미의 덩어리이고, 그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나의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를 규정해 줍니다. 나의 인생은 다른 사람을 위한 예증도 아니고 혹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저렇게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 하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 내 인생을 사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내가 나를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의식하는 나 자신의 정신 구조 안에서 내가 나 된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데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행복을 달콤한 초콜렛 같은 맛으로만 생각하면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낯선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말씀 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리고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전개되든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전개되는 미래의 상황이 아니라 오늘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지 못하는 우리의 불신앙인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그 분의 손을 의지하고 그리고 전심으로 그 분께 나 자신의 인생을 부탁합니다.
(찬양)
주님여 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지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영혼의 핏기를 잃은 채 파리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용기를 가지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은 우리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수많은 구름 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그렇게 우리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따르며 일생을 살았고, 하나님은 그들 중 누구도 배반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깊이 결단하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자기 집에 머물게 하심
마지막 세 번째는 자기 집에 머물게 하십니다. 사방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님이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처럼 또한 자기의 욕심에 끌려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우리들을 사방으로부터 불러 당신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11절은 말합니다.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호 11:11)고 말입니다. ‘집’은 ‘평화’와 ‘안전’의 상징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남의 집에서 잠자리를 마련해 주어도 내 집만큼 편하지는 않습니다. 아주 화려하고 좋은 호텔에 묵어봤자 거기서는 내 집안에서 나는 나만의 독특한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독하게 풀어헤친 락스 냄새가 납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의 평정이라고 하는 것은 몸과 정신이 익숙해진 상태, 심지어 거기에는 촉감과 빛 그리고 후각의 냄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익숙해진 내 집의 평온함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와 완전한 평강을 누리게 될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낮에는 새들이 먹이를 찾아서 사방을 돌아다니지만 그러나 어스름히 해가 땅에 떨어질 때에는 새들은 귀소 본능에 의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에 열방의 많은 사람들이 신속하게 그 복음을 듣고 주님께 돌아올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완전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구원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 완전한 구원의 안식을 믿음과 순종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들과 함께 영적인 가정에서 누리게 될 것을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가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죄에 팔렸고 사단에게 종 되어 그렇게 노예로 살도록 운명 지어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의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황당한 복음이 우리에게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이 되었고,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를 초월하는 우리의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즉각적으로 부어진 하나님의 생명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받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임으로 그 영적인 실제를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희망이 없다고 믿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불러 복음으로 고치고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이 죄 많은 우리의 이 삶이 우리의 집이라면 아마 영원히 완전한 평화를 우리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늘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잠시 즐거움을 느낄 수는 있지만 우리는 그곳이 영원히 우리가 거할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집이 내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또 거기가 편하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오늘도 당신을 멀리 떠난 사람들을 향해 당신의 품으로 불러 당신과 함께 가족의 친교를 나누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가 있다고 칩시다. 집을 나갔고 생사가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한 딸이 실종이 되어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친 듯이 전단지를 붙이며 그리고 수많은 유관 기관에 전화를 하며 아들을 찾는 엄마, 그리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딸의 사진을 보여주며 거처를 묻는 아빠의 마음에 소원은 무엇일까요? 그 아들이, 그 딸이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 것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돌아와서 가족으로서 한 집에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버려서라도 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자기가 죽어서라도 그 딸이 살아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엄마 아빠의 마음은 충분합니다. 그런 우리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그 사랑을 무한대로 확장해 보면 오늘 선지자를 통해서 눈물 섞인 음성으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 간절한 부름에 담겨진 하나님 마음을 여러분들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슴에 철판을 깔지 않고 마음에 돌이 있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이 마음을 못 느낀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집은 어디입니까? 그리고 요즘 있는 그 집은 충분히 평안하고 안전합니까?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으로는 여러분들이 충분히 당신의 행복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같은 사람을 보내어 주님의 불붙는 마음을 전하시고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오십시오. 아버지가 계시는 집, 어머니인 교회가 있는 집, 그리고 부족하지만 목자가 있고 그리고 사랑하는 지체들이 있고, 그리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며 살아갈 지체들이 있는 그곳으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당신의 피로 구속해 내신 것은 이렇게 당신의 집에 한 가족으로 살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집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나에게 완전한 쉼을 줍니다. 가출한 청소년처럼 방황하지 말고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파하시면서도 징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마음에 불타는 사랑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들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이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에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드려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여러분들을 받아주실 것입니다. 궁핍하다면 풍성하게 하실 것이고, 죄가 있다면 용서해 주실 것이며 상처가 있다면 다시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당신의 말씀에 손을 내밀어 다시 일어서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혼자라면 도저히 아버지의 집에 돌아갈 수 없지만 그러나 돌아갈 결심을 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돌아갈 힘을 주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은 탕자가 내가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결심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돌아갈 힘을 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돼지우리 같은 현실에서 쥐엄 열매나 찾으려고 살지 마십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가 계시고,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더욱이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아끼실 리가 없는 분이니 만약에 무엇인가 아까운 것이 있으셨더라면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을 리가 만무합니다. 세상은 여러분에게 수없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육신의 생각은 다른 길이 있다고 여러분들에게 유혹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양심은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돌아오십시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2018.11.11. 주일오전7)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호 5: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으나 그의 마음의 고향은 유다 나라였습니다. 그의 눈에 두 나라는 한 나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도록 부름받은 조국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들이 비록 구차한 방법으로 앗수르 왕에게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도록 도움을 청하였지만 결국 그 일은 무산되었고 패망하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으며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을 부르고 계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II. 기다리시는 하나님
A. 하나님 얼굴을 구함
우리가 읽은 15절, 한 절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불러내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내 얼굴’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의 이 구절의 히브리어는 ‘파미니’라는 단어인데 히브리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이 너무 신비로워서 복수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면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크게 두 가지 은유를 내포합니다. 첫째는 이 하나님의 얼굴이 악인에게 비췰 때입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진노를 뜻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2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2)고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악인에게 비취실 때에 진노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향해서 하나님의 친밀함 곧 영광과 은혜, 기쁨을 보여주십니다. 특히 당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얼굴빛을 비춰주십니다. 시편 102편 2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시 102:2) 라고 하였습니다. 즉, 시인에게 있어서 고난 받는 날에 유일한 희망은 적군이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자신에게 비춰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80편 1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80:19)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즉, 멸망당할 위기에 있어도 주의 얼굴빛이 비취면 그들은 구원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만 사실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그리고 민족적으로도 진리였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과거를 반추하며 교훈을 다집니다. 이때 그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사는 것이 최고의 특권임을 주장하였습니다. 신명기 4장 7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 하고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엄밀한 의미에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왕도 없고, 국가의 중요한 요소인 영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이스라엘은 그저 광야를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큰 나라,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가 각기 자기들의 신을 섬겼지만 그 신들 중에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 같이 이스라엘 가까이 계셔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은총을 베풀어 준 신은 없었습니다.
우리의 일생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 빛 앞에 가까이 가며 살아온 순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때로는 믿음이 약해져서 주님의 얼굴 앞에 살기보다는 자기의 욕망 앞에서 살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기보다는 자기의 상식을 붙들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성공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얼굴빛으로 나아가 다시 회개하며 신앙을 회복하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당신의 얼굴빛으로 우리를 도우셨고, 원수 앞에 쓰러져 그 칼날에 멸망하지 않게 도와주셨습니다. 그 얼굴빛을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 인생의 길을 열어주셨고,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와 그리고 은혜,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번영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보다는 세속의 왕국을 의지하게 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얼굴빛 앞에서 살기보다는 부강한 나라의 국력 앞에서 살고 싶어 했습니다. 번영할수록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주님이 많이 주실수록 그들은 열렬히 우상을 섬겼습니다. 결국 패망이 임하였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 깨달았습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성심으로 섬기던 우상이 자기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얼굴빛 앞에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인생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평안할 때는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때리시기 위해서 종종 시련을 주시고, 인생의 문제가 생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생사 간에 의지할 분이 오직 하나님뿐인 줄을 믿고 그 분을 진심으로 간절히 찾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얼굴빛으로 여러분들에게 비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빛에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친교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진노하기 위해 그 얼굴을 여러분들에게 드시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친밀한 사랑과 영광, 은혜, 그리고 놀라운 기쁨을 주시기 위해, 복 주시기 위해 여러분들에게로 당신의 얼굴을 향하신 그런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들은 진심으로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정말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렸을 때 사람이 그것을 얼마나 간절히 찾는지를 알고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들 중에 아주 어린 아이일 때 자녀들을 잃어버려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부모들은 찾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사라졌습니다. 이제 나머지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이 아이를 찾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도 이 아이를 찾는 부모의 마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그 아이를 찾고 그 아이 없이 일생을 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보다는 그 아이를 한번 만나고 눈을 감는 것이 오히려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교회당에 나오지만 정말 하나님을 찾아본 적이 있습니까? 간절히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며 주님을 만나지 아니하고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간절히 찾는 사람은 거기에 집중한 사람입니다. 다른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오직 그것 하나에 마음을 쏟은 사람입니다.
제가 설교자로 소명을 받고 얼마나 많은 교회에서 설교했겠습니까? 9-10명 모이는 손바닥만한 작은 교회부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천 명이 모인 집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속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한 장의 사진처럼 똑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 있습니다. 아직 교회를 개척하기 전 교수시절이었고 저는 그 당시 청교도에 깊이 심취해 있고, 부흥회에 꽂혀 있었습니다. 성남에 있는 어느 작은 교회에서 아마도 수요 예배 저녁 시간에 저를 설교해 주도록 불렀고, 몇 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 교회는 동네 사람들에게 매우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수요 예배에 담임 목사님이 단에 설 수 없어서 도망을 가실 정도로, 피신을 하실 정도로 그렇게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60명 정도 될까 말까한 아주 적은 무리의 성도들이 방석에 앉아서 바닥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비닐 장판으로 바닥을 깐 교회였습니다. 거기서 저는 전심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가 끝나고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합시다.’ 할 때 그 설교를 듣던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까까머리의 중학생이었는데 교복을 입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몇 학년인지는 기억이 안 났지만 그러나 체구로 볼 때에는 그저 초등학교 5학년, 4학년 되어 보이는 아주 왜소한 체구의 어린 아이였습니다. 설교시간 내내 집중해서 설교를 듣고 아멘하고 때로는 작은 글씨로 수첩에 적기도 하고 눈물을 훔치기도 하였습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 저는 모두 이 말씀을 붙들고 회개하자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성도들이 기도했습니다. 저는 기도 시간에 눈을 뜨고 기도를 하면서 그 앞에서 기도하는 그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두 주먹을 꼭 쥐고 하나님께 간절히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이쪽 목서부터 시작해서 얼굴 위쪽까지 돋아난 핏줄이 멀리서도 또렷이 보일 정도로 그 아이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기에게도 그런 부흥의 은혜를 달라고 빌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 어린 아이가 지금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이 세상 어디에선가 한 구석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아이와 같은 간절함이 없는 것일까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지 않는 것일까요? 주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행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 이 미묘한 심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주님은 나이나 성별, 피부 색깔, 그리고 그의 지위의 높고 낮음에 개의치 않으십니다. 지구 끝 어디에서든지 당신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며 매달리는 모든 사람 가까이 계십니다. 그가 위기에 처했으면 구해주실 것이며, 고난에 처했으면 환경을 열어주시거나 그 고난을 극복할 힘을 주실 것이고 만약에 죄가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제에 방해가 된다면 그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바라보실 때 가장 아름다운 때가 두 번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영혼일 때와 하나님 이외의 것들 사랑하다가 그 사랑에서 깨어져 진심으로 회개하며 주님의 얼굴을 구할 때의 영혼입니다. 왜 그렇게 힘든 것일까요? 그렇게 어린 아이들도 목에 핏줄이 서도록 우리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우리 교회에 이 핍박이 사라질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주님의 그 얼굴빛 안에서 부흥을 보도록 도와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매달릴 수 있는데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부녀자들도 그리고 남자들도 그렇게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우리들이 본 일이었는데 왜 우리에게는 그렇게 힘든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저에게는 이런 마음을 주셔도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에게는 이 마음을 안 주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거나 혹은 하나님의 부드러운 음성으로 당신의 사랑을 전해주셔도 마치 감동 받지 않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철 가슴, 돌 마음 경연대회라도 하는 것처럼 꼼짝도 않고 요동도 하지 않아서 우울한 얼굴로 예배에 나왔다가 더 슬픈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 힘든 것입니까? 그리고 주님이 여러분들이 그렇게 당신의 얼굴을 찾을 때 주님은 누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일까요? 당신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여러분들이 당신의 얼굴을 구하든 세상을 구하며 살든 그 분께는 손해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선지자를 통해 애끓는 음성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것을 예고하시는 것은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위해서입니다.
고민이 있으면 우리들은 밤을 하얗게 근심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슬픔 속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그리고 걱정 속에서 잠이 듭니다. 때로는 그 괴로움이 너무나 커서 저녁에 잠들고는 아침에 눈을 뜨지 않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빕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목숨을 건 마음으로 주님을 간곡히 찾아보셨습니까?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물을 것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주님의 얼굴을 구합니까?” 주님께 직접 물어보세요. 그게 사람에게 묻는 것보다 훨씬 빠릅니다.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해야 당신이 얼굴을 구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구해야 당신의 얼굴을 찾는 것일까요?
2015년은 제 생애에 잊히지 않는 고난의 해였습니다. 저는 건강을 많이 잃어버렸고 그래서 도저히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체력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건강하던 아내가 갑자기 드러누웠습니다. 이틀을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 검사를 받았으나 의사는 소견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서 병세는 점점 깊어갔습니다. 사람이 너무 큰 고난이 오면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저녁 간절히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온몸을 주물러야지만 겨우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온 몸이 굳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봄부터 매일 저녁마다 유언을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웃었는데 반복되면서 제 마음에는 두려움과 근심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뜻을 세우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체력이 안 되서 침대 모서리에 기대어 주님께 기도하던 어느 날 아침 하나님이 분명한 응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마침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너무 간단했습니다. “안 죽는다고 해라.”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 가운데 응답하셔서 내게 믿는 마음을 주셨는데 당신은 안 죽는다고 그러시더라. 그러니 제발 그런 유언을 남기는 따위의 일은 하지 마라.” 한 순간 마음속에서 그 일로 인한 근심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나 오랫동안 설교했던 평범한 사실 하나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집중하지 않는 수천마디의 기도보다 마음을 쏟는 한 번의 기도가 주님의 얼굴빛을 보게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다시 그 일로 거의 근심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이 당신의 얼굴빛을 구하게 하십니다. 염려와 근심으로 온 밤을 하얗게 밝히고 그리고 그 많은 시간을 번뇌와 씨름으로 보낼 그 에너지의 1/10만이라도 하나님을 향하고, 전심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해 보십시오. 이런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얼굴빛을 비춰주지 아니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어울리지 않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은 사면을 두루 살피십니다. 그리고 그 어디서든지 당신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 그가 누구인지 간에 그 사람 가까이 계셔서 당신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하는 놀라운 증거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맞습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찬양)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얼굴빛 앞에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보험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내가 주님을 알고 주님이 나를 아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인생은 주님의 손에 맡겨졌고, 그리고 주님이 이끄시는 그 길 어디에든지 간에 나는 걸어갈 수 있노라고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주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저는 여러분과 꼭 같은 죄인에 불구하고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연약하기 때문에 쓰러지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 죄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이 말씀의 사랑이 느껴진다면 제가 보여드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의 마음은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이제 언제까지 여러분들이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멸망을 향해 달려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순종하겠습니까? 주님은 그 걸음을 멈추도록 여러분들을 여기에 보내셨고 그리고 이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여러분들을 불러 이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말고 당신의 얼굴을 구하도록 부르시고 계십니다. 주님의 얼굴빛을 구하며 주님을 찾기를 바랍니다.
B. 그 죄를 뉘우침
두 번째는 그 죄를 뉘우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얼굴빛 앞에 살기 위해서는 그 죄를 회개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감미로운 사랑은 회개와 함께 경험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호 5:15上)고 말입니다. 이 표현은 사실 말도 안 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눈높이에 맞춰서 알아듣기 쉽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교훈입니다. 온 우주가 당신 안에 있는데 하나님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이 온 세상이 당신의 것인데 안 계신 곳 없는 하나님께 가까운 곳과 먼 곳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한 은유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빛 앞에 있는 것과 같은 그 친교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는 자들만이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자인지를 깨닫습니다. 주님과의 막힘이 없는 친밀한 교제를 갈망하면 갈망할수록 그 무엇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직 우리 안에 있는 죄밖에 그렇게 하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나라가 패망하는 고통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들의 번영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우상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고난을 받을 때가 돼서야 하나님 앞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28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나 우리는 이스라엘이 넘어진 동일한 지점에서 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바깥에서 행복해 보려고 몸부림치지만 마지막 때는 그 세상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진정 파멸에 이를 때 우리가 사랑하던 이 세상도 우리를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얼굴빛으로 돌아오기 위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오늘도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 토로하고 있는 시인의 깨달음은 우리에게 은혜를 넘어서서 충격을 줍니다. 119편 75절과 6절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시 119:75-76)
하나님의 가장 두려운 심판은 우리를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충분히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짓고 우리의 마음에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사도는 이방인들이 이렇게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통렬하게 한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당신의 선하심을 굽히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를 때 그 성실하심과 선하심 때문에 여러분들은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물로 예언하였지만 유다는 그의 예언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자신의 예언대로 유다가 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화려하던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고 화려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모든 보물들이 다 뜯겨 그리고 이제는 말발굽 아래 짓밟혀 그렇게 비참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굶어죽기 않기 위해 양식을 바꾸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녔습니다. 폐허가 된 아름다웠던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선지자는 슬피 목 놓아 울었습니다. 한참 울고 난 후에 놀랍게도 그 마음속에서 희망이 솟았습니다. 왜냐하면 범죄한 이스라엘이 이렇게 바벨론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도록 징계를 받은 것은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였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노래합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러면서 멸망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선지자는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서 징계하실지라도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며 역설적으로 커다란 심판 속에서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바꿔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마음에 가중되는 고통, 그리고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시련, 대부분 여러분들이 직접 두 손으로 뿌린 열매입니다. 그것을 거두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성실하다는 생각을 가져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시고 한번 택한 나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에 나의 잘못된 삶의 태도 그리고 내가 여전히 사랑하는 세상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당신 밖에서 찾아보는 행복이 아무것도 줄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모았으나 그것은 구멍 뚫린 전대와 같았습니다. 부지런히 마시고자 모았으나 그것은 구멍 뚫린 가죽 부대에 한없이 쏟아 붓는 포도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이 모으나 누린 것이 없고 많이 먹었으나 배부른 것이 없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오늘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이렇게 번영할 때는 하나님을 잊었으나 고난당할 때 당신을 기억하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인격적으로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사람에게는 죄보다 큰 하나님의 용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그를 사랑해 주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니 왜냐하면 그렇게 용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의 증거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회개하십시오. 떠들썩한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라 조용히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모으며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비추시고 용서를 구하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비십시오.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얼굴빛 앞에 사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나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회개하게 하기 위해 때로는 시련과 괴로움을 주십니다.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주님의 얼굴빛을 간절히 구할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뉘우치고 주님께 돌아온다면 말할 수 없는 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2018.11.25. 주일오전8)
때리시고 어루만지심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결국 나라가 패망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고난을 당한 후에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이 예언들은 모두 미래를 바라보고 있지만 과거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일어날 이스라엘 일을 현재처럼 보고 계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II. 때리시고 어루만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때리시고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 떠났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뉘우치게 하심으로 다시 하나님 향하여 살게 하십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을 그때 비로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스스로 외칩니다. 이것은 그들은 당신을 멀리 떠났어도 그들을 기다리고 계신 언약의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때리시는 하나님
제일 먼저 때리시는 하나님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께 돌이키기 위해 찢으시고 치심으로 징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을 징계를 통하여 입증하십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6장 1절에서 말합니다.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下).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치셨으나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죄에 빠졌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영을 위해 우상을 섬겼으나 그 우상 숭배가 가져다 준 것은 나라의 패망과 극심한 고난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패망에 대한 선지자의 역사 해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코 국력이 약해서 혹은 앗수르라는 나라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패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치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생각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 떠나고, 죄짓고, 악을 행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복수가 아닙니다. 당신께 돌아오도록 우리를 때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때리고 치실 때 그 고통은 주님을 버렸던 즐거움을 능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어디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신데 그분을 떠나서 찾는 행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을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심으로써 그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선지자의 애끓는 탄식과 음성이 이스라엘에게 전해졌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사랑에 눈이 멀었고, 물질적인 번영에 그들의 귀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음성은 농담거리가 되었고, 주님의 말씀은 하찮게 여겨졌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시고 때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시면서 끊임없이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 이스라엘의 영혼의 위험한 상태를 경고하셨고, 그리고 그들이 돌아오도록 애끓는 마음으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서 점점 멀어져간 이스라엘은 그 선지자의 부르짖음을 농담처럼 여기며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길로 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치시고 때리셨습니다.
평안할 때 죄의 고정된 마음을 하나님이 어떻게 흔드시는지를 보십시오. 평안할 때 죄와 정욕에 꽂혀있었던 마음이 시련과 환란을 당하면서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시인은 107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시 107:12-13).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멀리 악으로 나아가는 우리를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버리는 것은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선택의 마지막은 끊임없는 고통과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영적인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당신의 선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이 세계를 창조했고, 창조된 세계를 붙들고 계시며 붙들고 계신 그 세계를 선한 목적을 향해 가게 하십니다. 더욱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당신과의 생명적인 교제 안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지복을 인간이 충만히 누리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짓고 악을 향해 주님의 참된 행복에서 멀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주고 싶어 하시는 행복이 참 행복이고 우리가 찾으려는 행복이 사실은 불행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멀리 떠나는 사람을 지켜보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즉시 우리를 때리시거나 우리를 파멸하시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 사건과 여러 계기들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돌이키지 않으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셔서라도 그 길로 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살면서 또한 악을 행하는 것은 끊임없는 고통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잘못된 길로 걸어갈 때 그 징계가 크면 클수록, 그 채찍이 아프면 아플수록 역설적으로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도 포기한 인생에 대해서 주님이 거시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받을 수 있는 특권이고, 또한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징계에 있어서 ‘육신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를 대조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0절에서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0-11). ‘그들은’ 곧 ‘육신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모두 육신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 징계를 합니다. 그러나 항상 공정한 마음으로 동기 자체가 오직 자식의 올바름을 위해서만 징계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뜻대로 우리의 성미에 이기지 못해 잘못 아이들을 징계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허물이 있는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진심으로 징계하십니다. 복수심에서 우리를 때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불순종과 죄의 길로 가는 우리를 때리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십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당신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행복한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도덕적인 성품을 가진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래서 불화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화목하게 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이 징계의 목적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중에도 징계를 받고 계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자신이 잘못한 죄에 대한 기억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이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받는 징계인 줄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 그런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때리셨는데도 이것이 주님의 손인 줄을 모르고 사람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회초리를 때리셨는데도 그래서 아픈데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과 생각에서 하나님을 떠올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해야 하실까요? 아마 그 때리시는 손을 더 굳세게 하여 더 크게 때리실 것이고, 내리치는 회초리를 더 많이 때리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의 이 고통과 많은 아픔이 내가 잘못한 죄 때문에 하나님이 때리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셔서 우리가 잘못된 삶을 살 때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이 선포가 여러분들의 마음에 즐겁지 않아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외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멀리 멀리 떠나가 죄 짓고 주님 앞에 불순종의 길을 걸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여러분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당신의 종들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보이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문제를 드러내시고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믿고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여러분들이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하나님은 드디어 징계의 매를 드십니다. 그리고 때리십니다. 때려서 아프게 맞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매인지를 모를 때 하나님은 더 큰 징계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성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와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해 깨닫게 하셨습니다. 땅에 살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깨달으라고 때리시는데 여러분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주님은 우시면서 종아리를 때리시는데 여러분들은 인생에서 늘 일어나는 우연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짐승이 아닙니다. 짐승과 인간의 차이점은 고통을 당할 때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이스라엘을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당신 앞에 충성스럽기 짝이 없는 당신의 종의 가정을 상처투성이로 만드시면서까지 당신의 사랑의 음성으로만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B. 어루만져주심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눈 감고, 귀 닫고, 그리고 눈먼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때리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살면서 한번이라도 정직하게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지금 내가 곤고한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나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고 깨끗이 용서를 빌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처럼 때리시고 어머니처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동시에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징계가 엄중하면 엄중할수록 당신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단, 조건은 그 징계를 받을 때에 깨닫고 회귀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들을 베푸십니다. 징계가 단지 죄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붙들고 있는 그 죄와 불순종에서 그들을 떼어놓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서 6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下). 찢으시고 치시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의 엄중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셨으나 이스라엘은 사랑하셨으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더 큰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해 주는 의료적인 시술의 문맥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분으로 묘사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 26절에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치료하는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로페’인데 ‘의사’라는 의미로도 번역이 됩니다. 하나님은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이렇게 육신뿐 아니라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심으로써 육체와 영혼이 모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샬롬을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가 가득했을 때 또 한 선지자 말라기는 그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희망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하나님은 단지 의사로서 환자들을 치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버지로서 자기의 자녀들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타락한 자들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죄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타락한 사람들을 다시 건지시기 위해서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의 양심 속에서 부르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르시고, 급기야 그가 처해있는 삶의 상황을 흔들어 놓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세상 사랑에 붙어있던 마음이 떨어져 하나님을 향하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미끄러진 것은 하나님 때문에 미끄러진 것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미끄러졌습니다. 그러나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미끄러져서 고통 받아야 마땅한 죄인들을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구차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득하시고, 그들을 깨닫게 하시고 마지막에 징계까지 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멀리 멀리 떠나 죄에 빠져 고통 받는 그들을 차마 보실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은 찾아가셔서 미끄러진 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당신을 멀리 멀리 떠나 죄에 빠지고,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다가 받은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비참한 상황에 마음 아파하시며 그들을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려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멀리 떠난 여러분들이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는 수고와 괴로움으로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모두라면 아마 우리의 인생의 날들은 수고와 슬픔 밖에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속습니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지 못하는 이유를 자꾸 환경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혹은 고민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자녀들이 자신을 힘들게 해서,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등의 환경적인 이유로 자신이 영적으로 침체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한 모습으로 인생을 살지는 않습니다. 부유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서 가정을 이룰 수도 있고, 오랜 세월을 독신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결혼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결혼을 했지만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자녀 없이 살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고, 일평생 그런 일 없이 그저 낮은 지위에서 살아야 하는 인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삶의 양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삶의 양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지금 자신이 신앙에서 미끄러진 것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될까요? 정말 그럴까요? 확신하건데 그 정도밖에 신앙이 안 되는 사람이 지금 가난하게 하셨으니까 이나마 예배당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지 번영을 주셨더라면 아마 미끄러져 타락했을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은혜 생활을 잘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은 자신의 뜻대로 될 때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열렬히 순종할까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인생의 경험으로도 분명해집니다. 지금보다 가난했고, 지금보다 고민하는 일이 많았고, 지금보다도 더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상황에서도 여러분들은 그런 것들을 훌륭하게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극복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도 돌이켜 보면 다시 그 고통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의 선하신 사랑을 고난 속에 나타내 보여주셨다는 사실이 찬송 제목이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세월은 더 많이 흘렀습니다. 말씀의 지식도 더 많아졌고, 신앙의 연조도 길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되던 일이 지금은 왜 안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는 핑계를 끊임없이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그러는 동안 영혼은 병들어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부터 멀어집니다. 도대체 언제 끝이 날까요? 어느 환경이 되면, 어느 상황이 되면 여러분들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이 다시 불타오르겠습니까? 그러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황과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시련을 겪고 고난을 당하는 속에서 시인은 오히려 그 고난의 현실과 상반된 하늘 위에 높이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커서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넓은 궁창에 이르나니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불신앙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서 나는 주님을 믿을 수가 없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나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나를 붙드실 것을 믿는다’ 라고 말입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욱여쌈을 당하는 고통 속에서도 한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꼭 붙들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길을 잃어버릴까봐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의 잡은 손을 놓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 주님의 손을 붙들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러한 여러분들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으셨기에 오늘까지 여러분들이 살고 기동하며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를 그렇게 붙드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붙드실 수 있는 줄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그리고 우리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소원을 주님께 아뢰셔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의 모든 열망이 마지막 경건의 한 형태로 표현된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말씀으로 불을 지르시는 이유는 그냥 우리의 마음에서 그것이 타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불을 지피는 것이 아닙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화부들이 옛날 기차의 화칸에 끊임없이 석탄을 퍼부으며 증기를 발생시키는 것은 그렇게 단지 불을 때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육중한 기관차를 움직여 어디론가 가게 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시고 성령으로 은혜를 주시는 이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어떤 삶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그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게 하시는 하나님과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의 틈바구니에 있습니다. 그 틈바구니에 끼어서 우리의 능력으로 그 삶을 살아낼 수 있다고 교만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과 그리고 할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여러분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편에 서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마지막 경건의 형태가 기도입니다. 간절한 기도,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다는 모든 자만심을 버리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손으로 나를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고합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 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렇게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을 붙드는 간절한 믿음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이 비밀스러운 은혜의 힘이 기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니 간절한 기도로 어루만지시는 주님을 만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이스라엘은 물질적인 번영 속에서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나라를 잃고 깊은 패망을 경험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들이 잘못된 길로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돌아갈 유일한 목적지는 오직 하나님의 품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얻어야 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만복의 근원이신데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으며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만약에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있다면 그것은 행복을 가장한 불행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의 온 몸을 살펴보십시오. 조용히 묵상하며 지금 나의 온 몸이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기 저기 때리시고 치셔서 그렇게 멍들고 찢어진 모습으로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그렇게 얻어맞으면서 아프다고 눈물 흘렸지만 한 번도 그 눈물을 하나님을 향하여 흘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완고히 하고 어금니를 깨물며 그리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때리시고도 돌이켜 서서 당신이 때리신 여러분들을 바라보시며 깊이, 깊이 마음 아파하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그렇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니요, 그가 때리시고 그래서 여러분들은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일깨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게 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신의 상처를 보며 ‘이 모든 상처가 나의 죄 때문이니 주님의 마음은 나의 육신의 이 고통보다 훨씬 컸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슬기로운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리실 뿐만 아니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말씀으로 낫고 고쳐져서 그래서 예전에 꿈꾸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아가게 하십니다. 오늘 이렇게 치료하시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 새 삶을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2018.12.2. 주일오전9)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 6: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로 때리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당신을 버렸으나 당신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기에 때리신 그 손으로 이스라엘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II. 살게 하시는 하나님
이 절이 포함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살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살리실뿐만 아니라 또한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목숨이 살아있다고 해서 모두 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A. 살리심 : 생명
제일 먼저 하나님이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라고 하였습니다. ‘이틀’은 ‘생각보다 빠른 날’을 의미하고, 동시에 약속의 확실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살리시는 일이 있다면 언젠가는 그들은 죽은 자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랬습니까? 왕국은 번영하였고, 산업은 번창하고, 나라의 판도는 커졌습니다. 앗수르라는 강력한 나라가 침공하지 아니 하였더라면 이스라엘은 제법 오래도록 번영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번영의 꿈은 깨졌습니다. 나라가 패망하였습니다. 그들이 죽어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열렬히 살아있어서 나라를 일구고, 산업을 번영하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죽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우리를 살리사”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육체가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은 우리의 옛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어지는 성경 구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고 하였습니다. 육체는 죽으면 생명의 기능이 끊어지고 즉시 몸이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흙으로 돌아가고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고, 원소로 환원이 됩니다. 그러나 영혼은 본질 자체가 물질인 육체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영혼은 불멸하는 존재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이것은 신자의 영혼이나 불신자의 영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 때문에 똑같은 죽음이라는 용어가 육체에 적용될 때와 영혼에 적용될 때 각각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죽음이라는 말이 영혼에 적용되면 멸절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은 바로 우리가 예전에 영혼에 죽었던 자였는데 그렇게 영혼이 죽었기 때문에 세상의 풍조에 따라 죄짓고, 불순종하고, 악의 영을 따라 살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육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죽은 영혼은 수없이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많은 악한 행실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 죽은 행실, 곧 죽은 영혼으로 행하는 악한 일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만약에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이 쉽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자의식에 눈뜨지 못한 유년기를 지나고 있거나 혹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대면할 수 있는 사태를 만나지 아니 하였기 때문에 좁은 시야로 스스로 만족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살아갈 길도 모르고, 살 힘이 없는 것은 가장 최악의 인생의 모습입니다. 어디로부터 자신이 왔는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인간의 길인지도 모르고 또 올바르게 살 힘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보다 좀 더 나은 것은 살아갈 길은 알지만 살아갈 힘은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살아갈 길은 알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지는 알지만 마음속에 들어온 죄와 이 세상사랑 때문에 아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려니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자신 안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수많은 신자의 모순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인생의 길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힘이 없어서 불순종의 길을 계속 가다가 보면 그 지혜조차도 어둡게 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인간이 살아가야 할 길도 알고, 그렇게 올바른 길을 살아갈 수 있는 힘도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상태일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릴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36분마다 한 사람씩 자살을 합니다. OECD 국가 중 한국의 자살률이 제 1위입니다. 예전에는 먹고, 살고, 그리고 거처하는 일 때문에 인간이 비관하기도 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그런 일들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옛날과는 현저히 다르게 이제 인간들이 스스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지 못한 모습이 다양한 악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욱하는 마음에 살인을 저지르고 살인자가 되는 사람들이 1년에 평균 400명이라고 합니다. 어차피 인간이 살다보면 볼썽사나운 사람도 만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만나고, 자기를 언짢게 하는 사람도 만나는데 왜 그것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욱하는 마음에 사람을 죽여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얼마 전에 여러분들은 미국 광장에서 커다란 공연이 있었고, 그 건너편에 건문의 어느 한 방을 얻어서 기관총으로 자동 소총으로 그 많은 군중에게 무차별 사격해서 수많은 사람이 살상 되었던 미국의 일화를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 세상에서 낙오자요, 패배자요, 가난뱅이였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조사해보니 그는 굉장히 돈이 많은 거부였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렇게 돈도 많고 재산도 있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최근에 또한 미국에서 들어온 소식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더욱 찾게 만듭니다. 한 중년의 남자가 군부대에 침투해서 탱크를 훔쳤습니다. 그리고 탱크를 몰고 시내에 와서 길가에 나란히 서 있는 차들을 밟고 지나가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열두 대의 사이드카 경찰차가 따라왔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계속 탱크를 따라가며 마이크로, 확성기로 사람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하는 일과 사이렌을 울리는 일 이외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코브라 헬기를 동원하여 미사일로 이 탱크를 격파할 계획까지 세우고 추적했습니다. 탱크를 몬 이 남자는 고속도로로 접어들며 질주하였습니다. 그는 고속도로 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서 고속도로 건너편으로 역주행을 하며 차들을 들이받을 심산으로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를 넘다가 캐터필러가 그 턱에 걸려서 가지고 못하고 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투항을 권유하였지만 결국 특공대에 의해 사살되고 말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런 극단적인 살인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가족이 서로 원수처럼 미워하고, 그리고 서로 기뻐하며 살아가야 할 관계들이 서로 원망하는 관계로 깨어져 버린 채 살아갈까요? 부모가 자식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 사랑하여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을 버리는 것은 어디서 오는 힘일까요?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를 외면하고 의절하는 그 큰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이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로 이루어지겠지만 그것을 뿌리까지 추적해 가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생명’이라는 답을 얻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마땅히 분노할 일들에 대해 참고, 그리고 자신의 경솔한 결정이 몰고 올 미래의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생각하며 자신을 절제하고 지킬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가족을 친근히 하고 돌보며 살아갈 수 있는 이 자신의 영혼 안에 힘이 없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은 단지 물질로 된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는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을 소비하며 육체의 힘을 얻지만, 영혼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을 받지 아니하고는 참답게 영혼다운 영혼으로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그 끔찍한 모든 일들은 영혼이 영혼에게 고유한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힘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까? 이렇게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이 이 땅에서의 모든 것으로는 이 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 1서 4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결국 우리가 죽어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 그 은혜로부터 오는 힘이 아니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사람인 줄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힘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 희망도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다시 살려 우리의 영혼에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려고 삶의 모든 상황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위해 죽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살림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역사 이래 종교는 끊임없이 이 길이 무엇인지를 탐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많은 사람에게 이 길이 그 길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학문은 자연적인 진리를 찾아내어서 과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분석해 사회 과학을 만들었고, 사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종합하고 분석함으로 자연 과학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풍부한 물질생활은 바로 이런 학문의 발전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그러나 철학은 이 모든 사회 과학이나 자연 과학과는 다른 차원의 고민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과학과 사회의 진리가 어떻게 통합되고 그것 때문에 인간은 어떤 의미를 부여받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언제나 진리였습니다. 이처럼 종교는 길을 찾아가고, 철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자신들이 믿는 그 길이 그 길이라고 가르쳐 주었고, 철학자들은 자기가 발견한 진리를 그 진리라고 여겼습니다. 이것들은 종종 인간에게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기도 하였고, 인류에게 어떤 빛과 확신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든 학문이든 철학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생명을 준 것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생명은 그런 종교와 과학, 철학 속에 감추어 있지 않고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이 없는 길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생명이 없는 진리가 어찌 참 진리일 수 있겠습니까? 생명이 없는 과학의 발전이, 사회의 발전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어떠한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모든 길과 진리의 희미한 빛들을 남겨두시기는 하였으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두셨습니다. 누구도 어떠한 종교도, 어떠한 위대한 철학과 어떠한 과학도 이 생명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막아 놓으셨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당신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의 영혼 속에만 이 생명이 주어지게끔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인류가 찾았던 종교와 그 모든 화려하고 빛나는 철학은 우리의 인생의 궁극적인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빛깔이 있을지 모르나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가장한 것들이요, 참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 진정한 생명이 아닌 것입니다. 이 생명은 인간의 마음속에 부어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그리고 모든 이웃들을 사랑하게 만들며, 이 두 사랑 안에서 자신은 스스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게 합니다.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사랑과 선의로 돌보게 하시고, 이리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뜻들을 이루어가며 그 안에서 인간은 완전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도록 그렇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 헛된 종교에서 생명을 찾습니다. 생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철학을 통해서 그 진리에 도달하면 영원한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주후 5세기에서 3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기라성 같은 천재들이 태어난 시대입니다. 눈부신 그리스의 철학이 인류 사유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알고 계십니까? 그 당시에 철학자의 자살률이 가장 높았다는 것 말입니다. 결코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충만히 누릴 수 있도록 오늘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당연히 인생은 곤고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이 은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누립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고, 나를 나답게 살게 하며 영혼과 이 세상 사이에 구분은 있으나 천상의 소망이 이 지상에까지 이르고, 지상의 소명이 하늘에까지 이르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시간 속에 잠시 사라져 가는 육체를 보십시오. 육체를 가진 인간은 태어나고 자라며 장성하고 그리고 점점 늙어가고 그리고 소멸하고 결국은 사라져 갑니다. 만약 우리의 육체를 보면 우리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 오늘 그 생명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경험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은혜를 충만히 받고 살리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여러분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일으키심 : 소명 따르는 삶
두 번째는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소명을 따르는 삶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라고 말합니다. 단지 죽은 우리를 살려내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아난 우리를 일으켜 세우셔서 이제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고, 쓰러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워 가던 인생의 길을 다시 걷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145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시 145:14) 하나님은 넘어질 때 그들을 붙드실 뿐 아니라 또한 그렇게 마음을 비굴하게 낮추고 하나님을 찾는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주님이 넘어진 자를 붙드시고 그리고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이유는 다시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절망 중에 다시 일어나서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모든 의미가 바로 하나님을 통하여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를 깨닫고, 그 의미를 향하여 살게 하십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도 않고, 그리고 우리의 육체의 젊음은 항상 우리가 구가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젊었던 사람은 늙고, 병들고, 소멸하여 갑니다.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의 의미는 단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이 공간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의미는 초월적인 세계에까지 연결되어 영원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영원은 오늘 우리의 삶의 의미를 규정하고, 오늘 우리의 삶은 영혼을 향한 의미를 오늘 누리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언제쯤 되면 우리가 만족할만한 인생의 날이 올까요? 아마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정말 지혜로운 자라면 인간의 참된 만족이 세상의 물질과 그리고 이 세상의 평안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살아갈 힘을 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인생에는 지나온 인생이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많은 슬픔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인생의 슬픔과 죽음, 겁을 내지 않고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영적인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부여된 인생길을 걸어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허무와 두려움은 언제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현실에 국한해서 본다면 우리는 이런 허무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없는 사람은 가지면 그 허무와 두려움을 이긴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허무와 두려움을 이기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허무와 두려움은 단지 무엇을 소유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따라 사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무한한 점들처럼 많은 시간 중에 바로 이때 나를 여기에 태어나게 하셨을까?’ ‘무엇 때문에 나는 이 세상에 꼭 태어나게 되었을까?’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과 이 온 세계에 관한 경륜의 비밀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숨겨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하나님께서 그 비밀들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의 빛 아래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에 의해 살림을 얻고, 다시 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으켜 주심을 받아서 이제 하나님이 나를 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살게 하셨는지를 생각하며 그 잃어버렸던 인생의 의미를 찾으며 인생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잠시 잠깐 후면 우리의 인생은 끝나고, 인생의 무대에는 막이 내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들이 살았던 모든 삶을 가지고 그 분 앞에 왜 이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지를 설명하여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신자로 다시 불러주신 그 부르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고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 온 세계 위에 티끌만큼이라도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며 나 같은 지푸라기와 같은 인간 때문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고귀한 뜻에 감격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하나님 앞에 살게 함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주님이 영원히 죽었던 우리를 다시 영적으로 살아나게 하시고, 가던 길을 잃어버렸던 우리를 일으켜 제 길을 걷게 하시는 것은 모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 그의 앞에 산다고 하는 것은 그분과의 충만한 교제와 평화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이 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크게 가책 받는 일이 없이 부족하지만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과 친교를 누리면서 행복 가운데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여러분들이 태어나게 하신 것이 기쁘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지금도 여러분들을 돌보고 계신 하나님이 즐겁습니까? 기쁘십니까? 그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과의 완전한 평화와 교제 속에서 살기를 원하여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살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돌아오는 자를 다시 당신의 사랑을 받으며 당신 앞에서 당신을 향하여 살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 시간도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마른 뼈와 같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로 가득 채워져서 그 넘치는 생명으로 군대처럼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은 육체의 행실을 되풀이하는 악한 삶이 아니라 그 충만한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방황하는 것은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이제 핑계될 이유가 없이 진리가 명백하고,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며, 또 여러분들이 또 어떻게 하나님 앞에 참된 삶을 살아야 될지가 명백해졌습니다. 이제 핑계할 이유도 없고 핑계할 근거도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방황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던 불행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으로 그 지식을 알도록 창조되었는데 우리가 여태까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배신하고, 그리고 우리가 어리석게도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인간이 걸어가지 않아야 할 길을 걸어가며 기쁨과 그리고 교제대신 끊임없는 단절과 고통을 경험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 속 태우고 괴로워하며 절망과 좌절 사이를 오가는 삶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 살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환경의 탓을 너무 많이 하지 마십시오. 언제쯤 되면 그 환경들이 여러분들이 하나님 사랑하며 살기에 좋은 환경이 되겠습니까?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속에서 깊이 다짐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고, 신자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기도로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인간은 바람처럼 지나는 인생을 삽니다. 빈들에 마른풀 같이, 들에 핀 백합처럼, 공중의 나는 새 한 마리처럼 그렇게 힘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른풀도 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아궁 속에 던질 풀도 고이 입히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공중의 새 한 마리도 먹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태어났고, 숨 쉬고, 기동하고, 먹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인간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을 다시 살리십니다. 그래서 새 생명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살려낸 그들을 번쩍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이제 너와 함께 하나니 너는 네 인생의 길을 걸어가라. 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 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 음성 앞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방황하지 말고 은혜를 받으십시오. 간절히 하나님께 여러분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아뢰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들의 믿음은 간절한 기도로 표현되는 것이니 이렇게 당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일어나게 하십니다. 은혜를 받고 다시 충만한 생명으로 하나님 앞에 기쁨의 삶을 살게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2018.12.9. 주일오전10)
신실하고 복 주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 6: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올 때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다루실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절에서 선지자는 “우리를 살리시며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 살리라”(호 6:2)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의 비극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언제 죽든지 살아있는 동안은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을 살아내게 하는 진정한 힘은 영혼의 힘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의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힘 때문에 인간은 시련 속에서도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II. 신실하고 복 주시는 하나님
오늘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 고난을 받을 때 어떠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올지를 보여줍니다. 선지자의 이 미래적 선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한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실하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A. 신실하신 하나님
제일 먼저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죄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벽빛과 같이 어김이 없이 그들에게 나타나실 것임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새벽빛은 어김이 없이 오는 하나님의 시간을 뜻합니다. 밤에는 슬픔과 눈물이 있고 혹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어도 새벽은 정확하게 옵니다. 인간이 무엇을 경험하든지 그것에 영향 받지 않고 시간은 흘러가고 밤이 지나면 새벽이 찾아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고통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정확히 그들을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새벽빛은 이미 어두운 시간을 배경으로 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행복하고 즐거운 날에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상황,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모든 악한 인간이 대조를 이루게 하시고, 온 땅과 만물위에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변천하는 세상과 대조를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좋은 것은 절망의 어두움이 없는 빛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완벽하게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빛을 경험한 신자는 모두 한때는 어둠 속에 살던 사람들이었고, 찬란한 말씀의 빛을 경험한 사람은 무지의 흑암 속에서 머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곤고한 날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라고 하였습니다.
어두움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환경의 어두움입니다. 우리의 삶의 상황들이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어두움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 신자들은 종종 갈 길을 잃어버립니다. 어떻게 이런 일에 이르게 되었고, 왜 이 불행하고 슬픈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지, 그리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떨어지게 됩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낯선 환경,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 던져지면서 신자들은 두려워하게 됩니다. 둘째, 영혼의 어두움입니다. 환경의 어려움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영혼의 어두움입니다. 이 영혼의 어두움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사라진 가운데 드리우는 어두움입니다. 이 영혼의 어두움은 주관적인 어두움입니다. 스스로 죄 가운데 무지를 선택했기 때문에 찾아오는 어두움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지식과 총명에 넘치는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은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 진리 가운데로 성령님이 인도하시면 우리의 마음은 사랑에 넘치게 되고, 그 사랑은 우리 속에 성향을 형성하게 됩니다. 올바른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판단이 매우 분명해 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어두움이 드리울 때쯤 신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영혼의 총기를 잃어버렸습니다. 당연히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함께 식어간 것입니다. 자신이 어두운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환경의 어두움을 만나게 될 때 그 속에서 자신이 마치 더듬이가 모두 잘려버린 귀뚜라미가 된 것을 느낍니다. 아무리 부지런히 손을 휘저어보아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부터 해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믿으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철저히 깨닫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를 바라보던 시선에서 그것을 떼어놓아 우리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만납니다. 도저히 내가 바라지 않던 나 자신을 봅니다. 이때 충분히 절망하십시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렇게 낙심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비관적으로 본 그 마지막에는 아무런 실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자녀들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깊은 어두움, 누구도 자기를 도울 수 없는 환경의 어두움 속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을 믿었던 모든 신뢰를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도울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인생의 밤에 새벽이 가까워 올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굳어졌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녹고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어둠 속에 있어본 사람만이 진리의 빛의 가치를 알고 인생의 쓰디쓴 고통을 맛본 사람만이 하나님 사랑의 달콤함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병들어 고통을 받아본 사람만이 치료의 행복을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우리의 상황이 어려워서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버리지 않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이들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수없이 버렸으나 주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불리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약점이 있다면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붙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해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따라 이리저리 요동치는 삶에는 신실함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너무 많은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욕심 때문에 굴러 떨어져 신실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멀리 떠났으나 주님은 그들이 회개할 때에 새벽빛 같이 어김없이 오실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찾아오신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들을 찾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 번듯한 모습으로 나아갈 때가 올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반듯해질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의 죄를 위해 죽으셔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여러분들이 믿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한분께 모든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상황이 어떠하든지 내가 아무리 깊은 어두운 환경 속에 들어갔던지, 내 영혼을 에워싸고 있는 어둠의 깊이가 아무리 클지라도 하나님 그 분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나는 살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의지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복 주시는 하나님
마지막 두 번째는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어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 같이 어김이 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난 것이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이라면 그들에게 임하시는 것은 이 신실한 성품이 어떻게 시행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이 복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진정으로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시는 바와 같이 강수량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적은 강수량에도 잘 자랄 수 있는 작물들을 재배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곡식을 거두기 위해서는 비가 필요했습니다. 두 번의 비가 꼭 필요했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입니다. 이른 비를 맞고 농부들은 파종을 합니다. 그리고 늦은 비가 내림으로 식물들은 결실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이제 햇빛을 받으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풍성하게 수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시고 당신이 그들을 좋아하실 때는 때에 맞춰 비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버리면 하나님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늘이 비 내리기를 멈추자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죽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친 듯이 파종하고, 씨를 뿌리고, 심지어 동물을 기르고 애를 쓰지만 하늘이 문을 닫으면 비는 그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죽음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가뭄의 기간이 끝나고 하늘이 올려 보십시오. 비가 쏟아집니다. 그리고 얼마 후 죽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때에 인생에 있어서 승부수를 이 세상에 두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하나님이 복주시지 않는 한 복을 받기 위한 자신의 모든 노력이 헛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승부를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복의 근원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많이 애쓰고 씨를 뿌리고 부지런히 노력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손에 복을 주지 않으시면 그것만으로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풍성한 수확은 자연의 혜택인데 그 자연은 하나님에게 달린 것처럼 우리의 인생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주님을 등지고 여전히 불순종하면서 세상에서 잘 되보고 번영하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죄를 짓게 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가끔 속임수를 하고, 그리고 세속적인 방법으로 요령을 부려도 때로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난 다음에는 인생의 그런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한두 번 그것을 깨달았으면 믿음의 닻을 주님께 던지고 ‘이제 나는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 자녀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거듭 실패해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실패한 것밖에는 증명된 것이 없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상에서 번영해 보려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 없는 복을 누려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진정으로 선택하셨다면 당신 바깥에서 복을 받고 살려는 그 사람들을 버려두시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기들에게 복을 주시는 이가 우상인줄 알아서 우상을 섬기고 그 우상을 경배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 우상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었습니까? 우상이 준 줄 알았던 복은 알고 보니 하나님이 주신 복이었고, 우상이 지켜준 줄 알았던 자신의 행복은 하나님이 지켜주신 것이었고, 하나님이 그 팔을 걷으시자 그들은 나라가 패망하고 백성들은 불행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이스라엘 백성들만 가졌던 마음이겠습니까?
하나님 없이 복을 구하며 사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지고 복으로부터도 멀어집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인생이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종종 꼬입니다. 꼬일 때마다 우리는 그 꼬이는 인생의 상황과 씨름을 합니다. 그리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깊은 진흙탕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처럼 헤어 나오기는커녕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에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봐야 합니다.
성전 건축할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하고 헌신하기가 싫어서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학개 선지자는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성전을 지을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변명하고 자신들은 판벽한 집에서 훌륭한 거처를 만들고 살았습니다. 이때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학1:5)고 하였습니다. 즉, 너희가 무슨 짓을 하고 살아가는지 너희의 행동을 스스로 면밀하게 조사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그것이 ‘너희가 왜 많이 애쓰고 노력해도 복을 받지 못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말합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 1:5-6)” 인색하기 짝이 없이 부지런히 주머니에 돈을 모았으나 알고 보니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으니 그 주머니에 뚫어진 구멍으로 돈은 모두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이 그림이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적합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행위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이미 양심이 하나님께 복을 얻을 수 없는 자신임을 증명합니다. 그때 그는 이스라엘이 했던 똑같은 일을 되풀이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으니 이제는 자기 방법으로 부자가 되어 보고 복을 누려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복의 추구에서 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함은 만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얻어 보려는 데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로 이것을 빼고는 죄라고 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그 죄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기 스스로 복을 얻어 보려는데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실까요? 여러분들이 계속 회개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하나님이 손해 볼 일이 무엇이 있으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의무를 요구하시는데 우리가 의무를 이행함으로 하나님께 무슨 덕을 드리겠습니까? 아무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으시고, 필요한 것도 없으신 완전하신 하나님이신데 우리에게 이런 회개와 의무, 당신을 헌신하고 사랑하도록 요구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 자신이 만복의 근원이고 우리를 그 복의 근원 앞에서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돌이킨 자들이 회개하지 아니하고는 복이신 당신에게 돌아올 수 없고, 버려두었던 의무를 다시 이행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으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는 다른 곳에 있는 사랑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당신 앞에 살아서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시편 16편에서 시인은 이런 마음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1-2) 고백입니다. 모든 타락했던 사람, 모든 불순종했던 사람, 세상을 멀리 떠나고 세상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은 이것입니다. ‘나의 복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나의 죄는 복이 아닌 곳에서 복을 구한 것이었나이다.’ 어느 때까지입니까? 우리가 속으며 살아온 일생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아서 젊어서 주님을 섬길 수 있었던 우리들이 이제는 늙고 병들고 약해졌습니다. 그때 속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복이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뿐이 없는 줄 알았더라면 우리는 젊은 날들을 그렇게 허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어지면서 보람도 없이 열매도 없이 우리의 인생은 허공중에 흩어졌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언제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생겨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버리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본래 창조의 완전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거기에서 온갖 결함이 생겨나고 만물은 행복한 상태를 갈망하나 현실은 고통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문제는 땅에서 생겨나지만 해결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고통스러운 문제들이 일어날 때 왜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는지 묻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렇게 나에게 일어난 많은 아프고 힘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우리가 만약 인생의 덧없음을 깨달았다면 그렇게 허무한 일에 열심을 내며 살아왔던 날들을 회개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가졌던 것을 잃어버린 슬픔에 잠긴다면 가졌던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날들을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요함은 가난하고 결핍한 데서 경험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결국 신실하지 못한 수많은 인간과 자신을 보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쓴맛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단맛을 알 리가 없고 아픔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평안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양극에 있는 경험들은 언제나 서로 통합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에게 복을 준 줄 알고 우상을 섬겼으나 그들의 마지막은 우상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우상을 믿었던 자신의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형벌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는 줄을 깨달았고, 우상이 준다고 믿었던 많은 곡식과 그 풍족한 삶이 사실은 우리도 알지도 못하는 새에 신실하신 성품으로 우리를 도우셨던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문제를 통해서 결국은 이 세상에는 진정한 복이 없고 주님이 만복의 근원이신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의 복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전에 무엇을 섬겼든지 오늘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을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나의 복의 근원이 주님 밖에 없사옵나이다. 이제 주님 바깥에서 복을 찾았던 모든 날들을 후회 하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주머니에 동전 하나 없어도 아빠와 함께 가면 마음은 부자입니다. 왜냐하면 맘씨 좋은 아빠는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사주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안 그럽니다. 그런데 아빠는 그렇게 합니다. 그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굳이 동전 몇 닢을 주우려고 땅바닥을 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의 손을 꼭 붙드십시오. 그 아버지가 오늘도 당신에게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복을 누리게 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힘을 주셔서 우리의 소명을 따라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돌아오는 사람들이 신실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신실하십니다. 당신을 멀리 떠난 사람들이지만 다시 회개하고 당신의 품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은 지난날의 모든 과거를 씻으시고 다시 하늘을 열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십니다. 황폐했던 여러분들의 인생의 들판에는 결실한 곡식들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짧은 인생을 사는데 어찌 하나님 아닌 것에 목마르며 복주지 못할 이 세상의 것들에 목숨을 걸고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자들이 되겠습니까? 신실하고 복 주시는 우리 하나님을 덕 입어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무한한 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 6: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난주에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이스라엘을 다시 만나주신다는 것 그리고 이 땅의 모든 복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지만 다시 이 모든 복을 받을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오늘의 말씀의 요지입니다.
II.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오늘 3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인간의 문제는 결국 생명의 문제라고 말씀을 드렸고, 이 생명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우리의 영혼에 오는 것이지 이 땅에 있는 자원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패망하고 난 후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시련에 처한 다음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멀리 떠나 타락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이 지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지식은 이스라엘을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다시 살게도 할 수 있는 생명의 지식이었습니다. 아마 성경에 나오는 단어 중 ‘지식’이라는 단어만큼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지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지식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애써야 될 것인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지식이라는 말이 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은 창세기 2장 17절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는 이 구절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선악과를 따먹으면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었을 때는 어두움을 알지 못합니다. 빛만 알 뿐입니다. 그러나 어두움을 경험하고 나면 비로소 어두움과 빛에 대해 알게 됩니다. 빛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된다는 것 보다 어두움에 대해서 앎으로 빛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선악을 안다는 것은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좋은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특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선악을 알게 됐다.’ ‘지식을 갖게 된다.’라고 할 때 그것은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즉,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 이 지식을 말할 때, 부분적으로 인간에 관해서 이 지식을 말할 때 이것은 사랑 없는 정보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들에게 지식을 따라 그 아내와 동거하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한 인간에 대한 신상명세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식이라는 단어는 원래 동사에서 나오는데 이 동사가 처음 쓰인 곳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후 둘이 동침하여 가인을 낳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즉, ‘알다’라는 이 단어는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다’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경 속에는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세계를 아셨는데 세계를 아실 때는 그냥 알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창조될 인류를 사랑하시고 그 인류 때문에 즐거워할 당신을 사랑하는 지식 안에서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타락 후 인간은 즉시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즉, 타락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지식을 가져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혼에 어두움이 들어오자 이제 지성에는 눈멂이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인간은 이제 이 밝은 지식의 세계에서 캄캄한 무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살아있는 자신은 알겠는데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치 어두운 밤중에 더듬이를 잘려버린 귀뚜라미처럼 그렇게 그 공간에 던져진 것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런 상태에서 인간을 내버려 두셨다면 모든 인간은 어둠 속에서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비록 당신을 멀리 떠나고 죄를 지어 형벌을 받게 되었을지라도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처음 당신에게 범죄한 아담에게 조차도 당신을 아는 지식의 빛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이 지식의 빛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전해졌고, 그 빛에서 멀어진 백성들은 불순종하는 불택자들의 후손들로서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지고, 선택한 백성들은 이 지식의 빛 아래 머물렀습니다. 오류도 있었으나 그 지식의 빛은 여전히 가녀리게 남아서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내가 누구이고, 세계가 누구인지를 희미하게나마 알고 인생을 살아가게 하셨고, 그 빛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힘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희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희미한 빛을 붙들고 심지어 타락의 주범인 아담조차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지식의 빛은 이제 그 자손들에게 물려지고 아브라함에게 와서 그 하나님의 지식을 더 풍성하게 구원의 계시로 주십니다. 그래서 그 지식의 빛이 집안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그 집안은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으니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은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 먹고 잘살게 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찬란하게 보존하고, 그것을 열방에 보여주어서 모든 세계의 만민을 그 지식의 빛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이후로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은 세 가지 의무를 가졌으니 하나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의 지식의 빛을 간직하는 것과 새롭게 주어지는 지식의 빛을 보태는 것, 그리고 그 지식의 빛 아래서 그 지식의 빛을 가진 백성답게 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식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은혜로 주어진 이 지식의 빛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지식의 빛대로 살아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지식의 빛을 따라 살고, 그 생명의 은혜를 공급 받으며 살면 이 지식은 그들을 점점 더 큰 지식의 빛으로 인도할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세계는 보이는 세계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할 때 눈에 보이는 지상의 세계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맞짝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천상의 세계에 반영이 되게 하셨고, 천상의 세계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이 땅에는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인간을 두셔서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판단하며 주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득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였고, 그 찬란한 영광 안에서 모든 인류가 이 지식의 빛을 누리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모든 이웃들을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같이 사랑하는 세계가 되게 하시려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천상과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시고, 이 세계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랑하게 하기 위하여 이 세계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록 구원의 계시를 주셨으나 여전히 어두움과 무지는 우세해졌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는 이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을 알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양심에 핑계하지 못할 정도로 분명한 것이었을 뿐 하나님과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이 모든 세계에 피조물들을 선의로 대하며 살아가게 하는 이 사랑의 원동력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은 인간의 마음 안에 주어지지만 이 지식은 인간이 이 지식을 따라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증거하고 뜨거워질 수도 있고, 차갑게 식고 사라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로 있다가도 어둠 속에 다시 걸어가는 일들이 가능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결국 이 지식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생명의 힘인데 이 지식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바로 이 지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4장 6절에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지적합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 앞에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이 땅의 번영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불의와 악을 저지르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의 뿌리를 더듬어 내려가 보면 오직 하나의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4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으니 나도 내 자녀들을 버리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일치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 지식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추구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열렬하게 추구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자는 이 지식의 사랑 안에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서 최고의 관심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이었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보다 강했고 앗수르도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였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강대국들이 역사 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런 위대한 역사속의 나라들은 검불과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번영하는 그 나라 속에 한 시대를 구가하는 명성 속에 그 나라가 있었지만 역사는 그들을 기억하지만 그러나 그 나라 안에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아는 거짓된 지식만이 판쳤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많은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을 섬기고, 창조주 하나님을 모욕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었고, 이러한 타락성은 단지 종교에만 배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학문, 철학, 역사, 문학, 예술 모든 것에 배어 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 구약의 시대는 이스라엘조차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림으로써 얼핏 보면 지식을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지식의 세계에 대한 예고편이었을 뿐입니다.
신약 시대가 되면서 이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신학적인 대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져 세상의 통치를 주관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율법 이상의 은혜와 진리가 주어진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 세상에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과 18절은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7-18) 하나님이 때로는 홍해를 가르시고 혹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고 혹은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고, 혹은 기적을 베푸셔서 당신이 누군지를 보여주셨지만 그런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얻게 되는 지식은 아주 일정하게 작은 분량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제 마지막 때에 이 모든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보여주시던 지식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함께 찬란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30년 가까운 생애를 지내셨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의 몸 입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는 계시의 빛은 아직 찬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공적인 생애를 시작할 때부터 이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찬란하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렸는데 그렇게 작은 물건을 찾지 못해서 어둠 속에서 무릎으로 기면서 그것을 흘렸을지도 모르는 땅을 더듬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찾을 수 없었으니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수만 개의 조명탄이 하늘로 치솟으면서 장렬합니다. 눈부신 빛을 내면서 수만 개의 조명탄이 그 어두움을 비췹니다. 바늘 하나라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눈부신 빛이 비취고 그 바닷가가 대낮과 같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어둠 속에 희미한 빛이 구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바로 이렇게 수만 개의 조명탄이 하늘을 찬란하게 수놓아 온 지면을 눈부시게 비췬 빛입니다. 이처럼 신약 시대에 와서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 혹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신학적인 전환을 이룹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마지막에 선한 일을 모두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을 잃고 고통 받는 자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을 때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눈물이었습니다. 주린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슬퍼하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애끓는 심정은 하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냥 인간 예수를 보았을 뿐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결국 자기가 아끼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희생의 삶을 사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형벌 받아야 할 인류를 대신해 죽고, 그래서 죽어야 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후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 찬란하게 눈부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으나 그들은 보았으나 그러나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사람의 몸 입으신 예수는 예수, 하나님은 하나님이었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그 분, 하나님은 하나님이었고 이 둘 사이에 해결될 수 없는 깊은 단절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조차도 제자들은 아직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그렇게 우리 눈에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이성의 문제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순절의 성령이 강림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공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인간 바깥에서 행한 하나님의 일을 인간 안에 오신 하나님이 설명해 주실 때까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유보되었던 것입니다.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희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강림하시자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고, 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왜 그분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는지, 부활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하늘에 오르신 그분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신지 모든 지식들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빗줄기처럼 쏟아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 성경은 곧 사랑이셨으니 이 모든 지식이 차가운 지식으로가 아니라 뜨거운 사랑으로 역사하는 지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치를 깨닫고 나면 무지랭이 같은 초대교회 신도들이 무식한 사도들의 설교 한번 듣고 회심한 다음 생명을 버려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지식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여러 많은 문제에 직면합니다. 타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많은 문제가 있었고 그들이 타락하고 우상을 섬기면서 수많은 핑계거리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 여러분들도 그렇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물론 먹고 입고 사는 문제부터 정신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인간관계의 아픔에서부터 일생의 타고난 상처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자신의 본성의 약점에 이르기까지 여러분들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문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단언합니다. 죽는 날까지 그 고민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것이 현실이고 팩트입니다. 끝나지 않습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춤을 추고, 마약에 취해보면 그 시간동안은 잊어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깨고 나면 그 현실은 그대로 살아서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 긴 세월동안 현실을 원망하고, 투덜거리고, 심지어는 자학하고, 심지어는 자기를 위로하고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태어난 과거에 대해서 끊임없이 아파한 그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사는데 티끌만큼이나 도움이 되었습니까? 젊었을 때 어렸을 때 그렇게 아파하고 힘들어 하던 것을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서도 똑같은 일들로 아파하고 인생을 힘겨워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여러분들이 직면하는 현실입니다.
신앙은 이것을 결코 없애주지 않습니다. 신앙은 이런 것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와 현실은 그대로 존재하고 죄의 결과인 비참까지도 시간이 이 세상 속에 지속되고 있는 한 계속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죽는 날까지 그 현실을 직면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줍니다. 그것은 바로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고, 누린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행복하다면 그는 아직 인생에 대해서 철들지 않은 것입니다. 저 삶의 깊은 밑바닥, 인간 본성과 인간 운명의 본질을 주목하고 나면 그것은 이 세상의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우리를 만드셨을 때는 인간으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셨겠습니까? 여전히 현실은 수많은 죄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고 그 결과인 비참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비참의 결과들을 우리는 자신의 개인의 삶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본성 속에서, 사회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봅니다. 그리고 사회를 향해 모순과 부조리로 인해서 분노하면서도 놀랍게도 그런 부조리와 모순을 자기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는 또 다른 모순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종식될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종식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문제가 많을 것이고, 죄의 결과인 비참은 여전히 이 세상에 차고 넘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한복판을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 오셨을 때에 귀한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니 아들이 거할만한 세상은 죄가 없어야지 깨끗하게 한 다음에 예수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 많은 세상에 죄인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죄는 없으셨지만 죄의 결과인 모든 비참을 경험하며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에 대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배워가셨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그 문제들을 여러분들이 하나하나를 해결할 능력은 없습니다. 돈의 문제는 돈 벌면 해결될 것이고, 아픈 문제는 약 바르면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사실 있어도 큰 문제가 안 되는 문제들입니다. 보다 더 근본적인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일생 단 한순가도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채 산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더라도 나는 고통을 피해야겠다는 이기적인 마음도 사실은 행복을 위한 추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나아지는 것이 있습니까? 결국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그 모든 고통과 악의 문제는 현상일 뿐이고, 그 깊은 뿌리로 내려가면 거기에는 한 가지 뿌리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무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그 무지의 어두움 속에서 수많은 죄가 자라나고 그 죄는 장성하여 고통의 열매를 맺으니 여러분들의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바라는 정반대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자라는 고통의 원 뿌리들을 어떻게 잘라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흔히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 회개가 가능해집니까?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뉘우치게 되었습니까? 결국은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지식을 아는데서 하나님을 향한 모든 선한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지는 피해가 아닙니다. 잊지 마십시오. 무지는 스스로 알지 아니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무지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 그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대신 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지식의 빛들이 풍부한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은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시대 때와는 비교되지 않는 그 지식의 빛을 여러분들은 받고 있고, 결국은 그 지식을 회피하면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식의 결핍 속에 살면 여러분들이 스스로 알지 아니하기로 의지적으로 선택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더 많은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영원한 내세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금세에서도 그 책임을 끊임없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을 알라, 힘써 여호와를 알아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라, 그리스도를 예수로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니 너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누구 좋게 하려고, 누가 좋게 되자고 여러분들에게 예수를 그렇게 알라고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지푸라기 같은 설교자, 하나님의 은혜의 핏방울에 매달려 있는 티끌 같은 설교자를 불러서 긴 세월동안 예수를 알라고 그렇게 눈물로 설교하게 하시는 이유는 누구의 이익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그리스도를 알지 않고는 결국은 곤고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주님이 여러분 자신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물가에 나와서 남의 낯을 피하여 물을 긷던 여자, 남편이 다섯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 남편도 아니었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랬던 여자가 그렇게 기쁨 속에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외치며 자유와 기쁨을 맛보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주님이 주신 금덩어리 하나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그의 치명적인 질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 우물가에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핍박자요, 포행자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살던 미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일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노예가 되어서 예수님이 지던 것을 날마다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이 그의 시대에 살아계셨더라면 흘렸을 눈물을 흘리며 일평생 그 사람들을 위해 살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사울이었습니다. 무엇이 그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바꾸어 놓았을까요? 주님이 삼층천의 세계를 보여주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찬란한 빛처럼 들어오는 그 기이한 빛 아래서 그는 오직 하나를 알았을 뿐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라 우리가 못 박은 예수가 그리스도였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지식의 빛 때문에 그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다가 주님께로 갔습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추호의 근심과 걱정 없이 정말 행복한 삶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물질적인 결핍이 없이 충만한 건강과 젊음을 누리며 여러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인간 없이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도는 응답이 안 됩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짐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남아있는 채로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고난이나 슬픔이 있고,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있고 그리고 삼켜 버리려면 삼켜 버리지 삼켜 버리지도 않을 것이면서 끊임없이 나를 물고 뜯는 병마가 나와 함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는데도 살고 싶은 사람들은 데려가시고 나처럼 주님께 가고 싶은 사람들은 살려두십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수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해 붙들지를 않습니다. 어차피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행복하게 되는 일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뜨겁게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참한 상황을 통해서 그렇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맛볼 수 없는 하나님의 눈물 섞인 자비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없고 가난한 것을 통해서 내가 의지하며 살 것이 세상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전히 결핍과 고통, 상처와 아픔이 남아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나에게 그것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힘을 줍니다.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픔보다 더 큰 기쁨이,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그 선하신 자비가 우리를 에워쌉니다. 그래서 요란한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서 엄마의 젖을 물고 잠든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맡기고 만족을 누리며 살게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하는 비결입니다. 여러분들은 행복을 갈망합니다마는 그 행복의 길인 예수를 아는 지식은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관심사는 허접쓰레기 같은 이 세상의 물질이나 영광, 그리고 이 세상의 즐거움이나 장신구들이나 옷가지, 그리고 이 세상의 물질 같은 것들에 훨씬 더 많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자기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일보다는 자신의 육체의 감각에 열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그 생명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 안에서 풍성하게 역사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 생명을 주셨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어찌 그 생명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살아갈 힘을 주는 좋은 이야기들은 굳이 예배당에 나오지 않아도 TV만 틀어도 넘쳐납니다. 그리로 가십시오. 그리고 실험해 보십시오. 과연 그 안에 생명이 있는지 실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고난도 슬픔도 이기고, 그로 인간의 비극을 이기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찬란하게 빛나도록 보여주시는 은총의 기회로 누렸던 사람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여러분들을 만족 시킬 수 없습니다. 한 가지 근심에 집중하지만 그것이 끝나고 나면 또 다른 욕망은 그 다음 근심을 부릅니다. 포기하지 않는 욕망 속에서 절제할 수 없는 욕구가 생겨나고 그것들은 끊임없는 불만족과 심지어는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그런 삶을 온몸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얼마나 더 이 피곤한 삶을 살아야지만 우리는 ‘아, 헛되고 헛되도다. 정말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로는 내게 주신 영혼의 생명을 대신할 수가 없도다.’ 라고 고백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겠습니까? 과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보다도 지식이 미약하고 기독교를 아는 지식이 훨씬 미천하였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어찌하다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지식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잠시 사로잡았습니다. 여러분 속에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제목이었습니다. 상처가 많은 가정에 태어나게 하신 것도, 불신 가정에서 박해를 받게 하신 것도, 나 홀로 예수를 믿게 하신 것도,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의 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 것도, 그리고 문제가 많은 이 시대에 태어나 나를 주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것도 모두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아무 불만이 없었습니다. 마치 지옥과 같았던 이 땅에 천국이 임하는 것 같은 경험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시시 때때로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마지막 남아있는 소원은 오직 단 하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리스도의 눈물방울 끝에 매달릴 것 같은 인생, 아무 공로 없으나 골고다에 흘리신 그 핏방울 끝에 매달린 것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의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빛나는 사랑이었고, 나로서 살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지금 내 안에 역사하시는 예수의 생명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때 누군가 여러분들에게 소원이 뭐라고 물어보면 고개를 저었을 것입니다. 마치 전설 속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토마스 아퀴나스가 했다고 한 발언처럼 ‘주여 아무것도 필요 없나이다. 주님 자신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니 호세아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미한 그림자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보았고, 우리는 찬란한 빛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제시받고 있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지식의 빛을 여러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지식의 빛을 가지고 작은 지식의 빛이지만 어린 아이처럼 붙들고 그 지식의 빛 안에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나를 위해 사랑하시고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 같은 인간을 동물처럼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를 짐승처럼 살게끔 버려두지 않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그 짐승 같았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건져 내셔서 우리를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 빛이 있기에 우리가 주님을 떠나지 않고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빛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찬란한 지식의 빛 때문에 하나님께 빚진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 지식은 나나 우리의 조상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히 이 지식의 빛 아래 살아야 하고, 우리 코에 호흡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한순간도 이 지식이 우리에게 이미 충분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한량없는 보화와 영화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한 줄기의 빛이라도 더 얻게 해달라고, 그래서 짐승 같은 우리의 삶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그 빛 아래서 살도록 은혜를 달라고 주님께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이 지식의 빛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그 지식을 받았으나 그 지식대로 살지 않는 이 빛은 저 아프리카에 사는 흑인들, 문명을 등지고 살아가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더라면 아마 눈부신 성도의 삶을 살아냈을지도 모르는 그런 종류의 지식입니다. 그래서 지식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반드시 지식에 대한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래서 이 지식의 빛을 가지고 온 마음을 다해서 그 지식의 빛 아래 머물러야 합니다. 적어도 이런 말씀은 듣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버리고 있으니 나도 너를 버려 라고 말씀하지 않게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내게 주신 이 지식의 빛에 감사하고 이 지식의 빛 없이 짐승처럼 살았던 나의 지난날에 밑도 끝도 없는 고통과 번민과 죽을 것 같은 사망의 그림자들을 느끼면서 주님이 여러분한테 주신 그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의 빛을 굳게 붙들고 요동치는 세상에서 여전히 우리는 세상이라는 바다위에 떠 있는 작은 배 같으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이라는 이 작은 배에 우리 주님이 함께 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이 지식의 빛을 그리워하고, 그리고 이 지식의 빛 안에서 사람답게 하루를 살기를 짐승처럼 영광을 누리며 왕궁에서 천년을 사는 것보다 더 그리워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은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신앙은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전심으로 추구하지 않고는 획득될 수도 없고, 획득된 것이 자신 안에 유지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통한 지식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 사랑의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그 지식은 우리 안에서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만 되면 우리는 선지자가 그 패망 길로 가는 이스라엘의 역사의 비탈길에서 가상적인 연극을 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는지를 울부짖었던 이 외침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또 다른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그 길 이외에 이 모든 문제를 벗어날 수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냥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힘써 알자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정신과 우리의 모든 마음의 힘을 모두 발휘해서 그렇게 더 이상 낼 수 없는 힘으로 예수를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오늘 주님이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기를 원하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